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1052_a_01L섭대승론서攝大乘論序
016_1052_a_01L攝大乘論序



무릇 지극한 도는 너무나 넓고 커서, 생각만 하여도 그 도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고,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는 온 세상에 고르게 퍼져 있어, 아무리 권하여 부처님께 나아가도 그 자비는 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덕화[德]가 모든 중생[含生]에게 덧입혀지게 되었고, 불법의 다스림[理]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어떤 이도 빠뜨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중생은 자칫 불법의 길에서 벗어나 오래도록 헤매기 쉽고, 허깨비의 세계에 빠져 갈팡질팡하여도 그 생활을 멈추기 어렵다. 그리고 만약 먼저 이 세상을 초월한 깨달음[出世]을 말한다면, 본성[性]을 의심하여 깨달음의 길을 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불법의 가르침을 베풀고 깨달음의 방편을 마련하여, 각자 본성의 욕구[性欲]를 따르게 한 것이다.
016_1052_a_02L夫至道弘曠無思不洽大悲平等誘進靡窮德被含生理非偏漏但迷塗易久淪惑難息若先談出世則疑性莫啓故設教立方各隨性欲
요임금과 순임금[唐虞]1)이 다스리기 전에는 서적[圖牒]은 아주 드물어서 그 수도 적었으나, 주나라[姬周]2)이후 경전[經誥]이 널리 보급되어 그 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비록 다시 예법을 제정하고 가르침을 만들어서 세속의 법으로 중생을 인도하였을지라도, 실재[眞]와 허깨비[假]를 깨닫게 하는 오묘한 뜻[妙趣]에는 여전히 어두워서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자취는 총령(蔥嶺 : 파미르 고원) 서쪽에 감추어져 있었고, 그 가르침은 창해(滄海 : 넓은 바다) 바깥에 비밀스럽게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황실이 천명을 받아 중국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진나라 왕조가 들어서자 이윽고 불법이 일어나 그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양(梁)나라가 중국에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을 때에는 불법이 더욱 융성[興隆]하였으니, 천년의 절반이 되는 기간을 보내고, 7대(代)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016_1052_a_06L唐虞之前圖牒簡少姬周以後經誥弘多復制禮作訓竝導之以俗法而眞假妙趣尚冥然而未睹故迹隱蔥嶺以西教秘滄海之外自漢室受命方稍東漸爰及晉朝斯風乃盛梁有天下彌具興隆歷千祀其將半涉七代而迄今
축법란[法蘭]3)은 앞선 시대에 중생을 불법의 청정한 근원[淸源]으로 인도하였고, 구라마집[童壽]은 그 후대에 불법의 향기로운 가르침[芳塵]을 널리 전했으며, 안세고와 승예[安睿]4)는 호쾌한 기상을 펼쳐 불법의 실마리[義端]를 일으켰고, 도생과 승조[生肇]5)는 현묘한 언어[玄言]에 통달하여 그 언어로 불법의 한없이 깊고 지극한 이치를 풀이하였다. 비록 이들이 함께 불법을 도모하다 그 가는 방향이 나뉘었고 종파를 같이하면서도 분파6)로 갈라졌을지라도, 그 경지의 깊고 낮음을 경쟁하면서 자신들이 잘 아는 것과 잘 모르는 것들을 서로 섞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각 종파의 전공분야가 더욱 다양해져서 각자 다른 길로 다 같이 달려가고, 전해진 것을 서로 조종의 가르침으로 익혔으며, 버리거나 취하는 것도 각자의 뜻을 따르게 되었고,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에도 그 길이 다르게 되었다.
016_1052_a_13L法蘭導淸源於前童壽振芳塵於後安睿騁壯思以發義端生肇擅玄言以釋幽致雖竝策分鑣同瀾比而深淺競馳照晦相雜自茲以降篤好愈廣莫不異軌同奔傳相祖習而去取隨情開抑殊軫
혜개(慧愷)7)는 자신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불도에 뜻을 두어 바랑을 짊어지고 배움의 길을 떠나서, 부지런히 자신을 성찰하며 낮은 물론 밤에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다행히 자신이 의탁할 배움의 공동체를 얻어, 불도의 가르침에 대해 묻고 답을 받았으며, 두루 다니며 오랜 기간 강설에도 참석하였고, 이름난 스승과 뛰어난 학우에게 의문이 드는 것을 물을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두루 공부하기는 했으나 빠뜨린 것이 많고 그 경지도 낮았으며, 불법을 찬송하고 우러러보기는 하나 그것을 얻을 방법을 알지 못하여서, 불법의 갈래들을 탐구하여 불법의 근원을 깨닫고자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이것은 대체로 문자(文字)에만 그 생각이 매몰되어 있고, 불법의 주요한 뜻[弘旨]에는 생각이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새도록 생각하다 아침에 해가 떠도 안타까운 탄식만이 일어났고, 불법을 향한 마음을 저버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매번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여[順風]8) 도(道)를 물었으나, 도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016_1052_a_18L慧愷志慚負橐勤愧聚螢謬得齒迹學徒稟承訓義遊寓講肆多歷年所名師勝友備得諮詢但綜涉疏淺鑽仰無術波討源多所未悟此蓋慮窮於文字思迷於弘旨明發興嗟負心非一欲順風問道而未知厥路
016_1052_b_02L이때 삼장(三藏)에 정통한 법사가 있었으니, 그는 우선니국(優禪尼國) 바라문종(婆羅門種) 출신으로, 성(姓)은 바라타(頗羅墮)이고, 이름은 구라나타(拘羅那他)이었다. 구라나타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친의(親依)라고 한다. 법사는 학식과 통찰력이 깊고 넓었으며, 그 모습과 품격도 훌륭해서 비범함이 느껴졌다. 타고난 자질도 아주 뛰어나 남들 사이에 홀로 우뚝했고, 신묘한 변론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막힘이 없이 자유로웠다. 깨달음으로 얻은 불법의 기운이 무리들 중에 으뜸이었고, 실천으로 얻은 불법의 덕행도 세속의 기준을 뛰어넘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스승을 섬겼고, 먼저 외전(外典 : 불경 이외의 다른 서적)을 익혀서 외전의 깊은 뜻에 통달하였으며, 마음에는 네 가지 베다[四韋]9)를 담고, 가슴[胸衿]에는 육론(六論)10)을 품었다.
016_1052_b_02L有三藏法師是優禪尼國婆羅門種姓頗羅墮名拘羅那他此土翻譯稱曰親依鑑淵曠風表俊越天才高傑神辯閑道氣逸群德音邁俗少遊諸國歷事衆師先習外典洽通書奧包四韋於懷抱吞六論於胸衿
그리고 삼장(三藏 : 경장・율장・논장)을 온전히 다 배웠고, 오부(五部)11)를 꿰뚫어서 그에 따라 수행했으며, 대승(大乘)을 연구하여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 법사는 이미 불교 경전을 널리 섭렵하여 종합하였고, 불법의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마저도 통달해서, 항상 다른 지역에도 불교의 현묘한 종파를 일으켜서, 아직 불법을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불법의 문을 열어주기를 원하였다. 이 때문에 법사는 몸소 길을 나서 멀리 여행을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아서, 만리(萬里)를 가는 것도 이웃에 가는 것처럼 여기고 사해(四海)를 건너는 것도 지척(咫尺)을 가는 것처럼 여겼다. 그리하여 남조 양(梁)나라 태청(太淸) 2년(548년)에 건업(建鄴 : 지금의 남경)에 도착하여 머무르게 되었다.
016_1052_b_08L學窮三藏貫練五部硏究大乘備盡深極法師旣博綜墳籍妙達幽微每欲振玄宗於他域啓法門於未悟以身許道無憚遠遊跨萬里猶比鄰越四海如咫尺以梁太淸二年方居建鄴
그러나 당시는 양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때로, 법사에게 어려움이 거듭 밀려들게 되었다. 법사는 이 때문에 동쪽과 서쪽으로 피난을 다니게 되었고, 결국 부처님의 큰 법이 막혀 널리 전해지지 못하였다. 법사는 구강(九江)12)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도리어 오령(五嶺)13) 지역에만 떠돌게 되었으며, 번역한 불경도 그리 많지 않았다. 뒤에는 민월(閩越 : 대체로 복건성 북부와 절강성 남부 지역)지역에도 가서 강설을 한 적도 적지 않았다. 법사는 늘 이렇게 떠도는 자신의 현실을 마음으로 안타까워했고, 자신을 알아주는 자[知音]가 드문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므로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고[伯牙絕絃]14) 변화가 옥을 안고 울었던[卞和泣璧]15) 것이니, 진실로 오묘한 뜻을 담은 곡(曲)은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한 자 남짓의 보배[珍]는 진실로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법사는 떠돈 지가 오래되자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하였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드디어 번우(番禺 : 지금의 광동성에 있는 지역)에 도착하였다.
016_1052_b_13L仍値梁季混淆撗流荐及法師因此避地東西遂使大法擁而不暢未至九江返遊五嶺凡所翻譯卷軸未多後適閩越敷說不少法師每懷慷慨所歎知音者希故伯牙絕絃卞和泣璧良由妙旨之曲難辯盈尺之珍罕別法師遊方旣久欲旋返舊國經塗所亘遂達番禺
016_1052_c_02L의동(儀同) 삼사(三司) 광주자사(廣州刺史) 양산군공(陽山郡公)인 구양외(歐陽頠)16)는 지혜는 산악의 신령[嶽靈]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고, 덕행은 하부(河府)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문무(文武)를 모두 통달했으며, 어지러워진 도(道)를 바르게 하고 혼란한 시대를 바로 잡아서, 백월(百越) 지역에서 유민을 안정시켰고, 오령(五嶺)지방에서는 정법(正法)을 세웠다. 구양외는 법사의 높은 덕행을 흠모하고, 대사의 빼어난 가르침을 사모해서, 대사를 받들어 보살계사(菩薩戒師)로 삼고자 요청했고, 대사를 공손히 받들며 제자로서의 예법을 다하였다. 예전에 대사에게 수업을 받을 적에도 아주 즐거워해서, 이미 오랜 동안 쌓인 자신의 폐해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나, 대사의 가르침을 공손히 따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대사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금 다시 대사를 만나니, 그 마음은 덩실덩실 춤출 듯이 예전보다 배나 기뻤고, 다시 안정된 생활 속에서 대사의 덕(德)을 이어받고 도(道)를 물으며 의심나는 것도 아뢰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양외는 비록 겸손히 정중하게 세 번 대사를 청했을지라도 대사의 허락을 받지 못했고, 갑자기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구양외의 마음은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016_1052_b_21L儀同三司廣州刺史陽山郡公歐陽頠睿表嶽靈德洞河府經文緯武匡道佐時康流民於百越建正法於五嶺欽法師之高行慕大士之勝奉請爲菩薩戒師恭承盡弟子之愷昔嘗受業已少滌沈弊伏膺未久便致睽違今重奉値倍懷蹈舞欲飡和稟德訪道陳疑雖慇懃三請而不蒙允遂恍然失啚心魂靡託
형주자사(衡州刺史)로 양산공(陽山公 : 구양외)의 세자(世子)인 구양흘(歐陽紇)은 몸가짐과 행실이 엄숙하며 단정하였고, 위세와 무력도 바르게 사용하였으며, 문학과 역사도 두루 공부하였고, 다스림의 핵심[治要]도 깊이 통달하였다. 숭고한 성품이 내적으로 깊이 갖추어졌고, 청아한 덕행도 밖으로 흘러넘쳤다. 어진 이를 흠모하고 도(道)을 음미하였으며, 믿음을 두터이 하고 특별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몸소 법사에게 요청하는 주체가 되어 예를 다하여 섬겨 모시니, 법사가 이에 기뻐하며 요청을 받아들이고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016_1052_c_06L州刺史陽山公世子歐陽紇風業峻整威武貞拔該閱文史深達治要瀾內湛淸輝外溢欽賢味道篤信愛躬爲請主兼申禮事法師乃欣然受請許爲翻譯
제지사(制旨寺) 주지 혜지(慧智) 법사는 계행(戒行)이 맑고 담백했으며, 도의 기운이 넓고 씩씩했다. 뜻하는 사업이 아름답고 많았으며, 모든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완수하였다. 중생을 계도하고 구제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고, 사찰을 아름답고 장대하게 짓는 일도 쉬지 않았다. 정남장사(征南長史) 원경(袁敬)은 덕(德)이 충직하며 밝았고, 뜻(志)은 넓고 원대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계책은 거짓 없이 간결하였고, 청렴한 생활도 공평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얽혀있는 정치를 평화롭게 해결하여 백성들 사이에서 그 명성이 일찍부터 드높았다. 아울러 불법(佛法)을 매우 중시하였고, 그 지극한 이치[至理]를 숭상하고 마음에 두었다. 이들 스님[黑]과 속인[白] 두 현인이 시주를 모집하여, 천간[辰次]으로는 계[昭陽], 지지[歲維]로는 미[協洽], 즉 계미년(563년), 달[月旅]로는 3월[姑洗], 절기[神紀]로는 봄[句芒]에, 광주(廣州) 제지사(制旨寺)에서 즉시 번역이 시작되었다.
016_1052_c_11L制旨寺主慧智法師戒行淸白道氣宏壯志業閑贍觸途必擧匡濟不窮輪奐靡息征南長史袁敬德履沖明志託夷遠徽猷淸簡冰桂齊質弼諧蕃政民譽早聞兼深重佛法崇情至理黑白二賢爲經始檀越辰次昭陽歲維協洽月旅姑洗神紀句芒於廣州制旨寺便就翻譯
016_1053_a_02L법사는 이미 산스크리트어 문법학을 미묘한 부분까지 이해하고 있었고, 방언(方言)도 잘 알고 있었다. 문장은 번역한 근거가 있으면 반드시 밝혔고, 그 의미는 미묘한 것이라도 진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스승과 가까이에 자리를 마련하고[席間函丈]17) 아주 짧은 시간조차도 쉬지 않았으며, 한역한 것을 적을 때 신중히 하면서도 아주 기뻐하였고, 번역이 나오는 대로 바로 글로 옮겼다. 한 장(章) 한 구(句)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남김없이 밝히고, 의미를 완전히 다 풀고 나서야 비로소 번역문을 지었다. 번역 작업은 특히 어려운 일이라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아름답게 치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한 글자라도 어긋남이 있게 되면, 그 뜻과 내용이 원문과 아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니, 이에 원문 그대로 질박하게 번역하여 그 뜻을 얻는 것은 괜찮으나, 문장을 보기 좋게 하려고 꾸미다 그 본뜻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번역된 글은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문장으로서의 멋도 갖추었다. 승인(僧忍) 등과 함께 스승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서 배웠고, 새벽부터 밤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낭비하지 않아서, 곧 그 해[某年]1) 수단(樹檀)의 달에 번역문과 뜻풀이가 모두 완성되었다.
016_1052_c_18L法師旣妙解聲論善識方言詞有以而必彰義無微而不暢席閒函丈終朝靡息愷謹筆受隨出隨書一章一句備盡硏覈釋義若竟方乃著文翻譯事殊難不可存於華綺若一字參差則理趣胡越乃可令質而得義不可使文而失旨故今所翻文質相與僧忍等同共稟學夙夜匪懈無棄寸陰卽以某年樹檀之月文義俱
본론(本論) 3권(卷), 석론(釋論) 12권(卷), 의소(義疏) 8권(卷)으로, 모두 합쳐 23권(卷)이다. 이 논(論)은 대승(大乘)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고, 정법(正法)의 깊이 감추어진 진리이다. 그 오묘한 뜻은 마치 구름이 일어나는 듯 신비롭고, 그 맑은 문장은 바다가 넘쳐흐르는 듯 웅장하다. 깊고 견고하고 그윽하고 광대하여, 이승(二乘)19)을 좇았던 자들도 이 경전으로 인해 더이상 헤매이지 않게 되고, 넓고 호탕하여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니, 십지(十地)20)의 근본 학문[宗學]이 된다.
016_1053_a_05L本論三卷釋論十二卷義疏八卷合二十三卷此論乃是大乘之宗旨正法之秘奧妙義雲興淸詞海溢固幽遠二乘由此迷墜曠壯該含十地之所宗學
여래(如來)께서 입멸하신 후 거의 천백여 년이 되어, 미륵보살(彌勒菩薩)께서 알맞은 때에 이 세상에 나오시고, 영(靈)을 내려보내 세상을 굽어보시다가 이미 자신을 잊고 낮아지셔서, 아승가(阿僧伽) 법사를 위해 대승(大乘)의 핵심 의미[中義]를 넓게 풀어주셨다. 아승가(阿僧伽)는 중국말로 무착(無著)이다. 법사는 하나[一]를 얻으면 도(道)를 깨닫고, 둘[二]을 체득하면 도의 근본[宗]에 머물렀으며, 현묘함[玄]을 갖추고 극의[極]를 살펴보며 정신[神]을 집중하여 세상을 초월해서[物表], 불법의 지극한 이치[至理]를 크게 밝히고자 하였으므로, 이 『섭대승론』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식(唯識)의 감추어졌던 미묘한 말씀이 이 논으로 인해 뚜렷이 드러났고, 삼성(三性)21)의 오묘한 뜻이 이 논 때문에 널리 전해져서, 이륜(彝倫 :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이 이 세상의 으뜸가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유식의 이치에 도달하는 방편[舟航]이 마련된 것이다.
016_1053_a_09L如來滅後將千一百餘彌勒菩薩投適時機降靈俯接忘已屈應爲阿僧伽法師廣釋大乘中阿僧伽者此言無著法師得一會道體二居宗該玄鑑極凝神物表敷闡至理故制造斯論唯識微言因茲得顯三性妙趣由此而彰冠冕彝倫舟航有識
본론(本論)은 곧 무착(無著) 법사가 지은 것이다. 법사의 바로 밑에 동생은 바수반두(婆藪盤豆)인데, 중국말로 천친(天親)이라고 부른다. 도(道)가 성인의 경지[生知]22)에 버금갔고, 덕(德)은 맑고 깨끗함[藏性]을 갖추었으며, 몸가짐과 자세[風格]도 아주 훌륭했고, 정신과 기운[神氣]도 아주 맑고 활기차서, 그 형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전해 주었고, 대승(大乘)의 넓은 뜻을 익혔다.
016_1053_a_16L本論卽無著法師之所造也法師次弟婆藪盤豆此曰天親道亞生知德備藏性風格峻峙神氣爽發稟厥兄之雅訓習大乘之弘旨
무착(無著) 법사가 지은 모든 논은 말의 의미가 깊고 오묘해서, 그 이치를 깨닫기 어렵다. 그래서 혹시 후학들이 다시 잘못해서 그 뜻을 어지럽게 만들 것을 염려하여, 석론(釋論)을 지어 본문을 풀이하도록 한 것이다. 논의 구성 안에 소승(小乘)의 주장도 포함시켰고, 외도(外道)는 붓끝으로 논파하였다. 이 이후로부터 상계(像季)23)까지 방등(方等)24)과 원교(圓教)25)가 이에 번성해서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016_1053_a_19L無著法師所造諸論詞致淵玄理趣難曉將恐後學復成紕紊故製釋論以解本文籠小乘於形內挫外道於筆端自斯以後迄于像季方等圓教乃盛宣通
016_1053_b_02L 혜개(慧愷)는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도 얄팍하고 보잘 것 없으면서, 거대한 진리의 골짜기[巨壑]에 겨자로 된 작은 배[芥舟]를 띄우려고 했고, 느린 말[駘足]을 채찍질해 먼 길[脩路]을 가고자 했다. 이것은 터럭을 쌓아서 한 길[仞]을 만드는 것과, 횃불을 모아서 해나 달을 만드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학식이 있는 군자(君子)가 이 도(道)를 깊이 생각하고 살펴봐서 반드시 이 도가 사라지거나 쇠퇴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016_1053_a_24L慧愷不揆虛薄情慮庸淺乃欲泛芥舟於巨壑策駘足於脩路庶累毫成仞聚爝爲明有識君子幸宜尋閱其道必然無失墜也
016_1053_b_04L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016_1053_b_04L攝大乘論卷上


