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등론석』은 일명 중론으로서 본래 500게송이 있으며,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다. ‘등(燈)’을 빌려 이름 붙인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고요히 비추는 공능(空能)이 있기 때문이고, ‘중(中)’을 들어 제목으로 붙인 것은 연기관(緣起觀) 등에 비춰 (삿된 견해를) 없애 양 극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등불은 본디 무심지(無心智)여서 비춰 없애는 것이니, 법성이 평등한 중(中)의 뜻이 여기에 있으므로 논이 의지해 그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겉으로 표현된〕문장을 살피다가 본 뜻에 막히어 속된 것에 집착하여 진실에 미망하고, 단상(斷常)의 사이를 엎치락뒤치락하고 혹은 유무(有無) 안에서 오락가락하고 이름에 집착하여 진실을 잃으면 마치 잎을 잡아당겨 뿌리를 잃는 것과 같다. 어찌 그렇게 되기를 바라랴마는 그런 데에는 대개 이유가 있다. 시험삼아 설명을 하겠다.
만약 분별의 원인에 얽히고 허망의 결과를 초래하고, 의혹의 업이 내식(內識)을 훈습하고 나쁜 친구로서 그 외연(外緣)과 결합하면, 거만이 높은 산보다 높고 삿된 견해가 창해보다 깊은 데 이르니, 성냄의 불꽃은 만지기 어렵고 말의 칼날은 당면하기 어렵다. 유(有)를 설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유쾌해지고 공을 담론하는 것을 듣고 비방을 일으킨다. 6종에 치우치게 집착하면서도 각기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500논사가 다투어 각기 이론(異論)을 일으켜도, 혹은 삿된 견해를 가지고 정법을 어지럽히고 또한 거짓으로써 진실과 같다 하고, 인식이 깨달은 듯하지만 오히려 미망에 흔들리고, 가르침이 비록 통달했지만 다시 막힐 것이다. 가히 구슬을 버리고 돌을 가지고 놀며, 보물을 버리고 장작을 짊어지고, 그림을 보고 용을 두려워하고, 발자국을 살피어 코끼리를 겁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아하기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용수보살께서는 세간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려고 기욕(嗜慾)을 꾸짖고 발심하셨으며, 심오한 경(經)을 보고 겸손하여 독존(獨尊)의 현기(懸記)에 힘입어 법의 횃불로 염부(閻浮)를 불살랐다. 또한 그 지(地)는 초의(初依)을 넘고 공은 복위(伏位)를 초월하였으니, 이미 한 진실을 궁구하고 2능(能)을 궁구하였다. 양인(兩印)을 차고 백가(百家)를 평정하고3공(空)을 섞어 만물을 고르게 하였다. 무수히 많은 겁(劫) 동안 여러 어려움을 시험 삼고 저 무리의 미망을 슬퍼하여 이 논(論:中論)을 지은 것이다. 문장은 깊고 뜻은 미묘하며 논파는 솜씨 있고 주장을 펴는 것은 교묘하니, 둔근(鈍根)이 (이 설명을 들으면 대부분) 겁을 내서 물러나려는 마음을 일으켰다.
분별명(分別明)보살이라는 사람이 있어 대승의 법으로써 도(道)를 체득하고 중도[中]에 기거하여 널리 진리의 말을 보고 이 논(論:般若燈論釋)을 지어 비밀장(秘密藏)을 열어 여의주를 주었다. 게송과 주석이 서로를 이루고, 스승[師:龍樹]과 제자(弟子:分別明)를 드러내었다.
자기 견해와 이견이 천 갈래로 성하고 외도의 다른 계탁이 만 갈래로 갈라져도 마치 당나귀 마차로 네 필의 마차와 경쟁하고 반딧불로 용의 불길과 겨루는 것과 같이 그 품류(品類)를 드러냄에 그 스승의 종지를 드러내지 않음이 없었다. 옥과 돌이 갈라지고, 하늘과 땅이 이미 다르듯이 서역의 식자[染翰]가 여러 가(家)가 있어 진실을 고찰하고 미묘함을 분석했어도 이것[반야등론석]으로써 정예(精詣)로 삼았다. 만약 본말(本末)을 통틀면 600게송이 있고, 범문(梵文)도 이와 같으나 번역하면 이것이 감소한다.
우리 황제의 영험한 도(道)는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보다 뛰어나고 도주(陶鑄)의 조화와 같고, 6합(合)을 하나로 하고, 3재(才)를 꿰뚫어 4생(生)을 섭화하며, 10선(善)을 널리 알리셨으며, 근본을 숭상하고 지말적인 것을 그치게 하며, 무위태평(無爲太平)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보존하게 하여, 무언(無言)으로 다스렸다. 또한 한편으로서는 석전(釋典)에 관심이 있어 멀리 진리를 그리워하였다. 불교가 동쪽[東:中國]으로 전파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형상이 있어도 아직 빠진 부분이 많다고 여기고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듣기를 희망하며 자나깨나 노력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삼장법사 바라파밀다라(波羅頗蜜多羅)는 당(唐)나라 말로 명우(明又)라고 한다. 학문은 소승과 대승을 겸비하였고 많은 내용을 널리 종합하였다. 아(我)를 없애 신(神)을 기쁘게 하고 현(玄)을 밝혀내어 성(性)을 길렀다. 중국에 노닐 생각을 가지고 중생을 이롭게 할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장자에 몸을 의지하고 횃불을 들어 친구가 따르도록 하였다. 빙상(氷霜)을 개의치 않고 총령(葱嶺:파미르 고원)을 넘고 바람과 열을 무릅쓰고 사하(沙河:파미르 고원)를 건너니, 햇수로 5년이 흘러 험한 길 4만(리)을 지나대당(大唐) 정관(貞觀) 원년 취자(娶觜) 11월 20일에 범문(梵文)을 머리 위에 이고 서울에 도달하였다.
