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모든 법은 공(空)하다. 왜냐하면 저 탐욕[染]과 탐욕에 물든 자[染者], 성냄과 성내는 자 등은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의 뜻을 이해시키고자 이 품을 짓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로서 5음(陰)ㆍ12처(處)ㆍ18계(界)가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5음ㆍ12처ㆍ18계가 탐욕과 과오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5음ㆍ12처ㆍ18계가 있지 않다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탐욕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비유하면 거북의 털과 같다. 무엇을 논증하는가?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욕에 물든 자는 법을 알지 못하고 탐욕에 문든 자는 법을 보지 못하네 만일 사람이 탐욕을 잘 받아들이면 눈이 아주 어둡다고 하네.
016_0434_a_11L染者不知法, 染者不見法, 若人安受此,
名爲極盲暗。
【釋】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처럼 어리석음 등으로 눈이 어두워진 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저 5음 등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5음 등이 취합 작용을 하여 탐욕의 원인을 증장시키고 과오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탐욕에 물든 자와 저 탐욕 등은 세제 중에 허깨비ㆍ불꽃ㆍ꿈ㆍ건달바성과 같으며, 제일의제는 아니다. 그대의 그러한 분별을 잘 관찰해 보면, 탐욕보다 먼저 탐욕에 물드는 자가 있는 것인가? 탐욕에 물든 자보다 먼저 탐욕이 있다는 것인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있는가? 세 가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탐욕에 물든 자가 성립하니, 탐욕에 물든 자가 탐욕보다 먼저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34_b_02L因染得染者, 染者染不然。
【釋】만일 이것이 탐욕이고 저것이 탐욕에 물든 자라고 구별한다면, 이는 탐욕을 떠나 탐욕에 물든 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탐욕에 물든 자가 탐욕을 일으킨다는 뜻은 결국 성립하지 못한다. 어떻게 논증하여 아는가? 탐욕의 자체 없이는 탐욕에 물든 자는 성립하지 못한다. 관(觀)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의 자체와 같다. 다시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게송에 ‘탐욕은 변행(邊行)의 인[遍因]이며, 탐욕을 가진 자보다 먼저 일어나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에 물든 자는 탐욕의 원인이 된다. 아비달마의 상의(相義)는 이와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마치 탐욕에 물든 사람 없이 나중에 탐욕이 일어나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탐욕에 물든 자가 앞서 이미 존재한다면 이 탐욕에 물든 자가 다시 탐욕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논증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이와 같다. 또한 마치 조달(調達)이 상속하는 중에 저 조달의 탐욕을 또 물들이는 것은 증인(證因)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탐욕에 물든 자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와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상속과 다르지 않은 탐욕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에 물든 자의 뜻은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이루는 잘못은 없다. 저 상속과 다른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도 또한 마땅히 똑같이 부정되어야 한다. 또한 비유할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루는 목적[所成]과 상사(相似)와 이문(異門)을 부정하는 것은 주장과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작용하는 원인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상속의 탐욕에 물든 자도 또한 탐욕의 원인이 되므로 비유할 실체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상응하지 않는다. 불공인(不共因)을 부정하기 때문이니, 이 오류는 진실이 아니다. 다시 만약 그대가 결정코 ‘탐욕에 물든 자보다 탐욕의 법이 먼저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탐욕에 물든 자도 똑같이 오류가 있네 탐욕에 물든 자보다 탐욕이 먼저 있다면 탐욕에 물든 자를 떠나 탐욕은 성립할 수 없네.
016_0434_c_04L若有若無染, 染者亦同過, 染者先有染,
離染者染成。
【釋】이것은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탐욕에 물든 자보다 먼저 탐욕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탐욕이고 이것은 탐욕에 물든 자이기 때문이다. 탐욕에 물들여진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탐욕이라 말한다. 의지되는 것보다 먼저 있지 않다. 비유하면 밥이 익는 것과 같다. 만일 그대가 탐욕에 물든 자를 관하지 않고 탐욕의 법[染法]이 있다고 하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숙성하는 물건을 관하지 않고 숙성은 생기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을 어떻게 증험하는가? 탐욕에 문든 자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탐욕의 법[染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봄[觀]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에 물든 자의 자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두 실체처럼 일향(一向)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것 역시 이와 같이 부정하기 때문에 나의 주장에는 오류가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전 찰나에 일어난 탐욕이 이미 없어져도 장차 일어날 탐욕의 찰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이 때문에 나에게도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이처럼 탐욕을 일으키는 찰나가 다른 시간에 끊임없이 이어져 탐욕에 물든 자의 찰나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탐욕에 물든 자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이숙(異熟)이 다른 것을 이숙한다는 사실은 옳지 못하다. 이처럼 과거에 일어난 탐욕의 찰나가 현재의 탐욕에 물든 자의 원인이 된다는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찌하여 옳지 않은가? 마치 조달의 탐욕은 조달이라는 탐욕에 물든 자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탐욕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상속과 다른 탐욕과 같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네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상관(相觀)할 수 없기 때문이네.
