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538_b_01L
십팔공론(十八空論)
016_0538_b_01L十八空論 亦十六 亦十八 亦十四 亦十七


용수보살(龍樹菩薩) 지음
진제(眞諦) 한역
016_0538_b_02L龍樹菩薩造
陳天竺三藏眞諦 譯


【문】‘공(空)’이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열여덟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답】사람과 법의 두 가지가 다 ‘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다. 이제 모든 법을 요약하여 그 종류의 같지 않은 것을 열여덟 가지로 전개하겠다.
016_0538_b_04L空無分別云何得有十八種耶
爲顯人法二無我是一切法通相今約諸法種類不同開爲十八
열여덟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안의 공한 것이고, 둘째 바깥의 공한 것이고, 셋째 안팎의 다 공한 것이고, 넷째 원소[大]의 공한 것이고, 다섯째 ‘공’도 역시 공한 것이고, 여섯째 진실의 공한 것이고, 일곱째 함이 있음의 공한 것이고, 여덟째 함이 없음의 공한 것이고, 아홉째 필경의 공한 것이고, 열째 앞뒤가 없는 공한 것이고, 열한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한 것이고, 열두째 불성의 공한 것이고, 열셋째 제 모양의 공한 것이고, 열넷째 일체 법의 공한 것이고, 열다섯째 없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여섯째 있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일곱째 없다는 법과 있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여덟째 얻을 수 없는 자리의 공한 것이다. 이 열여덟 가지를 합하여 열여섯 가지로 만든 것은 무릇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를 성립시킴이니, 하나는 본체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이다.
016_0538_b_07L何者一內空二外空三內外空四大空空空六眞實空七有爲空八無爲空九畢竟空十無前後空十一不捨離十二佛性空十三自相空十四一切法空十五無法空十六有法空七無法有法空十八不可得空合此十八爲十六空凡有兩義故立十六一體二用
첫째의 이른바 안의 공한 것이란, 한편 받아들임의 공한 것이라고도 하나니, 범부와 이승(二乘)들이 여섯 가지 느낌[六入]을 받아드리는 것은 그것이 바로 여섯 대경[大塵]의 과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섯 감관[六根]만이 있어선 집착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히노니,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그 받아들임도 공한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016_0538_b_15L第一內空亦名受者空凡夫二乘謂六入爲受者以能受六塵果報故今明但有六根無有能執以無執故言受者空也
016_0538_c_01L다음 둘째의 바깥의 공한 것이란, 역시 받아들일 것의 공함이라고도 하나니, 여섯 가지 바깥의 느낌을 여읜다면, 어떤 법을 받아들일 것이 없을지라. 모든 중생으로서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이 다만 이 여섯 가지 대경뿐이거늘 안으로 이미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고 바깥으로 역시 받아들일 법이 없을진대, 이것이 곧 사람과 법의 함께 공한 것이니, 식[識]뿐이요, 경계가 없기 때문에 바깥의 공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역시 식이 없음은 곧 안의 공한 것이고, 여섯 가지 느낌에 식이 없음은 곧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감관도 대경도 없음은 곧 법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도 공하고 바깥도 공하다는 두 이치가 서로 성립되는 것이다.
016_0538_b_18L第二外空亦名所受空離六外入無別法爲可受者也若諸衆生所受所用但是六塵內旣無人能受外亦無法可受卽人法俱空唯識無境故名外空以無境故亦無有識卽是內空六入無識卽是無人無有根塵卽是無法故內外二空兩義相成也
다음 셋째의 안팎의 공함이란, 몸의 공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몸은 네 가지 원소[四大]가 안팎의 의지함이 되나니, 안의 의지란, 곧 여섯 감관[六根]에서 다섯 감관의 다 청정한 빛과 뜻의 감관[意根]이 모두 이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것을 안의 의지라 한다. 바깥의 의지란, 곧 바깥의 여섯 대경[大塵]이 그것이니, 자기 몸의 네 가지 원소에서 다섯 감관의 청정한 빛을 제외한 그 나머지 빛ㆍ냄새 등이 다 바깥 여섯 대경에 속하여 다섯 감관을 거둬 지니기 때문에 이를 바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몸을 떠난 바깥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이 몸이 능히 감관과 대경을 지니기 때문에 의지하는 자체라 하고, 감관과 대경을 의지하는 대상이라 하지만, 이 감관이나 또는 감관 아닌 것들이 죄다 공하기 때문에 이를 안팎의 공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016_0538_c_03L第三內外空謂身空也此身四大爲內外所依內依卽六根若五根皆有淨色及意根竝依此身故名內依依者謂外六塵若己身四大唯除五根淨色所餘色香等屬外六塵攝持於五根故稱爲外非謂離身之外也此身能持根塵故名爲依根塵所依此根及非根皆悉是空故名內外空也
다음 넷째의 원소의 공함이란, 몸의 의지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그릇누리[器世界]로서 시방 한량없고 그지없음이 죄다 공하기 때문에 이를 원소의 공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016_0538_c_12L第四大空謂身所拪託卽器世界方無量無邊皆悉是空故名大空
다음 다섯째의 ‘공’도 공함이란, 능히 진실을 비추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앞의 네 가지 공함을 모아서 그 경계를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르기를 공한 지혜라고 하나니, 이 공한 지혜가 역시 공하기 때문에 ‘공’도 ‘공’함이라고 내세운 것이다.
016_0538_c_14L第五空空能照眞之相會前四空境得名呼爲空智空智亦空故立空空
다음 여섯째의 진실의 공함이란, 진실한 경계의 공함을 말하는 것이니, 수행하는 자로서 안팎이 다 공하여 사람도 없고 법도 없음을 볼 적에 이 경계가 진실하여 진실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지만, 분별하는 성품으로선 그 성품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를 분별하는 성품이라 하고, 성품의 공한 그것이 바로 진실의 공함이다.
016_0538_c_16L第六眞實空謂眞境空行者見內外皆空無人無法此境眞實立眞實名由分別性性不可得名分別性性空卽眞實空也
016_0539_a_01L 이것이 여섯 가지 ‘공’에 대한 변론으로서 그 ‘공’의 체(體)가 스스로 차례를 이룩했으니, 첫째는 받아들이는 자체의 공한 것이고, 둘째는 받아들일 대상의 공한 것이고, 셋째는 자기 몸의 공한 것이고, 넷째는 몸의 머무는 처소가 공한 것이고, 다섯째는 비추는 자체의 공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다 관찰할 대경의 공한 것이고, 다섯째는 관찰하는 지혜 자체의 공한 것이고, 여섯째는 분별한 경계 모양이 공한 것이다. 또 앞의 네 가지를 알 것이고, 다섯째는 아는 것이고, 여섯째는 알 것의 모양이니, 다섯째 지혜의 공한 것이 앞의 네 가지 대경을 대치하기 때문에 네 가지 대경이 바로 공함이다. 여섯째 진실의 공한 것이 다섯째의 지혜를 대치하기 때문에 이 지혜가 공함을 이룩하는 것이다. 만약에 다섯째 지혜의 공한 것이 앞의 네 가지 경계를 대치함이 없다면, 이는 곧 사람이 있고 법이 있어서 분별하는 성품이리니, 이 지혜가 앞 경계의 사람도 없고 법도 없음을 봄으로 말미암아 곧 앞의 경계를 대치하는 것이다. 만약에 여섯째 대경이 공함으로 다섯째의 지혜를 대치함이 없다면, 이 지혜는 다만 진실을 이해할 뿐이어서 도로 분별하는 성품을 이룩하리니, 이 때문에 여섯째 그 진실의 공함을 말하여 대치하는 지혜라고 이르는 것이다.
016_0538_c_20L此六空辯空體自成次一受者空二所受空三自身空身所住處空五能照空六所觀境空前四皆是所觀境空第五能觀智空第六所分別境界相貌空又前四所第五能知第六所知相貌第五智空治前四境四境是空第六眞空治第五智故智成空若無第五智空治前四境則有人有法是分別性由此智見前境是無人無法卽治前境若無第六境空治第五智此智旣但眞解還成分別性故言第六眞實空名爲治智也
둘째, 공한 것이 열두 가지가 있음을 밝혔으니, 첫째 행(行)의 공한 것이고, 둘째 행이 아닌 공한 것이다. 보살이 이 두 공함을 배우는 것은 두 가지 선한 법을 얻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선한 도(道)가 그 하나이고, 선한 과(果)가 그 둘이다. 도는 바로 서른일곱 가지의 도품이고, 선한 과는 바로 보리(菩提)의 모든 도가 사람도 법도 없고 진실함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님을 밝힌 것이니, 이 네 가지를 여읜 마음을 이르되 선한 인(因)이라 하고, 이 선한 인을 얻기 위하기 때문에 보살이 행의 공함을 배워 관하는 것이다. 행이 아닌 공함이란, 이른바 두 가지 선한 과(果)이니, 곧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그것이다. 만약에 남음이 있는 그대로 쌓임[集]을 제거했다면 이 과는 세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여의기는 했으나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남음이 없이 괴로움을 소멸했다면 이는 곧 상ㆍ낙ㆍ아ㆍ정일 것이리니 이것이 일곱째와 여덟째의 두 공함이라 바로 청정함이니, 보살이 스스로 도달하여 처음은 도를 얻는 것이요, 그 뒤의 하나는 과를 얻는 것이다.
016_0539_a_10L第二義明空自有十二一者行空非行空菩薩學此兩空爲得二種善一謂善道二謂善果道卽三十七品等善果卽是菩提等也行空者三乘諸道無人法非眞實非虛妄此四種心是名善因爲得此善因故菩薩學觀行空非行空者謂二種善果卽餘無餘涅槃若有餘除集果則離四種顚倒非是常樂我淨無餘滅苦卽是常樂我淨此第七第八兩空是淨菩薩自度初得道後一得果
016_0539_b_01L셋째, 필경의 공함이란, 항상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살이 ‘공’을 닦되 필경 남을 항상 이익되게 하려고 그 중생들이 다할 때까지 항상 교화하기를 맹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집착이 있다면, 이제 이 마음을 관하되 이 마음으로 하여금 결정코 필경이란 마음을 버려야만 자연히 이익이 된다. 바야흐로 진실한 지혜로서 필경의 공함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에 필경의 마음을 내어서 이익되는 일을 한다면 일이 되지 않고 이익하지도 않고 또 자연스럽지도 않으리니, 항상 이익되게는 하되 공하지 않는 그것이 필경의 마음이라 이 지혜를 아홉째의 필경 공한 것이라 한다.
016_0539_a_22L第三畢竟空爲恒利益他菩薩修空畢竟恒欲利他至衆生盡誓恒教化此心有著今此觀心此心定令捨畢竟之心自然利益方是眞實智名畢竟空也若作畢竟心能爲利益不作不益不復自然恒利益不空此畢竟之心是智第九名畢竟空
넷째, 앞뒤가 없는 공함이란, 처음이 없는 ‘공’이라고도 하나니, 필경의 공함을 이룩해 남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앞도, 뒤도 아니고 처음도 끝도 없는 것이다.
016_0539_b_06L第四無前後空亦名無始空爲成畢竟空利益他故不前後卽無始終
보살이 만약에 그것이 바로 ‘공’인 줄을 알지 못한다면,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서 생사를 버릴 것이고, 이미 생사의 공한 것임을 본다면 앞과 뒤를 분별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처음과 끝에 있어서도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단점에나 장점에나 마음이 근심하고 기뻐함이 없을 것이다. 장점에 근심하지 않고 단점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아도 이미 근심과 기쁨을 떠난다면, 능히 생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생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필경의 이익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열째 처음이 없는 ‘공’을 관하는 것이다.
