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456_c_01L
반야등론석 제8권
016_0456_c_01L般若燈論釋卷第八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016_0456_c_02L偈本龍樹菩薩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12. 관고품(觀苦品)
016_0456_c_04L觀苦品第十二

다시 고(苦)는 무자성(無自性)이며 대치(對治)되는 것은 공(空)이다, 굳어진 집착을 부정하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음(陰)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고(苦)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고는 없으리니, 두 번째 머리가 없는 것과 같다.
오음이 곧 고라는 것은 마치 경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6_c_05L復次苦無自性所對治空遮定執故有此品起外人言第一義中有是諸何以故由苦故此若無者則無彼如第二頭陰是苦者如經偈曰

고집(古集) 역시 세간의 견처(見處)이고
또한 그것은 존재하네.
016_0456_c_09L苦集亦世閒,
見處及彼有

이러한 뜻인 까닭에 제일의제 중에 모든 음(陰)이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고(苦)에 관한 허망분별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6_c_10L以是義故第一義中有是諸陰論者虛妄分別於苦不然如偈曰

어떤 사람은 고(苦)는
스스로에 의해 혹은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느니
자타(自他)로 인해 혹은 무인(無因)으로 만들어진다느니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옳지 않네.
016_0456_c_12L有人欲得苦,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彼果皆不然

【釋】제일의제에서 여러 가지로 무량하게 이치대로 관찰하면 그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고는 자기를 원인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6_c_14L釋曰第一義中種種無量如理觀察彼皆不然云何觀察苦非自作偈曰

고(苦)가 만약 스스로 만들어진다면
연(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네.
016_0456_c_17L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釋】스스로 만들어지므로 인연(因緣)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苦)가 연(緣)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이러한 주장이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6_c_18L釋曰由自作故則不藉因緣是故苦從緣起卽無此義而彼不然復欲得此義云何謂從緣起如偈曰

현재의 음(陰)을 원인으로 해서
미래의 음이 생기할 수 있네.
016_0456_c_21L由現陰爲因,
未來陰得起
016_0457_a_01L
【釋】제일의제에서는 모든 음의 상속(相續)을 조달(調達)이라 이름하며, 조달의 작용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기(緣起)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한 존재가 현재의 음을 원인으로 하여 나중의 음(陰)을 끌어당겨 생기(生起)하는 것과 같다. 주장은 바로 이와 같다.
016_0456_c_22L釋曰第一義中諸陰相續名調達者非調達作何以故藉緣起故譬如一有由現陰爲因牽後陰起義正如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신(身) 등의 모든 근(根)과 각(覺)과 취(聚)는 비록 다르지만 아(我)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一]가 편주(遍住)하여, 또한 이 ‘작업을 짓는자[作者]’는 고(苦)를 짓기 때문에 곧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만약 ‘모든 작용들은 찰나찰나 생멸하여 무상(無常)하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는 오류가 있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마음의 찰나와 함께 발생하는 고는 곧 이 괴로운 찰나의 마음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이 작업한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의도가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신의 주장과도 어긋난다.”
016_0457_a_03L復次鞞世師言身等諸根覺聚雖別而我無異彼一遍住亦是作者彼作此苦故是自作若言諸行剎那剎那生滅無常者此說有過得何等過心剎那俱生之苦不卽此苦剎那心故非自作亦非他作何以故他所作業自受果者此義不然汝意若欲令他作者則違自悉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그대가 ‘장부(丈夫)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상주로써 증험하였으니,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라면 법의 자체(自體)를 파괴하게 된다. 설정한 주장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016_0457_a_11L論者言此中立驗汝言丈夫卽是作者是義不然何以故以其常故譬如虛空以常驗知非作者丈夫作者法自體破義過故
다시 만약 그대가 결정코 ‘아(我)가 이 고(苦)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연(緣)으로 생기하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오류가 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아법(我法) 가운데 고를 이름하여 아(我)라고 말한다. 주장의 뜻은 이러하다.
016_0457_a_15L復次若汝定謂我作此苦不從緣起有如是過此義云何以我法中名苦爲我義意如是
다시 만약 ‘장부가 작업(作業)하는 것이 곧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다른 인연(因緣)을 의지하지 않는 게 아니며 함께 작용한 후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량한 원인과 함께 아(我)가 고(苦)를 짓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마치 저 마른 풀과 소똥 등이 불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처럼, 주장의 뜻도 바로 그러하다. 다시 조달의 고(苦)는 조달의 아(我)가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苦)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이니, 마치 야야달다(耶若達多)의 고와 같다.
016_0457_a_17L復次若言丈夫作業卽是自作非不藉餘因緣共作後得起者是義不然何以故無量因共我作苦應如是知如彼乾草及牛糞等爲火作緣義意正爾次調達之苦非調達我作何以故苦故如耶若苦
016_0457_b_01L그대가 앞에서 ‘만약 찰나에 모든 작용 등에 개별적인 작용이 없다면, 그 업과 만들어진 것은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지금 그대에게 답하겠다. 제일의제 중에서는 고를 말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과실이 없다. 세제에서는 비슷한 상속(相續)의 인과(因果)는 다르지 않다. 세간 사람들이 모두 보고 다음과 같이 ‘저곳의 등불이 이곳으로 온다. 이 암라(菴羅)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또한 그와 같다. 나중 순간의 상(相)에 저 앞의 사(思)가 상속하여 인과가 다르지 않으며, 앞의 상사(相思)가 이 찰나의 사(思)가 쌓은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은 업이 소멸할 경우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016_0457_a_23L汝前說言若剎那諸行等無別作者彼業所作卽是自作今當答汝第一義中苦不可說我無過彼世諦中相似相續因果不世閒咸見作如是說如言彼處燈此菴羅樹是我所種此亦如是時有相與彼前思相續因果不別有相思此剎那作名爲自作由前剎那思所積集善不善業彼業滅時與後爲因
마치 등불처럼 앞의 순간이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마침내 결과를 얻는 데 이른바. 그러므로 작용 없이[不作]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미 작용하여 실멸(失滅)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의 뜻이 ‘모든 작용의 찰나에 앞에서 쌓은 업을 나중에 결과로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상속처럼’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7_b_09L如彼燈焰前爲後因如是展轉相續乃至得果故非不作而得非作已失滅若汝意謂諸行剎那先所集業不受後果何以故以其異故如別相續者是義不然如偈曰

곳곳[處處]에서 연기하는 법(法)은
곧 연(緣)이 아니고,
또한 연과 다르지도 않으니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네.
016_0457_b_13L處處緣起法,
不卽是彼緣,
亦不異彼緣,
不常亦不斷