016_0435_a_07L染及染者二, 同時起不然, 如是染染者,
則不相觀故。
【釋】무슨 인연으로 이러한 분별을 일으키는가? 관(觀)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탐욕에 물든 자이고 저것은 탐욕의 법이며, 이것이 탐욕의 법이고 저것은 탐욕에 물든 자라고 분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이 또한 무슨 말인가? 관(觀)함이 있으므로 여기서 논험(論驗)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관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어린싹과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무슨 뜻인가? 생기(生起)를 관(觀)하기 때문에 관함이 있다고 하는가? 별개의 말로써 관하는 것을 관함이 있다고 이름하는가? 만약 생기를 관하기 때문에 관함이 있다고 이름한다면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은 항상 서로에 의해 또한 동시에 일어난다. 공유인(共有因)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지와 불빛처럼 동시에 일어난다. 부정인(不定因)이기 때문이다. 만약 별개의 말로써 관하는 것을 관함이 있다고 이름한다면 소의 두 뿔처럼 동시에 일어난다. 왼쪽 하나와 오른쪽 하나라는 별개의 다른 말이 있는 까닭이다. 현견(現見)은 이와 같이 또한 부정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 및 등과 불 등이 화합하여 자재로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고, 소의 두 뿔을 다른 언어로 관하는 것 등은 세제(世諦)에서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일의제 중에는모든 성립할 수 없으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오류이며,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다시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를 일체(一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거나 이체(異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분별하면, 이 두 분별은 다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만약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는 곧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게송의 뜻은 이와 같다. 여기서 논험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一體)이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에 물든 자의 자체와 같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일체이면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라면 이 뜻은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탐욕과 탐욕에 물든 사람이 이체(異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여 위와 같은 오류는 없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논험하여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그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것은 증험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함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의 자체(自體)와 같다. 다시 이제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거듭 논파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만약 그대의 의도가 이른바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다른 하나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논함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나게 하지 못한다. 관함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원인과 결과가 둘인 것과 같다.
다시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하면 지금 곳곳에 별체로서 이것저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마치 말 주변에 소가 있는 것을 동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소가 홀로 있고 동반이 없어도 또한 동시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답한 것과 같아 뜻에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만약 동시에 일어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들은 별체(別體)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탐욕과 탐욕이 없는 것과 같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5_c_04L釋曰:染及染者若同時起,是義不然,以其別故,譬如染及離染。復次偈曰:
만약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각각 자체로서 성립한다면 무슨 뜻으로 억지로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분별하는가?
016_0435_c_06L若染染者二, 各各自體成, 何義强分別,
此二同時起?
【釋】만약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의 아체(我體)가 각각 다르다면, 실체가 다른 까닭에 서로 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만약 작용하는 바가 있어 이것은 곧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 저것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라고 관하는 모습을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그대의 뜻인가? 이 말에도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게송에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관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법에 나아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 역시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별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는가? 동시에 생기(生起)함이 성립하기 때문에 다시 별체를 추구하는가?
016_0435_c_16L如是別不成, 求欲同時起; 成立同時起,
復欲別體耶?
【釋】이러한 뜻은 장로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c_18L釋曰:如是義者,長老應說。如偈曰:
어떤 별체가 있어 동시에 발생하려 하는가?
016_0435_c_19L有何等別體, 欲同時起耶?
【釋】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별체로서 존재하여 차례로 일어나는 까닭에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인가? 별체가 없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인가? 만약 차례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하면 이는 옳지 않다. 마치 탐욕을 떠난 것과 같다. 앞에서 이미 오류를 말하였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이 또한 옳지 않다. 관(觀)함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원인과 결과가 둘인 것과 같다. 역시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둘은 동일(同一)과 부동일(不同一)이 성립하지 않네. 모든 법 역시 탐욕처럼 동일과 부동일이 성립하지 않네.
016_0436_a_03L由染染者二, 同不同不成; 諸法亦如染,
同不同不成。
【釋】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의 동일과 부동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탐욕 등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도가 이 품의 첫머리에서 “5음(陰) 등은 존재한다. 탐욕과 과오의 원인이기 때문에”라고 말한 그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세제에서 이유를 말하고 또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며, 먼저 말한 것처럼 이유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 품에서 밝힌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자체가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 이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마치 『반야바라밀다경(般若婆羅蜜多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선남자여, 색은 탐욕의 실체가 아니고,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탐욕의 실체가 아니며,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은 탐욕의 실체가 아니므로 공(空)하고,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므로 공하다.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이다.
이와 같이 색은 성냄의 실체가 아니고 성냄의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실체가 아니며 어리석음의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극용맹보살이여, 색은 탐욕이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탐욕이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다. 다시 색은 탐욕의 법성(法性)도, 청정함의 법성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관염염자품」의 해석을 마친다.
