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434_a_01L
반야등론석 제5권
016_0434_a_01L般若燈論釋卷第五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016_0434_a_02L偈本龍樹菩薩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6.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
016_0434_a_04L觀染染者品第六

또한 모든 법은 공(空)하다. 왜냐하면 저 탐욕[染]과 탐욕에 물든 자[染者], 성냄과 성내는 자 등은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의 뜻을 이해시키고자 이 품을 짓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로서 5음(陰)ㆍ12처(處)ㆍ18계(界)가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5음ㆍ12처ㆍ18계가 탐욕과 과오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5음ㆍ12처ㆍ18계가 있지 않다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탐욕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비유하면 거북의 털과 같다. 무엇을 논증하는가?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4_a_05L復次一切法空何以故彼染染者瞋者等本無自性欲使了知無自性有此品起有人言第一義中有陰入界何以故婆伽婆說彼爲染污過惡因故若此非有佛則不說彼爲染譬如龜毛云何驗知經中偈曰

탐욕에 물든 자는 법을 알지 못하고
탐욕에 문든 자는 법을 보지 못하네
만일 사람이 탐욕을 잘 받아들이면
눈이 아주 어둡다고 하네.
016_0434_a_11L染者不知法,
染者不見法,
若人安受此,
名爲極盲暗

【釋】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처럼 어리석음 등으로 눈이 어두워진 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저 5음 등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5음 등이 취합 작용을 하여 탐욕의 원인을 증장시키고 과오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탐욕에 물든 자와 저 탐욕 등은 세제 중에 허깨비ㆍ불꽃ㆍ꿈ㆍ건달바성과 같으며, 제일의제는 아니다. 그대의 그러한 분별을 잘 관찰해 보면, 탐욕보다 먼저 탐욕에 물드는 자가 있는 것인가? 탐욕에 물든 자보다 먼저 탐욕이 있다는 것인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있는가? 세 가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4_a_13L釋曰如染染者乃至癡等盲暗亦然是故當知有彼陰等論者言彼陰等行聚增長染因過惡顯現如是染者及彼染等於世諦中如幻焰夢乾闥婆城非第一義如是諦觀汝此分別爲欲染先有染者爲染者先有染染及染者此二俱時三皆不然如偈曰

만일 탐욕에 물든 자가 먼저 있다면
탐욕을 떠나 탐욕에 물든 자가 성립하네.
016_0434_a_20L若先有染者,
離染染者成

【釋】탐욕은 애착의 다른 이름이다. 탐욕에 물든 자가 탐욕을 떠난 것을 탐욕에 물든 자라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숙성했는데도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을어찌 숙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4_a_21L釋曰染是愛著異名若染者離染彼名染者此則不然何以故如熟無果云何名熟如偈曰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탐욕에 물든 자가 성립하니,
탐욕에 물든 자가 탐욕보다 먼저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34_b_02L因染得染者,
染者染不然

【釋】만일 이것이 탐욕이고 저것이 탐욕에 물든 자라고 구별한다면, 이는 탐욕을 떠나 탐욕에 물든 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탐욕에 물든 자가 탐욕을 일으킨다는 뜻은 결국 성립하지 못한다. 어떻게 논증하여 아는가? 탐욕의 자체 없이는 탐욕에 물든 자는 성립하지 못한다. 관(觀)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의 자체와 같다.
다시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게송에 ‘탐욕은 변행(邊行)의 인[遍因]이며, 탐욕을 가진 자보다 먼저 일어나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에 물든 자는 탐욕의 원인이 된다. 아비달마의 상의(相義)는 이와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4_b_03L釋曰若各別異此是染法此是染者是則離染亦名染者又染者起染無得義云何驗知非無染體得名染以有觀故如染自體復次阿毘曇人言如我偈曰染污名遍因自地中先起是故染者得爲染因阿毘達磨相義如是論者偈曰

탐욕에 물든 자가 이미 있는데
어디서 다시 탐욕이 일어나는가?
016_0434_b_10L染者先有故,
何處復起染

【釋】마치 탐욕에 물든 사람 없이 나중에 탐욕이 일어나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탐욕에 물든 자가 앞서 이미 존재한다면 이 탐욕에 물든 자가 다시 탐욕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논증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이와 같다. 또한 마치 조달(調達)이 상속하는 중에 저 조달의 탐욕을 또 물들이는 것은 증인(證因)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탐욕에 물든 자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와 같다.
016_0434_b_11L釋曰如無染人後時起染乃名染者若彼染者先已得名說此染者復起於染無如此義驗無體故義意如是復次猶如調達相續中染彼調達染者不作證因何以故以染者故譬如耶若達多
외도가 말하였다.
“상속과 다르던 다르지 않던 탐욕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에 물든 자[染者門]의 뜻은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성립시키는 오류가 된다. 또한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며,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016_0434_b_17L外人言別不別相續染非因故染者門作成已復成過亦譬喩無體及違義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상속과 다르지 않은 탐욕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에 물든 자의 뜻은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이루는 잘못은 없다. 저 상속과 다른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도 또한 마땅히 똑같이 부정되어야 한다. 또한 비유할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루는 목적[所成]과 상사(相似)와 이문(異門)을 부정하는 것은 주장과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34_b_19L論者言彼說不善別相續染非因故染者門作非成已復成過彼別相續染及染者亦應同亦非譬喩無體所成相似及遮異非違義故
외도가 말하였다.
“작용하는 원인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상속의 탐욕에 물든 자도 또한 탐욕의 원인이 되므로 비유할 실체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상응하지 않는다. 불공인(不共因)을 부정하기 때문이니, 이 오류는 진실이 아니다. 다시 만약 그대가 결정코 ‘탐욕에 물든 자보다 탐욕의 법이 먼저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4_b_23L外人言有所作因謂他相續染者亦爲染因故譬喩無體者言此不相應遮不共因故此過非實復次若汝定謂染者之先有染法者是亦不然如偈曰

탐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탐욕에 물든 자도 똑같이 오류가 있네
탐욕에 물든 자보다 탐욕이 먼저 있다면
탐욕에 물든 자를 떠나 탐욕은 성립할 수 없네.
016_0434_c_04L若有若無染,
染者亦同過,
染者先有染,
離染者染成

【釋】이것은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탐욕에 물든 자보다 먼저 탐욕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탐욕이고 이것은 탐욕에 물든 자이기 때문이다. 탐욕에 물들여진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탐욕이라 말한다. 의지되는 것보다 먼저 있지 않다. 비유하면 밥이 익는 것과 같다. 만일 그대가 탐욕에 물든 자를 관하지 않고 탐욕의 법[染法]이 있다고 하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4_c_06L釋曰此復云何若染者先有彼染法此則有過謂此是染此是染者故有所染故名之爲染非所依先有譬如飯熟故若汝欲得不觀染者而有染此亦不然如偈曰

탐욕에 물든 자를 떠나 탐욕을 이루는
그와 같은 경우는 성립할 수 없네.
016_0434_c_11L離染者染成,
不欲得如是

【釋】숙성하는 물건을 관하지 않고 숙성은 생기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을 어떻게 증험하는가? 탐욕에 문든 자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탐욕의 법[染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봄[觀]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에 물든 자의 자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두 실체처럼 일향(一向)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것 역시 이와 같이 부정하기 때문에 나의 주장에는 오류가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전 찰나에 일어난 탐욕이 이미 없어져도 장차 일어날 탐욕의 찰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이 때문에 나에게도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4_c_12L釋曰如熟不觀熟物起故此云何非染者無體而有染法何以故有觀故如染者自體外人言如父子二體非一向故此義得成論者言亦如是遮故無過外人言如先剎那起染已離而爲當起染剎那因是故無過論者偈曰

탐욕이 있더라도 탐욕에 물든 자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016_0434_c_19L有染復染者,
何處當可得

【釋】이처럼 탐욕을 일으키는 찰나가 다른 시간에 끊임없이 이어져 탐욕에 물든 자의 찰나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탐욕에 물든 자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이숙(異熟)이 다른 것을 이숙한다는 사실은 옳지 못하다. 이처럼 과거에 일어난 탐욕의 찰나가 현재의 탐욕에 물든 자의 원인이 된다는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찌하여 옳지 않은가? 마치 조달의 탐욕은 조달이라는 탐욕에 물든 자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탐욕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상속과 다른 탐욕과 같다.
016_0434_c_20L釋曰如是別時起染剎那無閒次生染者剎那此不可得以染者不成故如彼異熟是異熟是異熟者事則不如是過去起染剎那立爲現在染者之因義亦不爾云何不爾如調達染不爲調達染者之因何以故以其染故譬如別相續染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은 위와 같은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동시에 일어나므로 허물이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역시 오류가 없다. 그대는 지금 잘 들어야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a_04L復次鞞婆沙師我所立義無如上過所以者何染及染者同時起故無咎論者言亦有過汝今當聽如偈曰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네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상관(相觀)할 수 없기 때문이네.
016_0435_a_07L染及染者二,
同時起不然,
如是染染者,
則不相觀故

