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343_a_01L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6권
016_0343_a_01L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第十六


안혜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016_0343_a_02L安惠菩薩糅
釋上集論
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4) 논품 ②
016_0343_a_04L決擇分中論品第四之二
016_0343_b_01L【釋】‘실자성(實自性)’이란 모든 법이 실제로 존재하는 성품을 말한다.
‘가자성(假自性)’이란 모든 법이 거짓으로 존재하는 성품을 말한다.
‘세속자성(世俗自性)’이란 모든 법이 세속적으로 존재하는 성품을 말한다.
‘승의자성(勝義自性)’이란 모든 법이 승의적으로 존재하는 성품을 말한다.
‘생인(生因)’이란 인연 따위의 네 가지 연을 말한다.
‘성인(成因)’이란 세 가지 ‘양(量)’을 말하는 것이니, 첫 번째가 현량(現量)이고, 두 번째가 비량(比量)이고, 세 번째가 성량(聲量)이다.
‘전인(轉因)’이란 순연기(順緣起)를 말한다.
‘환인(還因)’이란 역연기(逆緣起)를 말한다.
‘유상경(有相境)’이란 안식 따위의 5식에 인연하는 색경 따위의 5경을 말한다. 이것이 생겨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오직 무분별한 모양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분별경(有分別境)’이란 의식에 인연하는 경계를 말한다. 이 같은 경계를 인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유분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대치경(對治境)’이란 이 같은 경계를 인하여 잡염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능히 대치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안주경(安住境)’이란 이 같은 경계에 인하여 거룩한 범천(梵天)에 태어나 머무는 것을 말한다. 여러 성자가 머무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증익경(增益境)’이란 이 같은 경계에 인하여 승진분(勝進分)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승하게 늘려 나가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손감경(損境)’이란 이 같은 경계에 인하여 무상정과 멸진정에 능히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심과 심법을 줄여 나가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자재경(自在境)’이란 이 같은 경계에 연하여 신통 따위 승품(勝品)의 공덕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재의 인이 되는 때문이다.
‘분석행상(分析行相)’이란 갖가지 품류로써 여러 법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나 유견(有見)과 무견(無見) 같은 것들이다.
‘차별(差別)행상’이란 모든 법이 차별되는 이치를 말한다. 한결같은 신심의 모양과도 같은 것이니, ‘심청정(心淸淨)’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희락(喜樂)’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인가(忍可)’라고 이름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정해(正解)행상’이란 갖가지 행상으로써 그 소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 행상의 요별(了別)을 ‘식(識)’이라 이름하고, 그 행상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상(想)’이라 이름하고, 그 행상을 접촉하여 거두는 것을 ‘수(受)’라고 이름하는, 이와 같은 따위이다.
‘관찰(觀察)행상’이란 열여섯 가지 행을 말한다. 바로 무상(無常) 따위의 네 가지와 인(因) 따위의 네 가지와 멸(滅) 따위의 네 가지와 도(道) 따위의 네 가지이다. 또 세속의 여섯 가지 행은 추행(麤行)ㆍ장행(障行)ㆍ고행(苦行)ㆍ정행(靜行)ㆍ묘행(妙行)ㆍ이행(離行)을 말한다.
‘작수작(作作)행상’이란 이루어야 할 것을 짓고 나서, 다시 인연따라 지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행에 인하여 어질게 지어가기 때문에, 다시 나머지 다른 수호(守護)에 따르는 행을 일으키게 된다.
‘자류등무간(自類等無間)’이란 탐(貪)에서 다시 탐이 빈틈없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진(瞋) 따위도 이와 같다. 각각 별도의 종류 따위가 빈틈없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류(異類)등무간’이란 ‘탐’에서 ‘진’ 따위가 빈틈없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욕계에서 색계가 빈틈없이 생겨나고 색계에서 무색계가 빈틈없이 생겨나는, 이러한 것들이다.
‘삼마발저(三摩鉢底)등무간’이란 삼마발저가 빈틈없이 서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욕계의 착한 법에서 초정려에 빈틈없이 들어가는 것처럼, 초정려에서 욕계로 빈틈없이 환생하게 된다. 이처럼 제2정려 따위의 무색정도 이치에 맞게 익숙하게 알아야 한다.
‘퇴(退)등무간’이란 정려 따위에서 퇴실하는 그 시분이 빈틈없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생(生)등무간’이란 생을 받는 시분이 빈틈없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욕계에서 색계 따위로 빈틈없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인차(隣次)등무간’이란 여러 가지 심과 심법이 빈틈없이 순서대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그 중간에 마음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격월(隔越)등무간’이란 멸진정 따위를 일으킬 때를 말한다. 앞서 설명한 심과 심법에서 나중에 생겨나는 심과 심법을 유추하는 그 중간에 간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起)등무간’이란 이와 같은 법에서 저것과 같은 법이 빈틈없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멸(滅)등무간’이란 이와 같은 법에서 저것과 같은 법이 빈틈없이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심과 심법이 빈틈없이 소멸되는 것처럼, 멸진정에 들어가거나 또는 무상정 따위에 들어가거나 또는 무여열반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취증상(取增上)’이란 안근 따위의 근의 유추에서 경계를 능히 취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증상하는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생(生)증상’이란 남녀의 근에서 태어나고자 잉태되는 것의 유추를 말한다. 그 증상하는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주(住)증상’이란 명근에서 신체 따위에 머무는 것의 유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증상하는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수용잡염(受用雜染)증상’이란 5수근(受根)이 그 수용하는 것을 유추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증상하는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또 탐 따위의 소수면(所隨眠)에 덮이기 때문에, 낙탐(樂貪)의 소수면ㆍ고진(苦瞋)의 소수면ㆍ불고불락치(不苦不樂癡)의 소수면이라고도 말한다.
‘청정(淸淨)증상’이란 신근 따위의 5근과,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 따위의 세 가지 근이 세간과 출세간의 청정한 법을 유추하는 것을 말한다. 증상하는 힘에 기인하는 때문이다.
‘전(田)증상’이란 공업(共業)에서 기세간(器世間)의 생성이 유추되는 것을 말한다. 증상하는 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집수(執受)증상’이란 4대종에서 그 소조색이 유추되는 것을 말한다.
‘계소의(界所衣)’란 욕계 따위에 거두어지는 신체를 말한다.
‘취(趣)소의’란 5취에 거두어지는 신체를 말한다. ‘주저(洲渚)소의’란 섬부주(贍部洲) 따위를 말한다.
‘촌전(村田)소의’란, 만약 촌전에 의지하게 되면, 유(有)가 바로 이것을 바탕 삼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소의’란, 만약 보특가라에 의지하게 되면, 유(有)가 바로 이것을 바탕 삼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무병(無病)소의’란, 만약 무병에 의지하게 되면, 유(有)가 바로 이것을 바탕 삼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시라(尸羅)소의’란, 만약 시라에 의하게 되면, 유가 바로 이것을 바탕 삼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장엄(莊嚴)소의’란, 만약 저것과 같은 사문(沙門)의 장엄에 의지하게 되면, 여러 가지 공덕이 생겨나는 것도 저러한 것을 바탕 삼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중구의(衆具依)’란 4의(依) 즉 의복 따위를 말한다.
‘선우의(善友依)’란 만약 이 같은 것에 의지하게 되면, 착한 법 따위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법의(法依)’란 계경 따위의 12분교를 말한다.
‘작의의(作意依)’란 일곱 가지 작의 즉 요상작의 따위를 말한다.
‘삼마발저의’란 일곱 가지 정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서 “내가 초정려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누를 소진시킬 수 있었으니, 무소유처에 의지하는 것까지 모두 이와 같다”는 말씀 그대로이다.
‘계섭(界攝)’이란 모든 계의 종자를 말한다. 이것을 인하여 법을 생기게 하는 종자를 모두 수렴하기 때문이다.
‘상(相)섭’이란 모든 법의 자체 모양이 다시 자체로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종류(種類)섭’이란 색의 종류를 축약하는 것을 말한다. 10색처가 색온에 수렴되는 따위이다.
‘분위(分位)섭’이란 순락수 따위의 분위(分位)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조반(助伴)섭’이란 색이 5온 따위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저들의 권속이기 때문이다.
