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016_0360_a_11L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발생은 발생하는 법(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360_b_01L【답】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ㆍ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3상(相)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016_0360_b_04L復次,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016_0360_b_13L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만일 발생ㆍ머묾ㆍ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문】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360_b_19L問曰:汝說三相爲無窮,是事不然。生、住、滅雖是有爲,而非無窮。何以故?
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016_0360_b_21L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016_0360_c_01L 법(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016_0360_c_10L復次,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문】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016_0361_a_16L問曰:是燈非未生有照,亦非生已有照。但燈生時,能自照,亦照彼。
【답】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016_0361_a_18L答曰:
云何燈生時, 而能破於闇? 此燈初生時,
不能及於闇。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016_0361_b_13L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법(法)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016_0361_b_21L復次,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016_0361_c_01L 또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作]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발생한 법(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법(法)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緣)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a_01L【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緣]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답】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법(法)이 뭇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016_0362_b_05L復次,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緣)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불[燃]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문】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16_0362_b_20L問曰:定有三世別異,未來世法得生,因緣卽生,何故言無生?
【답】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016_0362_b_22L答曰: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016_0362_c_01L
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c_01L若未來世中有未生法而生,是法先已有,何用更生有法?不應更生。
【문】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相)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362_c_03L問曰:未來雖有,非如現在相,以現在相故說生。
【답】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2)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법(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016_0362_c_17L復次,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3_a_01L 만일 법(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016_0362_c_22L復次,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법(法)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답】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016_0363_a_10L答曰: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만일 법(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016_0363_a_18L復次,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016_0363_b_07L復次,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또 머무는 법(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緣)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016_0363_c_01L
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016_0363_c_01L復次,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이 법은 이때에, 이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016_0363_c_09L復次,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만일 법(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016_0363_c_20L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016_0364_a_01L 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6_0363_c_22L諸法有時,推求滅相不可得。何以故?云何一法中亦有亦無相?如光影不同處。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016_0364_a_02L復次,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016_0364_a_04L法若無者,則無滅相。如第二頭、第三手,無故不可斷。
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016_0364_a_06L復次,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緣)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없다. 자체가 없기에 다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소멸 또한 그와 같다.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34)
016_0364_a_15L復次,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016_0364_b_01L 또 그대는 앞에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있기에 유위법이 있으며 유위법이 있기에 무위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치에 맞게 궁구해 보건대 3상(相)은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유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상(相)이 없는 법(法)은 없다고 말한 바와 같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위의 상은 발생하지 않음ㆍ머물지 않음ㆍ소멸하지 않음이다. 유위의 상이 그쳤기에 무위의 상이라 한다. 무위 자체에는 별도의 상이 없다. 이 세 가지 상3)에 의지해서 무위의 상이 있는 것이다. 가령 불[火]에는 뜨거움의 상이 있고 땅[地]에는 단단함의 상이 있고 물[水]에는 차가움의 상이 있지만 무위는 그렇지 못하다.
【문】 만일 이 발생ㆍ머묾ㆍ소멸이 필경 있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논서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는가?
016_0364_b_03L問曰:若是生、住、滅畢竟無者,云何論中得說名字?
【답】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이 말한 바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그 상(相)이 또한 이와 같네. (35)
016_0364_b_04L答曰:
如幻亦如夢, 如乾闥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생상과 주상과 멸상은 확정된 것[決定]이 없다. 범인(凡人)은 탐착(貪著)해서 확정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인들께서는 연민을 품고 그 전도(顚倒)를 그치게 하고자 다시 그 탐착된 이름[名字]을 갖고서 말한다. 말[語言]은 동일하지만 그 의도[心]가 다르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기에 논박이 있을 수 없다. 마치 환영이나 화작(化作)된 것과 같으니, 그 유래하는 바를 물어 따질 수 없으며, 그 속에 슬픔과 기쁨의 표상[想]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실체를 구할 수 없다. 건달바성과 같은 것은 해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저 실체가 없이 이름을 쓰는 것일 뿐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범부는 분별해서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016_0364_c_01L【답】 이제까지 매 장에서 모든 법을 타파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3상(相)을 타파하는 경우를 보자. 3상이 있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고, 유위가 있지 않기에 무위가 있지 않다. 유위와 무위가 있지 않기에 모든 법이 있지 않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유위라면 유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고 만약 무위라면 무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다. 다시 묻지 않아야 하는데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이 깊어 다시 묻고 있다. 이제 다시 답하겠다.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없네. 이 행위에는 행위자가 없네. 실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지음이 없네. 행위자에게 또한 행위가 없네.(2)
016_0364_c_07L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만약 먼저 행위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행위자 없이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가 있지 않을 않을 것이다. 또 행위 없이 행위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행위자와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있을 수 없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와 실재하지 않는 행위에도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본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어도 지음이 없거늘, 하물며 행위자가 있지 않고 행위가 있지 않은 경우이겠는가?
