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350_a_01L중론(中論) 제1권

석승예서(釋僧睿序)
016_0350_a_01L中論卷第一
釋僧睿序

『중론』에는 오백 개의 게송(偈頌)이 있으니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은 것이다. 중(中)으로 이름을 삼은 것은 진실[實]을 비추고, 논(論)으로 부른 것은 말[言]을 다했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름[名]이 아니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중(中)에 붙여서 펼치고, 말은 해석이 아니라면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論)을 빌려서 밝힌다. 진실이 펼쳐지고 말이 분명해지면 보살의 행(行)과 도량(道場)의 비춤[照]에 대해 환하게 매듭이 풀린 듯이 알게 될 것이다.
016_0350_a_02L中論有五百偈龍樹菩薩之所造也以中爲名者照其實也以論爲稱者盡其言也實非名不悟故寄中以宣言非釋不盡故假論以明之其實旣宣其言旣明於菩薩之行道場之朗然懸解矣
무릇 범부의 집착하는 미혹[滯惑]은 전도된 견해[倒見]에서 생기니 삼계(三界)는 그것 때문에 윤닉(淪溺)하고, 편벽된 깨달음[偏悟]은 생사를 싫어하는 지혜[厭智]에서 일어나니 2승(乘)의 굳건한 절개[耿介]는 그것 때문에 어그러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큰 깨달음[大覺]은 밝게 비추는 데에 있고 작은 지혜[小智]는 좁은 마음에 얽혀있는 줄 알 수 있다.
016_0350_a_08L夫滯惑生於倒見界以之而淪溺偏悟起於厭智耿介以之而致乖故知大覺在乎曠照智纏乎隘心
비춤이 밝지 않으면 유무(有無)를 평등하게 하여 도속(道俗)1)을 하나로 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앎이 다하지 않으면 중도(中途)를 건너 2제(二際)2)를 없앨 수 없다. 도속(道俗)이 평등해지지 않고 2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보살의 걱정이다. 이 때문에 용수대사가 중도(中道)로써 분석하여 미혹에 빠져 있는[惑趣] 무리로 하여금 현묘한 뜻[玄指]을 바라보아 일변(一變)하게 하고, 즉화(卽化)3)로써 묶어 장주(莊周)의 무리로 하여금 대승의 이치에 대해 문답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016_0350_a_11L照之不曠則不足以夷有無一道俗知之不盡則未可以涉中途泯二際道俗之不夷二際之不菩薩之憂也是以龍樹大士析之以中道使惑趣之徒望玄指而一變括之以卽化令玄悟之賓喪諮詢於朝徹
넓고도 넓구나! 참으로 이로(夷路)를 충계(沖階)4)에서 평탄하게 하며, 현문(玄門)을 우주 내에서 열며, 혜풍(慧風)을 마른 나뭇가지[陳枚]에 부채질하며, 감로(甘露)를 마르고 시든 것[枯悴]에 흐르게 한다고 할 만하다.대개 백 개의 들보로 지은 집[百梁]이 완성되면 띠풀로 지은 집[茅茨]은 좁고 누추하여 더럽게 여기듯이 이 논이 크고 넓음을 보면 치우친 깨달음을 가진 이승의 사람[偏悟]들이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남을 알게 될 것이다.
016_0350_a_17L蕩蕩焉眞可謂坦夷路於沖階敞玄門於宇內扇慧風於陳枚流甘露於枯悴者矣夫百梁之搆興則鄙茅茨之仄陋睹斯論之宏曠則知偏悟之鄙倍
016_0350_b_01L다행이구나! 이 중국[赤縣]의 땅에 홀연 영취산(靈鷲山)을 옮겨서 진산(鎭山)을 만드니 마음이 음흉한[險陂]한 변방의 사람들이 유광(流光)의 남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제부터 도(道)를 담론하는 어진 사람들은 비로소 함께 진실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천축(天竺)의 여러 나라에 감히 학자의 무리에 들려면 이 논을 완미하지 않음이 없어 긴요한 것[喉衿]으로 여기고, 붓을 적셔서 해석을 편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016_0350_a_21L幸哉此區之赤縣忽得移靈鷲以作鎭險陂之邊情乃蒙流光之餘惠而今而後談道之賢始可與論實矣云天竺諸國敢預學者之流不翫味斯論以爲喉衿其染翰申釋甚亦不少
지금 번역되어 나온 것은 천축 범지(梵志)로 빈가라(賓伽羅)5)라고 하고 진나라 말로는 청목(靑目)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석한 것이다. 그 사람은 깊은 법을 믿고 이해했으나 말이 바르지 않고 맞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이치에 어긋나고 빠지고 번거롭게 중복된 것은 구마라집 법사(法師)가 모두 마름질하고 덧붙여 경전과 상통하게 하자 이치는 [남김없이] 다하게 되었지만 문장은 간혹 앞뒤로 다 좋게 고지치는 못했다.
016_0350_b_04L今所出者是天竺梵志名賓伽羅秦言靑目之所釋也其人雖信解深法而辭不雅中其中乖闕煩重法師皆裁而禆之於經通之理文或左右未盡善也
『백론(百論)』은 밖을 다스려 삿됨을 막고 이 『중론』은 안을 깨끗이 하여 막힌 것을 흐르게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해석은 깊고 넓으며, 『십이문론(十二門論)』의 관법은 정밀하고 깊은 이치에 도달했다. 이 네 가지 논을 살펴보면 참으로 해와 달이 품속에 든 것처럼 환하게 비추어 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나는 그것을 완미하고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비루하고 졸렬함을 잊고 내가 깨달은 생각을 서문에 붙인다. 아울러 품목(品目)의 뜻도 앞에다 쓴다. 어찌 잘 해석하기를 바라겠는가? 대체로 서로 같음을 기뻐하는 마음뿐이다.
016_0350_b_08L百論治外閑邪斯文祛內以流滯大智釋論之淵博十二門觀之精詣尋斯四者若日月入懷無不朗然鑑徹矣予翫之味之不能釋手遂復忘其鄙拙悟懷於一序幷目品義題之於首期能釋耶蓋是欣自同之懷耳