‘시(時)섭’이란 과거는 과거 따위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방(方)섭’이란 특정한 방향에 존재하는 온 따위는, 그 특정한 방향에 모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구분(具分)섭’이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여러 가지 무루색에 일체의 색이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일분(一分)섭’이란 안근에 수렴되는 색온을 말한다.
‘갱호(更互)섭’이란 온ㆍ계ㆍ처에 그 모양이 돌려 가면서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승의(勝義)섭’이란 모든 법의 무상ㆍ고ㆍ부정ㆍ공ㆍ무아가 진여에 수렴되는 것을 말한다.
‘타성상응(他性相應)’이란 다른 성품과 상응하지만, 자신의 성품이 아닌 것을 말한다.
‘불상위(不相違)상응’이란 비록 다른 성품과 상응하더라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서로 어긋나는 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탐이 진과 함께 하고, 낙이 고와 함께 하는, 이와 같은 따위이다.
‘변행(遍行)상응’이란 수온과 상온에 접촉하는 사(思) 심소법이 일체의 마음에서 뜻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무명(無明)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ㆍ살가야견과 같은 네 가지 번뇌는 염오의에 해당한다.
‘불변행(不遍行)상응’이란 변행을 제외한 나머지 탐 따위와 신(信) 따위를 말한다.
‘소치(所治)상응’이란 여러 번뇌가 돌아 가면서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능치(能治)상응’이란 대치도에 수렴되는 착한 법이 돌아 가면서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증습(曾習)상응’이란 출세간 및 출세한 이후의 후득지(後得智)에 의해 성취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 상응법을 말한다.
‘미증습(未曾習)상응’이란 앞서 제거된 여러 가지 상응법을 말한다.
‘하열(下劣)상응’이란 성문승과 독각승에 수렴되는 여러 가지 상응법을 말한다.
‘광대(廣大)상응’이란 모든 불보살에게 존재하는 상응법을 말한다. ‘성취(成就)ㆍ잡염(雜染)ㆍ식(識)’ 따위에서 일곱 종류의 ‘청정’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 모양을 설명하였기에, 여기서 다시 풀이하지는 않겠다.
‘여덟 가지의 의문사’란 예를 들어 “누가 신심을 내게 되는가, 무엇에 대해 신심을 내는가, 어떠한 것을 바탕으로 신심을 내는가, 무엇 때문에 신심을 내는가, 어떠한 것으로 말미암아 신심을 내는가, 어떠한 것에 대한 신심인가, 어떠한 곳에 처하여 신심을 내는가, 신심에는 몇 종류가 있는가”이다. 또 ‘여덟 가지의 조건사’란 예를 들어 “만약 신심을 낼 수 있다면, 만약 신심을 내게 하는 것이 있다면, 만약 신심을 바탕으로 한다면, 만약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 만약 신심으로 말미암아, 만약 그들이 신심을 낸다면, 만약 신심에 처해서, 만약 신심 그대로라면”이니, 이 같은 무량한 법문에는 모두 여덟 종류가 있다.
‘불필경출리(不畢竟出離)’란 세간도에 말미암는 것을 말한다.
‘필경(畢竟)출리’란 출세간도에 말미암는 것을 말한다. 이 앞의 네 가지는 쉽게 이해되는 까닭에 되풀이하여 풀이하지 않겠다.
‘상심심(相甚深)’이란 세 가지의 자체 성품을 말한다.
‘잡염심심(雜染甚深)’이란 진여를 물들여 집착하면서 물들여 집착함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이르는 것을 말한다.
‘청정심심’이란 진여를 청정한 것도 청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 무엇이라 이르는 것을 말한다.
‘연기심심’이란 어떠한 법도 일어나는 것에는 참다운 작용이 없으나, 그러한 모든 법이 갖가지로 일어나는 따위를 말한다. 또 실제로는 무아(無我)지만 자아가 비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업(業)심심’이란 업이 있으면 과보가 있으나 그 업을 짓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심심(智甚深)’이란 무분별지를 말한다. 어째서 이 같은 지혜를 분별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진여의 성품을 분명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생(生)심심’이란 여러 보살이 업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드러내 보여 생을 받는 것을 말한다.
‘보리(菩提)심심’이란 무루계(無漏界) 가운데에 모든 부처님의 보리를 건립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성품이 무량하게 상속하여 증득되기 때문이다. 갖가지 성품을 건립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의지하는 것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제불(諸佛)심심’이란 어떤 대법회 가운데에서 한량없고 끝이 없는 모든 불세존이 갖가지 색신과 갖가지 의요를 나타내더라도, 나와 남의 차별이 있다고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또 화신불은 부처님의 모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갖가지 부처님의 사업을 능히 조작하는 것이다.
‘교심심(敎甚深)’이란 대승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갖가지 비밀스러운 의요의 차별과 3해탈문 및 일체법이 있는 것을 말한다. 욕(欲)이란 근본 따위이니, 이미 그 모양을 설명하였기에 여기서 다시 풀이하지 않겠다.
‘임지방편(任持方便)’이란 자량(資糧)에 대한 모든 방편을 말한다.
‘유가방편(瑜伽方便)’이란 사마타(奢摩他:止)와 비발사나(毘鉢舍那:觀)를 말한다.
‘상방편(相方便)’이란 지(止)ㆍ거(擧)ㆍ사(捨)의 모양 가운데에서의 방편을 말한다.
‘결택방편’이란 순결택분 가운데에서의 방편을 말한다.
‘격월방편(隔越方便)’이란 임지방편을 말한다.
‘인차방편(隣次方便)’이란 결택방편을 말한다.
‘인차격월방편’이란 유가방편 및 상방편의 두 가지 방편을 순결택분 가운데에서는 ‘인차’라고 이름하는 것이고, 임지방편 가운데에서는 ‘격월’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聖道)에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통달ㆍ수ㆍ원증’은 다른 장에서 이미 설명하였기에 여기서 다시 풀이하지 않겠다.
‘지구경(智究竟)’이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말한다.
‘단구경(斷究竟)’이란 일체의 번뇌를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을 말한다.
‘필경구경(畢竟究竟)’이란 출세간도에 말미암는 것을 말한다.
‘불필경구경’이란 세간도에 말미암는 것을 말한다.
‘하열구경(下劣究竟)’이란 성문과 독각을 말한다.
‘광대구경’이란 모든 불보살을 말한다.
‘보살구경’이란 최후의 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제불구경(諸佛究竟)’이란 장애 없이 지혜가 생겨날 때에, 마치 그 수효가 백천 구지(百千俱胝)와 같은 태양이 일시에 출현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스무 종류의 ‘인발(引發)’은 예전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어떠한 것이 ‘섭결택’입니까?
열 가지 처소에 기인해서 모든 결택을 수렴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열 가지 처소입니까?
첫 번째가 성소작결택처(成所作決擇處)이고, 두 번째가 취입결택처(趣入決擇處)이고, 세 번째가 승해결택처(勝解決擇處)이고, 네 번째가 도리결택처(道理決擇處)이고, 다섯 번째가 논결택처(論決擇處)이고, 여섯 번째가 통달결택처(通達決擇處)이고, 일곱 번째가 청정결택처(淸淨決擇處)이고, 여덟 번째가 인발결택처(引發決擇處)이고, 아홉 번째가 구차별결택처(句差別決擇處)이고, 열 번째가 ‘공용에 인하지 않고 잠시 뜻을 일으킬 때에 일체 뜻이 성립되는 결택처[不由功用暫作意時一切義成決擇處]’이다.
【釋】‘성소작결택처’란 4제의 모양을 분별해서 세간의 갖가지 그 수명을 늘리는 방편 따위를 완성하는 것이다. ‘취입결택처’란 내가 3승 가운데 어떠한 승에 들어가야 하는지, 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승으로 들어가라고 권해야 하는지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승해결택처’란 문혜(聞慧)에 인하여 그 청해 물은 가르침에 대해 수승한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도리결택처’란 생각의 지혜[思慧]에 인하여 앞뒤로 설명한 의취를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논결택처’란 문혜와 사혜로 문론의 도리를 되풀이하여 세워서 법락을 수용하려는 것을 말한다. ‘통달결택처’란 견도에서 진제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청정결택처’란 수도에서 여러 가지 번뇌를 남김없이 청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발결택처’란 승진도(勝進道)로써 보다 수승한 공덕을 이끌어 발명시키는 것을 말한다. ‘구차별결택처’란 두 구절ㆍ세 구절ㆍ네 구절 따위 문답의 차별로써 이끌어 발명하는 문을 말한다. 끝없는 법의 이치를 차별되게 연설하는 때문이다. ‘불유공용잠작의시일체의성결택처’란 여래의 지혜는 예전의 공용을 여의었기에 일체의 이치에서 잠시 생각을 낼 때에, 집착 없고 걸림 없이 지견이 전향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논궤(論軌)결택’입니까?
