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空)과 대립하는 것을 제거하여 5음(陰)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제 증험하여 알게 하기 위해 이 품을 짓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5음ㆍ12처[入]ㆍ18계(界)는 존재한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근거로, 작업을 짓는 자[作者]와 작업(作業)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약 이것들이 없다면 부처님께서 그것들을 원인으로 삼아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지 말아야 한다. 비유하면 말의 뿔과 같다.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존재하는 까닭에 경전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선법(善法)의 행을 행해야 하며 악법(惡法)을 행해서는 안 되네 이 생 및 다음 생에도 행하는 자는 안락(安樂)을 얻네.
016_0443_c_11L應行善法行, 惡法不應行, 此世及後生,
行者得安樂。
【釋】이처럼 경전 중에 작업을 짓는 자[作者]와 작업(作業)이 설해지고 있다. 작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이다. 저 선업을 분별하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自性)이고, 둘째는 상응(相應)이며, 셋째는 발기(發起)이며, 넷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불선 역시 그렇다. 무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른바 보생(報生)ㆍ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설해진 이유의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을 원인으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것을 이유라고 한다면 이 주장은 성립 못한다. 만약 세제 중에서 이와 같은 것을 획득하고자 하더라도 비유할 실체가 없고 이와 같은 실체가 없다. 바가바께서 제일의제 중에‘5음 등이 원인이 되어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뜻에 있어서 옳지 못하다. 그렇지 않은 것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작업을 짓는 자가 실체로서 존재하든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든, 또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도 업(業)을 지을 수 있는 것인가? 작업도 역시 이와 같아서 실체로서 존재하든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든,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도 작자에 의해 지어진 것인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행해진 것을 업(業)이라 하고 행위하는 주체자를 자(者)라 한다. 여기서는 먼저 실체로서 작업하는 자를 관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4_a_11L釋曰:所作名業,能作名者。此中先觀立有實者,如偈曰:
실체로서의 작업하는 자에게는 작업이 없네.
016_0444_a_13L有實者無作。
【釋】만약 그대의 의도가 작업을 관하지 않고 작업을 짓는 자[作者]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만약 반드시 이와 같다면 작업은 없을 것이다. 작업에 이미 체가 없다면 작업을 짓는 자는 성립할 수 없다. 또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에 작업이 없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비유를 들어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험석(驗釋)하려는 것은 5취온(取蘊)으로써 가설로 시설한 것이다. 또한 외도가 계탁한 것은 제바달다를 선업(善業) 혹은 불선업(不善業)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조달(調達)의 상속 작용은 작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작업을 짓는 자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와 같다. 다시 만약 작업을 짓는 자[作者]가 실체로서 존재하며 가설로서 시설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치 외도 식강(食糠)이 자아를 작업을 짓는 자[作者]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같다는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것이 취착되므로 여기서 증험하겠다.제일의제 중에 조달의 자아[我]는 작업을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작업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작업도 제바달다의 상속하는 자아의 작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업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다시 외도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그대의 주장은 무슨 까닭인가? 제바달다의 상속의 작업과 같은 것은 다른 것의 작업(作業)인가? 다른 것의 작업이 없는 것인가? 이는 둘 다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다른 것의 작업이라면 그대가 세운 주장은 논파된다. 만약 작업이 없다면 비유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취착(取著)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야야달다의 상속의 작업을 야야달다의 아(我)가 작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비유가 성립한다. 이와 같이 작업을 관하지 않고서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허망분별이고, 의미에 있어서도 옳지 못하다. 작업을 짓는 자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작업 또한 이와 같다. 작업을 짓는 자를 관하지 않고도 자연히 존재한다. 작업을 짓는 자는 작업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작업을 분별하여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하면 작업에 곧 작용이 없게 되는 이러한 과실이 존재한다. 또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서로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세간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그 둘은 반드시 서로 원인을 기다린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제바달다의 상속에서 작업을 짓는 자는 제바달다의 정업(定業)을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하고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와 같다. 