외도들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은 유위(有爲)의 자체(自體)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생기(生起) 등의 모든 유위상(有爲相)과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저 유위상에는 서로 의지하는 뜻이 없을 것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음(陰) 등에서 생기 등의 모든 상(相)이 서로 도와 인(因)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저 법은 없지 않다. 이른바 유위인 5음 등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생기 등의 유위상을 말할 경우 저 생기 등의 상(相)은 유위(有爲)인가, 무위(無爲)인가?” 외도가 말하였다. “그것은 유위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지금부터 차례로 그 주장을 분별하겠다. 먼저 생기(生起)를 증험하자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제일의제 중에 생기 등의 모든 상은 유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법의 실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생기[生]ㆍ머묾[住]ㆍ소멸[滅]의 체(體)에는 각각 작용이 있다. 이런 까닭에 생기 등의 모든 상은 유위상이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증험할 실체가 없다. 단지 주장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은 각각 공능(功能)이 있다. 그대가 없다고 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 등 작용의 상(相)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생기 또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처럼, 머묾 역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왜냐하면 머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물을 먹어야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유위상은 머무는 작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머무는 작용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여인이 땅에 병을 놓는 것과 같다. 소멸 또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파괴되기 때문이니, 마치 막대기로 물건을 부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저들이 생기 등의 유위상을 세운 것은 그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유가 성립하지 못하고 주장과도 서로 위배되는 오류가 있으므로 생기는 유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생기 등이 유위상이라고 말한 것은 주장이 옳지 못하다. 다시 만약 그대가 앞서 말한 오류를 피하려고 생기 등은 무위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도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만약 생기가 무위이면서 유위의 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면 이와 같은 뜻은 없다. 무위의 자체는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주장의 뜻은 이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생기가 무위면서 유위법상(有爲法上)의 작용을 한다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 꽃과 같다. 머묾과 소멸 또한 그러하다. 다시 자세히 부정하지 않겠다. 또한 만약 그대가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은 유위상이며 작용하는 바가 있다고 분별한다면 이는 차례로 작용한다는 말인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말인가? 이 두 경우 모든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차례로 작용할 경우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무엇에 대해 무력한 것인가? 유위에 대한 것이다. 다시 생기 등을 차례에 따라 얻으려 함은 법체(法體)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처럼 머묾과 소멸 두 가지도 상(相)에 대해 작용하는 힘이 없다. 법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사멸한 법은 소멸하였으므로 실체가 없다. 생기와 머묾 두 가지도 곧 소멸에 있어서는 힘이 없다.또한 이미 생기한 법은 생기하였으므로 무력하다. 또 법체가 머물거나 혹은 소멸할 경우도 무력하다. 머물 때도 무상(無常)이 따른다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마치 『백론(百論)』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경량부(經量部)논사가 말하였다. “모든 법은 각각 달리 정해진 인(因)과 연(緣)이 스스로 자체에 존재하고 상속하여 한순간에 장차 생기하여 자체를 얻을 때 이것을 이름하여 생기라고 한다. 첫 찰나가 상속하는 상태를 이름하여 머묾이라 한다. 전 찰나와 서로 닮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늙음[老]이라 한다. 이미 생기한 것이 괴멸하는 것을 소멸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반드시 한 찰나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관(觀)1)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방편을 써서 나에게 오류를 적용시키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허물이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상속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묾을 분멸한다면 이는 세제의 세 가지 상(相)이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그대가 머무는 순간은 머묾과 소멸로부터 떨어져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한 오류를 모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먼저 자체가 아직 생기하지 않고 나중에 자체를 얻는 경우를 생기(生起)라 이름한다. 생기하는 것이 수립된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머무는 것이 썩으므로 이를 늙음이라 이름한다. 늙는 것이 사멸하므로 이를 괴멸이라 이름한다. 생기 등은 차례로 유위의 실체를 떠나지 못하므로 이 뜻으로 인해 그 상(相)은 실체로서 성립한다. 앞에서 ‘생기 등세 가지가 차례로 상에 작용하는 힘이 없네’라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엇을 이름하여 상(相)이라 하는가? 이른바 보이는 상[所相]에 대하여 아직 상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면 고형성의 모습이 지(地)와 분리되지 않은 것과 같다. 또한 대인(大人)의 여러 상이 대인과 분리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생기 등이 제일의제 중에 바로 유위의 모든 법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차례가 있기 때문이다.
차례란 무엇인가? 진흙 덩어리를 바퀴 위에 놓고 손을 움직여 쓰다듬으면 동그랗게 되는 것처럼 이 모든 상태의 개별성은 저 병가(甁家)처럼 유위의 체상이 아니다. 생기 등의 모든 상(相) 역시 저 유위법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가설로서 시설된 것일 뿐이다. 진실로 생기는 여기서 부정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부정하는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는 머묾과 소멸은 무체(無體)이기 때문이다 장차 생기할 때 머묾과 소멸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분별하는 것은 오직 세제의 언설로서 있는 것이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오류를 면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생기 등의 모든 유위상은 차례로도 동시에도 저 실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이 주장은 무슨 뜻인가? 그대의 의도가 유위의 모든 법은 유위상이 아니라는 것처럼 유위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생기 등도 또한 유위상이 아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제일의제에서는 생기 등의 모든 상을 분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유위거나 혹은 무위라 해도 말한 바의 오류와 같은 것이 이제 도리어 그대를 뒤따른다.
다시 독자부(犢子部) 사람이 말하였다. “생기는 곧 유위이며 무한 소급이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자체와 화합하여 15법이 존재하며 총체적으로 함께 생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이 법의 실체이고, 둘째는 이른바 저 생기이며, 셋째는 머묾의 차별성이고, 넷째는 소멸의 상이며, 다섯째는 만약 백법(白法)이면 정해탈의 생기가 존재하고, 여섯째는 만약 흑법(黑法)이면 사해탈(邪解脫)의 생기가 존재하며, 일곱째는 만약 이것이 출리법(出離法)이면 출리의 실체가 생기하고, 여덟째는 비출리법(非出離法)이면 비출리의 실체가 생기한다.
여기서 앞의 일곱 개는 법체의 권속(眷屬)이며, 일곱 개의 권속마다 각각 한 개의 따르는 권속이 있다. 이른바 생기(生起)의 생기 내지 비출리(非出離)의 비출리인 실체가 바로 권속의 권속법이다. 이와 같이 법체와 화합하여 총 15법의 생기가 존재한다. 저 근본 생기가 그 자체 외의 14법을 생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생기의 생기는 능히 저 근본 생기를 일으킨다. 머묾 등 또한 그러하다. 이 뜻으로 인하여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 마치 우리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생기의 생기가 일어날 때 오로지 근본 생기만이 일어나네. 근본 생기가 일어날 때 다시 생기의 생기가 일어나네.
