016_0290_b_01L어떠한 것이 ‘견도(見道)’입니까? 만약 총괄적으로 설명한다면, 세제일법(世第一法)에서 무간(無間)ㆍ무소득(無所得)한 삼마지발라야(三摩地鉢羅若) 및 그것에 상응하는 따위의 법(法)을 밝게 터득하는 것이니, 분별이 없는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그 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 그 소연(所緣)과 능연(能緣)이 평등한 평등지(平等智)를 그 모양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에 연유하여 ‘소취’와 ‘능취’가 바로 성품이 없는 진여임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또 각각 따로 유정가(有情假)와 법가(法假)를 쫓아내거나, 두 가지 가(假)의 소연을 모두 쫓아내는 법의 지혜를 모양으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각각 따로 ‘유정가의 소연’을 쫓아내는 법의 지혜를 모양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지혜에 연유해서 자상속(自相續)하는 가운데에 아상(我相)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여기서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쫓아낸다는 뜻이다. 각각 따로 ‘법가의 소연’을 쫓아내는 법지를 모양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지혜로 인하여 자상속하는 가운데에 색 따위 법의 모양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假)의 소연을 모두 쫓아내는 법의 지혜를 모양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지혜에 연유해서 일체의 처소에 자아 및 법의 모양을 차별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약 견도의 차별을 분별하여 해설한다면, 세제일법의 무간도에서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ㆍ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ㆍ집법지인(集法智忍)과 집법지(集法智)ㆍ집류지인(集類智忍)과 집류지(集類智)ㆍ멸법지인(滅法智忍)과 멸법지(滅法智)ㆍ멸류지인(滅類智忍)과 멸류지(滅類智)ㆍ도법지인(道法智忍)과 도법지(道法智)ㆍ도류지인(道類智忍)과 도류지(道類智)의 이와 같이 열여섯 가지이다. 4성제에 있어서 법류지(法類智)와 법류지인(法類智忍)이 바로 견도의 차별된 모양이다. ‘고’란 무엇입니까? 고제(苦諦)를 말하는 것이다. ‘고법(苦法)’이란 무엇입니까? 고제의 증상(增上)에서 일어나는 교법(敎法)을 말하는 것이다. ‘법지’란 무엇입니까? 방편도 사이에서 진제의 증상을 관찰하는 법지이다. ‘지인(智忍)’이란 무엇입니까? 앞서의 관찰에서 역(力)을 증상하기 때문이다. 각기 고제의 행상 가운데에서 일어나 무루혜(無漏慧)를 증득하게 된다. 이 같은 지혜에 기인해서 고를 인견(忍見)하는 것에 의해 끊어지는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버리게 된다. 【釋】지금 여기서 해설하는 이치는 방편도 가운데에서 고제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계경 따위의 법을 관찰하는 것에 해당한다. 여리작의(如理作意)에 수렴되는 지혜의 증상하는 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자상속(自相續)하는 고제 가운데에서 저러한 진여를 증득하게 되면, 출세간혜(出世間慧)의 정견의 바탕이 생겨난다. 이 같은 ‘혜’에 연유하는 까닭에, 일체의 고제를 인견하는 것에서 끊어지는 삼계에 얽매어 있는 스물여덟 가지 수면을 영원히 버리게 되는 까닭에 ‘고법지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고법지’란 무엇입니까? 인혜(忍慧)의 무간도(無間道)는 이 같은 지혜(智慧)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증득을 이루게 된다. 【釋】왜냐하면 먼저는 인혜에 연유하는 까닭에 고제를 인견하는 것에서 끊어지는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끊고, 그 소의(所依)를 전향시키는 것도 이 같은 무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지혜가 생겨나는 것으로 인하여 증득하여 전의(轉依)하는 까닭에 ‘고법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고류지인’이란 무엇입니까? 고법지의 무간도에서 무루혜가 생겨나는 것을 가리킨다. 고법지인과 고법지는 각각 별도의 내증이 있으니, 그 이후의 여러 성스러운 법도 모두 이와 동일한 종류라고 말한다. 【釋】왜냐하면 처음의 두 가지 ‘인혜’나 ‘지혜’는 바로 이 이후의 모든 유학과 무학의 성스러운 법의 종류이니, 이로부터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루혜(無漏慧)가 생겨나면, 각각 별도의 내증이 이것을 인연하여 경계로 삼게 된다. 이 이후의 여러 가지 선법도 모두 이와 같은 종류인 까닭에 ‘고류지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고류지’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무간도에서 무루지(無漏智)가 생겨나는 것을 가리킨다. ‘고류지인’을 가려내서 인가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고류지인에 연유해서 무간도의 무루지가 생겨나서 그 고류지인을 내증하여 인가하는 까닭에 ‘고류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나머지 진제에서도 그 대응되는 것에 따라 여러 인혜와 여러 지혜가 있으니 마땅히 숙지해야 한다. 【釋】이 같은 지위에서 법인(法忍)과 법지(法智)에 연유해서 취해지는 것을 깨닫게 되고 유인(類忍)과 유지(類智)에 기인해서 취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출세간도에는 두 가지 경계가 있으니 진여(眞如) 및 정지(正智)이다. ‘법지의 품도(品道)’는 진여를 경계로 삼고 ‘유지의 품도’는 정지를 경계로 삼는 것으로, 이 같은 여러 인혜(忍慧)와 지혜(智慧)로 말미암아 진실로 깨닫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일체의 인혜와 지혜의 지위에 해당되는 것을 해설하여 ‘무상관(無相觀)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박가범께서 말씀하신 ‘제6무상(無相)에 머무는 보특가라(補特伽羅)’이다. 