016_0539_b_08L薩若不解其是空則生疲厭之心捨棄生死旣見生死是空則不分別前之與後及以始終旣不分別始終於短於長心無憂喜於長不憂聞短不喜旣離憂喜則能不捨生死以不捨故畢竟利益乃得成也是故第十觀無始空
016_0539_c_01L다섯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이란, 보살이 이 선정을 수학(修學)함으로써 그 공덕의 선근(善根)이 다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 부처님은 남음이 없는 열반 가운데에서도 역시공덕의 선근 문(門)을 버리지 않으신지라 유전 있는 과보가 이미 다 끝났지만 공덕의 선근만은 본래 만물을 교화하려 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작용이 있는 것이다. 여래께선 비록 열반에 드시어도 중생들의 기연(機緣)을 따라 응신(應身)ㆍ화신(化身)의 두 몸을 나타내 중생들을 이끌어 이익되게 하기 위해 곧 다시 마음과 뜻을 일으키시나니, 이 때문에 중생이 다하지 않으므로 응신ㆍ화신의 작용도 다하지 않음이다. 이 때문에 비록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도 공덕의 선근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승(二乘)들이 열반에 든다면 다시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나니, 자비(慈悲)가 희박하여 중생들을 교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비록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모든 불ㆍ보살의 법신ㆍ응신ㆍ화신 세 가지 몸이 만물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은 곧 일체 유전없는 법의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른바 열반에 들어도 공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열반 가운데에 오히려 법신이 있다고 안 것은 작용이 끝내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응신ㆍ화신의 작용이 다하지 않는 것을 보는지라. 이 때문에 이 몸의 본체가 항상 스스로 담연(湛然)하여 길이길이 변천하거나 파괴되지 않는 줄을 안다.
016_0539_b_15L第五不捨離空菩薩修學此定止功德善根無盡何以故一切諸佛於無餘涅槃中亦不捨功德善根門流果報已盡功德善根本爲化物故恒有此用如來雖入涅槃猶隨衆生機緣現應化兩身導利含識卽是更起心義故衆生不盡應化之用亦不故言雖入無餘而不捨功德善根若二乘入滅無更起心以慈悲薄少不化衆生若佛入無餘而更起心以諸佛菩薩三身利物無窮故來法身卽是一切無流法之依處故言散滅不捨離功德也所以得知涅槃之中猶有法身者以用終體旣睹應化之用不盡故知此身之體常自湛然永無遷壞
비바사(毘婆沙) 스님들이 말씀하기를, “열반은 제 모양이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능히 일의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열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지혜를 성취할 수 없고, 지혜를 성취하지 않는다면 번뇌가 없어지지 않는다. 열반이 이미 도를 낼 수 있고 도가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열반의 본래 일인 만큼 이미 그 일이 있는 것을 본다면 응당 그 체(體)가 있는 줄을 알지라.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여래의 법신이 열반 가운데에 있는 것도 곧 이러한 이치다. 분별을 제기하기 위해 열반이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분별하는 성품이겠지만, 진실한 이치 가운데엔 이런 분별이 없나니, 이 때문에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말로써 설명하자니 열반은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실 열반 가운데엔 버리지 않는다는 그 뜻도 없나니, 이 때문에 버리지 않는 ‘공’이란, 곧 생사를 버리지 않는 뜻을 이룩하는 것이다. 앞은 생사를 버리지 않은 채 필경 남을 이익되게 하는 그것이 저 이승(二乘)으로서 아주 이익되게 하지 못하는 것과의 다른 점을 밝히고, 이제 비록 생사에 있거나 열반에 있거나 모두가 다 만물을 교화하는 것임을 밝힘은 이 뜻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앞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 가지 있는 이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곧 열한째의 버리지 않는 ‘공’이고, 또는 산멸(散滅)하지 않는 ‘공’이라고 한다.
016_0539_c_08L如毘婆沙師說無槃無有自相而不可言無何以故能顯事用故若不依涅槃不成智慧智慧不成則煩惱不滅涅槃旣能生道能滅惑卽是涅槃家事旣見有則知應有體故不得言無也如來法身在涅槃中卽義亦爾爲除分別涅槃不捨功德卽是分別性眞實義中無此分別故名不捨離空語言說涅槃不捨功德而涅槃中亦無不捨之意故名不捨空卽成不捨生死之意前明不捨生死畢竟利他異於二乘不能永利今明雖在生死及涅槃竝皆化物此義不異故前來至此凡有三空名利他事此卽第十一不捨空亦名不散空也
여섯째 성품의 공한 것과, 일곱째 모양의 공한 것과, 여덟째 일체 법의 공한 이 세 가지 공한 것이 다 스스로가 이익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016_0539_c_23L六性空七相空八一切法空此三明自利利他因
016_0540_a_01L【문】‘공’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답】청정한 불성이 바로 공한지라. 이 때문에 성품의 공한 것이라 한다.
016_0540_a_01L空何所爲
爲淸淨佛性卽空故名性空
【문】어째서 성품의 공한 것이라 합니까?
【답】불성이란 곧 모든 법의 제 성품이다. 왜냐하면 자연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 성품에 두 가지 뜻이 있을 뿐이니, 하나는 처음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인이 그것이다.
016_0540_a_02L何故名性空
佛性者卽是諸法自性何以故然有故但自性有兩義一無始二因
마치 처음이 없는 생사 가운데 마음이 있거나 마음이 없는 두 가지 법이 자연 원인이 없는 것과 같음이니, 만약에 마음이 원인이 있다면 이 원인이 본래 있는 것이어서 처음이 있다 해야 하겠다. 만약에 본래 원인이 있었다면 이 원인은 곧 자연이겠고, 이미 자연이라면 응당 마음도 자연인 것임을 인정해야 하겠다.
016_0540_a_05L譬如無始生死中有心無心兩法自然無因若心有因此因爲本有爲始若本有因此因卽是自然旣是自亦應許心是自然
옛적에 원인이 있지 않았다면 응당 중생도 없어야 하겠는데, 때가 있고 원인이 있어서 바야흐로 중생이 있다면 이는 마치 흙이나 돌 따위와 같겠다. 만약에 원인과 때가 있으므로 해서 중생을 이룩해야 한다면 이 때문에 자연의 한 부분은 마음 있는 것이 되고, 한 부분은 마음 없는 것이 되는 줄을 알지니, 그러므로 마치 처음이 없는 생사 가운데 마음이 있거나 마음이 업는 두 가지 법이 자연 원인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성도 그와 같아서 자연 원인이 없나니, 허망한 것도 오히려 자연의 이치가 있거늘 어찌 하물며 진실한 것으로서 자연하지 않겠는가. 처음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불성이 원인이 되는지라. 그러므로 여섯 가지 느낌[六入]에 해탈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고, 만약에 불성이 없다면 해탈의 결과를 성취할 수 없으리니, 마치 깨끗한 구슬이 흐린 물을 맑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불성도 처음이 없기 때문에 생사가 처음이 없는 것이다. 같고 다른 ‘공’과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는 ‘공’이 앞서 설한 바 그대로이다.
016_0540_a_09L昔未有因應無衆生有時有因方有衆生如土石等若有因時應成衆生故知自然一分作有心一分作無心故言譬如無始生死中有心無心兩法自然無因也佛性亦爾自然無因虛妄尚有自然何況眞實而不自然故由無始佛性爲因所以六入欲求解脫若無佛解脫之果不得成就譬如淨珠能淸濁水以佛性無始故生死無始一異空淨不淨空等如上說
016_0540_b_01L그리고 이 ‘공’의 성품은 다섯 가지 과실을 여의기 위해 다섯 가지 공덕을 나타내나니, 사람과 법이 곧 분별하는 성품이고 사람과 법을 따라 분별을 내는 것이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다. 분별하는 성품에 나아가 법을 찾아도 얻을 수 없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에 나아가 분별할 사람과 법을 찾아도 얻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진실한 성품이니, 진실이란 체(體)가 없는 것이라, 체가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것이 없고,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없고 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적정(寂靜)하나니, 적정한 그것이 바로 제 성품의 열반인 것이다.
016_0540_a_19L此空性爲離五失顯五種功德人法是分別性從人法生分別是依他性就分別性覓法不可得就依他性覓所分別之人法亦不可得卽眞實性眞實無體無體故無相無相故無生無生故無無滅故寂靜寂靜卽是自性涅槃
이제 성품의 공한 것이 다섯 가지 과실을 제거하나니, 비열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그 첫째이다. 불성을 얻을 수 있고, 얻으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줄을 믿지 않음으로써 보리심(菩提心)을 낼 수가 없는가 하면, 이 보리심을 내지 않기에 항상 비열함을 지키는지라, 불성이 그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능히 비열한 마음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0_b_02L此自性空除五種過失一除下劣心不薄信佛性是有可得得之有無量功德則不能發菩提心不發此心守下劣佛性令其發心故言能除下劣心也
훌륭한 체 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그 둘째이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불성의 평등함을 알지 못하고서 ‘나는 불성이 있고 나는 이미 발심했는데 다른 사람은 불성도 업고 발심할 수도 없다’고 하여, 훌륭한 체하는 교만을 부릴지라도 그가 만약 이 평등한 이치를 체득한다면, 나와 남이 없고 교만한 마음이 곧 없어지리니, 이 때문에 능히 훌륭한 체하는 마음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0_b_07L二除高心若人不解佛性平謂我有佛性我已發心他無佛性不能發心故高慢若體此理無有此高心卽滅故言能除高心也
허망에 집착하여 진실을 버리는 것이 그 셋째이니, 허망 그것이 바로 생사의 과실이라 마치 어떤 사람이 와서 구타하고 모욕하고 비방하는 것과 같음이니, 이러한 일은 첫째 본래 있던 것이 아니고, 둘째는 마음으로 만든 것과 다만 허망으로 일으킨 것이어서 자연이 아니니, 곧 허망이다. 만약에 진실한 도리를 체득하지 않고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허망에 집착하여 다 진실을 버리기 마련이니, 이 때문에 삼독(三毒) 가시 따위의 번뇌를 내는 것이다. 만약에 생사가 허망하여 실제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안다면 구타하는 이와 모욕당하는 이를 보지 않고 중생들의 과실을 보지도 않고 번뇌를 내지도 않아 곧 허망을 버리며 다만 중생들은 다 불성이 있고 공덕이 원만한 것으로 볼 뿐이어서 곧 진실을 취할 수 있으리니, 이로 말미암아 자비심을 내어 보살을 성취하는 것이다.
016_0540_b_10L三除著虛妄棄捨眞實虛妄所以是生死過失者如人來打拍罵詈毀辱等事一非本有二由心所作虛妄所起是自然卽是虛妄若不體眞實道理謂此是眞實則取著虛妄皆棄眞實故生三毒利等煩惱若識生死虛妄非是實有則不見能拍所罵不見衆生過失不生煩惱卽棄虛妄但見衆生皆有佛性功德圓同卽是能取眞由此卽生慈悲成菩薩者
‘나[我]’라는 소견을 제거하는 것이 그 넷째이니, 모든 법을 본래 제 성품이 진실한 것이어서 있거나 없거나 둘다 평등한지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안다면 곧 ‘나’라는 소견으로 모양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릴 것이다.