일찍이 전진(前秦)은 구마라집[童壽]을 부르려 병사를 썼고, 후한(後漢)은 가섭마등(迦葉摩騰)을 청하려 멀리 번사(蕃師)를 수고롭게 한 것이 어찌 이 감응에 비유되며 도(道)에 그윽하게 부합한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국가(國家)의 상서로움과 덕인(德人)의 강림을 유사(有司)가 아뢰니, 황제의 마음이 특히 기뻤다. 그 해에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바라파밀다라 스님을) 모시라는 조서가 내리고, 거듭 『보성경(寶星經)』 1부를 역출할 것을 청하였다.
4년 6월, 승광(勝光)으로 이주하여 이내 의학사문(義學沙門)인 혜승(慧乘)ㆍ혜랑(慧朗)ㆍ법상(法常)ㆍ담장(曇藏)ㆍ지수(智首)ㆍ혜명(慧明)ㆍ도악(道岳)ㆍ승변(僧변)ㆍ승진(僧珍)ㆍ지해(智解)ㆍ문순(文順)ㆍ법림(法琳)ㆍ영가(寧佳)ㆍ혜색(慧賾)ㆍ혜정(慧淨) 등과 전역사문(傳譯沙門)인 현모(玄謨), 승가(僧伽)와 삼장(三藏)스님의 동학(同學)인 굴다(崛多)율사 등이 함께 이 논을 증명(證明)하고 대역(對譯)하였다.
상서좌복야빈국공(尙書左僕射빈國公)인 방현령(房玄齡), 태자첨사(太子詹事)인 두정륜(杜正倫), 예부상서조군왕(禮部尙書趙郡王)인 이효공(李孝恭)등이 모두 이 성군을 돕는 현신(賢臣)으로서 항상 도운 사람들이며, 충정(忠貞)을 다해 주인을 섬긴 이들이다. 몸을 도외시하고 법을 구했다. 성군(聖君)의 민첩한 배려고 마침내 이를 널리 선포하여 이익이 더욱 두터워져 이것이 개발되었다.
감역(監譯)의 칙사(勅使) 우광록대부태부경난릉(右光祿大夫太府卿蘭陵)인 소경(簫璟)은 믿음의 뿌리가 처음부터 두터워 지혜의 힘을 끝까지 구하고, 고요히 생각하여 진리를 살피고, 빈 마음으로 도(道)를 그리워하고 영향을 찬탄 권조(勸助)하여 중지함이 없었다. 그 덕승(德僧)들은 부지런하고 나태하지 않아, 유지(幽旨)를 조사하여, 화(華)를 버리고 진리는 존재케 하니 그 이치를 이해하고 기뻐하였다. 스승이 그 시비를 궁구하니 문장은 맞았어도 상세한 뜻은 덮여 그 뜻을 밝히려고 거듭 살피었다.수성(壽星) 10월 17일 검감(檢勘)을 마쳤다.
이 논(반야등론석)을 지음에 중도(中道)를 관(觀)하여 밝히면 중(中)은 있으나 관(觀)은 없고, 공(空)이 제일의를 드러내면 제일의제를 얻으나 공(空)과 어긋난다. 그리하여 사남(司南)의 수레는 미혹함을 나타내고 조담(照膽)의 거울은 삿된 사람을 비추니, 삿됨이 없으면 거울에 비출 것이 없고 미혹하지 않으면 수레가 쓸모없다. 이 『반야등론석』의 논파와 주장은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안으로 물리치고 밖으로 부정하며 미망이 다하게 하였으면서도 오묘하게 남겨둘 것은 남겨두고 논파해야 할 것은 논파했으니, 넓고 넓으며 거침없도다.
그 근원을 알려 해도 알 수 없고, 그것을 따르려 해도 끝을 알 수 없다.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마음과 정신을 밝히는 숫돌이고, 바다와 산을 넘는 수레이며, 혼식(昏識)을 놀라게 하는 천둥과 우레이고, 유도(幽塗)를 비추는 해와 달이다. 이 땅(중국)에 먼저 『중론(中論)』 4권이 있었다. 본 게송과 대체로 같으며, 빈두로가(賓頭盧伽)가 주해(注解)하였지만 그 부집(部執)에 어두워 학자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이 『반야등론석』이 흥하여 거울이 되어 여러 군자(君子)를 일깨워 줄 것이다. 상세하게 이것을 보라.
널리 모든 분별을 끊고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시며 유근(有根)을 잘 제거하기 위하여 진실법을 훌륭히 설하시네.
016_0402_a_17L[觀緣品] 普斷諸分別, 滅一切戲論, 能拔除有根,
巧說眞實法。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경지를 문자로 훌륭하게 안립(安立)하시어 나쁜 지혜와 그릇된 마음을 깨뜨리시니, 이 까닭으로 머리 숙여 예경합니다.1)
016_0402_a_19L於非言語境, 善安立文字,
破惡慧妄心, 是故稽首禮。
【釋】이들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 나의 스승(용수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 자기가 깨달은 대로 진리를 자세히 증험하고 참된 뜻을 열어 나타냈으니, 모든 삿된 지혜의 그물을 끊기 위함이다. 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비록 범행(梵行)을 닦지만 미혹하기 때문에 모두 선하지 못한 것이 된다.이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도(道)를 깨닫게 하려고 성스런 가르침에 의거해 이 『중론(中論)』을 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논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이른바 바가바(婆伽婆)께서는 무명중생(無明衆生)이 세간의 생기와 소멸[起滅], 단멸과 상주[斷常], 같은 것과 다른 것[一異], 오는 것과 가는 것[來去] 등 그물같이 빽빽한 모든 희론의 숲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제일의 자비를 일으키시고, 용맹의 지혜를 내셨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고, 싫증내는 마음 없이 무량한 복덕과 지혜의 짐을 짊어지시며, 반야 경계의 바다를 꿰뚫고 모든 희론의 그물을 끊어 다른 연(緣)에 의지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모든 법의 진실한 감로를 얻으셨다.
