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지혜의 의지처[智依]2)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고, 둘째는 지혜의 양상[智相]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다. 셋째는 지혜의 양상에 들어감[入智相]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고, 넷째는 그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다. 다섯째는 그것에 들어가는 수행의 원인ㆍ결과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고, 여섯째는 다시 그 수행의 차이 가운데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다. 일곱째는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고, 여덟째는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다. 아홉째는 단멸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고, 열째는 지혜의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다. 이와 같이 이 수다라의 문구는 대승이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말 중에서 소승경전에서는 이 열 가지 문구를 말하지 않고 오직 대승경전에서만 밝힌다. 이른바 아리야식(阿梨耶識)이 지혜의 의지의 자체이다. 세 가지 자성이 있으니, 첫째는 타성(他性)이고, 둘째는 망분별성(妄分別性)이며, 셋째는 성취성이다3). 지혜의 양상의 자체이기 때문에 유식이라고 말한다. 지혜의 양상에 들어가는 일은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한다.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의 일이란 열 가지 보살지에서 그것을 돌이켜서 수행함이다.
016_1262_b_01L그 차별의 자체 중에서 보살계를 받음을 매우 높은 계율이라고 부른다. 수릉엄삼매4)와 허공삼매5) 등의 여러 삼매는 매우 높은 마음의 자체이다. 분별없는 지혜를 말하여 매우 높은 지혜6)의 자체라고 한다. 머물지 않음의 열반을 말하여 단멸인 그것의 증과의 자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이 있으니, 첫째는 진신(眞身)이고, 둘째는 보신(報身)이며, 셋째는 응신(應身)이다7).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이다. 이와 같이 말한 열 가지 문구는 소승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고, 오직 대승에서만 뛰어난 말씀과 최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위해서 말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대승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열 가지 승묘함과 뛰어난 말이 있음을 설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어째서 이 열 가지 양상의 승묘함과 여래의 뛰어난 말씀은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소승은 대승이 아니라고 부정하는가? 이 열 가지 문구는 소승경전에서는 말하지 않고, 대승에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문구는 능히 대보리를 증득하고, 잘 성립하고 위배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게송으로 설한다.
그 말씀은 다른 곳에는 없네. 이 견해는 뛰어난 원인이고 최상의 보리이므로 부처님께서는 대승 가운데 열 가지 문구의 뛰어난 말씀을 이 경전에서 설하시네.
016_1262_b_15L彼說餘處所無有, 此見勝因上菩提,
佛語說於大乘中, 十句勝說於此經。
어떤 의미 때문에 이 열 가지 문구는 이러한 순서로 말하는가?8)
016_1262_b_17L有何義故,此諸十句如是漸次說是?
그 까닭은 보살이 처음 수학할 때, 먼저 마땅히 모든 법의 원인과 결과의 의지처를 알고 인연에 대해서 잘 통달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연생법(緣生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잘 통달해야 한다. 사나움ㆍ편안함ㆍ비방을 여의고 두루 잘 통달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처럼 잘 수학하기 때문이고, 그 잘 취한 양상에 대해서 마땅히 증득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 가운데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
016_1262_c_01L그런 다음에 지혜의 양상에 들어가고서, 이전의 수행 가운데 6바라밀을 닦아서 증득하니, 이미 몸과 마음을 청정히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정한 마음에 포섭되는 6바라밀이기 때문에, 10지 중에서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3아승기겁9)을 수행한다. 그런 다음에 세 가지 보살계10)를 원만케 한다. 원만하게 하고서 그 증과인 열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야 한다. 이것이 열 가지 문구를 순서대로 말함이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 모든 대승이 다 요약되어 있다.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性]12)이고 일체법의 의지처이네. 그것이 있어서 모든 윤회세계가 차별이 있고 열반을 증득하게 하네.
016_1262_c_10L無始已來性, 一切法所依, 有彼諸道差,
及令得涅槃。
다시 그 경전에서 설하였다.
016_1262_c_12L還彼經所說:
일체의 모든 법이 저장되니 그 식은 일체 종자식이네. 그러므로 저장식[家識]이라 이름하나니 뛰어난 자는 이것을 교법으로 삼네.
