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360_a_01L중론 제2권
016_0360_a_01L中論卷第二

용수보살 지음
범지 청목주석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박인성 번역
016_0360_a_02L龍樹菩薩造
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7.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35偈
016_0360_a_04L觀三相品第七[三十五偈]

【문】 경전에서 “유위법에는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발생에 의해 발생하고, 머묾에 의해 머물며, 소멸에 의해 소멸한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016_0360_a_05L問曰經說有爲法有三相物以生法生以住法住以滅法滅故有諸法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3상(相)에는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3상은 유위(有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무위(無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둘 다 맞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0_a_08L答曰不爾何以故三相無決定故是三相爲是有爲能作有爲爲是無爲能作有爲相二俱不然何以故

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016_0360_a_11L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발생은 발생하는 법(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360_a_13L若生是有爲應有三相是事不然何以故共相違故相違者生相應生法住相應住法滅相應滅法法生時不應有住滅相違法一時則不然如明闇不俱以是故生不應是有爲法滅相亦應如是
【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 아니고 무위법이라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016_0360_a_19L問曰若生非有爲若是無爲有何咎
016_0360_b_01L【답】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ㆍ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360_a_20L答曰若生是無爲云何能爲有爲法作相何以無爲法無性故因滅有爲名無爲是故說不生不滅名無爲相更無自是故無法不能爲法作相如兔角龜毛等不能爲法作相是故生非無滅亦如是

3상(相)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016_0360_b_04L復次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0_b_06L是生滅相若一一能爲有爲法作若和合能與有爲法作相二俱不何以故若謂一一者於一處中或有有相或有無相生時無住住時無生滅時無生若和合者共相違法云何一時俱若謂三相更有三相者是亦不然何以故

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016_0360_b_13L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만일 발생ㆍ머묾ㆍ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016_0360_b_15L若謂生滅更有有爲相生更有生有住有滅如是三相復應更有相則無窮若更無相是三相則不名有爲法亦不能爲有爲法作相
【문】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360_b_19L問曰汝說三相爲無窮是事不然雖是有爲而非無窮何以故

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016_0360_b_21L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016_0360_c_01L
법(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016_0360_b_23L法生時通自體七法共生生生住住滅滅七法中本生除自體能生六法生生能生本生本生能生生生是故三相雖是有爲而非無窮

【답】
만일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5)
016_0360_c_05L答曰
若謂是生生
能生於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만일 이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016_0360_c_07L若是生生能生本生者是生生則不名從本生生何以故是生生從本生云何能生本生

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016_0360_c_10L復次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016_0360_c_12L若謂本生能生生生者是本生不名從生生生何以故是本生從生生生云何能生生生生生法應生本生今生生不能生本生生生未有自體何能生本生是故本生不能生生生
【문】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전에도 아니고 후에도 아니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016_0360_c_17L問曰是生生生時非先非後能生本但生生生時能生本生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016_0360_c_19L答曰不然何以故
若生生生時
能生於本生
生生尚未有
何能生本生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016_0360_c_22L若謂生生生時能生本生可爾而實未有是故生生生時不能生本生
016_0361_a_01L
만일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8)
016_0361_a_01L復次
若本生生時
能生於生生
本生尚未有
何能生生生

또 만일 이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근본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016_0361_a_03L若謂是本生生時能生生生可爾實未有是故本生生時不能生生生

【문】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하네. (9)
016_0361_a_05L問曰
如燈能自照
亦能照於彼
生法亦如是
自生亦生彼

등불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올 때 사물들을 밝게 비추고 자기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고 자기도 발생하게 한다.
016_0361_a_08L如燈入於闇室照了諸物亦能自照生亦如是能生於彼亦能自生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네.(10)
016_0361_a_10L答曰不然何以故
燈中自無闇
住處亦無闇
破闇乃名照
無闇則無照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미치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밝음과 어둠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16_0361_a_13L燈體自無闇明所及處亦無闇明闇相違故破闇故名照無闇則無照得言燈自照亦照彼
【문】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016_0361_a_16L問曰是燈非未生有照亦非生已有照但燈生時能自亦照彼

【답】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016_0361_a_18L答曰
云何燈生時
而能破於闇
此燈初生時
不能及於闇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1_a_20L燈生時名半生半未生燈體未成就云何能破闇又燈不能及闇如人得乃名爲破若謂燈雖不到闇而能破闇者是亦不然何以故
016_0361_b_01L
만일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애리라. (12)
016_0361_b_01L燈若未及闇
而能破闇者
燈在於此閒
則破一切闇

만일 등불이 힘을 갖고 있어서 어둠에 다다르지 않고서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타고 있는 등불이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이곳의 어둠에든 모든 곳의 어둠에든) 두 곳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61_b_03L若燈有力不到闇而能破者此處燃應破一切處闇俱不及故
또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13)
016_0361_b_05L復次不應自照照彼何以故
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闇亦應自闇
亦能闇於彼

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016_0361_b_08L若燈與闇相違故能自照亦照於彼闇與燈相違故亦應自蔽蔽彼若闇與燈相違不能自蔽蔽彼燈與闇相亦不應自照亦照彼是故燈喩非破生因緣未盡故今當更說

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016_0361_b_13L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법(法)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361_b_15L是生自生時爲生已生爲未生生未生生則是無法無法何能自生謂生已生則爲已成不須復生如已作不應更作若已生若未生是二俱不生故無生汝先說生如燈能自生亦生彼是事不然滅亦如是

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016_0361_b_21L復次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016_0361_c_01L
또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作]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발생한 법(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법(法)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1_b_23L名衆緣和合有生已生中無作故無生未生中無作故無生生時亦不離生法生時不可得離生時生法亦不可得云何生時生是事去來中已已生法不可生何以故生已復生是展轉則爲無窮如作已復作復次若生已更生者以何生法生是生相未生而言生已生者則自違所說以故生相未生而汝謂生若未生謂生者法或可生已而生或可未生而汝先說生已生是則不定復次燒已不應復燒去已不應復去如是等因緣故生已不應生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緣)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1_c_13L未生法亦不何以故法若未生則不應與生緣和合若不與生緣和合則無法生法未與生緣和合而生者應無作法而作無去法而去無染法而染無恚法而恚無癡法而癡如是則皆破世閒是故未生法不生復次若未生法生者世閒未生法皆應生一切凡夫未生菩提今應生菩提不壞法阿羅漢無有煩惱今應生煩惱兔等無角今皆應生但是事不然是故未生法亦不生
016_0362_a_01L【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緣]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62_a_01L問曰未生法不生者以未有無作無作者無時無方等故不生若有緣有作有作者有時有方等合故未生法生是故若說一切未生法皆不生是事不爾
【답】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a_05L答曰若法有緣有時有方等和合則生者先有亦不先無亦不生有無亦不生三種先已破是故生已不生未生亦不生時亦不生何以故已生分不生未生分亦不生如先答復次若離生有生時者應生時生但離生無生時是故生時亦不生
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62_a_12L復次若言生時生者有二生過以生故名生時以生時中生二皆不然無有二法云何有二生是故生時亦不生復次生法未則無生時生時無故生何所依故不得言生時生如是推求生已無未生無生生時無生無生故生不生不成故滅亦不成滅不成故有爲法不成是故偈中說去時中已答
【문】 나는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거나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016_0362_a_21L問曰我不定言生已未生生生時生但衆緣和合故有
016_0362_b_01L【답】 그대가 비록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緣)들이 화합하는
그때에 발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6)
016_0362_a_23L答曰汝雖有是說此則不然何以故
若謂生時生
是事已不成
云何衆緣合
爾時而得生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 하러 다시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가? 뭇 연(緣)이 다 갖추어졌든 다 갖추어지지 않았든 모두 발생과 동일하게 타파한다.
016_0362_b_02L生時生已種種因緣破汝今何以更說衆緣和合故有生若衆緣具足不具足皆與生同破

만일 법(法)이 뭇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016_0362_b_05L復次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緣)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불[燃]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016_0362_b_07L衆緣所生法無自性故寂滅寂滅爲無此無彼無相斷言語道滅諸戲衆緣名如因縷有布因蒲有席縷自有定相不應從麻出若布自有定相不應從縷出而實從縷有布麻有縷是故縷亦無定性布亦無定如燃可燃因緣和合成無有自性可燃無故燃亦無燃無故可燃亦無一切法亦如是是故從衆緣生法無自性無自性故空如野馬無實是故偈中說生與生時二俱寂滅不應說生時生汝雖種種因緣欲成生相是戲論非寂滅相
【문】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16_0362_b_20L問曰定有三世別未來世法得生因緣卽生何故言無生

【답】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016_0362_b_22L答曰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016_0362_c_01L
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c_01L若未來世中有未生法而生是法先已有何用更生有法不應更生
【문】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相)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362_c_03L問曰未來雖有非如現在相以現在相故說生
【답】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2)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c_05L答曰現在相未來中無若無何言未來生法生若有不名未來名現在現在不應更生二俱無生故不生
또 그대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또한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이것이 발생할 것을 갖는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이 있어서
이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19)
016_0362_c_08L復次汝謂生時生亦能生彼當更說
若言生時生
是能有所生
何得更有生
而能生是生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생하게 하며 다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을 어떤 것이 다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발생이 있어서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무한이네.
발생을 발생하게 하는 것 없이 발생이 있다면
법(法)은 모두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네. (20)
016_0362_c_11L若生生時能生彼是生誰復能生
若謂更有生
生生則無窮
離生生有生
法皆能自生

