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론(百論)』이란 성인의 마음에 통하는 나루이자 길[津塗]이고 진제(真諦)를 여는 중요한 논서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800여년에 출가한 대사(大士)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제바(提婆)이다. 현묘한 마음[玄心]을 뛰어나게 깨닫고 고상한 기개[儁氣]는 높고 밝았으며, 도(道)는 당시(當時)를 비추고 정신[神]은 세상 밖[世表]을 초월했다. 그러므로 삼장(三藏)의 중첩한 관문[重關]을 열고 십이(十二)1)의 깊은 길[幽路]을 평탄하게 할 수 있어 가이라국[迦夷]2)에서 마음껏 걷고 법(法)의 성곽과 해자[城塹]가 되었다. 당시에 외도(外道)가 어지럽게 일어나고 이단(異端)이 다투어 일어나며 삿된 변론[邪辯]이 진리를 핍박하여 정도(正道)를 거의 어지럽히게 되었다. 이에 위로는 성인의 가르침[聖教]이 점차 쇠퇴함을 개탄하고 아래로는 뭇 미혹한 이들[群迷]이 방종하고 미혹함[縱惑]을 슬퍼하여 침윤(沈淪)한 이들을 멀리 건지려고 이 논을 지었으니 바름을 지키고[防正] 삿됨을 막아[閑邪] 종극(宗極)을 크게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른 교화[正化]가 이것 때문에 융성하고 삿된 도[邪道]가 이것 때문에 사라졌다. 뭇 오묘함[眾妙]을 거느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016_0548_b_01L논에 백 개의 게송이 있기 때문에 백(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치(理致)가 깊고 그윽하여 뭇 서적의 핵심을 거느리고 글의 뜻[文旨]이 아름답고 요약되어 제작(制作)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뜻[至趣]은 그윽하고 간략하여 그 문(門)을 얻은 이가 적다.바수(婆藪)3) 개사(開士)는 밝은 지혜가 안으로 융통하고 오묘한 생각이 기특하게 빼어났다. [제바의] 현묘한 자취[玄蹤]에 깊게 계합하여 훈석(訓釋)을 지어, 가라앉고 숨은 뜻을 아름다운 글[徽翰]에 빛나게 하며, 풍미(風味)를 펼쳐 흐르게 하여 후세[來葉]에 입혔다. 문장[文藻]은 환하게 빛나고 중요한 도리[宗塗]는 깨닫기 쉽다. 그 논은 말하되 치우침이 없고 파하되 집착함이 없다. 무심하여 의거함[據]이 없기에 일은 참됨을 잃지 않고 삼가고 기대는 것[寄]이 없기에 이치가 저절로 현묘하게 회통하여 근본으로 돌아가는 도가 이에 드러나게 되었다. 천축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은 기량(器量)이 깊고 넓으며 빼어난 정신[俊神]은 멀리 초월하였으며, 연찬하고 우러르기를 여러 해를 하여 점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고,항상 이 논을 맛보고 읊조려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먼저 친히 번역하였으나 방언(方言)이 아직 융통하지 못하여 생각하고 뜻을 찾는 사람들[思尋]로 하여금 틀린 문장에서 주저하게 하며, 수행 계위를 표방하는 사람들[標位]로 하여금 돌아가 이를 곳[歸致]에서 어긋나게 하였다.
대진(大秦) 사예교위(司隷校尉)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은 풍운(風韻)은 맑게 펴지고 충심(沖心)은 간략하고 뛰어나며, 내외(內外)를 널리 섭렵하고 이사(理思)는 겸하여 통달하였다. 어릴 적부터 대도(大道)를 좋아하고 자라서는 더욱 독실하였다. 비록 시무(時務)에 얽매여 있었으나 법언(法言)을 그치지 않고 매번 이 글을 어루만져 개탄한 바가 참으로 많았다. 홍시(弘始) 6년 세차(歲次) 수성(壽星)에 이치를 아는 사문을 모아 구마라집과 함께 정본(正本)을 상고하여 정제하고 반복해서 논변하였다. 논의 뜻을 힘써 보존하여 바탕[質]을 보존하되 조야하지 않게 하고 간략하되 반드시 이치에 부합하게 하니 종치(宗致)가 극진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흠잡을 것이 없게 되었다. 논은 모두 20품이고 품에는 각기 다섯 개의 게송이 있다. 뒤의 10품은 그 사람이 이 땅에 무익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빼버리고 전하지 않았다. 밝고 식견이 있는 군자들이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제바보살(提婆菩薩)지음 바수개사(婆藪開士)풀이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016_0548_b_15L提婆菩薩造 婆藪開士釋
姚秦三藏鳩摩羅什 譯
1. 죄와 복을 버리는 장[捨罪福品]
016_0548_b_17L捨罪福品第一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립니다. 자비로우신 세존께서 무량한 겁 동안 온갖 고를 짊어지셨고 번뇌가 이미 끊어지셨으며 습기 또한 제거되셨기에 범천[梵]ㆍ제석천[釋]ㆍ용(龍)ㆍ천신이 모두 경배드립니다.
016_0548_b_18L頂禮佛足哀世尊, 於無量劫荷衆苦,
煩惱已盡習亦除, 梵釋龍神咸恭敬。
또 위없이 세상을 비추는 법으로, 흠과 더러움을 청정하게 하고 희론(戱論)을 그치게 하는 부처 세존들의 말씀과 공양받을 만한 이들[應眞僧]인 여덟 현성[八輩]1)께 예를 올립니다.
016_0548_b_20L亦禮無上照世法, 能淨瑕穢止戲論,
諸佛世尊之所說, 幷及八輩應眞僧。
【외도】2) 게송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이 세존인가?