016_1262_c_13L一切諸法家, 彼識一切種, 故說爲家識,
聰明者乘此。
이것은 경전의 증명이다. 다시 그것은 무슨 까닭에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하는가? 유정의 법은 그 식에 의지하여 모든 잡염법이 결과가 되고, 그것들에 있어서도 역시 모든 식에 의지해서 원인이 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부른다. 혹은 다시 중생이 그것을 의지해서 자아로 삼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을 역시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어떤 증명이 있는가?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에서 설하였다.
아타나식은 가장 미세하고 심오하며 비유하면 모든 종자는 물결과 같네. 나는 범부를 위해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느니 집착해서 그것을 자아로 삼음을 막기 위해서이네.
016_1262_c_21L阿陁那識最微深, 喩如水波於諸子,
我不爲凡言說此, 莫執取以之爲我。
016_1263_a_01L그것은 무슨 의미 때문에 아타나식13)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감각기관을 유지하기 때문이고, 모든 의지처의 자체를 취하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그것에 의지해서 모든 감각기관이 파괴되지 않고,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순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신체를 취하나니, 그것이 능히 생기해서 신체를 취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타나식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또한 심(心)이라고 이름한다. 부처님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한 것과 같다.14)
016_1263_a_05L彼亦名心,如佛所說心`意`識爾。
여기서 의(意)에 두 가지 의지처가 있다. 첫째는 근작연(近作緣)15)의 성품이니, 가까이에서 멸한 식과 의식이 생기하는 원인의 의지처가 된다. 두 번째 의는 네 가지 번뇌인 신견(身見)ㆍ아만(我慢)ㆍ애신(愛身)ㆍ무명과 항상 함께한다. 그것은 식이 잡염되어 생기하는 의지처이다. 식은 첫 번째 의지처에 의해 생기한다. 두 번째는 잡염된 경계의 식의 의미이다. 가까운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며, 대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의(意)임을 밝힌다.
잡염된 장애의 무명,17) 같은 법인 다섯 가지 식, 삼매 혹은 뛰어난 차이를 설하는 가운데 마땅히 과실을 이루네.
016_1263_a_11L雜染障無明, 同法及諸五, 三昧或勝事,
說中應誠患。
무상천에서 아상을 일으켜서 태어남이 계속되어 끝이 없네. 가까이 수순해서 아상을 일으켜서 일체가 성립되지 않네.
016_1263_a_13L無想而起我, 生順行無窮,
近順起我相, 一切是不成。
염오의 마음의 성품이 없으면 두 가지가 없고 세 가지는 위배되네.18) 그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아집을 이루는 등의 뜻이 없네.
016_1263_a_14L離染無心事,
二三是相違, 彼無一切處, 執成我等義。
마음이 참된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에 항상 수순하여 위배되지 않네. 모든 부분과 함께 작용하므로 무명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네.
016_1263_a_15L心順正義故, 常順不相違, 一切是同行,
說無明不離。
세 번째로 심(心)의 자체는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곳에 없다. 이런 의미 때문에 아리야식이 심(心)의 자체를 이룬다고 해석한다. 이것을 종자로 삼아서 그 의(意)와 의식이 작용한다. 무슨 까닭에 심이라고 하는가? 갖가지 법의 종자가 훈습하여 쌓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016_1263_b_01L부처님은 무슨 까닭에 소승경전에서 그 심을 아리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한다고 말하지 않으셨는가?19) 심오하고 미세한 지혜의 경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성문은 일체를 아는 지혜를 성취한 분의 지혜를 배우고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는 지혜를 풀어서 말하고 다시 해탈을 말하여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살은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성취한 분의 지혜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이 식을 말한다. 만약 말하지 않았다고 그 식을 부정하면,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성취한 분의 지혜를 알고 행하기 어렵다.
또한 다른 명칭으로 소승경전에서 그 식을 말한다.20) 『증일아함경』에서 “세간에서는 아리야(阿犁耶)를 즐기고, 아리야와 아리야로 이루어진 것을 집착하며, 아리야를 구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아리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법을 말할 때 가까이하고 바르게 들어서 수순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법을 구하고 법에 따르고자 한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할 때 세간에서 이 희유한 법을 말한다. 『여래출사익경(如來出思益經)』에서 이런 의미를 말한다. 소승경전에서도 역시 다른 명칭으로 이 아리야식(阿犁耶識)을 말한다. 대중부의 『증일아함경』에서도 역시 그것을 말하여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지부[彌沙塞部]에서도 역시 말하여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乃至世間陰不斷]21)이라 한다. 이처럼 다른 명칭으로 역시 그 식을 말한다.