간략하게 일곱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토론의 성격[論體]이고, 두 번째가 토론이 진행되는 장소나 상대방[論處]이고, 세 번째가 논제의 성립 근거[論依]이고, 네 번째가 완전 무결한 변론[論莊嚴]이고, 다섯 번째가 토론에서의 패배[論負]이고, 여섯 번째가 토론의 회피[論出離]이고, 일곱 번째가 다수의 대론자와 전개하는 토론[論多所作法]이다. 첫 번째의 ‘논체’에는 다시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언론(言論)이고, 두 번째가 상론(尙論)이고, 세 번째가 쟁론(諍論:반대적인 주장의 전개)이고, 네 번째가 훼론(毁論)이고, 다섯 번째가 순론(順論)이고, 여섯 번째가 교론(敎論)이다.
【釋】‘언론’이란 일체의 세속 언어를 가리킨다. ‘상론’이란 모든 세간에서 그 배운 것에 따라 세속지를 논의해서 중생에게 존중 받는 것에 기인한다. ‘쟁론’이란 서로 그 세워진 언론을 반대하는 것이다. ‘훼론’이란 다시 서로 분노해서 추악한 말을 내뱉는 것이다. ‘순론’이란 청정한 지견에 따라 결택되는 언론이다. ‘교론’이란 유정을 교도하여 그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로 하여금 그 마음이 정해지도록 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이미 정해진 자는 해탈을 얻도록 하는 모든 언론을 가리킨다. 두 번째의 ‘논처’란 왕가에서나 또는 대신의 처소에서나, 또는 자질이 뛰어나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자이거나, 또는 좋은 도반을 상대하거나, 법의 이치를 잘 터득하는 사문과 바라문 따위와 논단(論端)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왕가’란 국왕이 함께한 자리를 말한다. ‘대신의 처소’란 국사를 결정하는 자리를 말한다. ‘자질이 뛰어나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자’란 상인 따위를 말한다. ‘좋은 도반’이란 도반 가운데에서 논리가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 ‘적론(敵論)’이란 그 말하는 것이 서로 배타적인 것을 말한다. ‘법의 이치를 잘 터득하는 사문과 바라문 따위’란 그와 같이 토론하는 중에서 글의 뜻을 잘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세 번째의 ‘논의’란 그 성립 근거에 의지해서 토론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가 성립하는 대상[所成立]이고, 두 번째가 능히 성립하는 주체[能成立]이다. ‘소성립’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자성(自性)이고, 두 번째가 차별(差別)이다. ‘능성립’에는 여덟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입종(立宗)이고, 두 번째가 입인(立因)이고, 세 번째가 입유(立喩)이고, 네 번째가 합(合)이고, 다섯 번째가 결(結)이고, 여섯 번째가 현량(現量)이고, 일곱 번째가 비량(比量)이고, 여덟 번째가 성교량(聖敎量)이다. ‘소성립의 자성’이란 아자성(我自性)이나 법자성(法自性)이 존재한다고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모두 성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소성립의차별’이란 아차별(我差別)이나 법차별(法差別)이 모두 보편적이거나 모두 보편적인 것이 아니거나, 상주하거나 상주하지 않거나, 유색이거나 무색이라는 무량한 차별 따위를 말한다. ‘입종(立宗)’이란 그 근거에 대응해서 스스로 확인한 이치를,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제시하여 그가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성립해야 할 근거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 자신의 종지가 성립하는 이치를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것을 입종이라 이름한다. 만약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그 성립해야 할 근거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에, 다른 종지가 성립하는 이치를 예를 들어 제시하는 것을 입종이라 이름한다. 만약 상대방의 종지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을 독자적으로 주창하는 것도 입종이라 이름한다. 만약 말로 공표하지 않고 단지 몸을 떨쳐 움직이는 의사표시[身表語]로써 이 같은 이치를 예를 들어 제시하는 것도 입종이라 이름한다. 만약 말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능히 이해시킬 수 있으나, 청중이 이 같은 이치를 미처 터득하지 못한 때에도 입종이라 이름한다. 만약 안정되게 건립된 것이 어떠한 인식 논리적인 허물도 없는 경우에, 자아나 법의 자체 성품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립이나, 또는 자아나 법의 차별이 보편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는 건립 따위가 앞의 근거를 만족시키는 것도 입종이라 이름한다. ‘입인(立因)’이란 비록 소성립되었으나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이치를 그 현량의 성립[可得]과 불성립[不可得]을 올바르게 설명해서 이를 믿고 이해하도록 하는 정황 근거[相]를 가리킨다. 여기서 ‘믿고 이해하는 정황 근거’란 그 이유를 믿고 이해하도록 하는 이치를 말한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인식이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근거를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미처 인식되지 않은 이치를 성립시키는 것에 대한 신해(信解)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근거를 설명하는 것을 입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현량의 성립과 불성립’이란 자체 및 그 모양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입유(立喩)’란 어떤 것을 인지하는 쪽과 인지되지 않는 쪽이 서로 화합하도록,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정하는 쪽’이란 이현료분(已顯了分)을 말한다. ‘인정하지 않는 쪽’이란 미현료분(未顯了分)을 말한다. 인지하는 쪽과 인지되지 않는 쪽에 대해서, 그 이치를 평등하게 하는 올바른 설명을 입유라 이름한다. ‘합(合)’이란 다른 종류의 이치로 끌어가고자, 이 법에 나아가서 그 이치를 올바로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같이 3분(分)에 연유하여 성립되는 것은 앞서의 성립된 이치와 같다. 다시 나머지 종류가 성립되는 이치를 성립시키고자, 그 같은 이치를 인용해서 이 같은 법에 대조시키는 올바른 설명의 도리를 합이라고 이름한다. ‘결(結)’이란 구경의 이치에 이르는 일체의 올바른 설명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이 같은 논의사가 어긋나지 않게 결정되어, 그 결론이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결이라 이름한다. 이미 입종 따위의 모양을 설명하였으니, 지금은 실제 예를 들어 간략하게 이것을 드러내겠다. 무아론자(無我論者)의 경우, 이 같은 논의사(論議事)에 처해서 저 유아론자에게 미리 “모든 법에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고 설명하는, 이 같은 언표가 ‘입종’에 해당한다. 그 다음으로는 온에 처해서 자아를 시험삼아 베풀어진 것에 대해 네 가지 과실(過失)이 성립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 같은 언표는 입인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 온에 처해서 참다운 자아가 시험삼아 베풀어진 경우에는, 이같이 자아라고 헤아리는 것이 바로 온의 모양인지, 온 가운데 처해 있는지, 다른 처소에 처해 있는지, 온에 속하지 않는다고 시험삼아 베풀어진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온의 모양으로 시험삼아 베풀어진 경우에는, 온이란 자유롭지 못한 것이어서 여러 인연[衆緣]에서 생겨나는 생멸법에 불과하여, 만약 그러한 모양을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 논리가 성립하지 못하기에, 이것을 첫 번째의 과실이라 이름하게 된다. 만약 자아가 온 가운데에 처해서 시험삼아 베풀어진 것이라 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온에 의존하는 것은 항상 머물지 않기에, 이것에 의존하게 된다는 자아 역시도 항상 머물지 않는 것이기에, 이러한 것이 두 번째의 과실이 된다. 만약 자아가 온을 여의고 다른 처소에서 시험삼아 베풀어진다고 하는 경우에는, 자아라는 것은 그 원인 되는 것이 없기에 자아라는 것 역시 쓰임새가 없게 되는 것이 세 번째의 과실이 된다. 만약 온에 귀속되지 않고 자아를 시험삼아 베푸는 경우에는, 자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그 자체 성품이 해탈에 이른 것이기에, 다시 해탈을 구하는 것은 그 공덕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 네 번째의 과실에 해당된다. 그 다음으로 현재에서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언표가 입유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만약 현재의 모양과 더불어 실제로 존재하는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진 경우에는, 이같이 과거를 헤아리는 것이 바로 현재의 모양인지, 현재 가운데 처해 있는지, 다른 처소에 처해 있는지, 현재를 기다리지 않고 시험삼아 베풀어진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현재의 모양으로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진다고 하는 경우에는, 이미 생겨나서 아직 소멸되지 않은 것이 현재의 모양이기에, 과거법의 자체도 역시 이미 생겨나 미처 소멸하지 않은 것이 그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의 과실이 된다. 만약 현재 가운데에서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진 경우에는, 미처 소멸하지 않은 것에 처해서 그 소멸한 체가 시험삼아 베풀어진다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 까닭에, 도리가 합당하지 않게 되는 이러한 것이 두 번째의 과실이 된다. 만약 현재를 여의고 다른 처소에 과거를 시험삼아 베푸는 경우에는, 현재를 제외한 다른 것에 과거가 존재한다는 일은 약간이라도 성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러한 것이 시험삼아 베풀어지겠는가. 이러한 것이 세 번째의 과실이 된다. 만약 현재를 기다리지 않고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진다고 하는 경우에는, 무위법(無爲法)을 과거세로 시험삼아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 네 번째의 과실이 된다. 그러나 과거세의 모양이 멸하는 까닭에 모양이 없다는 이치는 성립된다. 만약 현재와 동일하게 과거가 시험삼아 베풀어지게 되면, 네 가지 과실이 성립하게 되니, 이러한 까닭에 과거의 모양이 모든 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온에 처해서 자아를 시험삼아 베풀게 되면, 네 가지 과실이 성립하는 까닭에, 무아의 이치가 이루어진다. 그 다음에 이와 같이 아전도(我顚倒)를 논파하게 되는 것이니, 이 같은 도리로 인하여 자아가 상주한다는 것까지도 또한 논파하는 이 같은 언표는 합에 해당한다. 나중에 이 같은 도리로 인하여 온이 모두 무상 내지는 무아라고 설명하는 언표가 결에 해당한다. ‘현량(現量)’이란 자신이 올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아서 더 이상 미혹되어 어지럽지 않다는 뜻이다. ‘자신이 올바르다’는 이치는 스스로 올바르게 이치를 취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 안근으로 인하여 올바르게 색 따위를 취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말은 세간에서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물병 따위의 일을 간략하게 하기 위해서 현량에 의해 성립되는 성품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거짓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현량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말은 장애 따위로 인하여 그 원인을 얻지 못하는 까닭에 그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미혹되어 어지럽지 않다’는 것은 쥐불놀이로 생기는 불수레나 신기루 따위를 간략하게 말하는 것이다. ‘비량(比量)’이란 나머지 인식 근거[量]를 제시해서 믿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현량으로 얻어지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인식되지 않은 일을 결정하여 함께 전향하는 것을 말한다.
