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苦)는 무자성(無自性)이며 대치(對治)되는 것은 공(空)이다, 굳어진 집착을 부정하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음(陰)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고(苦)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고는 없으리니, 두 번째 머리가 없는 것과 같다. 오음이 곧 고라는 것은 마치 경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7_a_01L 【釋】제일의제에서는 모든 음의 상속(相續)을 조달(調達)이라 이름하며, 조달의 작용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기(緣起)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한 존재가 현재의 음을 원인으로 하여 나중의 음(陰)을 끌어당겨 생기(生起)하는 것과 같다. 주장은 바로 이와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신(身) 등의 모든 근(根)과 각(覺)과 취(聚)는 비록 다르지만 아(我)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一]가 편주(遍住)하여, 또한 이 ‘작업을 짓는자[作者]’는 고(苦)를 짓기 때문에 곧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만약 ‘모든 작용들은 찰나찰나 생멸하여 무상(無常)하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는 오류가 있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마음의 찰나와 함께 발생하는 고는 곧 이 괴로운 찰나의 마음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이 작업한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의도가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신의 주장과도 어긋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그대가 ‘장부(丈夫)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상주로써 증험하였으니,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라면 법의 자체(自體)를 파괴하게 된다. 설정한 주장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장부가 작업(作業)하는 것이 곧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다른 인연(因緣)을 의지하지 않는 게 아니며 함께 작용한 후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량한 원인과 함께 아(我)가 고(苦)를 짓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마치 저 마른 풀과 소똥 등이 불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처럼, 주장의 뜻도 바로 그러하다. 다시 조달의 고(苦)는 조달의 아(我)가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苦)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이니, 마치 야야달다(耶若達多)의 고와 같다.
016_0457_b_01L그대가 앞에서 ‘만약 찰나에 모든 작용 등에 개별적인 작용이 없다면, 그 업과 만들어진 것은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지금 그대에게 답하겠다. 제일의제 중에서는 고를 말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과실이 없다. 세제에서는 비슷한 상속(相續)의 인과(因果)는 다르지 않다. 세간 사람들이 모두 보고 다음과 같이 ‘저곳의 등불이 이곳으로 온다. 이 암라(菴羅)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또한 그와 같다. 나중 순간의 상(相)에 저 앞의 사(思)가 상속하여 인과가 다르지 않으며, 앞의 상사(相思)가 이 찰나의 사(思)가 쌓은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은 업이 소멸할 경우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마치 등불처럼 앞의 순간이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마침내 결과를 얻는 데 이른바. 그러므로 작용 없이[不作]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미 작용하여 실멸(失滅)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의 뜻이 ‘모든 작용의 찰나에 앞에서 쌓은 업을 나중에 결과로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상속처럼’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곳곳[處處]에서 연기하는 법(法)은 곧 연(緣)이 아니고, 또한 연과 다르지도 않으니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네.
016_0457_b_13L處處緣起法, 不卽是彼緣, 亦不異彼緣,
不常亦不斷。
【釋】나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대가 “다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든다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마음의 찰나로부터 전래된 업(業)이 아직 대치(對治)되지 않고 상속하여 결과를 이루니 공능(功能)의 수승함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자광색(紫鑛色)의 즙을 마다롱가(摩多弄伽)나무 종자(種子)에 흡수시켜 그것을 심으면 훗날 꽃 중에 자광색이 있는 것처럼, 세제와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장부(丈夫)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말하였다. “한편으로 업(業)을 짓고 한편으로는 결과를 받는다. 위와 같은 오류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한편’이란 말은 작용하지 않고 결과를 얻는 것이고, 뒤의 ‘한편’이란 말은 이미 작용이 실괴(失壞)한 것이다. 작용의 경계[邊]에서는 영원히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오류가 존재한다.”
016_0457_c_01L외도가 말하였다. “아(我)는 하나이므로 과실이 없다. 어떻게 하나임을 알 수 있는가? 하나라는 수(數)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아가 하나라는 수와 상응한다는 이와 같은 뜻은 없다. 왜냐하면 유(有)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하나라는 수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앞의 음(陰)이 나중의 음과 다르고 나중의 순간의 음이 앞 순간의 음과 다르다면 이 음은 저 음으로부터 발생하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他作苦]’라고 말할 수 있네.
