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에는 오백 개의 게송(偈頌)이 있으니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은 것이다. 중(中)으로 이름을 삼은 것은 진실[實]을 비추고, 논(論)으로 부른 것은 말[言]을 다했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름[名]이 아니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중(中)에 붙여서 펼치고, 말은 해석이 아니라면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論)을 빌려서 밝힌다. 진실이 펼쳐지고 말이 분명해지면 보살의 행(行)과 도량(道場)의 비춤[照]에 대해 환하게 매듭이 풀린 듯이 알게 될 것이다.
무릇 범부의 집착하는 미혹[滯惑]은 전도된 견해[倒見]에서 생기니 삼계(三界)는 그것 때문에 윤닉(淪溺)하고, 편벽된 깨달음[偏悟]은 생사를 싫어하는 지혜[厭智]에서 일어나니 2승(乘)의 굳건한 절개[耿介]는 그것 때문에 어그러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큰 깨달음[大覺]은 밝게 비추는 데에 있고 작은 지혜[小智]는 좁은 마음에 얽혀있는 줄 알 수 있다.
비춤이 밝지 않으면 유무(有無)를 평등하게 하여 도속(道俗)1)을 하나로 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앎이 다하지 않으면 중도(中途)를 건너 2제(二際)2)를 없앨 수 없다. 도속(道俗)이 평등해지지 않고 2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보살의 걱정이다. 이 때문에 용수대사가 중도(中道)로써 분석하여 미혹에 빠져 있는[惑趣] 무리로 하여금 현묘한 뜻[玄指]을 바라보아 일변(一變)하게 하고, 즉화(卽化)3)로써 묶어 장주(莊周)의 무리로 하여금 대승의 이치에 대해 문답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넓고도 넓구나! 참으로 이로(夷路)를 충계(沖階)4)에서 평탄하게 하며, 현문(玄門)을 우주 내에서 열며, 혜풍(慧風)을 마른 나뭇가지[陳枚]에 부채질하며, 감로(甘露)를 마르고 시든 것[枯悴]에 흐르게 한다고 할 만하다.대개 백 개의 들보로 지은 집[百梁]이 완성되면 띠풀로 지은 집[茅茨]은 좁고 누추하여 더럽게 여기듯이 이 논이 크고 넓음을 보면 치우친 깨달음을 가진 이승의 사람[偏悟]들이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남을 알게 될 것이다.
016_0350_b_01L다행이구나! 이 중국[赤縣]의 땅에 홀연 영취산(靈鷲山)을 옮겨서 진산(鎭山)을 만드니 마음이 음흉한[險陂]한 변방의 사람들이 유광(流光)의 남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제부터 도(道)를 담론하는 어진 사람들은 비로소 함께 진실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천축(天竺)의 여러 나라에 감히 학자의 무리에 들려면 이 논을 완미하지 않음이 없어 긴요한 것[喉衿]으로 여기고, 붓을 적셔서 해석을 편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 번역되어 나온 것은 천축 범지(梵志)로 빈가라(賓伽羅)5)라고 하고 진나라 말로는 청목(靑目)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석한 것이다. 그 사람은 깊은 법을 믿고 이해했으나 말이 바르지 않고 맞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이치에 어긋나고 빠지고 번거롭게 중복된 것은 구마라집 법사(法師)가 모두 마름질하고 덧붙여 경전과 상통하게 하자 이치는 [남김없이] 다하게 되었지만 문장은 간혹 앞뒤로 다 좋게 고지치는 못했다.
『백론(百論)』은 밖을 다스려 삿됨을 막고 이 『중론』은 안을 깨끗이 하여 막힌 것을 흐르게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해석은 깊고 넓으며, 『십이문론(十二門論)』의 관법은 정밀하고 깊은 이치에 도달했다. 이 네 가지 논을 살펴보면 참으로 해와 달이 품속에 든 것처럼 환하게 비추어 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나는 그것을 완미하고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비루하고 졸렬함을 잊고 내가 깨달은 생각을 서문에 붙인다. 아울러 품목(品目)의 뜻도 앞에다 쓴다. 어찌 잘 해석하기를 바라겠는가? 대체로 서로 같음을 기뻐하는 마음뿐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016_0350_b_17L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016_0350_b_19L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서를 짓는가?
016_0350_b_20L問曰:何故造此論?