만일 발생이 다시 발생한다면 발생은 무한이다. 만일 이 발생이 다시 발생하게 하지 않아서 스스로 발생한다면, 모든 법들 또한 다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016_0362_c_14L若生更有生生則無窮若是生更無而自生者一切法亦皆能自生實不爾

존재하는 법(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016_0362_c_17L復次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2_c_19L凡所有生爲有法有生爲無法有生爲有無法有生是皆不然是事先已離此三事更無有生是故無生
016_0363_a_01L
만일 법(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016_0362_c_22L復次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법(法)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63_a_01L若法滅相是法不應生何以故二相相違故一是滅相知法是滅一是生知法是生二相相違法一時則不然是故滅相法不應生
【문】 만약 멸상의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는 법이 발생할 것이다.
016_0363_a_05L問曰若滅相法不應生不滅相法應生
【답】 모든 유위법은 찰나찰나에 소멸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법이란 없다. 유위법 없는, 확정된 자성의 무위법은 없다. 무위법은 단지 이름[名字]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016_0363_a_06L答曰一切有爲法念念滅故無不滅法離有爲有決定無爲法無爲法但有名字故說不滅法終無有是事
【문】 만약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016_0363_a_09L問曰若法無生應有住

【답】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016_0363_a_10L答曰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016_0363_a_12L不住法不住無住相故住法亦不住何以故已有住故因去故有住若住法先有不應更住住時亦不住離住不住更無住時是故亦不住如是一切處求住不可得故卽是無生若無云何有住

만일 법(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016_0363_a_18L復次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363_a_20L若法滅相是法無有住相何以故法中有二相相違故是滅相住相一時一處有住滅相是事不然故不得言滅相法有住
【문】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016_0363_b_01L問曰若法不應有住
016_0363_b_01L【답】 소멸하지 않는 법은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는 모든 법(法)들은
모두 늙음과 죽음의 상(相)을 갖고 있네.
존재하는 법이 늙음과 죽음이 없이
머물고 있는 것은 정녕 볼 수 없네. (25)
016_0363_b_02L答曰無有不滅法何以故
所有一切法
皆是老死相
終不見有法
離老死有住

모든 법은 발생할 때 무상(無常)이 항상 좇아다닌다. 무상에 둘이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에는 항상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머물고 있을 때가 없다.
016_0363_b_04L一切法生時無常常隨逐無常有二老及死如是一切法常有老死無住時

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016_0363_b_07L復次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또 머무는 법(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緣)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363_b_09L若有住法爲自相住爲他相住二俱不然若自相住則爲是常一切有爲法從衆緣生若住法自住則不名有住若自相住法亦應自相住如眼不能自見住亦如是若異相住住更有住是則無窮復次見異法生異相不得不因異法而有異相異相不定故因異相而住者是事不然
【문】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할 것이다.
016_0363_b_17L若無住應有滅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네.
지금 소멸하고 있는 법도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27)
016_0363_b_18L答曰何以故
法已滅不滅
未滅亦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有滅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016_0363_b_20L若法已滅則不滅以先滅故未滅亦不滅離滅相故滅時亦不滅離二更無滅時如是推求滅法卽是無生生何有滅
016_0363_c_01L
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016_0363_c_01L復次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016_0363_c_03L若法定住則無有滅何以故由有住相故若住法滅則有二相住相滅相是故不得言住中有滅如生死不得一時有若法不住亦無有滅何以故離住相故若離住相則無法無法云何滅


이 법은 이때에,
이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016_0363_c_09L復次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363_c_11L若法有滅相是法爲自相滅爲異相二俱不然何以故如乳不於乳時隨有乳時乳相定住故非乳時亦不滅若非乳不得言乳滅

모든 법들의
생상을 얻을 수 없네.
생상이 있지 않으니
멸상도 있지 않네. (30)
016_0363_c_15L復次
如一切諸法
生相不可得
以無生相故
卽亦無滅相

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016_0363_c_17L如先推求一切法生相不可得爾時卽無滅相破生故無生無生云何有若汝意猶未已今當更說破滅因緣

만일 법(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016_0363_c_20L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016_0364_a_01L
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6_0363_c_22L諸法有時推求滅相不可得何以故云何一法中亦有亦無相如光影不同處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016_0364_a_02L復次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016_0364_a_04L法若無者則無滅相如第二頭第三無故不可斷

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016_0364_a_06L復次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緣)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없다. 자체가 없기에 다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소멸 또한 그와 같다.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016_0364_a_08L如先說生相生不自生亦不從他生若以自體生是則不然一切物皆從衆緣生如指端不能自觸如是生不能自生從他生亦不然何以故生未有故不應從他生是生無故無自體自體無故他亦無是故從他生亦不滅法亦如是不自相滅不他相滅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34)
016_0364_a_15L復次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016_0364_b_01L
또 그대는 앞에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있기에 유위법이 있으며 유위법이 있기에 무위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치에 맞게 궁구해 보건대 3상(相)은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유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상(相)이 없는 법(法)은 없다고 말한 바와 같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위의 상은 발생하지 않음ㆍ머물지 않음ㆍ소멸하지 않음이다. 유위의 상이 그쳤기에 무위의 상이라 한다. 무위 자체에는 별도의 상이 없다. 이 세 가지 상3)에 의지해서 무위의 상이 있는 것이다. 가령 불[火]에는 뜨거움의 상이 있고 땅[地]에는 단단함의 상이 있고 물[水]에는 차가움의 상이 있지만 무위는 그렇지 못하다.
016_0364_a_18L汝先說有生滅相故有有爲以有有爲故有無爲今以理推求三相不可得云何得有有爲如先說無有無相法有爲法無故何得有無爲無爲相名不生不住不滅止有爲相故無爲相無爲自無別相因是三相無爲相如火爲熱相地爲堅相水爲冷相無爲則不然
【문】 만일 이 발생ㆍ머묾ㆍ소멸이 필경 있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논서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는가?
016_0364_b_03L問曰若是生畢竟無者云何論中得說名字

【답】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이
말한 바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그 상(相)이 또한 이와 같네. (35)
016_0364_b_04L答曰
如幻亦如夢
如乾闥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생상과 주상과 멸상은 확정된 것[決定]이 없다. 범인(凡人)은 탐착(貪著)해서 확정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인들께서는 연민을 품고 그 전도(顚倒)를 그치게 하고자 다시 그 탐착된 이름[名字]을 갖고서 말한다. 말[語言]은 동일하지만 그 의도[心]가 다르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기에 논박이 있을 수 없다. 마치 환영이나 화작(化作)된 것과 같으니, 그 유래하는 바를 물어 따질 수 없으며, 그 속에 슬픔과 기쁨의 표상[想]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실체를 구할 수 없다. 건달바성과 같은 것은 해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저 실체가 없이 이름을 쓰는 것일 뿐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범부는 분별해서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016_0364_b_06L滅相無有決定凡人貪著謂有決定諸賢聖憐愍欲止其顚倒還以其所著名字爲說語言雖同其心則如是說生滅相不應有難如幻化所作不應責其所由不應於中有憂喜想但應眼見而已如夢中所見不應求實如乾闥婆城日出時現無有實但假爲名字不久則滅滅亦如是凡夫分別爲有智者推求則不可得

8.행위와 행위자를 관찰하는 장[觀作作者品]12偈
016_0364_b_16L中論觀作作者品第八[十二偈]

【문】 지금 분명히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고 행위 수단(所用作法)이 있다. 세 가지가 결합해서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作者]와 행위[作業]가 있다.
016_0364_b_17L問曰現有作有作者有所用作法事和合故有果報是故應有作者
016_0364_c_01L【답】 이제까지 매 장에서 모든 법을 타파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3상(相)을 타파하는 경우를 보자. 3상이 있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고, 유위가 있지 않기에 무위가 있지 않다. 유위와 무위가 있지 않기에 모든 법이 있지 않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유위라면 유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고 만약 무위라면 무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다. 다시 묻지 않아야 하는데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이 깊어 다시 묻고 있다. 이제 다시 답하겠다.
016_0364_b_20L答曰上來品品中破一切法皆無有餘如破三相三相無故無有有爲有爲無故無無爲有爲無爲無故切法盡無作者若是有爲有爲中已破若是無爲無爲中已破不應復汝著心深故而復更問今當復答

