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0548_a_01L백론서(百論序)

석승조(釋僧肇) 지음
016_0548_a_01L百論序 釋僧肇作

『백론(百論)』이란 성인의 마음에 통하는 나루이자 길[津塗]이고 진제(真諦)를 여는 중요한 논서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800여년에 출가한 대사(大士)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제바(提婆)이다. 현묘한 마음[玄心]을 뛰어나게 깨닫고 고상한 기개[儁氣]는 높고 밝았으며, 도(道)는 당시(當時)를 비추고 정신[神]은 세상 밖[世表]을 초월했다. 그러므로 삼장(三藏)의 중첩한 관문[重關]을 열고 십이(十二)1)의 깊은 길[幽路]을 평탄하게 할 수 있어 가이라국[迦夷]2)에서 마음껏 걷고 법(法)의 성곽과 해자[城塹]가 되었다.
당시에 외도(外道)가 어지럽게 일어나고 이단(異端)이 다투어 일어나며 삿된 변론[邪辯]이 진리를 핍박하여 정도(正道)를 거의 어지럽히게 되었다. 이에 위로는 성인의 가르침[聖教]이 점차 쇠퇴함을 개탄하고 아래로는 뭇 미혹한 이들[群迷]이 방종하고 미혹함[縱惑]을 슬퍼하여 침윤(沈淪)한 이들을 멀리 건지려고 이 논을 지었으니 바름을 지키고[防正] 삿됨을 막아[閑邪] 종극(宗極)을 크게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른 교화[正化]가 이것 때문에 융성하고 삿된 도[邪道]가 이것 때문에 사라졌다. 뭇 오묘함[眾妙]을 거느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016_0548_a_02L百論者蓋是通聖心之津塗開眞諦之要論也佛泥日後八百餘年有出家大士厥名提婆玄心獨悟儁氣高道映當時神超世表故能闢三藏之重關坦十二之幽路擅步迦夷法城塹于時外道紛然異端競起辯逼眞殆亂正道乃仰慨聖教之陵俯悼群迷之縱惑將遠拯沈淪故作斯論所以防正閑邪大明於宗極者矣是以正化以之而隆邪道以之而替非夫領括衆妙孰能若斯
016_0548_b_01L논에 백 개의 게송이 있기 때문에 백(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치(理致)가 깊고 그윽하여 뭇 서적의 핵심을 거느리고 글의 뜻[文旨]이 아름답고 요약되어 제작(制作)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뜻[至趣]은 그윽하고 간략하여 그 문(門)을 얻은 이가 적다.바수(婆藪)3) 개사(開士)는 밝은 지혜가 안으로 융통하고 오묘한 생각이 기특하게 빼어났다. [제바의] 현묘한 자취[玄蹤]에 깊게 계합하여 훈석(訓釋)을 지어, 가라앉고 숨은 뜻을 아름다운 글[徽翰]에 빛나게 하며, 풍미(風味)를 펼쳐 흐르게 하여 후세[來葉]에 입혔다. 문장[文藻]은 환하게 빛나고 중요한 도리[宗塗]는 깨닫기 쉽다. 그 논은 말하되 치우침이 없고 파하되 집착함이 없다. 무심하여 의거함[據]이 없기에 일은 참됨을 잃지 않고 삼가고 기대는 것[寄]이 없기에 이치가 저절로 현묘하게 회통하여 근본으로 돌아가는 도가 이에 드러나게 되었다.
천축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은 기량(器量)이 깊고 넓으며 빼어난 정신[俊神]은 멀리 초월하였으며, 연찬하고 우러르기를 여러 해를 하여 점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고,항상 이 논을 맛보고 읊조려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먼저 친히 번역하였으나 방언(方言)이 아직 융통하지 못하여 생각하고 뜻을 찾는 사람들[思尋]로 하여금 틀린 문장에서 주저하게 하며, 수행 계위를 표방하는 사람들[標位]로 하여금 돌아가 이를 곳[歸致]에서 어긋나게 하였다.
016_0548_a_13L論有百偈故以百爲名理致淵玄統群籍之要文旨婉約窮制作之美然至趣幽簡尟得其門有婆藪開士者明慧內融妙思奇拔遠契玄蹤爲之訓釋使沈隱之義彰於徽翰風味宣流於來葉文藻煥然宗塗易曉其爲論言而無當破而無執儻然靡據事不失眞蕭焉無寄而理自玄會本之道著乎茲矣有天竺沙門鳩摩羅什器量淵弘儁神超邈鑽仰累年轉不可測常味詠斯論以爲心要雖親譯而方言未融至令思尋者躇於謬文摽位者乖迕於歸致
대진(大秦) 사예교위(司隷校尉)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은 풍운(風韻)은 맑게 펴지고 충심(沖心)은 간략하고 뛰어나며, 내외(內外)를 널리 섭렵하고 이사(理思)는 겸하여 통달하였다. 어릴 적부터 대도(大道)를 좋아하고 자라서는 더욱 독실하였다. 비록 시무(時務)에 얽매여 있었으나 법언(法言)을 그치지 않고 매번 이 글을 어루만져 개탄한 바가 참으로 많았다. 홍시(弘始) 6년 세차(歲次) 수성(壽星)에 이치를 아는 사문을 모아 구마라집과 함께 정본(正本)을 상고하여 정제하고 반복해서 논변하였다. 논의 뜻을 힘써 보존하여 바탕[質]을 보존하되 조야하지 않게 하고 간략하되 반드시 이치에 부합하게 하니 종치(宗致)가 극진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흠잡을 것이 없게 되었다. 논은 모두 20품이고 품에는 각기 다섯 개의 게송이 있다. 뒤의 10품은 그 사람이 이 땅에 무익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빼버리고 전하지 않았다. 밝고 식견이 있는 군자들이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016_0548_b_04L大秦司隸挍尉安成侯姚嵩風韻淸舒心簡勝博涉內外理思兼通少好大長而彌篤雖復形羈時務而法言不輟每撫茲文所慨良多以弘始六年歲次壽星集理味沙門與什考挍正本陶練覆疏務存論旨使質而不簡而必詣宗致盡爾無閒然矣凡二十品品各五偈後十品其人以爲無益此土故闕而不傳冀明識君詳而攬焉
016_0548_b_14L
백론(百論) 상권
016_0548_b_14L百論卷上

제바보살(提婆菩薩)지음
바수개사(婆藪開士)풀이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016_0548_b_15L提婆菩薩造
婆藪開士釋
姚秦三藏鳩摩羅什 譯

1. 죄와 복을 버리는 장[捨罪福品]
016_0548_b_17L捨罪福品第一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립니다.
자비로우신 세존께서 무량한 겁 동안 온갖 고를 짊어지셨고
번뇌가 이미 끊어지셨으며 습기 또한 제거되셨기에
범천[梵]ㆍ제석천[釋]ㆍ용(龍)ㆍ천신이 모두 경배드립니다.
016_0548_b_18L頂禮佛足哀世尊
於無量劫荷衆苦
煩惱已盡習亦除
梵釋龍神咸恭敬

또 위없이 세상을 비추는 법으로,
흠과 더러움을 청정하게 하고 희론(戱論)을 그치게 하는
부처 세존들의 말씀과
공양받을 만한 이들[應眞僧]인 여덟 현성[八輩]1)께 예를 올립니다.
016_0548_b_20L亦禮無上照世法
能淨瑕穢止戲論
諸佛世尊之所說
幷及八輩應眞僧

【외도】2) 게송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이 세존인가?
016_0548_b_22L外曰偈言世尊之所說何等是世尊
【불자】3) 그대는 왜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가?
016_0548_b_23L內曰汝何故生如是疑
016_0548_c_01L【외도】 여러 가지로 세존의 상(相)을 말하기에 의심을 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뉴천(葦紐天)4)진(秦)에서는 편승천(徧勝天)이라 한다.5)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6)진(秦)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 한다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가비라(迦毘羅)7)ㆍ우루가(優樓迦)8)ㆍ늑사바(勒沙婆)9)를 다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붓다만을 세존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016_0548_c_01L外曰種種說世尊相故生疑有人言葦紐天秦言遍勝天名世尊又言摩醯首羅天秦言大自在天名世又言迦毘羅優樓迦勒沙婆等仙人皆名世尊汝何以獨言佛爲世尊是故生疑
【불자】 붓다께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명료하게 장애 없이 아시며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붓다만을 세존이라 하는 것이다.
016_0548_c_06L內曰佛知諸法實相明了無㝵又能說深淨法是故獨稱佛爲世尊
【외도】 다른 지도자[導師]들도 모든 법을 명료하게 알고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한다. 가령 가비라의 제자는 『승거경(僧佉經)』10)을 암송해서 선법(善法)들의 보편상[總相]과 특수상[別相]을 말한다. 25제(諦) 중에서 청정한 지각[覺]의 요인들을 선법이라고 한다. 가령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11)을 암송해서 “6제(諦)12) 중에서 구나제(求那諦)13)에 의해서 하루에 세 번 목욕하고 두 번 불을 공양(供養) 하는 등의 화합에 의해서 ‘나’[神]의 일부분인 선법을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늑사바의 제자는 『니건자경(尼乾子經)』14)을 암송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굽고 삭발하는 등의 고통을 받는데 이것을 선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논사들은 스스로 단식을 행하고 호수에 몸을 던지고 불에 뛰어오르고 스스로 높은 산에서 떨어지고 말을 하지 않고서 항상 서 있고 우계(牛戒)를 지키는 등 이것을 선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심오하고 청정한 법인데 왜 붓다만이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가?
016_0548_c_08L外曰諸餘導師亦能明了諸法亦能說深淨法如迦毘羅弟子誦『僧佉經』說諸善法摠相別相於二十五諦中淨覺分是名善法優樓迦弟子誦『衛世師經』言於六諦求那諦中日三洗再供養火等和合生神分善勒沙婆弟子誦『尼乾子經』言五熱炙身拔髮等受苦法是名善法又有諸師行自餓法投淵赴火自墜高巖寂默常立持牛戒等是名善法如是皆是深淨法何以言獨佛能說耶
【불자】 이것은 다 그릇된 견해[邪見]이어서 바른 견해[正見]을 뒤엎기 때문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016_0548_c_18L內曰是皆邪見覆正見故不能說深淨法是事後當廣說
【외도】부처님은 어떤 선법(善法)을 말하는가?