이 같은 인혜와 지혜의 지위 가운데 나타나 머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 같은 지위 가운데에서 일체의 모양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무상하게 머무는 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멸(滅)ㆍ정(定)ㆍ유정(有頂)의 견도이다. 이 같은 열여섯 가지 심찰나(心刹那)를 설명하여 ‘견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혜와 지혜에 수렴되는 열여섯 가지 심찰나는 일찍이 발견하지 못한 사성제의 경계로서 혹은 각각 네 가지 찰나로서 인견하기 때문에 ‘견도’라고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또 심찰나란 그 소지경(所知境)에 있어서 지(智)의 구경위가 생겨나는 것을 일찰나(一刹那)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비록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금유(今有)가 생겨나는 때를 ‘심찰나’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소지경에 처해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구경위를 능히 인지하는 것을 ‘일찰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고제의 설명처럼 이 같은 하나의 심찰나도 두루 알아야 한다. 이처럼 그 고집(苦集)을 영원히 끊는 것 따위도 마찬가지임을 익숙히 알아야 한다. 또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견도의 차별은 모두가 거짓으로 세워진 것이라 진실하지 않다. 【釋】무슨 까닭인가 하면, 출세위 가운데에서 각각 따로 내증하여 희론을 끊는 까닭이다. 일체의 ‘도제’는 네 종류의 상응에 연유하여 깨치는 것이니, 안립(安立)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사유(思惟)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증득하여 받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안립에 기인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성문(聲聞) 따위가 자내소증(自內所證)에 따라서 구경을 성취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려는 까닭에, 그 후득지로 인한 한량없는 종류의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으로 도제를 안립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진제 가운데에 이러이러한 인혜가 있고 이러이러한 지혜가 있다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사유에 기인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현관(現觀)의 방편을 올바로 닦고 익혀서 세간의 지혜로써 안립된 사유를 되풀이하여 익히는 것이다. ‘증득하여 받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되풀이하여 익힌 자내증(自內證)으로 최초로 견도위(見道位)에서 올바르게 세간을 벗어나는 희론이 없는 위치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원만함에 기인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지위가 나중에 원만하게 전의(轉依)되어 궁극의 증득에까지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구경위(究竟位)를 증득하고서 다시 후득지에 연유하여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도제를 안립하는 것이다. 이 같은 네 가지 모양의 진실한 도의 바퀴가 되풀이하여 돌아가되, 서로 의지해서 그 돌아가는 것에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또 계경(契經)에서 “6진(塵)을 멀리하고 6구(垢)를 여의어서 모든 법 가운데에서 정법의 안목이 생긴다”라고 한 말씀은 이 같은 견도의 여러 법인(法忍)에 의지해서 능히 6진을 멀리하고, 여러 법지(法智)에 의지해서 능히 6구를 여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중생들이 처음으로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묘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안목으로 자체적인 성품을 삼는 까닭이다. 【釋】‘법인으로 능히 6진을 멀리하는 것’이란, 여러 가지 법인으로 말미암아 일체 번뇌의 때를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법지가 능히 6구(垢)를 여읜다는 것’이란, 여러 법지에 인하여 6구(垢)가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을 끊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인혜와 진혜의 두 가지 진리는 그 차례에 따라서, 두루 알기 때문이고, 영원히 끊기 때문에 마침내 도가 청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에 연유해서 ‘진을 여의는 것’과 ‘구를 여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계경에서 “견법(見法)ㆍ득법(得法)ㆍ극통달법(極通達法)ㆍ구경견법(究竟見法)으로 일체의 소망과 의혹을 건너고, 다른 나머지 연(緣)에 따르지 않고, 또 대사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에 끌리지 않고, 모든 법 가운데에서 두려움이 없어짐을 성취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견도에 의거한 것이니, 그 교화받는 유정들에게 성스러운 진제의 현관이 틈이 없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釋】‘견법’이란 여러 법인(法忍)을 가리키는 것이니, 그런 것에 의하여 진실한 법을 통달한 것이다. ‘득법’이란 여러 