016_0540_b_20L四能除我見諸法本來自性眞實若有若無二皆平等若人能作此解卽捨我見執相之心也
016_0540_c_01L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그 다섯째이니,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바른 법을 믿어 받게 한다면, 그 바른 법의 모양 있고 모양 없음을 깨달아 불성을 체득할 수 있고, 모양 없는 바른 법을 믿어 받는다면 대승(大乘)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016_0540_b_23L五除怖畏能令衆生信受甚深正法正法有相與無相體解佛性則能信受無相正法則不謗大乘也
다음은 이 성품의 공한 것이 능히 다섯 가지 공덕을 발휘할 수 있음을 밝히겠다. 첫째 비열한 마음을 제거함으로써 바른 노력[正根]을 내고, 둘째 훌륭한 체하는 교만을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마음을 내고, 셋째허망을 제거함으로써 자비를 내고, 넷째 ‘나’라는 소견을 제거함으로써 지혜를 내고, 다섯째 두려움을 제거함으로써 바른 법을 받으므로 이 때문에 성품의 공함이 불성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한다.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므로 해서 다섯 가지 과실을 여의나니, 성품을 다스려 청정함을 얻게 하는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이익되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두째 성품의 공한 불성이 바로 그 공한 것이라 한다.
016_0540_c_03L次明此性空能引五種功德者一除下劣生正勤二除高慢生平等三除虛妄生慈悲四除見生般若除怖畏受正法故言性空顯佛性理有五種功德離五過失治護性令得淸淨卽是自利因故此第十二名爲性空佛性卽是空也
일곱째 제 모양의 공함이란, 서른두 가지 큰 모습과 여든 가지 작은 모습을 얻기 위해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형상 있는 것으로서 이른바 네 가지 원소[四大]와 다섯 가지 대경[五塵]이고, 둘째는 형상 없는 것으로서 이른바 일체 네 가지 쌓임[四陰]인 마음의 법이다. 그리고 화신(化身)은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니, 왜냐하면 생사는 허망하고 뒤바뀐 것이어서 괴로움과 쌓임의 두 진리에 지나지 않지만, 화신은 그렇지 않는지라, 법에 의지한 응신(應身)이어서 본체가 있으니 뒤바뀐 것이 아니고, 또 능히 중생들의 뒤바뀜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과 끝이 있기 때문이니, 생사가 아닌 만큼 생사의 허망한 모양이 없고, 열반이 아닌 만큼 열반의 진실한 모양도 없는지라, 이 때문에 모양의 공 한 것이라 한다. 만약에 보살이 능히 이 모양의 공함을 닦는다면, 서른두 가지 큰 모습과 여든 가지 낱낱 모습으로 하여금 곧 화신의 모양을 닦아서 청정함을 얻을 수 있으리니, 이 때문에 열셋째 모양의 공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40_c_09L七自相空爲得三十二大相八十小相又有二種一者色相謂四大五二無色相謂一切四陰心法也化身非生死非涅槃何以故生死是虛妄顚倒不過苦集兩諦化身不爾法應身而有體非顚倒復能除衆生顚倒故言非生死非涅槃者有始終以非生死則無生死虛妄之相非涅槃亦無涅槃眞實之相故名相若菩薩能修此相空則令三十二八十種好卽修治化身之相貌令得淸淨故第十三名爲相空
016_0541_a_01L여덟째 일체법의 공함이란, 이른 바 일체 여래의 법이 항하사(恒河沙)처럼 한량없어서 열 가지 힘과 두려움이 없는 그러한 등등의 법이 서로 떠나거나 서로 떠나지 않는 공한 것임을 밝힘이다. 만약 법신(法身)으로써 응신(應身)을 바란다면 떠나고 떠나지 않는 것이 있거니와, 응신만으로선 결정코 법신을 떠나지 아니하니, 왜냐하면 한결같이 법신을 근본으로 삼고, 응신을 끝으로 삼기 때문이다. 끝은 근본을 떠나지 않지만 근본은 끝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016_0540_c_21L八一切法空者謂一切如來法無量恒河沙如十力無畏等明相離不相離空若以法身望應身有離不離應身沒不離法身何以故一爲法身是本應身爲末末不離本本爲離末
【문】법신이 만약 응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답】만약에 그렇다면 한 사람이 부처가 됨에 따라 일체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는데, 일체 사람이 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신이 바로 응신은 아니라는 뜻이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러나 법신도 응신을 떠나지는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법신은 차별이 없어서 항상 세 세상[三世]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와 같이 떠남과 떠나지 않는 도리로 수행한다면 이것이 곧 응신의 과(果)를 얻는다. 다만 응신ㆍ화신의 두 몸이 다 능히 만물을 이익되게 하되 화신은 바로 종자를 심는 것이 되고, 응신은 그 종자를 성숙시키는 것이 되어서 이 일체 법의 공한 것으로 하여금 청정한 일체 불법이 되게 할 뿐이다.
016_0541_a_03L法身若不離應身者有何過咎
若爾則一人得佛一切人皆應得以一切人不同得故故知法身有不卽應身義法身亦不離應身何以故以法身無有差別常不離三世諸佛功德故若能如此亦離亦不離道理而修行者此則能得應身之果但應化兩身悉能利物化身正爲下種身爲成熟令此一切法空爲淸淨一切佛法
그리고 일체 불법이 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떠남도 없고 떠나지 않음도 없는 것이니, 치우치게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잡는 자체도, 잡을 대상도 없는 것이니, 그 경계와 지혜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열넷째 일체법의 공함을 변론함이다. 여기에 이르러 무릇 세 가지 공한 것이 있어서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 원인을 밝히어 설명했다.
016_0541_a_13L一切佛法復有兩義一則無離無不離以不可偏執二則無執及所執以境智無差別故也此卽第十四辨一切法空至此凡有三空明自利利他因竟
열다섯째 있다는 법의 공함과 열여섯째 없다는 법의 공한 이 두 가지 ‘공’함이 다 앞의 열네 가지 공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있다는 법의 공함이란 사람과 법의 두 가지가 다 없다는 것이니, 증익(增益)에 대한 비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며,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이 도리가 진실히 있다고 하는 중생들의 허망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리마저 업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없다는 법의 공함이다. 이는 손감(損減)에 대한 비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증익을 떠나고 손감을 떠난다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지라, 이 때문에 공의 바탕이라고 이르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공함이 도로 앞의 열네 가지의 공함에 다 섭수되는 것이다.
016_0541_a_17L第十五有法空第十六無法空此兩空通出前十四空體有法空者謂人法二無所有爲除增益言無法空者謂眞實有此無人無法之道理除衆生妄執謂無此道理故名無法空爲除損減謗離增離減則非有無故名爲空體也故此兩空還屬前十四空所攝也
016_0541_b_01L다음 열일곱째의 이른바 있다는 법과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이 하나의 공함이 모든 ‘공’이란, ‘공’의 모양을 다 벗어난 것이다. 이른바 있다는 법과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이 ‘공’의 바탕과 모양을 밝힘이다. 결정코 없다는 법은 곧 결정코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한편 사람도, 법도 없는 그 도리가 있기 때문에 결정코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리 있는 그것마저 없기 때문에 이야말로 ‘공’의 바탕이고 ‘공’의 모양이라, 바탕은 이치의 증익과 손감이 없음을 밝힘이고, 모양은 그 바탕의 결정을 밝힘이다. 결정코 이것은 있고 결정코 이것은 없다거나, 이것은 진실히 있고 이것은 진실히 없다거나, 진실히 사람도 없고 법도 없지만, 진실히 이 도리가 있다고 하는 이러한 논리로 열여섯 가지 공한 것을 밝힌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공한 것이 앞의 여섯 가지 공한 바탕에 섭수되고, 또 열네 가지 공한 것이 되기도 한다. 뒤의 네 가지 공한 것은 앞의 모든 바탕과 모양을 도로 변론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뒤의 공한 것은 모두가 앞의 열네 가지에 섭수되고, 이 때문에 열네 가지와 열여섯 가지와 열여덟 가지의 그 광대하고 간략함의 같지 않는 것이 있다.
016_0541_b_01L第十七有法無法空此一空出諸空所言有法無法空者明此空體相決定無法卽名決定無有此無人法之道理故名決定有此無此有是空體相體明理無增減相明其體決定決定是無決定是有卽是眞實無實有眞實無人無法眞實有此道理此論所以但明十六空者正以此兩空屬前六空體所攝也亦爲十四空卽後四空還辨前諸體相故此後空倂屬前十四攝故有十四十六八廣略不同
016_0541_c_01L다음 열여덟째 ‘공’을 벗어난 과(果)란, 이른바 얻을 수 없는 ‘공’이 곧 그것이니, 이 과의 얻기 어려움을 밝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의 이치는 아주 없는 ‘단(斷)’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상(常)’도 아니면서 곧 큰 ‘상’이다. ‘상’의 이치를 이미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단’의 이치도 얻을 수 없고 결정된 모양을 얻을 것이 업기 때문에 얻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왜냐하면, 이 ‘공’의 이치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면서 이것이 큰 ‘낙’이다. ‘나[我]’와 ‘나’없음이 아니면서 이것이 큰 ‘나’이고 ‘정(靜)’도 아니고 ‘정’아닌 것도 아니면서 이것이 큰 ‘정’이기 때문이다. 이 ‘공’이 여덟 가지 ‘공’의 일과 공용에 섭수되어서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것이 바로 ‘공’의 바탕인 줄을 보기 때문에 일과 공용에 따라 같지 않고 떠나거나 합함에 따라 다름을 이룩하나니, 앞서 변론한 바와 같이 맨 처음의 여덟 가지 ‘공’은 ‘공’의 바탕을 밝히었고, 다음의 열 가지 ‘공’은 ‘공’의 작용을 밝히었는데, 이 작용 가운데 뒤의 두 ‘공’은 열네 가지 ‘공’에 섭수된다. 열일곱째인 하나의 ‘공’은 여섯 가지 ‘공’의 바탕에 섭수되고, 열여덟째인 하나의 ‘공’은 여덟 가지 ‘공’의 작용에 섭수되는지라. 이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열여섯 가지로 되기도 하고, 열여섯 가지가 도로 열네 가지로 되기도 하여, 혹은 먼저가 광대하고 뒤가 간략하거나, 혹은 먼저가 간략하고 뒤가 광대하여서 그 이치와 일이 같지 않고 바탕과 모양이 차별이 나게 되었으니, 떠나고 합함에 따라 그 이치가 이러한 것이다.
016_0541_b_13L第十八出空果所言不可得空者此果難得何以故如此空理非斷非而卽是大常常義旣不可得故斷義亦不可得無有定相可得故名難何以故此之空理非苦非樂而是大樂非我無我而是大我非淨非不淨而是大淨此空屬八空事用所攝以見無人法正是空體故名隨事用不同離張成異如上所辯初六空明空體卽十空明空用用中後兩空爲十四空所攝第十七一空爲六空體所攝第十八一空爲八空用所攝十八成十六十六還十四或先廣後或先略後廣理事不同體相差別若離若合其義如此也
여기서부터 넷째 ‘공’의 도리를 분별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다. 만약에 ‘공’이 결정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일체 중생은 해탈할 수 없으리니, 왜냐하면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청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드시 청정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를 닦아도 소용이 없으리니, 왜냐하면 아직 해탈하여 번뇌 없는 도를 얻기 이전에 ‘공’의 바탕이 이미 자연히 청정하기 때문에 번뇌가 지혜를 장애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번뇌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공력(功力)을 의지하지 않고서 일체 중생들이 저절로 해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보는 바 그대로 공력을 떠나서는 중생들이 해탈할 수 없으니 만큼 이 ‘공’은 결코 청정한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다시 공용으로 말미암아 해탈하게 되니 만큼 이 ‘공’이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 줄을 알지라. 이것을 이르되 청정하면서 청정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으면서 청정한 도리라고 한다.