중론(中論) 제1권

용수보살(龍樹菩薩) 지음
범지(梵志) 청목(靑目)주석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1.인과 연을 관찰하는 장[觀因緣品]16偈
016_0350_b_14L中論觀因緣品第一 [十六偈]
龍樹菩薩造
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016_0350_b_17L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016_0350_b_19L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서를 짓는가?
016_0350_b_20L問曰何故造此論
016_0350_c_01L【답】 어떤 이는 모든 사물들이 대자재천(大自在天)6)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위뉴천(韋紐天)7)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화합(和合)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시간[時]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세성(世性)8)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변화(變化)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연(自然)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미진(微塵)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無因] 한다거나, 그릇된 원인[邪因]을 둔다거나, 단멸하거나 상주한다고 하는 따위의 그릇된 봄(邪見)에 떨어져서 갖가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말하게 되어 바른 법(法)을 알지 못한다.
016_0350_b_21L答曰有人言萬物從大自在天生有言從韋紐天生言從和合生有言從時生有言從世性生有言從變生有言從自然生言從微塵生有如是等謬故墯於無因邪因常等邪見種種說我我所不知正法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그릇된 봄을 끊고 부처님의 법[佛法]을 알게 해 주시고자 먼저 성문의 법에서는 12연기(因緣)9)를 말씀하셨고, 또 이미 마음을 닦아서 깊은 법을 감당할 수 있는 큰 마음이 있는 이를 위해서 대승의 법으로 인과 연들의 상(相)을 말씀하셨으니, 즉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아, 완전히 공해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도량에 앉아 있을 때 12연기를 관찰하는 것이 허공과 같이 다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고 말한 바와 같다.
016_0350_c_04L佛欲斷如是等諸邪見令知佛法故先於聲聞法中說十二因緣爲已習行有大心堪受深法者以大乘法說因緣相所謂一切法不生不不一不異等畢竟空無所有如『般若波羅蜜』中說佛告須菩提菩薩坐道場時觀十二因緣如虛空不可盡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후 5백 세가 지난 상법(像法)에는 사람의 근기가 둔해져서 모든 법들에 깊이 집착해서, 12연기(因緣)ㆍ5온(蘊)10)ㆍ12처(處)11)ㆍ18계(界)12) 등의 결정적인 상(相)을 구하기만 하여 부처님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언설[文字]에 집착할 뿐이었다. 대승의 법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공하다[畢竟空]”고 하는 말을 듣고도 무슨 이유로 공하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공한데 어찌 죄와 복의 과보 따위가 있다고 분별하겠는가? 그러니 세제(世諦)도 제일의제(第一義諦)도 없다’는 의심을 내어 이러한 없음[空]의 상(相)을 취해서 탐착을 일으켜 완전히 공한 것에 대해서 갖가지 과실을 범한다. 용수 보살께서는 이 점들을 감안해서 이 『중론』을 지으신 것이다.
016_0350_c_10L佛滅度後後五百歲像法中人根轉深著諸法求十二因緣五陰十二十八界等決定相不知佛意但著文字聞大乘法中說畢竟空不知何因緣故空卽生疑見若都畢竟空何分別有罪福報應等如是則無世第一義諦取是空相而起貪著畢竟空中生種種過龍樹菩薩爲是等故造此『中論』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016_0350_c_19L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016_0350_c_21L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이 두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으니, 간략하게 제일의(第一義)를 말한 것이다.
016_0350_c_22L以此二偈讚佛則已略說第一義
【문】 모든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왜 단지 이 여덟 가지 일만을 들어 타파하는가?
016_0350_c_23L諸法無量何故但以此八事破
016_0351_a_01L【답】 법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긴 하나 간략하게 여덟 가지 일을 들어 모든 법을 통틀어서 타파한 것이다.
‘발생하지 않는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논사들은 갖가지로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니,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타자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유(有)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無)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렇듯이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지만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이 확정되어 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이다.
‘소멸하지 않는다’란,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여타의 여섯 가지 일도 없다.
016_0351_a_01L法雖無量略說八事則爲摠破一切法不生者諸論師種種說生相謂因果一或謂因果異或謂因中先有果或謂因中先無果或謂自體生或謂從他生或謂共生或謂有生或謂無生如是等說生相皆不然此事後當廣說生相決定不可得故不生滅者若無生何得有滅以無生無滅餘六事亦無
【문】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모든 법들을 이미 다 타파했는데, 왜 다시 여섯 가지 일을 말하는가?
016_0351_a_10L問曰不生不滅已摠破一切法何故復說六事
【답】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이치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진 않지만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다는 것은 믿는다. 만약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깊이 궁구하면, 이것은 곧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왜 그런가? 만약 법이 실제로 있다면 없는 것이 아닌데,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다면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고, 먼저 자성(自性)이 있었다면 이것은 상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들어간다.
어떤 이가 네 가지로 모든 법들을 논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네 가지 문(門)으로 모든 법들을 성립시킨다고 하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같다면 연(緣)이 없을 것이고 다르다면 상속(相續)이 없을 것이니, 후에 여러 가지로 타파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351_a_11L答曰爲成不生不滅義故有人不受不生不滅而信不常不斷若深求不常不斷是不生不滅何以故法若實有則不應無先有今無是卽爲斷若先有性是則爲常是故說不常不斷卽入不生不滅義有人雖聞四種破諸法以四門成諸法是亦不然若一則無若異則無相續後當種種破是故復說不一不異
016_0351_b_01L어떤 이는 여섯 가지로 모든 법을 타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온다’와 ‘간다’로 모든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온다란 모든 법이 대자재천(大自在天)ㆍ세성(世性)ㆍ극미(極微) 따위에서 오는 것을 말하며, 간다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또 모든 사물들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본다. 왜 그러한가? 겁초의 곡식이 없으면 지금의 곡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겁초의 곡식이 없는데도 지금의 곡식이 있다면, 발생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51_a_20L有人雖聞六種破諸猶以來出成諸法來者言諸法從自在天世性微塵等來出者還去至本處復次萬物無生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劫初穀不生何以故離劫初穀今穀不可得若離劫初穀有今穀者則應有生而實不爾是故不生
【문】 만약 발생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소멸할 것이다.
問曰若不生則應滅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서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소멸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만약 소멸한다면 지금 곡식이 있지 않을 것이나 실제로는 곡식이 있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다.
016_0351_b_04L答曰不滅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劫初穀不滅若滅今不應有穀而實有穀是故不滅
【문】 만약 소멸하지 않는다면 상주할 것이다.
問曰若不滅則應常
【답】 상주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상주하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싹이 틀 때 씨는 변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는다.
016_0351_b_07L答曰不常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常如穀芽時種則變壞是故不常
【문】 만약 상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단멸할 것이다.
問曰若不常則應斷
【답】 단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단멸하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에서 싹이 튼다. 그러므로 단멸하지 않는다. 만약 단멸한다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016_0351_b_10L答曰不斷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斷如從穀有芽是故不斷若斷應相續
【문】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같을 것이다.
問曰若爾者萬物是一
【답】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같지 않은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가 싹을 내지 싹이 곡식의 씨를 내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곡식의 씨가 싹을 내고 싹이 곡식의 씨를 낸다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같지 않다.
016_0351_b_13L答曰不一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一如穀不作芽芽不作穀穀作芽芽作穀者應是一而實不爾是故不一
【문】 만약 같지 않다면 마땅히 다를 것이다.
問曰若不一則應異
【답】 다르지 않다.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본다. 만약 다르다면 왜 곡식의 싹ㆍ곡식의 줄기ㆍ곡식의 잎을 구별할 때 나무의 싹ㆍ나무의 줄기ㆍ나무의 잎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016_0351_b_17L答曰不異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異若異者何故分別穀芽穀葉不說樹芽樹莖樹葉是故不
【문】 만약 다르지 않다면, 마땅히 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問曰若不異應有來
016_0351_c_01L【답】 오는 것은 없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오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 속의 싹은 어디에서 오는 일이 없다. 만약 온다면, 마치 새가 와서 나무에 깃들 듯이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오지 않는다.
016_0351_b_21L答曰無來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如穀子中芽無所從來若來者應從餘處來如鳥來拪樹而實不爾是故不來
【문】 만약 오지 않는다면, 마땅히 가는 것은 있을 것이다.
問曰若不來應有出
【답】 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가지 않는 것을 본다.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마치 뱀이 구멍에서 빠져나가듯이 싹이 씨에서 나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가지 않는다.
016_0351_c_02L答曰不出何以故世閒現見故世閒眼見萬物不出若有出應見芽從穀出蛇從穴出而實不爾是故不出
【문】 그대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의 이치를 풀이했는데, 나는 논을 지은 이의 말을 듣고 싶다.
016_0351_c_05L問曰汝雖釋不生不滅義我欲聞造論者所說

【답】
모든 법(法)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
타자로부터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그 둘로부터도, 또는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그러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13)
016_0351_c_07L答曰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란, 모든 사물들은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일이 없고 반드시 인(因)과 연(緣)에 의존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하나의 법에 두 가지 자체(自體)가 있게 되니, 하나는 발생하는 것[生]이요 다른 하나는 발생시키는 것[生者]이다. 만일 여타의 인연들이 없이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을 것이다. 또 발생에는 다시 발생이 있게 되어 발생이 무한할 것이다. 자기가 없기 때문에 타자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있기 때문에 타자가 있는 것이고,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자로부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한다면 두 과실이 있다. 자기로부터 발생하고 타자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원인이 없이 사물이 있다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옳지 않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없다. 원인이 없는데도 결과가 있다면, 보시(布施)를 하고 지계(持戒)를 하는 이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10악(惡)14)을 하고 5역(逆)15)을 하는 이들이 천계(天界)에 태어날 것이다. 왜냐 하면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016_0351_c_09L不自生者萬物無有從自體生必待衆因復次若從自體生則一法有二謂生謂生者若離餘因從自體生者則無因無緣又生更有生則無窮自無故他亦無何以故有自故有他若不從自生亦不從他生生則有二過自生他生故若無因而有萬物者是則爲常是事不然無因則無果若無因有果者布施持戒等應墮地獄十惡五逆應當生天以無因

모든 법의 자성은
연(緣) 속에 있지 않네.
자성이 있지 않으니
타성도 있지 않네. (2)
016_0351_c_20L復次
如諸法自性
不在於緣中
以無自性故
他性亦復無
016_0352_a_01L
또 모든 법의 자성은 연 속에 있지 않다. 단지 연이 화합한 것이기에 이름[名字]을 얻을 따름이다. 자성이란 자체이다. 연 속에는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니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으니 타성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으므로 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은 타성에 있어서는 또한 자성이다. 만일 자성이 타파된다면 타성도 타파된다. 그러므로 타성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자성과 타성이 타파된다면 양자가 타파되는 것이다. 원인이 없다면 큰 과실이 있다. 원인이 있다 해도 타파되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이랴? 4구(句)16) 중 어느 발생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51_c_22L諸法自性不在衆緣中但衆緣和合得名字自性卽是自體衆緣中無自自性無故不自生自性無故他性亦無何以故因自性有他性他性於他亦是自性若破自性卽破他性故不應從他性生若破自性他性破共義無因則有大過有因尚可破何況無因於四句中生不可得是故不生
【문】 아비달마학파의 사람은 “법들이 4연(緣)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4연이란 무엇인가?
016_0352_a_08L問曰阿毘曇人言諸法從四緣云何言不生何謂四緣

