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釋】지금 이 품도 또한 공(空)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전도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자부(自部)의 사람이 말하였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번뇌는 전도(顚倒)에서 일어난다. 전도로 인하여 욕심 등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주장은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분별에서 번뇌가 일어나 욕심과 성냄 등이 있다고 하네 선(善)과 불선(不善)의 전도는 연(緣)으로부터 일어나네.
016_0505_c_10L分別起煩惱, 說有貪瞋等, 善不善顚倒,
從此緣而起。
【釋】여러 논에 “욕심과 성냄 등은 차례에 따라 선과 불선을 일으킨다”고 말한 것은 애(愛)와 애 아닌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일어나며, 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르게 사유하지 않은 분별은 번뇌를 일으키는 연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5음(陰) 등에는 자체가 존재한다. 제일의제 중에 5음 등은 인연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욕심 등과 같다. 만약 자체가 없다면 연에서 생기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와 애 아닌 것의 전도는 모두 연(緣)에서 생기하네 자아[我]에 자체가 없으므로 번뇌 또한 실체가 아니네.
016_0505_c_19L愛非愛顚倒, 皆從此緣起, 我無自體故,
煩惱亦非實。
【釋】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욕심 등의 번뇌가 제일의제 중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비유가 빠졌으므로 주장에 오류가 있다.그대가 “자아[我]는 세제(世諦)로써 비유되며 제일의제는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장하려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만약 세제 중에 존재가 성립한다면 오히려 나의 주장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아가 만약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두 경우가 다 성립하지 않네. 자아를 원인으로 하여 번뇌가 존재하고 자아 없이는 그것들은 생기하지 않네.
016_0506_a_04L我若有若無, 是二皆不成, 因我有煩惱,
我無彼不起。
【釋】여기에서 자아는 세제에서도 성립하지 않고 제일의제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아를 떠나면 번뇌는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지하는 주체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대상도 또한 실체가 없다. 주장을 개오(開悟)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자아를 원인으로 하여 번뇌가 존재하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번뇌는 곧 아법(我法)이고, 또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의 자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관아품(觀我品)」에서 관한 것처럼 번뇌에는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증험은 다음과 같다. 제일의제에 욕심 등이 다 없다. 자아가 의지하는 것은 무체(無體)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석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아이의 피부 색깔이 흰지 검은지 말할 수 있겠는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자아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오로지 마음과 번뇌가 화합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번뇌는 곧 마음 위의 법이다. 그대가 세운 무아(無我)라는 주장은 그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틀리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무엇에 저 번뇌가 있는가? 존재한다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하네 만약 중생을 떠나 있다면 번뇌는 속할 곳이 없네.
016_0506_a_19L誰有彼煩惱, 有義則不成, 若離衆生者,
煩惱則無屬。
【釋】이는 번뇌가 곧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곳에서 중생을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중생을 떠나면 번뇌는 속할 곳이 없다. 마음의 생기에 관하여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식(識)의 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이며, 또한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마음에 관한 그대의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나의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번뇌가 없다는 주장을 용인하는 것은 비존재를 실체로 삼는 것이다. 무체(無體)의 실체가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실체는 다시 서로 체상(體相)이 없다.”
016_0506_b_03L自部人言:彼受無煩惱義者則以無爲體,無體之體成故,諸體更互無體相。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모든 실체에는 병이나 비단이나 나머지 다른 사물 등이 존재한다고 하면 실체가 있는 경우와 실체가 없는 경우에 지각의 원인을 일으킬 수 있는가? 병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 이 병과 청색ㆍ황색ㆍ흑색 등이 화합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청색과 황색 등의 색깔이 사람을 지시한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만약 비존재인 병과 비단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청색과 황색 등의 색(色) 또한 사람에게 지시할 수 없다.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는 궁극적으로 주인이 없고 실체가 없다는 주장은 마치 석녀의 아이처럼 청색과 황색의 상(相)이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비존재를 실체로 삼는다는 뜻은 성립하지 못한다. 지금 다시 유식학파에게 답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5음도 없고 5음을 떠난 것도 없으니 5음 중에 여래는 없네 여래 중에 5음이 없으니 여래에 5음이 있지 않네.
016_0506_b_19L非陰不離陰, 陰中無如來, 如來中無陰, 非如來有陰。
모든 번뇌도 그러하다. 다섯 가지 중에 번뇌는 없어도 고(苦)를 일으키므로 번뇌라고 이름한다. 탐욕에 물든 사람은 번뇌가 아니다. 지금 다르지 않다는 뜻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탐욕에 물든 사람이 곧 번뇌라면 불사르는 자와 불사르는 대상이 동시에 하나가 되는 오류가 생긴다. 또 번뇌와 다름없이 탐욕에 물든 자가 존재한다는이 주장은 이미 앞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다시 번뇌와 달리 탐욕에 물든 자가 존재한다면 번뇌를 떠나 홀로 탐욕에 물든 자가 있다는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이체(異體)가 성립하지 않는다. 탐욕에 물든 자에도 번뇌는 없다. 번뇌에도 탐욕에 물든 사람은 없다. 탐욕에 물든 자가 아니어도 번뇌는 존재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추구해도 번뇌에는 실체가 없다. 번뇌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능히 세우려는 것[能成法]이 없다. 이는 그대의 비유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의 전도는 본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네 무엇을 연(緣)으로 삼아 번뇌를 일으키는가.