무착(無着) 지음
016_1053_b_05L無著菩薩造
진제(眞諦) 한역
변상섭 번역
眞諦三藏譯


1. 의지승상(依止勝相)

1) 중명품(衆名品)
016_1053_b_06L依止勝相中衆名品第一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대승의 수다라(修多羅)이다. 불세존 앞에서 바르게 대승구의 정의에 들어간 보살마하살은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교설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하며,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뛰어넘는다.
016_1053_b_07L攝大乘論卽是阿毘達磨教及大乘修多羅佛世尊前善入大乘句義菩薩摩訶薩欲顯大乘有勝功德依大乘教說如是言 諸佛世尊有十勝相所說無等過於餘教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란 첫째는 응지(應知:인식)의 의지(依止)가 수승한 모습이며, 둘째는 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며, 셋째는 응지에 들어감의 수승한 모습이며, 넷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수승한 모습이며, 다섯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여섯째는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 의지해야 하는 계학(戒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일곱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심학(心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여덟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혜학(慧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아홉째는 학의 결과인 적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열째는 지혜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이 열 가지 정의의 수승한 상으로 말미암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그 밖의 다른 가르침보다 우월하다. 대승에서 나타나는 수다라의 문구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또한 어찌하여 이 가운데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승이 그 밖의 다른 교설(敎說)보다 수승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간략한 해석[略釋]으로 이러한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대승에만 있으며, 소승에는 없다.
016_1053_b_12L十勝相者一應知依止勝相二應知勝相三應知入勝相四入因果勝相五入因果修差別勝相六於修差別依戒學勝相此中依心學勝相八此中依慧學勝九學果寂滅勝相十智差別勝相由此十義勝相如來所說過於餘教如此釋修多羅文句顯於大乘眞是佛說復次云何此中略釋能顯大乘勝於餘教今此略釋顯斯十義唯大乘有小乘中無
016_1053_c_02L무엇이 열 가지인가? 아리야식을 설하여 응지의 의지의 모습이라고 하며, 첫째는 의타성(依他性)이며, 둘째는 분별성(分別性)이며,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인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응지의 상이라고 하며, 유식의 가르침을 설하여 응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며, 6바라밀을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살의 10지를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모습이라고 하며, 보살이 받아 지니며 수호하는 금계(禁戒)를 설하여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의 계학(戒學)의 모습이라 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와 허공기(虛空器) 등의 정(定)을 설하여 심학(心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분별지를 설하여 혜학(慧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주처열반을 설하여 학의 결과인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자성신(自性身)과 응신(應身) 그리고 화신(化身), 이 셋을 설하여 무분별지의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016_1053_b_22L何者爲十謂阿黎耶識說名應知依止相三種自性一依他性二分別性三眞實性說名應知唯識教說名應知入相六波羅蜜說名入因果相菩薩十地說名入因果修差別相菩薩所受持守護禁戒說名於修差別戒學相首楞伽摩虛空器等定說名心學相無分別智說名慧學相無住處涅槃說名學果寂滅相三種佛身自性身應身化身三說名無分別智果相
이와 같은 열 가지 처(處)는 오직 대승에만 있어서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제일(第一)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는 오직 보살을 위하여 이 열 가지 정의를 설하셨다. 따라서 대승에 의거하여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넘어선다.
016_1053_c_09L如此十種處唯大乘中有異於小乘故說第一世尊但爲菩薩說此十義故依大乘諸佛世尊有十勝相所說無等過於餘教
또한 다시 어찌하여 이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설한 것이 비길 데가 없으며, 대승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여래의 바른 교설은 소승이 결코 대승이 아니라고 가로막는다. 소승 가운데에서는 이 열 가지 정의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하나의 정의를 따라 해석하더라도 단지 대승 가운데의 해석을 볼 따름이다. 또한 다시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성취함이 순차적으로 뒤따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016_1053_c_13L復次云何此十勝相所說無等能顯大乘是如來正說遮小乘決非大乘於小乘中未曾見此十義隨釋一義但見大乘中釋復次此十義能引出無上菩提成就隨順不相違諸衆生得一切智智而說偈言

응지의 의지와 상(相)과
들어감ㆍ원인과 결과ㆍ닦음의 차이와
세 가지 학(學)과 결과인 멸(滅)과
지혜가 위없는 승(乘)에 포섭된다.
016_1053_c_18L應知依及相
入因果修異
三學及果滅
智無上乘攝

