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526_b_01L십이문론품목(十二門論品目)
016_0526_b_01L十二門論品目

제1 관인연문(觀因緣門)[만법(萬法)에 인(因)이 되는 것은 각기 성품[性]이 있는 듯하나 고찰해 모아보면 실로 본래의 성품이 없다. 환하게 트여서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문(門)이라고 한다.]
제2 관유과무과문(觀有果無果門)[성품이 없는 법을 거듭 고찰하면 먼저 있다[有]가 생기기도 하고 먼저 없다[無]가 생기기도 한다. 유무(有無)는 생김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3 관연문(觀緣門)[위에서는 인(因)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연(緣)을 고찰한다. 4연(緣)1)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모두 과(果)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4 관상문(觀相門)[위의 세 가지 문은 인(因)과 연(緣)이 생김이 없음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3상(相)2)을 고찰한다. 3상이 이미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5 관유상무상문(觀有相無相門)[여기서는 3상의 실체를 고찰하니 상(相)이 있으면서 상이 되고 상이 없으면서 상이 된다. 상이 있는 것[有]도 상이 없는 것[無]도 상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6 관일이문(觀一異門)[곧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을 고찰하면 같은 법[一法]에도 있고 다른 법[異法]에도 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7 관유무문(觀有無門)[위에서는 3상이 상이 아님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4상(相) 역시 아님을 밝힌다. 생(生)과 주(住)는 유(有)가 되고 변이(變異)는 무(無)가 된다. 같은 곳[同處]에도 있지 않고 다른 곳[異處]에도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8 관성문(觀性門)[이미 유무(有無)를 알았다. 또 그 성품[性]을 고찰하고, 변역(變易)하여 무상(無常)하고 연(緣)을 따라 있으면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9 관인과문(觀因果門)[성품이 없는 법은 이미 인과(因果)가 없다. 변하고 달라지는 곳에서 고찰해 찾아보면 이치를 터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0 관작문(觀作門)[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으면 지음[作]도 없게 된다. 네 곳[四處]3)에 이미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1 관삼시문(觀三時門)[이미 지음이 없음을 고찰하였다. 반드시 그 인(因)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3시(時)4)를 찾아보아도 지음이 없기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2 관생문(觀生門)[지음은 만듬[造]이 있게 되고 생김은 일어남[起]이 있게 된다. 시간[時]에는 이미 없으니 무엇이 생기는 것이 되겠는가? 바로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016_0526_b_02L 觀因緣門第一萬法所因似各有性推而會之實自無性通達無滯故謂之門
觀有果無果門第二重推無性之法爲先有而生爲先無而生有無無生以之爲門
觀緣門第三上推因此推緣四緣廣略皆無有果故以爲門
觀相門第四上三門推因緣無生此推三相三相旣無以之爲門
觀有相無相門第五此推三相之實爲有相而相爲無相而相有無無相故以爲門
觀一異門第六卽推有相無相爲在一法爲在異法不一不異以之爲門
觀有無門第七上推三相非相此明四相亦非生住爲有變異爲無同處不有異處亦無故以爲門
觀性門第八旣知有無又推其性變易無常從緣而有則非性也故以爲門
觀因果門第九無性之法旣無因果變異處推求則無得理故以爲門
觀作門第十無因無果則爲無作四處旣無以之爲門
觀三時門第十一旣推無作必盡其因故尋三時無作而以爲門
觀生門第十二作爲有造生爲有起時中旣無誰爲生者卽以爲門

십이문론서(十二門論序)
016_0526_b_14L十二門論序

『십이문론(十二門論)』은 실상(實相)의 절중(折中)5)이고 도량(道場)의 중요한 궤범[要軌]이다. 십이문(十二門)이란 뭇 갈래[衆枝]를 총괄한 큰 숫자[大數]이며, 문(門)이란 열리고 통하여 막힘이 없음을 이르며, 논한다는 것은 그 근원[源]을 궁구하여 그 이치[理]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이치[一理]가 다하지 않으면 온갖 다른 것들[衆異]이 어지럽게 일어나 이치를 모르는 어그러짐이 있게 되며, 한 근원[一源]이 다하지 않으면 온갖 길[衆塗]이 번성하게 되어 다른 곳에 이르는 자취가 있게 된다. 다른 곳에 이르는 길들이 평탄해지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보살의 근심이다. 이 때문에 용수보살이 출리(出離)를 원하는 이가 말미암을 길을 열고자 『십이문(十二門)』을 지어 바로잡았다.
016_0526_b_15L十二門論者蓋是實相之折中道場之要軌也十二門者摠衆枝之大數門者開通無滯之稱也論之者欲以窮其源盡其理也若一理之不盡則衆異紛然有或趣之乖一源之不則衆塗扶疏有殊致之迹殊致之不夷乖趣之不泯大士之憂也是以龍樹菩薩開出者之由路作十二門以正之
016_0526_c_01L십이(十二)로써 바로 잡으면 유무(有無)가 아울러 펼쳐지고 일이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일이 유무에서 다하면 공(功)을 조화(造化)에서 잊게 되며6), 이치가 허위(虛位)7)에서 다하면 아(我)를 2제(際)에서 잊게 된다. 그런즉 아(我)를 잊으면 통발[筌]8)을 버리게 되고 통발을 잊으면 언교(言敎)의 이유조차 버리게 된다[遺寄]. 통발과 아(我)를 겸하여 잊어야 비로소 진실[實]에 가깝게 될 것이다. 진실에 가깝게 되면 허(虛)와 실(實) 두 가지가 아득해져 득실(得失)에 사이가 없게 된다. 아득하여 사이가 없으면 조차(造次)를 양현(兩玄)에서 잊고 전패(顚沛)를 일치(一致)에서 없애서9) 돌아가는 수레[歸駕]를 도량(道場)에서 가지런히 몰고 이치로 향하는 마음[趣心]을 불지(佛地)에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016_0526_c_02L正之以十二則有無兼暢無不盡事盡於有無則忘功於造化理極於虛位則喪我於二際然則喪在乎落筌筌忘存乎遺寄筌我兼始可以幾乎實矣幾乎實矣則虛實兩冥得失無際冥而無際則能忘造次於兩玄泯顚沛於一致整歸駕於道場畢趣心於佛地
넓고도 넓도다! 참으로 허인(虛刃)10)을 틈이 없는 곳에서 놀리고 희성(希聲)11)을 우주 안에서 연주하여 중도의 이치를 놓친 사람[溺喪]을 중도의 이치[玄津]에서 건지고 유무(有無)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유무의 밖[域外]에서 끄집어내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만났도다! 후세의 학자들은 험한 길[夷路]이 평탄해지고 그윽한 길[幽塗]이 열려 참으로 화란(和鸞)12)을 북녘 바다[北冥]에 떨치고 흰 소[白牛]를 남쪽으로 몰아가며, 큰 깨달음[大覺]을 꿈속 경계[夢境]에서 깨치고 현전(現前)의 사물[百化]에 나아가 편안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는 태양[曜靈]이 바야흐로 한창인지 대지[玄陸]가 아직 밝지 않은지 어찌13) 다시 알겠는가?
016_0526_c_09L恢恢焉眞可謂運虛刃於無閒奏希聲於宇內溺喪於玄津出有無於域外者矣後之學者夷路旣坦幽塗旣開得振和鸞於北冥馳白牛以南迴大覺於夢境卽百化以安歸夫如是慧復知曜靈之方盛玄陸之未希也哉
나[睿]는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난 얕은 식견으로 감히 허관(虛關)에 정성을 쏟고 종극(宗極)을 희망하여 날마다 마땅함이 있기를 바라고 해마다 잘 자라기를 바라는데 더구나 재질이 아름다운 자이겠는가? 지극한 공경과 우러름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우둔한 말과 짧은 생각으로 서문을 써서 편다. 아울러 품목(品目)의 뜻도 앞에다 쓴다. 어찌 보탬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 마음으로 빨리 나아가는 길을 열기를 바랄 뿐이다.
016_0526_c_16L睿以鄙倍之淺識猶敢朋用誠虛關希懷宗極庶日用之有宜冀歲計之能殖況才之美者乎不勝敬仰之至敢以鈍辭短思序而申之幷目品義題之於首豈期能益也庶以此開疾進之路耳

십이문론(十二門論)

1. 인과 연들을 관찰하는 문[觀因緣門]
016_0526_c_21L觀因緣門第一

용수보살(龍樹菩薩)지음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016_0526_c_22L龍樹菩薩造
姚秦三藏鳩摩羅什 譯
016_0527_a_01L
설명하겠다. 이제 대승[摩訶衍]14)의 요체를 풀이하겠다.
016_0527_a_01L說曰今當略解摩訶衍義
【문】 대승의 요체를 풀이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
016_0527_a_02L問曰解摩訶衍者有何義利
【답】 대승이란 시방 삼세 부처님들의 깊디깊은 법장(法藏)15)이니 공덕(功德)이 크고 근기가 높은 자들을 위해 설시(說示)하는 것이다. 말세의 중생은 복이 얕고 근기가 낮아서 설사 경문(經文)을 찾아본다 해도 이에 통달할 수 없다. 나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껴 (이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고, 또 여래의 위 없는 큰 법을 환히 밝히고자 한다. 그러기에 대승의 요체를 풀이하는 것이다.
016_0527_a_03L答曰摩訶衍者是十方三世諸佛甚深法藏爲大功德利根者說末世衆生薄福鈍根雖尋經不能通達我愍此等欲令開悟又欲光闡如來無上大法是故略解摩訶衍義
【문】 대승은 무량하고 무한해서 측량하거나 계산할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하는 일이 없거늘 하물며 어찌 그 뜻을 풀어서 펼칠 수 있겠는가?
016_0527_a_08L問曰摩訶衍無量無邊不可稱直是佛語尚不可盡況復解釋演散其義
【답】 이런 이치 때문에 나는 서두에서 “요체를 풀이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答曰以是義故我初言略解
【문】 왜 대승이라고 하는가?
016_0527_a_10L何故名爲摩訶衍
【답】 대승이란, 2승(乘)16)보다 위에 있기에 대승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들께서 가장 크게 이것을 타고서 도달하기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큰 사람인 부처님들께서 이 수레[乘]를 타기[乘]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또 중생의 큰 고[苦]을 제거해서 큰 이익을 주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또 관세음ㆍ득대세(得大勢)17)ㆍ문수사리(文殊師利)18)ㆍ미륵 보살 등 대사(大士)19)들이 타는 것이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또 2승(乘)은 모든 법들의 가장자리[邊]와 밑바닥[底]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대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27_a_11L答曰摩訶衍者於二乘爲上故名大乘諸佛最大乘能至故名爲大諸佛大人乘是乘故名爲大又能滅除衆生大苦大利益事故名爲大又觀世音得大勢文殊師利彌勒菩薩等是諸大士之所乘故故名爲大又以此乘能盡一切諸法邊底故名爲大
또『반야경』에서 부처님 스스로가 “대승의 뜻은 무량하고 무한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이유 때문에 대라고 하는 것이다. 대는 심오한 이치를 분유하고 있으니 이른바 공성[空]이다. 만약 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대승에 통달하고, 6바라밀(婆羅蜜)을 다 갖추어서 장애가 없다. 그래서 이제 공성[空]만을 풀이하는 것이다. 공성을 풀이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열두 문[十二門]을 통해서 공성[空義]에 들어가야 한다. 최초는 ‘인과 연들을 관찰하는 문’이다. 이른바 다음 게송과 같다.
016_0527_a_18L又如『般若經』中佛自說摩訶衍義無量無邊以是因緣名爲大大分深義所謂空也若能通達是義卽通達大乘具足六波羅蜜所障㝵是故我今但解釋空解釋空當以十二門入於空義初是因緣所謂
016_0527_b_01L
여러 연에서 생긴 법
이것에는 자성이 없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이 법이 있겠는가?
016_0527_b_01L衆緣所生法
是卽無自性
若無自性者
云何有是法