그리하여 저 취[趣]2)ㆍ수명[壽]ㆍ신분[分齊]ㆍ성(性)ㆍ처(處)3)ㆍ시간 등에서 중생을 섭수하여 이익케 하시며, 모든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및 외도(外道)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오직 제일승(第一乘)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위해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에 의거해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등의 모든 언어를 시설하셨다. 이 연기의 진실한 가르침 가운데 가장 수승하다.
우리의 아사리[성사(聖師)]용수보살도 또한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문구에서 여래의 여실한 도리를 열어 보이고 여실한 깨달음을 얻어 지극한 용맹을 내어 통달한 대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까닭에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또 자비의 물로 마음을 적셔 이미 깨달은 것을 증험하여 세간의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가 이미 깨달은 것을 이해하게 하려고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는 것도 아니며,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네.
016_0402_b_19L不滅亦不起, 不斷亦不常, 非一非種種,
不來亦不去。
연기는 희론을 그치게 하며 설한 것이 희론을 잘 없애기 때문에 모든 설법자 가운데 최상인 부처님께 예경합니다.
016_0402_b_21L緣起戲論息, 說者善滅故,
禮彼婆伽婆, 諸說中最上。
【釋】이 게송4)의 순서대로 직접 풀이하여 이 논의 뜻을 해석하겠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게송의 뜻을 말한다.
016_0402_b_22L釋曰:彼句義次第解無閒故,解此論義是故初說如是句義。
파괴되는 까닭에 소멸[滅]이라 하고,출생하는 까닭에 생기[起]라 하며, 상속하여 죽는 까닭에 단멸[斷]이라 하고, 모든 시간에 머무는 까닭에 상주[常]라 하며, 차별되지 않고 다른 뜻이 없는 까닭에 같은 것[一] 이라 하고, 차별되고 다른 뜻이 있는 까닭에 다른 것[種種]이라 하며, 이곳으로 온다는 뜻에서 오는 것[來]이라 하고, 저기로 간다는 뜻에서 가는 작용이라 한다. 이 소멸이 없으므로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 가는 것이 없으므로 가는 것도 아니다. 생기와 소멸, 같은 것과 다른 것은 제일의제(第一義諦)에서 끊어지고, 저 단멸과 상주는 세속제에서 끊기며, 가는 것과 오는 것은 때로는 세속제와 제일의제에서 끊긴다고 한다. 혹은 이와 같은 것 모두는 제일의제에서 끊긴다. 그분이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이란 불세존(佛世尊)이다.
연기란 갖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연기라 한다. 언어의 자성(自性)에 집착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까닭에 희론을 그치게 한다고 한다. 모든 재난과 장애가 없는 까닭에, 혹은 자성(自性)이 공(空)하기 때문에 잘 없앤다[善滅]고 한다. 설한 것은 뜻을 널리 연설하기 때문이다. 올바르고 전도되지 않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에 부처님[婆伽婆]이라고 이름 한다. 이와 같은 뜻으로 인하여 내가 예경하는 것이다.
‘모든 설법자 가운데 최상’이란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그(부처님)는 전도되지 않은 연기로써 하늘과 인간에게 열반(涅槃)과 신락(信樂)의 도(道)를 열어 보이셨기 때문이고, 성문ㆍ독각ㆍ보살에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며, 연설하신 대로 연기가 바르며 전도되지 않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문】 그대는 스스로 연기법을 설한다고 했는데, 만일 연기를 말한다면 어째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혹은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연기한다고 하는가? 이 말은 서로 모순된다. 또한 이해될 수 없는 까닭에 말과 뜻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가 다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답】 만일 모든 연기가 다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가 내게 오류가 있다고 이해해도 마땅하지만, 나는 아직 “모든 연기가 다 생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까닭에 위와 같은 잘못은 없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세속제에는 연기가 존재하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그대가 말한 이유[因]는 이 주장에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보시바라밀[檀] 등과 같다. 제일의제에서는 선(善)을 말할 수 없지만 생사(生死)를 섭수하는 까닭에 선이라고 한다.
또한 식(識)을 아(我)라 하는 것처럼 제일의제 중에 식은 진실로 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여 아는 까닭에 과오가 없다. 또한 마치 변화한 장부(丈夫)가 나타는 것처럼 장부의 자성(自性)은 실로 생긴 것이 아니다. 또 아지랑이처럼 내입(內入)의 생기 등은 세속제에서 설해지며, 제일의제에서는 설해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잘못이 없다.
또한 담무덕인(曇無德人)6)이 말하였다. “논의 처음에 생기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무위법(無爲法)이므로 특수한 연기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법(我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논의 처음에 성문 등과 같은 연기가 아니라는 주장과 상응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자성을 부정하는 까닭에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특별한 연기법을 말한 것은 그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저 무위연기(無爲緣起)가 있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려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증험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의 의도가, 말하자면 연기가 반드시 연기무위(緣起無爲)라 한다면 이 해석에는 과오가 있다. 왜냐하면 생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저 생기에 실체가 없으므로 ‘같은[共]’이라 이름 할 수 없다. 무위에는 생기가 없지만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머무는 것[住]과 같다.”