016_0506_c_07L愛非愛顚倒, 本無有自體, 以何等爲緣,
而能起煩惱?
【釋】마치 아법(我法)처럼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의 전도에는 본래 자체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번뇌는 연(緣)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다. 세우려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주장은 오류이다. 다시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색(色) 등의 여섯 대상에서 전도가 일어난다. 어째서 비존재란 말인가? 그것이 없다고 말하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색깔ㆍ소리ㆍ향ㆍ맛ㆍ감촉과 법은 여섯 가지이네 애(愛)와 애가 아닌 것이 연(緣)이 되어 사물에 대해 분별을 일으키네.
016_0506_c_15L色聲香味觸, 及法爲六種, 愛非愛爲緣,
於物起分別。
【釋】여기에서는 여섯 대상을 연하여 능히 모든 번뇌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애와 애가 아닌 것이 전도하여 연이 되고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을 일으킨다. 제일의제의 사물에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섯 대상은 실체가 없다. 비유하면 색명인 자의 안식(眼識)과 같다. 또한 욕심과 성냄 등은 전도분별을 일으킨다. 마치 내가 말하는 것과 같다. 원인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전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비유에 오류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틀리다. 모두 허망하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07_a_01L論者言:汝語非也,皆是虛妄。如論偈說:
색깔과 소리와 향과 맛과 감촉과 법의 실체는 여섯이 되네. 마치 건달바(乾闥婆)의 성(城)과 같고 불꽃과 같고, 또한 꿈과 같네.
016_0507_a_02L色聲香味觸, 及法體六種, 如乾闥婆城,
如焰亦如夢。
【釋】이와 같은 자체에는 다 자체가 없다. 세분(勢分) 또한 없고, 나아가 세제를 비방하는 오류도 없다. 무슨 오류는 없는가?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건달바의 성과 같은가? 시간과 공간 등으로써 뭇 사람이 함께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이름하여 건달바의 성과 같다고 한다. 어째서 불꽃과 같다고 하는가? 비유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뜨거울 때 불꽃을 보고 “이것은 물이다”고 말하고 이를 뒤쫓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부질없어 스스로 피로해져도 결국 얻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체는 다 공하다. 법에는 집착하는 범부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불꽃과 같다고 말한다. 어째서 꿈과 같은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사념(思念)하는 원인과 결과가 실체로서 없고 일체법에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름하여 마치 꿈과 같다고 한다. 만약 색 중에 있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愛) 혹은 애가 아닌 것을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으리오 마치 환인(幻人)과 같고 또한 거울 속의 형상과 같네.
016_0507_a_14L若愛若非愛, 何處當可得, 猶如幻化人,
亦如鏡中像。
【釋】제일의제에서는 애와 애가 아닌 것 모두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색(色)의 모습 등은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마치 환화인(幻化人)과 같다고 하는가? 진실하지 않은 경계에서 비슷하게 현현(顯現)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형상(形相)과 같다고 하는가? 사람의 노력 없이도 나타날 수 있고, 형상(形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대가 위에서 제시한 이유와 주장 등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사물의 실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애착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욕심이 일어나겠는가? 불애(不愛)가 만약 무체(無體)라면 어느 곳에서 성냄이 일어나겠는가?
016_0507_b_06L無有可愛者, 何處當起貪, 不愛若無體,
何處當起瞋?
【釋】두 가지에 실체가 없으므로 어리석음 또한 실체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말한 바의 오류와 같은 것은 지금 다시 그대에게 있다.
016_0507_b_08L釋曰:彼二無體故癡亦無體,是故如所說過今還在汝。
경량부[修多羅]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애와 애 아닌 것에 전도가 있다. 마치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경에서 말씀하셨다면 이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무아(無我)를 말하면 반드시 무아인 것과 같다. 지금 경(經) 중에 현저히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른바 무상(無常)을 상주(常住)로, 무아를 자아[我]로, 무락(無樂)을 낙(樂)으로, 부정(不淨)을 청정(淸淨)으로 계탁하는 것을 이름하여 전도(顚倒)라고 한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애와 애 아닌 것의 전도가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제 중에 애와 애 아닌 것의 전도가 있다. 제일의제 중에 있지 않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07_b_16L論者言:於世諦中有愛非愛顚倒,非第一義中有,是故我說無過。如論偈說:
제일의제에서는 궁극적으로 전도가 없으며 여래께서는 자아[我]와 무아(無我) 등을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네.
016_0507_b_18L於第一義中, 畢竟無顚倒, 如來終不說,
是我無我等。
【釋】제일의제 중에서도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를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대의 비유와 제시한 이유에는 실체가 없다.
016_0507_b_20L釋曰:第一義中亦不說我無我故,汝譬喩及出因無體。
다시 경량부 사람이 의도를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전도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생사에 수순하는 것이고,둘째는 열반에 수순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생사에 수순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무상을 상주로 무아를 자아[我]로, 무락(無樂)을 낙(樂)으로, 무정(無淨)을 청정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무엇을 열반에 수순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무상에 대하여 무상을 집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있으므로 전도라고 이름한다. 가령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으려 할 때 상주(常住)와 단멸(斷滅) 두 가지의 전도는 지혜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무상의 사물에 대하여 무상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 전도라고 말하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전도란 무슨 뜻인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는 무상하다. 이른바 상주(常住)를 가히 전도(顚倒)라고 말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않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무상이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을 전도된 집착이라고 한다면 무상 또한 집착이니 공이 어째서 집착이 아니겠는가?