【문】 만약 인연에 의존하지 않고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64_c_22L問曰:若不從因緣,有作者、有作業,有何咎?
016_0365_a_01L 【답】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것이네.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는 것이네. (4)
016_0364_c_23L答曰: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약 지음 등이 없다면 죄와 복이 없네. 죄와 복 등이 없으니 죄와 복의 과보(果報)도 없네. (5)
016_0365_a_02L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약 과보가 없다면 또한 열반도 없네. 모든 있을 수 있는 지음이 모두 공허해서 결과가 없게 되네. (6)
016_0365_a_03L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모든 법들은 원인이 없고 결과가 없는 것이 된다. ‘발생하게 하는 법’을 원인이라 하고 ‘발생하는 법’을 결과라 하는데 이 둘이 없게 된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다. 또한 죄와 복도 없다.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과보 및 열반의 도(道)가 없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
【문】 만약 행위자가 없고 행위가 없다면 지음[所作]이 있을 수 없다. 이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으니 지음[作]이 있을 것이다.
016_0365_a_13L問曰:若無作者、無作業,不能有所作,今有作者、有作業,應有作。
【답】 실재하면서 실재하는 않는 행위자가 두 행위를 할 수 없네.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네. (7)
016_0365_a_15L答曰: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다. 존재는 확정된 것[決定]이고 비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것[不決定]이다. 한 사람 한 사물에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있겠는가?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8)
016_0365_a_21L復次,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016_0365_b_01L 또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행위가 존재한다면 또한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한다면 행위자가 다시 무엇을 짓겠는가?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다면 죄와 복 등의 인연과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을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라고 말한 것이다.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9)
016_0365_b_07L復次,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또 실재하는 행위는 이미 타파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다. 지금은 일시에 모든 것을 타파하고자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자는 세 가지의 행위를 짓지 않는다. 이제 세 가지의 행위자 또한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답】 이 행위는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다. 가명(假名)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말하는 바와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5_b_19L答曰:是業從衆緣生,假名爲有,無有決定,不如汝所說。何以故?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에 의존해서 행위가 있네. 행위를 성립시키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이 밖에 다른 것이 없네. (11)
016_0365_b_21L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016_0365_c_01L 행위에 미리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의존해서 행위를 일으키고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다. 행위자 또한 확정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라고 하는 것이다. 둘이 화합하기 때문에 행위와 행위자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화합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고 공하기에 발생하는 것[所生]이 없는 것이다. 그저 범부가 기억하고 표상해서 분별하는 대로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행위가 있지 않고 행위자가 있지 않다.
행위와 행위자와 같이 취착(取著)과 취착하는 자도 타파되네. 그리고 모든 법들도 이와 같이 타파되네. (12)
016_0365_c_06L復次,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또 행위와 행위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확정되지 않으며 확정된 것이 없기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이,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이와 같다. ‘취착(取著)’이란 5온(蘊)의 몸[身]을 말한다. ‘취착하는 자’란(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이렇듯이 사람을 떠나 5온이 있지 않으며 5온을 떠나 사람이 있지 않으니, 단지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데 이것을 선행하는 존재[本住]라고 하네. (1)
016_0365_c_14L問曰:有人言: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만약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누가 안[眼] 등의 법을 소유하겠는가? 그러니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2)
016_0365_c_17L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이라고 한 것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명(命) 등의 모든 근(根)들을 이름한 것이다.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이라고 한 것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ㆍ상(想)ㆍ사(思)ㆍ억념(憶念) 등 심법과 심소법을 이름한 것이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서 안(眼) 등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어서 이 선행하는 존재에 의존해서 안(眼) 등의 모든 근이 증장(增長)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신(身)과 안[眼] 등의 모든 근은 무엇에 의존해서 증장할 수 있겠는가?”