혹은 어느 때 물질과 마음이 단절되더라도 아리야식에는 단절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종자이다. 그러므로 그 지혜의 의지처는 아타나식의 체성이고, 심의 체성이며, 아리야식의 체성이고, 근본식의 체성이며,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의 체성이다. 그것은 아리야식을 말한다. 이 아리야식의 흐름은 분명하게 뛰어나서 마치 대왕의 길과 같다.
016_1263_c_01L다시 다른 부류는 여래께서 『아함경』에서 말씀하신 바 “세간은 아리야를 즐기고……” 등의 문구는 5음을 아리야라고 말한다고 한다. 다시 다른 부류는 탐욕 등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이 아리야라고 말한다. 혹은 다시 말하기를 신견이 아리야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야식에 대해서 미혹하기 때문이고, 혹은 듣거나 해설한 것에 의거해서 이렇게 말한다. 소승경전과 분별에 의지해서 안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분별과 안립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렇게 분별한다. 아리야식은 이렇게 차별해서 말하면 뛰어난 것이 된다.22)
어째서 뛰어난가? 그것이 5음이라면 살기 괴로운 세계의 태어나는 곳에서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을 때 혐오하게 된다. 그는 이미 한결같이 혐오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항상 싫어해서 떠나기를 구한다. 만일 아리야식이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이라면 제4선(禪)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싫어해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중생 가운데 의지처는 성립되지 않으며, 신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법 가운데 무아를 믿는 자는 혐오해서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그 의지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야식이 내면의 의지처가 됨은 인정된다.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는 세계에 태어나는 자는 괴로움의 5음에서 해탈하기를 구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자아로 보는 양상이 있어서 그 해탈이 상응하지 않는다. 제4선 이상에 태어나는 자는 비록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상(我相)과 아애(我愛) 등을 일으킨다. 이처럼 이 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는 자는 비록 신견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애를 짓는다. 이상과 같이 아리야식을 분별하여 뛰어나고 밝은 지혜가 된다. 이것이 아리야식의 비슷한 이름과 다른 명칭들을 분별하여 안립함이다.
016_1264_a_01L또한 이것의 양상을 분별하는 일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23) 그것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의 양상[自相]을 차별하고, 둘째는 원인의 양상을 차별하며, 셋째는 결과의 양상을 차별한다. 이 중에서 아리야식의 자체의 양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모든 잡염법의 훈습에 의지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의 양상과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인의 양상을 차별하는 의미는, 그 모든 잡염법에 대해서 그 아리야식이 일체 종자로서 언제나 원인이 되어 현전케 함을 말한다. 이 중에서 결과의 차별이란, 아리야식 중에서 그 모든 잡염법이 아득한 옛적부터의 훈습(熏習)에 의지해서 생겨남을 말한다.
무엇을 훈습이라 이름하는가?24)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법에 의지해서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성품이 있으며 이것을 말한다. 이른바 꽃이 호마(胡麻)를 훈습하고 호마와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 향기의 원인의 성품으로 생겨남과 같다. 혹은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의 훈습이 있고, 그것이 탐욕 등과 함께 생멸하여 그 마음이 그 원인의 양상으로 생기한다. 혹은 많이 듣는 이는 많이 들음의 훈습이 있고, 그 들어서 지니는 생각과 함께 생멸하며, 마음 안에서 그 원인의 양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훈습의 의미 때문에, 마치 법의 그릇을 역시 법을 지닌다고 이름하듯이 아리야식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016_1264_b_01L그 아리야식과 모든 잡염법이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26) 비유하면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원인으로서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됨과 같다.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붙들어서 동시에 땅에 쓰러지지 않음과 같다. 마땅히 알지니,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서로 원인이 된다. 아리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듯이, 모든 잡염법이 아리야식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렇게 인연을 안립하나니, 다른 인연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는 갖가지 훈습이 어떻게 분별이 있는 갖가지 법의 원인을 이루는가?27) 이른바 갖가지 색깔로 물들여진 옷과 같다. 처음에는 갖가지 색깔을 보지 못하지만, 그 옷을 염색 그릇에 담으면 그때는 갖가지 색깔의 차이를 보게 되므로 하나가 아니다. 아리야식의 갖가지 훈습도 이와 같다. 훈습할 때는 여러 가지가 없지만, 결과를 일으킬 때는 염색 그릇에서처럼 갖가지 수많은 법의 성품이 나타난다.