실재하는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네. (1)
016_0364_c_02L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행위가 실재할 것이니,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행위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니, 또한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364_c_04L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則不應作若先定無作者定無作業亦不應作何以故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없네.
이 행위에는 행위자가 없네.
실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지음이 없네.
행위자에게 또한 행위가 없네.(2)
016_0364_c_07L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만약 먼저 행위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행위자 없이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가 있지 않을 않을 것이다. 또 행위 없이 행위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행위자와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있을 수 없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와 실재하지 않는 행위에도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본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어도 지음이 없거늘, 하물며 행위자가 있지 않고 행위가 있지 않은 경우이겠는가?
016_0364_c_09L若先決定有作業不應更有作者離作者應有作業但是事不然若先決定有作者不應更有作業又離作應有作者但是事不然是故決定作者決定作業不應有作不決定作者不決定作業亦不應有作何以本來無故有作者有作業尚不能何況無作者無作業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고
또한 행위가 실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지고 말리라. (3)
016_0364_c_17L復次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또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고 행위가 실재하는데 그대가 행위자에게 지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원인이 없는 되리라. 행위를 떠나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를 떠나 행위가 있는 것이니,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016_0364_c_19L若先定有作者定有作業汝謂作者有作卽爲無因離作業有作者離作有作業則不從因緣有
【문】 만약 인연에 의존하지 않고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64_c_22L問曰若不從因緣有作者有作業有何咎
016_0365_a_01L
【답】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것이네.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는 것이네. (4)
016_0364_c_23L答曰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약 지음 등이 없다면
죄와 복이 없네.
죄와 복 등이 없으니
죄와 복의 과보(果報)도 없네. (5)
016_0365_a_02L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약 과보가 없다면
또한 열반도 없네.
모든 있을 수 있는 지음이
모두 공허해서 결과가 없게 되네. (6)
016_0365_a_03L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모든 법들은 원인이 없고 결과가 없는 것이 된다. ‘발생하게 하는 법’을 원인이라 하고 ‘발생하는 법’을 결과라 하는데 이 둘이 없게 된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다. 또한 죄와 복도 없다.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과보 및 열반의 도(道)가 없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
016_0365_a_04L若墮於無因一切法則無因無果生法名爲因所生法名爲果是二卽是二無故無作無作者亦無所用作法亦無罪福罪福無故亦無罪福果報及涅槃道是故不得從無因生
【문】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일으킨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65_a_09L問曰若作者不定而作不定業有何
【답】 하나가 없어도 행위를 일으킬 수 없는데 하물며 둘 다 없음이겠는가? 마치 화인(化人)이 허공으로 집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저 말[言說]이 있을 따름이지 행위자와 행위는 없다.
016_0365_a_11L答曰一事無尚不能起作業何況二事都無譬如化人以虛空爲舍有言說而無作者作業
【문】 만약 행위자가 없고 행위가 없다면 지음[所作]이 있을 수 없다. 이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으니 지음[作]이 있을 것이다.
016_0365_a_13L問曰若無作無作業不能有所作今有作者作業應有作

【답】
실재하면서 실재하는 않는 행위자가
두 행위를 할 수 없네.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네. (7)
016_0365_a_15L答曰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다. 존재는 확정된 것[決定]이고 비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것[不決定]이다. 한 사람 한 사물에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있겠는가?
016_0365_a_17L作者定不定不能作定不定業何以有無相違故一處不應有二有是決定無是不決定一人一事云何有有無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8)
016_0365_a_21L復次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016_0365_b_01L
또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행위가 존재한다면 또한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한다면 행위자가 다시 무엇을 짓겠는가?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다면 죄와 복 등의 인연과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을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65_a_23L若有作者而無業何能有所作若無作者而有業亦不能有所作何以故如先說有中若先有業作者復何所若先無業云何可得作如是則破罪福等因緣果報是故偈中說有不能作無無不能作有若有作作者其過如先說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9)
016_0365_b_07L復次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또 실재하는 행위는 이미 타파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다. 지금은 일시에 모든 것을 타파하고자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자는 세 가지의 행위를 짓지 않는다. 이제 세 가지의 행위자 또한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365_b_09L定業已破不定業亦破定不定業亦今欲一時摠破故說是偈是故作者不能作三種業今三種作者亦不能作業何以故

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하지 못하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10)
016_0365_b_13L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세 가지 과실의 이유를 든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위자와 행위를 구해 보아도 모두 얻을 수 없다.
016_0365_b_15L作者定不定亦定亦不定不能作於業何以故如先三種過因緣此中應廣說如是一切處求作者作業皆不可得
【문】 만약 행위가 없고 행위자가 없다면 다시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질 것이다.
016_0365_b_18L問曰若言無作無作者則復墮無因
【답】 이 행위는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다. 가명(假名)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말하는 바와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5_b_19L答曰是業從衆緣生假名爲有無有決定不如汝所說何以故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에 의존해서 행위가 있네.
행위를 성립시키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이 밖에 다른 것이 없네. (11)
016_0365_b_21L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016_0365_c_01L
행위에 미리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의존해서 행위를 일으키고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다. 행위자 또한 확정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라고 하는 것이다. 둘이 화합하기 때문에 행위와 행위자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화합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고 공하기에 발생하는 것[所生]이 없는 것이다. 그저 범부가 기억하고 표상해서 분별하는 대로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행위가 있지 않고 행위자가 있지 않다.
016_0365_b_23L業先無決定因人起業因業有作者作者亦無決定因有作業名爲作者二事和合故得成作作者若從和合則無自性無自性故空空則無所但隨凡夫憶想分別故說有作業有作者第一義中無作業無作者

행위와 행위자와 같이
취착(取著)과 취착하는 자도 타파되네.
그리고 모든 법들도
이와 같이 타파되네. (12)
016_0365_c_06L復次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또 행위와 행위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확정되지 않으며 확정된 것이 없기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이,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이와 같다. ‘취착(取著)’이란 5온(蘊)의 몸[身]을 말한다. ‘취착하는 자’란(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이렇듯이 사람을 떠나 5온이 있지 않으며 5온을 떠나 사람이 있지 않으니, 단지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016_0365_c_08L如作作者不得相離不相離故不決無決定故無自性受者亦如是受名五陰身受者是人如是離人無五陰離五陰無人但從衆緣生如受受者餘一切法亦應如是破

9. 선행하는 존재를 관찰하는 장[觀本住品]12偈
016_0365_c_13L中論觀本住品第九[十二偈]

【문】 어떤 이가 말한다.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데
이것을 선행하는 존재[本住]라고 하네. (1)
016_0365_c_14L問曰有人言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만약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누가 안[眼] 등의 법을 소유하겠는가?
그러니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2)
016_0365_c_17L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이라고 한 것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명(命) 등의 모든 근(根)들을 이름한 것이다.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이라고 한 것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ㆍ상(想)ㆍ사(思)ㆍ억념(憶念) 등 심법과 심소법을 이름한 것이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서 안(眼) 등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어서 이 선행하는 존재에 의존해서 안(眼) 등의 모든 근이 증장(增長)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신(身)과 안[眼] 등의 모든 근은 무엇에 의존해서 증장할 수 있겠는가?”
016_0365_c_18L眼耳鼻舌身命等諸根名爲眼耳等苦受樂受不苦不樂受憶念等心心數法名爲苦樂等法有論師先未有眼等法應有本住因是本眼等諸根得增長若無本住身及眼等諸根爲因何生而得增長
016_0366_a_01L
【답】
만약 안(眼) 등의 근과
고(苦)ㆍ낙(樂) 등의 법을 떠나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3)
016_0366_a_01L答曰
若離眼等根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말할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바깥의 법(法)인 물단지ㆍ옷 등은 안(眼) 등 근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안의 법은 고(苦)ㆍ락(樂) 등의 근에 의해 알 수 있다. 경전에서 “괴멸하는 것[可壞]이 색(色)의 특징이고, 느끼는 것[能受]이 수(受)의 특징이고, 인식하는 것[能識]이 식(識)의 특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안(眼)과 이(耳), 고(苦)와 낙(樂) 등을 떠나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엇에 의해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말할 수 있는가?
016_0366_a_03L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以何可說以何可知如外法甁以眼等根得知內法以苦樂等根得知如經中說可壞是色相能受是受相能識是識相汝說離眼耳苦樂先有本住者以何可知說有是法
【문】 어떤 논사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보며 눈짓하는 것, 수명, 사유, 고(苦)와 낙(樂), 증오와 애정, 움직임 등이 ‘나[神]’의 특징이다. 만약 ‘나[神]’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등의 특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016_0366_a_09L問曰有論師言出入息視眴壽命苦樂憎愛動發等是神相若無有云何有出入息等相是故當知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本住
【답】 만약 이 ‘나’가 있다면 몸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치 벽 속에 기둥이 들어 있듯이. 만약 (‘나’가) 몸 바깥에 있다면 마치 사람이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몸 안에 있다면 몸은 괴멸할 수 없을 것이다. ‘나’가 항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몸 바깥에 있어서 몸을 덮는 것이 갑옷과 같다면 몸은 보이질 않을 것이다. ‘나’가 세밀하게 덮고 있기 때문이다. 또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몸이 괴멸하는 것을 실제로 본다. 그러므로 고와 낙 등을 떠나 앞서서 여타의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팔을 잘라냈을 때 ‘나’는 움츠러들어 안에 있어서 잘라낼 수 없다고 말한다면 머리를 잘라냈을 때도 움츠러들어 안에 있기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고와 락 등을 떠나 앞서서 ‘나’가 있다고 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016_0366_a_13L答曰是神若有應在身內如壁中有柱在身外如人被鎧若在身內身則不可壞神常在內故是故言神在身內但有言說虛妄無實若在身外覆身如鎧者身應不可見神細密覆故應不可壞而今實見身壞是故當知離苦樂等先無餘法若謂斷臂時縮在內不可斷者斷頭時亦應縮在內不應死而實有死是故知離苦樂先有神者但有言說虛妄無實
016_0366_b_01L또 만약 몸이 크면 ‘나[神]’도 크고 몸이 작으면 ‘나’도 작은 것이 등불이 크면 밝음도 크고 등불이 작으면 밝음도 작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몸을 따르는 것이기에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몸을 따르는 것이라면 몸이 없을 때 ‘나’도 없을 것이다. 마치 등불이 사라지면 밝음도 사라지듯이.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안(眼)과 이(耳), 고(苦)와 락(樂) 등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을 떠나 앞서서 별도의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가령 중풍[風狂病]에 걸린 사람이 의지대로 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나’가 모든 행위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중풍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를 떠나서 따로 하는 짓이 있는 것이리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궁구해 보아도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굳이 말한다면 이런 일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6_a_23L若言身大則神大身小則神小燈大則明大燈小則明小者如是神則隨身不應常若隨身者身無則神如燈滅則明滅若神無常則與眼耳苦樂等同是故當知離眼耳等無別神復次如風狂病人不得自在不應作而作若有神是諸作主者何言不得自在若風狂病不惱神者應離神別有所作如是種種推求眼耳等根苦樂等法先無本住若必謂離眼耳等根苦樂等法有本住者無有是事何以故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안과 이 등이 있을 것이네. (4)
016_0366_b_12L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있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근과 고와 락 등의 법도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있을 것이다.
016_0366_b_14L若本住離眼耳等根苦樂等法先有今眼耳等根苦樂等法亦應離本住而有
【문】 둘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선행하는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다.
016_0366_b_17L問曰二事相離可爾但使有本住