【釋】무슨 인연으로 이러한 분별을 일으키는가? 관(觀)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탐욕에 물든 자이고 저것은 탐욕의 법이며, 이것이 탐욕의 법이고 저것은 탐욕에 물든 자라고 분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이 또한 무슨 말인가? 관(觀)함이 있으므로 여기서 논험(論驗)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관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어린싹과 같다.
016_0435_a_09L釋曰何因緣故起此分別以觀無故而可分別此是染者彼爲染法此是染法彼爲染者而不欲爾此復云何欲有觀故此中立驗彼染與染者無同起義何以故以有觀故譬如子芽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무슨 뜻인가? 생기(生起)를 관(觀)하기 때문에 관함이 있다고 하는가? 별개의 말로써 관하는 것을 관함이 있다고 이름하는가? 만약 생기를 관하기 때문에 관함이 있다고 이름한다면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은 항상 서로에 의해 또한 동시에 일어난다. 공유인(共有因)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지와 불빛처럼 동시에 일어난다. 부정인(不定因)이기 때문이다. 만약 별개의 말로써 관하는 것을 관함이 있다고 이름한다면 소의 두 뿔처럼 동시에 일어난다. 왼쪽 하나와 오른쪽 하나라는 별개의 다른 말이 있는 까닭이다. 현견(現見)은 이와 같이 또한 부정인이다.”
016_0435_a_14L復次鞞婆沙師言汝出此因有何等爲觀生故名爲有觀爲觀別語名爲有觀若觀生故名有觀者心心數法此恒相隨亦同時起共有因故如燈炷光明亦同時起非一向故觀別語名有觀者如牛二角亦同時一左一右有別語故現見如此非一向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 및 등과 불 등이 화합하여 자재로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고, 소의 두 뿔을 다른 언어로 관하는 것 등은 세제(世諦)에서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일의제 중에는모든 성립할 수 없으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오류이며,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다시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를 일체(一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거나 이체(異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분별하면, 이 두 분별은 다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a_22L論者言是心心數及燈光等和合自在同時共起彼二牛角觀別語等於世諦中欲令如此第一義中皆不成故汝所說過我無此咎復次染及染者若一若異同時分別二皆不然如偈曰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일체(一體)라면
일체는 곧 동시에 이러나지 않네.
016_0435_b_04L染及染者一,
一則無同時

【釋】만약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는 곧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게송의 뜻은 이와 같다. 여기서 논험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一體)이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에 물든 자의 자체와 같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일체이면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라면 이 뜻은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탐욕과 탐욕에 물든 사람이 이체(異體)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여 위와 같은 오류는 없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b_05L釋曰若言同時卽有二體偈意如是此中立驗染及染者不同時起何以以一體故如染者自體若汝意欲染及染者一體同時義則不可以相違我今染與染者別體同時無如上過者此亦不然如偈曰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별체(別體)라면
또한 동시에 일어나지 않네.
016_0435_b_11L染及染者異,
同時亦叵得

【釋】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논험하여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그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것은 증험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을 세우겠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함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의 자체(自體)와 같다. 다시 이제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거듭 논파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b_12L釋曰別體同時無有此義以驗破故復次彼立別體而欲同時令他解者驗無體故此中立驗染染者二不得同時何以故以有觀故如染自體次今當更破別體同時如偈曰

만약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동반(同伴)이 없어도 또한 같아야 하네.
016_0435_b_17L若別同時者,
離伴亦應同

【釋】만약 그대의 의도가 이른바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다른 하나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논함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나게 하지 못한다. 관함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원인과 결과가 둘인 것과 같다.
016_0435_b_18L釋曰若汝意謂染及染者此二同時而不欲令隨一離伴者此中立驗一義中不欲令彼染及染者別體同以有觀故如因果二
다시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하면 지금 곳곳에 별체로서 이것저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마치 말 주변에 소가 있는 것을 동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소가 홀로 있고 동반이 없어도 또한 동시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답한 것과 같아 뜻에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5_b_22L復次餘論師若汝別體欲得同時今處處別體彼彼同時如馬邊有牛說爲同時是獨牛無伴亦得同時此如先答無少異復次偈曰

만약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무슨 소용 있는가?
016_0435_c_03L若別同時起,
何用染染者

【釋】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가 만약 동시에 일어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들은 별체(別體)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탐욕과 탐욕이 없는 것과 같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5_c_04L釋曰染及染者若同時起是義不然以其別故譬如染及離染復次偈曰

만약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각각 자체로서 성립한다면
무슨 뜻으로 억지로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분별하는가?
016_0435_c_06L若染染者二,
各各自體成,
何義强分別,
此二同時起

【釋】만약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의 아체(我體)가 각각 다르다면, 실체가 다른 까닭에 서로 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만약 작용하는 바가 있어 이것은 곧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 저것은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라고 관하는 모습을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그대의 뜻인가? 이 말에도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게송에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관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법에 나아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별체로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 역시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c_08L釋曰若染及染者我體各別以體別故則不相觀復次若有所用此是染者染此是染染者有觀相貌說同時汝意爾耶此說有過何以故如偈染及染者二同時起不然如是等同時起不應爾有觀故不卽此法說同時起以不異故若欲別體同時起此亦不然如偈曰

이와 같이 별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는가?
동시에 생기(生起)함이 성립하기 때문에
다시 별체를 추구하는가?
016_0435_c_16L如是別不成,
求欲同時起
成立同時起,
復欲別體耶

【釋】이러한 뜻은 장로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5_c_18L釋曰如是義者長老應說如偈曰

어떤 별체가 있어
동시에 발생하려 하는가?
016_0435_c_19L有何等別體,
欲同時起耶

【釋】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별체로서 존재하여 차례로 일어나는 까닭에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인가? 별체가 없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인가? 만약 차례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하면 이는 옳지 않다. 마치 탐욕을 떠난 것과 같다. 앞에서 이미 오류를 말하였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이 또한 옳지 않다. 관(觀)함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원인과 결과가 둘인 것과 같다. 역시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5_c_20L釋曰同時起者有何等義爲有別體次第起故說同時起爲無別體同時起耶若言次第同時起者是則不然如染及離染先已說過若同時起者此亦不然以有觀故如因果二亦先已說是故偈曰

그러므로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 둘은
동일(同一)과 부동일(不同一)이 성립하지 않네.
모든 법 역시 탐욕처럼
동일과 부동일이 성립하지 않네.
016_0436_a_03L由染染者二,
同不同不成
諸法亦如染,
同不同不成

【釋】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의 동일과 부동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탐욕 등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도가 이 품의 첫머리에서 “5음(陰) 등은 존재한다. 탐욕과 과오의 원인이기 때문에”라고 말한 그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세제에서 이유를 말하고 또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며, 먼저 말한 것처럼 이유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 품에서 밝힌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자체가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 이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016_0436_a_05L釋曰彼瞋癡等若內若外同以不同亦皆不成如是第一義中彼染等不成故如外人品初作如是說陰等是以染污過患故者彼因不成又世諦說因及違義故如先所說因過失品內所明染及染者無其自體他得解此義得成
마치 『반야바라밀다경(般若婆羅蜜多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선남자여, 색은 탐욕의 실체가 아니고,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탐욕의 실체가 아니며,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은 탐욕의 실체가 아니므로 공(空)하고, 탐욕의 실체를 떠난 것도 아니므로 공하다.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이다.
016_0436_a_12L如『般若波羅蜜經』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色非染體非離染體如是受想行識非染非離染體復次色受想行識非染體空非離染體空此是般若波羅蜜
이와 같이 색은 성냄의 실체가 아니고 성냄의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실체가 아니며 어리석음의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이와 같다.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극용맹보살이여, 색은 탐욕이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탐욕이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다. 다시 색은 탐욕의 법성(法性)도, 청정함의 법성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관염염자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36_a_16L如是色非瞋體非非瞋體亦非癡體非非癡體受想行識亦復如是此名般若波羅蜜極勇猛色非染非淨想行識非染非淨復次色非染法性非淨法性受想行識亦復如是此名般若波羅蜜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染染者品」竟


7. 관유위상품(觀有爲相品)
016_0436_b_01L般若燈論釋觀有爲相品第七

또다시 이 품을 세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5음(陰) 등의 모든 법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지만 미혹한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상(相)을 취하여 분별하므로 지금 드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무자성의 뜻을 알게 하려고 이 품을 짓는다.
016_0436_b_02L復次成立此品其相云何陰等諸法本無自性惑者未知取相分別今欲顯示令彼識知無自性義有此品起
외도들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은 유위(有爲)의 자체(自體)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생기(生起) 등의 모든 유위상(有爲相)과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저 유위상에는 서로 의지하는 뜻이 없을 것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음(陰) 등에서 생기 등의 모든 상(相)이 서로 도와 인(因)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저 법은 없지 않다. 이른바 유위인 5음 등이다.”
016_0436_b_05L外人言第一義中有是陰等有爲自何以故以彼起等諸有爲相共相扶故此若無者彼有爲相無相扶義譬如兔角由起等諸相與陰等相扶因有力故彼法不無所謂有爲諸陰等也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생기 등의 유위상을 말할 경우 저 생기 등의 상(相)은 유위(有爲)인가, 무위(無爲)인가?”
외도가 말하였다.
“그것은 유위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지금부터 차례로 그 주장을 분별하겠다. 먼저 생기(生起)를 증험하자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6_b_11L論者言汝說起等有爲相者起等相爲是有爲爲是無爲外人言是有爲也論者言今當次第分別此先驗起者如偈曰

