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490_b_01L
반야등론석 제12권
016_0490_b_01L般若燈論釋卷第十二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016_0490_b_02L偈本龍樹菩薩 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20. 관인과화합품(觀因果和合品_)
016_0490_b_04L觀因果和合品第二十

지금 이 품에서도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서 비세사 사람 등이 앞 품에서 세운 시간[時]에 관한 주장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비세사 사람 및 승거 사람 등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시간이 존재한다. 결과에 발생과 소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종자와 물과 흙 등이 화합할 때 시간이 실체로서 있어 싹 등이 발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앞에서 설한 것처럼 이유에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시간이 있어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하면 지금 이것에 대해 답변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0_b_05L釋曰今此品者亦爲遮空所對治鞞世師等於前品中立時不成故說鞞婆沙人及僧佉人等言第一義中有如是時果有生滅故如種子與水土和合以時節有體故而芽得生無因者果則不生以是故如前所說因有力故當知有時論者言若有說言因緣和合有果生者今當答之論偈說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해도
결과가 이미 먼저 있는데
어떻게 화합하여 발생하는가?
016_0490_b_14L若謂衆因緣,
和合而果生,
是果先已有,
何須和合生

【釋】화합 중에 만약 결과가 있다면 이와 같은 오류가 생긴다. 왜냐하면 결과가 있어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있으나 화합 중에 발생한다면 결과가 있는데 어떻게 발생하겠는가? 만약 ‘발생한다’고 말하면 화합 중에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발생하는 것’의 두 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가 있다면 발생하지 않으니, 이미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만약 이미 있다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것과 발생하지 않는 것이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가 있어 ‘인연이 화합한 중에 결과가 없었으나 결과를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지금 이것에 대해 답변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0_b_16L釋曰和合中若有果者得如是過以故有不生故若有而從和合中生有云何生若言生者和合中則無何以故有之與生二法相違復次若有果則不生已有故果若已有不須更生何以故生與不生此二相違有言因緣和合中無果而能生果者今當答之如論偈說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하면
화합 중에 결과가 없는데
어떻게 반드시 화합하여 발생하는가?
016_0490_c_02L若謂衆因緣,
和合而果生,
和合中無果,
何須和合生

【釋】이것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발생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만약 발생하는 것이 없다면 발생하는 법의 실체도 없다. 이것이 그대가 세우려는 주장의 오류인 것이다. 만약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제 거듭 논파해 나가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0_c_04L釋曰此謂果不生無有生故譬如兔若無生者生法體壞是汝立義等若立因緣和合中有果者今當重如論偈說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를 취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실지로는 취할 수 없네.
016_0490_c_08L若謂衆因緣,
和合而有果,
是果應可取,
而實不可取

【釋】이것은 결과를 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마음이라도 취하려 하나 취할 수 없다.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증험하겠다. 화합한 가운데 존재하는 싹을 결과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합 중에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취할 수 없다면 이 중에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종자 중에 병과 비단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화합 중에 결과라고 부를 만한 싹이 없기 때문이다.
016_0490_c_10L釋曰此謂果不可取何以故一心欲取而不能取以果無故此下作驗合中有芽名果亦不可取何以故合中無果故不可取若不可取者中則無譬如種中無有甁絹如是於和合中無芽名果故不可取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화합 중에 취할 수 없다고 말해도 이 뜻은 있다. 말하자면 아주 멀거나, 아주 가깝거나, 그들이 손상되거나, 마음이 미혹하여 번민이 있을 때나 장애 등이 있을 때는 취하려 해도 장애가 있어 물체가 있더라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없다고 말하면 그대가 이유를 들고 주장을 세운 것에 오류가 있다.”
016_0490_c_16L僧佉人彼說和合中不可取者亦有是義所謂極遠極近及諸根損患心迷悶有隔障等能障於取雖有物體而不可取非一向無故不可取若言無是彼出因立義之過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앞에서 설한 오류와 같다. 이제 장차 다시 설하겠다. 그들은 위에서 이유를 들어 말한 ‘취할 수 없는’이 이유에 무슨 뜻이 있는가? 현량(現量)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인가?육근과 육식과 같은 것은 실체로서 있어도 현량으로 취착된 것은 없기 때문이니, 그대가 이유를 든 것은 부정인이다. 만약 험량(驗量)으로써 취할 수 없다면 이유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고 증험한 것과 같다.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할 수 있다면 이유가 공하지 않다. 비유하면 결과의 실체가 있는 것과 같다.
016_0490_c_21L復次更有異僧佉人言如前所說過者今當更說彼上出因言不可取者此因有何等爲是現量不可取耶如諸根識而實是有亦不爲現量所取故彼立因非是一向若以驗量不可取者義不成猶如驗因中果有取可量故若可量者因則不空譬如有果體
이와 같이 괴로움과 즐거움 두 부류는 탐냄과 성냄과 여러 견해 등 세 번뇌의 원인이 되고, 색과 소리 등 다섯 가지도 또한 탐냄과 성냄 등 세 번뇌의 원인이 된다. 이 원인 등으로 인하여 험량이 있기 때문이니, 원인 중에 결과를 취한다. 그대가 비록 현량은 취할 수 없다고 말해도 이제 험량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성립할 수 없다. 만약 현량과 험량으로 다 취할 수 없다면 이것은 내 주장과 달라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91_a_05L是苦樂二種能爲貪瞋諸見三煩惱色聲五種亦能爲貪瞋等三煩惱以是因等有驗量故因中果有取汝雖言現量不可取然今驗量有可取故彼出因義不成若現量及驗量俱不可取者此違我義及因不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내가 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연이 화합한 중에 끝내 결과가 없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아주 멀리 있는 것 등도 취할 수 없으며, 한결같이 없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은 세제에도 이런 이치는 없는데 어찌 하물며 제일의제에서이겠는가? 제일의제에도 역시 아주 먼 등의 사물이 없으며 위와 같은 괴로움ㆍ즐거움ㆍ색ㆍ소리 등도 제일의제 중에 없다. 이렇다면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91_a_11L者言我道不可取者謂於因緣和合中畢竟無果故不可取汝言極遠等亦不可取非一向無者世諦之中亦無此理何況第一義耶於第一義中亦無極遠等物如上苦樂色聲等於第一義中亦無是則因義不成
이른바 ‘결과’라고 이름하는 결과도 역시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면 세제 중에 결과도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원인도 또한 원인을 발생시킬 수 없다. 그대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말하면 세제 중에서 이미 논파된 것이다.”
016_0491_a_17L所言果者果亦自體空故若因中無果者世諦中果亦不生譬如拒不能生拒因亦不能生因汝言因能生果者世諦中亦已被破
또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원인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순간 먼저 원인의 체가 없고 결과도 먼저 없다가 나중에 발생한다.”
016_0491_a_21L復有異僧佉人言若因未生時先無因體果亦先無而後方生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제 증험하겠다. 만약 먼저 원인이 없으면 나중에도 발생하지 않으니,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석녀 등과 같다.자세한 것은 앞에서 험량을 설한 증험을 설한 것과 같다. 수다라인과 비세사인 등이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헤아려 분별한 것에 대해 총괄적으로 답하였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1_a_23L論者言今當說驗若先無因後亦不生無有故譬如空華石女等廣如前說驗今更摠答修多羅人及鞞世師等計因中無果者如論偈說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해도 결과가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뭇 인연이
인연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네.
016_0491_b_03L若謂衆因緣,
和合無果者,
是則衆因緣,
與非因緣同