016_0541_c_05L此下第四分別空道理有三一淨不淨若言空定是不淨則一切衆生不得解脫何以以定不淨不可令淨故也若言定是淨則修道無用何以故未得解脫無漏道時空體本已自然淸淨故無煩惱爲能障智慧又能除則不依功力一切衆生自得解脫現見離功力衆生不得解脫知此空非是定淨復由功用而得解脫故知此空非定不淨是名淨不淨不淨淨道理也
또 해석하건대 만약에 ‘공’의 이치가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일체 공력은 다 과보가 없으니, 왜냐하면 ‘공’의 경계 제 성품이 청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비록 도를 낸다 하더라도 그 속됨을 제거할 수 없고 도가 곧 소용이 없게 되므로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 ‘공’은 청정하지 않은 성품이 아니 줄을 알 것이다.
016_0541_c_15L若言空理定是不淨一切功力則無果報何以故以空界自性是不淨雖復生道俗不可除道則無用無此義故故知此空非性不淨
【문】만약에 그렇다면 이미 제 성품의 청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역시 제 성품의 청정한 것도 없어야 하겠다. 늘 어떻게 법계(法界)를 청정한 것이 아니라거나 청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분별하여 판정할 수 있습니까?
【답】아마라식(阿摩羅識)이 바로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로되 다만 객(客)ㆍ진(塵) 번뇌에 더럽힘이 되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말할 뿐이니, 객ㆍ진을 다 끊기 위해 청정하다고 세우는 것이다.
016_0541_c_19L若爾旣無自性不淨亦應無有自性淨云何分判法界非淨非不淨
阿摩羅識是自性淸淨心但爲客塵所污故名不淨爲客塵盡故立爲淨
016_0542_a_01L【문】무엇 때문에 반드시 청정하다거나 결코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서, 혹은 청정하고 혹은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법계가 다섯 가지 느낌[五入]과 선정(禪定) 등의 그 뜻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청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눈[眼] 등 모든 감관을 비록 번뇌에 덮였으나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으며, 또 이는 청정한 것이 아니고, 또 제 성품의 청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법계라면 비록 번뇌에 덮이더라도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이야말로 제 성품을 청정한 것이다. 이 제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알라. 법계가 다섯 가지 느낌과는 바탕이 다른 것이다.
016_0542_a_01L何故不說定淨定不淨而言或淨或不淨耶
爲顯法界與五入及禪定等義異所以不說淨者爲明眼等諸根雖爲煩惱所覆而不爲煩惱所染又非是又非自性淨故不說爲淨若是法雖爲煩惱所覆而不爲煩惱所染故非不淨而是自性淨以是自性淨不說爲不淨故知法界與五入體異也
【문】어째서 결정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선정을 더불어 다른 것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법계를 결정코 번뇌가 있다고 말한다면 곧 제 성품이 청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법계가 비록 번뇌에 덮임이 될지라도 제 성품은 청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결코 청정하지 않다거나 결코 청정하지 앟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법계의 도리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016_0542_a_11L何故不說定是不淨
爲明與禪定有異何以故若言法界定有煩惱卽自性不淨而此法界雖爲煩惱所覆而非自性不淨故不得說定是不淨非不淨正是法界之道理定
016_0542_b_01L【문】무엇 때문에 그대로 진리[如如]의 결코 청정함을 말하지 않고서 그냥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중생들로 하여금 도를 닦게 하기 위해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설한 것이니, 곧 그대로의 진리가 다섯 가지 감관과 다름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로의 진리와 다섯 가지 감관이 같이 번뇌에 덮이더라도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음은 다 청정한 것이로되, 그러나 그 청정한 이치가 다른 것이 있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 감관의 자체가 번뇌를 여의는 것은 번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다섯 가지 감관이 다만 청정하기만 하고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대로의 진리는 번뇌를 여의지 않고서 바로 번뇌의 제 성품이니, 이 때문에 청정하면서도 다시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줄을 알라. 또 그대로의 진리와 선정도 같이 번뇌에 덮이어선 다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긴 하되, 그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같지 않은지라, 만약 선정의 경우라면 번뇌에 덮이면서 다시 더럽히게 되어 한결같이 제 성품을 잃어버리고 온 전체가 번뇌를 이룩함과 동시에 또 선하지 않는 것을 이룩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로의 진리라면 비록 번뇌를 다시 여의지 않아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제 성품을 잃지 않고, 도한 번뇌와 선하지 않는 것을 이룩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곧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청정한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2_a_16L何故不說如如定淨而言淨不淨爲令衆生修道故說爲淨不淨卽顯如如與五根有異何以故如如及五根同爲煩惱所覆而竝不爲煩惱所染同皆是淨而淨義有異何以五根體離煩惱非煩惱性故五根唯淨非是不淨若如如不離煩惱是煩惱自性故知淨而復有不淨之又如如及禪定同爲煩惱所覆有不淨義而不淨義不同若是禪定爲煩惱所覆而復被染一向失於自擧體成煩惱亦成不善若是如如雖復不離煩惱名爲不淨而猶不失自性亦不轉成煩惱及以不善故卽不淨而復有淨義
이것을 세 글귀로 나눠 말할 수 있으니, 첫째 다섯 가지 감관이 번뇌를 여의는 것은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으므로 다만 청정할 뿐이어서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둘째 선정이 번뇌를 이룩함은 그 번뇌에 더럽히게 됨으로 다만 청정하지 않을 뿐이고 다시 청정한 것이 있지 않다. 셋째 그대로의 진리는 다섯 가지 감관과 다르기 때문에 번뇌에 더럽히지 않는 그것이 곧 청정하고 번뇌를 여의지 않는 그것이 곧 청정하지 않음이라, 이 때문에 청정하면서도 다시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 그대로의 진리는 선정과도 다르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제 성품을 잃지 않으며 번뇌와 선하지 않음을 이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때문에 곧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청정한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2_b_07L可爲三句一五根離煩惱不爲煩惱所染則但是淨非是不淨二禪定成煩惱爲煩惱所但是不淨無復有淨三如如以異五根故不爲煩惱所染是淨而不離煩惱卽是不淨故言淨而復有不淨義也又如如以異禪定故不離煩惱故言不淨而猶不失自性亦不轉成煩惱及以不善故言卽不淨而復有淨義
다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힘이 그 둘이다. 사람도 없고 법도 없으니 만큼 이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히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그 도리가 있으니 만큼 이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진실히 있기도 하고 진실히 없기도 하다고 말함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밟힘이다.
016_0542_b_16L二明非有非無道理無人無法故言非有實有無人無法之道理故言非無亦言眞實有眞實無卽非有非無也
다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도리를 밝힘이 그 셋이다. 모든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란, 청정한 것은 곧 아주 없는 ‘단(斷)’을 여의고 언제나 있는 ‘상(常)’을 여읨이니, ‘상’의 이치가 ‘나[我]’와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말한다. ‘나’의 몸이 ‘상’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말함이니, 이것이 그대로의 진리에 그 세 가지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016_0542_b_19L三明不一不異道理諸淨不淨淨則離斷離常常義異我故言不一我體常故言不異此明如如具三德
016_0542_c_01L이 열여섯 가지 ‘공’을 네 가지 과(科)로 만들어 간추리겠으니, 맨 처음에 있는 여섯 가지 ‘공’은 그 ‘공’의 제 모양을 변론한 것이고, 그 다음에 있는 여덟 가지 ‘공’은 ‘공’의 일과 작용을 변론한 것이다. 셋째 있는 두 가지 ‘공’은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변론한 것이고, 넷째는 이 열여섯 가지 ‘공’의 이치가 네 가지 과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을 밝힘이다. 네 가지 과실을 제거함이란, 희론(戱論)을 제거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게으름을 제거하는 것이 그 셋째이고,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 그 넷째이다.
016_0542_b_22L就此十六空作四科料簡初有六辯空之自相次有八空辯空事用三有兩空辯淨不淨四明此十六空能除四種過失一除戲論二除怖三除懈怠四除疑惑
첫째의 희론을 제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세간의 중생들이 안팎의 법 가운데 한량없는 희론을 일으키니, 이른바 ‘나’가 있다거나 ‘나’가 없다는 등 다 사람과 도(道)의 결과에 의지하는 이러한 것들이 곧 희론이라, 만약에 도와 또는 도의 결과까지도 죄다 공한 것으로 본다면 능히 이러한 희론을 제거하리니, 만일 안이 공하고, 바깥이 공하고, 안팎이 다 공하고 원소[大]가 공한 이 같은 네 가지 공한 것이 세간의 사람과 법인 두 가지 ‘나’의 희론을 제거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공’도 역시 공하고 제일의 이치 진실도 공한 이 같은 두 가지 공한 것이 세간을 뛰어난 인과(因果)의 경계와 지혜 등 모든 희론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016_0542_c_03L一除戲論者有兩一世閒衆生於內外法中起無量戲論謂有我無我等皆依人道果是名戲論若見道及道果皆悉空則能除此等戲論若是內空外空外空大空此之四空能除世閒人法二我之戲論若是空空及第一義眞實空此之兩空能除出世閒因果境智等戲論也
둘째의 두려움을 제거함이란, 중생으로서 사람이 다 공함이라고 들으면, 곧 두려움을 내어 도 닦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께서 그들을 위해 이 공의 일과 공용이 있음을 설하시나니, 왜냐하면 능히 이 여덟 가지 공의 일과 공용을 닦는 사람은 곧 그 도와 도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세 가지 몸의 일체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016_0542_c_11L二除怖畏者衆生聞人皆空則生怖畏不肯修道故如來爲說此空有事用何以故若人能修八空事用則能得道及以道果乃至三身等一切功德也
셋째의 게으름을 제거함이란, 만약에 결코 청정한 것으로 관한다면 도를 닥을 필요가 없고, 결코 청정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주 소멸할 수 없음으로써 도를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생사에 처하여 끝내 해탈할 수 없으리니, 이 때문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변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혹이 있을 적엔 청정하지 않고, 의혹을 제거한 뒤엔 곧 청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도 닦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016_0542_c_15L三除懈怠者若觀定淨不勞修道若言定是不淨則永不可除滅亦不假修道唯處生死永無解脫也是故須辨是有淨不淨以故有惑之時則不淨除惑已後卽淸淨故應須修道
016_0543_a_01L넷째의 의혹을 제거함이란, 만약에 의혹된 자의 마음으로 이미 그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이라고 함을 듣는다면, 곧 망설이게 되어서 결단할 수 없으리니, 이를테면, 둥치를 보고 사람이라고 하거나 사람을 불러 둥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러한 자를 위해 분별하사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가 결코 없는 것임을 밝히시는가 하면,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도리가 결정코 있기 때문에 공한 것임과 또는 있고 없는 두 가지 이치가 있는 것임을 밝히심이니, 이러한 도리가 능히 의혹된 마음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016_0542_c_20L四除疑惑者惑者之心旣聞如如是有是無則生猶豫不能決斷謂如見杌謂人呼人爲杌佛爲分判明人法二我決定是無無人無法之道理決定是有故空有無兩義存焉如此道理能除疑之心也
셋째로 유식(唯識)의 진실함을 밝히겠으니, 일체 법은 청정한 식(識)이 있을 뿐이어서 의심하는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 넓은 해석은 『유식론(唯識論)』에 있는 그대로이고, 다만 유식의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방편의 유식이다. 이를테면 먼저 아리야식(阿梨耶識)만이 있고, 다른 경계가 없음을 관하여서 현전에 경계와 지혜의 두 가지 ‘공’함을 얻어 허망한 식을 제거해 이미 다하는 것이다. 이것을 방편의 유식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바르게 관하는 유식이니, 이를테면, 생사에 허덕이는 허망한 식의 마음과 그 밖의 경계를 일체 다 깨끗이 하고 다만 아마라식(阿摩羅識)의 청정한 마음만이 있는 것이다.