016_0457_c_05L若前陰異後, 後陰異前者, 此陰從彼生,
可言他作苦。
【釋】만약 사람이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苦)를 얻는다면 법의 실체(實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정한 주장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조달의 나중의 음(陰)은 앞의 음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조달의 음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중의 자기 음의 실체와 같다. 또한 고체(苦體)의 상속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장 명제와 비유가 앞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집착이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이 조성한 업(業)의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상태의 차별은 다 사람이 짓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진 고(苦)’라 말하거나,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라고 말하는 두 학파가 세운 그러한 오류는 나에게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단지 이러한 말만을 했지만,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 스스로 고(苦)를 짓는다면 고 떠나 별개의 사람이 없네 어떤 것이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람 스스로 짓는 고인가?
016_0457_c_17L若人自作苦, 離苦無別人, 何等是彼人,
言人自作苦?
016_0458_a_01L 【釋】무엇이 고(苦)인가? 이른바 오음(五陰)의 상(相)이다. 저 고음(苦陰)을 떠나서 따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사람이 고(苦)를 짓는다는 것이다. 다시 그대가 집착하여 사람과 오음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단지 오음에 대하여 조달이라는 이름을 시설한 것일 뿐 사람은 가히 얻을 수 없다. 연기(緣起)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병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사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미 성립하지 않으므로 ‘고(苦)를 짓는 자’도 없다. 다시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고가 만들어진다면 그 주장도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지어 이 사람에게 준다면 고를 떠나 어떻게 다른 것이 존재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고가 만들어진다고 말하는가?
016_0458_a_04L若他人作苦,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他,
而言他作苦。
【釋】고를 떠나 사람은 없다.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별체(別體)가 존재함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증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앞서 이미 증험을 하여 여러 가지 이해 못하는 부분들을 밝혀 주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스스로 짓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만든다면 저것은 도리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自作]이네.
016_0458_a_09L自作若不成, 何處有他作? 若他人作苦,
彼還是自作。
【釋】스스로 고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고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옳지 못하다. 마치 별개의 상속과 같다. 결정된 업을 받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면[他作] 이와 같은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설한 말뜻은 이와 같다. 그대가 ‘상태[位]에는 차별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허망 된 말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만약 스스로 고가 만들어진다거나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다 옳지 못하다.
다시 다른 니건자(尼犍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스스로 고를 짓기 때문에 고는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苦)는 곧 사람이 아니므로, 이를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만들어지고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두 주장이 모두 성립한다.” 용수(龍樹)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앞의 게송에서 “고가 만약 스스로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연(緣)으로부터 일어나지 못하네”라고 설한 것처럼, 이 두 구절은 저기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말의 뜻은 이와 같다. 또한 만약 고(苦)가 다시 고를 만든다면 곧 결과가 다시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된다. 또한 고가 스스로 생기한다면 인연(因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세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그대는 앞에서 “고가 곧 사람은 아니며, 이 사람이 고를 만드는 것을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외도의 의도는 사람으로서 다른 것[他]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체가 없어 고를 만들 수 없다. 어째서 만들지 못하는가? 공(空)하기 때문이다. 공이란 곧 사물이 없는 것[無物]이니, 어찌 생기(生起)함이 일어나겠는가? 생기 없이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이 다른 것이라는 뜻도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들어진다느니,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느니 하는 주장 모두 옳지 못하다. 자타(自他) 모두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자기 원인과 다른 것 두 가지로 고를 만들므로 오류가 없다”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하여 용수보살께서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하나하나 작용이 성립하지 못함은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타 두 가지가 고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며,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인이라는 집착은 무기품(無起品)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이것에 대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자타(自他) 두 가지가 (고(苦)를) 만들지 못하는데 무인(無因)에 어떻게 고가 존재하겠는가?
016_0458_b_22L自他二不作, 無因何有苦?
016_0458_c_01L 【釋】이 품은 앞에서부터 고를 부정하였다. 만약 무인(無因)이라면 또한 고는 없다. 무인에 고가 존재한다는 이러한 뜻은 없다. 제일의제 중에 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저 고에 실체가 없음을 여러 차례 관찰하였고, 외도가 이 품의 첫머리에서 ‘모든 음(陰)은 존재한다. 고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들어 말하였으나, 제일의제 중에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홀로 고(苦)를 관하여도 네 가지 주장이 성립 못할 뿐만 아니라 외계[外]에 존재하는 모든 법에도 네 가지 종류가 또한 다 없네.