【釋】여기서 결과가 없다는 말은 말하자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원인의 모습[因相]이란 이른바 스스로의 결과를 발생하는 것[自果生], 간단없이 발생하는 것[無間生], 자분을 발생하는 것[自分生] 등의 차별이 있다. 이것을 원인의 모습[因相]이라 한다. 연의 모습[緣相]은 두루 갖가지 결과를 발생시키고, 다른 것을 지속적으로 자라게 하며, 다른 것을 상속시켜 나아가 먼 곳까지 두루 여러 결과를 발생시키지만 자분(自分)을 발생시키지 않아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016_0491_b_05L釋曰此言無果者謂果空故因之與果云何差別因相者謂自果生無閒自分生等差別是爲因相緣相者謂通生種種果能長養他令他相續乃至遠處通生諸果非自分生能廣饒益
이와 같은 것들을 인연의 차별된 모습이라 한다. ‘인연 아닌 것과 같네’라 함은 인연이 아닌 것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인연은 인연 아닌 것과 같다. 또다시 이제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하여 ‘제일의제 중에 종자 등의 모든 인연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고 증험하겠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인연이 아닌 것과 같다.
016_0491_b_11L如是等名爲因緣差別相與非因緣同者謂非因緣不生於果何以果空故以是故因緣與非因緣同復次今爲執因中無果者出驗第一義中種子等諸因緣不能生果何以果空故譬如非因緣
또 다시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연(緣)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결정된 연(緣)이 있어 결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결과가 공하다면 주장과 서로 맞지 않는다.”
016_0491_b_16L復次修多羅人言緣能生果何以故有決定緣能生果故若果空者義不相應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는 이와 같은 증험이 없다. 오히려 위와 같이 인연이 아니라는 오류와 같아져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는 그대의 증험은 무력하다.”
016_0491_b_18L論者言第一義中無如是驗還同上非因緣欲令他信解者汝驗無力
경량부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보리종자에서 보리 싹이 발생함을 본다. 이러한 까닭으로[因]를 든 것은 뜻이 이치에 맞지 않다.”
016_0491_b_20L修多羅人復言見麥種子能生麥芽以是故彼出因者無有義理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제 중에 실체로서 보리종자에서 보리 싹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어도 제일의에서는 아니다. 만약 제일의 중에 보리에서 싹이 발생한다고 말하면 이 뜻은 옳지 않다.이와 같이 관찰해 본다면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앞서 대답한 것과 같다. 그대가 결과의 발생과 소멸을 주장하고, 원인이 되어 결과에 발생의 뜻이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다시 지금 묻겠다.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집착하는 것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고 소멸한다는 것인가? 아직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고 먼저 소멸한다는 것인가? 집착하는 자가 답한다. 나에게 어떤 오류가 있어 두 질문을 하는가?”
016_0491_b_22L論者言世諦之中實見麥種能生麥芽非第一義於第一義中麥生芽者是義不然是觀察有果生者不然如先答汝立果生滅以爲因者果有生義不然次今問執因中無果者因爲生果已而滅爲未生果而先滅耶執者答言我有何過爲此二問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주장과 서로 맞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1_c_06L論者言義不相如論偈說

결과에 작용을 하고서
원인이 곧 소멸한다면
준 원인과 소멸된 원인이라는
두 실체가 있는 것이네.
016_0491_c_07L與果作能已,
而因方滅者,
與因及滅因,
則便有二體

【釋】이것은 세제 중에서는 또한 주는 것과 소멸하는 것이 한 법이지만 실체가 두 개가 될 수 없는 오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아직 결과에 작용하지 않았는데 먼저 소멸한다는 것에 대해 이제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1_c_09L釋曰此謂於世諦中亦不欲令與者滅者一法有二體過復次若未與果作能而先滅者今當欲答如論偈說

만약 원인이 아직 작용을 주지 않고
먼저 원인이 소멸한다면
원인이 소멸하고 결과가 일어나는 순간
이 결과에는 원인이 없는 것이네.
016_0491_c_12L若因未與能,
而因先滅者,
因滅而果起,
此果則無因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원인이 소멸한 후에 결과가 곧이어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영원히 이미 소멸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모든 세간에서 다 이해하는 것이니, 또다시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016_0491_c_14L釋曰此謂不欲無因而有果以是故非因滅已而果方生何以故已滅故譬如久已滅者此義一切世閒之所共解亦復不須更令物解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화합한 법이 일어남과 동시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등불과 빛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뜻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동시에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1_c_18L修多羅人復言和合法起有同時能生果如燈與光同時而起是義應爾論者言謂同時而生果者是亦不然如論偈說

만약 화합과 동시에
결과가 발생한다면
발생시킨 것과 발생한 것이
한 시점이라는 오류에 떨어지네.
016_0491_c_22L若同時和合,
而能生果者,
能生及所生,
墮在一時中

【釋】이것은 말하자면 동시라는 오류로 인하여 발생시키는 주체와 발생하는 대상의 두 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동시에 태어난다는 것에 위와 같은 오류가 있는 것과 같다. 다시 어찌하여 다른 시기에 일어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발생과 대상과 발생시키는 주체는 원인과 결과로 서 둘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증험하겠다. 결과와 원인이 함께 화합하여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대상과 발생시키는 주체는 둘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둘인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용기와 심지와 기름 등이 화합하여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등불과 빛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 등불과 빛이 서로 상망(相望)하여 원인과 결과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설은 옳지 못하다.
016_0492_a_01L釋曰此謂有同時過而不欲令能生所生二法如父子二同時而起有如上過復次云何別時起謂所生及能生因果爲二今次作驗非果與因和合同時俱起何以故所生及能生二譬如父子二如先所說有器炷油等和合有力故世諦中燈共光同時非燈與光相望爲因果是故汝說不善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아직 화합하기 전에 결과가 먼저 일어났어도 뒤에 회합하는 순간 곧바로 뚜렷해진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없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2_a_10L復更有異僧佉人言未和合前果已先起後和合時方乃顯了論者答言無有是義如論偈說

만약 아직 화합하기 전에
이미 결과가 일어난다면
저 인연을 여읜 후에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네.
016_0492_a_12L若未和合前,
已有果起者,
離彼因緣已,
果起則無因

【釋】말하자면 화합의 인연을 여의고도 먼저 결과가 있다면 세제 중에 실제로도 이러한 일을 볼 수 없다. 이 까닭으로 나의 부처님 법 중에서는 결과가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나중에 뚜렷해진다’고 한 말은 앞서 이미 답하였다.
016_0492_a_14L釋曰此謂離和合因緣而先有果者世諦之中實亦不見有如此事以是我佛法中無果先起汝言後顯了先已答訖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법은 이미 소멸하였을지라도 결과가 일어날 때까지는 오히려 원인의 실체가 머물고 있는 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원인이 이미 소멸하였으나 실체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게 해 결과의 실체가 된다고 말하면 이러한 뜻은 없다. 왜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2_a_18L更有異僧佉人言因法雖已滅至果起時猶有因體住論者若因滅已而體不捨卽住爲果體無如是義何以故如論偈說

만약 원인이 변화하여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향해가고 있는 것이네.
먼저 있었는데 다시 발생한다면
거듭 발생한다는 오류에 떨어지네.
016_0492_a_21L若因變爲果,
因卽有向去,
先有而復生,
則墮重生過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의 실체가 결과가 되어도 실체를 버리지 않는다면,마치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이 집을 버리지 않고 저 집에 이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원인의 실체가 이미 있는데도 또다시 일어난다면 거듭 발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작용된 것이 전혀 없다. 변한 것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진흙덩어리가 병이 아닌 것처럼, 진흙덩어리가 소멸된 후에 병이 발생하므로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변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진흙 자체와 같다.
016_0492_a_23L釋曰此謂因體爲果而體不捨如提婆達多不捨此宅而至彼宅何以故因體已有而復更起則爲重生旣不生果全無所作復次若謂卽因變爲果者卽是不名變變不名卽是如泥不卽是甁泥團滅已而有甁生得稱變不變故譬如泥自體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과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나의 주장은 이와 같아 위와 같은 오류가 없다.”
016_0492_b_07L僧佉人復言因能生果我義如是無如上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원인의 실체를 버리지 않았는데 결과라 부른다면 단지 이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과의 실체는 없다. 위에서 설한 오류를 그대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원인의 실체를 버리고 결과의 실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원인이 다시 결과의 실체 중에 머문다고 말하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대는 사량(思量)하지 않고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016_0492_b_08L論者言若不捨因體而名果者但名字有差別而無果體如上說過汝不能免若捨因體果體起時而因還住果體中者是義不然汝不思量作如是說
또다시 집착을 가진 승거 사람에게 묻겠다. 그대의 ‘원인이 일어난다’는 말은 ‘원인이 이미 소멸되었어도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소멸되지 않았어도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두 물음은 모두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2_b_13L復次今問執有異僧佉汝言因能起者爲因已滅能起果耶爲未滅能起果耶二俱不然如論偈說