인연ㆍ등무간연[次等緣]ㆍ
소연연[緣緣]ㆍ증상연,
이 4연(緣)에서 법들이 발생하네.
다시 제5의 연은 없네.(3)
016_0352_a_09L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모든 연들은 다 사연에 포함된다. 이 사연에 의지해서 모든 사물들이 발생한다. 인연(因緣)이란 모든 유위법을 말한다. 등무간연이란 과거세와 현재세의 아라한 최후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세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이다. 소연연과 증상연은 모든 법이다.
016_0352_a_11L一切所有緣皆攝在四緣以是四緣萬物得生因緣名一切有爲法次第除過去現在阿羅漢最後心心數餘過去現在心心數法緣緣增上一切法

【답】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하는가,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가?
이 연이 결과를 갖는 것인가,
이 연이 결과를 갖지 않는 것인가? (4)
016_0352_a_16L答曰
果爲從緣生
爲從非緣生
是緣爲有果
是緣爲無果

만일 결과가 있다면 이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는가,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가? 만일 연이 있다면 이 연은 결과를 갖는 것인가, 결과를 갖지 않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52_a_18L若謂有果是果爲從緣生爲從非緣若謂有緣是緣爲有果爲無果俱不然何以故

이 법에 의존해서 결과가 발생하기에
이 법을 연(緣)이라 하네.
만일 이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찌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5)
016_0352_a_21L因是法生果
是法名爲緣
若是果未生
何不名非緣
016_0352_b_01L
모든 연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를 연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연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 한해서 이를 연이라 하는 것이다. 연이 성립하는 것은 결과에 연유한다. 결과가 후이고 연이 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어찌 연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물단지의 예를 보자. 물과 흙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발생한다. 물단지를 보고 나서야 이에 의해서 물과 흙 등이 물단지의 연들이라는 것을 안다. 물단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찌 물과 흙 등을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하물며 연 아닌 것에서랴?
016_0352_a_23L諸緣無決定何以故若果未生是時不名爲緣但眼見從緣生果故名之爲緣緣成由於果以果後緣先故未有果何得名爲緣如甁以水土和合故有甁生見甁故知水土等是甁若甁未生時何以不名水土等爲非緣是故果不從緣生緣尚不生況非緣

결과가 미리 연(緣) 속에 있다는 것도
있지 않다는 것도 모두 있을 수 없네.
미리 없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다면 어디에 연을 쓰겠는가? (6)
016_0352_b_08L復次
果先於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誰緣
先有何用緣

또 연(緣) 속에 결과가 미리 있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미리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다면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또한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물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352_b_10L緣中先非有果非無果若先有果名爲緣果先有故若先無果亦不名爲緣不生餘物故
【문】 이제까지 모든 연들을 한데 묶어서 타파했다. 이제 연들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016_0352_b_13L問曰已摠破一切因緣今欲聞一一破諸緣

【답】
결과는 있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7)
016_0352_b_14L答曰
若果非有生
亦復非無生
亦非有無生
何得言有緣

만일 인연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있으면서 없는 것 이 세 종류일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일 ‘연 속에 결과가 미리 있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 연이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란, 있으면서 없다는 것은 반은 있고 반은 없는 것을 말한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다. 또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모순되고 없는 것은 있는 것과 모순되는데, 어떻게 한 법에 두 상(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세 종류로 결과가 발생하는 모습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016_0352_b_16L若緣能生果應有三種若有若無有無如先偈中說緣中若先有果應言生以先有故若先無果不應言以先無故亦應與非緣同故有無亦不生者有無名爲半有半無二俱有過又有與無相違無與有相違得一法有二相如是三種求果生相不可得故云何言有因緣
016_0352_c_01L등무간연(等無間緣)을 타파한다.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라면
소멸하는 일이 있을 수 없네.
소멸한 법이 어떻게 연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등무간연은 있지 않네.
016_0352_c_01L次第緣者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심법과 심소법은 삼세(三世)에 틈이 없이 발생한다. 현재세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의 소멸함은 미래세의 심법과 심소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 만일 미래세의 법이 이미 있어서 발생한다면 등무간연을 어디에 쓰겠는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은 머물거나 또는 머물지 않거나이다.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등무간연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머문다면 유위법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항상 소멸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소멸했다면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만일 소멸하는 법이 여전히 있다면 이 법은 상주하는 것이다. 만일 상주하는 것이라면 죄와 복 등이 없다. 만일 소멸하고 있을 때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고 한다면, 소멸하고 있는 법이란, 반은 이미 소멸한 법이고 반은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이어서 다시 제3의 법이 없는 것을 소멸하고 있는 법이라 한다.
016_0352_c_03L諸心心數法於三世中次第生現在心數法滅與未來心作次第緣未來法未生與誰作次第緣若未來法已卽是生何用次第緣現在心心數法無有住時若不住何能爲次第緣若有住則非有爲法何以故一切有爲法常有滅相故若滅已則不能與作次第緣若言滅法猶有則是常則無罪福等若謂滅時能與作次第緣滅時半滅半未滅更無第三法名爲滅時
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有爲法)들은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한 찰나도 머물 때가 없는데 어떻게 현재세의 법에 소멸하려는 것[欲滅]과 소멸하지 않으려 하는 것[未欲滅]이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한 찰나에 이 소멸하려는 법과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대 자신의 법을 깨뜨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아비달마학파는 “소멸한 법[滅法]이 있고 소멸하지 않은 법[不滅法]이 있으며, 소멸하려는 법이 있고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다. 소멸하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이다.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을 제외한 그 밖의 현재세의 법ㆍ과거세의 법ㆍ미래세의 법ㆍ무위법(無爲法)을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등무간연이 있지 않다.
016_0352_c_14L又佛說一切有爲法念念無一念時住云何言現在法有欲未欲滅汝謂一念中無是欲滅欲滅則破自法汝阿毘曇說有滅法有不滅法有欲滅法有不欲滅法滅法者現在法將欲滅未欲滅法者除現在將欲滅法餘現在法及過去未來無爲法是名不欲滅法是故無次第緣
소연연(所緣緣)을 타파한다.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진실하고 미묘한 법
연(緣)이 없는 이 법에
어떻게 소연연이 있겠는가? (9)
016_0352_c_22L緣緣者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016_0353_a_01L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승의 법들은,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무형(無形)ㆍ유형(有形)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 등의 모든 법상(法相)들은 법성(法性)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은 다 공하며 상(相)이 없고 연(緣)이 없다. 비유하면 뭇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다같이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다.”
진실한 법을 믿어야 하고, 방편의 말을 진실한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소연연이 있지 않다.
016_0353_a_01L佛說大乘諸法若有色無色有形有漏無漏有爲無爲等諸法相入於法性一切皆空無相無緣譬如衆流入海同爲一味實法可信隨宜所說不可爲實是故無緣緣
증상연을 타파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네.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네. (10)
016_0353_a_06L增上緣者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경전에서 12연기(緣起)를 말할 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자체에 확정된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다. 있음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증상연이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범부를 따라서 있다 또는 없다고 분별해서 말씀하실 따름이다.
016_0353_a_08L經說十二因緣是事有故是事有則不然何以故諸法從衆緣生故無定性自無定性故無有有相有相無故何得言是事有故是事有是故無增上緣佛隨凡夫分別有無故說

연 일반 속에서도,각각의 연 속에서도
결과를 구할 수 없네.
연(緣)에 없는데
어떻게 연에서 나오겠는가? (11)
016_0353_a_13L復次
略廣因緣中
求果不可得
因緣中若無
云何從緣出

또 ‘연 일반 속에서…’란 구별하지 않은 연 일반 속에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연 속에서도…’란 하나하나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연 일반 속에도 각각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연에서 나온다 하겠는가?
016_0353_a_16L略者於和合因緣中無果廣者於一一緣中亦無果若略廣因緣中無果云何言果從因緣出

