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은 듣기가 어려운 위대한 가르침[大敎]이니 지극한 이치[至理]가 그윽하고 은미하여 가지가지 오묘한 문[衆妙之門]을 뛰어넘고 삿된 논리의 법칙[邪論之軌]을 막아준다. 대사(大士)가 이 논을 지은 까닭이 아마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저 실상(實相)의 종지의 극치[宗極]는 언어가 사라지고[言亡:言語道斷] 사려가 끊어진[慮斷:心行處滅] 것이며, 진여(眞如)의 체(體)는 오묘하여 도가 현묘하고 이치가 아득하다. 장대(壯大)하구나, 법계(法界)가 툭 트여서 작위함이 없음이여! 신실하구나, 대방(大方)이 한계 밖으로 뛰어넘어 있음이여! 이 때문에 왕성(王城)에 세 번 머물고[三止] 보전(寶殿)에 세 번 들어갔으니[三加], 지인(至人)이 모범을 드리움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하겠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천백여 년에 군기(群機)가 진리의 문을 두드리니, 중생의 느낌이 부딪쳐 느낌이 마침내 소통되었다. 북천축국(北天竺國)에 두 분 보살이 계셔서 스승과 제자[師資]의 인연을 맺어 서로 족적(足跡)을 접해서 이으니 꽃과 꽃받침처럼 이어져서 아름다운 향기를 계승했다.
무착(無着)보살은 큰 줄기[紘網]를 천양하였기 때문에 논(論)의 본문을 훌륭하게 지었고, 바수(婆藪)보살은 그 명리(名理)를 드날렸기 때문에 지극히 정미하게 주석을 서술했다. 모든 논[諸論]의 종지의 귀결점[宗歸]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나, 법화(法華)의 논지(論旨)는 3거(車)를 이끌어서 수레바퀴 자국을 함께하고 비사(鞞沙)의 그윽한 종치[幽致]는 10주(住)를 열어서 함께 섬돌을 오르는 것과 같이 이 논[攝大乘論]은 여러 가지 명상[衆名]이 평탄하고 넓어 마치 왕이 행차하는 길[王路]에 샛길이 없는 것과 같고, 장식(藏識)이 항상 흘러서 넓은 하천[洪川]이 길이길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이 논에서는 3성(性)의 독특한 종지[殊旨]가 일심(一心)으로 혼용되고 6도(度)의 허종(虛宗)이 모두 피안(彼岸)에 깃들며, 10지(地)의 용급(龍級)을 밟고 3학(學)의 이로(夷路)를 막는다. 열반은 주처가 없어서 대비와 지혜[悲慧]의 양융(兩融)을 운용하고 보리는 원만하고 지극하여 진실로 감응하는 한결같은 법칙[一揆]을 갖추고 있다.
016_1097_b_02L섭대승(攝大乘)을 말해보자. 섭(攝)은 주체적으로 포섭하고[能攝], 온축해서 축적하며[蘊積], 포함하고 포섭해서 간직하는 것을 섭(攝)이라고 한다. 대승(大乘)을 말해보자. 이치는 반드시 상대적인 의존관계[待]가 끊어져 있지만 임시로 크다[大]고 가칭해서 대승(大乘)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의미가 확연하고 두루하며, 체성(體性)이 해박(該博)한 것을 대(大)라고 한다. 그 세간에 유행하는 공덕이 열반에 이르러 갈 수 있고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을 승(乘)이라고 한다. 이 논은 무착보살이 지은 것이다. 이 논이 근원의 이치를 끝까지 추궁하여 청미(淸微)하고 화창하게 드날렸으니, 이를 논이라고 한다. 석(釋)은 바수(婆藪) 논사가 주해(注解)한 것이다. 명확한 논변으로 분석하니, 문장과 이치[文理]가 모두 뛰어나다. 이것을 석이라고 한다. 양(梁)나라 태청(太淸) 2년에 남인도[南身毒] 우선니국(優禪尼國)에 진제(眞諦) 삼장이 있었으니, 도(道)가 세간 밖으로 벗어났고 학(學)은 뭇 영재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법(法)으로써 제도할 때에 사방에서 뛰어난 제자들이 건업(建業:남경)에 운집하였는데, 양나라가 말기에 이르러 장차 무너지려 하는 때를 만나서 발길을 영남(嶺南)으로 돌렸다.
광주(廣州)자사인 양산공(陽山公) 구양외(歐陽頠)가 이곳에 머물면서 보살계사(菩薩戒師)가 되어줄 것을 엎드려 간청하고, 아들[世子]인 형주(衡州)자사 구양흘(歐陽紇)은 또 번역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단양(丹陽)의 의학승(義學僧)인 승종(僧宗)과 혜개(慧愷)가 전수해 주시는 법어를 필수(筆受)하니, 이 일에 합당한 사람을 얻었다 할 것이다. 논본(論本)과 석론(釋論)은 모두 열다섯 권이다. 내가 용렬하고 학식이 얕기는 하나, 이 논을 연마하고 탐구하여 망실하지 않고[鑽仰無墜], 부족하나마 법문을 들은 것을 여기에 기술하여 후에 오는 명철(明哲)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예장(豫章)의 군수(郡守)인 왕흠(王欽)이 개황(開皇) 원년 5월에 이 논을 주상(奏上)하였는데, 천선사(遷禪師)가 수지(受持)하고 있는 논(論)과 다르지 않다.
016_1097_b_16L豫章郡守王欽。開皇元年五月奏此論。與遷持論不殊。
섭대승론석서(攝大乘論釋序)
016_1097_b_18L攝大乘論釋序
이 서문은 천선사(遷禪師)가 강남에서 서주(徐州)에 이르러 강설한 내용이다.
016_1097_b_19L遷禪師江南將至徐州講唱
016_1097_c_02L무릇 지극한 도(道)는 넓고 넓어서 생각할 수 없고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대비(大悲)는 평등하여 중생을 이끌어 나아감에 다함이 없다. 덕(德)은 함생(含生:중생)을 덮어 주며 이(理)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누설되지 않는다. 단지 길을 미혹하여 뒤바뀐 것이 오래되어 미혹 속에 빠져서 번뇌를 쉬기가 어려울 뿐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것[出世]을 먼저 말하면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겨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 때문에 교(敎)를 설함에 방편을 세우는 것이니, 각각의 근성과 욕구[性欲]에 따르는 것이다. 당우(唐虞:요순 시대) 이전에는 도첩(圖諜)이 간소하였고, 희주(姬周:주나라 시대) 이후에는 경전[經誥:유교 경전]이 매우 많아 비록 예(禮)를 만들고 훈(訓)을 지어서 모두 세속법으로 가르쳤지만 전제와 속제[眞仮]의 묘취(妙趣)에 대해서는 깜깜하여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취는 총령(葱嶺) 서쪽(인도)에 숨어 있었고 가르침은 창해(滄海)의 밖에 비장(秘藏)되어 있었는데, 한나라 왕실에서 명을 받고부터 점점 동쪽으로 들어왔으며 진(晋)나라 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풍교(風敎)가 왕성하게 되었다. 양(梁)나라 시대에는 천하에 가득 차서 흥륭하였으며 천 년 세월을 지나면서 7대(代)를 걸쳐 지금에 이르렀다.
법란(法蘭)1)은 앞서서 청정한 근원[淸源]을 인도했고 동수(童壽:구마라집)는 그 후에 불법의 향기를 떨쳤으며, 안세고(安世高)와 승예(僧叡)는 웅장한 생각을 펼쳐서 의단(義端:불법의 실마리)을 일으켰고, 도생(道生)과 승조(僧肇)는 현묘한 언어[玄言]2)로써 그윽한 이치를 자유자재로 해석하였다. 비록 함께 모여 도모하였지만 분파가 갈리고 크게 시끄러워져 같은 물결(학파) 속에서 파가 갈려 깊고 낮음을 다투었으며 빛과 어둠[照晦]3)이 서로 뒤섞였다. 이로부터 돈독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이 점점 자세해져서 한결같이 다른 길로 달려갔다. 조상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수하였으니, 정서에 따라 버리고 취하였으며, 진귀한 것에 따라 개발하고 물리쳤다. 혜개(慧愷)4)는 뜻이 점점 커져서 바랑을 짊어지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거짓으로 나이를 속여 학도(學徒)가 되었다. 부처님의 교훈을 받들어 돌아다니면서 강의하였으며 수년에 걸쳐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을 만나서 토론하였다. 단지 종합적으로 섭렵하였기에 통찰이 얕아서 성인의 도와 덕을 탐구하였지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물결을 찾아 그 원류를 구했지만 깨닫지 못한 것이 많았다. 이것은 깊은 뜻이 문자에 가려져 있고 넓은 뜻은 생각에 미혹되었기 때문이었으니, 마음을 짊어졌어도 하나가 아님을 한탄하였다. 매번 풍조에 따라 도(道)을 묻고자 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했다.
016_1098_a_02L삼장법사[眞諦]가 있었는데, 우선니국(優禪尼國)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성은 파라타(頗羅墮)이고, 이름은 구라나타(拘羅那他)이었다. 중국말로 친의(親依)라고 번역하여 불렀다. 지식과 관찰력이 깊고 넓었으며 외모가 출중하고 뛰어난 천재였으며 변재가 막힘이 없었다. 도(道)의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덕음(德音)이 세속까지 전해졌다.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를 유행하면서 여러 스님들을 받들어 모셨다. 먼저 외전(外典)을 공부하였으며, 외서에 대해서도 모두 달통하였고, 4위(韋:네 가지 veda)를 품 속에 안고 6론(論)을 가슴에 품었다. 3장(藏:경ㆍ율ㆍ론)을 궁구하였고 5부(部:四諦와 修道)를 거듭 익혔으며, 대승을 연구하여 깊은 궁극을 모두 알았다. 법사는 이미 광범위하게 서적을 공부하였기에 깊은 이치[幽微]를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항상 다른 지역에 가서 현종(玄宗:자기 종지)을 떨쳐 깨닫지 못한 이에게 법문을 열어주고 싶어 했다. 몸을 도에 바쳐서 먼 곳에 유행하는 것을 가리지 않아서 만 리를 가더라도 마치 이웃에 가듯 하며 사해(四海)를 건너도 지척과 같이 여겼다.
양(梁)나라 태청(太淸) 2년(548)에 건업(建業:남경)에 들어왔는데, 이에 양나라 말기의 혼란한 시대를 만나니 멋대로 흐름이 연이어졌다. 법사는 이로 인해 이쪽저쪽으로 피해 다녔으므로 끝내 대법(大法)이 가려져 펼쳐지지 못하였다. 구강(九江)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령(五嶺)에 유행하였으나 번역된 경권은 많지 않았다. 후에 민(閩:복건성의 옛 이름)과 월(越:절강성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적지 않게 강설하였다. 법사는 항상 비분강개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탄식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知音]가 적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백아(伯牙)가 현을 끊고 변화(卞和)가 구슬을 안고 울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으니 미묘한 뜻을 담은 곡조는 변별하기 어렵고 한 자 남짓의 진귀한 보배는 구별하는 이가 드물었다. 법사는 오랫동안 지방을 유행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였다. 여러 지역을 거쳐 드디어 번우(蕃禺:광동성에 있는 현)에 도착하였다.
