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_0318_b_01L‘결택(決擇)’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의 건립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현관(現觀)의 건립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특가라의 건립’은 능히 증득함[能證]에 해당하고 ‘현관의 건립’은 증득하는 대상[所證]에 해당한다. 보특가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네 가지 인연을 말미암는 까닭에 건립되었으니, 이것은 그 설명을 쉽게 하려는 때문이고, 세간법에 맞추려는 때문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때문이고, 나와 남이 모두들 공덕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때문이다. 【釋】‘그 설명을 쉽게 하려는 때문’이란, 무량색(無量色) 따위의 차별에 처해 무량하게 그 모양을 차별하는 상법(想法) 가운데에서 총괄적으로 하나의 거짓 설립된 유정을 건립함으로써 나고 죽는다고 이름하는 갖가지 언설이 이 때문에 어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간법에 맞춘다는 것’이란, 여러 가지 세간이 아니라 단지 상법에 의지해서 언설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부분 유정이 생각에 의지하여 언설을 일으키는 까닭에 성자가 세간을 교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과 동일한 방편으로 보특가라를 건립하는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때문’이란 세간의 유정이 심오한 연기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기에, 일체의 유정은 자아가 없는 것이라는 설법을 듣게 되면, 바로 두려움을 일으켜 바른 교화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남의 자아가 모두 공덕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때문’이란, 만약 거짓 설립된 유정의 차별을 보이고서 단지 모든 법의 물들거나 깨끗한 모양만을 해설하게 되면, 이것은 일체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된다. 마침내 이 같은 신체 가운데에 이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끊으려 해도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게 되고, 이와 같은 신체 가운데에서 이러한 공덕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증득할 것을 증득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에 대한 방편으로 보특가라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보특가라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일곱 종류가 있으니, 병이 행해지는 차별[病行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멀리 여의는 차별[出離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맡아 가지는 차별[任持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방편의 차별[方便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과보의 차별[果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경계의 차별[界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수행의 차별[修行差別]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이 같은 보특가라의 건립을 익숙히 잘 알아야 한다. ‘병행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에도 일곱 종류가 있으니, 탐행(貪行)ㆍ진행(瞋行)ㆍ치행(癡行)ㆍ만행(慢行)ㆍ심사행(尋思行)ㆍ등분행(等分行)ㆍ박진행(薄塵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출리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성문승(聲聞乘)ㆍ독각승(獨覺乘)ㆍ대승(大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임지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자량을 준비하지 못한 것[未具資糧]ㆍ자량을 준비하는 도중[已具未具資糧]ㆍ자량을 이미 갖춘 것[已具資糧]을 가리킨다.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방편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과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에는 스물일곱 종류가 있으니, 신해(信解)ㆍ견지(見至)ㆍ신증(身證)ㆍ혜해탈(慧解脫)ㆍ구해탈(俱解脫)ㆍ예류향(預流向)ㆍ예류과(預流果)ㆍ일래향(一來向)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향(不還向)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향(阿羅漢向)ㆍ아라한과(阿羅漢果)ㆍ극칠반유(極七返有)ㆍ가가(家家)ㆍ일간(一間)ㆍ중반열반(中般涅槃)ㆍ생반열반(生般涅槃)ㆍ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ㆍ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ㆍ상류(上流)ㆍ퇴법아라한(退法阿羅漢)ㆍ사법아라한(思法阿羅漢)ㆍ호법아라한(護法阿羅漢)ㆍ주부동아라한(住不動阿羅漢)ㆍ감달아라한(堪達阿羅漢)ㆍ부동법아라한(不動法阿羅漢)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계차별’이란 무엇입니까? 욕계에 머무는 이생ㆍ유학ㆍ무학을 가리킨다. 【釋】욕계의 유(有)의 경우처럼 색계와 무색계도 이와 같다. 다시 욕계와 색계에는 보살이 머물고 있고 또 욕계에는 독각 및 불가사의한 여래가 계시는 것이니,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수행차별’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수승한 해와 행[勝解行]의 보살이고, 두 번째가 증상의요행(增上意樂行)의 보살이고, 세 번째가 유상행(有相行)의 보살이고, 네 번째가 무상행(無相行)의 보살이고, 다섯 번째가 무공용행(無功用行)의 보살이니, 이 같은 것에서 그 보특가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탐행의 보특가라’입니까? 아주 예리한 장기간의 탐욕을 가리킨다. 【釋】비록 열등한 가애과(可愛果)의 경계에 처해 있지만 능히 상품의 ‘탐행’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번 일어나게 되면 장기간 단절되지 않는다. ‘탐행’의 경우처럼 ‘심사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다. 각각 자체 경계에 따라 오랜 기간 동안 그 번뇌가 맹렬한 것이니, 이것은 이치에 따라 잘 안배해서 풀이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등분행의 보특가라’입니까? 자성의 지위에 머무르는 번뇌를 가리킨다. 【釋】저 번뇌의 맹렬한 것을 멀리 여의고, 평등한 지위에 머무르되 여러 가지 번뇌에 기인하는 까닭에, 그 경계의 세력에 따라서 번뇌가 드러나 행한다. 어떠한 것이 ‘박진행의 보특가라’입니까? 자체 성품의 지위에 머무르는 엷어진 번뇌를 가리킨다. 【釋】앞에서 해설한 자체 성품의 지위에 있는 번뇌의 모양 그대로이다. 지금 이 같은 번뇌가 서로 다른 것을 유추하는 것이 엷어졌기 때문에, 비록 그 인연하는 것의 경계를 증상시키더라도 엷어진 성품의 번뇌가 드러나 행하는 것이기에, 예전에 수습한 저 수승한 대치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성문승의 보특가라’입니까? 성문법(聲聞法)의 성품에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釋】정성(定性)이거나 부정성(不定性)의 성품인 둔한 근기[鈍根機]가 스스로 해탈을 구하고자 바르고 넓은 서원을 세우고 탐욕을 싫어하여 여의는 해탈의 의요(意樂)를 닦아 나가되, 성문장을 그 인연 경계로 삼아 정진해서 행법(行法)을 닦되 법에 따르는 수행[隨法行]으로 고제(苦際)를 소진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성의 근기로서 경계를 의요(意樂)하는 행을 발원하는 가애과(可愛果)의 차별은 성문승에 설명되어 있음을 익숙하게 알아야 한다. 독각과 보살의 근성과 비교해서 이것을 둔한 근기라고 해설하니,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수법행 따위의 이근기에 대한 설명이 어긋나게 될 것이다. 어떠한 것이 ‘독각승의 보특가라’입니까? 독각법(獨覺法)의 성품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釋】정성이거나 부정성인 중근기(中根機)가 스스로 해탈을 구하여 넓은 서원을 발하여 탐욕을 싫어해 여의는 해탈의 의요를 닦거나 아울러 보리(菩提)의 증득을 의요하여 홀로 닦아 나가되, 성문장을 그 인연 경계로 삼아 정진하여 행법을 닦으며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혹 그러한 수행 도중에 순결택분(順決擇分)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또는 순결택분을 이미 일으켰거나, 또는 그러한 수행 도중에 과보를 성취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러한 수행 도중에 과보를 성취하고서도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나와서 오직 내적인 사유로써 성도를 드러내어 유전시키는 것이, 기린의 뿔처럼 혼자 머물거나 또는 부행(部行) 가운데에서 홀로 수승한 선근을 쌓아 고제(苦際)를 소진시킨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전에 순결택분을 일으키지 못하였다면, 과보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인각(麟角)의 독주(獨住)를 이루는 것 외에는 마땅히 독승(獨勝)의 부행(部行)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대승의 보특가라’입니까? 