016_0507_c_11L無常謂常者, 名爲顚倒執, 無常亦是執,
空何故非執。
【釋】말하자면 지혜의 소연(所緣)은 전도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도에 관한 주장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삼계의 욕망을 이미 벗어났는데 무슨 까닭으로 해탈이라 말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말은 곧 해탈이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다시 ‘무상도 공하다’고 말하면 어째서 제일의제 아닌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 무기(無起)에 관한 주장은 도리에 위배됨을 이미 앞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열반에 생기가 없고 또한 무상이 없는 것과 같다. 다시 무상의 실체는 상주의 분별지(分別智)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저도의 집착이 없다고 말하면 상주하는 깨달음을 소연 경계는 곧 실체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게송에서 ‘무상도 집착이니 공이 어째서 집착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도(倒)란 곧 전도이다. 왜냐하면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자와 같다. 여기서 증험하겠다.제일의제 중에 색이 무상하다고 말하면 곧 전도이다. 이는 분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에 집착하여 상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지혜를 분별하여 모든 행이 공하다고 말하면 그 지혜는 일향(一向)으로 전도 된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또한 전도된 것이다.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공지(空智)는 해탈의 원인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전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내입(內入)이 고락(苦樂) 등 지혜의 경계인 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주장은 무슨 뜻인가?”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눈이 공하다는 것을 연(緣)한 지혜는 해탈의 원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016_0508_a_07L論者言:汝立義中是何義耶?自部人言:緣眼空智非是得解脫因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도리어 나의 주장을 성립시킨다. 어떻게 나의 주장을 성립시키는가? 무분별지에 의해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눈이 공하다고 말하면 눈이 공하다고 아는 지혜에는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말을 차지하고 지금 다시 그대를 위하여 나는 근본적인 주장을 말하겠다. 마치 무상(無常)에 집착하여 상주라고 하는 것처럼 이는 전도된 것이다. 무아(無我)를 자아[我]라 하고, 무락(無樂)을 낙(樂)이라 하며, 부정(不淨)을 청정이라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자부의 사람이 주장을 분별하여 말하였다. “이와 같이 집착이 있는 것은 집착하는 것과 집착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착을 일으키는 것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 집착을 일으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주장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집착을 갖춘 것과 집착을 일으키는 자와 집착을 내는 경계는 일체 적멸(寂滅)의 상(相)이 되네 이 까닭으로 집착이 존재하지 않네.
016_0508_a_18L執具起執者, 及所執境界, 一切寂滅相,
是故無有執。
【釋】집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른바 집착을 갖춘 것과 집착을 일으키는 자와 집착을 내는 경계 등이다. 집착을 갖춘 것이란 이는 능히 집착하여 총괄적으로 물체를 연(緣)하는 지혜를 말한다. 집착을 일으키는 자는 집착하는 마음 혹은 망치(妄置) 혹은 비발(非撥) 등을 말한다. 또한 집착을 필요로 하는 자는 집착을 일으키는 사람을 말한다. 집착하는 경계는계탁하는 바의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의 경계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법은 다 자체가 공하다. 내가 말하는 바의 경계와 같이 집착을 갖춘 것 등의 모든 적멸의 상을 열어 보이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집착을 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여 중생들에게 이해시키려 하나 비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에 대해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위의 게송에서 ‘집착하는 성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른 것과 옳은 것 또한 없네’라고 한 것과 같다. 두 도리(道理)에 관하여 이미 앞에서 개오(開悟)시켰기 때문이다. 생기 또한 성립하지 않는데 그와 같고 그와 같이 전도와 전도하는 자 또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게송에서 ‘무엇에 전도가 있고 무엇에 비전도가 있겠는가?’ 라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전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가 없기 때문에 전도하는 자 또한 없다. 다시 만약 전도가 있다면 비전도도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의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제일의제 중에 비유할 실체가 없으며, 또한 그대의 주장과도 위배된다.”
다시 세간의 사람이 말하였다. “전도와 화합하는 것을 전도된 사람이라 이름한다. 이 전도는 이미 전도된 자와 화합하는가?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와 화합하는가? 전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화합이 있는가? 지금 세 종류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전도와 화합한다고 말하면 이 모두 옳지 않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생기한 것과 화합하지 않으면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과 또한 화합하지 않으니 이미 전도된 자와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 화합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508_c_04L已起者無合, 未起亦無合, 離已未倒者,
有合時不然。
【釋】이는 이미 전도된 자가 다시 전도와 화합한다면 소용 없다. 왜냐하면 전도된 자는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전도되지 않은 자와 같다. 만약 전도와 시간이 화합한다고 하면 이는 모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전도를 떠나 부전도가 시간과 화합한다고 마하면 이는 옳지 않다. 작용은 관찰될 때 모두 다 옳지 않다. 만약 있다면 그대는 지금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전도는 무엇과 더불어 화합하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존재와 전도의 화합이 없다고 말하면 이 주장 때문에 그대는 앞서 말한 오류를 얻게 된다. 다시 제일의제에서처럼 모든 실체에는 다 자성이 없다. 이 도리를 말하여 이미 개해(開解)시켰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생기한 것이 없고 아직 생기하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전도가 있는가? 모든 전도에 다 발생이 없는데 어느 곳에서 전도가 일어나겠는가?