이것은 대승 가운데 심오하고 매우 미세한 인연법이다.28)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성의 차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결과의 차별이다. 이 중에서 이 아리야식에 의지해서 모든 법을 생기하는 것이 자성의 차별이다. 갖가지 자성의 분별이 조건[緣]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인연에 미혹한 이는 아리야식에 대해서 말하기를, 혹은 자성이 원인의 성품이라고 말하고,29) 혹은 과거의 지은 것이 원인의 성품이라고 말하며,30) 혹은 자재천의 변화가 원인의 성품이라고 말하고,31) 혹은 실체의 자아가 원인의 성품이라고 말하고,32)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말한다. 두 번째 인연에 미혹한 이는 또한 자신을 계탁하여 짓는 자와 받는33) 자로 삼는다.
016_1264_c_01L비유하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한 맹인들에게 어떤 이가 코끼리를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선천적인 맹인들은 혹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기도 하고, 혹은 이빨이나 혹은 귀ㆍ다리ㆍ꼬리 등을 만져보기도 한다. 그가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질문하면, 혹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 혹은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 혹은 절구 같다고도 하며, 혹은 빗자루[箒] 같다고도 하고, 혹은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석산(石山)34) 같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인연을 통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무명의 장애 때문에 마치 선천적인 맹인처럼 혹은 생각으로 헤아려 자성으로 삼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의 원인, 혹은 자재천ㆍ실체의 자아ㆍ원인 없음ㆍ짓는 자ㆍ받는 자라고 말한다. 아리야식도 코끼리의 경우처럼 체성ㆍ체상ㆍ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하면 아리야식의 원인의 성품과 결과의 성품은 과보식의 모든 종자의 성품이기 때문에 삼계에서 모든 신체와 모든 윤회세계를 포섭한다.
외부와 내부는 명료하지 않고 서로 수순하는 성품을 말하네. 그것은 세속의 모든 것과 진실이니 종자에 여섯 가지를 말하네.
016_1264_c_09L內外不分明, 而說相順事, 彼一切眞實,
說爲六種子。
공(空), 모든 요소와 함께함, 그것은 또한 수순한다고 말하네. 결정적임, 여러 조건[緣]을 필요로 함, 자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네.
016_1264_c_11L空及同諸大, 彼亦說隨順,
定而忘諸緣, 及自果將來。
그것이 보는 것, 무기성, 혹은 그것과 수순하여 남음이 없으며, 그것을 훈습함은 다른 곳이 아니네. 그것이 훈습의 양상이네.
016_1264_c_12L彼見而無記,
或順彼無餘, 薰彼非餘處, 然彼是習相。
여섯 가지 식에는 수순의 의미가 없고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네. 모든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고 나머지를 일으켜서 수순하기 때문이네.
016_1264_c_13L六無有順義, 二別相違故, 諸念無同故。
生餘隨順故。
내부와 외부의 모든 종자 그것은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하네. 상속하지 않고 취하여 다하기 때문이고, 자연스럽게 두루 멸하기 때문이네.35)
016_1264_c_15L內外諸種子, 彼說爲生因,
不續取盡故, 自然壞遍故。
나머지 여섯 가지 전식(轉識)은 그 모든 신체와 윤회세계의 과보를 수용함을 알아야 한다.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6_1264_c_16L 所有餘六轉順識,彼一切身道處受果報應知。如中『邊分別論』說。
첫째는 인연을 짓는 식36)이고 둘째는 과보를 수용하는 식37)이네. 분별하고 과보를 수용하는 것이 여러 심리작용[心]38)을 함께 일으키네.
016_1264_c_18L一是作緣識, 第二受果報, 分別受報者,
同發諸心爾。
그 모든 식은 다시 서로 연(緣)이 되기 때문에 『대승아비담수다라(大乘阿毘曇修多羅)』에서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64_c_20L彼諸識迭互作緣故,『大乘阿毘曇修多羅』有偈:
일체의 모든 법이 의지하고 그 모든 식도 그러하네. 다시 서로 결과의 성품이 되고 일체가 원인의 성품이 되네.