연(緣)에 결과가 없는데도
연에서 나온다 한다면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겠는가? (12)
016_0353_a_19L復次
若謂緣無果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또 연에서 결과를 구할 수 없는데 (연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는가? 예를 들어 진흙에 물단지가 없는데 (진흙에서 물단지가 나온다고 한다면), 왜 우유에선 나오지 않는가?
016_0353_a_21L若因緣中求果不可得何故不從非緣出如泥中無甁何故不從乳中出
016_0353_b_01L
만일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13)
016_0353_a_23L復次
若果從緣生
是緣無自性
從無自性生
何得從緣生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네.
결과가 있지 않으니
연과 연 아닌 것 또한 있지 않네. (14)
016_0353_b_03L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또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없는 것[無法]인데, 없는 것이 무엇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란, 연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연 아닌 것이라 말한다. 연 아닌 법은 실제로는 없다. 그러므로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 둘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과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없으니 연도 연 아닌 것도 없다.
016_0353_b_04L果從衆緣生是緣無自性若無自性則無法無法何能生是故果不從緣不從非緣生者破緣故說非緣無非緣法是故不從非緣生若不從二生是則無果無果故緣非緣亦無

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25偈
016_0353_b_09L中論觀去來品第二[二十五偈]

【문】 세간에서는 눈으로 이미 간 것[已去]ㆍ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ㆍ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의 3시(時)의 지음[作]이 있음을 본다. 지음이 있으니 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53_b_10L問曰世閒眼見三時有作已去未去去時以有作故當知有諸法

【답】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016_0353_b_12L答曰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去]이 없이 감[去業]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53_b_14L已去無有去已去故若離去有去業是事不然未去亦無去未有去法故去時名半去半未去不離已去未去

【문】
동작이 있는 곳에 감이 있네.
이것에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없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네. (2)
016_0353_b_18L問曰
動處則有去
此中有去時
非已去未去
是故去時去

거동[作業]이 있는 곳마다 감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거동이 있음을 눈으로 본다. 이미 간 것에는 거동이 이미 사라져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거동이 아직 없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53_b_20L隨有作業處是中應有去眼見去時中有作業已去中作業已滅未去中未有作業是故當知去時有去
016_0353_c_01L
【답】
지금 가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감이 있겠는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3)
016_0353_b_23L答曰
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016_0353_c_02L去時有去法是事不然何以故離去法去時不可得若離去法有去時者去時中有去如器中有果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016_0353_c_05L復次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353_c_07L若謂已去未去中無去去時實有去是人則有咎若離去法有去時不相因待何以故若說去時有去則爲二而實不爾是故不得言離去有去時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게 되네.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네. (5)
016_0353_c_12L復次
若去時有去
則有二種去
一謂爲去時
二謂去時去

또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감이 있다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두 가지 감이란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다.
016_0353_c_14L若謂去時有去是則有過所謂有二一者因去有去時二者去時中有
【문】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問曰若有二去有何咎

【답】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되네.
가는 이 없이
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6)
016_0353_c_17L答曰
若有二去法
則有二去者
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 왜 그러한가? 감이 있어야 가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두 감이 있고 그래서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감이 없다.
016_0353_c_19L若有二去法則有二去者何以故去法有去者故一人有二去二去者此則不然是故去時亦無去
【문】 가는 이 없이 감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제 3시(時)17)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
016_0353_c_22L問曰去者無去法可爾今三時中定有去
016_0354_a_01L
【답】
가는 이 없이
감이 있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감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가는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7)
016_0354_a_01L答曰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

가는 이가 없다면 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감이 없는데 어떻게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016_0354_a_03L若離於去者則去法不可得今云何於無去法中言三時定有去者

가는 이는 가지 않네.
가지 않은 이도 가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네. (8)
016_0354_a_05L復次
去者則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또 가는 이는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가는 이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는 이 또는 가지 않는 이이다. 이 둘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다.
016_0354_a_07L無有去者何以故若有去者則有二若去者若不去者若離是二無第三去者
【문】 만일 가는 이가 간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問曰若去者去有何咎

【답】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016_0354_a_10L答曰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만일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가 없는데 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가는 이가 따로 있어서 가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016_0354_a_12L若謂定有去者用去法是事不然以故離去法去者不可得故若離去定有去法則去者能用去法而實不爾

만일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을 것이니
하나는 가는 이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의 감이네. (10)
016_0354_a_16L復次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또 만일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과실이 있다. 가는 이는 하나인데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하나는 가는 이에게 성립하고 있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에 성립하고 있는 가는 이이다. 가는 이가 성립하고 난 후에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54_a_18L若言去者用去法則有二過於一去者中而有二去以去法成去者以去者成去法去者成已然後用去是事不然是故先三時中謂定有去者用去法是事不然
016_0354_b_01L
만일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네.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네. (11)
016_0354_a_23L復次
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저 가는 이가 있고 후에 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그러므로 3시(時)에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만일 확실하게 결정되어 감이 존재하고 가는 이가 존재한다면 최초의 시작[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3시에서 시작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4_b_02L若人說去者能用去法是人則有離去法有去者何以故說去者用去法是爲先有去者後有去法是事不然是故三時中無有去者
復次若決定有去有去者應有初而於三時中求發不可得何以故

이미 간 것에는 시작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시작이 없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시작이 없네.
어느 곳에서 시작이 있겠는가? (12)
016_0354_b_08L已去中無發
未去中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왜 그러한가? 3시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016_0354_b_10L何以故三時中無發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네.
이 둘에 시작이 있을 것이니,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13)
016_0354_b_11L未發無去時
亦無有已去
是二應有發
未去何有發

이미 간 것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없네.
모든 것에 시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별하는가? (14)
016_0354_b_13L無去無未去
亦復無去時
一切無有發
何故而分別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미 간 것도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나 이미 간 것 두 곳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둘 모두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았을 때는 아직 시작이 있지 않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시작이 없으니 감이 없고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016_0354_b_14L若人未發則無去時亦無已去若有當在二處去時已去中二俱不然未去時未有發故未去中何有發無故無去無去故無去者何得有已未去去時
【문】 만약 감이 있지 않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지라도 마땅히 머묾과 머무는 이는 있을 것이다.
016_0354_b_19L問曰若無去無去者有住住者

【답】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15)
016_0354_b_20L答曰
去者則不住
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
何有第三住
016_0354_c_01L
만일 머묾이 있고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땅히 제3자가 머무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가고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감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감의 특징[去相]과 모순되는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감이 소멸했을 때 머묾이 있는 것인데 감이 있지 않다면 아예 머묾이 있지 않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머무는 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제3의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나 가지 않는 이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354_b_22L若有住有住者應去者住若不去者若離此二應有第三住是事不然去者不住去未息故與去相違名爲不去者亦不住何以故因去法滅故有住無去則無住離去者不去者更無第三住者若有第三住者卽在去者不去者中以是故不得言去者

가는 이가 머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16)
016_0354_c_06L復次
去者若當住
云何有此義
若當離於去
去者不可得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에게 감의 특징이 있는데 어찌 머묾이 있겠는가? 감과 머묾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016_0354_c_08L汝謂去者住是事不然何以故離去去者不可得若去者在去相云何當有住去住相違故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머묾이 있지 않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머묾이 있지 않네.
행(行)과 지(止)의 법도
모두 감의 이치와 동일하네. (17)
016_0354_c_11L復次
去未去無住
去時亦無住
所有行止法
皆同於去義

또 만일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간 것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있으면서 머무는 것이리라. 세 곳 모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감과 머묾이 타파되었듯이 행(行)과 지(止)도 타파될 것이다. 행(行)이란 이를테면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相續)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지(止)란 곡식의 씨가 소멸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상속되기에 행(行)이라 이름하고 단절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또 이를테면 무명을 연(緣)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나아가 발생을 연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을 행(行)이라 하고, 무명이 멸하기에 모든 행(行)이 멸하고 하는 따위를 지(止)라고 하는 것과 같다.
016_0354_c_13L若謂去者住是人應在去時已去去中住三處皆無住是故汝言去者有住是則不然如破去法住法亦如是行者如從穀子相續至芽葉等止者穀子滅故葉滅相續故名行斷故名止又如無明緣諸行乃至老死是名行無明滅故諸行等是名止
【문】 그대가 갖가지 문(門)을 세워서 감과 가는 이, 머묾과 머무는 이를 타파하긴 했지만 감과 머묾의 있음이 눈에 보인다.
016_0354_c_21L問曰汝雖種種門破去住者而眼見有去住
【답】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만일 감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하나의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두 가지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54_c_22L答曰肉眼所見不可信若實有去去者爲以一法成爲以二法成二俱有過何以故
016_0355_a_01L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옳지 않네.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18)
016_0355_a_01L去法卽去者
是事則不然
去法異去者
是事亦不然

