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6_1161_c_01L섭대승론석 제7권
016_1161_c_01L攝大乘論釋卷第七

세친 해석
진제 한역
변상섭 번역
016_1161_c_02L世親菩薩釋
陳天竺三藏眞諦譯


3. 석응지입승상(釋應知入勝相) ①
016_1161_c_04L釋應知入勝相第三之一

1) 정입상장(正入相章)
016_1161_c_05L正入相章第一
【論】이와 같이 이미 응지승상(應知勝相)1)을 설하였다. 어떻게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2)을 알아야 하는가?
【釋】이 품은 열 장(章)이 있다. 첫 번째는 정입상(正入相)이고, 두 번째는 능입인(能入因)이며, 세 번째는 입경계(入境界)이고, 네 번째는 입위(入位)이며, 다섯 번째는 입방편도(入方便道)이고, 여섯 번째는 입자량(入資糧)이며, 일곱 번째는 입자량과(入資糧果)이고, 여덟 번째는 이지용(二智用)이며, 아홉 번째는 이지의지(二智依止)이고, 열 번째는 이지차별(二智差別)이다.
016_1161_c_06L論曰如此已說應知勝相云何應知應知入勝相釋曰此品有十章正入相二能入人三入境界四入位五入方便道六入資糧七入資糧果八二智用九二智依止十二智差別
모든 인식현상을 응지(應知:인식)라고 하며, 3성(性)은 모든 인식현상의 뛰어난 모습이라고 하며, 또한 다시 3성을 인식이라고 한다.3) 똑같이 하나의 무성이기 때문에 뛰어난 상이라고 한다. 또한 다시 인식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품(淨品)이고, 둘째는 부정품이다. 정품이란 즉 의타성(依他性)에 분별이 없는 것이며, 부정품은 즉 의타성에 분별이 있는 것이다. 의타에 세 가지 자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4) 첫째는 의타성이고, 둘째는 의타성 가운데의 분별이고, 셋째는 의타성 가운데의 무분별진여이다. 나머지 정의는 분별장 가운데 설한 것과 같이 앞에서 이미 그 의미를 드러냈다.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이 행함이 있다면 응지상(應知相)5)에 들어갈 수 있다. 이제 마땅히 이 정의를 설하여야 할 것이다. 이 물음은 단지 들어감[入]의 체상을 묻는 것일 따름이고, 응지와 뛰어난 상을 묻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시 이 물음은 유식관 가운데서 무슨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가 되는가를 묻기 때문에 이 물음에 답한다.
016_1161_c_11L一切法名應知三性名諸法勝相次三性名應知同一無性故名勝相復次應知有二種一淨品二不淨品淨品者謂依他性無分別不淨品者謂依他性有分別於依他有三種性應知一依他性二依他性中分別依他性中無分別眞如餘義如分別章中說前已顯此義若人有如此行得入應知相今當說此義此問但問入體相不問應知及勝相復次此問問唯識觀中緣何法爲境故答此問
016_1162_a_02L【論】다문(多聞)6)에 훈습된 의지(依止)는
【釋】대승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다문에 훈습된 이 훈습이 있다는 것을 설하니, 곧 의지이다. 또한 별도로 의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신(身)의 체가 서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한다.7)
016_1161_c_22L論曰多聞所熏習依止釋曰於大乘法中多聞所熏習此熏習有說卽是依止又別說依止者謂身體相續
【論】아리야식에 섭지되지 않으면서,
【釋】이 다문의 훈습은 아리야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리야식에 섭지되지 않는다.
016_1162_a_03L論曰非阿黎耶識所攝釋曰顯此多聞熏習是阿黎耶識對治故非阿黎耶所攝
【論】아리야식과 같이 종자를 이루며,
【釋】아리야식이 모든 부정품의 인식현상의 인이 되기 때문에 종자가 되는 것과 같이 다문의 훈습도 역시 이와 같다. 모든 정품의 인식현상을 생하는 인이 되어 아리야식과 같이 종자를 이룬다. 어떤 인식현상이 다문의 훈습으로써 종자가 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016_1162_a_06L論曰如阿黎耶識成種子釋曰如阿黎耶識爲一切不淨品法因故成種子多聞熏習亦爾爲一切淨品法生因如阿黎耶識成種子法以多聞熏習爲種子爲答此問故
【論】정사유(正思惟)에 의해 섭지되며,
【釋】이 이하의 네 가지 인식현상이 모두 다문의 훈습으로써 종자가 된다. 만약 각관사유(覺觀思惟)8)함에 있어서 대승의 다문훈습에 의해 이 각관이 이루어진다면 삿된 사유와 치우친 사유[偏思惟]를 떠난다. 정사유가 본성의 품류가 되기 때문에 정사유에 의해 섭지된다고 말한다.
016_1162_a_10L論曰正思惟所攝釋曰此下四法竝以多聞熏習爲種子若覺觀思惟依大乘多聞熏習生此覺觀離邪思惟及偏思惟以正思惟爲性類故正思惟所攝
【論】가르침과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는 상에 의해 생하여지며,
【釋】가르침과 같다는 것은 12부의 방등교(方等敎)9)를 일컬으며, 실체적 대상[義]과 같다는 것은 방등교에 의해 설명되는 이치[理]를 말한다.10) 마음의 상은 이러한 이치의 가르침과 같이 현현한다. 이러한 이치의 가르침이 연연(緣緣)이 되어 각관(覺觀)분별을 생한다.
016_1162_a_15L論曰似法及義顯相所生釋曰似法謂十二部方等教似義謂方等教所詮之理心相似此理教顯現此理教爲緣緣生覺觀分別
【論】취하여진 것[所取]과 같은 종류11)이며,
【釋】만약 이러한 각관이 일어난다면 이 취하여진 것과 같은 것을 체상으로 삼는다.12) 이 두 구절은 인식의 상분(相分)을 드러낸다.
016_1162_a_19L論曰似所取種類釋曰此覺觀若起似此所取以爲體相此二句同顯識相分
【論】견(見)이 있으며,
【釋】이 각관은 요별할 수 있으므로 곧 식(識)의 견분이다. 이러한 정의가 식의 두 가지 인식현상, 즉 상식(相識)과 견식(見識)을 성립시킨다.
016_1162_a_21L論曰有見釋曰覺觀能了別卽是識見分此義成立識二法謂相識及見識
016_1162_b_02L【論】의언분별(意言分別)이다.13)
【釋】의식이 각관사유하는 것은 단지 언어를 연하여 분별할 따름이고, 달리 실체[義]가 있어서 연할 수는 없다. 또한 반드시 이름에 의해 모든 인식현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언분별이라고 이름하며, 다문훈습의 의지가 이 인식현상의 인(因)이 된다.
016_1162_a_23L論曰意言分別釋曰意識覺觀思惟但緣言分別無別有義可緣又必依名分別諸法故言意言分別多聞熏習依止爲此法因

2) 능입인장(能入人章)
016_1162_b_04L能入人章第二
【論】어떤 사람이 응지(應知:인식)의 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
【釋】이것은 무슨 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이 유식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관행은 네 가지의 힘이 있다. 보살이란 어떠한 모습인가?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資糧)을 바르게 얻음이다. 이 자량은 어떠한 단계를 닦아 원만함을 얻게 되는가? 네 가지의 힘이 있다. 첫째는 인(因)의 힘이고, 둘째는 선지식(善知識)의 힘이며, 셋째는 정사유의 힘이고, 넷째는 의지(依止)의 힘이다.
016_1162_b_05L論曰何人能入應知相釋曰此問修何觀行人能入唯識觀人是菩薩觀行有四種力菩薩者何相善得福德智慧二種資糧此資糧以何次第修令得圓滿有四種力一因力二善知識力三正思惟力四依止力
【論】대승의 다문훈습이 서로 이어지고,
【釋】소승의 다문을 떠나게 되기 때문에 대승이라 한다. 끝없이 생하는 곳에서 하나의 생함도 없음을 드러내어 거듭 닦으므로 다문훈습의 마음이 서로 이어진다. 이것을 인의 힘[因力]이라고 한다.
016_1162_b_11L論曰大乘多聞熏習相續釋曰離小乘多聞故云大乘顯非一生於無窮生處數習多聞熏習心相續名因力
【論】헤아릴 수 없이 세상에 나오신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여 높이 섬김을 이미 얻으며,
【釋】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이 사람은 부처님에 의해 바른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여, 가르침대로 바르게 수행하기 때문에 공경하여 높이 섬긴다고 말한다. 먼저 이미 이와 같이 공경하여 높이 섬김을 얻기 때문에 선지식의 힘이라고 이름한다.
016_1162_b_15L論曰已得承事無量出世諸佛釋曰過數量諸如來出現於是人依佛聽受正教如教正修行故名承事先已得如此承事故名善知識力
016_1162_c_02L【論】정위(正位)를 결정코 믿고 즐거워함[信樂]에 이미 들어가며,
【釋】만약 사람이 대승 가운데서 즐거이 믿는다면, 악지식(惡知識) 등에 의해 바뀌고 무너뜨려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코라고 말한다. 믿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믿음에 무궁한 공덕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미 믿음이 있다면 인을 얻는 수행을 구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10신(信)으로부터 10회향(廻向)14)까지가 정위를 믿고 즐거워함이다. 지금 밝혀진 위계가 단지 10회향을 취하여 결정코 믿어 즐거워하는 것을 사유(思惟)의 힘이라고 한다. 대승의 다문훈습이 이 힘의 원인이다.
016_1162_b_19L論曰已入決定信樂正位釋曰若人於大乘中信樂非惡知識等所能轉壞故名決定信有三種信有二信可得三信有無窮功德已有信求修行得因故名爲樂從十信至十迴向是信樂正位今所明位但取十迴向決定信樂名思惟力乘多聞熏習爲此力因
【論】선근을 잘 성숙시키고 닦아 익히고 늘리고 키움으로 해서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올바르게 얻는다.
【釋】만약 사람이 이미 한결같이 결정코 믿어 즐거워한다면 즐거워하는 법을 얻어 간절하게 공경하여 관행법(觀行法)을 닦는다. 만약 관행법을 닦는다면 공덕이 있는 선근을 늘리고 키운다. 이와 같은 사유력의 힘으로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성숙시킴으로 말미암아 점차 성숙해진다. 이 복덕과 지혜가 만든 의지를 사용하여 초지(初地)15)에 들어감을 얻기 때문에 의지의 힘이라고 이름한다. 이 네 가지의 힘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드러낸다.
016_1162_c_03L論曰由善成熟修習增長善根是故善得福德智慧二種資糧釋曰若人已一向決定信樂爲得所樂法慇懃恭敬觀行法若修觀行法增長功德善根如此由思惟力是善成熟福德智慧資糧次第成熟用此福德智慧作依得入初地故名依止力此四種力顯能入人

3) 입경계장(入境界章)
016_1162_c_11L入境界章第三
【論】모든 보살은 어는 곳에서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가는가?
【釋】이 물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어느 곳이 유식의 경계이냐를 묻는다. 둘째는 어느 곳이 유식의 위계이냐고 묻는다.
016_1162_c_12L論曰諸菩薩於何處入唯識觀釋曰此問有二意一問何處是唯識境界二問何處是唯識位
【論】가르침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봄으로써 상을 드러내므로 의언분별(意言分別)하는 대승의 인식현상16)의 상이 생하여진다.
【釋】이 인식현상은 유식관이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경계라고도 한다. 의언분별이란 마음이 각관사유하는 것이다. 이 사유는 두 가지 상이 있으니, 첫째는 견식이 있어서 상이 되기 때문에 견이 있다고 설명하고, 둘째는 상식(相識)이 있어서 상이 되니, 12부의 대승의 가르침과 같이 그리고 대승의 가르침에 의해 설명하여지는 이치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일컬으며, 설명하여 상이 있다고 이름한다. 대승의 인식현상의 상이 생하여진다고 하는 것은 대승의 가르침이 인이 되기 때문에 생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경계의 체를 드러내 의언분별이라고 일컫는다. 경계의 상을 드러내어 견이 있고 상이 있다고 말하며, 경계의 인을 드러내어 대승의 인식현상의 상이라고 일컫는다.