【답】
법(法)에 의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며
사람에 의해 법이 있다는 것을 아네.
법 없이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 없이 어떻게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5)
016_0366_b_18L答曰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법(法)’이란 안(眼)과 이(耳), 고와 낙 등이다. ‘사람’이란 선행하는 존재이다. 그대가 법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있기에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법이 없이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이 없이 어찌 안과 이 등의 법이 있겠는가?
016_0366_b_20L法者眼耳苦樂等人者是本住汝謂以有法故知有人以有人故知有法今離眼耳等法何有人離人何有眼耳等法
016_0366_c_01L
모든 안(眼) 등의 근(根)에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들이
각각 다르게 분별하는 것이네. (6)
016_0366_c_01L復次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낙 등의 모든 법에는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실재하지 않는다. 안(眼)이 색에 의존해서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인과 연들이 화합하기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이 있다는 것을 알지,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모든 안 등의 근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이 각각 분별하는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66_c_03L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實無有本因眼緣色生眼識以和合因緣有眼耳等諸根不以本住故知是故偈中說一切眼等根實無有本住眼耳等諸根各自能分別

【문】
만약 안(眼) 등의 모든 근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 등 하나하나의 근이
어떻게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7)
016_0366_c_08L問曰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만약 모든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지금 하나하나의 근이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에는 사유 작용이 없기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을 떠나 다시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있다.
016_0366_c_10L若一切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本住者今一一根云何能知塵眼耳等諸根無思惟不應有知而實知塵當知離眼耳等諸根更有能知塵者
【답】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의 근 속에 각각 인식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 한 인식하는 자가 근들 속에 있는 것인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66_c_14L答曰若爾者爲一一根中各有知者爲一知者在諸根中二俱有過何以故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와 같은 근들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네. (8)
016_0366_c_16L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만약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 자는 한 ‘나[神]’이다. 이와 같이 안 등의 근들에는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어서 색(色)ㆍ성(聲)ㆍ향(香) 등을 고유하게 인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혹은 눈[眼]으로 소리[聲]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여섯 감관[六向]을 갖고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듣는 것과 같다. 만약 듣는 자와 보는 자가 같다면 안 등의 근(根)으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66_c_18L若見者卽是聞者聞者卽是受者是一神如是眼等諸根應先有本住色聲香等無有定知者或可以眼聞如人有六向隨意見聞若聞者者是一於眼等根隨意見聞但是事不然
016_0367_a_01L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많을 것이네. (9)
016_0367_a_01L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보는 자를 떠나서 듣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鼻)ㆍ설(舌)ㆍ신(身)에 있어서도 ‘나[神]’는 일시에 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인데 ‘나’는 많을 것이다. 모든 감관[根]이 일시에 대상[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
016_0367_a_03L若見者聞者受者各異則見時亦應何以故離見者有聞者故如是鼻舌身中神應一時行若爾者人一而神多以一切根一時知諸塵而實不是故見者聞者受者不應俱用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을
발생하게 하는 대(大)들
그 대(大)들에도 ‘나’가 있지 않네. (10)
016_0367_a_08L復次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안(眼)과 이(耳) 등의 근들과 고(苦)와 낙(樂) 등의 법들을 떠나 별도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타파된 것이다. 이제 안과 이 등의 원인인 4대(大)의 경우를 보면, 이 4대에도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016_0367_a_10L若人言離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別有本住是事已破今於眼耳等所因四大是四大中亦無本住
【문】 만약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에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은 있을 것이다.
016_0367_a_13L問曰若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無有本住可眼耳等諸根苦樂等諸法應有

【답】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眼) 등도 있지 않을 것이네. (11)
016_0367_a_15L答曰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만약 안(眼)과 이(耳)나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S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이 안과 이 등이 있겠으며 무엇을 연(緣)으로 해서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도 있지 않다.
016_0367_a_18L若眼耳苦樂等諸法無有本住者有此眼耳等何緣而有是故眼耳等亦

안(眼) 등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네.
지금도 후에도 다시 있지 않네.
삼세(三世)에 있지 않으니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이 없네. (12)
016_0367_a_21L復次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016_0367_b_01L
또 선행하는 존재[本住]를 사유하고 궁구해 보아도 안(眼) 등보다 이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삼세에 있지 않다면 발생이 없고 적멸해 있는 것이므로, 논박이 있을 수 없다.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눈 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가운데 희론이 사라졌으며 희론이 사라졌으니 모든 법들이 공하다.
016_0367_a_23L思惟推求本住於眼等先無今後亦若三世無卽是無生寂滅不應有若無本住云何有眼等如是問答戲論則滅戲論滅故諸法則空

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16偈
016_0367_b_04L中論觀燃可燃品第十[十六偈]

【문】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있다. 마치 불과 장작이 있듯이. 불은 취착하는 자이고 장작은 취착 즉 5온[蔭]이다.
016_0367_b_05L問曰應有受受者如燃可燃燃是受可燃是受所謂五陰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이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이 한 법(法)4)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두 법5)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67_b_07L答曰是事不何以故可燃俱不成故可燃若以一法成若以二法成二俱不成
【문】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有]’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016_0367_b_09L問曰且置一異法若言無燃可燃云何以一異相破如兔角龜毛無故不可破世閒眼見實有事而後可思如有金然後可燒可鍛若無燃不應以一異法思惟若汝許有一異法當知有燃可燃若許有者則爲已有
016_0367_c_01L【답】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367_b_16L答曰隨世俗法言說不應有過可燃若說一若說異不名爲受離世俗言說則無所論若不說燃云何能有所破若無所說則義不可明如有論者欲破有無必應言有不以稱有無故而受有無是以隨世閒言說故無咎若口有言便是受者汝言破卽爲自破可燃亦如是有言說亦復不受是故以一異法思惟燃可燃二俱不成何以故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016_0367_c_02L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불은 태우는 것[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作]은 행위[業]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 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016_0367_c_04L燃是火可燃是薪作者是人作是業若燃可燃一則作作者亦應一若作作者一則陶師與甁一作者是陶師作是甁陶師非甁甁非陶師云何爲是以作作者不一故可燃亦不若謂一不可則應異是亦不然以故若燃與可燃異應離可燃別有分別是可燃是燃處處離可燃應有燃而實不爾是故異亦不可

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016_0367_c_13L復次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作]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016_0367_c_15L若燃可燃異則燃不待可燃而常燃若常燃者則自住其體不待因緣功則空人功者將護火令燃是功現是故知火不異可燃復次若燃異可燃燃卽無作離可燃火何所然若爾者火則無作無作火無有是事
【문】 왜 불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을 때 사람의 노력도 공허하다고 하는가?
016_0367_c_22L問曰云何火不從因緣生人功亦空
016_0368_a_01L【답】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016_0367_c_23L答曰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368_a_02L可燃若異則不待可燃有燃若不待可燃有然則無相因法是故不從因緣復次若燃異可燃則應常燃若常燃者應離可燃別見有燃更不須人何以故

만약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말한다면
그 때는 장작이 있을 뿐인데
어떤 것으로 장작을 태우겠는가? (4)
016_0368_a_07L若汝謂燃時
名爲可燃者
爾時但有薪
何物燃可燃

만약 먼저 장작이 있어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불을 떠나 따로 장작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하겠는가?
016_0368_a_09L若謂先有薪燒時名可燃者是事不若離燃別有可燃者云何言燃時名可燃