이미 소멸되어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아직 소멸하지 않고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원인이 소멸하였다면 이미 없어진 것인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016_0492_b_15L爲已滅生果
爲未滅生果
因滅者已壞,
云何能生果

【釋】이것은 이미 소멸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 이것은 원인이 아닌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는가? 만약 원인이 일어난 후에도 실체가 소멸하지 않으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설한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6_0492_b_17L釋曰此謂已滅者不復是因何能生若因起已而體不滅何能生果之所說義不相應
또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로서의 법은 항상 머무른다 해도 앞 사물의 실체가 소멸하여 나중 사물의 실체를 일으켜 변이(變異)가 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원인이 실체가 소멸하지 않았어도 결과를 잘 발생시킬 수 있다.”
016_0492_b_20L復有異僧佉人言實法恒住而前物體滅後物體起此變異以是義故因體不滅而能生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것도 오류이다. 앞의 실체가 소멸할 때 실체로서의 법도 소멸한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법은 사물의 실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비유하면 이미 소멸한 법의 실체와 같다. 나중에 법의 체가 이러날 때에는 실제 법도 일어난다. 왜냐하면 실제 법은 사물의 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일어난 법의 체와 같다. 그대가 설한 것처럼 세제의 도리와 서로 위배된다. 만약 제일의제의 도리에 의한다면 어떤 법의 실체가 있어 소멸하고, 어떤 법의 실체가 있어 발생하여 변이라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모든 때에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92_b_23L論者言是亦有過前體滅時實法亦滅何以故實法與物體不異故如已滅法體後法體起時實法亦起何以故實法與物體不異故譬如已起法體如汝所說與世諦道理相違若依第一義道理有何法體滅有何法體生而言有變異耶何以故一切時無有譬喩
그대가 설한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다시 그대가 앞서 법의 실체가 소멸했다고 말하면 이 실체는 원인의 실체인가, 원인의 실체가 아닌가? 만약 이것이 원인의 실체라면 앞서 법의 실체가 소멸하는 순간 원인의 실체도 소멸한다. 게송에서 ‘원인이 소멸한다’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이미 원인이 소멸되었어도 결과를 일으키는 힘이 있지 않다. 다시 앞서 법이 소멸해도 원인의 실체가 없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2_c_07L汝所說者是義不然次汝言前法體滅者此體爲是因體爲非因體若是因體者前法體滅體亦滅偈言因滅者謂非是已滅因有能起果力復次若前法滅非因體如論偈說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여 머문다면
어떻게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물체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
016_0492_c_12L因果和合住,
云何得生果
不與果和合,
何物能生果

【釋】이것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실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의 자체가 스스로 원인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여 함께 머물면 이미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원인을 곧 작용이 없으니, 법의 실체가 전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가 세운 주장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역시 위와 같이 대답한다. 사물의 실체는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그 밖에 결과와 같다.
016_0492_c_14L釋曰此謂因不生果何以故因果體不異故如因自體不自生因若因與果和合共住旣不生果因則無用體有顚倒故是汝立義之過若有人因不與果和合者亦如上答物不生果何以故果空故譬如餘果
또한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을 총체적으로 이미 부정하였다. 이제 장차 개별적으로 설하겠다. 안식(眼識) 등의 결과를 부정한다. 만약 안식이 눈을 원인으로 삼는다면 이 눈은 본 후에 대상을 취착하는가? 보지 않고서 대상을 취착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만약 눈이 보고서 취착한 후에 식(識)이 일어나면 식을 작용이 없다.만약 눈이 보지 않고서 취착한다면 색의 경계는 작용이 없게 된다.
016_0492_c_20L且已摠遮因能生果今當別說遮彼眼識等果若此眼識以眼爲因者此眼爲見已取境爲不見而取境二俱不然若眼見而取然後識起者識則無用若眼不見而取者色之境界則爲無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에 ‘작용하는 원인’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으면 우유는 낙(酪)의 원인이 아니다. 비유하면 우유와 병(甁)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016_0493_a_03L復有人言第一義中因能生果以故因與果作因故若因不生果者是則乳非酪因譬如乳與甁論者言汝說不善何以故如論偈說

과거의 결과는
과거의 원인과 화합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결과도
이미 생겨난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016_0493_a_06L無有過去果,
與過去因合,
亦無未來果,
與已生因合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가 모두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또다시 과거의 원인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 다시 이미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이미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3_a_08L釋曰此謂因果俱無故譬如兔角次過去因以時別故則不與果和合復次已生未生果與已生未生因不和合者如論偈說

이미 발생한 결과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은
필경에는 화합하지 않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와 이미 발생한 원인도
또한 화합하지 않네.
016_0493_a_12L已果及未因,
畢竟無和合,
未果及已因,
亦復無和合

【釋】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이 다른 원인과 결과는 둘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결과는 이미 발생한 것이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은 이미 괴멸한 것이다. 이미 괴멸한 결과와 아직 괴멸하지 않은 원인은 화합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3_a_14L釋曰此謂時別因果二故已生果與已生未生因已壞果與已壞未壞因不和合者如論偈說

이미 발생한 결과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또한 이미 괴멸한 결과는
아직 괴멸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016_0493_a_17L無有已生果,
與已未因合,
亦無已壞果,
與已未因合

【釋】여기에서 원인과 결과 둘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부정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대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하면 원인과 결과는 영원히 화합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3_a_19L釋曰此謂因果二得同時者先已遮由時有別汝義不成作是觀察之與果永無和合如論偈說

원인이 만약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원인에 만약 화합이 있으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016_0493_a_22L因若不和合,
云何能生果
因若有和合,
云何能生果

【釋】지금부터 논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종자가 땅에 있을 경우 싹이 높은 산에서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이제 도리의 입장에서 저 벼 종자 중에 결과가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는 자에게 오류가 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3_b_01L釋曰此下作驗第一義中因不生果不和合故譬如種子在地芽不出高復次今有道理與彼執稻種中無果及有果者過如論偈說

원인 중에 결과가 만약 공하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원인 중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016_0493_b_05L因中果若空,
云何能生果
因中果不空,
云何能生果

【釋】여기에서는 종자에서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니, 앞에서 대답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그 밖의 결과와 같다. ‘원인 중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란 말하자면 결과가 이미 있기 때문에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 비유하면 원인이 원인을 발생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앞에서 이미 대답했기 때문이다.
016_0493_b_07L釋曰此謂種不生果以果空故如先所答譬如餘果因中果不空者謂果已有故因不生果譬如因不生因先已答故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결과가 일어나기 전에 이 결과가 먼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뜻이 없다. 지금 이 오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3_b_11L鞞婆沙人言果未起前此果先有論者言無如是義今爲遮此過如論偈說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공하지 않은 것은 소멸이 없네
생기와 소멸이 없기 때문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게 되네.
016_0493_b_13L未起果不空,
不空則無滅,
以無起滅故,
果得不空過

【釋】여기서는 결과가 연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과는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있으면서 일어난다면 이러한 뜻은 없다. 이미 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만약 일어나지 않으나 결과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바로 결과는 실체가 항상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는다. 그러나 집착하는 자들은 결과에 공하지 않다는 오류가 있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3_b_15L釋曰此謂果不從緣起以果有自體若有而起者無如是義已有故不須更起若謂不起而有果者是則果體應常不滅以是故果得不空過執者不欲令果有不空過如論偈說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고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소멸하지도 않네
결과가 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네.
016_0493_b_20L果不空不起,
果不空不滅,
以果不空故,
無起亦無滅