016_1098_b_02L의동(儀同) 삼사(三司) 광주 자사(刺史)인 양산군(陽山郡) 구양외(歐陽頠)는 외모가 준수하였고, 그 덕은 여러 지방에 알려졌으며 문무(文武)에 능하였다. 바른 도로써 다스려 백월(百越)에서 유민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오령(五嶺)에서 바른 법을 세웠다. 법사의 고귀한 행(行)을 존경하고 대사의 수승한 규칙을 흠모하여 보살계사(菩薩戒師)로 청하여 모든 제자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예전에 업(業:보살계)을 받은 적이 있어 나쁜 것을 이미 씻어 버렸지만 계를 받은 지 오래되지 않아 어겼으므로 오늘 다시 계를 받으니, 마음이 매우 기뻤다. 다시 공양 올리고 덕을 받으며 도를 찾아 의심을 풀고 싶어서 세 번 간절히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여 마음에 의지를 잃었다. 형주(衡州) 자사이며, 양산공(陽山公)의 아들인 구양흘(歐陽紇)이 있었는데, 기세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권세와 무예가 뛰어났고 문사(文史)를 모두 섭렵하여 치도(治道)의 요점을 깊이 통달하였다. 내면에는 지혜의 물결이 가득 차있어서 담담했고 청정하고 밝은 기상이 밖으로 흘러 넘쳤다. 또한 현인을 흠모하고 도를 완미하였으며 돈독하게 믿고 빼어남을 흠애하여 몸소 청주(請主)가 되었으며 예를 올리는 일을 겸해서 행하였다. 법사는 이에 흔쾌히 청을 받아들여 번역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제지사(制旨寺)의 사주(寺主) 혜지(慧智) 스님은 계행(戒行)의 청정하고 도의 기운이 훌륭하였다. 한가롭고 담담하게 지내는 데 뜻을 두었으며 도탄을 만나면 반드시 거양해서 끊임없이 대중을 구제해 주고 쉴새없이 교화하였다. 정남(征南) 장사(長史) 원경덕(袁敬德)은 품행이 겸허하고 밝았으며 자연스럽고 고상한 경지에 뜻을 두었고, 훌륭한 계획으로 간단히 일을 처리하였으며, 옥과 같이 밝게 정치를 보좌하여 백성들은 일찍부터 그 명성을 들었다. 아울러 불법을 깊이 존중하여 숭고한 마음으로 깊은 이치에 이르렀으며 출세(出世)와 세속의 두 현인에게 항상 보시하였다.
계미년(癸未年, 503) 3월 봄에 광주 제지사에서 곧 번역에 들어갔다. 법사는 이미 성론(聲論)을 잘 이해하였고, 방언(方言)을 잘 알았으므로 그 말이 나온 까닭을 반드시 밝혔고 의미는 은미하다고 해서 펼치지 않았다. 스승의 자리와 조금 떨어져서 항상 모시고 하루 종일 쉴새없이 즐거이 필수(筆受)에 전념하여 법문이 나오면 바로 받아 적었다. 한 장(章) 한 구절[句]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였고 해석하여 뜻이 완비되었을 때 마침내 문장으로 적었다. 그러나 번역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다. 한 글자가 어긋나면 이치의 깊은 뜻이 호월(胡越)5)의 거리만큼 벌어지는 것이니, 질박하더라도 뜻을 얻게 하여야 하고, 문채롭게 꾸미는 데 힘써서 근본 종지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지금 번역된 경문에서는 문채로움과 질박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승인(僧忍) 등과 함께 밤낮으로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촌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곧 그 해 수단(樹檀)의 달에 문장과 의미가 다 완성되니, 본론(本論) 3권ㆍ석론(釋論) 12권ㆍ의소(義疏) 8권을 합하여 23권이었다.
016_1098_c_02L이 논은 대승의 종극(宗極)이요, 정법(正法)의 신비한 오의[秘奧]라 미묘한 뜻이 구름같이 일어났으며 밝은 언사가 바다와 같이 넘치면서도 깊고 심오하여, 2승(乘)은 이것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넓고 장엄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10지(地)의 종학(宗學)이 되는 것이다.
여래께서 입멸하신 후 천백여 년에 미륵보살이 적절한 시기에 나투어 영부(靈俯)에 강령하여 중생을 제접하니, 자기를 잊고 자신을 낮추어 대중에게 감응하셨다. 또한 아승가(阿僧伽) 법사를 위하여 대승의 뜻을 자세하게 해석해 주었다. 아승가는 이 나라 말로 무착(無着)이다. 법사는 하나를 얻으면 도에 회합하고 둘을 받아들이면 종지를 알았다. 이치를 이야기한 것은 궁극적인 것을 비추어서 정신과 현상에 응시하여 지극한 이치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논을 짓게 된 것이다. 유식(唯識)의 미묘한 뜻[微言]이 이로 인해 드러날 수 있었다.
본론(本論)은 무착 법사가 지은 것이다. 법사의 두 번째 동생은 바수반두(婆藪槃豆)이며 이 나라 말로 천친(天親)이다. 도에 대해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여 버금갔으며 덕성을 갖추고 풍격(風格)이 뛰어났으며 정신과 기력이 모두 화통하였다. 그 형의 고귀한 교훈을 계승하여 대승의 큰 종지[弘旨]를 학습하였다. 무착 법사가 지은 여러 논은 언사가 매우 심연하여 그 이치를 알기 어려웠다. 장차 후세에 다시 어떤 오류라도 범할까 두려워 석론(釋論)을 지어 본문을 해석하니, 소승을 그 안에 다 포함시켰고 외도는 붓끝으로 논파하였다. 이로부터 상계(像季)시대에 이르러 방등원교(方等圓敎)가 번성하게 되었다. 혜개(慧愷)6)는 허박(虛薄)한 것을 법으로 삼지 않고 정려(情慮)가 볼품 없이 얕았지만 겨자씨 같은 작은 배를 큰 골짜기에 띄우고자 했고 느린 말을 채찍질해서 먼 길을 가고자 하였다. 바라건대 털끝이 모여서 한 길 높이가 되고 작은 불이 모여서 큰 광명이 되는 법이니, 혜를 갖춘 군자(君子)여, 깊이 연구하고 열람하도록 할지어다. 그리하면 반드시 그 도(道)를 잃어버림이 없으리라.
016_1099_a_02L
지혜의 장애[智障]가 극히 어둡고 깜깜하다는 것은 진(眞:眞諦)과 속(俗:俗諦)이 다르다는 집착을 말한다. 이치에 맞고 양(量:인식)에 맞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빛으로 말미암아,
016_1099_a_02L智障極盲闇。 謂眞俗別執。 由如理如量。
無分別智光。
깨뜨려 비길 데 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마음의 미혹을 없애어 남음이 없으며, 항상 덕과 원만한 지혜에 머무르고 항상 대비(大悲)를 좇아 행하시며,
016_1099_a_04L破成無等覺。 滅心惑無餘。
常住德圓智。 恒隨行大悲。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지극한 해탈의 진실한 도를 시방세계에 설하시는 것은 공용(功用)이 없는 마음으로 가능하다.
016_1099_a_05L如衆生根性。
極解脫眞道。 於十方界說。 能無功用心。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생사에 머물지 않으며 항상 크나큰 자비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으시며,
016_1099_a_06L由無分別智。 不住於生死。 常起大悲故。
不入於涅槃。
지혜의 방편을 섭지(攝持)함으로써 스스로와 남에게 지극히 이익됨에 이른다. 나는 몸과 입 그리고 뜻으로써 불ㆍ세존께 엎드려 절을 올리나이다.
016_1099_a_08L由攝智方便。 至自他極利。
我以身口意。 頂禮佛世尊。
이 위없는 바른 법을 여래께서 스스로 깨달아 설하시니 만약 사람들이 바르게 행할 수 있다면 감로(甘露)의 묘한 발자취에 이르리라.
016_1099_a_09L是無上正法。
如來自覺說。 若人能正行。 至甘露妙迹。
만약 이 법을 비방한다면 바닥이 없는 굽은 구덩이에 빠진다. 지혜와 신심(信心)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법에 엎드려 절을 올리나이다.
016_1099_a_10L若誹謗此法。 沒無底枉坑。 由智及信心。
頂禮眞實法。
도에 머무르며 과(果)에 머무는 승려는 널리 모든 대중보다 수승하여 지혜와 도(道)로 청정하게 씻고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에
016_1099_a_12L住道住果僧。 普勝一切衆。
智道浴淸淨。 世無上福田。
조그마한 착한 일을 그 가운데 던져 허공과 대지처럼 광대한 세간의 즐거움과 청량(淸凉)한 열반을 성취하리라.
016_1099_a_13L片善投於中。
廣大如空地。 成就世閒樂。 及淸涼涅槃。
저는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엎드려 절을 올리나이다. 총명하지만 삿되고 교만한 사람은 아함(阿含)을 닦아 얻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016_1099_a_14L我一心頂禮。 佛聖弟子衆。 聰明邪慢人。
退阿含修得。
자신의 집착을 따라 행하고 말하니, 바른 이치로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미륵보살을 섬기고 일광정(日光定)에 의지하여
016_1099_a_16L行說隨自執。 正理非所證。
事彌勒菩薩。 依止日光定。
참다운 법의 상을 비추어 깨달아 움직임이 없으면서 또한 세상에 나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바른 법과 진실한 도리를 베풀어 설하시니,
016_1099_a_17L照了實法相。
無動及出世。 爲我等宣說。 正法眞道理。
마치 가을 달과 태양 빛처럼 글월과 낱말이 세상에 널리 퍼져서 심히 깊고 큰 갖가지 글귀의 의미가 경전을 요달함에 의거하니
016_1099_a_18L如秋月日光。 文詞遍於世。 甚深大種種。
句義依了經。
총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심(下心)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리라. 미세하고 비밀한 법은 통달하기 어렵고 지혜는 집착이 없고 장애가 없어서
016_1099_a_20L能令聰慧人。 下心起尊敬。
細密法難通。 智無著無㝵。
이익 등의 여덟 가지 세간의 법1)에 마음이 항상 물들고 집착함이 없으니, 장애가 없음을 의(義)2)라고 이름한다. 통달하여 민첩한 사람은 항상 염송하고,
016_1099_a_21L利等八世法。
心常無染著。 無㝵名稱義。 通敏者恒誦。
천인(天人)은 널리 알아서 큰 스승의 발에 엎드려 절을 올리네. 자세히 설명하여 다함이 없는 비와 감로(甘露) 같은 문장의 뜻을,
016_1099_a_22L天人普識知。 頂禮大師足。 辯說常無盡。
雨甘露文義。
존귀한 분에 의해 분수에 따라 들으니 마치 비를 기다리는 새와 같다. 결정하는 장(藏)3)을 펼쳐 살펴보고 대승을 설명하여 섭지함으로써,
016_1099_a_24L依尊隨分聞。 猶如乞雨鳥。
披閱決定藏。 以釋攝大乘。
016_1099_b_02L 이 말이 큰 문해인(文海人)에게
이익이 되고 두려움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016_1099_b_02L願此言利益。
怖大文海人。
衆名品第一之一
【釋】이 품(品)에는 세 장(章)이 있으니, 첫째는 비길 데 없는 성스러운 가르침이며, 둘째는 열 가지 정의의 순서이며, 셋째는 많은 이름이다.
016_1099_b_04L釋曰。此品有三章。一無等聖教。二十義次第。三衆名。
1) 무등성교장(無等聖敎章)
016_1099_b_06L無等聖教章第一
【論】『섭대승론』은 아비달마(阿毘達磨)4)의 가르침이며, 대승의 수다라(修多羅)5)이다. 【釋】이 말은 무슨 정의(定義)를 의거하는 것이며,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나는가? 모든 소지(所知:인식)6)를 의거하며, 심히 깊고 광대한 법(法)7)의 실성(實性)을 의거한다. 만약 불보살의 위력(威力)을 떠난다면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공능(功能)이 있어서 이러한 정의를 설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상(相)을 설함으로 말미암아 이 논서를 저술하는가? 만약 아비달마라는 이름을 떠난다면 이 논서가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또한 예를 들어 『십지경(十地經)』과 같이 경전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제 저술한 이 논서의 그 쓰임[用]은 어떠한가? 중생의 무지와 의심 그리고 전도(顚倒)를 풀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다시 이 논서를 아비달마대승수다라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래 법문의 다른 부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이 논서의 다른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대승이라고 하는 것은 소승의 아비달마와는 구별하고자 함이다. 어찌하여 단지 아비달마라는 이름만을 설하지 않고 다시 수다라라는 이름을 설하는가? 어떤 아비달마는 성스러운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비달마라는 이름을 설한 것은 이 논서가 보살장(菩薩藏)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다시 장(藏)을 세우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대승 가운데서 스스로의 미혹인 보살의 번뇌를 멸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보살은 분별로써 번뇌를 삼으며, 아비달마란 깊고 깊으며 광대한 법성(法性)을 상(相)으로 삼는다.
