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臣)은 들으니 천제(天帝)께서 최상의 법(法)을 받으셔서 큰 복이 모여 그 기운이 더욱 커지고 전륜성왕이 바르고 참된 도(道)를 이루어 하늘의 신(神)과 땅의 신[祇]들이 덕에 합하였습니다. 이는 곧 성인(聖人)이 집계(執契)함에 현묘한 조화가 은근하게 통하고, 지극한 정성이 감통(感通)함에 공력(功力)이 은근하게 이에 응하여서 임금의 마음[情]이 서쪽을 돌아보게 되고 법의 바다가 동쪽으로 흐르니 홍범(洪範)의 계책을 여는 것과 같고 원광(圓光)의 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천에 씌어진[持綫] 미묘한 경전은 부처님의 입[金口]에서 나온 비밀한 윤언(綸言:임금의 뜻을 일반에게 알리고자 내린 문서)이었으며, 나뭇잎에 쓴 옛 경전[舊章]은 용궁(龍宮)으로부터 인각(麟閣)1)에 올라온 것입니다. 옛날 가유위(迦維衛)가 세상을 다스리면서 법문을 크게 여셔서 무상(無象)에 밝은 거울을 달아놓고 저 언덕에 빈 배를 운행하시어서 공(空)과 유(有)를 모두 없애고 생(生)과 멸(滅)을 함께 잊으시어 희이(希夷:심오한 도리)의 밖에서 지혜를 끊으셨고 움직임과 고요함의 밖에 형체를 남기었습니다. 그러나 인연을 따라 날카롭게 보고 자취에 응하여 앎을 내시니 대지가 진동하고 사람과 하늘이 모이고 신비한 빛을 놓아서 해와 달을 가렸습니다. 이에 백억(百億)의 수미산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화되었으며 삼천세계가 다 그 한계[隄封] 안에 들었습니다. 삼독(三毒)의 고삐에 매인 것을 가엾게 여기시고 오음(五蔭)의 타래에 뒤덮임을 불쌍히 여기시며 빠른 번개 같은 떠도는 삶을 애석하게 여기시고, 흘러가는 물위의 등나무에 매달린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8관(關)을 여시어 어두운 길에 지혜의 식(識)을 여시고 3승(乘)의 법도로써 썩은 집에 자비하신 마음을 운행하셨습니다. 용이 일어나니 안개가 모이고, 신(神)이 움직이니 하늘이 따릅니다. 큰 도로 마음을 삼아서 법의 구름을 바라보며 멀리 거행하시고 음성을 듣고 도를 깨달아서 초지(初地)로부터서 점점 인(仁)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내원(苑)의 큰 가지를 옮겨서 기원(祇園)의 깊숙한 방에 들여 놓았습니다. 지수(智水)의 여윤(餘潤)을 붓고 혜일(慧日)의 마지막 빛을 이었습니다. 이윽고 수례를 니련하(尼連河)에 멈추고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돌아가셨으니 성령(聖靈)이 더욱 멀어지고 상교(像敎)가 점차 미약해져서 큰 뜻이 더러는 무너지고 이 도[文]가 장차 떨어지려고 합니다. 이에 이단(異端)을 깊이 파서 연구하고 숱한 실마리를 분석하여서, 이것은 말류(末流)로서 옛것이 아니라고 하며 길을 달리하고 파(派)를 나눕니다. 천친(天親:세친)을 처음 배우는 무리들이 오히려 서하(西河)의 의심을 일으키고, 용수(龍樹)를 끝까지 배우는 무리들이 동로(東魯)의 탄식을 더욱 깊이 내쉽니다. 우러러 생각하오니 법보(法寶)는 다 무위(無爲)를 깨닫는 것이기에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법을 스승으로 삼으시고 법을 의지하여 머무신다”고 하였으니, 어찌 기틀을 연구하고 성품을 다하며 만물의 미묘함과 신(神)을 궁구(窮究)하여 찰나 간에 나가고 들며 원기(元氣)를 포함할 뿐이겠습니까? 무릇 생각건대 하늘이 크기에 추위와 더위가 그의 공(功)으로 운행(運行)하고 땅을 일러 두텁다고 하기에 산과 못[澤]이 그 기운을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문(姬文)은 큰 성인의 자질로서 주역[易]의 도를 은근히 도왔으며, 구명(丘明)은 동치(同恥)의 덕을 품어서 미묘한 이치를 이어받아 서술하였습니다. 모든 경과 지어진 논이 이 뜻을 같이하였기에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을 무착(無著)보살이 지었습니다. 보살은 여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에 함장수발(含章秀發)한 32상(相)을 갖추었지만 미미(微微)한 8천억의 번뇌[結]가 불법의 교화로 함께 풀려버렸습니다. 바른 법을 널리 유통시켜서 경의 으뜸을 장식하니 진여(眞如) 공덕의 종(宗)을 밝히고 보살 위행(位行)의 지위를 나타내어 소승의 집착을 깨뜨리고 대승의 뼈대[綱紀]를 이루었습니다. 그 가운데 보리(菩提) 한 품이 가장 미묘하여서 8식(識)을 돌려 4지(智)를 이루고 4지를 묶어서 3신(身)을 갖추었으니, 여러 경론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니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고 말할 만합니다.
016_0844_a_02L성상(聖上)께서는 하늘이 내린 보명(寶命)을 모두 받들어 선대의 왕보다 더욱 빠르게 나아가셨습니다. 천사(天師)의 높음을 굽혀 지혜가 만물(萬物)에 두루 하고 인황(人皇)의 운수(運數)에 응하시니 도가 3명(明)을 비추십니다. 자비하신 은혜를 밖으로 펴시고 신기하신 기틀은 안으로 깊으십니다. 단정히 임금의 자리[座]에 앉아 온갖 신령을 부리니 팔짱을 끼고서 온 나라를 조회받고, 조화(造化)의 시작을 두루 다스리니 음양(陰陽)의 경계[際]를 삼켰다 토해냈다 자유롭습니다. 공(功)을 이루고 음악을 지으니 이미 소무(韶舞)2)를 빛내었고 정(定)을 다스리어 예(禮)를 지으니 말씀이 취화(翠華)3)를 움직입니다. 금륜(金輪)으로 임금이 되시니 국경[封疆]의 견고함이 오직 멀었고, 자그만 성[芥城]이 비록 가득하나 구정(龜鼎)4)의 복조(福祚)가 다함이 없습니다. 큰 계획을 빛나게 널리 드러내시어서 여러 중생들을 열어 인도하시기에 무릇 모든 내전(內典)을 다 번역하셨습니다. 마가다국(摩伽陀國)의 삼장 법사(三藏法師) 바라파밀다라(波羅頗蜜多羅)는 중국[唐] 말에 밝은 분입니다. 그는 중천축(中天竺)의 왕족으로서 당나라 정관(貞觀) 원년 12월에 장안[京]에 들어왔습니다. 법사는 계행이 정밀하고 부지런하며 재주와 학식이 밝고 총명합니다. 지극한 덕은 초과(初果)에 가깝고 재능이 많아 장차 성인에 버금갑니다.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맑은 행적을 이어서 상국(上國)에 오셨고, 도생(道生)과 혜원(慧遠)의 빼어난 기상을 목표로 하여 불문[玄門]을 공경하여 걸어왔습니다. 임금은 마음속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태자가 예의를 다하여 공경하였습니다. 그는 견문이 넓고 생각이 뛰어나 그윽한 것을 찾고 은밀한 것을 통찰하니, 장안에 있는 대덕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여 높이 받들지 않음이 없습니다.그는 정관 4년에 밝은 어명을 공손히 받들었습니다.