016_0350_c_01L【답】 어떤 이는 모든 사물들이 대자재천(大自在天)6)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위뉴천(韋紐天)7)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화합(和合)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시간[時]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세성(世性)8)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변화(變化)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연(自然)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미진(微塵)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無因] 한다거나, 그릇된 원인[邪因]을 둔다거나, 단멸하거나 상주한다고 하는 따위의 그릇된 봄(邪見)에 떨어져서 갖가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말하게 되어 바른 법(法)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그릇된 봄을 끊고 부처님의 법[佛法]을 알게 해 주시고자 먼저 성문의 법에서는 12연기(因緣)9)를 말씀하셨고, 또 이미 마음을 닦아서 깊은 법을 감당할 수 있는 큰 마음이 있는 이를 위해서 대승의 법으로 인과 연들의 상(相)을 말씀하셨으니, 즉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아, 완전히 공해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도량에 앉아 있을 때 12연기를 관찰하는 것이 허공과 같이 다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고 말한 바와 같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후 5백 세가 지난 상법(像法)에는 사람의 근기가 둔해져서 모든 법들에 깊이 집착해서, 12연기(因緣)ㆍ5온(蘊)10)ㆍ12처(處)11)ㆍ18계(界)12) 등의 결정적인 상(相)을 구하기만 하여 부처님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언설[文字]에 집착할 뿐이었다. 대승의 법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공하다[畢竟空]”고 하는 말을 듣고도 무슨 이유로 공하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공한데 어찌 죄와 복의 과보 따위가 있다고 분별하겠는가? 그러니 세제(世諦)도 제일의제(第一義諦)도 없다’는 의심을 내어 이러한 없음[空]의 상(相)을 취해서 탐착을 일으켜 완전히 공한 것에 대해서 갖가지 과실을 범한다. 용수 보살께서는 이 점들을 감안해서 이 『중론』을 지으신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016_0350_c_19L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016_0350_c_21L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이 두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으니, 간략하게 제일의(第一義)를 말한 것이다.
016_0350_c_22L以此二偈讚佛,則已略說第一義。
【문】 모든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왜 단지 이 여덟 가지 일만을 들어 타파하는가?
016_0350_c_23L問曰:諸法無量,何故但以此八事破?
016_0351_a_01L【답】 법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긴 하나 간략하게 여덟 가지 일을 들어 모든 법을 통틀어서 타파한 것이다. ‘발생하지 않는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논사들은 갖가지로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니,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타자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유(有)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無)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렇듯이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지만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이 확정되어 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이다. ‘소멸하지 않는다’란,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여타의 여섯 가지 일도 없다.
【문】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모든 법들을 이미 다 타파했는데, 왜 다시 여섯 가지 일을 말하는가?
016_0351_a_10L問曰:不生不滅已摠破一切法,何故復說六事?
【답】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이치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진 않지만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다는 것은 믿는다. 만약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깊이 궁구하면, 이것은 곧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왜 그런가? 만약 법이 실제로 있다면 없는 것이 아닌데,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다면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고, 먼저 자성(自性)이 있었다면 이것은 상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들어간다. 어떤 이가 네 가지로 모든 법들을 논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네 가지 문(門)으로 모든 법들을 성립시킨다고 하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같다면 연(緣)이 없을 것이고 다르다면 상속(相續)이 없을 것이니, 후에 여러 가지로 타파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351_b_01L어떤 이는 여섯 가지로 모든 법을 타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온다’와 ‘간다’로 모든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온다란 모든 법이 대자재천(大自在天)ㆍ세성(世性)ㆍ극미(極微) 따위에서 오는 것을 말하며, 간다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또 모든 사물들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본다. 왜 그러한가? 겁초의 곡식이 없으면 지금의 곡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겁초의 곡식이 없는데도 지금의 곡식이 있다면, 발생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답】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같지 않은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가 싹을 내지 싹이 곡식의 씨를 내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곡식의 씨가 싹을 내고 싹이 곡식의 씨를 낸다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같지 않다.
016_0351_c_01L【답】 오는 것은 없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오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 속의 싹은 어디에서 오는 일이 없다. 만약 온다면, 마치 새가 와서 나무에 깃들 듯이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오지 않는다.
【답】 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가지 않는 것을 본다.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마치 뱀이 구멍에서 빠져나가듯이 싹이 씨에서 나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가지 않는다.
【문】 그대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의 이치를 풀이했는데, 나는 논을 지은 이의 말을 듣고 싶다.