016_0548_c_20L外曰佛說何等善法相
016_0549_a_01L【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선을 행하는 법(法)이네수투로(修妬路)15)
부처님께서는 대략 두 종류의 선법을 말씀하셨다. ‘그치게 하는 것’[止相]과 ‘행하는 것’[行相]이다. 모든 악들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모든 선을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악이라 하는가? 몸[身]을 그릇되게 행해하는 것, 입[口]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생각[意]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살생ㆍ도둑질ㆍ음행(淫行)이다.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이다. 생각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탐욕[貪]ㆍ증오[瞋惱]ㆍ그릇된 견해[邪見]이다. 또 10불선도(不善道)에 포함되지 않는 매질ㆍ몽둥이질ㆍ묶는 일ㆍ가두는 일 따위가 있다. 그리고 십불선도 앞뒤의 여러 가지 죄를 악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는가? 악을 그치게 해서 짓지 않는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기거나 입으로 말하거나 계를 받거나 해서 오늘부터 다시는 결코 짓지 않겠다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선이라 하는가?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 합장하는 일, 절을 드리는 일 등이다.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진실한 말, 적절한 말, 부드러운 말, 이익을 주는 말이다.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자(慈)와 비(悲), 바르게 봄[正見] 등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청정한 법을 선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 선법을 믿고 받아들이며 수습(修習)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016_0548_c_21L內曰惡止善行法修妒路
佛略說善法二種止相行相息一切惡是名止相修一切善是名行相何等爲惡身邪行口邪行意邪行妄言兩舌惡口綺語瞋惱邪見復有十不善道所不攝鞭杖繫閉等及十不善道前後種種罪是名爲惡何等爲止息惡不作若心生若口語若受戒從今日終不復作是名爲止何等爲善身正行口正行意正行迎送合掌禮敬等實語和合語軟語利益語慈悲正見等如是種種淸淨法是名善法何等爲行於是善法中信受修習是名爲行
【외도】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서두에 길상[吉]16)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논사들이 경전을 저술하는 법이 서두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이해하기 쉽고 진리의 소리[法音]가 널리 퍼진다. 만약 지혜가 있는 이가 독송하고 기억해서 알아 둔다면 수명이 늘고 위덕(威德)이 있으며 존중을 받게 된다. 가령 『바라하파제(婆羅呵婆帝)』17) 진(秦)에서는 『광주경(廣主經)』이라 한다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전 등에서는 처음에 모두 길상[吉]을 말한다. 최초가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도 최후도 길상하다. 그대의 경전은 처음에 악을 말하기 때문에 길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하고 말한 것이다.
016_0549_a_11L外曰經有過初不吉故修妒路
諸師作經法初說吉故義味易解法音流布若智人讀誦念知便得增壽威德尊重有經名『婆羅呵波帝』秦言『廣主經』如是經初皆言吉以初吉故中後亦吉經初說惡故是不吉是以言汝經有
【불자】 그렇지 않네. 그릇된 봄[邪見]을 끊기 위해 이 경을 말하는 것이네.수투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릇된 봄[邪見]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길상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만약 조금이라도 길상이 있다면 경전의 초두에 길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는 실제로는 길상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한 사태를 두고 이 사람은 ‘길상하다’ 하고 저 사람은 ‘길상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길상한 것도 아니고 길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한다.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상함이 없는 것이다. 그대 어리석은 이는 방편 없이 억지로 즐거움을 구하길 바라고 허망하게 기억과 표상을 일으켜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016_0549_a_18L內曰不然斷邪見故說是經修妒路
是吉是不吉此是邪見氣是故無過
復次無吉故修妒路
若少有吉經初應言此實無吉何以故是一事此以爲彼以爲不吉或以爲非吉非不吉不定故無吉汝愚人無方便强欲求樂妄生憶想言是事吉是事不吉
016_0549_b_01L 자기와 타자와 양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이 길상함[吉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법은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자성[自相]이 없으므로 타성[他相] 또한 없다. 또 무한역행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 다시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모두18)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발생[生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것,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길상함[吉事]이 없다.
016_0549_b_01L復次共不可得故修妒路
是吉法不自生何以故無有一法從自己生亦二相過故一者二者能生不從他生自相無故他相亦無復次無窮故以生更有生故亦不共生俱過故凡生法有三種是三種中求不可得是故無吉事
【외도】 이 길상함은 자기에게서 발생하니 마치 소금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소금의 자성인 짠 맛이 다른 사물을 짜게 하는 것과 같다. 길상함도 이와 같아서 자성이 길상함이 다른 사물을 길상하게 한다.
016_0549_b_08L外曰吉自生故如鹽修妒路
譬如鹽自性醎使餘物醎吉亦如是自性吉能使餘物吉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기 때문이네. 또 소금의 성질[相]은 소금 속에 머물 러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앞에서 자성(自性)으로서 발생하는 법은 있지 않다고 하며 (이를) 타파했다. 또 그대의 의도는 소금은 인과 연들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은 자성(自性)으로서 짠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그대의 말로 그대의 말을 타파해 보겠다. 소금이 다른 사물과 합한다 하더라도 사물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소금의 성질은 소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의 성질은 말의 성질이 아닌 것과 같다.
016_0549_b_11L內曰前已破故亦鹽相鹽中住修妒路
我先破無有法自性生復次意謂鹽從因緣出是故鹽不自性醎我不受汝語今當還以汝語破汝所鹽雖他物合物不爲鹽鹽相鹽中住故譬如牛相不爲馬相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등불이 이미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추듯이 길상함도 이와 같다. 자기를 길상하게 하고 또한 길상하지 않은 것도 길상하게 한다.
016_0549_b_16L外曰如燈修妒路
譬如燈旣自照亦能照他吉亦如自吉亦能令不吉者吉
【불자】 등불 자체에도 다른 것에도 어둠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 왜 그러한가? 빛[明]과 어둠은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에는 비추는 작용[能照]이 없다. (어둠이 없기에 어둠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춤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은 자기를 비추지 않는다. 비춤을 받는 장소에도 또한 비춤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비출 수 없다. 어둠을 타파하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을 타파하는 일이 없기에 비춤이 아니다.
016_0549_b_18L內曰燈自他無闇故修妒路
燈自無闇何以故明闇不竝故燈亦無能照不能照故亦二相過故能照受照是故燈不自所照之處亦無闇是故不能照他以破闇故名照無闇可破故非照
016_0549_c_01L【외도】 처음에 발생할 때 둘 모두를 비추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등불이 먼저 발생하고 나서 이후에 비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발생할 때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춘다.
016_0549_b_23L初生時二俱照故修妒路
我不言燈先生而後照初生時自照亦能照他
【불자】 그렇지 않네. 한 법(法)에서 유와 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처음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반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은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하물며 어떻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추는 일이 있겠는가? 또 한 법이 어떻게 유이고 무이겠는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등불이 이미 발생했든 아직 발생하지 않았든 모두 어둠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질[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어둠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016_0549_c_02L不然一法有無相不可得故修妒路
生時名半生半未生生不能照如前何況未生能有所照復次一法云何亦有相亦無相
復次不到闇故修妒路
燈若已生若未生俱不到闇性相違燈若不到闇云何能破闇
【외도】 마치 주술이나 별과 같기 때문이네.수투로
멀리서 먼 데 있는 사람에게 주술을 걸어 괴롭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하늘에서 별이 변해서 사람을 길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등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어둠에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
016_0549_c_08L外曰呪星故修妒路
若遙呪遠人能令惱亦如星變在天令人不吉燈亦如是雖不到闇而能破闇
【불자】 실제를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등불에 힘이 있어서 어둠에 도달하지 않아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면, 인도[天竺]에서 등불을 켰을 때 어찌 중국[振旦]의 어둠이 타파되지 않겠는가? 주술과 별의 힘이 먼 곳에 미칠 수 있듯이 등불이란 사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처음에 길상하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네.수투로
또 만약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을 말한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때도 길상하다면 그대가 처음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 허위의 말[妄語]가 되고 말 것이다.
016_0549_c_11L內曰太過實故修妒路
燈有力不到闇而能破闇者何不天竺然燈破振旦闇如呪星力能及遠而燈事不爾是故汝喩非也
復次初吉餘不吉修妒路
若經初言吉餘應不若餘亦吉汝言初吉者是爲妄語
【외도】 처음에 길상하기에 다른 때도 길상하네.수투로
처음에 길상의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때도 길상하다.
016_0549_c_16L外曰初吉故餘亦吉修妒路
初吉力故亦吉
【불자】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네.수투로
그대가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함을 말한다면 많은 것이 길상하지 않음이 된다.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 때문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고 말 것이다.
016_0549_c_18L內曰不吉多故吉爲不吉修妒路
經初言吉則多不吉以不吉多故吉爲不吉
【외도】 마치 코끼리19)의 손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코끼리는 손을 갖고 있기에 ‘손을 갖고 있는 것[有手]’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눈과 귀와 머리 따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눈과 귀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부분의 길상함에 힘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의 길상하지 않음을 길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016_0549_c_20L外曰如象手修妒路
譬如象有手故名有手不以有眼頭等名爲有眼如是以少吉力故令多不吉爲吉
016_0550_a_01L【불자】 그렇지 않네. 코끼리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다면 머리와 발 등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부분[分] 속에 전체[有分]가 갖추어져 있다면 어찌 머리 속에 발이 있지 않겠는가? 다름[異]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지 않다면 그래도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체가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그대로 발일 것이다. 둘20)은 코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함[一]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길상함[吉事]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최초에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과 최후도 길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16_0549_c_23L內曰不然無象過故修妒路
若象與手異頭足等亦異如是則無別象若分中有分具者何不頭中有足破異中說若象與手不異者亦無別若有分與分不異者頭應是足事與象不異故如破一中說如是吉事種種因緣求不可得云何言初吉中後亦吉
【외도】 악을 그치게 한다 할 때 ‘그치게 한다’는 것은 좋은 일[妙]이다. 어떻게 처음에 두지 않는가?
016_0550_a_07L外曰惡止止妙何不在
【불자】 수행자는 반드시 먼저 악을 알고 난 이후에 그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악을 앞에 두고 그치게 한다는 것을 뒤에 둔 것이다.
016_0550_a_08L內曰行者要先知惡然後能止故先惡後止
【외도】 선행을 처음에 두어야 하네. 좋은 과보가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모든 선법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수행자는 좋은 과보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 선행을 말하고 뒤에 악을 그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016_0550_a_09L外曰善行應在初有妙果故修妒路
諸善法有妙果行者欲得妙故止惡如是應先說善行後說惡
【불자】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거친 번뇌[鹿垢]를 제거하고 다음에 미세한 번뇌를 제거한다. 만약 수행자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면 선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후에 선법을 배이게 한다. 비유하면 옷을 빨 때 먼저 거친 때[鹿垢]를 제거한 이후에 물을 들일 수 있는 것과 같다.
016_0550_a_12L內曰次第法故先除麤垢次除細若行者不止惡不能修善是故先除麤垢後染善法譬如浣衣先去垢然後可染
【외도】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했으니 다시 선행을 말할 필요가 없다.
016_0550_a_15L外曰已說惡止不應復言善行
【불자】 보시 등은 선행이기 때문이네.수투로
보시는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또 가령 큰 보살은 먼저 악을 그치게 하고 4무량심(無量心)을 행한다.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다른 이의 목숨을 수호하는 일은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016_0550_a_16L內曰布施等善行故修妒路
布施是善行非是惡止復次如大菩薩惡已先止行四無量心憐愍衆生守護他是則善行非止惡
【외도】 보시는 인색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는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016_0550_a_19L外曰布施是止慳法是故布施應是止惡
016_0550_b_01L【불자】 그렇지 않다. 만약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면 보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 된다. 또 번뇌[漏]들이 멸진했을 때 사람의 인색함과 탐욕은 이미 멸진한 것이다. 보시할 때에 어떻게 악을 그치게 하겠는가? 혹은 어떤 이는 보시를 행하긴 하지만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하지는 않는다. 설사 (보시를 행하는 것이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보시는 선행이다.
016_0550_a_20L內曰不然若不布施便是惡者諸不布施悉應有罪復次諸漏盡人慳貪已盡布施時止何惡或有人雖行布施慳心不縱復能止然以善行爲本是故布施是善行
【외도】 이미 선행을 말했으니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곧 선행이기 때문이다.