016_0366_a_01L 【답】
만약 안(眼) 등의 근과 고(苦)ㆍ낙(樂) 등의 법을 떠나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3)
016_0366_a_01L答曰:
若離眼等根,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말할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바깥의 법(法)인 물단지ㆍ옷 등은 안(眼) 등 근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안의 법은 고(苦)ㆍ락(樂) 등의 근에 의해 알 수 있다. 경전에서 “괴멸하는 것[可壞]이 색(色)의 특징이고, 느끼는 것[能受]이 수(受)의 특징이고, 인식하는 것[能識]이 식(識)의 특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안(眼)과 이(耳), 고(苦)와 낙(樂) 등을 떠나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엇에 의해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말할 수 있는가?
【문】 어떤 논사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보며 눈짓하는 것, 수명, 사유, 고(苦)와 낙(樂), 증오와 애정, 움직임 등이 ‘나[神]’의 특징이다. 만약 ‘나[神]’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등의 특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답】 만약 이 ‘나’가 있다면 몸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치 벽 속에 기둥이 들어 있듯이. 만약 (‘나’가) 몸 바깥에 있다면 마치 사람이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몸 안에 있다면 몸은 괴멸할 수 없을 것이다. ‘나’가 항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몸 바깥에 있어서 몸을 덮는 것이 갑옷과 같다면 몸은 보이질 않을 것이다. ‘나’가 세밀하게 덮고 있기 때문이다. 또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몸이 괴멸하는 것을 실제로 본다. 그러므로 고와 낙 등을 떠나 앞서서 여타의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팔을 잘라냈을 때 ‘나’는 움츠러들어 안에 있어서 잘라낼 수 없다고 말한다면 머리를 잘라냈을 때도 움츠러들어 안에 있기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고와 락 등을 떠나 앞서서 ‘나’가 있다고 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016_0366_b_01L또 만약 몸이 크면 ‘나[神]’도 크고 몸이 작으면 ‘나’도 작은 것이 등불이 크면 밝음도 크고 등불이 작으면 밝음도 작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몸을 따르는 것이기에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몸을 따르는 것이라면 몸이 없을 때 ‘나’도 없을 것이다. 마치 등불이 사라지면 밝음도 사라지듯이.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안(眼)과 이(耳), 고(苦)와 락(樂) 등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을 떠나 앞서서 별도의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가령 중풍[風狂病]에 걸린 사람이 의지대로 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나’가 모든 행위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중풍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를 떠나서 따로 하는 짓이 있는 것이리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궁구해 보아도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굳이 말한다면 이런 일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안과 이 등이 있을 것이네. (4)
016_0366_b_12L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있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근과 고와 락 등의 법도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있을 것이다.
016_0366_b_14L若本住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者,今眼耳等根、苦樂等法亦應離本住而有。
【문】 둘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선행하는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다.
016_0366_b_17L問曰:二事相離可爾,但使有本住。
【답】 법(法)에 의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며 사람에 의해 법이 있다는 것을 아네. 법 없이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 없이 어떻게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5)
016_0366_b_18L答曰: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법(法)’이란 안(眼)과 이(耳), 고와 낙 등이다. ‘사람’이란 선행하는 존재이다. 그대가 법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있기에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법이 없이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이 없이 어찌 안과 이 등의 법이 있겠는가?
016_0366_c_01L
모든 안(眼) 등의 근(根)에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들이 각각 다르게 분별하는 것이네. (6)
016_0366_c_01L復次,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낙 등의 모든 법에는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실재하지 않는다. 안(眼)이 색에 의존해서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인과 연들이 화합하기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이 있다는 것을 알지,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모든 안 등의 근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이 각각 분별하는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안(眼) 등의 모든 근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 등 하나하나의 근이 어떻게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7)
016_0366_c_08L問曰: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만약 모든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지금 하나하나의 근이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에는 사유 작용이 없기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을 떠나 다시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있다.