016_0351_c_05L問曰:汝雖釋不生不滅義,我欲聞造論者所說。
【답】 모든 법(法)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 타자로부터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그 둘로부터도, 또는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그러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13)
016_0351_c_07L答曰: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란, 모든 사물들은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일이 없고 반드시 인(因)과 연(緣)에 의존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하나의 법에 두 가지 자체(自體)가 있게 되니, 하나는 발생하는 것[生]이요 다른 하나는 발생시키는 것[生者]이다. 만일 여타의 인연들이 없이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을 것이다. 또 발생에는 다시 발생이 있게 되어 발생이 무한할 것이다. 자기가 없기 때문에 타자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있기 때문에 타자가 있는 것이고,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자로부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한다면 두 과실이 있다. 자기로부터 발생하고 타자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원인이 없이 사물이 있다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옳지 않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없다. 원인이 없는데도 결과가 있다면, 보시(布施)를 하고 지계(持戒)를 하는 이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10악(惡)14)을 하고 5역(逆)15)을 하는 이들이 천계(天界)에 태어날 것이다. 왜냐 하면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자성은 연(緣) 속에 있지 않네. 자성이 있지 않으니 타성도 있지 않네. (2)
016_0351_c_20L復次,
如諸法自性, 不在於緣中, 以無自性故,
他性亦復無。
016_0352_a_01L 또 모든 법의 자성은 연 속에 있지 않다. 단지 연이 화합한 것이기에 이름[名字]을 얻을 따름이다. 자성이란 자체이다. 연 속에는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니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으니 타성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으므로 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은 타성에 있어서는 또한 자성이다. 만일 자성이 타파된다면 타성도 타파된다. 그러므로 타성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자성과 타성이 타파된다면 양자가 타파되는 것이다. 원인이 없다면 큰 과실이 있다. 원인이 있다 해도 타파되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이랴? 4구(句)16) 중 어느 발생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 아비달마학파의 사람은 “법들이 4연(緣)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4연이란 무엇인가?
016_0352_a_08L問曰:阿毘曇人言諸法從四緣生,云何言不生?何謂四緣?
인연ㆍ등무간연[次等緣]ㆍ 소연연[緣緣]ㆍ증상연, 이 4연(緣)에서 법들이 발생하네. 다시 제5의 연은 없네.(3)
016_0352_a_09L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모든 연들은 다 사연에 포함된다. 이 사연에 의지해서 모든 사물들이 발생한다. 인연(因緣)이란 모든 유위법을 말한다. 등무간연이란 과거세와 현재세의 아라한 최후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세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이다. 소연연과 증상연은 모든 법이다.
이 법에 의존해서 결과가 발생하기에 이 법을 연(緣)이라 하네. 만일 이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찌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5)
016_0352_a_21L因是法生果, 是法名爲緣。 若是果未生,
何不名非緣?
016_0352_b_01L 모든 연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를 연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연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 한해서 이를 연이라 하는 것이다. 연이 성립하는 것은 결과에 연유한다. 결과가 후이고 연이 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어찌 연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물단지의 예를 보자. 물과 흙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발생한다. 물단지를 보고 나서야 이에 의해서 물과 흙 등이 물단지의 연들이라는 것을 안다. 물단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찌 물과 흙 등을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하물며 연 아닌 것에서랴?
결과가 미리 연(緣) 속에 있다는 것도 있지 않다는 것도 모두 있을 수 없네. 미리 없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다면 어디에 연을 쓰겠는가? (6)
016_0352_b_08L復次,
果先於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誰緣?
先有何用緣?
또 연(緣) 속에 결과가 미리 있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미리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다면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또한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물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문】 이제까지 모든 연들을 한데 묶어서 타파했다. 이제 연들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016_0352_b_13L問曰:已摠破一切因緣,今欲聞一一破諸緣。
【답】 결과는 있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7)
016_0352_b_14L答曰:
若果非有生, 亦復非無生, 亦非有無生,
何得言有緣?
만일 인연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있으면서 없는 것 이 세 종류일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일 ‘연 속에 결과가 미리 있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 연이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란, 있으면서 없다는 것은 반은 있고 반은 없는 것을 말한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다. 또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모순되고 없는 것은 있는 것과 모순되는데, 어떻게 한 법에 두 상(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세 종류로 결과가 발생하는 모습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라면 소멸하는 일이 있을 수 없네. 소멸한 법이 어떻게 연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등무간연은 있지 않네.
016_0352_c_01L次第緣者,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심법과 심소법은 삼세(三世)에 틈이 없이 발생한다. 현재세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의 소멸함은 미래세의 심법과 심소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 만일 미래세의 법이 이미 있어서 발생한다면 등무간연을 어디에 쓰겠는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은 머물거나 또는 머물지 않거나이다.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등무간연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머문다면 유위법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항상 소멸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소멸했다면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만일 소멸하는 법이 여전히 있다면 이 법은 상주하는 것이다. 만일 상주하는 것이라면 죄와 복 등이 없다. 만일 소멸하고 있을 때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고 한다면, 소멸하고 있는 법이란, 반은 이미 소멸한 법이고 반은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이어서 다시 제3의 법이 없는 것을 소멸하고 있는 법이라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有爲法)들은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한 찰나도 머물 때가 없는데 어떻게 현재세의 법에 소멸하려는 것[欲滅]과 소멸하지 않으려 하는 것[未欲滅]이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한 찰나에 이 소멸하려는 법과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대 자신의 법을 깨뜨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아비달마학파는 “소멸한 법[滅法]이 있고 소멸하지 않은 법[不滅法]이 있으며, 소멸하려는 법이 있고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다. 소멸하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이다.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을 제외한 그 밖의 현재세의 법ㆍ과거세의 법ㆍ미래세의 법ㆍ무위법(無爲法)을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등무간연이 있지 않다.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진실하고 미묘한 법 연(緣)이 없는 이 법에 어떻게 소연연이 있겠는가? (9)
016_0352_c_22L緣緣者,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016_0353_a_01L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승의 법들은,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무형(無形)ㆍ유형(有形)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 등의 모든 법상(法相)들은 법성(法性)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은 다 공하며 상(相)이 없고 연(緣)이 없다. 비유하면 뭇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다같이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다.” 진실한 법을 믿어야 하고, 방편의 말을 진실한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소연연이 있지 않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네.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네. (10)
016_0353_a_06L增上緣者,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경전에서 12연기(緣起)를 말할 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자체에 확정된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다. 있음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증상연이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범부를 따라서 있다 또는 없다고 분별해서 말씀하실 따름이다.