다시 제일의 중에 제바달다의 상속중인 작업을 짓는 자는 반드시 관보를 받는 업을 짓지 못한다.왜냐하면 작업을 짓는 자을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의 상속의 작업과 같다. 다시 지금 주장을 세워 앞서 말한 것을 부정하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이 후반의 게송은 작업 및 작업을 짓는 자가 무인의 오류에 떨어짐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작업에는 작업을 짓는 자가 없기 때문이며, 작업을 짓는 자에는 작업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인에 떨어진다. 이유가 없는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면 일체 세간 사람들이 잘 믿을 수 없게 된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제바달다의 상속에서 제바달다의 업인을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야야달다처럼 다시 제일의제 중에 제바달다의 상속에서 제바달다의 정해진 과보의 업인을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작업을 짓는 자를 관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야야달다의 상속의 작업과 같다. 이 까닭으로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釋】무엇을 결과[果]라 하는가? 이른바 각각 결정된 인연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과라 이름한다. 무엇을 원인이라 하는가? 이른바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 화합하여 같이 작용하는 바가 있고,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 법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원인이라 한다. 마치 그대가 원인을 곧 무인(無因)이라 분별하고 결과 또한 무과(無果)라고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을 관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니 응당 이 뜻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만약 상관(相觀)하지 못하면 그 실체는 없다.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어떤 것의 실체가 없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세간(世間) 중에 병과 옷 등의 사물에도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여 작업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만약 작업을 짓는 자가 작업을 관하지 않고 작업이 작업을 짓는 자를 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저 병과 옷 등은 공인(工人)의 선교방편(善巧方便)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히 성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저 병 등은 여러 지엽적인 원인이 성취된 것으로서 그것들은 뛰어난 부분들을 갖춘 것이다. 만약 볼 수 없다면 갖춘 것 등도 없다. 이와 같이 일체 자르는 자와 자르는 도구 및 잘리는 물건 또한 다 실체가 없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어째서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에 의해 모두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 모두 요별되기 때문이다. 법과 법 아닌 것도 실체가 없다. 다시 어떤 자부(自部) 사람이 마음을 일으키기를 ‘모든 행은 공하므로 작업을 짓는 자에게 실체가 없다. 저 작업을 짓는 자는 공하여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 왜냐하면 뛰어난 몸과 입과 생각의 자체가 법과 법 아닌 것을 잘 작업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다만 취집(聚集)만이 존재하나 세제에 요익케 하려고 저들을 이름하여 작업을 짓는 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법과 법 아닌 것을 관하기 때문이다. 만약 작업을 짓는 자가 없다면 관하는 작업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법 등은 실체가 없어 그대는 오류를 모면할 수 없다. 상관(相觀)의 도리가 없는 까닭이다. 도리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법과 법 아닌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결과가 된다. 인천(人天) 등은 선도(善道)를 사랑하고 지옥 등은 악도(惡道)를 사랑하지 않는 것, 저 신근(身根)의 수용(受用) 모두는 자체가 없다. 선도(善道) 중에 수행자는 계(戒)를 받고 선(禪)을 익혀 삼마발저(三摩鉢著)8정도[聖道支]의 정견(正見)을 상수(上首)로 삼아 모든 번뇌를 여의는 이 주장은 모두 공하다.
이처럼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없다고 분별한다면 모든 오류의 덩어리는 다 그대에게 속하여 치료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실을 이미 알았으면 응당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의 상관도리(相觀道理)를 믿어야 할 것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말한 바에 오류란 없다.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체로서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이 없다는 그 취착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옳지 못한 뜻이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釋】한 사물과 한 찰나에 존재 및 비존재는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둘은 성립하지 못한다. 상위법(相違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존재한다고 하는가? 마치 한 불 속에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할 경우 세간에서는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실체로서 존재하므로 실재한다고 말하고, 작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한 사물과 한순간에 관하는 것이 자재(自在)하기 때문에 두 뜻이 성립하여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두 문[二門]을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으므로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상관도리는 나중에 부정하려는 것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마치 야야달다처럼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거나 또한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세운 주장은 비유할 실체가 없다. 증험으로 파할 수 없다.”