016_1099_c_02L이 보살장에는 대략 몇 가지 종류가 있는가? 역시 세 가지가 있으니, 수다라와 아비달마 그리고 비나야(毘那耶)8)이다. 이 세 가지는 위와 아래의 승(乘)의 차별로 말미암아 두 가지를 이루니, 성문장(聲聞藏)과 보살장이다. 이 세 가지와 두 가지를 어찌하여 장(藏)이라고 하는가? 섭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법을 섭지하는가? 모든 인식하는 의(義)9)이다. 어찌하여 세 가지를 이루어 아홉 가지 인을 따로이 세우는가? 수다라란 다른 사람의 의혹을 다스리기[對治] 위한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 의(義) 가운데 의심을 일으킨다면 결정하는10)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수다라를 세운다. 두 극단[二邊]11)을 받아들여 쓰는 것[受用]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따로이 비나야를 세운다. 부처님께서는 죄와 과실이 있는 받아들여 씀을 가로막음으로 말미암아 비나야를 세워 즐거움을 행하는 극단[樂行邊]12)을 다스리고, 부처님께서 죄와 과실이 없는 받아들여 씀을 기쁘게 따름으로 말미암아서 비나야를 세워 고행의 변[苦行邊]13)을 다스린다. 스스로 견(見)을 취하여[見取]14) 치우쳐 집착하는 것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따로이 아비달마를 세운다. 전도됨이 없는 참다운 법상(法相)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016_1100_a_02L또한 다시 세 가지 수학(修學)15)을 세우기 위하여 따로이 수다라를 세우며, 의계학(依戒學)16)과 의심학(依心學)17)을 성립하기 위하여 따로이 비나야를 세운다. 왜냐 하면 만약 사람이 계율을 지닌다면 곧 마음에 후회함이 없고, 후회함이 없는 것 등으로 말미암아 순차적으로 정(定)을 얻을 수 있어서 의혜학(依慧學)18)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따로이 아비달마를 세우는 것은, 왜냐 하면 전도됨이 없는 의(義:실체적 대상)를 가려서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수다라로 말미암아 법과 의를 바르게 설하고 비나야로 말미암아 법(法)과 의(義)를 성취한다. 왜냐 하면 사람이 미혹을 수행한다면 비나야는 이 두 가지의 법과 의를 통달할 수 있으며, 법과 의(義)를 결정하는 수승한 지혜는 아비달마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아홉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3장(藏)을 세운다. 이 3장은 무엇에 두루 쓰이는가? 생사를 해탈하기 위함이 그 공통된 쓰임이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는가? 훈습하고, 깨닫고, 고요하고, 통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해탈할 수 있다. 3장을 듣고 사유함으로 해서 훈습할 수 있으며, 훈습함으로 해서 깨달으며,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고요하며, 고요함으로 말미암아 통달한다.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해탈할 수 있다.
3장을 간략하게 설한다면 네 가지 정의(定義)가 있다. 만약 보살이 이 네 가지 정의를 요별할 수 있다면 곧 일체지(一切智)를 갖춘다. 만약 성문이 한 구절, 한 게송의 정의를 깨달을 수 있다면 곧 흐름[流]19)이 다함에 이른다. 어떻게 하나하나의 장에 네 가지 정의가 있는가? 수다라의 네 가지 정의란 첫째는 의지(依止)이며, 둘째는 상이며, 셋째는 법이며, 넷째는 의(義)이다. 이러한 네 가지 정의를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수다라라고 이름한다. 의지란 처(處)20)이며 인식 주관[人]이며 씀[用]이다. 이 세 가지에 의거하여 부처님께서는 수다라를 설하기 때문에 의지라고 한다. 상이란 진제(眞諦:승의제)와 속제(俗諦)의 상이기 때문에 상이라고 한다. 법(法)21)이란 음(陰:五陰)ㆍ계(界:十八界)ㆍ입(入)22)ㆍ연생(緣生:十二緣起)ㆍ제(諦:四諦)ㆍ식(食:四食)ㆍ정(定)ㆍ무량(無量:四無量)ㆍ무색(無色)ㆍ해탈(解脫:八解脫)ㆍ제입(制入:八制入)ㆍ변입(遍入:십일체입)ㆍ조도(助道:삼십칠조도품)ㆍ무애변(無礙辯:四無礙解) 그리고 무쟁(無諍:無諍三摩提) 등이기 때문에 법이라고 이름한다. 의(義)란 사(事:正智)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의라고 한다. 도를 생하고 미혹을 멸하는 것이 사(事)이다.23)
아바달마의 네 가지 정의란 첫째는 마주 대하는 것[對]이며, 둘째는 거듭하는 것[數]이며, 셋째는 굴복시키는 것[伏]이며, 넷째는 풀이하는 것[解]이다. 마주 대하는 것이란 법이 무주처열반을 향하여 마주 대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진리와 도의 부분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마주 대한다고 일컫는다. 거듭하는 것이란 모든 법 가운데 하나의 법을 좇아서 혹은 이름[名]으로써, 혹은 별상(別相)으로써 혹은 통상(通相)으로써 거듭거듭 이 하나의 법을 드러내기 때문에 거듭하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굴복시키는 것이란 의지 등의 방편을 바르게 설함으로 말미암아 이 법(法)24)은 모든 의견[說]을 굴복시켜, 세우고 깨뜨리는 두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풀이하는 것이란 아비달마로 말미암아 수다라의 의미를 쉽게 풀기 때문에 풀이하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016_1100_b_02L비나야에 네 가지 정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첫째는 죄와 과실로 말미암은 것이며, 둘째는 연기(緣起)로 말미암은 것이며, 셋째는 돌이켜 깨끗하게 하는 것[還淨]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넷째는 벗어나 떠나는 것[出離]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와 과실이란 5편(篇)과 7취(聚)25)의 죄를 말한다. 연기라는 것은 혹은 네 가지이고 혹은 여덟 가지이다. 네 가지란 첫째는 무지(無知)이고, 둘째는 방일(放逸)함이고, 셋째는 번뇌가 치성함이며, 넷째는 가벼이 여기고 교만함이다. 여덟 가지란 첫째는 마음으로 말미암으나 몸과 입으로는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몸으로 말미암으나 마음과 입으로는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입으로 말미암으나 몸과 마음으로는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과 몸으로 말미암으나 입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몸과 입으로 말미암으나 마음으로는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여섯째는 마음과 입으로 말미암으나 몸으로는 말미암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몸과 입 그리고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여덟째는 몸과 입 그리고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 깨끗하게 하는 것이란 선심(善心)으로 말미암으며 다스려 벌하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선심이란 본래와 같이 대하여 다스림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벗어나 떠나는 것이란 일곱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각각이 일어나 겉으로도 드러나서 서로 이어짐을 막는 것이고, 둘째는 배움과 더불어 벌을 받는 것이고, 셋째는 먼저 제정(制定)하고 뒤에 개방하는 것이니 먼저 이미 계율을 제정하고 뒤에 다른 뜻으로 말미암아 개방하는 것이다. 넷째는 다시 버리는 것이니 대중이 본래대로 같은 뜻으로 모인다면 먼저 죄를 범한 사람을 다시 버리는 때에 돌이켜 깨끗하여지며, 다섯째는 의지[依]를 바꾸는 것이니 공통되는 죄가 아니라면 비구와 비구니가 남녀의 근(根)을 바꾸는 것이다. 여섯째는 여실하게 관하는 것이니 네 가지 법의 우다나(鬱陀那)26)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관찰하며, 또한 법상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항상 스스로의 죄를 관찰한다. 일곱째는 법이(法爾)27)를 얻음이니, 만약 4제를 관한다면 법이를 얻음으로 말미암아 조그만 죄를 조금이라도 따르는 것을 다시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28)
다시 비나야에 네 가지 정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사람[人]이니 불세존께서는 이것에 의거하여 계율을 세우셨다. 둘째는 제도(制度)를 세우는 것이니 큰 스승에게 모인 대중들에게 이미 과실을 설명하고 배울 것[學處]을 세운다. 셋째는 분별하는 것이니 이미 간략하게 제도를 세우고 다시 자세히 해석한다. 넷째는 결판(決判)하는 것이니 이렇게 세운 제도 가운데 무엇이 죄를 범하는 것이고 무엇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인가를 ‘판별’한다. 이제 본문을 풀이한다.
016_1100_c_02L【論】바르게 대승의 구절의 정의에 들어간 보살마하살은 【釋】이미 다라니(陀羅尼)29) 등의 공덕을 얻었으며 이 공덕으로 말미암아 문장과 구문과 뜻에 대해서 잘 섭지하고, 또한 이치에 맞게 드러내어 설할 수 있기 때문에 바르게 들어갔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단지 보살마하살만을 말하고 이름을 설하지 않았는가?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어찌하여 이 두 가지 이름30)을 설하였는가? 두 가지 행을 모두 갖추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論】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교설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釋】오직 대승 가운데에만 수승한 공덕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승(乘) 가운데는 없다. 대승의 공통되지 않는 덕[不共德]을 밝히기 위하여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한다고 말한다.
【論】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뛰어넘는다. 【釋】이러한 말씀은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인가?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어서 실유(實有)를 드러내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모든 불세존이란 열 가지 명호 가운데서 아는 것과 같다.
【論】첫째는 응지(應知:인식)31)의 의지(依止)가 수승한 모습32)이다. 【釋】응지란 정품과 부정품의 법을 말한다. 곧 3성(性)33)이다. 이 3성은 3성의 원인에 의지하여 곧 수승한 모습이다. 이 의지의 수승한 모습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언설 또한 수승한 것이다. 곧 아뢰의식이 의지이므로 수승한 모습이다. 비유하건대 석자(石子)34)와 같고 내지는 지과(智果)의 수승한 모습도 역시 이와 같다.
【論】둘째는 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다. 【釋】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란 응지의 자성을 말하며 혹은 응지는 곧 상(相)이라는 것35)을 말한다.
016_1100_c_21L論曰。二應知勝相。釋曰。應知勝相者。謂應知自性或應知卽是相。
【論】셋째는 응지에 들어감의 수승한 모습36)이다. 【釋】응지는 3성을 말하며, 들어감이란 들어감을 이룰 수 있다는 것과 들어감을 이룬 것을 말하니, 곧 유식(唯識)이다.
016_1100_c_23L論曰。三應知入勝相。釋曰。應知謂三性入者。謂能成入及所成入卽是唯識。
016_1101_a_02L【論】넷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수승한 모습이다. 【釋】유식에 들어감의 원인은 곧 원락위(願樂位) 가운데 있어서의 보시 등 세간의 6바라밀이다. 들어감의 결과는 곧 유식에 들어간 뒤에 통달위(通達位) 가운데 있어서 6바라밀이 바뀌어 결과를 이루므로 출세간이라고 한다.
【論】다섯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釋】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는 곧 세간과 출세간의 6바라밀이다. 닦는다는 것은 4덕(德)37)을 거듭 익히는 것을 말한다. 이 닦음의 지(地)는 지가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한다. 곧 환희지(歡喜地) 등의 10지(地)이다.
016_1101_b_02L【論】이 열 가지 정의의 수승한 상으로 말미암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그 밖의 다른 가르침보다 우월하다. 대승에서 나타나는 수다라의 문구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釋】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이 간략하게 설명한 문구(文句)로 말미암아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낸다. 소승 가운데는 없으므로 오지 대승의 교설이다.
【論】또한 어찌하여 이 가운데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승이 그 밖의 다른 교설(敎說)보다 수승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간략한 해석[略釋]으로 이러한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대승에만 있으며, 소승에는 없다. 무엇이 열 가지가 되는가? 아뢰야식을 설하여 응지(應知)의 의지(依止)의 모습이라고 하며, 첫째는 의타성(依他性)이며, 둘째는 분별성(分別性)이며,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인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응지의 상이라고 하며, 유식의 가르침을 설하여 응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며, 6바라밀을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釋】왜냐 하면 유식의 도(道)로 말미암아 3성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락위(願樂位)의 6바라밀은 비록 세간의 법이지만 출세간의 법을 이끌 수 있으며 유식의 도를 생(生)할 수 있기 때문에 3성에 들어가는 원인이라고 설한다. 보살이 이미 지(地)에 들어가니, 출세간의 청정한 6바라밀이 곧 3성에 들어가는 결과이다.