연(緣)에 결과가 없는데도 연에서 나온다 한다면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겠는가? (12)
016_0353_a_19L復次,
若謂緣無果,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또 연에서 결과를 구할 수 없는데 (연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는가? 예를 들어 진흙에 물단지가 없는데 (진흙에서 물단지가 나온다고 한다면), 왜 우유에선 나오지 않는가?
016_0353_a_21L若因緣中求果不可得,何故不從非緣出?如泥中無甁,何故不從乳中出?
016_0353_b_01L
만일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13)
016_0353_a_23L復次,
若果從緣生, 是緣無自性, 從無自性生,
何得從緣生?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네. 결과가 있지 않으니 연과 연 아닌 것 또한 있지 않네. (14)
016_0353_b_03L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또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없는 것[無法]인데, 없는 것이 무엇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란, 연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연 아닌 것이라 말한다. 연 아닌 법은 실제로는 없다. 그러므로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 둘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과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없으니 연도 연 아닌 것도 없다.
【문】 세간에서는 눈으로 이미 간 것[已去]ㆍ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ㆍ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의 3시(時)의 지음[作]이 있음을 본다. 지음이 있으니 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53_b_10L問曰:世閒眼見三時有作:已去、未去、去時。以有作故,當知有諸法。
【답】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016_0353_b_12L答曰: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去]이 없이 감[去業]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016_0353_c_05L復次,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답】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016_0354_a_10L答曰: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만일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가 없는데 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가는 이가 따로 있어서 가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을 것이니 하나는 가는 이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의 감이네. (10)
016_0354_a_16L復次,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또 만일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과실이 있다. 가는 이는 하나인데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하나는 가는 이에게 성립하고 있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에 성립하고 있는 가는 이이다. 가는 이가 성립하고 난 후에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54_b_01L 만일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네.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네. (11)
016_0354_a_23L復次,
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저 가는 이가 있고 후에 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그러므로 3시(時)에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만일 확실하게 결정되어 감이 존재하고 가는 이가 존재한다면 최초의 시작[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3시에서 시작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미 간 것에는 시작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시작이 없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시작이 없네. 어느 곳에서 시작이 있겠는가? (12)
016_0354_b_08L已去中無發, 未去中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왜 그러한가? 3시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016_0354_b_10L何以故?三時中無發?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네. 이 둘에 시작이 있을 것이니,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13)
016_0354_b_11L未發無去時, 亦無有已去, 是二應有發,
未去何有發?
이미 간 것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없네. 모든 것에 시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별하는가? (14)
016_0354_b_13L無去無未去, 亦復無去時,
一切無有發, 何故而分別?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미 간 것도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나 이미 간 것 두 곳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둘 모두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았을 때는 아직 시작이 있지 않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시작이 없으니 감이 없고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 만약 감이 있지 않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지라도 마땅히 머묾과 머무는 이는 있을 것이다.
016_0354_b_19L問曰:若無去、無去者,應有住、住者。
【답】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15)
016_0354_b_20L答曰:
去者則不住, 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
何有第三住?
016_0354_c_01L 만일 머묾이 있고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땅히 제3자가 머무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가고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감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감의 특징[去相]과 모순되는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감이 소멸했을 때 머묾이 있는 것인데 감이 있지 않다면 아예 머묾이 있지 않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머무는 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제3의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나 가지 않는 이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머묾이 있지 않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머묾이 있지 않네. 행(行)과 지(止)의 법도 모두 감의 이치와 동일하네. (17)
016_0354_c_11L復次,
去未去無住, 去時亦無住, 所有行止法,
皆同於去義。
또 만일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간 것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있으면서 머무는 것이리라. 세 곳 모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감과 머묾이 타파되었듯이 행(行)과 지(止)도 타파될 것이다. 행(行)이란 이를테면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相續)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지(止)란 곡식의 씨가 소멸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상속되기에 행(行)이라 이름하고 단절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또 이를테면 무명을 연(緣)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나아가 발생을 연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을 행(行)이라 하고, 무명이 멸하기에 모든 행(行)이 멸하고 하는 따위를 지(止)라고 하는 것과 같다.