016_1264_c_22L一切諸法依, 如是彼諸識, 迭互作果事,
一切及因事。
016_1265_a_01L만일39) 이 모든 식이 첫 번째 인연에서 서로 인연의 결과가 된다면, 두 번째 인연에서는 어떤 연(緣)이 있는가? 증상연이다. 그런데 이 여섯 가지 식은 몇 가지 조건[緣]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증상연40)ㆍ염연(念緣)41)ㆍ차제연42) 등의 연생이다. 이 나머지 세 가지 인연, 즉 세간이 다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윤회세계, 수용하는 과보는 네 가지 조건[四緣]을 이룬다.
이와 같이 아리야식의 다른 명칭과 양상을 분별하여 안립하였다. 또한 이러한 다른 명칭과 이러한 양상은 오직 아리야식에만 있고 여섯 가지 수순하는 전식에는 그렇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렇게 아리야식을 분별하여 안립하지 않으면 잡염과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번뇌의 잡염이나 업의 잡염이나 생의 잡염도 성립되지 않고, 세간의 청정도 출세간의 청정도 성립되지 않는다.43)
어째서 번뇌의 잡염의 일이 성립되지 않는가?44) 여섯 가지 식에서는 번뇌와 잡염의 훈습이 종자가 되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使]45) 등과 함께 생멸하고, 그것이 훈습으로 인하여 종자를 이루며 다른 곳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안식은 이미 멸하였고 다른 식 중간에는 훈습이 없으며 훈습의 의지처도 볼 수 없다. 이미 안식과 이전에 멸한 빛깔ㆍ형체가 없어서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가 성립되지 않는다.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겨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음과 같다.
또한 그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는 것도 훈습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탐욕은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탐욕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식도 아니니, 모든 식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고 모든 식이 동시에 생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의 성품이 아니니, 다른 것의 성품은 함께 생멸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에 훈습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그 식은 식의 훈습처도 아니다. 마땅히 알지니, 안식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여섯 가지 수순하는 전식(轉識)도 이렇게 해석한다.
016_1265_b_01L또한 비상천(非想天)46) 등 상부의 지위로부터 죽어서 이곳에 태어나면 번뇌의 잡염이 있다. 그것이 처음 생기하는 식에는 또한 종자가 함께 생겨나는 일이 없다. 의지처와 그것의 훈습은 이미 과거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를 다스리는 식이 생기하고 나서 그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멸하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그 다스리는 식 안에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번뇌에 대해서 (그 다스리는 식은) 자성 해탈이기 때문이고,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세간의 식이 생기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리야식이 없다면 의지처와 그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없기 때문에 종자가 없어서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째서 업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47) 행(行)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는 것이 수순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이것이 없으면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됨도 역시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65_b_10L云何業染不成?行緣識不順義故。彼無,取緣有亦不順故。
어째서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48) 다음 생의 의지신을 취함이 수순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정이 아닌 지위에서 죽어서 중음49)에 머물면서 잡염의 의식을 반연하여 다음 생의 의지신을 취하면, 그 잡염의 의식은 중음 안에서 멸한다. 그것은 가라라(歌囉囉)50)로써 모태 안에 의탁한다. 만약 오직 의식이 의탁한다면, 의탁하고 나서 그 의지하는 세력 때문에 모태 안에 마땅히 식에 의지해서 작용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두 가지 의식이 모태 안에서 동시에 있어야 하므로 그 의탁한 것은 의식이 아니고, 의식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다. 잡염의 의지신이기 때문이고, 의식의 인식대상에 수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의식에 의탁한다 하더라도 그 의탁한 의식을 일체 종자식으로 삼겠는가? 장차 그 의지신에 따라서 의지하여 작용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그 의탁한 것이 일체 종자식이라면 그것은 오직 아리야식이다. 다른 명칭으로 안립하여 의지하는 식으로 삼은 것뿐이다.