【論】보살이 받아 지니며 수호하는 금계(禁戒)를 설하여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의 계학의 모습이라고 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41)와 허공기(虛空器)42) 등의 정(定)을 설하여 심학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분별지를 설하여 혜학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주처열반을 설하여 학의 결과인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자성신(自性身)43)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 이 셋을 설하여 무분별지의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016_1101_c_02L【釋】지 가운데 세 가지 관을 닦음[修觀]이 있으니, 설하여 세 가지 의지하는 학(學)이라고 한다. 이 학의 결과가 곧 멸함[滅]이니 세 가지 장애를 멸하는 것이다. 무분별지를 의지하는 혜학이라 하고, 이 지혜가 성문(聲聞)에 있어서라면 네 가지 전도(顚倒)를 분별함이 없으므로 무분별이라 하고, 보살에 있어서라면 모든 법을 분별함이 없으므로 무분별이라고 하니, 두 가지 무분별의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불신이 무분별지의 결과이다. 만약 자성신을 떠난다면 법신을 이루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안근과 같다. 만약 법신을 떠나면, 응신은 이룰 수 없다. 비유하건대 안식(眼識)이 근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둘은 의지의 주체[能依]와 의지처[所依]로 말미암아 서로 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응신을 떠난다면 이미 대지(大地)44)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보살은 받아들여 쓸 법락(法樂)이 없다.
만약 받아들여 쓸 법락이 없다면 보리의 자량(資糧)45)을 모두 갖추지 못한다. 마치 색(色)을 보는 것과 같다. 만약 응신을 떠난다면 화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화신이 없다면 보살이 원락위에 머무르고 성문이 파리하고 매끄럽지 못한 원락을 처음 일으켜 수행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결정코 3신이 있어야 한다.
016_1102_a_02L【論】따라서 대승에 의거하여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시며,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넘어선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이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설한 것이 비길 데가 없으며, 대승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여래의 바른 교설은 소승은 결코 대승이 아니라고 가로막는다. 소승 가운데에서는 이 열 가지 정의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하나의 정의를 따라 해석하더라도 단지 대승 가운데의 해석을 볼 따름이다. 또한 다시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성취함이 순차적으로 뒤따라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釋】세 가지 의미는 열 가지 정의가 위없는 보리의 원인이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취함이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도리에 있어서 사유를 가려 택하여 이 열 가지 정의가 성취되어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이미 보고서 인도하는 스승에 의해 설하여진 도의 상과 같다. 순차적으로 뒤따른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수행의 위계 가운데서 관을 행한다면 이 열 가지 정의가 관을 닦음을 순차적으로 뒤따라서 머문다는 것이다. 마치 인도하는 스승에 의해 설하여진 도가 순차적으로 뒤따라서 머무는 것과 같다.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10지 가운데에 장애하는 인(因)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인도하는 스승에 의해 설하여진 도 가운데에 강도ㆍ도둑ㆍ호랑이 그리고 이리 등의 장애가 없다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지(地)는 지 가운데서 생사와 열반이 서로 거리낌이 없다. 따라서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 수 있다.
【論】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47)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釋】이 열 가지 정의로 말미암아 세 가지 덕(德)을 모두 갖추므로 비길 데 없는 경계, 비길 데 없는 행(行), 비길 데 없는 결과라고 일컫는다. 만약 사람이 이것을 듣고 사유하며 닦는다면 반드시 위없는 보리를 얻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論】응지의 의지와 상(相), 들어감, 원인과 결과, 닦음의 차이, 세 가지 학(學)과 결과인 멸(滅), 그리고 지혜가 위없는 승(乘)에 포섭된다.
016_1102_a_20L應知依及相, 入因果修異, 三學及果滅,
智無上乘攝。
열 가지 정의는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것이 보리(菩提)의 원인이라는 것을 본다. 따라서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며, 열 가지 정의를 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수승하다.
016_1102_a_22L十義餘處無, 見此菩提因,
故大乘佛言, 由說十義勝。
2) 십의차제장(十義次第章)
016_1102_a_23L十義次第章第二
016_1102_b_02L【論】어찌하여 열 가지 정의는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여지는가? 보살은 처음으로 배움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모든 법의 여실한 인연(因緣)을 관하여야 한다. 이 관으로 말미암아 12연생(緣生)48)에서 총명한 지혜를 생하게 된다.49) 이후에 연생하는 법에서 그것의 체상(體相)을 요별하여야 한다. 총명한 지혜50)는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二邊]의 과실을 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여 마땅히 연하여지는 여실한 모든 상[諸相]을 통달하여야 한다. 차후에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다음에는 마음이 이미 응지(應知)의 실상을 통달한다. 먼저 행하여졌던 6바라밀을 성취하여 청정케 하고 다시 물러나 상실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의식 속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의식 속의 청정함에 섭지되는 모든 바라밀을 10지의 차별에 의거하여 하나를 좇아서 3아승기겁(阿僧祇劫)51)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보살의 세 가지 학(學)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원만하여지면 학의 결과인 열반과 위없는 보리를 차후에도 닦을 수 있어야 한다. 열 가지 정의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 순서를 설하는 가운데 모든 대승이 다 원만하여짐을 얻는다.
【釋】이 열 가지 정의의 경계에는 순서가 있다. 바른 행에도 순서가 있고 결과에도 순서가 있다. 이 순서를 관함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 정의의 순서를 세운다. 또한 만약 사람이 이미 모든 법의 원인을 요별하였다면 12연생에서 곧 총명한 지혜를 얻는다. 왜냐 하면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생하므로 자재천(自在天)52) 등의 평등하지 않은 원인으로부터 생하지도 않으며, 역시 원인이 없이 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라는 두 가지 지혜를 세운다.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하는 이 법의 상을 보살은 알아야 한다. 무엇이 상이 되는가? 분별성은 실제로 체가 있지 않으나, 언어를 집착하여 이름이 있으니 증익이 된다. 진실성은 실제로 있으나, 언어를 집착하여도 이름이 없어서 손감이 된다. 증익이 없고 손감이 있는 것을 두 극단[二邊]이라고 한다. 총명한 지혜는 이 두 극단을 떠날 수 있다.
016_1102_c_02L다시 집착하여지는 것이 오직 식(識)에 있다. 이 지혜로 말미암아 이 상을 통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통달로 말미암아 다시 장애가 없어서 다음에 유식에 들어감을 좇아 따른다. 세간의 6바라밀은 속제(俗諦)에 의거한다. 진제(眞諦)에 의거하며 청정한 뜻에 섭지되는 출세간의 6바라밀을 얻어서 역시 배워야 할 것이다. 다음에 10지 가운데서 차별을 좇아서 각각 3아승기겁을 닦고 익혀야 할 것이다. 성문이 닦아 얻는 것과는 같지 않다. 왜냐 하면 성문은 3생(生) 가운데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뿌려, 다스리는 도를 성숙시킨다. 다스리는 도가 성숙되어짐으로 해서 세 번째의 생 가운데서 삼계를 해탈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다. 다음에는 이 차별을 닦는 가운데 계율 등의 3학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다음에 3학의 결과인 열반이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멸하여 위없는 보리와 3신 등을 깨우쳐야 하므로 이와 같은 순서를 설한다.
대승을 세운다면 이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연생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곧 아뢰야식 가운데 들어가고, 법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곧 3성에 들어가 섭지하고, 만약 얻음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곧 유식 가운데 들어간다.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곧 유식의 관처(觀處)에 들어가고, 만약 지(地)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곧 원인과 결과의 처[因果處]에 들어가고, 만약 3학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곧 10지처(地處)에 들어가고, 만약 멸함[滅]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3학처(學處)에 들어가고, 만약 위없는 보리와 3신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곧 무주처열반에 들어가 섭지한다. 만약 부처님의 체와 원인과 결과의 수(數)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와 같기 때문에 순서를 설한다. 다시 다른 설명이 있다.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 수 있고, 허망함이 없고 분별이 없는 지혜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성취한다고 한다. 네 가지 도리와 3량(量)53)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좇아 따른다고 한다. 먼저 좇아 따르지 않으면 뒤에 서로 어긋난다.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계(界)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의 의지이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55)가 있으며56)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57)
016_1103_a_12L此界無始時, 一切法依止, 若有諸道有,
及有得涅槃。
016_1103_b_02L 【釋】이에 아함(阿含)을 인용하여 아리야식의 체를 증명하고자 한다. 아함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아비달마를 말한다. 이 가운데 불세존께서 게송을 읊으셨다. 이는 곧 이 아리야식(阿梨耶識)이며, 계는 밝혀 앎[解]58)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 계에는 다섯 가지 정의(定義)59)가 있다. 첫째는 체(體)60)의 품류라는 정의이다. 모든 중생은 이 체의 품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체의 품류로 말미암아 중생은 다르지 않다. 둘째는 인(因)이라는 정의이다. 모든 성인의 법, 즉 4념처(念處) 등은 이 계를 연하여 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한다는 정의이다. 모든 성인에 의해 얻어지는 법신은 이 계의 법문(法門)을 즐거이 믿음[信樂]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수 있다. 넷째는 진실이라는 정의이다. 세간에 있으면서 깨뜨려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역시 다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간직한다는 정의이다. 만약 응한다면 이 법의 자성은 선하기 때문에 안[內]을 이루고, 만약 제외된다면 이 법은 비록 다시 서로 응하더라도 껍데기[㲉]61)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계에 관하여 불세존께서는 비구에게 설하셨다.
‘중생은 처음에는 요달할 수 없어서, 무명이 덮개[蓋]가 되고 탐욕과 애착에 얽매여서 혹은 흐르고[流] 혹은 연결되어[接] 어느 때는 니리야(泥梨耶)62)이고, 어느 때는 축생(畜生)이고, 어느 때는 아귀[鬼道]이며, 어느 때는 아수라도(阿修羅道)이며, 어느 때는 인도(人道)이며, 어느 때는 천도(天道)이다. 비구여, 너희들은 이와 같이 오랜 시간을 고통 받고 탐욕과 애착을 증익하고 항상 혈적(血滴)63)을 받는다.’ 이러한 증거로 말미암아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라는 것을 안다. 세존께서 경에 설하신 것처럼 ‘이 식의 계(界)가 근거하고 유지함[持]이고 처(處)이므로 항상 상응하여, 무위(無爲)의 항가(恒伽)의 모래알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의 공덕인 지혜를 서로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 세존께서 서로 응하지 아니하고 서로 떠나고 버리는 지혜는 유위의 모든 법의 근거이고 유지함이고 처이기 때문에 모든 법의 의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경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래장이 있다면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趣)가 있다고 말한다. 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존께서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고통에 대해 싫어함이 없고 열반에 대해 바라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열반을 얻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 계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라고 하는 것은 곧 인(因)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인을 세우지 않는다면 시작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법의 의지라는 것은 이 식(識)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의 인이 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의지라고 말한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가 있고 열반을 얻음이 있다’라는 것은 이 모든 법의 의지가 만약 있다면 도이며 곧 과보(果報)가 있으며 역시 이 과보로 말미암아 중생이 생을 받음이 있다.
016_1103_c_02L삿된 교설(敎說)과 바른 교설의 분별에는 다름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할 수 있어서 나중에 수승한 덕(德)을 얻게 되는 상품의 바른 행을 얻을 수 있다. 번뇌의 의지로 말미암아 극히 무거운 번뇌를 생하고 항상 번뇌를 일으킨다. 이 과보들의 네 가지 차별을 의지의 수승함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의지의 하열함이라고 한다. 생사 가운데에는 단지 도(道:趣)들만이 있고, 열반은 역시 있지 않다. 왜냐 하면 응지의 의지 가운데 번뇌가 있다면 곧 해탈도 있다. 다시 아함에 있어서 아뢰야식의 이름을 증명할 수 있다.
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고 머무는 일체종자식이다. 따라서 아리야64)라고 하니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016_1103_c_07L諸法依藏住, 一切種子識, 故名阿黎耶,
我爲勝人說。
【釋】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며, 머문다고 하는 것에서 두 번째의 구절이 첫 번째의 구절을 풀이한다. 즉 일체종자식은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아리야식이 서로 이어진다. 앞의 과보가 뒤에 인(因)을 이룬다. 따라서 아리야식이라고 한다는 것은 정의를 드러내어 이름을 증명함으로써 식을 이름하여 가리킨다.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고 하는 것에서 수승한 사람은 보살을 말한다. 보살 경계의 의지이면서 보살도를 장애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을 위하여 설한다.