만약 다르다면 다다르지[至] 못하네.
다다르지 못한다면 타지 못하네.
타지 않으니 꺼지지 않네.
꺼지지 않으니 상주할 것이네. (5)
016_0368_a_12L復次
若異則不至
不至則不燒
不燒則不滅
不滅則常住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68_a_14L若燃異可燃則燃不應至可燃何以不相待成故若燃不相待成則自住其體何用可燃是故不至若不至則不燃可燃何以故無有不至而能燒故若不燒則無滅應常住自相事不爾

【문】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016_0368_a_20L問曰
燃與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016_0368_a_22L燃與可燃異而能至可燃如男至於如女至於男
016_0368_b_01L
【답】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016_0368_b_01L答曰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016_0368_b_03L若離燃有可燃若離可燃有燃各自成者如是則應燃至可燃而實不爾何以故離燃無可燃離可燃無燃故今離男有女離女有男是故汝喩非喩不成故燃不至可燃
【문】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016_0368_b_08L問曰燃相待而有因可燃有燃因燃有可二法相待成

【답】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016_0368_b_10L答曰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68_b_12L若因可燃而燃成亦應因燃可燃成是中若先定有可燃則因可燃而燃若先定有燃則因燃可燃成今若因可燃而燃成者則先有可燃而後有燃不應待燃而有可燃何以故燃在先燃在後故若燃不燃可燃則可燃不成又可燃不在餘處離於燃故若可燃不成燃亦不成若先燃後有可燃燃亦有如是過是故燃二俱不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016_0368_b_22L復次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爲可燃中
則爲無有燃
016_0368_c_01L
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016_0368_c_01L若欲因可燃而成燃則燃成已復成何以故燃自住於燃中若燃不自住其體從可燃成者無有是事是故有是燃從可燃成今則燃成復成有如是過復有可燃無燃過何以故可燃離燃自住其體故是故燃可燃相因無有是事

만약 어떤 법[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016_0368_c_08L復次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定]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68_c_10L若法因待成是法還成本因待如是決定則無二事如因可燃而成燃因於燃而成可燃是則二俱無定定故不可得何以故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016_0368_c_14L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016_0368_c_16L若法因待成是法先未成未成則無無則云何有因待若是法先已成成何用因待是二俱不相因待是故汝先說燃可燃相因待成無有是事
그러므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도 아니네.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12)
016_0368_c_20L是故
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016_0369_a_01L
또 이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장작도 이와 같아서, 불에 의존하는 것과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016_0368_c_22L今因待可燃燃不成不因待可燃亦不成可燃亦如是因燃不因燃俱不成是過先已說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016_0369_a_02L復次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016_0369_a_04L燃不於餘方來入可燃可燃中亦無析薪求燃不可得故可燃亦如是不從餘處來入燃中燃中亦無可燃如燃已不燃未燃不燃燃時不燃義如去來中說

장작은 불이 아니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14)
016_0369_a_09L是故
可燃卽非燃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69_a_11L可燃卽非燃何以故先已說作作者一過故離可燃無燃有常燃等過故無有可燃燃中無可燃可燃中無燃以有異過故三皆不成
【문】 무엇 때문에 불과 장작을 말하는가?
016_0369_a_15L問曰何故說燃可燃
【답】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듯이 취착에 의존해서 취착하는 자가 있다. ‘취착’이란 5온을 말하고, ‘취착하는 자’란 사람을 말한다. 불과 장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369_a_16L答曰如因可燃有燃如是因受有受者受名五陰受者名人燃不成故受者亦不成何以故

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016_0369_a_18L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016_0369_a_20L如可燃非燃如是受非受者作者一過故又離受無受者異不可得故以異過故三皆不成如受受者外衣等一切法皆同上說無生畢竟空
016_0369_b_01L
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의 있음과
법(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016_0369_b_01L是故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品)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나[我]’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색(色)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016_0369_b_04L諸法從本已來無生畢竟寂滅相故品末說是偈若人說我相如犢子部衆說不得言色卽是我不得言離色是我我在第五不可說藏中如薩婆多部衆說諸法各各相是善是不善是無記是有漏無漏有爲無爲等別如是等人不得諸法寂滅相以佛語作種種戲論

11. 최초의 궁극을 관찰하는 장[觀本際品]8偈
016_0369_b_12L中論觀本際品第十一[八偈]

【문】 최초의 궁극[本際]은 있지 않다. 경전에서 “중생은 생사 윤회한다.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생이 있고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가?
016_0369_b_13L問曰『無本際經』說衆生往來生死際不可得是中說有衆生有生死何因緣故而作是說

【답】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최초의 궁극은 얻을 수 없네.
생사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1)
016_0369_b_16L答曰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성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5신통(五神通)9)의 외도(外道),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 셋째는 신통(神通)을 얻은 대보살이다. 부처님은 세 부류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최초와 최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최초와 최후가 없다면 중간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69_b_18L聖人有三種一者外道五神通二者阿羅漢辟支佛三者得神通大菩薩佛於三種中最上故言大聖佛所言無不是實說生死無始何以故死初後不可得是故言無始汝謂若無初應有中者是亦不然何以故
016_0369_c_01L
시작과 끝이 없는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에는
전도 후도 동시도 있지 않네. (2)
016_0369_c_01L若無有始終
中當云何有
是故於此中
先後共亦無

중간과 최후에 의존해서 최초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중간에 의존해서 최후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최후가 있지 않은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생사에는 최초와 중간과 최후가 있지 않다. 그래서 전과 후와 동시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369_c_03L因中故有初因初故有後若無初無後云何有中生死中無初是故說先共不可得何以故

만약 태어남이 전에 있고
늙음ㆍ죽음이 후에 있다면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게 되고
태어남이 없이 늙음ㆍ죽음이 있게 되리라. (3)
016_0369_c_06L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만약 늙음ㆍ죽음이 전에 있고
태어남이 후에 있다면
이것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리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 (4)
016_0369_c_08L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태어나고 죽는 중생에게 만약 전에 태어남이 있고 잠시 늙음이 있고 후에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물[法]의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고 늙음ㆍ죽음에는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태어남에 의존하지 않고서 늙음ㆍ죽음이 있게 된다.10)
만약 전에 늙음ㆍ죽음이 있고 후에 태어남이 있다면 늙음ㆍ죽음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태어남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11)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은 전과 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69_c_09L生死衆生若先生漸有老而後有死則生無老死法應生有老死老死有生又不老死而生是亦不然又不因生有老死若先老死後生老死則無因生在後故又不生何有老死謂生老死先後不可謂一時成者亦有過何以故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함께할 수 없네.
태어날 때 죽음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은 다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네. (5)
016_0369_c_16L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라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태어날 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法]은 태어날 때에는 있고 죽을 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태어날 때 죽음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생긴다면12)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소의 뿔이 동시에 나오기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016_0369_c_18L若生老死一時則不然何以故生時卽有死故法應生時有死時無若生時有死是事不然若一時生則無有相因如牛角一時出則不相因

전과 후와 동시
이것이 모두 옳지 않은데
왜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있다고
희론해서 말하는가? (6)
016_0369_c_22L是故
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戲論
謂有生老死
016_0370_a_01L
그러므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사유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그대는 지금 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탐착(貪著)하고 희론(戱論)해서 확정된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가?
016_0370_a_01L思惟生老死三皆有過故卽無生畢竟空汝今何故貪著戲論生老死謂有決定相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
느낌과 느끼는 자
등의 모든 법들, (7)
016_0370_a_04L復次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들도
모두 최초의 궁극이 없네. (8)
016_0370_a_06L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또 ‘모든 법들’이란 이른바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 느낌[受]과 느끼는 자[受者] 등을 말한다. 모두 최초의 궁극[本際]이 없다. 비단 생사에만 최초의 궁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보여 주고자 생사에는 최초의 궁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016_0370_a_07L一切法者所謂因可相受及受者等皆無本際非但生死無本際略開示故說生死無本際

12. 고를 관찰하는 장(觀苦品)10偈
016_0370_a_10L中論觀苦品第十二[十偈]

어떤 이가 말한다.