016_0445_b_20L外人言:如耶若達多,亦有作者亦無作者。汝立譬喩無體,驗不能破。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야야달다 자체의 상속(相續) 중에 제바달다의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의 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는 그렇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오류는 없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이와 같은 분별은 제일의제에 의지하면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의 건립이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나에게는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나 작업은 없다. 이 까닭으로 오류는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이것은 무엇이 만들지 못하는 것인가? 짓는 자와 업이다. 무슨 까닭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5_c_05L釋曰:此誰不作?謂作者業。何故不作?偈曰:
이것은 취착(取著)하기 때문에 과실이 있고 그 과실은 앞서 말한 것과 같네.
016_0445_c_07L此由著有過, 彼過如先說。
【釋】앞에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말한 것과 같다. 제일의제 중에 “조재하는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작업을 지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작업을 짓는 자가 존재하는 작업을 지을 수 없다”는 두 구절의 주장은 따로 이유와 비유가 있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작업을 짓는 자는 실재하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또한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작업을 만들지 않으니 이 오류는 앞에서 이미 말하였네.
016_0445_c_12L作者實不實, 亦實亦不實, 不作三種業,
是過先已說。
작업은 실재하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또한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 모두 작업을 짓는 자의 작업이 아니네 오류 또한 앞서 말한 것과 같네.
016_0445_c_14L作業實不實, 亦實亦不實,
非俱作者作, 過亦如先說。
【釋】모든 과실은 앞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단지 주장에 차별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관(觀)하는 것으로 인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5_c_15L釋曰:此諸過失如前廣明,唯有立義爲差別耳。由如是觀。偈曰:
작업을 짓는 자를 연하여 작업이 존재하고 작업을 연하여 작업을 짓는 자는 존재하네 이로 인하여 작업의 뜻이 성립하네 다른 원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네.
016_0445_c_17L緣作者有業, 緣業有作者, 由此業義成,
不見異因故。
【釋】세제 중에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은 다시 서로를 상관(相觀)하며, 이것을 여의고 달리 다시 다른 원인이 작업의 뜻을 성립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외도가 품의 첫머리부터 원인을 말하여 비유를 들지만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에 과실을 모면하기 어렵다.
【釋】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작업을 짓는 자는 작업을 연(緣)으로 하고, 작업은 작업을 짓는 자를 연으로 한다. 이와 같이 취착[取]은 취착을 짓는 자[取者]를 연으로 하고, 취착을 짓는 자는 취착을 연으로 한다. 제일의제에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 둘은 다 여의었기 때문에 취착을 짓는 자와 취착도 이와 같이 여읜다.
다시 여기서 제일의제 중에 조달이 실체로서 취착하는 것은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취착을 관(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와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실체로서 취착을 짓는 자가 아닌 자가 취착하거나 또는 실체로서 취착하지 않거나 실체로서 또는 실체가 아닌 것으로 취착하지 않는다. 세운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는 실체로서 가히 취착할 실체로서 제바달다를 위해 취착하는 것은 없다. 취착을 짓는 자를 관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야야달다의 취착과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또한 실체가 아닌 취착은 없다.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닌 취착을 짓는 자는 실체가 아닌 취착을 위하여 취착하지 않는다. 또한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닌 취착이 또한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닌 취착을 짓는 자를 위하여 취착하지 않는다. 주장의 차별과 이유 및 비유는 앞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釋】무엇이 그 밖의 법인가? 이른바 자신과 남이 이해하는 바이다. 결과 혹은 원인,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하는 대상[所依], 보는 주체[能相]와 보이는 상[所相], 혹은 총체성과 개별성 등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또한 응당 관찰 해야 한다. 결과는 원인을 연으로 하고 원인은 결과를 연한다고 하는 이 주장은 성립하지만, 이것은 세속법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제일의제 중에 원인과 결과 등의 법은모두 자체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저 취착의 화살을 뽑으려 하기 때문에 일부분이라도 개시(開示)하겠다. 제일의제 중에서 우유로 낙(酪)을 결코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결과를 관(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실 등과 같다. 만약 “세간에서 모두 우유로 낙을 만드는 것을 보는데 그대가 없다고 말한다면 곧 세간에서 보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이 취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나는 제일의제 중에는 아니라고 주장했으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서는 우유로 낙을 만들지 못하나, 세제에서는 만든다.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의 비유는 성립할 수 없으며, 내세우는 주장 또한 무너진다. 만약 모든 법이 자체의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고 말하면 비유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 법에는 각각 결정된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처음 분별은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 분별을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실[經] 등은 저 낙의 원인이 아니니, 앞서 세운 주장 중에 이미 간별하였기 때문이다 비유할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처럼 원인 중에 결과가 존재하고 원인이 능히 작용을 일으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저 원인은 곧 없다. 거북의 털로 만드는 옷과 같다. 무엇이 원인인가? 이른바 낙과 병 등이다. 이 까닭으로 결과가 존재한다. 다시 만약 결과가 없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마치 우유 중에 낙이 없는 것처럼 풀 중에도 없다. 낙을 구하는 자는 어째서 우유에 취착하고 풀에 취착하지 않는가? 저 취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원인에 결과가 있음을 안다.