【釋】나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대가 “다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든다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마음의 찰나로부터 전래된 업(業)이 아직 대치(對治)되지 않고 상속하여 결과를 이루니 공능(功能)의 수승함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자광색(紫鑛色)의 즙을 마다롱가(摩多弄伽)나무 종자(種子)에 흡수시켜 그것을 심으면 훗날 꽃 중에 자광색이 있는 것처럼, 세제와 어긋나지 않는다.
016_0457_b_15L釋曰我悉檀如是汝立異故爲因者此義不成何以故由先心剎那所傳來業對治未生相續與果以功能勝異故譬如以紫鑛汁浸摩多弄伽子種之後時花中有紫鑛色不違世諦
다시 장부(丈夫)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말하였다.
“한편으로 업(業)을 짓고 한편으로는 결과를 받는다. 위와 같은 오류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한편’이란 말은 작용하지 않고 결과를 얻는 것이고, 뒤의 ‘한편’이란 말은 이미 작용이 실괴(失壞)한 것이다. 작용의 경계[邊]에서는 영원히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오류가 존재한다.”
016_0457_b_20L復次說有丈夫者言一邊作業一邊受果無如上過論者言彼一邊者不作而得此一邊者已作失壞以作業邊永不得果有此過失
016_0457_c_01L외도가 말하였다.
“아(我)는 하나이므로 과실이 없다. 어떻게 하나임을 알 수 있는가? 하나라는 수(數)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아가 하나라는 수와 상응한다는 이와 같은 뜻은 없다. 왜냐하면 유(有)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하나라는 수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7_c_01L外人言我是故無過云何知一與一數相應故論者言我與一數相應無如此義以故由有故譬如一數以是義故非自作亦不他作此義云何如偈曰

만약 앞의 음(陰)이 나중의 음과 다르고
나중의 순간의 음이 앞 순간의 음과 다르다면
이 음은 저 음으로부터 발생하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他作苦]’라고 말할 수 있네.
016_0457_c_05L若前陰異後,
後陰異前者,
此陰從彼生,
可言他作苦

【釋】만약 사람이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苦)를 얻는다면 법의 실체(實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정한 주장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조달의 나중의 음(陰)은 앞의 음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조달의 음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중의 자기 음의 실체와 같다. 또한 고체(苦體)의 상속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장 명제와 비유가 앞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6_0457_c_07L釋曰若人欲得他作苦者法體不成立義有過而實不然云何不然此中立驗第一義中調達後陰於先陰非何以故調達陰故譬如後自陰體又彼苦體相續不別故立義譬喩如前應知
다시 집착이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이 조성한 업(業)의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상태의 차별은 다 사람이 짓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진 고(苦)’라 말하거나,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라고 말하는 두 학파가 세운 그러한 오류는 나에게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단지 이러한 말만을 했지만,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7_c_13L復次執有人者說如是言所造業自受果者是義不然何以故諸位差別皆人作故名自作苦亦名他作二家所立者我無此過論者言汝但有此語是亦不然如偈曰

만약 사람 스스로 고(苦)를 짓는다면
고 떠나 별개의 사람이 없네
어떤 것이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람 스스로 짓는 고인가?
016_0457_c_17L若人自作苦,
離苦無別人,
何等是彼人,
言人自作苦
016_0458_a_01L
【釋】무엇이 고(苦)인가? 이른바 오음(五陰)의 상(相)이다. 저 고음(苦陰)을 떠나서 따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사람이 고(苦)를 짓는다는 것이다. 다시 그대가 집착하여 사람과 오음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단지 오음에 대하여 조달이라는 이름을 시설한 것일 뿐 사람은 가히 얻을 수 없다. 연기(緣起)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병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사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미 성립하지 않으므로 ‘고(苦)를 짓는 자’도 없다. 다시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고가 만들어진다면 그 주장도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7_c_19L釋曰何等是苦謂五陰相離彼苦陰無別有人云何而言人作於苦復次若汝執言人與五陰不一不異者義不然何以故但於五陰施調達名無人可得以緣起故譬如甁等如是第一義中彼人不成人旣不成無作苦者復次他人作苦是義不然偈曰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지어
이 사람에게 준다면
고를 떠나 어떻게 다른 것이 존재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고가 만들어진다고 말하는가?
016_0458_a_04L若他人作苦,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他,
而言他作苦

【釋】고를 떠나 사람은 없다.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별체(別體)가 존재함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증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앞서 이미 증험을 하여 여러 가지 이해 못하는 부분들을 밝혀 주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a_06L釋曰離苦無人前已遮故人有別體令證知者以無驗故如是自作苦不可得先已立驗曉諸未解是故偈曰

스스로 짓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만든다면
저것은 도리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自作]이네.
016_0458_a_09L自作若不成,
何處有他作
若他人作苦,
彼還是自作

【釋】스스로 고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고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옳지 못하다. 마치 별개의 상속과 같다. 결정된 업을 받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면[他作] 이와 같은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설한 말뜻은 이와 같다. 그대가 ‘상태[位]에는 차별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허망 된 말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만약 스스로 고가 만들어진다거나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다 옳지 못하다.
016_0458_a_11L釋曰無自作苦而指示言他作苦者此語不然如別相續決定報業言他作者無如此義是故偈言何處有他語意如是汝言位有差別人無異此爲妄語以是義故若自作苦他作者此皆不然
다시 다른 니건자(尼犍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스스로 고를 짓기 때문에 고는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苦)는 곧 사람이 아니므로, 이를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만들어지고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두 주장이 모두 성립한다.”
용수(龍樹)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a_17L復次異尼犍子作如是言人自作苦故苦是自作而苦不卽人名爲他作是故自作他作二門得成論者偈曰

스스로 고(苦)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58_a_20L自作苦不然

【釋】사람은 고를 만들지 못한다. 이 뜻은 이와 같다. 괴로움은 자체가 없고 사람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고의 실체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8_a_21L釋曰無人作苦此義如是由苦無自人無體故若謂苦體是人者義亦不然何以故偈曰
016_0458_b_01L
고(苦)는 다시 고를 만들지 못하네.
016_0458_b_01L苦不還作苦

【釋】앞의 게송에서 “고가 만약 스스로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연(緣)으로부터 일어나지 못하네”라고 설한 것처럼, 이 두 구절은 저기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말의 뜻은 이와 같다. 또한 만약 고(苦)가 다시 고를 만든다면 곧 결과가 다시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된다. 또한 고가 스스로 생기한다면 인연(因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세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그대는 앞에서 “고가 곧 사람은 아니며, 이 사람이 고를 만드는 것을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b_02L釋曰如先偈言苦若自作者則不從緣起此之二句如彼已遮語意如是復次若苦還作苦者卽是果還作果又苦自起不待因緣此之二種世所不見汝前說言苦不卽人此人作苦名他作者此說不善如偈曰