016_1265_c_01L만일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종자식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지처인가? 원인으로서의 식이 일체 종자식이 아니고, 의지처의 과보의 성품이 일체 종자식이라는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해석은 성립된다. 그 의탁하는 식은 의식이 아니고 과보식이다. 그것은 일체 종자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 생의 의지신을 취하고서 무엇이 감각기관을 집취하는가? 과보식이 아니면 의(意)와 의식에서는 볼 수 없다.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므로 그 나머지 식이 감각기관을 집취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이 식과 멸색(滅色)51)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 마치 갈대 묶음이 수순하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과보식이 아니면) 그것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과보식은 식식(識食)52)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생은 과보식이 아니면 여섯 가지 식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삼계에 태어난 중생들의 음식작용의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무색계에 태어나서 머물 때 일체 종자의 과보식이 없으면 잡염과 선근의 마음은 종자가 없어야 하고, 잡염과 선근의 마음의 의지처가 없어야 한다. 또한 그곳에서 출세간의 마음이 현전하면 나머지 세간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 작용은 마땅히 없어야 한다. 또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53)에 태어나거나 불용처(不用處)54)의 출세간의 마음이 현전할 때는 마땅히 그 두 세계를 여의어야 한다. 그 출세간의 식은 비유상비무상처를 의지처로 삼지 않고 불용처[非有用處]를 의지처로 삼지 않으며, 열반을 의지처로 삼는다.
016_1266_a_01L또한 육신을 버리고자 할 때 혹은 선과 불선을 지어서 혹은 위로부터 혹은 아래부터 의지처가 점차 차가워지며 독이 소멸하고 청량해진다. 아리야식이 없으면 이런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 종자의 과보식이 없으면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째서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55) 이와 같이 모든 욕망을 떠나려는 이가 아직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오직 욕계의 선심을 얻으며 욕계에 대해서 혐오하게 된다. 그런데 욕계의 가행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의 종자가 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그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수많은 생에 간격지워져서 그 선정에 드는 마음의 종자가 되지 못한다. 이미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은 설명하였다. 그 선정에 든 색계의 마음은 일체 종자의 과보식이 오랫동안 전전해 와서 지금의 인연이 되고, 그 선행의 습기 때문에 그 마음이 증상연이 된다. 이처럼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런 의미에 수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 종자의 과보식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어째서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56) 부처님께서 “밖으로 남의 말을 듣고 내면적으로 고요히 사유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남의 음성을 듣고 생각하는 것은 이식(耳識)에 훈습되는가? 의식에 훈습되는가? 아니면 양쪽에서 훈습되는가? 여기서 그 모든 법을 고요히 사유해서 잊지 않고 지니면 그때 이식(耳識)은 작용하지 않는다. 의식도 역시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된다. 만약 고요히 사유하는 작용이 생겨날 때는, 그 오래 전에 멸하여 무상한 의식과 문훈습(聞熏習)은 이미 자체가 없다. 어떻게 다시 그 종자의 마음이 나중에 고요히 사유하는 작용이 생겨나겠는가?
016_1266_b_01L또한 그 고요하게 사유하는 수행은 세간의 마음이고, 그 바른 견해와 함께 수순함은 출세간의 마음이다. 어느 때라도 함께 생멸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훈습되지 않는다.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출세간의 청정은 일체 종자의 과보식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중에서 문훈습이 그 종자를 섭수하는 것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떻게 일체 종자의 과보식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는 출세간의 마음의 종자가 되지 않는가? 출세간의 마음은 일찍이 없으므로 그 훈습이 본래 없다. 이미 그 훈습이 없는데 무슨 종자로부터 생겨나겠는가? 그것은 마땅히 매우 청정한 법계이고 오직 문훈습의 종자로써 생겨난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심에 이르기까지, 그 문훈습은 몸과 마음을 좇아서 그 공통된 성품을 나타내고, 과보식 중에서 작용도 역시 그러하다.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 그러나 그것57)은 아리야식이 아니다. 그 다스림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미약한 훈습에 의지해서 중품의 훈습을 생겨나게 하고, 중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상품의 훈습이 생겨난다. 많이 듣고 사유하며 닦음에 수순하는 의미 때문이다.
016_1266_c_01L또한 그 출세간의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에 기운을 나타내서 번뇌를 다스리고, 괴로움의 세계를 다스리며, 모든 악업을 소멸하여 다스린다. 또한 모든 불보살에게 수순하고 가까이한다. 이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역시 법신에 포섭됨을 알아야 한다. 모든 성문과 독각은 해탈신에만 포섭된다. 또한 그 아리야식은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된다.