016_0508_c_15L無起未起者, 云何有顚倒, 諸倒悉無生,
何處起顚倒?
【釋】여기에서 게송의 뜻은 발생이 없으므로 전도가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 등은 다 오류가 존재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08_c_17L釋曰:此謂偈意顯無生故無有顚倒,汝出因等皆是有過。如論偈說: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이 실체로서 있다고 한다면 저 상락아정은 반대로 전도가 되네.
016_0508_c_19L常樂我淨等, 而言實有者, 彼常樂我淨,
翻則爲顚倒。
【釋】여기에서는 제일의제 중에 상락아정 등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이 또한 전도된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08_c_21L釋曰:此謂第一義中有常我等,應知亦是顚倒。如論偈說:
자아[我] 및 상락(常樂) 등이 장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아(無我)와 고(苦)와 부정(不淨)은
마땅히 얻을 수 있어야 하네.
016_0508_c_23L我及常樂等, 若當是無者, 無我苦不淨,
而應是可得。
【釋】여기에서는 무아 등의 자체가 능히 자아 등의 전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하기 때문이다. 무아 등 또한 비존재를 성립시키지 않는데. 무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는가? 이 전도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 없이는 결코 걸상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생각에 관한 전도를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등은 그 과실을 모면하기 어렵다. 상주(常住)와 무상(無常) 등의 전도 및 부전도를 관찰함으로 해서 원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다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것은 무인(無因)이기 때문에 무명(無明)과 행이 사멸되고 나아가 생(生)과 노사(老死) 이들 모두 다 사멸되네.
016_0509_a_08L以彼無因故, 則無明行滅, 乃至生老死,
是等同皆滅。
【釋】여기서는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 및 노사(老死) 등은 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에 무 자체를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자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번뇌에는 실체가 있다고 하는가,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는가? 지금 질문한 것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의 모든 번뇌에 하나하나 자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무엇을 단제(斷除)할 수 있고 누가 존재의 실체를 끊을 수 있는가?
016_0509_a_15L若人諸煩惱, 有一自實體, 云何能斷除?
誰能斷有體?
【釋】여기에서는 자체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괴멸(壞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번뇌에 실체가 없어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면 또한 게송에서 말하는 오류와 같을 것이다. 어째서 끊을 수 없단 말인가? 비존재라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말[馬]의 실체가 없듯이 이 비존재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만약 이러한 생각을 일으켜 “실체로서 번뇌가 존재하나 성도(聖道)가 일어날 때 끊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이 말에 오류가 없다고 한다면, 실체로서 번뇌는 무슨 상(相)과 비슷해서 대치도(對治道)를 일으켜서 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의 주장은 중생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이러한 까닭으로 실체로서 있다느니 실체로서 있지 않다느니 하는 번뇌의 분별을 일으킨다. 그러나 끊을 수 있다는 이 분별은 옳지 않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에는 번뇌가 없다. 자체가 단멸되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여인을 환작(幻作)하는 순간 비록 환화(幻化)하더라도 모든 범부가 탐욕에 물든 마음을 일으키고 나중에 실체가 아닌 것을 알고 탐욕에 물든 마음을 스스로 버리는 것과 같다. 번뇌에 실체가 없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 외도가 세운 증험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말하였다. 내가 세운 증험에 오류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도를 이해시키는 것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품에서 주장하는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 경(經)을 인용하여 현성(顯成)하겠다.
『금광명녀경(金光明女經)』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색(色)이 아니므로 모든 곳에서 있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 또한 그러하다. 마치 언어에 실체가 없고 내입과 욉입에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의 실체에는 실체가 없고 또한 내외(內外)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佛)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염오(染汚)가 곧 여실(如實)한 뜻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떤 염오의 전도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이 염오를 일으키는 것이 만약 실체로서 없다면 이는 곧 전도된 것이다. 만약 전도가 실체로서 없다면 거기에는 진실의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을 청정(淸淨)이라 한다.’ 번뇌가 실체로서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정각(正覺)을 이룰 때 번뇌라고 말하는 것은 색이 아니며 무색도 아니다. 수ㆍ상ㆍ행ㆍ식이 아니며, 수ㆍ상ㆍ행ㆍ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비식(非識)이 아니며 무식(無識)이 아닌 것도 아니다.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취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사람은 단제(斷除)할 대상이 없어 증득할 때도 얻을 것이 없다. 증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증(無證)과 무득(無得)과 무상(無相)과 무위(無爲)는 단지 가설된 이름일 뿐이다. 비유하면 환화(幻化)와 같다.모든 법의 부동상(不動相)에 대하여 취착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고 소리와 같아 상(相)을 떠나고 기억을 떠나서는 발생하는 것도 없고 사멸하는 것도 없다.” 「관전도품」의 해석을 마친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와 소멸이 없어 4성제에 자체가 없다고 말하면 그대는 이와 같은 오류를 갖게 되네.
016_0509_c_08L若一切法空, 無起亦無滅, 說聖諦無體,
汝得如是過。
【釋】그 말한 바의 도리에 따라 중생들을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그 사실은 옳지 않다. 공하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초래한다. 생기와 소멸에 자체가 없다면 고체(苦體)에도 실체가 없다. 고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집제(集諦)를 일으키더라도 실체가 없다. 집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멸제(滅諦) 역시 실체가 없다. 멸제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고(苦)를 소멸하는 도제(道諦)에서는 정견(正見)을 으뜸으로 삼지만, 도제에서 닦은 것도 또한 실체가 없다.