【釋】결과가 만약 공하면 생기와 소멸도 없다. 만약 반드시 있다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기가 없기 때문에 소멸이 없다. 이 까닭으로 결과가 만약 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일어나고 소멸하는가?또 어떻게 ‘이와 같이 결과는 생기와 소멸법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과가 만약 이미 있다면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을 볼 수 없다. 비유하면 현재의 모습과 같다.
016_0493_b_22L釋曰果若空則無起滅若定有者不須復起無起故無滅以是故果若不空云何起滅復次云何欲得如此果是起滅法故果若已有則不見有起滅法譬如現在相
또 어떤 노가야(路伽耶) 외도가 말하였다.
“결과가 아직 일어나기 전에 결과의 자체는 없다. 왜냐하면 결과의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이미 일어나면 또 다른 법의 실체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설은 허망하여 주장에 의미가 없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답하겠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016_0493_c_04L復有路伽耶言果未起前果無自體何以故果體空果已起者亦無他法體論者言說虛妄無有義理我今答汝何以故如論偈說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일어나고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소멸하는가
결과가 공하기 때문에
생기도 소멸도 없네.
016_0493_c_08L果空云何起,
果空云何滅
以果是空故,
無起亦無滅

【釋】이것은 말하자면 제일의제 중에는 결과가 공하여 생기가 있다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제일의제 중에 벼 싹 위에 보리 싹이 있다는 것은 실체로서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소멸한다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벼의 싹이 소멸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연에서 일어나는 것은 자체가 모두 공하다. 이것을 아법(我法)에서는 제일의제로 관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이 조금이나마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이들 사물은 인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세제에도 이러한 일은 없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016_0493_c_10L釋曰此謂第一義中果空而有起者不然何以故果無體故譬如空華一義中於稻芽上有麥芽無體體滅者是亦不然無體故譬如非稻芽滅復次從緣起者自體皆空是我法中第一義觀故若謂有少許物而不空此等之物則不從因緣生世諦之中亦無是事譬如空華
위의 게송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를 테면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생기와 소멸이 없다는 오류를 얻는다. 이제 그대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은 제일의제 중에 결과가 공해도 생기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과 같다. 제일의제에서 결과가 공한 것은 소멸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환영과 같다. 결과 또한 이와 같다.
016_0493_c_18L如上偈說起果不空果得不空過此謂果不空得無起滅過今令汝解第一義中果空而有起故譬如幻等第一義中果空以有滅故亦如幻等果亦如是
만약 결과가 다른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삼는다면 이러한 결과는 일어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없다. 세제 중에도 결과가 없기 때문에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또한 위에서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일어나며,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소멸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이른바 생기와 소멸 모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93_c_22L若果以無他體爲體者此果則無起無滅世諦之中亦無果故譬如空華亦如上說果空云何起果空云何滅此謂起滅俱無體故
이 결과가 이미 공하면 생기와 소멸이 없다. 그러나 외인은 결과에 생기와 소멸이 없다고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논험하겠다. 내입(內入) 등의 결과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과 같다. ‘일어나는 것이 없고 소멸하는 것이 없다’고 증험한 것에 의하여 그대가 ‘결과는 생기와 소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타파하였다. 그대의 차별법은 타파되므로 그대가 세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다시 능생(能生)의 원인인 이 원인은 결과와 같은가, 다른가?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4_a_03L此果旣空則無起滅然外人不欲令果無起滅故中立驗內入等果非無自體而有起譬如幻等以此無起無滅之驗破汝果有起有滅汝差別法破故汝立義之過復次能生之因此因與果爲一耶爲異耶其過如論偈說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결국 이런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역시 이런 주장도 있을 수 없다.
016_0494_a_09L因與果一者,
終無有是義,
因與果異者,
亦無有是義

【釋】어째서 원인과 결과가 같다거나 다르다고 할 수 없는가? 이 과실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4_a_11L釋曰何故因果不得一異耶是中過如論偈說

원인과 결과가 만약 같다면
일어나게 하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같게 되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네.
016_0494_a_13L因果若一者,
能所則爲一,
因果若異者,
因則同非因

【釋】역시에서 그대가 일으키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 어떻게 같은가? 또한 마치 불과 장작과 같으니, 어떻게 하나일 수 있나? 이 두 비유는 세간에 모두 본다. 이 까닭으로 내가 지금 증험하겠다. 원인과 결과는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으키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둘인 것과 같다. 이것은 같다고 헤아려 분별하는 오류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016_0494_a_15L釋曰此謂汝不欲得能生所生二如父與子云何爲一亦如火與薪云何得一此之二喩世閒共見以是故我今說驗因之與果不得爲一何以故能生所生有異故譬如父子二此謂計一者過
다시 다르다고 집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원인과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모든 것이 원인의 법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도 그대는 원인이 원인 아닌 것[非因]과 같다고 하지 않는다. 그대의 의도는 원인과 결과 두 법이 상속하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지금 묻겠다. 원인 중에 먼저 결과가 있다고 집착하면이 결과는 먼저 존재하던 것이 발생한 것인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이 발생한 것인가? 이 모두 옳지 않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4_a_21L復次執異者云何謂因與果異故譬如一切非因法而汝不欲因同非因汝意欲得因果二法相續不異復次今問執因中先有果者果爲先有已生爲未有而生是皆不其過如論偈說

결과가 이미 있다면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원인이 다시 어떻게 발생하겠는가?
016_0494_b_03L果若已有者,
何用從因生
果若未有者,
因復何能生

【釋】여기에서는 결과에 자체가 있다면 어떤 원인을 빌려 발생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세제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 결과에 자체가 없다면 허공의 꽃처럼 세제 중에 사람들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위의 게송에서 ‘결과가 공하면 어째서 발생하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다.
016_0494_b_05L釋曰此謂果若有自體者何假因生世諦之中亦復不能令人信解果若無自體者如虛空華於世諦中而亦不能令人解也如上偈說果空云何
이 관찰로써 제일의제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옳지 않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이는 원인이 아닌 것이다. 앞서 외도가 주장한 ‘능히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성립된 주장과 위배된다. 다시 지금 위배된다는 말은 제일의제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음을 말한다. 세제 중에 환화 등과 같은 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016_0494_b_10L以此觀察第一義中因能生果者不然若因不生果者則不是因如前外人所立能生果者因應處處爲因今爲破此因義不成汝亦違先所於第一義中成立因生果義復次今言違者謂於第一義中因不生果世諦之中有如幻化等生故
비세사 사람이 또한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 원인은 능히 결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은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끝내 ‘이것이 결과의 원인’이라고 지시하여 말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낙타 뿔로 된 활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존재하므로 말할 수 있다. ‘눈은 원인이고 식(識)은 결과’이며, ‘벼는 원인이고 싹은 결과’라고 설하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말한다. 만약 식과 싹의 비유가 성립할 수 있다면 내가 세운 주장이 성립할 수 있다. 그 증험은 이와 같다.”
016_0494_b_16L鞞世師人復言第一義中因能生果何以故世人咸言此果之因故當知因能生若因不生果者終不指示言此是果之因譬如駝角弓無故不說今以有故說如說眼是因識是果稻是因芽是果以有故說若說識與芽喩得成者卽是我所立義得成其驗如是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일찍이 조금이라도 결과의 발생이 제일의제에 있으면‘이것은 원인이고 이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고, 이와 같이 지시할 수 있다. 이제 발생시키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위에서 인용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한다’고 말한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그대의 주장은 틀렸다.”
016_0494_b_23L論者言若曾有少許果生是第一義者可得言此是因此是果可作如是指示今能生因無故汝上所引世人咸說是果之因者所立不成亦違汝
또한 어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화합법이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 화합법은 시간을 얻었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품의 첫머리에 그대들이 나를 부정하여 ‘결과의 발생과 소멸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원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홀로 원인만이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화합과 시간으로 인하여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이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말은 정확히 내 주장을 성립한다.”
016_0494_c_05L復有僧佉人言得和合法故果生此和合法由得時節故能生於果此品初彼遮我言果有生滅爲因故因不成者非是不成亦非獨因能生復由和合及得時節而能生果彼所言因不生果者正成我義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인연의 화합은 실체법이며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자체에서 발생한 후에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인가?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4_c_10L論者因緣和合者非是實法自體能生若自體生已可能生果今則不然以故其過如論偈說