처소에 따라 미약함ㆍ중품ㆍ상품으로 점차 증장하면서, 이와 같이 이렇게 과보식의 미약하고 열등한 의지처도 역시 점차 전환된다. 의지처가 점차 지혜로 전환되어 영원히 의지처의 전환을 이룬다. 그 과보식인 일체 종자식은 종자를 여의어서 영원히 단멸됨을 이룬다. 또한 그 아리야식은 마치 물과 우유처럼, 어떻게 아리야식이 아닌 것과 동일한 성품으로 작용하는가? 언제나 멸진하나니, 마치 거위가 물 속에서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혹은 세간을 혐오함에 들어가고, 혹은 선정의 훈습이 감소함에 들어가고, 선정의 훈습이 증장함에 들어감으로써 의지처의 전환을 얻음과 같다.
또한58)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집착하지 않더라도 식은 그 안에서 떠나지 않음이 성립된다. 멸진정은 그것59)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곳에서 나와서 다시 생기하지 않는다. 과보식은 중단되면 다른 곳에서 취해서 수순할 수 없다. 또한 만일 헤아려서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마음은 역시 선ㆍ불선ㆍ무기의 성품이 생기하지 않아야 하므로 그것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60) 만약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나중에 모든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하면, 역시 생겨나지 않음을 앞에서 분별하였다. 또한 색계나 무색계에서 죽거나 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이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차제연(次第緣)이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일체 종자의 과보식을 떠나서는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다. 따라서 그 해석과 양상의 설명이 성립된다. 여기서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66_c_19L如是一切種子報識中閒無染無淨成。是故釋成彼無,及隨所相說。是中說偈:
보살은 청정한 마음에서 5식(識)을 여의네. 나머지를 여의고 전의를 어떻게 마음이 이루겠는가?
016_1266_c_21L菩薩淨心, 離諸五識, 離餘轉事,
心云何作?
다스림이 전의라면 한량없으므로 성립되지 않네. 원인과 결과를 분별하면 그 단멸은 마땅히 수순해야 하네.
016_1266_c_23L對治迴轉, 無量不成,
因果分別, 彼滅應順。
016_1267_a_01L종자를 여의고 자체가 없음을
만일 인정해서 전의로 삼으면 그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전의는 성립되지 않네.
016_1267_a_01L離子非事,
若取轉事, 彼事二無, 轉事不成。
또한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어떠한가?61)
016_1267_a_02L何者復此阿犂耶識差別事?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 가지는 세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다. 첫째는 언설훈습[言說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신견훈습[身見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인연훈습[因緣習]의 차별이다.62) 네 가지 훈습의 차별은 첫째는 취하는 시기[取時]의 차별이고, 둘째는 과보[報]의 차별이며, 셋째는 자체를 반연함[念事]의 차별이고, 넷째는 양상[相]의 차별이다.63)
이 중에서 취하는 시기의 차별은 모든 훈습이 생겨남을 말한다. 이것이 없으면 행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고,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중에서 과보의 차별은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과보를 받음을 말한다. 이것이 없으면 종자가 없게 되며, 다음 존재의 모든 법이 생겨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자체를 반연함의 차별이란 그 염오의[意]가 아상(我相)을 반연함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염오의가 자아라고 반연하여 집착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양상의 차별은 그 공통된 양상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의 양상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의 양상 등이다.
공통된 양상은 자연계의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내부의 종자이다. 공통된 양상은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다스림이 생겨나면 공통되지 않은 것의 장애가 멸한다. 공통된 양상은 타인의 망상 분별에 섭지되어져서 청정만을 본다. 관행을 닦는 사람들이 한 사물 중에서 갖가지 믿음과 갖가지 소견을 얻음과 같다.
단멸하거나 증득하기 어려운 속박을 공통된 성품이라 말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산란된 마음으로 스스로 외부를 반연하여 무너뜨리네.