법지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러한 것이 전의를 능히 증명하기 때문이다. ‘극통달법’이란 여러 유지(類智)를 가리키는 것이니, 여러 가지 성스러운 법을 통달하는 것은 이 같은 두 종류이기 때문이다. ‘구경견법’이란 여러 유지를 가리키는 것이니, 여러 소지(所知)에서 이미 구경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일체의 소망을 건넌다는 것’이란, 여러 인혜와 지혜의 출세간도에 연유해서 긴긴 밤 동안 희망해 왔던 성스러운 과보를 증득하였기에 그 자내소증(自內所證)에 처해서 다시 구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의혹을 건넌다는 것’이란, 이 같은 견도의 타소증(他所證)에 처해서 머뭇거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능히 이 같은 뛰어난 과위(果位)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연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란 그 도를 닦아가되 외도의 학설에 끌리지 않고 스스로 잘 대처한다는 것[自然善巧]이다. ‘대사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에 끌리지 않는다는 것’이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 내에서 이미 청정한 법을 증득하였기에 나머지 생으로 전향하더라도 삿된 도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 가운데에서 두려움 없음[無畏]을 성취한다는 것’이란 그 증득하는 것에 의거해서 법을 질문하고 청취하는 때에, 마치 나쁜 욕탐의 증상만을 내는 이처럼 겁내거나 나약한 갖가지 마음이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수도(修道)’란 무엇입니까? 견도에 있는 세간도(世間道)ㆍ출세간도(出世間道)ㆍ연도(軟道)ㆍ중도(中道)ㆍ상도(上道)ㆍ방편도(方便道)ㆍ무간도(無間道)ㆍ해탈도(解脫道)ㆍ승진도(勝進道) 따위를 모두 수도라 이름한다. 【釋】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는 이미 모든 현관을 성취하여 이로부터 상지의 나머지 번뇌의 미혹을 끊는 방편으로 인하여 세간도 따위를 되풀이하여 익히는 이러한 것을 ‘수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세간도’란 무엇입니까? 세간의 초정려ㆍ제2정려ㆍ제3정려ㆍ제4정려ㆍ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가리킨다. 이 같은 정려와 무색계에는 네 종류의 상응으로 인해서 자세히 분별되니, 그 잡염(雜染)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그 깨끗한 백업(白業)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그 건립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그 청정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잡염에 기인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네 가지 무기근(無記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애(愛)이고, 두 번째가 견(見)이고, 세 번째가 만(慢)이고, 네 번째가 무명(無明)이다. 이 같은 네 가지 미혹[惑]의 염오로 인하여 그 마음이 여러 가지 염오된 정려(靜慮)의 정문(定門)에 처해서 색계와 무색계의 일체 유부무기(有覆無記)인 번뇌와 수번뇌가 끊이지 않고 자라나게 된다. 【釋】왜냐하면 유애(有愛)에 기인하는 까닭에, 그 맛들이는 것에서 상지의 정려의 잡염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깨끗한 정(靜)의 경안락(輕安樂)의 맛에 탐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유견(有見)에 기인하는 까닭에, 그 삿된 견해를 내는 것에서 상지의 정려의 잡염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려에 의지해서 선제(先際) 따위를 헤아리는 삿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에 연유하는 까닭에, 자만하는 것에서 그 상지의 정려의 잡염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뛰어난 정을 증득한 것에 의지해서 스스로 높다는 자만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명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의심내는 것에서 그 상지의 정려의 잡염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이가 진실한 도리를 미처 통달하지 못하였기에, 승품(勝品)의 소증(所證)에 대해서 늘 이것이 해탈한 것인지 해탈하지 않은 것인지 의혹을 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번뇌가 언제나 그 마음을 물들고 집착하게 해서 색계와 무색계의 크고 작은 미혹이 상속해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 ‘백업(白業)에 기인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청정한 정려와 무색계(無色界)의 정(定)을 가리킨다. 그 성품이 어진 것에 기인해서 ‘깨끗한 백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비록 세간에 해당되지만 ‘전(纏)’과 ‘구(垢)’를 여읜 까닭에 이 또한 청정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건립(建立)에 기인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네 종류의 건립이 있으니, 지분건립(支分建立)ㆍ등지건립(等至建立)ㆍ품류건립(品類建立)ㆍ명상건립(名想建立)을 가리킨다. 