또한 우유 중에 낙이 없듯이 또한 삼계 등도 없다. 이것이 없다면 무슨 인연 때문에 우유의 인연에서 낙이 발생하고 삼계가 발생하지 않는가? 일체 사물을 한 원인으로부터 생기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반드시 원인 중에 결과가 존재함을 안다.마치 도공이 흙을 보고 뛰어나게 병을 만들려는 취착으로써 병을 만들지, 모든 것에 취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공능(功能)으로 생기의 작용이 있고 원인에 결과가 있음을 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마치 그대가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이유를 제시한 것과 같은 것은 주장을 세우는 법(法)이 아니다. 이것은 다르기 때문에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대의 ‘결과 없이 원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것이 존재함으로 해서 저것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세간 중에 성립하며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제일의제 중에는 이유 및 비유의 둘 모두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원인 자체와 같다. 이 법체(法體)를 두 가지로 차별하는 것에 의해 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첫 번째 이유를 논파한 것과 같다. 저 우유 등에 취착하는 모든 원인도 또한 이 도리로써 답견(答遣)해야 한다.
다시 마치 비바사 논사가 원인 중에 결과가 없이 원인이 능히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취착한 것처럼, 원인은 힘이 없고 또한 생기의 작용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또한 독자부(犢子部)가 말한 것처럼 결과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이 생기의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세제 중에 작업을 짓는 자의 원인이 성립하나 제일의제에는 원인 혹은 결과, 존재도 비존재도 모두 성립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 중에 있는 결과의 체(體)를 지각할 수 없다. 결과가미세하기 때문이다. 이 취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원인 중에 거침[麤]이 없기 때문이다. 거침이 먼저 실체로서 없으나 나중에 얻을 수 있다면 곧 원인 가운데 결과가 없어 너의 주장은 논파된다.만약 그대의 의도가 미세한 것이 거친 것이 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미세한 것이 변하여 거친 것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거친 결과는 미세함과 서로 위배된다. 법체의 전도(顚倒)는 내세우는 주장에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요별 작용으로 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응당 묻기를 ‘요별 작용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해야 한다. 이에 ‘마치 등불로 병 등을 요별하는 작용과 같다’고 대답한다. 이 취착은 이미 「관연품(觀緣品)」에서 논파한 것과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등불은 저 병과 옷 등을 요별하기 작용을 못한다. 왜냐하면 눈이 취착하기 때문이며, 장애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색(色)이기 때문이며, 접촉하기 때문이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등이 있다 비유하면 지신[土塊]과 같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결과가 만약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하였다면 공능(功能) 자체를 요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까닭으로 나는 이와 같이 결과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무엇을 만든다는 말인가? 이른바 원인의 자체가 변화하여 결과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말의 뜻은 이와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과거와 미래의 감수작용을 원인으로 삼는다면 의지(依止)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감수작용을 원인으로 삼는다면 곧 비유가 없어 결과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오류가 존재한다. 또한 그대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지 않다고 할 경우, 만약 다르지 않다면 이것은 저것의 원인이 아니다.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원인의 자체와 같다.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원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법의 자성(自性)이 무너진다. 주장 명제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결과도 또한 실체가 없다.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 저 존재는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할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여러 불이문(不異門) 또한 취착하는 바에 따라 논파해야 할 것이다. 