보살법의 성품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釋】정기이거나 부정기의 성품인 이근기(利根機)가 일체 유정의 해탈을 구하고자 넓은 서원을 발하고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處涅槃]의 의요(意樂)를 닦아 나가되, 보살장을 그 인연 경계로 삼아 중생을 성숙시키고 청정한 불국토를 닦아서 대기(大記)를 수기 받아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는 것이다. ‘대기를 수기 받는다는 것’이란, 여덟 번째의 보살지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태어남이 없는 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자량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보특가라’입니까?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고 연품(軟品)의 깨끗한 신승해를 일으켜 연품의 순해탈분(順解脫分)을 성취하였으나, 미처 정(定)이 생겨나지 않은 때이다. 어떠한 것이 ‘자량을 준비하는 도중의 보특가라’입니까?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고 중품(中品)의 깨끗한 신승해를 일으켜 중품의 순해탈분을 성취해서 이미 정이 생겨난 때이다. 어떠한 것이 ‘자량을 이미 준비한 것의 보특가라’입니까?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고 상품(上品)의 깨끗한 신승해를 일으켜 상품의 순해탈분을 성취해서, 바로 이곳에 태어난 때를 가리킨다. 【釋】또 ‘자량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란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아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하품의 체찰법인(諦察法忍)을 성취하고 하품의 순결택분을 성취하였으나, 미처 정이 생겨나지 않은 때이다. ‘자량을 준비하는 도중’이란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고,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중품의 체찰법인을 성취하고 중품의 순결택분을 성취해서 이미 정이 생겨난 때이다. ‘자량을 이미 준비한 것’이란 진제를 인연하여 증상되는 법을 경으로 삼고, 여러 진제 가운데에서 상품의 체찰법인을 성취하고 상품의 순결택분을 성취하여 바로 이곳에 태어난 때를 가리킨다. 여기서 ‘3품의 순결택분’이란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세제일법의 성품은 오직 하나의 찰나 간으로 말미암아 상속되지 않는다. ‘이것에 태어나는 때’란 그 정이 현관(現觀)에 들어가 이미 예전의 지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품과 중품의 순해탈분에서 순결택분까지는 퇴보하는 이치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오직 그 현재의 행[現行]이 퇴보하는 것으로 습기마저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도중에 이미 선근을 일으킨 자는 다시 그것이 새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하품의 순해탈분의 현관에 의거하여 박가범께서 “만약 세간에서 그 품지를 높은 경지로 늘려 나가는 정견을 갖추었다면, 수천 생을 거치더라도 3악도의 세계[三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또 네 종류의 순해탈분(順解脫分)이 있으니, 첫 번째는 ‘순해탈분에 의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순해탈분을 수승하게 이해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순해탈분을 즐기는 것’이고, 네 번째는 ‘순해탈분으로 나아가 증득하는 것’이다. 선법을 바라는 것에서 해탈을 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있게 되는 선근을 모두 순해탈분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그것과 상응하는 교법에 존재하는 수승한 이해가 행을 구족하게 되는 선근을 순해탈분을 수승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해탈의 경계를 인연하여 그 작의가 상속하여 청정한 즐거움이 구족되어 있는 선근을 순해탈분을 즐기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같이 남(生)에 있어서, 순결택분을 결정하는 모든 선근을 일으키는 것을, 순해탈분으로 나아가 증득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여섯 종류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이 있으니, 수순순결택분(隨順順決擇分)ㆍ승진순결택분(勝進順決擇分)ㆍ통달순결택분(通達順決擇分)ㆍ여전순결택분(餘轉順決擇分)ㆍ일생순결택분(一生順決擇分)ㆍ일좌순결택분(一座順決擇分)을 말한다. 진제의 경계를 인연하는 행을 처음으로 일으킨 하품의 선근을 수순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바로 이 같은 선근이 중품으로 전향을 이루게 되면 이를 승진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예전의 하품을 유추하여 그 공덕의 수승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근이 늘어나 마침내 상품에까지 이르러서, 이 같은 남 가운데에서 결정적으로 진제의 이치를 참고 통달하는 것을 통달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또 이 같은 지위 가운데에서 부정기의 종성이 가장 수승한 보리에 회향하거나, 여러 독각이 스승 없이 보리를 스스로 증득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으로 전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여전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만약 이 같은 생에서 능히 통달할 수 있는 것을 일생순결택분이라 이름하고, 그 앉은 자리의 정(定)에서 능히 통달하는 것을 일좌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이 ‘수신행의 보특가라’입니까? 자량이 이미 갖추어진 성품의 둔한 근기를 가리킨다. 【釋】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체현관을 닦게 된다. 어떤 것이 ‘수법행의 보특가라’입니까? 자량이 이미 갖추어진 성품의 이근기를 가리킨다. 【釋】자연적으로 진제의 증상법(增上法)에 따라 체현관을 닦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신승해의 보특가라’입니까? ‘수신행’이 이미 과보를 받는 지위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견지의 보특가라’입니까? 법에 따른 행으로 이미 과보의 지위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신증의 보특가라’입니까? 모든 유학이 6구(垢)를 여의고 여덟 가지 해탈정(解脫定)을 증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불환과(不還果)를 해설하여 신증(身證)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 같은 신증으로 인하여 여덟 가지 해탈정을 성취해서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하기 때문이다. 【釋】‘여덟 가지 해탈’이란 색계에서 여러 가지 색 따위를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어떠한 것이 ‘혜(慧)해탈의 보특가라’입니까? 이미 모든 누(漏)를 소진하였으나, 아직 여덟 가지 해탈정을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釋】혜에 대치되는 번뇌장을 구경에 이르도록 끊은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구분(俱分)해탈의 보특가라’입니까? 이미 모든 누를 소진하여 여덟 가지 해탈정을 모두 증득한 것을 가리킨다. 번뇌장(煩惱障)의 분(分) 및 정장(定障)의 분으로 말미암은 해탈을 모두 성취한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예류과향의 보특가라’입니까? 순결택분에 머무르는 것 및 견도의 열다섯 가지 심찰나(心刹那)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釋】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일좌순결택분에서 초과(初果)의 미성취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류과향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예류과의 보특가라’입니까? 견도의 제16의 심찰나 지위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釋】이 같은 견도를 또한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또한 법현관(法現觀)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어떠한 이가 견도의 마지막 심위에서 초과를 얻게 됩니까? 