위의 게송에서 설한 것처럼 그대는 이러한 오류를 갖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중생은 4제(諦)의 경계에 대해 부지런히 행하고 정진하여 고제를 마땅히 알아야 하고, 집제를 끊어야 하며, 멸제를 증득해야 하며, 도제를 닦아야 할 것이다. 이 4성제 모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없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4성제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果) 역시 존재하지 않네. 4과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에 머무는 자 역시 없네.
016_0510_a_02L聖諦無體故, 四果亦無有, 以果無體故,
住果者亦無。
【釋】여기에서는 말하자면, 신견(身見)ㆍ의견(意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의 여러 허물을 땔감이라고 한다면 4성제는 불이라는 것이다.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多含)ㆍ아나함(阿羅含)ㆍ아라한(阿羅漢) 등이 4성제의 불이 능히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을 보는 것이다. “4과(果)에 무는 자”란 말하자면 역시 수다원도에 의해 수다원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또 그 이름이 다른 연과 화합하지 않으므로 하늘의 악마도 가진 것으로써 파괴할 수 없다. 또한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 등과 함께 화합하므로 이름하여 승(僧)이라 한다. 이 승은 또한 무상복전(無上福田)이라고 한다. 그대가 만약 승보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가 있겠는가?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존재를 파괴하게 되네.
016_0510_a_17L若無法僧者, 云何有佛寶? 若三寶皆空,
則破一切有。
【釋】불(佛)이란 4성제를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佛)이라 이름한다. 어째서 보(寶)라 하는가?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나는 이해해야 할 것을 이미 이해하였고, 수행해야 할 것을 이미 수행하였고,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불이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법에는 자체가 있어 거기서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므로 불이라 이름한다.
경전의 게송에서 “자체가 없는 법 중에 남김없이 깨달으면 모든 법을 평등하게 깨닫기 때문에 불이라 하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가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위의 게송에서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종재를 파괴하게 되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장에 오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원인과 결과의 자체가 공하다면 법과 법 아닌 것 또한 공하니 세간의 언설 등은 이와 같이 모두 다 파괴될 것이네.
016_0510_b_06L若因果體空, 法非法亦空, 世閒言說等,
如是悉皆破。
【釋】여기에서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오류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이 오류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공함을 세우지 않고 생기하고 소멸하는 모든 체에 자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오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증험하겠다. 모든 체에 자체가 있어 생기와 소멸이 있기 때문에 만약 모든 체에 자체가 없다면 생기와 소멸은 볼 수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인용한 주장은 모두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공(空)과 공의(空義)가 모든 희론을 능히 소멸함을 이해하지 못했네 그런데도 공을 부정하려 하는가?
016_0510_b_14L汝今自不解, 空及於空義, 能滅諸戲論,
而欲破空耶?
【釋】공은 모든 집착과 희론을 잘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이름한다. 연기하므로 공함을 아는 지혜를 공의라 한다. 그대가 지금 진실한 모습을 파괴하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허공을 치는 것과 같아서 쓸데없이 스스로 피곤할 뿐 끝내 허공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한다. 그대가 만약 위의 게송에서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生起)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한 것도 또한 쓸데없는 노력일 뿐 중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2제(諦)에 의거하며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이시네.
016_0510_b_23L諸佛依二諦, 爲衆生說法, 一謂世俗諦,
二謂第一義。
【釋】세제란 세간의 언설을 말하는 것이다. 색(色) 등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소멸하는 모습에 대해 설하는 것과 같다. 또 제바달다가 가고 오는 것, 비사노밀다라(毘師奴蜜多羅)가 먹는 것, 수마달다(須摩達多)의 좌선, 범마달다(梵摩達多)의 해탈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이른바 세간의 언설이며, 세제라고 이름한다. 이들을 제일의제라고 하지 않는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제일(第一)의 뜻이 있으므로 제일의(第一義)라고 이름한다.
또 그것은 최상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자 진실의(眞實義)이므로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진실이란 다른 것에 연하지 않는 모습이다. 혹은 진실에 머물러 진실의 소연(所緣) 경계에 대해 분별이 없는 지혜를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저 일어남 등을 말한 순서대로 부정하여 일어남이 없다고 설한 것과 문(聞)ㆍ사(思)ㆍ수(修)의 3혜(慧)가 모두 제일의제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일의제를 말한다. 능히 제일의 부정으로써 전도되지 않은 방편의 인연을 짓기 때문에 이러한 까닭으로 또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2제(諦)의 차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하고 깊은 불법(佛法)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네.
016_0510_c_15L若人不能解, 二諦差別相, 卽不解眞實,
甚深佛法義。
【釋】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2제의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계의 모습에 착란하지 않아도 올바르지 않은 사유가 많은 이러한 사람은 깊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체가 있다거나 자체가 없다는 집착된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깊다’란 건너기 어렵다는 뜻이다. ‘불(佛)’이란 앞에서 이미 이해한 것과 같다. ‘법’이란 천인(天人)에게 감로의 법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다. ‘행(行)’이란 이와 같은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끊어야 하고, 증득해야 하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감로법(甘露法)이라 한다.이 사람은 제일 깊고 무분별지의 되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록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행하고 진실한 법의 경계에 머물러도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는 법의 실체에 대하여 중생에게 설법을 하더라도 경계가 아닌 것에 대하여 경계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중론』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제 중에 생기와 소멸 등의 법이 모두 없다”고 말하고 이대로 분별한다면 그 오류도 위의 게송에서 “모든 법이 공하다면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자가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세제에 수순하여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생기ㆍ머묾ㆍ소멸 등의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고 설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는 자는 제일의제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망한 분별을 짓는다면 존재의 광야 한가운데에 떨어져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다.