또한 경량부(經量部)논사가 말하였다.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뜻은 성문과 다른 [不共]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과 다르게 생기하는 것에 실체가 없는 것을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자재(自在)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저 외도가 소멸에 대해 이해할 때 소멸에 실체가 없는 것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비유하면 무아(無我)와 같다. 원인에 의지해 결과가 생기므로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가 일어나야 원인이 없어지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니주(摩尼珠)와 마른 소똥 가루와 햇빛이 화합하여 이렇게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실체7)에서 불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실체에서 불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생기하면서 소멸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라는 주장도 바로 그와 같다. 그대가 논의 처음에 설한 ‘성문과 다른 특별한 연기’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런 말을 해도 이 말은 바른 도리에 위배된다. 이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기는 ‘생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생기하는 것이 아닌 등의 특수한 연기’의 뜻을 이해시키려 한다. 이것이 불공의 ‘특수한 연기’인 까닭에 처음에 부처님을 찬탄하고 바야흐로 이 논을 짓는다. 먼저 ‘생기’가 ‘생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에 ‘소멸하는 것이 아님’등도 바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어떻게 저 ‘생기하는 것이 아님’ 등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이른바 생기를 분별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난 것[現前]으로 알기 때문에 모두 그와 같이 설하는 것이다. 혹은 자기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도 하며, 혹은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 하고, 혹은 무인(無因)에서 실체가 일어난다고 하는 이 설들은 다 옳지 못하다. 성스런 가르침 및 바른 도리에 의거하여 여실히 제관(諦觀)하는 것이 생기의 뜻이다. 그러므로 논을 지은 용수보살이 자재로이 결정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곳에서도 사물의 실체는 없네. 자기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모두로부터, 혹은 무인(無因)으로부터도.
016_0403_b_18L無時亦無處, 隨有一物體, 從自他及共,
無因而起者。
【釋】“자기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非自]”란 저 모임[聚]이 모든 일어나는 법을 안립 시켜도 끝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차례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自]란 아(我)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실체[體]를 무슨 까닭에 부정하는가? 말하자면 ‘부정한다’한 최승의 뜻이기 때문이며, 또한 남김없이 분별의 그물을 끊기 때문이다.남김 없는 [無餘] 분별의 그물은 남김 없는 인식의 경계를 말하기 때문이며, ‘경계가 없다[無境界]’는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성립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遮]’이란 유여(有餘)으 수(受)를 논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방편으로 모든 법이 ‘생기하는 것이 아님’을 설하는 것이다. 방편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대승의 실단(悉檀)8)이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함경(阿含經)』에서 색(色)에는 생기 작용이 없음을 설할 뿐 반야바라밀의 생기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로부터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不自起]”란 이른바 자기로부터 이러한 실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른 이해이다. 만일 이것을 달리 이해하여 자기[自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에도 오류가 있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이른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他起]”고 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그대가 “자기로부터 실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 오직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단다(悉檀多)에 위배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방편어로는, 제일의제 중에 모든 내입(內入) 등은 자기로부터 일어난다는 뜻이 없다. 세속제에서 작용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생각[思]과 같다. 이부(異部)로 회전(廻轉)하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도 이유가 되지 못하는가? 비유에 실체[體]가 없기 때문이므로 이와 같이 저 이유를 회전해도 모든 곳에 비유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승거(僧佉)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세우려는 주장은 어떤 뜻인가? 결과[果]를 ‘자기로부터[自]’라 이름 하는가, 아니면 원인을 ‘자기로부터’라 이름하는가?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만일 결과의 실체[體]를 세워 ‘자기로부터’라고 하면 나의 주장의 성립한다. 만일 원인의 실체가 ‘자기’라면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 원인 가운데 실체[體]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有]가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생기[起]’라고 해야 한다. 그대가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주장이 어찌 옳겠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생기에 관한 분별을 부정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기의 성질에 의하여 일어난다’ 하고, 또는 ‘다른 것의 성질[他性]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부정한다.그대가 바르게 사유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대가 미혹하기 때문이며,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어떤 사람이 달리 해석하여 말하였다. “모든 법은 자기의 실체로부터 일어나는 일이 없다. 저 생기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또 무한소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치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 뜻은 무엇인가? 이유와 비유를 설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설하는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논파는 전도를 드러내 오류를 이루게 된다. 무엇이 전도됨인가? 이른바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는 오류, 존재의 결과가 일어난다는 오류 및 유한소급[有窮]을 일으킨다는 오류로 말미암아 본래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승거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하였다. “모든 실체는 자기로부터 생기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일어나려고 다시 자기를 없애기 때문이니, 마치 삼계에 토끼의 뿔이 생기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다시 그대의 주장을 물리치고자 한다. 이처럼 나는 원인과 결과를 세워 다른 실체가 없음을 잘 요별 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자아(自我)처럼 원인의 실체로부터 결과의 법이 스스로 일어나므로 나의 주장이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삿된 분별을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먼저 그 주장을 부정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처럼 모든 법의 실체는 자기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때 어떤 곳이라도 물체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뜻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부터[他]’란 ‘다르다[異]’는 뜻이다. 이를 방편어로는, 제일의제 중에 내입(內入)은 모든 다른 연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왜냐하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甁) 등과 같이 또한 제일의제 중에 다른 연이 눈 등의 내입(內入)을 일으킬 수 없으니, 왜냐하면 다른 것[他]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실[經] 등과 같다.