【論】모든 유(有)65)가 생하는66) 부정품법(不淨品法)이 이 가운데 숨어 간직되어 과(果)가 되기 때문이다. 【釋】‘모든’이란 삼세(三世)를 말한다. 삼세 가운데의 취(取)가 부정품법을 생하고 있고 생할 수 있다.67) 다섯 가지 정품(淨品)을 뒤집은 것을 부정품이라고 한다.
016_1104_a_02L【論】또한 다시 모든 중생은 이 식 가운데 간직된 아상(我相)을 취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釋】간직한다는 것[藏]은 꼭 잡아 보존한다[執]는 의미이다. 아타나식(阿陀那識)과 의식에 있어서 중생이라는 이름을 설한다. 왜냐 하면 모든 중생은 아집(我執)이 없지 않다. 아집이 일어난다면 무슨 경계를 연하든지 간에 본식(本識)을 연하여 일어난다. 미세한 한 부류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지식(執持識)은 심오하고 미세하며,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 범부에서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하여지는 집착을 자아[我]로 삼는다.
016_1104_a_07L執持識深細, 法種子恒流, 於凡我不說,
彼勿執爲我。
【釋】앞에 인용한 아비달마의 게송이 증거가 된다. 이 가운데 다시 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다. 아비달마는 이론으로써 수승함이 되고 경은 가르침으로써 수승함이 된다. 가르침은 반드시 이론이 있어야 하고 이론은 반드시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 둘을 증거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증거를 떠난다면 정의를 세우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증거는 『해절경』68)으로부터 나온다. 부처님께서 광혜(廣慧)보살에게 이르셨다. “광혜여, 6도(道)의 생사에서 모든 중생은 거듭 생하는 무리[聚]를 좇아 있으므로 혹은 알로부터 태어나고, 혹은 태(胎)로부터 태어나며, 혹은 습으로부터 태어나고, 혹은 화(化)로부터 태어남을 받아서 이 가운데 신을 얻으며 성취한다. 처음 생을 받을 때에 일체종자식이 먼저 성숙하고 화합하여 크게 증장하고 원만하여지며, 두 가지 취(取)에 의거한다. 즉 색근(色根)69)에 의지함과 상(相)과 이름을 분별하는 언설의 습기(習氣)에 의지한다. 유색계 가운데는 두 가지 취함이 있고 무색계에는 두 가지 취함이 없다.
광혜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다나(阿陀那)70)라고도 하는데 왜냐 하면 이 본식으로 말미암아 신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설하여 아리야라고도 하는데, 왜냐 하면 이 본식은 신에 항상 숨어 간직되어 함께 이루어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혹은 설하여 질다(質多)71)라고도 하는데, 왜냐 하면 이 식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의 모든 진(塵)에 의해 생하여져 자라기 때문이다.
016_1104_b_02L광혜여, 이 본식을 연함[緣]에 의하여 이 식의 무리들이 생할 수 있다. 즉 안식(眼識) 내지는 의식을 말한다. 식이 있음에 의하여 안근이 바깥의 색진(色塵)을 연하여 안식이 생할 수 있다. 안식과 더불어 동일한 때에 같은 경계에서 분별이 있는 의식이 일어난다. 만약 하나의 안식이 일어난다면 이때에 한 부분의 다른 의식이 생하니, 안식과 더불어 같은 경계이다. 이 안식이 두 가지 식과 함께 하거나, 혹은 세 가지, 네 가지, 다섯 가지와 함께 일어난다면 이때 하나의 분별이 있는 의식이 5식(識)과 더불어 함께 경계를 연하여 생한다.
마치 큰 물의 흐름과 같다. 만약 하나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있다면 도달하는 즉시 하나의 물결이 일어난다.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만약 둘이거나, 많이 도달한다면 곧 많은 물결이 일어난다. 이 물은 항상 흘러서 없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또한 다시 청정한 둥근 거울의 표면에 그림자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만약 하나가 있어서 도달한다면 곧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그림자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만약 둘이거나, 만약 많이 있어서 도달한다면 곧 많은 그림자가 일어난다. 이 둥근 거울의 표면은 그림자를 바꾸어서 이루지 않으며 역시 손상하고 줄이지 않는다. 이 본식도 마치 물의 흐름과 거울 표면과 같다. 이 본식에 의하여 안식을 일으킬 수 있는 연(緣)이 하나가 있어서 도달한다면 곧 하나의 안식이 일어나고, 나아가 식을 일으킬 수 있는 인이 다섯 개가 있어서 도달한다면 곧 다섯 가지 식이 일어난다.
016_1104_c_02L광혜여, 이와 같이 보살은 법여지(法如智)에 의해 총명한 지혜가 있어서 의(意)ㆍ심(心)ㆍ식(識)의 비밀한 의미를 통달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이치에 맞고 양(量)에 맞는 이와 같은 의미로 말미암아 모든 보살이 의ㆍ식ㆍ심의 비밀한 의미를 통달할 수 있으므로, 글이나 말로써 설하신 것이 아니다. 광혜여, 모든 보살은 안에서나 밖에서도 여실하게 본식과 아타나식을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간직하고 머무는 것을 보지 못하며, 생하고 자라는 것들을 보지 못하며, 식과 안(眼)과 색(色) 그리고 안식(眼識)을 보지 못하며, 귀와 소리 그리고 이식(耳識)을 보지 못하며, 내지는 신(身)과 촉(觸) 그리고 신식(身識)을 보지 못한다. 광혜여, 모든 보살은 법여지에 의해 총명한 지혜가 있으며 의ㆍ식ㆍ심의 비밀한 의미를 통달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이치에 맞고 양에 맞는 이와 같은 의미로 말미암아 모든 보살이 의ㆍ식ㆍ심의 비밀한 의미를 통달할 수 있다고 글이나 말로써 설하신다.”
또한 다시 게송을 인용하여 경전에 설하여진 의미를 거듭 설명한다. 집지식(執持識)이 깊고 미세하다는 것에 대하여 어찌하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타나식이 되는가? 모든 색이 있는 모든 근(根)을 집지할 수 있다. 즉 의지가 있는 다섯 근과 상(相) 등의 습기를 집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식을 역시 아다나라고 한다. 깊고 미세하다는 것은 없애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정품법이 의지하여지고 머물게 되는 훈습을 생할 수 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생각생각이 생하고 멸하여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다. 범부에게 나는 설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범부인 사람은 깊고 깊은 행(行)이 없으며, 일체지를 구하지 않고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범부와 2승을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금하는 집착을 자아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의 상이 일어나 서로 이어져 증장된다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경에 의거하여 삿된 분별을 일으킨다면 곧 이식을 집착하여 자아로 삼는다. 삿된 집착을 일으킬까 두려워 나는 ‘그들을’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論】모든 색이 있는 제근[有色諸根]72)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어서 모든 생을 받는 취(取)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이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어 무너지지 않고 상실되지 않으며, 내지는 뒤의 시기에도 서로 이어져서 생을 받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하기 때문이다. 6도(道)의 신(身)은 모두 이와 같은 취이며, 이 취는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다나라고 이름한다.
016_1105_a_02L【釋】이제 도리를 세워 아다나라는 이름이 되었다. 도리란 일체의 색이 있는 모든 근을 잡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식이 색이 있는 다섯 근을 잡아 유지할 수 있음으로 해서 죽은 사람의 신(身)이 검게 붓고 허물어지는 것 등의 변이가 있는 위계에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만약 죽음의 위계에 도달한다면 아리야식은 다섯 근을 버려 떠난다. 이때 검게 붓고 허물어지는 등의 모든 상이 곧 일어난다. 따라서 이 식에 의해 한 기간 동안 잡아 유지되게 됨으로 해서 다섯 근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모든 생을 받는 취의 의지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 말은 앞의 질문에 거듭 답하는 것이다. 이 식은 중생이 생을 받고 있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할 수 있다. 이 취의 체성(體性)은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식이 생을 받고 있는 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생을 받고 있을 때에 모든 생하는 품류는 모두 이 식에 섭지된다. 한 기간 동안 받은 신도 역시 이 식에 섭지된다. 아리야식 가운데 신의 종자가 모두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로써 아리야식은 역시 아다나라고도 한다.
【論】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과 더불어 차제연(次第緣)73)의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멸한 식이 의가 되며, 또한 식이 생하는 의지로써 의(意)를 삼는다. 【釋】만약 마음이 앞에서 멸하고 뒤에서 생한다면 빈틈없이 뒤의 마음을 생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설하여 의라고 한다. 다시 의가 있어서 현재 생하고 있는 식의 의지를 만들 수 있으며, 현재의 식과 더불어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식을 생하는 연이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의가 된다. 현재 생하고 있다는 것은 식을 말한다. 이것은 곧 의가 식과 더불어 다르다는 것이다.
【論】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의[汚染意]가 있어서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항상 서로 응한다. 【釋】이것은 아타나식74)을 설명하고자 함이다.75) 무엇이 네 가지 번뇌인가?
016_1105_a_24L論曰。二有染污意。與四煩惱恒相應。釋曰。此欲釋阿陁那識。何者四煩惱。
016_1105_b_02L【論】첫째는 신견(身見)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名)이다. 【釋】아견(我見)은 자아를 집착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따라 아만이 일어난다. 아만이란 나를 집착함으로 해서 뽐내는 마음을 일으켜서 실제로 자아가 일어남이 없다. 아탐(我貪)을 설하여 아애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미혹이 온통 무명으로써 원인을 삼는다는 것을 이치[諦]라고 일컫는다. 실제의 인과를 마음이 미혹하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명이 된다.
【論】이 식은 그 밖의 다른 번뇌(煩惱)인 식(識)의 의지이다. 이 번뇌인 식은 첫 번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생하고, 두 번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釋】이 염오식76)은 첫 번째의 식77)에 의지하여 생하고 두 번째의 식78)으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차례로 이미 없어진 것을 설하여 의라고 한다.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하고자 하여도 생하는 의지와 더불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식을 더러움에 물든 식이라고 한다. 번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현재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역시 이 식이 있다.
【論】진(塵)과 차제(次第)를 연함으로79)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의라고 한다. 【釋】진(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식이라고 한다. 다른 것과 더불어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의라고 한다. 두 번째의 식은 아상(我相) 등이다. 혹은 분별의 주체[能分別]를 의지하기 때문에 의라고 한다.
【論】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釋】무슨 도리로써 이러한 정의를 세울 수 있는가?
016_1105_b_18L論曰。云何得知有染污心。釋曰。以何道理能成立此義。
016_1105_c_02L【論】만약 이 마음80)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81)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釋】독행무명의 상은 어떠한가? 만약 사람이 대하여 다스리는 도[對治道]를 얻지 못하였다면 참다운 지혜를 장애할 수 있는 미혹을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무명은 5식(識)에는 있지 않다. 왜냐 하면 사람이 5식에 있다면 장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대치도가 생하는 곳이라면 곧 장애의 처(處)인데, 더러움에 물든 의식에 역시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혹으로 말미암아서 단지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미혹과 더불어 서로 응하여 함께 행하므로 홀로 행한다는 이름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여섯 번째 식[第六識]이 독행무명으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고 말한다면 곧 여섯 번째 식은 한결같이 청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무명은 잠시도 쉬지 않는데,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여섯 번째 식으로써 선(善)을 이루는가?
항상 무명과 더불어 서로 응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은 선과 더불어 서로 응하여 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곧 과실이 있다. 만약 여섯 번째의 식이 항상 더러움에 물들여진다면 곧 대치도를 이끌어 생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어떤 다른 선한 마음과 서로 응한다고 말한다면 이 선한 마음이 대치도를 이끌어 생하기 때문에 염오심이 곧 멸한다. 만약 어떻게 설명한다면 곧 과실이 있다.
【論】5식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82)은 당연히 없다. 왜냐 하면 이 5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釋】마치 안식 등의 5식이 안 등의 5근을 동시에 의지로 삼는 것과 같이 의식도 반드시 동시에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밖의 다른 식을 세우는 것도 역시 이 의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안식 등이 의지가 없이는 생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의식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한다.