【답】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의 근 속에 각각 인식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 한 인식하는 자가 근들 속에 있는 것인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66_c_14L答曰:若爾者,爲一一根中各有知者?爲一知者在諸根中?二俱有過。何以故?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와 같은 근들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네. (8)
016_0366_c_16L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만약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 자는 한 ‘나[神]’이다. 이와 같이 안 등의 근들에는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어서 색(色)ㆍ성(聲)ㆍ향(香) 등을 고유하게 인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혹은 눈[眼]으로 소리[聲]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여섯 감관[六向]을 갖고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듣는 것과 같다. 만약 듣는 자와 보는 자가 같다면 안 등의 근(根)으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67_a_01L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많을 것이네. (9)
016_0367_a_01L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보는 자를 떠나서 듣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鼻)ㆍ설(舌)ㆍ신(身)에 있어서도 ‘나[神]’는 일시에 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인데 ‘나’는 많을 것이다. 모든 감관[根]이 일시에 대상[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
【답】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眼) 등도 있지 않을 것이네. (11)
016_0367_a_15L答曰: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만약 안(眼)과 이(耳)나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S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이 안과 이 등이 있겠으며 무엇을 연(緣)으로 해서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도 있지 않다.
016_0367_a_18L若眼耳苦樂等諸法無有本住者,誰有此眼耳等?何緣而有?是故眼耳等亦無。
안(眼) 등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네. 지금도 후에도 다시 있지 않네. 삼세(三世)에 있지 않으니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이 없네. (12)
016_0367_a_21L復次,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016_0367_b_01L 또 선행하는 존재[本住]를 사유하고 궁구해 보아도 안(眼) 등보다 이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삼세에 있지 않다면 발생이 없고 적멸해 있는 것이므로, 논박이 있을 수 없다.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눈 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가운데 희론이 사라졌으며 희론이 사라졌으니 모든 법들이 공하다.
【문】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有]’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016_0367_c_01L【답】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016_0367_c_02L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불은 태우는 것[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作]은 행위[業]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 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016_0367_c_13L復次,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作]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016_0368_a_01L【답】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016_0367_c_23L答曰: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문】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016_0368_a_20L問曰:
燃與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016_0368_a_22L燃與可燃異,而能至可燃,如男至於女,如女至於男。
016_0368_b_01L 【답】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016_0368_b_01L答曰: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문】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016_0368_b_08L問曰:燃、可燃相待而有,因可燃有燃,因燃有可燃,二法相待成。
【답】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016_0368_b_10L答曰: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016_0368_b_22L復次,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爲可燃中,
則爲無有燃。
016_0368_c_01L
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법[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016_0368_c_08L復次,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定]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016_0368_c_14L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016_0369_a_02L復次,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016_0369_a_18L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016_0369_b_01L
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의 있음과 법(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016_0369_b_01L是故,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品)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나[我]’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색(色)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답】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최초의 궁극은 얻을 수 없네. 생사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1)
016_0369_b_16L答曰: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성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5신통(五神通)9)의 외도(外道),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 셋째는 신통(神通)을 얻은 대보살이다. 부처님은 세 부류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최초와 최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최초와 최후가 없다면 중간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태어남이 전에 있고 늙음ㆍ죽음이 후에 있다면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게 되고 태어남이 없이 늙음ㆍ죽음이 있게 되리라. (3)
016_0369_c_06L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만약 늙음ㆍ죽음이 전에 있고 태어남이 후에 있다면 이것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리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 (4)
016_0369_c_08L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태어나고 죽는 중생에게 만약 전에 태어남이 있고 잠시 늙음이 있고 후에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물[法]의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고 늙음ㆍ죽음에는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태어남에 의존하지 않고서 늙음ㆍ죽음이 있게 된다.10) 만약 전에 늙음ㆍ죽음이 있고 후에 태어남이 있다면 늙음ㆍ죽음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태어남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11)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은 전과 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함께할 수 없네. 태어날 때 죽음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은 다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네. (5)