【釋】예전에 보았던 것에서 지금 나타내 보이는 것을 성취하는 1분(分)의 때에, 나머지 분에 대한 바른 신해(信解)가 생겨나게 된다. 저것이 이로 인하여 결정되어 함께 전향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연기를 보고 그 곳에 불이 있음을 아는 것처럼, 이러한 것을 현량에 근거한 비량이라고 이름한다. ‘성교량(聖敎量)’이란 현량과 비량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것을 말하게 됩니까?
모든 가르침은 현량과 비량에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고 그 논리가 결정적으로 안정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에 성교량이라 이름한다.
【釋】네 번째의 ‘논장엄’이란 바른 이치[正理]를 논의하는 것으로서 그 논의의 실마리[論端]를 전개하되, 그 이치가 깊고 훌륭하기에 논장엄이라 이름한다. 이것에는 다시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선자타종(善自他宗)이고, 두 번째가 언음원만(言音圓滿)이고, 세 번째가 무외(無畏)이고, 네 번째가 변재(辯才)이고, 다섯 번째가 돈숙(敦肅)이고, 여섯 번째가 응공(應供)이다. ‘선자타종’이란 자신의 종지나 다른 종지에 처해서 그 문자나 이치가 앞뒤로 빈틈없이 성숙되어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을 말한다. ‘언음원만’이란 분명한 말소리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 설명하는 것을 전달하는 말소리의 허물을 여의는 것이고, 그 발성되는 말소리가 어지럽지 않은 것 따위이다. ‘무외’란, 비록 대중에 처했을 때, 셀 수 없이 뛰어난 논객들이 작당하여 둘러싸더라도, 그 말소리가 의젓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변재’란 하는 말에 머뭇거림이 없는 것이다. ‘돈숙’이란 말소리가 일정한 것이다. ‘적론(敵論)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가장 적합한 말소리로 발언하는 것이다. ‘응공’이란 논점을 세우는 것이 온화한데다 친절한 방편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논부(論負)’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는 언행[捨言]ㆍ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굴한 언행[言屈]ㆍ언과(言過)를 가리킨다. ‘주장을 포기하는 언행’이란 자신이 논증하려던 주장[言]에 논증될 만한 근거가 없음을 자인하고서, 상대방의 논증이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비굴한 언행’이란 다른 일을 핑계 대는 방법 따위로 슬그머니 물러나거나, 논의와는 관계없는 일을 거론하여 원래의 화제[宗旨]를 바꾸거나, 또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려서 자신의 실수를 숨기려는 따위이니, 이것은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한 그대로이다. ‘다른 일을 핑계 대는 방법 따위로 슬그머니 물러선다는 것’이란 다른 일을 빗대어 그 말하는 이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서 “장로 천탁가(闡鐸迦)가 여러 외도와 함께 논쟁할 때에, 외도들이 이미 폐기된 논제를 새로 거론하기도 하고 논제로 정해진 것을 폐기하였다”는 말씀과도 같다. ‘언과(言過)’에는 간략하게 아홉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조리가 없는 언행[雜亂]이고, 두 번째가 상스러운 언행이고, 세 번째가 논증하는 것이 분명치 않은 것[不辯了]이고, 네 번째가 그 비유가 주연 관계(周延關係)를 넘어서는 것[無限量]이고, 다섯 번째가 어긋난 이치에 상응하는 것[非義相應]이고, 여섯 번째가 적절하지 못한 논증의 전개[不應時]이고, 일곱 번째가 결론 없이 전개되는 논증[不決定]이고, 여덟 번째가 그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논증[不顯了]이고, 아홉 번째가 논리가 이어지지 않는 것[不相續]이다. ‘조리가 없는 언행’이란 그 논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상스러운 언행’이란 화
를 내며 거친 말로 재촉하는 것을 말한다. ‘논증하는 것이 분명치 못한 것’이란 설명된 법의 이치를 청중과 상대방이 모두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비유가 주연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란 말이 중첩되어 그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되풀이되거나 빼놓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어긋난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란 간략하게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이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이치를 훼손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상대방과 같은 논지를 펴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이치에 대한 지나친 비난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치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고, 결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도리에 맞는 것도 다시 근거를 요구하기 때문이고, 모든 언론이 이치에 어긋나고 도리에 맞지 않게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적절하지 못한 논리의 전개’란 설명하는 순서가 어긋난 것을 말한다. ‘결론 없이 전개되는 논증’이란 논증된 것을 다시 취소하거나 취소된 것을 다시 세워서 그 논증를 자주 바꾸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그 뜻이 전달되지 않는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무시한 답변을 말한다. 또는 고상한 말과 속된 말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논리가 이어지지 않는 것’이란, 말하는 도중에 말하는 논조가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의 ‘논출리’란 거론할 만한 근거[論德]가 없어진 것을 관찰하고서 더 이상의 논의를 회피하거나 또는 잘못된 입장[負處]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계속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논의가 계속해서 능히 어질게 구경에 이를 수 있더라도, 만약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거론할 만한 자격[器]이 없을 때에, 그 청중조차도 자질[德]이 부족하고 또 스스로도 이를 잘 대처할 수 없다면, 다시 논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논할 만한 자격이 있는 때에, 그 청중들도 자질이 충분하고 스스로도 잘 대처할 수 있다면, 계속 논의를 진행할 수가 있다. 여기서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거론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란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논지를 벗어나서, 합당한 논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 청중조차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이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해서 고집을 부리거나 당파를 짓는 것 따위이다. ‘스스로도 이를 잘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란 논체(論體) 내지는 논장엄(論藏嚴)에 이르기까지 어질게 통달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것을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논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따위로 이름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의 ‘논다소작법(論多所作法)’이란 간략하게 세 종류가 있으니, 논단을 전개할 때에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어떠한 것이 그 세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거론하려는 논제를 충분히 파악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두루 논의를 전개하더라도 능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외’이니,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을 능히 대처할 수 있기에 바로 논단을 전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변재’이니, 이로 인해 갖가지 어려운 질문[問難]들을 모두 능숙하게 답변해 내는 것이다. 또 다시 만약 스스로의 이익과 안락을 구하고자 한다면 여러 논의의 궤범[論軌]에 잘 통달하되 다른 사람과의 논쟁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 된다. 박가범께서 대승아비달마경 가운데에서 “만약 여러 보살이 정진에 힘써 여러 성품을 닦아 나가거나, 진실한 법을 행하고자 법에 따라 행하거나, 일체의 유정을 잘 거두어 이롭게 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증득하려는 이는 마땅히 12처의 법을 올바로 관찰하되, 다른 사람과 더불어 논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12처의 법’입니까?
