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부처님과 위없는 크신 도(道)와 굳건한 마음으로 10지(地)에 머무르는 모든 보살들과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는 성문과 벽지불에게 공경하며 예배하옵니다. 이제 10지의 이치를 풀이하되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문】그대는 보살 10지의 이치를 해설하려 하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해설하는가? 【답】지옥(地獄)ㆍ축생(畜生)ㆍ아귀(餓鬼)ㆍ사람[人]ㆍ하늘[天] 및 아수라(阿修羅)의 여섯 갈래야말로 험난하고 두렵고 매우 무서운데, 이는 중생들의 나고 죽음의 큰 바다여서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업(業)을 따라서 오고 감은 바로 그의 센 물결이요, 흐르는 눈물과 젖과 땀과 고름과 피는 바로 나쁜 물의 더미요, 종기와 문둥병으로 바짝 마르고 피를 토해 똑똑 떨어뜨리며 상기(上氣)와 열병을 앓고 생인손[瘭疸]1)과 악창이 흘러 새며 토하고 배가 부르는 등의 이러한 갖가지 악한 병은 나쁜 나찰(羅刹)이 되고, 근심 슬픔과 괴로움은 물이 되며, 번거롭게 움직이면서 슬피 울부짖음은 물결 소리가 되고, 괴로워함의 모든 느낌은 옥초산(沃焦山)2)이 되며, 죽음은 물가의 낭떠러지가 되어서 뛰어넘을 수 있는 이가 없다. 여러 번뇌와 샘이 있는 업[有漏業]의 바람은 부추겨서 안정되지 않고 모든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은 속임수가 되며 어리석음과 무명(無明)은 아주 껌껌한 어두움이 되었다. 애욕을 따르는 범부는 끝없는 옛적부터 언제나 그 가운데를 다녔으니, 이와 같이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오가면서 일찍이 저 언덕에 이르게 되지 못하였다. 혹 이르렀던 이는 겸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었으니, 이 인연으로 보살 10지의 이치를 말한다. 【문】만약 사람이 보살의 10지를 닦고 행하지 못하면,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건널 수 없는가? 【답】만약 어떤 사람이 성문(聲聞)과 벽지불승(辟支佛乘)을 행하면, 이런 사람은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위없는 대승(大乘)으로써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건너려 하면, 이 사람은 반드시 10지를 두루 갖추어 수행하여야 한다. 【문】성문과 벽지불승을 행하는 이는 얼마 만에 나고 죽음의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는가? 【답】성문승을 행하는 이는 혹 1세(世)에 건널 수도 있고, 혹은 2세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 숫자를 넘기도 한다.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을 따르며, 또 전생부터 일찍이 행한 인연을 따르게 된다. 벽지불승을 행하는 이는 혹은 7세(世) 만에 건널 수도 있고, 혹은 8세 만일 수도 있다. 만약 대승을 행하는 이라면 혹은 1항하(恒河)의 모래만큼 많은 큰 겁이기도 하고, 혹은 2ㆍ3ㆍ4 내지 10ㆍ100ㆍ천ㆍ만ㆍ억 겁이기도 하며, 혹은 이 숫자를 넘은 연후에야 비로소 보살 10지를 두루 갖추어 수행하게 되어 부처님 도를 이룬다. 역시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을 따르고 또 전생부터 일찍이 행한 인연을 따르게 된다. 【문】성문과 벽지불 및 부처님께서 모두 저 언덕에 이른다 하면, 해탈하는 가운데서는 차별이 있는가? 【답】이 일은 마땅히 분별하여야 하겠다.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게 되는 이 가운데서는 차별이 없고 이 해탈로 인하여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는 이 가운데서도 역시 차별은 없으니,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처님의 매우 깊은 선정장해탈(禪定障解脫)과 일체법장해탈(一切法藏解脫)만은 모든 성문ㆍ벽지불과는 차별이 있어서 설명으로 다할 바가 아니며, 또한 비유로써 견줄 수도 없다. 【문】3승(乘)의 배우는 바가 모두 남음이 없는 열반을 위한 것이므로 만약 남음이 없는 열반 가운데서 차별이 없다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항하(恒河)의 모래만큼 많은 큰 겁 동안 나고 죽음에 오가면서 10지를 두루 갖추겠는가. 성문과 벽지불승으로써 빨리 모든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답】이 말이야말로 연약하고 졸렬하며, 이는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에 유익한 말이 아니다. 만약 모든 보살들이 그대의 작은 마음을 본받아서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의 뜻이 없으며 부지런히 힘써 10지를 닦을 수가 없다면, 여러 성문과 벽지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건널 수 있겠는가? 역시 3승에 차별이란 없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일체 성문과 벽지불은 모두가 부처님으로 말미암아 나오므로 만약 부처님께서 안 계신다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오겠는가? 만약 10지를 닦지 않는다면 어찌 부처님께서 계시겠으며, 만약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역시 가르침[法]과 승가[僧]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그대가 한 말은 곧 3보(寶)의 종자를 끊음이며, 이는 거룩한 이[大人]로서 지혜 있는 말이 아니므로 듣고 살필 것이 못된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세간에는 네 가지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이며, 둘째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이며, 셋째는 둘 다 같이 이롭게 하는 이며, 넷째는 둘 다 같이 이롭게 하지 않는 이다. 이 가운데서 둘 다 같이 이롭게 하는 이는 자비를 행하여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므로 상인(上人)이라 한다. 다음의 말과 같다.
세간은 가엾고 불쌍하여 언제나 저버리고 자기만을 이롭게 하여 한 마음으로 부유함과 즐거움을 구하며 삿된 소견의 그물에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서 여섯 갈래 안에서 헤매지만 크게 가엾이 여기는 모든 보살은 아주 뛰어나서 희유(希有)하니라.
중생들은 죽음이 닥쳐왔을 때 구호(救護)할 이가 없으므로 깊고 깜깜한 데 빠져 있으면서 번뇌의 그물에 얽매이게 되느니라.
만약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행할 수 있는 이라면 중생들의 짐을 걸머진 까닭에 그들 위해 중대한 임무를 맡느니라.
그 사람은 결정된 마음으로 혼자서 모든 고통 감수하면서 얻어지는 편안하고 고요한 과보를 일체에게 주어서 함께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시기를 제일이며 으뜸가는 사람이요. 또한 이런 분은 있기 드문 이라 하시니 공덕의 크나큰 창고[藏]이니라.
세간에선 언제나 말하기를 제 집에선 나쁜 아들 안 나리라 하나니 자기의 이익을 이룰 수 있을 뿐 남들은 이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착한 아들이 태어나서 남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이라면 이야말로 마치 만월(滿月)과 같아서 그의 집을 밝게 비추어 주리.
모든 복과 덕이 있는 사람은 가지가지의 인연으로써 이롭게 함이 마치 큰 바다와 같고 또한 마치 대지와 같으리라.
세간에서 구할 것이 없으면서도 자비로써 일부러 머무르나니 이 사람의 삶은 귀함이 되고 수명이 제일 으뜸가리라.