016_0548_b_22L外曰:偈言世尊之所說,何等是世尊?
【불자】3) 그대는 왜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가?
016_0548_b_23L內曰:汝何故生如是疑?
016_0548_c_01L【외도】 여러 가지로 세존의 상(相)을 말하기에 의심을 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뉴천(葦紐天)4)진(秦)에서는 편승천(徧勝天)이라 한다.5)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6)진(秦)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 한다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가비라(迦毘羅)7)ㆍ우루가(優樓迦)8)ㆍ늑사바(勒沙婆)9)를 다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붓다만을 세존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불자】 붓다께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명료하게 장애 없이 아시며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붓다만을 세존이라 하는 것이다.
016_0548_c_06L內曰:佛知諸法實相,明了無㝵,又能說深淨法,是故獨稱佛爲世尊。
【외도】 다른 지도자[導師]들도 모든 법을 명료하게 알고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한다. 가령 가비라의 제자는 『승거경(僧佉經)』10)을 암송해서 선법(善法)들의 보편상[總相]과 특수상[別相]을 말한다. 25제(諦) 중에서 청정한 지각[覺]의 요인들을 선법이라고 한다. 가령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11)을 암송해서 “6제(諦)12) 중에서 구나제(求那諦)13)에 의해서 하루에 세 번 목욕하고 두 번 불을 공양(供養) 하는 등의 화합에 의해서 ‘나’[神]의 일부분인 선법을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늑사바의 제자는 『니건자경(尼乾子經)』14)을 암송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굽고 삭발하는 등의 고통을 받는데 이것을 선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논사들은 스스로 단식을 행하고 호수에 몸을 던지고 불에 뛰어오르고 스스로 높은 산에서 떨어지고 말을 하지 않고서 항상 서 있고 우계(牛戒)를 지키는 등 이것을 선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심오하고 청정한 법인데 왜 붓다만이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가?
【불자】 이것은 다 그릇된 견해[邪見]이어서 바른 견해[正見]을 뒤엎기 때문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016_0548_c_18L內曰:是皆邪見,覆正見故,不能說深淨法,是事後當廣說。
【외도】부처님은 어떤 선법(善法)을 말하는가?
016_0548_c_20L外曰:佛說何等善法相?
016_0549_a_01L【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선을 행하는 법(法)이네수투로(修妬路)15) 부처님께서는 대략 두 종류의 선법을 말씀하셨다. ‘그치게 하는 것’[止相]과 ‘행하는 것’[行相]이다. 모든 악들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모든 선을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악이라 하는가? 몸[身]을 그릇되게 행해하는 것, 입[口]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생각[意]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살생ㆍ도둑질ㆍ음행(淫行)이다.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이다. 생각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탐욕[貪]ㆍ증오[瞋惱]ㆍ그릇된 견해[邪見]이다. 또 10불선도(不善道)에 포함되지 않는 매질ㆍ몽둥이질ㆍ묶는 일ㆍ가두는 일 따위가 있다. 그리고 십불선도 앞뒤의 여러 가지 죄를 악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는가? 악을 그치게 해서 짓지 않는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기거나 입으로 말하거나 계를 받거나 해서 오늘부터 다시는 결코 짓지 않겠다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선이라 하는가?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 합장하는 일, 절을 드리는 일 등이다.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진실한 말, 적절한 말, 부드러운 말, 이익을 주는 말이다.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자(慈)와 비(悲), 바르게 봄[正見] 등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청정한 법을 선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 선법을 믿고 받아들이며 수습(修習)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서두에 길상[吉]16)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논사들이 경전을 저술하는 법이 서두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이해하기 쉽고 진리의 소리[法音]가 널리 퍼진다. 만약 지혜가 있는 이가 독송하고 기억해서 알아 둔다면 수명이 늘고 위덕(威德)이 있으며 존중을 받게 된다. 가령 『바라하파제(婆羅呵婆帝)』17)진(秦)에서는 『광주경(廣主經)』이라 한다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전 등에서는 처음에 모두 길상[吉]을 말한다. 최초가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도 최후도 길상하다. 그대의 경전은 처음에 악을 말하기 때문에 길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하고 말한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그릇된 봄[邪見]을 끊기 위해 이 경을 말하는 것이네.수투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릇된 봄[邪見]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길상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만약 조금이라도 길상이 있다면 경전의 초두에 길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는 실제로는 길상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한 사태를 두고 이 사람은 ‘길상하다’ 하고 저 사람은 ‘길상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길상한 것도 아니고 길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한다.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상함이 없는 것이다. 그대 어리석은 이는 방편 없이 억지로 즐거움을 구하길 바라고 허망하게 기억과 표상을 일으켜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016_0549_b_01L 자기와 타자와 양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이 길상함[吉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법은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자성[自相]이 없으므로 타성[他相] 또한 없다. 또 무한역행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 다시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모두18)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발생[生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것,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길상함[吉事]이 없다.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기 때문이네. 또 소금의 성질[相]은 소금 속에 머물 러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앞에서 자성(自性)으로서 발생하는 법은 있지 않다고 하며 (이를) 타파했다. 또 그대의 의도는 소금은 인과 연들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은 자성(自性)으로서 짠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그대의 말로 그대의 말을 타파해 보겠다. 소금이 다른 사물과 합한다 하더라도 사물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소금의 성질은 소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의 성질은 말의 성질이 아닌 것과 같다.
【불자】 등불 자체에도 다른 것에도 어둠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 왜 그러한가? 빛[明]과 어둠은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에는 비추는 작용[能照]이 없다. (어둠이 없기에 어둠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춤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은 자기를 비추지 않는다. 비춤을 받는 장소에도 또한 비춤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비출 수 없다. 어둠을 타파하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을 타파하는 일이 없기에 비춤이 아니다.