016_0437_c_21L彼起起起時, 獨起根本根, 根本起起時,
還起於起起。
아사리 용수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많은 말을 해도 주장에 있어서는 옳지 않다.어째서 옳지 않은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7_c_23L阿闍梨言:汝雖種種多語而於義不然。云何不然?如偈曰:
생기가 생기할 때 근본 생기를 능히 일으킨다면 그대는 근본 생기로부터 발생하였는데 어떻게 근본 생기가 일어난다고 하는가?
016_0438_a_02L若謂起起時, 能起根本起, 汝從本起生,
何能起本起?
【釋】이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과 같은 것은 모두 생기하지 않았을 때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근본 생기란 생기의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음이다. 이와 같이 생기의 생기는 근본 생기를 일으킬 수 있다, 의미는 바로 이와 같다.”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생기하는 순간에 원하는 생기가 작용한다고 그대가 말한다면 만약 이 생기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생기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능히 일으키겠는가?
016_0438_a_12L汝謂此起時, 隨所欲作起, 若此起未生,
未生何能起?
【釋】첫 번째 구절은 이른바 근본 생기를 말한다. 두 번째 구절은 이른바 생기의 생기를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은 일어나려 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네 번째 구절은 근본 생기가 생기의 공능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왜냐하면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생기가 순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순간과 같으며, 또한 장차 일어나는 법체(法體)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공유인(共有因)처럼 법은 지금 생기한 것과 이미 생기한 것에 대하여 함께 일어난다. 모든 법은 생기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일향(一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가 생기하는 순간이기 때문에’라는 이유와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말한 것은 그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함께 발생하는 것[共生]도 부정하였다. 저 원인을 그대는 부정인[非一向因]이라 하며 나에게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대에게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다른 도리가 있어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도리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등이 스스로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추듯이 생기의 법 역시 또한 그러하여 자신을 생기시키고 다른 것들도 생기시키네.
016_0438_b_03L如燈照自體, 亦能照於他, 起法亦復然,
自起亦起彼。
【釋】이 주장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b_05L釋曰:以是義故,無無窮過。論者偈曰: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고 등불이 머무는 곳에도 어둠은 없네. 저 등불이 무엇을 비추어 스스로를 비추고 남을 비춘다고 하는가?
016_0438_b_06L燈中自無暗, 住處亦無暗, 彼燈何所照,
而言照自他?
【釋】이처럼 등불은 털끝만치도 비춤의 작용이 없다. 이유 명제의 말뜻은 그러하다. 다시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에서 등불은 스스로를 비출 수 없고 또한 다른 것은 비출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둠이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작열하는 햇빛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서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4대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저 지(地) 등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비유할 실체가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등불이 처음 생기할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등불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과 같다네. 말하자면 자체가 빛을 만들어 능히 밖의 어둠을 제거할 수 있다.’ 주장의 뜻도 그러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둠은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는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또한 비유할 실체도 없다. ‘등불이 비춘다’고 하는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어떻게 등불이 비출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가?”란 물리칠 수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말뜻은 다음과 같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b_19L釋曰:云何破者?謂不能破故。語義如是。偈曰:
이 등불이 처음 비추는 순간 저 어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네.
016_0438_b_21L此燈初起時, 不到彼暗故。
【釋】막 발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둠 속의 등불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지혜와 지혜 아닌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38_b_22L釋曰:以起時故,譬如暗燈。外人言:智非智等,非一向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러한 주장에 집착한다면앞서 성립시킨 부분 중에 포함되므로 이와 같이 또한 부정한다. 그러므로 부정인이 아니다. 또한 막 빛이 비추려는 순간은 아직 빛이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은 지은 업이 없는 것처럼 등불도 그와 같이 빛을 만들 수 없다. 다시 앞의 게송에서 ‘어떻게 등불이 비출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가? 등불이 처음 비추는 순간 저 어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처럼 여기서 증험하였다. 제일의제에서는 저 등불이 비추는 순간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왜냐하면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빛 없는 세계에 암흑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의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치되는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저 어둠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현견의 등불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해도 빛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그러한 주장을 세우는 것은 나의 논파력만을 증대하며 나의 비유를 점점 더 분명하게 하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것이 만약 그와 같다면 지금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보이는 것[所見]과 같다는 것인가? 또는 다르다는 것인가? 나도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둠을 제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만약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둠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저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 등불은 여기에 머물면서 모든 어둠을 없애야 하네.
016_0438_c_16L若燈不到暗, 而破彼暗者, 燈住於此中,
應破一切暗。
【釋】등불이 멀리 있는 어둠을 물리침을 그대도 이미 인정하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어둠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또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8_c_18L釋曰:燈破遠暗,汝旣不許。近亦如是,云何能破?復次如偈曰:
만약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역시 마땅히 그와 같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해야 하네.