016_0543_a_02L第三明唯識眞實辨一切諸法唯有淨識無有能疑亦無所疑廣釋如『唯識論』但唯識義有兩一者方便謂先觀唯有阿梨耶識無餘境界現得境智兩空除妄識已盡名爲方便唯識二明正觀唯識遣蕩生死虛妄識心及以境界一皆淨盡唯有阿摩羅淸淨心也
그리고 넷째로 의지하는 곳의 진실함은 이른바 괴로움의 의지하는 진리가 그것이다. 다섯째로 삿된 행의 진실함은 이른바 쌓임의 진리가 그것이고, 여섯째로 청정의 진실함은 곧 사라짐의 진리가 그것이다. 일곱째로 바른 행의 진실함은 곧 도의 진리가 그것이다. 네 가지 진리에 각각 세 가지가 있으니, 이는 이미 별도로 해석한 그대로이다.
016_0543_a_10L第四明依處眞實所謂苦依諦第五邪行眞實謂集諦第六淸淨眞實是滅諦第七正行眞實卽是道諦諦各有三種已如別解也
016_0543_b_01L『해절경(解節經)』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곱 가지 진여(眞如)를 밝혔으니, 첫째 나는 진여이고, 둘째 모양의 진여이고, 셋째 의식의 진여이고, 넷째 의지하는 진여이고, 다섯째 삿된 행의 진여이고, 여섯째 청정한 진여이고, 일곱째 바른 행의 진여이다. 첫째의 나는 진여란, 이를테면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죄다 진여가 없는 것이고, 둘째의 모양의 진여란, 이를테면 사람과 법인 이 두 가지가 다 ‘나’가 없는 것이고, 셋째의 의식의 진여란, 이를테면 일체 함이 있음은, 다만 의식이 있을 뿐인 것이고, 넷째의 의지하는 진여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다섯째의 삿된 행의 진여란, 이른바 쌓임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고, 여섯째의 청정한 진여란, 이른바 사라짐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일곱째의 바른 행의 진여란, 이른바 도의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이 일곱 가지 진여가 곧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제1의 이치인 자리가 곧 진실한 성품에 섭수된 것이라 이것을 일곱 가지진여라 하고, 이것이 바로 앞서 밝힌 일곱 가지 진실이니, 구족한 것은 『삼무성론(三無性論)』 가운데 널리 해석한 그대로이다.
016_0543_a_14L『解節經』明佛說有七種眞如一生二相三識依止五邪行六淸淨七正行第一生眞如者謂有爲諸法竝皆無如二相眞如者謂人法二無我三識眞如者謂一切有爲唯有識四依止眞如者謂如所說苦諦五邪行眞如者謂如所說集諦六淸淨眞如者謂如所說滅諦七正行眞如者謂如所說道諦此之七種眞如卽第一義諦第一義諦卽眞實性攝是故名爲七種眞如卽是前明七種眞實具如『三無性論』中廣釋也
【문】어떻게 이 일곱 가지가 다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곧 진실한 성품에 섭수된 것인 줄을 아십니까?
【답】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이 일곱 가지가 다 가장 수승하고 가장 지극한 것인 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것이 곧 두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장 수승함이란, 바로 그대로의 진리가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이 제1의 이치인 진리가 곧 이치대로의 지혜[如理智]에 비춰지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가장 지극함이란, 바로 이 일체 지혜의 경계가 곧 세속의 진리이고 이 세속의 진리가 수량대로의 지혜[如量智]에 비춰지므로 이치대로의 지혜는 곧 분별이 없는 지혜이고 수량대로의 지혜는 곧 분별이 없는 뒤의 지혜이다. 또 그대로의 진리는 곧 일체 갖가지의 지혜이고, 수량대로의 지혜는 곧 일체의 지혜이므로 오직 이 하나의 지혜가 진리를 통함으로써 곧 세속을 통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것이 바로 ‘공’의 이치이고 진실한 이치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이치대로의 지혜, 또는 일체 갖가지의 지혜라 하는 것이다. 만약 세속의 이치라면 이 이치를 이름하여 수량대로의 지혜, 또는 일체 그대로 지혜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른바 가장 수승하고 가장 지극한 이 두 지혜의 경계는 곧 이치대로의 지혜와 수량대로의 지혜만으로 알 바다.
016_0543_b_03L云何知此之七種皆是第一義諦卽眞實性攝耶
由兩義故知此七種皆是最勝最謂卽是二智境界所言最勝者是如如第一義諦此第一義諦卽爲如理智所照故名最勝最極者卽是一切智境界卽是俗諦此俗諦爲如量智所照如理智者卽無分別智量智卽是無分別後智又如如理是一切種智如量智卽是一切智唯是一智通眞卽有通俗卽空卽眞義取名如理智亦名一切種智若俗義有義取名如量智亦名如一切智言最勝最極而是二智境界卽如理如量兩智所知也
016_0543_c_01L다시 별도의 뜻이 있으니,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바로 진실한 성품에 섭수한 것인 줄을 알지라. 왜냐하면 일체 진실한 법이 다 같고 다른 등 허망한 생각을 여의는 것을 밝히었으니, 이를테면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어서 네 가지 비방[四謗]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모든 모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모양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니, 모든 모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모양과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다르고 다르지 않거나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이 아님을 다 말할 수 없는지라,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모든 모양 가운데에서 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업으며, 또 있거나 없거나, 있는 것이 아니거나 없는 것이 아님을 다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비방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016_0543_b_18L復有別義知此七種眞如是眞實性攝何以故明一切眞實法皆離一異等妄想謂非一非離四謗故明此七種眞如不可得說異於諸相亦不可說不異於諸相故言異於諸相不可得說不異於諸相亦不可說亦異不異非異非不異皆不可說明此七種眞如於諸相中不可說其有亦不可說其是無亦有亦無非有非無皆不可說離四謗故
다시 별도로 있는 것인 줄을 믿어야 할 것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청정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이 법을 인연하여 마음이 청정하다면, 이 때문에 이 일곱 가지 진여가 다 항상 머물러 언제나 그 성품이 다르지 않으므로 이것이 청정한 경계인 줄 알라. 이 때문에 진실히 선한 성품은 이 진리로 말미암아 항상 선한 것인 줄을 알지며, 이 때문에 이것이 바로 즐거움의 진리인 줄을 알지니, 왜냐하면 항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선하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진여가 곧 일체 법의 체성(體性)이고 이것이 체성이기 때문에 ‘나[我]’라고 말하나니, 곧 이것이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덕이다.
016_0543_c_04L復有別得信有何以故卽是淸淨境界故故知是有若有人能心緣此法心卽淸淨是故應知此七種眞如皆是常於一切時性不異故以是淸淨境是故應知是眞實善性由此理常是善是故應知是樂諦何以故常故所以而樂善故所以是淨如此七種眞如卽是一切法之體性以是體性故說爲我卽是常樂淨我四德也
또 해석하건대, 왜 이 일곱 가지를 진여라 하는가 하면, 제1의 이치인 진리의 진실한 성품이란, 그 모두가 한 맛이기 때문이다.
016_0543_c_13L又釋所以名此七種爲眞如第一義眞實性者爲其同是一味故也
016_0544_a_01L첫째의 나는 진여란, 이를테면 인과(因果)의 체(體)는 같으면서 명자(名字)가 다름이 있을 뿐이다. 어째서 같다고 하는가 하면, 다 같이 남을 의지하기 때문에 인(因)이 있고 이미 남을 의지하기 때문에 과(果)도 역시 남을 의지하나니, 이 인과의 체가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다. 다섯 가지 쌓임이 선도, 악도 없는 것을 이르되 과(果)라 하고, 다섯 가지 쌓임이 선과 악의 구별이 있는 것을 이르되 인(因)이라 하며, 그 나는 것을 이르되, 인이라 하고, 그 날 것을 이르되 과라 하며, 역시 앞의 것에 대해 과라 하기도 하고, 뒤의 것에 대해 인이라 하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똑같은 다섯 가지 쌓임이면서 인의 이름이 있고 과의 이름이 있을 뿐, 그 체는 실상 다름이 있지 않는 것인 줄 알라. 동일한 체이면서 명자가 다름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인이나 이 과가 이미 다 남을 의지한다면 이는 제 성품이 없는 것이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 체가 진실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한 맛이라 함이니, 곧 동일하게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한 맛이란, 이 나는 진여가 이미 남의 성품을 의지한다면 이는 진실히 나는 것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나는 진여 그것이 바로 나는 성품이 없어 ‘공’한 것이고,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곧 동일한 맛이다. 셋째 이것이 남의 성품을 의지한다면, 반드시 분별하는 성품이 있으리니, 분별하는 성품이 이미 모양 없는 성품이고, 모양 없는 성품이 곧 모양 없는 진여이고, 모양 그대로의 진여가 곧 한 맛이다. 이 때문에 이 세 가지 뜻으로써 나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3_c_15L一生眞如者謂因果體一而名字有何故言一同是依他故有因旣依果亦依他此之因果體卽五陰陰無記說名爲果五陰善惡有記之義說名爲因取其能生爲因所生爲果亦是對前爲果對後爲因故知只是一念五陰而有因有果之名實未嘗有異故言一體爲名字有異此因此果旣竝依他則無有自性無自性故體不眞實故名一味卽是同無眞實故名生眞如二言一味者此生眞如旣是依他性則無眞實生故名生眞如卽是無生性空以無生故卽是一味三此依他性則必有分別性分別性旣是無相性無相性卽是無相眞如卽相眞如卽是一味故以此三義名生眞如也
둘째의 모양의 진여란, 법의 공통된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없는 것이 곧 두 가지 공한 이치이므로 이를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라고 함이니,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 곧 이른바 모양의 진여인 것이다.
016_0544_a_09L二相眞如以顯法通相故是人法二無我二空之理名一切法通相卽名相眞如也
셋째의 의식의 진여란, 만약 의식만이 있고 경계가 없다면 그 경계가 이룩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도 역시 이룩되지 아니하나니, 이는 인연하는 것과 인연할 것이 다 같이 얻을 수 없는 그 성품인지라, 이 때문에 의식이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4_a_12L三識眞如者但唯有識無有境境界不成故識亦不成此則能緣所緣同是不可得性故名識眞如也
넷째의 의지하는 진여란, 이른바 괴로움이 그것이니, 다섯 가지 쌓임이 그 체(體)가 되는지라, 이 다섯 가지 쌓임이 곧 중생들의 의지하는 곳이어서 여기에 의탁하여 ‘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중생이라든가, 수자(譯者)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지라 한다. 괴로움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 있으니 이를테면 괴로움과 덧 없음과 ‘공’학과 ‘나’없음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이치가 모두 뒤바뀜이 없으므로 다 진실이라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의지하는 진여이며, 둘째는 이 아래 네 가지 모양이 모두가 ‘공’하여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다 진실이라 하나니 역시 의지하는 진여인 것이다.