016_0458_c_06L不獨觀於苦, 四種義不成, 外所有諸法,
四種亦皆無。
【釋】앞에서 말한 이치대로 저 외계[外]의 색(色) 등을 관찰하여도 이 뜻은 없다. 어째서 색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원인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연(緣)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니, 마치 싹의 자체(自體)를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모든 대(大)를 색(色)에 대해 다른 것[他]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계[他]이기 때문이니, 마치 색의 자체와 같다.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색은 자체가 없다. 다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자타가) 함께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인에 관한 집착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리 등도 마땅히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품의 첫머리에서 ‘고(苦)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말한 것에 과실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지금 이 품에는 ‘고는 곧 공(空)하다’는 주장을 나타내 보이려 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립 할 수 있다.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만약 색ㆍ 수ㆍ상ㆍ행ㆍ식이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다시 부처님께서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하셨으니,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고(苦)는 자기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자타(自他) 모두로부터 만들어 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무인(無因)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고품(觀苦品)」의 해석을 마친다.
【釋】어떻게 모든 행(行) 등의 법이 허망함을 알 수 있는가? 모든 행 등은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범부를 속이기 위하여 삿된 지혜로써 분별하여 가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허망하다. 또한 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경계에 대한 생각 등은 망실(妄失)의 원인이 되므로 이것은 곧 허망한 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여러 경(經)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것이다.
016_0459_b_01L‘저 허망한 겁탈법’이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최상의 진실’이란 이른바 열반진실법[涅槃眞法]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모든 행(行)은 곧 겁탈법이며, 멸괴(滅壞)의 법이다. 성문법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셨고, 대승경전 중에서도 이 말씀을 하셨다. 모든 유위법은 다 허망하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다 허망하지 않다는 이 두 가지 성스런 가르침[阿含]은 모든 행(行)이 곧 허망법(虛妄法)임을 밝힌 것이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 중에 내(內)의 모든 법은 공하다. 왜냐하면 겁탈법(劫奪法)이기 때문이니, 마치 환화(幻化)의 사람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주장과 이유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공(空)하다고 말한 것도 존재하지 않고, 겁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다.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그대는 주장과 이유가 모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마침내 어떤 사물이 가히 겁탈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망과 겁탈이라는 두 말은 없다[無]는 뜻이 아니다. 무슨 뜻으로 경계를 분별하는가? 저 자체(自體)가 공하다는 것이 곧 허망의 뜻이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빛의 그림자와 같다.
이것이 겁탈의 뜻이다. 이유와 주장 두 가지가 같지 않으므로 나의 주장에 이유가 빠졌다는 과실은 없다. 두 가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의도하는 주장은 성립한다. 다시 겁탈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고 마침내 지혜장(智慧障)의 뿌리를 남김없이 영원히 없애 이러한 말을 하신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겁탈이란 말은 공(空)과 별개의 실체[體]가 없다는 것이다. 저곳에 연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저곳에 불이 있다는 말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허망이란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여래께서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허망이라 말씀하셨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9_c_01L 법(法)이 변이(變異)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에는 자체(自體)가 없네.
016_0459_c_01L見法變異故, 諸法無自體。
【釋】이 게송은 무슨 뜻을 주장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변이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은 무체(無體)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인가? 상주(常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허망이라는 말을 하신 도리는 이와 같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어찌하여 유(有)라고 이름하는가?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도리에 의하면 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59_c_07L釋曰:云何名有?自體有故。如汝道理者,諸法則無體,而此不然。偈曰: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016_0459_c_09L由諸法空故。
【釋】모든 법에는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59_c_10L釋曰:諸法無我我所故,汝義如是,是故應信諸法有體。若不如此者,偈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법이 변이하는가?
016_0459_c_12L自體若非有, 何法爲變異。
【釋】이 실체는 변이하고 있다는 것을 현견(現見) 할 수 있기 때문에, 변이의 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실체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체가 변이(變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실체가 없다면 곧 변이도 없으리니,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 실체가 있어 변이하기 때문에 내입(內入) 등이라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법에는 자체가 존재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법에 자체가 존재하여 변이한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는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실체가 변이함을 현견(現見)한다. 그러므로 저 변이하는 실체와 무자체(無自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자신의 주장과 서로 상반된다.