016_0844_b_02L또 칙명으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한공(國公) 방현령(房玄齡)과 산기상시(散騎常侍) 행태자좌서자(行太子左庶子) 두정륜(杜正倫)을 시켜서 의학(義學)을 해설하도록 정하였고, 법사 혜승(慧乘)ㆍ혜랑(惠朗)ㆍ법상(法常)ㆍ지해(智解)ㆍ담장(曇藏)ㆍ지수(智首)ㆍ도악(道岳)ㆍ혜명(惠明)ㆍ승변(僧辯)ㆍ승진(僧珍)ㆍ법림(法琳)ㆍ영가(靈佳)ㆍ혜색(慧)ㆍ혜정(慧淨)ㆍ현모(玄謨)ㆍ승가(僧伽) 등에게 명하여 승광사(勝光寺)에서 함께 뛰어난 업적을 이루게 하였으며, 또한 칙명으로 태부(太府)의 경(卿) 난릉남(蘭陵男) 소경(蕭璟)을 시켜 삼장(三藏)을 수집(修緝)하게 하였습니다. 삼장 법사가 이르기를 “무릇 외국(外國)에서 대승이나 소승을 공부하는 자가 모두 이 논으로써 근본을 삼아서 만일 이것을 통하지 못하면 법을 크게 펼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정신을 한데 모아 특별히 연구를 더하였습니다. 혜정 법사는 총명하고 영민하며 학식이 넓은 이로서 임금의 명을 받아 문장을 엮었으며, 현모 법사는 방언(方言)에 능통하고 또한 의해(義解)를 겸해 맡아서 지극한 마음으로 번역하여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정관 7년 봄에 찬정(撰定)을 마치니 13권 24품입니다.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안평남(安平男) 이백약(李百藥)에게 칙명을 내려 서문을 쓰게 하였다.
의지(義智)로 여러 뜻을 지으니 말과 글귀가 다 때[垢]가 없다. 괴로운 중생들을 구제함은 자비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016_0844_b_11L義智作諸義, 言句皆無垢, 救濟苦衆生,
慈悲爲性故。
선교(善巧)의 말과 방편의 법은 이른바 최상승(最上乘)이니 대승의 마음을 낸 자를 위하여 간략히 다섯 가지의 뜻으로 나타낸다.
016_0844_b_13L巧說方便法, 所謂最上乘,
爲發大心者, 略以五義現。
016_0844_c_02L 【釋】『장엄대승경론』은 누가 능히 장엄하였는가? 【답】의지(義智)가 능히 장엄하였다. 【문】의지가 어떻게 장엄합니까? 【답】여러 가지의 뜻을 열어서 짓는다. 【문】무엇으로써 열어서 짓습니까? 【답】말과 글귀를 쓴다. 【문】어떠한 말을 쓰고 어떠한 글귀를 씁니까? 【답】때 없는 말을 쓰고 때 없는 글귀를 쓴다. 때 없는 말이라 함은 능히 열반의 성(城)에 이르는 것이요, 때 없는 글귀라 함은 글자와 글귀가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때 없는 말과 글귀를 떠나서는 여러 가지 뜻을 능히 열어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 【문】어떠한 뜻으로써 장엄한다고 합니까? 【답】괴로운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문】중생들이 스스로 괴로워하는데 어찌하여 구제합니까? 【답】보살이 되려는 이는 큰 자비로 체를 삼아서 괴로움을 받는 중생에게 연민(憐愍)의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문】만일 그들의 괴로움을 구제하려면 무슨 법으로 장엄해야 합니까? 【답】여래의 선교(善巧)의 말과 방편의 법으로 장엄해야 한다. 【문】어떠한 방편과 법입니까? 【답】이른바 최상승(最上乘)이다. 【문】누구를 위하여서 장엄합니까? 【답】대승의 마음을 낸 이들을 위해서이다. 【문】몇 가지의 뜻으로 장엄합니까? 【답】대략 다섯 가지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문】어떤 것을 다섯 가지의 뜻이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금(金)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 같고 비유하면 꽃이 한창 피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고 비유하면 문자(文字)를 아는 것과 같다.
016_0844_c_05L譬如金成器, 譬如花正敷, 譬如食美膳,
譬如解文字。
비유하면 보배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아서 이들이 각기 환희심을 얻으니 다섯 가지의 뜻과 법으로 장엄함도 환희하기는 또한 마찬가지이다.
016_0844_c_07L譬如開寶篋, 是各得歡喜,
五義法莊嚴, 歡喜亦如是。
【釋】여기서의 다섯 가지 비유는 곧 다섯 가지 뜻으로 장엄함과 그 순서가 같은데 능히 대승의 마음을 낸 이들이 믿고 향하기 때문이요,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요, 사유(思惟)하기 때문이요, 닦아서 익히기 때문이요, 증득하기 때문이다. 【문】그의 뜻이 어떠합니까? 【답】‘금으로 그릇을 만든다’고 함은 대승을 믿고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림을 비유한 것이요, ‘꽃이 핀다’고 함은 대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들을 열어 보임에 비유한 것이요,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함은 그들로 하여금 사유하여 법의 맛을 얻음에 비유한 것이요, ‘문자를 안다’고 함은 그들로 하여금 닦고 익혀서 더는 생각하지 않음에 비유한 것이요, ‘보배 상자를 연다’고 함은 그들로 하여금 진실한 보리라는 보배를 증득케 하여서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게 함이다. 이 다섯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대승을 분별하여 능히 그들이 애락(愛樂)을 내게 하는 것이다. 【문】만일 그 법의 자기 성품에 공덕이 구족하다면, 어떠한 뜻을 다시 장엄하겠습니까? 이 물음에 게송으로 답한다.
비유하면 아름다운 바탕에 더 장엄을 하여서 거울을 보고서 뛰어난 기쁨을 내듯이 미묘한 법으로 장엄하여 마치면 기쁨을 얻음이 제일이지요.
016_0844_c_19L譬如莊美質, 臨鏡生勝喜, 妙法莊嚴已,
得喜更第一。
016_0845_a_02L 【釋】비유하면 아름다운 바탕에 그 모습을 더욱 꾸며서 거울 앞에 있으면 기쁨이 더욱 커지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보살 또한 그러하여서 미묘한 법과 뜻을 장엄하여 자기의 마음에 들어가면 곧 뛰어난 기쁨을 내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보고 들음이 있기 때문이다. 【문】그 법에 어떠한 공덕이 있기에 이렇듯 장엄을 하여서 굳이 그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믿어 받게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어려운 임금을 섬김과 같아서 일로 인하여 위엄과 힘을 얻는다. 이와 같이 어려운 데서 뜻을 알면 앎으로 인하여 법재(法財)를 얻는다.
016_0845_a_06L譬如難事王, 因事得威力,
如是難解義, 因解得法財。
비유하면 보배를 보는 것과 같아서 특별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듯이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듣고서 깨닫지 않으면 또한 기쁨도 없다.