만약 생기가 유위라면
세 가지 상이 있어야 하네.
016_0436_b_14L若起是有爲,
亦應有三相

【釋】제일의제 중에 생기 등의 모든 상은 유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법의 실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생기[生]ㆍ머묾[住]ㆍ소멸[滅]의 체(體)에는 각각 작용이 있다. 이런 까닭에 생기 등의 모든 상은 유위상이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증험할 실체가 없다. 단지 주장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은 각각 공능(功能)이 있다. 그대가 없다고 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016_0436_b_15L釋曰第一義中不欲令彼起等諸相是有爲相何以故以有爲故譬如法外人言起住滅體各有作用是故欲令起等諸相是有爲相論者言驗無體唯有立義故外人言起住滅等各有功能汝撥無者義則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 등 작용의 상(相)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생기 또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처럼, 머묾 역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왜냐하면 머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물을 먹어야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유위상은 머무는 작용이 아니다.
016_0436_b_21L者言起等作相不可得故又世諦中起亦非彼有爲法相何以故以起作如父生子住亦非彼有爲法相以故以住作故如食持身又有爲相非彼住作
왜냐하면 머무는 작용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여인이 땅에 병을 놓는 것과 같다. 소멸 또한 유위법의 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파괴되기 때문이니, 마치 막대기로 물건을 부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저들이 생기 등의 유위상을 세운 것은 그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유가 성립하지 못하고 주장과도 서로 위배되는 오류가 있으므로 생기는 유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생기 등이 유위상이라고 말한 것은 주장이 옳지 못하다. 다시 만약 그대가 앞서 말한 오류를 피하려고 생기 등은 무위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도 역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6_c_03L何以故以住作故譬如女人置甁於地滅亦非彼有爲法相以故以破壞故如棒破物如是彼立起等有爲相者此義不成以因不成及與義相違有此過故起非有爲故說起有爲相者義則不然復次若汝欲避先所說過成立起等是無爲義亦不然如偈曰

만약 생기가 무위라면
어떻게 유위상이라 이름하는가?
016_0436_c_10L若起是無爲,
何名有爲相

【釋】만약 생기가 무위이면서 유위의 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면 이와 같은 뜻은 없다. 무위의 자체는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주장의 뜻은 이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생기가 무위면서 유위법상(有爲法上)의 작용을 한다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 꽃과 같다. 머묾과 소멸 또한 그러하다. 다시 자세히 부정하지 않겠다. 또한 만약 그대가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은 유위상이며 작용하는 바가 있다고 분별한다면 이는 차례로 작용한다는 말인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말인가? 이 두 경우 모든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차례로 작용할 경우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6_c_11L釋曰若起是無爲而爲有爲相者如此義以無爲自體無所有故義意如此復次第一義中起是無爲而作有爲諸法相者是義不然何以故無爲故譬如虛空住滅亦爾不復廣復次若汝分別起住滅等是有爲相有所作者爲是次第爲復同時俱有過何以故若次第者如偈曰

생기 등 셋은 차례로는
유위상에 작용하는 힘이 없네.
016_0436_c_19L起等三次第,
無力作業相

【釋】무엇에 대해 무력한 것인가? 유위에 대한 것이다. 다시 생기 등을 차례에 따라 얻으려 함은 법체(法體)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처럼 머묾과 소멸 두 가지도 상(相)에 대해 작용하는 힘이 없다. 법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사멸한 법은 소멸하였으므로 실체가 없다. 생기와 머묾 두 가지도 곧 소멸에 있어서는 힘이 없다.또한 이미 생기한 법은 생기하였으므로 무력하다. 또 법체가 머물거나 혹은 소멸할 경우도 무력하다. 머물 때도 무상(無常)이 따른다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마치 『백론(百論)』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6_c_20L釋曰於誰無力謂於有爲復次欲得起等隨次第者如法體未起住滅二種則無力爲相以法體無故又已滅之法滅則無體起住二種則於滅無又已起之法起則無力又法體若滅復無力若謂住時無常隨逐者是義不然如『百論』偈曰

머묾을 떠나 법체가 없는데
무상이 어느 곳에 머물겠는가?
처음에 머무른다면
나중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016_0437_a_04L離住無法體,
無常何有住
若初有住者後時不應故

항상 무상하다면
모든 시간에 머묾이 없으며
만약 먼저 항상하다면
다시 무상을 얻을 수 없네.
016_0437_a_06L若常有無常,
一切時無住
若先是常者,
復不得無常

만약 무상과 머묾이
법체와 동시에 있다면
머물 경우 무상이 없고
무상한 경우 머묾이 없네.
016_0437_a_07L若無常與住,
共法體同時,
有住無無常,
有無常無住

【釋】만일 생기 등의 모든 유위상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7_a_08L復次若謂起等諸有爲相同時有者是亦不然如偈曰

어떻게 한 사물에
동시에 세 가지 상(相)이 존재하는가?
016_0437_a_10L云何於一物,
同時有三相

【釋】이 상(相)은 이와 같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가? 이른바 한 사물이 한순간에 생기와 머묾과 소멸이 존재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궁극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016_0437_a_11L釋曰此相如是不同時有語義如此云何不有謂彼一物於一時中有起住滅義則不然以畢竟相違故
다시 경량부(經量部)논사가 말하였다.
“모든 법은 각각 달리 정해진 인(因)과 연(緣)이 스스로 자체에 존재하고 상속하여 한순간에 장차 생기하여 자체를 얻을 때 이것을 이름하여 생기라고 한다. 첫 찰나가 상속하는 상태를 이름하여 머묾이라 한다. 전 찰나와 서로 닮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늙음[老]이라 한다. 이미 생기한 것이 괴멸하는 것을 소멸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반드시 한 찰나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관(觀)1)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방편을 써서 나에게 오류를 적용시키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허물이 없다.”
016_0437_a_14L復次經部師言諸法各別有定因緣自在相續於一時中當可起者得自體時此名爲起初剎那相續位此名爲住先剎那不相似此名爲老已起者壞此名爲滅如是等決定有觀於一剎那同時有故汝作方便與我作過者我無此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상속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묾을 분멸한다면 이는 세제의 세 가지 상(相)이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그대가 머무는 순간은 머묾과 소멸로부터 떨어져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한 오류를 모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016_0437_a_21L論者言是相續者亦非實又有觀故住分別者是世諦三相非第一義汝言住時違住滅者此不應然以不免先所說過故復次鞞婆沙師言
“먼저 자체가 아직 생기하지 않고 나중에 자체를 얻는 경우를 생기(生起)라 이름한다. 생기하는 것이 수립된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머무는 것이 썩으므로 이를 늙음이라 이름한다. 늙는 것이 사멸하므로 이를 괴멸이라 이름한다. 생기 등은 차례로 유위의 실체를 떠나지 못하므로 이 뜻으로 인해 그 상(相)은 실체로서 성립한다. 앞에서 ‘생기 등세 가지가 차례로 상에 작용하는 힘이 없네’라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다.”
016_0437_b_02L如先體未起者於後得自體此名爲起起者樹立此名爲住者朽故此名爲老老者滅故此名爲由起等次第得不離有爲體以是義故彼相體成如先所說起等三次第無力作業相者此爲不善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엇을 이름하여 상(相)이라 하는가? 이른바 보이는 상[所相]에 대하여 아직 상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면 고형성의 모습이 지(地)와 분리되지 않은 것과 같다. 또한 대인(大人)의 여러 상이 대인과 분리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생기 등이 제일의제 중에 바로 유위의 모든 법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차례가 있기 때문이다.
016_0437_b_07L論者言汝語非也云何名相謂與所相未曾相離譬如堅相不離於地及大人諸相不離大人若言起等第一義中是彼有爲諸法相者此義不然何以故有次第故
차례란 무엇인가? 진흙 덩어리를 바퀴 위에 놓고 손을 움직여 쓰다듬으면 동그랗게 되는 것처럼 이 모든 상태의 개별성은 저 병가(甁家)처럼 유위의 체상이 아니다. 생기 등의 모든 상(相) 역시 저 유위법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가설로서 시설된 것일 뿐이다. 진실로 생기는 여기서 부정되기 때문이다.
016_0437_b_12L次第云何如以泥團置於輪上運手旋已如小塔形次拍令平次轉如蓋後攏如圌此諸位別非彼甁家有爲體相起等諸相亦不離彼有爲法者假施設耳眞實起者此中遮故
무엇을 부정하는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는 머묾과 소멸은 무체(無體)이기 때문이다 장차 생기할 때 머묾과 소멸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분별하는 것은 오직 세제의 언설로서 있는 것이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오류를 면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생기 등의 모든 유위상은 차례로도 동시에도 저 실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7_b_17L此云何遮彼未起者住滅無體若謂當來起時應有住滅作此分別者唯世諦言說不免如先所說過如是起等諸有爲相次第同時彼體不成因有過故復次偈曰

만약 생기와 머묾과 무너짐에
다른 유위상이 있다면
곧 무한소급이 되네.
016_0437_b_21L若諸起住壞,
有異有爲相,
有則爲無窮

【釋】만약 저들에게 차별성이 존재하고 유위상 역시 차별성이 존재한다면 이와 같은 것은 곧 무한소급의 오류이므로 주장이 옳지 않다. 또한 생기 등의 모든 상(相)이 무상(無相)이라면다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은 얻는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7_b_22L釋曰若彼有異彼亦有異者如是則無窮而不欲爾復次若起等諸相更無相者復得如先所說過失如偈曰