열 가지 정의는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것이 보리(菩提)의 원인이라는 것을 본다.
따라서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며,
열 가지 정의를 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수승하다.
016_1053_c_20L十義餘處無
見此菩提因
故大乘佛言
由說十義勝
016_1054_a_02L
어찌하여 열 가지 정의는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여지는가? 보살은 처음으로 배움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모든 법의 여실한 인연(因緣)을 관하여야 한다. 이 관으로 말미암아 12연생(緣生)에서 총명한 지혜를 생하게 된다. 이후에 연생하는 법에서 그것의 체상(體相)을 요별하여야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二邊]의 과실을 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여 마땅히 연하여지는 여실한 모든 상[諸相]을 통달하여야 한다. 차후에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다음에는 마음이 이미 응지(應知)의 실상을 통달한다. 먼저 행하여졌던 6바라밀을 다시 성취하여 청정케 하고 다시 물러나 상실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의식 속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의식 속의 청정함에 섭지되는 모든 바라밀을 10지의 차별에 의거하여 하나를 좇아서 3아승기겁(阿僧祇劫)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보살의 세 가지 학(學)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원만하여진 것은 학의 결과인 열반과 위없는 보리를 차후에도 닦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열 가지 정의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 순서를 설하는 가운데 모든 대승이 원만하여짐을 얻는다.
016_1053_c_21L云何十義如此次第說菩薩初學應先觀諸法如實因緣由此觀故於十二緣生應生聰慧次後於緣生法應了別其體相由智能離增益損減二邊過失如此正修應通達所緣如實諸相次後從諸障應解脫次心已通達應知實相是先所行六波羅蜜更成就令淸淨無復退失由依意內淸淨故次內淸淨所攝諸波羅蜜十地差別應修隨一三阿僧祇劫菩薩三學應令圓滿圓滿已是學果涅槃及無上菩提次後應得修十義次第如此此次第說中一切大乘皆得圓滿
처음으로 설하는 이 응지의 의지를 세워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식을 설하셨으며,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하셨느냐? 불세존께서는 아비달마략본(阿毘達磨略本)의 게송에서 설하셨다.
016_1054_a_12L此初說應知依止立名阿黎耶識世尊於何處說此識及說此識名阿黎耶如佛世尊阿毘達磨略本偈中說

이 계(界)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의 의지이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가 있으며,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
016_1054_a_15L此界無始時
一切法依止
若有諸道有
及有得涅槃

아비달마 가운데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016_1054_a_17L阿毘達磨中復說偈云

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고, 머무는
일체종자식이다.
따라서 아리야(阿梨耶)라고 한다.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016_1054_a_18L諸法依藏住
一切種子識
故名阿黎耶
我爲勝人說
016_1054_b_02L
이 아함의 두 게송은 식의 체와 이름을 입증한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하셨는가? 모든 유(有)가 생하는 부정품법(不淨品法)이 이 가운데 숨어 간직되어 과(果)가 되기 때문이며, 이 식이 모든 법 가운데 숨고 간직되어 인(因)이 된다. 또한 다시 모든 중생은 아상(我相)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이 식 가운데 간직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아함에 해절경(解節經:解深密經)에 설하여진 것과 같은 게송을 읊고 있다.
016_1054_a_20L此阿含兩偈證識體及名云何佛說此識名阿黎耶一切有生不淨品法於中隱藏爲果故此識於諸法中隱藏爲因故復次諸衆生藏此識中由取我相故名阿黎耶識阿含云如『解節經』所說偈

집지식(執持識)은 심오하고 미세하며,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
범부에게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物]을 집착하여 자아[我]로 삼는다.
016_1054_b_03L執持識深細
法種子恒流
於凡我不說
彼物執爲我

어찌하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는가? 모든 색이 있는 제근[有色諸根]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어서 모든 생을 받는 취(取)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이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어 무너지지 않고 상실되지 않으며, 내지는 뒤의 시기에도 서로 이어져서 생을 받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하기 때문이다. 6도(道)의 신(身)은 모두 이와 같은 취이며, 이 취는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타나라고 이름한다. 혹은 설하여 심(心)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 심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6_1054_b_05L云何此識或說爲阿陁那識能執持一切有色諸根一切受生取依止故何以故有色諸根此識所執持不壞不乃至相續後際又正受生時由能生取陰故故六道身皆如是取是取事用識所執持故說名阿陁那或說名心如佛世尊言心意識
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과 더불어 차제연(次第緣)의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멸한 식이 되며, 또한 식이 생하는 의지를 의(意)라고 한다.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의가 있으며,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항상 서로 응한다. 첫 번째는 신견(身見)이고, 두 번째는 아만(我慢)이며, 세 번째는 아애(我愛)이고, 네 번째는 무명(無名)이다. 이 식은 그 밖의 다른 번뇌(煩惱)인 식(識)의 의지이다. 이 번뇌인 식은 첫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생하고, 둘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진(塵)과 차제를 연함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의라고 한다.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5식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 하면 이 5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016_1054_b_12L意有二種一能與彼生次第緣依故先滅識爲又以識生依止爲意二有染污意與四煩惱恒相應一身見二我慢我愛四無明此識是餘煩惱識依止此煩惱識由一依止生由第二染污由緣塵及次第能分別故此二名意云何得知有染污心若無此心獨行無明則不可說有與五識相似此法應無何以故此五識共一時有自依謂眼等諸根
016_1054_c_02L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과 멸심정(滅心定)은 다름이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상정(無想定)은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 있고, 멸심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정(定)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에 무상천(無想天)에서는 한 시기에 흐름도 없고 상실함도 없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 가운데 아견과 아만 등이 없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시간 가운데 아집을 일으켜서 선과 악과 무기(無記) 가운데 두루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단지 악심만이 아집 등과 더불어 상응해서만 아(我)와 아소(我所)인 이것이 있으면 행할 수 있고, 선과 무기 가운데서는 곧 행할 수 없다. 만약 두 마음을 동시에 생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없거나, 만약 여섯 번째의 식과 서로 응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있다.
016_1054_b_22L復次意名應無有義復次無想定滅心定應無有異何以無想定有染污心所顯滅心定不若不爾此二定應不異復次於無想天一期應成無流無失無染污故於中若無我見及我慢等復次一切時中起我執遍善惡無記心中若不如此但惡心與我執等相應故我及我所此或得行於善無記中則不得若立二心同時生無此過失若立與第六識相應行有此過失

독행무명(獨行無明)과
이와 유사한 5식이 없고,
두 정(定)에 차별이 없으며,
의명(意名)은 의(義)가 없다.
016_1054_c_09L無獨行無明
及相似五識
二定無差別
意名無有義

무상천은 아집이 없다면
한 시기에 생하여 흐름이 없고,
선과 악과 무기 가운데
아집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016_1054_c_11L無想無我執
一期生無流
善惡無記中
我執不應起

염오심을 떠나, 있지 않다고 한다면
둘과 더불어 셋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모든 곳에 없다면
아집은 생할 수 없다.
016_1054_c_12L離污心不有
二與三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得生

진실한 의(義)를 깨달아 보아버리면
혹장(或障)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곳에 행하므로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016_1054_c_13L證見眞實義
或障令不起
恒行一切處
名獨行無明

이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무기성에 포섭되며, 항상 4혹(惑)과 함께 서로 응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혹과 같이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다. 이 두 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에 소장(所藏)되기 때문에, 이 마음이 항상 생하여 없어지지[廢] 않는다.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 번째의 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의(意)라 해야 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종자를 삼아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할 수 있다.
016_1054_c_15L此心染污故無記性攝恒與四惑相譬如色無色界惑是有覆無記二界煩惱奢摩他所藏故此心恒生不廢尋第三體離阿黎耶識不可得是故阿黎耶識成就爲意依此以爲種子餘識得生
016_1055_a_02L 어찌하여 이 의를 다시 설하여 심(心)이라고 하는가? 많은 종류의 훈습종자가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성문승은 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으면서 아리야와 아타나라는 이름은 설하는가? 미세한 경계에 섭지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문인은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位階)가 없다. 따라서 성문인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설을 떠나서도 지혜를 성취함으로 해서 본래의 원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모든 보살에게는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위하여 설하신다. 왜냐 하면 이 지혜를 떠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이러한 곳은 없다.
016_1054_c_21L云何此意復說爲心多種熏習種子所聚故云何於聲聞乘不說此心相及說阿黎耶阿陁那微細境界所攝故何以故聲聞人無有勝位爲得一切智智是故於聲聞人離此說由成就智令本願圓滿故不爲說諸菩薩應有勝位爲得一切智智故佛爲說何以故若離此智得無上菩提無有是處
또한 성문승에 있어서는 이 식을 다른 이름으로 여래께서 일찍이 드러내셨다. 『증일아함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간에서는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리야를 갈애(渴愛)하고, 아리야를 익히며, 아리야를 집착한다. 아리야를 멸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른 법을 세간은 기꺼이 듣고자 귀를 기울인다. 뜻을 지어 알고자 하여 정근(正勤)을 생하여 일으켜서 이제 아리야를 멸하여 다하는 것을 얻으며, 내지는 여래의 바른 법과 유사한 법을 받아들여 행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해서 이 첫 번째로 희유한 불가사의한 법이 세간에 드러나니 본식과 같다. 이 『여래출세사종공덕경(如來出世四種功德經)』이 다른 정의로 말미암아 성문승에게 이 식을 이미 드러내었다.
016_1055_a_06L復次此識於聲聞乘由別名如來曾顯如『增一阿含經』言於世閒喜樂阿梨耶愛阿黎耶習阿黎耶著阿黎耶爲滅阿黎耶來說正法世閒樂聽故屬耳作意欲知生起正勤得滅盡阿黎耶乃至受行如來正法及似法由如來出世是第一希有不可思議法於世閒顯現如本識此如來出世四種功德經由別義於聲聞乘此識已顯現
또한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의 아함 가운데서는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써 이 식을 드러내어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미사색부(彌沙塞部)도 역시 다른 이름으로 이 식을 설하여 궁생사음(窮生死陰)이라 일컫는다. 왜냐 하면 색과 심이 어느 때에는 서로 이어짐이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마음 가운데 그 종자는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응지의 의지인 아타나, 아리야, 질다(質多), 근본식, 궁생사음 등의 소승 가운데의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아리야식이 이미 왕로(王路)를 이룬다.
016_1055_a_15L復次摩訶僧祇部阿含中由根本識別名此識顯現譬如樹依根彌沙塞部亦以別名說此識謂窮生死陰何以故或色及心有時見相續斷此心中彼種子無有斷絕是應知依止阿陁那阿黎耶質多根本識窮生死陰等此名小乘中是阿黎耶識已成王路
016_1055_b_02L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심(心)ㆍ의(意)ㆍ식(識), 이 셋이 단지 이름만이 다르고 그 정의는 동일하다고 집착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의와 식이 그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보았으니, 마땅히 심의 정의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여래께서 세간에서 아리야를 희락한다고 설하신 것을 집착하여,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이 가운데 있는 5취음(取陰)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스승은 즐거움을 받음[樂受]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는 것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016_1055_a_22L復有餘師執識此三但名異義是義不然意及識已見義異當知心義亦應有異復有餘師執是如來說世閒喜樂阿黎耶如前所說此中有五取陰說名阿黎耶復有餘師執樂受與欲相應說名阿黎耶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신견(身見)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이와 같은 모든 스승들은 아함과 닦아 얻음으로 말미암아 아리야에 미욱하여, 이와 같은 집착을 일으킨다. 소승의 가르침과 행을 따름으로 해서 이 스승이 세운 정의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리야식에 미욱하지 않다면 소승의 이름에 있어서 이 식을 세우면 그 정의가 가장 수승하다.
016_1055_b_05L復有餘師執身見說名阿黎耶如此等諸師迷阿黎耶由阿含及修得是故作如是執由隨小乘教及行是師所立義不中道理若有人不迷阿黎耶識小乘名成立此識其義最勝
어찌하여 가장 수승한가? 만약 취음(取陰)을 잡아서 아리야라고 한다면 악취(惡趣)에서 하나의 도(道:趣)를 따라 한결같이 고통을 받는 곳, 거기에서 생을 받는다. 이 취음은 가장 싫어하고 거슬릴 수 있어서, 이 취음 가운데서 한결같이 애착할 수 없으니, 중생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가운데서 중생은 취음이 단절되어 생하지 않기를 항상 원한다. 만약 이 즐거움을 받음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면 네 번째의 정[第四定]으로부터 그 위의 계(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받아들임이 없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 받아들임을 얻는다면 상계(上界)를 얻고자 구함으로 해서 곧 싫어함을 생한다. 따라서 중생이 이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신견(身見)이라면 정법 속의 사람은 무아(無我)를 즐거이 믿으니 신견은 애착할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생하지 않는다.
016_1055_b_10L云何最若執取陰名阿黎耶於惡趣隨一道中一向苦受處於彼受生此取陰最可惡逆是取陰中一向非可愛生喜樂不應道理何以故彼中衆生恒願取陰斷絕不生若是樂受與欲相應從第四定乃至上界皆無此若人已得此受由求得上界則生厭惡是故衆生於中喜樂不稱道理若是身見正法內人信樂無我非其所愛於中不生喜樂
016_1055_c_02L이 아리야식인 중생심을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자아[自內我]로 삼아 집착한다. 만약 도(道:途) 가운데서 한결같이 고통을 받음[苦受]을 생한다면 그는 고음(苦陰)이 영원히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야식은 아애(我愛)에 의해 얽매여지기 때문에 일찍이 자아를 멸하여 없애기를 기꺼이 바라지 않는다. 네 번째의 정(定) 이상에서 생을 받는 중생은 비록 다시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서 즐거움 받기를 욕구함이 있으니, 스스로 아애를 좇아 따라서 떠나지 않는다. 또한 정법 안의 사람은 비록 다시 무아를 기꺼이 원해 신견을 피하여 거역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에 역시 스스로 아애가 있다. 아리야라는 이름으로써 이 식을 안립하니 곧 가장 수승하게 된다. 이 이름은 아리야의 다른 이름을 성립시킨다.
016_1055_b_20L此阿黎耶識衆生心執爲自內我若生一向苦受道其願苦陰永滅不起阿梨耶識我愛所縛故不曾願樂滅除自我從第四定以上受生衆生雖復不樂有欲樂受於阿黎耶識中是自我愛隨逐不離復次正法內人雖復願樂無我違逆身見於阿黎耶識中亦有自我以阿黎耶名安立此識則爲最勝是名成立阿黎耶別名