만약 세제(世諦)에 의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끝내 열반을 얻지 못하리.
016_0511_a_15L若不依世諦, 不得第一義, 不依第一義,
終不得涅槃。
【釋】세속제(世俗諸)란 모든 법은 생기하지 않으므로 본성이 공하지만 중생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집착을 내므로 세간에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간의 전도된 성품을 요달하고 있으므로 모든 법이 다 공하며 자성이 없음을 안다. 성인들은 이 제일의제를 또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2제에 의거하여 설법하셨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모든 언어의 길을 널리 초월하였기 때문이고, 모든 소승이 분별한 모든 분별의 원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다시 만약 세제가 없다면 제일의제를 증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번뇌와 생기 등이 소멸한 것이 열반의 모습이다. 만약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열반의 도(道)를 끝내 얻을 수 없다. 혹은 외도 중에 총명하다고 자만하는 자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분별하였다.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5음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집착하는 견해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공하지 않은 것인가? 5음이 공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보고 내가 지금 보면 내가 장차 보게 될 이러한 5음이 공하다고 보지만 5음을 여의고서는 공이 있을 수 없다. 공 중에 5음을 보고 5음 중에 공을 본다.” 이러한 견해는 올바른 사유가 아니며 증상만(增上慢)2)이라 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가 적고 어리석은 자는 악견(惡見)으로써 공을 파괴하니 마치 뱀을 잘못 만지는 것과 같고 법답지 아니한 주문을 지니는 것과 같네.
016_0511_b_11L少智愚癡者, 以惡見壞空, 如不善捉蛇,
不如法持呪。
【釋】여기에서는 무분별의 혜명(慧命)에 대해 장애를 짓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악견이 되며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다. 다시 자체가 없는 것에 대해 자체가 있다는 견해를 일으켜도 또한 공을 파괴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뱀을 잘못 잡은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다. 마치 주문을 지는 사람이 주문 법에 의하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입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갖가지 이롭지 못한 일을 짓게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까닭으로 회향하는 마음으로 법을 설법하지 않으셨네 부처님께서 이해하신 심오한 법에 중생은 들어갈 수 없네.
016_0511_b_20L諸佛以是故, 迴心不說法, 佛所解深法,
衆生不能入。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공에 대해 비방하여 법(法)에 생기와 소멸이 없고 나아가 삼보를 파괴한다고 말하네.
016_0511_b_22L汝今若如是, 於空生誹謗,
謂法無起滅, 乃至破三寶。
【釋】비방이란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그대의 성냄과 분노 때문에 공에 대해 오류를 지우려고 하지만 공은 끝내 그대가 말한 오류를 입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실체에 자체가 없다면 제일의제 중에 공하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체가 없다는 뜻은 나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집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부 사람들이 분별한 공을 부정하기 위하여 지금 이 공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공에 자체가 없다고 말해도 공에 집착하여 이러한 분별을 짓는 것은 아니다. 공은 이제 마땅히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적경(寶積經)』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아견(我見)을 수미산만큼 일으킬지라도 증상만(增上慢)을 지어 공에 대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겠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색이 공하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되고, 색이 공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공에 대해 옳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을 것이고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
016_0511_c_11L若然於空者, 則一切皆然, 若不然空者,
則一切不然。
【釋】여기에서 말해지는 것은 공을 바로 본다면 어떤 것들이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인가? 생기 등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다는 것인가? 이른바 유무(有無)등과 눈 등은 모두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허깨비의 사내와 같이 사내 자체가 공하다. 왜냐하면 모든 뭇 연의 모임에 의지하여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실체인가? 실체는 이른바 고(苦)이다. 무엇이 고인가? 이른바 이 생기를 고라 하며, 고 등의 작용을 보는 것을 고제(苦諦)라 한다. 무엇이 집체(集諦)인가? 이른바 고의 원인을 일으키는 것을 집제라 한다. 다시 집제란 이른바 여기에서 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 혹은 집 등의 작용을 보므로 멸제(滅諦)라 한다. 고를 소멸하는 원인인 방편을 얻으므로 도제(道諦)라 한다. 만약 도(道) 등의 작용을 보므로 도제라 하면 그 4성제가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그 법이 성립한다.
일체의 작용에 대해 자연스레 깨달으므로 이에 부처라 한다. 성문에 수순하여 말하면 경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고에 대해 나는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모든 법에는 눈의 생기[眼起], 지혜의 생기[智起], 진리를 아는 지혜의 생기[明起], 깨달음의 생기[覺起]가 있으니, 이들 실체의 자체는 모두 허깨비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일의제 중에 생기 등이 없다고 보면 “4성제를 본다”고 한다. 마치 『문수도행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에 생기가 없음을 본다면 고제(苦諦)를 이해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법에 머묾이 없음을 본다면 곧 집(集)을 끊을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이 궁극적으로 열반임을 본다면 멸제를 증득할 것이다. 무수사리여, 만약 모든 법에 자체가 없음을 본다면 도(道 )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마하연(摩訶衍) 중에 4성제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도리를 이루기 때문에 지혜를 이루며,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을 비방하면 위의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만약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원인과 결과에 상대가 없다면 작업하는 자와 작업 나아가 생기와 소멸 등의 모든 법은 다 허물어지네.