016_1162_c_15L論曰見似法義顯相意言分別大乘法相所生釋曰此法名唯識觀持亦名境界意言分別者是心覺觀思惟思惟有二相一有見識爲相故說有二有相識爲相謂顯現似十二部大乘教及似大乘教所詮理說名有大乘法相所生者大乘法爲因故得生此中顯境界體謂意言分別境界相謂有見有相顯境界因謂大乘法相
016_1163_a_02L
4) 입위장(入位章)
016_1163_a_02L入位章第四
이러한 의언분별에는 네 가지 위계가 있으니, 이 네 가지 위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016_1163_a_03L此意言分別有四位爲顯此四位故
【論】원락행지(願樂行地)에 들어간 사람은 들음[聞]17)을 따라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釋】의언분별이 있다는 것은 원락행지 가운데에 있다. 왜냐 하면 모든 보살이 있다는 것은 단지 모든 인식현상이 오직 식만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들어 가르침을 받아서, 이러한 가르침에 의지하여 들은 것을 따라서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인식현상이 오직 식만이 있다는 이치 가운데에서 의언분별이 생한다. 이러한 원락으로 말미암아 의언분별하기 때문에 보살이 이미 유식관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앎을 짓는 것을 유식의 원락위(願樂位)에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016_1163_a_04L論曰於願樂行地入謂隨聞信樂故釋曰有意言分別在願樂行地中以故有諸菩薩由但聽聞一切法唯有識依此教隨聞起信樂心於一切法唯有識理中意言分別生由此願樂意言分別故說菩薩已入唯識觀作如此知名入唯識願樂位
【論】견도(見道)는 이치와 같이 통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釋】이와 같은 방편으로 보살은 유식(唯識)의 견위(見位)에 들어간다. 이제 이 방편을 설명하여야 하는데, 곧 이치와 같이 통달함이다. 이 의언분별은 나타나는 상과 같으나, 실제로 이와 같이 있지 않고 오직 식만이 있다는 것을 통달한다. 이 식은 인식현상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며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도 아니다. 이와 같이 통달하는 것을 유식의 견위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016_1163_a_11L論曰見道謂如理通達故釋曰如此方便菩薩入唯識見位今當說此方便卽如理通達此意言分別如顯現相通達實不如是有但唯有識此識非法非義非能取所取如此通達名入唯識見位
【論】수도(修道)는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釋】의언분별은 도를 닦는 것 가운데 들어감을 드러낸다. 이제 이 방편을 설명하겠다. 이 의언분별은 인식현상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며 인식하는 주체도 아니고 인식되는 객체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모든 세 가지 장애를 대하여 다스린다. 이것을 유식의 수위(修位)에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지혜와 경계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 수도는 견도와 다르지 않다. 만약 이와 같다면 견도와 수도의 차이는 어떠한가? 지난날에는 진여를 보지 못했는데 이제 처음으로 봄을 얻는 것을 견도라고 이름하고, 먼저 이미 진여를 보았으나 뒤에 다시 거듭 관(觀)하는 것을 수도라고 이름한다.
016_1163_a_17L論曰修道謂能對治一切障故釋曰意言分別顯入修道今當說此方便此意言分別非法非義非能取非所取如此觀察能對治一切三障是名入唯識修位此修道與見道不異由智由境故若爾見修二道差別云何昔未見眞如今始得見名見道先已見眞如後更數觀名修道
016_1163_b_02L또한 3승에 두루 미치는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견도라고 이름하고, 단지 보살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수도라고 이름한다. 또한 관(觀)이 원만하지 않아도 물러나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견도라 이름하고, 관이 원만하지 않으면서도 물러나 나올 수 있다는 의미로 수도라고 이름한다. 또한 단지 공통된 경계만을 관하는 것은 견도라 하고, 공통된 경계와 개별적인 경계를 갖추어 관하는 것은 수도라고 이름한다. 또한 사(事)가 성립하지 않는 것을 견도라고 하며, 사가 성립하는 것을 수도라고 이른다.
016_1163_b_02L又能除三乘通障名見道除菩薩障名修道又觀未圓滿無退出義名見道觀未圓滿有退出義名修道又但觀通境名見道備觀通別境名修道又事不成名見道事成名修道
【論】구경도(究竟道) 가운데라는 것은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釋】구경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배움이 있는 구경(究竟)이고, 둘째는 배움이 없는 구경이다. 이 위계는 가장 청정한 지혜가 생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장애도 제거하여 없어져서 남음이 없기 때문에, 구경위(究竟位)라고 이름한다. 모든 지(地) 내지 여래지(如來地)는 모두 이 구경의 정의가 있다. 만약 사람이 이 네 위계에 들어가면 무슨 경계를 연(緣)하는가?
016_1163_b_07L論曰究竟道中謂出離障垢最淸淨故釋曰究竟道有二種有學究竟二無學究竟此位最淸淨智慧生處故最微細障滅盡無餘故故名究竟位諸地乃至如來地皆有此究竟義若人入此四位緣何境界
【論】모든 인식현상은 오직 식만이 있다. 설명하는 것과 같이 문혜를 따라서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이치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釋】이 말은 네 가지 위계의 경계를 드러낸다. 어찌하여 네 가지 위계의 경계가 될 수 있다고 하는가? 모든 인식현상은 즉 위(爲)18)가 있고 위가 없으며,19) 유(流)20)가 있고 유가 없으며,21) 4계(界)22)와 3승(乘)의 도의 결과 등이다. 이것들과 같은 인식현상은 모두 오직 식만이 있다. 왜냐 하면 모든 인식현상은 식으로써 상이 되고 진여가 체가 되기 때문이다. 방편도가 식으로써 상이 된다면, 만약 견도에 들면 진여로써 체가 된다. 이러한 경계에 의하여 문혜[聞]를 좇아 믿고 즐거워하여 신락위(信樂位)에 들고, 이치와 같이 통달하여 견위(見位)에 들어감을 얻으며,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어서 수위(修位)에 들어감을 얻으며,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구경위에 들어감을 얻는다.
016_1163_b_12L論曰一切法實唯有識如說隨聞信樂故如理通達故能對治一切障故出離障垢最淸淨故釋曰此言顯入四種位境界云何得爲四位境界一切法謂有爲無爲有流無流及四界三乘道果等如此等法實唯有識何以故一切法以識爲相眞如爲體若方便道以識爲相若入見道以眞如爲體依此境界隨聞信樂入信樂位如理通達得入見位能對治一切障得入修位出離障垢得入究竟位

5) 입방편도장(入方便道章)
016_1163_b_23L入方便道章第五
이러한 방편으로 인하여 보살은 네 위계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제 마땅히 이 정의를 드러내 설명한다.
016_1163_b_24L因此方便菩薩得入四位今當顯說此義
016_1163_c_02L【論】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釋】이것은 8처(處)에서 지니는 선근의 힘이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묻는다. 무엇을 선근의 힘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8처라고 하는가? 선근의 힘에는 네 가지가 있다.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첫째는 인(因)의 힘이고, 둘째는 선지식의 힘이며, 셋째는 정사유의 힘이며, 넷째는 의지의 힘이다.
016_1163_c_03L論曰云何得入 釋曰此問欲顯八處持善根力爲入方便何者爲善根力何者爲八處善根力有四種一因力二善知識力三正思惟力依止力如前所明
【論】선근의 힘을 지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釋】있지 않으면 생하게 하고, 이미 있으면 늘리고 키우게 하기 때문에 보살의 선근을 지닌다고 이름한다. 혹은 설명하여 6바라밀이라 하고, 혹은 설명하여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행이라고 한다. 다스림마저도 능히 깨뜨려서 다스림에 막히지 않기 때문에 힘을 지닌 선근의 힘이라고 말한다. 8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8처라고 하는가?
016_1163_c_07L論曰由善根力持故釋曰未有令生已有令增長故名持菩薩善根或說爲六波羅蜜或說爲福慧二行能破對治非對治所遮故名爲力持善根力應知有八何者爲八
【論】세 가지 모양의 연마심(鍊磨心)이 있기 때문이며, 4처의 장애를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며, 가르침과 실체를 연하여 경계가 되고 틈이 없이 닦고 공경하여 사마타비발사나(奢摩他毘鉢舍那:定慧)를 닦아 방일함이 없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곧 3처이다. 이 세 가지 모양의 연마심은 세 가지의 퇴굴심(退屈心)을 대하여 다스릴 수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자신을 가볍고 천하게 보는 등의 퇴굴심이다. 이러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첫 번째의 연마심을 드러낸다. 왜냐 하면 모든 보살이 위없는 보리가 넓고 크며 깊고 깊어서 닦기 어렵고 얻기 어렵다고 듣고서는 “내가 이제 어떻게 이렇게 얻기 어려운 위없는 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이 곧 물러나 굴복한다. 이러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름지기 첫 번째의 연마심을 닦아야 한다.
016_1163_c_12L論曰由有三相鍊磨心故由滅除四處障故緣法義爲境無閒修恭敬修奢摩他毘鉢舍那放逸故釋曰此卽三處此三相鍊磨心能對治三種退屈心何者爲三輕賤自身等退屈心爲除此心故顯第一鍊磨心何以故有諸菩薩聞無上菩提廣大甚深難修難得我今云何能得如此難得無上菩提由有此執故於自身心則退屈爲除此心故須修第一鍊磨心
【論】시방세계를 세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釋】이것은 위없는 보리가 한 곳을 정하여 닦아 얻는 것이 아니고, 처(處)를 따라 닦고 배워서 모두를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016_1163_c_22L論曰十方世界無數量故釋曰此顯無上菩提非定一處修得隨處修學悉皆可得
016_1164_a_02L【論】세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도(人道)23)에 있는 중생이
【釋】이것은 위없는 보리 등의 부류를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몸을 가벼이 천하게 여길 수 없음을 드러낸다.
016_1163_c_24L論曰不可數量在人道衆生釋曰此顯無上菩提等類皆得是故此身不可輕賤
【論】순간 순간에
【釋】이것은 위없는 보리를 얻는 데 정하여진 시각이 없으며, 때를 기다려서 닦아 얻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016_1164_a_04L論曰剎那剎那釋曰此顯得無上菩提無有定時非待時修得
【論】위없는 보리를 증득(證得)한다. 이것을 첫 번째의 연마심(鍊磨心)이라고 이름한다.
【釋】이것은 보리가 주어질 수 있는 것들24)이 아니어서, 반드시 정성스럽게 닦아서 마침내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연마심으로 말미암아 방편 가운데 첫 번째의 퇴굴심이 곧 멸하여 생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얻을 수 있는 방편을 가벼이 천하게 여기는 퇴굴심이다. 이러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두 번째의 연마심을 드러낸다. 왜냐 하면 보살이 이와 같은 연마심을 일으킴이 있으므로 이러한 보시 등이 보살의 자량이 된다. 만약 보살이 의욕하는 것을 떠난다면 곧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의욕을 나 같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보시 등의 법은 나 같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러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방편에서 마음이 곧 물러나 굴복한다. 이러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드시 두 번째의 연마심을 닦아야 한다.
016_1164_a_06L論曰證得無上菩提是名第一鍊磨心釋曰此顯菩提無可與必假懃修方可證得由此鍊磨心於方便中第一退屈心則滅不生輕賤能得方便退屈心爲除此心故顯第二鍊磨心何以故由有菩薩作如此心此施等是菩提資糧若離菩薩意欲則不可得此意欲我等云何應得故施等法非我等所能行由有此執故於能得方便心則退屈爲除此心故須修第二鍊磨心
【論】이러한 바른 의지(意志)로 말미암아
【釋】이것은 체상에 비유하여 방편을 드러낸다. 삼세의 모든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은 바른 의지를 얻는다면 이것은 진실한 방편의 체이다.
016_1164_a_16L論曰此正意釋曰此顯方便譬體相世諸菩薩若得如此正意是眞方便體
016_1164_b_02L【論】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을 반드시 생하여 자라게 함을 얻으니, 내가 믿고 즐거워하여
【釋】이것은 공능에 비유하여 방편을 드러낸다. 공능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평등의 공능이고, 둘째는 생함의 공능이며, 셋째는 자라게 함의 공능이다. 이러한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 만약 모든 바라밀을 생하고 자라게 한다면 구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평등의 공능이라고 이름한다. 있지 않으면 있게 하는 것을 생하는 공능이라고 이르며, 이미 있으면 원만하게 하는 것을 자라게 하는 공능이라고 이른다. 삼세의 모든 보살의 방편의 체와 공능이 결정코 둘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것과 같아야 한다. 왜냐 하면 내가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곧 그것의 바른 의지(意志)이며, 비유하여진 방편의 체가 된다. 이 체는 이미 정하여졌다. 왜냐 하면 움직이지 않고 잃지 않기 때문이다.
016_1164_a_18L論曰施等諸波羅蜜必得生長是我信樂釋曰此顯方便譬功能功能有三種一平等功能二生功能三長功能由此正意若生長諸波羅蜜不具足故名平等功能未有令有名生功能已有令圓滿名長功能如三世諸菩薩方便體及功能決定無二我等亦應同彼何以故我之信樂卽彼正意爲所譬方便體此體已定以故無動失故
【論】이미 견고하게 머무름을 얻은 것이다.