이와 같이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번뇌와 해탈이 비록 차별이 없다손 치더라도,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고 오랫동안 나고 죽음에 머무르면서 이롭게 하는 바가 많으며 보살 10지(地)를 두루 갖추는 일은 큰 차별이 있다. 【문】부처님께서는 큰 자비가 있어서, 그대 제자들을 위하여 갖가지로 칭찬하고 중생들을 사랑하며 가엾이 여기심이 진실로 하신 말씀과 같다. 그대는 갖가지 인연으로써 똑똑히 분별하여 깨우치고 인도해야 하리라. 자비를 행하는 이가 들으면 곧 마음이 깨끗해지리니, 나는 매우 기쁘도다. 그대는 앞의 게송에서 10지의 이치를 말하였으니, 원컨대 우리들을 위하여 해석하라. 【답】‘공경하며’라고 함은 공경하는 마음이며, ‘예배하옵고’라 함은 몸을 굽혀서 발에 댐이며, ‘일체의 부처님’이라고 함은 3세(世)와 시방의 부처님이시다. ‘위없는 크신 도’라고 함은 온갖 법을 실답게 알고 보고 통달하여 남음이 없을 뿐더러 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위없다’ 하며, 거룩한 이가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신 도’라고 한다. ‘보살들’이라고 함은 위없는 도를 위하여 마음을 내었으므로 보살이라고 한다. 【문】다만 마음만을 내었다고 하여 곧 이가 보살인가? 【답】어찌 마음만을 내었다고 하여 보살이 되겠는가.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을 내고서 반드시 위없는 도를 이룰 수 있어야 비로소 보살이라 한다. 혹은 마음만을 내면 역시 보살이라 하기도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처음에 내는 마음을 여의고서는 위없는 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새로 뜻을 내는 이를 보살이라 하나니, 마치 비구가 비록 아직은 도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도인(道人)이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를 명자(名字)만의 보살이라 하며 점차로 닦고 익히면 더욱 진실한 법을 이룬다. 뒤에 환희지(歡喜地)를 해석하는 가운데서 실다운 보살의 형상을 자세히 말하리라. ‘들’이라 함은 처음 마음을 내어서부터 금강의 걸림 없는 해탈의 도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보살들이므로, 이를 ‘들’이라 한 것이다. ‘굳건한 마음으로’라고 함은 마음이 마치 수미산과 같아서 꺾고 무너뜨릴 수 없고 또한 대지와 같아서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다 함이다. ‘10지에 머무름’이라 함은 환희지 등의 10지이니, 뒤에 자세히 설명하리라. 【문】만약 보살이라면 다시 훌륭한 공덕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굳건한 마음’만을 일컫는가? 【답】보살에게는 굳건한 마음의 공덕이 있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고 2승(乘)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연약한 이는 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나고 죽음에 있으면서 모든 괴로움을 받겠느냐. 빨리 성문과 벽지불승으로써, 속히 모든 고통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또 마음이 연약한 이는 활지옥(活地獄)과 흑승(黑繩)지옥ㆍ중합(衆合)ㆍ지옥ㆍ규환(叫喚)지옥ㆍ대규환(大叫喚)지옥ㆍ소자(燒炙)지옥ㆍ대소자(大燒炙)지옥ㆍ무간(無間)대지옥과 그리고 그의 권속인 탄화(炭火)지옥ㆍ불시(沸屎)지옥ㆍ소림(燒林)지옥ㆍ검수(劍樹)지옥ㆍ도도(刀道)지옥ㆍ동주(銅柱)지옥ㆍ자극(刺棘)지옥과 함하(鹹河)지옥 등에 있을 때, 그 안에서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며 칼ㆍ창ㆍ화살ㆍ쇠뭉치ㆍ쇠 소리가 울리는 마름쇠ㆍ작은 쇠 창ㆍ쇠 절구ㆍ쇠 절굿공이와 쇠 수레바퀴 따위의 이와 같은 죄를 다스리는 기물로써 베고 찍고 쪼개고 찌르고 몽둥이로 치고 껍질을 벗겨 찢으며 칼과 쇠사슬로써 결박하고서 태우고 지지면서 고문하며 그 몸을 갈고 부수고 찧어서 무르녹아 잘 익게 한다. 여우와 개ㆍ범ㆍ이리며 사자 등의 악한 짐승이 다투어 와서 물고 질질 끌면서 그 몸을 뜯어 먹으며, 까마귀와 솔개며 보라매ㆍ수리 등이 쇠 부리로 쪼아대고, 악한 귀신들이 내몰아쳐서 칼 나무에 닿게 하며, 불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면서 쇠로 된 불 수레로써 그의 목을 스치고 뻘건 쇠막대기를 따르게 하며 때린다. 천 개의 못으로 몸을 찌르고 칼로 깎아내며 아주 컴컴한 안에 연기가 뭉게뭉게 이는 냄새나는 곳에 넣고 달군 쇠로써 몸을 두드려 펴면서 그 살을 잘게 저미고 그 몸 가죽을 벗기며 도리어 손발을 매어 끓는 솥에 넣고서 그 몸을 통째로 굽고 삶으며 쇠몽둥이로 머리를 치면 뇌가 부서지고 눈이 튀어나오며 쇠꼬챙이에 꿰어놓고서 온 몸을 불로 태우면 흐르는 피가 땅에 물을 대듯 한다. 혹은 똥 강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칼과 창과 가시가 있는 나쁜 길을 다니게 하는데, 저절로 칼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마치 소나기 퍼붓듯 하면서 팔과 다리와 몸을 갈가리 찢는다. 맵고 짜고 쓰고 악취가 나는 강물에 그 몸을 담그면 살이 문드러져서 온몸이 떨어지며, 뼈만 남게 되면 옥졸이 끌어당겨서는 차고 밟고 치고 짓두드린다. 이와 같은 따위의 한량없는 모진 고통이 있는데도, 목숨은 아주 길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을 보거나 듣게 되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 한빙(寒氷)지옥ㆍ알부타(頞浮陀)지옥ㆍ니라부타(尼羅浮陀)지옥ㆍ아파파(阿波波)지옥ㆍ아라라(阿羅羅)지옥ㆍ아후후(阿睺睺)지옥ㆍ청련화(淸蓮華)지옥ㆍ백련화(白蓮華)지옥ㆍ잡색연화(雜色蓮華)지옥ㆍ홍연화(紅蓮華)지옥과 적연화(赤蓮華)지옥 등이니, 언제나 컴컴하고 크게 두려운 곳에 있게 된다. 성현을 헐뜯으면 그 안에 살게 되니, 형용은 마치 집채와 산과 언덕과도 같으며 거칠고 매서운 찬바람 소리는 사납고 두렵기 짝이 없다. 매우 애절하게 몸에 불어오면 마치 마른 풀이 구르듯 하고 살이 떨어짐은 마치 겨울의 잎사귀와 같다. 언 낫으로 상처를 내는지라 고름과 피가 흘러나와서 몸뚱이는 깨끗하지 못하여 더러운 것이야말로 참기조차 어려우며, 차가운 바람이 끊고 찢는지라 몹시 괴로워서 오직 근심과 슬픔과 통곡만이 있을 뿐이며, 다시 다른 마음이란 없다. 울부짖음과 외로움뿐이므로 의지하거나 믿을 데가 없나니, 이런 죄는 모두가 성현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연약한 이가 이런 일을 보거나 듣게 되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 축생인 돼지ㆍ개ㆍ야간(野干)ㆍ고양이ㆍ너구리ㆍ검은 원숭이ㆍ쥐ㆍ큰 원숭이ㆍ범ㆍ이리ㆍ사자ㆍ외뿔소[兕豹]ㆍ표범ㆍ곰ㆍ코끼리ㆍ말ㆍ소ㆍ염소와 지네ㆍ그리마[蚰蜒]ㆍ살무사ㆍ독사와 자라ㆍ거북이ㆍ물고기ㆍ교규(蛟虬)3)ㆍ고둥ㆍ 조개ㆍ까마귀ㆍ까치ㆍ솔개ㆍ올빼미ㆍ매ㆍ비둘기 등의 이와 같은 날짐승 길짐승은 서로 서로가 해친다. 