연들에서 생긴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이다. 연들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이다. 바깥의 연들[外因緣]이란 예를 들어 진흙덩어리ㆍ먹줄ㆍ도공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생기고, 또 실ㆍ베틀의 북[機杼]ㆍ직공[織師] 등이 화합해서 명주[疊]가 생기고, 또 땅을 고르는 일ㆍ터를 다지는 일ㆍ대들보와 서까래ㆍ진흙ㆍ풀ㆍ사람의 노력[人功] 등이 화합해서 집이 생기고, 또 타락의 그릇ㆍ모아서 흔드는 일ㆍ사람의 노력 등이 화합해서 연유가 생기고, 또 씨ㆍ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간[虛空]ㆍ절기 등이 화합해서 싹이 생기는 경우에 있어서 그 연들을 말한다. 바깥 연의 법은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의 연들[內人緣]이란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 (生)ㆍ노사(老死)가 각각 앞의 것에 의존해서 뒤의 것이 생기는 경우에 있어서 그 연들을 말한다.
016_0527_b_03L衆緣所生法有二種一者二者緣亦有二種一者二者外因緣者如泥團輪繩陶師等和合故有甁生又如縷繩機杼織師等和合故有疊又如治地築基人功等和合故有舍生又如酪鑽搖人功等和合故有酥生又如種子虛空時節人功等和合故有芽生當知外緣等法皆亦如是內因緣者謂無明名色六入老死各各先因而後生
이와 같이 안과 바깥의 모든 법은 다 연들에서 생긴다. 연들에서 생기니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법이 자성이 없다면 타성도 없고, 자성과 타성 양자도 없다. 왜 그러한가? 타성에 의존하기에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타성에 의존해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소는 말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고 말은 소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배는 능금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고 능금은 배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여타의 것도 모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016_0527_b_14L如是內外諸法皆從衆緣生從衆緣生故卽非是無性耶若法自性無他性亦無自他亦何以故因他性故無自性若謂以他性故有者則牛以馬性有馬以牛性有梨以柰性有柰以梨性有餘皆應爾實不然
016_0527_c_01L만약 “타성에 의존해서 있지 않고 그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부들[蒲]에 의존하기에 자리[席]가 있다면 부들과 자리는 일체가 되어 다른 것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만약 부들이 자리에 대해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부들에 의존해서 자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부들 또한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부들 또한 연들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으니 부들의 본성에 의존해서 자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리는 부들을 자체로 하지 않아야 한다. 여타의 물단지. 연유 등 바깥의 연들에서 생긴 법들도 모두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 안의 연들에서 생긴 법들도 모두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칠십론(七十論)』20)에서 이렇게 말한다.
016_0527_b_20L若謂不以他性故有但因他故有者是亦不然何以故若以蒲故有席者則蒲席一體不名爲他若謂蒲於席爲他者不得言以蒲故有席蒲亦無自性何以故蒲亦從衆緣出故無自性無自性故不得言以蒲性故有席是故席不應以蒲爲體餘甁酥等外因緣生法皆亦如是不可得內因緣生法皆亦如是不可得如『七十論』中說

연법(緣法)21)은 실제로 생기는 일이 없네.
만약 생기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의 심(心)에서 생기는가,
여러 심에서 생기는가?
016_0527_c_06L緣法實無生
若謂爲有生
爲在一心中
爲在多心中

이 12연기법(十二因緣法)은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기는 일이 없다. 만약 생기는 일이 있다면 하나의 심(心)에서 생기는가, 여러 심(心)에서 생기는가? 만약 하나의 심에서 생긴다면,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함께 생기는 것이다. 또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사물은 원인이 전에 있고 결과가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심(心)에서 생기는 일이 있다면, 12연기의 법들은 각각 독립해 있는 것이다. 앞의 분지가 심과 함께해서 소멸했을 때 뒤의 분지가 무엇을 원인[因緣]으로 삼겠는가? 소멸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원인이 될 수 있겠는가?
016_0527_c_08L是十二因緣法實自無生若謂有生爲一心中有爲衆心中有若一心中有者因果卽一時共生又因果一時是事不然何以故凡物先因後果若衆心中有者十二因緣法則各各別異先分共心滅已後分誰爲因滅法無所有何得爲因
만약 12연기법이 미리 존재한다면 하나의 심이거나 여러 심에서일 것인데,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연들은 모두 공하다. 연들이 공하기 때문에 연들에서 생긴 법도 공하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법들은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위법들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의 유위법에 의존해서 나(我)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장작[可然]에 의존해서 불[然]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온ㆍ처ㆍ계가 공하다면 나[我]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我]에 의존해서 나의 것[我所]이 존재한다.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016_0527_c_15L十二因緣法若先有者應若一心若多心二俱不然是故衆緣皆空緣空故從緣生法亦空是故當知一切有爲法皆空有爲法尚空何況我耶因五陰十二十八界有爲法故說有我如因可然故說有然若陰界空更無有法可說爲我如無可然不可說然如經說佛告諸比丘因我故有我所若無我則無我所
016_0528_a_01L이와 같이 유위법이 공하기 때문에 무위인 열반법도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러한가? 이 5온이 소멸했을 때 다시 여타의 5온이 발생하지 않으니 이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5온은 본래 자체가 공한 것인데 무엇이 소멸하기에 열반이라 하는가? 또 나 또한 공한데 누가 열반을 얻겠는가? 또 발생하지 않는 법[無生法]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발생하는 법이 성립한다면 발생하지 않는 법도 성립할 것이다. 발생하는 법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후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발생하는 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하는 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발생하는 법이 성립하지 않는데 발생하지 않는 법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그러므로 유위법ㆍ무위법ㆍ나[我]는 모두 공하다.
016_0528_a_01L如是有爲法空故當知無爲涅槃法亦空何以故此五陰滅不生餘五陰是名涅槃五陰本來自何所滅故說名涅槃又我亦復空誰得涅槃復次無生法名涅槃若生法成者無生法亦應成生法不成已說因緣後當復說是故生法不成因生法故名無生若生法不成無生法云何成是故有爲無爲及我皆空

2.결과가 있다는 것과 결과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는 문[觀有果無果門]
016_0528_a_09L觀有果無果門第二