【釋】여러 정려에는 네 가지 건립이 갖추어져 있고 여러 무색정 중에서는 오직 세 가지뿐이기에, 지분건립이 제외된다. ‘지분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초정려에 있는 다섯 가지 지분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심(尋)이고, 두 번째가 사(伺)이고, 세 번째가 희(喜)이고, 네 번째가 낙(樂)이고, 다섯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2정려에도 네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네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내등정(內等淨)이고, 두 번째가 희(喜)이고, 세 번째가 낙(樂)이고, 네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3정려에도 다섯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사(捨)이고, 두 번째가 염(念)이고, 세 번째가 정지(正智)이고, 네 번째가 낙(樂)이고, 다섯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제4정려에도 네 가지 지분이 있다. 어떠한 것이 그 네 가지입니까? 첫 번째가 사청정(捨淸淨)이고, 두 번째가 염청정(念淸淨)이고, 세 번째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고, 네 번째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법이란 무량한 것인데, 어째서 오직 심(心) 따위의 지분만을 건립하는 것입니까? 대치지(對治支)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이익지(利益支)에 기인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두 가지에 의존하는 자성지(自性支)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세 가지 지분으로 모두 만족하여 나머지 것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초정려 가운데에서 ‘심’과 ‘사’의 두 가지는 대치지에 해당한다. 능히 욕계의 욕(欲)ㆍ에(恚)ㆍ해(害) 따위의 ‘심’과 ‘사’를 끊는 까닭이다. ‘희’와 ‘낙’ 두 가지는 이익지에 해당한다. ‘심’과 ‘사’의 지분이 그 소치(所治)를 다스리는 것에 연유해서 생을 여의는 ‘희’와 ‘낙’을 얻기 때문이다. ‘심일경성’은 그 두 가지에 의존하는 자성지에 해당한다. 정려에 의지하여 ‘심’ 따위를 전변시키기 때문이다. 제2정려지의 ‘내등정’은 대치지에 해당한다. 이것에 연유하여 ‘심’과 ‘사’를 능히 다스리기 때문이다. ‘희’와 ‘낙’은 이익지에 해당하고, ‘심일경성’은 그들 두 가지에 의존하는 자성지에 해당한다. 그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제3정려지 가운데의 ‘사’ㆍ‘염’ㆍ‘정지’는 대치지에 해당한다. 이 같은 세 가지에 연유해서 ‘희’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낙’은 이익지에 해당한다. ‘심일경성’은 그들 두 가지에 의존하는 자성지에 해당한다. 그 이치는 앞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제4정려 가운데의 ‘사청정’ㆍ‘염청정’은 대치지에 해당한다. 이 같은 두 가지에 연유해서 ‘낙’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불고불락수’는 이익지에 해당한다. ‘심일경성’은 그들 두 가지에 의존하는 자성지에 해당한다. 여러 무색정 가운데에서 지분을 건립하지 않으니 사마타(奢摩他) 일미(一味)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등지(等至)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일곱 가지 작의(作意)로 말미암아 초정려를 증득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비상비비상처에까지 이르게 된다. 【釋】이 같은 것은 성문지(聲聞地) 이후의 유가처(瑜伽處)에서 자세히 분별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일곱 가지 작의(作意)라고 이름합니까? 요상작위(了相作意)ㆍ승해작위(勝解作意)ㆍ원리작의(遠離作意)ㆍ섭락작위(攝樂作意)ㆍ관찰작위(觀察作意)ㆍ가행구경작위(加行究竟作意)ㆍ가행구경과작위(加行究竟果作意)이다. 초정려에 증득하여 편입되는 때에 일곱 가지 작의에 연유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지(正地)를 작의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욕계 가운데의 걱정거리 따위를 인견(忍見)해서 그 거친 모양을 사무치게 깨닫게 된다. 【釋】초정려 가운데에는 이 같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를 ‘고요한 모양’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을 ‘요상작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의는 듣고 생각하는 그 사이마다 잡스러워지는 것이기에, 이후의 상지(上地)에서는 듣고 생각해서 얻어지는 지혜를 초월하여 한결같이 모양을 닦되, 그 추하고 고요한 모양을 인하여 경계로 삼게 된다.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되풀이하여 닦아서 그 ‘심’과 ‘사’의 거칠거나 고요한 성품의 모양을 사유하는 것을 ‘승해작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수습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단도(斷道)가 생겨나 그들이 그 행을 갖추게 되는 작의를 ‘원리작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 말미암아 상품(上品)의 원리를 능히 끊게 되고 아울러 그와 같은 품지에서 능히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행(觀行)을 닦는 자가 다시 상지에서 끊는 견과 상지를 끊는 공덕을 기뻐하며 이미 약간이나마 그 멀리 여의는 것의 ‘희’와 ‘낙’에 접촉하여 ‘혼침’과 ‘수면’을 제거하고자 하는 때에, 수시로 청정하고 묘한 작의를 수습함으로써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섭락작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로 행을 닦는 자는 방편의 선품을 갖추게 되는 까닭에, 욕계의 계(繫)ㆍ번뇌(煩惱)ㆍ전(纏)ㆍ구(垢)로 하여금 다시 드러나 행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번뇌가 끊어지는 것과 끊어지지 않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의하여 그들의 생을 관찰하되 그 청정한 모양에 따르는 것을 ‘관찰작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자는 여러 번 관찰하여 수대치(修對治)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욕계의 모든 번뇌로 하여금 잠시동안 그 얽매인 것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이 같은 대치도에 상응하는 작의는 바로 초정려의 최후의 방편이 되기 때문에 ‘방편구경작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간도에서 근본의 초정려를 증득하여 그 행을 갖추는 작의를 ‘방편구경과작의’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요상작의’로 말미암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게 되는 것이니, 이는 끊기 위한 까닭이고 성취하기 위한 까닭이다. ‘승해작의’에 연유해서 올바른 이치를 구하고자 바른 방편을 발휘하게 되고, ‘원리작의’에 기인해서 상품의 미혹을 버리게 된다. ‘섭락작의’에 연유해서 중품의 미혹을 버리게 되고, ‘관찰작의’에 연유해서 그 증득한 것에 따라 마음을 안정시켜 증상만(增上慢)을 멀리 여의게 된다. ‘방편구경작의’에 인하여 하품의 미혹을 버리고, ‘방편구경과작의’에 인하여 그와 같이 닦은 것을 받아들여 수도의 과보를 작의하게 된다. 이같이 초정려정(初靜慮定)에 증득하여 편입하고자 일곱 가지 작의를 닦는 것이니,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 증득하여 편입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을 마땅히 익숙히 알아야 한다. 또 ‘추한 모양’이란 일체의 하지 즉 욕계에서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추한 모양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무거운 고에 머무는 것이니 적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 명행(命行)이 미약한 것이니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고요한 모양’이란 일체의 상지 즉 초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를 말하는 것이니, 거친 모양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품류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초정려에서 연도(軟道)ㆍ중도(中道)ㆍ상도(上道)의 세 가지 품(品)을 갖추어 훈수(熏修)하는 것을 가리킨다. 【釋】초정려의 경우처럼 나머지 정려 및 무색계도 그 세 가지 품의 훈수는 마찬가지이다. 연도품ㆍ중도품ㆍ상도품에 연유해서 초정려를 훈수하기 때문에 초정려 가운데에서 세 가지 이숙과가 다시 생겨난다. 초정려와 나머지 정려 가운데에서도 그 훈수하는 것이나 이숙과가 생겨나는 것에 각각 세 가지 품이 있는 것도 이와 같다. 【釋】‘여러 정려 가운데에서의 세 가지 품의 훈수에서 세 가지 과보가 생겨난다는 것’이란, 범중천(梵衆天)ㆍ범보천(梵輔天)ㆍ대범천(大梵天)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들의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무색계 가운데에는 다른 처소가 없기 때문에 그 이숙과가 생겨나는 처소의 차별을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색계에는 안도(安堵)와 궁전 따위의 처소가 없기 때문에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차별을 건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품으로 말미암아 무색정을 훈수하는 까닭에 그러한 이숙과가 생겨나는 때에도 높거나 낮거나 열등하거나 뛰어난 것이 있게 된다. ‘그들의 이숙과가 생겨날 때에 높거나 낮다는 것’이란, 그 수면 따위에 기인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등하거나 뛰어난 것이 있다는 것’이란, 그 염오(染汚)와 불염오(不染汚)가 많거나 적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名想)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네 가지 정려 가운데에서의 그 삼마지(三摩地)의 차별에는 명칭을 붙일 수도, 그 수효를 헤아릴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이것은 초정려에 수렴되는 정 가운데에서의 모든 불세존 및 구경을 성취하여 커다란 위덕을 갖춘 보살마하살이 들어가는 삼마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삼마지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 따위도 그 이름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어찌 능히 그 수효를 헤아리거나 다시 이를 증득해서 편입하겠는가? 초정려에 수렴되는 정의 경우처럼 나머지 정려나 무색계에 수렴되는 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 반야바라밀다경에서 말씀하시는 삼마지만 해도 그 수효가 몇백을 넘는다. 이처럼 나머지 대승경전에서 말씀하시는 삼마지는 그 수효가 한량없는 것이다. 초정려에 수렴되는 정의 경우처럼, 나머지 다른 정려와 무색정에 수렴되는 정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설명은 모두가 정려바라밀다(靜慮波羅蜜多)에 의지하는 것이다. ‘청정함에 기인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초정려 가운데의 변제정(邊際定)에서 비상비비상처의 변제정까지를 청정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정려와 무색의 변제정’이란, 승품(勝品)의 공덕을 분발하여 자재 따위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정을 닦아 구경처(究竟處)에 이르기 때문이다. ‘출세도’란 무엇입니까? 수도 가운데에 있는 법지품(法智品)과 유지품(類智品)에 수렴되는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지혜의 모양은 견도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아울러 이에 상응하는 삼마지 따위나 또는 미지정(未至定)에 수렴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는 초정려 내지는 무소유처에 수렴되기도 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는 세간에 속하는 것이니, 그 밝게 터득하지 못한 상(想)이 언제나 현행하기 때문이다. 