【釋】이것은 곧 움직이지 않고 잃지 않은 의미를 해석한다. 탐욕과 인색함 등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견고하다고 이름하며, 소승과 악지식 등의 삿된 교화(敎化)가 물러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016_1164_b_05L論曰已得堅住釋曰此卽釋不動失義貪悋等所不能壞故名堅小乘惡知識等邪化能令退故名住
【論】나는 이러한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나아가 원만함을 얻으므로 곧 어렵지 않게 된다. 이것을 두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釋】이것은 비유하여진 세 가지 공능을 드러낸다. 이러한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 나는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익힌다는 것은 평등의 공능을 밝히며, 나아가 얻는다는 것은 생하는 공능을 밝히며, 원만하다는 것은 자라게 하는 공능을 밝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공능은 반드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곧 어렵지 않음이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시 ‘이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믿음과 즐거움을 일컫는다. 믿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실제로 있음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며, 셋째는 무궁한 공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실제로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자성이 있어서 불성(佛性)에 머문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불성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무궁한 공능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과(果)인 불성에 이른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믿음을 이미 일으켜서, 방편을 얻을 수 있는 보시 등의 바라밀 가운데서 수행을 하고자 구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016_1164_b_08L論曰由此正意修習施等波羅蜜進得圓滿則爲不是名第二鍊磨心釋曰此顯所譬三種功能由此正意我修習施等波羅蜜明平等功能進得明生功能圓滿明長功能此三功能必定可得故說則不爲難復次由此正意者有何義謂信及樂信有三處一信實二信可得三信有無窮功德信實有者信實有自性住佛性信可得者信引出佛性信有無窮功德者信至果佛性起三信已於能得方便施等波羅蜜中求欲修行故名爲樂
016_1164_c_02L이러한 믿음과 즐거움이 바른 의지의 체가 된다. 이러한 믿음과 즐거움을 얻음으로 말미암아서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행하므로 곧 어렵지 않게 되어서, 구경(究竟)에는 원만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다시 보살은 바른 의지가 있어서, “나는 6도(度:六波羅蜜)의 마음을 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탐욕과 인색함 등의 모든 장애를 나와 떠나므로 모든 바라밀의 장애를 가로막을 수 있어서 멸진하여 남음이 없다. 따라서 큰 공용으로 인(因)하지 않고도 6도가 쉽게 원만할 수 있다. 6도가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가 자연히 성취된다. 내가 이미 이렇게 바른 의지에 견고하게 머무름을 얻었기 때문에 6도를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두 번째의 연마심으로 말미암아 방편 가운데서 두 번째의 퇴굴심이 곧 멸하여 생하지 않는다.
016_1164_b_20L此信及樂爲正意體由得此信樂修行施等波羅蜜則不爲難能令究竟圓滿復次菩薩有正意謂我有能生六度出離貪悋等諸障能遮諸波羅蜜滅盡無餘是故不因大功用六度易可圓滿由六度圓滿無上菩提自然成就我已得此堅住正意是故修行六度不以爲難由第二鍊磨心方便中第二退屈心則滅不生
셋째는 마땅히 얻게 된다는 것을 의심하는 퇴굴심이다. 이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세 번째의 연마심을 드러낸다. 모든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고 넓고 크나큰 공덕을 사량함에 있어서, 보살은 위없는 보리가 가장 얻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내어, 한 순간에 마음을 가로막는 것이다. ‘금강심(金剛心)은 생사심(生死心)이 없음을 말하며, 이 마음을 제거해야 역시 마땅히 얻을 수 있을 텐데, 이러한 정의는 생각하기도 어렵다’라는 이런 집착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를 얻음에 있어서 마음이 곧 물러나 굴복한다. 이러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름지기 세 번째의 연마심을 닦아야 한다.
016_1164_c_06L三疑應得退屈心爲除此心故顯第三鍊磨心何以故有諸菩薩思量諸佛甚深廣大功德菩薩作是念無上菩提最難可得一剎那心所障謂金剛心無有生死心除此心亦應可得此義難思由有此執於得無上菩提心則退屈爲除此心故須修第三鍊磨心
【論】만약 사람이 많은 선법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釋】사람은 곧 범부와 2승(乘)이다. 범부에게는 보시와 계율과 수행의 세 가지 선법(善法)이 있다. 이 선법을 혹은 거듭 치우쳐서 닦고 혹은 원만하게 닦는다. 치우쳐서 거듭 거듭 닦든지 원만하게 닦더라도 보시와 계율과 수행은 곧 많은 선(善)을 이룬다. 이 선의 품류(品類)가 많기 때문에 2승은 37품의 선법이 있다. 틈이 없이 닦고 공경하여 닦음으로 말미암아 곧 많은 선을 이룬다. 역시 품류가 많기 때문이다.
016_1164_c_13L論曰若人與衆善法相應釋曰卽凡夫及二乘凡夫有施戒修三種善法此善法或數偏修或圓滿修偏數數修及圓滿修施戒修則成衆以品類多故二乘有三十七品善由無閒修及恭敬修則成衆善以品類多故
016_1165_a_02L【論】뒤에 명(命)을 버렸을 때 모든 생을 받는 가운데에서 애착할 수 있는 부유함[富]과 즐거움[樂]이 자연히 이루어진다.
【釋】만약 범부가 먼저 보시를 만족하게 닦으면 뒤에 명(命)을 버렸을 때, 곧 사람 가운데 태어나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 일은 어긋남이 없다. 만약 먼저 만족하게 계율을 지키면 나중에 명이 끊어졌을 때 곧 하늘 가운데 태어나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 일은 어긋남이 없다. 만약 선정(禪定)을 만족하게 닦으면 나중에 명을 버렸을 때 곧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 일은 어긋남이 없다. 이것은 죽음으로 떨어짐에 있어서 과보를 얻는 것을 밝힌다. 만약 2승이 37품을 만족하게 닦으면 나중에 범부의 수명을 버리고 성인의 수명을 얻어서, 6신통 등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 일은 어긋남이 없다. 이것은 위계를 옮김에 있어서 과보를 얻음을 밝힌다.
016_1164_c_20L論曰後捨命時於一切受生中可愛富樂自然而成釋曰若凡夫先修施滿足後捨命時卽生人中受可愛富樂果此事無差若先持戒滿足後捨命時卽生天中受可愛富樂果此事無差若修定滿後捨命時卽生色無色界受可愛富樂果此事無差此就死墮明得果若二乘修三十七品滿足後捨凡夫壽得聖人壽受六通等可愛富樂果此事無差此就移位明得果
【論】이 사람이 장애가 있는 선(善)을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가 오히려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어찌하여 나는 원만한 선과 장애가 없는 선을 얻는다고 하며, 모든 뜻과 같이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을 마땅히 이루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것을 세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釋】10지(地) 가운데서 복덕과 지혜인 두 가지 품류의 선법을 잘 생하여 키우기 때문에 원만심이라고 이름한다. 추중(麤重)25)의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는 금강정(金剛定)에 의해 깨뜨려 무너뜨려지기 때문에 금강정은 나중에 모든 장애를 떠날 수 있다. 전의(轉依)26)가 이루어질 때를 장애가 없는 선이라고 이름한다. 불과(佛果)를 부유함과 즐거움의 자재라고 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라고 일컬으며, 덕(德)을 갖추기 때문에 부유함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부유함과 즐거움은 일체의 뜻과 같이 애착할 만한 인식현상이다.
016_1165_a_07L論曰是人得有㝵善此義尚應成云何我得圓滿善及無㝵善一切如意可愛富樂而當不成是名第三鍊磨心釋曰於十地中好生長福德智慧二品善法故名圓滿心麤重難破障金剛定所破壞故金剛定後能離一切障轉依成時名無㝵善佛果名富樂自在故稱樂具德故稱富此富樂是一切如意可愛法
소승에 있어서는 지혜가 끊어지는 것이 뜻과 같음이 되고, 은덕이 애착할 만하다는 것이 된다. 대승에 있어서는 법신(法身)이 부유함과 즐거움이 되고, 응신(應身)이 뜻과 같음이 되며, 화신(化身)이 애착할 만하다는 것이 된다. 이 세 가지가 위없는 보리를 섭지하여 다하므로 ‘모든’이라고 말한다. 앞에 말한 ‘명을 버린다’는 것은 앎의 장애[智障]를 떠나서 지장(智障)이 이미 멸한다는 것을 비유한다. 어찌하여 나는 뜻과 같고,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이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는가? 세 번째의 연마심으로 말미암아 방편 가운데 세 번째의 물러나 굴복하는 마음[退屈心]이 곧 멸하여 생하지 않는다.
016_1165_a_16L若約小乘以智斷爲如意恩德爲可愛若約大乘身爲富樂應身爲如意化身爲可愛此三攝無上菩提盡故言一切前言捨命者譬離智障智障旣滅云何我如意可愛富樂而當不成由第三鍊磨心於方便中第三退屈心則滅不生
【論】이 가운데 게송을 읊는다.
【釋】게송 가운데 다시 앞의 세 가지 정의를 드러낸다.
016_1165_a_22L論曰此中說偈釋曰偈中更顯前三義
論曰
016_1165_b_02L
【論】인도(人道) 가운데의 중생은
생각 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처소(處所)가 세어 헤아림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열한 마음이 없다.
016_1165_a_24L人道中衆生
念念證菩提
處所過數量
故無下劣心

착한 마음의 사람은 믿고 즐거워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을 생할 수 있고
뛰어난 사람은 이러한 정의를 얻기 때문에
보시 등을 닦을 수 있다.
016_1165_b_03L善心人信樂
能生施等度
勝人得此意
故能修施等

만약 착한 사람이 죽을 때
곧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는다면
멸위(滅位)27)의 원만하고 깨끗한 선(善),
이러한 정의는 어찌하여 없는가?
016_1165_b_04L若善人死時
卽得勝富樂
滅位圓淨善
此義云何無

【論】인도(人道:六道 중의 하나) 가운데의 중생은
【釋】이것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무등과(無等果)28)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가볍고 천시하지 말아야 함을 드러낸다.
016_1165_b_05L論曰人道中衆生釋曰此顯同類能得無等果故不應輕賤自身
【論】생각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釋】이것은 시각이 정하여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인(因)을 닦고 과(果)를 얻음이 모두 때가 정하여져 있지 않다. 이렇기 때문에 항상 모름지기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때때로 닦을 수 없지 않으니 인을 닦음이 이미 이러하며, 과를 얻음도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마땅히 시간이 장애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가볍고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016_1165_b_07L論曰念念證菩提釋曰此顯時無修因及得果竝無定時是故恒須勤修無時而不可修修因旣爾得果亦然是故不應謂時有障而輕賤自身
【論】처소(處所)가 세어 헤아림을 넘어서니
【釋】처소가 정하여져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처(處)를 따라 인을 세워 모두가 성립함을 얻을 수 있다. 과를 얻음도 역시 이와 같다.
016_1165_b_11L論曰處所過數量釋曰顯處所無定隨處立因皆可得成得果亦爾
【論】따라서 천하고 열등하다는 마음[下劣心]이 없다.
【釋】이것이 앞의 세 가지 정의를 밝혀 해설하기 때문에, 물러나 굴복하는 마음이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我]는 공능(功能)은 없지만 마땅히 위없는 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이 천하고 열등하지 않다.
016_1165_b_13L論曰故無下劣心釋曰此明解前三義故退屈心不生謂我無有功能應得無上菩提故心不下劣
016_1165_c_02L【論】착한 마음의 사람은 믿고 즐거워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度]을 생할 수 있다.
【釋】악한 마음과 무기(無記)29)의 마음은 믿고 즐거워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은 산만하고 무기의 마음으로 보시 등의 행을 행한다. 다시 외도들은 악한 마음으로 보시 등의 행을 행한다. 이러한 악함과 무기를 떠남이 되기 때문에 착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위없는 보리를 얻고자 구하는 사람을 착한 마음의 사람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보시 등이 착함이다. 만약 착한 마음이 없이 인이 된다면 곧 보시 등의 행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모름지기 뛰어난 인으로써 뛰어난 과를 생한다. 뛰어난 인이 곧 믿고 즐거워함이다. 믿고 즐거워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을 생한다. 이 두 구절은 세 가지 정의를 드러낸다. 첫째는 증상연(增上緣)을 드러내고, 둘째는 동류인(同類因)을 드러내며, 셋째는 등류과(等流果)를 드러낸다.
016_1165_b_16L論曰善心人信樂能生施等度釋曰惡心及無記心能信樂何以故有諸以散漫無記心行施等行復有諸外道以惡心行施等行爲離此惡無記故說善心求得無上菩提者名善心人復次施等是善若無善心爲因則不成施等行是故須勝因以生勝勝因卽信樂由信樂故生施等諸此兩句顯三義一顯增上緣二顯同類因三顯等流果
【論】뛰어난 사람은 이러한 의지를 얻기 때문에 보시 등을 닦을 수 있다.
【釋】모든 보살을 뛰어난 사람이라고 이른다. 이러한 의지는 곧 보살의 바른 의지이며, 믿음과 즐거움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보시 등을 닦음에 있어서 가능함[能]이 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보시 등을 닦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016_1165_c_03L論曰勝人得此意故能修施等釋曰諸菩薩名勝人此意卽是菩薩正意謂信及樂由有此意於修施等有能是故我修施等不以爲難
【論】만약 착한 사람이 죽을 때
【釋】착한 사람은 두 가지가 있다. 곧 범부와 2승이다. 범부는 보시를 닦고 계율을 닦고, 2승은 도품(道品)을 닦는다. 죽을 때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곧 죽어서 타락함과 위계를 옮김이다.
016_1165_c_07L論曰若善人死時釋曰善人有二種卽凡夫及二乘夫修施修戒二乘修道品死時亦有二種卽死墮及移位
【論】곧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釋】역시 두 가지가 있다. 범부는 인(人)ㆍ천(天)과 범세(梵世)30)의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으며, 2승은 6신통(神通)의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는다. 만약 이러한 인을 세우면 반드시 정하여 과(果)를 받는다.
016_1165_c_10L論曰卽得勝富樂釋曰亦有二種凡夫得人天梵世富樂二乘得六通等富樂若立此因必定得果
【論】멸위(滅位)의 원만하고 깨끗한 선, 이러한 의미는 어찌하여 없는가?