2) 상품(相品)
016_1055_c_06L相品第二
또한 이 식의 상을 세우니,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 상은 간략하게 설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상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인(因)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과(果)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다. 자상을 세운다는 것은 모든 부정품법의 습기(習氣)에 의하여 그것이 생할 수 있게 되며, 종자를 섭지하여 그릇[器]을 만드는 것을 자상이라고 한다. 인(因)의 상을 세운다는 것은, 이 일체종자식이 부정품법을 생하기 위하여 항상 일어나서 인이 된다. 이것을 인(因)의 상이라고 한다. 과(果)의 상을 세운다는 것은 이 식이 갖가지 부정품법의 시작함이 없는 습기로 인하여 마침내 생할 수 있다는 것이 과(果)의 상이라고 한다.
016_1055_c_07L復次成立此識相云何可見此相略說有三種立自相立因相果相立自相者依一切不淨品法習爲彼得生攝持種子依器是名自立因相者此一切種子識爲生不淨品法恒起爲因是名因相立果相此識因種種不淨品法無始習氣方乃得生是名果相
무슨 법을 습기라고 하는가? 이 습기라는 이름은 무슨 정의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이 법은 그것과 서로 응하여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하며, 나중에 변하여 그것이 생하는 인(因)이 된다. 이것은 드러내어지는 것의 정의이다. 비유하건대 마(麻)가 꽃으로 훈습하는 것과 같이, 마는 꽃과 동시에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의 향(香)이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사람에게 탐욕 등의 행이 있다면 탐욕 등의 습기가 있다. 이 마음은 탐욕 등과 더불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의 변이를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문혜(聞慧)가 많은 사람[多聞人]에게 많은 습기가 있다면 거듭 들은 것을 사유하여 마음과 함께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을 명료하게 생하는 인이 된다. 이러한 훈습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머무는 것을 얻기 때문에 이 사람은 법(法)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아리야식에서 이와 같은 도리를 알아야 한다.
016_1055_c_15L何法名習氣習氣名欲顯何義此法與彼相應共生共滅後變爲彼生因此卽所顯之譬如於麻以花熏習麻與花同時生滅彼數數生爲麻香生因若人有欲等行有欲等習氣是心與欲等同生同滅彼數數生爲心變異生因多聞人有多聞習氣數思所聞共心生滅彼數數生爲心明了生因由此熏習得堅住故故說此人爲能持法阿黎耶識應知如此道理
016_1056_a_02L이 더러움에 물든 종자는 아리야식과 같은가, 다른가? 다른 물체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화합하여 비록 분별하기 어렵지만 다르지 않지 않다. 아리야식은 이와 같이 생한다. 훈습이 생할 때에는 승묘하고 경이로운 공능이 있으니 설하여 일체종자라고 한다.
016_1056_a_02L此染污種子與阿黎耶識同異云何不由別物體故異如此和合雖難分別而非不阿黎耶識如此而生熏習生時有功能勝異說名一切種子
어찌하여 아리야식은 오염된 법과 더불어 일시에 번갈아 서로 간에 인(因)이 되는가? 비유하건대 등불이 심지와 함께 생하고 태우는 것과 같이 일시에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 또한 갈대 묶음이 일시에 서로 의지하며 도우므로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본식은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는 그 정의도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은 오염된 법의 인이 되고, 오염된 법은 식의 인이 된다. 왜냐 하면 이 두 법을 떠나서 다른 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056_a_06L云何阿黎耶識與染污一時更互爲譬如燈光與燈炷生及燒燃一時更互爲因又如蘆束一時相依持故得住立應知本識與能熏習更互爲其義亦爾如識爲染污法因染污法爲識因何以故離此二法異因不可得故
어찌하여 훈습은 다르지도 않고 여러 종류도 아니면서, 다름이 있고 여러 종류인 모든 법을 지어 생하는 인이 되는가? 비유하건대 많은 실로 묶은 옷이 여러 가지 색이 없었는데, 염색하는 그릇에 넣은 후에는 옷 위에 갖가지 모양이 마침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리야식은 여러 가지의 모든 법에 의해 훈습된다. 훈습할 때는 한 가지 성품으로 여러 종류가 없으나, 만약 과(果)를 생하고 물들이는 그릇이 나타나면 헤아릴 수 없는 상모(相貌)가 아리야식에 현현한다.
016_1056_a_13L云何熏習不異不多種而能爲有異多種諸法作生因譬如多縷結衣無多色若入染器後於衣上種種相方得顯現如此阿黎耶識種種諸法所熏熏時一性無有多種若生果染器現前則有不可數種類相貌阿黎耶識顯現
016_1056_b_02L대승에 있어서 이 연생(緣生)은 가장 미세하고 깊고 깊다. 간략히 설한다면 두 가지 연생이 있다. 첫째는 분별의 자성인 연생이고, 둘째는 애(愛)와 비애(非愛)를 분별하는 것이다.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모든 법(法)이 생하여 일어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연생이라 한다. 여러 가지 법의 인과 연의 자성을 분별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12연생이 있으니 애와 비애를 분별한다고 일컫는다. 선도와 악도에서 애와 비애를 분별하여 여러 가지의 다른 인을 생하기 때문이다.
016_1056_a_20L此緣生於大乘最微細甚深若略說有二種緣生一分別自性二分別愛非愛依止阿黎耶識諸法生起是名分別自性緣生由分別種種法因緣自性故復有十二分緣生是名分別愛非愛於善惡道分別愛非愛生種種異因故
만약 사람이 아리야식에서 첫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혹은 자성이 생사의 인이라고 집착하고, 혹은 숙작(宿作)을 집착하며, 혹은 자재하는 변화를 집착하고, 혹은 여덟 가지의 자재아(自在我)를 집착하며, 혹은 인이 없음을 집착한다. 만약 두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아(我)를 짓는 것[作者]이 받는 것[受者]이라고 집착한다.
016_1056_b_03L若人於阿黎耶識迷第一緣生或執自性是生死因或執宿作或執自在變化或執八自在我或執無因若迷第二緣生執我作者受者
마치 여러 타고난 맹인이 일찍이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것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그것을 내보이고 그들에게 만져보고서 깨닫게 하면, 이 맹인들은 혹은 그 코를 만지고, 혹은 그 치아를 만지고, 혹은 그 귀를 만지고, 혹은 그 다리를 만지고, 혹은 그 꼬리를 만지며, 혹은 그 등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물으면 맹인은 답하여 코끼리는 마치 쟁기자루 같다고 할 것이며,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고, 혹은 키 같다고 설명할 것이고, 혹은 절구통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빗자루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바위덩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의 연생과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무명으로 타고난 맹인은 자성을 인이라고 말하고, 혹은 숙작(宿作)이라고 말하고, 혹은 자재변화라고 말하고, 혹은 8자재아(自在我)라고 말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말하고, 혹은 짓는 것이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016_1056_b_07L譬如衆多生盲人不曾見象有人示之令彼觸證有諸盲人或觸其鼻或觸其牙或觸其耳觸其腳或觸其尾或觸其脊等有人問之象爲何相盲人答云象如犂柄或說如杵或說如箕或說如臼或說如帚或說如山石若人不了二種緣無明生盲或說自性爲因或說宿或說自在變化或說八自在我說無因或說作者受者
아리야식의 체상(體相)과 인과상(因果相)을 요달하지 못한다면 마치 저 눈먼 사람이 코끼리의 체상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다른 설명을 하는 것과 같다. 간략하게 아리야식의 체상을 설하면 과보식이며, 일체종자식이다. 이 식이 모든 삼계의 신(身)과 모든 6도(道)의 4생(生)을 포섭하여 모두 다한다. 이러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어 말씀하셨다.
016_1056_b_16L由不了阿黎耶識體相及因果相如彼生盲不識象體相作種種異說若略說阿黎耶識體相是果報識是一切種子由此識攝一切三界身一切六道四生皆爲顯此義故說偈言

외종자[外]와 내종자[內]는
두 가지에 있어서 밝게 요달하지 못한다.
단지 가명(仮名)과 진실(眞實)일 따름이니,
일체 종자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016_1056_b_21L外內不明了
於二但假名
及眞實一切
種子有六種

생각생각에 멸하는 것, 모두 갖추어 있음[俱有],
다스릴 때까지 좇아 따르는 것,
결정(決定)하는 것, 인연을 관함,
스스로의 과를 이끌어 드러내는 것이다.
016_1056_b_23L念念滅俱有
隨逐至治際
決定觀因緣
如引顯自果

견고하고 무기(無記)이며 훈습할 수 있어서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상응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훈습할 수 없다.
이것이 훈습의 체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016_1056_b_24L堅無記可熏
與能熏相應
若異不可熏
說是熏體相
016_1056_c_02L
6식(識)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어긋난다.
두 생각[二念]은 함께 있지 않으니,
그 밖에 생하는 경우[生起識]에도 이러하여야 한다.
016_1056_c_02L六識無相應
三差別相違
二念不俱有
餘生例應爾

이 외종자와 내종자는
생하는 인과 이끄는 인이 될 수 있다.
메말라 죽어도 여전히 상속(相續)하여
차후에 바야흐로 멸하여 다한다.
016_1056_c_04L此外內種子
能生及引因
枯喪猶相續
然後方滅盡

비유하건대 외종자와 같이 내종자는 그러하지 않다. 이 의미를 두 구의 게송으로 드러낸다.
016_1056_c_05L譬如外種子內種子不爾此義以二偈顯之

외종자에는 훈습이 없으나,
내종자는 그렇지 않다.
문(聞) 등의 훈습 없이
과를 생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016_1056_c_07L於外無熏習
種子內不然
聞等無熏習
果生非道理

이미 지음과 짓지 않음,
실(失)과 득(得)이 모두 서로 어긋난다.
내(內)와 외(外)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내종자는 훈습이 있다.
016_1056_c_09L已作及未作
失得幷相違
由內外得成
是故內有熏

나머지 식은 아리야식과 달라서 생기식이라고 일컬으며, 일체의 생하는 처(處)와 도는 수용식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변론(中邊論)』의 게송이 설하는 것과 같다.
016_1056_c_10L所餘識異阿黎耶識謂生起識切生處及道應知是名受用識如『中邊論』偈說

첫째는 설하여 연식(緣識)이라 하고,
둘째는 설하여 수식(受識)이라 한다.
요별하여 받아들이므로 분별이라 하고
행을 일으키는 것 등의 심법(心法)이다.
016_1056_c_13L一說名緣識
二說名受識
了受名分別
起行等心法