만일 감이 가는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해도 옳지 않다.
016_0355_a_03L若去法去者一是則不然異亦不然
【문】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5_a_04L問曰一異有何過

【답】
감이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행위자와 행위
이것들이 하나가 될 것이네. (19)
016_0355_a_05L答曰
若謂於去法
卽爲是去者
作者及作業
是事則爲一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이 없이 감이 있고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는 것이네. (20)
016_0355_a_07L若謂於去法
有異於去者
離去者有去
離去有去者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착란(錯亂)된 것이니 인(因)과 연(緣)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를 의존해서 감이 있다. 또 감을 법(法)이라 이름하고 가는 이를 인(人)이라 한다. 인(人)은 상주하는 것이고 법(法)은 무상한 것이다. 만일 같다면, 두 가지 모두가 상주하는 것이 되거나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한 것이 된다. 같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일 다르다면,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감이 아직 있지 않아도 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는 이가 아직 있지 않아도 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으니 하나의 법이 멸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016_0355_a_08L如是二俱有過何以故若去法卽是去者是則錯亂破於因緣因去有去因去者有去又去名爲法去者名爲人人常法無常若一者則二俱應二俱無常一中有如是等過若異則相違未有去法應有去者未有去者應有去法不相因待一法滅一法在異中有如是等過

감과 가는 이 이 둘이
만일 같은 법으로 성립한다거나 다른 법으로 성립한다고 한다면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립하는 일이 있겠는가? (21)
016_0355_a_16L復次
去去者是二
若一異法成
二門俱不成
云何當有成

또 만일 가는 이와 감이 같은 법으로나 다른 법으로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제3의 법이 성립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과 가는 이가 없는 인연을 말하는 셈이 된다.
이제 다시 말한다.
016_0355_a_18L若去者去法有若以一法成若以異法成二俱不可得先已說無第三法若謂有成應說因緣無去無去者今當更說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네.
이전에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는 이와 감이 있지 않네. (22)
016_0355_a_22L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016_0355_b_01L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감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가는 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것ㆍ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과 성읍(城邑)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람이 성읍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감과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이는 감에 의존해서 성립하고 감은 가는 이에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016_0355_b_01L隨以何去法知去者是去者不能用是去法何以故是去法未有時無有去者亦無去時已去未去如先有人有城邑得有所起去法去者則不然去者因去法成去法因去者成故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네.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네. (23)
016_0355_b_06L復次
因去知去者
不能用異去
於一去者中
不得二去故

또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0355_b_08L隨以何去法知去者是去者不能用異去法何以故一去者中二去法不可得故

실재하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도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24)
016_0355_b_11L復次
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그러니 감이나 가는 이,
갈 곳이 모두 없네. (25)
016_0355_b_13L去法定不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실재하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는[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本實有]것으로 감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감’이란 몸의 움직임[身動]이다. ‘세 가지의 감’이란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이미 간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존재할 것이고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지 않는[不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本實無]것을 의미한다. 감에 의존할 때 가는 이라 할 수 있는데, 감이 없으니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전에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가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겠는가?
016_0355_b_14L決定者名本實有不因去法生去法名身動三種名未去已去去時若決定有去者離去法應有去者不應有住是故說決定有去者不能用三去若去者不決定不決定名本實無以因去法得名去者以無去法故不能用三去因去法故有去者若先無去法則無去者云何言不決定去者用三去
016_0355_c_01L감도 가는 이의 경우와 같다. 만일 이전에 가는 이 없이 감이 실재한다면, 가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이렇게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해 보건대 감ㆍ가는 이ㆍ갈 곳 이 법들은 모두 서로 의존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에 의존해서 감이 있다. 이 두 법에 의존해서 갈 곳이 있는 것이니, 실재한다고 말해서 안 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법(法)은 허망(虛妄)하고 공(空)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어서 환영과 같고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016_0355_b_22L去者去法亦如是若先離去者決定有去法則不因去者有去法是故去者不能用三去法若決定無去法者何所用如是思惟觀察去法去者所去處是法皆相因待因去法有去因去者有去法因是二法則有可去處不得言定有不得言定無是故決定知三法虛妄空無所有但有假如幻如化

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8偈
016_0355_c_08L中論觀六情品第三[八偈]

【문】 경전에서는 여섯 근(根)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다음과 같다.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
몸[身]ㆍ뜻[意] 등의 6정(情:根)이네.
이 눈 등 여섯 근은
색(色) 등 여섯 경계에 작용하네. (1)
016_0355_c_09L問曰經中說有六情所謂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이 중에서 눈[眼]이 안[內]의 근(根)이 되고 색(色)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눈이 색을 보고, 나아가 뜻[意]이 안의 근이 되고 법(法)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뜻[意]이 법(法)을 능히 인식한다.
016_0355_c_12L此中眼爲內情色爲外塵眼能見色乃至意爲內情法爲外塵意能知法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55_c_14L答曰無也何以故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네.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2)
016_0355_c_15L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마치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또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이 봄[見相]을 갖는 것이라면, 자기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송에서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55_c_17L是眼不能見自體何以故如燈能自亦能照他眼若是見相亦應自見亦應見他而實不爾是故偈中說眼不自見何能見餘物
【문】 눈은 자기를 볼 수 없긴 하나 다른 것을 볼 수는 있다. 마치 불이 다른 것을 태울 수는 있으나 자기를 태우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016_0355_c_21L問曰眼雖不能自見而能見他如火能燒他不能自燒
016_0356_a_01L
【답】
불의 비유는
눈의 봄을 성립시키지 못하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다  이것에 답했네. (3)
016_0355_c_23L答曰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摠答是事

그대가 불의 비유를 제시하긴 했지만 눈의 봄[見法]을 성립시키진 못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간 것에 감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듯이, 이미 탄 것과 아직 타지 않은 것과 지금 타고 있는 것 모두에 태움(燒)이 없다. 이렇듯이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과 지금 보고 있는 것 모두에 봄[見相]이 없다.
016_0356_a_02L汝雖作火喩不能成眼見法是事「去來品」中已答如已去中無去未去中無去去時中無去如已燒未燒俱無有燒如是已見未見見時無見相

봄이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
그런데 봄이 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4)
016_0356_a_07L復次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또 눈이 아직 색을 대하지 않았을 때는 보지 못하니, 그 때를 봄이라 할 수 없다. 색을 대함으로 인하여 봄이라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봄이 볼 수 있겠는가?
또 두 경우 모두 봄이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6_a_09L眼未對色則不能見爾時不名爲見因對色名爲見是故偈中說未見時無見云何以見能見復次二處俱無見法何以故

봄은 보지 않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네.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 (5)
016_0356_a_13L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봄은 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봄[見相]이 없기 때문이다. 봄[見相]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봄[見法]이 없으니 보는 이도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봄[見]을 떠나서 보는 이가 있다면 눈이 없는 이가 다른 감관[根]으로 보는 것이리라. 만약 봄이 본다면 봄에 봄[見相]이 있는 것이니 보는 이에게는 봄[見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56_a_15L見不能見先已說過故非見亦不見無見相故若無見相云何能見見法無故見者亦無何以故若離見有見無眼者亦應以餘情見若以見見則見中有見相見者無見相是故偈中說若已破於見則爲破見者

봄이 없어도 봄이 없지 않아도
보는 이를 얻을 수 없네.
보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6)
016_0356_a_21L復次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016_0356_b_01L
또 봄이 있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봄이 있지 않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있겠는가?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누가 봄에 의해서 바깥의 색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이다.
016_0356_a_23L若有見見者則不成若無見見者亦不成見者無故云何有見可見若無見者誰能用見法分別外色是故偈中說以無見者故何有見可見

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 등 네 법(法)이 있지 않네.
4취(取) 등의 연(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7)
016_0356_b_04L復次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또 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ㆍ촉(觸)ㆍ수(受)ㆍ애(愛)의 네 법이 모두 있지 않다. 애(愛) 등이 있지 않으니 4취(取)18) 등 12연기의 분지(分枝)도 있지 않다.
016_0356_b_06L可見法無故愛四法皆無以無愛等故四取等十二因緣分亦

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성(聲), 듣는 이[聞者] 등도
이와 같은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모두 위에서 말한 바와 같네.(8)
016_0356_b_09L復次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또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뭇 연(緣)에 귀속되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어 공(空)하듯이, 그 밖의 이(耳) 등의 다섯 근(根)이나 성(聲) 등의 다섯 경계[塵]도 봄이나 봄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치가 같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016_0356_b_11L如見可見法空屬衆緣故無決定耳等五情聲等五塵當知亦同見見法義同故不別說