016_0369_c_16L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라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태어날 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法]은 태어날 때에는 있고 죽을 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태어날 때 죽음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생긴다면12)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소의 뿔이 동시에 나오기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 느낌과 느끼는 자 등의 모든 법들, (7)
016_0370_a_04L復次,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들도 모두 최초의 궁극이 없네. (8)
016_0370_a_06L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또 ‘모든 법들’이란 이른바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 느낌[受]과 느끼는 자[受者] 등을 말한다. 모두 최초의 궁극[本際]이 없다. 비단 생사에만 최초의 궁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보여 주고자 생사에는 최초의 궁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고(苦)를 말하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 (1)
016_0370_a_11L有人說曰: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어떤 이는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자기가 짓는 것이면서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란, 중생은 뭇 연(緣)에 의해 고(苦)에 이르게 되고, 고를 싫어해서 멸하고자 하지만 고의 진정한 연들을 알지 못해서 네 가지 오류13)를 범하므로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온(蘊)이 있기에 저 온(蘊)이 발생하는 것이네. (2)
016_0370_a_19L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란 자성(自性)에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세(前世)의 5온[蔭]에 의존해서 후세의 5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자기가 짓는 것일 수 없다.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고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실이 천과 다르다면 실을 떠나서 천이 있고 실을 떠나서 천이 있지 않다면 천은 실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듯이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고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지 않다면 이 5온은 저 5온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苦)가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 자기가 고(苦)를 짓는다면 개체[人]마다 자기가 고를 짓고 자기가 고를 받을 것이다.
016_0370_b_12L問曰:自作者是人,人自作苦,自受苦。
【답】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어떤 개체가 있기에 그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4)
016_0370_b_13L答曰: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5온의 고를 떠나 어디에 따로 개체가 있기에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일까? 이 개체를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체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짓는 고(苦)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짓는 고가 성립하겠는가?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네. (7)
016_0370_c_06L復次,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가 고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와 타자[此彼]는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그 타자에게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파했다. 그대가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고(苦)는 자체가 짓는 것이 아니네. 사물[法] 자체가 사물을 짓는 것이 아니네. 타자는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가 고를 짓겠는가? (8)
016_0370_c_13L復次,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또 자체가 고(苦)를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가령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없듯이 사물[法]은 자체가 법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고(苦)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고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다면 타자가 고를 지을 것이다. 타자 또한 고인데 어떻게 고가 고를 짓겠는가?
【답】 만약 자기나 타자가 고(苦)를 짓는 것이라면 양자가 고를 짓는 것이리라. 자기나 타자가 짓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겠는가? (9)
016_0370_c_21L答曰: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尚無作,
何況無因作。
016_0371_a_01L 자기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과실이 있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랴? 원인이 없다면 많은 과실이 있다. 행위와 행위자를 타파하는 장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6_0370_c_23L自作、他作猶尚有過,何況無因作。無因多過,如「破作作者品」中說。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10)
016_0371_a_02L復次,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또 불교에서 5취온[聚陰]을 고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어떤 외도의 사람들은 고수(苦受)를 고(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물들인 대지ㆍ강ㆍ산ㆍ나무 등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문】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네. 모든 행(行)들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기에 이는 속이는 것이네. (1)
016_0371_a_09L問曰:
如佛經所說, 虛誑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誑。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속이는 것[虛誑]은 허망하게 취한 것[妄取相]이다. 제일의 진실(眞實)은 열반이니, 허망하게 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까닭에 모든 행(行)들은 속이는 것이며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면 이 중에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하셨네. (2)
016_0371_a_15L答曰:
虛誑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만약 허망하게 취한 것은 속이는 것이라면 이 행들 중에서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空義)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71_a_17L若妄取相法,卽是虛誑者,是諸行中,爲何所取?佛如是說,當知說空義。
【문】 모든 행(行)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016_0371_a_19L問曰:云何知一切諸行皆是空?
016_0371_b_01L【답】 모든 행(行)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모든 행들은 발생하고 소멸해서 머물지 않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모든 행들이란 5온이다. 행에서 생긴 것이기에 5온은 행이다. 이 5온은 다 허망해서 확정된 상[定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면 갓난애 때의 색(色)은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어린애[童子] 때의 색이 아니다. 어린애 때의 색은 청년[壯年]일 때의 색이 아니다. 청년일 때의 색은 노년일 때의 색이 아니다. 색과 같은 것은 찰나찰나 (생멸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을 분별할 수 없다.