016_0550_b_02L外曰已說善行不應說惡何以故惡止卽是善行故
【불자】 그치게 하는 것의 특징[相]은 ‘멈추게 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의 특징은 ‘짓는 것[作]’이다. 특징[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말하는 것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포함하지 않는다.
016_0550_b_03L內曰相息行相作性相違故是故說善行不攝惡止
【외도】 이것은 실제로 그러하다. 나는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선법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약 선행을 말했다면 굳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016_0550_b_05L外曰是事實爾我不言惡善行是一相但惡止則是善法故若言善行不應復言惡止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을 말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계(戒)를 받을 때 악들을 멈추게 하는 것을 이른다. 선행은 선법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단지 선행의 복을 말할 뿐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계를 받아서 악을 그치게 할 때 불선(不善)의 심(心)이든 무기(無記)의 심이든 이 때 선(善)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또한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그치는 일을 말해야 하고 또 선행도 말해야 한다.
016_0550_b_07L內曰說惡止善行何以故惡止名受戒時息諸惡善行名修習善法若但說善行福不說惡止者有人受戒惡止心不善若心無記是時不行善故應有福是時惡止故亦有福是故應說惡止亦應說善行
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은 중생의 의도[意]를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로 나누셨네. 하급과 중급과 상급의 사람이 갖고 있는 보시와 지계와 지혜이네.수투로
수행자는 세 부류가 있다. 하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중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고, 상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가르친다. 보시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재물을 버리는 일에 상응하는 사업(思業)ㆍ신업(身業)ㆍ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을 이른다. 지계는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 속에 생기거나 계를 받을 때 오늘부터 다시는 세 가지의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네 가지의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을 짓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모든 법상(法相)들에 심(心)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 하급ㆍ중급ㆍ상급을 말하는가? 이익의 차이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보시하는 이는 이익이 작기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계를 지키는 이는 이익이 중간 정도이기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지혜가 있는 이는 이익이 가장 높기에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또 보시의 과보는 가장 낮고 지계의 과보는 중간이고 지혜의 과보는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급ㆍ중급ㆍ상급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016_0550_b_13L是惡止善行法隨衆生意故佛三種分別下中上人修妒路
行者有三種下智人教布中智人教持戒上智人教智慧施名利益他捨財相應思及起身口持戒名若口語若心生若受戒今日不復作三種身邪行四種口邪智慧名諸法相中心定不動何以說下中上利益差降故布施者少利是名下智持戒者中利益是名中智慧者上利益是名上智復次報下戒報中智報上是故說下中上
016_0550_c_01L【외도】 보시하는 이는 모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外曰布施者皆是下智不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보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보시를 행하는 이는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이른다.
016_0550_c_02L內曰何以故施有二種一者不淨二者淨行不淨施是名下智人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보시라 하는가?
016_0550_c_04L外曰何等名不淨施
【불자】 과보를 위한 보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기 때문에.수투로
과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세의 과보[現報]와 후세의 과보[後報]이다. 현세의 과보란 명예[稱敬]와 존중[敬愛] 등이고, 후세의 과보란 후세의 부귀 등인데,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과보라 한다. 왜 그러한가? 바꾸어서 얻고자 하기 때무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팔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멀리서 다른 지방에 도착해서 비록 잡다한 물건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지만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있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업(業)은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보시해서 과보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016_0550_c_05L內曰爲報施是不淨如市易故修妒路
報有二種現報後報現報者名稱敬愛等後報者後世富貴等名不淨施所以者何還欲得故譬如賈客遠到他方雖持雜物多所饒益然非憐愍衆生以自求利故是業不布施求報亦復如是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보시라 하는가?
016_0550_c_11L外曰何等名淨施
【불자】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존중하면서 이익되게 하고자 금세와 후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고 보살들과 상급의 사람들과 같이 청정한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을 청정한 보시라고 한다.
016_0550_c_12L內曰若人愛敬利益他故不求今世後世報如衆菩薩及諸上人行淸淨施是名淨施
【외도】 계를 지키는 이는 모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016_0550_c_14L外曰持戒皆是中智人不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계를 지키는 일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이를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016_0550_c_15L內曰不然何以故持戒有二一者不淨二者不淨持戒者中智人
【외도】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인가?
外曰何等不淨持戒
【불자】 계를 지켜서 즐거움의 과보를 구하네.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수투로
즐거움의 과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계(人界)에서 부귀를 받는 것이다. 계를 지켜서 천계에서 천녀(天女)와 즐거이 놀기를 바라거나, 인계에서 다섯 욕계의 즐거움[欲樂]을 받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란 안으로는 다른 색(色)을 욕구하면서 바깥으로는 친해서 사이가 좋은 척하며 속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이 난타에게 말했다.
016_0550_c_17L內曰戒求樂報爲婬欲故如覆相修妒路
樂報有二種一者生天二者人中富貴持戒求天上與天女娛樂若人中受五欲樂所以者何爲婬欲故如覆相者內欲他色外詐親善是名不淨持戒如阿難語難陁
016_0551_a_01L
마치 숫양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네.
앞의 것을 갖고서 다시 버리네.
그대가 계를 지키고자 하나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네.
016_0550_c_23L如羝羊相觸
將前而更卻
汝爲欲持戒
其事亦如是

몸은 비록 계를 지키나
마음은 탐욕에 이끌리네.
이 업(業)이 청정하지 않거늘
이 계(戒)를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51_a_02L身雖能持戒
心爲欲所牽
斯業不淸淨
何用是戒爲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계라고 하는가?
016_0551_a_03L外曰何等名淨持戒
【불자】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법은 계(戒)가 근본이다. 계를 지키는 이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으니 환희한다. 환희하니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즐거우니 한 마음[一心]을 얻는다. 한 마음을 얻으니 진실한 지혜가 생긴다. 진실한 지혜가 생기니 싫어함을 얻는다. 싫어함을 얻으니 탐욕을 벗어난다. 탐욕을 벗어나니 해탈을 얻는다. 해탈하니 열반을 얻는다. 이것이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016_0551_a_04L內曰行者作是一切善法戒爲根本持戒之人則心不悔不悔則歡喜歡喜則心樂樂得一心一心則生實智實智生則得厭得厭則離欲離欲得解脫解脫得涅槃是名淨持戒
【외도】 만약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면 울타라가(鬱陀羅伽)ㆍ아라라(阿羅邏)21) 등이 최상이네.수투로
만약 지혜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말한다. 이제 울타라가와 아라라 외도(外道) 등이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가 된다.
016_0551_a_09L外曰若上智者鬱陁羅伽等爲上修妒路
若行智人是名上智今鬱陁羅伽阿羅邏外道等爲上智人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지혜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016_0551_a_12L內曰不然何以故智亦有二種一者不淨二者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지혜라고 하는가?
016_0551_a_13L外曰何等名不淨智
【불자】 세간[世界]에 계박되기에 청정하지 않네. 마치 원수가 와서 친구가 되는 것과 같네.수투로
세간의 지혜는 생사(生死)를 증대[增長]하게 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지혜는 되돌아가서 계박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원수가 처음에는 친구인 척 속이다가 오래되면 해를 끼치는 것과 같다. 세간의 지혜도 또한 이러하다.
016_0551_a_14L內曰爲世界繫縛故不淨怨來親修妒路
世界智能增長生死所以者何此智還繫縛故譬如怨家初詐親附久則生害世界智亦如是
【외도】 단지 이 지혜만이 생사를 증대하는가? 보시와 지계도 그러한가?
016_0551_a_17L外曰但是智能增長生死施戒亦爾耶
【불자】 복(福)을 취하고 악을 버리네. 이것들은 유행(流行)하게 하는 법이네.수투로
복은 복의 과보를 말한다.
016_0551_a_18L取福捨惡是行法修妒路
名福報
【외도】 만약 복이 복의 과보를 말한다면 왜 수투로(修妬路)에서 단지 복만을 말하는가?
016_0551_a_19L若福名福報者何以修妒路中但言福
016_0551_b_01L【불자】 복은 원인이고 복의 과보는 결과이다. 어떤 때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하고 어떤 때는 결과로서 원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천량의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금으로 인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림을 보고 손재주가 좋다[好手]고 말하는 것과 같다.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다고 한다. ‘취한다’란 집착한다는 것이니, 복의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행[行]이란, 사람을 항상 생사에 유행하게 하는 것이다.
016_0551_a_21L內曰名因福報名果或說因爲果或說果爲因此中說因爲果如食千兩金金不可食因金得食名食金又如見畫言是好手因手得故名好手名著著福報惡先已名將人常行生死中
【외도】 어떤 것들이 유행(流行)하지 않는 법인가?
016_0551_b_03L外曰何等是不行法
【불자】 둘 모두를 버리는 것이다.수투로
‘둘’이란, 복의 과보와 죄의 과보를 말한다. ‘버린다’란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복에 집착하지 않으면 다시 5도(道)22)에 왕래23)하지 않는다. 이것을 유행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016_0551_b_04L內曰俱捨修妒路
名福報名心不著心不著福不復往來五是名不行法
【외도】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하네. 과보가 좋기 때문이네. 또 인연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복의 과보는 좋아서 모든 중생들은 항상 좋은 과보를 구한다. 그러니 왜 버려야 하겠는가? 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대는 지금 이유[因緣]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복을 버릴 필요가 없다.
016_0551_b_06L外曰福不應捨以果報妙故亦不說因緣故修妒路
諸福果報妙一切衆生常求妙果云何可捨又如佛言諸比丘於福莫畏汝今又不說因緣是故不應捨福
【불자】 복이 소멸했을 때 괴로움이 있네.수투로
‘복’이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소멸은 상실하고 괴멸하는 것을 말한다. 복의 과보가 소멸할 때 즐거운 일이 없어지게 되어 큰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길 때 즐겁고 머물고 있을 때 즐겁지만 소멸할 때는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버려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 복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도(助道)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복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하물며 어찌 죄를 버리지 않겠는가?
016_0551_b_10L內曰福滅時苦修妒路
名福報名失壞福報滅時所樂事生大憂苦如佛說樂受生時住時樂滅時苦是故應捨福又如佛言於福莫畏者助道應行故如佛說福尚應捨何況罪
【외도】 죄와 복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대가 복이 소멸할 때 괴롭다고 말한다면 죄가 생기고 머물 때는 즐거울 것이다.