016_0512_b_03L若因果無待, 作者及作業, 及至起滅等,
一切法皆壞。
【釋】여기에서는 인연을 상대하면 인과(因果) 등의 뜻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대는 어찌하여 공의(空義)에 대해 허망한 분별을 내는가? 비유하면 어린애가 그림 속의 야차(夜叉)를 보고 공포심을 내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만약 색 등은 공하여 허공의 꽃과 같이 자체가 있지 않다고 분별하는 자는 이 공의에 대해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뭇 인연을 따라 생기하는 법을 나는 바로 공하다고 말하니 단지 가명자(假名字)이고 또한 중도(中道)의 뜻이다.
016_0512_b_11L從衆緣生法, 我說卽是空, 但爲假名字,
亦是中道義。
【釋】눈 등의 모든 실체가 연(緣)에서 일어난다면 모든 연 중에 눈 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으며, 자기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또한 자타(自他) 동시도 아니고 자타 동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연기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제일의제 중에 자체가 생기하지 않으며 세속제에 의거하므로 눈 등이 생기한다. 내가 “이 생기는 것은 공하다”고 말하면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경전의 게송에서 “인연을 따르는 것을 발생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발생법에는 자체가 없네. 만약 연에 속하는 존재가 있다면 곧 공하다고 이름하네”라고 한 것과 같다. 세간과 출세간은 단지 가설로 시설된 것이다. 그 공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름하여 불방일(不放逸)이라 한다.
『능가경』에서 “자체는 생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기(無起)의 진리는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신 “나는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면 또한 이것도 공의 다른 이름이다.왜냐하면 시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모두 세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명자(名字)를 시설하여 중도(中道)라 한다. 이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중도라 하는가? 생기와 비생기 및 존재와 비존재 등의 치우침을 여의었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이른바 모든 실체에는 생기도 없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으며, 상주도 없고 무상(無常)도 없으며, 공(空)도 없고 공하지 않는 것도 없다. 중도를 닦는 자는 관찰할 때 눈에 실체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눈에 실체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또한 『보적경(寶積經)』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있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며 없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다. 양자를 떠난 중간에는 바로 색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도 없다. 이와 같은 중도를 이름하여 실상을 증득하는 방편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일찍이 어떤 법도 인연에 따라 생기한 적이 없었네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016_0512_c_13L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如是一切法,
無不是空者。
【釋】여기에서 인연에 따라 생기한 사물은 비유하면 허깨비 등의 장부와 같은 것이어서 필경에는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허공 등과 같이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 ‘연에서 생기한 법’을 이유로 든다면 그대의 주장 중에 일부 뜻으로서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가 제시한 이유의 오류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허공의 오류는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큰 오류가 이제 그대 자신에게 있기에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오류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고(苦)가 있겠는가? 무상(無常)은 곧 고(苦)를 뜻하는 것으로서 고에는 자체가 없네.
016_0513_a_05L不從緣生者, 何處當有苦? 無常卽苦義,
彼苦無自體。
【釋】여기에서 만약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면 곧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한다면 고가 아니다.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면 고이므로 무아(無我)이다. 무아라면 곧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고에는 자체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은 주장과 상응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고에 자체가 있다면 소멸이 있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까닭에 곧 소멸의 실체를 논파할 것이네.
016_0513_a_21L苦若有體者, 不應有滅義, 汝著有體故,
卽破於滅體。
만약 고에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도를 닦는 일도 없네 도를 닦는다면 정해진 성품은 없네.
016_0513_a_23L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道若可修者, 卽無有定性。
【釋】여기에서는 만약 소멸에 실체가 있다면 고에도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닦는다’란 무엇인가? 자주자주 정견(正見) 등을 일으키므로 닦는다고 이름한다. 만약 이러한 도(道)의 자체가 이미 성취되어 생기가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이러한 오류를 피하려고 도(道)를 닦는다고 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도가 닦을 수 있다면 자체가 없는 것이니 고와 집부터 멸에 이르기까지 이것 등도 모두 없네.
016_0513_b_05L若道是可修, 卽無有自體, 苦集乃至滅,
是等悉皆無。
【釋】여기에서는 道에 생기의 의미가 성립한다면, 자체가 없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앞서 게송에서 설한 도리에 고를 생기하는 것이 없음은, 고가 없기 때문에는 멸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고를 소멸하는 도를 말하자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를 소멸하는 것이 도(道)인데 어디서 도를 얻을 수 있는가? 고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고의 원인도 이해하지 못하네.
016_0513_b_11L爲滅苦者道, 何有道可得? 不解苦自體,
亦不解苦因。
【釋】여기에서 그대가 말한 도리에 따르면 고에는 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자체가 있다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고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가 있어 단멸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의 실체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단멸에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애(愛)의 실체에 다함이 없다면 다함이 있다는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에 실체가 없다면 실체가 없으므로 소멸을 증득했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을 증득함이 없는데 소멸에 나아가는 도에 자체가 있다면 수도(修道)도 없게 된다. 만약 도를 닦음이 없다면 또한 4과(果)를 증득하는 사람은 없다. 4과를 증득하려는 사람이 자체가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 묻겠다. 어째서 버리지 않는가? 만약 증득한 결과에 자체가 있다면 어떻게 다시 증득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또한 법보(法寶)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으므로 불보(佛寶)가 어떻게 있겠는가?