【釋】나는 이제 10지(地)의 복덕과 지혜 그리고 번뇌의 흐름이 없는 도품(道品)을 닦는다. 모든 지에 있어서 원만하고 도품에 있어서 깨끗하다. 금강심을 멸한 뒤에 멸위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위없는 보리의 과이며,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이라고 이름한다. 나는 결정코 마땅히 이것을 얻었는데 어찌하여 없다고 하는가?
016_1165_c_13L論曰滅位圓淨善此義云何無釋曰我今修十地福慧及無流道品圓約諸地淨約道品金剛心滅後名爲滅位此卽無上菩提果名勝富樂我決定應得此云何言無
【論】네 번째의 처의 장애를 없애 버렸기 때문에
【釋】이것은 곧 8처(處) 가운데 네 번째의 처이다. 이 네 가지 장애를 보살은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이제 이것을 설명하겠다.
016_1165_c_18L論曰由滅除四處障故釋曰此卽八處中第四處此四種障菩薩皆應滅除今當說之
【論】그리고 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의 사유(思惟)를 버려 떠났기 때문에 삿된 사유가 멸한다.
【釋】2승(乘)의 사유는 고(苦)와 무상(無常) 등의 생사의 과실(過失)을 거듭 관하는 것을 말하며, 열반적정의 공덕을 거듭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은 단지 자신만을 사랑하여 중생에 이익되는 일을 버린다. 만약 이러한 관을 떠나면 삿된 사유를 버린다고 이른다.
016_1165_c_20L論曰捨離聲聞獨覺思惟故邪思惟滅釋曰二乘思惟謂數觀苦無常等生死過失及數觀涅槃寂靜功德此觀但愛自身捨利益衆生事若離此觀名滅邪思惟
016_1166_a_02L【論】대승 가운데서 믿는 마음을 생하고 결정코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모든 삿된 뜻과 의혹을 멸한다.
【釋】대승의 매우 깊고 넓고 큰 법 가운데서 진제(眞諦)31)에 대해 믿는 마음을 생하고, 속제(俗諦)32)에 대해 결정코 깨달으려는 마음을 생하기 때문에 진여에 대하여 다스리지[撥]33) 않는다는 뜻을 버리며, 여래께서 설하신 바인 12부 경전에 있어서 문장과 같이 의미를 판별하는 뜻을 버리기 때문에34) 모든 삿된 뜻과 의혹을 멸한다. 또한 다시 대승 가운데서 안립(安立)35)하여진 인식현상의 모습에 의하여 여래는 3성(性)36)을 설하셨다. 이것은 곧 모든 인식현상의 무성(無性)37)이다. ‘모든 인식현상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본래 고요하고 맑아서 자성열반(自性涅槃)이므로 이와 같은 것들은 있지 않는 품류이다’고 하는 것은 분별성에 의거하여 설한다.
016_1166_a_02L論曰於大乘中生信心及決了心故滅一切邪意及疑釋曰於大乘甚深廣大法中於眞諦生信心於俗諦生決了心故於眞如捨非撥意於如來所說大乘十二部捨如文判義意故滅一切邪意及復次於大乘中依所安立法相來說三性謂一切法無性一切法不生不滅本來寂靜自性涅槃如是等無有品類是依分別性說
만약 마술ㆍ신기루ㆍ꿈 속의 영상ㆍ그림자ㆍ거울의 형상ㆍ메아리ㆍ물 속의 달ㆍ변화를 설한다면 이것은 의타성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진여(眞如)ㆍ실제(實際)ㆍ무상(無相)ㆍ진실(眞實)ㆍ법계(法界)ㆍ공(空) 등을 설한다면 이것은 진실성에 의거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3성의 설명 가운데서 믿지 못함과 의심이 생할 수 없기 때문에 삿된 뜻과 의혹이 멸하였다고 설한다.
016_1166_a_11L若說幻事鹿渴夢相光影鏡像谷響水月變化是依依他性說若說眞如實際無相眞實法界空等是依眞實性說此三性說中不信及疑不得生故說滅邪意及疑
【論】이렇게 듣는 것[所聞]과 사유하는 것[所思]의 모든 인식현상 가운데 아집(我執)38)과 아소집(我所執)39)의 삿된 집착을 버려 떠나기 때문에 법집(法執)을 멸하여 제거한다.
【釋】문혜(聞慧)와 사혜(思慧)의 경계를 듣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모든 인식현상이라고 이른다. 문구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의미가 문혜의 경계이다. 이 의미에 의거하여 이치에 맞고 상량함에 맞게[如理如量] 찾아낸 도리, 이 도리가 사혜의 경계이다. 이 가운데 인식현상의 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법아집(法我執)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건대 열반이 있다고 집착하여 집제(集諦)40)가 생하지 않아 적정(寂靜)이 체가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인식현상의 체가 작용[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법아소집(法我所執)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열반의 작용을 집착하여 3고(苦)를 여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집착들이 삿된 집착이라고 한다. 이러한 집착을 멸하지 못하면 유식의 네 위계에 들어감을 얻을 수 없다.
016_1166_a_16L論曰是所聞思諸法中離我及我所邪執故是故滅除法執釋曰聞思境界名所聞思諸法文句所顯義是聞慧境界依此義如理如量推尋道理此道理是思慧境界中若執法體是有名法我執譬如執有涅槃謂集諦無生寂靜爲體若執法體有用名法我所執譬如執涅槃謂能離三苦如此等執名爲邪執若未滅此執不能得入唯識四位
016_1166_b_02L 법집을 멸하여 제거하기 때문에 유식의 네 위계에 들어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다시 듣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인식현상의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이 가운데 단지 인식현상의 체와 용만이 있게 된다고 집착하는 것을 설명하여 아와 아소라고 이른다. 인식주체의 아와 아소를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인식주체의 아집은 앞의 10해(解) 가운데서 이미 멸하여 제거하였기 때문에, 오직 인식현상의 아[法我]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식의 방편에 들어감을 드러낸다.
016_1166_b_02L滅除法執故能得入唯識四位復次遠離所聞及所思法我及我所執中但執法體及用爲有說名我我所不執人我我所何以故此人我執前十解中已滅除故唯法我未除故入唯識方便
【論】안립하여 눈앞에 나타나 머무는 모든 상과 사유를 모두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별을 제거할 수 있다.
【釋】산란위(散亂位)41) 가운데서는 색 등의 6진[塵]이 스스로 증지(證知)42)되어서 눈앞에 나타나 머문다. 적정위(寂靜位) 가운데서는 골쇄취(骨鎖聚)43) 등이 정심으로부터 일어나 안립된다. 이러한 것들과 같은 모든 상이 모두 산란심과 적정심의 경계이다. 사유함이란 각관사유를 말하며, 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 등을 관한다. 이러한 마음은 내경(內境)44)을 연한다. 경계에 상이 없고 견식(見識)이 생하지 않음을 보기 때문에 분별을 멸할 수 있다. 분별이 없음이 방편이 되기 때문에 유식의 네 위계에 들어감을 얻는다. 만약 분별을 일으킨다면 곧 들어갈 수 없다. 또한 눈앞에 드러나 머무는, 그리고 정립된 모든 상과 사유를 모두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분별에 있어도 방편의 도(道) 가운데서 관하기 때문에 무분별의 뜻을 짓는다는 것이다. 만약 방편이 이미 익어지면 모름지기 공용(功用)45)하지 않아도 자연히 무분별이 가능하다.
016_1166_b_08L論曰安立現前住切相思惟悉不分別是故能滅除分別釋曰於散亂位中色等六塵自所證知爲現前住於寂靜位中骨鎖聚等從定心起爲安立如此等一切是散亂寂靜二心境界思惟謂覺觀思惟觀苦無常無我等此心緣內由見境無相見識無生是故能滅分別由無分別爲方便故得入四位若起分別則不得入復次現前住及所立一切相思惟悉不分別者是人在分別觀方便道中故作無分別意若方便已熟不須功用自然能無分別
【論】이 가운데서 게송을 읊는다.
【釋】이 게송은 최후에 멸하는 바를 드러낸다.
016_1166_b_20L論曰此中說偈釋曰此偈顯最後所滅
論曰

【論】드러나 머무르고 안립한
모든 상과 사유를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016_1166_b_22L現住及安立
一切相思惟
智人不分別
故得無上覺
016_1166_c_02L
【論】드러나 머무르고 안립한 모든 상과 사유를
【釋】모든 상은 두 가지가 있다. 드러나 머무르는 것과 정립된 것을 말한다. 산란한 마음에 연하여진 6진(塵)이 드러나 머무르는 것이라고 이름하며, 정심(定心)에 연하여지는 뼈46) 등이 정립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외부의 것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고, 둘째는 의식 내의 것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외부의 것과 같은 것이 상(相)이고, 의식 내의 것과 같은 것이 사유이다.
016_1166_b_24L論曰現住及安立一切相思惟釋曰一切相有二種謂現住及所立散心所緣六塵名現住定心所緣骨等爲所立復次一切相有二種一如外顯現二如內顯現如外是相如內是思惟
【論】지혜로운 사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釋】보살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르며, 이미 유식의 도리를 듣고 사유한다. 이러한 문혜와 사혜로 말미암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름한다. 뜻을 지어서[作意] 분별하지도 않고 내지는 공용이 없이 분별하지도 않는다.
016_1166_c_07L論曰智人不分別釋曰菩薩名智人已聞思唯識道理由此聞思故名智人作意不分別乃至無功用不分別
【論】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釋】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성취한다. 곧 초지(初地) 이상을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016_1166_c_10L論曰故得無上覺釋曰由不分別故成就無分別智入初地卽初地以上爲無上覺
【論】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된다.
【釋】이것은 곧 8처 가운데 다섯 번째 처의 인(因)과 방편이며, 유식관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제 당연히 이것을 설한다.
016_1166_c_12L論曰緣法及義爲境釋曰此卽八處中第五處因及方便能令入唯識今當說之
【論】무슨 인과 무슨 방편으로 들어감을 얻는가?
【釋】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인을 묻고 뒤에 방편을 묻는다.
016_1166_c_15L論曰何因何方便得入釋曰此問有兩意先問因後問方便
016_1167_a_02L【論】문훈습(聞熏習)의 종류는 정사유(正思惟)에 섭지되며, 가르침과 실체와 같이 나타나며, 견이 있는 의언분별(意言分別)이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곧 첫 번째의 질문에 답한다. 대승의 12부 경전에서 생하여지는 문혜(聞慧)의 훈습으로 인한다. 이 훈습은 종류(種類)가 있다. 종류는 곧 문혜이다. 이것으로써 생하는 인이 된다. 이 문혜에 의거하여 거듭 정사유를 일으켜서 늘리고 키워서 견고하게 머물게 하기 때문에 섭지한다고 이른다. 섭지하여 정사유를 견고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 인을 키우는 것[長因]이며, 억념(憶念)을 섭지함이 있으며, 혹은 바른 가르침과 같이 나타나고 혹은 바른 가르침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실체와 같이 나타난다.
의식이 각관(覺觀)사유하는 것을 의언분별(意言分別)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언분별은 두 가지가 있으니, 즉 상과 견이다. 이제 단지 견만을 취하고 상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러한 관은 식을 연하고 차별적 대상을 버리기 때문이다.
016_1166_c_16L論曰由聞熏習種類正思惟所攝現似法及義有見意言分別故釋曰此卽答第一問因大乘十二部經所生聞慧熏習此熏習有種類類卽是聞慧以此爲生因依此聞慧數起正思惟增長令堅住故名攝攝令堅住正思惟爲長因有憶念攝持或似正教顯現或似正教所詮義現意識覺觀思惟名意言分別此意言分別有二種謂相及見今但取見不取相何以故此觀緣識遣塵故
【論】네 가지 심사(尋思)47)로 말미암는다.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48)을 말하며, 거짓으로 심사를 세운다.
【釋】이것은 곧 8처(處) 중 여섯 번째 처이다. 만약 보살이 이름에서 이름만을 보고, 실체적 대상에서 오직 실체적 대상만을 보고,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의 언설에서 오직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의 언설만을 보고,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차별의 언설에서 단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차별의 언설만을 본다면 이 4처(處)에서 바라밀을 보아 의혹을 결정코 깨달으므로 설명하여 심사라고 이름한다. 보살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서로 각기 다름을 보며, 실체적 대상이 상응함에 의해 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상응함을 본다.