016_0845_a_07L譬如見生寶,
不別則不愛, 如是聞妙法, 不覺亦不喜。
【釋】이 세 게송은 순서대로 미묘한 법에 세 가지의 공덕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첫째는 장애를 끊는 인(因)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요, 둘째는 자재한 인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요, 셋째는 미묘하게 기쁜 인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문】이 뜻이 무엇입니까? 【답】쓴 약을 먹을 때 처음에는 괴롭다. 쓴 약은 먹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즐겁다. 그것은 병이 치료되기 때문이니, 이 법도 또한 그러하여서 문자에 머물 때에는 괴롭다. 그것은 맛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알 때는 즐거우니, 장애되는 병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엄한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롭다. 그것은 뜻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즐거우니, 위엄과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 법도 또한 그러하여서 사유할 때는 괴롭다. 그것은 너무 깊어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아릴 때에는 즐거우니, 성재(聖財)를 키우기 때문이다. 보배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함은 보배가 특별하지 않을 때는 사랑하지 않으니, 그것은 쓸데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인식될 때에는 매우 중하게 여긴다. 그것은 쓸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법도 또한 그러하여서 닦아 행할 때는 기쁘지 않다. 그것은 비어서 쓸모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닦아서 헤아릴[思度] 때는 매우 기쁘다. 그것은 크게 쓸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연기품(緣起品)을 마친다.
016_0845_b_02L 불기(不記)와 동행(同行)과 불행(不行)과 또한 성취와 체(體)와 비체(非體)와 능치(能治)와
문이(文異)의 여덟 가지 인(因)으로 성립되었다.
016_0845_a_25L不記亦同行, 不行亦成就, 體非體能治,
文異八因成。
016_0845_c_02L 【釋】대승이 성립하는 데 대략 여덟 가지의 인이 있다. 첫째는 불기(不記)요, 둘째는 동행(同行)이요, 셋째는 불행(不行)이요, 넷째는 성취요, 다섯째는 체(體)요, 여섯째는 비체(非體)요, 일곱째는 능치(能治)요, 여덟째는 문이(文異)이다. 첫째 ‘불기’라 함은 이전의 법이 다 없어지고 난 뒤에 부처님께서 나오신 것이다. 만일 이 대승이 바른 법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처음에 기록하지 않으셨겠는가? 비유하면 미래의 세상에 다른 세존이 있다면 곧 기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동행’이라 함은 성문승과 대승은 어느 것을 먼저하고 어느 것을 뒤에 함이 없이 일시에 동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 대승만이 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아느냐? 셋째 ‘행하지 않는다’고 함은, 대승은 깊고 넓어서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리는 사람들도 능히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온갖 논박을 일삼는 외도들이 행하겠는가? 그들은 대승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다. 저 외도들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넷째 ‘성취한다’고 함은, 만일 그대가 다른 이가 보리를 얻는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대승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께서 대승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여 이러한 고집을 지으면 이는 도리어 나[我]를 이루는 뜻이 된다. 그가 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 된다. 다섯째 ‘체’라고 함은, 만일 그대가 다른 부처님에게는 대승의 체가 있고 이 부처님에게는 대승의 체가 없다고 하여 만일 이러한 고집을 지으면 이도 또한 나라는 뜻을 이룬다. 대승에는 다름이 없어서 체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체가 아니다’라고 함은, 만일 그대가 이 부처님께는 대승의 체가 없다고 하면 이는 곧 성문승에도 체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성문승은 부처님의 말씀이기에 체가 있고 대승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체가 없다고 고집하면 이는 큰 과실(過失)이 있다. 만일 불승(佛乘)은 없으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어서 성문승을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이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 ‘능히 다스린다’고 함은, 이 법을 의지하여 닦아 행함으로써 무분별의 지혜를 얻게 되고 무분별의 지혜로 말미암아 능히 여러 번뇌를 깨뜨린다. 그러므로 대승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덟째 ‘글이 다르다’고 함은, 대승은 매우 깊어서 글과 뜻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글을 따라 뜻을 취하여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서는 안 된다. 또는 만일 그대가 말한 대로 처음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부처님께서 무공용(無功用)의 마음에서 버린 까닭이라고 고집하여서는 안 된다. 이 뜻은 그렇지 않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의 인연으로 현저하게 보고 또한 법을 보호한다. 여래의 지혜는 걸림이 없는 것이니 버린다는 것은 마땅히 그러하지 않다.
016_0845_c_09L諸佛三因緣, 現見亦護法, 如來智無㝵,
捨者不應爾
【釋】만일 이 대승이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는 큰 장애가 된다.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의 인연이 있는데 어찌해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첫째는 무공용의 지혜를 항상 일으켜 이 눈으로 항상 보는 것이요, 둘째는 항상 정근(正勤)을 지어서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여래의 지혜의 힘은 장애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인연으로 인하여 그대가 말한 여래께서 버려서 기록하지 않는다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일 그대가 말한 대로 체가 있는 것은 곧 성문승이요, 이는 곧 대승의 체이니,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곧 이 승으로써 큰 보리를 얻기 때문이라고 고집하면 이 뜻은 옳지 않다. 게송으로 말한다.
완전함도 아니요 어긋나지 않음도 아니며 행(行)함도 아니고 가르쳐 줌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문승이 곧 대승은 아닌 것이다.
016_0845_c_19L非全非不違, 非行非教授, 是故聲聞乘,
非卽是大乘。
016_0846_a_02L 【釋】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곧 성문승을 대승의 체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완전함[全]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긋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이며, 행이 아니기 때문이요, 가르쳐 줌도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함이 아니다’라고 함은 성문승은 남을 이롭게 함을 가르쳐 주는 것에 다만 스스로 욕심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하도록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어긋나지 않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성문승이 스스로의 방편으로 남을 가르쳐 주는 것이 곧 남을 이익되게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비록 자기를 이익되게 함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하나 그 또한 스스로의 열반을 구하여 방편으로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니 이로써는 곧 큰 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이 아니다’라 함은 만일 그대가 오래도록 성문승의 행을 행하면 큰 보리의 과(果)를 얻는다고 말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으니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문승은 큰 보리의 방편이 아니다. 오랫동안 방편이 아닌 것을 행하여서 능히 대승의 과를 얻을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쇠뿔을 당겨서 우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승에서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성문승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문승으로써는 대승을 얻을 수 없다. 이제 다시 그대에게 서로 어긋나는 뜻을 보이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가르쳐 주는 것과 방편과 머무름과 시절(時節)의 아래와 위에서 승은 다섯 가지의 일이 일체가 다르다.
016_0846_a_13L發心與教授, 方便及住持, 時節下上乘,
五事一切異。
016_0846_b_02L 【釋】성문승이 대승과는 다섯 가지의 서로 어긋남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다르고, 둘째는 가르쳐 주는 것이 다르며, 셋째는 방편이 다르고, 넷째는 머무름이 다르며, 다섯째는 시절이 다른 것이다. 성문승에서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가르쳐 주거나 부지런히 방편을 닦는 것이 다 스스로 열반을 얻으려는 것인 까닭에 머무는 것도 또한 적고, 복과 지혜의 무더기가 작은 까닭에 시절(時節)도 또한 적어서 나아가 삼생(三生)에 이르러야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은 그러하지 않아 마음을 일으키거나 가르쳐 주거나 부지런히 방편을 닦는 것이 모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무는 것도 또한 많고, 복과 지혜의 무더기가 크기 때문에 시절도 또한 많아서 삼 대아승지겁(三大阿僧祇劫)을 지낸다. 이와 같이 일체가 서로 어긋난다. 그러기에 마땅히 소승의 행으로써 대승의 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의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경[修多羅]에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는 계율[毗尼]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셋째는 법공(法空)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대가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니, 이 세 가지의 상에 어긋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고집을 지어도 이 뜻은 옳지 않다. 게송으로 말한다.