만약 욕계에서 그 욕심을 여의지 못한 이는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 예류과를 성취하게 된다. 【釋】여기서의 순서는 비록 약간의 욕심을 여의더라도 욕심을 여의지 못했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그가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 제16지의 심위(心位)에 이르러 예류과를 성취하게 된다. 만약 그 욕심을 여의는 것이 갑절이 되는 이는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 일래과를 얻게 된다. 예전에 세간도를 바탕으로 욕계의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6품의 번뇌를 이미 끊은 것을, 그 욕심을 여의는 것이 갑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 제16지의 심위에 이르러 일래과를 성취하게 된다. 만약 이미 욕계의 욕심을 여읜 자는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게 되면, 불환과를 성취하게 된다. 예전의 세속도를 바탕으로 욕계의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9품의 번뇌를 이미 끊은 것을 이미 욕심을 여의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정기의 성품이 결정되는 지위에 들어가 제16지의 심위에 이르게 되면, 불환과를 성취하게 된다. 만약 견도에서 끊어지는 일체의 번뇌를 이미 영구히 끊으면 바로 예류과를 얻게 되는데, 어째서 3결(結)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가장 수승한 것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 종류의 장애에서 해탈하는 것으로 인하여 가장 수승한 것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해탈로 나아가는 인(因)을 밝히지 않은 까닭이고, 비록 나아가는 인이 이미 밝혀졌더라도 다시 삿된 것을 위해서 멀리 여의는 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아울러 바르지 못하게 벗어나는 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살가야견으로 인하여 5취온을 아(我)ㆍ아소(我所)라고 깊이 애착하기 때문이고, 커다란 고의 덩어리에 싫어해 배척함[厭背]을 내지 않기 때문이고, 수승한 해탈을 발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은 비록 해탈을 발원하고 수도로 나아가더라도 ‘계금취견’과 ‘의’로 말미암아 삿된 도에 집착해서 정도를 의심하는 까닭에, 삿되게 벗어나거나 바르지 못하게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3결(結)이 소지경(所知境)에 미혹되는 인이 되기 때문이고, 삿된 견해에 미혹되는 인이 되기 때문이고, 대치에 미혹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살가야견이 그 소지경을 미혹시키는 것을 인하여 커다란 고의 덩어리에 처하게 되어, 아(我)와 아소(我所)의 모양을 허망하게 늘려 나가기 때문이다. 계금취견이 능지견(能知見)을 미혹시키는 것을 인하여 전도된 견해를 청정한 해탈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대치를 의심하는 것을 인하여 삼보에 대해 결정된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일래과향의 보특가라’입니까? 수도위 가운데에서 욕계 제5품의 번뇌를 이미 끊고 그와 같은 도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견도 이후에 욕계 내지는 중중품(中中品)의 번뇌를 이미 끊은 것을 인하여 그와 같은 단도(斷道)에 머무는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일래과의 보특가라’입니까? 수도위 가운데에서 욕계 제6품의 번뇌를 이미 끊고 그와 같은 도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중연품(中軟品)의 번뇌를 이미 영원히 끊는 단도의 구경을 인하여 이것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불환과향의 보특가라’입니까? 수도위 가운데에서 욕계 제7품과 제8품의 번뇌를 이미 끊고 그와 같은 도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일래과 이후의 욕계의 연상품(軟上品)ㆍ연중품의 번뇌를 끊는 것 및 그와 같은 단도에 머무는 것을 말미암아 이것이 건립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불환과의 보특가라’입니까? 수도위 가운데에서 욕계 제9품의 번뇌를 이미 끊고 그와 같은 도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그들이 욕계의 연연품의 번뇌를 영원히 끊는 단도의 구경을 말미암아 이것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견도에서 끊어지는 일체 번뇌를 이미 영구히 끊었거나, 또는 욕계의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일체 번뇌를 영구히 끊었다면, 불환과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데, 어째서 단지 오순하분결(五順下分結)을 영구히 끊어야 불환과를 성취한다고 말합니까? 이는 가장 수승한 것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장 수승하다고 하게 됩니까? 하취(下趣)와 하계(下界)에서 수승한 인이 되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취’란 지옥ㆍ축생ㆍ아귀를 말하고 ‘하계’란 욕계를 말한다. 살가야견ㆍ계금취견ㆍ의견을 가장 수승한 인으로 삼아 여러 유정을 하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진에를 가장 수승한 인으로 삼기에, 여러 유정이 하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아라한과향의 보특가라’입니까? 유정천(有頂天)에서 제9품의 번뇌를 이미 영구히 끊고 그와 같은 구경도(究竟道)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아라한과의 보특가라’입니까? 유정천에서 제9품의 번뇌를 이미 영구히 끊고, 그와 같은 구경도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아라한은 삼계의 일체 번뇌를 영원히 끊은 것인데, 어째서 단지 오순상분결(五順上分結)을 영구히 끊기만 하면, 아라한과를 성취한다고 말합니까? 가장 수승한 것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장 수승하다고 하게 됩니까? 이 같은 다섯 가지 결(結)로 인하여 상분(上分)의 인(因)을 취하고도 그 상분의 인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색계와 무색계의 애(愛)와 취(取)로 인하여 욕계 이상의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도거(掉擧)ㆍ만(慢)ㆍ무명(無明)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이 같은 높은 지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애와 만으로써 상지의 정려를 의심한다는 것’이란 그러한 것에 의해 괴로워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극칠반유의 보특가라’입니까? 바로 예류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간계와 천상을 오가면서 잡되게 유(有)를 받다가 최대한 일곱 번 왕복하게 되면 고제(苦際)를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가가의 보특가라’입니까? 예류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상에서나 인간계에서 집에서 집으로 이르는 사이에 고제를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예류과에서 일래과향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천상에서나 인간계에서 그 왕래가 결정되어 최대한 두 번의 유(有)를 받고 나서야 반열반(般涅槃)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일간의 보특가라’입니까? 바로 일래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상에서 오직 한 번의 유(有)를 받아 고제를 소진시키게 되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일래과에서 불환과향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천상에서 오직 한 번의 유(有)를 받고서야 반열반에 드는 까닭이니, 유를 한 번 거치고 나서야 이 같은 1생을 수용하는 까닭에, 일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중반열반의 보특가라’입니까? 태어나는 번뇌[生結]는 이미 끊었으나 일어나는 번뇌[起結]를 미처 끊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혹 욕계에서 색계로 태어나려는 중유신(中有身)이 일어나려는 차에, 바로 성도(聖道)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하기도 하고, 혹 중유신이 일어난 다음에 생유(生有)로 나아가기 위해 사유(思惟)를 일으키려는 차에, 바로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하게 되기도 하고, 혹 사유에서 이미 생유로 나아감이 밝혀졌으나 미처 생유에 이르기 직전에, 바로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하게 되기도 한다. 