또 모든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528_a_10L復次諸法不生何以故

미리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네.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네.
무엇에 발생하는 것[生者]이 있겠는가?
016_0528_a_11L先有則不生
先無亦不生
有無亦不生
誰當有生者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존재한다 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無窮]이 된다. 가령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미리 발생한다면, 이제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원인 속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끝에서[有邊] 다시 발생할 것이니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에는 발생의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미리 존재하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28_a_13L若果因中先有則不應生先無亦不應先有無亦不應生何以故若果因中先有而生是則無窮如果先未生而生者今生已復應更生何以故因中常有故從是有邊復應更生是則無若謂生已更不生未生而生者中無有生理是故先有而生是事不
016_0528_b_01L또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는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에도 둘 모두가 존재하니, 하나는 발생함[生]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지 않음[不生]이다. 옳은 점이 없다.
또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상반되기 때문에 이 두 행위의 상[作相]도 상반된다.
또 존재[有]는 비존재[無]와 상반되고 비존재는 존재와 상반된다. 만약 이미 발생한 것도 존재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발생함[生]이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도 존재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28_a_21L復次若因中先有果而謂未生而生已不生者是亦二俱有而一生一不生無有是處復次若未生定有生已則應無何以故未生共相違故生未生相違故是二作相亦相復次有與無相違無與有相違生已亦有未生時亦有者則生未生不應有異何以故若有生生已亦有生亦有如是生未生有何差別生無差別是事不然是故有不生
또 이미 미리 성립해 있는데 어떻게 다시 발생하겠는가? 이미 행위한 것[作已]은 다시 행위하지 않듯이 이미 성립한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법[有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약 발생함이 원인 속에 존재한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결과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가령 진흙 속에서 물단지가, 부들[蒲] 속에서 자리[席]가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016_0528_b_07L有已先成何用更生如作已不應成已不應成是故有法不應生若有生因中未生時果應可見而實不可見如泥中甁蒲中席應可見而實不可見是故有不生
【문】 비록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하긴 하지만,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016_0528_b_12L問曰果雖先有未變故不見
【답】 만약 물단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진흙 속에 물단지가 미리 존재하긴 하지만) 물단지 자체가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상(相)에 의해 (그 물단지를) 인식하는가? 진흙 속에 물단지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물단지의 상으로서 물단지가 존재하는가, 소의 상이나 말의 상으로서 물단지가 존재하는가? 만약 진흙 속에 물단지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의 상이나 말의 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28_b_13L答曰若甁未生時甁體未變故不見者以何相知言泥中先有甁爲以甁相有甁爲以牛相馬相故有甁耶若泥中無甁相者亦無牛相是豈不名無耶是故汝說因中先有果而生者是事不然
016_0528_c_01L또 변이[變法]가 곧 결과라면 원인 속에 미리 변이가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물단지 등이 미리 (원인인 진흙 속에) 존재하기에 변이도 미리 존재한다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아직 변이하지 않은 것은 결과가 아니다”고 말한다면,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변이가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후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단지 등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만약 “이미 변이한 것이 결과이다”고 말한다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정되지 않은 것이어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016_0528_b_18L復次變法卽是果者卽應因中先有變何以故汝法因中先有果故若甁等先有變亦先應當可見而實不可得是故汝言未變故不見是事不然若謂未變不名爲果則果畢竟不可得何以故變先無後亦應無故甁等果畢竟不可得若謂變已是果者則因中先無如是則不定或因中先有果或先無
【문】 미리 변이가 존재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얻을 수 없다”란, 가령 사물은 가까운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먼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근(根]이 손상되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마음[心]이 머물지 않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장애물이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동등하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월등하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미세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눈 속의 약물이 그러하다. ‘먼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새가 허공을 날아 높이 올라가고 멀리 사라질 때이다. ‘근[감관]이 손상되었기에 인지되지 않는다’란, 가령 눈이 멀었을 때는 색깔을 보지 못하고 귀가 멀었을 때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코가 막혔을 때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입이 헐었을 때는 맛을 알지 못하고 몸이 굳었을 때는 감촉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016_0528_c_04L問曰先有變但不可得見凡物自有而不可得者如物或有近而不可知或有遠而不可知或根壞故不可或心不住故不可知障故不可知同故不可知勝故不可知微細故不可知近而不可知者如眼中藥遠而不可知者如鳥飛虛空高翔遠逝壞故不可知者如盲不見色聾不聞鼻塞不聞香口爽不知味身頑不知觸心狂不知實
‘마음이 머물지 않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마음이 색(色) 등에 머물고 있을 때 소리[聲]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물이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대지가 큰 물을 가로막고 벽이 바깥의 물건들을 가로막는 것이다. ‘동등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검은 바탕 위에 검은 점과 같은 것이다. ‘월등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종이나 북 소리가 날 때 빗질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미세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극미 등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들이 존재하더라도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대가 “원인 속에서 변이를 얻을 수 없기에 물단지 등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존재하지만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016_0528_c_13L心不住故不可知如心在色等則不知聲障故不可知者如地障大水壁障外物同故不可知者如黑上墨點勝故不可知者如有鍾鼓音不聞捎拂聲細微故不可知者如微塵等不現如是諸法雖以八因緣故不可知汝說因中變不可得甁等不可得者是事不然以故是事雖有以八因緣故不可得
016_0529_a_01L【답】 변이[變法]와 물단지 등의 결과를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변이와 물단지 등의 결과가 극히 가까이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조금 멀리 있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극히 멀리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조금 가까이에 있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근[감관]이 손상되었기에 얻을 수 없다면 감관이 정상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마음이 머물지 않기에 얻을 수 없다면 마음이 머문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장애물이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변이와 물단지 등은 장애물이 없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동등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차이가 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월등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월등한 것이 그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물단지 등의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이미 발생한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미세해서 상(相)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둘 다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016_0528_c_21L荅曰變法及甁等果不同八因緣不可得何以故若變法及甁等果極近不可得者小遠應可得極遠不可得小近應可得若根壞不可得者淨應可得若心不住不可得者心住應可得若障不可得者變法及甁法無障應可得若同不可得者異時應可得若勝不可得者勝止應可得細微不可得者而甁等果麤應可得若甁細故不可得者生已亦應不可何以故生已未生細相一故生已未生俱定有故
【문】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미세하지만 이미 발생했을 때는 거칠고 큰 것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얻을 수 있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얻을 수 없다.
016_0529_a_10L問曰未生時細生已轉麤是故生已可得未生不可得
【답】 만약 그렇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원인 속에는 거칠고 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원인 속에 거칠고 큰 것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 속에 거칠고 큰 것이 미리 존재한다면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제 결과는 거칠고 큰 것인데 그대는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거칠고 큰 것을 결과라 하지 않는다. 이제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제로는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법이 존재한다.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만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다.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29_a_11L若爾者因中則無果何以故因中無麤故又因中先無麤若因中先有麤者則不應言細故不可得今果是麤汝言細故不可得是麤不名爲果今果畢竟不應可得而果實可得是故不以細故不可得如是有法因中先有以八因緣故不可得先因中有果是事不然
016_0529_b_01L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그렇다면 원인과 원인이 서로 파괴하고 결과와 결과가 서로 파괴한다. 왜 그러한가? 마치 명주가 실에 있고 과일이 그릇에 있는 것과 같다. 단지 이 머무는 곳[住處]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실과 그릇은 명주와 과일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이 파괴된다면 결과도 파괴된다. 그러므로 실 등은 명주 등의 원인이 아니다.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원인에 의존하기에 결과가 성립하는 것이다.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데 결과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또 만약 만들지 않으면 결과라 하지 않는다. 실 등의 원인은 명주 등의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가령 실 등은 명주 등이 머무는 것이기에 명주 등의 결과를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원인이 존재하지 않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둘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나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016_0529_a_19L復次若因中先有果生者是則因因相壞果相壞何以故疊在縷如果在器但是住處不名爲何以故器非疊果因故若因壞果亦壞是故縷等非疊等因因無故果亦無何以故因因故有果成因不果云何成復次若不作不名果等因不能作疊等果何以故如縷等不以疊等住故能作疊等果如是則無因無果若因果俱無則不應求因中若先有果若先無果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는데 얻을 수 없다면, 상(相)이 현현할 것이다. 마치 냄새를 맡고서 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듣고서 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웃음 소리를 듣고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기를 보고서 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니[鵠]를 보고서 못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상이 현현할 것이다. 이제 결과 자체를 얻을 수 없으니 상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29_b_06L復次若因中有果而不可得應有相現如聞香知有聞聲知有鳥聞笑知有人見煙知有火見鵠知有池如是因中若先有應有相現今果體亦不可得相亦不可得如是當知因中先無果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실에 의존해서 명주가 존재하고 부들[蒲]에 의존해서 자리[席]가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원인이 만들지 않는다면 다른 것도 만들지 않는다. 마치 명주는 실이 만든 것이 아닌데 어찌 부들이 만든 것이겠는가? 만약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결과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29_b_11L復次若因中先有果生則不應言因縷有因蒲有席若因不作他亦不作疊非縷所作可從蒲作耶若縷不作蒲亦不作可得言無所從作耶若無所從作則不名爲果若果無因亦無如先說是故從因中先有果生是則不然
또 만약 결과가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상주하는 것이다. 열반의 상과 같다. 만약 결과가 상주하는 것이라면 모든 유위법들은 다 상주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들은 다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들이 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상주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상주하는 것에 의존해서 무상한 것이 존재하고 무상한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것과 무상한 것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529_b_18L復次若果無所從作則爲是常如涅槃性若果是常諸有爲法則皆是常何以故一切有爲法皆是果故一切法皆常則無無常若無無常無有常何以故因常有無常因無常有常是故常無常二俱無者是事不是故不得言因中先有果生
016_0529_c_01L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결과는 다시 다른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된다. 마치 명주가 입는 일[著]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고, 마치 자리[席]가 가리는 일[障]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고, 마치 수레가 싣는 일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땅에 냄새가 미리 존재하는데 물로 뿌리지 않는다면 냄새가 피어나지 않듯이 결과도 이와 같아서 만약 여러 연(緣)을 만나지 않는다면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인식되는 때가 결과이다. 물단지 등의 사물이 결과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인식될 때 짓는 것이다. 물단지 등은 미리 존재하기에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짓는 것을 결과라 한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29_c_01L復次若因中先有果生則果更與異果作如疊與著爲因如席與障爲因車與載爲因而實不與異果作因故不得言因中先有果生若謂如地先有香不以水灑香則不發果亦如若未有緣會則不能作因是事不何以故如汝所說可了時名果等物非果何以故可了是作甁等先有非作是則以作爲果是故因中先有果生是事不然
또 인식함의 원인[了因]은 단지 현현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마치 어둠 속의 물단지를 비추기 위해서 등불을 켤 때 여타의 침상 등의 물건들도 비추듯이, 물단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연이 화합할 때 여타의 침상 등의 물건들을 생기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지금 만드는 일[今作]과 앞으로 만드는 일[當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만드는 일과 앞으로 만드는 일의 구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 발생한다면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생길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지 않는데 발생하기 때문이다.
016_0529_c_11L復次了因但能顯不能生物如爲照闇中甁故然燈亦能照餘臥具等物爲作甁故和合衆緣不能生餘臥具等物是故當知非先因中有果生復次若因中先有果生則不應有今作當作差別汝受今作當作是故非先因中有果若謂因中先無果而果生者是亦不然何以故若無而生者應有第二第三手生何以故無而生故
【문】 물단지 등의 사물에는 여러 연이 있지만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에는 연들이 없는데, 어떻게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016_0529_c_20L問曰甁等物有因緣第二頭第三手無因云何得生是故汝說不然
016_0530_a_01L【답】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 그리고 물단지 등의 결과는 원인 속에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진흙덩어리 속에 물단지가 있지 않고 돌 속에도 물단지가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진흙덩어리를 물단지의 원인이라 하고 돌 등을 물단지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우유를 타락의 원인이라 하고 실을 명주의 원인이라 하면서 부들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016_0529_c_22L答曰二頭第三手及甁等果因中俱無泥團中無甁石中亦無甁何故名泥團爲甁因不名石爲甁因何故名乳爲酪因縷爲疊因不名蒲爲因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하나하나의 사물이 모든 사물들을 생기게 할 것이다. 마치 손가락 끝이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을 만들어 내듯이 그렇듯이 실은 명주만을 내지 않고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을 낼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도 발생한다면, 왜 실은 명주만을 만들어 내고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은 만들어 내진 않는가? 모두22)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모든 원인들은 각각 힘이 있어서 결과를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기름이 필요한 자는 반드시 삼[麻]에서 (기름을) 얻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삼에서 구하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가?
016_0530_a_03L復次若因中先無果而果生者則一一物應生一切物如指端應生車飮食等如是縷不應但出疊亦應出車食等物何以故若無而能生者何故縷但能生疊而不生車飮食等物俱無故若因中先無果而果生者則諸因不應各各有力能生果如須油者從麻取不苲於沙若俱無者何故麻中求而不苲沙
만약 “이전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지 모래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기에 그래서 삼에서 구하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발생의 상이 성립한다면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지 모래에서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에서 구하는 것이지 모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은 발생의 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삼에서 구하는 것이지 모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016_0530_a_12L若謂曾見麻出油見從沙出是故麻中求而不苲沙事不然何以故若生相成者應言餘時見麻出油不見沙出是故於麻中不取沙而一切法生相不成故得言餘時見麻出油故麻中求不取於沙
또 내가 이제 한 사물을 파괴할 때 모두가 모든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 발생하는 것,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 결과가 미리 존재하기도 하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면서 발생하는 것 세 가지 발생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동의인(同疑因)에 떨어질 것이다.
016_0530_a_18L復次我今不但破一事皆摠破一切因果若因中先有果生先無果先有果無果生是三生皆不成是故汝言餘時見麻出油則墮同疑因
016_0530_b_01L또 만약 앞선 원인 속에 결과가 없는데도 결과가 발생한다면 모든 원인의 상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원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데 법이 무엇을 만들 수 있겠으며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만들지 않고 성취하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이라 하겠는가? 이와 같이 만드는 사람에게는 만드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또한 만들게 하는 자에게도 만드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면 만드는 일[作]ㆍ만드는 사람[作者]ㆍ만드는 대상[作法]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면 어떻게 다시 만드는 일을 필요로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만드는 일ㆍ만드는 사람ㆍ만드는 대상의 모든 원인들을 다 얻을 수 없기에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016_0530_a_21L復次若先因中無果而果生者諸因相則不何以故諸因若無法何能作何能若無作無成云何名爲因如是作不得有所作使作者亦不得有所若謂因中先有果則不應有作作法別異何以故若先有果何須復作是故汝說作作者作法諸因皆不可得因中先無果者是亦不然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이런 비판을 하겠지만 나는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 원인과 결과가 모두 공하다고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타파해서 ‘나’와 법을 성립시키니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다면 이런 비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016_0530_b_06L何以若人受作作者分別有因果應作是難我說作作者及因果皆空若汝破作作者及因果則成我法不名爲是故因中先無果而果生是事不復次若人受因中先有果應作是我不說因中先有果故不受此難亦不受因中先無果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기도 하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면서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함[有性]과 존재하지 않음[無性]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본성이 상반되는데 어떻게 처소를 같이하겠는가? 마치 밝음과 어둠, 괴로움과 즐거움, 감과 머묾, 계박과 해탈이 처소를 같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 (동시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으면서 두 가지 모두는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0_b_13L若謂因中先亦有果亦無果而果生是亦不然何以無性相違故性相違者云何一處如明闇苦樂去住縛解不得同處故因中先有果先無果二俱不生
또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는 것과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의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도 발생하지 않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발생하지 않고,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치가 이것에 달하면 모든 처소에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끝내 발생하지 않는다. 끝내 발생하지 않으니 모든 유위법들은 다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들은 다 원인이고 결과이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또한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016_0530_b_17L因中先有果先無果上有無中已是故先因中有果亦不生無果亦不生有無亦不生理極於此一切處推求不可得是故果畢竟不生果畢竟不生故則一切有爲法皆空何以故一切有爲法皆是因是果有爲空故無爲亦空有爲無爲尚空何況我耶
016_0530_c_01L
3. 연을 관찰하는 문[觀緣門]
016_0530_c_01L觀緣門第三