016_0551_b_15L外曰罪福相違汝言福滅時苦者罪生住時應樂
【불자】 죄가 머물 때는 괴롭네.수투로
‘죄’란 죄의 과보를 말한다. 죄의 과보가 생길 때 괴롭거늘 하물며 어찌 머물 때 괴롭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괴롭고 머물 때 괴롭고 소멸할 때 즐겁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대가 “죄와 복은 상반되기에 죄가 생길 때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그대는 어찌 죄와 복이 상반되기에 죄가 소멸할 때 즐겁고 생길 때와 머물 때는 괴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016_0551_b_16L內曰罪住時苦修妒路
名罪報罪報生時苦何況住時如佛說苦受生時苦住時苦滅時樂汝言罪福相違故生時應樂者今當答汝何不言福罪相違故罪滅時樂生住時苦
016_0551_c_01L【외도】 상주함의 복에는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에 버리지 않아야 하네.수투로
그대가 복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소멸할 때 괴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상주함의 복의 과보에는 소멸할 때의 괴로움이 없으니 버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마사(馬祀)24)를 행하면 이 사람은 노쇠함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복의 과보가 상주하기에 태어나는 곳도 상주한다. 이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016_0551_b_21L外曰福無捨因緣故不應捨修妒路
汝說捨福因緣滅時苦今常福報中無滅苦不應捨如經說能作馬祀是人度衰老死福報常生處常是福不應捨
【불자】 복은 버려야 하네.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이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독이 섞인 밥은 먹을 때는 즐겁고 소화하고자 할 때는 괴롭다. 복도 이와 같다. 또 복의 과보가 있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이지만 많이 받아들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불을 가까이 하면 한기를 막아주기에 즐겁지만 더 가까이에 다가서면 몸을 태우니 괴롭다. 그러므로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두 가지 특징이 있기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016_0551_c_02L福應捨二相故修妒路
是福有二相與樂能與苦如雜毒飯食時美欲消時苦福亦如是復次有福報是樂因多受則苦因譬如近火止寒則樂近燒身則苦是故福二相二相故無是以應捨
그대가 마사(馬祀)의 복보(福報)는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언설이 있을 뿐이네. 인연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마사(馬祀)의 과보는 실제로는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마사의 업의 인연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의 인연이 한계가 있다면 과보도 한계가 있다. 마치 진흙덩어리가 작다면 물단지도 작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사(馬祀)의 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그대의 천신[天]은 증오가 있어서 함께 다투고 서로 괴롭힌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대의 마사 따위의 행위[業]는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모두 무상하다.
016_0551_c_08L又汝言馬祀福報常者有言說無因緣故修妒路
馬祀福報實無何以故馬祀業因緣有量故世閒因若有量果亦有量如泥團小甁亦小是故馬祀業有量故無常復次聞汝天有瞋恚共鬪相惱故不應常又汝馬祀等業從因緣生故皆無常
유루의 청정한 복은 무상하기에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죄가 섞인 복을 버리지 않겠는가?수투로
또 마사(馬祀)와 같은 행위[業]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승거경』에서는 “제사[祀法]는 청정하지 않고 무상하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의 특징(相)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016_0551_c_14L復次有漏淨福無常故尚應捨何況雜罪修妒路
如馬祀業中有殺等罪故復次如『僧佉經』言祀法不淨無常勝負相是以應捨
【외도】 만약 복을 버린다면 짓지 않아야 할 것이네.수투로
만약 복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면 처음에 짓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 지혜가 있는 사람이 헛되이 괴로운 일을 짓는가? 비유하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나서 다시 깨뜨리는 것과 같다.
016_0551_c_18L外曰若捨福不應作修妒路
若福必捨本不應作何有智人空爲苦事譬如陶家作器還破
016_0552_a_01L【불자】 도(道)를 생기게 하는 순서이네. 마치 때묻은 옷을 빨아서 물을 들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때묻은 옷을 먼저 빨고 후에 깨끗해졌을 때 물을 들인다면 빨래해서 깨끗이 한 것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물들임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때묻는 옷은 물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먼저 죄의 때를 제거하고 다음에 복덕(福德)으로써 마음에 배이게 하고 이후에 열반도(涅槃道)의 물[染]을 받는 것이다.
016_0551_c_20L內曰生道次第法如垢衣浣染修妒路
如垢衣先浣後淨乃染浣淨不虛也所以者何法次第故以垢衣不受染故如是先除罪垢次以福德熏心然後受涅槃道染
【외도】 복을 버리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수투로
복에 의지해서 악을 버린다. 무엇에 의지해서 복을 버리는가?
016_0552_a_02L外曰捨福依何等修妒路
依福捨惡依何捨福
【불자】 무상(無相)이 가장 위이네.수투로
복을 취하면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고 죄를 취하면 3악도(惡道)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무상의 지혜가 가장 으뜸이다. 무상이란 모든 상(相)을 억념하지 않고 모든 수(受)를 여의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에 의지하는 곳[所依]이 없다. 이것을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이 방편에 의지해서 복을 버릴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세 종류의 해탈문25) 없이 제1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의지하지 않고서 앎과 봄을 얻고자 하는데, 증상만(增上慢)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공(空)이란 말이 실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016_0552_a_03L內曰無相最上修妒路
取福天中生取罪三惡道生是故無相智慧最第一無相名一切相不憶念一切受過去未來現在法心無所著一切法自性無故則無所依是名無以是方便故能捨福何以故除三種解脫門第一利不可得如佛語諸比丘若有人言我不用空無相欲得若知若見無增上慢者是人空言無實

2. ‘나’26)를 타파하는 장[破神品]
016_0552_a_12L破神品第二
016_0552_b_01L
【외도】 “모든 법은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나’[神] 등의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비라(迦毗羅)ㆍ우루가(優樓迦) 등은 “‘나[神]’와 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비라는 “원질[冥初]27)에서 지각[覺]이 생기고, 지각에서 아만(我慢)[我心]이 생기고, 아만에서 5유(唯:五微塵)28)가 생기고, 5유에서 5대(大)29)가 생기고, 5대에서 11근(十一根)30)이 생긴다. ‘나’는 주재하고 상주하고 지각의 특성을 가지며 모든 법 속에 거처한다.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고 후패[敗]하지 않으며 모든 법을 포섭한다. 이 25제(二十五諦)를 알면 해탈을 얻고 이것을 알지 못하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루가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며 상주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ㆍ봄ㆍ눈깜박임ㆍ수명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또 탐욕ㆍ증오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지혜 등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탈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016_0552_a_13L外曰不應言一切法空無相神等諸法有故修妒路
迦毘羅優樓迦等言神及諸法有迦毘羅言從冥初生覺從覺生我心從我心生五微塵從五微塵生五大從五大生十一根神爲主覺相處中常住不壞不敗攝受諸法能知此二十五諦卽得解脫不知此不離生死優樓迦言實有神常出入息視眴壽命等相故則知有神復次以欲恚苦樂智慧等所依處故則知有神是故神是實有云何言無若有而言無則爲惡邪人惡邪人無解脫是故不應言一切法空無相
【불자】 만약 ‘나’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악하고 바르지 못한 일이겠지만, 만약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에 무슨 과실이 있겠는가? 이를 찬찬히 관찰해 보건대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016_0552_b_03L若有神而言無是爲惡邪若無而言無此有何過諦觀察之實無有神
【외도】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승거경』에서는 “지각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나’이다”고 말한다.
016_0552_b_05L外曰實有神如『僧佉經』中說覺相是
【불자】 ‘나’[我]와 지각[覺]은 동일한 것인가, 상이한 것인가?
內曰覺爲一耶爲異耶
【외도】 ‘나’와 지각은 동일한 것이다.
016_0552_b_07L外曰覺一也
【불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나’는 무상할 것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는 무상할 것이다. 비유하면 뜨거움은 불의 속성이니 뜨거움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도 무상한 것과 같다. 이제 지각은 실제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특성[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고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기 때문이고 존재하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552_b_08L內曰覺若神相神無常修妒路
覺是神相者覺無常故神應無常如熱是火相熱無常故火亦無常覺實無常所以者何相各異故屬因緣故本無今有故已有還無故
【외도】 발생하지 않으니 상주하는 것이네.수투로
발생의 상(相)이 있는 법은 무상하다. ‘나’는 발생의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
016_0552_b_12L外曰不生故常修妒路
生相法無常神非生相故常
【불자】 만약 그렇다면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닐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지각은 무상하고 ‘나’는 상주한다고 말하니, ‘나’는 지각과 상이할 것이다. 만약 ‘나’와 지각이 상이하지 않다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도 무상할 것이다.
016_0552_b_14L內曰若爾覺非神相修妒路
覺是無汝說神常神應與覺異若神覺不異者覺無常故神亦應無常
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옳은 점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모든 곳에 편재하니 지각도 5취[道]에 동시에 편재해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에 편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니다.
016_0552_b_16L復次覺是神相無有是處所以者何
覺行一處故修妒路
若覺是神相者汝法中遍一切處覺亦應一時遍行五道覺行一處不能周遍是故覺非神相
016_0552_c_01L만약 그렇다면 ‘나’와 지각은 동일할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지각을 ‘나’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각과 동일할 것이니, ‘나’는 편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면 불에 뜨거움의 속성과 뜨거움 아님의 속성이 없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아서 편재함과 편재하지 않음의 속성이 없을 것이다.
만약 편재한다고 한다면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 있을 것이네.수투로
또 그대가 ‘나’가 편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두 속성이 있을 것이다.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편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지각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이고, 만약 지각 아님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 아님이다.
016_0552_b_20L復次若爾神與覺等修妒路
汝以覺爲神相者神應與覺等神則不遍譬如火無熱不熱相神亦如是不應有遍遍相
復次若以爲遍則有覺不覺相修妒路
汝欲令神遍神則二相不覺相何以故覺不遍故神若墮覺處是則若墮不覺處是則不覺
【외도】 능력이 편재하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지각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실은 없다.
016_0552_c_04L外曰力遍故無過修妒路
有處覺雖無用此中亦有覺力是故無無覺過
【불자】 그렇지 않네. 능력과 능력을 갖는 것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의 능력이 있다면 이 곳에 처할 때 지각은 작용이 있으면서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지각의 작용이 없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이 언설[語]이 있을 뿐이다.
016_0552_c_06L內曰不然力不異故修妒路
若有覺力處是中覺應有用而無用是故汝語非也若如是覺無用處亦有覺力者但有是語
【외도】 인과 연들이 화합해서야 지각의 능력에 작용이 있네.수투로
‘나’는 비록 지각의 능력이 있지만 반드시 인과 연들이 화합하는 것을 기다려서야 작용이 있는 것이다.
016_0552_c_09L外曰因緣合故覺力有用修妒路
神雖有覺力要待因緣合故乃能有用
【불자】 발생의 상(相)에 떨어지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할 때 지각에 작용이 있다면 이 지각은 인과 연들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의 상에 떨어진다. 만약 지각과 ‘나’가 상이하지 않다면 ‘나’도 또한 발생의 상을 갖는다.
016_0552_c_11L內曰墮生相故修妒路
若因緣合時覺有用者是覺屬因緣故則墮生相若覺神不異神亦是生相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수투로
마치 등불이 사물을 비추긴 하지만 사물을 만들 수는 없듯이 인과 연들도 이와 같아서 지각으로 하여금 작용이 있게 하지만 지각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016_0552_c_14L外曰如燈修妒路
譬如燈能照物不能作物因緣亦如是能令覺有用不能生覺
【불자】 그렇지 않다. 비록 등불이 물단지 등을 비추지는 않지만 물단지 등을 얻을 수 있고 또 작용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하지 않을 때면 지각을 얻을 수 없어서 ‘나’도 또한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2_c_16L內曰不然燈雖不照甁等而甁等可得亦可持用若因緣不合時覺不可得神亦不能覺苦樂是故汝喩非也
【외도】 마치 색과 같네.수투로
색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등불이 비추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듯이, 그렇듯이 지각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인과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인지할 수 없다.
016_0552_c_19L外曰如色修妒路
譬如色雖先有燈不照則不了如是覺雖先因緣未合故亦不了
【불자】 그렇지 않네. 자기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아직 비춤이 있지 않다면 사람이 비록 색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색의 상은 스스로 인지한다. 그대의 지각의 상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2_c_21L內曰不然相不了故修妒路
若未有照人雖不了相自了汝覺相自不了是故汝喩非
016_0553_a_01L또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색의 상은 사람이 인지하기 때문에 색의 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보지 않을 때라도 항상 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의 인식은 ‘나’의 속성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인식[知]과 지각[覺]은 동일한 의미이다.