【釋】여기에서 드러내 보이는 세 가지 중반(中般)은 번뇌의 세력을 인하여 그 태어나는 곳으로 나아가 생유가 상속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번뇌가 이미 소진되면 오직 수면의 세력을 인하여 명종 이후에 모든 온이 연속되어 일어나게 되니, 이것은 수면이 소진되지 못하여 남아 있는 것이다. 또 중유신이 일어나면 되풀이하여 익힌 힘을 인하여 성도가 나타나 나머지 수면을 끊게 되기에, 바로 이 같은 지위에서 반열반에 들게 된다. 또 중유가 일어나고 나면 생유로 나가는 때에 사유를 일으켜 성도가 나타나 나머지 수면을 끊고 반열반에 들게 된다. 또 사유가 일어나고 나서 생유처에 이르렀으나, 그 생유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때에 성도가 나타나 나머지 수면을 끊고 반열반에 들게 된다. 이와 같은 세 종류의 그 생유처를 미처 일어나지 않은 것과 일어나려는 차인 것과 이미 일어난 것으로 유추하는, 그러한 지위의 차별의 건립은 칠선장부취경(七善丈夫趣經)에 따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생반열반의 보특가라’입니까? 2결(結)을 완전히 끊지 못하였기에, 색계에 태어나서야 바로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무행반열반의 보특가라’입니까? 저 색계에 태어나더라도 수행을 더함[加行]에 인하지 않고서 바로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釋】‘가행에 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전생에 되풀이하여 익힌 힘으로 무루의 성도가 그 경계에 자유로이 나타나 무공용(無功用)을 이루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유행반열반의 보특가라’입니까? 저 색계에 태어나서 그 수행을 더하는 힘에 인해서야 비로소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釋】‘가행에 연유하는 것’이란 상지와 상반되는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상류의 보특가라’입니까? 색계지(色界地)의 무루지(無漏地) 가운데에서 두루 생을 받다가 마지막으로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들어가면 비로소 그 곳의 무루지에서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또 유정천까지 이르러서야 성도가 나타나 고제를 소진시키기도 한다. 【釋】여기에서 드러내 보이는 두 종류의 상류는 그 첫 번째가 극지색구경(極至色究竟)이고, 그 두 번째가 극지유정(極至有頂)이다. ‘극지색구경’이란 많은 애착에 맛들인 보특가라가 여러 생으로 인하여 연품(軟品) 따위의 정려 차별을 애착하여 맛들이는 까닭에 줄곧 범중천에서 색구경천에 이르기까지 일체처에서 각각 순서대로 한 번의 생을 받다가 마지막에 색구경천에 들어가 반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극지유정’이란 제4정려에서 잡되게 닦지 않고 오직 정거천에서 피해가는 것뿐이니,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순서대로 모든 유정천에서 생을 받다가, 마지막으로 유정천에 이르러서야 반열반에 드는 것이다. 또 제4정려에서 잡되게 닦는 것에는 5품의 차별이 있으니, 첫 번째가 하품의 수도이고, 두 번째가 중품의 수도이고, 세 번째가 상품의 수도이고, 네 번째가 상승품(上勝品)의 수도이고, 다섯 번째가 상극품(上極品)의 수도이다. 이와 같은 5품을 인하여 제4정려를 잡되게 닦기 때문에 그 차례에 따라 다섯 곳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게 된다. 어떠한 것이 ‘퇴법아라한’입니까? 둔한 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사유하거나 사유하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의 퇴보가 가능한 것이다. 【釋】여기서 ‘사유’란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고,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자신을 해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현법락주에서 퇴보한다는 것’이란 세간의 정려 따위의 정으로 물러서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사법아라한’입니까? 둔한 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사유하거나 사유하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에서의 퇴보가 가능한 것이다. 【釋】만약 사유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퇴보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떠한 것이 ‘호법아라한’입니까? 둔한 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사유하거나 사유하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에서의 퇴보가 가능한 것이다. 【釋】만약 유산(遊散)하지만 않는다면 퇴보하지 않을 수가 있다. 어떠한 것이 ‘주부동(住不動)아라한’입니까? 둔한 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에서 퇴보하지는 않으나, 그 연근(練根)은 불가능한 것이다. 【釋】‘연근’이란 하근기의 둔한 근기를 전향시켜 상근의 이근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부동법아라한에서는 연근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니, 부동법아라한은 그 성품이 원래 이근기인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감달(堪達)아라한’입니까? 둔한 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에서 퇴보하지도 않고 연근도 역시 능히 감당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부동법아라한’입니까? 이근기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정이 흩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거나 모두 그 현법락주에서 퇴보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욕계에 머무는 이생의 보특가라’입니까? 욕계에 태어나거나, 또는 살아가면서도 성스러운 법[聖法:부처님 법]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욕계에 머무는 유학의 보특가라’입니까? 욕계에 태어나거나 또는 살아갈 때에, 이미 성스러운 법을 성취하였어도 아직 결(結)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욕계에 머무는 무학의 보특가라’입니까? 욕계에 태어나거나 또는 살아갈 때에, 이미 성스러운 법을 성취해서 결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釋】욕계에 세 종류가 있는 것처럼 색계와 무색계도 각각 세 종류가 있으니, 그 모양에 따라 익숙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이 ‘욕계와 색계에 머무는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무색계 생정려(生靜慮)의 모양을 제외하고 정려의 즐거움에 머물면서 욕계에 태어나거나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으로 무색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가장 수승한 위덕을 증득한 보살이라면, 모든 곳에서 생을 받아서 모든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나, 무색계는 중생을 성숙시키는 처소가 아닌 까닭이다. 【釋】‘무색계의 생정려를 제외시킨다는 것’이란 무색계의 생에 존재하는 수승한 정을 능히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려의 즐거움에 머문다는 것’이란 정려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보살이 교묘하게 대처해서 전향하기 때문이다. 그 교화 받는 유정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까닭에, 욕계에 태어나거나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욕계에 머무는 독각의 보특가라’입니까? 부처님께서 세상에 안 계시는 때에 욕계에 태어나 스스로 독각의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불가사의한 여래의 보특가라’입니까? 욕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시되, 도사다천(都史多天)의 묘한 보배 궁전에 안주하시는 것에서부터 대반열반(大般涅槃)의 나타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모든 불보살이 행하는 큰 행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釋】‘일체 보살이 행하는 것’이란 도사다천의 묘한 보배 궁전에서 나타내 보이시는 것에서 대신변(大神變)을 나투어 마군을 항복 받는 것까지를 말한다. ‘모든 불보살의 행하는 것’이란 등정각의 성취를 나타내 보이시는 것부터 대열반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까지를 말한다. 어떠한 것이 ‘승해행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승해행의 지위에 머물면서 보살의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인(因)을 성취하는 것이다. 