이 두 가지 식은 번갈아서 인이 된다. 대승아비달마의 게송에서 설하였다.
016_1056_c_15L此二識更互爲因如大乘阿毘達磨偈說

모든 법은 식에 숨어 간직되고
식은 법(法)에서 역시 그러하다.
이 둘은 서로 인이 되고
역시 항상 사로 과가 된다.
016_1056_c_17L諸法於識藏
識於法亦爾
此二互爲因
亦恒互爲果

만약 첫 번째의 연생 가운데에서 모든 법이 식과 더불어 번갈아 인연이 된다면, 두 번째의 연생 가운데에서 제법은 무슨 연(緣)인가? 증상연(增上緣)이다. 다시 몇 가지 연이 6식을 생할 수 있는가?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즉 증상연(增上緣)ㆍ연연(緣緣)ㆍ차제연(次第緣)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연생, 즉 첫째의 궁생사연생(窮生死緣生)과 둘째의 애증도연생(愛憎道緣生) 그리고 셋째의 수용연생(受用緣生)은 네 가지 연을 빠짐없이 갖춘다.
016_1056_c_19L若於第一緣生中諸法與識更互爲因緣於第二緣生中諸法是何緣增上緣復次幾緣能生六識有三緣謂增上緣所緣緣次第緣如此三緣一窮生死緣生二愛憎道緣生受用緣生具足四緣
016_1057_a_02L
3) 인증품(引證品)
016_1057_a_02L引證品第三
이 아리야식을 이미 여러 가지 이름과 체상으로 말미암아 성립시켰다. 어떻게 이와 같은 여러 이름과 체상으로써 아리야식을 알 수 있는가? 여래께서 체상을 설하신 것도 역시 이러하며, 생기식을 설하지 않으셨다. 만약 이 이름과 상에 의해 세워진 아리야식을 떠난다면 부정품과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으며, 번뇌의 부정품ㆍ업의 부정품ㆍ생의 부정품ㆍ세간의 정품ㆍ출세간의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016_1057_a_03L此阿黎耶識已成立由衆名及體相云何得知阿黎耶識以如是等衆名故如來說體相亦爾不說生起識離此名相所立阿黎耶識不淨品淨品等皆不成就煩惱不淨品業不淨品不淨品世閒淨品出世淨品等皆不成就
어찌하여 번뇌의 부정품이 성취되지 않는가? 근본번뇌와 작은 부분의 번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훈습종자는 6식에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두 가지 혹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이 안식은 혹에 의해 훈습되어서 종자를 성립시킨다. 그 밖의 다른 식은 그러하지 않다. 안식이 이미 멸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일어나면 훈습과 훈습의 의지는 모두 얻을 수 없다. 안식이 앞에서 이미 끊어져 현재 체가 없으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미 멸하여 없는 법으로부터 탐욕이 함께 생함이 있다는 것은 성취될 수 없다. 비유하건대 과거에 사라져 없어져버린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할 수 없음과 같다.
016_1057_a_10L云何煩惱不淨品不成就根本煩惱及少分煩惱所作熏習種子六識不得成就何以故眼識與欲等大小二惑俱起俱滅此眼識是惑所熏成立種子餘識不爾是眼識已滅或餘識間起熏習及熏習依止皆不可得眼識前時已謝現無有體或餘識所閒從已滅無法有欲俱生不得成就譬如從過去已滅盡業果報不得生
또한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동시에 생한다고 하더라도 훈습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탐욕 가운데서는 머무를 수 없으니, 탐욕은 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탐욕은 서로 이어져서 견고하게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그 밖의 다른 식에서는 역시 훈습이 없다.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며, 나머지 모든 식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057_a_19L復次眼識與欲等或俱時生起熏習不成何以故此種子不得住於欲中以欲依止識故又欲相續不堅住故此欲於餘識亦無熏習依止別異故所餘諸識無俱起俱滅故
016_1057_b_02L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와 더불어 서로 훈습하지 못한다. 일시에 같이 생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모든 혹(或)에 의해 훈습되지 않으며, 역시 같은 종류의 식에 의해 훈습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안식을 사량(思量)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도 역시 이와 같이 사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상천(無想天) 이상으로부터 물러나 타락하여 하계(下界)의 생을 받는다면 크고 작은 혹에 오염된 최초의 식, 이 식이 생할 때에는 종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혹의 훈습은 의지와 더불어 함께 이미 지나가서 멸하여 남지 않기 때문이다.
016_1057_a_23L同類與同類不得相熏以無一時共生滅故是故眼識不爲欲等大小諸惑所熏亦不爲同類識所熏如此思量眼識所餘諸識亦應如此思量復次若衆生從無想天已上退墮受下界生小惑所染初識此識生時應無種子何以故此惑熏習與依止竝已過去滅無餘故
또한 혹을 대하여 다스리는 식[對治識]이 이미 생하여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모두 사라져 다하였다. 만약 아리야식이 없다면 이 대치식은 크고 작은 혹의 종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성해탈이기 때문이며, 무류심은 혹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관(觀)에서 나와 세간심을 일으킬 때 모든 혹의 훈습이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없어졌으니, 유류(有流)의 의식은 종자가 없이 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아리야식을 떠나 번뇌의 오염은 이루어질 수 없다.
016_1057_b_08L復次或對治識已生所餘世閒諸識皆已滅盡若無阿黎耶識此對治識共小大惑種子俱在此義不成何以故自性解脫故無流心與惑不得俱起俱滅故復次後時出觀正起世閒心諸惑熏習久已謝滅流意識無有種子生應得成是故離阿黎耶識煩惱染污則不得成
또한 어찌하여 업의 염오가 성립될 수 없는가?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한다는 부분이 논리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없다면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있다는 것도 역시 논리를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업의 염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1057_b_15L復次業染污云何不得成緣行生識分無得成義若無此義緣取生有亦無成故業染污不成
016_1057_c_02L또한 어찌하여 생의 염오라는 이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결생(結生)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부정지(不靜地)로 물러나 타락하여 마음이 중음(中陰) 가운데에 있어서 염오의 식을 일으키므로, 마침내 생을 받을 수 있다. 이 염오가 있는 식은 중음 가운데에서 멸한다. 이 식은 모태 가운데서 가라라(柯羅邏)에 의탁하여 변이하고 화합하여 생을 받는다. 만약 단지 의식이 변이하여 가라라 등을 이룬다면 이 의식을 의지하여 모태 가운데서 다른 의식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정의는 없다. 모태 가운데서 일시에 두 가지 의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이러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016_1057_b_18L復次云何生染污此義不成結生不成故若人於不靜地退墮心正在中陰起染污意識得受生此有染污識於中陰中滅識託柯羅邏於母胎中變合受生但意識變成柯羅邏等依止此意識於母胎中有別意識起無如此義母胎中二種意識一時俱起無此義
이미 변이한 의식은 의식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의지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 경계를 연하기 때문이며, 연하여지는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의식이 이미 변이하였다면 이 때의 의식은 가라라를 이루어서 이 식이 되니 일체법의 종자이며, 이 식을 의지하여 그 밖의 다른 식을 생하게 되니 일체법의 종자가 된다. 네가 만약 이미 변이한 식을 이름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는 곧 아리야식이다. 너는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세워 일컬음으로써 의식이라고 말한다. 만약 네가 의지의 주체인 식[能依止識]이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런 연유로 이 식은 의지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것의 인을 이룬다. 이 의지처인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라면, 의지의 주체인 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는 정의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식은 의탁하여 생하며 변이하여 가라라를 이루니, 의식이 아니다. 단지 과보이며 역시 일체종자라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016_1057_c_03L已變異意識不可成立爲意識止不淸淨故長時緣境故所緣境不可知故若此意識已變異是時意識成柯羅邏爲此識是一切法種子依止此識生餘識爲一切法種子汝執已變異識名一切種子識卽是阿黎耶識汝自以別名成立謂爲意若汝執能依止識是一切種子識是故此識由依止成他因此所依止若非一切種子識能依止名一切種子識是義不成是故此識託生變異成柯羅邏非是意識但是果報是一切種子此義得成
또한 만약 중생이 이미 의탁하여 생하며, 나머지 색근(色根)을 잡아 유지할 수 있다면 과보식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나머지 모든 식이 결정코 다른 의지가 있으며, 오래 견고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색근에 잡아 지니는 식[執持識]이 없다면 역시 색근은 성립될 수 없으며, 또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일어서듯이 이 식과 명색(名色)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므로 이 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016_1057_c_15L復次若衆生已託生能執持所餘色根離果報識則不可得何以故所餘諸識定別有依止不久堅住若此色根無執持識亦不得成復次此識及名色更互相譬如蘆束相依俱起此識不成
016_1058_a_02L또한 과보식을 떠나서는 일체의 생하려고 하거나 이미 생한 중생의 식식을 이룰 수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과보식을 떠나 안식 등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식을 따른다면 삼계 가운데서 생을 받은 중생은 식사(食事)를 짓게 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생으로부터 명(命)을 버리고 상정지(上靜地)에 태어난다면 산동(散動)의 염오의식으로 말미암아 그것에서 생을 받는다. 이 염오의 산동식은 정지(靜地) 가운데서 과보식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종자가 있다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1057_c_20L次若離果報識一切求生已生衆生識食不成何以故若離果報識眼識等中隨有一識於三界中受生衆生爲作食事不見有能故若人從此生捨命生上靜地由散動染污意識彼受生是染污散動識於靜地中果報識有餘種子此義不成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색계에 태어나서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 염오심(染汚心)과 선심(善心)을 생한다면 곧 종자와 의지가 없으므로 염오와 선, 두 가지 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무색계에서 만약 무류심을 일으키면 나머지 세간심이 이미 멸하여 다하니, 문득 이 도(道:趣)를 버려야 한다.
016_1058_a_04L復次衆生生無色界離一切種子果報識若生染污心及善心則無種子幷依染污及善二識皆不得成於無色界若起無流心所餘世閒心已滅盡便應棄於此道
만약 중생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가운데 생하여 불용처심(不用處心)과 무류심을 일으킨다면, 곧 두 처(處)를 버린다. 왜냐 하면 무류심은 출세심이기 때문에 비상비비상도(非想非非想道)는 그것의 의지가 아니며, 불용처도(不用處道)도 그것의 의지가 아니다. 곧바로 향하는 열반도 의지가 아니다.또한 사람이 이미 선업을 짓거나 또는 악업으로써 수명(壽命)을 바르게 버린다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혹은 상향으로 혹은 하향으로 순차적인 의지의 냉촉(冷觸)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생의 염오는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
016_1058_a_09L若衆生生非想非非想中起不用處心及無流心卽捨二何以故無流心是出世心故非想非非想道非其依止不用處道亦非依止直趣涅槃亦非依止復次若人已作善業及以惡業正捨壽命離阿黎耶識或上或下次第依止冷觸不應得成是故生染污離一切種子果報識不可得立
016_1058_b_02L어찌하여 세간의 정품이 성립하지 않는가? 중생이 만약 욕계(欲界)의 욕을 떠나지 못하면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먼저 욕계의 선심을 일으켜서 욕계의 욕을 떠나기를 구하여 마음을 관하는 것을 닦아 행한다. 이 욕계의 가행심은 색계심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지 않기 때문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욕계의 선심은 색계의 선심의 종자가 아니다. 과거의 색계심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생과 다른 마음에 의해 사이가 가로막혀서, 나중에 정식(淨識)의 종자를 세울 수 없게 된다. 이미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연유로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즉 색계정심(色界靜心)의 일체종자가 과보식에 차례로 전래하여 인연을 세우게 되며, 이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增上緣)을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이 일체의 이욕지(離欲地) 가운데서 이와 같은 세간청정품이라는 정의를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58_a_17L云何世閒淨品不成若衆生未離欲欲界未得色界心先起欲界善心求離欲欲界修行觀此欲界加行心與色界心不俱起俱滅故非所熏是故欲界善心非是色界善心種子過去色界心無量餘生及別心所隔後時不可立爲靜識種子已無有故是故此義得成謂色界靜心一切種子果報識次第傳來立爲因緣此加行善心立爲增上緣如此於一切離欲地中是義應知此世閒淸淨品義離一切種子果報識則不可立
어찌하여 출세간의 정품을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고 하는가? 불세존께서 “타음(他音)을 들음과 스스로의 정사유(正思惟), 이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정견이 생함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 타음을 들음과 정사유는 이식(耳識)과 의식, 혹은 이(耳)ㆍ의(意) 두 가지 식을 훈습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만약 사람이 듣는 대로 해석하고 정사유하면 이때 이식(耳識)이 생할 수 없으며, 의식도 역시 생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산동분별식(散動分別識)이 사이에 끼여들기 때문이다. 만약 정사유와 더불어 상응하여 생한다면 이 의식은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멸하였으며, 문혜에 의해 훈습된 것은 훈습과 함께 이미 없다. 어찌하여 나중에 앞의 식이 종자가 되어 뒤의 식을 생할 수 있겠는가?
016_1058_b_06L云何出世淨品離阿黎耶識不可得立佛世尊說從聞他音及自正思惟由此二因正見得生聞他音及正思惟不能熏耳識及意或耳意二識何以故若人如聞而解及正思惟法爾時耳識不得生識亦不得生以餘散動分別識所聞故若與正思惟相應生此意識久已謝聞所熏共熏習已無云何後時以前識爲種子後識得生
또한 세간심은 정사유와 상응하고, 출세정심(出世淨心)은 정견과 더불어 상응하여 어느 때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 따라서 이 세간심은 정심(淨心)에 의해 훈습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미 훈습이 없으니, 출세간의 종자를 이룰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난다면 출세간의 정심은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가운데의 문혜와 사혜의 훈습에는 출세간의 훈습종자를 섭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없다.
016_1058_b_15L復次世閒心與正思惟相應出世淨心與正見相無時得共生共滅是故此世心非關淨心所熏旣無熏習不應得成出世種子是故若離一切種子果報識出世淨心亦不得成何以故此中聞思熏習無有義能攝出世熏習種子
016_1058_c_02L만약 염탁(染濁)을 대하여 다스리는 출세간의 정심의 인을 지을 수 있다면 어찌하여 일체종자인 과보식이 부정품을 이루는가? 이 출세심은 예로부터 일찍이 습(習)을 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훈습이 없다. 만약 훈습이 없다면 이 출세심은 무슨 인(因)으로부터 생하는가? 너는 이제 답하여야 한다.
016_1058_b_21L云何一切種子果報識成不淨品因若能作染濁對治出世淨心因此出世心昔來未曾生習是故定無熏習若無熏習此出世心從何因生汝今應答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所流]인 바른 문훈습(聞熏習)이 종자가 되기 때문에 출세심이 생할 수 있다. 이 문혜의 훈습은 아리야식과 같은 성질인가? 다른 성질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성질이라면 어찌하여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같은 성질이 아니라면 이 문혜의 종자는 무슨 법으로써 의지를 삼는가?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의 위계에 이르러서는 이 문혜가 훈습을 생하여 하나의 의지처를 따라 존재한다. 이 가운데서 과보식과 더불어 함께 생한다. 비유하건대 물과 우유와 같아서, 이 문훈습이 곧 본식은 아니지만 이미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016_1058_c_03L最淸淨法界所流正聞熏習爲種子故出世心得生此聞慧熏習與阿黎耶識同性爲不同性若是阿黎耶識性云何能成此識對治種子若不同性此聞慧種子以何法爲依至諸佛無上菩提位是聞慧熏習隨在一依止處此中共果報識俱生譬如水乳此聞熏習卽非本識成此識對治種子故
이 가운데 하품의 훈습에 의지하여, 중품의 훈습을 생하고 중품의 훈습을 의지하여 상품의 훈습을 생한다. 왜냐 하면 거듭거듭 문(聞)과 사(思)와 수(修)를 가행하기 때문이다. 이 문훈습이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라 하더라도 법신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리야식을 대하여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생한다. 따라서 아리야식의 성질에 들어가 포섭되지 않는다. 출세간의 가장 청정한 법계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세간법이지만 출세심을 이룬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출세간의 정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일체의 상심(上心)의 혹을 대하여 다스리고, 일체의 악도에 생하는 것을 대하여 다스리며, 일체의 악행(惡行)을 썩혀서 무너뜨려 대치하며, 이끌어 상속하여 이 처(處)에 생하게 할 수 있어서, 모든 불보살을 좇아 따르며 받들어 섬기게 한다.
016_1058_c_11L此中依下品熏習中品熏習生依中品熏習上品熏習生何以故數數加行聞思修是聞熏習若下中上品應知是法身種子由對治阿黎耶識生是故不入阿黎耶性攝出世最淸淨法界流出故雖復世閒法成出世心何以此種子出世淨心未起時一切上心惑對治一切惡道生對治一切惡行朽壞對治能引相續令生是處隨順逢事諸佛菩薩
016_1059_a_02L문훈습이 비록 세간법이지만 처음으로 관(觀)을 닦는 보살이 얻은 것이라도 이 법은 법신이 섭지하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성문과 연각(緣覺)에 의해 얻어진 것이,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한다면 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이 아니고 법신과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하여 이와 같이 하품으로부터 중품, 상품으로 차례로 점차 증상하고, 이와 같이 과보식은 차례로 점차 감소하여 의지가 곧 바뀐다. 만약 의지가 한결같이 바뀐다면 이 종자가 있는 과보식은 곧 종자가 없어져서 일체가 모두 멸하여 없어진다.
016_1058_c_21L此聞熏習雖是世閒初修觀菩薩所得應知此法屬法身攝若聲聞獨覺所得屬解脫身攝此聞熏習非阿黎耶識屬法身及解脫身攝如是如是從下中上次第漸如是如是果報識次第漸減依止卽轉若依止一向轉是有種子果報識卽無種子一切皆盡
만약 마치 물과 우유가 화합하는 것과 같이 본식이 본식이 아닌 것과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본식은 멸하고 본식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마치 물오리가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탐욕을 떠날 때에 부정지(不靜地)의 훈습은 멸하고 정지의 훈습이 증가하여 세간의 전의(轉依)라는 논리가 이루어지듯이 출세간의 전의도 역시 이와 같다.
016_1059_a_05L若本識與非本識共起共滅猶如水乳和合云何本識滅非本識不滅譬如於水鵝所飮乳猶如世閒離欲時不靜地熏習靜地熏習增世閒轉依義得成世轉依亦爾
만약 사람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식이 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니, 과보식은 정(定) 가운데서도 신을 떠나지 않음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 하면 멸심정은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만약 이 정(定)으로부터 나온다면 식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과보식은 서로 이어짐이 이미 끊어졌으니, 의탁하여 생함을 떠났을 때에는 다시 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059_a_10L若人入滅心定由說識不離身是故果報識於定中應成不離身何以故滅心定非此識對治故何知然若從此定出識不應更生以故此果報識相續已斷若離託生時不復得生
만약 사람이 멸심정에 마음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사람이 설하는 것은 곧 마음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 하면 정(定)이라는 정의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상(相)과 경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는 허물 때문이며, 악 및 무기와 더불어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想)과 수(受)가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세 가지가 화합함에 있어서 반드시 촉(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정에도 공능이 있기 때문이며, 단지 상(想)을 멸할 따름이라는 허물 때문이며, 신(信) 등의 선근을 작의(作意)하여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의지의 주체를 뽑아 제거하는 것은 의지처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행이 아닌 것처럼 일체행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016_1059_a_15L若人說滅心定有心人所說則不成心何以故定義不成解相及境不可得故與善根相應過故與惡及無記不相應故想及受生起過故於三和合必有觸故於餘定有功能故但滅想是過患故作意信等善根生起過故拔除能依離所依不可得故有譬喩故如非一切行一切行不如是故
016_1059_b_02L만약 어떤 사람이 색심(色心)이 차례로 생하는 것은 모든 법의 종자라고 집착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이미 앞의 과오가 있으면서 다시 다른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허물이란, 만약 사람이 무상천으로부터 퇴타하거나 멸심정에서 나온다면 이 가운데서 집착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아라한의 최후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차제연(次第緣)을 떠난다면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정ㆍ부정품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마음이 있다는 정의가 성취되므로 앞에 설하여진 상을 믿어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 게송을 짓는다.
016_1059_a_23L若有人執色心次第生是諸法種子此執不然何以故已有前過復有別失別失者若人從無想天退及出滅心定此中所執不阿羅漢最後心亦不得成若離次第緣此執不成如此若離一切種子果報識淨不淨品皆不得成是故此心有義成就應當信知依前所說相今更作偈