다른 것이 고를 만든다면.
016_0458_b_08L若他作苦者

【釋】외도의 의도는 사람으로서 다른 것[他]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체가 없어 고를 만들 수 없다. 어째서 만들지 못하는가? 공(空)하기 때문이다. 공이란 곧 사물이 없는 것[無物]이니, 어찌 생기(生起)함이 일어나겠는가? 생기 없이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b_09L釋曰外人意欲以人爲他此人無體不能作苦何故不作以其空故空則無物云何起作無起有體者智人所不欲是故偈曰

다른 것이 없는데 무엇이 고를 만드는가?
016_0458_b_13L無他誰作苦

【釋】이 다른 것이라는 뜻도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들어진다느니,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느니 하는 주장 모두 옳지 못하다. 자타(自他) 모두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자기 원인과 다른 것 두 가지로 고를 만들므로 오류가 없다”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하여 용수보살께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b_14L釋曰無此他義語意如是以是義故自作他作此皆不然俱作者言二作故無過爲遮此故阿闍梨偈曰

만약 하나하나의 작용이 성립한다면,
자타 두 가지의 작용이 고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네.
016_0458_b_17L若一一作成,
可言二作苦

【釋】하나하나 작용이 성립하지 못함은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타 두 가지가 고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며,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인이라는 집착은 무기품(無起品)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이것에 대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b_18L釋曰一一不作如先已遮苦非自作亦非他作是故汝言二作苦者此義不然亦不無因何以故此無因執「無起品」已遮此中偈曰

자타(自他) 두 가지가 (고(苦)를) 만들지 못하는데
무인(無因)에 어떻게 고가 존재하겠는가?
016_0458_b_22L自他二不作,
無因何有苦
016_0458_c_01L
【釋】이 품은 앞에서부터 고를 부정하였다. 만약 무인(無因)이라면 또한 고는 없다. 무인에 고가 존재한다는 이러한 뜻은 없다. 제일의제 중에 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저 고에 실체가 없음을 여러 차례 관찰하였고, 외도가 이 품의 첫머리에서 ‘모든 음(陰)은 존재한다. 고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들어 말하였으나, 제일의제 중에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8_b_23L釋曰此品前來所說遮苦若無因者則亦無苦無因有苦無如是義由第一義中苦不可得語意如此如是種種觀察彼苦無體外人品初言有諸陰以苦故爲因者第一義中此執不如偈曰

홀로 고(苦)를 관하여도
네 가지 주장이 성립 못할 뿐만 아니라
외계[外]에 존재하는 모든 법에도
네 가지 종류가 또한 다 없네.
016_0458_c_06L不獨觀於苦,
四種義不成,
外所有諸法,
四種亦皆無

【釋】앞에서 말한 이치대로 저 외계[外]의 색(色) 등을 관찰하여도 이 뜻은 없다. 어째서 색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원인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연(緣)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니, 마치 싹의 자체(自體)를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모든 대(大)를 색(色)에 대해 다른 것[他]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계[他]이기 때문이니, 마치 색의 자체와 같다.
016_0458_c_08L釋曰如前所說道理彼外色等觀察亦無此義云何色不自作何以故有若無因不然故如前已說又從緣起故如芽自體不名自作若言從諸大作名他作者是義不然云何不然諸大於色不名爲他何以故以其外如色自體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색은 자체가 없다. 다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자타가) 함께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인에 관한 집착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리 등도 마땅히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품의 첫머리에서 ‘고(苦)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말한 것에 과실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지금 이 품에는 ‘고는 곧 공(空)하다’는 주장을 나타내 보이려 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립 할 수 있다.
016_0458_c_15L又遮實有故色無自體他義不成亦非共作以一一不成故亦不無因何以故此無因執前已遮如是聲等亦應類破是故品初說因由苦故者有過失故此義不成此品中爲欲顯示苦是空義是故得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만약 색ㆍ 수ㆍ상ㆍ행ㆍ식이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016_0458_c_21L如『般若波羅蜜經』中說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色非苦非樂如是受想行識非苦非樂若色受想行識非苦非樂是名般若波羅蜜
016_0459_a_01L 또한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에서 “무엇을 성제(聖諦)라 하는가? 고(苦), 혹은 집(集), 혹은 멸(滅), 혹은 도(道)를 성제라 이름하지 않는다. 고(苦) 등이 생기하지 않음을 성제라고 이름하니,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6_0459_a_01L又如『梵王問經』中說云何名聖諦若苦若集若滅若道不名聖諦彼苦等不起乃名聖諦如是等
다시 부처님께서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하셨으니,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고(苦)는 자기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자타(自他) 모두로부터 만들어 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무인(無因)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고품(觀苦品)」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59_a_04L復次聲聞乘中婆伽婆有比丘問佛言瞿曇苦自作耶他作耶佛言俱作耶佛言無因作耶佛言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苦品」竟


13. 관행품(觀行品)
016_0459_a_09L般若燈論釋觀行品第十三

다시 모든 행(行)의 여러 차별이 다 무자성(無自性)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이 품을 짓는다. 여기서 외도가 경(經)을 인용하여 주장을 세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a_10L復次爲令他解一切諸行種種差別皆無自性有此品起此中外人引經立義如偈曰

부처님께서는
그 허망한 겁탈법(劫奪法)을 말씀하셨네.
016_0459_a_13L婆伽婆說彼,
虛妄劫奪法

【釋】어떻게 모든 행(行) 등의 법이 허망함을 알 수 있는가? 모든 행 등은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범부를 속이기 위하여 삿된 지혜로써 분별하여 가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허망하다. 또한 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경계에 대한 생각 등은 망실(妄失)의 원인이 되므로 이것은 곧 허망한 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여러 경(經)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것이다.
016_0459_a_14L釋曰云何知彼諸行等法是虛妄耶彼諸行等自體無故誑凡夫故邪智分別謂爲可得故是虛妄又能爲彼第一義諦境界念等妄失因故是虛妄法婆伽婆說者謂於諸經中告諸比丘作如是說
016_0459_b_01L‘저 허망한 겁탈법’이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최상의 진실’이란 이른바 열반진실법[涅槃眞法]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모든 행(行)은 곧 겁탈법이며, 멸괴(滅壞)의 법이다. 성문법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셨고, 대승경전 중에서도 이 말씀을 하셨다. 모든 유위법은 다 허망하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다 허망하지 않다는 이 두 가지 성스런 가르침[阿含]은 모든 행(行)이 곧 허망법(虛妄法)임을 밝힌 것이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016_0459_a_20L彼虛妄劫奪法者一切有爲法最上實者謂涅槃眞法如是諸行是劫奪法是滅壞法聲聞法中作如是說大乘經中亦作是說諸有爲法皆是虛妄諸無爲法皆非虛妄此二阿含皆明諸行是虛妄法此義得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 중에 내(內)의 모든 법은 공하다. 왜냐하면 겁탈법(劫奪法)이기 때문이니, 마치 환화(幻化)의 사람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주장과 이유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공(空)하다고 말한 것도 존재하지 않고, 겁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다.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b_03L論者言此中立驗第一義中內諸法空何以故劫奪法故如幻化人外人言立義出因無差別故言第一義中諸法空者是無所有奪法者亦無所有出因闕故立義不有過失故論者偈曰