또한 비세사인(鞞世師人)이 말하였다. “미진(微塵)을 원인으로 모든 법의 결과가 일어난다. 저 두 미진을 처음으로 차례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 모여 실체10)가 일어난다. 그대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我)의 속성[求那]11)을 분별하여 원인으로 주장하는 것인가. 특수[異義]12)를 분별하여 원인으로 주장하는 것인가? 만일 아(我)의 실체[體]를 여의고 따로 속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만일 저 특수[異義]를 분별하면 세간의 이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설은 옳지 않다. 총괄적인 원인을 설하기 때문이다. 저 법이 모여 다른 지각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은 지각의 원인을 설하여 ‘다른[他]’이라 하며, ‘아(我)’와 ‘속성’은 아니라고 말하니, 다르게 사유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이해 또한 무너지지 않으니, 주장 명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일의제에서는 ‘지(地)의 미진’이 처음 일어나는 순간을 ‘지의 실체[地實]’라 하지 않으니, 미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화진(火塵)과 같으니, 이와 같이 제일의제에서는 화진이 처음 일어날 때 ‘불의 실체[火實]’라 이름하지 않는다. 미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수진(水塵)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도 차례로 설해야 한다.”
다시 아비담(阿毘曇)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다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과의 공능(功能)이 공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설한 것인가, 공하지 않다는 것을 설하여 ‘다른 것’이라 한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결과의 공능이 공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유 명제가 성립되지 않으며, 공하지 않다면 능성법(能成法)13) 이 공하므로 비유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속의 언설은 실제하고 병과 눈 등의 내입과 외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대가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016_0404_c_05L論者言:世俗言說實故,甁眼入等內外可得故。汝說過者,此不相應。
또 불호(佛護) 논사가 해석하였다.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他作]도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016_0404_c_06L復次佛護論師釋曰:他作亦不然。何以故?遍一切處,一切起過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그와 같이 오류를 설하면 곧 이루는 목적[所成法]과 이루는 내용[能成]이 전도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로부터 모든 원인의 실체가 일어나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또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한 사물의 실체만 일어나기 때문에 앞에서 한 말과 서로 위배된다. 또 만일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이 일어나는 오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한다는 것[他起]’이라는 오류가 된다면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14)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싹과 다른 지(地) 등의 종자와 다르지 않은 종자는 싹 등의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와 같은 주장에 의해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물체가 일어난다고 말하면 그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함께 하지 않은[不共]’이란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어느 때 어느 곳에 한 물체도 ‘함께[共]’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말에는 오류가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한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15) 이 주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여기서 나형부(裸刑部)의 견해를 비판한다.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슨 말인가? 그가 말하기를 “금과 금 아닌 것과 사람의 노력과 불 등 자타(自他)의 힘에 의해 팔찌 등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설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무인(無因)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슨 뜻인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어떤 사물의 실체도 무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인은 증험 할 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증험이 성립한다 해도 오류가 있기 때문에 세간이 이해하는 바를 깨뜨린다. 세간에서 논증하는 주장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속의 내입(內入)의 실체를 일어나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이 것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싹 등과 같다. 다시 세간에서 이해하는 바를 오류란, 저 세간에서 만일 사물의 실체가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안다면, 실로 비단을 만드는 것과 대나무로 광주리를 만드는 것과 진흙으로 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오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나쁜 원인[惡因]”을 처(婦) 등이 없는 것처럼 또한 “무인(無因)”이라고 한다. 나쁜 원인은 무엇인가? 이른바 자성(自性)ㆍ자재천(自在天)ㆍ장부(丈夫)ㆍ장(藏)ㆍ시(時)ㆍ나라연(那羅延) 등은 실체가 아니므로 이것은 무인이며, 실체를 일으킬 수 없다. 만일 “저 자성 등에서 일어난다”고 말하여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하면, 논증 방법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증험을 말해도 또한 오류가 있다.
또 자성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성이 있어 저 내입(內入) 등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체(我體)를 장엄하기 때문이다. 물에서 자생하는 꽃의 뿌리ㆍ실뿌리ㆍ줄기ㆍ잎사귀의 색과 모양이 아름다운 것처럼, 또한 대청주인다라니라아비니라보(大靑珠因陀羅尼羅阿毘尼羅寶) 등처럼, 또 공작 목덜미의 갖가지 무늬 빛을 좋아하는 것처럼 모든 자성은 그러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와 같은 주장을 내세워 자성을 ‘작용하는 자[作者]’라 한다면 업의 원인에 작용하는 자가 없음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렇다면 저 내입(內入)이 인연을 일으켜 반드시 세속의 지혜가 작용하는 모든 언어가 되어 다시 오류가 성립하게 된다. 만일 제일의제에서라면 비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는 연꽃과 보배 등이 본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일 ‘내가 무인을 주장해도 그들로 하여금 원인을 이해시킬 수 없으므로 반드시 원인을 들어 무인(無因)을 이해시켜야 한다. 비유하면 오랑캐와 함께 다시 오랑캐의 말을 하는 것처럼, 이런 까닭에 방편으로 원인을 설해도 앞의 말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끝을 바꾸는 것은 또한 얻고자 하는 의도와 같으며, 이 의도로 그를 이해시킬 수 있다. 오랑캐에게 ‘저 곳에 연기가 있으면 곧 불이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의도를 알려 지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쪽 말과 저쪽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또 외인(外人)은 자재천이 원인이 된다고 집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자재천(自在天)이 세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세속제에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소 치는 사람처럼 혹은 근심과 기쁨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재천을 집착하여 모든 원인으로 세간을 만드는 자라 이름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인식되는 것[所量]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자재(自在)와 같다.그러므로 세속제에서도 자재천이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끝내 자재천이 원인이 되어 모든 법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이 원인과 결과는 자기의 성질인가, 다른 것의 성질[他性]인가, 둘 다 갖춘 성질인가? 이 차이에 관한 분별은 앞에서 이미 부정했으므로 일어나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아님도 나중에 자세히 논판하겠다. 제일의제 주에서 자재천은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기세간(器世間)의 갖가지 업의 원인이 자재천이기 때문에 머무는 작용ㆍ생기하는 작용ㆍ괴멸되는 작용ㆍ고락의 증감 작용 따위의 의지처가 된다’고 했는데, 이 설이 성립하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이루게 된다. 세속의 언설은 제일의가 아니며, 제일의 주에는 업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장부(丈夫)17)가 생기는 원인[生因]이 된다고 고집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세간은 장부를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실로 그물을 짜는 것처럼, 월주(月珠)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나무에서 가지와 잎 등이 돋아나는 것처럼, 모든 중생이 장부로 원인을 삼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 운동(運動)과 부동(不動), 가까운 것과 먼 것, 안과 밖 등 그와 같은 모든 것은 다 장부를 원인으로 삼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에서 자재천이 원인이 된다고 집착하는 이런 생각을 이미 부정했지만, 이제 다시 말하겠다. 조달(調達)18)의 아(我)와 같은 것은 조달의 몸을 모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我)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의 자아(自我)와 같다.