없다면 곧 유위(有爲)가 아니네.
016_0437_c_02L無則非有爲

【釋】이 주장은 무슨 뜻인가? 그대의 의도가 유위의 모든 법은 유위상이 아니라는 것처럼 유위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생기 등도 또한 유위상이 아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제일의제에서는 생기 등의 모든 상을 분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유위거나 혹은 무위라 해도 말한 바의 오류와 같은 것이 이제 도리어 그대를 뒤따른다.
016_0437_c_03L釋曰此義云何如汝意欲有爲諸法非有爲相以有爲故如是起等亦非有爲相以是義故第一義中不應分別起等諸相若是有爲若是無爲所說過今還屬汝
다시 독자부(犢子部) 사람이 말하였다.
“생기는 곧 유위이며 무한 소급이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자체와 화합하여 15법이 존재하며 총체적으로 함께 생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이 법의 실체이고, 둘째는 이른바 저 생기이며, 셋째는 머묾의 차별성이고, 넷째는 소멸의 상이며, 다섯째는 만약 백법(白法)이면 정해탈의 생기가 존재하고, 여섯째는 만약 흑법(黑法)이면 사해탈(邪解脫)의 생기가 존재하며, 일곱째는 만약 이것이 출리법(出離法)이면 출리의 실체가 생기하고, 여덟째는 비출리법(非出離法)이면 비출리의 실체가 생기한다.
016_0437_c_08L復次犢子部言是有爲而非無窮云何知耶由此自體和合有十五法摠共起故何等十一此法體二謂彼起三住異四滅五若是白法則有正解脫起六若是黑法則有邪解脫起七若是出離法則出離體起八若非出離法則有非出離體起
여기서 앞의 일곱 개는 법체의 권속(眷屬)이며, 일곱 개의 권속마다 각각 한 개의 따르는 권속이 있다. 이른바 생기(生起)의 생기 내지 비출리(非出離)의 비출리인 실체가 바로 권속의 권속법이다. 이와 같이 법체와 화합하여 총 15법의 생기가 존재한다. 저 근본 생기가 그 자체 외의 14법을 생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생기의 생기는 능히 저 근본 생기를 일으킨다. 머묾 등 또한 그러하다. 이 뜻으로 인하여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 마치 우리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7_c_15L此前七種是法體眷屬七眷屬中皆有一隨眷屬謂有起起乃至非出離非出離體此是眷屬屬法如是法體和合摠有十五法起彼根本起除其自體能起作十四法起起能起彼根本起住等亦然以是義故無無窮過如我偈曰

저 생기의 생기가 일어날 때
오로지 근본 생기만이 일어나네.
근본 생기가 일어날 때
다시 생기의 생기가 일어나네.
016_0437_c_21L彼起起起時,
獨起根本根,
根本起起時,
還起於起起

아사리 용수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많은 말을 해도 주장에 있어서는 옳지 않다.어째서 옳지 않은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7_c_23L阿闍梨言汝雖種種多語而於義不云何不然如偈曰

생기가 생기할 때
근본 생기를 능히 일으킨다면
그대는 근본 생기로부터 발생하였는데
어떻게 근본 생기가 일어난다고 하는가?
016_0438_a_02L若謂起起時,
能起根本起,
汝從本起生,
何能起本起

【釋】이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과 같은 것은 모두 생기하지 않았을 때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근본 생기란 생기의 생기를 일으킬 수 있음이다. 이와 같이 생기의 생기는 근본 생기를 일으킬 수 있다, 의미는 바로 이와 같다.”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a_04L釋曰不如是生以未起故如前都未起外人言根本起者能起起起如是起起能起本起義正如此論者偈曰

만약 근본 생기가
저 생기의 생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면
저것은 생기의 생기에서 생겨나니
어떻게 생기의 생기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016_0438_a_07L若謂根本起,
能起彼起起,
彼從起起生,
何能起起起

【釋】이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장은 뜻은 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근본 생기와 생기의 생기, 이 두 가지가 일어날 때 각각 스스로 작업(作業)한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a_09L釋曰不如是生以未起故義意如是外人言彼根本起及以起起此二起時各自作業是故無過論者偈曰

생기하는 순간에
원하는 생기가 작용한다고 그대가 말한다면
만약 이 생기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생기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능히 일으키겠는가?
016_0438_a_12L汝謂此起時,
隨所欲作起,
若此起未生,
未生何能起

【釋】첫 번째 구절은 이른바 근본 생기를 말한다. 두 번째 구절은 이른바 생기의 생기를 말한다. 세 번째 구절은 일어나려 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네 번째 구절은 근본 생기가 생기의 공능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왜냐하면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생기가 순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순간과 같으며, 또한 장차 일어나는 법체(法體)와 같다.
016_0438_a_14L釋曰第一句謂根本起第二句謂起第三句謂起時未起第四句謂根本起無起功能何以故以未生故起時故譬如前未生時又如當起法
외도가 말하였다.
“공유인(共有因)처럼 법은 지금 생기한 것과 이미 생기한 것에 대하여 함께 일어난다. 모든 법은 생기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일향(一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가 생기하는 순간이기 때문에’라는 이유와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말한 것은 그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38_a_19L外人言如共有因於法起時及已起者共起諸法有起功能故非謂一汝言起時故因及未生故因者義不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함께 발생하는 것[共生]도 부정하였다. 저 원인을 그대는 부정인[非一向因]이라 하며 나에게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대에게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다른 도리가 있어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도리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8_a_22L論者言前染染者中已遮共亦遮彼因汝言非一向者說我有又言無有無窮過者此不能避有人言有別道理避無窮過道理云如偈曰

마치 등이 스스로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추듯이
생기의 법 역시 또한 그러하여
자신을 생기시키고 다른 것들도 생기시키네.
016_0438_b_03L如燈照自體,
亦能照於他,
起法亦復然,
自起亦起彼

【釋】이 주장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b_05L釋曰以是義故無無窮過論者偈曰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고
등불이 머무는 곳에도 어둠은 없네.
저 등불이 무엇을 비추어
스스로를 비추고 남을 비춘다고 하는가?
016_0438_b_06L燈中自無暗,
住處亦無暗,
彼燈何所照,
而言照自他

【釋】이처럼 등불은 털끝만치도 비춤의 작용이 없다. 이유 명제의 말뜻은 그러하다. 다시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에서 등불은 스스로를 비출 수 없고 또한 다른 것은 비출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둠이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작열하는 햇빛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서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4대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저 지(地) 등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비유할 실체가 없다.
016_0438_b_08L釋曰如是燈無毫末照用因語意爾復次此中立驗燈體於彼第一義中不能自照亦不照他何以故以暗無譬如猛熾日光復次第一義中燈不破暗何以故以其大故譬如彼地以是義故譬喩無體
외도가 말하였다.
“등불이 처음 생기할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등불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과 같다네. 말하자면 자체가 빛을 만들어 능히 밖의 어둠을 제거할 수 있다.’ 주장의 뜻도 그러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둠은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는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또한 비유할 실체도 없다. ‘등불이 비춘다’고 하는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b_14L外人言燈初起時卽能破暗如偈言如燈能破暗自體作明能除外暗義意如是如先所說暗無故者此因不成亦譬喩無以燈及光義可得故論者偈曰

어떻게 등불이 비출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가?
016_0438_b_18L云何燈起時,
而能破於暗

【釋】“어떻게 등불이 비출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가?”란 물리칠 수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말뜻은 다음과 같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8_b_19L釋曰云何破者謂不能破故語義如偈曰

이 등불이 처음 비추는 순간
저 어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네.
016_0438_b_21L此燈初起時,
不到彼暗故

【釋】막 발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둠 속의 등불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지혜와 지혜 아닌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38_b_22L釋曰以起時故譬如暗燈外人言非智等非一向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러한 주장에 집착한다면앞서 성립시킨 부분 중에 포함되므로 이와 같이 또한 부정한다. 그러므로 부정인이 아니다. 또한 막 빛이 비추려는 순간은 아직 빛이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은 지은 업이 없는 것처럼 등불도 그와 같이 빛을 만들 수 없다. 다시 앞의 게송에서 ‘어떻게 등불이 비출 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가? 등불이 처음 비추는 순간 저 어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처럼 여기서 증험하였다. 제일의제에서는 저 등불이 비추는 순간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 왜냐하면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빛 없는 세계에 암흑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의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치되는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저 어둠과 같다.”
016_0438_c_01L論者言汝執此義墮前成立分中攝故如是亦遮非非一向也復次起時未生故如未生子無所作業燈亦如是不能作明復次如前偈說云何燈起時而能破於暗此燈初起時不到彼暗故者此中立第一義中彼燈起時不能破暗以故以不到故譬如無明世界中閒黑暗復次第一義中燈不破暗何以以不得所對治故譬如彼暗
외도가 말하였다.
“현견의 등불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해도 빛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그러한 주장을 세우는 것은 나의 논파력만을 증대하며 나의 비유를 점점 더 분명하게 하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것이 만약 그와 같다면 지금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보이는 것[所見]과 같다는 것인가? 또는 다르다는 것인가? 나도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둠을 제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만약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둠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8_c_10L外人現見燈不到暗而能作明故論者汝立此門增我破力令我譬喩轉更明顯故我無過彼若如是今當觀爲如所見爲復異耶我亦不見燈不到暗而能除暗若燈不到暗而能除暗者是義不然如偈曰