또 포대기[襁]와 그물을 쳐놓고 엿보다가 잡아서는 찢어서 죽이는 것이 한 가지만이 아니다. 사로잡으면 곧 굴레를 씌워서 코를 뚫고 목을 묶어 수레를 끌게 하는데 채찍으로 치며, 그 몸을 찍고 찌르면 가죽과 살이 찢어져서 그 고통이야말로 참을 수가 없다. 연기를 씌우고 불로 태우는 모진 고통은 방법이 갖가지 이며, 죽으면 곧 가죽을 벗기고 그 살을 먹는 등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고통이 있다. 그 마음이 연약한 이가 이런 일을 보거나 들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 목이 바늘 같은 아귀[鍼頸餓鬼]와 입에서 불을 뿜는[火口] 아귀ㆍ큰 혹이 난[大癭] 아귀ㆍ게운 것을 먹는[食吐] 아귀ㆍ씻어 버린 찌꺼기를 먹는[食盪滫] 아귀ㆍ고름을 먹는[食膿] 아귀ㆍ똥을 먹는[食屎] 시아귀며 부타귀(浮陀鬼)ㆍ구반다귀(鳩槃茶鬼)ㆍ야차귀(夜叉鬼)ㆍ나찰귀(羅刹鬼)ㆍ비사사귀(毘舍闍鬼)ㆍ부단나귀(富單那鬼)ㆍ가라부단나귀(迦羅富單那鬼) 등의 여러 귀신에서는 수염과 머리칼이 쑥대강이 같이 흩어지고 긴 손톱과 발톱과 큰 코며 몸속에는 벌레가 많고 더러운 냄새는 두려울 만하다. 뭇 괴로움에 몹시 시달리고, 언제나 간탐과 질투와 배고프고 목마르는 괴로움과 근심이 있다. 일찍이 음식을 얻지도 못하고 얻어도 삼킬 수가 없다. 항상 피고름과 똥오줌과 눈물ㆍ침ㆍ찌꺼기 등의 깨끗하지 못한 것을 구하고, 힘 있는 자가 빼앗았다 하더라도 먹을 수가 없다. 벌거숭이로 옷이 없는지라 추위와 더위가 갑절 더 심하고, 매서운 바람이 몸에 불면 뒹굴면서 괴로워한다. 모기와 등에며 독한 벌레들이 그 몸을 깨물어 먹고 뱃속의 모진 배고픔은 늘 불이 타는 것과 같다. 그 마음이 연약한 이가 이런 일을 보거나 들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 인간 안에서는 은혜와 사랑이 이별하게 되는 고통과 원수와 미운 이가 만나게 되는 고통과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고통이며 가난하여 구걸하게 되는 고통 등 이와 같은 한량없는 뭇 고통이 있고, 여러 하늘과 아수라들도 쇠퇴하여 타락하게 되는 때의 고통이 있다. 그 마음이 연약한 이가 이런 모든 고통을 보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찌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만약 마음이 굳건한 이가 지옥ㆍ축생ㆍ아귀ㆍ하늘ㆍ사람과 아수라 중에서 모든 괴로움 받는 것을 보면,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두려워함이 없이 원을 세우되, ‘이 모든 중생들이 쇠망(衰亡)함ㆍ괴로움에 깊이 들어가 구호됨이 없고 돌아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나는 멸도(滅度)를 얻어서 이들을 제도하여야겠다’라고 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부지런히 행하고 힘써 나아가 오래지 않아서 소원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보살의 모든 공덕 가운데서 굳건한 마음이 첫째니라’하고 말하리라. 다음에 또, 보살은 여덟 가지의 법이 있어서 온갖 공덕을 능히 모으나니, 첫째는 크게 가엾이 여김이며, 둘째는 굳건한 마음이며, 셋째는 지혜이며, 넷째는 방편이며, 다섯째는 방일하지 않음이며, 여섯째는 부지런히 힘써 나아감이며, 일곱째는 언제나 생각을 굳게 지킴이며, 여덟째는 선지식(善知識)이다. 그러므로 처음 마음을 낸 이는 급히 여덟 가지 법을 행함을 마치 머리에 불타는 것을 구하듯이 하고서, 그런 뒤에 다른 공덕을 닦아야 한다. 또, 이 여덟 가지의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성문들의 4쌍(雙) 8배(輩)가 있나니, 이른바 수다원(須陀洹)4)에 나아감과 수다원 등이다. ‘벽지불로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는 이’라고 함은 세간에 부처님이 안 계시고 부처님 법이 없을 때에 도를 얻는 이를 벽지불이라 하며, 모든 성현들은 나와 내 것이라는 탐착을 떠났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이 없는 이라고 한다. ‘이제 10지의 이치를 풀이하되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따르겠다’라고 함은 『십지경(十地經)』에서 차례로 설명하겠다. 이제 차례를 따라서 자세히 해설하리라. 【문】그대가 말한 것은 경전에서와 다름이 없다. 경전에서 이치가 이미 이루어졌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가? 스스로 뛰어난 것을 나타내서 명리(名利)를 구하려 함이 아닌가?
【답】나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글과 말을 장엄한 것 아니며 또한 이양(利養)을 탐내어 이 논(論)을 짓는 것도 아니니라.
【문】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이 논을 짓는가?
【답】나는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며 다른 인연 때문에 이 논(論)을 짓는 것이 아니니라.
중생들이 여섯 갈래에서 고통을 받는데도 구호됨이 없음을 보고, 이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혜의 힘으로써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의 힘을 나타내서 명리를 구하기 위함이 아닐뿐더러 시샘하며 제가 높은 체 하는 마음으로 공양(供養)을 구하는 것도 없다. 【문】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며 이롭게 하는 일이야 경전 가운데서 이미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해설하여 한갓 스스로 수고할 필요가 있는가?
【답】다만 부처님의 경전만을 보고서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를 통달하는 이도 있고 잘 해석해 줌을 얻고서야 진실한 이치를 아는 이도 있느니라.
영리한 근기와 깊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깊은 경전을 듣고 곧 첫째가는 이치[等一義]를 통달할 수 있다. 이른바 ‘깊은 경전’이라 함은 곧 이는 보살 10지이며, ‘첫째가는 이치’라 함은 곧 이는 10지의 실다운 이치이다. 여러 논사(論師)들은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논의(論議)를 지어서 말과 글귀를 장엄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하여 10지의 이치를 통달하게 되는 이가 있다. 다음의 말과 같다.
어떠한 사람은 화려하게 꾸며서 장구(章句)를 장엄함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게송을 좋아하는 이도 있으며 여러 가지로 된 글귀[雜句]를 좋아하는 이도 있고
비유와 인연을 좋아하여 알게 되는 이도 있게 되나니 좋아하는 바가 각각 같지 않으므로 나는 그에 따르면서 버리지 않느니라.