또한 야야달다의 몸 등의 모임은 야야달다의 아(我)가 만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 즐거움과 괴로움과 지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조달의 몸 등의 모임과 같다. 만일 ‘저 계박된 아(我)는 삼계의 원인이 되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아(我)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만일 해탈한 아라고 한다면 주장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의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문】 그대가 ‘아(我)로 원인을 삼는다’고 말한 것은 우리의 주장 중 한 부분이므로 그대가 이유를 제시해도 이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016_0406_a_02L問曰:汝言我故因者,此自立義中是一分故,汝出因者是義不成,有過失故。
【답】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앞에서 이미 설하였다. 왜 오류가 없는지는 앞에서 ‘소리는 무상하다. 소리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북소리와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은 오직 이 한 아(我)만 있다는 것이니, 마치 허공이 하나인 것과 같다. 병 등의 분별은 모두 거짓이며, 거짓이므로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비유할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논파는 이루어질 수 없다. 주장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19)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 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허공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허공 꽃처럼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허공’이라 말한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언설이 있을 뿐이다. 세속법 중에 아(我)를 설한 것은 가설하여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대가 한 아(我)만을 세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의 주장은 저 자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범마(梵摩:梵天)를 위시하여 아래로 주지(住持)20)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의 결과가 일어남은 다 자성을 원인으로 한다. 내입(內入)이 괴로움과 즐거움과 어리석음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반드시 원인이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과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능작(能作)의 인(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세간의 사물에 능작의 인이 갖추어져 있다면, 아(我)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마치 전단나무의 조각ㆍ기와 조각ㆍ금으로 장엄된 그릇과 같이 이러한 것들은 총체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저 내입에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 등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내입이 저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모든 5온은 다 이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 등의 자성이 된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5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수음(受陰)과 같다. 이 때문에 이유 명제와 비유 명제가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위에서 그대가 세운 주장 때문에 제일의제에서는 전단나무 등의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세속제 가운데 어리석음이 행온(行蘊)에 포섭되므로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 즐거움과 괴로움 등 두 가지는 에 다른 법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자성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대상[所量]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지각[覺]과 같이 그 증험에 상응하지 않는다.
【답】 총괄적으로 지각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었고, 또한 비유의 자체(自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저 장(藏)21)은 5대(大)22)등 진리[諦]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장부와 같다. 그대가 만일 자성이 원인이 된다고 설한다면, 자기의 논증을 스스로 논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말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총체적으로 이유를 설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주장을 세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해되지 못하여 총체적으로 하나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원인이 없이 모든 법은 일어날 수 없다. 속성[性]ㆍ시간[時]ㆍ나라연(那羅延) 등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자재천을 부정하는 가운데 말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자기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모두 원인 없이, 어떤 때에 어떤 실체에서도 어떤 사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없지만 요작23)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물었다. “어떤 사물을 어떻게 요작(了作)하는가?”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등불과 항아리 등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등불과 항아리 두 사물은 본래 스스로 발생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발생하지 않은 등불로 저 발생하지 않은 항아리 등을 요작(了作)하려 하는가? 마치 말[馬]에 뿔이 없는 것처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제일의제에는 법의 발생이 없기 때문이다. 세속제 중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저 등불은 벼에서 무슨 작용을 하는가, 작용이 되는가?”
외도가 말하였다. “수(受)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수는 본래 앞에 없다가 나중에 비로소 존재한다. 앞서 없다가 나중에 있는 수를 곧 작용[作]이라 한다. ‘어둠 속의 안식(眼識)은 이 순간 감수작용을 못하다가 등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장애를 없앤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이것은 작법(作法)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장애를 없애는 것이 어찌 작용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가 ‘감수 작용이 먼저 있음을 본다’고 고집하여 만일 감수[受]가 먼저 있다고 말한다면, 등불이 다시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한 무엇을 항아리라 이름하는가? 아법(我法) 중에 4대(大)와 4대가 지은 색이 화합하기 때문에 ‘항아리’라 이름하는 것처럼, 저 등불이 있을 때 빛도 함께 일어난다. 이 뜻으로 인하여 세속제에는 작용하는 바의 원인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물체는 각각 자기의 원인으로부터 상속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빛이 물체와 함께 일어나는 것처럼 이것이 요해(了解)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제일의제 중에는 생기법이 전혀 없으며, 또한 요해도 없다. 5대(大) 등의 진리들은 요해될 수 없는 사물로서 능히 그것은 요해되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요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의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한다’는 그 말은 옳지 못하다.