016_0438_c_20L若燈能自照, 亦能照他者, 暗亦應如是,
自障亦障他。
【釋】어둠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동시에 다른 것을 어둡게 할 수 없다면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춤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겠는가? 다시 여기서 증험을 하겠다.제일의제 중 등불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는 것에 대치되는 것을 허물 수 없다. 왜냐하면 대치되는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저 어둠과 같다. 이와 같이 등불은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니, 비유할 실체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외도가 저 등불의 비유를 들어 생기의 뜻을 성립시키고 스스로와 다른 것도 생기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스스로 생기하고 또한 다른 것을 일으킨다면 무엇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미 생기한 것이 일어나는 것인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는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경우와 같다. 이와 같은 뜻은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9_a_09L釋曰:未起無生,以未生故,如前未生時。如是意者,先已分別。復次偈曰:
이 생기가 이미 일어났다면 이미 일어났는데 다시 어느 것에서 일어나겠는가?
016_0439_a_11L此起若已起, 起復何所起。
【釋】이미 생기하였기 때문이다. 저 생기를 일으키는 것은 곧 공용(公用)이 없다. 그와 같이 관찰할 때 생기는 스스로를 일으키고 다른 것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그대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 생기 등이 무위를 이룬다면 무위인 까닭에 저 모든 생기 등은 유위상(有爲相)이 아니다. 그대가 ‘상(相)이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묻겠다.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할 경우 무엇이 생기한다는 것인가? 현재 생기할 때의 생기를 말하는가? 이미 생기한 것이 일어남을 말하는가?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생기하는 것과 생기한 것,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는 생기하지 않네. 지금 가는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작요, 거기서 이미 해석하였네.
016_0439_a_19L起時及已起, 未起皆無起, 去未去去時,
於彼已解釋。
【釋】그와 같이 이미 증험하였으며, 여기서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말하겠다. 제일의제 가운데 현재의 생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간의 향전(向前)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소멸하려는 순간처럼다시 만약 저 법이 일부 생기하고 일부는 생기하지 않은 경우를 지금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일부가 생기하였다면 그것은 다시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생기는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미래와 같다. 외도의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뜻도 잘 관찰해야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 생기하지 때문에 생기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네. 어떻게 지금 생기하는 것을 연기(緣起)라고 말하는가?
016_0439_b_07L由起時名起, 此義則不然, 云何彼起時,
而說爲緣起?
【釋】저 지금 생기하는 것은 있는가, 없는가? 또는 있으면서 없는가? 이러한 과실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검술을 잘 배워도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한 행동을 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는 일을 따르는 것과 같다. 그대 역시 이와 같다. 왜냐하면 대선(大仙)이 저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을 위하여 깊은 연기를 설하지만 그대는 오랫동안 망상에 훈습되어 법답지 못한 행을 행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바른 도리를 해친다.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나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인과를 없애고 올바른 백법(白法)을 파괴하여 즐거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저 나쁜 견해의 사람을 교화하여 불선(不善)의 때에 찌든 주장을 씻기 위해 불바가바(佛婆伽婆)께서 말씀하시를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고 하셨다. 이른바 무명(無明)을 행(行)이라고 말한 것 모두는 세제이기 때문에 성립하며 제일의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뜻은 바로 내가 하려는 바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바른 도리를 해친다’고 한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법은 무성(無性)으로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재해야 저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와 같은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39_b_23L由諸法無性, 自體非有故, 此有彼得者,
如是則不然。
【釋】또한 부처님께서 게송에서 ‘만약 연(緣)함으로써 발생한다면 발생이 아니니, 그 연기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네. 만약 인연을 따른다면 이는 곧 공하며, 공을 이해하는 자를 불방일(不放逸)이라 이름하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여러 경전을 여기서 마땅히 자세히 말하겠다. 이와 같이 관한다면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환(幻)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 생기하는 것은 적멸하여 생기의 상(相)이 없다. 저 외도가 ‘지금 생기하는 것으로써 연기를 삼는다’고 말한 것은 제일의제에서는 증험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세간에서는 여러 인연이 각각의 결과로 일어남을 현견(現見)한다. 이른바 병과 옷 등이다. 현견보다 뛰어난 다른 증험은 없다. 앞의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생기하는 순간과 이미 생기한 것과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에 생기는 없다고 한 주장은 옳지 않다. 계(戒) 등이 생기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계(戒) 등의 모임은 공덕을 따르는 것인데 누가 능히 어기겠는가? 이것은 세제에서만 성립하며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며 진실 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오류가 없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병과 옷에 생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은 세제이며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혹은 병이나 혹은 옷은 지금 생기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직 생기하지 않았을 때는 아니다.
만약 이미 생기한 것에 생기가 있다고 하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병과 옷 따위의 생기는 아직 생기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라 하며, 이와 같이 집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병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망각을 안치하여 저 병이라는 이름을 연(緣)하여 병의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뜻은 다만 세제에서 망각을 안치할 뿐이다. 병은 아직 생기하지 않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釋】‘어떤 사물’이란 병과 옷 등이다. 모든 연에서 혹은 화합 중에서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실체가 먼저 존재한다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a_03L釋曰:一物者,或甁衣等。若於諸緣、若和合中、及於餘處,體先有者,偈曰:
이미 존재하는데 생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016_0440_a_05L已有何須起?
【釋】저들이 이미 존재한다면 생기는 쓸모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a_06L釋曰:彼若已有,起則無用故。爲是因緣,偈曰:
실체가 존재하면 생기가 없기 때문이네.