자체(自體) 및 뭇 인연에서
화합은 발생하지 않네
자체에서 이미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016_0494_c_13L自體及衆緣,
和合不能生,
自體旣不生,
云何能生果

【釋】여기에서 화합은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 등과 간다. 또한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에서 화합(和合)을 부정하여 게송에서 “하나의 화합도 없으며 여러 화합도 없네. 만약 이것이 하나의 화합이라 말하여 마땅히 인연을 떠나 있어야 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제 그대를 위해 바른 뜻을 분별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4_c_15L釋曰此謂和合不生於果何以故實法故譬如幻等亦如提婆『百論』遮和合偈中說一和合者無諸和合亦若言是一者應離因緣有今當爲汝分別正義如論偈說

그러므로 결과는 연(緣)이 화합한 것에서도
화합하지 않은 것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화합법도 없네.
016_0494_c_20L是故果不從,
緣合不合生,
以果無有故,
和合法亦無

【釋】여기에서는 모든 연을 여의고 화합법은 없음을 이른 것이다. 다시 앞에서 이미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부정한 것과 같이, 지금 화합도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부정한다.어째서 발생하지 않는가? 이른바 이 화합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것도, 먼 곳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제일의제 중에 발생하지 않는다면 앞서 인연을 부정한 중에 이미 이해시킨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화합법은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고 화합법이 아닌 것도 결과를 발생하지 않는다.
016_0494_c_22L釋曰此謂離諸緣無和合法復次如先已遮因不生果今遮和合亦不生云何不生謂此和合非是近生非遠生第一義中不生者如先遮因緣中已令信解如是和合法不生果非和合法亦不生果
또한 『백론』 중에 “세간의 명자(名字)는 화합으로 인하여 있으며, 법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화합도 없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 까닭으로 품의 첫머리에 외도들이 설한 이유와 외도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오류가 있다. 시간의 법을 부정하여 원인과 결과에 자성이 없음을 이해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내 주장이 성립한다.
016_0495_a_05L又如『百論』中說世閒名字由和合有法體非有體非有故亦無和合以是故品初外人所說因者與出因過遮彼時法爲令信解因果無自性故是此品義意以是我義得成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 중에 설한 것과 같다.
“극용맹보살이여, 색에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다. 색에는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으며,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도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다. 왜냐하면 색에는 화합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색에 화합이 없다면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 또한 화합이 없다. 색을 보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보지 않아 작용[行]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016_0495_a_10L如『般若經』中說極勇猛色非因非果若色非因非果乃至受想行識非因非果何以故色無和合若色無和合乃至受想行識亦無和合不見色不見受想行識無所行是名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식취후세경(識趣後世經)』의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화합처(和合處)를 설하여 이것을 방편문(方便門)이라 한 것은 제일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하네.”
「관인과화합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95_a_15L如佛於『識趣後世經』中說偈言若說和合處是說方便門爲趣第一義智者如是解
釋「觀因果品」竟


21. 관성괴품(觀成壞品)
016_0495_a_18L般若燈論釋觀成壞品第二十一

【釋】지금 이 품도 또한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한다. 앞의 품에서 인과에는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미 신해(信解)시켰다. 여기에서는 모든 법에 생성(生成)과 괴멸(壞滅)이 없음을 현시(顯示)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016_0495_a_19L釋曰今此品者亦爲遮空所對治前品以因果無自性故已令信解爲顯示諸法無成壞故說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시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곧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이 원인도 없다. 비유하면 뱀의 다리와 같다.시간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성과 괴멸 두 법은 시간에 따라 전변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간이 원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인이 성립하기 때문에 곧 내가 세우려는 주장은 성립한다.”
016_0495_a_22L僧佉人言第一義中有時何以故是成壞因故若無時者則不是因如蛇足由有時故成壞二法隨時而是故說時爲因因得成故卽是我所立義得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성과 소멸 두 법은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는 것인가? 생성을 떠나지 않고 괴멸이 있는 것인가? 함께 있으면서 함께 괴멸이 존재하는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5_b_04L論者言成壞二法爲離成有壞爲不離成有壞爲與俱有壞是皆不然如論偈說

생성을 떠나 괴멸이 존재하지 않고
함께 있는 것에도 괴멸이 없네
괴멸을 떠나 생성이 존재하지 않고
힘께 있는 것에도 생성이 없네.
016_0495_b_06L離成無有壞,
與俱亦無壞,
離壞無有成,
與俱亦無成

【釋】우리 불법의 뜻도 그와 같고 그와 같다. 마치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이 원인이 된다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생성을 더나 괴멸이 존재한다면 생성에 원인이 없는 것은 괴멸이며, 괴멸에는 원인이 없다. 또한 생성의 법은 허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성이라 하는가? 이른바 뭇 연(緣)이 화합하는 것이다.
016_0495_b_08L釋曰我佛法義如是如是如汝所說時爲因者其義不成何以故若離成有壞者則不因成有壞壞則無因無成法可壞故云何爲成謂衆緣合
무엇을 괴멸이라 하는가? 이른바 중연(衆緣)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존재한다면 생성이 없이 무엇이 장차 허물어지겠는가? 비유하면 병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생성을 떠나 괴멸을 없다. 만약 함께 있어 괴멸이 존재한다고 하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법이 먼저 달리 생성한 연후에 화합한다. 이 화합법은 다른 것과 분리된 것은 아니다.
016_0495_b_12L云何爲壞謂衆緣散復次若離成有壞者無成誰當壞故譬如無甁是故離成無壞若謂與俱而有壞者是亦不然何以故法先別成然後有合合法不離於異
만약 다른 것과 분리된다면 괴멸에는 원인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함께 있어도 괴멸은 없다. 이와 같이 만약 괴멸을 떠나거나 괴멸과 함께하는 경우에도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괴멸을 떠나 생성이 존재한다면 생성은 곧 상주하는 것으로, 상주는 괴멸의 상(相)이 아니다. 그래서 실체로서 법이 상주함을 볼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괴멸을 떠나 또한 생성은 없다. 만약 함께 있어 생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생성과 괴멸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한순간에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016_0495_b_17L若離異者壞則無因是故與俱亦無壞如是若離壞共壞無有成者何以故若離壞有成成則爲常常是不壞相而實不見有法是以是故離壞亦無成若謂與俱有成者是亦不然成壞相違云何得一時俱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어째서 다른 사람의 주장에는 오류가 있고, 자신의 주장은 성립하는가? 자신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청변 논사가 대답하였다.
“그대의 주장은 틀리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5_b_23L僧佉人言何有與他立過自義得成自若成者應說道理論者答言汝義非也其過如論偈說

생성을 떠나 곧 괴멸이 없는데
어떻게 괴멸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떠나 태어나는 것이 없으니
괴멸이 없는데 어떻게 생성이 있겠는가?
016_0495_c_02L離成則無壞,
云何得有壞
離死則無生,
無壞何有成

【釋】여기에서는 생성을 떠나 괴멸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간의 사람은 다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얘기할 필요가 없다. 생성을 떠나 괴멸이 없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함께 있어도 괴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5_c_04L釋曰此謂離成無有壞法世閒之人皆共解故不須廣說釋離成無壞已復次與俱亦無壞者如論偈說