갓난애 때의 색은 기어다니는 애 때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다면, 오로지 이 갓난애 때의 색이 있을 뿐이어서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 가령 진흙덩어리 같은 것은 항상 진흙덩어리여서 결코 물단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이 항상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과 다르다면, 갓난애는 걸어다니는 애가 되지 않을 것이고 걸어다니는 애는 갓난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두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애[童子]ㆍ소년(少年)ㆍ청년ㆍ노년의 색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혈연 관계[親屬法)를 상실해서 아버지가 없게 되고 자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갓난애만이 아버지를 얻게 되고 여타의 것 즉 기어다니는 애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는 (상속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문】 색이 확정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고 난 후 상속해서 다시 발생해서 나아가(=어린애ㆍ소년ㆍ청년) 노년의 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과실이 없다.
016_0371_b_16L問曰:色雖不定嬰兒色,滅已,相續更生,乃至老年色,無有如上過。
【답】 갓난애의 색이 상속해서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나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장작과 불이 있다 하더라도 불이 소멸했을 때는(꺼졌을 때는) 상속하지 않는다.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갓난애의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상주하는 본체[本相] 또한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문】 나는 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머묾이 없이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기에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016_0371_b_23L問曰:我不說滅不滅故相續生,但說不住相似生故,言相續生。
016_0371_c_01L【답】 만약 그렇다면 확정된 색이 있고 (색들이 거듭해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가지의 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또한 상속이 없다. 이렇듯 모든 곳에서 색을 구해 보아도 확정된 상[定相] 없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파초나무[芭蕉樹]는 실체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껍질과 잎이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색의 상(相)을 구할 때 찰나찰나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실체의 색[實色]을 얻지 못하므로 색의 형체[色形]나 색의 상[色相]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유사하게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등불과 같은 것에서 확정된 색[定色]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고자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색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14)
수(受)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가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해서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치 물의 흐름이 상속(相續)하는 것과 같다. 그저 거칠게 지각해서[覺] 세 가지 수(受)가 몸에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受)도 색과 동일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5) 상(想)은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발생한다. 이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름[名字相]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想)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먼저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와 같다. 형체에 의지해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지 않다면 그림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에는 확정된 자성이 없다. 만약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형체 없이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상(想)도 이와 같다. 단지 바깥의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존재할 따름이다.16)
016_0372_a_01L식(識)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눈[眼] 등의 근(根)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식도 상이하다.17) 이 식은 색에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그 중간에 있는가? 확정되지 않는다. 단지 발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고 이 사람을 인식하고 저 사람을 인식한다. 이 사람을 아는 인식은 저 사람을 아는 인식과 같은가, 다른가?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안식과 이식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다고도 말하고 다르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구별이 없다. 단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지해서 눈[眼] 등을 구별하는 것이기에 공하고 자성이 없다. 마치 마술사[伎人]가 구슬 하나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내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본래의 구슬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듯이, 식(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할 때 본래의 식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러므로 식은 머묾[住]이 없기에 자성이 없다. 속이는 것[虛誑]이어서 환영과 같다.18) 모든 행(行)도 이와 같다.
모든 행이란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와 의행(意行)이다.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것들인가? 중생을 뇌란(惱亂)하게 하는 탐착(貪著) 따위를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라 한다. 중생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말과 탐착하지 않음 등을 청정한 것[淨]이라 한다. 어떤 때는 감소하고 어떤 때는 증가한다. 청정한 행(行)은, 인간[人]이나 욕천(欲天)이나 색천(色天)이나 무색천(無色天)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청정하지 않은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감소했는데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그러므로 행들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묾[住]이 없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하게 병을 잘 다스리면 낫지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행은 이와 같아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다고 할 따름이다.19)
016_0372_b_01L세제(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명에 의존해서 모든 행이 있고, 모든 행에 의존해서 식(識)의 집착이 있고, 식의 집착에 의존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존해서 6입(入)이 있고, 6입에 의존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의존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의존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의존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의존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의존해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에 의존해서 늙음과 죽음[老死]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恩愛別苦]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은 고(苦)들은 모두 행(行)을 근본으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세제에 의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어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명(無明)이 그친다. 무명이 그치기에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기에 4제(諦)20)를 볼 때 끊어지는[見諦所斷] 견(見)ㆍ의(疑)ㆍ계금취(戒禁取) 따위가 끊어지고 수습(修習)을 할 때 끊어지는[思惟所斷] 탐욕ㆍ증오ㆍ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조희(調戲)ㆍ무명도 끊어진다.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분지[分]가 소멸한다. 이른바 무명ㆍ모든 행ㆍ식ㆍ명색ㆍ6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 따위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들이 소멸하기에 5온의 몸[身]이 완전히 소멸해서 다시 남는 것이 없으니 오직 공성[空]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 주고자 “모든 행은 속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기에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기에 공하다. 이렇게 게송을 읊는다.