보살의 종성에 안주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대보리의 원력을 처음 발하는 것에서부터 극환희지(極歡喜地)에 들어가기 전까지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진실한 내면의 증득을 아직 성취하지 못한 까닭에 승해행보살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이 ‘증상의요행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십지(十地) 가운데 머무는 모든 보살을 가리킨다. 세간을 벗어나는 내면의 증득을 이미 성취하여 청정하게 의요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유상행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극희지(極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발광지(發光地)ㆍ염혜지(焰慧地)ㆍ극난승지(極難勝地)ㆍ현전지(現前地) 가운데 머무는 모든 보살을 가리킨다. 이 같은 6지로 인하여 비록 기쁘거나 즐겁지 않은 것이라도 여러 모양 사이에 섞이게 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무상행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원행지(遠行地) 가운데 머무는 모든 보살을 가리킨다. 이 보살이 공용을 이루거나 그 욕락에 따르는 것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능히 나타내어 행하지 않게 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무공용행 보살의 보특가라’입니까? 부동지(不動地)ㆍ선혜지(善慧地)ㆍ법운지(法雲地) 가운데에 머무는 모든 보살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 보살이 순수하면서도 성숙된 무분별지를 이미 성취한 까닭이다. 또 예류과의 보특가라에 대한 해설처럼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차례대로 닦아 여의는 것[漸出離]이고, 두 번째가 잠깐 사이에 여의는 것[頓出離]이다. ‘점출리’란 앞에서 자세히 해설한 그대로이고, ‘돈출리’란 체현관에 들어가 미지정(未至定)에 의지해서 출세간도를 밝혀 삼계의 일체 번뇌를 잠깐 사이에 끊는 것이다. 【釋】‘각 품지(品地)마다 별도로 끊는 것’이란 오직 두 종류의 과보만을 세우는 것이니, 바로 예류과와 아라한과를 가리켜 각 품지마다 별도로 끊는 것이라고 한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상상품의 수면을 잠깐 사이에 끊어 가되 이처럼 연연품에 이르는 것이다. ‘삼계를 잠깐 사이에 끊는다는 것’이란 견도에서 끊어지는 경우처럼 세간도의 계(界)와 지(地)에서 점차로 각 품지마다 별도로 끊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이치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하면, 지단경(指端經)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소유색 내지 식(識)이 그 과거인지 미래인지 현재인지를 자세히 해설하여 멀거나 가까운 것에 이르는, 이와 같은 일체를 총괄해서 1분(分)ㆍ1단(團)ㆍ1적(積)ㆍ1취(聚)로 간략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한 다음에야, 일체가 모두 무상이고 일체가 모두 고(苦)임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에 의지하여 단지 초과와 후과의 두 가지 과보만을 건립하게 된다. 이 같은 두 가지 과보로 인하여 그 순서에 따라 삼계의 모든 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영원히 끊어 가면, 나머지 다른 드러나는 것이 없어지는 까닭에, 두 번째나 세 번째의 두 가지 과보를 건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돈출리에 의거하는 것’이란 여래께서 예류과의 무간(無間)을 거쳐 가는 것을 분별해서 아라한과를 건립하신 것이다. 이 같은 보특가라는 대부분 현법락주에 머무르기에 혹 임종하는 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聖旨]을 훌륭히 완수하게 된다. 설사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그 원력에 기인하기 때문에, 즉시 이 같은 원력에 의하여 욕계에 환생하되 부처님이 안 계신 세상에 태어나 독승과(獨勝果)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현관(現觀)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열 종류가 있으니, 법현관(法現觀)ㆍ의현관(義現觀)ㆍ진현관(眞現觀)ㆍ후현관(後現觀)ㆍ보현관(寶現觀)ㆍ불행현관(不行現觀)ㆍ구경현관(究竟現觀)ㆍ성문현관(聲聞現觀)ㆍ독각현관(獨覺現觀)ㆍ보살현관(菩薩現觀)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법현관’입니까? 여러 진제가 증상되는 법에 처해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신승해(信勝解)를 성취하는 수신행(隨信行)을 가리킨다. 【釋】왜냐하면 여러 가지 진제를 증상시키는 계경 따위의 법에 처해서,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 그 인연의 세력을 증상시켜서 최후의 순해탈분의 착한 근기에 수렴되는 상품의 청정한 신승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신승해를 성취한 까닭에, 이를 해설하여 ‘법현관으로써 여러 가지 진제를 현관하는 것’이라고 이름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의현관’입니까? 여러 가지 진제가 증상되는 법에 처해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체찰법인(諦察法忍)을 성취하는 수신행을 가리킨다. 【釋】이 같은 참는 지혜[忍慧]는 순결택분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왜냐하면 앞서 해설한 법 가운데에서의 여리작의(如理作意)가 고제(苦諦) 따위의 경계에서 그 인연의 세력을 증상하여 최후의 순결택분의 착한 근기에 수렴되는 체찰법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같은 체찰법인은 세 종류의 여리작의에 인하여 그 인식이 가능해지기[顯發] 때문이다. 또 세 가지 품을 이루게 되니, 상연품(上軟品)ㆍ상중품(上中品)ㆍ상상품(上上品)을 가리킨다. ‘상연품’이란 이같이 태어날 때가 연위(軟位)인 것이고, ‘상중품’이란 정인위(頂忍位)를 말하는 것이고, ‘상상품’이란 세제일법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진현관’입니까? 견도위의 열여섯 가지 심찰나의 지위에 있는 모든 성도를 이미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釋】또 견도위 가운데에서 변제(邊際)의 현관을 체득하여 진제를 편히 건립하기에 세속지(世俗智)가 나타나지 않는다. 출세지를 증상시키는 연의 세력으로 인하여 그들의 종자를 길러 가기 때문에, 이 같은 지혜를 성취해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이것은 견도의 열여섯 가지 심찰나에 틈이 없는 것으로서 앞에 나타나 일어나는 세간의 심지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위에서는 이 같은 세속지가 다시금 나타나게 된다. 어떠한 것이 ‘후현관’입니까? 일체의 수도를 가리킨다. 견도 이후의 일체 세간으로 인한 출세간도를 모두 후현관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보현관’입니까? 부처님을 청정히 증득하고 정법을 청정히 증득하고 스님들을 청정히 증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釋】부처님과 그 성제자들에 기인한 삼보의 처소에서 증득을 결정하는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는 것이니, “박가범께서는 참다운 정등각자(正等覺者)이시고,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는 참다운 선법의 묘한 말씀이시고, 성제자의 대중은 참다운 정행자(淨行者)이시다”라고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불행현관’입니까? 이미 무작율의(無作律儀)를 증득하였기에, 비록 유학(有學)의 지위에 머물러 있더라도 “내가 지금 나락가도(奈落迦道)를 이미 다하였고, 방생도(傍生道)를 이미 다하였고, 아귀도(餓鬼道)를 이미 다하였다. 악취(惡趣)로 거꾸로 떨어지는 업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가 다시 악취업(惡趣業)을 지어 악취의 이숙(異熟)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미 무작율의를 증득하였다는 것’이란 성인께서 애호하시는 계율에 수렴되는 율의를 이미 증득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에 대치 받아 지옥의 이숙(異熟) 따위가 다시는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지옥 따위가 영원히 소진되어 다시는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불행현관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이 ‘구경현관’입니까? 도제 가운데에서 구경도를 해설하는 것과 같다. 일체의 추중(麤重)을 이미 그치게 하고 일체의 속박을 여읜 증득[離繫得]을 이미 성취한, 이와 같은 것들이다. 어떠한 것이 ‘성문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은 다른 사람의 음성을 통하여 듣고 나서야 증득하기 때문에, 성문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독각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을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도 증득하기 때문에, 독각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보살현관’입니까? 