‘장구’라 함은 구절의 뜻을 장엄한 것이며, 게송으로 된 것이 아니다. ‘게송’이라 함은 의미[義趣]를 말하는 것으로 말씨가 여러 글귀로 되어 혹은 네 마디와 다섯 마디와 일곱 마디 등으로 되기도 한다. 게송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4구게(句偈)인데 파자(波蔗)라 하고, 둘째는 6구게인데 기야(祇夜)라 한다. ‘여러 가지로 된 글귀’라 함은 똑바로 말 그대로 하는 것이다. ‘비유’라 함은 사람들이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비유를 빌어다 알게 하니, 비유에는 진실인 것도 있고 거짓인 것도 있다. ‘인연’이라 함은 그 까닭을 찾아내어 그 좋아한 바를 따르면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문】중생들 스스로의 좋아하는 바가 같지 않은데, 그대는 어떤 일을 좋아하는가? 【답】나는 위없는 도의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일체를 버리지 않고 힘을 따라 이롭게 하되, 혹은 재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법으로써 하기도 한다. 다음의 말과 같다.
만약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이 이와 같은 경전을 듣게 된다면 다시 해석할 필요도 없이 곧 10지의 이치를 알리라.
만약 복과 덕이 있고 근기가 영리한 이라면 바로 이 『십지경』을 듣기만 하고서도 즉시 그 이치를 이해하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이 논을 지은 것은 아니다. 【문】어떠한 이를 착한 사람이라 하는가? 【답】만약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곧 스스로 이해할 수 있나니, 마치 장부는 쓴 약을 먹을 수 있으나 어린이라면 꿀을 섞게 됨과 같다. 착한 사람에게는 간략히 말하여 열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믿음[信]이며, 둘째는 힘써 나아감[精進]이며, 셋째는 생각함[念]이며, 넷째는 선정[定]이다. 다섯째는 착한 몸의 업[善身業]이며, 여섯째는 착한 입의 업[善口業]이며, 일곱째는 착한 뜻의 업[善意業]이다. 여덟째는 탐냄이 없음[無貪]이며, 아홉째는 성냄이 없음[無恚]이며, 열째는 어리석음이 없음[無癡]이다. 다음의 말과 같다.
어떤 사람에겐 경전의 글이 읽거나 외움에 어려울 수 있으므로 만약 비바사(毘婆沙)를 짓게 된다면 이런 사람에겐 크게 이로우리라.
만약 사람으로서 근기가 둔하고 게으른 이라면 경전의 글이 어렵기 때문에 읽거나 외울 수가 없다. ‘어렵다’ 함은 글이 많아서 외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장엄한 말과 섞여 꾸민 비유며 여러 게송들을 좋아함이 있으면 이런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짐짓 이 논을 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먼저 말한 ‘부처님 경전만으로도 곧 족히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거늘, 무엇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한 그 말은 옳지가 않다. 다음의 말과 같다.
사유하면서 이 논을 지으며 착한 마음을 깊이 내어서 이 법의 불을 켜기 때문에 부처님께의 견줄 데 없는 공양이니라.
나는 이 논을 지을 때에 사유하고 분별하여 3보(寶)와 보살들을 많이 생각하였다. 또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깊이 착한 마음을 내었으니, 곧 이는 자기를 이롭게 한 것이다. 또 이 바른 법을 널리 펴 말하여 밝게 비추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의 견줄 데 없는 공양이 되었나니, 곧 이는 남을 이롭게 한 것이다. 다음의 말과 같다.
법을 말하여 법의 등불을 켜고 법의 당기를 세웠나니 이 당기야말로 바로 성현의 미묘한 법의 제 모습[印相]이니라.
나는 이제 이 논을 지으매 진리[諦]와 버림[捨]과 적멸(寂滅)과 지혜[慧]의 이 네 가지의 공덕들이 저절로 닦이고 모이느니라.
이제 이 논을 지음에 이 네 가지의 공덕이 저절로 닦이고 모이나니, 그러므로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진리’라 함은 온갖 진실한 것으로서 그를 진리라 한다. 온갖 진실한 것 가운데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하나니, 변하거나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처님의 법을 해설하므로 곧 진리가 모이는 곳이다. ‘버림’이라 함은 보시를 말함이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법의 보시[法施]와 재물의 보시[財施]이다. 두 가지 보시 가운데서 법의 보시가 더 훌륭하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법의 보시를 하여야 하고, 둘째는 재물의 보시를 하여야 한다. 두 보시 가운데서 법의 보시가 더 훌륭하다”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법의 보시를 할 때에 바로 버림이 모이는 곳이다. 내가 또 10지의 이치를 말할 때에 몸ㆍ입ㆍ뜻의 나쁜 법이 없고, 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생각과 모든 그 밖의 번뇌까지도 일으키지 않아 이런 허물을 막기 때문에 바로 적멸이 모이는 곳이라 한다. 남을 위하여 법을 해설하여 큰 지혜의 과보를 얻나니, 이 설법 때문에 곧 지혜가 모이는 곳이다. 이와 같이 이 논을 지음에 이 네 가지의 공덕이 모인다. 다음에 또 말한다.
나는 『십지론(十地論)』을 말할 적에 그 마음이 청정함을 얻고 이런 마음을 깊이 탐내기 때문에 부지런히 힘쓰며 게으르지 않다.
만약 사람이 듣고 받아 지니면 마음이 깨끗한 이일 것이니 나는 또한 깊이 이를 즐겨서 한 마음으로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게송의 그 뜻은 이미 나타냈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의 마음과 다른 이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이 10지의 이치를 지은 것이며, 깨끗한 마음이 이르러야 할 데에 이르면 큰 과보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가류타이(迦留陀夷)5)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阿難)을 원망하지 말라. 만약 내가 아난에게 수기(授記)하지 않아도 내가 열반한 뒤에 아라한이 되면 이 깨끗한 마음의 업과 인연 때문에 장차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 일곱 번 왕이 되리라”고 하심과 같으니, 경전 가운데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2. 입초지품(入初地品)
【문】그대가 이런 말을 하여 나의 마음을 깨우쳤으니, 매우 기쁘다. 이제 10지를 해설하면 반드시 이익된 것이 많으리라. 무엇이 10지인가?
【답】이 가운데 10지의 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을 위하여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 말씀하시며 장차도 말씀하시리라.
초지의 이름은 환희지(歡喜地)요 둘째의 이름은 이구지(離垢地)요 셋째의 이름은 명지(明地)라 하며 넷째의 이름은 염지(焰地)이니라.
다섯째의 이름은 난승지(難勝地)요 여섯째의 이름은 현전지(現前地)요 일곱째의 이름은 심원지(深遠地)이며 여덟째 이름은 부동지(不動地)이니라.
아홉째의 이름은 선혜지(善慧地)요 열째의 이름은 법운지(法雲地)이다. 10지의 형상을 따로따로 나누어 다음에서 자세히 말하리라.