보살은 선식(善識)에서
그 밖의 다른 5식(識)을 떠나
다른 마음이 없다면
전의(轉依)는 무슨 방편으로 지을 수 있는가?
016_1059_b_08L菩薩於善識
則離餘五識
無餘心轉依
以何方便作

만약 대치(對治)가 전의라고 한다면
멸함이 아니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과와 인이 멸(滅)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곧 허물이다.
016_1059_b_10L若對治轉依
非滅故不成
因果無差別
於滅則有過

종자도 없고 법도 없음이,
전의가 된다고 편든다면
무(無)에 있어서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전의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1059_b_11L無種子無法
若許爲轉依
於無二無故
轉依義不成

4) 차별품(差別品)
016_1059_b_12L差別品第四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설하여 혹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차별이다.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으로 말미암아 다르기 때문에 언설과 아견과 유분의 훈습의 차별이라고 한다. 아견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으며, 유분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는다. 네 가지란 이끌어 생함[引生]ㆍ과보ㆍ연하는 상[緣相]ㆍ상모의 차별이다.
016_1059_b_13L此阿黎耶識差別云何若略說或三種或四種差別三種者由三種熏習異故謂言說我見有分熏習差別四種者引生果報緣相相貌差別
이끌어 생함의 차별이란 훈습이 새로 생함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하고,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생한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보의 차별이란, 6도(道) 가운데서 행(行)에 의해 이 법이 성숙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생을 받을 때 갖고 있는 모든 법이 생기한다는 이런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연하는 상의 차별이란 이 마음 가운데 상이 있어서 아집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마음 가운데서 아상을 집착하는 경계라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016_1059_b_17L引生差別者是熏習新生若無此緣行生識緣取生有是義不成果報差別者依行於六道中此法成熟若無此後時受生所有諸法生起此義不成緣相差別者於此心中有相能起我執若無此於餘心中執我相境此義不
016_1059_c_02L상모의 차별이란, 이 식은 공상(共相)이 있고 불공상(不共相)이 있으니,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의 상[無受生種子相]이고,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의 상[有受生種子相]이다. 공상이란 기세계(器世界)의 종자이다. 불공상이란 각기 다른 내입처(內入處)의 종자이다. 또한 공상이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고, 불공상은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대하여 다스림이 일어날 때 불공종자는 대하여 다스려져서 멸하고, 공종자식(共種子識)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분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정견(正見)의 청정이다. 마치 관을 닦는 수행인이 한 종류의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원락과 여러 가지의 관찰을 마음에 따라 성립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59_b_24L相貌差別者此識有共相有不共無受生種子相有受生種子相相者是器世界種子不共相者是各別內入種子復次共相者是無受生種子不共相者是有受生種子若對治起時不共所對治滅於共種子識他分別所持正見淸淨譬如修觀行於一類物種種願樂種種觀察隨心成立此中說偈

멸하기 어렵고 풀기 어려워,
설하여 이름하니 공결(共結)이라 한다.
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외(外)와 다르니,
상이 광대하므로 바깥을 이룬다.
016_1059_c_09L難滅及難解
說名爲共結
觀行人心異
由相大成外

청정한 사람은 멸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가운데서 청정을 보아
청정한 불국토를 성취하니,
부처님의 지견[佛見]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016_1059_c_11L淸淨人未滅
此中見淸淨
成就淨佛土
由佛見淸淨

다시 다른 게송이 있다.
016_1059_c_12L復有別偈

여러 가지의 원(願)과 견(見)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룰 수 있다.
한 종류의 물(物) 가운데서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봄을 이루기 때문에
소취(所取)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다.
016_1059_c_13L種種願及見
觀行人能成
於一類物中
隨彼意成故
種種見成故
所取唯有識