여러 보살이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 가운데에서 참는 지혜[忍慧]의 수습을 일으켰으나 이를 증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釋】성문과 독각을 조복시키는 방편 가운데에서 선교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하품의 승(乘)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보살도의 극희지(極喜地)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도의 정기의 성품을 결정하는 지위[正性決定]에 들어가는 것을 보살현관이라 이름한다. 이미 현관을 모두 설명하였으니, 지금은 그 차별을 설명하도록 한다. ‘성문현관’과 ‘보살현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열한 종류가 있으니, 경계차별(境界差別)ㆍ임지차별(任持差別)ㆍ통달차별(通達差別)ㆍ서원차별(誓願差別)ㆍ출리차별(出離差別)ㆍ섭수차별(攝受差別)ㆍ건립차별(建立差別)ㆍ권속차별(眷屬差別)ㆍ승생차별(勝生差別)ㆍ생차별(生差別)ㆍ과차별(果差別)을 가리킨다. 【釋】‘경계차별’이란 방광분의 대승을 인연하여 경계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임지차별’이란 대겁아승기야를 모두 거쳐서 그 복과 지혜의 자량이 원만한 것을 말한다. ‘통달차별’이란 보특가라의 법에 인하여 무아(無我)의 이치를 증상시키는 법을 말한다. 방편으로 인도되는 세간의 지혜를 갖추어 두 가지 무아법을 통달한 것을 말한다. ‘서원차별’이란 일체 유정과 자신이 평등하다는 것을 능히 통달하여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중생을 이익되게 거두는 것을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출리차별’이란 제10지에 의지하여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섭수차별’이란 열반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섭수하는 것을 말한다. ‘건립차별’이란 모든 부처님의 정토를 어질게 닦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권속차별’이란 일체의 교화 받는 중생을 권속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승생차별’이란 마치 세간에서 자식을 잉태하여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종족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보살도 부처님의 종자를 번창하게 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이러한 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 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생차별’이란 여래의 대집회가 열리는 때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차별’에는 또 열 가지가 있으니, 전의차별(轉依差別)ㆍ공덕원만차별(功德圓滿差別)ㆍ5상차별(相差別)ㆍ3신차별(身差別)ㆍ열반차별(涅槃差別)ㆍ증득화합지용차별(證得和合智用差別)ㆍ장청정차별(障淸淨差別)ㆍ화합작업차별(和合作業差別)ㆍ방편시현성등정각입반열반차별(方便示現成等正覺入般涅槃差別)ㆍ5종발제차별(種拔濟差別)이다. 여기서 ‘전의차별’이란 염(染)과 불염(不染)의 일체종에 의존하는 추중이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공덕에 의존하여 영원히 전향하는 것을 말한다. ‘공덕원만차별’이란 역(力)ㆍ무소외(無所畏)ㆍ불공불법(不共佛法) 따위의 끝없는 공덕이 영원히 원만함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5상차별’이란 청정한 따위의 다섯 가지 모양의 차별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는 ‘청정차별(淸淨差別)’이니, 일체 번뇌와 그 습기를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원정차별(圓淨差別)’이니, 부처님의 정토를 두루 닦아 다스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신차별(身差別)이니, 그 법신이 원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수용차별(受用差別)이니, 모든 때와 장소에서 열리는 대법회는 여러 보살과 함께 갖가지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업차별(業差別)’이니,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갖가지 변화를 일으켜 시방의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세계에서 여러 가지 불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 다시 ‘3신차별’이란 원만하게 자체 성품을 증득하여 그 변화신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열반차별’이란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에 처해서 일체의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고자 일체의 공덕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증득화합지용차별’이란 가장 지극하게 청정한 법계의 한 가지 맛[一味]을 증득한 까닭에, 그들이 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에 능히 의존해서 한 분 한 분 부처님의 공능(功能) 따위의 일체 부처님의 공능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장청정차별’이란 일체의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 가는 것을 말한다. ‘화합작업차별’이란 유정을 낱낱이 교화하여 제도하는 작용은 모두가 일체 부처님께서 증상시키는 것임을 말한다. 방편으로 평등한 정각을 이루어서 열반에 들어가는 차별을 보인다고 한 것은, 시방의 일체 세계에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그 후에 때에 따라 자주 정각을 평등히 이루는 것을 보여주어서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여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5종발제차별’이란 재난과 횡액 따위의 다섯 가지 어려운 일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첫 번째는 ‘재난과 횡액을 구제하는 것’이니, 여래가 마을 따위에 들어갈 때에 맹인이나 농아 따위에게, 그 눈을 뜨게 하고 귀가 열리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릇된 방편을 구제하는 것’이니, 세간에서 바른 견해를 얻도록 하여 일체의 삿되고 악한 견해를 멀리 여의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악한 세계[惡趣]를 구제하는 것’이니, 견도가 생겨나게 하여 여러 가지 악취를 뛰어넘게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살가야견을 구제하는 것’이니,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하여 삼계를 벗어나게 하는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그 의지하는 승을 구제하는 것’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하품의 승을 즐기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사무량’ 따위의 가장 수승한 공덕은 어떠한 현관에서 수렴됩니까? 후현관과 구경현관에서 수렴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가장 수승한 공덕은 여러 성제자 따위가 수도위에서나 구경도에서 일으키는 것이니, 이리하여 두 가지 현관에서 수렴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무애해(無礙解)ㆍ신통(神通)ㆍ상수현청정(相隨顯淸淨)ㆍ역(力)ㆍ무외(無畏)ㆍ염주(念住)ㆍ불호(不護)ㆍ무망실법(無忘失法)ㆍ영단습기(永斷習氣)ㆍ대비(大悲)ㆍ18불공불법(不共佛法)ㆍ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를 가리키는 것이다. 【釋】이와 같은 공덕은 여래께서 여러 경전 가운데에서 어떤 때는 성문승에 의거해서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대승에 의거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공덕은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간략하게 다섯 가지 문으로 그 모양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소의(所依)ㆍ경계(境界)ㆍ행상(行相)ㆍ자체(自體)ㆍ조반(助伴)의 문을 말한다. 여기서 ‘무량’이란 사무량(四無量)을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자무량(慈無量)이고, 두 번째는 비무량(悲無量)이고, 세 번째는 희무량(喜無量)이고, 네 번째는 사무량(捨無量)이다. ‘자무량’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에게 즐거움이 상응하도록 베푸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意樂)에 머무는 것이 모두 갖추어진 가운데에서의 정(定)이나 혜(慧) 및 그것에 상응하는 모든 심과 심소를 가리킨다. 