또 모든 법의 연(緣)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016_0530_c_02L復次諸法緣不成何以故

하나하나의 연이든 화합한 연이든
이것에는 결과가 존재하지 않네.
연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기겠는가?
016_0530_c_03L廣略衆緣法
是中無有果
緣中若無果
云何從緣生

물단지 등의 결과는 하나하나의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합한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문(門)에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016_0530_c_05L甁等果一一緣中無和合中亦無二門中無云何言從緣生
【문】 왜 연들이라 하는가?
016_0530_c_07L問曰云何名爲諸緣
【답】 4연(緣)에서 모든 법이 생기네.
다시 제5의 연은 존재하지 않네.
인연ㆍ등무간연ㆍ
소연연ㆍ증상연이네.
016_0530_c_08L答曰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4연(緣)이란 인연ㆍ등무간연[次第緣]ㆍ소연연[緣緣]ㆍ증상연이다. 인연이란, 법을 생기게 하는 직접 원인이다. 이미 생기게 했거나 지금 생기게 하거나 앞으로 생기게 하는 직접 원인인 법을 인연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이란, 전찰나의 법이 소멸했을 때 잇달아서 다음 찰나의 법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소연연이란, 기억된 법에 수반되어서 신업(身業)을 일으키거나 구업(口業)을 일으키거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數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소연연이라고 한다. 증상연이란, 이 법이 존재하기에 저 법이 발생할 수 있을 때 이 법은 저 법에 대해서 증상연이 된다. 이와 같이 4연은 모두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016_0530_c_10L四緣者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緣者隨所從生法若已從生今從生當從生是法名因緣次第緣者前法已滅次第生是名次第緣緣緣者所念法若起身業若起口業若起心心數法是名緣緣增上緣者以有此法故彼法得生此法於彼法爲增上如是四緣皆因中無果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연들이 없이 결과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들이 없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원인이 없이 결과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인이 없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과 원인[因]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치로 궁구해 보건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 곳23)에 모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연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화합한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16_0530_c_18L若因中有果者應離諸緣而有果而實離緣無若緣中有果者應離因而有果實離因無果若於緣及因有果者可得以理推求而不可得是故二處俱無如是一一中無和合中亦無云何得言果從緣生復次
016_0531_a_01L
만약 결과가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에서 출현한다면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016_0531_a_01L若果緣中無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또 만약 결과가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연에서 발생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서는 발생하지 않겠는가? (결과가) 둘 모두24)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기에 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연이 전이고 결과가 후이기 때문이다. 연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다.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공하다. 유위법들과 무위법들이 공한데 어떻게 나(我)가 존재하겠는가?
016_0531_a_03L若謂果緣中無而從緣生者何故不從非緣生二俱無故是故無有因緣能生果者果不生故緣亦不生何以以先緣後果故緣果無故一切有爲法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無爲空故云何有我耶

4. 상을 관찰하는 문[觀相門]
016_0531_a_09L觀相門第四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016_0531_a_10L復次一切法空何以故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두 법은 모두 상(相)이 존재하지 않네.
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두 법은 모두 공하네.
016_0531_a_11L有爲及無爲
二法俱無相
以無有相故
二法則皆空

유위법은 상으로써 성립하지 않는다.
016_0531_a_13L有爲法不以相成
【문】 무엇을 유위의 상이라고 하는가?
016_0531_a_14L問曰何等是有爲
【답】 모든 사물들에는 각각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 가령 소는 뿔이 있고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고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고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데 이것이 소의 상이다. 가령 물단지는 밑바닥이 평평하고 배가 불룩하고 목이 가늘고 입술이 투박한데, 이것이 물단지의 상이다. 가령 수레는 바퀴ㆍ굴대ㆍ끌채[轅]ㆍ멍에[軛]이 있는데 이것이 수레의 상이다. 가령 사람은 머리ㆍ눈ㆍ배ㆍ등골뼈ㆍ어깨ㆍ팔ㆍ손ㆍ발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상이다. 그렇듯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만약 유위법의 상이라면 유위법인가, 무위법인가?
016_0531_a_15L答曰萬物各有有爲相如牛以角峯垂%(古*頁)尾端有毛是爲牛相如甁以底平腹大頸細脣麤是爲甁相如車以輪軛是爲車相如人以頭肩臂足是爲人相如是生若是有爲法相者爲是有爲爲是無爲
【문】 만약 유위법이라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問曰若是有爲有何過
【답】 만약 발생이 유위라면
다시 3상(相)이 존재할 것이네.
만약 발생이 무위라면
어떻게 유위의 상(相)이라 하겠는가?
016_0531_a_21L答曰若生是有爲
復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016_0531_b_01L
만약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3상(相)이 존재할 것이고, 이 3상에 다시 3상이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뻗어나가면 무한역행이 된다. 머묾과 소멸도 그러하다. 만약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무위법이 유위법에 대해서 상을 만들겠는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없는데 누가 이 발생을 인지할 수 있겠는가? 또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분별되기에 발생이 존재한다. 무위법은 분별되지 않기에 발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머묾과 소멸도 그러하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공(空)하기에 유위법들이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에 의존하기에 무위법이 존재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
016_0531_a_23L若生是有爲者卽應有三相是三相復應有三相如是展轉則爲無窮亦爾若生是無爲者云何無爲與有爲作相離生誰能知是生復次分別生故有生無爲不可分別是故無生滅亦爾滅空故爲法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有爲故有無爲有爲無爲法空故切法皆空
【문】 그대가 “3상에 다시 3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한역행이 되니 발생은 유위법이 아니다”고 말한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발생한 발생의 발생은
그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016_0531_b_09L問曰汝說三相復有三相是故無窮生不應是有爲者今當說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本生]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生生]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삼상은 비록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역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531_b_12L法生時通自體七法共生生生住住滅滅七法中本生除自體能生六法生生能生本生本生還生生生是故三相雖是有爲而非無窮滅亦如是

【답】 만약 이 발생의 발생이
다시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016_0531_b_17L答曰若謂是生生
還能生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만약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 발생의 발생이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016_0531_b_19L若謂生生能生本生本生不生生生生生何能生本生

만약 이 근본 발생이
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이 저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016_0531_b_21L若謂是本生
能生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016_0531_c_01L
만약 “근본 발생[本生]이 발생의 발생[生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의 발생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의 발생[生生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래서 발생의 발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 발생이 실제로는 자체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발생의 발생이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531_b_23L若謂本生能生生生生生生已還生本生是事不然何以故生生法應生本生是故名生生而本生實自未生云何能生生生若謂生生生時能生本生者是事亦不然何以故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혹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016_0531_c_05L是生生生時
或能生本生
生生尚未生
何能生本生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혹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생의 발생이 자체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만약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발생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타오를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531_c_07L是生生生時或能生本生而是生生自體未生不能生本生若謂是生生生時能自生亦生彼如燈然時能自照亦照彼是事不然何以故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등불은 무엇을 비추는 것일까.
016_0531_c_11L燈中自無闇
住處亦無闇
破闇乃名照
燈爲何所照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머무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만약 등불에 어둠이 없다면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고 한다. 등불은 자기의 어둠을 없애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것의 어둠을 없애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춘다. 발생도 이와 같아서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1_c_13L燈體自無闇明所住處亦無闇若燈中無闇住處亦無闇云何言燈自照亦能照彼破闇故名爲照燈不自破亦不破彼闇是故燈不自照亦不照彼是故汝先說燈自照亦照彼亦如是自生亦生彼者是事不然
【문】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등불에는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016_0531_c_19L若燈然時能破闇是故燈中無闇住處亦無闇
【답】어떻게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타오르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가 없네.
016_0531_c_21L答曰云何燈然時
而能破於闇
此燈初然時
不能及於闇
016_0532_a_01L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에 다다를 수 없다. 만약 어둠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어둠을 없앤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016_0531_c_23L若燈然時不能到闇若不到闇不應言破闇

만약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 세간에 있을 때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애리라.
016_0532_a_02L復次燈若不及闇
而能破闇者
燈在於此閒
則破一切闇

또 만약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아도 힘으로써 능히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지금 타오르고 있는 등불이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두 곳25)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간에서 지금 타오르고 있는 등불은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앨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등불이 어둠에 미치지 않아도 힘으로써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2_a_04L若謂燈雖不到闇而力能破闇者處然燈應破一切世閒闇俱不及故而實此閒然燈不能破一切世閒闇是故汝說燈雖不及闇而力能破闇是事不然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이와 같아서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016_0532_a_09L復次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闇亦應如是
自蔽亦蔽彼

또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므로 자기도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약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을 수 없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 그러나 등불은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016_0532_a_11L若謂燈能自照亦照彼闇與燈相違亦應自蔽亦蔽彼若闇與燈相違能自蔽亦不蔽彼而言燈能自照亦照彼者是事不然是故汝喩非也如生能自生亦生彼者今當更說

만약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발생을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32_a_16L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已生何用生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든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할 것이다.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은 곧 발생인데 어떻게 다시 발생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미 발생한 것에는 다시 발생이 존재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作已]에는 다시 만듦[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생은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그대가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016_0532_a_18L此生未生時應若生已生若未生生若未生而生未生名未有云何能自若謂生已而生生已卽是生何須更生生已更無生作已更無作是故生不自生若生不自生云何生彼汝說自生亦生彼是事不然滅亦如是
016_0532_b_01L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법은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위법이 소멸한 것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열반도 공하다.
016_0532_b_01L是故生滅是有爲相是事不然滅有爲相不成故有爲法空有爲法空無爲法亦空何以故滅有爲名無爲涅槃是故涅槃亦空
또 발생이 없고 머묾이 없고 소멸이 없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으니 법(法)이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상(相)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라면 어떤 상(相)으로 이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하는가? 만약 상이 있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어떻게 상이 없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상이 없는 것은 무(無)일 것이다. 무는 인지할 수 없다.
016_0532_b_05L復次無生無住無滅名無爲相無生滅則無法法不應作相若謂無相是涅槃相事不然若無相是涅槃相以何相故是無相若以有相知是無相云何名無相若以無相知是無相無相是無無則不可知
만약 “가령 여러 벌의 옷은 다 상이 있는 것이지만 오직 한 벌의 옷만이 상이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바로 상이 없는 것을 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상이 없는 옷을 취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상이 없는 옷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의 상이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없는 곳이 무위의 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2_b_11L若謂如衆衣皆有相一衣無相正以無相爲相故人言取無相衣如是可知無相衣可取如是滅是有爲相無生滅處當知是無爲相是故無相是涅槃者是事不然
왜 그러한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여러 인(因)과 연(緣)들이 모두 공하다.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것에 의존해서 무위를 얻겠는가? 그대는 어떤 유위의 확정된 상을 얻기에 상이 없는 곳이 무위라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여러 상의 옷들 중에서 상이 없는 옷이 상이 없는 열반에 비유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옷의 비유는 후의 제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위법은 모두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나[我]도 공하다. 셋26)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
016_0532_b_15L何以故滅種種因緣皆空不得有有爲相云何因此知無爲汝得何有爲決定相知無相處是無爲是故汝說衆相衣中無相衣喩涅槃無相者事不然又衣喩後第五門中廣說故有爲法皆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有爲無爲法空故我亦空三事空故一切法皆空