첫 번째가 위없는 이치가 미묘한 법의 증득을 자세히 설명할 때에 믿고 이해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고, 두 번째는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청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고, 세 번째는 논의를 일으킬 때에 청중이 현명하여 그 논의할 만한 근거가 없어진 것을 관찰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고, 네 번째는 모든 논의를 일으킬 때에 능히 여섯 가지 오류를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어떠한 것이 그 ‘여섯 가지 오류’입니까?
잘못된 논제에 집착하는 오류[執著邪宗失]이고, 답변의 순서가 어지러운 오류[矯亂語失]이고, 고집부리는 언사의 오류이고, 언행이 거친 오류이고, 마음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오류이다. 다섯 번째는 논의를 일으킬 때에 원한을 품지 않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여섯 번째는 논의를 일으킬 때에 다른 사람을 잘 애호하는 마음을 갖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일곱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안정된 마음[定心]을 잘 보호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여덟 번째는 논의를 일으킬 때에 패배를 자인하고 그 상대방의 승리를 인정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아홉 번째는 논의를 일으킬 때에 자신이 패배하고 상대방이 이겼을 경우 괴롭지 않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열 번째는 마음속으로 이미 괴로울 때 편안하게 머물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열한 번째는 이미 안주하지 못하면서 늘 평상시처럼 착한 법[善法]을 닦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고, 열두 번째는 여러 착한 법을 이미 일관되게 닦지 못하여 그 마음이 정에 들지 못한 때에 속히 정을 얻는 것이나, 마음이 이미 정에 들었을 경우 해탈을 속히 성취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경전 가운데에서 욕ㆍ근ㆍ정진ㆍ수의 여러 가지 선품을 이미 설명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욕ㆍ행ㆍ정실법ㆍ수법행을 다시 설명하는 것입니까?
그 의요가 청정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익이나 공경 받는 일 따위를 위해서 문혜(聞慧)나 사혜(思慧) 따위의 여러 가지 선품을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釋】 ‘유정을 어질게 거두어 이익되게 한다는 것’이란, 성문 따위의 현관과는 별도로 여러 보살은 이타행으로 수승함을 삼는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때문이다. 이로써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이 구족하게 되어, 무상정등보리를 속히 증득하게 된다. 또 이 경전 가운데의 여러 구절의 이치는, 논단을 전개할 때의 대승법의 선품이 위없이 심오한 것임을 말한다. 만약 다투려는 마음 없이 남을 이해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논쟁을 벌여야 하겠는가. 모든 쟁론을 벌일 때에, 비록 질문을 던지더라도 풀이해 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과실만을 지적하려 들거나, 또 청중들이 마음이 어질지 못해서 선법이 아닌 종교에 빠져 있는 때에는, 논증하는 모든 언론에 여섯 가지 과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무릇 쟁론을 전개할 때에, 그릇된 마음으로 삿된 종교에 집착하거나 그릇된 방편으로 다른 사람의 착오를 지적하려 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하거나, 대론자의 말이 바른 이치에 가까운데도 거꾸로 이를 그릇되다고 비난하거나, 또는 거친 말을 해서 대론자 및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거나, 또는 스스로 화를 내는,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과실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또 쟁론을 전개할 때에 몸과 마음이 침착한 것도 행하기 힘든 것이다. 침착하지 않은 까닭에 두 가지 일을 이루기 힘들게 되니,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보살펴 주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보살피는 것’이다. 이 같은 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청정한 신심이 생기게 하고, 해탈처에 대한 정근의 방편으로 스스로의 마음도 안정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쟁론을 전개할 때에, 어떻게 해야 내가 승리를 거두고 다른 사람을 잘못된 견해로 떨어뜨리겠는가 하는 마음을 품는 경우, 혹 논단이 뜻처럼 되지 않게 되면, 곧바로 번뇌[熱惱]를 품게 되니, 바로 이 같은 것으로 인하여 안락하게 머물지 못하게 되고, 또 이 같은 것으로 인하여 무간도의 착한 법을 닦지도 못하고, 마침내 증상된 법의 증득을 성취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비밀결택’입니까?
다른 이치를 해설하고자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은밀하게 옮겨 변화시켜 다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그대로이다.

부모와 임금
세간의 어진 이를 죽이고
국토와 그 축생조차도 모두 없애 버리는
이 같은 이를 청정하다고 이르네.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간에서 가장 중한 죄악으로 여겨지는 문자들을 겉으로 설명[表詮]해서, 그 말뜻을 옮기고 변화시켜서 나머지 다른 청정한 이치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모든 세간에서 가장 중한 죄악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어진 이와 대중을 해치거나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釋】‘어진 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별현자(別賢者)이고, 두 번째는 공현자(共賢者)이다. ‘별현자’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세간을 보호함[護世間]이고, 두 번째는 공양에 응하는 것[應供養]이다. ‘공현자’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바로 부친과 모친을 말한다. ‘호세간’이란 국왕을 말하는 것이고, ‘응공양’이란 학식이 높은 범지(梵志)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세간에서 가장 청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을 살해하게 되면 어진 이를 시해했다고 이름하는 것이고, 만약 국민이나 그 따르는 축생 따위를 죽이게 되면, 대중을 해쳤다고 이름하게 된다.
【釋】‘이 같은 이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란 세간에서 가장 중한 죄로 여겨지는 그러한 것을 문자로써 드러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을 가리켜 이 같은 문자를 바꾸어 은밀하게 청정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모 따위를 시해한다는 말을 가리킨다.
【釋】그 드러낸 것을 은밀하게 옮기고 바꾸어 애착을 영원히 끊는 나머지 이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애착이나 업이거나 유취식(有取識)이거나 계금취견과 견취견의 2취이거나 안처 따위의 6처 및, 그 행해지는 경계를 그 순서에 따라서 부친과 모친 따위로 이름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그 법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애착은 발동시키는 인(因)에 해당하고, 업은 생기게 하는 인에 해당한다. 이 같은 것으로 인하여 그 습기의 종자를 능히 번식시키는 것을 세간에서는 부친 따위로 이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두 가지 인으로 인하여 유취식이 단절되지 않고 전해지게 된다. 그 전해지는 때에 비록 해탈을 구하더라도 이 두 종류의 방편이 아닌 법으로 인하여 그 해탈의 성취가 장애받게 되니, 이같이 허망한 분별에 집착하는 것을 가장 수승한 청정이라 여기게 된다. ‘계견(戒見)의 이 두 가지 취’란 세간의 학식 높은 범지처럼 허망한 분별에 집착하는 것을, 가장 수승한 청정이라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유취식의 소의가 되고 소연이 되는 6처의 경계’란 세간이나 국가이거나 그 따르는 축생 따위를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은 따위의 법을 영원히 끊을 수 있게 되면, 이 같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청정한 사람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또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믿음을 내지도 않고 은혜도 저버리고
맛있는 것도 끊고 누울 자리도 없이 살면서
남이 토해 놓은 것을 먹는다면
이 같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대장부이다.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간에서 가장 비천하게 여기는 뜻을 가진 문자를 변화시켜서 비밀스럽게 나머지 최상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세간에서 비천하게 여기는 것에는 보통 네 종류가 있으니, 의업(意業)이 열등한 것이고, 신업(身業)이 열등한 것이고, 어업(語業)이 열등한 것이고, 그 수용이 열등한 것을 말한다.