【불자】 그렇지 않네. 한 법(法)에서 유와 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처음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반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은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하물며 어떻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추는 일이 있겠는가? 또 한 법이 어떻게 유이고 무이겠는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등불이 이미 발생했든 아직 발생하지 않았든 모두 어둠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질[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어둠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외도】 마치 주술이나 별과 같기 때문이네.수투로 멀리서 먼 데 있는 사람에게 주술을 걸어 괴롭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하늘에서 별이 변해서 사람을 길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등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어둠에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
【불자】 실제를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등불에 힘이 있어서 어둠에 도달하지 않아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면, 인도[天竺]에서 등불을 켰을 때 어찌 중국[振旦]의 어둠이 타파되지 않겠는가? 주술과 별의 힘이 먼 곳에 미칠 수 있듯이 등불이란 사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처음에 길상하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네.수투로 또 만약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을 말한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때도 길상하다면 그대가 처음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 허위의 말[妄語]가 되고 말 것이다.
【외도】 마치 코끼리19)의 손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코끼리는 손을 갖고 있기에 ‘손을 갖고 있는 것[有手]’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눈과 귀와 머리 따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눈과 귀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부분의 길상함에 힘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의 길상하지 않음을 길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016_0550_a_01L【불자】 그렇지 않네. 코끼리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다면 머리와 발 등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부분[分] 속에 전체[有分]가 갖추어져 있다면 어찌 머리 속에 발이 있지 않겠는가? 다름[異]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지 않다면 그래도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체가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그대로 발일 것이다. 둘20)은 코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함[一]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길상함[吉事]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최초에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과 최후도 길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자】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거친 번뇌[鹿垢]를 제거하고 다음에 미세한 번뇌를 제거한다. 만약 수행자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면 선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후에 선법을 배이게 한다. 비유하면 옷을 빨 때 먼저 거친 때[鹿垢]를 제거한 이후에 물을 들일 수 있는 것과 같다.
016_0550_b_01L【불자】 그렇지 않다. 만약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면 보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 된다. 또 번뇌[漏]들이 멸진했을 때 사람의 인색함과 탐욕은 이미 멸진한 것이다. 보시할 때에 어떻게 악을 그치게 하겠는가? 혹은 어떤 이는 보시를 행하긴 하지만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하지는 않는다. 설사 (보시를 행하는 것이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보시는 선행이다.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을 말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계(戒)를 받을 때 악들을 멈추게 하는 것을 이른다. 선행은 선법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단지 선행의 복을 말할 뿐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계를 받아서 악을 그치게 할 때 불선(不善)의 심(心)이든 무기(無記)의 심이든 이 때 선(善)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또한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그치는 일을 말해야 하고 또 선행도 말해야 한다.
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은 중생의 의도[意]를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로 나누셨네. 하급과 중급과 상급의 사람이 갖고 있는 보시와 지계와 지혜이네.수투로 수행자는 세 부류가 있다. 하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중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고, 상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가르친다. 보시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재물을 버리는 일에 상응하는 사업(思業)ㆍ신업(身業)ㆍ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을 이른다. 지계는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 속에 생기거나 계를 받을 때 오늘부터 다시는 세 가지의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네 가지의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을 짓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모든 법상(法相)들에 심(心)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 하급ㆍ중급ㆍ상급을 말하는가? 이익의 차이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보시하는 이는 이익이 작기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계를 지키는 이는 이익이 중간 정도이기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지혜가 있는 이는 이익이 가장 높기에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또 보시의 과보는 가장 낮고 지계의 과보는 중간이고 지혜의 과보는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급ㆍ중급ㆍ상급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불자】 과보를 위한 보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기 때문에.수투로 과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세의 과보[現報]와 후세의 과보[後報]이다. 현세의 과보란 명예[稱敬]와 존중[敬愛] 등이고, 후세의 과보란 후세의 부귀 등인데,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과보라 한다. 왜 그러한가? 바꾸어서 얻고자 하기 때무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팔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멀리서 다른 지방에 도착해서 비록 잡다한 물건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지만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있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업(業)은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보시해서 과보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불자】 계를 지켜서 즐거움의 과보를 구하네.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수투로 즐거움의 과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계(人界)에서 부귀를 받는 것이다. 계를 지켜서 천계에서 천녀(天女)와 즐거이 놀기를 바라거나, 인계에서 다섯 욕계의 즐거움[欲樂]을 받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란 안으로는 다른 색(色)을 욕구하면서 바깥으로는 친해서 사이가 좋은 척하며 속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이 난타에게 말했다.
016_0551_a_01L 마치 숫양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네. 앞의 것을 갖고서 다시 버리네. 그대가 계를 지키고자 하나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네.
016_0550_c_23L如羝羊相觸, 將前而更卻, 汝爲欲持戒,
其事亦如是。
몸은 비록 계를 지키나 마음은 탐욕에 이끌리네. 이 업(業)이 청정하지 않거늘 이 계(戒)를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51_a_02L身雖能持戒, 心爲欲所牽,
斯業不淸淨, 何用是戒爲?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계라고 하는가?
016_0551_a_03L外曰:何等名淨持戒?
【불자】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법은 계(戒)가 근본이다. 계를 지키는 이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으니 환희한다. 환희하니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즐거우니 한 마음[一心]을 얻는다. 한 마음을 얻으니 진실한 지혜가 생긴다. 진실한 지혜가 생기니 싫어함을 얻는다. 싫어함을 얻으니 탐욕을 벗어난다. 탐욕을 벗어나니 해탈을 얻는다. 해탈하니 열반을 얻는다. 이것이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지혜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016_0551_a_12L內曰:不然。何以故?智亦有二種:一者、不淨;二者、淨。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지혜라고 하는가?