016_0513_c_05L若無四聖諦, 亦無有法寶, 無有法僧故,
云何當有佛?
【釋】‘부처’란 법으로써 제자를 깨닫게 할 수 있으므로 부처라 한다. 다시 이제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에게 묻겠다.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는가, 없는가? 【문】 이것은 어떤 오류가 있어서 이와 같이 묻는가? 【답】 만약 그대가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다고 하면 진여(眞如)를 깨닫지 못해도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깨달음을 인연으로 삼지 않으면 부처는 무연(無緣)의 오류에 떨어지며 부처를 연으로 삼지 않으면 깨달음은 무연의 오류에 떨어진다.
016_0513_c_13L不以覺爲緣, 佛墮無緣過, 不以佛爲緣,
覺墮無緣過。
부처에 자체가 있다면 모든 보살이 수행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도 성불할 수 없네.
016_0513_c_15L佛有自體者, 諸菩薩修行,
爲佛勤精進, 不應得成佛。
이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사람을 만들 수 없네 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자체가 있어 만든다면 옳지 않다.
016_0513_c_16L是法及非法,
無人能作者, 不空何須作? 有體作不然。
【釋】여기에서는 법에 자체가 있어 작용을 일으킨다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그대의 의도가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늘리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밝은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오류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째서 작용하는 것에는 모든 자체가 없다는 것인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곳곳에서 작업하는 자는 모두 자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마치 환술로 만든 사물과 같다. 내입(內入) 등의 작업도 또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이 내입도 또한 자체가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물이라도 자체가 있다면 앞의 주장과 위배된다.이는 말하자면 작업에는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니, 그대가 자체가 있다는 뜻에 집착해도 만약 자체가 있다면 그대는 분명히 나를 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작용과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어떠한 사물과 비슷한가?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삿된 견해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언설의 일과 세간은 다 파괴되네.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
016_0514_a_14L一切言說事, 世閒皆被破, 若壞緣起法,
空義亦不成。
【釋】언설이란 “병을 만든다”, “옷을 만든다”, “제바달다는 흰 소가 오면 나는 우유를 마시겠다고 말한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병 등에 자체가 있어 반드시 작업이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연기에서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위의 게송에서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공의를 파괴하면 어떤 오류를 얻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한 사물도 만들 필요가 없으니, 또한 사람이 업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만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자라고 하면 공의를 파괴하게 되리라.
016_0514_a_22L一物不須作, 亦無人起業, 不作名作者,
則壞於空義。
발생도 없고 또한 소멸도 없는 이것이 바로 상주이며
갖가지 모든 사물의 부류가 다 자체에 머무네.
016_0514_b_01L無生亦無滅, 是則名爲常,
種種諸物類, 皆住於自體。
【釋】무엇을 사물의 부류라 하는가? 비유하면 벽화에 갖가지 색과 모양과 성질과 분량 등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자체에 머무네’라고 하는가? 짓는 자가 없는 것을 ‘자체에 머문다’고 말한다. 파괴되지 않는 까닭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주라고 말하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얻지 못한 자는 얻어야 하네 고변(苦邊)의 업이 다함과 모든 번뇌가 끊어짐을 공의가 없기 때문이네.
016_0514_b_07L未得者應得, 及盡苦邊業, 一切煩惱斷,
以無空義故。
【釋】세간과 출세간이 수승한 법을 증득하고 고변을 다하면 반드시 대치법을 닦을 필요는 없다. 말하는 상(相)도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따르면 환화와 불꽃처럼 자체에 일어남이 없다. 자체가 있다거나 없다고하면 모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니, 지혜의 눈이 가린 자는 모든 법에 대해 망령되이 “모든 법은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세제의 견해이며 허망되게 집착하여 제일의로 삼는다. 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른바 고와 집과 나아가 멸과 도에 이르기까지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보면 이러한 견해는 잘못 본 것이라 하네.
016_0514_b_16L所謂苦與集, 乃至於滅道? 見有生滅者,
是見名不見。
【釋】어째서 잘못 본 것인가? 이른바 여실하게 연기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약 고 등의 모든 작용을 보는 것을 여의었다면 달리 볼 진리의 법이 없을 것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생기 등의 도리는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고 등에 생기가 없다고 보는 것이 ‘진리를 본다’는 뜻이라면 그대가 항상 말한 것은 성립시킨다.내입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전도되지 않았다면 그 말은 도리어 전도된 것이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고를 보아야 할 것인가를 자세하게 관찰할 것이다.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따라서 환희환(歡喜幻)을 찾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품에서는 자부의 사람들이 한 말에는 오류가 있어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고 4성제에 자체가 없음을 밝혀 중생들을 신해시키는 것이 의도이므로 아래에 경을 인용하여 나타내고자 한다.
『범왕소문경(梵王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범천왕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문(門)에 의거해 마땅히 고는 성제(聖諦)가 아님을 알아야 하며, 집ㆍ멸ㆍ도 또한 성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이 성제란 무엇인가? 범천왕이여, 만약 고가 생기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성제라고 하고, 집이 생기하지 않으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필경에는 열반과 같이 생기와 소멸이 없음을 본다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알고서 도를 닦는다면 이름하여 성제라고 한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