016_0440_a_08L體有起無故。
【釋】이 뜻으로 인하여 생기보다 앞서 실체가 존재한다면 생기를 증험할 필요가 없다. 실체가 이미 존재하는데 생기한다는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다시 시간의 차별성에 집착하는 자가 “모든 법은 실체로서 존재한다. 어떻게 증험해서 아는가? 현세(現世)로부터 왔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현재로부터 왔다면 곧 현재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실체의 차별성과 상(相)의 차별성 및 상태의 차별성은 앞의 과실과 같다. 모두 이것으로써 대답이 된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모든 법의 실체가 있음을 요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실이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요해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을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다시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세속에 섭수되는 까닭이다. 마치 현재의 사물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현재의 사물이란 제일의제에서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대의 비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하려는 주장도 무너진다. 또한 비록 자체가 없더라도 세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 시점의 색 등의 모든 법은 환(幻) 등과 같은 것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세제 가운데 색(色) 등의 모든 법은 단지 가설[假]로서 시설되는 것임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에 이르길 ‘지금 생기하는 것과 이미 생기한 것과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에 생기는 없네’라고 말한 것들은비록 앞에서 이미 답하였지만 지금 다시 말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그 뜻은 만약 생기가 생기하는 순간에 능히 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b_03L釋曰:彼意若謂起於起時能有所起,此執不然,有過失故。如偈曰:
저 생기가 작용을 하고 있는데 어찌 다시 생기가 존재하겠는가?
016_0440_b_05L彼起能起作, 何等復起是?
【釋】저 생기는 옳지 못하다. 생기의 작용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부자(父子)의 생기가 무(無) 자체인 것과 같다. 게송의 주장은 이와 같다. 또 만약 다음과 같이 “다시 다른 생기가 존재하여 능히 저 생기를 일으킨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오류이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실체가 존재한다면 생기는 무의미하며 실체가 없다면 생기는 의지할 곳이 없네. 실체가 있으면서 없어도 또한 그러하니, 이 뜻은 앞에서 이미 설하였네.
016_0440_b_17L有體起無用, 無體起無依, 有無體亦然,
此義先已說。
【釋】어느 곳에서 이미 말하였는가? 저 「관연품(觀緣品)」의 게송에서 “존재도 아니고 또한 비존재도 아니다. 모든 연의 뜻도 마땅히 그러하네”라고 설한 것처럼, 또한 게송에서 “존재가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며 존재면서 동시에 비존재인 것[法]의 생기는 없네”라고 설한 것처럼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으니, 다시 해석하지 않겠다. 또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소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죽을 때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아직 소멸하지 않았을 때 생기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c_01L釋曰:以滅時故,譬如死時。外人言:未滅時起,是故無過。論者偈曰:
법이 소멸하지 않은 경우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네.
016_0440_c_03L法若無滅時, 彼體不可得。
【釋】그 체상(體相)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이 게송의 뜻도 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머묾[住]의 부정인이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역시 무상(無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못하는 경우도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 앞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생기는 존재한다. 저 생기하는 것[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없다면 저 생기하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마치 거북의 털로 옷을 만드는 것처럼 두 가지 모두 무체(無體)이다. 생기가 성립하기 때문에 머묾의 법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한 이유대로 생기는 무체가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는 실체가 없으므로 생기하는 것도 성립하지 못한다. 비록 세제 중에 이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제일의제는 머무는 상[住相]이 없다. 이제 이 실체에 대하여 묻겠다. 아직 머물지 않은 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이미 머문 실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현재 머무는 실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제일의제에는 세 가지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직 머물지 않은 실체는 머물지 못하며 머무는 실체도 머물지 못하네. 지금 머물러도 머물지 못하며, 생기하지 않는데 무엇이 장차 머물겠는가?
016_0440_c_16L未住體不住, 住體亦不住, 住時亦不住,
無起誰當住。
【釋】첫째 구절은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멸과 같다. 둘째 구절은 현재의 세(世)와 과거의 세의 2세(世)를 하나의 시간으로 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머문다는 주장은 공하다. 셋째 구절은 과거의 머묾과 미래의 머묾을 떠나 다시 현재의 머묾은 없다는 것이다. 있다고 하면 옳지 못하다. 앞에서 자세히 논파한 것과 같다. 넷째 구절은 어떤 사물의 생기도 어떤 사물의 머묾도 없다는 것이다. 게송의 뜻은 그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에서 실체로서 생기의 상을 얻을 수 없다.앞에서 계속 도리를 자세히 인증하여 사람들에게 이해시켰다. 생기가 이미 성립 하지 못하는데 무엇이 머문다는 것인가?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가 “생기하는 것과 생기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무상(無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다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멸하는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 꽃과 같이 게송의 뜻도 그와 같다. 다시 만약 그대의 의도가 “이미 생기한 찰나에 머무는 상[住相]의 힘이 있다. 이 순간에 법체(法體)가 소멸하지 않으며, 또한 이것은 항상됨이 아니다. 머묾이 끊어짐 없이 이어져 곧 늙음이 있고 무상이 뒤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만약 색 등의 머무는 상이 작용할 때 무상이 없다면 나중에도 무상이 뒤따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있는 곳에 물이 없으며, 불은 나중에도 또한 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머묾의 뜻도 그렇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의 법체의 멸진(滅盡)을 현견(現見)한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를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그대가 소멸을 보았다면 이 소멸은 실체를 항상 서로 수반하는 것인가? 각각 개별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더불어 서로 수반한다면 머묾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별개로 존재한다면 실체에는 소멸하는 순간이 없다. 이미 소멸하는 순간이 없다면 실체도 얻을 수 없다. 이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총명하나 게으른 사람이 다음과 같이‘비유하면 사라보다 먼저 불체(佛體)가 없다가 나중에 부처가 되는 것처럼 머묾 역시 그와 같다. 먼저 소멸이 없다가 나중에 소멸한다는 주장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불체가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일체지(一切智)의 상(相)과 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범부가 지혜로 나중에 성불한다는 그와 같은 주장은 없다. 세제 중이 이 방편어는 성립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최후의 찰나에 지혜의 상(相)이 일어날 때를 부처가 된다고 한다. 저 지혜와 불체에는 차별이 없다. 그대가 말한 대로 실체로서의 도리는 없다. 이와 같이 늙음과 머묾이 같거나 다르다는 것도 또한 이 오류와 같아 성립하지 않는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저 일체의 모든 법에는 항시 늙음과 죽음이 존재하네. 어떻게 머무는 것[法]이면서 늙음과 죽음의 상(相)이 없는가?