만일 허망하여 탈법(奪法)이 없다면
무엇을 겁탈(劫奪)이라고 말하는가?
016_0459_b_08L若妄奪法無,
有何名劫奪

【釋】그대는 주장과 이유가 모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마침내 어떤 사물이 가히 겁탈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망과 겁탈이라는 두 말은 없다[無]는 뜻이 아니다. 무슨 뜻으로 경계를 분별하는가? 저 자체(自體)가 공하다는 것이 곧 허망의 뜻이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빛의 그림자와 같다.
016_0459_b_09L釋曰汝謂立義出因皆無所有若爾此旣是無竟有何物可名劫奪以無體故譬如兔角是故虛妄劫奪此之二語非是無義復有何義分別境界彼自體空是虛妄義不如實有喩若光影
이것이 겁탈의 뜻이다. 이유와 주장 두 가지가 같지 않으므로 나의 주장에 이유가 빠졌다는 과실은 없다. 두 가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의도하는 주장은 성립한다. 다시 겁탈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고 마침내 지혜장(智慧障)의 뿌리를 남김없이 영원히 없애 이러한 말을 하신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b_15L是劫奪義因與立義此二不同是故我無立義闕因過失無二過故所欲義成復次劫奪語者佛婆伽婆拔煩惱障及智障根永盡無餘故作此說如偈曰

부처님께서 이를 설하신 것은
공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네.
016_0459_b_19L婆伽婆說此,
爲顯示空義

【釋】겁탈이란 말은 공(空)과 별개의 실체[體]가 없다는 것이다. 저곳에 연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저곳에 불이 있다는 말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허망이란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여래께서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허망이라 말씀하셨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9_b_20L釋曰劫奪語者與空無別體如言彼處有煙此說彼處有火外人言虛妄語者非是無義此有何義謂如來不說諸法無我若爾云何說虛妄語如偈曰
016_0459_c_01L
법(法)이 변이(變異)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에는 자체(自體)가 없네.
016_0459_c_01L見法變異故,
諸法無自體

【釋】이 게송은 무슨 뜻을 주장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변이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은 무체(無體)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인가? 상주(常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허망이라는 말을 하신 도리는 이와 같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c_02L釋曰此偈說何義謂見諸法變異知諸法無體云何無體以非常住故婆伽婆說虛妄語者道理如是又如偈曰

유체(有體)는 무체(無體)가 아니네.
016_0459_c_06L有體非無體

【釋】어찌하여 유(有)라고 이름하는가?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도리에 의하면 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c_07L釋曰云何名有自體有故如汝道理諸法則無體而此不然偈曰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016_0459_c_09L由諸法空故

【釋】모든 법에는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9_c_10L釋曰諸法無我我所故汝義如是故應信諸法有體若不如此者偈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법이 변이하는가?
016_0459_c_12L自體若非有,
何法爲變異

【釋】이 실체는 변이하고 있다는 것을 현견(現見) 할 수 있기 때문에, 변이의 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실체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체가 변이(變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실체가 없다면 곧 변이도 없으리니,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 실체가 있어 변이하기 때문에 내입(內入) 등이라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법에는 자체가 존재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c_13L釋曰現見此體有變異故是故定知有變異法此中立驗第一義中諸法有體何以故體變異故此若無體無變異如石女兒由有體變異謂內入等是故第一義中法有自體論者偈曰

만약 법에 자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變異)가 존재하는가?
016_0459_c_19L若法有自體,
云何有變異

【釋】법에 자체가 존재하여 변이한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는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실체가 변이함을 현견(現見)한다. 그러므로 저 변이하는 실체와 무자체(無自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자신의 주장과 서로 상반된다.
016_0459_c_20L釋曰法有自體而變異者是義不然何以故以自體者不可壞故而今現見彼體變異是故當知彼變異體與無自體不得相離汝所立因則自相
016_0460_a_01L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허망법’이라는 뜻은 이른바 여실(女實)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무자체임을 현견한다’는 것은 무아(無我)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란 곧 아(我)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법의 변이를 본다’는 것은 모든 법의 전변멸괴(轉變滅壞)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이라는 말은 무아라는 말과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허망’이란 말은 곧 무아를 말하는 것이며, 공(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016_0460_a_02L有人言虛妄法義者謂不如實見法無自體者此謂說無我義何以故言自體者卽是我名見法變異者謂諸法轉變滅壞是故虛妄語者其無我不得相離此虛妄語卽說無非謂說空
이러한 까닭으로 성도(聖道)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아견(我見)의 산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내외(內外)의 모든 법에 아(我)와 아소(我所)의 빛의 그림자가 현현(顯現)한다. 성도가 일어날 때 모든 법에 아 및 아소를 다시 분별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법이 무자체라고 말한다면 외도가 아에 대해 집착한 것처럼,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장이 성립한다면 곧 내가 이루려는 바를 이룬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무아(無我)는 성립하지만, 공(空) 및 무자체(無自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60_a_07L是故聖道未起我見山未崩內外諸法我及我所光影顯現聖道起時於此諸法不復分別我及我所若言諸法無自體者如外道所執我此我無體成立此義者則成我所成如是因者成立無我不成立空及無自體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들이 법에 실체가 없다고 분별하는 것은 말하자면 마치 토끼의 뿔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두려움이 발생한다. 비유하면 어린이가 밤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정신을 잃고 공포에 또는 것과 같다. 그대 또한 이와 같다. 마치 그대가 말한 것처럼 외도가 아(我)에 집착하여 이 무아(無我)를 설정한 것은 내가 의도하는 것은 성립시킨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지금 진리를 잘 들으시오. 만약 이 허망이라는 말로써 무아(無我) 및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가 또한 무자체(無自體)임이 성립시켜 이렇게 이해하면, 이와 같이 내가 지금 법공(法空)으로써 이유를 들어 그대에게 개시(開示)하는 것 또한 사람이 무아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016_0460_a_13L論者言汝等分別法無體謂如兔角無體如是故生怖畏如小兒夜見自影謂是非人失聲驚汝亦如是如汝所言外道執我此無我則成我所成者汝今諦聽以虛妄之言爲成立無我及外道執我亦無自體作此解者如是如是今成立法空爲因開示汝者此亦成立人無我義
016_0460_b_01L왜냐하면 이 사람이 무아[人無我]라는 것은 저 법공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因]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해(信解)하게 한다. 주장 명제가 ‘소리는 무상하다’와 같은 것은 어떻게 이유를 댈 수 있는가? 그것은 작용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용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 또한 성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허망한 법이 성립한다면 그 자체가 없어 바로 ‘사람이 곧 무아라는 주장’을 성립시킨다. 서로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한 것처럼 ‘허망이라는 뜻은 모든 법의 자체가 머물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한 주장에 이제 답하겠다. 만약 법에 가히 집착할 수 있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0_a_21L何以故此人無我與彼法空不相離故如是此因令人信解如立義者聲是無常云何出因謂彼作故言作故者苦空無我亦得成立如是成立虛妄法者無其自體卽亦成立人無我義以不相離故如外人虛妄義者此明諸法自體不住答此義若法可取者偈曰