‘이 가운데’라 함은 대승의 이치 가운데이며, ‘10[十]’이라 함은 숫자의 법이며, ‘지(地)’라 함은 보살의 착한 뿌리인 계급으로서 머무르는 곳이다. ‘모든 부처님’이라 함은 시방(十方)과 3세(世)의 모든 여래요, ‘말씀하셨다’ 함은 열어 보이면서 풀이하셨다 함이며,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이라 함은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인 여러 보살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보살을 부처님의 제자라 한 것이며, 과거와 미래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가 이 10지를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며 장차도 말씀하시리라고 한다. 보살이 초지에 있어서 비로소 좋은 법의 맛을 얻고 마음에 기쁨이 많기 때문에 환희지(歡喜地)라 한다. 제2지 중에서는 열 가지 착한 길을 행하여 모든 때[垢]를 여의기 때문에 이구지(離垢地)라 한다. 제3지 중에서는 널리 배움이 많고 대중을 위하여 법을 말하며 광명을 비출 수 있기 때문에 명지(明地)라 한다. 제4지 중에서는 보시와 지계와 많이 들음[多聞]이 더욱 더 늘고 거룩한 덕이 왕성하기 때문에 염지(焰地)라 한다. 제5지 중에서는 공덕의 힘이 왕성하여 온갖 악마들이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난승지(難勝地)라 한다. 제6지 중에서는 악마의 일을 막은 뒤에 모든 보살의 도와 법이 모두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현전지(現前地)라 한다. 제7지 중에서는 삼계를 떠나 멀고 법왕(法王)의 지위에 가까웠기 때문에 심원지(深遠地)라 한다. 제8지 중에서는 하늘과 악마ㆍ범천ㆍ사문이며 바라문들이 그의 서원(誓願)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부동지(不動地)라 한다. 제9지 중에서는 그 지혜가 점차로 밝고 고르며 부드러움이 더욱 왕성해지기 때문에 선혜지(善慧地)라 한다. 제10지 중에서는 보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서 한꺼번에 법의 비를 내릴 수 있음이 마치 겁소(劫燒) 후에 큰 비를 널리 쏟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운지(法雲地)라 이름한다. 【문】이미 10지의 이름을 들었으니, 이제 어떻게 초지에 들어가며 지(地)를 얻을 적의 모습과 지를 닦고 익히게 되는가?
【답】혹은 두터이 착한 뿌리 심고 모든 행(行)을 잘 행하며 온갖 소용되는 자량[資用]을 잘 모으고 모든 부처님께 잘 공양하며
잘 아는 이[善知識]의 수호를 받고 깊은 마음을 두루 갖추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으로 중생을 생각하고 위없는 법을 믿고 이해하나니
이 여덟 가지의 법을 갖춘 뒤에는 스스로 서원을 세워 말하되 나 자신이 제도가 된 뒤에 다시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겠다고
열 가지 힘[十力]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정취(定聚)에 들어가며 곧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모든 허물과 잘못이 없으며
곧 세간의 길이 바뀌어서 세간을 벗어나는 으뜸가는 길에 든다. 이로써 초지를 얻게 되나니 이 자리의 이름이 환희지니라.
‘두터이 착한 뿌리[善根]를 심는다’ 함은 법답게 모든 공덕을 닦고 모으는 것을 두터이 착한 뿌리를 심음이라 한다. 착한 뿌리라 함은,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음이니, 온갖 선법은 이 세 가지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착한 뿌리라 한다. 온갖 나쁜 법은 모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서부터 생기나니,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착하지 못한 뿌리[不善根]라고 함과 같다. 아비달마[阿毘曇] 중에서 갖가지로 분별하였나니, “욕심세계의 얽매임[欲界繫]ㆍ형상세계의 얽매임[色界繫]ㆍ무형세계의 얽매임[無色界繫]과 얽매임이 아닌 것[不繫]을 합쳐서 열두 가지이다. 마음과 상응함[心相應]이 있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心不相應]이 있음을 합치면 스물네 가지이다. 이 중에서 샘이 없는 착한 뿌리[無漏善根]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닦고 모으며, 나머지는 아홉의 보살지(菩薩地) 중에서 닦고 모은다. 또 아직 마음을 내지 못하였을 때에도 오랫동안 닦고 모으며, 혹은 한 마음 가운데에 셋이 있기도 하고 혹은 한 마음 가운데에 여섯이 있기도 하고 혹은 한 마음 가운데에 아홉이 있기도 하고 혹은 한 마음 가운데에 열둘이 있기도 하다. 혹은 마음과 상응함만으로 모으기도 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으로는 모으지 않기도 하며, 혹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으로 모으고 마음과 상응함으로는 모으지 않기도 하며, 혹은 마음과 상응함으로 모으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으로도 모으기도 하며, 혹은 마음과 상응하거나 마음과 상응하지 않거나 간에 모으지 않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착한 뿌리의 분별이며, 아비달마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 중의 착한 뿌리는 중생들을 위하여 위없는 도를 구하기 때문에 행하는 바 모든 선법이면 모두 착한 뿌리라 하며, 살바야지(薩婆若智:一切智)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착한 뿌리라 한다. ‘모든 행을 잘 행한다’의 ‘잘 행함’이란 깨끗하다 함이며, ‘모든 행’이라 함은 계율을 지닌다 함이다. 깨끗하게 계율을 차례대로 행하나니, 이 지니는 계율이 일곱 가지 법[七法]과 화합하기 때문에 ‘잘 행함’이라 한다. 무엇이 일곱 가지 법인가? 첫째는 제부끄러움[慚]이며, 둘째는 남부끄러움[愧]이며, 셋째는 많이 들음[多聞]이며, 넷째는 힘써 나아감[精進]이며, 다섯째는 생각[念]이며, 여섯째는 지혜[慧]이며, 일곱째는 깨끗한 생활[淨命]과 깨끗한 몸과 입의 업[淨身口業]이다. 이 일곱 가지 법을 행하면서 모든 계율을 갖추어 지니는 것을 바로 모든 행을 잘 행함이라 한다. 또 경전에서 “모든 선정이 행할 곳[行處]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선정을 얻으면 모든 행을 잘 행한다고 할 것이다. 이 논 중에서는 반드시 선정으로써 비로소 마음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모두가 역시 마음을 내었으나 반드시 선정에 있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또 속인이 집에 있은 것도 역시 ‘행’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소용되는 자량[資用]를 잘 모은다’고 함은 위의 게송 중에서 말한 ‘두터이 착한 뿌리를 심고’, ‘모든 행을 잘 행하며’, ‘부처님께 많이 공양하고’, ‘잘 아는 이의 수호’, ‘깊은 마음을 두루 갖추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을 생각하고’, ‘위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다’라는 등의 이것을 ‘소용되는 자량’이라고 한다. 또 선법을 본래 행함에는 반드시 수행하여야 하므로 역시 소용되는 자량이라고 한다. 이른바 보시(布施)하고 인욕(忍辱)하며 질박하여 마음에 아첨이 없으며 유순하고 온화하게 같이 머무르며 성내거나 원망하는 성질이 없고 다 없애서 허물을 숨기지 않으며 편벽되게 고집하지 않고 패려궂거나 사납지[很戾] 않으며 다투지 않고 스스로 뽐내지 않고 방일하지 않으며 교만을 버리고 괴팍스러움을 떠나며 제 몸을 칭찬하지 않고 일을 참고 견디며 결정된 마음으로 과감하게 받아낼 수 있으며 가르쳐 준 것을 버리거나 바꾸지 않고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한 줄 알며 혼자 있기를 즐기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법을 따르며 행하고 나면 점차로 아주 훌륭한 공덕을 두루 갖출 수 있다. 이 법맛[法味]은 굳고 단단하기 때문에 본래의 행[本行]이라 한다. 