밝게 터득하지 못한 상이 언제나 현전하는 것으로 인해서 성스러운 도의 현행이 의지하는 것을 지극히 밝게 터득하지 못한 까닭에 한결같이 세간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 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그들의 상(想)은 파리해서 용맹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 소연하는 모양을 취하는 것으로 인해서 ‘무상(無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비상비비상처에 성스러운 도가 없다는 것을 아는가 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상삼마발저(有想三摩鉢底)까지는 능히 진실로 비추어 알게 된다. 멸진정(滅盡定)의 통달은 출세간에 수렴되는 것이니,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나중에 증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취(人趣)에서도 능히 인발(引發)될 수 있고, 여기서 인발이라 말하는 것은 처음 일어난다는 뜻이다. 또는 인취에서나 색계에서도 능히 현전할 수 있으니, 예전에 이미 생겨난 것이 나중에 다시 현전하기 때문이다. 【釋】‘또는 인취에서’란 금생을 말하는 것이고, ‘색계에서’란 나중에 그 곳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룩한 제자가 이미 무색정을 이미 성취하여 색계를 떠난 때에도, 다시 색계로 태어나고자 합니까? 반드시 색계의 욕을 영원히 여읠 필요는 없다. 무색정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4구게(句偈)를 짓게 되는 것이다. 만약 색계의 욕을 이미 여읜 이는 모두 무색계의 적정해탈정(寂靜解脫定)에 들어가게 됩니까? 만약 무색계의 적정해탈정에 들어갈 수 있다면, 색계의 욕을 모두 여의게 됩니까? 이 같은 첫 구절은 미지정(未至定)에 의거해서 색계의 욕을 여의더라도 무색계의 적정해탈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구절은 여러 성자가 제4정려를 이미 성취하였어도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싫어하여 배척함을 일으켜 제4정려의 행이 언제나 현전하게 해서 단결도(斷結道)를 버리고 승진도(勝進道)에 의거해서 서서히 무색계의 적정해탈정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은 이 같은 행자가 이욕을 구하고자 단결도에 의지해서 서서히 무색계의 적정해탈정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 구절은 앞에서의 것과 같은 모양이 아닌 것이다. 무색계에서는 어째서 멸진정이 현전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면 이 같은 멸진정은 대부분 현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적정(寂靜)한 머무름에 인하여 해탈이 이숙되는 자는 이 같은 멸진정이 대부분 현전에서 일어나지 않기에, 방편에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이 적정한 머무름에 안주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취 따위에서 이 같은 멸진정을 유인하여 현전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미 무색계에 태어난 경우에는 그 공용에 인하지 않고도 저절로 제일가는 적정해탈이 이숙되는 머무름에 안주하기 때문에, 방편의 공용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에, 이 같은 멸진정을 추구하여 현전하게 하는 것이다. ‘연도’란 무엇입니까? 연연품(軟軟品)ㆍ연중품(軟中品)ㆍ연상품(軟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삼계에 얽매어진 품지(品地)를 버릴 수가 있으니, 이 같은 품지에도 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중연품(中軟品)ㆍ중중품(中中品)ㆍ중상품(中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능히 삼계의 얽매인 품지를 버릴 수가 있으니, 이 같은 품지에도 상상ㆍ상중ㆍ상하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상도’란 무엇입니까? 상연품(上軟品)ㆍ상중품(上中品)ㆍ상상품(上上品)의 도를 가리킨다.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능히 삼계에 얽매인 품지를 버릴 수가 있으니, 이 같은 품지에도 연상ㆍ연중ㆍ연연의 세 가지 품의 번뇌가 있다. 이와 같은 연도의 상품에서도 다시 각각 연 따위의 세 가지로 9품이 건립되는 것은, 그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는 순서대로 끊어진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다. 또 어떠한 것이 연연품의 도에 인연해서 상상품의 번뇌를 끊는가 하면, 이 같은 번뇌가 지극히 날카롭게 ‘참’과 ‘괴’의 선지법(善地法)를 훼손시키는 것에 인하여 수치심이 없는 자의 신체 가운데에서 그 추중(麤重)이 드러나 행하는 것은 쉽게 깨달을 수 있고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상품의 번뇌는 마치 ‘진’과 ‘구’와도 같아서 약간의 대치만으로도 능히 이를 제거할 수 있다. 만약 하하품의 번뇌가 상품과 상반되는 자의 신체 가운데 있는 경우에는 미약하게 드러나 행하기에 이를 깨닫기도 힘들고 분별해 내기도 힘들다. 이같이 미약한 ‘구’는 세력이 큰 대치로써 제거하게 된다.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나머지의 ‘능취’와 ‘소취’의 모양이 번복되어 건립된 것도 이와 같음을 숙지해야 한다. ‘방편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에 기인해서 번뇌를 능히 버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도를 올바르게 닦는 때에 각각의 상품 따위의 번뇌에서 생겨나는 번뇌의 추중을 버리거나 여의게 된다. 