016_0551_a_13L外曰:何等名不淨智?
【불자】 세간[世界]에 계박되기에 청정하지 않네. 마치 원수가 와서 친구가 되는 것과 같네.수투로 세간의 지혜는 생사(生死)를 증대[增長]하게 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지혜는 되돌아가서 계박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원수가 처음에는 친구인 척 속이다가 오래되면 해를 끼치는 것과 같다. 세간의 지혜도 또한 이러하다.
【불자】 복(福)을 취하고 악을 버리네. 이것들은 유행(流行)하게 하는 법이네.수투로 복은 복의 과보를 말한다.
016_0551_a_18L內曰:取福捨惡是行法。修妒路 福,名福報。
【외도】 만약 복이 복의 과보를 말한다면 왜 수투로(修妬路)에서 단지 복만을 말하는가?
016_0551_a_19L外曰:若福名福報者,何以修妒路中但言福?
016_0551_b_01L【불자】 복은 원인이고 복의 과보는 결과이다. 어떤 때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하고 어떤 때는 결과로서 원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천량의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금으로 인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림을 보고 손재주가 좋다[好手]고 말하는 것과 같다.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다고 한다. ‘취한다’란 집착한다는 것이니, 복의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행[行]이란, 사람을 항상 생사에 유행하게 하는 것이다.
【외도】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하네. 과보가 좋기 때문이네. 또 인연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복의 과보는 좋아서 모든 중생들은 항상 좋은 과보를 구한다. 그러니 왜 버려야 하겠는가? 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대는 지금 이유[因緣]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복을 버릴 필요가 없다.
【불자】 복이 소멸했을 때 괴로움이 있네.수투로 ‘복’이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소멸은 상실하고 괴멸하는 것을 말한다. 복의 과보가 소멸할 때 즐거운 일이 없어지게 되어 큰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길 때 즐겁고 머물고 있을 때 즐겁지만 소멸할 때는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버려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 복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도(助道)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복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하물며 어찌 죄를 버리지 않겠는가?
【외도】 죄와 복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대가 복이 소멸할 때 괴롭다고 말한다면 죄가 생기고 머물 때는 즐거울 것이다.
016_0551_b_15L外曰:罪福相違故,汝言福滅時苦者,罪生、住時應樂。
【불자】 죄가 머물 때는 괴롭네.수투로 ‘죄’란 죄의 과보를 말한다. 죄의 과보가 생길 때 괴롭거늘 하물며 어찌 머물 때 괴롭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괴롭고 머물 때 괴롭고 소멸할 때 즐겁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대가 “죄와 복은 상반되기에 죄가 생길 때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그대는 어찌 죄와 복이 상반되기에 죄가 소멸할 때 즐겁고 생길 때와 머물 때는 괴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016_0551_c_01L【외도】 상주함의 복에는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에 버리지 않아야 하네.수투로 그대가 복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소멸할 때 괴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상주함의 복의 과보에는 소멸할 때의 괴로움이 없으니 버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마사(馬祀)24)를 행하면 이 사람은 노쇠함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복의 과보가 상주하기에 태어나는 곳도 상주한다. 이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불자】 복은 버려야 하네.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이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독이 섞인 밥은 먹을 때는 즐겁고 소화하고자 할 때는 괴롭다. 복도 이와 같다. 또 복의 과보가 있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이지만 많이 받아들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불을 가까이 하면 한기를 막아주기에 즐겁지만 더 가까이에 다가서면 몸을 태우니 괴롭다. 그러므로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두 가지 특징이 있기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그대가 마사(馬祀)의 복보(福報)는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언설이 있을 뿐이네. 인연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마사(馬祀)의 과보는 실제로는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마사의 업의 인연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의 인연이 한계가 있다면 과보도 한계가 있다. 마치 진흙덩어리가 작다면 물단지도 작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사(馬祀)의 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그대의 천신[天]은 증오가 있어서 함께 다투고 서로 괴롭힌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대의 마사 따위의 행위[業]는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모두 무상하다.
유루의 청정한 복은 무상하기에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죄가 섞인 복을 버리지 않겠는가?수투로 또 마사(馬祀)와 같은 행위[業]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승거경』에서는 “제사[祀法]는 청정하지 않고 무상하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의 특징(相)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016_0552_a_01L【불자】 도(道)를 생기게 하는 순서이네. 마치 때묻은 옷을 빨아서 물을 들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때묻은 옷을 먼저 빨고 후에 깨끗해졌을 때 물을 들인다면 빨래해서 깨끗이 한 것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물들임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때묻는 옷은 물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먼저 죄의 때를 제거하고 다음에 복덕(福德)으로써 마음에 배이게 하고 이후에 열반도(涅槃道)의 물[染]을 받는 것이다.
【외도】 복을 버리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수투로 복에 의지해서 악을 버린다. 무엇에 의지해서 복을 버리는가?
016_0552_a_02L外曰:捨福依何等?修妒路 依福捨惡,依何捨福?