이미 실체로서 원인이 능히 결과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세제 중에 만약 원인이 없다면 또한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원인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거북의 털로 옷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만약 결과가 없다면 원인 또한 만들 수 없다. 이 주장에는 차이가 있다 이유와 비유 모두 앞과 같다. 그것이 반은 존재하면서 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착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자부 사람 및 비세사 사람 등이 말하였다. “원인은 있고 결과가 없어도 원인은 능히 작용을 할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결과가 없는 것이다. 내가 용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이미 발생한 결과에는 원인의 작용이 없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에는 원인의 공능이 존재한다. 이 주장으로 인하여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과가 없기 때문에, 또한 내가 용인 못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설정한 것과 같은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대가 현견(現見)하므로 용인 못하는가? 증험 때문에 용인 못하는 것인가? 일체 인식 방법 때문에 용인 못하는가? 그와 같은 분별로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를 든 것에 오류가 있다. 부정인[非一向]이기 때문이다. ‘아직 생기하지 못한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에’라는 이 증험은 다른 사람을 신해(信解)시킬 수 없다. 그대가 ‘결과 없이 생기 한다’고 말한다면 그 결과 없이 생기하는 것에 비유가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 가희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제일의제 중에서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인으로써 관하기 때문이다. 마치 명주의 생기와 같다. 다시 진흙덩어리를 실제로 구나(求那)라고 이름하며, 가유(假有)의 병[假甁]을 구니(求泥)라 한다. 제일의제 중에 진흙덩어리는 병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구니로써 관(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다시 제일의 중에 호리병의 상(相)은 소의 체상(體相)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말의 상과 같다. 다시 개별자를 아사야사(阿娑也娑)1)라 이름하며, 일반자를 아사야비(阿娑也毘)2)라고 이름 한다. 제일의제 중에 실체로서 실[經] 등은 비단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사야비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이와 같이 작업을 짓는 자와 작업은 자체의 성(性)이 없다. 품은 뜻은 이와 같다. 이 까닭으로 성립할 수 있다.
마치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선남자여,색(色)은 작용을 짓는 자도 작업을 시키는 자도 아니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역시 작용을 짓는 자도 작업을 시키는 자도 아니다. 만약 색과 나아가 식이 작용을 짓는 자도 작업을 시키는 자도 아니라면 이는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한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말하기를 ‘사리불이 ⧼부처님이시여, 무작(無作)이 곧 반야바라밀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작업을 짓는 자를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하셨다. 또한 저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색은 선(善)이 아니며 불선(不善)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 역시 또한 그와 같다. 만약 색(色)과 나아가 식(識)에 이르기까지 선이 아니고 불선이 아니라면 이를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경전들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작자업품」의 해석을 마친다.
다시 취착하는 자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잘 관차하게 하기 위해 이 품을 짓는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7_c_12L復次爲令諦觀取者無體,有此品起。如偈曰:
눈과 귀 등의 모든 근(根)과 수(受) 등의 모든 심법(心法) 이것보다 먼저 사람이 존재한다고 일부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네.
016_0447_c_14L眼耳等諸根, 受等諸心法, 此先有人住,
一部如是說。
【釋】불교의 부파 모두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사불다라(婆私弗多羅)3)가 있어 이와 같이 주장을 세운다. 눈 등의 모든 근(根)과 수(受) 등의 심법(心法) 이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먼저 머무는 것이 있어야 한다. 도리가 그러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취착하는 자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 등은 성립할 수 없네. 이 까닭으로 머무는 실체[住體]가 먼저 존재함을 알아야 하네.