【釋】그 일부분이 점차로 전의(轉依)하게 되는 것을 ‘수도 가운데의 가행도’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간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의 무간에 기인해서 번뇌를 영원히 끊어 남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釋】왜냐하면 이 같은 도의 무간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품의 번뇌에서 생겨나는 그 품의 추중을 제거하여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추중을 전의해서 ‘추중이 없음’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을 ‘수도 가운데에서의 무간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해탈도’란 무엇입니까? 이 같은 도를 증득하여 번뇌를 끊는 것에 기인해서 해탈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이 같은 도의 능히 증득함을 인하여 번뇌를 영원히 끊고 전의를 성취하게 되는 까닭이다. ‘승진도’란 무엇입니까? 나머지 다른 품지의 번뇌를 끊어가는 모든 가행도ㆍ무간도ㆍ해탈도를 ‘승진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이 같은 품지를 끊고 난 후의 다른 번뇌는 모두 방편도ㆍ무간도ㆍ해탈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품지를 유추하여 승품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승진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번뇌를 버리는 가행이나, 또는 방편을 강구하여 모든 법을 사유하는 것이거나, 또 방편을 강구하여 모든 법에 안정하게 머무르는 것이거나, 또 나머지 삼마발저(三摩鉢底)로 나아가서 닦는 모든 도를 ‘승진도’라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라고 말하는 것은 나머지 이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번뇌를 끊고 버리는 여러 가지 방편도는 단지 정사유(正思惟)만이 경전 따위의 법에 합해지는 것이다. 또 다시 예전에 사유한 것에서 증득한 법 가운데에 안정되게 머물러 관찰하는 것이거나, 혹은 다시 다른 승품의 공덕에 진입하는 이와 같은 것들을 ‘승진도’라 이름하는 것이다. 승품(勝品)의 공덕을 이끌어 내는 것이거나 여러 가지 그것에 존재하는 도에 안주하는 것은 모두 ‘승진도’라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통이 무량한 따위의 여러 가지 승품의 공덕을 이끌어 내거나 또는 그러한 생이 이미 현전하여 안정되게 머무르는 이와 같은 도를 ‘승진도’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도하는 모양의 차별은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지금은 그 이치를 설명하던 대로 다시 여러 가지 수도의 차별을 논하기로 한다. 다시 이와 같은 여러 도의 ‘수(修)’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네 종류가 있으니, 득수(得修)ㆍ습수(習修)ㆍ제거수(除去修)ㆍ대치수(對治修)를 가리킨다. 【釋】‘득수’란 미처 생기지 않은 선법을 닦아 익혀서 생기도록 하는 것이고, ‘습수’란 이미 생겨난 선법을 닦아가되, 굳게 머물러 잊지 않고 더욱 늘리고 넓혀가는 것이고, ‘제거수’란 이미 생겨난 악한 법[不善法]을 닦아서 영원히 끊는 것이고, ‘대치수’란 아직 생기지 않은 사악한 불선법을 닦아서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수’의 차별된 모양은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4정단(正斷)에 의거해서 해설하게 된다. 이것은 그 성취하는 것에 기인해서 ‘수’를 ‘득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수’의 세력에 연유해서 미처 얻지 못한 여러 가지 선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 익히는 까닭에 이 같은 ‘수’를 ‘습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수의 세력에 인하여 되풀이하여 익힘으로써 여러 가지 선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 제거하는 까닭에 ‘수’를 ‘제거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수’에 인하여 현행위의 여러 가지 불선법을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또 대치를 수습하기 때문에 ‘대치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미래의 여러 가지 불선법을 대치하여 불선법을 이루는 까닭이다. 또 도가 생겨나는 때에 자연히 습기(習氣)가 안립되는 것을 ‘득수’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종류로부터 전전하고 증가하고 상속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가 현전해서 닦아 익히는 것을 ‘습수’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도가 현전하는 것에 따라 현행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가 현전하는 때에 자체적으로 장애를 능히 버리는 것을 ‘제거수’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같이 능히 소멸시키는 것에 따라 추중의 장애를 대치시키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가 이미 자체적으로 장애를 버려서 법을 미래에 머무르게 하여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을 ‘대치수’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미 전의를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미래세에 그와 같은 장애를 안치하여 불생법에 머무르게 하는 까닭이다. 