【불자】 무상(無相)이 가장 위이네.수투로 복을 취하면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고 죄를 취하면 3악도(惡道)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무상의 지혜가 가장 으뜸이다. 무상이란 모든 상(相)을 억념하지 않고 모든 수(受)를 여의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에 의지하는 곳[所依]이 없다. 이것을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이 방편에 의지해서 복을 버릴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세 종류의 해탈문25) 없이 제1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의지하지 않고서 앎과 봄을 얻고자 하는데, 증상만(增上慢)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공(空)이란 말이 실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016_0552_b_01L 【외도】 “모든 법은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나’[神] 등의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비라(迦毗羅)ㆍ우루가(優樓迦) 등은 “‘나[神]’와 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비라는 “원질[冥初]27)에서 지각[覺]이 생기고, 지각에서 아만(我慢)[我心]이 생기고, 아만에서 5유(唯:五微塵)28)가 생기고, 5유에서 5대(大)29)가 생기고, 5대에서 11근(十一根)30)이 생긴다. ‘나’는 주재하고 상주하고 지각의 특성을 가지며 모든 법 속에 거처한다.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고 후패[敗]하지 않으며 모든 법을 포섭한다. 이 25제(二十五諦)를 알면 해탈을 얻고 이것을 알지 못하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루가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며 상주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ㆍ봄ㆍ눈깜박임ㆍ수명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또 탐욕ㆍ증오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지혜 등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탈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외도】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승거경』에서는 “지각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나’이다”고 말한다.
016_0552_b_05L外曰:實有神。如『僧佉經』中說:覺相是神。
【불자】 ‘나’[我]와 지각[覺]은 동일한 것인가, 상이한 것인가?
內曰:神、覺爲一耶?爲異耶?
【외도】 ‘나’와 지각은 동일한 것이다.
016_0552_b_07L外曰:神、覺一也
【불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나’는 무상할 것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는 무상할 것이다. 비유하면 뜨거움은 불의 속성이니 뜨거움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도 무상한 것과 같다. 이제 지각은 실제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특성[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고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기 때문이고 존재하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옳은 점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모든 곳에 편재하니 지각도 5취[道]에 동시에 편재해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에 편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니다.
016_0552_c_01L만약 그렇다면 ‘나’와 지각은 동일할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지각을 ‘나’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각과 동일할 것이니, ‘나’는 편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면 불에 뜨거움의 속성과 뜨거움 아님의 속성이 없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아서 편재함과 편재하지 않음의 속성이 없을 것이다. 만약 편재한다고 한다면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 있을 것이네.수투로
또 그대가 ‘나’가 편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두 속성이 있을 것이다.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편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지각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이고, 만약 지각 아님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 아님이다.
【외도】 능력이 편재하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지각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실은 없다.
016_0552_c_04L外曰:力遍故無過。修妒路 有處覺雖無用,此中亦有覺力,是故無無覺過。
【불자】 그렇지 않네. 능력과 능력을 갖는 것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의 능력이 있다면 이 곳에 처할 때 지각은 작용이 있으면서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지각의 작용이 없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이 언설[語]이 있을 뿐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비록 등불이 물단지 등을 비추지는 않지만 물단지 등을 얻을 수 있고 또 작용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하지 않을 때면 지각을 얻을 수 없어서 ‘나’도 또한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3_a_01L또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색의 상은 사람이 인지하기 때문에 색의 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보지 않을 때라도 항상 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의 인식은 ‘나’의 속성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인식[知]과 지각[覺]은 동일한 의미이다.
【외도】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을 암송해서 “인식과 ‘나’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나’는 무상(無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와 인식은 합하기 때문이네. 마치 소를 갖는 것[有牛]과 같네.수투로 사람과 소가 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소를 갖는 것[有牛]’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神]’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塵]가 합하기 때문에 ‘나’를 ‘인식을 갖는 것[有知]’이라 하는 것이다.
【불자】 소의 성질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소의 성질[相]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가 합한다 하더라도 ‘소를 갖는 것’이 소인 것은 아니다. 소만이 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나’와 인식이 합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특성[知相]은 인식[知]에 있지, ‘나’가 인식인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가 합하기에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하지만, 이 인식이 색경[色塵] 등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이 태우지 불을 갖는 사람이 태우지 않는 것과 같다.
016_0553_b_01L【불자】 그렇지 않네. 인식이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근[情]이 의(意)와 경계가 합해서 인식이 발생할 때 이 인식이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식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인식하는데 ‘나’가 다시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등불은 색 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하더라도 색 등을 인식할 수 없다. 법(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식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32)이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외도】 말의 몸[馬身]과 합하기에 ‘나’를 말[馬]이라고 하는 것이네.수투로 가령 ‘나’가 말의 몸과 합하기에 ‘나’를 말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나’가 비록 (말의) 몸과 상이하더라도 또한 ‘나’를 말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말의) 몸 속의 ‘나’는 말이 아니네.수투로 말의 몸은 말이다. 그대가 “몸이 ‘나’와 상이하다”고 말한다면 ‘나’가 말의 몸과 상이한 것인데, 어떻게 ‘나’를 말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나’로 ‘나’를 비유한다면 부처(負處)33)에 떨어진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가 아닐 것이다. 왜 그러한가? 나는 앞에서 “인식이 인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인식을 ‘나’라 하지 않는다면 또한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른 것에 합하기에 다른 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면 인식이 ‘나’와 합하는데 어떻게 인식을 ‘나’라 이름하지 않겠는가?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검은 명주를 비유로 든다면 스스로 그대의 경전을 위배하게 된다. 그대의 경전에서 검음은 속성[求那]이고 명주는 실체[陀羅驃]이다. 실체는 속성이 되지 않고 속성은 실체가 되지 않는다.
【외도】 몽둥이를 가진 자와 같네.수투로 마치 사람과 몽둥이가 합하기에 사람을 ‘몽둥이를 가진 자[有杖]’라 하지 몽둥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몽둥이가 사람과 합하는 것이지만 몽둥이를 ‘사람을 갖는 것[有人]’이라고 하지도 않고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인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이 인식이 ‘나’와 합하기에 인식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
016_0553_c_01L【불자】 그렇지 않네. 몽둥이를 가진 자는 몽둥이가 아니네.수투로 비록 몽둥이가 몽둥이를 가진 자와 합하지만 몽둥이를 가진 자가 몽둥이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인식의 특성은 인식 속에 있지 ‘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식 주체가 아니다.