만약 이 법을 여의면 훌륭하고 미묘한 공덕에 나아가거나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본래의 행이 여덟 가지 법과 화합하기 때문에 초지(初地)의 소용되는 자량이 된다. ‘모든 부처님을 잘 공양한다’ 함은 만약 보살이면 세상마다 법답게 늘 모든 부처님께 많은 공양을 하였을 것이다. 공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세하거나 간략하거나 간에 대승의 바른 법이면 잘 듣는 것이며, 둘째는 네 가지 일로써 공양하고 공경 예배하여 모시는 것 등이다. 이 두 가지 법을 갖추어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모든 부처님을 잘 공양한다’고 한다. ‘잘 아는 이[善知識]’라 함은 보살에게 비록 네 가지의 잘 아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중에서 말하는 바는 잘 가르쳐서 대승에 들어가고 모든 바라밀(波羅密)를 갖추며 10지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이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보살 및 성문들이라야 대승의 법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여 물러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수호한다’ 함은, 언제나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고 가르쳐서 착한 뿌리가 더욱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수호한다’고 한다. ‘깊은 마음을 두루 갖춘다’ 함은 불승(佛乘)과 위없는 대승[無上大乘]이며 일체지승(一切智乘)을 깊이 즐기는 것을 ‘깊은 마음을 두루 갖춘다’고 한다. 【문】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화합품(和合品)」중에서 사리불(舍利弗)에게 말하였다. “모든 보살의 온갖 내는 마음[發心]은 모두가 깊은 마음이라 하리라. 1지(地)로부터 1지에 이르기 때문에 나아감의 마음[趣心]이라 하고, 공덕을 더욱 불리기 때문에 뛰어남의 마음[過心]이라 하며, 위없는 일을 얻기 때문에 꼭대기의 마음[頂心]이라 하고, 으뜸가는 법을 포섭하여 가지기 때문에 으뜸가는 마음[上心]이라 하며, 현재에 모든 부처님 법을 얻기 때문에 앞에 나타나는 마음[現前心]이라 하고, 이익되는 법을 모으기 때문에 반연함의 마음[緣心]이라 합니다. 일체 법을 통달하기 때문에 건너감의 마음[度心]이라 하고, 원하는 바에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결정된 마음[決定心]이라 하며, 원한 바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기쁨의 마음[喜心]이라 하고, 몸소 스스로 이룩하기 때문에 짝이 없음의 마음[無侶心]이라 하며, 헐고 무너짐을 떠나기 때문에 조화된 마음[調和心]이라 하고, 모든 악이 없기 때문에 선한 마음[善心]이라 합니다. 나쁜 사람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잡스럽지 않은 마음[不雜心]이라 하고, 머리로써 보시하기 때문에 버리기 어려운 마음[難捨心]이라 하며, 계율을 깨뜨린 사람을 구제하기 때문에 어려운 계율 가지는 마음[持難戒心]이라 하고, 비열함과 악하게 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참기 어려운 마음[難忍心]이라 합니다. 열반을 얻고 능히 버리기 때문에 정진하기 어려운 마음[難精進心]이라 하고, 선정을 탐내지 않기 때문에 선정하기 어려운 마음[難禪定心]이라 하며, 도를 돕는 착한 뿌리에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지혜롭기 어려운 마음[難慧心]이라 하고, 온갖 일을 능히 이루기 때문에 모든 행에 건너감의 마음[度諸行心]이라 하며, 지혜로써 잘 생각하기 때문에 잘난 체하거나 크게 잘난 체하거나 거만함을 떠난 마음[離慢大慢我慢心]이라 하고, 갚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이는 온갖 중생들의 복밭의 마음[一切衆生福田心]이라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깊은 법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마음[無畏心]이라 하고, 막히고 거리끼지 않기 때문에 공덕을 불리는 마음[增功德心]이라 하며, 언제나 힘써 나아가기 때문에 그지없는 마음[無盡心]이라 하고, 무거운 짐을 받아질 수 있기 때문에 번민하지 않는 마음[不悶心]이라 합니다.” 또 ‘깊음 마음’이란 뜻에는, 중생을 평등하게 생각하고 널리 온갖 것을 사랑하며 어질고 착한 이에게 공양하고 악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스승과 어른을 존경하고, 구제할 이 없는 이를 구제하며 돌아갈 데 없으면 돌아가게 하고 살 데가 없으면 살 수 있게 하며 마지막[究竟]이 없는 이에게는 마지막을 짓게 하고 짝이 없는 이에게는 짝이 되어 주며, 굽은 사람들 안에서는 정직한 마음을 쓰고 못된 사람들 안에서는 참되고 바른 마음을 쓰며 아첨하는 사람들 안에서는 아첨 없는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이들 안에서는 은혜를 알도록 하고 지을 줄 모르는 이들 안에서는 지을 줄 알도록 하며 이익 없는 이들 안에서는 이익을 잘 행하고 삿된 중생들 안에서는 바른 행을 행하며 교만한 사람들 안에서는 교만이 없는 행을 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들 안에서는 성내지 않으며 죄 지은 중생들 안에서는 항상 수호하는 이가 되고 중생들에게 허물이 있더라도 그 과실을 보지 않으며, 복밭에 공양하고 가르침을 따라서 교화받기에 어렵지 않으며 아련야(阿練若) 처소에서 힘써 정진하고 이양을 구하지 않으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다음에 또, 속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속여 흐림이 없고 착한 입의 업 때문에 자신을 칭찬하지 않으며 그치고 족한 줄을 알기 때문에 위력으로 협박하지 않고 마음에 때[垢]가 없기 때문에 부드럽고 온화하며 착한 뿌리를 모으기 때문에 나고 죽음에 들어갈 수 있고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을 참는 것이다. 보살은 이러한 깊은 마음의 형상들이 있으므로 다하거나 끝이 있을 수 없거늘 그대는 이제 다만 ‘깊은 마음’이라는 형상만을 말하니, 어찌 적지 않다 하겠는가? 【답】적지 않다. 무진의(無盡意)는 온갖 깊은 마음의 형상을 통틀어 한 곳에서 말하였으며, 이 중의 것은 여러 지위[地]에 분포되어 있어서 이 『십지경』에는 지위마다 따로따로 깊은 마음의 형상을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여러 지위에 따라서 모두 깊은 마음을 얻으며, 깊은 마음의 이치는 곧 그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제 초지 중에서는 두 가지의 깊은 마음을 말한다. 첫째는 큰 서원을 내는 것이며, 둘째는 정지(定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지를 따르고 있는 것이 깊은 마음을 잘 말한다 함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어찌 적지 않다 하겠는가’라고 말한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중생을 가엾이 여긴다’ 함은 가엾이 여김[悲]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는 이[悲者]라 한다. 무엇을 가엾이 여김이라 하는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이다. ‘모든 으뜸가는 법을 믿고 이해한다’ 함은 모든 부처님 법에 믿음의 힘으로 통달한다는 것이다. 서원을 세우면서 ‘나 자신이 제도가 된 뒤에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겠다’라고 함은 온갖 법에서 서원이 그 근본이 된다. 서원을 여의면 이룩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서원을 세운다. 【문】무엇 때문에 ‘나는 중생들을 제도해야겠다’라고 말하지 않고서 ‘자신이 제도가 된 뒤에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겠다’고 말하는가? 【답】자신이 아직 제도되지 못했으면 남을 제도할 수 없다. 마치 사람 자신이 흙탕에 빠져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 있겠는가? 또 마치 물에 떠다니면서 빠진 이를 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제도된 뒤에 남을 제도해야겠다’고 한다. 다음의 말과 같다.