016_1167_a_04L論曰由四種尋思謂名義自性差別假立尋思釋曰此卽八處中第六處若菩薩於名唯見名於義唯見義於名義自性言說唯見名義自性言說於名義差別言說唯見名義差別言說此四處見度疑決了說名尋思菩薩見名義相各異及見相應依義相應
보살은 자성의 언설과 차별의 언설을 본다. 언설은 모두 실체적 대상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더불어 상응하는데, 어찌하여 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서로 객(客)이 됨을 알 수 있는가?49) 먼저 이름에서는 앎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더불어 같은 체라면 이름을 듣지 못했을 때에도 실체적 대상 가운데서 이름을 아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이름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더불어 같은 체라고 한다면 이름이 많으면 실체적 대상도 역시 많아야 한다. 또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더불어 같은 체라고 한다면 이름이 이미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실체적 대상도 역시 이러해야 한다. 만약 한 사물도 인식현상과 서로 어긋남을 이루지 않는다면 곧 같은 체여야 한다. 또한 이 이름이 마땅히 실체적 대상이 있는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어야 한다. 실체적 대상이 없는 가운데서 일어나거나, 만약 이미 있었으나 있지 않게 된 실체적 대상 가운데서 이름이 일어난다면 곧 하나의 체라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016_1167_a_11L菩薩見自性言說及差別言說皆屬義故名與義相應云何得知名義互爲客先於名智不生故若名與義同未聞名時於義中名智應成又名多故若名與義同體名多義亦應多又名不定故若名與義同體名旣不定義亦應爾若不成一物相違法則應同體又此名爲當於有義中起無義中起若已有及未有義中名起則一體義不成
016_1167_b_02L또한 만약 네가 먼저 실체적 대상이 이미 있었고 뒤에 이름으로써 실체적 대상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면, 마치 등(燈)이 색을 비추듯이 만약 이렇다면 이 사람은 먼저 이미 실체를 잡아지니고[執] 뒤에 바야흐로 이름을 세운다. 실체를 잡아지니지 못했을 때에는 이름을 세우지 못한다. 이러한 잡아둠은 곧 실체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마침내 뒤에 다시 이름을 세워 실체를 드러낼 것인가? 이러한 잡아둠이 만약 실체적 대상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름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서는 어떤 다른 사람도 이 실체적 대상을 요달하지 못한다. 이 이름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1167_a_21L又若汝說先已有義後以名顯義譬如燈照色若爾此人先已執義後方立名非未執義時立此執卽應能了義何須後更立名顯義此執若不能了義名豈能了次由此名有餘人不達此義以未了此名故
만약 이름이 정하여져서 실체적 대상을 요별할 수 있다면 곧 이와 같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름이 정하여져서 실체적 대상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서는 마땅히 인식주관[人]도 없고 인식한 사물[物]도 없으며, 인식하지 못한 사물[不識物]도 없다.
또한 만약 실체적 대상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는 집착이 있다면 이러한 이름으로 말미암아서는 실체적 대상에 있어서 삿된 집착이 없다. 마치 범부인 사람의 인식인 5음(陰)50)은 단지 행[行陰]의 무리[聚]인 것과 같다. 거듭 익힘으로 말미암아 자타(自他)에 있어서 서로 이어져 아집을 일으키므로 실체적 대상 가운데 삿된 집착이 없지 않다.
만약 실체적 대상이 이름과 더불어 하나라면 이러한 두 가지 일은 성립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정의들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이 실체에 있어서 객(客)이 되고 실체는 이름에 있어서 역시 이렇듯이 객이 됨을 안다.
016_1167_b_05L若名定能了義則不應如此若名定能了義由此名不應有人有識物有不識物復次若有執義異名由此名於義無有邪執譬如凡夫人識五陰但是行聚由數習故於自他相續起我執於義中不無邪執義與名一此二事不應成由如此等是故知名於義爲客義於名爲客亦爾

6) 입자량장(入資粮章)
016_1167_b_13L入資糧章第六
【論】네 가지 여실지(如實智)로 말미암아, 일컫되 명(名)과 의(義: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차별이다. 여실지는 네 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8처 가운데 일곱 번째의 처이다. 무엇을 심사(尋思)에 의해 이끌려 온 여실지라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명에 있어서 오직 명만이 있음을 심사한다면 뒤에 오직 명만이 있음을 여실하게 안다. 세간이 이러한 정의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의 가운데에서 이 명을 세워 생각[想]하게51)되므로 언설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이 색 등의 명을 안립하지 않으면 색의 부류 가운데서 한 사람도 이 부류를 생각할 수 없다. 만약 이 색을 생각할 수 없다면 곧 증익(增益)하지 않는다. 만약 증익하지 않으면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집착하지 않으면 서로 가르쳐 내보일 수 없다.
016_1167_b_14L論曰由四種如實智謂名義自性差如實智四種不可得故釋曰卽八處中第七處何者名尋思所引如實智若菩薩於名已尋思唯有名後如實知唯有名世閒爲顯此義故於此義中立此名爲想見言說故世閒不安立色等名於色類中無有一人能想此類是色若不能想則不增益若不增益不起執著若不執著不能互相教示
016_1167_c_02L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명을 안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명을 심사(尋思)하여 이끌어 온 첫 번째 여실지라고 한다. 무엇이 의(義:실체적 대상)를 심사하여 이끌어 온 여실지라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의에서 오직 의만이 있다고 이미 심사한다면 의를 여실하게 알아서 모든 언설을 떠나므로 언설할 수 없다. 즉 색(色)과 수(受) 등의 부류에서 ‘색이다, 색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법이다, 법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유다, 유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의를 심사하여 이끌어 온 여실지라고 한다.
016_1167_b_24L若菩薩如此知名名名尋思所引第一如實智何者義尋思所引如實智若菩薩於義已尋思唯有義如實知義離一切言說不可言說謂色受等類色非色不可說法非法不可說有非有不可說是名義尋思所引第二如實智
무엇이 자성을 심사하여 이끌어 온 여실지라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색과 명 등의 종류의 자성언설(自性言說) 가운데서 이미 오직 언설만이 있다는 것을 심사한다. 자성언설, 이 품류는 그의 자성이 아니고 그의 자성과 같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보살은 이 품류를 여실하게 통달한다. 마치 변화ㆍ거울 속의 형상ㆍ메아리ㆍ그림자ㆍ꿈 속의 영상52) 그리고 마술 등과 같이 그 품류가 아니면서 그 품류와 같이 나타난다.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을 심사하여 이끌어 온 세 번째 여실지라고 하며, 매우 깊은 의[甚深義]53)를 경계로 삼는다.
016_1167_c_07L何者自性尋思所引如實智若菩薩於色名等類自性言說中已尋思唯有言說自性言說此類非其自性如其自性顯現菩薩如實通達此類譬如變化鏡像谷響光影夢相幻事等非類似類顯現是名自性尋思所引第三如實智以甚深義爲境界
무엇을 차별을 심사하여 이끌어 온 여실지라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차별의 언설 가운데에서 이미 오직 언설만이 있다고 심사하면 색 등의 품류 가운데에서 보살은 차별의 언설에 두 개의 실체적 대상이 있지 않음을 본다. 이 품류는 있지 않고 없지도 않다. 언설할 수 있는 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있지 않고, 언설할 수 없는 체가 성취되기 때문에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진제(眞諦)로 말미암기 때문에 색(色)이 아니고, 속제(俗諦)로 말미암기 때문에 색이 아님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 색이 있다고 언설하기 때문에 있으면서 있지 않고 색이면서 색이 아닌 것과 같이, 이와 같이 견(見)이 있음과 견이 없음 등의 차별언설의 다른 품류도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보살이 차별언설에 두 개의 의가 있지 않음을 안다면 이를 이름하여 차별을 심사하여 이끌어 온 네 번째 여실지라고 한다. 먼저 이미 명(名)과 의(義)를 설명하였고 뒤에 자성과 차별을 설명한다.
016_1167_c_14L何者差別尋思所引如實智若菩薩於差別言說已尋思唯有言說於色等類中菩薩見差別言說無有二義此類非有非非有由可言體不成就故非有非非有由不可言體成就故如此非色由眞諦故非非色由俗諦故於中有色言說故如有非有及色非色如此有見無見等差別言說別類由此道理應知皆爾若菩薩如實知差別言說無有二義是名差別尋思所引第四如實智先已說名及義後說自性及差別
016_1168_a_02L이 네 가지 가운데 모든 거짓 세운 언설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의를 얻을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실체적 대상을 얻을 수 없으므로 명도 역시 자성과 차별이 없다. 따라서 보살은 이 명이 오직 자성과 차별을 거짓 세운다는 것을 심사한다. 이와 같이 헤아리고 의심하여 결정코 깨우치는 것 등을 설하여 심사라고 이른다. 이러한 심사로 인하여 보살은 명과 의 등이 둘이 있지 않다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여실지라고 이름한다.
016_1168_a_02L此四中皆假立言說欲何所爲顯義不可得由義不可得名亦無自性及差別是故菩薩尋思此名唯假立自性差別如此度疑決了等說名尋思因此尋思菩薩觀名義等二無所有是名如實智
【論】만약 보살이 이것들과 같이 실체적 대상에 이미 들어가 이미 이해했다면
【釋】이미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네 가지 심사를 얻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미 이해했다는 것은 이미 네 가지 여실지를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016_1168_a_07L論曰若菩薩已入已解如此等義釋曰已入謂已得四種尋思已解謂已得四種如實智
【論】곧 가행(加行)을 닦아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가게 된다.
【釋】지(地) 이전의 6바라밀[度]과 네 가지 통달의 부분의 선근을 가행이라고 이름한다. 원락위(願樂位)로부터 구경위(究竟位)까지를 꿰뚫어 유식관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유식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어떤 경계를 연하여 가행을 닦아야 하는가?
016_1168_a_10L論曰則修加行爲入唯識觀釋曰地前六度及四種通達分善根名加行從願樂位乃至究竟位通名唯識觀若欲入唯識觀修加行緣何境界
【論】이러한 관 가운데서 의언분별하여 문자와 언설[字言]과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난다.
【釋】원락위로부터 구경위까지를 관 가운데라고 말하며, 의언분별을 연하는 것을 경계라고 한다. 이것을 떠나서 다른 외부의 경계가 없다. 왜냐 하면 이 의언분별은 문자언설과 의와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016_1168_a_14L論曰於此觀中意言分別字言及義顯現釋曰從願樂位乃至究竟位名觀中緣意言分別爲境離此無別外境何以故此意言分別似文字言說及義顯現故
【論】이 가운데 이 문자와 언설의 상(相)은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통달을 얻는다.
【釋】단지 의언분별이 있을 뿐이고 달리 명이 있지 않다. 보살은 명이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통달하여 곧 외부의 대상[外塵]에 대한 삿된 집착을 떠난다.
016_1168_a_18L論曰此中是字言相但意言分別得如此通達釋曰唯有意言分別無別有菩薩能通達名無所有則離外塵邪執
016_1168_b_02L【論】이 실체적 대상은 이름과 언설에 의지하는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釋】앞에서 이미 명을 버렸고 이 밑으로는 명에 의지함으로써 의를 버린다. 의라는 것은 6식에 연하여지는 경계이다. 명을 떠나서는 달리 이러한 경계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명에 의지함으로써 의를 버린다. 명언은 이미 오직 의(意)의 분별이기 때문에 의(義)는 역시 다른 체가 없다. 보살은 의가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통달하여 역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삿된 집착을 떠난다.
016_1168_a_22L論曰此義依於名言唯意言分別亦如此通達釋曰前已遣名此下依名以遣義義者卽六識所緣離名無別此境是故依名以遣義名言旣唯意分別故義亦無別體薩能通達義無所有亦離外塵邪執
【論】이 명(名:이름)과 의(義: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차별은 단지 거짓으로 설하여, 양(量)54)이라고 한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釋】앞에서 이미 명과 의를 버렸다. 명과 의가 이미 없으니 명과 의의 자성과 차별을 어떻게 세울 수 있겠는가? 만약 거짓으로 설한 것을 떠난다면 달리 명과 의의 자성과 차별은 없다. 이 두 인식현상을 얻을 수 없음을 증견(證見)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통달이라고 한다.
016_1168_b_05L論曰此名義自性差別唯假說爲量亦如此通達釋曰前已遣名義名義旣無名義自性及差別云何可立離假說無別名義自性及名義差別由證見此二法不可得故名爲通達
【論】다시 이러한 위계 가운데서 단지 오직 의언분별(意言分別)을 증득(證得)한다.
【釋】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미 외부의 대상을 버렸는데, 이 관 가운데서 다시 무슨 경계를 연하는가?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분별이라는 것을 관하기 때문에 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의언분별을 연하는 것을 경계로 삼고 이 경계를 버리지 못한다. 만약 버리지 못한다면 유식의 경계는 이 위계 가운데 있어서 무슨 경계를 이미 버려서 모두 다하여 남음이 없는가? 이 위계에서는 단지 네 경계를 보지 않는다.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
016_1168_b_10L論曰次於此位中但證得唯意言分別釋曰是觀行人已遣外塵此觀中復緣何境觀一切境唯是意言分別故此觀行人緣意言分別爲未能遣於此境若未能遣唯識境在此位中已遣何境皆盡無餘此位但不見四境何者爲四
016_1168_c_02L【論】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을 보지 않고 자성과 차별의 가설55)도 보지 않는다. 실상(實相)으로 말미암아 자성과 차별의 정의가 있음을 얻을 수 없을 따름이다.
【釋】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근본[本]이고, 이름과 실체적 대상에는 각각 자성과 차별의 가설이 있으니, 곧 이것을 자성과 차별의 가설을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곧 이 자성과 차별을 보지 않는 것을 이 네 인식현상을 버려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고 말한다. 마음이 의언분별을 연함으로 말미암아 경계로 삼아 결정코 견고하게 머물기 때문에 다시 나머지 경계를 분별하지 않는다. 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아 이미 이 네 가지 인식현상이 결정코 있지 않음을 요별하기 때문에 마음은 이 상을 연하지 않는다. 이 상을 연하지 않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분별을 얻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 방편으로 말미암아 외부의 진을 분별하는 것을 버렸다면 다시 무슨 다른 방편과 다른 경계가 있어서 진관(眞觀)에 들어감을 얻는가?