016_0553_a_01L復次以無相故色相不以人知爲色相是故若不見時常有色汝知是神相不應以無知處爲知無知處爲知是事不然汝法中知覺一義
【외도】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을 암송해서 “인식과 ‘나’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나’는 무상(無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와 인식은 합하기 때문이네. 마치 소를 갖는 것[有牛]과 같네.수투로
사람과 소가 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소를 갖는 것[有牛]’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神]’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塵]가 합하기 때문에 ‘나’를 ‘인식을 갖는 것[有知]’이라 하는 것이다.
016_0553_a_04L優樓迦弟子誦『衛世師經』言知與神異是故神不墮無常中亦不無知何以故
知合故如有牛修妒路
譬如人與牛合故人名有牛如是神合故神有知生以神合知故神名有
【불자】 소의 성질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소의 성질[相]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가 합한다 하더라도 ‘소를 갖는 것’이 소인 것은 아니다. 소만이 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나’와 인식이 합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특성[知相]은 인식[知]에 있지, ‘나’가 인식인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가 합하기에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하지만, 이 인식이 색경[色塵] 등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이 태우지 불을 갖는 사람이 태우지 않는 것과 같다.
016_0553_a_10L內曰牛相牛中住非有牛中修妒路
相牛中住不在有牛中是故雖人合有牛不作牛但牛爲牛如是雖神知合知相知中住神不爲知汝言神塵合故知生是知知色塵等故但知能知非神知譬如火能燒有火人燒
【외도】 법(法)31)을 사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사람에게 비록 봄[見相]이 있지만 등불을 사용하면 보고 등불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 ‘나’에게 비록 인식이 있지만 인식을 사용하면 인식하고 인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016_0553_a_16L外曰能用法故修妒路
人雖有見相用燈則見離燈則不見神雖有能知用知則知離知則不知
016_0553_b_01L【불자】 그렇지 않네. 인식이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근[情]이 의(意)와 경계가 합해서 인식이 발생할 때 이 인식이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식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인식하는데 ‘나’가 다시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등불은 색 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하더라도 색 등을 인식할 수 없다. 법(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식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32)이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016_0553_a_18L內曰知卽能知故修妒路
以情塵合故知是知能知色等諸塵是故知卽能非是所用若知卽能知神復何用燈喩非也何以故
燈不知色等故修妒路
燈雖先有不能知色等非知法故故但知能知色若不能知不名爲知是故縱有能知彼能何用
【외도】 말의 몸[馬身]과 합하기에 ‘나’를 말[馬]이라고 하는 것이네.수투로
가령 ‘나’가 말의 몸과 합하기에 ‘나’를 말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나’가 비록 (말의) 몸과 상이하더라도 또한 ‘나’를 말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53_b_02L外曰馬身合故神爲馬修妒路
譬如神與馬身合故神名爲馬神雖異身亦名神爲馬是神知合故神名爲知
【불자】 그렇지 않네. (말의) 몸 속의 ‘나’는 말이 아니네.수투로
말의 몸은 말이다. 그대가 “몸이 ‘나’와 상이하다”고 말한다면 ‘나’가 말의 몸과 상이한 것인데, 어떻게 ‘나’를 말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나’로 ‘나’를 비유한다면 부처(負處)33)에 떨어진다.
016_0553_b_05L內曰不然中神非馬修妒路
馬身卽馬也汝謂身與神異則神與馬異云何以神爲馬故此喩非也以神喩神則墮負處
【외도】 마치 검은 명주와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검은 명주와 같다. 검음이 비록 명주와 상이하긴 하지만 명주와 검음이 합하기에 검은 명주라 하듯이, 그렇듯이 인식이 비록 ‘나’와 상이하긴 하지만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53_b_08L如黑疊修妒路
譬如黑疊黑雖異疊與黑合故名爲黑疊如是知雖異神神與知合故神名爲知
【불자】 만약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가 아닐 것이다. 왜 그러한가? 나는 앞에서 “인식이 인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인식을 ‘나’라 하지 않는다면 또한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른 것에 합하기에 다른 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면 인식이 ‘나’와 합하는데 어떻게 인식을 ‘나’라 이름하지 않겠는가?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검은 명주를 비유로 든다면 스스로 그대의 경전을 위배하게 된다. 그대의 경전에서 검음은 속성[求那]이고 명주는 실체[陀羅驃]이다. 실체는 속성이 되지 않고 속성은 실체가 되지 않는다.
016_0553_b_11L內曰若爾修妒路
若神與知合故神名爲知神應非神何以故我先說知卽是能知知不名神神亦不名能知若他合故以他爲名者知與神合何不名知爲又如先說黑疊喩者自違汝經經黑是求那疊是陁羅驃陁羅驃不作求那求那不作陁羅驃
【외도】 몽둥이를 가진 자와 같네.수투로
마치 사람과 몽둥이가 합하기에 사람을 ‘몽둥이를 가진 자[有杖]’라 하지 몽둥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몽둥이가 사람과 합하는 것이지만 몽둥이를 ‘사람을 갖는 것[有人]’이라고 하지도 않고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인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이 인식이 ‘나’와 합하기에 인식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
016_0553_b_18L外曰如有修妒路
譬如人與杖合故人名有杖但名杖杖雖與人合杖不名有人不名人如是神與知合故神名能知不但名知亦非是知與神合故知名爲
016_0553_c_01L【불자】 그렇지 않네. 몽둥이를 가진 자는 몽둥이가 아니네.수투로
비록 몽둥이가 몽둥이를 가진 자와 합하지만 몽둥이를 가진 자가 몽둥이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인식의 특성은 인식 속에 있지 ‘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식 주체가 아니다.
016_0553_b_23L內曰不然有杖非杖修妒路
雖杖與有杖合有杖不爲杖如是知相知中神中是故神非能知
【외도】 또 수론학파의 사람들[僧佉人]은 “만약 인식이 ‘나’와 상이하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전에는 그와 같은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의 특징이 있는 것을 ‘나’로 삼는다. 그러므로 항상 지각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말한다.
016_0553_c_02L外曰僧佉人復若知與神異有如上過我經中無如是過所以者何覺卽神相故我以覺相爲神是故常覺無不覺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지각의 특징이 있다면 ‘나’는 하나가 아니네.수투로
지각에는 여러 고(苦)와 낙(樂)등의 지각이 있다. 만약 지각이 ‘나’의 특징[相]이라면 ‘나’는 여럿일 것이다.
016_0553_c_05L內曰已先破今當更說
若覺相神不一修妒路
覺有種種苦樂覺等若覺是神相應種種
【외도】 그렇지 않네. 하나이면서 여러 상(相)이 되네. 마치 파리구슬과 같네.수투로
마치 한 개의 파리구슬이 색깔에 따라서 청색이나 황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으로 변하듯이 그렇듯이 한 지각이 경계[塵]에 따라서 여럿이 되어 고(苦)를 지각하거나 낙(樂)을 지각하거나 등등을 한다. 비록 지각이 여러 상이 있긴 하나 실제로는 하나의 지각이다.
016_0553_c_08L外曰不然一爲種種相如頗修妒路
如一頗梨珠隨色而變或靑黃赤白等如是一覺隨塵別異或覺苦或覺樂等覺雖種種相實是一覺
【불자】 만약 그렇다면 죄와 복은 동일한 상(相)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覺]이라면 이것을 복이라고 한다. 만약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각[覺]이라면 이것을 죄라고 한다. 모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이 법을 믿는다.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과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이 동일하다면 죄와 복이 동일한 상일 것이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 등이 또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가령 구슬과 같은 것은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색을 따라서 변하지만, 지각은 연(緣)과 함께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구슬은 새로 새로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상이 동일하지 않다. 그대가 구슬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016_0553_c_11L若爾罪福一相修妒路
若益他覺是名若損他覺是名罪一切慧人心信是法若益他覺損他覺是一者應罪福一相如施盜等亦應一復次如珠先有隨色而變然覺共緣生是故汝喩非也復次珠新新生滅故相則不汝言珠一者是亦非也
【외도】 그렇지 않네. 결과는 여럿이지만 하나이네.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마치 한 명의 도공이 물단지나 동이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만드는 이가 하나이기 때문에 결과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하나의 지각이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행위[業]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을 행할 수 있다.
016_0553_c_18L外曰不然果雖多作者一如陶師修妒路
如一陶師作甁瓫等非作者一故果便一也是一覺能作損益等業
【불자】 도공은 구별[別異]이 없네.수투로
가령 도공의 몸은 하나여서 구별[異相]이 없기에 물단지나 동이 등과 다르다. 그러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이나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은 구별이 실제로 존재한다. 또 해롭게 하는 행위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은 지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3_c_21L內曰陶師無別異修妒路
譬如陶師身一無異相而與甁盆等異然益他覺損他覺實有異又損益等與覺不異是故汝喩非
016_0554_a_01L【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하기 때문에.수투로
어떤 사물은 지각되지는 않지만 추리되기 때문에 인식된다. 마치 사람이 이미 가고 나서 이후에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나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질 때 가는 행위[去]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는 행위를 알 듯이, 그렇듯이 속성들이 실체에 의지하는 것을 본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해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와 인식[知]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 한다.
016_0554_a_02L外曰實有神比知相故修妒路
有物雖不可現知以比相故知如見人先去然後到彼日月東出西沒雖不見去以到彼故知去如是見諸求那依陁羅以比知相故知有神知合故名能知
【불자】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인식하지 못할 때 ‘나’가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편재하고 광대한 데 반해 인식[知]은 적다. 만약 ‘나’가 인식[知]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곳은 몸 바깥을 말한다. 어떤 때는 몸 안을 말한다. 수면이나 기절 등 이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인식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의 특징이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는 그대의 말은 공허해서 실질이 없다.
016_0554_a_07L內曰是事先已破今當更說
不知非神修妒路
汝法神遍廣大而知少若神知者有處有時不知是則非神有處名身外有時名身內睡眠悶等是時不知若神知相有處有時不知是則非神何以故無知相故汝以知相有神者空無實也
【외도】 가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인식이 없네. 마치 연기가 그러하듯.수투로
가령 연기가 불의 특징이긴 하지만 석탄일 때는 연기가 없다. 이 때에 연기가 없지만 불은 존재한다. 그렇듯이 인식이 ‘나’의 특징이긴 하지만 인식이 있든 인식이 있지 않든 ‘나’는 항상 존재한다.