어떤 사람 자신이 두려움을 건넜으면 귀의(歸依)하는 이를 건네줄 수 있겠지만 제가 아직 의심과 뉘우침을 건너지 못하고서 어찌 귀의한 이를 건네 줄 수 있겠는가?
만약 사람 스스로가 착하지 못하면 남을 착하게 할 수가 없으며 만약 스스로 적멸(寂滅)하지 않으면 어찌 남을 적멸하게 할 수 있으리.
그러므로 먼저 자신이 잘 적멸하고서 그 뒤에 남을 교화하게 된다. 또「법구게(法句偈)」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자신이 몸을 편히 하여 착한 곳에 있을 수 있는 이가 그런 뒤에 다른 사람 편안히 하면 스스로 이로운 바가 같아지리라.
무릇 만물은 먼저 자기를 이롭게 하고서야 그 뒤에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무슨 까닭인가? 다음의 말과 같다.
자기의 이익을 이룬다면 비로소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나니 자신은 버리고 남을 이롭게 하려 하면 이익을 잃은 뒤에 근심하고 뉘우치리.
그 때문에 ‘자신이 제도가 된 뒤에 중생을 제도해야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문】어떠한 이익되는 일을 얻어야 이 일을 이루고 필정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 어떠한 마음으로써 이런 서원을 낼 수 있는가? 【답】부처님의 열 가지 힘[十力]을 얻어야 이 일을 이루고 필정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런 서원을 낼 수 있다. 【문】어떤 것이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인가? 【답】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의 인과(因果)를 모두 환히 통달하시나니 첫째의 힘이라 하며,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일으키는 업과 과보를 사실대로 아시나니 둘째의 힘이라 하며, 모든 선정과 삼매(三昧)를 알고 더러움ㆍ깨끗함ㆍ들어감ㆍ나옴 등의 모습을 사실대로 분별하시나니 셋째의 힘이라 하며,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넷째의 힘이라 하며, 중생들의 좋아하는 바가 같지 않음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다섯째의 힘이라 하며, 세간의 가지가지 다른 성품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여섯째의 힘이라 하며, 온갖 처소에 이르는 길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일곱째의 힘이라 하며, 전생의 일을 아시나니 여덟째의 힘이라 하며, 나고 죽음의 일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아홉째의 일이라 하며, 번뇌[漏]가 다하는 일을 사실대로 아시나니 열째의 힘이라 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을 얻기 위하여 큰마음으로 서원을 세우면 곧 필정지에 들게 된다. 【문】무릇 처음에 내는 마음이면 모두가 이와 같은 모습이 있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내는 마음에 곧 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일만은 응당 분별하여야 하며 일정하게 대답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모든 보살이 처음 마음을 낼 때에 모두가 필정지에 당연히 들어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처음 마음을 낼 때에 바로 필정지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점차로 공덕을 닦기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 같은 이는 처음 마음을 낼 때에 정지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뒤에 공덕을 모으고 닦다가 연등불(燃燈佛)을 만나고서야 정지에 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모든 보살이 처음 마음을 내면 곧 정지에 든다’라고 하는 이것은 삿된 이론이다. 【문】만약 이것이 삿된 이론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대는 ‘이 마음으로써 정지에 들어간다’라고 말하는가? 【답】어떤 보살은 처음 마음을 내어 즉시 정지에 들어가서 이 마음으로써 초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사람 때문에 ‘처음 마음을 내어 정지 안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이 보살의 처음 마음과 석가모니부처님의 처음 낸 마음인 이런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답】이 마음은 온갖 번뇌에 섞이지 않았고 이 마음은 계속하여 다른 법[乘]을 탐내지 않으며, 이 마음은 굳고 단단하여 온갖 외도로서 이길 수 있는 이가 없고, 이 마음은 모든 악마들이 파괴할 수 없으며, 이 마음은 언제나 착한 뿌리를 모을 수 있고, 이 마음은 함이 있음[有爲]은 무상한 것인 줄 알 수 있으며, 이 마음은 움직임이 없어서 부처님 법을 포섭할 수 있고, 이 마음은 가림[覆]이 없어서 모든 삿된 행을 떠났다. 이 마음은 편안히 머물러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견줄 데가 없어서 서로 어김이 없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금강과 같아서 모든 법을 통달하였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다하지 않아 그지없는 복덕을 모으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평등하여 일체 중생을 똑같이 여기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높고 낮음이 없어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깨끗하여 성품에 때가 없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때[垢]를 떠나서 지혜가 빛나고 밝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허물이 없어서 깊은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넓고 인자하기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커서 일체 중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서 장애 없는 지혜에 이르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두루 이르러서 크게 가엾이 여김을 끊지 않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끊어지지 않아 바르게 회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온갖 나아가 향하는 바가 지혜로운 이의 칭찬을 받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볼 만하므로 소승(小乘)이 우러러 쳐다보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보기 어려워서 일체 중생으로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깨뜨리기 어려워서 부처님의 법에 잘 들 수 있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머무르는 데가 되어 온갖 즐거운 도구가 머무르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장엄한 복덕의 소용되는 자량[資用]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선택한 지혜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순박하고 두터운 보시로써 소용되는 자량이 되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큰 서원으로 지니는 계율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꺾기 어려운 정진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이기기 어려운 정진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은 고요히 사라진 선정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괴롭게 하는 것이 없는 지혜의 소용되는 자량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성냄이 없어서 인자한 마음이 깊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뿌리가 깊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두텁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즐겁고 기쁜 마음이 두텁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에 움직이지 않아 평등한 마음이 두텁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보호하고 생각하시는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 때문이며, 이 마음은 계속되어 3보(寶)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들은 처음의 필정지의 마음을 장엄하기 때문이니, 「무진의품(無盡意品)」중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마음은 온갖 번뇌에 섞이지 않았다’ 함은 견도위(見諦:見道位)와 사유(思惟:修道位)에서 끊어진바 294의 번뇌가 마음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음은 계속하여 다른 법[乘]을 탐내지 않는다’라고 함은 처음의 마음으로부터 서로 이어 오면서 성문승과 벽지불승을 탐내지 않고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만을 위하는 까닭에 계속하여 다른 법을 탐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40글귀의 이론들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문】그대는 ‘이 마음은 항상하고, 온갖 함이 있는 법은 모두 무상하다’고 말하는데,『법인경(法印經)』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는 세간이 공(空)이므로 항상하거나 변하여 무너지지 않음이 없는 줄 살필지니라”라고 하셨다. 