다시 불호(佛護)논사가 이 구절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또한 무인(無因)에서 저 물체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무인에서 일어난다면 마땅히 모든 곳에서 모든 사물이 항상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말뜻은 성립하게 하는 것[能成]과 성립되는 것[所成]이 분명히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주장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저 사물의 실체가 원인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때에 실체가 일어나고, 또한 어떤 곳에서 한 사물이 일어나야 비로소 생기의 시작이 있으므로 먼저 한 말과 서로 위배된다. 이처럼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이미 오류를 지적하였다. 만일 그것과 다른 불상응의 의미가 있다면 또한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여기서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란 일체의 모든 논에 이와 같은 설은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혹은 자기의 종(宗)이나 혹은 다른 종이나 한 사물도 혹은 물들었건 혹은 깨끗하건 무인(無因)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낱낱이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도 등과 같지 않은 특수한 연기에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 등의 주장이 성립한다.”
다시 아비담(阿毘曇) 사람이 말하였다. “4연(緣)이 있어 모든 법은 발생한다. 어찌하여 연기는 ‘일어나는 것이 아닌[不起]’이라고 하는가? 우리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07_a_10L復次阿毘曇人言:有四種緣,能生諸法。云何而言緣起不起?如我。偈曰:
인연(因緣)과 연연(緣緣)과 차제연(次第緣)과 증상연(增上緣)의 4연(緣)으로 모든 법이 일어나니 다시 다섯째 연은 없네.
016_0407_a_12L因緣及緣緣, 次第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釋】‘인연’24)이란 공유(共有)와 자분(自分)과 상응(相應)과 변(遍)과 보(報) 등의 다섯 원인을 말한다. ‘인연’이란 모든 법을 말하고, 차제연이란 아라한 최후에 일어나는 심법과 심소법[心數法]이며, ‘증상연’이란 이른바 소작인(所作因)이다. ‘다섯째 연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종(宗)에도, 다른 사람의 종(宗)에도, 천상인간(天上人間)에도, 수다라(修多羅)에도, 아비담(阿毘曇)에도, 그 밖의 논(論)들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다섯째 연이 있다고 설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대중부(大衆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생의 유무(有無) 등 모든 연(緣)은 다 네 가지 연 가운데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네 가지 연은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대가 ‘물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논자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실체 그 이외의 뭇 연[衆緣] 언설과 음성 등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이네.
016_0407_b_01L所有諸物體, 及以外衆緣, 言說音聲等,
是皆無自性。
【釋】‘모든 물체’란 저 눈 등을 말한다. ‘의 뭇 연’이란 가라라(歌羅羅) 등이고, ‘언설과 음성’이란 화합의 시기이며, ‘무자성(無自性)’이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모든 실체 등은 무자성이다. 또한 다른 처(處) 및 자재천(自在天) 등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저 다른 것은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자기의 실체가 되고, 뭇 인연이 ‘다른 것의 실체[他體]’가 된다고 하는가? 그 존재[有]는 앞의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의 주장에서 이미 논파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기서 나를 논파할 수 없다.
혹은 자기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허망하게 분별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여, “만일 모든 법의 실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설하며, 자기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다. 만일 다른 연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 다른 연이 있으므로 모든 법이 일어날 수 있다. 연은 반드시 존재하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해한다”고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이와 같이 “자기로부터 일어남”을 부정한다면 나의 주장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실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다른 것이 어떤 것을 일어날 수 있게 한다면, 이 말은 옳지 않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여 저 실체 밖에 달리 일어나는 것이 있음을 부정한다면, 내가 든 비유를 돕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빨강과 하얀 연(緣)에는 눈[眼] 등이 없다. 뭇 연(緣) 중에 안법(眼法)은 공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뭇 연은 자체가 없다.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두 가지 말이 있다. 제일의제에서 저 눈 등은 빨강과 하얀 뭇 연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 등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항아리와 같다. 제일의제 중에 빨강과 하얀 뭇 연은 그 공능으로 눈 등을 일으키지 않는다.왜냐하면 저 눈은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헝겊을 자르는 칼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제일의제 중에 원인과 뭇 연은 눈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세간의 혼돈스런 지혜와 원인 없음[無因]에 대한 쟁론에 머무는 자들을 모두 불쌍히 여기시어 세속제 중에 인연ㆍ차제연ㆍ소연연ㆍ증상연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연(緣) 때문에 나의 주장은 논파되지 않는다.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또 다르게 분별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모두 여기서 다시 사량(思量)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연 가운데 무엇이 눈 등의 모든 실체를 일으키는가? 또한 다른 이름으로 차별된 것은 대중부와 비세사(鞞世師)등에서 분별된 것처럼 그것도 상(相)에 따라 이러한 주장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결코 다섯째 연은 없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눈 등과 다른 것 모두가 그러하지가 않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아(自我) 등의 모든 실체[體]와 내입(內入) 등의 뭇 연은 낱낱이 모두 있지 않으니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네.