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고(苦)를 말하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 (1)
016_0370_a_11L有人說曰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어떤 이는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자기가 짓는 것이면서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란, 중생은 뭇 연(緣)에 의해 고(苦)에 이르게 되고, 고를 싫어해서 멸하고자 하지만 고의 진정한 연들을 알지 못해서 네 가지 오류13)를 범하므로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370_a_14L有人言苦惱自作或言他作或言亦自作亦他作或言無因作於果皆不於果皆不然者衆生以衆緣致苦厭苦欲求滅不知苦惱實因緣有四種謬是故說於果皆不然何以故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온(蘊)이 있기에
저 온(蘊)이 발생하는 것이네. (2)
016_0370_a_19L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란 자성(自性)에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세(前世)의 5온[蔭]에 의존해서 후세의 5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자기가 짓는 것일 수 없다.
016_0370_a_21L若苦自作則不從衆緣生自名從自性生是事不然何以故因前五陰後五陰生是故苦不得自作
016_0370_b_01L【문】 만약 이 5온이 저 5온이 된다면 이것은 타자가 짓는 것이다.
016_0370_b_01L問曰言此五陰作彼五陰者則是他作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타자에 의해
고(苦)가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네. (3)
016_0370_b_02L是事不然何以故
若謂此五陰
異彼五陰者
如是則應言
從他而作苦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고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실이 천과 다르다면 실을 떠나서 천이 있고 실을 떠나서 천이 있지 않다면 천은 실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듯이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고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지 않다면 이 5온은 저 5온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苦)가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016_0370_b_05L若此五陰與彼五陰異彼五陰與此五陰異者應從他作如縷與布異者應離縷有布若離縷無布者則布不異縷如是彼五陰異此五陰者則應離此五陰有彼五陰若離此五陰彼五陰者則此五陰不異彼五陰故不應言苦從他作
【문】 자기가 고(苦)를 짓는다면 개체[人]마다 자기가 고를 짓고 자기가 고를 받을 것이다.
016_0370_b_12L問曰自作者是人自作苦自受苦

【답】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어떤 개체가 있기에
그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4)
016_0370_b_13L答曰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5온의 고를 떠나 어디에 따로 개체가 있기에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일까? 이 개체를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체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70_b_15L若謂人自作苦者離五陰苦何處別有人而能自作苦應說是人而不可是故苦非人自作若謂人不自作他人作苦與此人者是亦不然以故

만약 고(苦)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받는 일이 있겠는가? (5)
016_0370_b_20L若苦他人作
而與此人者
若當離於苦
何有此人受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면, 5온이 없으니 이 개체가 이 사람이 받는 일은 없다.
016_0370_b_22L若他人作苦與此人者離五陰無有此人受
016_0370_c_01L
만약 고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있기에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6)
016_0370_c_01L復次
苦若彼人作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人
而能授於此

또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고 말한다면, 5온의 고 없이 어떻게 다른 개체가 있기에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그 상(相)을 말해야 할 것이다.
016_0370_c_03L若謂彼人作苦授與此人者離五陰何有彼人作苦持與此人若有者應說其相

자기가 짓는 고(苦)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짓는 고가 성립하겠는가?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네. (7)
016_0370_c_06L復次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가 고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와 타자[此彼]는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그 타자에게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파했다. 그대가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70_c_08L種種因緣彼自作苦不成而言他作是亦不然何以故此彼相待故彼作苦於彼亦名自作苦自作苦先已破汝受自作苦不成故他作亦不

고(苦)는 자체가 짓는 것이 아니네.
사물[法] 자체가 사물을 짓는 것이 아니네.
타자는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가 고를 짓겠는가? (8)
016_0370_c_13L復次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또 자체가 고(苦)를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가령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없듯이 사물[法]은 자체가 법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고(苦)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고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다면 타자가 고를 지을 것이다. 타자 또한 고인데 어떻게 고가 고를 짓겠는가?
016_0370_c_15L自作苦不然何以故如刀不能自割是法不能自作法是故不能自作作亦不然何以故離苦無彼自性離苦有彼自性者應言彼作苦彼亦卽是苦云何苦自作苦
【문】 만약 자기가 짓는 것과 타자가 짓는 것이 옳지 않다면 양자가 짓는 것이리라.
016_0370_c_20L問曰若自作他作不然應有共作

【답】
만약 자기나 타자가 고(苦)를 짓는 것이라면
양자가 고를 짓는 것이리라.
자기나 타자가 짓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겠는가? (9)
016_0370_c_21L答曰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尚無作
何況無因作
016_0371_a_01L
자기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과실이 있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랴? 원인이 없다면 많은 과실이 있다. 행위와 행위자를 타파하는 장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6_0370_c_23L自作他作猶尚有過何況無因作因多過如「破作作者品」中說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10)
016_0371_a_02L復次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또 불교에서 5취온[聚陰]을 고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어떤 외도의 사람들은 고수(苦受)를 고(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물들인 대지ㆍ강ㆍ산ㆍ나무 등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71_a_04L佛法中雖說五受陰爲苦有外道人謂苦受爲苦是故說不但說於苦種義不成外萬物地水山木等一切法皆亦不成

13. 행을 관찰하는 장[觀行品]9偈
016_0371_a_08L中論觀行品第十三[九偈]

【문】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네.
모든 행(行)들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기에
이는 속이는 것이네. (1)
016_0371_a_09L問曰
如佛經所說
虛誑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誑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속이는 것[虛誑]은 허망하게 취한 것[妄取相]이다. 제일의 진실(眞實)은 열반이니, 허망하게 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까닭에 모든 행(行)들은 속이는 것이며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71_a_12L佛經中說虛誑者卽是妄取相第一實者所謂涅槃非妄取相以是經說當知有諸行虛誑妄取相