016_0460_a_01L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허망법’이라는 뜻은 이른바 여실(女實)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무자체임을 현견한다’는 것은 무아(無我)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란 곧 아(我)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법의 변이를 본다’는 것은 모든 법의 전변멸괴(轉變滅壞)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이라는 말은 무아라는 말과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허망’이란 말은 곧 무아를 말하는 것이며, 공(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도(聖道)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아견(我見)의 산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내외(內外)의 모든 법에 아(我)와 아소(我所)의 빛의 그림자가 현현(顯現)한다. 성도가 일어날 때 모든 법에 아 및 아소를 다시 분별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법이 무자체라고 말한다면 외도가 아에 대해 집착한 것처럼,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장이 성립한다면 곧 내가 이루려는 바를 이룬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무아(無我)는 성립하지만, 공(空) 및 무자체(無自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들이 법에 실체가 없다고 분별하는 것은 말하자면 마치 토끼의 뿔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두려움이 발생한다. 비유하면 어린이가 밤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정신을 잃고 공포에 또는 것과 같다. 그대 또한 이와 같다. 마치 그대가 말한 것처럼 외도가 아(我)에 집착하여 이 무아(無我)를 설정한 것은 내가 의도하는 것은 성립시킨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지금 진리를 잘 들으시오. 만약 이 허망이라는 말로써 무아(無我) 및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가 또한 무자체(無自體)임이 성립시켜 이렇게 이해하면, 이와 같이 내가 지금 법공(法空)으로써 이유를 들어 그대에게 개시(開示)하는 것 또한 사람이 무아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016_0460_b_01L왜냐하면 이 사람이 무아[人無我]라는 것은 저 법공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因]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해(信解)하게 한다. 주장 명제가 ‘소리는 무상하다’와 같은 것은 어떻게 이유를 댈 수 있는가? 그것은 작용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용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 또한 성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허망한 법이 성립한다면 그 자체가 없어 바로 ‘사람이 곧 무아라는 주장’을 성립시킨다. 서로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한 것처럼 ‘허망이라는 뜻은 모든 법의 자체가 머물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한 주장에 이제 답하겠다. 만약 법에 가히 집착할 수 있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실체에는 변이(變異)가 없으며 나머지 또한 변이가 없네. 마치 젊음에 늙음이 작용하지 못하고 늙음 또한 젊음에 작용하지 못함과 같네.
016_0460_b_05L彼體不變異, 餘亦不變異, 如少不作老,
老亦不作少。
【釋】이 두 비유는 숫자의 순서처럼 상사(相似)하고 상대(相對)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법(法)이 자체(自體)에 머물면서 변이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젊음과 늙음과 같다. 만약 전찰나(前刹那)와 다른 모습[異相]에 늙음이 머무는 것을 이름하여 변이(變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습은 이미 가버렸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늙음과 젊음과 같다.
외도가 “마치 우유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전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이유[因]는 부정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지금 그대에게 묻겠다. 무엇이 낙(酪)인가? 저들은 우유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유가 곧 낙으로서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분별하여 낙이라 이름하는가? 결정되어 있다고 분별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우유는 색깔과 맛과 역용(力用)과 이익 등을 버리지 않으므로 우유는 낙이 되지 못한다. ‘다른 것[異]’도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0_b_18L釋曰:由乳不捨色味力用利益等故,乳不爲酪。異亦不然。何以故?如偈曰:
우유와 다른 어떤 사물이 존재하여 능히 저 낙을 발생시키는가?
016_0460_b_20L異乳有何物, 能生於彼酪。
016_0460_c_01L 【釋】낙이 생기할 수 없으므로 그 밖의 실체에도 또한 변이가 없다. 그대가 부정인이라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떤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나도 또한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낙의 상(相)은 우유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화합의 자재력(自在力) 때문에 우유는 낙을 발생시킨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화합의 자재력이란 이 우유가 자체(自體)를 버리고 능히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자체를 버린다면 우유가 낙을 발생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주장과) 서로 어긋난다. 무엇이 어찌하여 어긋나는가?