또 네 종류의 대치가 갖추어진 것에 연유한 까닭에 ‘대치수(對治修)’라 이름하는 것이니, 바로 염괴대치(厭壞對治)ㆍ단대치(斷對治)ㆍ지대치(持對治)ㆍ원분대치(遠分對治)를 말한다. ‘염괴대치’란 무엇입니까? 유루의 모든 행에 있어서 허물과 걱정이 많은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釋】병이나 종기 따위의 행으로 인해서 번성해서 5취온이 괴멸하는 모양을 염증내기 때문이다. ‘단대치’란 무엇입니까? 가행도와 무간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釋】그러한 것이 여러 가지 번뇌를 능히 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지대치’란 무엇입니까? 해탈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釋】그러한 것을 지니는 것으로 인하여 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원분대치’란 무엇입니까? 이것 이후의 여러 도를 가리킨다. 【釋】그러한 것에 연유해서 예전의 끊어진 번뇌에서 전변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대치차별은 앞서의 대치수와는 서로 차별되는 이치이다. 또 도의 차별에는 열한 종류가 있으니, 관찰사도(觀察事道)ㆍ근공용도(勤功用道)ㆍ수치정도(修治定道)ㆍ현관방편도(現觀方便道)ㆍ친근현관도(親近現觀道)ㆍ현관도(現觀道)ㆍ청정출리도(淸淨出離道)ㆍ의근차별도(依根差別道)ㆍ정수삼학도(淨修三學道)ㆍ발제공덕도(發諸功德道)ㆍ섭제도도(攝諸道道)를가리킨다. 이 가운데에도 그 각분(覺分) 따위로 말미암은 차별이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이처럼 열한 종류의 도를 건립하는 것은 그 차례에 따라서 ‘37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말하니, 4종정행(種正行)ㆍ4종법적(種法迹)ㆍ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ㆍ3무루근(三無漏根)을 가리킨다. ‘관찰사도’란 4념주(念住)를 말하는 것이니,이것으로인하여 최초로 부정행(不淨行) 따위로 일체의 신(身)ㆍ수(受)ㆍ심법(心法)의 사물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근공용도’란 4정단을 말하는 것이니, 일체사물을 두루 관찰하는 것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장애를 끊고 정진에 힘써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취정도’란 4신족(神足)을 말하는 것이니, 이처럼 일체의 장애를 깨끗하게 제거한 후에, 다시 마음으로 힘써 관찰하는 것으로 인하여 삼마지를 닦아 ‘감당할 수 있는 성품’을 길들여 완성하기 때문이다. ‘현관방편도’란 신근(信根) 따위의 5근(根)을 말하는 것이니, 이처럼 삼마지를 닦아 다스린 후에, 무루의 성스러운 도를 증득하고자 그 증상연(增上緣)이 되는 난선근(煖善根)과 정선근(頂善根)의 방편을 힘써 닦기 때문이다. ‘친근현관도’란 신력(神力) 따위의 5력(力)을 말하는 것이니, 이처럼 증상연을 이미 성취한 이가 다시 무간도에서 진제의 이치를 통달하고자,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불신(不信) 따위의 장애를 굴복시키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의 근분(近分)이 되는 방편을 인견(忍見)하기 때문이다. ‘현관도’란 7각지(覺支)를 말하는 것이니, 이 같은 것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각각 별도로 증득하여 진리를 깨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청정출리도’란 거룩한 팔지도(八支道)를 말하는 것이니, 이 이후로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청정하게 닦아 영원히 벗어나는 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리로 인해서 보리분법(菩提分法)은 그 차례가 이와 같은 것이다. ‘의근차별도’란 4정행도(正行道)를 말하는 것이니, 근분정(近分定)이나 근본정(根本定) 따위로 인한 그 심지가 차별되고 아울러 이근기와 둔근기가 차별되기 때문이다. ‘고정지차별’이란 미지정 및 무색정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 차례에 따라 지(止)와 관(觀)이 열등하기 때문이다. ‘낙정행’이란 근본정려(根本靜慮)에 의지하는 것이니, 화도(化道)와 관심(觀心)의 두 도(道)가 전변하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의 더디게 통달하는 것’이란 둔한 근기가 고와 낙에 의지하는 것을 말하고, ‘두 가지의 속히 통달하는 것’이란 날카로운 근기가 고와 낙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정수삼학도’란 4법적(法迹)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에 연유해서 증상계(增上戒) 따위의 삼학도를 청정하게 닦게 되는 것이다. 무탐(無貪)과 무에(無恚)로써 능히 증상계학(增上戒學)을 청정하게 닦아 다스리되 끝끝내 탐욕과 진에의 문에서 그 학처(學處)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념(正念)은 증상심학(增上心學)을 능히 청정하게 닦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소연을 망각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안정시키기 때문이다. 정정(正定)은 능히 증상혜학(增上慧學)을 깨끗하게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 마음이 정을 성취한 것에 연유하여 참다운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발제공덕도’란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말하는 것이니, 이에 연유해서 일체의 공덕을 마련하게 되기 때문이다. ‘변섭제도도’란 3무루근(無漏根)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에 인하여 초위(初位)ㆍ중위(中位)ㆍ구경위(究竟位)의 모든 도를 능히 섭수하기 때문이다.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은 방편도와 견도를 섭수하는 것이고, 이지근(已知根)은 수도를 섭수하는 것이고, 구지근(具知根)은 구경도를 섭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