016_1168_b_17L論曰是觀行人不見名及義不見自性差別假由實相不得有自性差別義已釋曰名義是本名義各有自性及差別假說卽是名不見自性差別假說卽是不見自性差別名遣此四法永盡無餘由心緣意言分別爲境決定堅住是故不復分別餘境由四種尋思及四種如實智已了別此四法決定無所有故心不緣此相不緣此相故不得此四種分別若由二種方便遣外塵分別復有何別方便及別境得入眞觀
【論】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아
【釋】먼저 앞의 질문에 답한다. 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고 다른 방편이 없다. 네 가지 삼마제(三摩提)에 섭지되는 방편에 들어가게 된다.
016_1168_c_05L論曰由四種尋思及四種如實智釋曰先答前問無別方便由以四種尋思及四種如實智四種三摩提所攝爲入方便
【論】의언분별에 있어서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므로
【釋】다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다고 하는 뒤의 질문에 답한다. 범부의 의언분별에는 본래부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과 같음이고, 둘째는 실체적 대상[義]과 같음이다.
이름과 실체적 대상은 모든 인식현상을 섭지하여 모두 다한다. 이 이름과 실체적 대상은 오직 의언분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그 밖의 다른 인식현상은 없다.
016_1168_c_08L論曰於意言分別顯現似名及義釋曰次答後問無別境界凡夫從本意言分別有二種一似名二似義名義攝一切法皆盡此名義但是意言分別所作離此無別餘法
【論】유식관에 들어감을 얻는다.
【釋】이러한 방편에 의거하고 이러한 경계를 연하여 유식의 진관(眞觀)에 들어간다.
016_1168_c_13L論曰得入唯識觀釋曰依此方便緣此境界得入唯識眞觀
【論】유식관 가운데서 무슨 인식현상에 들어가며, 어떠한 인식현상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가?
【釋】이 아래로는 8처 중의 8처를 밝힌다. 이 가운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는 들어간 인식현상을 묻고, 둘째는 들어간 비유를 묻는다.
016_1168_c_15L論曰於唯識觀中入何法如何法得入釋曰下明八處中第八處此中有兩問問所入法二問所入譬
【論】단지 유량(唯量)에 들어간다.
【釋】이 아래로는 첫 번째의 질문에 답한다. 단지 유식량(唯識量)에 들어간다. 이 유식량은 몇 가지 인식현상을 섭지하는가?
016_1168_c_18L論曰但入唯量釋曰此下先答第一問但入唯識量此唯識量攝幾種法
【論】상(相)과 견(見)의 두 가지 인식이며,
【釋】이 유식은 두 가지 인식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상식(相識)이고, 둘째는 견식(見識)이다. 또한 대상[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상이라고 이름하며, 연하여진 경계[所緣境]라고 일컫는다. 식(識)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견이라고 이름하며, 연하는 주체인 식[能緣識]이라고 일컫는다. 이 두 가지 인식현상은 하나는 인(因)이고, 다른 하나는 과(果)이다. 또한 하나는 소의(所依)이고, 다른 하나는 능의(能依)이다.
016_1168_c_20L論曰相見二法釋曰此唯識不出二法一相識二見識復次似塵顯現名相謂所緣境似識顯現名見謂能緣識此二法一是因一是果又一是所依一是能依
016_1169_a_02L【論】여러 가지 상모(相貌)이며,
【釋】이 두 가지 인식현상은 시작함이 없는 생사로부터 거듭 익숙하여졌기 때문에 매우 빠르다[速疾]. 따라서 한 순간에 여러 가지 상모가 있어서 이와 같은 세 가지 인식현상을 일으키니, 유식관에 있어서 관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016_1169_a_02L論曰種種相貌釋曰此二法由無始生死來數習故速疾是故於一時中有種種相貌起如此三法於唯識觀觀行人得入
【論】이름과 실체적 대상[義], 자성과 차별의 가설 그리고 자성과 차별의 대상, 이 여섯 가지의 상에는 실체[義]56)가 없기 때문이다.
【釋】이름과 실체적 대상에는 각각 셋이 있으므로 여섯이 된다. 이름의 세 가지란 첫째는 이름이고, 둘째는 자성이고, 셋째는 차별이다. 실체적 대상의 세 가지도 역시 이렇다. 이 여섯 가지 상은 모두 실체가 없다. 왜냐 하면 이름은 본래 스스로 실체적 대상[義]이며, 실체적 대상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이른다. 실체적 대상도 역시 실체적 대상이 없다. 식량(識量)을 떠나 달리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 또한 실체[義]가 없다. 이름이 이미 실체적 대상이 없으므로 이름의 자성과 이름의 차별도 역시 실체적 대상이 있지 않다. 실체적 대상이 이미 실체가 없으므로 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실체적 대상의 차별도 역시 실체가 있지 않다. 이러한 여섯 상이 실체가 없음을 밝힘으로써 유식관에 들어감을 드러낸다. 이미 유식관에 들어감을 드러냈는데 상견관(相見觀)에 들어감은 어떠한가?
016_1169_a_05L論曰名義自性差別假說自性差別六種相無義故釋曰名義各有三爲六名三者一名二自性三差別義三亦爾此六種相竝無義何以故名本自義義無所有故名無義此名爲自有義爲當無義若有義義無所有故名無義若名無義亦無無所有名無義義亦無義離識量外無別有義故義亦無義名旣無義名自性及名差別亦無有義義旣無義義自性及義差別亦無有義明此六相無顯入唯量觀明入唯量觀已云何入相見觀
016_1169_b_02L【論】이러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있지 않아 실체적 대상[義]57)이 된다.
【釋】이러한이란 곧 상과 견에 있어서 이러하다는 것이다. 상은 능취와 소취가 아니다. 왜냐 하면 대상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능취가 아니며, 식을 떠나 다른 대상이 없기 때문에 소취도 아니다. 견도 역시 능취와 소취가 아니다. 식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취가 아니며, 취하여진 대상이 이미 없어서 식도 역시 없기 때문에 능취가 아니다. 이미 능취와 소취가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능취와 소취가 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견관에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이미 상견관에 들어감을 밝혔으며, 여러 가지 상모(相貌)를 관함에 들어감은 어떠한가?
016_1169_a_18L論曰由此能取所取有爲義故釋曰此卽此於相見相非能取所取何以故似塵顯現故非能取離識無別塵故非所取見亦非能取所取顯現似識故非所取所取塵旣無識亦是無故非能取旣無能取所取故非有義由不見能取所取有體名入相見觀已明入相見觀何入種種相貌觀
【論】일시에 갖가지 상모와 같이 나타나고 생하기 때문에,
【釋】만약 보살이 갖가지 상모와 같이 나타나는 의타성을 실제로 상이 있지 않음을 본다면 의타성이 생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만 실제로 생함이 있지 않음을 본다. 일시에 갖가지 상모가 상도 없고 생도 없음을 관할 수 있다는 것을 갖가지 상모를 관한다고 이름한다. 3성을 관함에 들어가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등나무의 비유를 설한다.
016_1169_b_03L論曰一時顯現似種種相貌及生故釋曰若菩薩見依他性顯現似種種相貌實無有見依他性顯現似生實無有生於一時中能觀種種相貌無相無生名種種相貌觀爲顯入三性觀故說藤譬
【論】마치 어둠 속의 등나무가 뱀과 같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釋】사람이 등나무의 모습을 보고 뱀이라고 집착하여 말한다. 이 아래로는 두 번째 질문에 답한다. 중생은 본래부터 대승의 12부 경전에서 설한 3무성(無性)의 의미를 듣지 못했다. 문혜(聞慧)를 얻지 못해서 세 가지 번뇌에 덮이게 되어 마치 어둠과 같다. 어떤 사람은 2승과 범부에 비유하기도 한다. 등나무의 모습은 의타성을 비유한다. 뱀은 분별성을 의미한다. 2승과 범부는 의타성을 깨닫지 못하고, 분별성에 인식주관과 인식현상이 있다고 집착한다.
016_1169_b_08L論曰譬如暗中藤顯現似蛇釋曰人見藤相執言是蛇此下答第二問衆生從本以來不聞大乘十二部經說三無性義未得聞慧爲三煩惱所譬之如闇有人譬二乘凡夫藤相譬依他性蛇譬分別性二乘凡夫不了依他性執分別性有人法
【論】마치 등나무 가운데 뱀이 곧 허망하여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釋】의타성 가운데 분별성은 허망하다. 실제로 인식주관과 인식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016_1169_b_15L論曰猶如於藤中蛇卽是虛實不有故釋曰於依他性中分別性是虛實無人法故
【論】만약 사람이 이미 이러한 등나무의 의미를 요별한다면
【釋】보살은 이미 문혜와 사혜를 얻어 유식의 방편관에 들어간다.
016_1169_b_18L論曰若人已了別此藤義釋曰譬菩薩已得聞思二慧入唯識方便觀
【論】먼저의 뱀이라는 산란한 지각[亂智]은 경계를 연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곧 문득 사멸하여 단지 등나무라는 지각(知覺)만이 있다.
【釋】문혜와 사혜를 얻지 못했을 때 범부의 위계 가운데서는 인식주관과 인식현상이 있다고 집착한다. 이 집착은 본래 경계가 있지 않다. 문혜와 사혜를 얻은 뒤에 의타성을 요별하여 이러한 집착이 곧 사라지고 오직 의타성의 지혜만이 있다.
016_1169_b_20L論曰先時蛇亂智不緣境卽便謝滅唯藤智在釋曰未得聞思慧時於凡夫位中執有人法執本無有境得聞思慧後了別依他此執卽滅唯依他性智在
016_1169_c_02L【論】이러한 등나무의 지혜는 허망하여 실제의 경계가 없다고 미세하게 분석하므로 말미암는다.
【釋】만약 네 가지 대상의 상을 연하여 이 등나무를 분석한다면 단지 네 가지 상을 볼 따름이고 다른 등나무를 보지 않기 때문에 등나무라는 지각은 허무한 것이다. 허무하기 때문에 난(亂)이며 실제의 경계가 없다. 망령되게 경계를 일으켜 집착한다.
016_1169_b_24L論曰此藤智由微細分析虛無實境釋曰若人緣四塵相分析此藤但見四相不見別藤故藤智是虛虛故是亂無有實境妄起境執
【論】왜냐 하면 단지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상이기 때문에
【釋】왜냐 하면 등나무는 실제로 있지 않다. 네 가지 대상을 떠나서는 달리 등나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016_1169_c_05L論曰何以但是色香味觸相故釋曰何以藤非實有以離四塵外無別有藤故
【論】만약 마음이 이 경계를 연한다면 등나무라는 지각(知覺)은 역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釋】이것은 등나무라는 지각이 비록 거친 난집(亂執)을 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미세한 난집이기 때문에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방편 가운데 비록 의타성으로써 분별성인 거친 난집을 버리고 의타성이 있음을 보아도 스스로 미세한 난집이라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뒤에 진관(眞觀)에 들어가 곧 이러한 집착을 버린다. 따라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016_1169_c_07L論曰若心緣此境藤智亦應可滅釋曰此明藤智雖能遣麤亂執而自是細亂執故應可除在方便中雖以依他性遣分別性麤亂執而見有依他性自不免是細亂執後入眞觀卽遣此執故應可除
【論】만약 이미 이와 같이 보아서, 여섯 가지 상이 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의언분별로 나타나는 것을 굴복시켜 없앤다면
【釋】모든 인식현상에는 단지 여섯 상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는 단지 의언분별일 뿐이다. 의언분별을 떠나서는 여섯 상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지혜로 말미암아 관을 행하는 사람은 분별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016_1169_c_13L論曰若如此見已伏滅六相顯現似名及義意言分別釋曰一切法但有六相此六但是意言分別離意言分別有六相實無所由如此智觀行人得入分別性
【論】마치 뱀이라는 지각과 같은 차별적 대상[塵]58)의 지각이 생하지 않는다.
【釋】분별성에 들어갈 때에는 차별적 대상의 지각이 생할 수 없다. 등나무를 요별하였을 때에 뱀이라는 지각이 생하지 않음과 같다. 이러한 언설과 비유는 분별성에 들어감을 드러낸다.
016_1169_c_17L論曰塵智不生譬如蛇智釋曰分別性時塵智不得生如了別藤時蛇智不生此言及譬顯入分別性
【論】여섯 상을 굴복시켜 멸한 실체적 대상[義]59) 가운데에서 이 유식의 지각이 역시 등나무라는 지각과 같은 것을 굴복시켜 없앨 수 있어야 한다.60)
【釋】분별성에 들어간 위계[位] 가운데서 보살은 이미 무상성(無相性)61)을 증득한다. 이 무상성은 무생성(無生性)62)의 지혜를 이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유식의 지각이 굴복시켜 멸할 수 있어야 한다. 4미(微)63)를 요별할 때 등나무의 지각도 생하지 않음과 같다.