만약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고
저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
등불은 여기에 머물면서
모든 어둠을 없애야 하네.
016_0438_c_16L若燈不到暗,
而破彼暗者,
燈住於此中,
應破一切暗

【釋】등불이 멀리 있는 어둠을 물리침을 그대도 이미 인정하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어둠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또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8_c_18L釋曰燈破遠暗汝旣不許近亦如是云何能破復次如偈曰

만약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역시 마땅히 그와 같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해야 하네.
016_0438_c_20L若燈能自照,
亦能照他者,
暗亦應如是,
自障亦障他

【釋】어둠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동시에 다른 것을 어둡게 할 수 없다면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춤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겠는가? 다시 여기서 증험을 하겠다.제일의제 중 등불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는 것에 대치되는 것을 허물 수 없다. 왜냐하면 대치되는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저 어둠과 같다. 이와 같이 등불은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니, 비유할 실체가 없다.
016_0438_c_22L釋曰暗自他二不欲爾者燈自他二豈欲得耶復次此中立驗第一義中燈於自他不壞所治何以故有能治譬如彼闇如是燈體自照照他先已遮故譬喩無體
이런 까닭으로 외도가 저 등불의 비유를 들어 생기의 뜻을 성립시키고 스스로와 다른 것도 생기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스스로 생기하고 또한 다른 것을 일으킨다면 무엇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미 생기한 것이 일어나는 것인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9_a_04L是故外人引彼燈喩成立起義能起自他者是則不然以不免前無窮過故復次若謂自起亦起他云何能起爲已起起爲未起起爾有何過若未起起者如偈曰

이 생기가 만약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와 다른 것을 발생시킬 수 있는가?
016_0439_a_08L此起若未起,
云何生自他

【釋】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는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경우와 같다. 이와 같은 뜻은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39_a_09L釋曰未起無生以未生故如前未生如是意者先已分別復次偈曰

이 생기가 이미 일어났다면
이미 일어났는데 다시 어느 것에서 일어나겠는가?
016_0439_a_11L此起若已起,
起復何所起

【釋】이미 생기하였기 때문이다. 저 생기를 일으키는 것은 곧 공용(公用)이 없다. 그와 같이 관찰할 때 생기는 스스로를 일으키고 다른 것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그대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무한소급의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 생기 등이 무위를 이룬다면 무위인 까닭에 저 모든 생기 등은 유위상(有爲相)이 아니다. 그대가 ‘상(相)이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은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묻겠다.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할 경우 무엇이 생기한다는 것인가? 현재 생기할 때의 생기를 말하는가? 이미 생기한 것이 일어남을 말하는가?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9_a_12L釋曰由已起故生於彼起則無功用如是觀察汝言起者能起自他義則不爾以不免前無窮過故又彼起等成其無爲以無爲故彼諸起等非有爲相汝言相故者因義不成又復當說有起者云何起耶爲起時起已起起是皆不然如偈曰

생기하는 것과 생기한 것,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는 생기하지 않네.
지금 가는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작요,
거기서 이미 해석하였네.
016_0439_a_19L起時及已起,
未起皆無起,
去未去去時,
於彼已解釋

【釋】그와 같이 이미 증험하였으며, 여기서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말하겠다. 제일의제 가운데 현재의 생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간의 향전(向前)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소멸하려는 순간처럼다시 만약 저 법이 일부 생기하고 일부는 생기하지 않은 경우를 지금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일부가 생기하였다면 그것은 다시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생기는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미래와 같다.
외도의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뜻도 잘 관찰해야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9_a_21L釋曰如彼已驗此中亦應如是廣說以第一義中起時不起何以故異世向前故如欲滅時復次若謂彼法少起少未起說爲起時者是亦不然以故若少起者彼更不起起無用故若未起者起亦不起以未起故譬如未來外人言決定起者來向現在名起時論者言如是義者亦應觀察如偈曰

지금 생기하지 때문에 생기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네.
어떻게 지금 생기하는 것을
연기(緣起)라고 말하는가?
016_0439_b_07L由起時名起,
此義則不然,
云何彼起時,
而說爲緣起

【釋】저 지금 생기하는 것은 있는가, 없는가? 또는 있으면서 없는가? 이러한 과실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검술을 잘 배워도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한 행동을 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는 일을 따르는 것과 같다. 그대 역시 이와 같다. 왜냐하면 대선(大仙)이 저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을 위하여 깊은 연기를 설하지만 그대는 오랫동안 망상에 훈습되어 법답지 못한 행을 행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바른 도리를 해친다.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016_0439_b_09L釋曰彼起時者爲有爲無爲亦有亦此等過失如上已遮外人言譬如有人善解劍術起不善心行惡逆行自害其母以爲隨順汝亦如是何以大仙爲彼聲聞獨覺說深緣起汝久習妄想行非法行自破所欲害正道理此執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나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인과를 없애고 올바른 백법(白法)을 파괴하여 즐거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저 나쁜 견해의 사람을 교화하여 불선(不善)의 때에 찌든 주장을 씻기 위해 불바가바(佛婆伽婆)께서 말씀하시를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고 하셨다. 이른바 무명(無明)을 행(行)이라고 말한 것 모두는 세제이기 때문에 성립하며 제일의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뜻은 바로 내가 하려는 바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바른 도리를 해친다’고 한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9_b_16L論者言汝不知耶有惡見人撥無因果破壞白法不肯信受爲欲教化彼惡見人洗濯不善垢穢義故佛婆伽婆作如此說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所謂無明緣行諸如是等爲世諦故非第一義如是意者是我所欲汝言自破所欲害正理者此語不然如偈曰

모든 법은 무성(無性)으로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재해야 저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와 같은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39_b_23L由諸法無性,
自體非有故,
此有彼得者,
如是則不然

【釋】또한 부처님께서 게송에서 ‘만약 연(緣)함으로써 발생한다면 발생이 아니니, 그 연기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네. 만약 인연을 따른다면 이는 곧 공하며, 공을 이해하는 자를 불방일(不放逸)이라 이름하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여러 경전을 여기서 마땅히 자세히 말하겠다. 이와 같이 관한다면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환(幻)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 생기하는 것은 적멸하여 생기의 상(相)이 없다. 저 외도가 ‘지금 생기하는 것으로써 연기를 삼는다’고 말한 것은 제일의제에서는 증험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옳지 못하다.”
016_0439_c_02L復次如佛說偈若從緣生則不生緣起者體非有若屬因緣此則空空者名不放逸如是等諸經此中應廣說由如是觀若生未生悉皆如幻是故起時寂滅則無起相如彼外人所說起時以爲緣起者第一義中驗不成故彼爲不善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세간에서는 여러 인연이 각각의 결과로 일어남을 현견(現見)한다. 이른바 병과 옷 등이다. 현견보다 뛰어난 다른 증험은 없다. 앞의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생기하는 순간과 이미 생기한 것과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에 생기는 없다고 한 주장은 옳지 않다. 계(戒) 등이 생기하기 때문이다.”
016_0439_c_09L復有人言世閒現見種種因緣各各果起謂甁衣等無異驗勝現見者如前偈說起時及已起未起皆無起此不相應以戒等起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계(戒) 등의 모임은 공덕을 따르는 것인데 누가 능히 어기겠는가? 이것은 세제에서만 성립하며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며 진실 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오류가 없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병과 옷에 생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은 세제이며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혹은 병이나 혹은 옷은 지금 생기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직 생기하지 않았을 때는 아니다.
016_0439_c_13L論者言彼戒等聚隨順功德誰能違者而是世諦非第一義彼如是等爲捨執著爲實義故有此論起是故無過若汝意謂甁衣有起者是世諦非第一義我所欲者若甁若衣現起可得非彼未起
만약 이미 생기한 것에 생기가 있다고 하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병과 옷 따위의 생기는 아직 생기하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이라 하며, 이와 같이 집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병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망각을 안치하여 저 병이라는 이름을 연(緣)하여 병의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뜻은 다만 세제에서 망각을 안치할 뿐이다. 병은 아직 생기하지 않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439_c_18L若已起者起不然甁衣等起未起起故如此執是義不然何以故若甁未起安立妄覺緣彼甁名謂有甁起如是意者此但世諦安置妄覺以甁未生不可得故
비바사 논사가 말하였다.
“3세(世)는 있기 때문에 저 병 등은 생기한다. 나의 주장은 이와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또한 옳지 못하다.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39_c_23L復次鞞婆沙師言三世有故甁等起我義如此論者言此亦不然如偈曰

어떤 곳에 만약 어떤 사물이
아직 생기하지 않고도 실체가 존재한다면.
016_0440_a_02L隨處若一物,
未起而有體

【釋】‘어떤 사물’이란 병과 옷 등이다. 모든 연에서 혹은 화합 중에서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실체가 먼저 존재한다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a_03L釋曰一物者或甁衣等若於諸緣和合中及於餘處體先有者偈曰

이미 존재하는데 생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016_0440_a_05L已有何須起

【釋】저들이 이미 존재한다면 생기는 쓸모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a_06L釋曰彼若已有起則無用故爲是因偈曰