4. 오온(五蘊)을 관찰하는 장[觀五陰品]9偈
016_0356_b_14L中論觀五陰品第四[九偈]

【문】 경전에서는 5온(蘊)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016_0356_b_15L問曰經說有五陰是事云何

【답】
색(色)의 원인 없이
색을 얻을 수가 없네.
색 없이
색의 원인을 얻을 수가 없네. (1)
016_0356_b_16L答曰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

‘색(色)의 원인’이란 베[布]의 원인인 실과 같은 것이다. 실을 없애면 베가 없고 베를 없애면 실이 없다. 베는 색과 같고 실은 색의 원인과 같다.
016_0356_b_18L色因者如布因縷除縷則無布除布則無縷布如色縷如因
【문】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6_b_20L問曰若離色因有色有何過

【답】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면
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2)
016_0356_b_21L答曰
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예를 들어 실 없이 베가 있다면 이 베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016_0356_b_23L如離縷有布布則無因無因而有法世閒所無有
016_0356_c_01L
【문】 불교의 법(法), 외도의 법, 세간의 법에 모두 원인이 없는 법이 있다. 불교의 법에는 세 무위(無爲)가 있다. 무위는 상주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다. 외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ㆍ신(神)19)ㆍ미진(微塵)20)ㆍ열반 따위가 있다. 세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 따위가 있다. 이 세 법(法)21)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주하는 것이기에 원인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까닭에 원인이 없는 법이 세간에 없다고 하는가?
016_0356_c_02L問曰佛法外道法世閒法中皆有無因法佛法有三無爲爲常故無因外道法中虛空微塵涅槃等世閒法虛空方等三法無處不有故名爲常常故無因汝何以說無因法世閒所無
【답】 이 원인이 없는 법은 그저 언설(言說)이 있을 따름이다. 사유(思惟)해서 분별(分別)한 것은 모두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법이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라면 원인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6_0356_c_07L答曰無因法但有言說思惟分別則皆無若法從因緣有不應言無因若無因則如我說
【문】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발생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언설의 원인[言說因]이다. 이 원인이 없는 법은 발생의 원인이 없고 단지 언설의 원인이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016_0356_c_10L問曰有二種因一者二者言說因是無因法無作因有言說因令人知故
【답】 언설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허공은 「6계(界)를 관찰하는 장」에서 타파하는 바와 같다. 그 밖의 것들은 후에 논파할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도 모두 타파되는데 하물며 극미[微塵]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랴?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법은 세간에 없다.
016_0356_c_12L答曰雖有言說是事不然虛空如六種中破餘事後當破復次現事尚皆可破何況微塵等不可見法是故說無因法世閒所無
【문】 색 없이 색의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問曰若離色有色因有何過

【답】
만일 색 없이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리라.
만일 결과가 없는 원인을 말한다면
옳은 점이 없네. (3)
016_0356_c_16L答曰
若離色有因
則是無果因
若言無果因
則無有是處

색이라는 결과가 없이 오직 색의 원인만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다.
016_0356_c_18L若除色果但有色因者卽是無果因
【문】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6_c_19L問曰若無果有因有何咎
【답】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면 사물이 어떻게 원인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破因緣品]22)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016_0356_c_20L答曰無果有因世閒所無何以故以果故名爲若無果云何名因復次若因中無果者物何以不從非因生是事如「破因緣品」中說是故無有無果因
016_0357_a_01L
만일 이미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만일 색이 있지 않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4)
016_0357_a_01L復次
若已有色者
則不用色因
若無有色者
亦不用色因

또 두 경우에 색의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지 않다면 또한 색의 원인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016_0357_a_03L二處有色因是則不然若先因中有色不名爲色因若先因中無色亦不名爲色因
【문】 두 경우라면 모두 옳지 않다. 단지 원인이 없이 색이 있을 따름이다.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7_a_06L問曰若二處俱不然但有無色有何咎

【답】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네. (5)
016_0357_a_07L答曰
無因而有色
是事終不然
是故有智者
不應分別色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나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는 이를 범부라 이름한다. 무명과 탐욕[愛染]으로써 색을 탐착(貪著)하고 그런 후에 그릇된 봄[邪見]으로써 분별과 희론을 일으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거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제 이 중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016_0357_a_09L若因中有果因中無果此事尚不可何況無因有色是故言無因而有是事終不然是故有智者不應分別色分別名凡夫以無明愛染貪著然後以邪見生分別戲論說因中有果無果等今此中求色不可得故智者不應分別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6)
016_0357_a_16L復次
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是事亦不然

또 만일 결과와 원인이 서로 유사하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원인은 미세하고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색은 힘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베가 실과 유사하다면 베라 이름할 수 없다. 실은 다(多)이고 베는 일(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삼[麻]의 실은 명주를 이루지 않듯이 거친 실은 미세한 베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주장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색도 없고 색의 원인도 없는 것이다.
016_0357_a_18L若果與因相似是事不然因細果麤力等各異如布似縷則不名布縷多布一故不得言因果相似若因果不相似是亦不然如麻縷不成絹麤縷無出細布是故不得言因果不相似二義不然故無色無色因
016_0357_b_01L
수온[受蔭]ㆍ상온[想蔭]ㆍ
행온[行蔭]ㆍ식온[識蔭] 등
여타의 모든 법은
다 색온[色蔭]과 동일하네. (7)
016_0357_b_01L受陰及想陰
行陰識陰等
其餘一切法
皆同於色陰

(나머지) 네 온(蔭)과 모든 법도 이와 같이 사유해서 논파해야 한다.
또 이제 논을 짓는 이는 공성의 이치를 찬미하고자 게송을 읊는다.
016_0357_b_03L四陰及一切法亦應如是思惟破今造論者欲讚美空義故而說偈

만일 어떤 자에게 묻는 자가 있을 때
(어떤 자가) 공성(空性)이 없이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8)
016_0357_b_05L若人有問者
離空而欲答
是則不成答
俱同於彼疑

만일 어떤 자가 논박하고자 할 때
공성(空性)이 없이 그 과실을 말한다면
이것은 논박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9)
016_0357_b_07L若人有難問
離空說其過
是不成難問
俱同於彼疑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는 제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공성(空性)의 이치가 없이 묻고 답한다면, 물음은 물음이 되지 못하고 답은 답이 되지 못해서 모두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어떤 자가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말했을 때 묻는 자가 “무엇에 근거해서 무상하다고 하는가?” 했다고 하자. 이 물음에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라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어 그것23)이 상주하는 것인지 무상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이것24)은 그가 의심하는 것25)과 같게 된다.
016_0357_b_08L若人論議時各有所執離於空義而有問答者皆不成問答俱亦同疑人言甁是無常問者言何以故無常從無常因生故此不名答何以故因緣中亦疑不知爲常爲無常是爲同彼所疑
만일 묻는 자가 그 과실을 말하고자 할 때 공성에 의지해서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논박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상함에 의거해서 나의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나도 상주함에 의거해서 그대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상주함이 없다면 업보가 없을 것이다. 눈[眼]ㆍ귀[耳] 등 법(法)들이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분별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논박이 되지 못하고 그가 의심하는 것26)과 같게 된다.
만일 공성(空性)에 의거해서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공성의 상(相)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고자 한다면 공성[空法]에 의거해야 하는데 하물며 고(苦)가 없는 적멸[寂滅相]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016_0357_b_14L問者若欲說其過不依於空而說諸法無常則不名問難何以汝因無常破我常我亦因常破汝無常若實無常則無業報耳等諸法念念滅亦無有分別有如是等過皆不成問難同彼所疑若依空破常則無有過何以故此人不取空相是故若欲問答尚應依於空法況欲求離苦寂滅相者

5. 6계(界)를 관찰하는 장[觀六種品]8偈
016_0357_b_22L中論觀六種品第五[八偈]
016_0357_c_01L
【문】 6계(界)에는 각각 확정된 상(相)이 있다. 확정된 상이 있기 때문에 6계가 있다.
016_0357_b_23L問曰六種各有定相有定相故則有六種

【답】
허공의 상(相)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허공은 없네.
만약 미리 허공이 있다면
상(相)이 없는 것이 되네. (1)
016_0357_c_02L答曰
空相未有時
則無虛空法
若先有虛空
卽爲是無相