【답】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면
이 중에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하셨네. (2)
016_0371_a_15L答曰
虛誑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만약 허망하게 취한 것은 속이는 것이라면 이 행들 중에서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空義)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71_a_17L若妄取相法卽是虛誑者是諸行中爲何所取佛如是說當知說空義
【문】 모든 행(行)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016_0371_a_19L云何知一切諸行皆是空
016_0371_b_01L【답】 모든 행(行)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모든 행들은 발생하고 소멸해서 머물지 않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모든 행들이란 5온이다. 행에서 생긴 것이기에 5온은 행이다. 이 5온은 다 허망해서 확정된 상[定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면 갓난애 때의 색(色)은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어린애[童子] 때의 색이 아니다. 어린애 때의 색은 청년[壯年]일 때의 색이 아니다. 청년일 때의 색은 노년일 때의 색이 아니다. 색과 같은 것은 찰나찰나 (생멸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을 분별할 수 없다.
016_0371_a_20L答曰一切諸行虛妄相故空諸行生滅不住無自性故空諸行名五陰從行生故五陰名是五陰皆虛妄無有定相何以故嬰兒時色非匍匐時色匍匐時色非行時色行時色非童子時色童子時色非壯年時色壯年時色非老年時色如色念念不住故分別決定性不可
갓난애 때의 색은 기어다니는 애 때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다면, 오로지 이 갓난애 때의 색이 있을 뿐이어서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 가령 진흙덩어리 같은 것은 항상 진흙덩어리여서 결코 물단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이 항상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과 다르다면, 갓난애는 걸어다니는 애가 되지 않을 것이고 걸어다니는 애는 갓난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두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애[童子]ㆍ소년(少年)ㆍ청년ㆍ노년의 색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혈연 관계[親屬法)를 상실해서 아버지가 없게 되고 자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갓난애만이 아버지를 얻게 되고 여타의 것 즉 기어다니는 애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는 (상속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016_0371_b_05L嬰兒色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爲異二俱有過何以故若嬰兒色卽是匍匐色乃至老年色者如是則是一色皆爲嬰兒無有匍匐乃至老又如泥團常是泥團終不作甁以故色常定故若嬰兒色異匍匐色則嬰兒不作匍匐匍匐不作嬰兒何以故二色異故如是童子少年老年色不應相續有失親屬法父無子若爾者唯有嬰兒應得父則匍匐乃至老年不應有分是故二俱有過
【문】 색이 확정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고 난 후 상속해서 다시 발생해서 나아가(=어린애ㆍ소년ㆍ청년) 노년의 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과실이 없다.
016_0371_b_16L問曰色雖不定嬰兒色滅已相續更生乃至老年色無有如上過
【답】 갓난애의 색이 상속해서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나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장작과 불이 있다 하더라도 불이 소멸했을 때는(꺼졌을 때는) 상속하지 않는다.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갓난애의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상주하는 본체[本相] 또한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016_0371_b_17L答曰嬰兒色相續生者爲滅已相續爲不滅相續生若嬰兒色滅云何有相續以無因故如雖有薪可燃滅故無有相續若嬰兒色不滅而相續者則嬰兒色不滅常住本相亦無相續
【문】 나는 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머묾이 없이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기에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016_0371_b_23L問曰我不說滅不滅故相續生但說不住相似生故言相續生
016_0371_c_01L【답】 만약 그렇다면 확정된 색이 있고 (색들이 거듭해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가지의 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또한 상속이 없다. 이렇듯 모든 곳에서 색을 구해 보아도 확정된 상[定相] 없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파초나무[芭蕉樹]는 실체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껍질과 잎이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색의 상(相)을 구할 때 찰나찰나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실체의 색[實色]을 얻지 못하므로 색의 형체[色形]나 색의 상[色相]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유사하게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등불과 같은 것에서 확정된 색[定色]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고자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색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14)
016_0371_c_01L答曰若爾者則有定色而更生如是應有千萬種色但是事不然如是亦無相如是一切處求色無有定相但以世俗言說故有如芭蕉樹求實不可但有皮葉如是智者求色相念念更無實色可得不住色形色相似次第生難可分別如燈炎分別定色不可得從是定色更有色生不可是故色無性故空但以世俗言說故有
수(受)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가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해서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치 물의 흐름이 상속(相續)하는 것과 같다. 그저 거칠게 지각해서[覺] 세 가지 수(受)가 몸에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受)도 색과 동일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5)
상(想)은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발생한다. 이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름[名字相]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想)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먼저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와 같다. 형체에 의지해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지 않다면 그림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에는 확정된 자성이 없다. 만약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형체 없이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상(想)도 이와 같다. 단지 바깥의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존재할 따름이다.16)
016_0371_c_11L受亦如是智者種種觀察次第相似故生滅難可別知如水流相續但以覺故說三受在身是故當知受同色說想因名相生若離名相則不是故佛說分別知名字相故名爲非決定先有從衆緣生無定性定性故如影隨形因形有影無形則無影影無決定性若定有者離形應有而實不爾是故從衆緣生無自性不可得想亦如是但因外名相世俗言說故有
016_0372_a_01L식(識)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눈[眼] 등의 근(根)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식도 상이하다.17) 이 식은 색에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그 중간에 있는가? 확정되지 않는다. 단지 발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고 이 사람을 인식하고 저 사람을 인식한다. 이 사람을 아는 인식은 저 사람을 아는 인식과 같은가, 다른가?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안식과 이식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다고도 말하고 다르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구별이 없다. 단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지해서 눈[眼] 등을 구별하는 것이기에 공하고 자성이 없다. 마치 마술사[伎人]가 구슬 하나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내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본래의 구슬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듯이, 식(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할 때 본래의 식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러므로 식은 머묾[住]이 없기에 자성이 없다. 속이는 것[虛誑]이어서 환영과 같다.18) 모든 행(行)도 이와 같다.
016_0371_c_21L識因色聲香味觸等眼耳鼻舌身等生以眼等諸根別異識有別異是識爲在色爲在眼在中閒無有決定但生已識塵識此識彼人知此人識爲卽是知彼人識爲異是二難可分別如眼識耳識亦難可分別以難分別故或言一或言無有決定分別但從衆緣生故眼等分別故空無自性如伎人含一珠已復示人則生疑爲是本珠爲更有識亦如是生已更生爲是本識是異識是故當知識不住故無自性虛誑如幻諸行亦如是
모든 행이란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와 의행(意行)이다.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것들인가? 중생을 뇌란(惱亂)하게 하는 탐착(貪著) 따위를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라 한다. 중생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말과 탐착하지 않음 등을 청정한 것[淨]이라 한다. 어떤 때는 감소하고 어떤 때는 증가한다. 청정한 행(行)은, 인간[人]이나 욕천(欲天)이나 색천(色天)이나 무색천(無色天)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청정하지 않은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감소했는데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그러므로 행들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묾[住]이 없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하게 병을 잘 다스리면 낫지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행은 이와 같아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다고 할 따름이다.19)
016_0372_a_10L諸行者行有二種不淨何等爲不淨衆生貪著等名不淨不惱衆生實語不貪著等名淨或增或減淨行者人中欲天色天無色天受果報已還作故名增不淨行者亦如是地獄畜生餓鬼阿修羅中受果報已則減還作故名增是故諸行有增有減故不住如人有病隨宜將適病則除愈不將適病則還集諸行亦如是有增有減故不決定但以世俗言說故有
016_0372_b_01L세제(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명에 의존해서 모든 행이 있고, 모든 행에 의존해서 식(識)의 집착이 있고, 식의 집착에 의존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존해서 6입(入)이 있고, 6입에 의존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의존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의존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의존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의존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의존해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에 의존해서 늙음과 죽음[老死]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恩愛別苦]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은 고(苦)들은 모두 행(行)을 근본으로 삼는다.
016_0372_a_21L因世諦故得見第一義諦所謂無明緣諸行從諸行有識著識著故有名色從名色有六入從六入有觸從觸有受從受有愛從愛有取從取有有從有有生從生有老死憂悲苦恩愛別苦怨憎會苦等如是諸苦皆以行爲本
부처님께서는 세제에 의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어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명(無明)이 그친다. 무명이 그치기에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기에 4제(諦)20)를 볼 때 끊어지는[見諦所斷] 견(見)ㆍ의(疑)ㆍ계금취(戒禁取) 따위가 끊어지고 수습(修習)을 할 때 끊어지는[思惟所斷] 탐욕ㆍ증오ㆍ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조희(調戲)ㆍ무명도 끊어진다.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분지[分]가 소멸한다. 이른바 무명ㆍ모든 행ㆍ식ㆍ명색ㆍ6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 따위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들이 소멸하기에 5온의 몸[身]이 완전히 소멸해서 다시 남는 것이 없으니 오직 공성[空]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 주고자 “모든 행은 속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16_0372_b_04L佛以世諦故說若得第一義諦生眞智慧者則無明息無明息故諸行亦不集諸行不集故見諦所斷身戒取等斷及思惟所斷色染無色染調戲無明亦斷是斷故一一分滅所謂無明諸行名色六入老死憂悲苦惱恩愛別苦怨憎會苦等皆滅是滅故五陰身畢竟滅更無有餘但有空是故佛欲示空義故說諸行虛誑
또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기에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기에 공하다. 이렇게 게송을 읊는다.
016_0372_b_14L復次諸法無性故虛誑虛誑故如偈說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자성이 없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3)
016_0372_b_15L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비록 발생하더라도 자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갓난애가 확정되어 자성에 머문다면 결코 기어다니는 애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노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갓난애는 순차적으로 상속하고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기어 다니는 애가 현현하고 나아가 노년이 현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보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016_0372_b_17L諸法無有性何以故諸法雖生不住自性是故無性如嬰兒定住自性者終不作匍匐乃至老年而嬰兒次第相續有異相現匍匐乃至老年是故說見諸法異相故知無性
【문】 만약 모든 법에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372_b_22L問曰若諸法異相無性卽有無性法有何咎
016_0372_c_01L【답】 자성이 없는데 어찌 법(法)이 있겠으며 어찌 상(相)이 있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성을 논파하고자 자성이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면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데 어찌 자성이 없는 법이 있겠는가?
016_0372_b_23L答曰無性云何有法云何有相何以故有根本故但爲破性故說無性是無性法若有者不名一切法空若一切法空云何有無性法

【문】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애에서
노년에 이르기 까지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다른 것이 있네. (4)
016_0372_c_04L問曰
諸法若無性
云何說嬰兒
乃至於老年
而有種種異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다른 것[異相]이 없는 것인데, 그대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 모든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 있겠는가?
016_0372_c_06L諸法若無性則無有異相而汝說有異相是故有諸法性若無諸法性何有異相

【답】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5)
016_0372_c_09L答曰
若諸法有性
云何而得異
若諸法無性
云何而有異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異性]를 얻을 수 있겠는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변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순금이 변이할 수 없듯이. 또 마치 어둠이 변이해서 밝음이 되지 않고 밝음이 변이해서 어둠이 되지 않듯이.
016_0372_c_11L若諸法決定有性云何可得異性名決定有不可變異如眞金不可變如暗性不變爲明明性不變爲暗

이 법이 변이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네.
마치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수 없고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없듯이. (6)
016_0372_c_14L復次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또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마땅히 변이의 상(相)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이 변이하든가, 다른 법이 변이하든가 이다. 이 둘은 옳지 않다. 만약 바로 이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은이가 그대로 늙은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는 젊은이와 다른 것이니,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21)에 과실이 있다.
016_0372_c_16L若法有異者則應有異相爲卽是法爲異法異是二不然若卽是法異則老應作老而老實不作老若異法異者老與壯異壯應作老而壯實不作老二俱有過
【문】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지금 눈에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세월이 지나 늙은이가 되는 것이 보이는 경우와 같이.
016_0372_c_21L問曰若法卽異有何如今眼見年少經日月歲數則老
016_0373_a_01L
【답】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네.
우유 외에 어떤 사물[法]이 있어서
타락[酪]이 될 수 있겠는가? (7)
016_0372_c_22L答曰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어서 다시 인과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우유와 타락은 여러 가지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우유가 곧 타락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변이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우유 외에 어떤 사물[物]이 있어서 타락이 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이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편벽되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016_0373_a_02L若是法卽異者乳應卽是酪更不須因緣是事不然何以故乳與酪有種種異故乳不卽是酪是故法不卽異若謂異法爲異者是亦不然離乳更有何物爲酪如是思惟是法不異法亦不異是故不應偏有所執
【문】 이 법을 논파하고 다른 법을 논파해도 여전히 공한 것[空]이 있다. 공한 것이 곧 법이다.
016_0373_a_08L問曰破是破異猶有空在空卽是法

【답】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공한 법이 있을 것이네.
공하지 않은 법이 없는데
어떻게 공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8)
016_0373_a_09L答曰
若有不空法
則應有空法
實無不空法
何得有空法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한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하지 않은 법을 논파해 왔다.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지 않는데 어찌 공한 법이 있겠는가?
016_0373_a_11L若有不空法相因故應有空法而上來種種因緣破不空法不空法無故則無相待無相待故何有空法
【문】 그대가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법도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한 것[空]을 말한 것이 된다. 다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이와 같다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016_0373_a_14L問曰汝說不空法無故空法亦無若爾者卽是說空但無相待故不應有執有對應有相待若無對則無相待待無故則無相無相故則無執如是卽爲說空