016_0544_a_14L四依止眞如者所謂苦五陰爲體五陰者爲衆生依處託此爲我人衆生壽者等故名依止苦諦有四相無常無我此之四義同是無倒皆名眞實卽是依止眞如二者此下四相皆是空無所有故皆名眞實亦依止眞如也
016_0544_b_01L다섯째 삿된 행의 진여란 이른바 쌓임의 진리[集諦]가 그것이니 쌓임이 두 가지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진여라고 일컫는 것이다. 첫째 뒤바뀜이 없는 진여이니 이를테면 능히 내는 이치로서 이 이치의 진실한 것이 곧 쌓임의 진여이고, 둘째 내는 것이나 낼 것이 다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를 삿된 행의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44_a_21L五邪行眞如者所謂集諦集有兩義故稱眞如一無倒眞謂能生之義此義眞實卽是集眞二能生所生皆無所有以無所有故名邪行眞如
여섯째 청정한 진여란, 이른바 사라짐의 진리[滅諦]가 또한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 뒤바뀜이 없는 진여이니 네 가지 덕이 다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진여라 한다. 둘째 사라짐의 진리는 생사와 더불어 차별이 없이 모두가 그대로 진리이니, 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청정한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4_b_02L六淸淨眞如者謂滅諦亦有兩義一無倒眞如謂四德皆是無倒故稱眞如二滅諦與生死無有差別同一如如皆無所有名淸淨眞如
일곱째 바른 행의 진여란, 이른바 도의 진리[道諦]가 그것이다. 도는 곧 지혜이니, 지혜는 무명(無明)을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어긋나고 도는 곧 뒤바뀜이 없어 진여가 그 도와 같다. 또 번뇌의 체가 같기 때문에 두 가지가 공하여 다 아무것도 없는지라, 이 때문에 한 맛의 그대로이기 때문에 바른 행의 진여라 함이니, 진여라거나, 그대로의 진여라거나, 또는 진실이라거나 다 바른 행의 진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016_0544_b_06L七正行眞如者所謂道道卽般若般若與無明體性相乖道卽無倒眞如如道及煩惱體同故於二空皆是無所有故是一味如如名正行眞如也亦名眞如亦名如如亦名眞實皆盡得也
그리고 열 가지 수승한 지혜의 진실이란, 열 가지 수승한 지혜가 있음으로써 열 가지 ‘아견(我見)’을 제거할 수 있나니, 첫째 하나라는 고집이고, 둘째 인(因)이라는 고집이고, 셋째 느낌이라는 고집이고, 넷째 지음이라는 고집이고, 다섯째 자재(自在)라는 고집이고, 여섯째 증상(增上)이라는 고집이고, 일곱째 항상하다는 고집이고, 여덟째 청정하다거나 청정하지 않다는 고집이고, 아홉째 수행이라는 고집이고, 열째 계박(繫縛)이라거나 해탈이라는 고집이다.
016_0544_b_11L十勝智眞實者有十種勝智爲除十種我見一者因者執受者執作者執自在者執增上者執常者執不淨淨者執修行者執繫縛解脫者執
첫째의 하나라는 고집이란, 이를테면 모든 법을 한데 모아서 통틀어 하나의 이름을 성립시킴이니, 이는 곧 아주 없다는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칠입론(七立論)의 게송에 설한 바 그대로 마치 언덕이 무너지면 다시 본래대로 환원할 수 없고 또한 무덤 속의 시체는 두 번 오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감관과 경계만을 중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인의 말씀대로라면, 공중의 새 발자취를 볼 수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곧 그것일 것이다. 이것은 세입(世入)의 외도들이 하나라는 고집을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몸이 곧 ‘나’인 만큼 몸이 사라지면 ‘나’도 없어진다는 그것이 바로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라 이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다섯 가지 쌓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016_0544_b_16L一一者執謂合集諸法共立一名則墮斷見何以故如『七入論』偈所說譬如岸崩不更還本乃至塚閒體不再來唯根境界是名衆生若聖教說有如空鳥迹會可見此謂世入外道顯一者執其謂卽身是人身滅我亡相墮斷見爲破此執故立五陰
016_0544_c_01L수승한 지혜가 비록 세 가지 뜻이 있지만 많이 합쳐 모음과, 또한 그것과 다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나니, 세 세상[三世]의 물질과 마음을 모두 쌓임이라 하기 때문에 많이 합쳐 모으는 것이라 한다. 세 세상 물질과 마음의 합쳐 모으는 것이라 하고 물질 덩어리가 느낌과 드리고, 느낌 덩어리가 또 생각 따위와 다르기 때문에 그 다름을 분별함이라 하나니, 이것을 다섯 가지 쌓임이라 한다. 만약 다섯 가지 쌓임에 이 세 가지 뜻이 있는 줄을 분명히 안다면 곧 하나라는 고집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세 세상이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머물지 않는 것인데, 일체 안팎의 모든 물질을 다 같이 쌓임이라고 하는지라, 이 세 가지 뜻으로써 세 가지를 대치(對治)하나니, 이를테면 첫째 무명이고, 둘째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고, 셋째 서로 뒤섞인 무명이 그것이다.
016_0544_b_22L勝智雖有三義謂多合集別異三世色心竝名爲陰故名爲多合集三世色心同名爲陰故謂合集色聚異受受聚異於想等故名別異是名五陰若解了五陰有此三義則無一者之言三世者過去已謝未來未有在不住而以一切內外諸色同名陰以三義對治三種無明謂一假說及以相雜
첫째의 무명이란, 세입의 외도들이 이른바 ‘몸은 이 하나의 물체이고 하나의 물체는 곧 ‘나’라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다만 세 세상의 다섯 가지 쌓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는 곧 쌓임을 ‘나’인 줄 계교하여 쌓임이 사라지면 ‘나’도 없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세 세상의 다섯 가지 쌓임은 하나가 아니고 많은 것임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 하나라는 고집을 깨뜨린 것이다.
016_0544_c_08L一無明者如世入外道等謂身是一物一物是我人不知但有三世五陰故墮斷見此是卽陰計我陰滅我亡故佛爲說三世五陰是多非一卽破其一者之執也
둘째의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란, 저 우루카(優累佉) 따위 외도들이 이른바 ‘몸은 다른 부분’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는 곧 사람과 법을 다른 것으로 보아 쌓임을 떠나서 ‘나’를 고집하기 때문에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법이 이미 다를진댄 쌓임이 사라져도 ‘나’는 존재한다고 말함은 그 모든 쌓임을 합쳐 모아서 가정으로 사람이 된다고 말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뿐이요 체(體)가 없거늘 이 가정으로 설한 것에 미혹하기 때문에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합쳐 모은 것을 법이라고 가정으로 말하지만 그 법의 체가 곧 ‘공’한 것임을 설하셨으니, 바로 그들의 고집을 깨뜨림이다. 이 때문에 능히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을 제거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4_c_12L二假說無明者如優婁佉等外道謂身異分執有人異法此是離陰執我故墮常何以故人法旣異則謂陰滅我存由其不解合集諸陰假說爲人但名無體迷此假說故名假說無明故佛爲說合集假說爲法體卽是空卽破其此執故言能除假說無明也
016_0545_a_01L셋째의 서로 뒤섞인 무명이란, 일체 유부(有部)에서 고집하는 이른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聖道] 가운데 바른 생각과 바른 소견이 다 같이 지혜에 섭수되는 것’이란 말과 같다. 그 두 가지의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집착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경부(經部)와 대승 스님들이 설하시기를, “바른 생각이란 앞의 이치를 구하려 하다가 결단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뜻을 짓나니, 뜻을 짓는 것은 바로 뜻의 업이기 때문에 이는 지혜에 섭수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바른 소견을 지혜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통틀어 논하자면 일체 알아보아서 통달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 지혜에 속하나니, 다섯 가지 쌓임도 그러한지라. 만약에 느낌이 생각과 다르고 생각이 지어감과 다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서 다만 느낌과 생각을 동일한 물건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 체성(體性)을 잃었기 때문에 서로 뒤섞인 무명이라 함이니, 서로 뒤섞인 무명이기 때문에 바른 소견을 잃는 것이고 바른 소견을 잃는다면 해탈할 수 없는지라,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다섯 가지 쌓임의 체성이 같지 않음을 설하여 느낌과 생각 등의 다른 점을 분별하시어 공통되고 차별되는 두 모양을 성립하셨으니, 차별된 모양이란, 증명하는 소견을 내는 것이다. 공통된 모양이란 비교하는 소견을 내는 것이다.
016_0544_c_19L三相雜無明者如一切有部所執謂八聖道中正思正見同是般若所攝以其不能分別兩異故生此執故經部大乘師說正思故者欲求前理未決斷猶屬作意作意卽是意業故非是般若所收唯有正見是名般若通而論一切知見能通達選擇皆屬般若陰亦爾若不能分別受異想想異行謂想受只一物則失其體性故名相雜無明相雜無明故失正見失正見則不能得解脫故佛爲說五陰體不同分別受想等異爲立通別二相別相生證見通相生比見也
【문】다섯 가지 쌓임이 어떻게 근본의 진실에 섭수될 수 있습니까?
【답】물질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 분별의 물질로서 역시 길고 짧음과 크고 작음과 모나고 둥근 그러한 이치가 있는 것은 다 분별의 거짓에 속함이니, 그 별다른 체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물질로서 각각 종류가 있음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내는 것과 같음이니, 불이 나는 것을 원인으로 삼음은 불을 내는 분야의 종류이다. 종류가 이미 그 비슷할진댄 이는 곧 진실한 법의 서로 나는 것이 남을 의지하는 거짓에 속함이니, 그 종류가 원인을 의지해 이룩되기 때문에 제 성품의 힘이 아닌 것이다. 셋째 그대로[如如]의 물질이다. 만약에 분별이 거짓의 이름이라면 한결같이 체가 없으리니, 이로 법이 ‘공’한 것이다. 만약에 남을 의지한 거짓이라면 비록 또 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체는 진실이 아니고 남을 의지해 있으리니, 이 역시 법이 ‘공’한 것이다. 이 두 ‘공’의 체가 이미 진실이기 때문에 그대로의 물질이라 하고, 또 이러한 것이 물질의 제 성품이기 때문에 이 물질을 그대로라고 지목함이다.
016_0545_a_09L五陰云何爲根本眞實所攝
色有三種一分別色亦有長短大小方圓等義皆屬分別假以無別體故也二種類謂各有種類如從因生果以火生爲因生火家種類種類旣其相似是實法相生屬依他假以其種類依因得成非是自性之力也三如如色若是分別假名一向無體卽是法空若是依他假雖復有體體非眞實他而有卽有法空此兩空之體旣是眞實故名如如色以如是色之自性
이것이 바로 그대로의 분야에 속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대로의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45_a_21L以色目於如如此是如如家色故言如如色也
016_0545_b_01L끝으로 뿌리에 따르는 것을 이름하여 본래 끝이라 지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을 이름하여 진실의 거짓이라고 하는지라, 거짓 체는 곧 ‘공’이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고, 거짓 ‘공’은 곧 그대로이기 때문에 진실의 모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물질의 쌓임이 이미 세 가지 거짓이어서 거짓에 섭수되는 것인 만큼 느낌 등 네 가지 쌓임의 이치도 저절로 다 그러하여, 모두가 세 가지 거짓에 섭수되는 것이리니, 괴로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그것이 분별의 거짓이라, 분별의 체가 인연을 따란 나고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 곧 님을 의지한 거짓이며, 그대로를 진실의 거짓이라 하나니, 만약에 공통된 모양과 차별된 모양을 분별한다면 이 마음이 곧 생각인 것이다. 만약에 괴롬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되 분별하는 집착이 없다면, 이를 느낌이라고 할 것이다.