실체가 존재하면 생기가 없기 때문이네.
016_0440_a_08L體有起無故

【釋】이 뜻으로 인하여 생기보다 앞서 실체가 존재한다면 생기를 증험할 필요가 없다. 실체가 이미 존재하는데 생기한다는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다시 시간의 차별성에 집착하는 자가 “모든 법은 실체로서 존재한다. 어떻게 증험해서 아는가? 현세(現世)로부터 왔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현재로부터 왔다면 곧 현재를 무너뜨린다. 이러한 실체의 차별성과 상(相)의 차별성 및 상태의 차별성은 앞의 과실과 같다. 모두 이것으로써 대답이 된다.
016_0440_a_09L釋曰以此義故先起有體者驗起則有體起者立義有過復次執時異者說如是言諸法有體云何驗知現世故此執不然何以故若來現在則破現在如是體異相異及位異者如先過失皆以此答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모든 법의 실체가 있음을 요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실이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요해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을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다시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세속에 섭수되는 까닭이다. 마치 현재의 사물과 같다.”
016_0440_a_15L復次僧佉人言諸法體有可顯了故我無過失論者可顯了者先已遮故此不相應次未起有體云何可信僧佉復言世攝故如現在物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현재의 사물이란 제일의제에서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대의 비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하려는 주장도 무너진다. 또한 비록 자체가 없더라도 세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 시점의 색 등의 모든 법은 환(幻) 등과 같은 것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세제 가운데 색(色) 등의 모든 법은 단지 가설[假]로서 시설되는 것임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에 이르길 ‘지금 생기하는 것과 이미 생기한 것과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모두에 생기는 없네’라고 말한 것들은비록 앞에서 이미 답하였지만 지금 다시 말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a_19L論者言現在物者第一義中無自體故汝譬不成所欲義壞復次雖無自體亦不壞世諦現在時色等諸法猶如幻等亦可得彼世諦中色等諸法但假施設如是知偈言起時及已起未起皆無如是等先雖已答今當更說如偈曰

만약 생기가 지금 생기하는 순간에
이 생기가 일어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016_0440_b_02L若謂起起時,
此起有所起

【釋】그 뜻은 만약 생기가 생기하는 순간에 능히 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b_03L釋曰彼意若謂起於起時能有所起此執不然有過失故如偈曰

저 생기가 작용을 하고 있는데
어찌 다시 생기가 존재하겠는가?
016_0440_b_05L彼起能起作,
何等復起是

【釋】저 생기는 옳지 못하다. 생기의 작용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부자(父子)의 생기가 무(無) 자체인 것과 같다. 게송의 주장은 이와 같다. 또 만약 다음과 같이 “다시 다른 생기가 존재하여 능히 저 생기를 일으킨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오류이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b_06L釋曰彼起不然以起作故譬如父子起無自體偈義如是復次若如是說更有異起能起此起是亦有過得何等過偈曰

만약 생기에 다시 생기가 존재한다면
이 생기는 무한 소급의 오류가 있네.
016_0440_b_10L若起更有起,
此起無窮過

외도가 말하였다.
“생기하지 않음으로써 생기하므로 무한소급의 오류가 없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도 이러하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b_11L外人言不起起故無無窮過我欲如論者偈曰

만약 생기함이 없이 일어난다면
법 모두 이와 같이 일어나네.
016_0440_b_13L若起無起起,
法皆如是起

【釋】법이 이미 그렇지 못하니, 생기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억지로 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생기가 있다고 할 경우, 실체가 있거나 실체가 없거나 실체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거나 생기에는 모두 오류가 있다. 마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b_14L釋曰法旣不爾起亦應然是故不應强作分別復次此有起者若有體無體若有無體起悉有過如偈曰

실체가 존재한다면 생기는 무의미하며
실체가 없다면 생기는 의지할 곳이 없네.
실체가 있으면서 없어도 또한 그러하니,
이 뜻은 앞에서 이미 설하였네.
016_0440_b_17L有體起無用,
無體起無依,
有無體亦然,
此義先已說

【釋】어느 곳에서 이미 말하였는가? 저 「관연품(觀緣品)」의 게송에서 “존재도 아니고 또한 비존재도 아니다. 모든 연의 뜻도 마땅히 그러하네”라고 설한 것처럼, 또한 게송에서 “존재가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며 존재면서 동시에 비존재인 것[法]의 생기는 없네”라고 설한 것처럼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으니, 다시 해석하지 않겠다. 또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b_19L釋曰何處先說如「觀緣品」中偈說有亦非無諸緣義應爾又如偈言有非不有非有無法起如先已遮復更釋復次如偈曰

만약 소멸할 때 생기가 존재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40_b_23L若滅時有起,
此義則不然

【釋】소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죽을 때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아직 소멸하지 않았을 때 생기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0_c_01L釋曰以滅時故譬如死時外人言滅時起是故無過論者偈曰

법이 소멸하지 않은 경우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네.
016_0440_c_03L法若無滅時,
彼體不可得

【釋】그 체상(體相)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이 게송의 뜻도 이와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머묾[住]의 부정인이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역시 무상(無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못하는 경우도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 앞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c_04L釋曰以彼體相不相應故如虛空花偈意如是外人言住非一向故論者彼亦無常隨故未滅時不成我無過咎如前廣說
외도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생기는 존재한다. 저 생기하는 것[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없다면 저 생기하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마치 거북의 털로 옷을 만드는 것처럼 두 가지 모두 무체(無體)이다. 생기가 성립하기 때문에 머묾의 법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한 이유대로 생기는 무체가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는 실체가 없으므로 생기하는 것도 성립하지 못한다. 비록 세제 중에 이 생기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제일의제는 머무는 상[住相]이 없다. 이제 이 실체에 대하여 묻겠다. 아직 머물지 않은 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이미 머문 실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현재 머무는 실체가 머문다는 것인가? 제일의제에는 세 가지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0_c_08L外人言:有如是起所起法有故此若無者彼所起法則不得有如用龜毛爲衣二皆無體起成故住法則有是故如所說因起非無體論者言起無體故所起不成雖世諦中說有此起第一義中則無住相今問此體爲未住體住爲已住體住爲住時體住第一義中三皆不如偈曰

아직 머물지 않은 실체는 머물지 못하며
머무는 실체도 머물지 못하네.
지금 머물러도 머물지 못하며,
생기하지 않는데 무엇이 장차 머물겠는가?
016_0440_c_16L未住體不住,
住體亦不住,
住時亦不住,
無起誰當住

【釋】첫째 구절은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멸과 같다. 둘째 구절은 현재의 세(世)와 과거의 세의 2세(世)를 하나의 시간으로 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머문다는 주장은 공하다. 셋째 구절은 과거의 머묾과 미래의 머묾을 떠나 다시 현재의 머묾은 없다는 것이다. 있다고 하면 옳지 못하다. 앞에서 자세히 논파한 것과 같다. 넷째 구절은 어떤 사물의 생기도 어떤 사물의 머묾도 없다는 것이다. 게송의 뜻은 그와 같다.
016_0440_c_18L釋曰第一句者由非住故譬如滅二句者以現在世及過去世二世一時不可得故住義則空第三句者住未住更無住時有者不然廣如前第四句者無一物起無一物住意如是
다시 제일의제에서 실체로서 생기의 상을 얻을 수 없다.앞에서 계속 도리를 자세히 인증하여 사람들에게 이해시켰다. 생기가 이미 성립 하지 못하는데 무엇이 머문다는 것인가?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가 “생기하는 것과 생기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1_a_01L復次第一義中無一物體起相可得從前已來廣引道理令人解了起旣不成誰爲住者由此義故先說言所起之法起有因者此皆不復次如偈曰

소멸할 때 머묾이 존재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41_a_05L滅時有住者,
是義則不然

【釋】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 다른 것이라면 동시에 존재한지 않는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빛이 암흑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처럼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아직 소멸하지 않았을 때 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1_a_06L釋曰以相違故若相違法則不同時如烈日光不與暗竝偈意如是外人彼未滅時體可得故論者偈曰

만약 법이 소멸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 실체는 얻을 수 없네.
016_0441_a_09L若法無滅時,
彼體不可得