【답】
위대한 성인께서 공성[空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네.
만약 공성[空]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지 못하시네. (9)
016_0373_a_19L答曰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016_0373_b_01L
위대한 성인께서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들, 무명과 애(愛) 따위의 번뇌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성[空]을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해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다. 비유하면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복용해야 치유되는데 약으로 말미암아 다시 병이 들면 치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에서 나왔다면 물로 끌 수 있겠지만 만약 물에서 생겼다면 무엇으로 끄겠는가? 공성이 물과 같을 때 온갖 번뇌의 불을 끌 수 있다.
죄가 무겁고 탐착(貪著)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디기 때문에 공성에 대해서 견해를 내서, 공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공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인해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만약 공성으로 이 사람을 교화한다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원히 이 공성을 안다. 이 공성을 떠나면 열반의 도(道)가 없다. 경전에서는 ‘공ㆍ무상(無常)ㆍ무작(無作)의 해탈문22)을 떠나서 해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언설(言說)일 뿐이다’라고 한다.”
016_0373_a_21L大聖爲破六十二諸見及無明愛等諸煩惱故說空若人於空復生見者是人不可化譬如有病須服藥可治若藥復爲病則不可治如火從薪出以水可滅若從水生爲用何滅如空是水能滅諸煩惱火有人罪重貪著心深智慧鈍故於空生見或謂有空或謂無空因有無還起煩惱若以空化此人者則言我久知是空若離是空則無涅槃道如經說離空無相無作門得解脫者但有言說

14. 합함을 관찰하는 장[觀合品]8偈
016_0373_b_09L中論觀合品第十四[八偈]

위의 근(根)을 타파하는 장23)에서 봄[見], 봄의 대상[所見], 보는 자[見者]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셋은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겠다.
016_0373_b_10L說曰上「破根品」中說見所見見者皆不成此三事無異法故則無合無合今當說
【문】 왜 이 안[眼] 등 셋은 합하지 않는가?
問曰何故眼等三事無合

【답】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네.
이렇듯 세 법(法)은 달라서
결코 결합할 때가 없네. (1)
016_0373_b_13L答曰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016_0373_c_01L
봄은 안근(眼根)을 말한다. 봄의 대상[可見]은 색인 경계[色塵]를 말한다. 보는 자는 ‘나[我]’를 말한다.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어서 결코 합할 때가 없다. ‘다른 곳’이란, 󰠏󰠏󰠏눈[眼]은 몸 안에 있다. 색은 몸 바깥에 있다. ‘나’는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또 만약 봄[見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합해서 보는가, 합하지 않고서 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합해서 본다면, 경계[塵]가 있는 곳마다 근(根)이 있고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고서 본다면 근(根)과 ‘나’와 경계가 각각 다른 곳에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가령 안근(眼根)은 이곳에 있기에 먼 곳의 물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24) 보지 못한다.
016_0373_b_16L見是眼根可見是色塵見者是我三事各在異處終無合時異處者在身內色在身外我者或言在身內言遍一切處是故無合復次若謂有見爲合而見不合而見二俱不然以故若合而見者隨有塵處應有根有我但是事不然是故不合若不合而見者塵各在異處亦應有見而不見何以故如眼根在此不見遠處甁是故二俱不見
【문】 ‘나’와 의(意)와 근(根)과 경계(塵)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해서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봄과 봄의 대상과 보는 자가 있다.
016_0373_c_03L問曰四事合故有知生能知甁衣等萬物是故有見可見見者
【답】 이것은 근을 논하는 품25)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그대가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이 인식 작용은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을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인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인가? 만약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이라면, 인식 작용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합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인식 작용이 발생하겠는가? 만약 넷이 동시에 합할 때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전에 물단지가 있으면 후에 보고 그리고 나서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라면 전과 후가 없는 것이다. 인식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법들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아서 확정된 상[定相]이 있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016_0373_c_05L答曰是事「根品」中已破今當更說汝說四事合故知是知爲見甁衣等物已生爲未見而生若見已生者知則無用若未見而生者是則未合云何有知生若謂四事一時合而知生是亦不然若一時生則無相待何以故先有甁次見後知生一時則無先後知無故見者亦無如是諸法如幻如夢有定相何得有合無合故空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
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또한 그러하네.
그 밖의 입처[入]와 그 밖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네. (2)
016_0373_c_14L復次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듯이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합하지 않는다.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의 세 법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들음[聞]ㆍ들음의 대상[可聞]ㆍ듣는 자[聞者]ㆍ그 밖의 입처[入]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의 대상, 탐욕을 내는 자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증오ㆍ증오의 대상ㆍ증오하는 자ㆍ그 밖의 번뇌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016_0373_c_16L如見可見見者無合故可染染者亦應無合如說見可見見者三法說聞可聞聞者餘入等如說染可染染者則說瞋 可瞋瞋者餘煩惱等

다른 법들이 합하는 것이네.
봄 등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네.
다름[異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봄 등이 어찌 합하겠는가? (3)
016_0373_c_20L復次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또 무릇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합한다. 봄 등에서는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016_0373_c_22L凡物皆以異故有合而見等異相不可得是故無合
016_0374_a_01L
비단 봄 등의 법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네. (4)
016_0374_a_01L復次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또 비단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등의 셋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다.
016_0374_a_03L非但見可見見者等三事異相不可一切法皆無異相
【문】 왜 다름[異相]이 있지 않은가?
016_0374_a_05L問曰何故無有異相

【답】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이 아니네.
어떤 법이 원인에서 나왔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네.(5)
016_0374_a_06L答曰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그대가 말하는 다른 것[異] 이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이라 한다.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는 다른 것[異]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연(緣)들에서 생겼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원인이 괴멸하면 결과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들보와 서까래 등에 의존해서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집은 대들보나 서까래와 다르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 등이 괴멸하면 집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016_0374_a_08L汝所謂異是異因異法故名爲異異法不名爲異何以故若法從衆緣是法不異因因壞果亦壞故如因梁椽等有舍舍不異梁椽梁椽等壞舍亦壞故
【문】 만약 확정된 다른 법[異法]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問曰若有定異法有何咎

【답】
만약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는 것이리라.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네.
그러니 다름이 있지 않네. (6)
016_0374_a_13L答曰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만약 다름[異]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異法]이 있을 것이다.26) 그러나 실제로는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과 다름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이 있다면,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의 다른 것[異物]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과 다름[異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016_0374_a_16L若離從異有異法者則應離餘異有異法而實離從異無有異法是故無餘異如離五指異有拳異者拳異應於甁等異物有異今離五指異拳異不可得是故拳異於甁等無有異法
【문】 우리 학파의 경전에서는 “다름[異相]은 연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016_0374_a_21L問曰我經說異相不從衆緣生分別摠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
016_0374_b_01L
【답】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016_0374_a_23L答曰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그대는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름[異相]은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뭇 연(緣)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름[異相]은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다. 지금 다른 것[異法]에는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다른 것[異法]이 있는데 어디에 다름[異相]을 쓰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에도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다름이 다르지 않은 것에 있다면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두 경우 모두27)에 없다면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법(法)과 저 법이 또한 있지 않다.
016_0374_b_02L汝言分別摠相故有異相因異相故有異法若爾者異相從衆緣生如是卽說衆緣法是異相離異法不可得異相因異法而有不能獨成今異法中無異相何以故先有異法故用異相不異法中亦無異相何以故若異相在不異法中不名不異法二處俱無卽無異相異相無故此彼法亦無

또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法)이 자기와 합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합하는 것도 아니네.
합하는 자도, 지금 합하고 있는 것도,
합함도 모두 있지 않네. (8)
016_0374_b_11L復次異法無故亦無合
是法不自合
異法亦不合
合者及合時
合法亦皆無

이 법(法)은 자체와 합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손가락이 자체와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법도 합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이미 성립했기 때문에 합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합함[合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는 자[合者]ㆍ지금 합하고 있는 것[合時]ㆍ합함[合法]을 모두 얻을 수 없다.
016_0374_b_13L是法自體不合以一故如一指不自異法亦不合以異故異事已成須合故如是思惟合法不可得是故說合者合時合法皆不可得
中論卷第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제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을 가리킨다.
  2. 2)미래세의 법과 현재세의 법을 말한다.
  3. 3)발생과 머묾과 소멸을 말한다.
  4. 4)같은 법이라는 뜻이다.
  5. 5)다른 법이라는 뜻이다.
  6. 6)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과 이미 성립한 것 두 가지를 말한다.
  7. 7)불은 장작을 소유한다, 불 속에 장작이 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8. 8)여기서 세 가지는 불과 장작, 취착과 취착하는 자, 행위와 행위자를 말한다.
  9. 9)9)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
  10. 10)이상 게송 3를 풀이한 것이다.
  11. 11)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12. 12)‘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생긴다면’이라는 뜻이다.
  13. 13)13)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라는 네 가지 오류를 말한다.
  14. 14)이상 색(色)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5. 15)이상 수(受)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6. 16)이상 상(想)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7. 17)눈 등의 감관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식도 상이하다.
  18. 18)이상 식(識)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9. 19)이상 행(行)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20. 20)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21. 21)바로 이 법이 변이하는 것과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2. 22)3해탈문(解脫門)이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되는 세 종류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아(我)와 법(法)의 공함을 관하는 것이 공(空)해탈문, 차별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 무상(無相)해탈문, 원구(願求)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무원(無願)해탈문 또는 무작(無作)해탈문이다.
  23. 23)제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24. 24)근(根)과 ‘나’와 경계가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5. 25)주 14)와 같다.
  26. 26)이(異)나 이상(異相)은 ‘다름’을, 이법(異法)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뒤의 응리여이유이법‘(應離餘異有異法)’은 “여타의 다름을 떠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겠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27. 27)다른 것[異法]이나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