【외도】 또 수론학파의 사람들[僧佉人]은 “만약 인식이 ‘나’와 상이하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전에는 그와 같은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의 특징이 있는 것을 ‘나’로 삼는다. 그러므로 항상 지각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말한다.
【외도】 그렇지 않네. 하나이면서 여러 상(相)이 되네. 마치 파리구슬과 같네.수투로 마치 한 개의 파리구슬이 색깔에 따라서 청색이나 황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으로 변하듯이 그렇듯이 한 지각이 경계[塵]에 따라서 여럿이 되어 고(苦)를 지각하거나 낙(樂)을 지각하거나 등등을 한다. 비록 지각이 여러 상이 있긴 하나 실제로는 하나의 지각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죄와 복은 동일한 상(相)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覺]이라면 이것을 복이라고 한다. 만약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각[覺]이라면 이것을 죄라고 한다. 모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이 법을 믿는다.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과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이 동일하다면 죄와 복이 동일한 상일 것이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 등이 또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가령 구슬과 같은 것은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색을 따라서 변하지만, 지각은 연(緣)과 함께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구슬은 새로 새로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상이 동일하지 않다. 그대가 구슬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결과는 여럿이지만 하나이네.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마치 한 명의 도공이 물단지나 동이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만드는 이가 하나이기 때문에 결과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하나의 지각이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행위[業]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을 행할 수 있다.
【불자】 도공은 구별[別異]이 없네.수투로 가령 도공의 몸은 하나여서 구별[異相]이 없기에 물단지나 동이 등과 다르다. 그러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이나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은 구별이 실제로 존재한다. 또 해롭게 하는 행위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은 지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4_a_01L【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하기 때문에.수투로 어떤 사물은 지각되지는 않지만 추리되기 때문에 인식된다. 마치 사람이 이미 가고 나서 이후에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나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질 때 가는 행위[去]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는 행위를 알 듯이, 그렇듯이 속성들이 실체에 의지하는 것을 본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해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와 인식[知]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 한다.
【불자】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인식하지 못할 때 ‘나’가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편재하고 광대한 데 반해 인식[知]은 적다. 만약 ‘나’가 인식[知]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곳은 몸 바깥을 말한다. 어떤 때는 몸 안을 말한다. 수면이나 기절 등 이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인식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의 특징이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는 그대의 말은 공허해서 실질이 없다.
【외도】 가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인식이 없네. 마치 연기가 그러하듯.수투로 가령 연기가 불의 특징이긴 하지만 석탄일 때는 연기가 없다. 이 때에 연기가 없지만 불은 존재한다. 그렇듯이 인식이 ‘나’의 특징이긴 하지만 인식이 있든 인식이 있지 않든 ‘나’는 항상 존재한다.
【불자】 그렇지 않네. ‘나’는 인식 주체이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존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인식 주체[能知]가 아니다. 또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대에 따르면 ‘나’가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연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 불이 존재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불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 ‘나’가 인식할 때든 인식하지 않을 때든 봄의 주체[能見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그대는 공통 표상[共相]을 보고 추리[比知]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554_b_01L가는 자는 가는 행위로써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가는 행위를 떠나서 가는 자가 다른 곳에 도달하는 일은 있지 않다. 그러기에 가는 자가 보이는데 다른 곳에 도달한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나’를 떠나서 인식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거북이를 보고서 토끼의 표상[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석녀를 보고서 아이의 표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듯이 인식을 보고서 ‘나’의 표상[神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마치 손이 잡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손이 어떤 때는 잡고 어떤 때는 잡지 않는 것과 같다. 잡지 않을 때에는 손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손은 항상 손이다. ‘나’도 그러해서 어떤 때는 인식하고 어떤 때는 인식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않을 때 ‘나’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나’인 것이다.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고통[苦]이나 쾌락[樂]을 지각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지각[覺]이 없다면, 지각이 없는 몸은 홀로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죽은 사람은 몸이 있어도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몸을 갖는 어떤 것이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외도】 그렇지 않네. 감각되는 것[觸]이 없는 것이 마치 빈 공간과 같네.수투로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는다.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안의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타지 않고 단지 뜨거움만이 있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안의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고 단지 고통만이 존재한다.
016_0554_c_01L【불자】 만약 그렇다면 가는 행위가 없네.수투로 만약 ‘나’에 감각되는 것[觸]이 없다면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행위[去法]는 의지[思惟]에서 생기고 몸의 움직임에서 생긴다. 몸에는 의지가 없다. 지각[覺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없다. 몸[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불자】 상이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장님과 절뚝발이의 경우는 두 감각[觸]과 두 의지[思惟]가 있기에 당연히 갈 수 있는 것이지만, 몸과 ‘나’는 두 가지34)가 없기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나’는) 절단된다는 과실이 있다. 또 그대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미한 뜨거움이 빈 공간에 편재하기에 몸이 감각해서 뜨거움을 인식하는 것이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한다고 임의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무상(無常)하기에 불에 타네.수투로 집이 불에 탈 때 풀과 나무 등은 무상하기에 타기도 하고 열이 나기도 한다. 빈 공간은 상주하기에 타지도 않고 열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몸은 무상하기에 고통스러워 하기도 하고 절단되기도 하지만 ‘나’는 상주하기에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고 절단되지도 않는다. 또 집주인은 불에서 멀리 있기에 불에 타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서 “‘나’는 편재한다”고 말하기에 또한 절단된다.
【외도】 반드시 ‘나’가 존재하네. 색 등을 파악하기 때문이네.수투로 5근[情]은 5경[塵]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知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나’가 눈[眼] 등을 사용해서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마치 사람이 낫을 사용해서 5곡을 베서 거두는 것과 같다.