016_0447_c_20L若取者無體, 眼等不可得; 以是故當知,
先有此住體。
【釋】나는 취착하는 자가 있어 먼저 머문다고 본다. 왜냐하면 취착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취착하는 자를 가히 얻을 수 있으므로 모든 취착보다 먼저 머무는 것이 존재한다.비유하면 베를 짜는 사람이 날실과 씨실 이전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또한 취착하는 사람 이전에 눈 등의 취착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취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나무 껍질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취착 및 취착하는 자 두 가지 모두 성립한다. 이러한 뜻으로 나는 앞에서 “제일의제에는 음(陰) 등의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은 결코 파괴 할 수 없다. 용수 논사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눈 등의 모든 근(根)과 수(受) 등의 모든 심법(心法) 그보다 먼저 취착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을 무슨 까닭으로 시설하는가?
016_0448_a_07L若眼等諸根, 受等諸心法, 彼先有取者,
因何而施設。
【釋】눈 및 수(受) 등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취착으로서 또한 어떤 사물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취착하는 자를 시설하는가? 이와 같이 그것은 이때에 존재하지 않는다. 취착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눈 등의 취착보다 먼저 취착하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시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씨실과 날실 등과 같다. 이 까닭으로 취착하는 자는 성립하지 못한다. 취착하는 자가 성립하지 못하므로 이유 명제는 곧 허물어진다. 이유가 허물어지므로 저 날실과 씨실 등의 비유는 실체가 없다. 제일의제 중에 취착 및 취착하는 자의 실체는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독자부(犢子部) 사람이 말하였다. “마치 먼저 천상에 태어나서 생천(生天)의 업이 다한 것처럼 천상의 취착하는 자는 이와 같이 머묾을 얻고 나중 사람 등의 모든 음(陰)을 취하기 때문에 저 취착하는 자는 아함으로서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 하늘에 태어난 자는 천상의 취착의 실체를 하늘이라 시설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대는 총체적으로 아함을 말하였으나 다른 증험이 없기 때문에 의혹이 생기게 해 결코 믿을 수 없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눈 등의 근(根) 없이 먼저 저 머무는 자가 존재한다면 또한 취착하는 자 없이 눈 등이 있음을 의심할 바 없네.
016_0448_a_22L若無眼等根, 先有彼住者, 亦應無取者,
眼等有無疑。
【釋】그대의 뜻이 이와 같다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취착하는 자를 관하지 못하면 눈 등의 모든 취착의 실체는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만약 이 두 법이 서로를 상관(相觀)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차례의 뜻은 마땅히 그렇지 않다. 이른바 이 눈 등의 법을 취착하는 것이 취착하는 자, 조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눈이 취착하는 자, 조달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이 눈 등의 법을 취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어떤 취착이 있어 사람을 요별(了別)하며, 어떤 사람이 있어 취착을 요별하네 취착 없이 어떻게 사람이 존재하며 사람 없이 어떻게 취착이 존재하리오.
016_0448_b_07L或有取了人, 或有人了取, 無取何有人?
無人何有取。
【釋】“어떤 취착이 있어 사람을 요별하고”란 이른바 눈 등의 모든 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있어 취착을 요별하네”란 말하자면 보는 자와 듣는 자이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는 거듭 서로를 상관(相觀)하므로 세제 중에는 성립하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후반 게송은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이유에 과실이 있음을 그대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釋】“어떤 사람의 머묾도 없다”는 것은 저 눈 등의 하나하나의 근(根)에 각각 사람의 머묾이 있음이다. 왜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48_b_17L釋曰:無一人住者,謂彼眼等一一根,先各有人住。何以故?偈曰:
눈 등의 근은 다른 차별성으로 인해 그들의 차별성을 요별하네.
016_0448_b_19L由彼眼等根, 異異了彼異。
【釋】“눈 등”이란 이른바 귀ㆍ코ㆍ입ㆍ몸ㆍ수(受)이다. 눈으로부터 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차별성이 있으므로 이것은 ‘보는 자’, 저것은 ‘접촉하는 자’라고 말 할 수 있다. 다른 취착을 관하기 때문에 취착을 하는 자가 성립한다. 그대가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와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눈 등의 모든 근(根)보다 먼저 어떤 머무는 자도 없다면 눈 등 하나하나 이전에 그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 있겠는가?