스스로 대승의 경에 들어가면 현재 번뇌는 스스로 멸(滅)하여진다. 넓고 크고 매우 깊은 뜻은 스스로 법공에 어긋나지 않는다.
016_0846_b_06L入自大乘經, 現自煩惱滅, 廣大甚深義,
不違自法空。
【釋】이 대승은 또한 세 가지의 상에 어긋나지 않는다. 스스로 대승의 경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스스로 번뇌로부터 계율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보살은 분별로써 번뇌를 삼기 때문이다. 넓고 크고 매우 깊은 것은 곧 보살의 법공이며 이 공(空)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큰 보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세 가지의 모습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앞에서 행하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내가 이제 이 뜻을 더 보여서 그대로 하여금 믿어 받아들이게 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지함이 있고 일정하지 아니하고 세속을 인연하고 또한 넓지 않으며 물러나 굴복하여 헤아리는 사람이 어찌 대승의 뜻을 알겠는가.
016_0846_b_14L有依及不定, 緣俗亦不普, 退屈忖度人,
寧解大乘義。
016_0846_c_02L 【釋】다섯 가지의 인이 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헤아리는 사람들은 능히 대승의 경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지혜는 의지함이 있기 때문이요,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세속을 인연하기 때문이요, 넓지 못하기 때문이요, 물러나 굴복하기 때문이다. ‘의지함이 있다’는 것은 지혜가 가르침을 의지하여 생기고 증득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어느 때에는 다시 다른 지혜가 나기 때문이다. ‘세속을 인연한다’는 것은 세제(世諦)를 헤아려서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넓지 못하다’는 것은 비록 세제를 인연하더라도 아는 것이 적어서 일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러나 굴복한다’는 것은 다투어 의논하다가 말이 궁하면 곧 잠자코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곧 의지할 것이 없으며, 마침내 물러나 굴복하지도 않는다. 물러나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량경(無量經) 가운데 백천 가지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대승의 법이라고 한다. 이 법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변재가 다함이 없다. 그러기에 대승은 헤아리는 사람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성문승은 부처님의 보리 방편이 아니라고 하니, 만일 그렇다면 어느 것이 그것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넓고 크고도 매우 깊어서 성숙(成熟)을 분별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방편을 말하기에 이것이 곧 무상승(無上乘)이다.
016_0846_c_05L廣大及甚深, 成熟無分別, 說此二方便,
卽是無上乘。
【釋】‘넓고 크다’는 것은, 말하자면 온갖 신통이 매우 부지런한 방편을 말미암아 남들로 하여금 다 믿고 알게 하기 때문이다. ‘매우 깊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분별의 지혜는 행하기 어렵기에 그 순서대로 하나는 중생을 성숙하게 하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법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둘을 말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방편이라 하니, 이 두 가지의 방편이 곧 무상승의 체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두려워한다면 과실은 무엇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을 데서 두려워하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불타게 된다. 두려움은 복 아님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길이 과환(過患)을 일으킨다.
016_0846_c_13L不應怖而怖, 由怖被燒然, 怖引非福故,
長時過患起。
【釋】만일 사람이 두려워하지 아니할 데서 허망하게 두려움을 내면 이 사람은 곧 매우 뜨거운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불타게 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이 두려움을 말미암아 큰 복취(福聚)가 아닌 것을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죄로 말미암아 능히 이 사람은 한량없는 시겁(時劫)을 지나면서 큰 열뇌(熱惱)를 받게 된다. 【문】그 사람이 다시 무슨 인으로 이런 두려움을 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종성(種性)이 아니고 법의 벗이 아니며 지혜가 적고 인연의 힘이 적기에 이 깊고 미묘한 법을 두려워하여 큰 보리를 물러나 잃는다네.
016_0846_c_20L非性非法朋, 少慧少因力, 怖此深妙法,
退失大菩提。
016_0847_a_02L 【釋】사람이 두려움을 내는 데는 네 가지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종성이 아니어서 보살의 종성을 떠났기 때문이고, 둘째는 법의 벗이 아니어서 선지식(善知識)을 떠났기 때문이고, 셋째는 지혜의 힘이 적어서 대승의 법이 공함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넷째는 인연의 힘이 적어서 지난 세상에 여러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자기 성품인 착한 뿌리를 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매우 깊고 미묘한 법에서 그릇되게 두렵다는 생각을 낸다. 이 생각으로 말미암아 큰 보리의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에서 마땅히 얻을 것을 얻지 못하니 이를 물러선다[退]고 이른다. 그대는 이제 마땅히 이 물러섬의 허물과 근심이 매우 깊고 무거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두려움의 허물과 두려움의 원인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마땅히 두려워해서는 안 될 원인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다름이 없으면 곧 서로 없고 다름이 있으면 곧 험한 곳 비교할 것이 없는 가지가지의 말과 계속한 말과 다문(多門)의 말은
016_0847_a_08L無異卽互無, 有異卽險處, 無譬種種說,
續說多門說。
글의 뜻과 같음이 있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체를 총명하고 지혜로워 바로 관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016_0847_a_10L非有如文義, 諸佛甚深體,
聰慧正觀人, 應知不應怖。
016_0847_b_02L 【釋】‘다름이 없으면 곧 서로 없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성문승은 곧 대승이요, 대승의 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면 곧 성문과 벽지불(辟支佛)의 승이 다시 체가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 됨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다 불승(佛乘)이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는가? ‘다름이 있으면 곧 험한 곳이다’라는 것은, 만일 그대가 대승의 체와 다름이 있다고 인정하면 이 체는 곧 일체지(一切智)의 도이기에 제일 험한 곳이 되니, 그것은 건너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마땅히 우러러 믿어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는가? ‘비유할 이가 없다’는 것은 일시(一時)에 두 개의 대승이 함께 나와서 가히 서로 비교할 것이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하나는 두려워하고 둘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가지가지로 말한다’는 것은 이제 이 대승은 홀로 공(空)만 설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큰 복과 지혜의 무더기를 설한다. 그러나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유독 공만을 두려워하는가? ‘계속하여 말한다’고 함은 모든 때에 결정코 서로 이어서 공을 말하였으니, 그대가 잠깐 들음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공을 두려워하는가? ‘다문(多門)으로 말한다’는 것은 경들 가운데 다문으로 달리 말하여 큰 요용(要用)을 나타내어 온갖 분별을 깨뜨리고 무분별의 지혜를 얻게 하였다. 만일 이 말씀과 달라서 큰 용이 없는 것에는 여래는 다만 공만을 말씀하시고, 법성(法性)ㆍ실제(實際) 등과 같은 것들은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이미 다문이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유독 공만을 두려워하는가? ‘글의 뜻과 같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대승은 매우 깊어서 글의 뜻과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글을 따라 뜻을 취하여 공을 두려워하는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체’라는 것은 부처님의 성품은 매우 깊어서 갑자기 깨달아 알기 어렵기에 마땅히 요별(了別)함을 구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이와 같은 것들의 인연이 있다. 그러기에 총명하고 지혜로워 정관(正觀)하는 사람은 이 대승에서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마땅히 두려워하지 아니할 인을 말하였다. 다음에는 이 법을 능히 행할 지혜를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순서에 따라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면 법을 얻고 지혜를 얻으리니 이 지혜로 이 법을 행하여서 얻지 못하여도 그르게 여겨 헐뜯지 말라.