【論】또한 의명(意名)83)은 당연히 의(義)84)가 없어야 한다. 【釋】어찌하여 의(義)가 없는가? 앞에서 마음이 멸하여 의(意)가 된다고 정립하였다면 이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고 의(義)가 없다.85) 왜냐 하면 의(意)는 요별함으로써 정의를 삼는데, 없는 가운데서 어떻게 정립할 수 있겠는가? 이 식은 6식을 따라서 앞에서 이미 멸하였으니 이 의명(意名)은 얻을 수 없다. 체가 없기 때문에 요별할 수 없다.
016_1106_a_02L【論】또한 무상정(無想定)86)과 멸심정(滅心定)87)이 다름이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상정은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 있고, 멸심정은 그러하지 않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정(定)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釋】만약 사람이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고 정립한다면 이 사람은 무상정에는 곧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고 말할 것이고, 멸심정에서는 곧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정이 곧 다르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두 가지 정에서는 의식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두 정은 다름이 없다.
【論】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에 무상천에서는 한 시기에 흐름도 없고 상실함도 없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 가운데 아견과 아만 등이 없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시간 가운데 아집을 일으켜서 선과 악, 그리고 무기(無記) 가운데 두루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단지 악심만이 아집 등과 더불어 상응해서만이 아(我)와 아소(我所)인 이 미혹이 행할 수 있고, 선과 무기 가운데서는 곧 행할 수 없다. 만약 두 마음을 동시에 생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없으나, 만약 여섯 번째의 식과 서로 응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있다. 【釋】만약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없다면 무상천에 한 시기의 생 가운데 생하더라도 곧 아집과 아만 등이 없으며, 이 생은 다시 흐르고 상실함이 없어서 성인이 싫어하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싫어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 정(定)은 더러움에 물든 식이 있으며, 아집으로 말미암아 항상 서로 뒤따르니, 보시 등의 모든 선이 항상 아집에 의해 뒤섞이게 되고, 아집이 항상 뒤따른다는 것을 안다. 만약 무명이 없다면 곧 이러한 일은 없다. 만약 이 무명이 의지를 떠난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이 무명의 의지는 아타나식을 떠나서는 달리 체가 없다.
【論】독행무명과 이와 유사한 5식이 없고, 두 정(定)에 차별이 없고, 의명(意名)은 의(義)가 없다.
016_1106_a_23L無獨行無明, 及相似五識, 二定無差別,
意名無有義。
016_1106_b_02L 무상천에 아집이 없다면 한 시기에 생하여 흐름이 없고,
선과 악 그리고 무기 가운데 아집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016_1106_b_02L無想無我執, 一期生無流,
善惡無記中, 我執不應起。
염오심을 떠나, 있지 않다고 한다면 둘과 더불어 셋88)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모든 곳에 없다면 아집은 생할 수 없다.
016_1106_b_03L離污心不有,
二與三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得生。
진실한 의(義)를 깨달아 보면 흑장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곳에 행하므로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016_1106_b_04L證見眞實義, 惑障令不起, 恒行一切處,
名獨行無明。
【論】이 마음89)은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무기성에 포섭되며, 【釋】이 마음은 무명이 의지하는 것이다. 3성 가운데 이 마음은 무슨 성에 속하는가? 더러움에 물듦으로 말미암아 유부무기성에 속한다. 왜냐 하면 더러움에 물듦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듦이 있는가?
016_1106_c_02L【論】색계와 무색계의 미혹과 같이 유부무기(有覆無記)90)이다. 이 두 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에 소장(所藏)되기 때문에, 【釋】계는 생하는 성질로써 정의를 삼는다. 음욕(婬欲)과 단식(段食)91)의 탐욕을 떠나 색욕(色欲)으로 말미암아 생하기 때문에 색계라고 하고, 낮은 두 계의 탐욕을 떠나 무색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생하기 때문에 무색계라고 한다. 이 두계의 미혹은 8정(定)에 포섭되기 때문에 비록 여섯 번째의 거친 식(識)과 서로 상응하더라도 무기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 미혹이 만약 욕계의 산란한 마음[散心]에 있다면 의지가 거칠기[麤] 때문에 불선(不善)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 두 번째의 식92)과 서로 응한다면 비록 정에 있지 않더라도 의지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역시 불선이 아니다. 만약 색과 무색계에 있다면 의지가 비록 거칠더라도 8정(定)93)에 포섭된다. 마음이 부드럽고 매끄럽기 때문에 역시 불선이 아니며, 생사를 역시 생할 수 있어 선이 아닌 까닭에 유부무기법에 속한다. 두 번째의 식에 의해 일으켜진 미혹도 역시 이러하다. 의지가 미세하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며 생사의 인(因)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다.
【論】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두 번째의 체를 찾아도 얻을 수 없다. 【釋】두 번 째의 식은 첫 번째 식을 연하여 아집을 일으킨다. 만약 첫 번째의 식을 떠난다면 이 식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첫 번째의 식이 있어서 두 번째의 식을 성취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첫 번째의 식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다.
【論】따라서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의(意)로 삼아야 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종자를 삼아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할 수 있다. 【釋】첫 번째의 식을 떠나서는 두 번째의 식의 인(因)과 생기식(生起識)의 인이 되는 다른 식의 체(體)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심(心)이라는 이름을 설하셨다. 이 이름은 두 번째의 식이 인과 생기식을 가리킨다. 부처님께서는 의(意)라는 이름을 설하셨다. 이 이름은 첫 번째의 식을 가리킨다. 왜냐 하면 두 번째의 식과 생기식은 만약 앞의 것이 이미 멸하고 뒤의 식이 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첫 번째의 식을 의지하여 스스로의 품류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의근(意根)이라고 설한다.
016_1107_a_02L【論】어찌하여 이 의(意)를 다시 설하여 심(心)이라고 하는가? 많은 종류의 훈습종자가 모였기 때문이다. 【釋】첫 번 째의 식을 혹은 질다(質多)라고 한다. 질다라는 이름에는 어떠한 정의(定義)가 있는가? 여러 종류라고 하는 정의와 번식하여 키운다는 정의가 있다. 여러 종류라는 것은 스스로 열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증상연(增上緣)이고, 두 번째는 연연(緣緣)이고, 세 번째는 상(相)을 풀이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함께 짓는다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더러움에 물들이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업의 훈습이며, 일곱 번째는 인(因)이며, 여덟 번째는 과(果)이며, 아홉 번째는 도(道)이며, 열 번째는 지(地)이다. 이 정의 가운데 각각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여러 종류라고 한다. 번식하여 키운다는 것에는 세 가지 정의가 있다. 첫째, 이 열 가지 법이 모임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서로 이어져 오래 머물게 한다. 둘째, 이 마음이 모든 법의 종자를 섭지할 수 있다. 셋째, 훈습종자에 의해 번식하여 키워진 여러 가지 법이다. 종자란 공능(功能)94)의 차별이 있는 인(因)이며, 번식하여 키워진다는 것은 변이하여 삼계(三界)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는 첫 번째의 식을 역시 질다라고 이름하셨다.
【論】어찌하여 성문승은 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으면서 아리야와 아다나라는 이름은 설하는가? 미세한 경계에 섭지하여지기 때문이다. 【釋】이름과 체를 각각 묻고 있으며, 두 물음에 두루 통하여서 답한다. 이 식은 소지(所知) 가운데 가장 미세하여 2승(乘)에 의해 연하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식은 역시 경계이다. 만약 불과(佛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식을 통달하여야 한다. 이 식은 응지 등의 아홉 가지 정의가 의지하는 것을 간직하기 때문에 섭지하여진다고 말한다. 또한 보살은 미세한 경계를 간직하고 있어서 이 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세한 경계에 속하여 간직하고 섭지한다.
【論】왜냐 하면 성문인은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位階)가 없다. 【釋】왜냐 하면 성문승에서는 미세한 경계를 설하지 않는다. 성문인은 여래의 경계를 알기 위하여 정근(正勤)을 하지 않는다. 수행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기 때문에 모든 성문인의 혹장(酷障)은 고(苦) 등의 지혜95)로 말미암는 거칠고 얕은 관을 행하므로 없애버릴 수 있다.
【論】따라서 성문인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설을 떠나서 지혜를 성취함으로 해서 본래의 원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의하여 설하지 않는다. 【釋】모든 부처님께서는 성문인이 만족함을 아는 것[知足]을 조금 원하여 스스로의 흑장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신다. 이 장애는 이 지혜를 떠나서도 나머지 지혜로 말미암아 멸하여 없앰을 얻을 수 있어서 본래의 원을 이룰 수 있다. 다른 장애를 해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여래의 법신을 구하여 미세하고 깊고 깊은 도를 수행하고자 발원(發願)하지 않기 때문에 의하여 설하지 않는다.
【論】왜냐 하면 이 지혜를 떠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이러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釋】만약 깊고 깊으며 미세한 경계를 떠난다면 열 가지96)를 순차적으로 닦는다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이것을 떠난다면 마음을 닦아 번뇌를 쉽게 제거하고 법신을 쉽게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는 없다.
【論】『증일아함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간에서는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리야를 갈애(渴愛)하고, 아리야를 익히며, 아리야를 집착한다. 아리야를 멸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바른 법을 설하셨다. 【釋】첫 구절은 근본을 간략하게 설하고, 뒤에 세 구절로써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다시 자세히 이것을 설한다. 아리야를 집착한다는 것은 현재에 대한 것이고, 아리야를 익힌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것이며, 아리야를 갈애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다시 다른 해석이 있으니,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현재이다. 어찌하여 현재인가? 과거에 아리야를 집착함으로 해서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과거와 현재에 아리야를 거듭 익힘으로 해서 미래에 아리야를 갈애한다. 또한 이 네 구절의 정의가 다르지 않다고 집착한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네 구절이 있는가?
016_1107_c_02L결정장론에 설하여진 것과 같이 두 가지 갈애가 있으니, 있음의 갈애[有愛]97)와 없음의 갈애[無有愛]98)이다. 있음의 갈애는 삼계의 갈애이며, 없음의 갈애는 곧 삼계를 끊음을 애착하는 것이다. 희락이란 만약 사람이 욕계에 생하여 있다면 이미 얻은 진(塵)을 연하여 기쁨을 생하고, 얻지 못한 진을 연하여 즐거움을 생한다. 착이란 만약 사람이 색계에 생하여 있다면 색계의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99) 색계의 생과 색계의 진을 탐착한다. 이미 얻은 색계의 정(定)으로 말미암아 정에서 더러움을 생하고 아직 얻지 못한 정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그 가운데서 해탈하게 되리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착(着)이라고 설한다. 습(習)이란 만약 사람이 무색계에 생한다면 무색계의 탐욕을 떠나지 못하고, 먼저 욕계의 과실을 관하면서도 색계의 탐욕을 일으키고, 뒤에 색계의 과실을 관하여 색계의 탐욕을 버리고 무색계의 탐욕을 생한다. 이러한 탐욕은 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익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습이라고 설한다.
이 세 가지 이름에는 상견에 의하여 일어나는 갈애가 있다. 갈애란 만약 사람이 악을 많이 행한다면 고통의 과보를 받을까 두려워 혹은 단견을 집착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를 구하기 때문에 갈애라고 설한다. 이 하나가 곧 없음의 갈애이고 단견에 의하여 일어난다. 혹은 네 가지에 관하여 네 구절을 거꾸로 해석하기 때문에, 혹은 네 가지에 관한 갈애로, 즉 음식과 의복 그리고 머무는 것에 없음을 애착함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네 구절을 해석하기 때문에, 혹은 스스로 법을 잘 설명함[法辯]을 드러내어 제자들로 하여금 법을 잘 설명함의 인을 얻게 하고자 하여, 혹은 하나의 정의에 많은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여, 혹은 둔한 근기의 사람으로 하여금 만약 이 정의를 잊는다면 다른 이름으로 돌이켜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혹은 둔한 근기의 사람에게 이름을 거듭 설명함으로 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혹은 다른 지방의 제자로 하여금 만약 하나의 이름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네 구절을 설명한다. 이름은 다르나 의미는 같다.