016_0355_a_01L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옳지 않네.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18)
016_0355_a_01L去法卽去者, 是事則不然 去法異去者,
是事亦不然。
만일 감이 가는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해도 옳지 않다.
016_0355_a_03L若去法、去者一,是則不然,異亦不然。
【문】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5_a_04L問曰:一異有何過?
【답】 감이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행위자와 행위 이것들이 하나가 될 것이네. (19)
016_0355_a_05L答曰:
若謂於去法, 卽爲是去者, 作者及作業,
是事則爲一。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이 없이 감이 있고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는 것이네. (20)
016_0355_a_07L若謂於去法, 有異於去者,
離去者有去, 離去有去者。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착란(錯亂)된 것이니 인(因)과 연(緣)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를 의존해서 감이 있다. 또 감을 법(法)이라 이름하고 가는 이를 인(人)이라 한다. 인(人)은 상주하는 것이고 법(法)은 무상한 것이다. 만일 같다면, 두 가지 모두가 상주하는 것이 되거나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한 것이 된다. 같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일 다르다면,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감이 아직 있지 않아도 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는 이가 아직 있지 않아도 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으니 하나의 법이 멸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감과 가는 이 이 둘이 만일 같은 법으로 성립한다거나 다른 법으로 성립한다고 한다면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립하는 일이 있겠는가? (21)
016_0355_a_16L復次,
去去者是二, 若一異法成, 二門俱不成,
云何當有成?
또 만일 가는 이와 감이 같은 법으로나 다른 법으로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제3의 법이 성립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과 가는 이가 없는 인연을 말하는 셈이 된다. 이제 다시 말한다.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네. 이전에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는 이와 감이 있지 않네. (22)
016_0355_a_22L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016_0355_b_01L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감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가는 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것ㆍ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과 성읍(城邑)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람이 성읍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감과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이는 감에 의존해서 성립하고 감은 가는 이에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도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24)
016_0355_b_11L復次,
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그러니 감이나 가는 이, 갈 곳이 모두 없네. (25)
016_0355_b_13L去法定不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실재하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는[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本實有]것으로 감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감’이란 몸의 움직임[身動]이다. ‘세 가지의 감’이란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이미 간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존재할 것이고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지 않는[不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本實無]것을 의미한다. 감에 의존할 때 가는 이라 할 수 있는데, 감이 없으니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전에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가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겠는가?
016_0355_c_01L감도 가는 이의 경우와 같다. 만일 이전에 가는 이 없이 감이 실재한다면, 가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이렇게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해 보건대 감ㆍ가는 이ㆍ갈 곳 이 법들은 모두 서로 의존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에 의존해서 감이 있다. 이 두 법에 의존해서 갈 곳이 있는 것이니, 실재한다고 말해서 안 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법(法)은 허망(虛妄)하고 공(空)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어서 환영과 같고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눈[眼]이 안[內]의 근(根)이 되고 색(色)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눈이 색을 보고, 나아가 뜻[意]이 안의 근이 되고 법(法)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뜻[意]이 법(法)을 능히 인식한다.
016_0355_c_12L此中眼爲內情,色爲外塵,眼能見色,乃至意爲內情,法爲外塵,意能知法。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55_c_14L答曰:無也。何以故?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네.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2)
016_0355_c_15L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마치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또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이 봄[見相]을 갖는 것이라면, 자기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송에서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문】 눈은 자기를 볼 수 없긴 하나 다른 것을 볼 수는 있다. 마치 불이 다른 것을 태울 수는 있으나 자기를 태우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016_0355_c_21L問曰:眼雖不能自見,而能見他,如火能燒他,不能自燒。
016_0356_a_01L 【답】 불의 비유는 눈의 봄을 성립시키지 못하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다 이것에 답했네. (3)
016_0355_c_23L答曰: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摠答是事。
그대가 불의 비유를 제시하긴 했지만 눈의 봄[見法]을 성립시키진 못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간 것에 감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듯이, 이미 탄 것과 아직 타지 않은 것과 지금 타고 있는 것 모두에 태움(燒)이 없다. 이렇듯이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과 지금 보고 있는 것 모두에 봄[見相]이 없다.
봄이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 그런데 봄이 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4)
016_0356_a_07L復次,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또 눈이 아직 색을 대하지 않았을 때는 보지 못하니, 그 때를 봄이라 할 수 없다. 색을 대함으로 인하여 봄이라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봄이 볼 수 있겠는가? 또 두 경우 모두 봄이 없다. 왜 그러한가?