【釋】‘의업이 열등한 것’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이와 반대 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다음 생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보시 따위를 행하지 않는 따위이다. 두 번째는 태어나게 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 것이니, 예전의 은혜를 돌보지 않고 세간의 이치를 거역해서 모친을 살해하는 따위의 온갖 나쁜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업이 열등한 것’이란 도둑질을 하고자 담벼락의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이니, 이것도 가장 천한 것이라 이름한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업이기 때문이다. ‘어업이 열등한 것’이란 거짓말 따위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도 가장 비천하다고 말한다. 착한 대중 사이에서 용납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용이 열등한 것’이란 귀신이나 개나 새 따위를 말하는 것이니, 남이 토해 놓은 것을 즐겨 먹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를 드러내고자 세간에서 가장 비천한 뜻에 해당하는 문자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같이 문자를 변화시켜서 무상의 이치를 드러내게 됩니까?
‘믿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을 변화시켜서 은밀하게 나머지 승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釋】여기서 ‘믿지 않는 것’이란 해탈지견을 말하는 것이니, 스스로 드러내어 증득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란 열반의 지혜를 말한다. 유위법을 은혜라 이름하고 무위법을 은혜가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그 은혜가 아닌 것을 깨닫기 때문에 ‘은혜를 모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끊는다는 것’이란 후유(後有)를 이어 가는 원인이 되는 번뇌를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도 없다는 것’이란 미래의 여러 취(趣)를 말하는 것이니, 고통스러운 처소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이 토해 놓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 현행하는 법 가운데에서 비록 거짓으로 근력을 유지하여 몸을 잠시나마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목숨이나 재물에 즐거움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같이 행할 수만 있으면, 바로 가장 뛰어난 대장부라 하는 것이다. 또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깨달음이 굳지 않아도 굳은 것으로 삼아
거꾸로 된 세상에 어질게 살고
지극한 번뇌에 괴로워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보리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 이 게송은 앞에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자체 성품은 여러 보살이 삼마지에 의지해서 견도와 수도의 두 가지 도로 대보리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계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시바라밀다가 속히 원만함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인색함을 늘리는 법의 성품이고, 두 번째는 보시에 싫증 내는 것이고, 세 번째는 보시하라는 요청을 싫어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약간의 보시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보시를 아예 멀리하는 것이다.
【釋】‘인색함을 늘리는 법의 성품’이란 간(慳)과 인(悋)의 수면 및 그 습기를 영원히 끊고 법성진여(法性眞如)를 증득하여 전의하기 때문이다. ‘보시에 싫증 낸다는 것’이란 보시를 닦기 위하여 서약을 하고 오랜 동안 어려운 행[難行]과 괴로운 행[苦行]을 하는 것이다. ‘보시하라는 요청을 싫어한다는 것’이란 요청하기 전에 스스로 베푸는 것이니, 그들이 구걸하는 자체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보시를 아예 멀리한다는 것’이란 언제나 기약해서 보시하는 따위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또 계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범행자가 되어 제일가는 청정한 범행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언제나 욕심을 여의기를 바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욕심내는 법[欲法]을 끊어 버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욕탐(欲貪)이 이미 생겨나면 바로 이를 단단히 붙잡아 매는 것이고, 네 번째는 두렵게 해서 욕법을 다스리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두 가지와 두 가지를 끊임없이 터득하는 것이다.
【釋】‘제일가는 청정한 범행을 이룬다는 것’이란 출세간의 도를 말한다. ‘언제나 욕심 여의기를 구한다는 것’이란 참다운 정변지로써 이러한 것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이같이 참다운 정변지’란 진여를 능히 통달하는 지혜를 말한다. ‘욕심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란 언제나 범행이 아닌 것을 끊는 방편을 버린다는 것이다. ‘욕탐이 이미 생겨나면 이를 단단히 붙잡아 맨다는 것’이란 몸속에서 욕탐이 이미 생겨나면 바로 이를 붙잡아 바깥으로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 ‘두렵게 해서 욕법을 다스린다는 것’이란 욕심의 허물을 설명하는 것으로써 여러 유정을 두렵게 하는 것이니, 대치도를 건립하여 일체의 유정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와 두 가지를 끊임없이 터득한다는 것’이란 더럽고 깨끗함[染淨]의 인과를 차별하는 네 가지 진제 가운데에서 세간과 출세의 두 가지 도 및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두 가지 도를 끊임없이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논(論)을 대승아비달마집(大乘阿毘達磨集)이라 합니까?