【釋】여기에서 드러내는 ‘자무량’은 정려로써 그 의지하는 것을 삼는 것이고, 유정으로써 그 경계(境界)를 삼는 것이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원력과 상응하는 것으로 그 행상(行相)을 삼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로써 그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고, 일체의 공덕이 모두 사마타와 비발사나에 섭수되는 까닭에 여러 가지 심과 심법으로 그 조반(助伴)을 삼는 것이다. 비무량 따위의 일체의 공덕은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이와 같음을 익숙하게 알아야 한다. ‘비무량’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과 혜이니, 나머지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소의ㆍ자체ㆍ조반이 자무량과 더불어 그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희무량’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이 즐거움을 여의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과 혜이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사무량’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과 혜이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釋】‘이익하게 하는 것을 의요함’이란 즐거움을 베푸는 것에 상응하는 따위로 유정들이 애착하는 따위를 버리게 하는 것이며, ‘마땅히 그들을 번뇌에서 해탈하게 해야겠다’고 사유하는, 이와 같은 의요를 ‘사행상(捨行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익하게 하는 것을 의요하는 행상이 원만한, 이러한 것을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해탈’이란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한 그대로이다. ‘유색(有色)에서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여 해탈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신(內身)으로는 그 이끌어 보이는 색(色)이라는 상(想)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고, 또는 현재 그 이끌어 보이는 자의 ‘색’이라는 상(想)에 편안히 서는 것을 말한다. 그 이끌어 보이는 색의 관찰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모든 심과 심소를 가리킨다. 【釋】이는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장(變化障)이다. ‘유색’이란 내신에 처하여 아직 무색정에 의지하면서 그 이끌어 보이는 색이라는 생각을 미처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고, 또는 그 인견되는 자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편히 설립함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의해탈(意解脫)로써 좋고 나쁜 색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해탈’이란 일체의 변화장에서 능히 해탈하는 것을 말한다. ‘무색상(無色想)에서 외부의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여 해탈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신으로는 그 이끌어 보이는 색(色)이라는 상(想)을 굴복시킨 것이고, 또는 현재 그 이끌어 보이는 자의 ‘무색’이라는 상(想)에 편히 건립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끌어 보이는 색을 관찰하여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나머지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釋】‘내신으로는 무색이라는 상’이란 그 내신에 처해서 무색정에 의거하여 그 이끌어 보이는 색이라는 상을 이미 굴복시킨 것이고, 또는 그 이끌어 보이는 자의 무색이라는 생각에서 편히 건립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끌어 보이는 것’이란 명(名)과 상(想)이 현전하여 행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머지의 것은 앞에서 풀이한 그대로이다. ‘정해탈(淨解脫)을 신작증(身作證)하여 모두 갖추어 머무르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내적으로 청정하고 부정한 갖가지 색에 처해서 전전상대상(展轉相待想)ㆍ전전상입상(展轉相入想)ㆍ전전일미상(展轉一味想)을 이미 성취한 까닭이다. 그 성취한 것이 모두 갖추어진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나머지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청정하거나 부정하게 변화하는 번뇌가 생겨나는 장애에서 해탈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은, 청정하고 부정한 여러 가지 색에 처해서 그 ‘전전상대상’과 ‘전전상입상’에 의거해서 ‘전전일미상’을 성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머지 색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청정한 색을 상대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고, 나머지 색 가운데에서 부정한 색을 상대하는 것을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단지 청정하다고 해서 이것을 상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종류만이 있는 때에는 청정하다고 하거나 부정하다는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이고, 또 청정한 가운데에서 부정하다는 성품이 따라 인지되는 것이고, 부정한 가운데에서 청정하다는 성품이 따라 인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엷은 가죽으로 둘러싸인 것을 모두 청정하다고 이르는 것이나, 그 가운데에는 머리카락이나 터럭 따위의 서른여섯 가지 부정한 물건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총괄적으로 일체의 색이 합해진 것을 전전해서 한 가지 맛의 청정하다는 생각을 내게 되는 것이니, 이미 성취한 즐거운 색에 따르는 것을 풀어 버리는 것이다. ‘해탈하여 자재하다는 것’이란 청정하거나 부정한 색이 변화하는 장애 및 이 가운데에서 번뇌가 생겨나는 장애를 능히 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번뇌를 변화시키는 것에 처하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청정한 색을 변화시키고자 행을 더하는 공용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부정한 색의 변화에 상반되는 까닭이다. ‘무변허공처해탈(無邊虛空處解脫)’이란 무엇입니까? 해탈에 순응해서 무변허공처에 머무는 것이 모두 갖추어진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머지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釋】무변허공처의 해탈처럼 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도 이와 같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장애에 걸리지 않고 적정해탈(寂靜解脫)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성제자가 얻게 되는 경우에는 능히 무루에 순응하는 까닭에 이 같은 청정한 성품을 해탈이라 이름하게 된다. 그 애착하여 맛 들이는 것에서 해탈하기 때문이다. ‘적정해탈’이란 색계와 무색계를 넘어서는 가운데에서의 청정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장애에 걸리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따라서 무색에 집착하여 맛들이는 것이 여기에서의 장애이다. ‘상과 수가 멸하는 해탈[想受滅解脫]’이란 무엇입니까? 비상비비상처의 해탈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적정해탈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진해탈(眞解脫)에 엇비슷하게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심과 심소가 소멸되어, 해탈을 이루고자 상과 수가 소멸된 장애[想受滅障]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낸 ‘상과 수가 소멸된 해탈’이란 비상비비상처를 의지로 삼는 것으로 경계ㆍ행상ㆍ조반도 없고 심과 심법 또한 없는 것이기에 단지 심과 심법이 소멸한 것을 자체로 삼는다. 