016_1169_c_20L論曰於伏滅六相義中是唯識智亦應可伏滅譬如藤智釋曰於入分別性位中菩薩已證無相性此無相性能引無生性智故唯識智應可伏如了別四微時藤智不生
016_1170_a_02L【論】진여의 지각에 의하여
【釋】무상성의 지각으로써 무생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러한 언설과 비유는 의타성과 진실성에 들어감을 드러낸다.
016_1170_a_02L論曰由依眞如智故釋曰依無相性智得入無生性此言及譬顯入依他性及眞實性
【論】이와 같이 보살은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의언분별의 모습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분별성에 들어감을 얻고, 유식의 실체적 대상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의타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어찌하여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가?
【釋】만약 이미 모든 인식현상이 단지 의언분별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실제로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요별했다면, 의언분별에 의함으로 말미암아 분별의 무상성을 요별함을 얻는다. 만약 보살이 외부의 차별적 대상을 보지 않고 단지 의언분별만을 본다면 곧 의타성을 요별한다. 어떻게 이 인식현상을 요별한다고 하는가? 만약 인연(因緣)을 떠나서 스스로는 근(根)과 차별적 대상이 생함을 얻을 수 없다면 인연인 근과 차별적 대상이 이미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 인식현상이 인연이 없다면 어떻게 생할 수 있는가? 따라서 보살이 의타성과 무생성을 요별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진실성을 요별하는 것이다.
016_1170_a_05L論曰如此菩薩由入似義顯現意言分別相故得入分別性由入唯識義故得入依他性云何得入眞實性釋曰若菩薩已了別一切法但是意言分別離此以外實無所有由依意言分別得了別分別無相性若菩薩不見外塵但見意言分卽了別依他性云何了別此法離因緣自不得生根塵爲因緣根塵旣不成此法無因緣云何得生故菩薩能了別依他性及無生性卽是了別眞實性
【論】만약 유식의 상(想)을 이미 버렸다면
【釋】만약 보살이 처음으로 진관(眞觀)에 의해 의타성에 들어간다면 두 번째의 진관으로 말미암아서는 의타성을 제거하여 곧 유식의 상을 버린다.
016_1170_a_16L論曰若捨唯識想已釋曰若菩薩依初眞觀入依他性第二眞觀除依他性則捨唯識想
【論】이 때의 의언분별은 먼저 들은 것[所聞:문혜]의 인식현상이 훈습한 종류이다.
【釋】진관에 들어간 때이기 때문에 ‘이 때’라고 말한다. 처음 수행을 배울 때부터 진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의식은 지난 날 들은 바른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이 드러낸 실체를 각관사유하며, 기억하여 지니기 때문에 의언분별이라고 이름한다. 먼저 들은 것의 인식현상을 거듭 익혀서 생하여지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이름한다. 나중에 기억하여 지니게 되는 경계는 오히려 앞에서의 경계가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종류(種類)라고 이름한다.
016_1170_a_18L論曰是時意言分別先所聞法熏習種類釋曰是入眞觀時故言是時從初修學乃至入眞觀前意識覺觀思惟憶持昔所聞正教及正教所顯義故言意言分別先所聞法數習所故言熏習後時所憶持境界猶是先時境界所流故名種類
016_1170_b_02L【論】보살은 이미 차별적 대상[塵]의 상(想)을 요별하고 굴복하여 없앤다.
【釋】보살은 네 가지 심사(尋思)에 의하여 6진을 이미 요별하고, 네 가지 여실지(如實智)에 의하여 이미 차별적 대상의 상(想)을 굴복하여 없앤다.
016_1170_b_02L論曰菩薩已了別伏滅塵想釋曰菩薩依四尋已了別六塵依四如實智已伏滅塵想
【論】모든 실체와 같이 나타나는 것도 다시 생하는 연(緣)이 없기 때문에 생할 수 없다.
【釋】지난 날 의언분별이 듣고 사유하여지는 모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내지는 오직 식만이 있는 상[唯有識想]64)과 같이 나타나는 모든 것이 생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생하는 연[生緣]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하는 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분별성(分別性)과 의타성(依他性)이다. 분별성이 이미 멸하였으니 의타성도 생할 수 없다. 이미 두 가지 경계가 없기 때문에 모든 실체적 대상과 내지는 유식과 같은 상(想)이 모두 생할 수 없다. 또한 이때 하나의 차별적 대상의 품류도 없어서, 보살에 의해 요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차별적 대상과 같이 일어나는 의언분별을 얻는다. 의언분별이 생하는 연이 모두 다하여 이미 생하는 연이 없기 때문에, 이때 가운데서는 모든 의언분별이 모두 생할 수 없다.
016_1170_b_05L論曰似一切義顯現無復生緣故不得生釋曰昔意言分別顯似所聞思一切義乃至似唯有識想皆不得生何以故以無得生緣故生緣有二種謂分別性及依他性別性已滅依他性又不得生旣無二境故一切義乃至似唯識想皆不得復次是時無一塵品類而非菩薩所了別猶得似此塵起意言分別言分別生緣皆盡旣無生緣故此時中一切意言分別悉不得生
【論】따라서 유식과 같은 의언분별도 역시 생할 수 없다.
【釋】이러한 말은 무슨 의미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가? 이 유식의 상(想)이 만약 마음의 분별이 된다면 이러한 상(想)은 곧 경계를 이룬다. 이러한 경계를 집착하는 것은 한결같이 굴복시켜 없애기 때문에, 내지는 유식의 상까지도 일어날 수 없음에 이르는데, 어찌 하물며 나머지 의언분별이 생할 수 있겠는가?
016_1170_b_15L論曰是故似唯識意言分別亦不得生釋曰此言欲顯何義此唯識想若爲心分別此想則成境界此境界執由一向伏滅故乃至唯識想尚不得起何況餘意言分別而當得生
【論】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釋】보살은 의타성에 의하여 분별성을 제거하고 진실성에 의하여 의타성을 제거함으로 말미암는다. 만약 모두 제거된다면 보살은 어느 처(處)에 머무는가? 보살의 마음은 어떤 경계를 연하는가?
016_1170_b_20L論曰由此義故釋曰由菩薩依依他性除分別性依眞實性除依他性若悉被除菩薩住在何處菩薩心緣何境界
016_1170_c_02L【論】보살은 모든 실체적 대상[義]과 이름[名] 가운데서 오직 무분별에 머문다.
【釋】무분별지가 이름[名]이다. 이 이름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모든 실체적 대상을 분별하지 않음이다. 실체적 대상은 곧 경계이다. 이 지각은 모든 경계에서 다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가지 분별이 없다. 곧 이 지각을 세우면 보살이라고 한다. 또한 다시 이름이란, 곧 구경에 이르러 이름은 모든 인식현상을 꿰뚫으며,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 이 이름은 곧 법계이다.65) 모든 실체적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상(相)66)으로 삼는다. 혹은 설하여 무분별경(無分別境)이라고 이름한다. 보살은 오직 이러한 인식현상 가운데 머문다. 이 두 가지는 첫 번째 질문에 답한다.
016_1170_b_23L論曰菩薩唯住無分別一切義名中釋曰無分別智是名此名其相云何謂不分別一切義義卽是境此智於一切境無復能取所取二種分別立此智爲菩薩復次名者謂至究竟名通一切法於一切法無有差別名卽是法界此法界以通一切法分別一切義爲相或說名無分別境菩薩唯於此法中住此兩復次答第一問
【論】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인 법계(法界)를 증득할 수 있다.
【釋】능취(能取)ㆍ소취(所取)와 인식주관과 인식현상 내지는 상성(相性)과 생성(生性)의 차별을 분별하지 않아 이와 같은 무분별지를 얻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진여(眞如)와 법계(法界)를 증득하여 머무를 수 있다. 각각의 지[地地]는 모두 세 가지 부분이 있으니, 들어가고 머무르고 나옴이다. 증득함을 얻고 머무름을 얻는 것은 곧 앞의 두 부분이다.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것을 증득이라 하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을 머묾이라고 한다. 또한 처음으로 얻는 것을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이미 얻어서 상속하는 것을 머묾이라고 이른다. 이는 곧 두 번째의 질문에 답함이다.
016_1170_c_10L論曰由無分別智得證得住眞如法界釋曰不分別能取所取及人法乃至相生性差別得如此無分別智故得證住眞如法界地地皆有三分謂入住出得證得住卽前二未得令得爲證已得令不失爲住又初得名入得已相續名住此卽答第二問
【論】이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釋】진관에 들어간 때에 보살의 지각은 열 가지 평등에 의거한다. 『십지경』에 설함과 같다. 또한 두 가지에 의하여 평등하니, 즉 능연(能緣)과 소연(所緣)67)이다. 능연은 곧 무분별지이다. 지각에 분별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일컫는다. 소연(所緣)은 곧 진여의 경계이다. 경계도 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이 경계의 지각은 실체 가운데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에 머물지 않아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설한다. 평등 가운데 최상이어서 비할 바가 없기 때문에 거듭된 이름을 짓는다.
016_1170_c_17L論曰是時菩薩平等平等釋曰是入眞觀時菩薩智依十種平如十地經說又依二種平等謂能緣所緣能緣卽無分別智以智無分別故稱平等所緣卽眞如境境亦無分別故稱平等又此境智不住能取所取義中譬如虛空故說平等平等以於平等中最上無等故作重名
016_1171_a_02L【論】능연과 소연이 무분별지를 생한다.
【釋】무분별지가 생하여 어떠한 상모가 있는가? 열 가지 평등에 의거한다. 능연과 소연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생한다. 무분별지는 두 가지 평등에 의거하니, 즉 지각과 경계이다. 능연과 소연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생한다. 또한 무분별지는 가장 궁극적으로 평등하여 능연과 소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생한다.
016_1170_c_24L論曰能緣所緣無分別智生釋曰無分別智生有何相貌依十種平等能緣所緣悉平等故無分別智又無分別智依二種平等謂智及能緣所緣悉平等故無分別智生又無分別智依最極平等不住能緣所緣故無分別智生
【論】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진실성(眞實性)에 들어감을 얻는다.
【釋】앞에서부터 차례로 해석한 모든 방편의 정의와, 나중에 설하여질 정의가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미로 말미암아’라고 말한다. 초지(初地)를 향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든 의미를 얻음으로 해서 진실성을 증견(證見)한다. 이 위계는 언설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스스로 증득하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증득하였을 때 각관사유인 분별을 여의기 때문이다. 앞에 설한 보살은 모든 실체적 대상과 이름 가운데 오직 무분별에 머문다. 이 이름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또한 다시 어떤 인식현상이 이름이 되는가?
016_1171_a_08L論曰由此義菩薩得入眞實性釋曰如前來次第釋諸方便義及後所應說義故言由此義故向初地人名菩薩由此諸義得證見眞實性此位不可言說何以故以自所證故證時離覺觀思惟分別故前說菩薩唯住無分別一切義名中此名有幾種復次以何法爲名
【論】가 가운데 게송을 설한다.
【釋】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이 게송을 설한다.
016_1171_a_16L論曰此中說偈釋曰爲答此問故說此偈
論曰

【論】인식현상[法]과 인식주관[人] 그리고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
자성[性]과 간략한 명(名)과 상세한 명,
깨끗하지 않은 것과 깨끗한 것 그리고 구경(究竟)의 것,
열 가지 명은 차별적인 경계이다.
016_1171_a_17L法人及法義
性略及廣名
不淨淨究竟
十名差別境
016_1171_b_02L
【釋】이름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보살의 경계이다. 열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인식현상[法]이라는 이름이니, 즉 색(色)ㆍ수(受) 등과 안(眼)ㆍ이(耳) 등이다. 둘째는 인식주관이라는 이름이니, 즉 믿음을 행하고, 가르침을 행하는 등이다. 셋째는 가르침[法]68)이라는 이름이니, 즉 수다라(修多羅)와 기야(祇夜)69) 등이다. 넷째는 실체적 대상이라는 이름이니, 12부 경전에 드러내어진 모든 실체적 대상의 이름이다. 다섯째는 자성이라는 이름이니, 즉 상응하는 실체가 없는 문자이다. 여섯째는 간략한 이름이니, 즉 중생 등의 두루 미치는 이름이다. 일곱째는 상세한 이름이니, 즉 중생들에게 개별적으로 있는 이름이다. 여덟째는 깨끗하지 않는 이름이니, 즉 범부 등이다. 아홉째는 깨끗한 이름이니, 즉 성인(聖人) 등이다. 열째는 구경(究竟)의 이름이니, 즉 모든 인식현상을 두루 꿰뚫는 진여(眞如)와 실제(實際) 등이다.
016_1171_a_19L釋曰名有十種是菩薩境界何等爲一法名謂色受等眼耳等二人名謂信行法行等三法名謂修多羅祇夜等四義名謂十二部經所顯諸義五性名謂無義文字六略名謂衆生等通名七廣名謂衆生各有別名八不淨名謂凡夫等九淨名謂聖人等十究竟名謂通一切法眞如實際等
【論】열 가지 이름[名]은 차별이 있는 경계이다.