【불자】 왜 귀를 사용해서 보지 않는가?수투로 만약 ‘나’에 능력[力]이 있다면 왜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보지 않는가? 마치 불이 탈 때 곳곳이 모두 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어떤 때는 낫 없이 손으로 베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집에 여섯 방향으로 난 창문[六向]이 있어서 사람이 그 안에 거주하면서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나’도 이와 같으니 곳곳을 볼 것이다.
016_0555_a_01L【외도】 그렇지 않네.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비록 ‘나’에 보는 능력[見力]이 있긴 하지만 눈 등이 감각하는 것[所伺]과 같지 않다. 경계가 각각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도공이 비록 물단지를 만들긴 하지만 진흙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 비록 보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눈 아닌 것을 사용해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본다면 ‘나’와 눈은 상이할 것이다. ‘나’와 눈이 상이하다면 ‘나’는 눈이 없을 것이다. ‘나’에 눈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그대가 도공의 비유를 든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진흙 없이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흙이 곧 물단지이다. 그러나 눈은 색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다른 근[情]이 작동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오는가? 그렇다면 눈을 사용해서 맛[味]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소유하는 자35)가 인식한다. 또 다음과 같다. 한 사물을 눈과 몸이 인식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령 사람이 눈을 사용해서 이전에 물단지 등을 인식한 일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비록 눈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이 감촉해서 (물단지 등을) 또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불자】 불이 태우는 것이네.수투로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妄語]이다. 왜 그러한가? 사람에게는 태움의 성질[燒相]이 없다.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가령 바람이 나무를 움직이고 서로 어울려 불을 일게 해서 (불이) 산이나 못을 태울 때 행하는 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지 사람이 태우는 것이 아니다.
016_0555_b_01L【불자】 만약 의(意)가 있다면 인식할 수 있고 의가 없다면 인식할 수 없다면, 단지 의가 눈 등의 문(門)에 작용하면 인식하는데 ‘나’를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55_b_01L內曰:若有意能知,無意不能知者,但意行眼等門中便知,神復何用?
【외도】 의(意)는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와 의가 서로 인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나’로써 의를 인식한다. 무한역행이 아니다.
016_0555_b_03L外曰:意不自知,若意、意相知,此則無窮。我神一故,以神知意,非無窮也。
【불자】 ‘나’에 또 ‘나’가 존재하네.수투로 만약 ‘나’가 의(意)를 인식한다면 누가 다시 ‘나’를 인식하겠는가? 만약 ‘나’가 ‘나’를 인식한다면 이것도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교법에 따르면 현재의 의(意)가 과거의 의(意)를 인식한다. 의[意法]는 무상하기 때문에 과오가 없다.
【외도】 왜 ‘나’를 제거하는가?수투로 만약 ‘나’를 제거한다면 어떻게 단지 의(意)만으로 대상들을 인식하겠는가?
016_0555_b_08L外曰:云何除神?修妒路 若除神,云何但意知諸塵?
【불자】 마치 불이 열을 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불이 열을 낼 때 행위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불은 스스로 열을 낸다. 열을 내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의(意)가 인식의 특징[知相]을 갖는다. 비록 ‘나’가 없긴 하지만 (意의) 본성이 인식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나’와 인식은 상이하기 때문에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습관[宿習]의 기억이 상속(相續)하기에 태어날 때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네.수투로 마치 갓난애가 슬픔과 기쁨 등의 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지만 선세의 습관[宿習]의 기억[念]이 상속하기 때문에 금세에 다시 여러 가지 행위[業]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하고 또 상주의 특징[常相]을 갖고 있다.
【불자】 편재하는 것이 어떻게 기억하는가?수투로 ‘나’는 상주하고 경계[塵]들에 편재하기에 기억하지 않을 때가 없다면, 기억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또 만약 기억이 모든 곳에서 발생하다면 기억도 모든 곳에 편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기억할 것이다. 만약 기억이 부분 부분의 장소에서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分]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나’라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고, 만약 인식이라면 ‘나’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016_0555_c_01L【불자】 비록 앞에서 이미 타파하긴 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라면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네.수투로 또 만약 기억이 발생한다면 이 때에 인식한다. 만약 기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이 인식일 터인데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나’가 존재하네. 왼쪽 것으로 보고 오른쪽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가령 사람이 전에 왼쪽 눈으로 보고 후에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때 왼쪽 눈[彼]이 보고 오른쪽 눈[此]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안에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자】 함께 두 눈으로 답하네.수투로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다. 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편재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또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다. 또 어떻게 귀로 보지 않겠는가? 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이다. 또 가령 왼쪽 눈으로 보는 것을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도 왼쪽 눈[此分]으로 보고 저 부분[彼分]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나’의 인식은 부분의 인식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하네. 몸의 행위[身業]가 그러하듯.수투로 몸의 부분인 손에 행위[所作]가 존재할 때 몸의 행위[身作]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나’는 편재하는 데 반해 의(意)는 적다. ‘나’와 의(意)가 합하기에 ‘나’의 인식이 발생한다. 이 인식과 의 등은 적다. 만약 적은 부분인 인식으로써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찌 많은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니 ‘나’를 인식 아님[不知]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그대가 몸의 행위를 비유로 든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부분[分]과 전체[有分]의 동일함과 상이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자】 불에 탄 것도 이와 같네.수투로 만약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면 ‘불에 탄 것’이라 하지 말고 ‘일부가 불에 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고 ‘불에 탄 옷’이라고 한다면 이제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으니 ‘불에 타지 않은 옷’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 옷은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설[語言]에 집착하지 말라.
【외도】 ‘나’가 존재한다. 존재ㆍ단일성ㆍ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나[神]’가 존재한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한다.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
【외도】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이 만약 동일한 것으로써 존재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556_a_15L外曰:有、一、甁等,若以一有,有何過?