만약 아직 허공의 상(相)이 있지 않은데 미리 허공이 있다면 허공은 상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色)이 없는 공간[處]이 허공의 상이기 때문이다. 색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무상하다.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에는 허공의 상이 없을 것이다. 색에 의존해서 색이 없는 공간이 있다. 색이 없는 공간을 허공의 상(相)이라 한다.
016_0357_c_04L若未有虛空相先有虛空法者虛空則無相何以故無色處名虛空相是作法無常若色未生未生則無滅爾時無虛空相因色故有無色處色處名虛空相
【문】 만약 상(相)이 없이 허공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7_c_09L問曰若無相有虛空有何咎

【답】
이 상(相)이 없는 법은
어떤 곳에도 있지 않네.
상이 없는 법에 있어서
상은 상을 띠는 일[所相]이 없네. (2)
016_0357_c_10L答曰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만약 상주하는 법(法)과 무상한 법 중에서 상(相)이 없는 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없다. 논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유위와 무위가 어떻게 각각 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답한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有爲)의 상이고,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없음은 무위(無爲)의 상이다. 만약 허공이 상이 없는 것이라면 허공은 있지 않다.
만약 전에는 상이 없다가 후에 상이 와서 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전에 상이 없다면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7_c_12L若於常無常法中求無相法不可得如論者言是有是無云何知各有相滅是有爲相無生滅是無爲相虛空若無相則無虛空若謂先無相後相來相者是亦不然若先無則無法可相何以故

상(相)을 갖는 것에도 상을 갖지 않는 것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3)
016_0357_c_18L有相無相中
相則無所住
離有相無相
餘處亦不住
016_0358_a_01L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뿔이 있는 것,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 것,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는 것, 이것들이 소의 상(相)이다. 이 상들을 떠나서 소는 있지 않다. 만약 소가 있지 않다면 이 상들이 거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상을 갖지 않는 법에서 상은 상을 띠는 일이 없다. 상을 갖는 법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水相]에 불의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자기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상을 갖지 않는 법에 상이 거주한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것을 무[無法]라 한다. 상을 갖는 것[有相]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항상 서로 의존[因待]하기 때문이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나 다시 제3의 장소에서 상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송에서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하고 말한 것이다.
016_0357_c_20L如有峯有角尾端有毛頸下垂%(古*頁)名牛相若離是相則無牛若無牛是諸相無所住是故說於無相法中相則無所相有相中相亦不住先有相故如水相中火相不住先有自相故若無相中相住者則爲無因無因名爲無法而有相可相常相因待離有相無相法更無第三處可相故偈中說離有相無相餘處亦不住

상[相法]이 있지 않으니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도 있지 않네.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상도 있지 않네. (4)
016_0358_a_06L復次
相法無有故
可相法亦無
可相法無故
相法亦復無

또 상이 거주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이 없다.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상도 없다. 왜 그러한가? 상에 의존해서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있고 상을 띠게 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이 있다.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016_0358_a_09L相無所住故則無可相法可相法無相法亦無何以故因相有可相可相有相共相因待故

그러니 이제 상이 있지 않고
상을 띠게 하는 것도 있지 않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
다시 사물[物]이 있지 않네. (5)
016_0358_a_12L是故今無相
亦無有可相
離相可相已
更亦無有物

인과 연들 속에서 처음에서 끝까지 구해 보아도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확정을 얻을 수 없다. 이 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들은 다 있지 않다. 모든 법들은 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두 법에 포함된다. 어떤 때는 상(相)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되고 어떤 때는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상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불의 상이 되고 다시 불이 연기의 상이 되는 경우와 같다.
016_0358_a_14L於因緣中本末推求可相決定不可得是二不可得故一切法皆無切法皆攝在相可相二法中或相爲可相或可相爲相如火以煙爲相亦復以火爲相
【문】 유(有)가 있지 않다면 무(無)는 있을 것이다.
016_0358_a_19L問曰若無有有應當有無

【답】
유(有)가 없다면
어떻게 무(無)가 있겠는가?
유와 무가 이미 없으니
유와 무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6)
016_0358_a_20L答曰
若使無有有
云何當有無
有無旣已無
知有無者誰
016_0358_b_01L
무릇 사물[物]이 스스로 괴멸했거나 다른 것에 의해 괴멸했다면 이를 무(無)라 한다. 무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유(有)에 의지해서 있다. 그러므로 유가 없다면 어떻게 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사물의 무이겠는가?
016_0358_a_22L凡物若自壞若爲他壞名爲無無不自有從有而有是故言若使無有有云何當有無眼見耳聞尚不可得況無物
【문】 유가 있지 않기에 무도 있지 않다. (그러나) 유와 무를 아는 자는 있을 것이다.
016_0358_b_03L問曰以無有有故無亦無應當有知有無者
【답】 만약 (유와 무를) 아는 자가 있다면 유에 있거나 무에 있을 것이다. 유와 무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유와 무를) 아는 자도 같이 타파된다.
016_0358_b_04L答曰若有知者應在有應在無中有無旣破知者亦同破

그러므로 허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다섯도 허공과 같네. (7)
016_0358_b_05L是故知虛空
非有亦非無
非相非可相
餘五同虛空

허공에서 갖가지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그 밖의 다섯 가지27)도 이와 같다.
016_0358_b_07L如虛空種種求相不可得餘五種亦如是
【문】 허공은 최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최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먼저 타파하는가?
016_0358_b_09L問曰虛空不在初不在後何以先破
【답】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은 연들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타파된다. 식(識)은 고(苦)와 낙(樂)의 원인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이하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논파된다. 허공은 이와 같은 상(相)이 없고 단지 범부가 있다고 희망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타파한다. 또 허공은 4대(大)를 지닌다. 4대를 인연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근본이 되는 것을 타파하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타파된다.
016_0358_b_10L答曰衆緣和合故易識以苦樂因故知無常變異故易虛空無如是相但凡夫悕望爲有是故先破復次虛空能持四大四大因緣有識是故先破根本餘者自破
【문】 세간의 사람들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을 본다. 그대는 왜 홀로 세상과 상반되게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16_0358_b_14L問曰世閒人盡見諸法是有是無何以獨與世閒相違言無所見

【답】
지혜가 얕은 사람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를 보네.
그러니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하네. (8)
016_0358_b_16L答曰
淺智見諸法
若有若無相
是則不能見
滅見安隱法
016_0358_c_01L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 도(道)를 얻지 못했다면 법들의 실상(實相)을 보지 못한다. 봄[見]을 사랑하기 때문에 갖가지 희론이 생긴다. 법(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이를 있다[有]고 여겨서 상(相)을 취해 “있다”라고 말한다.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단멸한다[斷]고 여겨서 상을 취해서 “없다”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이[智者]는 모든 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없다고 보는 것[無見]을 멸하고,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있다고 보는 것[有見]을 멸한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법들을 보는 것[所見]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환영과 같고 꿈과 같다. 나아가 무루도(無漏道)를 보는 것[見]도 멸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보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한다면 있음[有]를 보거나 없음[無]을 보게 된다.
016_0358_b_18L若人未得道不見諸法實相愛見因緣故種種戲論見法生時謂之爲有取相言有見法滅時謂之爲斷取相言無智者見諸法生卽滅無見見諸法滅卽滅有見是故於一切法雖有所見皆如幻如夢乃至無漏道見尚何況餘見是故若不見滅見安隱法者則見有見無

6.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관찰하는 장[觀染染者品]10偈
016_0358_c_03L中論觀染染者品第六[十偈]

【문】 경전에서 탐욕ㆍ증오[瞋恚]ㆍ무지[愚癡]는 세간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애(愛)라고도 하고 착(著)이라고도 하고 염(染)이라고도 하고 음욕(婬欲)이라고도 하고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름들이 있다. 이것은 결사(結使)로서 중생에 의지한다. 중생을 물든 자[染者]라 하고 탐욕을 물듦[染法]이라 한다. 물듦과 물든 자가 있기 때문에 탐욕이 있다. 그 밖의 둘도 이와 같다. 증오[瞋]가 있기에 증오하는 자[瞋者]가 있고 무지[癡]가 있기에 무지한 자[癡者]가 있다. 이 3독(毒)이 인연이 되어서 3업(業)28)이 일어난다. 3업이 인연이 되어서 3계(界)29)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이 있다.
016_0358_c_04L問曰經說貪欲瞋恚愚癡是世閒根貪欲有種種名初名愛次名著名染次名婬欲次名貪欲有如是等名字此是結使依止衆生衆生名染貪欲名染法有染法染者故則有貪欲餘二亦如是有瞋則有瞋者癡則有癡者以此三毒因緣起三業三業因緣起三界是故有一切法
【답】 경전에서는 비록 3독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체를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8_c_12L經雖說有三毒名字求實不可得何以故