간략하게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그 편집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그 편집이 세밀하기 때문이고, 그 편집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어휘의 뜻풀이로 말미암아 본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이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釋】‘편집이 평등한 것’이란 진현관(眞現觀)을 증득한 여러 대보살이 함께 결집했기 때문이다. ‘편집이 세밀하다는 것’이란 일체의 대승아비달마경 가운데에서의 모든 사택처(思擇處)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이다. ‘편집이 정확하다는 것’이란 전도(顚倒)되지 않은 결집의 방편으로 인하여 모든 부처님의 보리도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016_0343_a_05L實自性者謂諸法實有性假自性者謂諸法假有性世俗自性者謂諸法世俗有性勝義自性者謂諸法勝義有性生因者謂因等四緣成因者三量一現量二比量三聲量轉因者謂順緣起還因者謂逆緣起有相境謂眼等五識所緣色等五境由緣此所生唯有無分別相故有分別境謂意識所緣境由緣此境有分別生故對治境者謂緣此境棄捨雜染由能對治故安住境者謂緣此境生聖天梵住由衆聖所住故增益境謂緣此境能轉勝進是增勝因故損減境者謂緣此境能入無想定盡定是損減心心法因故自在境者謂緣此境發神通等勝品功德是自在因故分析行相者謂種種品類分析諸法如有色無色有見無見如是差別行相者謂諸法差別義如一信相或名心淨或名憙樂或名忍可如是等正解行相者謂以種種行相正解所緣境如了別行相名識取像行相名想領納行相名受如是等察行相者謂十六行卽無常等四等四滅等四道等四或世俗六行麤行障行苦行靜行妙行離行作隨作行相者謂作所作已復更隨作由此行善守護已復更起餘隨守護自類等無閒者謂貪無閒還復生貪瞋等亦爾各別種類等無閒生故異類等無閒者謂貪無閒瞋等生界無閒色界生色界無閒無色界生如是等三摩鉢底等無閒者謂三摩鉢底無閒相生如欲界善無閒入初靜慮初靜慮無閒還生欲界如是於第二靜慮等及無色定如理應知退等無閒者謂從靜慮等退時無閒所生起生等無閒者謂受生時無閒所生如從欲界無閒生色界等鄰次等無閒者謂諸心心法無閒次第生於其中閒心無斷絕故隔越等無閒者起滅定等時前生心心法望後生心心法中閒隔越故起等無閒者謂若此法無閒彼法次第生滅等無閒者謂此法無閒彼法次第滅如心心法無閒滅已或入滅盡定或入無想定或入無餘涅槃界取增上者謂眼等根望能取境界有增上力故生增上者謂男女根望生胎孕有增上力住增上者謂命根望身等住有增上力故受用雜染增上者謂五受根望所受用有增上力故又爲貪等所隨眠故謂樂貪所隨眠苦瞋所隨眠不苦不樂癡所隨眠淸淨增上者信等五根未知欲知等三根望世出世淸淨法有增上力故田增上者共業望器世閒生有增上力故執受增上者謂四大種望所造色界所依者謂欲界等所攝身趣所依者謂五趣所攝身洲渚所依者謂贍部洲等村田所依者謂若依此村田而卽用此爲所依補特伽羅所依者謂若依此補特伽羅而有卽用此爲所依無病所依者謂若依無病而有卽用此爲所依尸羅所依者謂若依尸羅而有卽用此爲所依莊嚴所依謂若依彼彼沙門莊嚴諸功德生卽用彼爲所依衆具依者謂四依衣服等善友依者謂若依此善等生法依者謂契經等十二分教作意依者謂七種作意卽了相作意等摩鉢底依者謂七依定如經言我說依初靜慮能盡諸漏乃至依無所有處亦爾界攝者謂諸界種子由此能攝種所生法相攝者謂諸法自相還能自攝種類攝者謂約色種類有十色處色薀所攝如是等分位攝者順樂受等分位所攝助伴攝者謂色五薀所攝彼眷屬故如是等時攝者謂過去等攝過去等方攝者謂於此方所有薀等卽此方攝具分攝者無色無漏諸色攝一切色一分攝者謂眼根攝色薀如是等更互攝謂薀處更互相攝勝義攝者諸法無常不淨無我眞如所攝他性相應者謂與他性相應非己性不相違相應者謂雖與他性相應然不相違非相違如貪與瞋樂與苦如是遍行相應者謂觸作意一切心無明我慢我愛薩迦耶見四煩惱於染污意不遍行相應者謂遍行所餘貪等信等所治相應者諸煩惱更互相應能治相應者謂對治道所攝善法更互相應曾習相應謂除出世閒及出世後所得法相應法未曾習相應者謂前所除諸相應法下劣相應者謂聲聞獨覺乘所攝諸相應法廣大相應者謂諸佛菩薩所有相應法成就雜染識等乃至七種淸淨已說其相不復重釋八何詞者謂何誰信何所信用何信爲何信由何信何之信於何信幾何八若詞者謂若能信若所信若用若爲信若由信若彼信若於信爾所信如是等無量法門皆有八種不畢竟出離者謂由世閒道畢竟出離者謂由出世閒道前四易解故重釋相甚深者謂三自性雜染甚深謂眞如云何染而不染淸淨甚深謂卽眞如云何淨而不淨緣起甚深者謂無有法於所生起有實作用然彼諸法種種生起如是等又實無似我顯現業甚深者謂有業有果而作者不可得智甚深者謂無分別智云何此智無有分別而能分明觀眞如性生甚深者謂諸菩薩不由業煩惱力而示現受生菩提甚深者謂於無漏界中諸佛菩提不可建立一性無量相續所證故不可建立種性所依無差別故諸佛甚深者於一大集會中有無量無邊諸佛世尊種種身種種意樂然不謂有自他差別又化身佛不住佛相而能造作種種佛事教甚深者謂於大乘教中有種種秘密意樂差別三解脫門及一切法欲爲根本等已說其相不復重釋任持方便者謂於資糧所有方便伽方便者謂奢摩他毘鉢舍那相方便者謂於止捨相中所有方便擇方便者謂於順決擇分中所有方便隔越方便者謂卽任持方便鄰次方便者謂卽決擇方便鄰次隔越方便者謂卽瑜伽及相二種方便於順決擇分中名鄰次於任持方便中隔越去聖道遠故通達圓證餘處已說故不重釋智究竟者謂盡無生斷究竟者謂一切煩惱無餘永斷畢竟究竟者謂由出世閒道不畢竟究竟者謂由世閒道下劣究竟者聲聞獨覺廣大究竟者謂諸佛菩薩菩薩究竟者謂於最後位諸佛究竟謂無障智生時猶如百千俱胝等日一時出現二十種引發前已廣說攝決擇者謂由十處攝諸決擇何等十處謂成所作決擇趣入決擇勝解決擇道理決擇論決擇通達決擇淨決擇引發決擇句差別決擇不由功用暫作意時一切義成決擇成所作決擇者謂能決擇成辦世閒種種養命方便等趣入決擇者謂能觀察我於三乘當入何乘云何令他亦得趣入勝解決擇者謂由聞慧如所聞起勝信解道理決擇者謂由思慧稱量前後所說意趣論決擇者謂如所聞思建立問論道理爲令展轉受用法樂通達決擇者謂見道能通達諦理故淸淨決擇者謂修道以能無餘淨諸煩惱故引發決擇者謂勝進道以能引發勝功德故句差別決擇謂以二四句等差別引發門說無邊法義差別故不由功用暫作意時一切義成決擇者謂如來智離先功用於一切義暫作意時無著無㝵智見轉故論軌決擇者略有七種一論體二論三論依四論莊嚴五論負六論出七論多所作法於此七門方便善名論軌決擇論體者復有六種一言論二尚論諍論四毀論五順論六教論言論者謂一切世閒語言尚論者謂諸世閒所隨聞論世智所尚故諍論者謂互相違反所立言論毀論者謂更相憤怒發麤惡言順論者謂隨順淸淨智見所有決擇言論教論者謂教導有情心未定者令其心定心已定者令得解脫所有言論論處者或於王家或於執理家或對淳質堪爲量者對善伴或對善解法義沙門婆羅門等而起論端於王家者謂若於是處王自降臨執理家者謂若是處處斷王事淳質堪爲量者謂商人等善伴謂於伴侶中立論者敵論者不越其言善解法義沙門婆羅門等者於彼彼論中善通達文義論依者依此立論略有二種一所成立二能成立所成立有二一自性二差別成立有八種一立宗二立因三立喩四合五結六現量七比量八聖教量所成立自性者謂我自性法自性若無所成立差別者謂我差別法差別若一切遍若非一切遍若常若無常若有色無色如是等無量差別立宗者謂以所應成自所許義宣示於他令彼解了所以者何若不言以所應成者自宗已成而說示他應名立宗若不言自所許義者說示他宗所應成義應名立宗若不言他者唱此言應名立宗若不言宣示者身表示此義應名立宗若不言令他解了者聽者未解此義應名立宗如所安立無一切過量