함께하지 않는[不共] 본식차별은 깨우쳐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중생세계를 생하는 연(緣)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께하는[共] 아리야식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며, 이것이 없다면 기세계를 생하는 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거칠고 무거운 상식(相識)과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 있다. 거칠고 무거운 상식이란 크고 작은 두 가지 혹의 종자를 말하며,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란 모든 유루(有漏)의 선법종자를 말한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앞의 업으로 말미암은 과는 수승한 공덕이 있는 의지와 수승한 공능이 없는 의지의 차별을 성립할 수 없다.
016_1059_c_15L是不共本識差別有覺受生種子無此衆生世界生緣不成是共阿黎耶識無受生種子若無此器世界生緣不成復次麤重相識細輕相識重相識者謂大小二惑種子細輕相識者謂一切有流善法種子若無此由前業果有勝能無勝能依止差別不得成
016_1060_a_02L또한 받음이 있는 상(相)과 받음이 없는 상, 두 가지의 본식이 있다. 받음이 있는 상이란 과보를 이미 숙성시킨 선악의 종자식이며, 받음이 없는 상이란 명언(名言)이 훈습한 종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때의 희론이 종자를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선과 악의 두 가지 업을 짓든지 짓지 않든지 간에 과보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수용(受用)하여 다한다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음 생한 명언의 훈습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016_1059_c_23L復次有受不受相二種本識有受相果報已熟善惡種子識不受相者名言熏習種子無量時戲論生起種子故若無此識有作不作善惡二業因與果報故受用盡義不成始生名言熏習生起亦不得成
또한 비유의 상(相)인 식이 있다. 마술, 아지랑이, 꿈의 영상, 눈병 등과 같이 비유하는 첫 번째의 식은 이러한 일과 유사하다. 만약 이 허망한 분별의 종자가 없다고 하면 이 식은 전도된 인연을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갖춘 상[具相]과 갖추지 않는 상[非具相]이 있으니, 만약 중생을 갖추어 얽맨다면 갖춘 상이 있고, 만약 세간의 탐욕을 떠남을 얻는다면 손해상(損害相)이 있다. 만약 배움이 있는 성문과 모든 보살이라면 한 부분을 멸하여 떠난 상이 있고, 만약 아라한과 연각과 여래라면 모든 부분에서 멸하여 떠난 상이 있다. 왜냐 하면 아라한과 독각은 혹장(惑障) 하나만을 멸하고, 여래께서는 혹장(惑障)과 지장(智障), 둘 다를 멸한다. 만약 이러한 번뇌가 없다면 순차적으로 멸하여 다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016_1060_a_06L復次有譬喩相識如幻事鹿渴夢想翳闇等譬第一識似如此事若無此虛妄分別種子故此識不成顚倒因緣復有具不具相若具縛衆生有具相若得世閒離欲有損害相若有學聲聞及諸菩有一分滅離相若阿羅漢獨覺如有具分滅離相何以故阿羅漢獨覺單滅惑障如來雙滅惑智二障無此煩惱次第滅盡則不得成
어찌하여 인연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인식현상인데 과보는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인가? 이 무기성은 선과 악, 두 인식현상과 더불어 함께 일어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선과 악의 두 가지 법은 스스로 번갈아서 서로 어긋난다. 만약 과보가 선과 악의 성질을 이룬다면 번뇌를 해탈함을 얻는 방편이 없다. 또한 선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방편이 없다. 따라서 해탈과 얽매임이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과보식은 결정코 무부무기성이다.
016_1060_a_15L何因緣善惡二法果報唯是無覆無記此無記性與善惡二法俱生不相違善惡二法自互相違若果報成善惡性無方便得解脫煩惱又無方便得起善及煩惱故無解脫及繫縛無此二義故是故果報識定是無覆無記性

2. 응지승상(應知勝相) ①
016_1060_a_21L攝大乘論應知勝相第二之一

이와 같이 응지(應知:인식)의 의지의 수승한 모습을 이미 설하였는데, 인식의 수승한 모습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응지의 수승한 모습은 간략히 설해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타성의 상이고, 둘째는 분별성의 상이고,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의 상이다.
016_1060_a_22L如此已說應知依止勝相云何應知應知勝相此應知相略說有三種一依他性相二分別性相三眞實性相
016_1060_b_02L의타성의 상이란, 본식이 종자가 되며 허망분별에 의해 섭지되는 모든 식의 차별이다. 무엇이 차별이 되는가? 즉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ㆍ응수식(應受識)ㆍ정수식(正受識)ㆍ세식(世識)ㆍ수식(數識)ㆍ처식(處識)ㆍ언설식(言說識)ㆍ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ㆍ선악양도생사식(善惡兩道生死識)이다. 신식ㆍ신자식ㆍ수자식ㆍ응수식ㆍ정수식ㆍ세식ㆍ수식ㆍ처식ㆍ언설식 등의 이와 같은 식들은 언설로 훈습된 종자로 인하여 생하고 자타차별식은 아견이 훈습한 종자로 인하여 생하며, 선악양도생사식은 유분(有分)의 훈습종자로 말미암아 생한다.
016_1060_b_02L依他性相者本識爲種子虛妄分別所攝諸識差別何者爲差別謂身識身者受者識應受識正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自他差別識善惡兩道生死識身識身者識受者識應受識正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如此等識因言說熏習種子生自他差別識因我見熏習種子生善惡兩道生死識因有分熏習種子生
이와 같은 여러 식들로 말미암아 일체의 계(界)와 도(道:途)는 번뇌에 의해 섭지된다. 의타성이 상이 되어 허망한 분별이 곧 현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들은 허망한 분별에 의해 섭지되지만, 유식(唯識)이 체가 된다. 있지 않는 허망한 진(塵)이 현현하는 의지가 이름하여 의타성의 상(相)이다. 분별성상이란 실제로 진이 없으나, 오직 식만이 있는 체(體)가 현현하여 진이 되는 것을 분별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진실성상이란 의타성이다. 이 진(塵)의 상이 영원히 있는 것이 없으나, 이것이 실제로 없지 않음으로 해서 진실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016_1060_b_11L由如此等一切界道煩惱所攝依他性爲相虛妄分別卽得顯現如此等識虛妄分別所攝唯識爲體非有虛妄塵顯現依止是名依他性相分別性相者實無有塵唯有識體顯現爲塵是名分別性相眞實性相者是依他性由此塵相永無所有此實不無是名眞實性相
신식과 신자식과 수자식으로 말미암아서 안(眼) 등의 6내계(內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응수식으로써 색 등 6외계(外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정수식으로써 안 등 6식계(識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식들이 근본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식은 이 식의 차별이다.
이와 같이 많은 식들은 유식(唯識)이다. 진(塵) 등이 없기 때문이다.
016_1060_b_19L由身識身者識受者識應知攝眼等六內界以應受識應知攝色等六外界以正受識應知攝眼等六識界由如此等識爲本其餘諸識是此識差別如此衆識唯識以無塵等
016_1060_c_02L꿈 속의 꿈들과 같다. 모든 바깥의 진을 떠나 한결같이 유식이다. 여러 가지의 색ㆍ소리ㆍ향기ㆍ맛ㆍ느낌과 집ㆍ숲ㆍ땅ㆍ산 등의 모든 진이 여실하게 현현하지만 이 가운데 하나의 진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비유로 말미암아 일체처는 오직 식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말들로 말미암아서 마술ㆍ아지랑이ㆍ눈병 등의 비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보게 되는 진(塵)은 일체처에 오직 식이다. 꿈 속의 진과 같아서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꿈 속의 진은 오직 식이라는 것을 요별하는 것과 같다.그런데 깨어 있을 때 어째서 이와 같지 않는가? 이러한 의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이미 진여지각(眞如智覺)을 얻었으면 이러한 깨어 있음이 없지 않다. 마치 사람이 바로 꿈 속에 있어서 깨어나지 않으면 이 깨달음은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이미 깨어나면 마침내 이 깨우침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깨우침은 역시 없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이미 얻게 되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있다.
016_1060_b_24L譬如夢等於夢中離諸外塵一向唯識種種色聲香味觸舍林地山等諸塵如實顯現此中無一塵是實有由如此譬一切處應知唯有識由此等言應知幻事鹿渴翳闇等譬若覺人所見塵一切處唯有識譬如夢塵如人夢覺了別夢塵但唯有識於覺時何故不爾不無此義若人已得眞如智覺不無此覺譬如人正在夢中未覺此覺不生若人已覺方有此覺如此若人未得眞如智覺亦無此覺若已得眞如智覺必有此覺
016_1061_a_02L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서 어찌하여 추론적인 지식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가? 성스러운 가르침과 진리로 말미암아서 가히 추리하여 헤아릴 수 있다. 성스러운 가르침이란 『십지경』 가운데 불세존께서 “불자여, 삼계란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또한 『해절경』에서 설하신 것과 같다. “이때 미륵보살마하살은 불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색상(色相)이 정심(定心)이 연한 바의 경계라면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심과 다르지 않다. 왜냐 하면 나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였으니, 이 색상의 경계는 식에 의해 현현하여지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이르기를 ‘세존이시여, 정경계(定境界)의 색상이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 식이 이 식을 취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십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그 밖의 다른 법을 취할 수 있는 법은 있지 않다. 비록 이 식을 취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변하여 생하여서 진(塵)과 같이 현현한다.’ 마치 면(面)에 의해서 면을 보면서 나는 그림자를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그림자는 또 다른[異] 면과 같이 현현한다. 정심도 역시 이러하니, 진과 같이 현현하는 것은 정심과 다르다고 말한다.’”이러한 아함과 성립된 도리로 말미암아 유식의 정의가 드러난다.
016_1060_c_12L若人未得眞如智於唯識中云何得起比智由聖教及眞理可得比度聖教者如『十地經』佛世尊言佛子三界者唯有識如『解節經』中說是時彌勒菩薩摩訶薩問佛世尊世尊此色相是定心所緣境爲與心異與心不異佛世尊言彌勒與心不異何以故我說唯有識此色相境界識所顯現彌勒菩薩言世尊若定境界色相與定心不異何此識取此識爲境佛世尊言彌勒無有法能取餘法雖不能取此識如此變生顯現如塵譬如依面見面謂我見影此影顯現相似異面定心亦爾現似塵謂異定心由此阿含及所成道理唯識義顯現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이때 관(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의 관 가운데 있으면서, 만약 청색과 황색 등 널리 들어오는 색상을 본다면 곧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파란 것과 노란 것 등의 색(色)인 그 밖의 다른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일체의 식 가운데서 보살은 유식을 이와 같이 추론하여 아는 것을 일으켜야 한다. 푸른 색과 노란 색에 대한 식은 보는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억지식이 아니다. 문혜와 사혜의 두 위계에서는 기억하는 의식(意識)인 이 식은 과거의 경계를 연하여 과거의 경계와 같이 일어난다. 따라서 유식의 정의가 성립할 수 있다. 이 추론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보살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식의 정의에 대해 추론하여 앎[比智]를 생할 수 있다.
016_1061_a_04L云何如此是時觀行人心正在觀中若見靑黃等遍入色相卽見自心不見餘境靑黃等色由此道理一切識中菩薩於唯識應作如此比知於靑黃等識非憶持識以見境在現前故於聞思兩位憶持意識此識緣過去境似過去境起故得成唯識義由此比知菩薩若未得眞如智覺於唯識義得生比知
이 여러 가지 식을 앞에서 이미 설하였는데, 예를 들어 마술과 꿈 등과 같은 것들 가운데서 안식 등의 식이 유식의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 안식과 색식 등의 식에는 색이 있는데, 어찌하여 유식의 정의를 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식들은 아함과 도리로 말미암아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만약 색이 식이라면 어찌하여 색과 같이 현현하는가? 어찌하여 서로 이어져 굳게 머무르며, 앞의 것과 뒤의 것이 서로 같은가? 전도(顚倒) 등의 번뇌의 의지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의(義)가 없는 곳에서 의를 일으키는 전도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의(義)의 전도가 없다면 혹장 및 지장, 이 두 가지 번뇌가 곧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두 가지 장애가 없다면 청정품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식은 이와 같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61_a_12L種種識前已說譬如幻事夢等於中眼識等識唯識義可成眼色等識有唯識義云何可見此等識由阿含及道理如前應知若色是識云何顯現似色云何相續堅住前後相似顚倒等煩惱依止故若不爾於非義義顚倒不得成若無義顚倒惑障及智障二種煩惱則不得成若無二障淸淨品亦不得成是故諸識如此生起可信是實此中說偈