또 이 같은 해탈은 진해탈과 엇비슷하게 원만함을 성품으로 삼는 것이기에, 만약 성제자가 출세간에 인하여 전의(轉依)를 이미 성취하게 되면, 여러 가지 심과 심법이 잠시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그 지위가 지극하게 적정한 까닭이고, 염오의 의(意)가 겉으로 행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이 같은 여덟 가지 해탈을 해설하여 성주(聖住)라고도 이름하니, 여러 성자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성자는 대부분 두 가지 머무름에 의거하게 되니, 세 번째와 여덟 번째의 해탈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전에서는 “이 같은 두 가지의 해탈분(解脫分)을 신작증(身作證)하여 구족하게 머무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이 같은 두 가지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니, 그 순서에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의 해탈장(解脫障)이 남김없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고, 원만하게 증득해야 나머지 해탈분으로 전의되기 때문에, 이를 해설해서 가장 수승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승처(勝處)’란 여덟 가지 수승한 처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앞의 네 가지 승처는 두 가지 해탈(解脫)에 기인하여 건립되고, 나중의 네 가지 승처는 한 가지 해탈에 기인해서 건립되는 것이니, 그러한 것에서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신(內身)이 유색(有色)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되, 좋거나 나쁘거나 열등하거나 수승하거나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색이 수승함을 깨닫는 이나 그 수승함을 보는 이가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그러한 것이 ‘초승처(初勝處)’이다. 내신이 유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되, 좋거나 나쁜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색에 대해서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는 것이 ‘제2승처’이다. 이 같은 두 가지 승처에서 유색으로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는 것에서 해탈하여 벗어나게 된다. 내신이 무색(無色)이라는 생각에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되,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는 것이 ‘제3승처’이다. 내신이 무색이라는 생각에서 외부의 색이 많은 것을 관찰하되,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는 것이 ‘제4승처’이다. 이 같은 두 가지 승처는 무색이라는 생각에서 외부의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는 것에서 해탈하여 벗어나는, 이러한 것을 ‘앞의 네 가지 승처’라고 하니, 바로 두 가지 해탈로 말미암아 건립되는 것이다. 내신의 색상이 무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여러 색을 관찰하되, 만약 푸른색이거나 푸른 현색이거나 푸른색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푸른빛을 내는 것이, 오막가(烏莫迦)꽃과 같고, 또는 바라니사(波羅斯)로 푸르게 물들인 옷처럼, 만약 푸른색이거나 푸른 현색이거나 푸른색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푸른빛을 내는, 그러한 여러 가지 색의 수승함을 깨닫는 이나 그 수승함을 보는 이가 참다운 생각을 내는 것이 ‘제5승처’이다. 내신의 색상이 무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되, 만약 노란색이거나 노란 현색이거나 노란색이 나타내는 것이거나 노란빛을 내는 것이, 갈니가(羯尼迦)꽃과 같고, 또는 바라니사로 노랗게 물들인 옷처럼, 만약 노란색인 경우에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기까지,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것이 ‘제6승처’이다. 내신의 색상이 무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여러 색을 관찰하되, 만약 빨간색이거나 빨간 현색이거나 빨간색이 나타내는 것이거나 빨간빛을 내는 것이, 반두시박가(般豆時縛迦)꽃과 같고, 또는 바라니사로 빨갛게 물들인 옷처럼, 만약 빨간색인 경우에 그 자세한 설명에 이르기까지, 참다운 생각을 내게 되는 것이 ‘제7승처’이다. 내신의 색상이 무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여러 색을 관찰하되, 만약 흰색이거나 흰 현색이거나 흰색이 나타내는 것이거나 흰빛을 내는 것이, 오사사(烏沙斯)별과 같고, 또는 바라니사로 희게 물들인 옷처럼, 만약 흰색이거나 흰 현색이거나 흰색이 나투는 것이거나 흰빛을 내는, 그러한 여러 가지 색의 수승함을 깨닫는 이나 그 수승함을 보는 이가 참다운 생각을 내는 것이 ‘제8승처’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승처는 정해탈(定解脫)에서 신작증하여 모두 갖추어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釋】여기서 ‘해탈’은 의해탈(意解脫)의 인연한 바이고 ‘승처’란 그 인연한 바를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소연이니, 적고 많은 것 따위의 경계에 마음대로 자재하기 때문이고, 또는 이러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고, 또는 바라는 것에 따라 전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은 색’이란, 유정수(有情數)의 색을 말하는 것이니, 그 양이 적기 때문이다. ‘좋은 색과 나쁜 색’이란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못한 현색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열등한 색이나 수승한 색’이란 인간 세계[人趣]이거나 천상 세계[天趣]이거나 그 순서에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색의 수승함에 대해서란 자유롭게 전향하기 때문이다. ‘깨닫는 이’란 사마타(奢摩他)의 도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보는 이’란 비발사나(毘鉢舍那)의 도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참다운 생각을 내는 것’이란 수승한 장소로 나아가는 도중에 증상만의 생각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푸른색’이란 총괄적인 구절이다. ‘푸른 현색’이란, 그 구생(俱生)하는 것이 푸르다는 것이다. ‘푸른빛을 나툰다는 것’이란 그 화합한 색이 푸르다는 것이다. ‘푸른빛’이란 두 가지에서 방출되는 선명하고 깨끗한 색깔이 푸르다는 것이다. 푸른색의 빛깔처럼 노란색ㆍ빨간색ㆍ흰색의 자세한 해설도 이와 같다. ‘한 가지 장소를 두 가지 비유로써 해설하는 것’이란 구생과 화합의 두 가지 현색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 푸른색’인 경우에는 꽃과 옷의 두 가지 푸른색을 모두 거론하고, ‘푸른 현색’인 경우는 꽃의 푸른색에 의거해서 설명하게 되니, 이것은 구생인 까닭이다. ‘푸른색이 나툰다는 것’이란 옷의 푸른색에 의거해서 설명하는 것이니, 이것은 화합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푸른빛’이란 두 가지에 의거해서 설명하는 것이니, 그러한 두 가지가 갖추어진 것으로 인하여 선명하고 청정한 빛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비유에서 ‘만약 푸른색이거나 푸른 현색이거나’의 총괄적인 구절과 풀이하는 구절은 그 상응하는 것대로 익숙하게 알아야 하니, 푸른색의 경우처럼 노란색 따위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나머지의 것은 해탈분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어떠한 것이 ‘나머지 것’입니까? 내신에서 유색이라는 생각으로 외부의 색을 관찰하는 따위를 말한다. 유색으로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는 것처럼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 풀이해야 하는 것이니, 여기서 그 수승한 장소의 그 수승함에 소연하는 경계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釋】‘변처’란 두루 가득하게 머무는 것이 모두 갖추어진 가운데 처한 정이나 혜 및 이에 상응하는 심과 심법을 변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두루 가득하다는 것’이란 그 양이 아주 많아서 사방으로 끝없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에는 다시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무변공처(無邊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가 모두 두루 가득한 것을 말한다. 어째서 변처의 지위(地位) 따위를 건립하게 됩니까? 이 같은 변처에 기인해서 소의색(所依色)과 능의색(能依色)이 모두 두루 가득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가운데 그 지위 따위를 건립하지 않는다면, ‘변처’란 것도 즉시 그 소의가 되는 대종색(大種色)을 여의게 되어, 푸른빛 따위의 소조색(所造色)이 두루 가득한 모양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소의색과 능의색이 모두 두루 가득한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지위 따위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것은 해탈을 해설한 그대로이니, 무변공처 따위를 말한다. 여기에서 그 해탈에 의지하는 까닭에 수도를 이루는 것임을 익숙히 알아야 한다. 그 승처로 말미암는 까닭에 방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변처로 말미암는 까닭에 구족한 지위[滿位]를 이루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처소에서 만위를 이루게 되면 바로 해탈의 구경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