만약 이것이 우유라면 어떻게 낙이라 이름 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낙이라면 어떻게 우유라 말하는가? 세간에서 모두 이와 같이 이해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단지 변하여 낙이 된다’고 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은 또한 앞에서와 같이 부정된다. 그와 같이 관찰하면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그대가 ‘모든 법(法)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써 이유를 든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공(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과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마치 전도(顚倒)된 지혜와 전도되지 않은 지혜와 같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상위한 법이 없으리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불공(不空)과 다르기 때문에 공법(空法)이 존재한다. 이러한 뜻으로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이유를 댄 것과 같다.”
만약 어떤 법도 공하지 않다면 이것을 관찰하므로 공이 존재하네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016_0460_c_19L若一法不空, 觀此故有空, 無一法不空,
何處空可得?
016_0461_a_01L 【釋】공(空)과 불공(不空)이란 세제의 법체(法體)에 의지한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마치 집에 사람이 머물면 집이 비지 않았다고 말하고, 사람이 머물지 않으면 집이 비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 제일의제 중에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은데 어디서 공법(空法)을 얻겠는가? 그대가 앞에서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분별하여 이유를 댄 것은,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단지 집착을 부정하기 위해 공하다고 가설한 것일 뿐이다.
다시 십칠지론자(十七地論者)가 말하였다. “분별된 것처럼,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분별의 실체도 공하다. 이 모든 법이 공함은 진실로 존재한다. 어찌하여 진실인가? ‘작업을 짓는 자[作者]’를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이러한 견해를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라고 말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공에 집착한다고 말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일체의 법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공하며, 공도 실법(實法)이 아니다. 그러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앞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법도 공(空)하지 않다’면, 곧 분별지(分別智)의 경계인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계인가? 만약 어떤 사물이 곧 공하다면 이것을 공지(空智)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공(空)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것은 이른바 모든 법은 다 공하다고 이름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 이르길 ‘어디에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불공(不空)의 견해란 허공의[空火]이 타는 것이다. 공이라 분별하는 것 또한 타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게송에서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둘[二]을 행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분별을 짓는다. ‘마치 환(幻)으로 화작(化作)된 말 따위처럼 실체(體)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 실제의 말 등과 같은 것은 실체가 존재하여 공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의 차별일 뿐이다.
무이(無二)의 행을 하는 자가 무분별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제일의제의 경계가 진실하여 일체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과 같아, 하나의 모습[一相]이나 모습이 없는 것[無相]으로 보아도 보이는 것[所見]이 없다. 게송에 이르길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디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인 까닭에 그대의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공지(空智)가 생기하므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 법체(法體) 스스로 공하여 지혜로 공을 요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등불을 비춰 병(甁)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병에는 실체가 없어 가히 존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말은 잘못 사량(思量) 한 것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공하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류를 짓게 한다. 그러나 공에 의지하여 공에 작용이 없음을 보고, 또한 공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들이 하려는 주장은 무너지며, 또한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 어찌하여 자신과 어긋난다는 것인가?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화합(和合)을 떠난다면 이와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네. 그러므로 공(空)은 생기(生起)하지 않으니, 나는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하네.
016_0461_b_12L若離於和合, 無有如是體, 是故空無起,
我說無自性。
이처럼 그대는 아함(阿含)에 위배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중에서 ‘나의 법문(法門)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이해한다면 옳은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법이 아닌 것임에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또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密經)』 중에 ‘색이 공함을 관(觀)하지 않고 색이 공하지 않음도 관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간다. 이것은 공견(空見)도 또한 집착이므로 반드시 부정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또한 작용이 공하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이 역시 버려야 한다. 이 두 집착은 큰 과오이기 때문이다. 공을 버리지 않는다면 오류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견해들의 오류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부처님께서는 아직 고(苦)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고의 종자(種子)를 끊고자 하므로 제일(第一)의 자비를 일으키신다. 마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무엇을 ‘공이라고 보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과실(過失)이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1_c_06L釋曰:云何名見空者?謂執著於空,言有此空。此執著空有何過失?如偈曰:
그것은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네.