봄은 보지 않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네.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 (5)
016_0356_a_13L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봄은 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봄[見相]이 없기 때문이다. 봄[見相]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봄[見法]이 없으니 보는 이도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봄[見]을 떠나서 보는 이가 있다면 눈이 없는 이가 다른 감관[根]으로 보는 것이리라. 만약 봄이 본다면 봄에 봄[見相]이 있는 것이니 보는 이에게는 봄[見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봄이 없어도 봄이 없지 않아도 보는 이를 얻을 수 없네. 보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6)
016_0356_a_21L復次,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016_0356_b_01L 또 봄이 있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봄이 있지 않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있겠는가?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누가 봄에 의해서 바깥의 색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이다.
【답】 색(色)의 원인 없이 색을 얻을 수가 없네. 색 없이 색의 원인을 얻을 수가 없네. (1)
016_0356_b_16L答曰: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
‘색(色)의 원인’이란 베[布]의 원인인 실과 같은 것이다. 실을 없애면 베가 없고 베를 없애면 실이 없다. 베는 색과 같고 실은 색의 원인과 같다.
016_0356_b_18L色因者,如布因縷,除縷則無布,除布則無縷。布如色,縷如因。
【문】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6_b_20L問曰:若離色因有色,有何過?
【답】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면 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2)
016_0356_b_21L答曰:
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예를 들어 실 없이 베가 있다면 이 베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016_0356_b_23L如離縷有布,布則無因。無因而有法,世閒所無有。
016_0356_c_01L
【문】 불교의 법(法), 외도의 법, 세간의 법에 모두 원인이 없는 법이 있다. 불교의 법에는 세 무위(無爲)가 있다. 무위는 상주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다. 외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ㆍ신(神)19)ㆍ미진(微塵)20)ㆍ열반 따위가 있다. 세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 따위가 있다. 이 세 법(法)21)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주하는 것이기에 원인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까닭에 원인이 없는 법이 세간에 없다고 하는가?
【답】 언설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허공은 「6계(界)를 관찰하는 장」에서 타파하는 바와 같다. 그 밖의 것들은 후에 논파할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도 모두 타파되는데 하물며 극미[微塵]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랴?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법은 세간에 없다.
【답】 만일 색 없이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리라. 만일 결과가 없는 원인을 말한다면 옳은 점이 없네. (3)
016_0356_c_16L答曰:
若離色有因, 則是無果因。 若言無果因,
則無有是處。
색이라는 결과가 없이 오직 색의 원인만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다.
016_0356_c_18L若除色果,但有色因者,卽是無果因。
【문】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6_c_19L問曰:若無果有因,有何咎?
【답】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면 사물이 어떻게 원인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破因緣品]22)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 두 경우라면 모두 옳지 않다. 단지 원인이 없이 색이 있을 따름이다.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7_a_06L問曰:若二處俱不然,但有無因,色有何咎?
【답】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네. (5)
016_0357_a_07L答曰:
無因而有色, 是事終不然。 是故有智者,
不應分別色。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나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는 이를 범부라 이름한다. 무명과 탐욕[愛染]으로써 색을 탐착(貪著)하고 그런 후에 그릇된 봄[邪見]으로써 분별과 희론을 일으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거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제 이 중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6)
016_0357_a_16L復次,
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是事亦不然。
또 만일 결과와 원인이 서로 유사하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원인은 미세하고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색은 힘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베가 실과 유사하다면 베라 이름할 수 없다. 실은 다(多)이고 베는 일(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삼[麻]의 실은 명주를 이루지 않듯이 거친 실은 미세한 베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주장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색도 없고 색의 원인도 없는 것이다.
016_0357_b_01L
수온[受蔭]ㆍ상온[想蔭]ㆍ 행온[行蔭]ㆍ식온[識蔭] 등 여타의 모든 법은 다 색온[色蔭]과 동일하네. (7)
016_0357_b_01L受陰及想陰, 行陰識陰等, 其餘一切法,
皆同於色陰。
(나머지) 네 온(蔭)과 모든 법도 이와 같이 사유해서 논파해야 한다. 또 이제 논을 짓는 이는 공성의 이치를 찬미하고자 게송을 읊는다.
016_0357_b_03L四陰及一切法,亦應如是思惟破。又今造論者欲讚美空義故,而說偈:
만일 어떤 자에게 묻는 자가 있을 때 (어떤 자가) 공성(空性)이 없이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8)
016_0357_b_05L若人有問者, 離空而欲答, 是則不成答,
俱同於彼疑。
만일 어떤 자가 논박하고자 할 때 공성(空性)이 없이 그 과실을 말한다면 이것은 논박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9)
016_0357_b_07L若人有難問, 離空說其過,
是不成難問, 俱同於彼疑。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는 제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공성(空性)의 이치가 없이 묻고 답한다면, 물음은 물음이 되지 못하고 답은 답이 되지 못해서 모두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어떤 자가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말했을 때 묻는 자가 “무엇에 근거해서 무상하다고 하는가?” 했다고 하자. 이 물음에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라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어 그것23)이 상주하는 것인지 무상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이것24)은 그가 의심하는 것25)과 같게 된다.