저 실체에는 변이(變異)가 없으며
나머지 또한 변이가 없네.
마치 젊음에 늙음이 작용하지 못하고
늙음 또한 젊음에 작용하지 못함과 같네.
016_0460_b_05L彼體不變異,
餘亦不變異,
如少不作老,
老亦不作少

【釋】이 두 비유는 숫자의 순서처럼 상사(相似)하고 상대(相對)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법(法)이 자체(自體)에 머물면서 변이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젊음과 늙음과 같다. 만약 전찰나(前刹那)와 다른 모습[異相]에 늙음이 머무는 것을 이름하여 변이(變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습은 이미 가버렸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늙음과 젊음과 같다.
016_0460_b_07L釋曰此二譬喩如數次第相似相對此中立驗法住自體變異者不然以故不捨自體故譬如少老若言彼前剎那異相老住名變異者此亦不何以故異相已去故譬如老
외도가 “마치 우유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전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이유[因]는 부정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지금 그대에게 묻겠다. 무엇이 낙(酪)인가? 저들은 우유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유가 곧 낙으로서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분별하여 낙이라 이름하는가? 결정되어 있다고 분별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0_b_12L若外人言如乳不捨自體而轉成酪以是義故因非一向者是義不然今當問何者是酪彼言乳是若乳是酪捨自體云何分別此名爲酪若定分偈曰

만약 이 실체가 곧 다르다면
우유는 마땅히 낙(酪)이어야 하네.
016_0460_b_17L若此體卽異,
乳應卽是酪

【釋】우유는 색깔과 맛과 역용(力用)과 이익 등을 버리지 않으므로 우유는 낙이 되지 못한다. ‘다른 것[異]’도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0_b_18L釋曰由乳不捨色味力用利益等故乳不爲酪異亦不然何以故如偈曰

우유와 다른 어떤 사물이 존재하여
능히 저 낙을 발생시키는가?
016_0460_b_20L異乳有何物,
能生於彼酪
016_0460_c_01L
【釋】낙이 생기할 수 없으므로 그 밖의 실체에도 또한 변이가 없다. 그대가 부정인이라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떤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나도 또한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낙의 상(相)은 우유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화합의 자재력(自在力) 때문에 우유는 낙을 발생시킨다.”
016_0460_b_21L釋曰無酪可起故餘體亦無變異言因非一向者是義不然有異人言我亦不說乳不生酪酪相異乳然以和合自在力故乳生於酪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화합의 자재력이란 이 우유가 자체(自體)를 버리고 능히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자체를 버린다면 우유가 낙을 발생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주장과) 서로 어긋난다. 무엇이 어찌하여 어긋나는가?
016_0460_c_02L論者言言和合自在力者此乳爲捨自體能生於酪爲不捨自體而生酪耶若爾有何過若捨自體則不得言乳生於若不捨自體此則相違云何相違
만약 이것이 우유라면 어떻게 낙이라 이름 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낙이라면 어떻게 우유라 말하는가? 세간에서 모두 이와 같이 이해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단지 변하여 낙이 된다’고 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은 또한 앞에서와 같이 부정된다. 그와 같이 관찰하면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그대가 ‘모든 법(法)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써 이유를 든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60_c_06L若是乳者云何名酪若是酪者云何是乳於彼世閒悉如是解若有人言乳不生酪但變爲酪如此義者亦同前遮如是觀察第一義中諸法異者此皆不成汝言諸法有體以此爲因此因不成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공(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과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마치 전도(顚倒)된 지혜와 전도되지 않은 지혜와 같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상위한 법이 없으리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불공(不空)과 다르기 때문에 공법(空法)이 존재한다. 이러한 뜻으로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이유를 댄 것과 같다.”
016_0460_c_12L外人言第一義中諸法不空何以故此相違法有故如顚倒智及不顚倒智此若無者則無違法如虛空花由違不空故有空法以是義故如所說因諸法不空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음(陰) 등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사물을 제거하여 공법(公法)에다 세우는 것이므로, 제일의제 중에 어떤 법도 공(空) 아님이 없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0_c_16L論者言第一義中有陰等者除此有物立於空法而第一義中實無一法是不空如偈曰