5.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관찰하는 문[觀有相無相門]
016_0532_b_23L觀有相無相門第五
016_0532_c_01L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016_0532_c_01L復次一切法空何以故

상(相)이 있는 것에서 상은 상을 띠지 않네.
상이 없는 것에서도 상은 상을 띠지 않네.
그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떠나서
상이 어떻게 상을 띠겠는가?
016_0532_c_02L有相相不相
無相亦不相
離彼相不相
相爲何所相

상이 있는 사물[事]에서 상은 상을 띠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에 상이 미리 있다면 다시 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또 만약 상이 있는 사물에서 상이 상을 띨 수 있다면 두 상이 있다는 과실이 있다. 첫째는 전에 있는 상이고, 둘째는 상(相)에 온 상(相)이다.27) 그러므로 상이 있는 사물에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상이 없는 사물에서도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어떤 법이 상이 없는 것이기에 상이 있는 것으로써 상을 띠겠는가? 가령 코끼리에는 두 개의 어금니가 있고 한 개의 코가 늘어져 있고 머리에 세 개의 돌기가 있고 귀는 삼태기[箕]와 같고 등뼈는 굽은 활과 같고 배는 크고 축 늘어져 있으며 꼬리끝에 털이 나 있고 네 다리는 투박하고 둥글다. 이것을 코끼리의 상이라고 한다. 이 상들을 떠나서 다시 코끼리가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은 없다. 가령 말은 쫑긋 솟은 귀를 갖고 있고 갈기가 축 늘어져 있고 네 다리에는 같은 발굽이 있고 꼬리 전체에 털이 나 있다. 이 상들을 떠나서 다시 말이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이와 같이 상이 있는 것에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떠나서 제3의 법이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016_0532_c_04L有相事中相不相何以故若法先有更何用相爲復次若有相事中相得相者則有二相過一者先有相二者相來相是相是故有相事中相無所相無相事中相亦無所相何法名無相以有相相如象有雙牙垂一鼻頭有三耳如箕脊如彎弓腹大而垂尾端有毛四腳麤圓是爲象相若離是相更無有象可以相相如馬豎耳垂%((髟-彡)*忩)四腳同蹄尾通有毛若離是相更無有馬可以相相如是有相中相無所無相中相亦無所相離有相無相更無第三法可以相相是故相無所
016_0533_a_01L상이 상을 띠는 일이 없기에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法]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사물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라는 것을 안다. 이 이유 때문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모두 공하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사물들이 또한 공하다. 왜 그러한가?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서 다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 아닌 것[非物]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소멸한 것이기에 사물 아닌 것[無物]이라 한다. 만약 사물이 아니라면 무엇이 소멸하겠는가? 그래서 사물 아닌 것이라 한다. 사물과 사물 아닌 것이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다 공하다.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나[我]도 공하다.
016_0532_c_18L相無所相故可相法亦不成何以故以相故知是事名可相以是因緣故可相俱空可相空故萬物亦空以故離相可相更無有物物無故物亦無以物滅故名無物若無物者何所滅故名爲無物無物空故切有爲法皆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有爲無爲空故我亦空

6. 같음과 다름을 관찰하는 문[觀一異門]
016_0533_a_02L觀一異門第六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016_0533_a_03L復次一切法空何以故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의
같음이나 다름은 얻을 수 없네.
같음과 다름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 둘이 성립하겠는가?
016_0533_a_04L相及與可相
一異不可得
若無有一異
是二云何成

이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같음을 얻을 수도 없고 다름도 얻을 수 없다. 만약 같음과 다름을 얻을 수 없다면 이 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 공하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공하기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다.
016_0533_a_06L是相可相若一不可得異亦不可得若一異不可得是二則不成是故相可相皆空可相空故一切法皆空
【문】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항상 성립하고 있는데 왜 성립하지 않는다 하는가? 그대는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같음이나 다름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모든 사물들에 있어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거나,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거나, 일부분은 상(相)이고 다른 부분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식(識)의 상(相)은 식과 같기에 작용하는 식(識)을 떠나서 다시 식이 있지 않다. 예컨대 수(受)의 상은 수와 같기에 작용하는 수(受)을 떠나서 다시 수가 있지 않다. 이것들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같다’는 것의 예이다.
016_0533_a_09L問曰可相常成何故不成汝說相可相一異不可得今當說凡物或相卽是可相或相異可相或少分是相餘是可相如識相是識離所用識更無識如受相是受離所用受更無受如是等相卽是可相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애(愛)의 소멸을 열반이라 한다. 애(愛)는 유위의 유루법이고 소멸(滅)은 무위의 무루법이다”고 말씀하셨다. 예컨대 믿음[信]에는 세 가지 상이 있다. 선한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고 법을 듣고자 하기를 좋아하고 보시를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기 때문에 색온(色蘊)에 속한다. 믿음[信]은 심소법에 속하기 때문에 행온(行蘊)에 속한다. 이것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의 예이다.
016_0533_a_15L如佛說滅愛名涅槃愛是有爲有漏法滅是無爲漏法如信者有三相樂親近善人欲聽法樂行布施是三事身口業故色陰所攝信是心數法故行陰所攝是名相與可相異
016_0533_b_01L예컨대 바르게 봄[正見]은 도(道)의 상(相)이다. 도(道)의 일부분이다. 또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의 상이다. 유위법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이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을 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거나,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거나,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을 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3_a_20L如正見是道相道是少分又生滅是有爲相於有爲法是少分如是於可相中少分名是故或相卽可相或相異可相可相少分爲相汝言一異不成故可相不成者是事不然
【답】 그대가 “상은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 식(識) 등이 그러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이 있기에 인지할 수 있는 것을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라고 하고, 작용하는 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은 자기를 인지할 수 없다. 마치 손가락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고,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그러므로 그대가 “식이 곧 상이고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3_b_02L答曰汝說或相是可相如識等是事不然何以故以相故可知名可相所用者名爲相物不能自知如指不能自觸如眼不能自見是故汝說識卽是相可相是事不然
또 만약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면 ‘이것은 상이다’, ‘이것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 하고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것은 상이다’, ‘이것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 하고 분별할 수 있다면 상이 그대로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만약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상은 원인이고 상을 띠게 하는 것은 결과이니, 이 둘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3_b_07L復次若相卽是可相者不應分別是相是可相若分別是相是可相不應言相卽是可相復次若相卽是可相者因果則一何以故相是因可相是果是二則一而實不一是故相卽是可相是事不然汝說相異可相者是亦不然
그대가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그대가 “애(愛)의 소멸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애(愛)가 열반의 상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애가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애의 소멸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그대가 믿음[信]에는 세 가지 상(相)28)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믿음[信]에 상이 없다면 이 세 가지 일이 없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다름을 얻을 수 없다. 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면 상에 다시 상이 있을 것이다. 무한역행이 될 것이니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름을 얻을 수 없다.
016_0533_b_13L汝說滅愛是涅槃相不說愛是涅槃相若說愛是涅槃相應言相可相異若言滅愛是涅槃相則不得言相可相異又汝說信者有三相俱不異信若無信則無此三事是故不得相可相異又相可相異者相更復應有相則爲無窮是事不然故相可相不得異
【문】 등불이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듯이 그렇듯이 상은 자기의 상을 띨 수 있고 또한 상은 다른 것의 상을 띨 수 있다.
016_0533_b_20L問曰如燈能自照亦能照彼如是相能自相亦能相彼
【답】 그대가 말한 등불의 비유는 세 유위의 상을 타파할 때 이미 타파한 바 있다. 또 앞에서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셈이 된다. 그대는 앞에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상이 자기의 상을 띠고 다른 것의 상도 띤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3_b_21L答曰汝說燈喩三有爲相中已破自違先說汝上言相可相異而今言相自能相亦能相彼是事不然
016_0533_c_01L또 그대가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이 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의미는 같음이나 다름에 있을 것이다. 같음과 다름의 의미가 앞에서 이미 타파되었기 때문에 일부분이 상이라는 것도 타파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같다는 것도 얻을 수 없고 다르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다시 제3의 법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성취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모두 공하다. 이 둘이 공하기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다.
016_0533_c_01L又汝說可相中少分是相者是事不然以故此義或在一中或在異中一異義先已破故當知少分相亦破如是種種因緣相可相一不可得異不可更無第三法成相可相是故相相俱空是二空故一切法皆空

7. 유와 무를 관찰하는 문[觀有無門]
016_0533_c_07L觀有無門第七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와 무는 동시에 얻을 수 없다. 또한 동시가 아닐 때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3_c_08L復次一切法空何以故有無一時不可得非一時亦不可得如說

유와 무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네.
무를 떠나서도 유가 존재하지 않고
무를 떠나지 않고서도 유가 존재하지 않네.
유는 항상 존재하지 않네.
016_0533_c_10L有無一時無
離無有亦無
不離無有有
有則應常無