016_0407_c_14L自我等諸體, 內入等衆緣, 一一皆不有,
以無自性故。
【釋】모든 연 중에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저 눈 등의 실체는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이들 소리는 개개의 원인 중에도 없고, 화합한 중에도 없으며, 다른 것 중에도 없다. 혹은 세속제에도, 혹은 제일의제에도 비롯함이 없을 때부터 자성이 없어 사물의 실체가 먼저 일어나지 못한다. 또한 아직 일찍이 무자성인 사물은 있지 않다. 뭇 연들의 다른 실체가 미래에 다른 것들을 일으킨다면 무엇을 성립시키는가? 한결같이 다른 것은 없다. 다른 원인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그대가 자기의 마음속으로 망령되게 “모든 법은 실체가 있으므로미래에 장차 이 실체를 기다려 일어나다. 저 연은 다른 것이다”하고, 상대력(相待力) 때문에 연을 다른 것이라고 분별한다면 단지 그것은 말만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뭇 연에는 다른 성질[他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세속제 중에 가설하여 ‘다른 것이 있다’고 설해도 제일의제 중에는 저 ‘다른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나의 의도는 이른바 미세한 아체(我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작용하여 명료하게 된다. 명료하지 않은 과(果)에 의해 연(緣)은 다른 것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찌 논파할 수 있겠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다. 항아리 등의 ‘미세한 아[細我]’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대의 ‘명료(明了)’라는 말은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2)산스크리트 gati의 번역어. 중생이 자신이 지은 행위, 곧 업(業)에 따라 나아가는 6도(道)의 세계.
3)산스크리트 āyatana의 번역어. 12처(處) 혹은 12입(入)을 말한다.
4)구의(句義)는 산스크리트로 padārtha이다. 언어라는 뜻으로 기(起)ㆍ멸(滅) 등 하나하나의 개념을 해석하여 직접 중론 전체의 논지를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5)비일향인(非一向因)은 anaikāntika-hetu에 해당되며, 보통 부정인(不定因)이라 번역한 다. 인명논리학(因明論理學)의 개념으로서 옳지 않은 이유[不定因]를 가리킨다. 이하 비일향인을 부정인이라 칭하겠다.
6)율종오부(律宗五部)의 하나. 담무덕(曇無德)비구의 부종(部宗)으로 소승 20부 중의 하나. 부처님께서 돌아기시고 난 뒤 100년경에 담무덕이 계율장에 의거해서 세운 부파이므로 이 부의 이름을 담무덕이라 하며, 그 율의 명칭을 사분율(四分律)이라 한다.
7)tad eva의 번역어로서 이체(異體)의 반대인 동체(同體)를 말한다.
8)siddhānta의 음역이다. siddha는 성립한다는 뜻이고, ānta는 목적ㆍ근거 등의 뜻으로서 합하여 원리(原理)ㆍ종의(宗義) 등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인도하여 깨달음을 완성시키기 위해 제시한 가르침의 네 가지 범주이다. 즉 세계실단(世界悉檀)ㆍ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ㆍ대치실단(對治悉檀)ㆍ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9)베다(Veda)를 말한다. 성논사(聲論師)들은 베다의 소리는 상주한다고 본다.
10)산스크리트로 dravya이다. 욕구의(六句義) 가운데 실구의(實句義)로서 실체(實體)를 의미한다.
11)덕구의(德句義)로서 속성(屬性)을 의미한다.
12)제5 이구의(異句義)로서 특수(特殊)를 의미한다.
13)종(宗)의 명제를 성립시키는 근거인 이유[因]와 비유[喩]를 능성법(能成法)이라 하고, 성립된 주장 명제를 소성법(小成法)이라 한다.
14)이 게송은 『중송』에 원래 없는 것이다.
15)험(驗)은 양(量)의 다른 이름이며 산스크리트로 pramāna이다. 험무체(驗無體)란 이유[因] 또는 비유[喩]에 잘못이 있으므로 주장[宗]도 잘못되어 증험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6)가라라는 산스크리트로 Kalala이다. 모태에 착상된 아버지의 정액을 가리킨다. 태내 오위(胎內五位)의 하나로서 탁태후(托胎後) 7일간의 상태를 말한다.
17)산스크리트로 Puruṣa이며, 장부(丈夫)는 승거 학파에서 신아(神我)와 같은 절대적 우주아(宇宙我)를 의미한다.
18)제바달다(提婆達多)이며, 다음에 나오는 야야달다와 함께 설화 속의 인물이지만, 이 경우 우리나라에서 통칭 갑돌이ㆍ갑순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19)유아설(有我說)의 입장에서 우리는 절대 일아(一我)를 세웠는데, 그대가 제바달다의 아(我)와 같다고 말해 개인아(個人我)의 뜻으로 해석하여 비난한 것은 비유에 잘못이 있으므로 우리 주장을 논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계를 유지하는 근원.
21)자성(自性)의 다른 말인 듯하다.
22)각(覺)은 대(大)라고도 불리며, 또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의 5대(大)를 의미한다고도 해석되지만, 어느 것이라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모든 진리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할 따름이다.
23)『십이문론(十二門論)』의 유과무과문(有果無果門)과 『백론(百論)』에서 많이 나오는 요인(了因)과 같은 뜻이다. 앞에서 나온 생인에 상반되는 것이다. 생인은 능생(能生)의 근거이요, 요인(了因)은 요별(了別)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진흙 등은 항아리의 생인이고, 등불은 항아리의 요인이 되는 것과 같다.
24)4연(緣)과 여섯 가지 인(因)의 관계를 서술한다. 여섯 가지 인(因) 가운데 능작인(能作因)을 제거한 다섯 가지 인은 모두 인연 속에 포섭된다. 이 오인은 결과에 대하여 친연(親緣)을 갖게 되며, 능작인(能作因)을 그 성질상 다른 3연(緣)으로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