016_0461_c_08L說彼不可治。
【釋】부처님께서는 저 공견(空見)을 가진 중생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약을 복용하면 모든 병에 작용하지만 또한 차도가 없으면 오히려 중병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법(空法)을 설한 것은 모든 악견(惡見)을 버리기 위함인데, 만약 도리어 공에 집착하면 이를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공(空)을 버리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수레가 진흙 속에 빠져 차를 꺼내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줄 테니, 나를 위하여 수레를 꺼내 주시오”라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수레를 꺼낸 후에 그 수레 주인에게 무소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가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지혜로운 사람의 가벼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그대에게 오류가 있다. 그대가 말한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하므로 나의 자인(自因)은 앞에서와 같은 과실(過失)이 없다. 또한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작용이 존재하는가? 모든 행(行)은 공하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신해(信解)시키려는 것이다. 이 품의 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016_0462_a_01L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저 모든 법은 전도(顚倒)로부터 일어나 실체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며, 허망하여 여실(如實)하지 않다. 극용맹보살이여,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법[一法]이라도 행한다면 이는 전도된 행이며, 여실한 행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한 『범천왕소문경』에서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진리에 집착한다. 이 법은 실체[實]가 아니며 또한 허망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말해지고 있다. 「관행품(觀行品)」의 해석을 마친다.
다시 지금 공(空)과 대치되는 모든 존재의 화합법[合法]이 다 무자성(無自性)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016_0462_a_08L復次爲令信解空所對治諸有合法皆無自性,有此品起。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일체 법의 자성(自性)이 모두 공(空)하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바른 도리에 어긋난다. 무엇이 도리인가? 부처님께서 ‘근(根)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和合)한 것을 촉(觸)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는 앞에서 말한 것과 서로 상반된다. 마치 내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원인을 삼아 이를 화합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원인을 화합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비유하면 거북이의 털을 원인으로 하여 의복이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삼결(三結)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화합이라 한다. 내가 제시한 이유는 바른 도리에 부합하므로 모든 법의 자체(自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런 말을 하지만 주장이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것이네 둘 둘씩 서로 마주보아도 모두 다 화합하지 않네.
016_0462_a_20L見可見見者, 此三各異方, 二二互相望,
一切皆不合。
016_0462_b_01L 【釋】봄과 보는 대상과 보는 자를 둘 둘씩 마주보아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모두가 화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a_22L釋曰:見與可見及彼見者,二二相望更互不合,又一切不合。由如是故,偈曰: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에서도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은 모두 화합하지 않네.
016_0462_b_02L應知染染者, 及彼所染法, 餘煩惱餘入,
三種皆無合。
【釋】‘탐욕’은 이른바 욕심의 모습[相]이다. ‘번뇌’란 이른바 중생의 상속(相續)을 탐욕으로 물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染] 등을 번뇌라고 말한다. ‘그 밖의’란 이른바 성냄 등을 말한다. 이것도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성냄ㆍ성내는 자ㆍ성내는 대상 등을 말한다. ‘그 밖의 입(入)’이란, 눈[眼]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고, 여기서 ‘그 밖’이라는 말은 이른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을 말한다.
무엇 때문에 입(入)이라 이름 하는가? 이른바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이 생기하는 장소[處門]이므로 입(入)이라 이름한다. 이 역시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내지 앎ㆍ아는 대상ㆍ아는 자이다. 탐욕 등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으로써 둘 둘씩 마주보아도 다시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전부가 화합하지도 못한다. 마치 보는 대상에 화합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여 의심이 없게 하려고,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른 것[異]이 다른 것과 화합하면 다름이 있을 수 없네 모든 보는 대상 등의 다름의 상(相)은 다 화합하지 못하네.
016_0462_b_14L異共異有合, 此異不可得, 及諸可見等,
異相皆不合。
【釋】보는 대상 등은 이른바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이다. 이와 같이 탐욕ㆍ탐욕에 물든 자ㆍ탐욕의 대상은 모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는 보는 대상 및 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에 차이가 없다면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비유하면 자체(自體)와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다른 것[異]과 다른 것이 화합한다고 말할 경우 여기서 탐욕 등의 상속(相續)이 만약 다른 곳에 존재해도 곧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다른 장소 및 다른 상속의 끊임없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화합(和合)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유가 성립한다.”
016_0462_c_01L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보는 대상 등이 먼저 다른 장소에 존재하다가 후에 한 장소에 있는 것을 이름하여 화합[合]이라 한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고 또한 증험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그것은 이와 같기 때문에 게송에서 말하였다.”