유[有性]와 무[無性]는 한 법 속에 동시에[共]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태어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을 때는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는 같다. 이것에 대해서는『중론』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만약 “무를 떠나서 유가 존재하기에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무를 떠나서 어떻게 유가 존재하겠는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법이 발생할 때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동시에 함께 발생한다.『아비달마』에서 “유와 무상성은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무상성은 소멸의 상(相)이기에 무이다. 그러므로 무를 떠나서 유가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3_c_12L有無性相違一法中不應共有如生時無死死時無生是事『中論』中已說若謂離無有有無過者是事不然以故離無云何有有如先說法生時通自體七法共生如阿毘曇中說與無常共生無常是滅相故名無故離無有則不生
만약 무상성을 떠나지 않고서 유가 발생한다면 유는 항상 무일 것이다. 만약 상주함이 있는 것[有常]이 무라면 최초에 머묾이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괴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머묾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유는 항상 무일 것이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무상을 떠나서 유가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무상을 떠나서 실제로 유는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3_c_19L若不離無常有有生者有則常無若有常無者初無有常是壞故而實有住是故有不常若離無常有有生者是亦不然以故離無常有實不生
016_0534_a_01L【문】 유가 발생할 때 이미 무상성이 존재하기에 유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소멸할 때 (무상성이) 일어나서 유를 괴멸하게 한다. 이와 같이 발생[生]과 머묾[住]과 소멸[滅]과 쇠이[老]는 모두 시간을 기다려서야 일어날 수 있다. 유가 발생할 때 발생[生]이 작용을 해서 유를 발생하게 한다. 발생과 소멸의 중간에는 머묾[住]이 작용을 행해서 유를 유지한다. 소멸할 때는 무상성이 작용을 행해서 이 유를 소멸하게 한다. 쇠이[老]는 발생을 변하게 해서 머묾에 다다르게 하고 머묾을 변하게 해서 소멸에 다다르게 한다. 무상성은 상주함을 얻는 것을 괴멸하게 해서 네 가지의 것29)을 성취하게 한다. 그러므로 법이 비록 무상성과 함께 발생하긴 하지만 유가 항상 무인 것이 아니다.
016_0533_c_23L問曰有生時已有無常而未發滅時乃發壞是有如是生得皆待時而發有起生爲用令有生滅中閒住爲用持是有滅時無常爲用滅是有生至住變住至滅無常則壞常令四事成就是故法雖與無常共生非常無
【답】 그대가 소멸의 상인 무상성이 유와 함께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발생할 때 유는 괴멸할 것이고 소멸할 때 유는 발생할 것이다. 또 발생과 소멸이 둘다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소멸할 때는 발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발생할 때는 소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발생과 소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무상성이 머묾과 함께 발생한다고 말한다면30) 유가 괴멸할 때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머물 때 괴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머묾과 괴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쇠이할 때는 머묾이 존재하지 않고 머물 때는 쇠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016_0534_a_07L答曰汝說無常是滅相與有共生時有應壞壞時有應生復次生滅俱無何以故滅時不應有生生時不應有滅生滅相違故復次汝法無常與住共生有壞時應無住若住則無何以故住壞相違故老時無住時無老
016_0534_b_01L그러므로 그대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과 쇠이와 무상성이 본래 함께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뒤섞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이 유가 만약 무상성과 함께 발생한다면 무상성은 괴멸의 상이니, 모든 사물들은 발생할 때 괴멸의 상이 없고 머물 때도 괴멸의 상이 없다. 그때 이 무상의 상이 없지 않겠는가? 예컨대 인식하기에 식(識)이니 인식하지 않는다면 식의 상이 없다. 감수하기에 수이니 감수(感受)하지 않는다면 수의 상이 없다. 억념(憶念)하기에 념(念)이니 억념하지 않는다면 념(念)의 상이 없다. 발생[起]이 발생[生]의 상이니 발생하지 않는다면 발생의 상이 아니다. 보존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이 머묾[住]의 상이니 보존하고 유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머묾의 상이 아니다. 변이[轉變]가 쇠이[老]의 상이니 변이하지 않는다면 쇠이의 상이 아니다. 수명이 소멸하는 것이 죽음의 상이니 수명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상이 아니다. 이와 같이 괴멸은 무상성의 상이다. 괴멸을 떠나서는 무상성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발생과 머묾의 때에 비록 무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유를 괴멸시킬 수 없고 후에 유를 괴멸시킬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함께 발생하겠는가? 그렇다면 유가 괴멸할 때마다 무상이 존재할 것이다.
016_0534_a_13L是故汝說生無常本來共生是則錯亂何以故是有若與無常共生無常是壞相凡物生時無壞相住時亦無壞相爾時非是無無常相耶如能識故名識不能識則無識相能受故名受不能受則無受能念故名念不能念則無念相是生相不起則非生相攝持是住相不攝持則非住相轉變是老相不轉變則非老相壽命滅是死相壽命不滅則非死相如是壞是無常相離壞非無常相若生住時雖有無常不能壞有後能壞有者何用共生爲如是應隨有壞時乃有無常
그러므로 “비록 무상성이 함께 발생하긴 하지만 후에 유를 괴멸시킨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이와 같이 유와 무는 함께해서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고서 성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공하다. 유와 무가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다.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또한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중생도 또한 공하다.
016_0534_b_03L是故無常雖共生後乃壞有者是事不然如是有無共不成不共亦不成是故有無空有無空故一切有爲空一切有爲空無爲亦空有爲無爲空故衆生亦空

8. 자성을 관찰하는 문[觀性門]
016_0534_b_07L觀性門第八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4_b_08L復次一切法空何以故諸法無性故如說

변이가 있는 것이 보이니
법에는 자성이 없네.
자성이 없는 법도 존재하지 않네.
법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네.
016_0534_b_10L見有變異相
諸法無有性
無性法亦無
諸法皆空故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이 다 변이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므로 법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여러 연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성이 연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은 만들어진 법[作法]이다. 만들어지지 않은 법[不作法]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에 자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하다.
016_0534_b_12L諸法若有性則不應變異而見一切法皆變異是故當知諸法無性復次若諸法有定性則不應從衆緣生性從衆緣生者性卽是作法不作法不因待他名爲性是故一切法空
016_0534_c_01L【문】 만약 모든 법이 공하다면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을 것이다. 만약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다면 고제(苦諦)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제가 없다면 집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제와 집제가 없다면 멸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苦)의 소멸이 없다면 고를 소멸시키는 도(道)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해서 자성이 없다면 4성제(聖諦)가 없을 것이다. 4성제가 없기 때문에 4사문과(沙門果)31)도 없다. 4사문과가 없기 때문에 현성(賢聖)이 없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불(佛)ㆍ법(法)ㆍ승(僧)도 없고 세간의 법들도 모두 없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절대로 공하지 않다.
016_0534_b_17L若一切法空則無生無滅若無生則無苦諦若無苦諦則無集諦無苦集諦則無滅諦若無苦滅則無至苦滅道若諸法空無性則無四聖無四聖諦故亦無四沙門果無四沙門果故則無賢聖是事無故僧亦無世閒法皆亦無是事不然故諸法不應盡空
【답】 2제(諦)가 있다. 하나는 세제(世諦)이고 하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세제에 의존하기에 제일의제를 말할 수 있다. 만약 세제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말할 수 없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지 못한다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2제(諦)를 알지 못한다면 자기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과 자타의 이익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만약 세제를 안다면 제일의제를 알고, 제일의제를 안다면 세제를 안다. 그대가 이제 세제를 말하는 것을 듣고서 “이것은 제일의제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과실에 떨어진다. 모든 부처님들의 연기[因緣]의 법을 깊고 깊은 제일의(第一義)라고 한다. 이 연기의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나[我]는 공하다”고 말한다. 만약 법이 여러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각각 확정된 자성이 있을 것이다.
016_0534_c_02L答曰有二諦第一義諦因世諦得說第一義若不因世諦則不得說第一義諦若不得第一義諦則不得涅槃若人不知二諦則不知自利他利共利如是若知世諦則知第一義諦知第一義則知世諦汝今聞說世諦謂是第一義諦是故墮在失處諸佛因緣法名爲甚深第一義是因緣法無自性我說是空若諸法不從衆緣生應各有定性
016_0535_a_01L5온(蘊)에는 발생과 소멸의 5온이 있지 않아야 한다. 5온이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면 무상성이 없다. 만약 무상성이 없다면 고성제가 없다. 만약 고성제가 없다면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법인 집성제가 없다. 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고(苦)가 소멸하는 성제(聖諦)가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은 변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苦)가 소멸하는 성제가 없다면 고를 소멸시키는 도(道)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성[空]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4성제가 없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4성제를 얻는 일도 없다. 만약 4성제를 얻는 일이 없다면 고(苦)를 아는 일, 집(集)을 끊는 일, 멸(滅)을 증득하는 일,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다. 이것들이 없기 때문에 4사문과(沙門果)가 없다. 4사문과가 없기 때문에 향(向)32)을 얻는 일이 없다. 만약 향(向)을 얻는 일이 없다면 불(佛)이 없다. 연기의 법을 파괴하기 때문에 법(法)이 없다. 법33)이 없기 때문에 승(僧)이 없다. 만약 불과 법과 승이 없다면 3보(寶)가 없는 것이다. 만약 3보가 없다면 세속의 법을 파괴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하다.
016_0534_c_12L五陰不應有生滅相陰不生不滅卽無無常若無無常無苦聖諦若無苦聖諦則無因緣生法集聖諦諸法若有定性則無苦滅聖諦何以故性無變異故若無苦滅聖諦則無至苦滅道是故若人不受則無四聖諦若無四聖諦則無得四聖諦若無得四聖諦則無知苦證滅修道是事無故則無四沙門無四沙門果故則無得向者若無得向者則無佛破因緣法故則無法以無果故則無僧若無佛則無三寶若無三寶則壞世俗法此則不是故一切法空
또 만약 모든 법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으며 죄가 없고 복이 없으며 죄와 복의 과보가 없어서, 세간은 항상 동일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5_a_02L復次若諸法有定則無生無滅無罪無福無罪福果世閒常是一相是故當知諸法無
만약 “법들은 자성이 없지만 타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타성에 의해 존재하겠는가? 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타성은 그대로 자성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타성은 타자의 자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자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어디에 다시 법이 존재하겠는가? 만약 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무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궁구해 보아도 자성이 없고 타성이 없다. 유가 없고 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법은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016_0535_a_05L若謂諸法無自性從他性有者是亦不然何以故若無自性云何從他性有因自性有他性故又他性卽亦是自性何以故他性卽是他自性故若自性不成他性亦不若自性他性不成離自性他性何處更有法若有不成無亦不成故今推求無自性無他性無有無無一切有爲法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有爲無爲尚空何況我耶

9. 원인과 결과를 관찰하는 문[觀因果門]
016_0535_a_14L觀因果門第九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에는 자성이 없다. 또한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5_a_15L復次一切法空何以故諸法自無性亦不從餘處來如說

결과는 뭇 연 속에서
결코 얻을 수 없네.
또한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결과가 존재하겠는가?
016_0535_a_17L果於衆緣中
畢竟不可得
亦不餘處來
云何而有果
016_0535_b_01L
연들 하나하나에도 화합한 것에도 모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또 이 결과가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른 곳에서 온다면 인과 연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연이 화합하는 작용[功]도 없을 것이다. 만약 결과가 연들 속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공한 것이다. 결과가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이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016_0535_a_19L衆緣若一一中若和合中俱無果先說又是果不從餘處來若餘處來則不從因緣生亦無衆緣和合功若果衆緣中無亦不從餘處來者卽爲空果空故一切有爲法空有爲法空故無爲法亦空有爲無爲尚空何況我耶

10. 짓는 자를 관찰하는 문[觀作者門]
016_0535_b_02L觀作者門第十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짓는 것[自作], 타자가 짓는 것[他作], 양자가 짓는 것[共作], 원인 없이 짓는 것[無因作]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5_b_03L復次一切法空何以故自作他作無因作不可得故如說

자기가 짓는 것, 타자가 짓는 것,
양자가 짓는 것, 원인 없이 짓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은 얻을 수 없네.
그러니 고(苦)가 존재하지 않네.
016_0535_b_05L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不可得
是則無有苦

만약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자기가 자기 자체를 짓는 것이다. 이것을 갖고서 이것을 만들 수는 없다. 예컨대 식(識)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고 손가락은 자기를 감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짓는다고 말할 수 없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타자가 어떻게 고(苦)를 짓겠는가?
016_0535_b_07L苦自作不然何以故若自作卽自作其體不得以是事卽作是事如識不能自識指不能自觸是故不得言自作他作亦不然他何能作苦
【문】 연들이 타자이다. 연들이 고(苦)를 짓기에 타자가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타자가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016_0535_b_11L問曰緣名爲他衆緣作苦故名爲他作何言不從他作
【답】 만약 연들을 타자라 한다면, 고(苦)는 연들이 지은 것이다. 이 고가 연들에서 생겼다면 연들의 성질을 갖는 것[衆緣性]이다. 연들의 성질을 갖는 것인데 어떻게 (연들을) 타자라 하겠는가? 가령 진흙의 물단지에서 진흙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또 가령 금팔찌[金釧]에서 금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고(苦)도 이와 같아서, 여러 연에서 생기기에 연들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또 이 연들은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기에 스스로 있음[自在]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결과가 생긴다고 말할 수 없다.『중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016_0535_b_13L答曰若衆緣名爲他苦則是衆緣作是苦從衆緣生是衆緣性若卽是衆緣性云何名爲如泥甁泥不名爲他又如金釧不名爲他苦亦如是從衆緣生故衆緣不得名爲他復次是衆緣亦不自性有故不得自在是故不得言從衆緣生果如『中論』中說