【論】이제 아리야를 멸하여 다하는 것을 얻으며, 【釋】이것은 도의 결과를 밝힌다. 곧 다하여 생함이 없는 지혜이다.
016_1108_a_05L論曰。方得滅盡阿黎耶。釋曰。此明道果。卽是盡無生智。
【論】나아가 여래의 바른 법과 유사한 법을 받아들여 행한다. 【釋】가르치는 대로 행하는 것을 받아들여 행한다고 하고, 여래께서 설하신 이름과 구절과 글자[味]100)를 바른 법이라고 일컫는다. 이름과 구절 그리고 문자에 의해 제시되는 정의(定義)를 유사한 법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바른 법을 바른 교설이라고 하며, 유사한 법을 바른 행과 바른 얻음이라고 한다. 또한 바른 법은 아함으로써 체를 삼고 유사한 법은 얻어지는 것으로써 체를 삼는다.
【論】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해서 이 첫 번째로 희유한 불가사의한 법이 세간에 드러나니 본식과 같다. 이 『여래출세사종공덕경』101)이 다른 정의로 말미암아 성문승에게 이 식을 이미 드러내었다. 【釋】다른 정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의미이니, 여래께서 스스로 세간에 나온 공덕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지 아리야식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다. 이 식이 공덕과 서로 응하기 때문에 이 식을 설한다. 둘째는 다른 이름이니 여래께서는 단지 이름만을 설하고 정의는 설하지 않으셨다. 셋째는 다른 정의이니 미세한 경계에 섭지되는 것이니 2승에게는 마땅한 교설이 아니므로 단지 정의로 말미암아 서로 응하기 때문에 이름을 설하고 정의는 풀이하지 않으셨다.
4)지의(智顗)라고도 하며 진제삼장에게서 배웠으며 『섭대승론』 및 『구사론』의 번역을 도운 섭론학과 초창기의 한 사람.
5)큰 차이가 남을 말함.
6)진제삼장의 제자로 섭론종의 초기 학자.
1)이익ㆍ손해ㆍ험담ㆍ뒤에서 칭찬함[譽]ㆍ칭찬함[稱]ㆍ책망함[譏]ㆍ고통[苦] 그리고 즐거움 등의 여덟 가지 인식 현상을 말한다.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에 8풍(風)이라고도 한다.
2)현장 역에는 artha를 모두 의(義)로 표현하고 있으나, 진제는 의(義)를 진(塵)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artha가 인식에 대한 대상을 말하는 것이며, 불교의 철학체계가 승의제와 세속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대상에 대하여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철학체계상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된다. 진(塵)은 세속적인 분별에 대한 대상이며, 의(義)는 승의제인 무분별에 대한 대상이다. 즉 차별적인 분별에 의하여 정립되는 차별적인 대상을 진(塵)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무분별에 의해 실재(實在)가 있는 그대로 현현하는 실체적인 대상을 의(義)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식(識)에 대한 인식대상은 진(塵)이며 사(事)에 대한 인식대상은 의(義)라고 구분한다. 따라서 장애가 없다고 말한다. 이 의(義)를 나타낼 때 현장은 진실의(眞實義)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6권의 인사의(因事義)의 주석을 꼭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진제 역에 있어서는 의(義)의 용례가 정의(定義)라는 개념으로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반드시 구분하여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앞의 의(義)는 그대로 의로 번역하고, 뒤의 것은 정의 또는 의미로 번역하기로 한다. 이 1권의 9번 주석과 23번 주석에도 의를 거론하고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3)결정(決定)은 bhūta-niścaya, sad-bhūta, being ascertainment의 의미이다. 즉 실재(實在)를 확인한다는 의미다. 장(藏)은 간직하다, 섭지하다는 뜻으로 장식(藏識)의 의미로도 쓰이며, 장경(藏經)의 의미로도 쓰인다. 뒤에 ‘결정하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수다라를 세운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결정하는 지혜를 담은 장경의 의미로 해석함이 옳을 것 같다.
4)abhidhamma의 음사. 법(法)에 대하여 연구한다는 의미로 하나의 학파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원시불교에서는 3장(藏) 가운데 논장(論藏)을 의미하기도 한다.
5)sūtra의 음사(音寫). 경(經)이라고 한역한다.
6)범어로는 jñeya로 소지(所知), 응지(應知) 또는 소지경(所知境)으로 한역한다. 현대의 철학 용어로는 인식(認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석(釋)에 응지의지승상(應知依止勝相)의 표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응지란 정품과 부정품의 법을 말하니, 곧 3성이다’라고 설한다. 법이란 인식현상이며 정품과 부정품이란 일체의 인식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응지는 인식이라고 번역한다. 법의 개념에 관하여서는 역자의 졸고(拙稿), 「유식삼성설의 제법 및 법계관 연구」에서 자세히 법의 개념과 법계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7)법(法)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2부 경전을 의미하므로 교법(敎法) 또는 가르침의 의미이고 둘째는 인식현상을 말한다(이 논석의 7권에 열 가지 명(名)의 차별을 설하는 부분 참조). 특히 두 번째의 의미는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눌 수 있으니, 유위법의 세속제의 인식현상을 말하며, 무위법의 승의제의 인식현상을 말한다. 뒤의 21법 주석 참조. 자세한 설명은 역자의 졸고(拙稿), 「유식삼성설의 제법 및 법계관 연구」 참조.
8)vinaya의 음사(音寫). 율장(律藏)이라고 한역한다.
9)응지는 앞의 6번의 주석에서 인식(認識)이라는 것을 보았다. 무분별지를 드러내는 것은 실체적 대상인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뒤에 전도됨이 없는 의를 가려서 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식하는 의를 섭지하므로 보살장 또는 성문장이라고 한다. 2번 주석과 23번 주석 참조.
10)2번 주석 참조. 실재를 확인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지혜를 얻게 하여 의에 대한 의심을 없앤다.
11)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말한다.
12)단견의 외도는 낙행을 많이 행하기 때문에 단견의 변을 말한다(본 논서 제15권 참조).
13)상견의 외도는 고행을 많이 행한다. 따라서 상견을 가리킨다.
14)신견과 변집견 그리고 사견을 취하여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15)밑에 설명하고 있는 계학과 심학과 혜학을 말한다.
16)현장 역에서는 증상계학이라고 한역하고 있다. 보살의 계율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17)현장 역에서는 증상심학이라고 현역한다. 선정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18)현장 역에서는 증상혜학이라고 한역한다. 무분별지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19)누(漏)라고도 한다. 마음의 흐름, 즉 취(取)의 작용이 있어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20)처(處)는 범어로 sthāna이다.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맞닿아 인식을 일으키는 장(場)이다. 곳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면 너무 장소의 의미만이 드러나고 정신적인 상태라는 의미가 소멸되기 쉬우므로 그대로 사용한다.
21)dharma. 법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인식현상이라는 뜻이며, 둘째는 가르침 또는 교설(敎說)의 의미이다. 첫째의 경우는 다시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뉘어지는데, 유위법은 행(行) 등의 대상정립적인 형성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부정품의 인식현상이며, 무위법은 그러한 작용 없이 유식(唯識)의 순수직관에 의해 현현하는 정품의 인식현상이다. 또한 법이라는 인식현상은 인식을 일으키는 주체의 작용과 이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형상(形相)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이 점은 훗설의 현상학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점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여기에서 법을 나열한 내용을 보면 인식의 주체적 작용과 드러나는 형상을 모두 나열하고 있다. 5음부터 4식까지는 부정품의 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뒤의 정(定)부터 끝까지는 정품의 법을 설명하고 있다.
22)12처(處)를 말한다.
23)2번 주석과 9번 주석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도를 생하고 미혹을 멸하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분별지의 작용에 의해 의가 현현하는 것이니, 보살장이 인식한 의(義)를 섭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事)는 의타성의 5사(事) 가운데 정지(正智)의 작용을 말한다. 뒤에 5권의 「분별장」 가운데 5사의 주석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24)여기에서는 두 번째의 의미로 가르침 내지는 교설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25)비구와 비구니의 구족계를 분류하는 항목이다.
26)우다나는 udāna의 음사(音寫)로 현장은 올타남(嗢柁南)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게송이라는 의미이다. 4법인(法印)을 말한다. 첫째,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인식현상은 자성이 없다). 연기하여 일어나는 유위법은 허망분별로 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제행무상(諸行無常:모든 행온은 항상함이 없다). 연하여지는 경계가 정하여 있지 않고 수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의식 내에서 대상을 정립하는 형성작용이 항상하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셋째, 일체개고(一體皆苦:모든 것이 고통이다). 이렇게 생하여지는 모든 번뇌는 속박과 장애이기 때문에 모두가 고통이라는 것을 밝힌다. 넷째, 열반적정(涅槃寂靜). 따라서 모든 번뇌를 끊어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열반에 드는 것을 밝힌다.
27)dharmatā. 진제는 법의 자성을 부정품의 경우에는 법이(法爾)라고 번역하고, 정품의 경우에는 법성으로 번역하고 있다. 2권 46번 주석 참조.
28)원문에는 소수소죄불갱고범(小隨小罪不更故犯)으로 되어 있으나, 불갱범고(不更犯故)로 번역한다.
29)dhāraṇị의 음사(音寫).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 가운데 신비스러운 힘을 가졌다고 믿는, 주문(呪文)의 성격을 갖는 장문(長文)을 말한다.
30)보살과 마하살을 말한다. 마하살(摩訶薩)은 보살의 존칭이다.
31)앞의 4번의 주석 참조.
32)인식의 주체[依止], 즉 인식주관 작용의 수승한 모습을 말한다. 아뢰야식과 아타나식 등을 바르게 세우려는 것이다.
33)분별성(分別性)ㆍ의타성(依他性)ㆍ진실성(眞實性)을 말한다. 현장은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ㆍ의타기성(依他起性)ㆍ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에 자세히 설명된다.
34)돌덩어리를 말한다. 즉 무분별지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마치 목석(木石)과 같다는 것을 폄하하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뒤의 지과(智果)는 무분별후득지를 말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35)인식이 곧 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되어진 상(相)을 통해서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식이 곧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삼성설을 통해 인식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36)인식을 일으키는 의식작용의 양상(樣相)을 드러내어 전의(轉依)를 통해 유식이 이루어짐을 설명한다.
37)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말한다.
38)학의 과인 적멸은 전의(轉依)이며, 이 장(章)에서 여섯 가지 전의를 설명하고있다. 전의란 본의인 의타성이 승의제의 생무성으로 전변하는 것을 말한다.
39)일체의 생사(生死)가 끊어진 적멸(寂滅)로서 전의이며, 법신이다. 열반에 머무는 것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주처라고 한다. 뒤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40)수면(隨眠)이란 범어로는 anuṣī로서 to sleep with 또는 adhere closely to의 의미이다. 즉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잠복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현대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과 유사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41)śūrañgama의 음사(音寫).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한다. 건행(健行) 또는 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한역한다. 부처님의 삼매 가운데 하나이다.
42)허공장(虛空藏)이라고 하기도 한다. 허공장삼마디를 말한다. 범어로는 gagana-gañja-ādi-samādhi이다.
43)자성신과 법신은 같은 말이나, 엄격하게 구분한다면 법신이 무상(無相)의 형상(形相)으로 이루어진 신이라면 자성신은 무분별한 의식이 작용하는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석(釋)에서 자성신은 법신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경지에서는 능취인 견(見)와 소취인 상(相)이 없는 유식의 경계이기 때문에 둘을 구분할 수 없다.
44)견도 이상의 보살의 위계를 10지로 나눌 경우에 높은 위계를 대지(大地)라고도 한다.
45)saṃbhāra. 수행에 갖추어야 할 선근과 공덕을 말한다. 즉 요구되는 자질 또는 소양(素養).
46)함께 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은 부처님만이 설하신 것이고, 소승은 모든 외도들에 의해 함께 설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47)sarvajña. 불지(佛智)의 다른 이름이다.