만일 묻는 자가 그 과실을 말하고자 할 때 공성에 의지해서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논박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상함에 의거해서 나의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나도 상주함에 의거해서 그대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상주함이 없다면 업보가 없을 것이다. 눈[眼]ㆍ귀[耳] 등 법(法)들이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분별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논박이 되지 못하고 그가 의심하는 것26)과 같게 된다. 만일 공성(空性)에 의거해서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공성의 상(相)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고자 한다면 공성[空法]에 의거해야 하는데 하물며 고(苦)가 없는 적멸[寂滅相]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016_0357_c_01L 【문】 6계(界)에는 각각 확정된 상(相)이 있다. 확정된 상이 있기 때문에 6계가 있다.
016_0357_b_23L問曰:六種各有定相,有定相故,則有六種。
【답】 허공의 상(相)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허공은 없네. 만약 미리 허공이 있다면 상(相)이 없는 것이 되네. (1)
016_0357_c_02L答曰:
空相未有時, 則無虛空法。 若先有虛空,
卽爲是無相。
만약 아직 허공의 상(相)이 있지 않은데 미리 허공이 있다면 허공은 상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色)이 없는 공간[處]이 허공의 상이기 때문이다. 색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무상하다.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에는 허공의 상이 없을 것이다. 색에 의존해서 색이 없는 공간이 있다. 색이 없는 공간을 허공의 상(相)이라 한다.
【답】 이 상(相)이 없는 법은 어떤 곳에도 있지 않네. 상이 없는 법에 있어서 상은 상을 띠는 일[所相]이 없네. (2)
016_0357_c_10L答曰: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만약 상주하는 법(法)과 무상한 법 중에서 상(相)이 없는 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없다. 논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유위와 무위가 어떻게 각각 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답한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有爲)의 상이고,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없음은 무위(無爲)의 상이다. 만약 허공이 상이 없는 것이라면 허공은 있지 않다. 만약 전에는 상이 없다가 후에 상이 와서 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전에 상이 없다면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상(相)을 갖는 것에도 상을 갖지 않는 것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3)
016_0357_c_18L有相無相中, 相則無所住。 離有相無相,
餘處亦不住。
016_0358_a_01L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뿔이 있는 것,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 것,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는 것, 이것들이 소의 상(相)이다. 이 상들을 떠나서 소는 있지 않다. 만약 소가 있지 않다면 이 상들이 거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상을 갖지 않는 법에서 상은 상을 띠는 일이 없다. 상을 갖는 법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水相]에 불의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자기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상을 갖지 않는 법에 상이 거주한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것을 무[無法]라 한다. 상을 갖는 것[有相]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항상 서로 의존[因待]하기 때문이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나 다시 제3의 장소에서 상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송에서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하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상이 있지 않고 상을 띠게 하는 것도 있지 않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 다시 사물[物]이 있지 않네. (5)
016_0358_a_12L是故今無相, 亦無有可相, 離相可相已,
更亦無有物。
인과 연들 속에서 처음에서 끝까지 구해 보아도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확정을 얻을 수 없다. 이 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들은 다 있지 않다. 모든 법들은 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두 법에 포함된다. 어떤 때는 상(相)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되고 어떤 때는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상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불의 상이 되고 다시 불이 연기의 상이 되는 경우와 같다.
【답】 유(有)가 없다면 어떻게 무(無)가 있겠는가? 유와 무가 이미 없으니 유와 무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6)
016_0358_a_20L答曰:
若使無有有, 云何當有無? 有無旣已無,
知有無者誰?
016_0358_b_01L 무릇 사물[物]이 스스로 괴멸했거나 다른 것에 의해 괴멸했다면 이를 무(無)라 한다. 무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유(有)에 의지해서 있다. 그러므로 유가 없다면 어떻게 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사물의 무이겠는가?
【답】 만약 (유와 무를) 아는 자가 있다면 유에 있거나 무에 있을 것이다. 유와 무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유와 무를) 아는 자도 같이 타파된다.
016_0358_b_04L答曰:若有知者,應在有中,應在無中。有無旣破,知者亦同破。
그러므로 허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다섯도 허공과 같네. (7)
016_0358_b_05L是故知虛空, 非有亦非無, 非相非可相,
餘五同虛空。
허공에서 갖가지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그 밖의 다섯 가지27)도 이와 같다.
016_0358_b_07L如虛空,種種求相不可得;餘五種亦如是。
【문】 허공은 최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최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먼저 타파하는가?
016_0358_b_09L問曰:虛空不在初,不在後,何以先破?