만약 탐욕[染法]을 떠나
먼저 스스로 탐욕을 내는 이[染者]가 있다면
이 탐욕을 내는 이[染欲者]에 의존해서
탐욕이 생길 것이네. (1)
016_0358_c_14L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만약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탐욕이 있겠는가?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 (2)
016_0358_c_16L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다시 탐욕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가 이미 탐욕을 냈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또한 다시 탐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탐욕을 내는 이가 있고 나서야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탐욕[染法]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먼저 사람이 없이 탐욕이 있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마치 장작이 없이 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 탐욕이 없다면 탐욕을 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58_c_17L若先定有染者則不更須染染者先已染故若先定無染者亦復不應起要當先有染者然後起染若先無染者則無受染者染法亦如是若先離人定有染法此則無因云何得起似如無薪火若先定無染法則無有染者是故偈中說若有若無染染者亦如是
016_0359_a_01L【문】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전후로 서로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9_a_02L問曰若染法染者先後相待是事不可得者若一時生有何咎

【답】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라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3)
016_0359_a_03L答曰
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이 있거나 탐욕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을 내는 이가 있다면, 이 둘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원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과실이 많아 해탈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타파해야 하겠다. 왜 그러한가?
016_0359_a_05L若染法染者一時成則不相待不因染者有染法不因染法有染者是二應常已無因成故若常則多過無有解脫法復次今當以一異法破染法染者何以故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같다면
같은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다르다면
다른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016_0359_a_10L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같은 법으로 합하거나 다른 법으로 합한다. 만약 같다면 합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같은 법이 어떻게 자기와 합하겠는가? 마치 손가락 끝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듯이. 만약 다른 법으로 합한다면 이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법으로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 성립해 있기에 끝내 다시 합할 필요가 없다면, 설령 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르다.
또 같음과 다름을 모두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9_a_12L染法染者若以一法合若以異法合若一則無合何以故一法云何自合如指端不能自觸若以異法合是亦不可何以故以異成故若各成竟須復合雖合猶異復次一異俱不可何以故

같아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달라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5)
016_0359_a_18L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016_0359_b_01L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같기에 합한다고 억지로 그래 본다면, 여타의 인연이 없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또 만약 같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 두 이름이 있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법(法)이고 탐욕을 내는 이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과 법이 같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다르기에 합한다고 말한다면 여타의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합할 것이다. 만약 다른데도 합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합할 것이다.
016_0359_a_20L若染染者一强名爲合者應離餘因而有染染者復次若一亦不應有染者二名染是法染者是人若人法爲一是則大亂若染染者各異言合者則不須餘因緣而有合若異而合者雖遠亦應合
【문】 같은 것이 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눈이 다른 것을 볼 때 함께 합하는 것이다.
016_0359_b_03L問曰一不合可眼見異法共合

【답】
만약 다르기에 합한다고 한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무엇인가?
이 두 상(相)은 먼저 다르기에
연후에 합한다고 말하는 것이네. (6)
016_0359_b_04L答曰
若異而有合
染染者何事
是二相先異
然後說合相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다름이 있기에 이후에 합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합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두 상(相)은 먼저 이미 다르고 이후에 합한다고 억지로 말하는 것이다.
016_0359_b_06L若染染者先有決定異相而後合者是則不合何以故是二相先已異後强說合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이미 다름이 성립해 있는데
왜 합한다고 말하는가? (7)
016_0359_b_09L復次
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또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그대는 지금 왜 굳이 합함을 말하는가?
016_0359_b_11L若染染者先各成別相汝今何以强說合相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그대는 합하고자 하네.
합함이 끝내 성립하지 않기에
다시 다름을 말하네. (8)
016_0359_b_13L復次
異相無有成
是故汝欲合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또 그대는 이미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합함[合相]을 말한다. 그러나 합함에는 과실이 있다.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성립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합함을 성립하게 하기 위해 다시 다름[異相]을 말한다. 그대 스스로 확정해 놓고서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셈이다.30)
016_0359_b_15L汝已染染者異相不成故復說合相合相中有過染者不成汝爲成合相故復說異相汝自已爲定而所說不定何以故

다름이 성립하지 않으니
합함이 성립하지 않네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9)
016_0359_b_19L異相不成故
合相則不成
於何異相中
而欲說合相

이 중에서는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합함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가?
016_0359_b_21L以此中染染者異相不成故合相亦不成汝於何異相中而欲說合相
016_0359_c_01L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모든 법들 또한 이와 같이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10)
016_0359_b_23L復次
如是染染者
非合不合成
諸法亦如是
非合不合成

또 증오[恚]와 무지[癡]도 탐욕[染]과 같다. 모든 번뇌와 모든 법도 3독과 같다.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며,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이 인과 연들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016_0359_c_02L如染癡亦如是如三毒一切煩惱一切法亦如是非先非後非合非散因緣所成
中論卷第一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도속(道俗): 도(道)는 열반, 깨달음, 출세간의 일을 말하고 속(俗)은 생사(生死), 세속의 일을 말한다.
  2. 2)2제(際): 대립하는 두 가지 극단으로 유(有)와 무(無), 열반과 생사 등이다.
  3. 3)즉화(卽化): 사물에 즉하여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접촉하는 그대로 진리라는 뜻이다,
  4. 4)충계(沖階): 보살지(菩薩地)에서 수행하여 불지(佛地)에 이르는 계위를 말한다.
  5. 5)빈가라(賓伽羅): 범어로는 Pigala라 하고 한역으로는 청목(靑目)이라고 한다. 불멸 후 1천년 경에 태어났다. 용수의 『중관론(中觀論)』에 산문으로 된 해석을 붙였다.
  6. 6)6)범어 maheśvara의 한역으로 마혜수라(摩醯首羅)라고도 하며 줄여서 자재천(自在天)이라고도 한다. 외도(外道)들은 이 신을 세계의 본체라 하며, 또는 창조의 신이라 하는데 하는데 인도 최고의 신(神)인 śiva 또는 viṣṇu를 지칭하기도 한다.
  7. 7)7)범어 viṣṇu의 음역으로 우주를 유지하게 하는 인도의 신(神)이다.
  8. 8)8)인도 6파철학(波哲學)의 하나인 상키야 학파[數論]에서 말하는 정신원리로서의 purṣa에 대조되는 물질의 궁극적인 원리인 prakṛti[根本原質]로서 자성(自性)이나 본성(本性)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9. 9)9)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
  10. 10)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薀).
  11. 11)11)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와 색처(色處)ㆍ성처(聲處)ㆍ향처(香處)ㆍ미처(味處)ㆍ촉처(觸處)ㆍ법처(法處).
  12. 12)12)안계(眼界)ㆍ이계(耳界)ㆍ비계(鼻界)ㆍ설계(舌界)ㆍ신계(身界)ㆍ의계(意界)와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식계(舌識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식계(意識界)와 색계(色界)ㆍ성계(聲界)ㆍ향계(香界)ㆍ미계(味界)ㆍ촉계(觸界)ㆍ법계(法界).
  13. 13)13)이하 각 게송에 표기된 일련 번호는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없는 것이나 역자가 달아 두었을 것을 밝힌다.
  14. 14)14)살생[殺生]ㆍ도둑질[偸盜]ㆍ그릇된 성관계[邪淫]ㆍ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 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ㆍ탐욕[貪]ㆍ증오[瞋]ㆍ그릇된 견해[邪見].
  15. 15)다섯 가지 극악무도한 죄로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것, 승단을 파괴하는 것 등을 말한다.
  16. 16)여기서 말하는 4구란 첫 번째 게송에서 말한 스스로 발생한다[自生], 타자로부터 발생한다[他生],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共生], 원인이 없이 발생한다[無因生]는 네 가지를 말한다.
  17. 17)앞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 과거세ㆍ 미래세ㆍ현재세를 말한다.
  18. 18)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19. 19)아뜨만(ātman)은 보통 아(我)로 한역되는데 여기서는 신(神)으로 한역하고 있다.
  20. 20)극미(極微)라고도 한다.
  21. 21)앞에서 말한 불교의 법ㆍ외도의 법ㆍ세간의 법 등 세 가지를 뜻한다.
  22. 22)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이란 「관인연품(觀因緣品)」을 말한다.
  23. 23)물단지를 가리킨다.
  24. 24)“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25. 25)‘물단지는 무상하다’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26. 26)상주함을 뜻한다.
  27. 27)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식(識)을 말한다.
  28. 28)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
  29. 29)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30. 30)다르지 않다고 확정해 놓고서는 다시 다르다고 말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