016_0545_a_22L以末從本爲名亦可得言以本來目於末此之眞實名眞實假體卽空故名眞實假空卽如如眞實之相亦不可得也色陰旣卽三爲三假所攝者受等四陰理自皆然竝爲三假所攝者受苦受樂是分別假分別體從因緣生有因有果卽依他假如如名眞實假若能分別通相別相此心是想若受領苦樂無有別執則名爲受也
다음 둘째의 이른바 인(因)이라는 고집이란, 이 고집을 끊기 위해 열여덟 경계의 수승한 지혜를 이룩한다. 모든 외도 무리들은 다 일체 법이 ‘나’를 인하여 나게 되는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이를 인이라는 고집이라 한다. ‘나’에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를테면 알음과 즐거움과 괴로움과 탐욕과 진심과 공력(功力)과 생각과 법과 또는 법 아닌 것이다. ‘나’가 이미 본래 있음으로써 ‘나’를 따라 법과 법 아닌 것이 생기고, 법과 법 아닌 것이 마음으로 하여금 ‘나’와 함께 화합하기 때문에 알음이 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고, 즐겁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으며,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탐욕을 내고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진심을 낸다. 즐거움을 얻으려고 이 때문에 괴로움을 싫어하여 공력을 닦고 공력을 닦기 때문에 바로 생각이 있으며, 해탈을 얻으려고 이 때문에 법과 또는 법 아닌 것을 반드시 제거하는데,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지 않는다면 알음이 없겠고, 알음이 없다면 이 때문에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016_0545_b_08L二因者執爲斷此執成十八界勝智諸外道輩通執一切法因我得生因者執我有九法謂知非法我旣本有從我生法非法非法令心共我和合和合故能有所知知故有樂樂故有苦由樂故生欲由苦生瞋欲得於樂所以厭苦而修功力功力故有正念欲得解脫故須除法非法法非法不生則無有以無知故無苦樂等
016_0545_c_01L그리고 만약 해탈을 구하려면 네 가지 법을 닦아야 할지니, 첫째 진실한 말이니, 곧 계율을 지킴이고, 둘째 보시이고, 셋째 고행(苦行)이고, 넷째 선정이다. 만약에 이 네 가지 바른 법을 닦는다면 선한 도를 내게 되리니, 선한 도는 즐거움을 얻고 즐거움은 지혜가 있다. 지혜인 즉 법과 법 아닌 것을 싫어하고 법과 법 아닌 것을 싫어한다면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대승에서 깨뜨려 이르기를, “만약에 먼저 ‘나’가 있으면서 법과 법 아닌 것은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후에 어떤 인연으로 나는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으니, 해탈도 그러한지라, 해탈을 얻은 뒤엔 역시 어떤 인연으로 다시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지 않으리니 이렇다면 해탈할 때가 없을 것이다.
016_0545_b_18L若求解脫當修四法一眞實語卽持戒二施三苦四者定若能修此四種正法則得生善道善道得樂樂有智慧智慧則厭法非法厭法非法則得解脫大乘破言若說先有我而未有法非法時無有因緣而生者解脫亦爾得解脫已亦應無有因緣更生法及非法如此則無解脫時也
경계라 함은 종자라는 뜻이니, 자기의 종류가 이른바 종자이고, 종자는 또 동일하다는 뜻이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종자로부터 열매를 나눠 퍼뜨림으로써 드디어 열여덟 경계를 이룩할 뿐이다. 그런데 종자에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집착함이고, 둘째는 집착할 바이고, 셋째는 눈[眼] 등 여섯 감관을 집착함이다. 능히 집착하는 종자는 세 종자의 종류라고 하나니, 바로 능히 나는 것으로 다만 인연을 따라 승부(勝負)가 다름이 있거나 나는 열매가 같지 않을 뿐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여섯 대경[大塵]에 업을 내고 아리야식(阿梨耶識)을 훈습하나니, 종류가 이미 같아서 동일한 탐심이기에 종자라고 말하고, 이 하나의 종자가 능히 여섯 감관을 다른 열매를 얻기 때문에 인(因)을 여섯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관을 능히 잡는 집착함이라고 말한 것은 감관이 나타남은 이미 마음의 법이 아닌 만큼 사실 집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외도들이 ‘감관 가운데 따로 사람이 있어서 이것이 집착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방편으로 감관을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016_0545_c_03L界者種子義分種類是名種子種子亦是一義種類同一故也但分張果遂成十八而種子有三一者能執二者所執三者執眼等六根能執種子名自種種類卽是能生但隨因緣勝負有異生果優劣不同故由過去貪六塵生業熏阿梨耶識令種子旣同是一貪故言種子是一能得六根異果故說因有六種也而言根能執者根現旣非心法實不能執但爲外道言根中別有人是能執者故方便說根爲能
물질 등 여섯 대경은 잡을 것의 종자이니, 자기 종자로 말미암아 나기 때문에 또는 과거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안의 감관이 바깥 대경을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탐하는 감관과 탐하는 마음이 이 물질에 나는 것을 말함이다. 또 여섯 대경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여섯 감관이 있는가 하면 다시 대경을 탐하는 그 탐심이 여섯 감관에서 나는 것이다.
016_0545_c_15L色等六塵是所執種子由自種生故說由過去貪內根欲用外塵故貪根與貪生於此塵又由貪六塵故有六根復以貪塵之貪生於六根也
여섯 의식은 이 잡음의 종자이라, 탐하는 안의 감관을 따라 바깥 대경이 이 열여덟 가지 경계를 내나니, 인(因)을 따르는 것은 경계라고 하기 때문에 경계가 곧 종자인 것이다. 이 경계를 빌어 설한 것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짓는 것이고, 둘째 지을 것이고, 셋째 지음이 그것이다.
016_0545_c_18L六識是執種子從貪內根外塵生十八從因名界界是種子假說此界有三種義一能作二所作三作
016_0546_a_01L구치라(俱絺羅) 비구가 외도에 있을 적에 ‘나[我]가 이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와서 묻는 것을 부처님이 그를 위해 방편으로 “눈 등이 이 짓는 것이고 그 눈 등을 잡음이 ‘나’의 짓는 것”이라고 설하셨다. 또 하나의 쌓임[陰]을 깨뜨리기 위해 보여 주시기를, ‘감관을 떠난 그 이외엔 따로 ‘나’가 없는지라, 다만 눈 등이 인연을 따라 나기에 짓는 것이라 하지만 실상 짓는 것이 없고 여섯, 대경을 빌려서 짓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하셨으니, 이것이 승카(僧佉) 외도들의 내세우는 두 가지 ‘항상한 나[常我]’라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첫째 알음이 있는 ‘나’를 일컬어 ‘항상한 나’라 하지만, 이미 항상하기 때문에 이는 짓는 것이 아니고, 둘째 알음이 없는 ‘나’를 잡아서 곧 일체 법이라 하지만, 알음이 있는 ‘나’가 제 성품으로써 지혜를 성취하니 만큼 이는 지을 것이 아니다. 이 부처님께서 여섯 대경을 가정으로 설하여 지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런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실지로 짓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대경이 또한 지을 것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016_0545_c_21L爲破俱絺羅在外道時謂我是能作而來問佛佛方便假說眼等是能作其執眼等爲我作又破一陰示云離根之外無有別我但是眼等從因緣生謂爲能作實非能作假說六塵名爲所爲破僧佉外道所立兩種常我謂有知我是常我旣是常故非是能二執無知我卽一切法是有知我用自性成就智非所作是佛假說六塵名爲所作非性有旣非實有能作知塵亦非所作
또 이 때문에 지음이 이 여섯 의식인 것임을 가정으로 설하셨으니, 첫째는 외도들의 이른바 ‘일체 일이 다 설하셨으니, 첫째는 외도들의 이른바 일체 일이 다 ‘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깨뜨림이니, 이것은 증익(增益)에 대한 비방이요, 둘째는 삿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의 이른바 ‘나’가 항상하고 ‘나’가 항상하기 때문에 모든 법도 항상하고 이미 두 가지가 다 항상하기 때문에 짓는 것과 지을 것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손감(損減)에 대한 비방이므로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게 하기 위해 여섯 대경을 가정으로 설하신 것이다. 감관과 대경을 짓기 위해 뜻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만약 감관과 대경을 여읜다면 의식도 없으리니, 왜냐하면, 의식은 반드시 감관과 대경을 의지하여 바야흐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고 짓지도 않은 것이니, 바로 외도들의 이른바 짓는 것과 지을 것 등 세 가지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 이 세 가지 뜻을 내세움이다. 또 종자가 능히 집착함과 집착할 바 등이 있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열여덟 가지 경계를 내세움이다. 만약에 열여덟 가지 경계가 네 가지 인연으로부터 나는 것을 안다면 내가 능히 내는 따위가 된다고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016_0546_a_09L是故假說作是六識破外道謂一切事皆由我意此是增益謗二邪見外道謂我常以我常故諸法亦常旣兩種倂常故無有能作及與所作卽損減謗爲離此二邊故假說六塵爲作根塵不作意故無有若離根塵亦無有識何以故以識必依根塵方得生故則無有不作爲破外道能作所作等三種無明立此三義爲顯種子有能執所執等故立十八界若解十八界從四緣生則不執我爲能生等也
그리고 감관을 이르러 짓는 것이라 함은, 그 짓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의식과 대경을 내고, 둘째 대경을 위해 인연을 지음이 그것이다. 대경을 이르되 지을 것이라 함은 그 대경이 눈의 인연 짓는 것이 되고 의식의 의지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을 일으키되 짓는 것이라 함은 이 의식의 일어나는 것이 곧 사업의 이치와 경계의 이치가 있어서 근본의 진실을 따르기 때문이다.
016_0546_a_20L根名能作者能作有二種一能生識識二能爲塵作緣塵爲所作者爲眼作緣爲識所識是作者作是生起有事義界義從根本眞實
016_0546_b_01L또 눈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하는 눈이고, 둘째는 종류의 눈이고, 셋째는 진리의 눈이고, 또한 행(行)과 행이 아닌 수승한 지혜의 눈이다.
016_0546_b_01L眼有三一分別眼二種類眼三如眼乃至行非行勝智
예컨대 앞서 다섯 가지 쌓임[五陰] 가운데, 네 가지를 해석한 것과 같음이니, 이를테면 짓는 것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열두 가지 인연이 인과(因果)를 내는데, 세 가지 증감(增感)이 없음을 설한 것이 곧 그것이다.
016_0546_b_02L例如五陰中釋四爲破作者執故說十二緣生因果事三義無增減
증감이란 이른바 지어감[行]과 의식 등 열한 가지 갈래[十一支]의 그 인(因)을 내세움이 평등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항상 함이 없는 법을 항상한 것으로 내세움이 그것을 인이라고 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승카(僧佉) 외도들이 ‘알음이 없는 나’를 내세워 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다.
016_0546_b_04L言增減者謂於行識等十一支立因不平等以故以無常法立常爲因故名不平如僧佉等外道立無知我爲
또 우루카(優累佉)들이 항상한 ‘나’를 내세워 인이라 하기도 하고, 자재천(自在天)을 고집하여 항상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 업 짓는 것을 역시 항상한 것으로 내세워 인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 그 짓는 것의 항상함이 없는 것을 과(果)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니, 인과(因果)가 곧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인을 내세우는 것이 평등한 이치가 아니고 항상함이 없는 과를 논(論)하기 위해 스스로 무명이 있는 것을 내세워 그 인을 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의 이른 바 항상함이 있는 인이란 것이 곧 그 인의 이치를 증익하는 것이다.
016_0546_b_07L如優婁佉立於常我爲因及執自在天爲常等而能作業亦是立常爲因能作無常果因果卽不相類故言立因不平等理而爲論無常之果自以有無明爲因而彼謂有常因卽是增益於因義也
인을 손감하는 것이란, 니건자(尼犍子) 외도들의 이른바 모든 법은 자연히 있고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음이니, 실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기 때문에 이는 그 인의 이치를 손감하는 것이다.