만약 어떤 법도 공하지 않다면
이것을 관찰하므로 공이 존재하네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016_0460_c_19L若一法不空,
觀此故有空,
無一法不空,
何處空可得
016_0461_a_01L
【釋】공(空)과 불공(不空)이란 세제의 법체(法體)에 의지한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마치 집에 사람이 머물면 집이 비지 않았다고 말하고, 사람이 머물지 않으면 집이 비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 제일의제 중에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은데 어디서 공법(空法)을 얻겠는가? 그대가 앞에서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분별하여 이유를 댄 것은,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단지 집착을 부정하기 위해 공하다고 가설한 것일 뿐이다.
016_0460_c_21L釋曰空不空者於世諦中依止法體如是分別此義云何如有舍宅有人住故名舍不空人不住故則名舍空今第一義中無一法不空何處得有空法可得如汝向言有相違法分別爲因者此因不成但爲遮執著故假言空耳
다시 십칠지론자(十七地論者)가 말하였다.
“분별된 것처럼,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분별의 실체도 공하다. 이 모든 법이 공함은 진실로 존재한다. 어찌하여 진실인가? ‘작업을 짓는 자[作者]’를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이러한 견해를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라고 말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공에 집착한다고 말하는가?”
016_0461_a_05L復次十七地論者言如所分別自體無故分別體空此諸法空實是有云何眞實不觀作者故論者汝此見者名著空見外人言何故名我以爲著空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일체의 법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공하며, 공도 실법(實法)이 아니다. 그러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앞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법도 공(空)하지 않다’면, 곧 분별지(分別智)의 경계인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계인가? 만약 어떤 사물이 곧 공하다면 이것을 공지(空智)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공(空)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것은 이른바 모든 법은 다 공하다고 이름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 이르길 ‘어디에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016_0461_a_09L論者言由一切法無體故空空非實法不應執著爲遮此如前偈中若有一法是不空者是有分別智境界此是無分別智境若有一物是空此名空智境界無此物以無一物是不空者此謂一切法皆空是故偈言何處空可得
다시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불공(不空)의 견해란 허공의[空火]이 타는 것이다. 공이라 분별하는 것 또한 타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게송에서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둘[二]을 행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분별을 짓는다. ‘마치 환(幻)으로 화작(化作)된 말 따위처럼 실체(體)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 실제의 말 등과 같은 것은 실체가 존재하여 공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의 차별일 뿐이다.
016_0461_a_15L次無一法不空者此言何謂不空見空火所燒分別空者此亦燒故故偈言何處空可得復次行二行者作此分別如幻馬等無體故空如實馬等有體不空此覺差別
무이(無二)의 행을 하는 자가 무분별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제일의제의 경계가 진실하여 일체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과 같아, 하나의 모습[一相]이나 모습이 없는 것[無相]으로 보아도 보이는 것[所見]이 없다. 게송에 이르길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디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인 까닭에 그대의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61_a_20L無二行者以無分別行般若波羅蜜時第一義諦境界眞實觀一切法猶如虛空相無相見無所見偈言無一法不空何處空可得以是義故彼因不成
016_0461_b_01L 외도가 말하였다.
“제멋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하고 서로 어긋난다고 하면서, 그대는 모든 순간에 항상 공의 관점에서 부정한다. 내 뜻도 그러하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이 이루어진다.”
016_0461_b_01L外人縱令不成及與相違汝一切時恒遮於空我意亦爾以是義故所欲得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공지(空智)가 생기하므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 법체(法體) 스스로 공하여 지혜로 공을 요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등불을 비춰 병(甁)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병에는 실체가 없어 가히 존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말은 잘못 사량(思量) 한 것이다.”
016_0461_b_04L論者言非空智起諸法乃空體自空智了空故如燈照知無甁非何以故彼甁無體不可令有故故汝說不善思量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공하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류를 짓게 한다. 그러나 공에 의지하여 공에 작용이 없음을 보고, 또한 공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들이 하려는 주장은 무너지며, 또한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 어찌하여 자신과 어긋난다는 것인가?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1_b_07L復有人言汝說空與他作過而依止空見空無力言無空是故汝等所欲義破亦違自悉檀云何自違如『梵天王問經』偈曰

공(空)을 이해한 자라면
모두 법성(法性)을 보네.
016_0461_b_10L若有解空者,
皆是見法性

또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1_b_11L又如『楞伽經』偈曰

화합(和合)을 떠난다면
이와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네.
그러므로 공(空)은 생기(生起)하지 않으니,
나는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하네.
016_0461_b_12L若離於和合,
無有如是體,
是故空無起,
我說無自性

이처럼 그대는 아함(阿含)에 위배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중에서 ‘나의 법문(法門)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이해한다면 옳은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법이 아닌 것임에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016_0461_b_14L如是違汝阿含論者言汝不聞耶『金剛般若波羅蜜經』中說解我法門如筏喩者是法尚應捨何況於非法
또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密經)』 중에 ‘색이 공함을 관(觀)하지 않고 색이 공하지 않음도 관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간다. 이것은 공견(空見)도 또한 집착이므로 반드시 부정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또한 작용이 공하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이 역시 버려야 한다. 이 두 집착은 큰 과오이기 때문이다. 공을 버리지 않는다면 오류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견해들의 오류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부처님께서는 아직 고(苦)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고의 종자(種子)를 끊고자 하므로 제일(第一)의 자비를 일으키신다. 마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1_b_17L又如『摩訶般若波羅蜜經』中說不觀色空不觀色不空此謂空見亦是執故須遮止若復有作不空分別者此亦應捨以此二執大過失故非捨空者有過如是種種諸見過患壞亂於心如來爲彼未離苦衆生斷苦種子故起第一大悲如偈曰
016_0461_c_01L
여래께서 공법(空法)을 말씀하심은
모든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네.
016_0461_c_01L如來說空法,
爲出離諸見

【釋】견해[見]란 이른바 신견(身見) 등을 말한다. 공(空)이란 이른바 내입(內入) 등과 대치(對治)되는 공(空) 등을 말한다. 만약 중생의 선근(善根)이 아직 미숙하여 무생(無生)의 깊은 법인(法忍)을 얻지 못하면 정도(正道)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1_c_02L釋曰見謂身見等空謂對治內入空若有衆生善根未熟未得無生深法忍者不解正道如偈曰

모든 존재를 공이라고 보는 자.
016_0461_c_05L諸有見空者

【釋】무엇을 ‘공이라고 보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과실(過失)이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1_c_06L釋曰云何名見空者謂執著於空有此空此執著空有何過失如偈曰

그것은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네.
016_0461_c_08L說彼不可治

【釋】부처님께서는 저 공견(空見)을 가진 중생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약을 복용하면 모든 병에 작용하지만 또한 차도가 없으면 오히려 중병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법(空法)을 설한 것은 모든 악견(惡見)을 버리기 위함인데, 만약 도리어 공에 집착하면 이를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공(空)을 버리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016_0461_c_09L釋曰如來說彼空見衆生不可療治此義云何如服下藥動作諸病而復不泄反成重病如是說空法爲捨諸惡見若還執空者說彼不可治以是義故捨空無過
또한 어떤 사람이 수레가 진흙 속에 빠져 차를 꺼내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줄 테니, 나를 위하여 수레를 꺼내 주시오”라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수레를 꺼낸 후에 그 수레 주인에게 무소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가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지혜로운 사람의 가벼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016_0461_c_14L又如有人車沒泥中爲出車故語異人言與無所有爲我出車而彼異人爲出車已從其車主索無所有由彼不解此語意故爲諸智人之所輕笑
그러므로 그대들은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그대에게 오류가 있다. 그대가 말한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하므로 나의 자인(自因)은 앞에서와 같은 과실(過失)이 없다. 또한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작용이 존재하는가? 모든 행(行)은 공하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신해(信解)시키려는 것이다. 이 품의 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016_0461_c_18L是故汝等不應執空以之爲有以是義故彼因不成過不離汝由汝所說因義不成我立自因無前過失及有力故云何有力說諸行空令人信解品義如此是故得成
016_0462_a_01L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저 모든 법은 전도(顚倒)로부터 일어나 실체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며, 허망하여 여실(如實)하지 않다. 극용맹보살이여,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법[一法]이라도 행한다면 이는 전도된 행이며, 여실한 행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한 『범천왕소문경』에서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진리에 집착한다. 이 법은 실체[實]가 아니며 또한 허망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말해지고 있다.
「관행품(觀行品)」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61_c_22L如『般若波羅蜜經』中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彼一切法從顚倒起無所有虛妄不如實極勇猛若有人行一法者此顚倒行不如實行如『梵王所問經』說世閒愚人執著諸此法非實亦非虛妄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行品」竟