016_0847_b_11L隨次聞思修, 得法及得慧, 此智行此法,
未得勿非毀。
【釋】만일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선지식을 의지하면 능히 바른 들음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정의(正義)에서 능히 바른 기억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진실한 경계에서 바른 지혜를 나게 하고, 다음으로 저것들을 좇아 법과(法果)를 증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저것들을 좇아 뒤에 해탈의 지혜를 일으키면 그 사람의 지혜는 깊음을 따르고 멀리까지 들어가서 능히 이 법을 행하게 된다. 그러니 그대가 만일 스스로 이러한 지혜가 없다면 마땅히 결정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미 이 법을 행하는 지혜를 말하였다. 그러니 다음으로는 이 법의 글귀를 두려워함을 막아야 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알지 않으면 아는 것이 깊지 못하고 깊으면 헤아림[思度]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아는 것이 깊어 해탈을 얻으면 모든 두려움이 마땅히 그렇지 않으리라.
016_0847_b_20L不解解不深, 深非思度解, 解深得解脫,
諸怖不應爾。
016_0847_c_02L 【釋】‘알지 않는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깊은 법은 자신이 알 것이 아니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이 깊지 못하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부처님의 아심도 또한 깊지 못하니, 만일 아시는 것이 깊었으면 무슨 까닭에 깊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깊음이 헤아림[思度]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만일 그대가 어찌해서 이 깊음은 생각하여 헤아림의 경계가 아닌가라고 하여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는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이 깊어서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만일 그대가 어찌해서 유독 깊은 뜻을 알아야 능히 해탈을 얻고 생각하여 헤아리는 사람은 능히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라고 하여 이와 같이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이미 이 법의 글귀는 두려워함을 막았다. 다음에는 대승이 성립되었음을 믿지 않는 자를 일깨우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작은 믿음과 경계와 짝으로 말미암아 깊고 큰 법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무상승(無上乘)을 이루었다고 한다.
016_0847_c_09L由小信界伴, 不解深大法, 由汝不解故,
成我無上乘。
【釋】‘작은 믿음’이란 좁고 용렬하게 믿고 아는 것이다. ‘작은 경계’란 아리야(阿梨耶)의 식 가운데서 작은 종자를 훈습(熏習)하는 것이다. ‘작은 짝’이란 서로 비슷한 믿음의 경계로써 권속을 삼기 때문이다. 이 셋이 만일 작으면 따로 대승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장하는 것을 이루어서 이를 무상(無上)의 법이라고 이른다. 이미 대승이 성립됨을 말하였다. 다음은 대승을 비방하여 헐뜯는 것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들음을 따라 깨달음을 얻지만 듣지 못하였어도 삼가 헐뜯지 말라. 한량없는 나머지를 듣지 못하였다고 비방하는 자는 어리석은 업(業)을 짓는다.
016_0847_c_17L隨聞而得覺, 未聞愼勿毀, 無量餘未聞,
謗者成癡業。
【釋】그대가 사소하게 들은 것에 깨달음이 있는 듯하더라도 마땅히 들은 것에 의해 다시 비방하여 헐뜯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듣지 못해서 믿음이 없더라도 관계없으니, 왜냐하면 착한 업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듣지 못한 이가 많다고 하여 삼가 비방하여 헐뜯어서도 안 된다. 그대가 가려 구별하지는 못할망정 만일 비방하여 헐뜯는다면 다시 어리석은 업을 더하여서 앞서 들은 것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승을 비방하여 헐뜯는 것을 막았다. 다음으로는 삿된 생각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0848_a_02L 글과 같게 뜻을 취할 때에 스승의 마음은 참 지혜에서 물러나고 비방하여 말하고 법을 가볍게 여기면
이를 인연하여 큰 허물이 생긴다.
016_0847_c_24L如文取義時, 師心退眞慧, 謗說及輕法,
緣此大過生。
【釋】‘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스스로 보고 취하여서 지혜스럽지 못한 쪽에서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참 지혜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은 참다운 앎은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비방하여 말한다’는 것은 착한 말을 헐뜯기 때문이다. ‘법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듣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다. 이 복이 아닌 것의 순서를 인연하여 몸에 큰 괴로움의 보(報)를 받는 것을 큰 허물이 일어난다고 이른다. 이렇게 삿된 생각을 막았으니 다음으로 악한 뜻을 막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악한 뜻과 자기 성품의 악은 착하지 못한 데서 마땅히 일으켜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착한 곳으로 옮기겠는가? 마땅히 큰 허물을 버려야 한다.
016_0848_a_08L惡意自性惡, 不善不應起, 況移於善處,
應捨大過故。
【釋】‘악한 뜻’이라는 것은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다. ‘자기 성품의 악’이라는 것은 이 마음은 자기 성품의 죄이어서 오히려 과실의 법에서도 일어날 수 없거늘 하물며 과실이 아닌 법에서 일으키겠는가? 그런 까닭에 마땅히 빨리 큰 허물과 근심을 버려야 한다. 성종품(成宗品)을 마친다.
【釋】이와 같이 이미 대승이 성립하였으니 다음은 대승을 의지하여 훌륭하게 귀의(歸依)함을 포섭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0848_a_15L釋曰,如此已成立大乘。 次依大乘。 攝勝歸依。 偈曰:
만일 사람이 삼보에 귀의하는 데는 대승의 귀의가 제일이니 일체에 두루 하는 것이며 용맹스럽고 과를 얻으며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016_0848_a_17L若人歸三寶, 大乘歸第一, 一切遍勇猛,
得果不及故。
016_0848_b_02L 【釋】 일체 삼보에 귀의하는 데는 마땅히 대승의 귀의가 제일이 됨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네 가지의 큰 뜻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성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네 가지의 뜻이라 하는가? 첫째는 일체에 두루 하다는 뜻이요, 둘째는 용맹하다는 뜻이요, 셋째는 과를 얻는다는 뜻이요, 넷째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들의 뜻은 뒤에 마땅히 말하겠다. 이 네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기에 유난(留難)하는 이가 많이 있으나 모든 귀의하는 자가 혹은 능하고 혹은 능하지 못하니 능한 자가 훌륭함이 된다. 이렇게 귀의의 훌륭함을 말하였다. 다음은 훌륭한 귀의를 권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어나기 어렵고 또한 이루기 어려우니 응당 큰 뜻을 세워라. 자기와 남의 이익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땅히 훌륭한 귀의를 지어야 한다.
016_0848_b_03L難起亦難成, 應須大志意, 爲成自他利,
當作勝歸依。
【釋】‘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이른바 훌륭한 원(願)이니 큰 서원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루기 어렵다’는 것은 이른바 훌륭한 행이니 한량없는 시겁을 경유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기에 마땅히 큰 뜻을 내야 한다. 왜냐하면 남의 이익과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한다’고 함은 이른바 원과 행이니 원과 행으로 말미암은 것을 들음의 인이라고 이른다.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고 함은 이른바 큰 뜻이니 큰 뜻으로 말미암기에 이는 자체(自體)의 과이다. 앞에서는 네 가지의 뜻을 말하였고, 이제는 마땅히 일체에 두루 한 뜻을 먼저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이 두루 하고 승(乘)이 두루 하고 지혜가 두루 하고 적멸(寂滅)이 두루 한 것, 이를 지혜 있는 자의 네 가지가 일체에 두루 한다고 이른다.