016_0441_b_11L彼一切諸法, 恒時有老死, 何等是住法,
而無老死相?
【釋】만약 생기가 있다면 이 실체가 있는 곳에 따라 머묾을 가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생기함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지금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가 세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그대들이 저 머묾을 머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할 때, 머묾은 스스로 머무는가? 다른 머묾을 가립하여 머무는 것인가? 두 경우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스스로 머무는 것과 다른 머묾으로 머문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마치 생기가 스스로 생기하지 않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하지 않는 것과 같네.
016_0441_b_17L住異住未住, 此義則不然; 如起不自起,
亦不從他起。
【釋】무엇이 생기가 자기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인가? 앞의 게송에서 “이 생기가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생기할 수 있는가? 만약 이미 생기하였다면 발생하였는데 발생이 다시 어디서 일어나겠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가? 앞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생기하고 다시 생기가 존재한다면 이 생기는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네”라고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머묾 역시 이와 같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머묾이 만약 아직 머무는 것이 없다면 자체는 어디에 머무는가? 머묾이 이미 머무는 것이 있다면 머묾이 이미 있는데 머묾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016_0441_c_01L此住若未住, 自體云何住? 此住若已住,
住已何須住?
머묾에 만약 다른 머묾이 머문다면 그 머묾은 곧 무한소급이 되네. 머묾이 만약 머무는 것 없이 머문다면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머물게 되네.
016_0441_c_03L住若異住住, 此住則無窮,
住若無住住, 法皆如是住。
【釋】두 게송은 바로 뜻을 해석하는 게송이며 논의 본 게송이 아니다. 앞에서 스스로 머무는 것의 머묾을 부정한 것은 자체로부터 생기함을 부정한 것과 같고, 뒤의 다른 것으로부터 머무는 것의 머묾을 부정한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함을 부정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머묾에는 자체가 없다. 그대가 앞에서 “이와 같이 생기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법에는 체가 존재한다는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 생기와 머묾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함께 작용하는 법체(法體)는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말의 뿔처럼 생기와 머묾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 소멸도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유를 말하는 힘에 의해서 제일의제 중에 생기와 머묾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소멸 또한 이와 같다. 이른바 실체로서 이미 말하였을 때, 아직 멸하지 않았을 때, 현재 멸할 때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1_c_14L論者言:滅亦如是,謂此體已滅、未滅、滅時欲令有滅者,一切不然。如偈曰:
아직 멸하지 않은 법은 소멸하지 않고 이미 멸한 법은 소멸하지 않으며 현재 멸할 때도 또한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무엇이 소멸하겠는가?
016_0441_c_15L未滅法不滅, 已滅法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等滅?
【釋】첫째 구절은 소멸이 공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머묾과 같다. 둘째 구절은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거듭 죽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 구절은 이미 멸한 것과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떠나 법은 다시 소멸함이 없다. 모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반드시 현재 멸하는 순간에 멸하지 않음을 안다. 또한 제일의제 중에 멸하고 있는 것을 멸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전류(轉流)이기 때문이다. 마치 막 생기할 법이 현재로 오는 것과 같다. 넷째 구절은 무슨 뜻인가? 일체 법이 다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기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생기의 상이 없기 때문이다.발생한 것이 없는데 소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마치 석녀의 아이와 같다. 이와 같이 그것이 생기하거나 생기하지 못해도 모든 때의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법이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경우, 거기서 소멸을 분별해도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것은 이 상태로 있을 때 바로 이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 그것은 다른 상태로 있을 때도 다른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
016_0442_a_12L彼於此位時, 不卽此位滅, 彼於異位時,
亦非異位滅。
“그것은 이 상태로 있을 때 바로 이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란 자체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우유가 우유의 상태에 머물 듯이 다른 상태로 소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유를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의 우유는 낙(酪)의 상태로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병 등과 같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소멸이 존재한다. 실체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우유의 숙성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일체 법의 생기(生起)의 상(相)을 얻을 수 없다면 생기의 상이 없으므로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도 옳지 못하네.
016_0442_a_20L若一切諸法, 起相不可得; 以無起相故,
有滅亦不然。
【釋】“모든 법은 생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앞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숙성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미 숙성하였다는 집착은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그대가 소멸을 말한다면실체가 있어 소멸하는가? 실체가 없이 소멸하는가?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과 불과 같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2_b_04L釋曰:以相違故,譬如水火。由如是故,偈曰: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다는 것은 의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네.
016_0442_b_06L一法有有無, 於義不應爾。
【釋】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復次偈曰:
법이 만약 실체가 없다면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도 옳지 못하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의 머리 그것을 자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네.