14. 관합품(觀合品)
016_0462_a_07L般若燈論釋觀合品第十四

다시 지금 공(空)과 대치되는 모든 존재의 화합법[合法]이 다 무자성(無自性)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016_0462_a_08L復次爲令信解空所對治諸有合法皆無自性有此品起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일체 법의 자성(自性)이 모두 공(空)하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바른 도리에 어긋난다. 무엇이 도리인가? 부처님께서 ‘근(根)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和合)한 것을 촉(觸)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는 앞에서 말한 것과 서로 상반된다. 마치 내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다.
016_0462_a_10L外人言汝說一切法自性皆空如是說者違正道理何等道理如佛所說有根塵識三種和合名之爲觸以是義故汝先所說則爲相違如我所立第一義中諸法有體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원인을 삼아 이를 화합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원인을 화합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비유하면 거북이의 털을 원인으로 하여 의복이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삼결(三結)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화합이라 한다. 내가 제시한 이유는 바른 도리에 부합하므로 모든 법의 자체(自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런 말을 하지만 주장이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2_a_15L何以故以此爲因說名爲合故此若無者如來不說此因名合譬如不因龜毛說爲衣服由佛說有貪瞋癡等如是三結名之爲合由我說因符正道理是故諸法非無自體論者汝雖有此說義則不然如偈曰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것이네
둘 둘씩 서로 마주보아도
모두 다 화합하지 않네.
016_0462_a_20L見可見見者,
此三各異方,
二二互相望,
一切皆不合
016_0462_b_01L
【釋】봄과 보는 대상과 보는 자를 둘 둘씩 마주보아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모두가 화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a_22L釋曰見與可見及彼見者二二相望更互不合又一切不合由如是故偈曰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에서도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은 모두 화합하지 않네.
016_0462_b_02L應知染染者,
及彼所染法,
餘煩惱餘入,
三種皆無合

【釋】‘탐욕’은 이른바 욕심의 모습[相]이다. ‘번뇌’란 이른바 중생의 상속(相續)을 탐욕으로 물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染] 등을 번뇌라고 말한다. ‘그 밖의’란 이른바 성냄 등을 말한다. 이것도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성냄ㆍ성내는 자ㆍ성내는 대상 등을 말한다. ‘그 밖의 입(入)’이란, 눈[眼]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고, 여기서 ‘그 밖’이라는 말은 이른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을 말한다.
016_0462_b_04L釋曰染謂欲相煩惱者謂能染污生相續故說染等爲煩惱餘謂瞋等此亦三種謂瞋瞋者及所瞋等餘入眼前已說此中餘者謂耳鼻舌身
무엇 때문에 입(入)이라 이름 하는가? 이른바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이 생기하는 장소[處門]이므로 입(入)이라 이름한다. 이 역시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내지 앎ㆍ아는 대상ㆍ아는 자이다. 탐욕 등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으로써 둘 둘씩 마주보아도 다시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전부가 화합하지도 못한다. 마치 보는 대상에 화합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여 의심이 없게 하려고,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b_09L云何名入謂心心數法所起處門故名爲入此亦三種謂聞可聞聞者乃至知可知知者彼染煩惱等及以餘入二二相望更互不合又一切不如可見等無合應知今爲令他解無疑故偈曰

다른 것[異]이 다른 것과 화합하면
다름이 있을 수 없네
모든 보는 대상 등의
다름의 상(相)은 다 화합하지 못하네.
016_0462_b_14L異共異有合,
此異不可得,
及諸可見等,
異相皆不合

【釋】보는 대상 등은 이른바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이다. 이와 같이 탐욕ㆍ탐욕에 물든 자ㆍ탐욕의 대상은 모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는 보는 대상 및 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에 차이가 없다면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비유하면 자체(自體)와 같다.”
016_0462_b_16L釋曰可見等者謂見可見見者如是染者可染皆不相合此中說驗一義中見者不與可見及見相合以故彼不異故若物不異者終不相譬如自體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다른 것[異]과 다른 것이 화합한다고 말할 경우 여기서 탐욕 등의 상속(相續)이 만약 다른 곳에 존재해도 곧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다른 장소 및 다른 상속의 끊임없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화합(和合)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유가 성립한다.”
016_0462_b_21L有人言異共異合者中染等相續若在別處則不相合彼別處及別相續無閒隨轉故名爲和合此因得成
016_0462_c_01L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보는 대상 등이 먼저 다른 장소에 존재하다가 후에 한 장소에 있는 것을 이름하여 화합[合]이라 한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고 또한 증험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그것은 이와 같기 때문에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c_01L論者言若可見等在別處後在一處名爲合者此因不亦無驗故汝語不善彼如是故偈曰

오직 보는 대상 등 뿐만 아니라
다른 상(相)도 얻을 수 없네
또한 나머지 일체법이
다름[異]도 얻을 수 없네.
016_0462_c_03L非獨可見等,
異相不可得,
及餘一切法,
異亦不可得

【釋】앞에서 말한 도리처럼 저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및 성냄ㆍ성내는 대상ㆍ성내는 자 등에는 모두 화합의 뜻이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아(我) 및 보는 눈 등에 차이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c_05L釋曰如前所說道理彼聞可聞聞者可瞋瞋者等皆無合義外人言言我及可見眼等無異者此義不成因不成故論者言非因不成何以故如偈曰

다름[異]은 다른 것을 연(緣)으로 하네.
016_0462_c_10L異與異爲緣

【釋】다른 것에 의존하므로 ‘다름’이라 이름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c_11L釋曰待異故名爲異偈曰

다른 것을 떠나 다름은 존재하지 않네.
016_0462_c_12L離異無有異

【釋】종자[種]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한 것은, 이 종자(種子)에 의존[待]하므로 싹을 이름하여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c_13L釋曰以種爲緣起者待此種子故芽爲異偈曰