만약 생성과 괴멸이 함께 한다면
어떻게 장차 존재할 수 있으리오.
또한 태어남과 죽음을
동시에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네.
016_0495_c_07L若成與壞俱,
云何當可得,
亦如生與死,
不可得同時

【釋】여기서는 괴멸과 생성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증험하겠다. 왜냐하면 생성은 괴멸의 연(緣)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죽음과 태어남은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함께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두 번째로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다고 분별하는 것은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5_c_09L釋曰此中說驗壞之與成非同時有何以故成是壞緣故譬如死與生不可得俱釋不俱已復次第二分別離壞無成者如論偈說

만약 괴멸(壞滅)을 떠나 생성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실체의 상(上)에 무상(無常)하여
언제나 존재하네.
016_0495_c_13L若離壞有成,
云何當可得
諸體上無常,
一切時中有

【釋】여기에서는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마치 주장명제 중에 모든 실체[體]가 무상하다고 한 것처럼 이른바 색법(色法) 등의 자체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무상의 자체(自體)와 같다.
016_0495_c_15L釋曰此謂離壞無成何以故如立義中諸體無常者謂色法等自體無常譬如無常自體
다시 정량부(正量部)의 사람이 말하였다.
“법이 비록 무상하지만 괴멸의 원인이 오면 법체(法體)는 곧 괴멸하여 모든 시간에 무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016_0495_c_18L復有正量部人言法雖無常得壞因來法體卽壞非一切時皆有無常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비유를 하나 들겠다. 어떤 사람이 설사하는 약을 복용하여 설사하고서는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이는 하늘이 나를 설사시킨 것이지 약 때문에 설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도 또한 이와 같다. 무상의 법은 언제나 법체를 허물어뜨린다. 그러나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한다면 이 사실은 옳지 못하다. 만약 괴멸의 원인을 얻고 무상이 비로소 법체를 허문다면단지 이 괴멸의 원인이 법체를 허무는 것이다. 어떻게 다시 무상이 허물 수 있겠는가?
016_0495_c_20L論者言若爾者譬如有人服瀉藥已便瀉乃語他言是天瀉我不言藥瀉汝亦如是無常之法一切時中能壞法體而言待壞因來是事不然若得壞因無常始能壞法體者但是壞因能壞法體何得復言無常能壞
지금 외도에게 묻겠다. 법체는 괴멸의 성품이며, 괴멸의 원인이 있어야만 괴멸할 수 있는가? 괴멸의 성품이 아니며, 괴멸의 원인이 있어야만 괴멸할 수 있는가? 이 법체가 만약 괴멸의 성품이어서 괴멸의 원인이 와야 괴멸할 수 있다면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으로 옳지 못한가? 법체가 생기 할 때 쉴 사이 없이 곧바로 허물어진다. 또한 생기하고 다시 소멸하여도 두 번째 찰나에 도달하지 못한다. 어째서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허물어지는가? 만약 법 자체가 허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유하면 열반과 같고, 또한 저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허물어진다.
016_0496_a_03L今問外人法體爲是壞性得壞因來壞耶爲非壞性得壞因來壞耶此法體若是壞性得壞因來壞者不然何故不然法體起時無閒卽壞亦起便滅不到第二剎那云何得待壞因來壞若法自體非壞者如涅槃亦不待彼壞因來壞
다시 괴멸에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괴멸에 원인이 없기 때문에 법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비유하면 무위(無爲)와 같다. 이 증험으로 인하여 저 괴멸의 원인이 논파된다. 저 원인이 이미 논파되면 곧 법체가 논파가 된다. 그대가 세운 주장은 오류이며, 또한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전후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동시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016_0496_a_09L復次壞無有因壞無因故法則不壞譬如無以此驗故破彼壞因彼因旣破破法體是汝立義之過且成壞二法前後而有者不然釋離壞無成已次同時有成壞者義亦不然何以故如論偈說

생성과 괴멸을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또한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라고 말하는 것처럼 옳지 못하네.
016_0496_a_15L成與壞同時,
云何而可得
亦如生與死,
同時者不然

【釋】이는 관할 때 주장이 앞과 같음을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서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96_a_17L釋曰此謂作是觀時義同前解復次互不成者如論偈說

생성과 괴멸을 서로 성립하게 한다 해도
이 둘은 성립은 존재하지 않고
이 둘을 떠나 서로 성립한다고 해도
두 법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016_0496_a_19L成壞互共成,
此二無有成,
離此二互成,
二法云何成

【釋】이는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외도가 앞에서 “시간이 존재하여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살바다비바사(薩婆多鞞婆沙)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이 자성(自性)의 괴멸법(壞滅法)은 생기하지 않고 곧바로 소멸한다. 생기하여 간단(間斷)없이 머물기 때문이다. 이 머묾은 간단없이 소멸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사실은 옳지 못하다.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a_21L釋曰此謂成壞二法不可得成如外人先說有時而爲成壞因者因則不薩婆多鞞婆沙人復言此自性壞法非起而卽滅由起無閒有住故住無閒而有滅論者言是事不然義如論偈說

소멸하는 것은 생기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생기하지 않네
소멸하는 것이 있다면 괴멸은 없고
소멸하지 않은 것도 괴멸은 없네.
016_0496_b_04L盡者無有起,
無盡亦無起,
有盡者無壞,
無盡亦無壞

【釋】이는 만약 법에 무상이 존재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소멸이라 한다. 소멸이 존재한다면 생기는 없다. 생기와 소멸 두 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태어남과 죽음과 같다. 만약 생기하여 간단없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소멸의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말한 것처럼 생기와 소멸의 법은 세제 중에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멸의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유분별(思惟分別)해서는 안 된다. 소멸이 없다면 괴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탈과 같다.
016_0496_b_06L釋曰此謂若法有無常者名爲盡盡者則無起起盡二法相違故譬如生與死若言起已而無閒不滅者非盡法以是故如向所說起盡法者於世諦中不成故有盡法者不須思惟分別無盡者非壞自體故譬如解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마땅히 생성과 괴멸이 존재해야 한다. 체법(體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성과 괴멸이 없다면 또한 체법도 없다. 비유하면 두꺼비의 털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물체의 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
016_0496_b_13L鞞世師人言應有成壞體法有故若無成壞亦無體法譬如蟾蜍毛而成壞是物體法故必有成壞故
그러므로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만약 한 사물이 실체로서 생성과 괴멸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생성과 괴멸의 법은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성과 괴멸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b_15L論者第一義中若有一物實有成壞者應說成壞法然無成壞可說故其義如論偈說

만약 저 생성과 괴멸을 떠나면
물체는 존재하지 않네
생성과 괴멸의 두 법은
물체를 떠나 또한 없네.
016_0496_b_18L若離彼成壞,
則無有物體,
是成壞二法,
離物體亦無

【釋】물체는 생성을 실체로 삼기 때문에 생성하여 이미 실체가 없다면 그대가 이전에 체법(體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든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하는 대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주체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그대가 물체로서 원인을 삼는다면 지금 그 오류를 말하겠다.”
016_0496_b_20L釋曰物體者以成爲體故成旣無體汝向說體法有故爲因者不成何以所依無體故能依亦不成復次汝以物體爲因者今說其過
경량부[修多羅] 사람이 말하였다.
“물체는 실체가 없어 자성(自性)이 곧 공하다. 그렇지만 사물 위[上]에 생성과 괴멸의 법은 존재한다.”
살바다(薩婆多)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사물이 실체(實體)가 존재한다면 자성은 공하지 않다. 사물 위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
이제 총괄적으로 그 두 부파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c_01L修多羅人物體無實自性是空然於物上有成壞法薩婆多人復說言物有實體自性不空於此物上而有成壞今摠答彼二部成壞如論偈說

생성과 괴멸의 두 법이 존재하여
물체가 공하다면 옳지 않네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존재하여
실체가 공하지 않다는 것도 옳지 않네.
016_0496_c_05L有成壞二法,
物體空不然,
有成壞二法,
體不空不然