016_0442_b_07L
法若無體者, 有滅亦不然, 如無第二頭,
不可言其斷。
【釋】게송의 비유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데 다시 멸함이 있음을 증험한다면 옳지 못하다. 법체(法體)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대들이 만약 “제일의제 중에 저 소멸의 상 및 수반되는 소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에 의해 멸하는 것인가? 다른 것에 의해 멸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법은 자체에 의해서 소멸하지 못하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소멸하지 못하네. 마치 자체에 의해서 생기하지 못하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생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네.
016_0442_b_14L法不自體滅, 他體亦不滅, 如自體不起,
他體亦不起。
【釋】자체로서 생기한다면 이것은 상응하지 못한다. 마치 앞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생기가 만약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는가? 생기가 만약 이미 방생하였다면 발생이 다시 어디서 일어나는가? 다른 실체에 의해 발생하였다면 게송에서 “생기에 만약 다른 생기가 있다면 생기는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생기는 이미 그와 같으며, 소멸 또한 그러한 부류이다. 소멸의 부류에 대하여 게송에 “이 소멸이 만약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소멸하는가? 소멸이 만약 이미 무너졌다면 소멸이 어느 곳에서 무너지겠는가? 소멸에 다른 소멸이 있다면 소멸은 곧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다. 소멸에 만약 소멸이 없다면 소멸법은 다 이와 같이 무너진다”고 설한 것과 같다.
게송을 해석한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마치 자신으로부터 생기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자세히 부정한 것과 같다. 스스로에 의해 소멸하고 다른 것에 의해 소멸하는 것은 생기처럼 논파된다.
016_0442_c_01L此釋義偈應知。如自他起,前已廣遮,自他滅者,類同起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괴멸의 원인이 있을 때 괴멸법(壞滅法)이 바야흐로 무너진다”고 한다면 응당 이와 같이 답해야 한다. 그대가 괴멸의 원인을 주장한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법은 이 법의 괴멸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품의 머리부분 이후로 자세히 그것을 부정하였다. 이와 같이 생기와 머묾은 제일의제에서 생기의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할 실체도 없다. 만약 세제 중에 원인과 비유를 말한다면 그대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증험을 세운 것과 같다. 이미 자세히 도리를 분별하여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외도가 말한 것과 같이 “저 5음(陰) 등 모든 유위법은 존재한다. 유위의 상(相)이 화합하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이미 논파하였다.
016_0442_c_10L釋曰:如外人所說,有彼陰等諸有爲法,以有爲相和合故者,彼爲已破。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일의제 주에서 저 소 등의 유위법이 존재한다. 들소의 뿔과 턱살(목) 등의 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도 마땅히 부정해야 한다. 그대가 이들 유위상을 세운다면 또한 상이 있다는 것인가, 상이 없다는 것인가? 만약 상이 있다면 이 뿔 등은 곧 소의 실체가 아니고 유위상(有爲相)도 아니다. 왜냐하면 상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의 실체와 같다. 앞에서 자세히 논파하였다. 만약 다시 상이 없다면 상이 없기 때문에 이들 모든 상은 자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상을 보는 주체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 또한 없다. 또한 상이 존재한다면 상은 무한소급의 오류이다. 이것들 모두는 앞에서 자세히 부정한 것과 같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주의 유위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대립이 없을 것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처럼 저 유위와 무위 두 법은 상대하기 때문에제일의제 중에 유위법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유위법이 성립한다면 유위가 제거되므로 능히 무위(無爲)를 말할 수 있다. 저 유위법을 이치대로 잘 관찰하면 실체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치 꿈과 같고 또한 환(幻)과 같고 건달바성과 같네. 생기와 머묾과 괴멸이 있다고 말해도 그 상(相)은 또한 이와 같네.
016_0443_a_09L如夢亦如幻, 如乾闥婆城, 說有起住壞,
其相亦如是。
【釋】모든 선인(仙人)들은 유위의 생기 등을 알아 능히 깨달음의 원인을 발생시켜 진실한 지견(知見)을 연다. 저 지혜로운 사람이 생기 등을 말한 것은 곧 내가 말하려는 것과 같다. 무지한 자는 지혜의 눈이 덮이어 실체가 없는 경계에 대해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고 꿈속의 말처럼 저 모든 법의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을 말한다. 이것은 염오훈습(染汚薰習)으로 인하여 각각 다른 원인을 집착하여 세 가지로 분별하여 실체의 뜻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을 보이기 위하여 꿈과 환(幻) 등의 세 가지 비유를 말함을 응당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생기 등은 곧 존재한다. 왜냐하면 현전(現前)의 지각으로써 취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色)과 같다. 또한 작용하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상속하여 함께 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하나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부정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개시하기 위하여 이해하는 정도에 맞게 꿈 등의 비유를 말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불바가바(佛婆伽婆)께서 진실을 보시고 성문승을 위하여 미혹의 장애를 대치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색(色)은 거품과 같고, 수(受)는 물거품과 같고, 상(想)은 햇빛과 같고,행(行)은 파초와 같고, 식(識)은 환사(幻事)와 같다.” 이 뜻은 아(我)와 아소(我所)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며,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승(大乘)을 위하여 번뇌장[惑障]과 소지장[智障]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위법(有爲法)은 본래 무 자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에서 “모든 유위법은 마치 별과 눈앞의 아지랑이와 등불ㆍ환상ㆍ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위(有爲)에 실체가 없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품의 주장은 이런 까닭으로 성립할 수 있다.
마치 『반야바라밀다경』 중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色)은 유위가 아니며 무위도 아니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와 같다. 만약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라면 이것은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