016_0554_a_13L外曰行無故知如煙修妒路
如煙是火相炭時無煙時雖無煙而有火如是知雖神相有知若無知神應常有
【불자】 그렇지 않네. ‘나’는 인식 주체이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존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인식 주체[能知]가 아니다. 또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대에 따르면 ‘나’가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연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 불이 존재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불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 ‘나’가 인식할 때든 인식하지 않을 때든 봄의 주체[能見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그대는 공통 표상[共相]을 보고 추리[比知]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016_0554_a_16L內曰不然能知故修妒路
若不知時欲令有神者則不能知亦無知相所以者何汝神無知時亦有神故復次若無煙時見有火知有火神若有知若無知無能見者是故汝喩非也復次汝說見共相比知故有神此亦非也所以者何
016_0554_b_01L가는 자는 가는 행위로써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가는 행위를 떠나서 가는 자가 다른 곳에 도달하는 일은 있지 않다. 그러기에 가는 자가 보이는데 다른 곳에 도달한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나’를 떠나서 인식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거북이를 보고서 토끼의 표상[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석녀를 보고서 아이의 표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듯이 인식을 보고서 ‘나’의 표상[神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016_0554_a_22L見去者去法到彼故修妒路
若離去者去法離去法無去者到彼如是見去曰到彼必知有去法若離神無知是事不然是故不應以知故知有神不可見龜而有毛想不可見石女而有兒想如是不應見知便有神想
【외도】 마치 손이 잡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손이 어떤 때는 잡고 어떤 때는 잡지 않는 것과 같다. 잡지 않을 때에는 손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손은 항상 손이다. ‘나’도 그러해서 어떤 때는 인식하고 어떤 때는 인식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않을 때 ‘나’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나’인 것이다.
016_0554_b_05L如手取修妒路
如手有時取有時不取不可以不取時不名爲手手常名手神亦如是有時知有時不知不可以不知時不名爲神神常名神
【불자】 잡음은 손의 특징이 아니네.수투로
잡음은 손의 행위[業]이지 손의 특징[相]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잡는다고 해서 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인식이 ‘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016_0554_b_09L內曰非手相修妒路
取是手業非手相何以故不以取故知爲手汝以知卽神相喩非也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고통[苦]이나 쾌락[樂]을 지각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지각[覺]이 없다면, 지각이 없는 몸은 홀로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죽은 사람은 몸이 있어도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몸을 갖는 어떤 것이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016_0554_b_12L外曰定有神覺苦樂故修妒路
無覺者則無覺身獨不能覺苦樂以故死人有身不能覺苦樂如是知有身者能覺苦樂此則爲神是故定有神
【불자】 만약 고통[惱]이 있다면 또한 절단되는 것이네.수투로
가령 칼로 몸을 벨 때 고통[苦]이 생긴다. 만약 칼로 ‘나’를 베서 ‘나’에도 고통이 있다면 ‘나’도 절단되는 것이다.
016_0554_b_16L內曰若惱亦斷修妒路
如刀害身時生惱若刀害神神亦有惱者神亦應斷
【외도】 그렇지 않네. 감각되는 것[觸]이 없는 것이 마치 빈 공간과 같네.수투로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는다.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안의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타지 않고 단지 뜨거움만이 있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안의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고 단지 고통만이 존재한다.
016_0554_b_18L外曰不然無觸故如空修妒路
神無觸故不可斷如燒舍時內空無觸故不可燒但有熱如是斷身時內神無觸故不可斷但有惱
016_0554_c_01L【불자】 만약 그렇다면 가는 행위가 없네.수투로
만약 ‘나’에 감각되는 것[觸]이 없다면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행위[去法]는 의지[思惟]에서 생기고 몸의 움직임에서 생긴다. 몸에는 의지가 없다. 지각[覺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없다. 몸[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016_0554_b_21L內曰若爾無去修妒路
若神無觸身不應到餘處何以故去法從思惟生從身動生身無思惟非覺法故神無動力非身法故如是身不應到餘處
【외도】 마치 장님과 절뚝발이와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장님과 절뚝발이가 서로 의지해서 가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는 의지[思惟]가 있고 몸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있어서 결합해서 간다.
016_0554_c_02L外曰如盲修妒路
譬如相假能去如是神有思惟身有動力和合而去
【불자】 상이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장님과 절뚝발이의 경우는 두 감각[觸]과 두 의지[思惟]가 있기에 당연히 갈 수 있는 것이지만, 몸과 ‘나’는 두 가지34)가 없기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나’는) 절단된다는 과실이 있다.
또 그대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미한 뜨거움이 빈 공간에 편재하기에 몸이 감각해서 뜨거움을 인식하는 것이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한다고 임의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016_0554_c_04L內曰異相故修妒路
如盲跛二觸二思惟故法應能去神無二事故不應去是故無去法若不爾有如上斷過復次汝謂空熱此事不何以故空無觸故微熱遍空身觸覺熱非空熱也但假言空熱
【외도】 마치 집주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집주인은 고통스러워 하지만 불에 타지 않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나’는 단지 고통스러워할 뿐 절단되지는 않는다.
016_0554_c_09L外曰舍主惱修妒路
如燒舍時舍主惱而不燒如是身斷時神但惱而不斷
【불자】 그렇지 않네. 무상(無常)하기에 불에 타네.수투로
집이 불에 탈 때 풀과 나무 등은 무상하기에 타기도 하고 열이 나기도 한다. 빈 공간은 상주하기에 타지도 않고 열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몸은 무상하기에 고통스러워 하기도 하고 절단되기도 하지만 ‘나’는 상주하기에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고 절단되지도 않는다. 또 집주인은 불에서 멀리 있기에 불에 타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서 “‘나’는 편재한다”고 말하기에 또한 절단된다.
016_0554_c_11L內曰無常故燒修妒路
舍燒時草木等無常亦燒亦熱空常故不燒不熱如是身無常故亦惱亦斷神常故不惱不復次舍主遠火故不應燒汝經言神遍滿故亦應斷壞
【외도】 반드시 ‘나’가 존재하네. 색 등을 파악하기 때문이네.수투로
5근[情]은 5경[塵]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知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나’가 눈[眼] 등을 사용해서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마치 사람이 낫을 사용해서 5곡을 베서 거두는 것과 같다.
016_0554_c_16L外曰必有神色等故修妒路
五情不能知五塵非知法是故知神能知神用眼等知色等諸塵如人以鐮收刈五穀
【불자】 왜 귀를 사용해서 보지 않는가?수투로
만약 ‘나’에 능력[力]이 있다면 왜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보지 않는가? 마치 불이 탈 때 곳곳이 모두 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어떤 때는 낫 없이 손으로 베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집에 여섯 방향으로 난 창문[六向]이 있어서 사람이 그 안에 거주하면서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나’도 이와 같으니 곳곳을 볼 것이다.
016_0554_c_19L內曰何不用耳見修妒路
若神見有力何不用耳見如火能燒處處皆燒又如人或時無鐮手亦能斷又如舍有六向人居其內所在能見神亦如是處處應見
016_0555_a_01L【외도】 그렇지 않네.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비록 ‘나’에 보는 능력[見力]이 있긴 하지만 눈 등이 감각하는 것[所伺]과 같지 않다. 경계가 각각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도공이 비록 물단지를 만들긴 하지만 진흙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 비록 보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눈 아닌 것을 사용해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016_0554_c_23L外曰不然所用定故如陶師修妒路
神雖有見力然眼等所伺不同於塵各定不能用耳見色如陶師雖能作甁離泥不能作如是神雖有見力非眼不能見
【불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본다면 ‘나’와 눈은 상이할 것이다. ‘나’와 눈이 상이하다면 ‘나’는 눈이 없을 것이다. ‘나’에 눈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그대가 도공의 비유를 든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진흙 없이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흙이 곧 물단지이다. 그러나 눈은 색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016_0555_a_05L內曰若爾修妒路
若神用眼見神與眼異神與眼異則神無眼神無云何見汝陶師喩者是亦不然以者何離泥更無有甁泥卽爲甁眼色異故
【외도】 ‘나’가 존재하네. 다른 근[情]이 작동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오는가? 그렇다면 눈을 사용해서 맛[味]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소유하는 자35)가 인식한다. 또 다음과 같다.
한 사물을 눈과 몸이 인식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령 사람이 눈을 사용해서 이전에 물단지 등을 인식한 일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비록 눈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이 감촉해서 (물단지 등을) 또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016_0555_a_09L外曰有神異情動故修妒路
無神者何故見他食果口中生涎是不應以眼知味有眼者能知
復次一物身知故修妒路
如人眼先識甁等闇中雖不用眼身觸亦知是故知有
【불자】 마치 장님과 같다. 논[修妬路]에서 이미 타파했다. 또 만약 눈을 사용해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온다면, 다른 근[감관]은 왜 작동하지 않겠는가? 몸도 또한 이와 같다.
016_0555_a_14L內曰如盲修妒路中已破復次若眼見他食果而口生涎者餘情何以不身亦如是
【외도】 사람이 태우는 것과 같네.수투로
사람이 비록 태우긴 하지만 불 없이 태울 수 없듯이 ‘나’ 또한 이와 같아서 눈을 사용해서 보는 것이지 눈 없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016_0555_a_16L外曰如人燒修妒路
譬如人雖能燒離火不能燒神亦如是用眼能見離眼不能見
【불자】 불이 태우는 것이네.수투로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妄語]이다. 왜 그러한가? 사람에게는 태움의 성질[燒相]이 없다.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가령 바람이 나무를 움직이고 서로 어울려 불을 일게 해서 (불이) 산이나 못을 태울 때 행하는 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지 사람이 태우는 것이 아니다.
016_0555_a_18L內曰火燒修妒路
言人燒者是則妄語何以故人無燒相自能燒如風動木相揩生火焚燒山無有作者是故火自能燒非人燒
【외도】 의(意)가 그러하듯.수투로
가령 죽은 사람은 비록 눈이 있긴 하지만 의(意)가 없기 때문에 ‘나’가 보지 못한다. 만약 의가 있다면 ‘나’가 본다. 그렇듯이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보지 눈 없이 보는 것이 아니다.
016_0555_a_22L外曰如意修妒路
如死人雖有眼無意神則不見若有意神則見如是神用眼見離眼不見
016_0555_b_01L【불자】 만약 의(意)가 있다면 인식할 수 있고 의가 없다면 인식할 수 없다면, 단지 의가 눈 등의 문(門)에 작용하면 인식하는데 ‘나’를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55_b_01L內曰若有意能知無意不能知者但意行眼等門中便神復何用
【외도】 의(意)는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와 의가 서로 인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나’로써 의를 인식한다. 무한역행이 아니다.
016_0555_b_03L外曰意不自知若意相知此則無窮我神一故以神知意非無窮也
【불자】 ‘나’에 또 ‘나’가 존재하네.수투로
만약 ‘나’가 의(意)를 인식한다면 누가 다시 ‘나’를 인식하겠는가? 만약 ‘나’가 ‘나’를 인식한다면 이것도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교법에 따르면 현재의 의(意)가 과거의 의(意)를 인식한다. 의[意法]는 무상하기 때문에 과오가 없다.
016_0555_b_05L內曰神亦神修妒路
若神知意誰復知神若神知神是亦無窮我法以現在意知過去意意法無常故無
【외도】 왜 ‘나’를 제거하는가?수투로
만약 ‘나’를 제거한다면 어떻게 단지 의(意)만으로 대상들을 인식하겠는가?
016_0555_b_08L外曰云何除神修妒路
若除神云何但意知諸塵
【불자】 마치 불이 열을 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불이 열을 낼 때 행위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불은 스스로 열을 낸다. 열을 내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의(意)가 인식의 특징[知相]을 갖는다. 비록 ‘나’가 없긴 하지만 (意의) 본성이 인식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나’와 인식은 상이하기 때문에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016_0555_b_09L內曰如火熱相修妒路
譬如火無有作者火性自熱無有不熱之如是意是知相雖復離神性知故能知知異故神不應知
【외도】 ‘나’가 존재하네. 습관[宿習]의 기억이 상속(相續)하기에 태어날 때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네.수투로
마치 갓난애가 슬픔과 기쁨 등의 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지만 선세의 습관[宿習]의 기억[念]이 상속하기 때문에 금세에 다시 여러 가지 행위[業]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하고 또 상주의 특징[常相]을 갖고 있다.