016_0372_b_14L復次,諸法無性故虛誑,虛誑故空。如偈說: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자성이 없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3)
016_0372_b_15L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비록 발생하더라도 자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갓난애가 확정되어 자성에 머문다면 결코 기어다니는 애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노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갓난애는 순차적으로 상속하고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기어 다니는 애가 현현하고 나아가 노년이 현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보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약 모든 법에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72_b_22L問曰:若諸法異相無性,卽有無性法,有何咎?
016_0372_c_01L【답】 자성이 없는데 어찌 법(法)이 있겠으며 어찌 상(相)이 있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성을 논파하고자 자성이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면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데 어찌 자성이 없는 법이 있겠는가?
이 법이 변이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네. 마치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수 없고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없듯이. (6)
016_0372_c_14L復次,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또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마땅히 변이의 상(相)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이 변이하든가, 다른 법이 변이하든가 이다. 이 둘은 옳지 않다. 만약 바로 이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은이가 그대로 늙은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는 젊은이와 다른 것이니,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21)에 과실이 있다.
【문】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지금 눈에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세월이 지나 늙은이가 되는 것이 보이는 경우와 같이.
016_0372_c_21L問曰:若法卽異,有何咎?如今眼見年少,經日月歲數則老。
016_0373_a_01L 【답】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네. 우유 외에 어떤 사물[法]이 있어서
타락[酪]이 될 수 있겠는가? (7)
016_0372_c_22L答曰: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어서 다시 인과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우유와 타락은 여러 가지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우유가 곧 타락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변이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우유 외에 어떤 사물[物]이 있어서 타락이 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이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편벽되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문】 그대가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법도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한 것[空]을 말한 것이 된다. 다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이와 같다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답】 위대한 성인께서 공성[空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네. 만약 공성[空]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지 못하시네. (9)
016_0373_a_19L答曰: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016_0373_b_01L 위대한 성인께서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들, 무명과 애(愛) 따위의 번뇌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성[空]을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해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다. 비유하면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복용해야 치유되는데 약으로 말미암아 다시 병이 들면 치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에서 나왔다면 물로 끌 수 있겠지만 만약 물에서 생겼다면 무엇으로 끄겠는가? 공성이 물과 같을 때 온갖 번뇌의 불을 끌 수 있다. 죄가 무겁고 탐착(貪著)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디기 때문에 공성에 대해서 견해를 내서, 공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공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인해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만약 공성으로 이 사람을 교화한다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원히 이 공성을 안다. 이 공성을 떠나면 열반의 도(道)가 없다. 경전에서는 ‘공ㆍ무상(無常)ㆍ무작(無作)의 해탈문22)을 떠나서 해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언설(言說)일 뿐이다’라고 한다.”
【답】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네. 이렇듯 세 법(法)은 달라서 결코 결합할 때가 없네. (1)
016_0373_b_13L答曰: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016_0373_c_01L 봄은 안근(眼根)을 말한다. 봄의 대상[可見]은 색인 경계[色塵]를 말한다. 보는 자는 ‘나[我]’를 말한다.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어서 결코 합할 때가 없다. ‘다른 곳’이란, 눈[眼]은 몸 안에 있다. 색은 몸 바깥에 있다. ‘나’는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또 만약 봄[見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합해서 보는가, 합하지 않고서 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합해서 본다면, 경계[塵]가 있는 곳마다 근(根)이 있고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고서 본다면 근(根)과 ‘나’와 경계가 각각 다른 곳에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가령 안근(眼根)은 이곳에 있기에 먼 곳의 물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24) 보지 못한다.