【釋】이 열 가지 차별이 있는 이름은 모두 보살의 경계이다. 보살이 머무는 것은 오직 열 번째에 있으며, 모든 인식현상의 이름 가운데 두루 미친다. 또한 다시 간략하게 설하면 이름에는 열 가지가 있으며, 보살의 경계이다. 인식현상의 이름은 안(眼) 등을 일컬으며, 인식주관의 이름은 나와 중생 등을 일컫는다. 가르침의 이름은 12부의 바른 가르침을 이르며, 실체적 대상의 이름은 12부에서 바르게 가르친 실체적 대상을 이른다. 자성의 이름은 일컫되 아아(阿阿)70)가 처음이 되며, 하(訶)71)는 마지막 음(音)으로 문자의 합이 37이다. 간략한 이름은 유위와 무위이며, 상세한 이름은 색(色)ㆍ수(受) 등과 공(空) 등이다. 깨끗하지 않은 이름은 범부 등을 일컬으며, 깨끗한 이름은 수다원(須陀洹) 등이다. 구경의 이름은 궁극을 꿰뚫는 경계[極通境]를 연하는 것이다. 출세지(出世智:無分別智)와 출세후지(出世後智:無分別後得智)에 의해 연하여지는 모든 인식현상의 진여(眞如)의 경계이다.
016_1171_b_05L論曰十名差別境釋曰此十種差別名悉是菩薩境界菩薩所住唯在第十通一切法名中復次略說名有十種是菩薩境界法名謂眼等人名謂我衆生等法名謂十二部正教名謂十二部正教義性名謂阿阿爲訶爲最後音字合三十七略名謂有爲無爲廣名謂色受等及空等淨名謂凡夫等淨名謂須陁洹等竟名謂緣極通境出世智及出世後智所緣一切法眞如境
【論】이와 같이 보살은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응지승상(應知勝相)에 들어감을 얻는다.
【釋】이와 같다고 하는 것은 방편과 순서[次第]와 시절과 버리고 얻음 등을 일컫는다. 보살은 이와 같은 의미로 말미암아 유식관에 들어감을 얻고, 혹은 유식의 방편관에 들어감을 얻고, 혹은 유식의 진관에 들어감을 얻는다. 유식관을 말미암아 3무성(無性)을 통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응지승상(應知勝相)에 들어감을 얻는다.
016_1171_b_16L論曰如此菩薩由入唯識觀故得入應知勝相釋曰如此謂方便次第時節捨得等菩薩由如此義得入唯識觀或入唯識方便觀或入唯識眞觀由唯識觀能通達三無性故得入應知勝相
攝大乘論釋卷第七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인식의 수승한 모습.
  2. 2)인식에 들어가는 수승한 모습.
  3. 3)법을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법은 의식에 드러나는 인식현상을 말하므로 인식은 인식현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현상을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3성은 인식현상의 3성을 말하므로 3성을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4. 4)의타성에 세 가지 자성이 있다는 것은 의타성이 홀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5. 5)인식의 모습.
  6. 6)많은 법문을 듣는 것.
  7. 7)신의 체가 서로 이어진다는 것은 부정품법에 훈습되어지는 색신(色身)과 전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법신(法身)이 하나의 체라는 것이다.
  8. 8)각(覺)은 범어로 vitarka로서 현장은 사(尋)로 번역하고 있으며, 언어로 개념화하고 서술하는 단계의 인식양상이다. 관(觀)은 범어로 vicāra로서 현장은 사(伺)로 번역하고 있으며, 언어로 서술되기 이전의 상념(想念)단계를 말한다. 따라서 각관(覺觀)은 대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언설로써 개념화하지 못하고 의식 속에 형상화하거나, 언설의 작용에 의하여 개념화하여 객체화하는 작용으로써 이것에 의해 대상을 정립하므로 희론(戱論)이 이루어진다.
  9. 9)방등(方等)은 vaipulya로, 대(大)가 보다 더 크게 증장되어졌다는 의미이다. 방광(方廣)이라고도 한다. 보다 더 증장 발전한 대승이란 뜻이다.
  10. 10)방등교가 설명하는 이치는 무분별지이며, 이 무분별지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11. 11)범본에는 vastu로 되어 있고 현장도 사(事)로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소취가 아니고 소취와 같이 인식되어진 청정한 상식(相識)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석에서도 취하여진 것과 같은 것이 체상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소취가 아리야식에 은장되어 상분이 되듯이 다문에 훈습되어진 의지가 청정한 상식의 의지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12. 12)허망분별에서는 연기하는 과정에서 갈애(渴愛)로 말미암아 대상을 취(取)하기 때문에 이미 염상(染相)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그러나 정사유(正思惟)한다면 연기의 과정이 끊어져 염상으로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소취와 같은 것이란 현장 역에서처럼 사(事)로 인하여 취하여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3. 13)불교에서 외진(外塵)이 실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인식작용이 모두 의언분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진이 실재한다면 무분별지는 전도를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이 불교철학의 기본적인 자세라는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14. 14)보살의 52종류의 수행의 위계 가운데 서른한 번째로부터 마흔 번째의 위계를 10회향이라고 한다. 자신이 수행한 공덕을 다시 중생에게 향하게 하는 공덕을 말한다.
  15. 15)보살 10지 가운데 첫 번째의 위계.
  16. 16)대승법이란 대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아니고 대승의 가르침에 의해 드러나는 의언분별이라고 하는 인식현상을 대승의 인식현상이라고 한다.
  17. 17)문혜(聞慧)를 뜻한다.
  18. 18)행온(行蘊)이 작용하는 것이다.
  19. 19)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을 말한다.
  20. 20)번뇌가 일어남. 취(取)의 작용이 있는 것을 말한다.
  21. 21)유류법(有流法:有漏法)과 무류법(無流法:無漏法)을 말한다.
  22. 22)4계를 4대(大)와 같이 혼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인 삼계(三界)에 허공계(虛空界)를 포함하여 4계라고 한 것 같다.
  23. 23)6도(道) 가운데 하나.
  24. 24)원문은 무가여등(無可與等)이다. 주거나 기다릴 수 있는 등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불어 비교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25. 25)거친 번뇌가 생함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26. 26)의타성이 생사를 이루는 분별적 작용에서 열반을 이루는 무분별적 작용으로 변이하는 것, 곧 색신이 법신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27. 27)뒤에 설명이 나온다. 허망분별이 끊어진 경지. 희론(戱論)이 적멸한 경지.
  28. 28)불과(佛果)와 같은 말이다.
  29. 29)기(記)의 네 가지 분류 가운데 네 번째인 응치기(應置記)에 해당하는 것이다. 선이나 악으로 분류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30. 30)범세계(梵世界)라고도 하며,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 가운데의 하나인 대범천(大梵天)의 세계이다.
  31. 31)승의제.
  32. 32)세속제.
  33. 33)대치(對治)한다는 의미.
  34. 34)6권에서 네 가지 의지[四依]를 설명할 때 네 번째로 뒤집는 의지[飜依]를 설명하였다. 문장과 구절의 드러내고자 하는 비밀한 뜻이 사전적인 의미로 드러나는 의미와는 다르기 때문에 드러난 의미를 취하지 않고 비밀한 의미를 취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 범어 원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5. 35)견고하게 정립한다는 의미.
  36. 36)3자성(自性). 의타성ㆍ분별성ㆍ진실성을 말한다.
  37. 37)3무자성(無自性). 생무성ㆍ상무성ㆍ진실무성을 말한다.
  38. 38)범어로는 ātma-grāha이다. 절대적인 존재성을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我)에는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있는데 여기서는 법아의 아집을 말한다.
  39. 39)아(我)에 속하는 것 또는 아(我)의 작용이라고 집착한다.
  40. 40)4성제(聖諦), 즉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가운데의 집제이다. 5취온(取蘊)의 인이 된다.
  41. 41)번뇌망상하는 위계.
  42. 42)논리적인 추론 등을 통하지 않고 직접 지각[直觀]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도 증지가 부정품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증지는 단지 분별이 없는 6식에 불과하지 깨달음의 인식수단이 아니다.
  43. 43)수행의 방편으로 탐욕 등을 끊기 위해 사람의 신체가 백골(白骨)로 이루어져 있다고 관하는 골쇄관을 닦을 때 나타나는 해골의 형상들을 말한다.
  44. 44)심연상을 연하여 이루어진 경계.
  45. 45)abhisaṃskāta. 행(行) 등의 의식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46. 46)위에서 말한 골쇄취를 의미한다.
  47. 47)현장 역에서의 심사(尋伺)와 구분하여야 한다. 심사를 진제는 각관(覺觀)으로 번역하고 있다. 깊이 심구하여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뒤에서 헤아리고 의심하여 결정코 깨우치는 것을 심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48. 48)svabhvāva-viśeṣa-prajñapti. 자성이라고 인식되어진 것, 차별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의 의미이다.
  49. 49)이것에 대해서는 『삼무성론(三無性論)』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삼무성론』 대정장 31권, p.868 a 참조).
  50. 50)현장 역에서는 5온(蘊)이라고 한다.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51. 51)상음(想陰). 의식에 있어서 대상을 떠올려 생각하는 작용, 그려본다는 의미이다.
  52. 52)원문에는 몽상(夢想)으로 되어 있으나, 몽상(夢相)이 맞는 것 같다. 6권에서 의타성을 여덟 가지 비유로 설명하는 가운데 꿈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설에서 ‘몽상(夢相)의 비유’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본 논서, 대정장 31권, p.192 c 참조).
  53. 53)깊고 깊은 의(義)라고 한 것은 자성을 깊이 궁구함으로써 그 실체적 대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 실체적 대상이 심심미묘하다는 의미이다.
  54. 54)식(識)은 소취(所取)로서의 진(塵)이 있는 인식의 수단이고, 양(量)은 소취가 없는 유식(唯識)의 인식 수단이다. 인식의 양상을 유량(唯量)ㆍ유이(唯二)ㆍ종종(種種)으로 구분할 때의 유량이다.
  55. 55)svabhāva-viśeṣa-prajñapti.
  56. 56)arthatva. 실재하는 실체를 말한다. 앞에 명과 의를 말할 때의 의는 artha이다. 두 용어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57. 57)upasthāna, coming into the presence of의 뜻을 현장은 성현현(性顯現)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능취ㆍ소취가 없는 유식의 인식상태에서 대상이 분별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대상은 실체적 대상이 분별에 의해 증익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므로 무분별한 의식에 나타난 자성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를 순수 파악의 대상과 실체라는 의미로 혼용하고 있다. 실체의 뜻으로 쓸 때는 arthatva로 표현하는 경우가 보인다.
  58. 58)앞에서 이미 진(塵)이 차별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보았다.
  59. 59)이 구절에서 의(義)가 실체적인 대상이라는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60. 60)여기에서 등나무라는 진실성을 얻었음에도 다시 의타성에서의 진실성을 굴복시켜 없애야 한다는 것은 의타성이 전의하여 생무성을 이루지 않으면 다시 의타성 가운데 분별성을 집착하게 되므로 무생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해심밀경』에서 “곧 중생이 언설을 일으켜 언설에 훈습된 마음과 언설의 수각과 언설의 수면으로 말미암아 의타성과 진실성 가운데서 분별성을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내세에 의타성을 생하여 번뇌잡염에 물들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등나무라는 지각도 멸하여져야 한다는 것은 의타성에서 진실성이 현현하는 것도 멸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생무성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61. 61)상무자성(相無自性).
  62. 62)생무자성(生無自性).
  63. 63)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4진(塵)의 극미(極微).
  64. 64)5온(蘊) 가운데의 상온이 대상 차별적인 사유가 아니고 유식의 경계에서의 상온(想蘊)을 말한다.
  65. 65)앞에서 언설훈습에 의해 명언(名言)이라는 부정품법이 생하며, 명은 취(取)의 의지라고 설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다시 무분별지가 명이며, 명이 법계라고 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곧 『대승장엄경론』에 세간이 곧 법계라는 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함에 있어서, 실체적 대상[義]에 상응하는 명(名)은 언설훈습을 통해 아리야식에 간직되며, 이것이 인(因)이 되어 대상에 대한 인식 또는 취(取)를 일으킨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과정에서 희론되기 때문에 지장(智障)과 혹장(惑障)이 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가 무분별지에 의해 제거되어지면 명은 법계를 이루어서(금이 흙에 묻혀 있다는 비유 참조) 종자가 되어 무분별후득지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무분별지가 명이며 명이 법계라고 하며, 또한 세간이 곧 법계이다”라고 말한다. 뒤에 8권에서 과명(果名)과 장명(障名)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과명이 법계이며, 장명이 언설훈습에 의한 명언이다.
  66. 66)이 때의 상은 분별하지 않으므로 정상(淨相)이다.
  67. 67)이미 능취와 소취가 없으나, 생무성으로서의 인식작용이 있어서 나무나 돌과 같지 않으므로 이러한 본체의 작용을 표현하기 위해 능연과 소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8. 68)첫 번째의 법은 인식현상을 말하고 이 법은 가르침을 말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법의 용례는 크게 이 둘로 나눌 수 있고, 인식현상이라는 법에서 유위법과 무위법 그리고 유루법과 무루법으로 나눌 수 있다.
  69. 69)geya. 중송(重頌).
  70. 70)A의 발음.
  71. 71)범음의 H의 발음을 음사(音寫)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