【釋】여기서 증험을 세우는 것은 위와 같다. 체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체가 존재한다면 괴멸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들이 세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거듭 오류를 두는 도리(道理)일 뿐이다. 이 생성과 괴멸의 법은 같은가, 다른가?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이 뜻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c_07L釋曰此中立驗如上體法有故若言自體有者則應不壞以是故汝等立因不成復次更有與過道理此成壞法爲一耶爲異耶二俱不然是義云如論偈說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일체(一體)라는 것은 옳지 않네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이체(異體)라는 것도 옳지 않네.
016_0496_c_12L是成壞二法,
一體者不然,
是成壞二法,
異體者不然

【釋】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과 같다. 그러나 이 두 법은 똑같이 한 사물에 의지한다. 비유하면 나머지 물체와 같다. 이 또한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비세사 사람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c_14L釋曰此謂相違故譬如愚與智然此二法同依一物譬如餘物體此亦因義有不成過鞞世師人說偈言

나는 항상 물체에는 생성하고
또 괴멸이 존재한다고 보네.
이 까닭으로 체법(體法)은
반드시 존재하며 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네.
016_0496_c_17L我常見物體,
有成亦有壞,
是故知體法,
定有而不空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진실로 보는 것은 단지 범부의 지혜와 같으며 제일의제는 아니다. 지금 장차 그대가 그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c_19L論者言汝實見者但是同凡夫智第一義今當爲汝分別其意如論偈說

생기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부정하네
생성을 보는 자는 우치(愚癡)하며
괴멸을 보는 자도 그러하네.
016_0496_c_21L起者先已遮,
無起法亦遮,
見成者愚癡,
見壞者亦爾

【釋】이는 생성과 괴멸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외도가 “생성과 괴멸을 보는 자는 어떻게 우치(愚癡)하여 제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청변 논사는 “이에 관해서 이미 대답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대가 뜻이 불충분하다면 지금 다시 말할 것이다. 제일의제 중에 만약 물체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이 생성과 괴멸은 저 실체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은 실체가 있어야 실체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실체 없이 실체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6_c_23L釋曰此謂無成壞體外人若言見成壞者云何知是愚癡非第一義耶者言此先已答汝若意由不足今更爲說於第一義中若見有物體者成與壞可依彼體然此物者爲有體能生體爲無體能生體是皆不然以故其義如論偈說

유체(有體)에서 실체가 발생하지 않고
또한 무체(無體)도 발생하지 않네
무체에서는 실체를 발생시키지 않고
또한 무체도 발생시키지 않네.
016_0497_a_07L有體不生體,
亦不生無體,
無體不生體,
亦不生無體

【釋】유체에서 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 중에는 무체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발생한 실체와 같다. 만약 외도가 “마치 종자(種子)의 실체처럼 나중 순간에 삭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 실체는 실체를 발생시킨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싹이 아직 트지 않았을 때에 싹의 실체는 없다. 싹의 실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싹이 아직 트지 않았을 때 명자(名字)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나머지 물체와 같다.
016_0497_a_09L釋曰有體不生體者第一義中無體譬如已生體若外人言如種子體後時能生芽故謂是體能生體者亦有過何以故芽未生時亦無芽體以稻體不生故芽未生時無有名字此謂未有言說故譬如餘未生物體
무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무체에서 실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원인의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니, 또한 토끼의 불과 같다. 무체에서 무체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증험하여 타파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묻겠다. 실체 등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인가? 다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똑같이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7_a_15L不生無體者體無故譬如兔角無體不生體者謂無因體體無生故亦如兔角無體不生無體者先已說驗破今問體等爲自生耶爲他生耶有過故其義如論偈說

법체(法體)는 스스로 발생하지 않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며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도 않네
지금 어느 곳에서 발생을 말하겠는가?
016_0497_a_20L法體不自生,
亦不從他生,
亦無自他生,
今說何處生

【釋】이와 같이 발생하지 않음을 앞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생성과 괴멸에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근본적으로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만약 제일의제 중에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면 지금 오류에 대해 말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7_a_22L釋曰如是不生前已廣說故此謂畢竟無生以成壞無有體故汝根本因義不成若第一義中欲得有體者當說過如論偈說

모든 법에 실체가 존재한다면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질 것이네
이는 법을 상주(常住)하는 것
혹은 무상(無常)한 것으로 용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네.
016_0497_b_03L諸法有體者,
卽墮斷常見,
當知所受法,
若常若無常

【釋】어째서 그러한가? 말하자면 이 법은 상주하거나 무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주한다면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견의 오류이다. 무상하다면 허물어지기 때문에 이는 단견의 오류이다.
어떤 외도가 말하였다.
“나에게 이러한 오류가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 게송을 인용하여 ‘모든 법에 실체가 존재한다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견도 아니네’라고 말한다.”
청변 논사가 물었다.
“어째서 그러한가?”
외도가 다시 『중론』의 게송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016_0497_b_05L釋曰何故爾耶謂此法若常若無常何以故常者不壞故是常見過常者壞故是斷見過有外人言我無是過其義云何引上偈本云諸法有體者非常亦非斷論者問言何故爾外人復引論偈答曰

생성(生成)과 멸진(滅盡)의 상속(相續)은
결과와 원인으로부터 연유하네
원인이 소멸하여 결과가 일어나
단멸하지도 않고 혹은 상주하지도 않네.
016_0497_b_11L起盡相續者,
由果及與因,
因滅而果起,
不斷亦不常

【釋】외도의 외도는 원인이 비로소 소멸하는 순간에 결과의 생기가 있으므로 단멸이 아니다. 결과가 비로소 생기할 때 원인의 소멸이 있으므로 상주가 아니다. 또한 경에서 “오음(五陰)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이나 단멸은 아니다”고 한 것과 같다. 이 주장 때문에 원인이 결과와 함께 단멸하지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016_0497_b_13L釋曰外人意謂因始滅時有果起故不斷果始起時有因滅故不常亦如經說五陰無常苦空無我而不斷滅以是義故因之與果非斷非常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주장은 상응하지 않는다. 먼저 소멸하고 나중에 생기한다는 것이 오류임을 이제 말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7_b_17L論者若如是者義不相應前滅後起說其過如論偈說

생기(生起)와 멸진(滅盡)의 상속이
원인과 결과로부터 연유하고
원인이 소멸하여 결과가 생기한다면
단멸하거나 혹은 상주하는 것이네.
016_0497_b_19L是起盡相續,
由因及果者,
因滅而果起,
若斷及若常

【釋】여기에서는 원인이 소멸하고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단멸(斷滅)의 오류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미 소멸한 것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씨를 태우는 것과 같다.
016_0497_b_21L釋曰此謂因滅更不生故則墮斷過已滅者不起故譬如燋種
비세사 사람이 청변 논사에게 말하였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사물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이 결과는 곧 연(緣)도 아니고, 그 연을 떠난 것도 아니며,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청변 논사가 앞에서 이루려고 한 것인데 지금 다시 오류라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016_0497_b_23L鞞世師等謂論者言如彼論中偈說若物從緣此果不卽緣亦不離彼緣非斷亦非常此謂論者先所欲得今復說爲過者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이 게송은 세제 중에서 단멸도 없고 상주도 없다고 한 것이지, 제일의의 경우는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일체법은 단멸과 상주의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97_c_04L論者言此語不善何以故此偈於世諦中說不斷不常非第一何以故第一義中一切法無斷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이 변하여 결과가 되고 결과에 머물기 때문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멸과 상주의 오류는 없다.”
016_0497_c_07L僧佉人言因變爲果住果故得說有體無斷常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전변설(轉變設)은 증험될 수 없어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 전변의 주장에 대하여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대가 다시 전변에 관한 분별을 일으킨다면 지금 다시 증험하겠다. 만약 사물이 변할 수 없다면 끝내 전변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변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존재한다면 주장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7_c_08L論者言是義不然轉變無驗不令人解轉變義者先已遮故汝今復起轉變分別者今更說若物不可變者終無有變何以故不可變故譬如兔角復次若諸體有自體者義不應爾其過如論偈說