016_0848_b_12L衆生遍乘遍, 智遍寂滅遍, 是名智慧者,
四種一切遍。
【釋】대승에 귀의하는 자는 네 가지의 일체에 두루 함이 있다. 첫째는 중생이 일체에 두루 한 것이니,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승(乘)이 일체에 두루 한 것이니, 3승(乘)을 잘 알기 때문이요, 셋째는 지혜가 일체에 두루 한 것이니, 두 가지의 무아(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적멸(寂滅)이 일체에 두루 한 것이니, 태어나고 죽음과 열반의 체가 일미(一味)이어서 과악(過惡)과 공덕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일체에 두루 한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으로는 용맹의 뜻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보리를 희망하여서 퇴전하지 않고 어려운 행을 행한다.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는 데는 훌륭한 용맹이 세 가지 있다.
016_0848_b_21L悕望佛菩提, 不退難行行, 諸佛平等覺,
勇猛勝有三。
016_0848_c_02L 【釋】대승에 귀의하면 세 가지의 훌륭한 용맹이 있다. 첫째는 원(願)이 훌륭한 용맹이니, 부처님께 귀의할 때에 큰 보리를 구하여서 환희(歡喜)를 많이 내어 훌륭한 공덕을 알기 때문이요, 둘째는 행이 훌륭한 용맹이니, 수행을 일으킬 때에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굴복하여 종속되지 아니하며 어려운 행을 행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과가 훌륭한 용맹이니, 부처를 이룰 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용맹으로 말미암아 모든 불자(佛子)들이 항상 좋은 데 태어남을 얻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발심과 지도(智度)와 취만(聚滿)과 대자(大慈)는 종자와 낳으신 어머니와 태장(胎藏)과 유모(乳母)로서 훌륭하오.
016_0848_c_07L發心與智度, 聚滿亦大慈, 種子及生母,
胎藏乳母勝。
【釋】보살이 좋은 데 태어나는 데는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종자가 훌륭한 것이니 보리의 마음으로써 종자를 삼기 때문이요, 둘째는 낳아 주신 어머니가 훌륭함이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써 낳아 주신 어머니를 삼기 때문이요, 셋째는 태장(胎藏)이 훌륭함이니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로써 주지하여 태장을 삼기 때문이요, 셋째는 유모(乳母)가 훌륭함이니 큰 자비로써 길러서 유모를 삼기 때문이다. 또는 좋은 데 난다 함은, 용맹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항상 훌륭한 몸을 얻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미묘한 상호(相好)와 생성(生成)하는 힘과 큰 즐거움과 큰 방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성취함, 이를 훌륭한 몸이라 이른다.
016_0848_c_15L妙相成生力, 大樂大方便, 如此四成就,
是名爲勝身。
【釋】보살의 몸이 훌륭한 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신(色身)이 훌륭한 것이니 미묘한 상호로 몸을 꾸밈을 얻어 전륜왕(轉輪王)들의 상호보다 훌륭한 것이요, 둘째는 힘이 훌륭한 것이니 중생을 성숙하게 하는 자재한 힘을 얻기 때문이요, 셋째는 즐거움이 훌륭한 것이니 적정(寂靜)한 상품(上品)의 부처님 지위는 가없는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요, 넷째는 지혜가 훌륭함이니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큰 선교방편(善巧方便)을 얻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불자가 좋은 데 태어나는 것이라고 이른다. 말하자면 색(色)의 성취와 힘의 성취와 즐거움의 성취와 지혜의 성취이다. 또한 이 용맹으로 말미암아 왕자(王子)의 모습과 더불어 비슷하게 태어난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0849_a_02L
광명을 주고 법이 자재하며 선교(善巧)의 말과 잘 다스림[善治]으로 조섭한다. 이 네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다.
016_0849_a_02L光授法自在, 巧說善治攝, 由此四因故,
佛種則不斷。
【釋】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임금의 종자가 끊이지 않는다. 첫째는 지위에 들어가서 직책을 받음이요, 둘째는 증상(增上)하여 어긋남이 없음이요, 셋째는 능히 잘 결정하여 판단하고, 넷째는 상주고 벌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좋은 데 태어나는 불자(佛子)도 또한 그러하다. 첫째는 광명과 직위를 받음[授職]을 얻는 것이니, 말하자면 일체의 모든 부처는 대광명과 함께 직위(職位)를 받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법이 자재한 것이니, 말하자면 일체의 법 가운데 지혜가 자재하여서 남과 어긋남이 없음이요, 셋째는 능히 교묘하게 말함이니, 말하자면 부처님과 중생들 가운데서 법을 잘 말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상과 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니, 말하자면 계를 배우는 자의 허물과 악함을 능히 다스리고 공덕을 능히 포섭하는 것이다. 또한 이 용맹으로 말미암아 대신들의 모습과 더불어 비슷함을 얻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바라밀(波羅蜜)에 들어가고 깨달음의 분(分)을 보며 은밀한 것을 지니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 이 네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아서 대신들과 비슷함을 얻는다.
016_0849_a_13L入度見覺分, 持密利衆生, 由此四因故,
得似於大臣。
【釋】네 가지의 인(因)이 있으니 이는 대신들의 공덕이다. 첫째는 임금의 금궁(禁宮)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의 미묘한 보물을 보는 것이고, 셋째는 임금의 밀어(密語)를 간직하는 것이고, 넷째는 자재하게 상을 주는 것이다. 용맹한 보살도 또한 그렇다. 첫째는 항상 모든 바라밀다에 잘 들어감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곳곳의 경 가운데서 항상 큰 보리의 보배를 보는 것이니 그것은 법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의 몸과 입과 뜻의 비밀을 항상 지니는 것이고, 넷째는 항상 가없는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용맹의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과를 얻는 뜻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복덕과 존중함과 즐거움이 있고 또한 고를 멸하고 즐거움을 증득하고 법음(法陰)을 증득하고 습기(習氣)를 다하고 유와 멸의 버림이 있는 것이다.
016_0849_a_23L福德及尊重, 有樂亦苦滅, 證樂證法陰,
習盡有滅捨。
016_0849_b_02L
【釋】대승에 귀의하는 자는 이 여덟 가지의 과를 얻는다. 첫째는 믿고 알 때에 큰 복덕의 무더기를 얻는 것이요, 둘째는 발심할 때에 세 가지의 존중함이 있음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일부러 생을 받을 때에 3유(有) 가운데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요, 넷째는 자기와 남이 평등함을 알 때에 큰 고(苦)의 무더기가 멸함을 얻고, 또는 모든 중생들의 고를 멸해 주는 힘을 얻는 것이요, 다섯째는 무생인(無生忍)에 들어갔을 때에 최상의 즐거움을 깨달아 증득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보리를 얻었을 때에 큰 법음(法陰)을 증득하는 것이다. 법음이라 함은 이른바 법신이다. 이와 같은 법신을 크다고 이르고, 훌륭하다고 이르고 항상하다고 이르고, 좋은 무더기라 이른다. 이것은 끝없는 경[修多羅] 등의 법장(法藏)이기 때문에 크다고 이르고, 일체의 법 가운데 가장 위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이르며, 영원하여서 다함이 있지 않기에 항상하다고 이르며, 힘과 두려움이 없는 것들의 착한 법을 쌓아 모은다. 그러기에 잘 모은다고 이른다. 일곱째는 훈습(熏習)하여 무더기가 다 없어져서 남김이 없음을 얻는 것이요, 여덟째는 유(有)와 멸(滅)의 버림을 얻는 것이니, 버림이 있는 자는 태어나고 죽음에 머물지 아니하고, 멸하여 버리는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과를 얻는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미치지 못하는 뜻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큰 체와 큰 뜻과 가없음과 다함이 없음은 세간과 출세간에 잘함으로 말미암아 신통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016_0849_b_16L大體及大義, 無邊及無盡, 由善世出世,
成熟神通故。
016_0849_c_02L 【釋】대승에 귀의하는 자에게 있는 선근(善根)은 네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능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는 큰 체요, 둘째는 큰 뜻이요, 셋째는 가없음이요, 넷째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 【문】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큰 체라는 것은 말하자면 세간의 선근이니 이미 2승(乘)을 초월하여 지났기 때문이요, 큰 뜻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출세간의 선근이니 2승들의 출세간은 다만 자기를 이익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요, 가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선근을 성숙한 것이니 능히 가없는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때문이요, 다함이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신통의 선근이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러도 또한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의의 훌륭한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귀의하는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희망과 큰 자비와 종지(種智)와 또한 뒤로 물러나지 않음과 삼출(三出)과 이득(二得)의 차별에 여섯 가지가 있다.