결과는 여러 연에서 발생하네.
이 연들은 스스로 있지 않네.
연들이 스스로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연들에서 결과가 생기겠는가?
016_0535_b_20L果從衆緣生
是緣不自在
若緣不自在
云何緣生果
016_0535_c_01L
이와 같이 고는 타자가 지을 수 없다.
자기와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와 타자가 고(苦)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자기가 짓는다는 과실과 타자가 짓는다는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양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016_0535_b_22L如是苦不得從他作自作他作亦不有二過故若說自作苦他作苦有自作他作過是故共作苦亦不然
만약 고가 원인 없이 생긴다면, 또한 옳지 않다. 무수한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형가섭[裸形迦葉]34)이 부처님께 물었다.
‘고는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고가 만약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면 타자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고는 양자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고는 원인이 없이 연이 없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물음에 부처님께 서 다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고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5_c_02L若苦無因生亦不然有無量過故經說裸形迦葉問佛苦自作耶佛默然不答世尊若苦不自作者是他作佛亦不答世尊若爾者苦自作他作耶佛亦不答世尊若爾者苦無因無緣作耶佛亦不答如是四問佛皆不答者當知苦則是空
【문】 부처님께서 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 “고(苦)는 무상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에 맞추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따름이다. 이 나형가섭은 “사람[人]이 고의 원인이다”고 말한다. ‘나[我]’가 존재한다고 하는 자는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모두 ‘나[神]’가 지은 것이다. ‘나’는 항상 청정해서 고[苦惱]가 없다. 인식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모두 다 ‘나’이다. ‘나’는 잘 생김ㆍ못 생김ㆍ고(苦)ㆍ낙(樂)을 짓고 다시 여러 가지의 몸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부처님께 “고는 자기가 짓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고는 실제로는 ‘나’가 지은 것이 아니다.
016_0535_c_09L問曰佛說是經不說苦是空隨可度衆生故作是是裸形迦葉謂人是苦因有我者好醜皆神所作神常淸淨無有苦所知所解悉皆是神神作好醜苦還受種種身以是邪見故問佛自作耶是故佛不答苦實非是我作
만약 ‘나’가 고의 원인이고 ‘나’가 원인이 되어서 고가 발생한다면 ‘나’는 무상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원인이고 그 원인에서 발생한 법은 모두 또한 무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죄와 복의 과보는 모두 다 단멸할 것이고 범행을 닦는 복의 과보도 공할 것이다. 만약 ‘나’가 고의 원인이라면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가 만약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를 짓는 자에게 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없이 고를 짓는다면 해탈을 얻는 자도 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탈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를 자기가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535_c_15L若我是苦因因我生苦我卽無常以故若法是因及從因生法皆亦無常若我無常則罪福果報皆悉斷滅梵行福報是亦應空若我是苦因無解脫何以故我若作苦離苦無我能作苦者以無身故若無身而能作苦者得解脫者亦應是苦如是則無解脫而實有解脫是故苦自作不然
016_0536_a_01L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고(苦) 바깥에 어떻게 사람이 있어서 고를 지어서 다른 이에게 주겠는가? 또 만약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자재천이 짓는 것이 되고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재천이 짓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본성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가령 소의 새끼도 소인 것과 같이 만약 만물이 자재천에서 생긴다면 모두 자재천과 유사할 것이다. 이것들은 그것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자재천이 중생을 만든다면 고를 자식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고를 짓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016_0535_c_23L他作苦亦不然離苦何有人而作苦與他復次若他作苦者則爲是自在天作如此邪見問故佛亦不答而實不從自在天作何以故性相違故牛子還是牛若萬物從自在天生應似自在天是其子故復次若自在天作衆生者不應以苦與子是故不應言自在天作苦
【문】 중생이 자재천에서 생기고 괴로움[苦]과 즐거움[樂] 또한 자재천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즐거움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016_0536_a_08L問曰衆生從自在天生苦樂亦從自在所生以不識樂因故與其苦
【답】 만약 중생이 자재천의 자식이라면 오직 즐거움으로써 괴로움을 차단할 뿐이지 괴로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재천만을 공양한다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지 스스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因緣)을 행해서 스스로 과보(果報)를 받을 뿐이지 자재천이 짓는 것이 아니다.
016_0536_a_10L答曰若衆生是自在天子者唯應以樂遮苦不應與苦亦應但供養自在天則滅苦得樂而實不爾但自行苦樂因緣而自受報非自在天作
또 그가 만약 자재천이라면 필요한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스스로 짓는다면 자재천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필요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變化)을 행해서 만물을 짓는 것이 어린애가 노는 것과 같겠는가?
또 만약 자재천이 중생을 만든다면 누가 또 이 자재천을 만드는 것인가? 만약 자재천이 스스로 만든다면 옳지 않다. 사물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만약 다시 만드는 자가 존재한다면 자재천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016_0536_a_13L復次彼若自在者不應有所須有所須自作不名自在若無所須何用變化作萬物如小兒戲復次若自在作衆生誰復作是自在若自在自作則不然如物不能自作若更有作者則不名自
016_0536_b_01L또 만약 자재천이 만드는 자라면 만들 때 장애가 없어서 생각만 해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자재경(自在經)』에서 “자재천은 만물을 만들기를 바라고 모든 고행(苦行)을 행해서 배로 기는 벌레들을 생기게 한다. 또 고행을 행해서 ‘나’는 새들을 생기게 한다. 또 고행을 행해서 사람과 천신을 생기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고행을 행해서 처음에 독충을 생겨나고 하고 다음에 ‘나’는 새를 생겨나게 하고 마지막에 사람과 천신을 생겨나게 한다면, 중생은 업(業)의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고행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6_a_19L復次若自在是作者則於作中無有障㝵念卽能作如『自在經』說自在欲作萬物行諸苦行卽生諸腹行虫行苦行生諸飛鳥復行苦行生諸人若行苦行初生毒虫次生飛鳥生人天當知衆生從業因緣生不從苦行有
또 자재천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어느 곳에 거주하면서 만물을 창조하는 것인가? 이 거주하는 곳은 자재가 만든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 만약 자재천이 만들었다면 어느 곳에 거주하면서 만드는 것인가? 만약 다른 곳에 거주하면서 만든다면 다른 곳은 또 누가 지은 것인가? 그렇다면 무한역행이 된다. 만약 다른 것이 만들었기에 이 자재천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의 모든 사물은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왜 고행해서 다른 이에게 공양하고 기쁘게 해서 원하는 바를 구하려고 하는 것인가? 만약 고행해서 다른 이에게 구한다면 자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6_b_02L復次若自在作萬物者爲住何處而作萬物是住處爲是自在作爲是他作若自在作者爲住何處作若住餘處作餘處復誰作如是則無窮若他作者則有二自在是事不然故世閒萬物非自在所作復次若自在作者何故苦行供養於他欲令歡喜從求所願若苦行求他當知不自在
또 만약 자재천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최초에 만들어진 것은 결코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말[馬]은 항상 말이고 사람은 항상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업(業)에 따라서 변화가 있는 것이니,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죄와 복이 없을 것이다. 선과 악, 잘 생김[美]과 못 생김[醜] 모두 자재천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복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016_0536_b_09L復次若自在作萬物初作便定不應有變馬則常馬人則常人而今隨業有變當知非自在所作復次若自在所作者卽無罪福善惡好醜皆從自在作故而實有罪福是故非自在所
또 만약 중생이 자재천에서 생겨난다면 모두 경애(敬愛)하는 것이 자식이 아버지를 경애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6_b_15L復次若衆生從自在生者皆應敬如子愛父而實不爾有憎有愛故當知非自在所作復次若自在作何故不盡作樂人盡作苦人而有苦者樂者當知從憎愛生故不自在不自在故非自在所作復次若自在作者衆生皆不應有所作而衆生方便各有所作是故當知非自在所作
016_0536_c_01L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왜 모두 즐거운 사람으로 만들고 모두 괴로워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괴로워 하는 사람과 즐거워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미움과 사랑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자재로운 것이 아니고 자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중생이 만드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방편으로 각각 만드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선과 악,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의 일들을 짓지 않아도 스스로 올 것이다. 그와 같다면 세간의 법을 파괴하고 계(戒)를 지키는 일과 범행(梵行)을 행하는 일이 모두 이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6_b_22L復次若自在作者善惡苦樂事不作而自來如是壞世閒法持戒修梵行皆無所益而實不爾是故當知非自在所作
또 만약 (자재천이) 복업(福業)의 인연이기에 중생 중에서 위대하다면 다른 중생의 복업을 행하는 자도 또한 위대할 것이니, 왜 자재천을 귀중하게 여기겠는가? 만약 인연이 없기에 자재롭다면 모든 중생도 자재로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자재로움을 다른 것에 의해서 얻는다면 다른 것도 다른 것에 의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역행이 된다. 무한역행이 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들 때문에 만물은 자재천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재천이 존재하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타자가 지은 것[他作]’에 대해서 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016_0536_c_03L復次若福業因緣故於衆生中大餘衆生行福業者亦復應大何以貴自在若無因緣而自在者一切衆生亦應自在而實不爾當知非自在所若自在從他而得則他復從他是則無窮無窮則無因如是等種種因緣當知萬物非自在生亦無有自如是邪見問他作故佛亦不答
양자가 짓는다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 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인과 연들이 화합해서 생기기 때문에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네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일 뿐이지 ‘고는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016_0536_c_10L作亦不然有二過故衆因緣和合生不從無因生佛亦不答是故此經但破四種邪見不說苦爲空
【답】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인과 연들에서 고가 생긴다고 말해서 네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긴 하지만 이것은 공성을 설시(說示)하는 것이다. 고는 인과 연들에서 생긴다고 설시하는 것은 공성의 이치를 설시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과 연들에서 생긴다면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공하다. 고가 공하듯이 유위와 무위와 중생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6_c_13L答曰雖如是說從衆因緣生苦破四種邪卽是說空說苦從衆因緣生卽是說空義何以故若從衆因緣生則無自無自性卽是空如苦空當知有爲無爲及衆生一切皆空

11. 삼시35)를 관찰하는 문[觀三時門]
016_0536_c_18L觀三時門第十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원인과 원인을 갖는 법[有因法]이 전시(前時)에, 후시(後時)에, 동시[一時]에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6_c_19L復次一切法空何以故因與有因法前時後時一時生不可得故如說