먼저 자체가 존재하다가
나중에 없다면 옳지 못하네
열반하는 순간에 다시 단멸한다면
단멸의 오류가 있는 것이네.
016_0497_c_13L先有自體者,
後無則不然,
涅槃時便斷,
卽有斷滅過

【釋】지금 실체에는 생기가 있고 소멸이 있는 것을 현견(現見)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실체에는 자체가 없다. 왜 그러한가? 생기와 소멸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서 먼저 자체가 존재한다면 아라한(阿羅漢)의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은 나중 순간에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곧 단멸(斷滅)의 오류가 된다. 이 오류를 그대는 피할 수 없다.
016_0497_c_15L釋曰今現見此體有起有滅是故諸體無自體所以者何起滅法故此義先已說復次若諸體先有自體者羅漢心心數法後時更不生故卽斷滅過此過汝不能避
만약 그대의 뜻이 열반하는 순간 곧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또한 단멸로부터 열반에 들기 이전의 존재들이 상속하는 순간, 우리들에게는 어떤 단멸의 오류가 있는가? 그리고 상속(相續)하여 단멸의 오류가 없다면 그대는 잘못 말한 것이다. 내가 앞에서 열반하는 순간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열반에 들기 이전의 모든 존재는 상속한다”고 말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마치 앞에서 열반하는 순간 다시 단멸한다고 말하듯이 이미 이해시킨 것은 단견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016_0497_c_20L若汝意言涅槃時是斷者亦從是斷未涅槃前諸有相續時我何有斷滅過而謂相續無斷過者汝不善說我前說涅槃時斷正遮汝言未入涅槃前諸有相續如前言涅槃時便斷者此已令解是斷見過故
만약 나중에 단멸한다고 하면 해탈에 장애가 된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단견(斷見)으로는 해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대에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마음의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니 지금 다시 경청하시오. 현재의 존재가 임종[末後]하는 순간 이를 ‘사유(死有)’라 이름한다. 아직 오지 않은 존재 중에 처음 생(生)을 받는 마음을 곧 ‘초유(初有)’라 한다. 여기서 주장의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8_a_03L若後時是斷者障於解脫何故爾耶由此斷見不得解脫故是答汝汝心猶不足者今當復聽現在有末後命終時是名死有未來有中初受生心者是名初有此中義如論偈說

사유(死有)는 곧 사멸하니
초유(初有)를 취(取)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498_a_08L死有者是滅,
取初有不然,
死有未滅時,
取初有不然

【釋】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사유가 곧 사멸한다면 미래의 존재를 취하지 못한다. 곧 사멸하기 때문이고 사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라한은 사유와 같다. 또한 사유를 과거의 존재라 이름한다. 초유(初有)를 현재의 존재라고 한다. 만약 사멸하여 다음에 초유가 생기한다면 이는 곧 무인(無因)이다. 만약 이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능히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류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증험하겠다.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으면 능히 취할 수 없다. 초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현재의 존재와 같다.
016_0498_a_10L釋曰此中說驗第一義中死有是滅不取未來有是滅故是死有故如阿羅漢死有復次死有名過去有初有名現在有若死有滅次起初有是則無因若言此死有未滅時能取初有是有故得無過者此中說驗死有未滅者不能取初有未滅故如現在有
외도가 다시 말하였다.
“사유는 사멸하려 하면 초유를 능히 취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또한 잘 말하지 못했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8_a_18L外人復言死有欲滅能取初有論者言亦不善說其過如論偈說

이 사유가 사멸할 때
능히 초유가 발생한다면
사멸하는 순간은 곧 같은 존재이고
발생하는 순간은 다른 존재이네.
016_0498_a_19L是死有滅時,
能生初有者,
滅時是一有,
生時是異有

【釋】여기에서는 사멸하는 순간과 발생하는 순간의 두 존재는 각기 다르기 때문인데, 어떻게 능히 취할 수 있는가?
016_0498_a_21L釋曰此謂滅時生時二有各異故何能取耶
외도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마치 그들이 말한 것과 같다. 상속(相續)이 존재하되 실체가 다르다면 나 또한 이와 같다.제바달다(提婆達多)의 사유(死有)는 제바달다의 초유(初有)를 취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의 사유와 같다. 또한 그대가 이미 사멸하거나, 아직 사멸하지 않거나 사멸할 때에 초유를 취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위의 두 경우처럼 오류이다. 또 그대가 사멸하여 아직 현전(現前)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취한다고 말한다면 앞의 두 경우와 같이 오류이다. 이와 같이 발생하는 순간과 이미 발생하였을 때 초유를 취한다면 또한 옳지 못하다. 다시 앞에서와 오류가 있다. 이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8_a_23L外人答言如彼所說有相續而體異者我亦如是論者言提婆達多死有不取提婆達多初有有異譬如耶若達多死有又復汝謂已滅未滅滅時取初有者不然如上二有過又復汝謂若滅未現前能取初有者同前二有過如是生時及已生取初有者亦不然還如前過以是故如論偈說

사멸하는 순간과 발생하는 순간
초유(初有)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네
그런데도 사멸된 음(陰)이
나중에 또다시 발생하는가?
016_0498_b_08L滅時及生時,
取初有不然,
而此滅陰者,
後復還生耶

【釋】여기서는 외도의 인정할 수 없는 이미 사멸된 음이 거듭 다시 중생(重生)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한 순간에 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초유가 사멸할 때 곧바로 다음의 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지금 마땅히 어느 음(陰) 중에 존재하다 죽으면 곧바로 이 음 중에 태어나야지, 나머지 음 중에 태어나서는 안 된다.
016_0498_b_10L釋曰此謂外人不欲得已滅之陰還復重生如一人一時有二自體者無若謂初有滅時卽後有生者今應隨在何陰中死卽於此陰中生不應餘陰中生
이와 같이 사유가 이미 사멸하였는데 초유를 취하는 것을 성립하지 않는 것을 이미 신해(信解)시켰다. 사유가 멸할 때 능히 초유를 취하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미 사멸하였거나 또한 지금 사멸하는 것은 다 성립하지 못한다. 마치 내가 말한 바의 도리와 같이 죽는 순간 모든 음이 이미 사멸하고 다시 이 음으로써 상속이 발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98_b_15L如是死有滅已能取初有者不成已令信解死有滅時能取初有者亦不成以是故已滅及滅時俱不成如我所說道理死時諸陰滅已還用此陰相續生者亦不然其過如論偈說

이와 같이 삼시(三時) 중에
상속(相續)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만약 삼시가 없다면
어디에 상속이 존재하리오.
016_0498_b_20L如是三時中,
有相續不然,
若無三時者,
何有有相續

【釋】여기에서 사유가 상속하여 초유를 발생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상속은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말[語]이란 세제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세운 주장이 논파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품의 첫머리에서 외도가 이와 같이 시간은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자세히 말하였다. 이 원인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세우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생성과 괴멸은 자성이 없다는 것을 중생에서 신해(信解)시키려는 것이 품에서 주장하는 의도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기서부터 경(經)을 인용하여 현성(顯成)한다.
016_0498_b_22L釋曰此謂死有續生初有者不然續不斷不常語者是世諦非第一義是故我所立者不破以是故如品初外人說有如是時爲成壞因者廣說此因過故立時不成以成壞無自性令物信解是品義意是故此下引經顯成
마치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 중에 설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색에는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는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 만약 수ㆍ상ㆍ행ㆍ식에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면 이를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셨다.”
「관성괴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98_c_06L如『般若』中說佛告極勇猛色不死不生受想行識不死不生色受想行識無死無生是名般若波羅蜜
釋「觀成壞品」竟
般若燈論釋卷第十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