016_0849_c_04L悕望及大悲, 種智亦不退, 三出及二得,
差別有六種。
【釋】대승에 귀의하는 차별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의 성품이요, 둘째는 인(因)이요, 셋째는 과(果)요, 넷째는 업(業)이요, 다섯째는 서로 응함이요, 여섯째는 품류(品類)이다. 희망으로 자기의 성품을 삼아서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체를 구하기 때문이다. 큰 자비를 인으로 삼아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종지(種智)를 과로 삼아서 더 이상 위가 없는 보리를 얻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지 아니함으로 업을 삼아서 남을 이익되게 하는 어려운 행을 행하여 행이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굴복하여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출(三出)을 서로 응함으로 삼아서 3승의 출리(出離)하는 행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이득(二得)을 품류(品類)로 삼아서 세속을 얻고 법성(法性)을 얻어서 거칠고 세밀한 차별을 얻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덕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행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귀의에는 큰 뜻이 있어서 공덕의 무더기가 증장(增長)하고 뜻이 자비하여 세간에 두루 하며 큰 성인의 법을 널리 유통한다.
016_0849_c_14L歸依有大義, 功德聚增長, 意悲遍世閒,
廣流大聖法。
【釋】큰 뜻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는 행이다.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행이라 함은 말하자면 공덕이 증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니, 만일 헤아리든지 만일 수로 셀 수 없든지 만일 시절이든지 헤아려 알 수가 없어서 가히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가히 세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마침내 항상 행하여 때에 분제(分齊)가 없기 때문이다. 남을 이익되게 하는 행이라 함은 뜻을 지음과 자비가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널리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큰 성인의 법을 유통하기 때문이라고 함은, 큰 성인의 법은 대승의 법이기 때문이다. 귀의품(歸依品)을 마친다.
【釋】이미 귀의의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0849_c_24L釋曰,已說歸依義。 次說種性差別。 偈曰:
016_0850_a_02L
유(有)와 훌륭함과 자기의 성품과 자기의 형상[相貌]과 품류와 과악(過惡)과 공덕과 금으로 비유함과 보배로 비유함 등 아홉 가지에 각기 네 가지가 있다.
016_0850_a_02L有勝性相類, 過惡及功德, 金譬與寶譬,
九種各四種。
【釋】종성에는 아홉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유(有)의 체요, 둘째는 가장 훌륭함이요, 셋째는 자기 성품이요, 넷째는 상모요, 다섯째는 품류요, 여섯째는 과악(過惡)이요, 일곱째는 공덕이요, 여덟째는 금으로 비유함이요, 아홉째는 보배로 비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뜻에 하나하나 각기 네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이 게송은 모두 합하여 든 것이요, 나머지의 게송은 각각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유의 체를 분별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경계로 말미암고 믿음으로 말미암고 행으로 말미암고 과로 말미암으니, 이 네 가지의 차별로 말미암아서 마땅히 유성(有性)의 체를 알아야 한다.
016_0850_a_09L由界及由信, 由行及由果, 由此四差別,
應知有性體。
016_0850_b_02L 【釋】종성은 체가 있는 것에 네 가지의 차별로 말미암으니, 첫째는 경계의 차별로 말미암고, 둘째는 믿음의 차별로 말미암고, 셋째는 행의 차별로 말미암고, 넷째는 과의 차별로 말미암게 된다. 경계의 차별로 말미암게 된다고 함은, 중생에는 가지가지 경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다. 많은 경계와 같은 것은 경[修多羅]에서 말한 것과 같이 경계의 차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3승의 종성들이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차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함은, 중생에게 가지가지의 믿음을 가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인(因)의 힘으로 일어남이 있고, 혹은 연(緣)의 힘으로 일어남이 있어서 능히 3승에서 하나의 승을 믿는 것이요, 일체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만일 성품의 차별이 없으면 또한 믿음의 차별도 없을 것이다. 행의 차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함은, 중생들이 행을 행하는 데는 혹은 능히 나가는 것이 있고, 혹은 능히 나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니 만일 성품의 차별이 없으면 또한 행의 차별도 없을 것이다. 과의 차별로 말미암은 것이라 함은 중생들의 보리에는 하(下)와 중(中)과 상(上)이 있어서 자(子)와 과가 서로 비슷하다. 그러니 만일 성품의 차별이 없으면 또한 과의 차별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의 차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종성이 체가 있음을 알 것이다. 이미 종성의 체가 있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이 가장 훌륭한 것을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밝고 깨끗함과 널리 포섭함과 큰 뜻과 또한 다함없고 뛰어난 네 가지의 훌륭함이 있기에 종성의 제일을 얻는다.
016_0850_b_03L明淨及普攝, 大義亦無盡, 由善有四勝,
種性得第一。
【釋】보살의 종성은 네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가장 훌륭함을 얻는다. 첫째는 선근이 밝고 깨끗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둘째는 선근이 널리 포섭됨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셋째는 선근의 큰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넷째는 선근이 다함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온갖 성문들의 선근은 이와 같이 밝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모든 사람들의 선근은 네 가지의 섭(攝)과 열 가지의 힘과 네 가지의 두려움이 없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요, 나머지 사람들의 선근은 남을 이익되게 함이 없기 때문이요, 나머지 사람들의 선근은 열반할 때에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의 선근은 그러하지 않다. 그것은 이로 말미암아 인이 되어 종성이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미 종성이 가장 훌륭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자기 성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釋】보살의 종성에는 네 가지의 자기 성품이 있다. 첫째는 성종의 자기 성품이요, 둘째는 습종의 자기 성품이요, 셋째는 소의(所依)의 자기 성품이요, 넷째는 능의(能依)의 자기 성품이니, 그 순서대로이다. 또는 저것이 있다고 함은 인(因)의 체가 있기 때문이요, 있음이 아니라고 함은 과의 체는 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만일 그러하다면 무엇을 일러 성품이라고 이릅니까? 【답】공덕으로 제도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도한다고 함은 공덕을 출생(出生)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기에 성품이라고 이른다. 이미 종성의 자기 성품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큰 자비와 큰 믿음과 크게 참음과 큰 행이다. 만일 이와 같은 상(相)이 있으면 이를 보살의 종성이라 이른다.