48)12연기설을 말한다. 첫 번째 시작함이 없는 무명을 연하여, 두 번째 행(行:대상을 정립하는 형성작용)이 생하며 행을 연하여, 세 번째 식(識:대상을 구분하여 식별하는 작용)이 생하며 식을 연하여, 네 번째 명색(名色:언설로써 훈습되어진 名과 유분의 훈습으로 생하여진 色)이 생하며 명색을 연하여, 다섯 번째 6입(入:여섯 가지 대상성이 있는 根이 생하며 6입을 연하여, 여섯 번째 촉(觸:根과 境 그리고 식이 서로 화합하는 것)이 생하며 촉을 연하여, 일곱 번째 수(受:6근을 통해 感受하는 것)가 생하며 수를 연하여, 여덟 번째 애(愛:갈애)를 생하며 갈애를 연하여, 아홉 번째 취(取:인하여 대상을 취착하는 의식의 작용)을 생하며 취를 연하여, 열 번째 유(有:구체적이고 차별적인 대상)를 생하며 유를 연하여 열한 번째 생(生:일어나는 것)을 생하며 생을 연하여, 열두 번째 노사(老死:늙고 죽음, 근심과 슬픔, 고뇌 등의 고통)가 생한다. 이것은 중생의 인식현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생하는 것인가를 내보임으로써 모든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어서 공(空)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49)12연생을 설명한 것은 중생의 인식현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 것인가를 설명함으로써 모든 유위의 인식현상이 허망하여 자성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이 연기설을 관함으로써 모든 인식현상이 공(空)하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을 총명한 지혜라고 말한다.
50)현장 역에는 선교(善巧)로 표기하고 있다.
51)겁(劫)은 kalpa로 무한히 긴 시간을 나타내며, 아승기(阿乘祇)는 asaṃkhya로 셀 수 없는 수(數)를 말한다. 자세한 의미는 권11의 본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52)바라문교에서는 자재천에 의해 세간이 모두 창조된다고 믿는다.
53)중량과 비량 그리고 성언량을 말한다. 뒤에 자세한 주석이 있다.
54)『섭대승론』에 이와 유사한 경전의 이름으로 아비달마대승장경, 대승아비달마, 아비달마대승수다라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이 경전이 실제로 존재하여 그 경전에서 많은 구절을 인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앞에서 아비달마를 설하는 것처럼 경ㆍ율ㆍ논 3장 중 대승의 논장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다.우정백수(宇井伯壽) 저(著), 『섭대승론연구(攝大乘論硏究)』, 암파서점(岩波書店), 1982, 동경 p. 28 이하 또는 장미아인(長尾雅人) 저(著), 『섭대승론(攝大乘論), 화역(和譯)と주해(注解)』, 강담사(講談社), 1982, 동경 p. 28 이하 참조.
55)6도(道)를 말한다. 현장은 6취(趣)라고 한역한다.
56)부정품법, 즉 세속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57)정품법, 즉 승의제(勝義諦)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58)밝혀서 아는 것, 즉 대상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59)뒤에 법계의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거의 유사한 설명이 나온다. 전체적인 의미를 종합하여 보면 계가 체를 이루어 종자가 되어 법을 생할 수 있으므로 법신을 이룬다. 따라서 진실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정의는 뒤에 법계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60)체는 본식이라고 하는 인식의 주체를 말하기도 하며, 실성(實性)이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허망한 대상성인 색은 체를 이루지 못하고 계(界)가 체를 이룬다.
61)껍데기라는 것은 바깥의 속박하고 있는 인식의 테두리, 즉 장애를 이루는 세간을 비유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62)niraya의 음사. 니리(泥梨) 또는 니려(泥黎)라고도 한다. 지옥(地獄).
63)모태(母胎)에서 생을 받는 씨앗을 말한다.
64)진제 역의 초반부에는 아려야(阿黎耶)식으로 표기하다가 조금 뒤부터는 아리야(阿梨耶)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혼란을 막기 위해 아리야로 통일하기도 한다.
65)bhava. 유(有)는 연기설에 입각하여 취(趣)를 연하여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말한다. 진(塵)이 6근에 상응하는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대상이며, 색(色)은 안근에 상응하는 대상 일반을 말한다. 취(取)의 작용이 일어나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취에 상응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대상이란 것은 의식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고 인식현상[法]에 드러난 구체적인 대상을 말하므로 즉 의식 내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기초이다. 불교에서는 의식 밖의 사물에 대하여서는 거론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66)일체유생(一切有生)을 ‘모든 생함이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우정백수 著, 『섭대승론연구』, p. 219. 장미아인 著, 『攝大乘論 和譯と注解』, p. 81. 참조), 이 번역은 ‘모든 유(有)가 생하는’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물론 범어로 읽는다면 ‘생함이 있는’이라는 번역이 맞다. 그러나 범어본이 한역본을 다시 범어로 환원한 것이란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언어적인 의미보다는 세친의 석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67)우종백수는 석(釋)의 이 부분을 “삼세 가운데 생하고 생할 수 있는 부정품법을 취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뒤에 집지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처음으로 생을 받을 때에 즉 색근과 상(相)과 명(名)을 분별하는 언설습기에 의지함이 있는 두 가지 취에 의거하여 모든 종류의 식이 먼저 성숙하여 화합하며 크게 늘어나고 원만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취(取)라고 하는 것은 색근에 의지하므로 색(色)을 취하고 언설습기에 의지하여 명(名)을 취하므로 생하는 것이지 부정품법을 취하지는 않는다. 유루법(有漏法)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취(取) 등의 작용에 의해 생하여진 인식현상[法, 일단 인식현상이라고 이해하고 뒤에 자세히 거론한다.]을 말하므로 취가 부정품법을 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성(無性)의 석(釋)에서도 “유(有)가 생(生)하는 것이란 유위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취가 생한다고 말하지 않고 유(有)가 생한다고 말하는가?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인식현상인 법에 드러난 대상을 유(有)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가 생한다고 말하여도 틀리지 않는다.
68)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제3에 나온다.
69)유색제근(有色諸根)을 말한다. 뒤의 주석과 제14권 「석지차별승상」의 2장의 주석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70)ādāna의 음사(音寫). 아뢰야식이니 아타나식이니 하는 것은 본식(本識)을 기능상으로 분류하는 것이지, 서로 다른 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색신을 집지하는 본식을 아타나식라고 하고, 법신을 집지하는 식을 아마라(阿摩羅)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다니식을 염식이라고 하고, 아마라식을 구경의 정식(淨識)이라고 한다.
71)citta의 음사(音寫). 마음[心]으로 한역한다.
72)범어로는 rūpīndriya이다. 색이 있는 제근이라고 한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물질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으로 번역하고 있으나(長尾雅人, 앞의 책, p. 86 참조), 이것은 색을 물질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다. 색은 물질이 아니고 대상 또는 대상성이다(뒤의 권13에서 色陰轉依를 설명하는 부분 참조). 앞에 세친의 석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이 근이 대상성을 갖는 것은 집지식과 유분(有分)의 훈습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근에 대상성이 부가되어, 취를 일으켜 색식에서부터 촉식까지를 생할 수 있다.
73)현장은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논서의 2권 제7 「연상장」에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74)ādāna-vijñāna. 집지식이라고 한역하고 염식(染識)이라고도 한다. 모든 근을 집지하여 대상성을 섭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집지식이라고 한다. 즉 이 식 때문에 유색제근이 가능하다.
75)이 염오의(染汚意)가 아타나식이라는 설명이 아니고 아타나식이 염오의에 의해 성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아타나식은 아리야식과 같이 본식의 작용이다. 염오의는 7식의 작용이다. 뒤에 5권에서도 ‘남은 것은 곧 아타나식이고 생기하는 것은 곧 6식이며, 변이하는 것은 7식이 되니, 곧 본식의 상모이다’고 아타나식과 7식인 의(意)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76)아타나식을 말한다.
77)의(意)의 작용 가운데 첫 번째인 틈 없이 멸하여 뒤의 식을 생하는 의지가 되는 작용을 말한다.
78)의(意)의 작용 가운데서 두 번째인 더러움에 물드는 의(意)의 작용을 말한다.
79)진과 차제를 연한다는 것은 연연(緣緣)과 차제연(次第緣)을 말한다. 연연과 차제연은 2권 말미에서 설명하고 있다.
80)현장 역에는 의(意)로 되어 있다. 이 마음이란 집지식을 말한다. 독행무명으로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心)이 옳은 것 같다.
81)avidyā-āveṇiki. 불공무명이라고도 한다. 탐욕 등의 열 가지 수면(隨眠)과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 무명을 말하며, 7식과 상응한다.
82)6식, 즉 의식에 의해 생하는 인식현상[法]을 말한다.
83)범어로는 nirukti이다. 뜻으로는 어원적인 해석이라는 뜻, 즉 지칭하는 실재(實在)가 없이 그 단어로써만 뜻을 갖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추상명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장 역에서는 훈석사(訓釋辭:字意로 이해하는 단어)로 한역하고 있다. 이 추상명사는 의식 속에 그 지칭하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 마음이 없다면 그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84)여기에서는 정의(定義)라는 개념으로 쓴 것이 아니고 실체적 대상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이러한 용례는 진제 역에서 진(塵)과 상관하여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진(塵)이 분별에 상응하는 차별적인 대상이라면 의(義)는 무분별에 상응하는 실체적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추상명사는 외부에 지칭하는 실재가 없이 단지 마음에 그 의(義)가 있는 것인데 만약 마음이 없다면 추상명사의 실체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85)앞에서 이 마음이 멸하여 의(意)가 되어, 다시 뒤의 마음을 생하는 의지가 된다는 설명을 하였다. 마음이 멸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때 마음의 정체(正體)가 소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설명을 하는 것이다. 즉 물결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그 물 자체는 그대로 있음과 같다. 추상명사는 실체적 사물 없이 마음 속에 그 대상을 갖는 것인데 마음이 멸하여 없으니 이 추상명사는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86)상(想)이라고 하는 표상작용이 없는 선정을 말하며, 색계의 4정 가운데 최상품이므로 색계의 무상천의 5음이 과보가 된다고 한다(『구사석론』 대정장 29권, pp. 183~184 참조). 여기에서는 염오식인 집지식이 있어서 유색제근을 집지함이 있기 때문에 색계의 선정이다.
87)수(受)와 상(想)을 멸하였기 때문에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 한다. 무색계의 유정천(有頂天)의 선정으로서 유정천의 4음(陰)이 과보가 된다. 염오식인 집지식이 없으므로 무색계이며, 멸심정이라고 한다.
88)둘은 독행무명과 5식과 유식한 6식의 법을 말하며, 셋은 무상정과 멸심정의 차별이 없음과 의명 그리고 무상천에서 흐름과 상실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89)아타나식, 즉 염오식을 말한다.
90)아리야식은 무부무기이지만 아타나식은 유부무기이다. 같은 무기의 성질이지만 아리야식은 번뇌 등의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덮음이 없으며, 아타나식은 번뇌 등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덮음이 있다.
91)4식(食) 중의 하나. 단식은 욕계의 질료이다. 식이란 스스로의 근을 이익되게 하는 4대(大)라고 한다. 즉 비근(鼻根)에 대한 향과 같이, 근이 식을 일으킬 수 있도록 제공되는 질료이다(『아비달마구사석론』 진제 역, 대정장 29권 p. 212 참조).
92)전식이 사멸(謝滅)하여 의(意)가 되어 뒤의 식을 생할 때에 바로 뒤의 식을 두 번째의 식이라고 한다.
93)여덟 가지 정이란 색계의 4선(禪:初禪ㆍ第二禪ㆍ第三禪ㆍ第四禪)과 무색계의 4정(定:空無邊處定ㆍ識無邊處定ㆍ無所有處定ㆍ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94)범어로는 śakti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는 의미이다. 즉 식변이(識變異)를 일으킬 수 있는 효과적이고 잠재적이며 정신적인 힘이다.
95)고제(苦諦) 등의 4제를 관하는 지혜를 말한다.
96)이 논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열 가지 수승한 상(相)을 말한다.
97)bhava-tṛṣṇā.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갈애이다.
98)vibhava-tṛṣṇā. 개별적인 대상이 없는 것에 대한 갈애이다.
99)아직 색계를 이욕하지 못하였다고 직역할 수 있으나, 이렇게 의역하였다.
100)명구미(名句味)는 명구문(名句文)이라고도 한다. 범어로는 nāma-pada-vtañjana. 명과 구절 그리고 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