오직 보는 대상 등 뿐만 아니라 다른 상(相)도 얻을 수 없네 또한 나머지 일체법이 다름[異]도 얻을 수 없네.
016_0462_c_03L非獨可見等, 異相不可得, 及餘一切法,
異亦不可得。
【釋】앞에서 말한 도리처럼 저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및 성냄ㆍ성내는 대상ㆍ성내는 자 등에는 모두 화합의 뜻이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아(我) 및 보는 눈 등에 차이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종자[種]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한 것은, 이 종자(種子)에 의존[待]하므로 싹을 이름하여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2_c_13L釋曰:以種爲緣起者,待此種子故,名芽爲異。偈曰:
만약 연(緣)으로부터 생기(生起)한다면 이것은 저 연과 다르지 않네.
016_0462_c_15L若從緣起者, 此不異彼緣。
【釋】제일의제에서는 보는 대상과 눈에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차별의 언어에 관(觀)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만약 법ㅌ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저 연과는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면 종자가 없는 다른 곳으로부터 싹이 돋아나야 할 것이다. 마치 불이 다른 실체를 관하지 못해도 자성(自性)이 뜨거운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보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듣는 자는 듣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탐욕에 물든 자는 탐욕 등을 관하지 못한다. 마치 불이 차가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가 곧 뜨거운 것처럼 이 다름[異]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제 중에 이 주장이 없기 때문이다.
016_0463_a_01L외도가 말하였다. “보는 자와 눈 등의 다름[異]은 반드시 서로 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와 말과 같다. 여기서 경계(境界)가 현현하는 것을 이름하여 식(識)의 모습이라 한다. 이것은 곧 보는 자이다. 이 보는 자가 가진 행취(行聚)와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청정한 색(色)으로써 대상[境]을 삼는 이것을 눈이라 한다. 형색(形色) 및 현색(顯色)을 이름하여 보는 대상이라 한다. 내가 말한 것처럼 이유에 작용력이 있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에 다름[異]이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못하다. 제일의제 중에 소와 말의 두 실체[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상(想)에는 차별이 있으며, 결과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이 다르다는 주장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앞에서 한 대답과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다름[異]의 법체(法體)가 있어 사물과 더불어 화합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다름의 법체가 있어 사물과 화합한다고 하려면 또한 두 번째 사물에 자연히 다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을 세워 다른 체[別體]가 존재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을 하겠다. 다른 법과 사물이 화합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다르기[總別]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色)의 실체[體]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서 다름은 언어[說]와 각지(覺智)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지와 언어를 차별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의 실체와 같다. 다시 이 다름은 다른 것 중에 존재하는가? 다르지 않은 것 중에 존재하는가? 이것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만약 다른 것 중에 존재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63_b_01L 【釋】만약 저 다름[異]의 법(法)에 이 다름이 이미 먼저 존재한다면, 이 다름은 저 다름에 대하여 곧 무의미하다. 차별의 법은 공하기 때문이다. 비세사 사람의 다름에 관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다르지 않는 것 중에 존재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釋】이것은 말하자면 ‘자체(自體)로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저 말한 것처럼 이유가 논파되므로 차별의 법은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같음[一]과 다름[異]은 곧 두 개의 극단이다. 그대는 지금 다름을 부정하지만, 다름의 법은 곧 없다. 이 다름이 만약 없다면 다르지 않음을 수용해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오류를 얻게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다름의 법이 없는 것을 이미 다른 이에게 이해시켰다. 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釋】다른 것을 관(觀)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이미 다른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도 없다. 무엇을 부정하는가? 지금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차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언어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결과이기 때문이며 원인이기 때문이고 지혜의 경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말하겠다. 저것이 이와 같이 같음[一]과 다름[異] 모두를 부정한다. 같음 등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사람이 화합하여 존재한다. 왜냐하면 화합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탐욕에 물든 사람의 화합이 조재한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말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먹는 자와 먹음이 서로 화합하는 것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63_c_01L 【釋】앞에서 말한 것처럼 방편으로서 다른[異法]이 서로 화합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없다. 저 외도가 이 품(品)의 첫머리에서 이유를 든 것이 이미 오류임을 지적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화합이 무자체(無自體)임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품의 주장은 성립한다.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색(色)에서부터 식(識)에 이르기까지가 화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면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합품(觀合品)」의 해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