016_0555_b_12L外曰應有宿習念相續故生時憂喜行修妒路
小兒生便知行憂喜等事無有教者以先世宿習憶念相續故今世還爲種種業是故知有神亦常相
【불자】 편재하는 것이 어떻게 기억하는가?수투로
‘나’는 상주하고 경계[塵]들에 편재하기에 기억하지 않을 때가 없다면, 기억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또 만약 기억이 모든 곳에서 발생하다면 기억도 모든 곳에 편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기억할 것이다. 만약 기억이 부분 부분의 장소에서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分]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나’라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고, 만약 인식이라면 ‘나’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016_0555_b_16L內曰云何念修妒路
神常遍諸塵無不念時從何生復次若念一切處生念亦應遍一切處如是一切處應一時念念分分處生神則有分有分故無常復次若神無知若知非神此事先已
【외도】 합하기에 기억이 발생하네.수투로
만약 ‘나’와 의(意)가 합한다면 세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억이 발생한다. 왜 그러한가? 비록 ‘나’와 의(意)가 합하긴 하지만 세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555_b_22L外曰合故念生修妒路
若神意合以勢發故念生何以故意雖合勢不發則念不生
016_0555_c_01L【불자】 비록 앞에서 이미 타파하긴 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라면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네.수투로
또 만약 기억이 발생한다면 이 때에 인식한다. 만약 기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이 인식일 터인데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016_0555_c_01L內曰雖先已破今當重神若知相不應生念若非知相不應生念
復次若念知修妒路
若念生時知若念不生是時不知應念卽是神復何用
【외도】 ‘나’가 존재하네. 왼쪽 것으로 보고 오른쪽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가령 사람이 전에 왼쪽 눈으로 보고 후에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때 왼쪽 눈[彼]이 보고 오른쪽 눈[此]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안에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016_0555_c_05L外曰應有神左見右識修妒路
如人先左眼見後右眼識不應彼見此識以內有神故左見右識
【불자】 함께 두 눈으로 답하네.수투로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다. 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편재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또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다. 또 어떻게 귀로 보지 않겠는가? 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이다. 또 가령 왼쪽 눈으로 보는 것을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도 왼쪽 눈[此分]으로 보고 저 부분[彼分]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016_0555_c_07L共答二眼修妒路
分知不名知復次若爾無知復次遍云何念復次若念復次何不用耳見復次若爾如左眼見不應右眼識神亦不應此分見彼分識是故不應以左眼見右眼識故便有神
【외도】 기억은 ‘나’에 속하기에 ‘나’가 인식하는 것이네.수투로
기억은 ‘나’의 법(法)이기에, 이 기억은 ‘나’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나’가 기억을 사용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016_0555_c_13L外曰念屬神故神修妒路
念名神法是念神中生是故神用念知
【불자】 그렇지 않네.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나’의 한 부분에서 인식이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의 인식이다. 만약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면 ‘나’는 인식이 아니다.
016_0555_c_15L內曰不然分知不名知修妒路
神一分處知生神則分知若神分知神不名知
【외도】 ‘나’의 인식은 부분의 인식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하네. 몸의 행위[身業]가 그러하듯.수투로
몸의 부분인 손에 행위[所作]가 존재할 때 몸의 행위[身作]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한다.
016_0555_c_17L外曰神知非分知何以故
神雖分知神名知如身業修妒路
譬如身手有所作名爲身作如是神雖分神名知
【불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나’는 편재하는 데 반해 의(意)는 적다. ‘나’와 의(意)가 합하기에 ‘나’의 인식이 발생한다. 이 인식과 의 등은 적다. 만약 적은 부분인 인식으로써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찌 많은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니 ‘나’를 인식 아님[不知]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그대가 몸의 행위를 비유로 든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부분[分]과 전체[有分]의 동일함과 상이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555_c_20L內曰若爾無知修妒路
汝法神遍意少意合故神知生是知與意等少若以少知神名知者汝何不言以多不知故神名不知又汝身業喩此事不然何以故有分一異不可得故
016_0556_a_01L【외도】 옷의 일부가 불에 탄 것과 같네.수투로
옷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불에 탄 옷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일부를 인식하더라도 ‘나’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016_0556_a_02L外曰如衣分燒修妒路
譬如衣一分燒名爲燒衣如是神雖一分知名爲神知
【불자】 불에 탄 것도 이와 같네.수투로
만약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면 ‘불에 탄 것’이라 하지 말고 ‘일부가 불에 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고 ‘불에 탄 옷’이라고 한다면 이제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으니 ‘불에 타지 않은 옷’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 옷은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설[語言]에 집착하지 말라.
016_0556_a_04L內曰燒亦如是修妒路
若衣一分燒不名爲燒應名分燒汝以一分燒故衣名燒者今多不燒應名不燒何以故是衣多不燒實有用故是以莫著語言

3. 단일성을 타파하는 장[破一品]
016_0556_a_08L破一品第三

【외도】 ‘나’가 존재한다. 존재ㆍ단일성ㆍ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나[神]’가 존재한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한다.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
016_0556_a_09L外曰應有神甁等神所有故修妒路
若有神則有神所有若無神則無神所有甁等是神所有故有神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나’는 이미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을 사유해 볼 때 동일한 것으로써 존재하는가, 상이한 것으로써 존재하는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016_0556_a_12L不然何以故神已不可得故今思惟有甁等若以一有若以異有俱有過
【외도】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이 만약 동일한 것으로써 존재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016_0556_a_15L外曰甁等若以一有何過
016_0556_b_01L【불자】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거나 전도되네.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가령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석가[憍尸迦]의 경우 그 인다라가 있는 곳에 석가와 석가가 있듯이, 그렇듯이 존재가 있는 곳마다 단일성과 물단지가 있고 단일성이 있는 곳마다 존재와 물단지가 있고 물단지가 있는 곳마다 존재와 단일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옷 따위의 사물들도 또한 물단지일 것이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한 사물이 존재할 것이니 모두 물단지일 것이다. 이제 물단지ㆍ옷 따위의 사물들은 모두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존재가 상주하기 때문에 단일성과 물단지도 상주할 것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하는 것이다. 또 단일성이 수(數)이므로 존재와 물단지도 수일 것이다. 또 만약 물단지가 5신(身)36)이라면 존재와 단일성도 5신일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형태가 있고 질애[對]가 있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형태가 있고 질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무상하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무상할 것이다. 이것을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한다”의 내용이다.
016_0556_a_16L內曰若有甁一如一一切成若不成若顚倒修妒路
若有甁一者如因陁羅釋迦憍尸迦其有因陁羅則有釋迦憍尸迦如是隨有處有一隨一處則有有隨甁處則有有若爾衣等諸物亦應是甁甁一故如是其有一物皆應是甁今甁衣等物悉應是一復次有常故甁亦應常復次若說有則說一復次一是數甁亦應是數復次甁五身一亦應五身若甁有形有一亦應有形有對若甁無常一亦應無常是名如一一切成
만약 곳곳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곳곳의 물단지 이것에도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사물 사물[事事]의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지금의 물단지는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할 때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이제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한다 해도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물단지도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의 내용이다.
만약 물단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존재를 말해야 하고 존재를 말하고자 한다면 물단지를 말해야 한다. 또 그대에 따르면 물단지가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와 단일성도 성립하고, 존재와 단일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물단지도 성립한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전도된다’의 내용이다. 여기서 네 쪽에 걸쳐서 단어를 풀이하고 있는데 번역할 만한 것이 못 된다.
016_0556_b_05L若處處有是中無甁今處處甁是亦無甁有不異故復次事事有不是甁今甁則非甁有不異故復次若說有不攝今說一甁亦不應攝一有不異故復次若有非甁甁亦非甁有不異故是名如一一切不成若欲說甁應說有欲說有應說甁復次汝甁成一亦成若有一成故甁亦應成以一故是名如一一切顚倒此中四紙辯名字無可傳譯
【외도】 사물은 존재와 단일성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사물은 존재이고 또한 단일성이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한다.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하는 곳이 모두 물단지인 것은 아니다. 또 만약 물단지를 말할 때 이미 존재와 단일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와 단일성을 말할 때 반드시 물단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016_0556_b_14L外曰物有一故無過修妒路
物是有亦是是故若有甁處必有有非有皆是甁復次若說甁當知已攝有非說有一必攝甁
【불자】 물단지에는 둘이 존재하는데 왜 둘에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왜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하는 곳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또 왜 존재와 단일성에 물단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016_0556_b_18L內曰甁有二故二無甁修妒路
若有甁一何故有處無甁復次云何說有一不攝甁
【외도】 물단지 속에 물단지의 존재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수투로
물단지 속의 물단지의 존재는 물단지와 상이하지 않지만 옷 등의 사물들과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이곳 저곳의 물단지 이것에 물단지의 존재가 존재하고 또한 이곳 저곳의 물단지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이곳 저곳의 존재가 존재하는 곳에 물단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016_0556_b_20L甁中甁有定故修妒路
甁中甁有與甁不異而異於衣物等是故在在處甁是中有甁有亦在在處甁有是中有非在在有處有甁
016_0556_c_01L【불자】 그렇지 않네. 물단지와 존재는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존재는 보편[總相]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믿고 만약 물단지를 말한다면 옷 등의 사물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특수[別相]이고 존재는 보편인데 어떻게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016_0556_c_01L內曰不然不異故修妒路
有是摠相何以故若說有則信甁等諸物若說甁不信衣等諸是故甁是別相有是摠相云何爲
【외도】 아버지와 아들과 같네.수투로
한 사람이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듯이 그렇듯이 보편은 또한 특수이기도 하고 특수는 또한 보편이기도 하다.
016_0556_c_05L外曰如父子修妒路
譬如一人亦子亦如是摠相亦是別相別相亦是摠
【불자】 그렇지 않네. 아들이기에 아버지이네.수투로
만약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면 아버지라 하지 않는다.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 아버지라 한다. 또 이 비유는 나에게 적합한 것이지 그대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016_0556_c_07L內曰不然子故父修妒路
若未生子名爲父子生然後爲父復次是喩同汝則非也
【외도】 물단지가 존재하네. 모두 믿기 때문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물단지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한다.
016_0556_c_09L外曰應有甁皆信故修妒路
世人眼見信有甁用是故應有甁
【불자】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에 모든 것이 없네.수투로
만약 물단지와 존재가 상이하지 않다면 물단지는 보편이지 특수가 아닐 것이다. 특수가 없기 때문에 보편도 없다. 특수가 있기 때문에 보편이 있는 것이다. 만약 특수가 없다면 보편이 없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없다.
016_0556_c_10L有不異故一切無修妒路
若甁與有不異者甁應是摠相非別相別相無故摠相亦無因有別相故有摠相若無別相則無摠相是二無故一切皆無
【외도】 마치 부분인 발 등을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부분인 머리나 발 등이 몸과 다르지 않지만 (머리나) 발만을 몸이라고 하지 않듯이 그렇듯이 물단지와 존재가 상이하진 않지만 물단지는 보편이 아니다.