016_0448_c_01L若眼等諸根, 先無一住者, 眼等一一先,
彼別云何有。
【釋】모든 외도가 낱낱의 취착보다 먼저 취착을 하는 자가 있다고 주장하여 “눈ㆍ귀 등보다 먼저 개개 사람의 머묾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눈 등을 관하면 취착을 하는 자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은 이와 같다. 앞서 세운 증험으로 인하여 눈 등의 취착보다 앞서 개개의 취착을 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보는 자는 곧 듣는 자이며 듣는 자는 곧 감수(感受)하는 자라면 개개가 먼저 존재한다 해도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48_c_11L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一一若先有,
是義則不然。
【釋】그들이 이와 같이 말한다면 곧 외도의 주장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외도가 “저 신근(身根)의 처(處)에 적취(積聚)되는 법은 마치 풀과 흙으로 집을 짓는 것과 같아 각각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있어 그 중에 수용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식지(識知)할 수 없다. 이른바 보는 자 등이다”라고 말한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체(一體)이므로 주장을 세운 것에 오류가 있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저 보는 자의 체(體)는 듣는 자와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마치 별체(別體)와 같다. 듣는 자는 상속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듣는 자는 같지 못하다. 그대가 “실체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 이 주장은 오류이다. 다시 보는 자가 보려면 눈으로 관하지 못해도 색을 가히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듣는 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듣는 자와 같다. “듣는 자는 다르지 않다”는 증험에 의하므로 눈으로 관하지 못해도 저 색을 얻을 수 있다.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보는 자는 이법(理法)이다. 이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주장이 오류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아(我)가 만약 하나의 장부(丈夫)라면 그 밖의 근에 떨어지는 오류에 이를 것이다. 마치 창문을 뛰어넘는 것과 같다. 저 곳곳에서 눈 등이 원인이 되어 색 등에 대한 지각을 일으킨다. 아(我)가 이미 보편이지 못하면 개별적인 곳에서 존재해야 한다. 만약 눈 등의 모든 근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는 자와 듣는 자 등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아가 보편(普遍)이기 때문에 곧 그 밖의 근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오류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에는 커다란 과실이 있다. 하나하나의 근(根) 모두에 아(我)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도리(道理)에 비춰 볼 때 이와 같은 아(我)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다른 5음ㆍ12처ㆍ18계를 얻기 위해 하나의 장부가 있어 보는 자 등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논주(論住)의 가르침은 앞의 「관입품(觀入品)」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장차 이러한 해석은 다시 자세히 풀이하지 않겠다. 어떤 이는 앞에서의 과실을 피하려고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말하기를 ‘보는 자와 듣는 자에게는 각각 차별성이 있으나 이것은 하나의 아[一我]이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집착하는 것에는 또한 오류가 있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그대와 같이 분별하면 어떠한 오류를 얻는가? 이제 그대에게 보이겠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49_a_17L釋曰:如汝分別,得何等過?今當示汝。如偈曰:
보는 자와 듣는 자가 같지 않다면 이 아(我)는 곧 실체가 많은 것이네.
016_0449_a_19L見聞者不同, 是我則多體。
【釋】만약 세간의 사물이 저 사물과 다르다면 저것은 이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르기 때문이니, 마치 병과 발우 등과 같다. 보는 자와 듣는 자가 다름도 또한 이와 같다. 보는 자와 듣는 자가 다름으로 인하여 냄새를 맡는 것과 맛보는 것과 감촉을 느끼는 것도 각각 차별이 있다. 이런 뜻인 까닭에 한 상속 중에 무량한 아(我)가 존재한다.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와 듣는 자는 개별적 상속이 존재한다. 이 차별은 옳지 못하다.
여기서 증험을 말하겠다. 보는 자와 취착하는 자는 듣는 자와 다르지 않다. 저 취착하는 자는 원인과 결과가 화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는 자와의 자체와 같다. 또한 앞의 게송에서 “보는 자와 듣는 자는 다르다”고 한 것은 보는 자가 연(緣)이 되면 곧 듣는 자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으로 인하여 아는 실체가 많은 것이 된다. 또한 과거의 시(時) 등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서 증험을 말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취착하는 자는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연기(緣起)하기 때문이니, 마치 취착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 등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의 눈 등의 자체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취착하는 자와 취착은 모두 다 성립하지 않는다. 앞의 오류를 벗어나기 못하기 때문이다.