【釋】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무상(無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다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멸하는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 꽃과 같이 게송의 뜻도 그와 같다. 다시 만약 그대의 의도가 “이미 생기한 찰나에 머무는 상[住相]의 힘이 있다. 이 순간에 법체(法體)가 소멸하지 않으며, 또한 이것은 항상됨이 아니다. 머묾이 끊어짐 없이 이어져 곧 늙음이 있고 무상이 뒤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016_0441_a_10L釋曰以諸有爲法無常隨逐故復次彼體不可得何以故無滅時故如虛空花偈意如是復次若汝意謂已起剎那住相有力當於爾時法體不滅亦不是常以住無閒次卽有老無常隨逐故此執不然
만약 색 등의 머무는 상이 작용할 때 무상이 없다면 나중에도 무상이 뒤따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있는 곳에 물이 없으며, 불은 나중에도 또한 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머묾의 뜻도 그렇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의 법체의 멸진(滅盡)을 현견(現見)한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016_0441_a_16L何以故若此色等住相用時無無常者後時亦無無常隨逐如火處無水火於後時亦不作住義亦然外人言世閒現見法體滅盡云何言無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를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그대가 소멸을 보았다면 이 소멸은 실체를 항상 서로 수반하는 것인가? 각각 개별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더불어 서로 수반한다면 머묾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별개로 존재한다면 실체에는 소멸하는 순간이 없다. 이미 소멸하는 순간이 없다면 실체도 얻을 수 없다. 이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016_0441_a_20L論者言此應觀察見滅者是滅與體爲恒相隨爲各別若與相隨卽無住義若在別處無滅時旣無滅時體不可得二俱不
총명하나 게으른 사람이 다음과 같이‘비유하면 사라보다 먼저 불체(佛體)가 없다가 나중에 부처가 되는 것처럼 머묾 역시 그와 같다. 먼저 소멸이 없다가 나중에 소멸한다는 주장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불체가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일체지(一切智)의 상(相)과 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범부가 지혜로 나중에 성불한다는 그와 같은 주장은 없다. 세제 중이 이 방편어는 성립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최후의 찰나에 지혜의 상(相)이 일어날 때를 부처가 된다고 한다. 저 지혜와 불체에는 차별이 없다. 그대가 말한 대로 실체로서의 도리는 없다. 이와 같이 늙음과 머묾이 같거나 다르다는 것도 또한 이 오류와 같아 성립하지 않는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1_b_01L復次有聰慢者或如是言譬如有人先無佛體後時得佛住亦如是雖無滅後時滅者竟有何咎此執不何以故無佛體者謂無一切智相用凡夫智後時得佛者無如此義世諦中此方便語亦不成立如是斷煩惱障及彼境障最後剎那智相起時說名得佛彼智與佛體無差別汝所言無實道理如是老住若一若異者亦同此過由此不成故阿闍梨偈曰

저 일체의 모든 법에는
항시 늙음과 죽음이 존재하네.
어떻게 머무는 것[法]이면서
늙음과 죽음의 상(相)이 없는가?
016_0441_b_11L彼一切諸法,
恒時有老死,
何等是住法,
而無老死相

【釋】만약 생기가 있다면 이 실체가 있는 곳에 따라 머묾을 가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생기함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지금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가 세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그대들이 저 머묾을 머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할 때, 머묾은 스스로 머무는가? 다른 머묾을 가립하여 머무는 것인가? 두 경우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1_b_13L釋曰若有起者隨是體處有住可見起可得成今則不爾是故彼立因義不成復次汝等欲得彼住住者爲住能自住爲假異住住二俱不然如偈曰

스스로 머무는 것과 다른 머묾으로 머문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마치 생기가 스스로 생기하지 않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하지 않는 것과 같네.
016_0441_b_17L住異住未住,
此義則不然
如起不自起,
亦不從他起

【釋】무엇이 생기가 자기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인가? 앞의 게송에서 “이 생기가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생기할 수 있는가? 만약 이미 생기하였다면 발생하였는데 발생이 다시 어디서 일어나겠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가? 앞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생기하고 다시 생기가 존재한다면 이 생기는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네”라고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머묾 역시 이와 같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1_b_19L釋曰云何起者自起不然如前說偈此起若未起云何得自生若已起能生復何所起故云何不從他生先偈言若起更有起此起無窮過住亦如此偈曰

머묾이 만약 아직 머무는 것이 없다면
자체는 어디에 머무는가?
머묾이 이미 머무는 것이 있다면
머묾이 이미 있는데 머묾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016_0441_c_01L此住若未住,
自體云何住
此住若已住,
住已何須住

머묾에 만약 다른 머묾이 머문다면
그 머묾은 곧 무한소급이 되네.
머묾이 만약 머무는 것 없이 머문다면
모든 법이 이와 같이 머물게 되네.
016_0441_c_03L住若異住住,
此住則無窮,
住若無住住,
法皆如是住

【釋】두 게송은 바로 뜻을 해석하는 게송이며 논의 본 게송이 아니다. 앞에서 스스로 머무는 것의 머묾을 부정한 것은 자체로부터 생기함을 부정한 것과 같고, 뒤의 다른 것으로부터 머무는 것의 머묾을 부정한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함을 부정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머묾에는 자체가 없다. 그대가 앞에서 “이와 같이 생기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법에는 체가 존재한다는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41_c_04L釋曰此二偈是釋義偈非論本偈遮自住住如遮自體起後遮他住住如遮從他起應如此知是故當知無自體如汝先說有如是起彼有體法有體者此因不成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 생기와 머묾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함께 작용하는 법체(法體)는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말의 뿔처럼 생기와 머묾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 소멸도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유를 말하는 힘에 의해서 제일의제 중에 생기와 머묾은 존재한다.”
016_0441_c_09L外人言第一義中有此起住何以故共行諸法彼體有故此若無者彼共行法體應不譬如馬角由起住有故彼共行滅是故第一義中說因力故起住是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소멸 또한 이와 같다. 이른바 실체로서 이미 말하였을 때, 아직 멸하지 않았을 때, 현재 멸할 때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1_c_14L論者言滅亦如是謂此體已滅滅時欲令有滅者一切不然如偈曰

아직 멸하지 않은 법은 소멸하지 않고
이미 멸한 법은 소멸하지 않으며
현재 멸할 때도 또한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무엇이 소멸하겠는가?
016_0441_c_15L未滅法不滅,
已滅法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等滅

【釋】첫째 구절은 소멸이 공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머묾과 같다. 둘째 구절은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거듭 죽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 구절은 이미 멸한 것과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떠나 법은 다시 소멸함이 없다. 모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반드시 현재 멸하는 순간에 멸하지 않음을 안다. 또한 제일의제 중에 멸하고 있는 것을 멸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전류(轉流)이기 때문이다. 마치 막 생기할 법이 현재로 오는 것과 같다. 넷째 구절은 무슨 뜻인가? 일체 법이 다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41_c_17L釋曰第一句者以滅空故譬如住二句者如人已死不復更死第三句離彼已滅及未滅法更無滅時俱過故是故定知滅時不滅復次第一義中滅時不滅以世傳流故如當起法來現在者第四句者其義云何一切諸法皆不生故
생기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생기의 상이 없기 때문이다.발생한 것이 없는데 소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마치 석녀의 아이와 같다. 이와 같이 그것이 생기하거나 생기하지 못해도 모든 때의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법이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경우, 거기서 소멸을 분별해도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2_a_01L言無生者生相無故無生有滅義則不然如石女兒如是彼欲起者及不起者於一切時有滅不然復次法住無住彼分別滅二俱不然如偈曰

법체(法體)가 만약 머물고 있다면
소멸의 상(相)은 있을 수 없네.
016_0442_a_05L法體若住者,
滅相不可得

【釋】머물기 때문에 소멸함이 없다고 세간 모두 이해한다. 만약 그대가 “머묾 없이 멸함이 있다는 것은 과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2_a_06L釋曰以住故無滅世閒悉解若汝言無住有滅無過失者是亦不然如偈曰

법체(法體)가 만약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 또한 얻을 수 없네.
016_0442_a_08L法體若無住,
滅亦不可得

【釋】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소멸의 상(相)과 같다. 다시 이 법이 머무는 상태에서 소멸하는가? 머무는 것과 다른 상태에서 소멸하는가?
외도가 말하였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2_a_09L釋曰以無住故如彼滅相復次此法爲當卽住此位滅耶爲住異位滅耶外人言此言何謂論者偈曰

그것은 이 상태로 있을 때
바로 이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
그것은 다른 상태로 있을 때도
다른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
016_0442_a_12L彼於此位時,
不卽此位滅,
彼於異位時,
亦非異位滅

“그것은 이 상태로 있을 때 바로 이 상태로 소멸하지 않네”란 자체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우유가 우유의 상태에 머물 듯이 다른 상태로 소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유를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의 우유는 낙(酪)의 상태로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병 등과 같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소멸이 존재한다. 실체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우유의 숙성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2_a_14L釋曰不卽此位滅者,
以不捨自體故譬如乳住乳位亦不於彼異位時滅何以故此中說驗第一義中乳不於彼酪位時滅以彼異故如異甁等有人言有如是滅依止體故譬如彼論者偈曰

만약 일체 법의
생기(生起)의 상(相)을 얻을 수 없다면
생기의 상이 없으므로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도 옳지 못하네.
016_0442_a_20L若一切諸法,
起相不可得
以無起相故,
有滅亦不然

【釋】“모든 법은 생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앞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숙성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미 숙성하였다는 집착은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그대가 소멸을 말한다면실체가 있어 소멸하는가? 실체가 없이 소멸하는가?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2_a_22L釋曰諸法不起如前已說未熟已熟此執不成譬喩無體復次汝言滅者爲有體滅耶爲無體滅耶二俱不然如偈曰

법에 만약 실체가 존재한다면
소멸의 상이 없네.
016_0442_b_03L法若有體者,
有則無滅相

【釋】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과 불과 같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2_b_04L釋曰以相違故譬如水火由如是故偈曰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다는 것은
의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네.
016_0442_b_06L一法有有無,
於義不應爾

【釋】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復次偈曰


법이 만약 실체가 없다면
소멸이 존재한다는 것도 옳지 못하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의 머리
그것을 자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네.
016_0442_b_07L