016_0556_b_01L【불자】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거나 전도되네.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가령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석가[憍尸迦]의 경우 그 인다라가 있는 곳에 석가와 석가가 있듯이, 그렇듯이 존재가 있는 곳마다 단일성과 물단지가 있고 단일성이 있는 곳마다 존재와 물단지가 있고 물단지가 있는 곳마다 존재와 단일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옷 따위의 사물들도 또한 물단지일 것이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한 사물이 존재할 것이니 모두 물단지일 것이다. 이제 물단지ㆍ옷 따위의 사물들은 모두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존재가 상주하기 때문에 단일성과 물단지도 상주할 것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하는 것이다. 또 단일성이 수(數)이므로 존재와 물단지도 수일 것이다. 또 만약 물단지가 5신(身)36)이라면 존재와 단일성도 5신일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형태가 있고 질애[對]가 있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형태가 있고 질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무상하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무상할 것이다. 이것을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한다”의 내용이다.
만약 곳곳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곳곳의 물단지 이것에도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사물 사물[事事]의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지금의 물단지는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할 때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이제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한다 해도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물단지도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의 내용이다. 만약 물단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존재를 말해야 하고 존재를 말하고자 한다면 물단지를 말해야 한다. 또 그대에 따르면 물단지가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와 단일성도 성립하고, 존재와 단일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물단지도 성립한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전도된다’의 내용이다. 여기서 네 쪽에 걸쳐서 단어를 풀이하고 있는데 번역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외도】 사물은 존재와 단일성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사물은 존재이고 또한 단일성이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한다.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하는 곳이 모두 물단지인 것은 아니다. 또 만약 물단지를 말할 때 이미 존재와 단일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와 단일성을 말할 때 반드시 물단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외도】 물단지 속에 물단지의 존재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수투로 물단지 속의 물단지의 존재는 물단지와 상이하지 않지만 옷 등의 사물들과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이곳 저곳의 물단지 이것에 물단지의 존재가 존재하고 또한 이곳 저곳의 물단지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이곳 저곳의 존재가 존재하는 곳에 물단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016_0556_c_01L【불자】 그렇지 않네. 물단지와 존재는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존재는 보편[總相]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믿고 만약 물단지를 말한다면 옷 등의 사물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특수[別相]이고 존재는 보편인데 어떻게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외도】 물단지가 존재하네. 모두 믿기 때문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물단지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한다.
016_0556_c_09L外曰:應有甁,皆信故。修妒路
世人眼見,信有甁用,是故應有甁。
【불자】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에 모든 것이 없네.수투로 만약 물단지와 존재가 상이하지 않다면 물단지는 보편이지 특수가 아닐 것이다. 특수가 없기 때문에 보편도 없다. 특수가 있기 때문에 보편이 있는 것이다. 만약 특수가 없다면 보편이 없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없다.
【외도】 그렇지 않네. 많은 원인에서 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네. 색 등이 물단지이듯이.수투로 부분인 색 등의 많은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단지 색만을 물단지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색이 없을 때 물단지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분인 색 등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분인 발 등과 몸도 이와 같다.
【불자】 색 등이 그렇듯 물단지도 동일한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다섯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한다면 부분인 색 등도 또한 동일한 것이리라. 색 등과 물단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군대와 숲과 같네.수투로 코끼리ㆍ말ㆍ수레ㆍ보병 많은 것들이 합하기 때문에 군대라 한다. 또 소나무ㆍ잣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합하기 때문에 숲이라 한다. 소나무만을 숲이라고 하지도 않지만 소나무가 없어도 숲이라고 하지 않는다. 군대도 그러하다. 그렇듯이 색 하나를 물단지라고 하지도 않지만 색이 없어도 물단지라고 하지 않는다.
【불자】 무리[衆]도 또한 물단지와 같네.수투로 만약 소나무과 잣나무 등이 숲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숲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숲이라고 말한다면 소나무와 잣나무 등도 하나일 것이다. 숲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마디ㆍ꽃ㆍ잎 같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또한 군대 등과 같은 모든 사물도 다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016_0557_b_01L【외도】 결과가 존재하네. 원인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존재하기에 결과가 성립하네.수투로 그대는 물단지라는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지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인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결과가 존재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은 극미[微塵]의 결과이다. 그대가 색 등을 인정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성립한다.
【불자】 결과가 존재하지 않듯이 원인도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물단지는 색 등 많은 부분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물단지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이제 색 등 많은 부분들은 물단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색 등은 수다한 것[多]이 아니다. 또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결과가 타파되었기 때문에 원인도 저절로 타파된다.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세38)가 동일한 것이 되네.수투로 또 진흙덩어리[泥團]일 때는 현재이고 물단지일 때는 미래이고 진흙[土]일 때는 과거이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진흙덩어리 속에 물단지와 진흙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가 동일한 것이 된다. 이미 만든 것[已作], 지금 만들고 있는 것[今作], 앞으로 만들 것[當作], 만드는 자[作者] 이와 같은 말들이 없어지게 된다.
【불자】 다른 것에 의존하기에, 상반되기에,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에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또한 짦은 것 속에도 둘 속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긺[長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긴 것[長] 속에 존재하거나 잛은 것 속에 존재하거나 둘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짧은 것에 의존하기에 긴 것이라 한다. 짧은 것 속에도 또한 긺[長性]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반되기 때문이다. 만약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면 짧은 것이라 하지 않는다. 긴 것과 짧은 것 둘 속에도 또한 긺[長]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과실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짧음[短相]도 또한 이와 같다. 긺과 짦음이 존재하지 않은데 어떻게 서로 의존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