독자부 사람이 말하였다. “취착 및 취착하는 자가 같다거나 다르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오류가 없다.”
016_0449_b_13L婆私弗多羅言:取及取者,若一若異,俱不可說,是故無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가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 오류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 신근(身根)의 취(聚)에 만약 결과가 혹은 원인의 모든 취를 향수(享受)한다면 아(我)는 무량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이런 까닭으로 아는 하나가 아니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식(識)은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상속(相續)을 보는 것은 하나가 아닌 많은 아를 성립하는 것과 같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취착이 존재한다. 부처님께서 ‘명색(名色)은 6입(入)을 연(緣)으로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저 색(色)은 곧 4대(大)로서 취착하는 자에 의해 취착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실체로서의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 입을 구족함으로써 차례로 수(受) 등을 발생시키며, 눈 등이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취착하는 자는 시설되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 등과 같으니, 이는 곧 여래께서 말씀하신 도리이다. 그대는 그 이치와 어긋난다.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한 주장은 논파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눈ㆍ귀 및 수(受) 등이 발생되는 모든 대(大), 그 모든 대(大) 중에서 취착하는 자를 얻을 수 없네.
016_0449_c_02L眼耳及受等, 所從生諸大, 於彼諸大中,
取者不可得。
【釋】그 취착하는 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제일의제에 의거할 때 명색(名色)의 분위(分位) 중에 취착하는 자는 실체가 없다. 그러나 세제 중에 명색이 인(因)이 되어 취착하는 자를 시설한다. 이런 까닭으로 아함에서 설한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 저 눈 등 및 대(大)는 오직 취(聚)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취착하는 자를 이유로 세우지만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치대로 잘 관찰하면 그것은 실체가 없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눈보다 먼저 취착하는 자는 없으며 지금 이후에도 또한 없네 취착하는 자가 없으므로 그 분별이 존재하지 않네.
016_0449_c_10L眼先無取者, 今後亦復無; 以無取者故,
無有彼分別。
【釋】눈 등의 모든 취착이 취착하는 자라면 옳지 못하다. 그들은 다른 취착이기 때문이니, 별상속(別相續)과 같다. 4대(大)가 취착하는 자라면 이와 같이 앞에서 험지(驗知)하였으나 가히 얻을 수 없다. 실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4대와 같다. 제일의제에서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취착 및 취착을 짓는 자가 같다는 것이나 다르다는 주장은 모두 허물어진다.
동일성과 차별성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저 분별은 소멸한다. 어찌하여 소멸하는가? 실체오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있다는 분별’이 멸하고, 시설을 원인으로 하는 까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별’이 멸한다. 또한 그대는 존재를 설정하여 나를 이해시키려 하나 나는 제일의제에서는 실체가 없음을 증험하므로 ‘존재한다는 분별’이 멸한다. 존재가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비존재도 따라서 소멸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지각으로써 관찰할 때 사물의 실체는 얻을 수 없네. 무(無) 자체이므로 저 법을 말할 수 없네.
016_0449_c_22L以覺觀察時, 物體不可得; 以無自體故,
彼法不可說。
【釋】앞의 사람이 말한 것처럼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 성립하지 못한다. 취착을 이유로 드는 것은 오류임을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취착과 취착한ㄴ 자는 모두 무자성(無自性)이다. 그러므로 이품을 지은 것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이 논증은 성립한다.
마치 『반야바라밀다경』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색(色)에는 보는 자도 보게 하는 자도 없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는 보는 자도 없고 보게 하는 자도 없다. 만약 색에서부터 식까지 보는 자도 보게 하는 자도 없다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이다. 다시 색에는 아는 자도 보는 자도 없다. 수ㆍ상ㆍ행ㆍ식에는 아는 자도 보는 자도 없다. 만약 색에서부터 식까지 아는 자도 보는 자도 없으면 이를 곧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취자품(觀取者品)」의 해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