法若無體者,
有滅亦不然,
如無第二頭,
不可言其斷

【釋】게송의 비유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데 다시 멸함이 있음을 증험한다면 옳지 못하다. 법체(法體)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대들이 만약 “제일의제 중에 저 소멸의 상 및 수반되는 소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에 의해 멸하는 것인가? 다른 것에 의해 멸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2_b_09L釋曰偈譬喩者以其無故以此無體驗有滅者是義不然法體壞故復次汝等若言第一義中有彼滅相及隨滅者爲是自滅爲是他滅二俱不然如偈曰

법은 자체에 의해서 소멸하지 못하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소멸하지 못하네.
마치 자체에 의해서 생기하지 못하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생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네.
016_0442_b_14L法不自體滅,
他體亦不滅,
如自體不起,
他體亦不起

【釋】자체로서 생기한다면 이것은 상응하지 못한다. 마치 앞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생기가 만약 아직 생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는가? 생기가 만약 이미 방생하였다면 발생이 다시 어디서 일어나는가? 다른 실체에 의해 발생하였다면 게송에서 “생기에 만약 다른 생기가 있다면 생기는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생기는 이미 그와 같으며, 소멸 또한 그러한 부류이다. 소멸의 부류에 대하여 게송에 “이 소멸이 만약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스로 소멸하는가? 소멸이 만약 이미 무너졌다면 소멸이 어느 곳에서 무너지겠는가? 소멸에 다른 소멸이 있다면 소멸은 곧 무한소급의 오류가 있다. 소멸에 만약 소멸이 없다면 소멸법은 다 이와 같이 무너진다”고 설한 것과 같다.
016_0442_b_16L釋曰自體起者此不相應如前已說此起若未起云何能自生此起若已生復何所起他體起者如偈言起若異起起則無窮過起旣如此滅亦類然滅類偈者此滅若未滅何能自滅此滅若已壞滅復何所壞此滅若異滅滅則無窮過滅若無滅法皆如是壞
게송을 해석한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마치 자신으로부터 생기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자세히 부정한 것과 같다. 스스로에 의해 소멸하고 다른 것에 의해 소멸하는 것은 생기처럼 논파된다.
016_0442_c_01L此釋義偈應知如自他起前已廣遮自他滅者類同起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괴멸의 원인이 있을 때 괴멸법(壞滅法)이 바야흐로 무너진다”고 한다면 응당 이와 같이 답해야 한다. 그대가 괴멸의 원인을 주장한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법은 이 법의 괴멸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품의 머리부분 이후로 자세히 그것을 부정하였다. 이와 같이 생기와 머묾은 제일의제에서 생기의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할 실체도 없다. 만약 세제 중에 원인과 비유를 말한다면 그대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증험을 세운 것과 같다. 이미 자세히 도리를 분별하여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2_c_02L有人言得壞因時壞法方壞者應如是答汝立壞因是義不然何以故法非是此法壞因以彼異故譬如餘品初已來廣遮彼說如是起住第一義中起因不成譬亦無體若世諦中說因譬喩者違汝義故如前立驗已廣分別道理自在故如偈曰

생기와 머묾과 무너짐은 성립하지 못하네.
그러므로 유위(有爲)는 존재하지 않네.
016_0442_c_09L起住壞不成,
故無有有爲

【釋】외도가 말한 것과 같이 “저 5음(陰) 등 모든 유위법은 존재한다. 유위의 상(相)이 화합하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이미 논파하였다.
016_0442_c_10L釋曰如外人所說有彼陰等諸有爲以有爲相和合故者彼爲已破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일의제 주에서 저 소 등의 유위법이 존재한다. 들소의 뿔과 턱살(목) 등의 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도 마땅히 부정해야 한다. 그대가 이들 유위상을 세운다면 또한 상이 있다는 것인가, 상이 없다는 것인가? 만약 상이 있다면 이 뿔 등은 곧 소의 실체가 아니고 유위상(有爲相)도 아니다. 왜냐하면 상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의 실체와 같다. 앞에서 자세히 논파하였다. 만약 다시 상이 없다면 상이 없기 때문에 이들 모든 상은 자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상을 보는 주체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 또한 없다. 또한 상이 존재한다면 상은 무한소급의 오류이다. 이것들 모두는 앞에서 자세히 부정한 것과 같다.
016_0442_c_12L有人言第一義中有彼牛等諸有爲何以故以角犎垂𩑶等相有故亦應遮汝立此等有爲相者爲更有爲更無相若更有相此角犎等則非牛體有爲相也何以故以有相故譬如牛實廣如前破若更無相者無相故此等諸相自然不成以能相無力故所相亦無又有相者相無窮此等一切如先廣遮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주의 유위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대립이 없을 것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처럼 저 유위와 무위 두 법은 상대하기 때문에제일의제 중에 유위법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유위법이 성립한다면 유위가 제거되므로 능히 무위(無爲)를 말할 수 있다. 저 유위법을 이치대로 잘 관찰하면 실체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2_c_21L復有人言一義中有是有爲何以故有待對故此若無者應無待對如石女兒以彼有爲無爲二法相待由此因故第一義中有是有爲論者言若有爲法得成立者除有爲故可說無爲彼有爲如理諦觀體不可得是故偈曰

유위(有爲)가 성립하지 못하므로
어떻게 무위가 존재하겠는가?
016_0443_a_04L有爲不成故,
云何有無爲

【釋】토끼의 뿔처럼 발생이 없다는 것은 세제에서도 실재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이유 등은 실체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상(相) 등이 있다고 분별하는가? 세제이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3_a_05L釋曰如兔角無生於世諦中亦不作實解應知此意以是義故因等無體若爾云何分別有諸相等爲世諦故如偈曰

마치 꿈과 같고 또한 환(幻)과 같고
건달바성과 같네.
생기와 머묾과 괴멸이 있다고 말해도
그 상(相)은 또한 이와 같네.
016_0443_a_09L如夢亦如幻,
如乾闥婆城,
說有起住壞,
其相亦如是

【釋】모든 선인(仙人)들은 유위의 생기 등을 알아 능히 깨달음의 원인을 발생시켜 진실한 지견(知見)을 연다. 저 지혜로운 사람이 생기 등을 말한 것은 곧 내가 말하려는 것과 같다. 무지한 자는 지혜의 눈이 덮이어 실체가 없는 경계에 대해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고 꿈속의 말처럼 저 모든 법의 생기와 머묾과 소멸 등을 말한다. 이것은 염오훈습(染汚薰習)으로 인하여 각각 다른 원인을 집착하여 세 가지로 분별하여 실체의 뜻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을 보이기 위하여 꿈과 환(幻) 등의 세 가지 비유를 말함을 응당 알아야 한다.
016_0443_a_11L釋曰諸仙知彼有爲起等能生覺因開實知見如彼智人所說起等是我所欲由無智者覆慧眼故於無實境起增上慢如夢中語說彼諸法起住滅等此由染污熏習各執異因分別三種謂有實義爲示彼故說夢幻等三種譬喩應知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생기 등은 곧 존재한다. 왜냐하면 현전(現前)의 지각으로써 취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色)과 같다. 또한 작용하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상속하여 함께 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하나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부정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개시하기 위하여 이해하는 정도에 맞게 꿈 등의 비유를 말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6_0443_a_18L有人言起等是有以故現前覺取故譬如色又作者有亦相續同取故如是說者此執不何以故非一向故爲開示彼如其數量說夢等譬喩應知
다시 불바가바(佛婆伽婆)께서 진실을 보시고 성문승을 위하여 미혹의 장애를 대치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색(色)은 거품과 같고, 수(受)는 물거품과 같고, 상(想)은 햇빛과 같고,행(行)은 파초와 같고, 식(識)은 환사(幻事)와 같다.”
이 뜻은 아(我)와 아소(我所)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며, 마치 빛과 그림자와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승(大乘)을 위하여 번뇌장[惑障]과 소지장[智障]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위법(有爲法)은 본래 무 자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016_0443_a_22L復次佛婆伽婆見眞實者爲聲聞乘對治惑障故作如是說色如聚沫受喩水泡想同陽焰行似芭蕉識譬幻事此意欲令知我我所本無自性猶如光影亦爲大乘對治惑障及智障故說有爲法本無自體
마치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에서 “모든 유위법은 마치 별과 눈앞의 아지랑이와 등불ㆍ환상ㆍ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위(有爲)에 실체가 없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품의 주장은 이런 까닭으로 성립할 수 있다.
016_0443_b_05L如『金剛般若經』說一切有爲法如星翳燈幻露泡夢電雲應作如是觀欲令他解有爲無體是此品是故得成
마치 『반야바라밀다경』 중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色)은 유위가 아니며 무위도 아니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와 같다. 만약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라면 이것은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016_0443_b_08L如『般若波羅蜜經』中說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色非有非無爲受想行識亦復如是若色受想行識非有爲非無爲者此是般若波羅蜜
또한 『능가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유위와 무위는 자체(自體)으 상(相)이 없다. 다만 저 범부가 어리석음과 망집으로 차별성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마치 석녀가 꿈에서 아이를 껴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016_0443_b_12L又如『楞伽經』說有爲無爲無自體相但彼凡夫愚癡妄執分別有異猶如石女夢見抱兒
또한 『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서 말하였다.
“수보리여,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관유위상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43_b_14L又如『金剛般若經』說須菩提凡所有相皆是虛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有爲相品」竟
般若燈論釋卷第五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여기서 관(觀)은 상관(相觀)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