【답】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은 연들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타파된다. 식(識)은 고(苦)와 낙(樂)의 원인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이하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논파된다. 허공은 이와 같은 상(相)이 없고 단지 범부가 있다고 희망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타파한다. 또 허공은 4대(大)를 지닌다. 4대를 인연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근본이 되는 것을 타파하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타파된다.
【문】 세간의 사람들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을 본다. 그대는 왜 홀로 세상과 상반되게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16_0358_b_14L問曰:世閒人盡見諸法是有是無,汝何以獨與世閒相違,言無所見?
【답】 지혜가 얕은 사람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를 보네. 그러니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하네. (8)
016_0358_b_16L答曰:
淺智見諸法, 若有若無相, 是則不能見,
滅見安隱法。
016_0358_c_01L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 도(道)를 얻지 못했다면 법들의 실상(實相)을 보지 못한다. 봄[見]을 사랑하기 때문에 갖가지 희론이 생긴다. 법(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이를 있다[有]고 여겨서 상(相)을 취해 “있다”라고 말한다.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단멸한다[斷]고 여겨서 상을 취해서 “없다”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이[智者]는 모든 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없다고 보는 것[無見]을 멸하고,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있다고 보는 것[有見]을 멸한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법들을 보는 것[所見]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환영과 같고 꿈과 같다. 나아가 무루도(無漏道)를 보는 것[見]도 멸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보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한다면 있음[有]를 보거나 없음[無]을 보게 된다.
【문】 경전에서 탐욕ㆍ증오[瞋恚]ㆍ무지[愚癡]는 세간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애(愛)라고도 하고 착(著)이라고도 하고 염(染)이라고도 하고 음욕(婬欲)이라고도 하고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름들이 있다. 이것은 결사(結使)로서 중생에 의지한다. 중생을 물든 자[染者]라 하고 탐욕을 물듦[染法]이라 한다. 물듦과 물든 자가 있기 때문에 탐욕이 있다. 그 밖의 둘도 이와 같다. 증오[瞋]가 있기에 증오하는 자[瞋者]가 있고 무지[癡]가 있기에 무지한 자[癡者]가 있다. 이 3독(毒)이 인연이 되어서 3업(業)28)이 일어난다. 3업이 인연이 되어서 3계(界)29)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이 있다.
【답】 경전에서는 비록 3독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체를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58_c_12L答曰:經雖說有三毒名字,求實不可得。何以故?
만약 탐욕[染法]을 떠나 먼저 스스로 탐욕을 내는 이[染者]가 있다면 이 탐욕을 내는 이[染欲者]에 의존해서 탐욕이 생길 것이네. (1)
016_0358_c_14L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만약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탐욕이 있겠는가?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 (2)
016_0358_c_16L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다시 탐욕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가 이미 탐욕을 냈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또한 다시 탐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탐욕을 내는 이가 있고 나서야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탐욕[染法]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먼저 사람이 없이 탐욕이 있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마치 장작이 없이 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 탐욕이 없다면 탐욕을 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59_a_01L【문】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전후로 서로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59_a_02L問曰:若染法、染者先後相待生,是事不可得者,若一時生,有何咎?
【답】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라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3)
016_0359_a_03L答曰:
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이 있거나 탐욕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을 내는 이가 있다면, 이 둘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원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과실이 많아 해탈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타파해야 하겠다. 왜 그러한가?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같다면 같은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다르다면 다른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016_0359_a_10L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같은 법으로 합하거나 다른 법으로 합한다. 만약 같다면 합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같은 법이 어떻게 자기와 합하겠는가? 마치 손가락 끝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듯이. 만약 다른 법으로 합한다면 이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법으로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 성립해 있기에 끝내 다시 합할 필요가 없다면, 설령 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르다. 또 같음과 다름을 모두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같아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달라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5)
016_0359_a_18L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016_0359_b_01L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같기에 합한다고 억지로 그래 본다면, 여타의 인연이 없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또 만약 같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 두 이름이 있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법(法)이고 탐욕을 내는 이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과 법이 같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다르기에 합한다고 말한다면 여타의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합할 것이다. 만약 다른데도 합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합할 것이다.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이미 다름이 성립해 있는데 왜 합한다고 말하는가? (7)
016_0359_b_09L復次,
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또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그대는 지금 왜 굳이 합함을 말하는가?
016_0359_b_11L若染、染者先各成別相,汝今何以强說合相?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그대는 합하고자 하네. 합함이 끝내 성립하지 않기에 다시 다름을 말하네. (8)
016_0359_b_13L復次,
異相無有成, 是故汝欲合,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또 그대는 이미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합함[合相]을 말한다. 그러나 합함에는 과실이 있다.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성립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합함을 성립하게 하기 위해 다시 다름[異相]을 말한다. 그대 스스로 확정해 놓고서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셈이다.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