만약 법이 전시에, 후시에, 동시에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016_0536_c_21L若法先後共
是皆不成者
是法從因生
云何當有成
016_0537_a_01L
전에 원인이 있고 후에 원인을 갖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전에 원인이 있고 후에 원인에서 발생한다면, 전의 원인일 때 원인을 갖는 것[有因]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원인이 되겠는가? 만약 전에 원인을 갖는 것이 있고 후에 원인이 있다면 원인이 있지 않을 때 원인을 갖는 것이 이미 성립하는데 원인을 어디에 쓰겠는가? 만약 원인과 원인을 갖는 것이 동시라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소의 뿔이 동시에 생길 때 왼쪽 것과 오른쪽 것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원인은 결과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는 원인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시(時)에서 원인과 결과를 얻을 수 없다.
016_0536_c_23L先因後有因是事不然何以故若先因後從因生者先因時則無有因誰爲因若先有因後因者無因時有因已成何用因爲若因有因一時亦無因如牛角一時生左右不相因如是因非是果因果非是因果一時生故是故三時因果皆不可得
【문】 그대는 원인과 결과의 법을 부정하고 또한 3시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전에 부정함[破]이 있고 후에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이 있다면, 아직 부정되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은데 이 부정함은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만약 전에 부정되어야 할 것이 있고 후에 부정함이 있다면, 부정되어야 할 것이 이미 성립했는데 어디에 부정함을 쓰겠는가? 만약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동시라면 이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소의 뿔이 동시에 생겨서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정함은 부정되어야 할 것에 의존하지 않고 부정되어야 할 것은 부정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016_0537_a_07L問曰汝破因果法三時中亦不成若先有後有可破則未有可破是破破誰若先有可破而後有破可破已成用破爲若破可破一時是亦無因牛角一時生左右不相因故如是破不因可破可破不因破
【답】 그대의 부정함[破]과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도 또한 이 과실이 있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다면 부정함이 없고 부정되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제 공하다고 말하니 내가 말한 것이 성립한다. 만약 내가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定有]고 말한다면 이 비판[難]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비판을 받지 않는다.
016_0537_a_13L答曰汝破可破中亦有是過若諸法空則無破無可破我今說空則成我所說若我說破可破定有者應作是難我不說破可破定有故不應作是難
【문】 전에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마치 도공이 물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이. 또 후에 원인이 존재한다. 제자가 원인이 되어서 스승이 있는 것이니 제자를 가르치고 난 후에 제자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또 동시에 원인이 존재한다. 등불과 빛[明]과 같이. 만약 전시(前時)의 원인, 후시(後時)의 원인, 동시의 원인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537_a_17L問曰眼見先時因如陶師作甁亦有後時因因弟子有師如教化弟子已後時識知是弟子亦有一時因如燈與明說前時因後時因一時因不可得是事不然
016_0537_b_01L【답】 도공이 물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아직 물단지가 있지 않다면 도공은 무엇을 위해 원인이 되겠는가? 도공과 같은 모든 전시(前時)의 원인은 모두 얻을 수 없다. 후시(後時)의 원인도 이와 마찬가지로 얻을 수 없다. 만약 아직 제자가 있지 않다면 누가 스승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후시의 원인도 얻을 수 없다. 만약 동시의 원인이 등불과 빛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 또한 의인(疑因)36)과 동일하다. 등불과 빛이 동시에 생긴다면 어떻게 서로 원인이 되겠는가? 그와 같이 인과 연들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유위법ㆍ무위법ㆍ중생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537_a_22L答曰如陶師作甁是喩不然以故若未有甁陶師與誰作因如陶一切前因皆不可得後時因亦如是不可得若未有弟子誰爲是師故後時因亦不可得若說一時因如燈明是亦同疑因燈明一時生云何相因如是因緣空故當知一切有爲無爲法衆生皆空

12. 발생을 관찰하는 문[觀生門]
016_0537_b_05L觀生門第十二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不生]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고,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016_0537_b_06L復次一切法空何以故不生生時不可得故今生已不生不生亦不生生時亦不生如說

이미 발생한 결과는 발생하지 않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네.
016_0537_b_09L生果則不生
不生亦不生
離是生不生
生時亦不生

발생이란 결과가 생기하는 것, 산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아직 산출되지 않은 것,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란 생기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란, 이 발생이 이미 발생했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무한역행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이미 지었는데 다시 짓기 때문이다. 만약 발생이 발생하고 나서 제2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제2의 발생은 발생하고 나서 제3의 발생을 발생시킬 것이고 제3의 발생은 발생하고 나서 제4의 발생을 발생시킬 것이다. 최초에 발생하고 나서 제2의 발생이 있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발생은 무한역행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生]은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7_b_11L生名果起出未生名未起未出未有生時名始起未成是中生果不生者是生生已不生何以故有無窮過故作已更作故若生生已生第二生二生生已生第三生第三生生已第四生如初生生已有第二生如是生則無窮是事不然是故生不生
016_0537_c_01L또 “발생은 이미 발생하고 나서 사용할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고 이 발생은 발생하지 않으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최초의 발생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발생한다면 그렇다면 두 종류의 발생이 있는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고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대가 앞에서는 확정된 것37)을 말했지만 지금은 확정되지 않는 것38)을 말하고 있다. 이미 지은 것은 짓지 않고,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이미 증명한 것은 증명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미 발생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법[生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不生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모든 발생하지 않은 것에 발생이 있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발생을 떠나서 발생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7_b_18L若謂生生已生所用生生是生不生而生是事不然何以故初生不生而是則二種生生已而生不生而生故汝先定說而今不定如作已不應燒已不應燒證已不應證如是生不應更生是故生法不生不生法亦不生何以故不與生合故又一切不生有生過故
만약 발생을 떠나서 발생이 있다면 지음[作]을 떠나서 지음이 있고 감[去]을 떠나서 감이 있고 먹음[食]을 떠나서 먹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약 발생하지 않는 법이 발생한다면 모든 발생하지 않는 법이 다 발생할 것이다. 모든 범부에게 아직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생기지 않았는데 모두에게 생길 것이고, 괴멸하지 않는 법[不壞法]인 아라한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도 일어날 것이고, 토끼와 말 등에서 뿔이 생기지 않는데도 생길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016_0537_c_03L若不生法生則離生有生是則不生若離生有生則離作有作去有去離食有食如是則壞世俗法事不然是故不生法不生復次若不生法生一切不生法皆應生一切凡夫未生阿耨多羅三藐三菩提皆應生不壞法阿羅漢煩惱不生而生兔馬等角不生而生是事不然是故不應說不生而生
【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란, 가령 인연의 화합ㆍ시간ㆍ공간ㆍ행위자ㆍ방편이 다 갖추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016_0537_c_11L問曰不生而生者如有因緣和合時方作者方便具足是則不生而生非一切不生而生是故不應以一切不生而生爲難
【답】 만약 법이 발생할 때 시간ㆍ공간ㆍ행위자ㆍ방편ㆍ여러 연의 화합에서 발생한다면, 이 중에서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할 때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과실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발생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537_c_14L答曰若法生時方作者方便衆緣和合生是中先定有不生先無亦不生又有無亦不生是三種求生不可得如先說是故不生法不生生時亦不生何以故有生生過不生而生過故
지금 발생하고 있는 법의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 만약 발생을 떠나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을 떠나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7_c_19L生時法生分不生先說未生分亦不生如前說復次離生有生時則應生時生而實離生無生時是故生時亦不生
016_0538_a_01L또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발생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 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의 발생이다. 두 법이 있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아직 발생이 있지 않은데 발생이 어느 곳에서 행하겠는가? 발생이 만약 행할 곳이 없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의 발생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016_0537_c_22L復次若人說生時生則有二生以生時爲生以生時生無有二法云何言有二是故生時亦不生復次未有生生時生於何處行生若無行處則無生時生是故生時亦不生
이와 같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生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무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생(無生)이다. 영원히 공적(空寂)하기 때문이다.
016_0538_a_04L如是生不生生時皆不成生法不成故無生亦如是滅不成故則有爲法亦不成有爲法不成故無爲法亦不成無爲法不成故衆生亦不成是故當知一切法無生畢竟空寂故
十二門論一卷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 4연(緣):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2. 2)3상(相): 생(生), 주(住), 멸(滅)을 말한다.
  3. 3)네 곳[四處]: 자작(自作), 타작(他作), 공작(工作), 무인작(無因作)을 말한다.
  4. 4)3시(時):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5. 5)절중(折中): 서로 다른 사물을 조절하여 알맞게 하는 것을 말한다.
  6. 6)일이 유무에서~잊게 되며: 조화(造化)의 공(功)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화(造化)는 조물주(造物主)를 말한다.
  7. 7)허위(虛位): 실상진여(實相眞如)의 법위(法位)를 말한다.
  8. 8)통발[筌]: 언교(言敎)를 통발에 비유한 것이다.
  9. 9)조차(造次)~없애서: 조차(造次)와 전패(顚沛)는 유가의 말이다. 양현(兩玄)과 일치(一致)는 도가의 말로 천지현묘(天地玄妙)한 이치(理致)를 말한다. 여기서는 유가와 도가의 말을 빌려 범부(凡夫)와 3승(乘)이 1승(乘)으로 돌아온다는 뜻을 표시했다.
  10. 10)허인(虛刃): 공(空)을 비유한 말이다.
  11. 11)희성(希聲): 보통 사람이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 없는 위대한 연주라는 뜻이다. 『노자(老子)』 41장에 “큰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모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大音希聲, 大象無形]”라는 말이 있다.
  12. 12)화란(和鸞): 화(和)와 난(鸞)은 모두 제후의 수레에 다는 방울로 식(軾)에 있는 것을 화라고 하고 재갈에 있는 것을 난이라 한다.
  13. 13)어찌: 원문의 혜(慧)는 소(疏)에서는 언(焉)자로 보았다.
  14. 14)범어 mahāyāna의 음역이고 대승(大乘)이라 한역한다.
  15. 15)법(法)을 함장(含藏)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법은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의미하고 법장(法藏)은 이 교법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의미한다.
  16. 16)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
  17. 17)대세지(大勢至)라고도 한다.
  18. 18)문수(文殊)라고도 한다.
  19. 19)범어 mahāsattva의 의역으로 마하살(摩訶薩)이라 음역하기도 한다. 대보살(大菩薩)을 의미한다.
  20. 20)용수의『공칠십론(空七十論)』을 말한다.
  21. 21)12연기법(緣起法)을 말한다.
  22. 22)앞에서 말한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을 가리킨다.
  23. 23)하나하나의 연과 연들이 화합된 것을 말한다.
  24. 24)연과 연 아닌 것을 말한다.
  25. 25)이 세간의 어둠과 모든 세간의 어둠을 말한다.
  26. 26)유위법ㆍ무위법ㆍ나(我)를 가리킨다.
  27. 27)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이어서 ‘시상(是相)’이 나오는데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本)에 의거해서 빼냈다.
  28. 28)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신(信)’으로 되어 있다. 원본과 명본에 의거해서 ‘상(相)’으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29. 29)발생과 머묾과 소멸과 쇠이를 말한다.
  30. 30)원문의 ‘법(法)’은 ‘설(說)’의 오기일 것이다.
  31. 31)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
  32. 32)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을 말한다.
  33. 33)원문의 ‘과(果)’를 송ㆍ원ㆍ명 3본에 의거해서 ‘법(法)’으로 바꾸었다.
  34. 34)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건자(尼乾子)의 제자일 때의 가섭(迦葉)을 일컫는 말이다.
  35. 35)전시(前時)ㆍ후시(後時)ㆍ동시.
  36. 36)원인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원인.
  37. 37)이미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38. 38)이미 발생한 것인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