016_0850_b_22L大悲及大信, 大忍及大行, 若有如此相,
是名菩薩性。
016_0850_c_02L 【釋】보살의 종성은 네 가지의 상모가 있다. 첫째는 큰 자비를 상으로 삼아서 모든 고를 받는 중생들을 애민(哀愍)하여 주고, 둘째는 큰 믿음을 상으로 삼아서 모든 대승의 법을 애락(愛樂)하고, 셋째는 크게 참음을 상으로 삼아서 능히 모든 어려운 행을 참고 행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큰 행으로 상을 삼아서 여러 바라밀(波羅蜜)의 자기 성품인 선근을 두루 행하기 때문이다. 이미 종성의 형상과 모양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품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결정됨과 결정되지 못함과 후퇴하여 물러나지 아니함과 혹은 후퇴하여 떨어지는 것이 인연을 만나는 순서와 같아서 품류에는 네 가지가 있다.
016_0850_c_07L決定及不定, 不退或退墮, 遇緣如次第,
品類有四種。
【釋】보살 종성의 품류는 간략히 말하여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정된 것이고, 둘째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며, 셋째는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은 것이며, 넷째는 후퇴하여 떨어지는 것이니, 그 순서대로이다. 결정됐다고 함은 인연을 만나도 후퇴하여 물러나지 아니함이요, 결정되지 않았다고 함은 인연을 만나면 후퇴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이미 종성의 품류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과실(過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의 종성은 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의 과실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습혹(習惑)과 악한 벗과 빈궁과 남에게 소속된 것이다.
016_0850_c_14L應知菩薩性, 略說有四失, 習惑與惡友,
貧窮屬他故。
【釋】보살 종성의 과실은 간략히 말하여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습혹(習惑)이니 공덕을 행하지 아니하고 번뇌를 많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악한 벗이니 착한 지식을 떠나고 나쁜 사람들과 지나치게 친한 것이요, 셋째는 빈궁함이니 필요한 여러 물건들이 다 모자라고 적기 때문이요, 넷째는 남에게 소속되는 것이니 남들에게 얽매이고 소속되어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종성의 과실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의 공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공덕에는 또한 네 가지가 있으니 비록 악한 길에 떨어져도 더디 들어가고 다시 빨리 나오며 박(薄)한 듯하여도 자비가 깊음이다.
016_0850_c_22L功德亦四種, 雖墮於惡道, 遲入復速出,
苦薄及悲深。
016_0851_a_02L 【釋】보살의 종성에는 비록 앞의 것과 같은 과실이 있어서 만일 악한 길에 떨어져도 마땅히 알아라. 이 가운데에는 다시 네 가지의 공덕이 있다. 첫째는 더디 들어가서 깊이 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속히 나와서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고(苦)가 핍박(逼薄)하여도 번뇌가 가볍기 때문이요, 넷째는 자비가 깊어 중생들을 애민(哀愍)하고 또한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종성의 공덕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을 금에 비유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훌륭한 금의 성품과 같아서 생겨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온갖 착함과 온갖 지혜와 온갖 깨끗함과 온갖 신통이다.
016_0851_a_07L譬如勝金性, 出生有四種, 諸善及諸智,
諸淨諸通故。
【釋】훌륭한 금의 성품이라는 것은, 생겨나는 데 네 가지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매우 많음이요, 둘째는 광명이요, 셋째는 때가 없음이요, 넷째는 조유(調柔)하는 것이다. 보살의 종성도 또한 그렇다. 첫째는 한량없는 선근을 의지하고, 둘째는 한량없는 지혜를 의지하며, 셋째는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에서 얻는 청정을 얻음을 의지하고, 넷째는 모든 신통변화(神通變化)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미 종성을 금에 비유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종성을 보배에 비유한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미묘한 보배 성품과 같아서 네 가지를 성취하는 인이 된다. 큰 과와 큰 지혜와 큰 정(定)과 큰 뜻이다.
016_0851_a_16L譬如妙寶性, 四種成就因, 大果及大智,
大定大義故。
【釋】미묘한 보배의 성품이라고 함은 네 가지 성취하는 의지이다. 첫째는 진(眞)을 성취하는 의지이고, 둘째는 색(色)을 성취하는 의지이며, 셋째는 형상[形]을 성취하는 의지이고, 넷째는 양(量)을 성취하는 의지이다. 보살의 종성도 또한 그러하여서 첫째는 큰 보리의 인이 되고, 둘째는 큰 지혜의 인이 되며, 셋째는 큰 정(定)의 인이 되니, 정이라 함은 마음이 일정한 데 머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넷째는 큰 뜻의 인이 되니, 끝없는 중생들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미 자세히 종성의 지위를 분별하여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무성(無性)의 지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0851_b_02L
한결같이 악한 행을 행하여서 널리 온갖 백법(白法)을 끊어 해탈할 분수가 있지 아니하고 착함이 적고 또한 인이 없다.
016_0851_b_02L一向行惡行, 普斷諸白法, 無有解脫分,
善少亦無因。
【釋】열반에 들어갈 법이 없는 자를 무성(無性)의 위치라고 한다. 여기에는 간략히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때가 되면 열반의 법에 드는 것이요, 둘째는 필경에는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이다. 때가 되면 열반의 법에 들어간다고 함은 네 가지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한결같이 악한 행을 행함이요, 둘째는 온갖 착한 법을 널리 끊음이요, 셋째는 해탈의 분수인 선근이 없기 때문이요, 넷째는 선근이 구족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함은, 인이 없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갈 성품이 없는 것이니,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다만 나고 죽고 하는 데만 구하고 열반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미 무성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열반에 들어가게 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깊고 큰 법을 자세히 연설하여 믿게 하고 끝까지 참게 하여 마침내 대보리를 성취하게 하니, 두 사람[二知]으로 하여금 두 성품이 뛰어남을 알게 한다.
016_0851_b_12L廣演深大法, 令信令極忍, 究竟大菩提,
二知二性勝。
【釋】‘자세히 깊고 큰 법을 연설한다’는 것은 남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혜 없는 자에게는 크게 믿음을 얻게 하고, 이미 크게 믿는 자에게는 극히 참음을 성취하여 능히 퇴전하지 않음을 행하게 하고, 이미 극히 참는 자에게는 구경에 더 위가 없는 보리를 성취하게 한다. ‘두 사람[二知]’이라고 함은 말하자면 여러 범부와 여러 성문들이니, 만일 이와 같은 두 사람을 얻어서 자기 성품과 성품의 덕이 원만함이 가장 뛰어남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문】무엇을 뛰어나다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보리의 나무를 증장하여 즐거움을 내고 고를 멸하여서 자기와 남의 이익됨이 과(果)가 되니 이 뛰어난 것은 마치 좋은 뿌리와 같다.
016_0851_b_20L增長菩提樹, 生樂及滅苦, 自他利爲果,
此勝如吉根。
016_0851_c_02L 【釋】이와 같은 종성은 능히 매우 넓은 공덕의 큰 보리의 나무를 증장하며, 능히 큰 즐거움을 얻으며, 능히 큰 괴로움을 멸하며, 능히 자기와 남이 이롭고 즐기는 것을 얻어서 그로써 큰 과를 삼는다. 그러기에 이 성품이 가장 제일이 되니, 길상(吉祥)의 나무뿌리와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보살의 종성도 또한 그러하다. 종성품(種性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