故建立我法自性若有若無我法差別遍不遍等具足前相是名立宗立因者謂卽於所成未顯了義正說現量可得不可得等信解之相信解相者是信解因義所以者何由正宣說現量可得不可得等相故於所應成未顯了義信解得生是故正說彼名立因現量可得不可得者謂依自體及相貌說立喩者謂以所見邊與未所見邊和會正說所見邊者謂已顯了分未所見邊者謂未顯了分以顯了分顯未了分令義平等所有正說名立喩合者爲引所餘此種類義令就此法正說理趣謂由三分成立如前所成義已復爲成立餘此種類所成義故遂引彼義令就此法正說道理名合結者謂到究竟趣所有正說由此道極善成就是故此事決定無異會究竟是名結已說立宗等相今當就事略顯如無我論者卽於此事我論者先說諸法無我此言是立宗次說若於薀施設四過可得故此言是立因所以者何若於諸薀施設實我者此所計我爲卽薀相爲於薀中爲於餘處爲不屬薀而施設耶若卽薀相而施設者薀不自在從衆緣生是生滅法若卽彼相我不成就是名初過若於薀中而施設者所依諸薀旣是無常能依之我亦應無常是第二過若離薀於餘處施設者我無所我亦無用是第三過若不屬薀而施設者我應獨存自性解脫更求解唐捐其功是第四過次說如於現施設過去此言是立喩所以者何若同現在相施設實有過去者此所計過去爲卽現在相爲於現在中於餘處爲不待現在而施設耶若卽現在相而施設者已生未滅是現在過去法體亦應已生未滅爲相初過若於現在中施設者於未滅中施設滅體不相應故不應道理是第二過若離現在於餘處施設者除現外餘實有爲事少分亦不可得何於彼施設是第三過若不待現在而施設者亦應施設無爲爲過去世是第四過然過去世相滅壞故無相義成若同現在施設卽成四過是故過去相不成就諸法無我亦爾若於薀施設卽四過可得故無我義成說如是遮破我顚倒已卽由此道理常等亦無此言是合後說由此道理是故五薀皆是無常乃至無我此言是結現量者謂自正明了無迷亂義自正義言顯自正取義如由眼正取色等此言爲簡世閒現所得甁等事共許爲現量所得性由彼是假故非現量所得明了言爲簡由有障等不可得因故不現前境無迷亂言爲簡旋火爲輪陽焰等比量者謂現餘信解此云何謂除現量所得餘不現事決定俱轉先見成今現見彼一分時於所餘分正信解生謂彼於此決定當有由俱轉故如遠見煙知彼有火是名現量爲先比量聖教量者謂不違二量之教此云何謂所有教現量比量皆不相違決無移轉定可信受故名聖教量論莊嚴者謂依論正理而發論端深爲善美名論莊嚴此復六種一善自他宗二言音圓滿三無畏四辯才敦肅六應供善自他宗者謂於自宗他宗若文若義前後無閒淳熟明解言音圓滿者謂善解聲論方起論端離當所說言音過失所發言音無雜亂等無畏者謂處大衆雖爲無量僻英俊結謀圍繞所發言詞坦然無辯才者謂言詞無滯敦肅者謂言無卒暴觀敵論者言詞究竟方乃發應供者謂立性賢和發言溫善便隨順敵論者心論負者謂捨言言屈言過由此三種諸立論者墮在負處受他屈伏捨言謂自發言稱己論失稱他論德我不善汝爲善等言屈者謂假託餘方便而退或說外事而捨本宗現忿怒憍慢覆藏等如經廣說假託餘事方便退者謂託餘事亂所說義如經說長老闡鐸迦與諸外道共論或毀已立宗或立宗已毀言過者有九種一雜亂二麤獷三不辯了無限量五非義相應六不應時七不決定八不顯了九不相續雜亂者捨所論事廣設異言麤獷者謂憤發卒暴言詞躁急不辯了者謂所說法衆及敵論所不領悟無限量者言詞重疊所說義理或增或減非義相應者略有五種一無義二違義損理四與所成等五招集過難義不可得故義不相應故不決定故能成道理復須成故一切言論非理非諦所隨逐故不應時者謂所應說前後不次不決定者謂立已復毀毀而復速疾轉換難可了知不顯了者越闡陁論相不領而答或典或俗詞雜亂不相續者謂於中閒言詞斷絕論出離者謂觀察德失令論出離復不作恐墮負處故不興論設復興能善究竟又若知敵論非法器衆無德自無善巧不應興論若知敵論是法器時衆有德自有善巧方可興論敵論非法器者謂彼不能出不善處安置善處時衆無德者謂不淳樂僻執有偏黨等自無善巧者於論體乃至論莊嚴中不善通達此相違名敵論者是法器等論多所作法者謂略有三種將興論定所須法何等爲三一善達自他由此堪能遍興談論遍於言事而興論故二無畏由此堪能處一切衆而興論端三辯才由此堪能於諸問皆善辯答復次若欲自求利益安樂於諸論軌應善通達不應與他而興諍論如薄伽梵於大乘阿毘達磨經中說如是若諸菩薩欲勤精進修諸善品行貞實法隨法行欲善攝益一切有欲得速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當正觀察十二處法不應與他共興諍論何等十二一者宣說證無上義微妙法時其信解者甚爲難得者作受教心而請問者甚爲難得者時衆賢善觀察德失甚爲難得者凡所興論能離六失甚爲難得等爲六謂執著邪宗失矯亂語失作語言不應時失言退屈失麤惡語心恚怒失五者凡興論時不懷獷甚爲難得六者凡興論時善護他甚爲難得七者凡興論時善護定甚爲難得八者凡興論時欲令己他得勝心甚爲難得九者己劣他心不煩惱甚爲難得十者心已煩得安隱住甚爲難得十一者旣不安住常修善法甚爲難得十二者於諸善法旣不恒修心未得定能速得心已得定能速解脫甚爲難得此經中已說欲勤精進修諸善品故復言欲行貞實法隨法行爲顯意樂淸淨故所以者何不爲利養恭敬等事修聞思等諸善品故欲善攝益有情者爲別聲聞等行由諸菩薩以利他行爲勝故如是菩薩自利利他行具足已速證無上正等菩提又此經中諸句義意謂興論時大乘法性無上甚深若無諍心解尚爲難況爲諍競凡興諍論雖起請問無心求解但求過失又傍證者心不賢直不善宗門樂著僻執凡所言論多具六失所以者何凡興論時或有私心執著邪宗或矯方便求他誤失或不待言便興亂語或敵論者言稱正理相誹撥或作麤言惱敵論者及時衆或復於彼自懷恚怒多具如是六種過失又興論時身心寂靜甚爲難不寂靜故二事難成謂善護他心善護自心由此令他心得淨信於解脫處正勤方便令自心定又興論時多起此心云何令我得勝他墮負處若不遂心卽懷熱惱由有此故不安樂住由此不能無閒修善是故於彼增上證法有未得退秘密決擇者說餘義名句文身隱密轉變更顯餘如經言逆害於父母王及二多聞誅國及隨行是人說淸淨今此頌中詮表世閒共可極重罪惡文字轉變密顯餘淸淨義何等世閒共可極重罪惡謂逆害尊人及大衆尊人有二一別二共共又二種一護世閒二應供養別亦二種謂父及母護世閒者謂王應供養者謂多聞梵世閒共許最淸淨故若摠殺害逆尊人若誅國人及隨行畜生名害大衆顯此義者名詮表世閒共可極重罪惡文字云何轉此文字密顯淨謂逆害父母等言轉變密顯永斷愛等餘義故所以者何若愛若業有取識戒見二取眼等六處及所行如其次第名母父等法相似故爲發因業爲生因由此能殖習氣種類世閒父由此二因令有取識轉不絕於流轉時雖求解脫然由二種非方便法障解脫得謂妄計度淸淨最勝戒見二取猶如世閒多聞梵恒妄計著最勝淸淨此有取識所所緣六處境界猶如世閒國及隨若能永斷如是等法當知是人最爲淸淨又如經說不信不知恩斷密無容處恒食人所吐是最上丈夫今此頌中宣說世閒極下劣義所有文字轉變密顯餘最上義世閒下劣凡有四種謂意業下劣身業下劣業下劣受用下劣意業下劣復有二一者不信善生相違不信有後世等不行施等故二不知恩順生不善不顧往恩違越世理起害母等所有惡行故身業下劣者謂行竊盜攻牆密處最可輕賤活命業故語業下劣謂妄語等最可輕賤於善衆中不容故受用下劣者謂鬼犬鳥等好食所吐故顯此義者名說世閒極下劣義文字云何轉此文字顯無上義謂不信等言轉變密顯餘勝義故信者謂解脫智見自現證故不知恩謂涅槃智有爲名恩無爲非恩非恩故名不知恩斷密者謂永斷後有續因煩惱故無容處者謂於當來諸趣苦處不復生故食吐者謂於現法中雖假資具力暫持身而於命財不生欣樂故若能如是是最上丈夫又如經說覺不堅爲堅 善住於顚倒 極煩惱所惱得最上菩提此如前說然其體性謂諸菩薩依三摩地由見修二道證大菩提又餘經說菩薩摩訶薩成就五法波羅蜜多速得圓滿何等爲五一者增益慳悋法性二者於施有倦三者憎惡乞求四者無暫少施五者遠離於施增益慳悋法性者謂由永斷慳悋隨眠幷彼習氣證得彼法性眞如轉依故於施有倦者謂爲修施誓受長時難行苦行故憎惡乞求者謂欲其自取厭彼乞求故無暫少施者一切時一切物施故遠離於施者常遠離期報施等故又餘經說菩薩摩訶薩成就五法梵行者成就第一淸淨梵行何等爲一者常求以欲離欲二者捨斷欲三者欲貪已生卽便堅執四者怖治欲法五者二二數會成就第一淸淨梵行者謂出世閒道常求以欲離欲者謂卽以此如實遍智永斷彼故此如實遍智者謂能通達此眞如智捨斷欲法者謂恒觀察捨斷非梵行方便欲貪已生卽便堅執者謂於內欲貪已生卽便堅執擯出於外怖治欲法者謂說欲過患怖諸有情立對治道拔濟一切二二數會者謂於染淨因果差別四眞諦中以世出世二道及奢摩他毘鉢舍那二道數數證會故何故此論名爲大乘阿毘達磨集有三義謂等所集故遍所集故正所集故由釋詞理以顯得名故爲此問所集者謂證眞現觀諸大菩薩共結集故遍所集者謂遍攝一切大乘阿毘達磨經中諸思擇處故正所集謂由無倒結集方便乃至證得佛菩提故
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第十六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