【답】 이것은 근을 논하는 품25)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그대가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이 인식 작용은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을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인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인가? 만약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이라면, 인식 작용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합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인식 작용이 발생하겠는가? 만약 넷이 동시에 합할 때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전에 물단지가 있으면 후에 보고 그리고 나서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라면 전과 후가 없는 것이다. 인식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법들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아서 확정된 상[定相]이 있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 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또한 그러하네. 그 밖의 입처[入]와 그 밖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네. (2)
016_0373_c_14L復次,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듯이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합하지 않는다.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의 세 법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들음[聞]ㆍ들음의 대상[可聞]ㆍ듣는 자[聞者]ㆍ그 밖의 입처[入]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의 대상, 탐욕을 내는 자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증오ㆍ증오의 대상ㆍ증오하는 자ㆍ그 밖의 번뇌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다른 법들이 합하는 것이네. 봄 등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네. 다름[異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봄 등이 어찌 합하겠는가? (3)
016_0373_c_20L復次,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또 무릇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합한다. 봄 등에서는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016_0373_c_22L凡物皆以異故有合,而見等異相不可得,是故無合。
016_0374_a_01L
비단 봄 등의 법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네. (4)
016_0374_a_01L復次,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또 비단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등의 셋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다.
016_0374_a_03L非但見、可見、見者等三事異相不可得,一切法皆無異相。
【문】 왜 다름[異相]이 있지 않은가?
016_0374_a_05L問曰:何故無有異相?
【답】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이 아니네. 어떤 법이 원인에서 나왔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네.(5)
016_0374_a_06L答曰: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그대가 말하는 다른 것[異] 이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이라 한다.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는 다른 것[異]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연(緣)들에서 생겼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원인이 괴멸하면 결과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들보와 서까래 등에 의존해서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집은 대들보나 서까래와 다르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 등이 괴멸하면 집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답】 만약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는 것이리라.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네. 그러니 다름이 있지 않네. (6)
016_0374_a_13L答曰: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만약 다름[異]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異法]이 있을 것이다.26) 그러나 실제로는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과 다름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이 있다면,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의 다른 것[異物]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과 다름[異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 우리 학파의 경전에서는 “다름[異相]은 연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016_0374_a_21L問曰:我經說異相不從衆緣生,分別摠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
016_0374_b_01L 【답】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016_0374_a_23L答曰: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그대는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름[異相]은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뭇 연(緣)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름[異相]은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다. 지금 다른 것[異法]에는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다른 것[異法]이 있는데 어디에 다름[異相]을 쓰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에도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다름이 다르지 않은 것에 있다면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두 경우 모두27)에 없다면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법(法)과 저 법이 또한 있지 않다.
이 법(法)은 자체와 합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손가락이 자체와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법도 합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이미 성립했기 때문에 합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합함[合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는 자[合者]ㆍ지금 합하고 있는 것[合時]ㆍ합함[合法]을 모두 얻을 수 없다.
7)불은 장작을 소유한다, 불 속에 장작이 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8)여기서 세 가지는 불과 장작, 취착과 취착하는 자, 행위와 행위자를 말한다.
9)9)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
10)이상 게송 3를 풀이한 것이다.
11)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12)‘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생긴다면’이라는 뜻이다.
13)13)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라는 네 가지 오류를 말한다.
14)이상 색(色)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5)이상 수(受)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6)이상 상(想)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7)눈 등의 감관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식도 상이하다.
18)이상 식(識)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9)이상 행(行)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20)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21)바로 이 법이 변이하는 것과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2)3해탈문(解脫門)이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되는 세 종류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아(我)와 법(法)의 공함을 관하는 것이 공(空)해탈문, 차별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 무상(無相)해탈문, 원구(願求)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무원(無願)해탈문 또는 무작(無作)해탈문이다.
23)제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24)근(根)과 ‘나’와 경계가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5)주 14)와 같다.
26)이(異)나 이상(異相)은 ‘다름’을, 이법(異法)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뒤의 응리여이유이법‘(應離餘異有異法)’은 “여타의 다름을 떠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겠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