만약 연(緣)으로부터 생기(生起)한다면 이것은 저 연과 다르지 않네.
016_0462_c_15L若從緣起者,
此不異彼緣

【釋】제일의제에서는 보는 대상과 눈에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차별의 언어에 관(觀)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만약 법ㅌ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저 연과는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면 종자가 없는 다른 곳으로부터 싹이 돋아나야 할 것이다. 마치 불이 다른 실체를 관하지 못해도 자성(自性)이 뜨거운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보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듣는 자는 듣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탐욕에 물든 자는 탐욕 등을 관하지 못한다. 마치 불이 차가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가 곧 뜨거운 것처럼 이 다름[異]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제 중에 이 주장이 없기 때문이다.
016_0462_c_16L釋曰非第一義中可見異眼何以故差別語有觀故譬如可見自體若法從緣起者不異彼緣若言異者應離此種芽從餘出如火不觀異體自性是煖如是見者不觀可見聞者不觀可聞染者不觀染等如火不待於冷而自體是煖者此異不成何以故世諦中無此義故
016_0463_a_01L외도가 말하였다.
“보는 자와 눈 등의 다름[異]은 반드시 서로 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와 말과 같다. 여기서 경계(境界)가 현현하는 것을 이름하여 식(識)의 모습이라 한다. 이것은 곧 보는 자이다. 이 보는 자가 가진 행취(行聚)와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청정한 색(色)으로써 대상[境]을 삼는 이것을 눈이라 한다. 형색(形色) 및 현색(顯色)을 이름하여 보는 대상이라 한다. 내가 말한 것처럼 이유에 작용력이 있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에 다름[異]이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016_0463_a_01L外人言見者與眼等異不須相觀何以故以相別故如牛馬此中境界顯現者名爲識相此是見者此見者所有行聚眼識所依淸淨色以爲境此名爲眼形色及顯色此名可見如我所說因有力故見者眼等異義得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못하다. 제일의제 중에 소와 말의 두 실체[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상(想)에는 차별이 있으며, 결과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이 다르다는 주장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앞에서 한 대답과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다름[異]의 법체(法體)가 있어 사물과 더불어 화합하기 때문이다.”
016_0463_a_07L論者言此語不第一義中牛馬二體不可得故有人言想差別故果因別故見者眼等異義成者還同前答復次鞞世師人言有異法體與物和合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다름의 법체가 있어 사물과 화합한다고 하려면 또한 두 번째 사물에 자연히 다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을 세워 다른 체[別體]가 존재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을 하겠다. 다른 법과 사물이 화합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다르기[總別]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色)의 실체[體]와 같다.
016_0463_a_11L論者言若汝欲令有異法體與物合者亦應無第二物自然有異以彼立異有別體故此中作驗無有異法與物和合何以故物體故譬如未有言說已前物體復次第一義中異無自體何以由摠別故譬如色體
다시 제일의제 중에서 다름은 언어[說]와 각지(覺智)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지와 언어를 차별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의 실체와 같다. 다시 이 다름은 다른 것 중에 존재하는가? 다르지 않은 것 중에 존재하는가? 이것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만약 다른 것 중에 존재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3_a_17L復次第一義中異非起說及覺智因何以故由是差別覺智言說因故譬如色體復次此異爲在異中爲在不異中此有何若在異中者如偈曰

다른 것 중에 다름이 존재하지 않네.
016_0463_a_21L異中無有異
016_0463_b_01L
【釋】만약 저 다름[異]의 법(法)에 이 다름이 이미 먼저 존재한다면, 이 다름은 저 다름에 대하여 곧 무의미하다. 차별의 법은 공하기 때문이다. 비세사 사람의 다름에 관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다르지 않는 것 중에 존재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3_a_22L釋曰若彼異法先已是異而言此異向彼異中是則無義異法空故鞞世師所立異義不成若於不異中有者此亦不然如偈曰

다르지 않은 것 중에도 없네.
016_0463_b_03L不異中亦無

【釋】이것은 말하자면 ‘자체(自體)로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저 말한 것처럼 이유가 논파되므로 차별의 법은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같음[一]과 다름[異]은 곧 두 개의 극단이다. 그대는 지금 다름을 부정하지만, 다름의 법은 곧 없다. 이 다름이 만약 없다면 다르지 않음을 수용해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오류를 얻게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다름의 법이 없는 것을 이미 다른 이에게 이해시켰다. 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3_b_04L釋曰此謂自體而有異過如彼所說因義破故異法不成外人言一異者是二邊汝今遮異異法則無此異若應受不異是故汝得違悉檀過者言如異法無已令他解不異無者如偈曰

다름의 법이 없는 까닭에
다르지 않은 법도 없네.
016_0463_b_10L由無異法故,
不異法亦無

【釋】다른 것을 관(觀)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이미 다른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도 없다. 무엇을 부정하는가? 지금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차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언어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결과이기 때문이며 원인이기 때문이고 지혜의 경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말하겠다. 저것이 이와 같이 같음[一]과 다름[異] 모두를 부정한다. 같음 등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3_b_11L釋曰觀異故有不異已遮異故不異亦無云何遮今說驗第一義中見者可見不得爲異何以故差別言語觀譬如可見自體如是有故果故疑智境界故是等諸因此應廣說彼如是一異俱遮由一等不成故如偈曰

같음의 법[一法]은 화합하지 못하고
다름의 법[異法]도 화합하지 못하네.
016_0463_b_18L一法則不合,
異法亦不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사람이 화합하여 존재한다. 왜냐하면 화합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탐욕에 물든 사람의 화합이 조재한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말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먹는 자와 먹음이 서로 화합하는 것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3_b_19L若有人言有如是染與染者合何以故由合時故如水乳二復次第一義中有染者合何以故差別言說觀故譬如食者與食相合論者偈曰

현재 화합하는 것도 이미 화합한 것도
화합하는 자도 모두 없네.
016_0463_b_23L合時及已合,
合者亦皆無
016_0463_c_01L
【釋】앞에서 말한 것처럼 방편으로서 다른[異法]이 서로 화합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없다. 저 외도가 이 품(品)의 첫머리에서 이유를 든 것이 이미 오류임을 지적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화합이 무자체(無自體)임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품의 주장은 성립한다.
016_0463_c_01L釋曰如前所說方便異法相合無如是義由彼外人品初說因已與其過爲令他解合無自體是品中義是故得成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색(色)에서부터 식(識)에 이르기까지가 화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면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합품(觀合品)」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63_c_05L如『般若波羅蜜經』中說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色不合不散是受想行識不合不散若色至識不合不散此是般若波羅蜜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合品』竟
般若燈論釋卷第八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