016_0546_b_13L損減因者如尼揵子等外道謂諸法自然而有無有因緣有謂無故言損減因也
과(果)를 증익하는 것이란, 역시 승카(僧佉)들의 내세우는 이치와 같음이니, 이른바 인 가운데 이미 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 과가 비록 본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으로 말미암아 그 과를 나타내기 마련이고, 이 과가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인을 따르지 않고도 저절로 그 과가 생겨나야 하겠거늘 이치가 실로 인연이 쌓이고 모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과가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집착하여 본래부터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곧 그 과를 증익하는 것이다.
016_0546_b_15L增果者如僧佉等所立之義謂因中已有果果雖本有由因顯果此旣是本有則不從因生而理實由因緣聚集方有此果而其執言本有故名增果
과를 손감하는 것이란, 저 ‘단견(斷見)’에 치우친 외도들의 내세우는 이치와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업은 다 과에 감응되어 미래에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지 감응되는 것도 있고 실지 나는 것도 있거늘, 그들이 삿된 고집으로 모두 다 없음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이 곧 그 과를 손감하는 것이다.
016_0546_b_19L損果者斷見等外道立義謂一切業皆感果無未來生實有感實有生而邪執立故名損果
016_0546_c_01L일을 증익하는 것이란, 자재천(自在天)의 고집하는 것과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일은 다 나의 뜻과 마음을 따라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명의 체(體)가 따로 뜻을 짓는 것이 있어서 행을 낸다거나, 무명의 체가 따로 뜻을 짓는 것은 실지 없으면서도 행을 낸다는 것과 가음이다. 또 우루카(優累佉)의 고집하는 것과 가음이니, 이른바 법의 체도 동전(動轉)하는 사업이 있다는 것이다.
016_0546_b_22L增事者如自在天所執謂一切事皆從我意心而有如無明體別有作意能生於行而無明體實無別有作意而生行也又如優婁佉所執於法體別有動轉等事業
말하자면 올리고 내리고 굽히고 펴는 등 다섯 가지 사업이 있으니, 그 동전하는 것을 체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체를 떠난 이외엔 실지 별다른 사업이 없거늘 그들이 삿된 고집으로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그 일을 증익하는 것이다.
016_0546_c_03L事業有五種謂上下屈申等執以動轉爲體體之外實無別事業而邪執爲有名增事
일을 손감하는 것이란, 외도들의 고집하는 이른바 무명은 행을 낼 힘이 없으니, 무명이 있거나 있지 않거나 자연행이 있기 때문에 그 무명은 행을 낼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열두 가지 인연이 번갈아 서로 나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인과와 일 등 증익하고 손감하는 여섯 가지 삿된 고집을 여읠 수 있을 것이다.
016_0546_c_06L損事者外道所執謂無明無力能生行無明若在若不在自然有故知無明無力生行若解十二有分展轉相生能離因果事等增減六種邪執
대략 열두 가지 인연의 그 인과의 이치를 밝히건대 스스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항상함이 없음을 밝히고, 둘째 동전(動轉)하는 뜻이 없음을 밝히고, 셋째 인과의 본체와 모양을 분별한다. 만약에 마음이 항상한 것이라면 인과가 없겠지만, 마음은 이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인과의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에 동전하는 뜻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인은 응당 뜻을 지니어 과를 내고 과는 응당 뜻을 지어 비로소 인을 따라 나는 것이 곧 자유로워야 하겠고, 남을 의지하여 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니, 남을 의지하는 이치란 인이 과를 의지하고 과가 인을 힘입어 이룩되는 것이다. 서로가 기다리는 것은 죄다 남을 의지하는 이치이니, 그러므로 이 가정은 실다운 성품이 없는 것이다.
016_0546_c_10L略明十二有分因果之義自有三種一明無常二明無動轉之意三辨因果體相若心是常則無因果以心是無常故因果義立若言別有動轉意者則因應作意生果果應作意方從因生便是自在非謂依他則生依他義因依果果藉因成互相須竝皆依他所以是假無有實性
만약에 서로가 같지 않다면 인과의 이치를 잃어버리는 것이어서 마치 콩이 보리를 내지 않는 것과 같으리니, 인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내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과로 하여금 인과 같지 않고 인으로 하여금 과와 같지 않다면, 나쁜 짓을 한 자도 천상에 태어나고 착한 일을 한자도 지옥에 떨어지며, 또한 생사에 유전할 자도 해탈에 감응될 수 있고 생사의 유전이 없는 자도 다시 생사를 더해야 할지니, 이 때문에 무상(無常)이 무상을 내는 것은 이 자연의 이치 그대로이다. 구태여 뜻 지음이 있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016_0546_c_17L不相似則失因果之義如豆不生麥非因故不互相生若令果不似因不類果者作惡便應生天爲善則墮地獄乃至有流應感解脫無流更增生死是故無常生無常此任自然之不勞執有作意
016_0547_a_01L그리고 인과의 서로 같은 것을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이라 함은 이 이치가 세 가지 번뇌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탐애(貪愛)의 껍질과 ‘아견(我見)’의 살과 무명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 열두 인연의 본체 가운데 만약 인과의 부분이라면, 사실 그대로 싫어 여의어 탐애를 깨뜨림으로써 원 없는 해탈문[無願解脫門]을 나타낸다. 만약 인(因)의 부분이라면, ‘아견’을 깨뜨림으로써 그 과가 인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을 나타내고, ‘나’가 항상 짓는 것이 아님으로써 공한 해탈문[空解脫門]을 밝힌다. 무명으로써 도로 무명을 나타내니 만큼 만약 모든 업의 행이 무명으로부터 나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무명의 그 어두움을 나타내는 마음이 곧 사라지리니, 무명이 바로 네 가지 비방[四謗] 가운데 모양을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명을 깨뜨림으로써 모양 없는 해탈문[無相解脫門]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에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이 증익도 없고 손감도 없음을 체득한다면, 곧 ‘아견’을 제거하고 지음이란, 고집을 여의리니 이 때문에 이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으로써 바로 이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다.
016_0546_c_23L因果相似名十二有分此義爲破三種煩惱謂貪愛皮我見肉無明心此十二緣體中若是果報分者實若厭離以破貪愛顯無願解脫門若是因分者以破我見顯果由因生非我常作明空解脫門以無明還顯無明若能解了諸業行從無明生者無明顯闇之心卽滅無明卽是四謗執相之故破此無明以顯無相解脫門也若體十二有分無增無則除我見離作者執故以十二有分正破此執也
세 가지 근본의 섭수하는바 무명이 세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소원을 분별로 나타나는 바이니, 곧 분별이 거짓이고, 둘째는 인과의 도리가 있는 것으로서 곧 남을 의지하는 거짓이고, 셋째는 이 두 가지가 다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곧 진실의 거짓이다. 무명의 한 부분이 이미 이러하니 만큼 나머지 행(行) 따위 열한 가지는 그 예(例)가 다 그러한지라. 다시 그것들에 대하여 해석하지 아니한다.
016_0547_a_11L三本所攝者無明有三義一者分別所顯卽分別假二有因果道理卽依他假此兩皆無所有卽眞實假無明一支旣爾所餘行等十一其例皆然不復具釋
다섯째의 자재(自在)라고 하는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아는 수승한 지혜[處非處勝智]를 설하겠다. 외도들은 계교하기를, ‘자재천은 뜻대로 착한 일을 하고서도 나쁜 갈래의 과보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 나쁜 갈래에 태어나서도 착한 갈래를 부를 수 있고, 생사에 유전하면서도 해탈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생사의 유전이 없으면서도 생사를 얻을 수 있으니, 왜냐하면 자유로움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는지라, 이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남을 의지해 있고 자재함이 없으니, 자재함이 없는 그것에 세 가지 이치가 있다.
016_0547_a_15L五破自在者執故說處非處勝智外道計自在如意能作善得惡道果報生惡能招善道作有流得解脫作無流感生何以故以得自在故爲破此執處非處皆是依他竝無自在無自在有三義
첫째는 업은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고, 둘째는 번뇌를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고, 셋째는 과보를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다. 수량의(壽量義) 가운데, 이 일곱 가지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를 널리 설한 것과 같다.
016_0547_a_21L一依業處非處二依煩惱處非處三依果報處非處如壽量義中廣明七種是處非處義
016_0547_b_01L이른바 업을 의지하는 것이 그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이란, 나쁜 업을 의지하여 나쁜 갈래에 들어가는 것을 도리에 계합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자재로운 힘이 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에 나쁜 업을 의지하여 나쁜 갈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도리에 계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이치가 업으리니, 착한 업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016_0547_a_23L依業處非處依惡業名惡道名爲是處無自在力入也若依惡業不入惡道名爲非處無有是處善業亦然
번뇌를 의지함이란,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다섯 가지 덮임[五蓋]을 버리지 못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七覺]을 닦지 못했다면, 끝내 괴롬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번뇌를 의지함으로써 해탈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재한 업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다. 범부들은 번뇌를 의지하여 살생 등 나쁜 업을 짓기 때문에 그 번뇌 없는 데를 의지하는 곳으로 삼을지니, 이 모두가 자재한 힘이 없는 것이다.
016_0547_b_03L依煩惱者若人未捨五蓋未修習七覺終不能得盡於苦際依煩惱不得至解脫知無自在業也凡夫依煩惱能作殺等業無煩惱爲依處故竝無自在力
과보를 의지함이란, 국토엔 두 임금이 없고, 세상엔 두 부처님이 없으시거늘 만약에 두 임금과 두 부처님이 한꺼번에 같이 일어난다면, 이럴 이치가 없겠다. 여인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그럴 이치가 없었고, 소승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로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이런 이치가 없다. 전륜성왕이나 부처님은 다 공동하지 않는 업이 있음으로 이 업이 가장 수승하여 일체가 의지하는 인연과 과보의 힘이 되나니, 비록 다시 뜻을 지어 하나의 곳으로 같이하려 해도 마침내 마음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016_0547_b_08L依果報者土無二王世無兩佛令二王兩佛同時俱興無有是處女人爲轉輪王亦無是處小乘聲聞及辟支佛得作佛者亦無是處轉輪王及佛同有不共之業此業最勝切依因緣果報等力雖復作意欲同一處終不得從心也
그리고 여인은 두 가지 업이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얻었고, 다른 하나는 나쁜 업을 말미암아 여인이 되어서 항상 남에게 예속되어 자재함을 얻지 못함이다. 이것이 다 남을 의지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사람도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서 인(因)의 이 업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금의 과(果)를 얻었지만 이 과를 이미 얻고 나서 보살을 구하려 해도 자재한 힘이 없어 마침내 얻을 수 없나니,
016_0547_b_14L女人有兩業心善故感得人身二由惡業所以爲恒隸屬於人不得自在皆是依他果報也二乘之人小欲知足依因此業故得今果已得此果欲求菩薩無自在力終不能得
이러한 이치가 두 가지 있어 업을 의지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과를 의지하는 것이 그 둘이다. 만약에 이 일곱 가지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아는 수승한 지혜를 얻는다면, 곧 ‘아견’을 여의고 뒤에는 자재함을 얻어 모든 일을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 성품에 속한 근본 이치를 이미 위와 같이 해석하였으니, 그 예와 힐난은 알 수가 있으므로 다시 거듭 기록하지 않는다.
016_0547_b_19L如此義有兩一依業二依果若得此七種處非處勝智則離我見後得自在如意能爲也屬三性根本義已如前釋例難可得不復重記
十八空論一卷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