어지러운 인(因)과 어지러운 체(體),
색식과 색이 없는 식,
만약 앞의 식이 없다면
뒤의 식도 생할 수 없다.
016_1061_a_22L亂因及亂體
色識無色識
若前識不有
後識不得生
016_1061_b_02L
어찌하여 산식ㆍ신자식ㆍ수자식ㆍ응수식ㆍ정수식은 모든 생하는 곳에서 다시 서로 긴밀하게 화합하여 생한다고 하는가? 생을 받아 드러나는 바를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세식(世識) 등은 앞에서 설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차별이 생하는가?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생사가 서로 이어져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섭지되는 중생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섭지하여지는 기세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섭지된 것을 헤아릴 수 없이 작사(作事)하여 다시 서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이 섭지하고 받아들여 쓰기 때문이며, 섭지하여진 애착과 미움의 업과 과보를 헤아릴 수 없이 받아 쓰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는 생과 사가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식들을 바르게 판별하여야, 유식의 정의를 성립시키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모든 식은 곧 유식을 이룬다.
016_1061_a_24L云何身識身者識受者識應受識受識於一切生處更互密合生具足受生所顯故云何世識等如前說有種種差別生無始生死相續不斷絕故無量衆生界所攝故無量器世界所攝故無量作事更互顯示所攝故量攝及受用差別所攝故無量受用愛憎業果報所攝故無量生及死證得差別所攝故云何正辨如此等識令成唯識義若略說有三相諸識則成唯識
오직 식량(識量)만이 있음이니, 바깥의 진(塵)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둘이 있음이니, 즉 상식(相識)과 견식(見識)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종종(種種)은 섭지된 것을 서로 생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어떠한가? 이 모든 식은 진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이루지만, 상이 있고 견이 있어서 안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으로써 상이 되기 때문이며, 안 등의 모든 식이 모든 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모든 안식에서부터 법식까지로써 상이 되기 때문이며, 의식(意識)은 의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가? 의식이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식과 같은 진분(塵分)을 생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61_b_12L唯有識量外塵無所有故有二謂相及見識所攝故由種種生相所攝故此義云何此一切識無塵故成唯識有相有見眼等諸識以色等爲相故眼等諸識以諸識爲見故意識以一切眼識乃至法識爲相故意識以意識爲見故云何如此意識能分別故似一切識塵分生故此中說偈

유량(唯量)과 유이(唯二) 그리고 종종(種種)에 들어감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설한다.
유식에 통달했을 때와
식을 굴복시켜 떠난 위계에서.
016_1061_b_20L入唯量唯二
種種觀人說
通達唯識時
及伏離識位
016_1061_c_02L
모든 스승은 이 의식이 여러 가지의 의지로부터 생하여 일어나므로 종종이란 이름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비유하건대 의업을 지음과 같이 신업과 구업 등의 업의 이름을 얻는다. 이 식이 모든 의지에서 생하는 여러 가지 상모는 두 가지 인식현상[法]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진(塵)과 같이 나타나고, 둘째는 분별과 같이 나타난다. 모든 처(處)는 촉(觸)과 같이 나타난다. 만약 유색계에 있다면 의식은 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한다. 비유하건대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신을 의지하여 생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61_b_22L諸師說此意識隨種種依止生起種種名譬如作意業得身口等業名此識於一切依止生種種相貌似二種法顯現一似塵顯現二似分別顯一切處似觸顯現若在有色界識依身故生譬如有色諸根依止身此中說偈

멀리 행함과 홀로 행함은
신 없이 빈 굴 속에 머무르니,
길들여 굴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길들여 굴복시키므로
곧 마귀의 속박에서 해탈한다.
016_1061_c_06L遠行及獨行
無身住空窟
調伏難調伏
則解脫魔縛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안 등의 5근에 연하여지는 경계, 하나하나의 경계를 의식이 취하여 분별할 수 있어서 의식은 그것을 생하는 인이 된다. 다시 다른 설명이 있으니, 12입(入)을 분별하여 설한 것 가운데 이 6식의 모임을 설하여 의입(意入)이라고 한다. 이 처가 본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이 된다. 이 가운데의 모든 식을 설하여 상식(相識)이라고 한다. 의식(意識)과 의지식(依止識)은 견식(見識)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상식은 견이 생하는 인이며, 진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견(見)을 생하는 의지의 작용을 일으킨다.
016_1061_c_08L如經言此眼等五根所緣境界一一境界意識能取分別意識爲彼生因復有別說分別說十二入中是六識聚說名意入是處安立本識爲義識此中一切識說名相識意識及依止識應知名見識何以故此相識由是見生因顯現似塵故作見生依止事
이와 같이 모든 식은 유식(唯識)을 이룬다. 어찌하여 모든 진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있지 않음을 아는가? 불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네 가지 가르침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모든 식에 차별적 대상[塵]이 없음을 찾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서로 다른 인식의 상을 아는 것이다. 마치 아귀ㆍ축생ㆍ사람ㆍ하늘과 같이, 같은 경계에서 견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계가 없는 인식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ㆍ미래ㆍ꿈ㆍ그림자의 대상에 있어서와 같다. 셋째는 공용을 떠나서는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마치 실제로 있는 진 가운데서 진을 연하여 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전도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3혜(慧)를 좇아서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016_1061_c_15L此諸識成立唯識云何諸塵現前顯現知其非有如佛世尊說若菩薩與四法相應能尋能入一切識無塵何者爲四知相違識相譬如餓鬼畜生人天於同境界由見識有異由見無境界識譬如於過去未來夢影塵中由知離功用無顚倒應成如實有塵中緣塵起識不成顚倒不由功用如實知故由知義隨順三慧
016_1062_a_02L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첫째는 모든 성인은 관에 들어 마음의 자재함을 얻으니, 원락자재로 말미암아 원하고 즐거워하는 대로 대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관을 행하는 사람이 이미 사마타를 얻었다면 인식현상[法]을 관하는 가행을 닦으니, 오직 사유를 따라 실체적 대상[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약 사람이 무분별지를 얻어서 무분별관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든 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 등의 실체적 대상[義]이 3혜를 따름으로 해서, 그리고 앞에서 유식의 논리가 성취된다는 것을 끌어와 입증함으로 말미암아서, 오직 식만이 있고 진이 없음을 안다.
016_1061_c_24L何如此一切聖人入觀得心自在由願樂自在故如願樂塵種種顯現故觀行人已得奢摩他修法觀加行唯思惟義顯現故若人得無分別智未出無分別觀一切塵不顯現故境界等義隨順三慧由前引證成就唯識義故知唯識無塵
이 가운데 여섯 구의 게송이 있어, 앞의 논리를 거듭 드러낸다. 이 게송, 즉 아귀ㆍ축생ㆍ인ㆍ천 등과 같은 게송은 뒤에 의혜학승상장(依慧學勝相章)에서 자세히 분별하여 설하게 될 것이다.
016_1062_a_08L此中有六偈重顯前義此偈後依慧學中當廣分別說謂餓鬼畜生人如是等
攝大乘論卷上
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중국의 고대의 전설적인 임금들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리킨다. 또는 두 임금이 다스리던 시기를 말한다. 당(唐)은 도당씨(陶唐氏)인 요(堯)임금을 말하고, 우(虞)는 유우씨(有虞氏)인 순(舜)임금을 말한다.
  2. 2)중국 고대 주나라를 말한다. 임금들의 성(姓)이 희성(姬姓)이어서 희주라고 부른 것이다.
  3. 3)축법란(竺法蘭)이라고도 불린다. 중인도 출신의 승려로, 후한(後漢) 영평(永平) 10년(67)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함께 낙양(洛陽)에 왔다. 명제(明帝)가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지어 그들을 머물게 하였고, 가섭마등과 함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다.
  4. 4)안세고(安世高)와 승예(僧睿)를 말한다. 안세고는 중국 불교 초기의 역경승(譯經僧)으로, 인도 서북부 파사(波斯) 지방의 안식국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버리고 불문(佛門)에 귀의하였고, 후한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거쳐 낙양(洛陽)에 닿아 번역 사업에 종사했다. 승예는 남북조시대의 승려로 불경 번역가로서 유명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오자, 그에게 사사하고 스승의 불경 한역에 참가하였다.
  5. 5)도생(道生)과 승조(僧肇)를 말한다. 도생은 동진(東晋)의 승려로, 하북성(河北省) 거록(鉅鹿) 출신이다. 장안(長安)에 가서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에 들어갔고, 409년에 장안을 떠나 건강(建康)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승조 또한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에서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고, 구라마집이 불경의 번역과 강술을 시작하자,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활약하여 승략(僧䂮)과 도항(道恒), 승예(僧叡)와 함께 구마라집 문하의 사철(四哲)로 일컬어졌다.
  6. 6)원문에는 ‘고(泒)’로 되어 있으나 ‘파(派)’로 해석하였다.
  7. 7)남조 진나라 때의 승려(518~568)이다. 속성(俗姓)은 조(曹)씨고, 진제(眞諦)의 제자다. 천가(天嘉) 4년(563) 법태(法泰)와 함께 광주 제지사의 역경장에 이르러 『섭대승론』과 『섭대승석론』을 원문과 대조하여 번역할 때 번역문을 기록하는 일에 참여했고, 그 다음에는 『구사론(俱舍論)』의 번역을 도왔으며, 뒤에 두 논의 주석서를 지었다. 또 진제가 『기신론(起信論)』과 『율이십이명료론(律二十二明了論)』 등을 번역할 때에는 이를 도와서 완성했다.
  8. 8)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말이다.
  9. 9)네 가지 베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위타(四韋陀)라고도 한다. 베다는 불교가 탄생하기 전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근본성전이다.
  10. 10)바라문교에서 가르치는, 베다(veda)에 대한 여섯 가지 보조 학문, 또는 그 학문에 대한 여섯 가지 문헌을 말한다. 그 여섯 가지는 음운학(音韻學), 문법학, 의식법(儀式法), 천문학, 시작법(詩作法), 어원학(語源學)이다.
  11. 11)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와 사성제의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수도(修道)를 말한다.
  12. 12)중국 장시성(江西省) 북부의 도시로, 양쯔 강(揚子江) 중류에 위치한다. 쌀과 차(茶) 시장으로 유명하다.
  13. 13)장강(長江)과 주강(珠江) 유역을 분수령으로 하여, 강서성(江西省)ㆍ호남성(湖南省)ㆍ광동성(廣東省)ㆍ광서성(廣西省)사이에 위치한 대유령(大庾嶺)ㆍ월성령(越城嶺)ㆍ기전령(騎田嶺)ㆍ맹저령(萌渚嶺)ㆍ도방령(都龐嶺)을 말한다.
  14. 14)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15. 15)변화는 초(楚)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자신이 캔 박옥(璞玉 : 다듬지 않은 옥)을 바쳤다. 두 왕은 돌이 아니라는 감정인의 말만 듣고, 변화의 왼발 뒤꿈치와 오른발 뒤꿈치를 잘랐다. 변화는 무왕의 아들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박옥을 안고 산 아래에서 삼일 밤낮을 울었다. 문왕이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으니 변화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발 뒤꿈치를 베인 것이 슬픈 게 아니라, 보옥(寶玉)임에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貞士]인데도 사기꾼이라 하니 그것이 슬프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문왕이 감정인을 시켜 그 돌을 쪼개 보니 과연 좋은 옥이 나왔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화씨(和氏)」
  16. 16)남조 진(陳)나라 장사(長沙) 사람(?~563)이다. 557년에 소임(蕭任)이 광주(廣州)를 점령하고 진(陳)나라에 반기를 들자, 구양외(歐陽頠)가 군대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다음해 진(陳) 무제(武帝)는 구양외를 십구주도독(十九州都督) 및 광주자사(廣州刺史)에 임명하였다. 진문제(陳文帝)가 즉위하자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봉호가 오르고, 양산군공(陽山郡公)에 봉해졌다.
  17. 17)자리와 자리 사이가 한 길[丈]을 용납할 수 있는 공간이란 뜻으로,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18. 1)원문에는 ‘모년(某年)’으로 돼 있으나, 문맥에 따라 ‘기년(其年)’으로 해석하였다.
  19. 19)여기서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래서 이승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이란 뜻으로,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을 말한다.
  20. 20)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를 의미한다.
  21. 21)의식에 형성되어 있는 현상의 세 가지 성질을 말한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이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온갖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인식 작용이며,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이다.
  22. 22)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도를 안다는 뜻으로 성인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23. 23)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ㆍ상법(像法)ㆍ말법(末法)의 세 시대 중 상법과 말법의 두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불교가 쇠퇴해지는 기간이다.
  24. 24)대승 불교 경전(經典)의 총칭이다.
  25. 25)완전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대승불교의 최종 진리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