이런 일과는 어찌 서로 틀리지 않다 하겠는가? 【답】그대는 이 뜻에 바른 이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힐난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는 ‘마음이 항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중에서 입으로는 ‘항상하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항상’이라는 뜻은 필정지의 처음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언제나 모든 착한 뿌리를 모으되 쉬지도 않고 그만두지도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하다’라고 한 것이다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라고 함은 ‘여래의 집’이란 곧 이는 부처님의 집이다. ‘여래’라 함의 ‘여(如)’는 진실이라는 것이며 ‘래(來)’는 이르렀다 함이니, 진실한 가운데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이른바 열반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진실이라 한다. 경전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첫째가는 거룩한 진리는 거짓이 없나니, 열반이 그것이니라”라고 하셨다. 다음에 또, ‘여(如)’는 무너지지 않는 형상[不壞相]을 말하나니 이른바 모든 법의 진실한 형상이 그것이며, ‘래(來)’는 지혜를 말한다. 진실한 형상 중에 이르러서 그 이치를 통달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공(空)과 형상 없음[無相]과 지음 없음[無作]을 ‘여(如)’라 하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해탈문에 와 있고 또한 중생들을 이 문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여(如)’는 네 가지 진리[四諦]이니, 온갖 것으로써 네 가지 진리를 보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여(如)’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선정과 지혜이며 이 여섯 가지 법으로써 부처님 경지에 와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진리[諦]ㆍ버림[捨]ㆍ적멸[滅]ㆍ지혜[慧]의 네 가지 공덕을 ‘여래’라고 하는데, 이 네 가지 법으로써 부처님 경지에 와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온갖 부처님의 법을 ‘여(如)’라고 하는데 이 여(如)가 모든 부처님께 와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며, 또 모든 보살 10지인 환희지ㆍ이구지ㆍ명지ㆍ염지ㆍ난승지ㆍ현전지ㆍ심원지ㆍ부동지ㆍ선혜지와 법운지를 ‘여(如)’라고 하는데, 모든 보살은 이 10지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와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또 진실한 여덟 가지 거룩한 도[八聖道]로써 왔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고, 또 방편과 지혜의 두 가지가 갖추어져서 부처님께 와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며, ‘여(如)’는 가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여래’라 하나니, ‘여래’라 함은 바로 시방과 3세의 모든 부처님들이다. 이 모든 부처님의 집을 ‘여래의 집’이라 하며, 이제 이 보살들은 여래의 도를 행하면서 계속하여 끊임이 없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반드시 여래를 이룰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하나니, 이를테면 전륜성왕의 집에 태어나서 전륜성왕의 상호가 있으면 반드시 이 사람은 전륜성왕이 되는 것처럼, 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반드시 여래를 이룰 것이므로 이를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여래의 집’이라 함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바로 네 가지 공덕인 진리ㆍ버림ㆍ적멸ㆍ지혜가 그것이니, 모든 여래는 이 안에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여래의 집이라 하느니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과 방편이 바로 여래의 집이다”라고 하였다.『조도경(助道經)』에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어머니요 좋은 권도와 방편은 아버지이니 낳아 주시기 때문에 아버지라 하고 길러 주기 때문에 어머니라 한다.
온갖 세간에서는 부모로써 집을 삼는데, 이 두 가지가 부모와 같기 때문에 이를 집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착함[善]과 지혜가 모든 부처님의 집이다. 이 두 가지 법으로부터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며, 이 두 가지는 바로 온갖 선법의 근본이니라”라고 하였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이 두 가지 법을 함께 행하여야 바로 법을 이룰 수 있나니, 착함은 바로 아버지이며 지혜는 바로 어머니이니, 이 두 가지가 화합하면 ‘모든 부처님의 집’이라 한다. 다음의 말과 같다.
보살에겐 선법이 아버지이고 지혜가 그 어머니가 되나니 일체의 여래는 모두가 이 둘로부터 출생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주삼매(般舟三昧)와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을 모든 부처님의 집이라 하나니, 이 두 가지 법으로부터 모든 여래는 출생하느니라”라고 한다. 이 중에 반주삼매는 아버지가 되고 크게 가엾이 여김은 어머니가 되며, 또 반주삼매는 바로 아버지이며 생멸 없는 법의 지혜[無生法忍]는 바로 어머니이니, 『조보리(助菩提)』 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반주삼매는 아버지이고 크게 가엾이 여김과 생멸 없는 법의 지혜는 어머니이니 일체의 모든 여래는 이 두 가지 법으로부터 출생하느니라.
집에 ‘허물과 잘못이 없다’라고 함은 집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깨끗하다’라고 함은 여섯 가지 바라밀과 네 가지 공덕과 방편과 반야바라밀과 착함과 지혜이며 반주삼매, 크게 가엾이 여김 및 모든 법의 지혜[諸忍]이니, 이 모든 법이 깨끗하여 허물이 없기 때문에 ‘집이 깨끗하다’라고 하며, 이 보살은 이러한 여러 가지 법으로써 집을 삼기 때문에 허물과 잘못이 없는 것이다. 허물과 잘못이 바뀌고 ‘세간의 길이 바뀌어서 세간을 벗어나는 으뜸가는 길에 든다’라고 함의 세간의 길이란 곧 이는 범부가 행하는 길이며, 바뀐다 함은 휴식한다 함이다. 범부의 길이란 마침내 열반에 이를 수가 없고 언제나 나고 죽음에 가고 오므로 이를 범부의 길이라 한다. ‘세간을 벗어난다’라고 함은 이 길로 인하여 삼계를 벗어나올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을 벗어나는 길’이라 한다. ‘으뜸’이라 함은 미묘하기 때문에 ‘으뜸’이라 하며, ‘든다’라고 함은 바르게 도를 행하기 때문에 ‘든다’고 하나니, 이 마음으로써 초지에 들기 때문에 이름이 환희지이다. 【문】초지를 무슨 까닭에 환희지라 하는가?
【답】초지의 과위를 얻을 것 같으면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되나니 보살로서 이 경지를 얻으면 마음은 언제나 기쁨이 많으며
자연히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종자가 더욱 자라나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어질고 착한 이란 이름을 얻는다.
‘초지의 과위를 얻는다’ 함은 마치 사람이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는 것과 같다. 세 가지 나쁜 길의 문을 잘 닫고 법을 보며 법에 들며 법을 얻으며 굳고 단단한 법에 머물러 기울거나 움직일 수가 없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견제(見諦)에서 끊을 바 법을 끊었기 때문에 마음이 크게 기뻐지며, 설령 잠을 자고 게을러서 29유(有)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도 마치 한 개의 터럭을 100등분 하고서 그 등분한 한 개의 터럭으로써 큰 바닷물의 두세 방울을 가져다 놓은 것과 같다. 괴로움이 이미 스러진 것은 마치 큰 바닷물과 같고, 나머지 아직 스러지지 않은 것은 마치 두세 방울과 같아서 마음이 크게 기뻐지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초지를 얻고 나면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한다. 온갖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천왕(天王)ㆍ범왕ㆍ사문이며 바라문과 모든 성문 및 벽지불 등이 함께 공양하고 공경함을 받는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집이야말로 허물과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길이 바뀌어서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들어섰으므로 다만 즐거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네 가지 공덕을 얻으며 여섯 가지 바라밀의 과보에 대한 재미만을 얻게 되어 모든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크게 기뻐지는 것이다. 이 보살에게 있는 나머지의 괴로움이란 마치 두서너 물방울과 같아서 비록 백천억 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지라도 시작도 없는 때로 부터의 나고 죽음의 괴로움은 마치 두서너 물방울과 같고, 스러질 수 있는 바의 괴로움은 마치 큰 바닷물과 같다. 그 때문에 이 자리의 이름을 환희지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