016_0556_c_14L外曰如足分等名身修妒路
如頭足分等雖不異身非但足爲身如是甁與有雖不異而甁非摠相
【불자】 만약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왜 발을 머리라 하지 않는가?수투로
만약 부분인 머리나 발 등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발은 머리일 것이다. 이 둘은 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드라와 쌰끄라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드라는 쌰끄라이다.
016_0556_c_17L內曰若足與身不異何故足不爲頭修妒路
若頭足分等與身不異者足應是頭是二與身不異故如因陁羅釋迦不異故因陁羅卽釋迦
【외도】 부분들은 다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부분[分]과 전체[有分]는 다르지 않지만 부분과 부분은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발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016_0556_c_21L外曰諸分異故無過修妒路
分不異非分分不異是故頭足不一
016_0557_a_01L【불자】 만약 그렇다면 몸이 없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발이 머리와 다르다면 머리는 부분인 발 등과 다를 것이다. 그와 같이 단지 부분들만이 존재하고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을 몸이라고 한다.
016_0556_c_22L內曰若爾無身修妒路
若足與頭異頭與足分等異如是但有諸分更無有分名之爲身
【외도】 그렇지 않네. 많은 원인에서 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네. 색 등이 물단지이듯이.수투로
부분인 색 등의 많은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단지 색만을 물단지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색이 없을 때 물단지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분인 색 등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분인 발 등과 몸도 이와 같다.
016_0557_a_02L外曰不然多因一果現故如色等是甁修妒路
如色分等多因現一甁果此中非但色爲甁亦不離色爲是故色分等不爲一足分等與身亦如是
【불자】 색 등이 그렇듯 물단지도 동일한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다섯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한다면 부분인 색 등도 또한 동일한 것이리라. 색 등과 물단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016_0557_a_06L內曰如色等甁亦不一修妒路
若甁與色聲香味觸五分不異者不應言一甁若言一甁色分等亦應一色等與甁不異故
【외도】 군대와 숲과 같네.수투로
코끼리ㆍ말ㆍ수레ㆍ보병 많은 것들이 합하기 때문에 군대라 한다. 또 소나무ㆍ잣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합하기 때문에 숲이라 한다. 소나무만을 숲이라고 하지도 않지만 소나무가 없어도 숲이라고 하지 않는다. 군대도 그러하다. 그렇듯이 색 하나를 물단지라고 하지도 않지만 색이 없어도 물단지라고 하지 않는다.
016_0557_a_09L外曰如軍修妒路
若象馬車步多衆合故名爲軍又松柏等多樹合故名爲林非獨松爲林亦不離松爲林軍亦爾如是非一色名爲甁亦不離色爲甁
【불자】 무리[衆]도 또한 물단지와 같네.수투로
만약 소나무과 잣나무 등이 숲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숲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숲이라고 말한다면 소나무와 잣나무 등도 하나일 것이다. 숲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마디ㆍ꽃ㆍ잎 같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또한 군대 등과 같은 모든 사물도 다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016_0557_a_13L內曰衆亦如甁修妒路
松柏等與林不異者不應言一林言一林者松柏等亦應一與林不異故如松樹根莖枝節華葉亦應如是破如軍等一切物盡應如是破
【외도】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가 부분인 색 등이 많다고 말한다면37) 물단지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단지를 타파하려고 하면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게 된다.
016_0557_a_17L外曰多甁故修妒路
汝說色分等多修妒路
甁亦應是故欲破一甁而受多甁
【불자】 색 등이 많다고 해서 물단지가 많은 것이 아니네.수투로
나는 그대의 과실을 말한다.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스스로 부분인 색 등이 많다고 말한다면, 별도의 물단지[甁法]가 색 등의 결과가 되는 일은 없다.
016_0557_a_19L內曰色等多故甁多修妒路
我說汝過非受多汝自言色分等多無別甁法爲色等果
016_0557_b_01L【외도】 결과가 존재하네. 원인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존재하기에 결과가 성립하네.수투로
그대는 물단지라는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지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인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결과가 존재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은 극미[微塵]의 결과이다. 그대가 색 등을 인정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성립한다.
016_0557_a_22L外曰有果以不破因有因故果成修妒路
汝破甁果不破色等甁因若有因必有果無無果因復次色等甁因是微塵果汝受色等故因果俱成
【불자】 결과가 존재하지 않듯이 원인도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물단지는 색 등 많은 부분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물단지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이제 색 등 많은 부분들은 물단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색 등은 수다한 것[多]이 아니다. 또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결과가 타파되었기 때문에 원인도 저절로 타파된다.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세38)가 동일한 것이 되네.수투로
또 진흙덩어리[泥團]일 때는 현재이고 물단지일 때는 미래이고 진흙[土]일 때는 과거이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진흙덩어리 속에 물단지와 진흙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가 동일한 것이 된다. 이미 만든 것[已作], 지금 만들고 있는 것[今作], 앞으로 만들 것[當作], 만드는 자[作者] 이와 같은 말들이 없어지게 된다.
016_0557_b_02L內曰果無因亦無修妒路
如甁與色等多分不異故甁不應一今色等多分與甁不異故色等不應多又如汝言無無果今果破故因亦自破汝法因果一
復次三世爲一修妒路
泥團時現在時未來土時過去若因果一泥團中應有甁是故三世時爲一已作當作者如是語壞
【외도】 그렇지 않네. 원인과 결과는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네. 긴 것과 짧은 것이 그렇듯.수투로
긴 것에 의존해서[因] 짧은 것을 보고 짧은 것에 의존해서 긴 것을 보듯이 그렇듯이 진흙덩어리가 물단지를 상대할[觀] 때는 원인이고 진흙을 상대할 때는 결과이다.
016_0557_b_10L外曰不然因果相待成故如長短修妒路
如因長見短短見長如是泥團觀甁則是因觀土則是果
【불자】 다른 것에 의존하기에, 상반되기에,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에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또한 짦은 것 속에도 둘 속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긺[長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긴 것[長] 속에 존재하거나 잛은 것 속에 존재하거나 둘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짧은 것에 의존하기에 긴 것이라 한다. 짧은 것 속에도 또한 긺[長性]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반되기 때문이다. 만약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면 짧은 것이라 하지 않는다. 긴 것과 짧은 것 둘 속에도 또한 긺[長]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과실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짧음[短相]도 또한 이와 같다. 긺과 짦음이 존재하지 않은데 어떻게 서로 의존하겠는가?
016_0557_b_13L內曰因他相違共過故非長中長相亦非短中及共中修妒路
若實有長相若長中有若短中有若共中有是不可得何以故長中無長相以因他故因短故爲長短中亦無長性違故若短中有長不名爲短長短共中亦無長二俱過故若長中有若短中有先說有過短相亦如是若無長云何相待
百論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십이(十二): 십이부(十二部) 경전을 말한다.
  2. 2)가이라국[迦夷]: 범어 Kapila의 음역으로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이다.
  3. 3)바수(婆藪): 범어 Vasu의 음역으로 『백론』 주석을 지었다.
  4. 1)1)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의 4과(果)와 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의 4향(向)을 말한다.
  5. 2)원문에는 ‘외왈(外曰)’이라 하였는데 외도의 주장이다.
  6. 3)원문에는 ‘내왈(內曰)’이라 하였는데 외도에 대한 불교도의 입장을 밝힌 부분이다.
  7. 4)비쉬누(viṣṇu)신을 말한다. 우주의 유지(維持)를 담당하는 힌두교 제2의 신(神)이다.
  8. 5)한역문의 할주(割註)를 각괄호 안에 넣었다.
  9. 6)마헤슈와라(maheśvara)신을 말한다. 또는 쉬바(śiva)신. 우주의 창조와 파괴를 담당하는 힌두교 제3의 신(神)이다.
  10. 7)범어로는 까삘라(kapila)이고 상키야학파[數論] 학파의 초조(初祖)이다.
  11. 8)범어로는 울루까(ulūka)이고 와이쉐쉬까학파[勝論]의 초조(初祖)이다.
  12. 9)범어로는 리샤바(ṛiṣabha)이고 자이나교의 초조(初祖)이다.
  13. 10)범어로는 saṃkhyā-sūtra이고 수론(數論)의 경전이다.
  14. 11)범어로는 vaiśeṣka-sūtra이고 승론(勝論)의 경전이다.
  15. 12)12)승론종(勝論宗)에서 일체법을 분별하기 위하여 세운 6구의(句義)을 말한다. ①dravya[實], ②guṇa[德], ③karman[業], ④sāmānya[同], ⑤viśeṣa[異], ⑥samavāya[合] 등인데 실(實)은 실체, 덕(德)은 속성, 업(業)은 운동이나 행위, 동(同)은 보편, 이(異)는 특수, 합(合)은 결합으로 번역될 수 있다.
  16. 13)6구의(句義) 중에서 덕제(德諦)이다. 구나(求那)는 guṇa의 음역이다.
  17. 14)범어로는 nigaṇthasūtra이고 자이나교의 경전이다.
  18. 15)원문의 수투로(修妬路)는 stra[經]의 음역이다.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을 바수 개사(婆藪開士)의 석(釋)과 구별하기 위해 표시된 것이다.
  19. 16)범어로는 śrī이고 책의 초두에 이 말을 적어 놓는다.
  20. 17)범어로는 브리하스빠띠(bṛihaspati)이다.
  21. 18)자기와 타자를.
  22. 19)범어로는 hastin이다. 코끼리는 ‘손(hasta)을 갖는 것(in)’이란 뜻이다.
  23. 20)머리와 발을 뜻한다.
  24. 21)범어로는 웃라까(udraka)와 아라라(aḷāra)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이 두 선인(仙人)한테서 배웠다.
  25. 22)여기서는 5취(趣)를 뜻한다.
  26. 23)윤회를 뜻한다.
  27. 24)말을 희생으로 바치는 제사이다.
  28. 25)삼해탈문이란 해탈을 얻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일체 만유가 공하다고 관하는 공(空)해탈문, 상대적 차별의 모양이 없다고 관하는 무상(無相)해탈문, 일체의 것을 구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무작(無作) 또는 무원(無願)해탈문이 있다.
  29. 26)수론의 ‘puruṣa’와 승론의 ‘ātman’에 해당하는 말이다. ‘나’로 번역될 수 있는데, 특정한 술어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따옴표 안에 넣었다.
  30. 27)범어로는 prakṛti이고, 보통 ‘자성(自性)’으로 한역된다. 세계를 생성하게 하는 질료인이다.
  31. 28)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5경(境)이다.
  32. 29)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이다.
  33. 30)5지근(知根)과 5작근(作根)과 의근(意根)을 합하여 11근이라 한다. 5지근은 안(眼)근ㆍ이(耳)근ㆍ비(鼻)근ㆍ설(舌)근ㆍ신(身)근 등이고, 5작근은 설(舌)근ㆍ수(手)근ㆍ족(足)근ㆍ남녀(男女)근ㆍ대유(大遺)근 등이다.
  34. 31)인식[知]을 가리킨다.
  35. 32)‘나[神]’를 가리킨다.
  36. 33)논증이 성립하지 않아 지는 것이다.
  37. 34)감촉과 의지를 말한다.
  38. 35)‘나[我]’를 가리킨다.
  39. 36)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갖는 것.
  40. 37)원문에는 ‘수투로’라는 할주(割註)가 있는데 논서의 내용이 아닌 듯해서 번역하지 않았다.
  41. 38)과거ㆍ현재ㆍ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