016_1267_a_20L難滅證縛, 說爲同事, 行人亂心,
自念外壞。
청정한 사람은 위배되지 않아서 진실로 청정을 보네. 부처님의 계율은 청정하나니 모든 부처님이 청정이라고 보네
016_1267_a_22L淨不相違, 眞實見淨,
佛戒淸淨, 諸佛見淨。
016_1267_b_01L그것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ㆍ공통된 양상ㆍ감각 지각작용이 있는 종자, 그것이 없으면 자연계와 중생 세간이 수순하는 차별된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거칠고 껄끄러운 양상과 평안함의 양상이 있다. 거칠고 껄끄러운 양상은 번뇌와 수번뇌[使]의 종자이다. 평안함의 양상은 유루 선법의 종자이다. 그것이 없으면 과보에 지음과 짓지 않음의 의지처의 차별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수용과 수용하지 않음의 양상이 있다. 수용의 양상64)은 이숙보(異熟報)의 선ㆍ불선의 종자이다. 수용하지 않음의 양상은 언어로 훈습된 종자이고, 한량없는 분별에 수순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짓거나 짓지 않은 선악업의 과보를 받을 때 수용하지 않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언어훈습이 생기하는 일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비유의 양상이 있으니, 요술ㆍ불꽃ㆍ꿈ㆍ안질 걸린 눈 등이다. 그 아리야식이 없으면 허망된 분별의 종자 때문에 자체를 반연함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공통된 양상과 개별적인 양상이 있다. 속박을 갖추는 자는 공통된 양상이고, 세간의 욕망을 여의는 자는 감소가 있는 양상이다. 유학의 성문과 보살은 일부분의 의미와 한 곳에서 소멸의 양상이다. 아라한ㆍ벽지불과 모든 여래는 번뇌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과 번뇌장ㆍ지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이다. 수순하는 바와 같다. 이것이 없으면 점차 번뇌가 소멸하는 일은 없다.
선과 불선의 모든 법은 어떻게 과보를 받는가? 부정무기(不定無記)65)의 과보이다. 이와 같은 무기는 선과 불선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선과 불선은 서로 위배되므로,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번뇌가 전전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과보식은 오직 부정무기이다. 이상으로 지혜의 의지처를 설명하였다.
또한 지혜의 양상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66) 그것은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타상[他性]이고, 둘째는 망령된 생각의 분별상이며, 셋째는 성취상이다.67)
016_1267_b_20L智相復云何知?彼略有三種:一他性相`二妄想分別相`三成就相。
016_1267_c_01L이 중에서 무엇이 의타상인가? 아리야식의 종자에 있어서 허망된 분별에 포섭되는 식이다. 그것은 다시 무엇인가? 신식(身識)68)ㆍ여식(與識)69)ㆍ수용식(受用識)70), 그 수용되는 식[所受用識]71)과 수용하는 식[受用識]72), 시식(時識)73)ㆍ수식(數識)74)ㆍ방처식(方處識)75)ㆍ차별가의식(差別假意識)76)ㆍ자타분별식(自他分別識)77)ㆍ선도악도생멸식(善道惡道生滅識)78)이다.
이 중에서 무엇이 허망된 분별상80)인가?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그 식이 존재하여 대상의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016_1267_c_13L是中何者妄分別相?若非有塵,唯彼識作塵現取故。
이 중에서 무엇이 성취상81)인가? 그 의타상 가운데 대상의 모습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성품이다.
016_1267_c_14L是中何者成就相?若還彼他性相中,微塵相永無有事。
마땅히 알지니, 이 중에서 신식ㆍ여식ㆍ수용식 등은 안근 등 여섯 가지이다. 마땅히 알지니 그 수용되는 식은 색경(色境) 등 여섯 가지이다. 마땅히 알지니, 그 능히 수용하는 식은 안식 등 여섯 가지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 모든 식은 나머지 식의 차별이다. 또한 이 모든 식은 오직 식만 있을 뿐이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마땅히 알지니, 꿈 등으로 나타낸다. 이른바 꿈속에서는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갖가지 빛깔과 형체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집ㆍ숲ㆍ땅ㆍ산 등 대상으로 사현(似現)하지만, 그곳에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타내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은 오직 식이다. 의미에 수순해서 통달해야 한다.
016_1268_a_01L마땅히 알지니, 요술ㆍ아지랑이ㆍ사슴의 목마름82)ㆍ안질 걸린 눈 등으로 말한다. 그런데 꿈과 같이 깨어 있을 때에 어느 곳에서나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꿈에서 깨어나서) 마치 꿈에서는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깨닫는 것처럼 그곳에서도 역시 그렇게 전전하지 않는가? 진실한 지혜를 깨달으면 진실이 전전한다.
또한 『상속해탈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삼매의 경계에서 보는 영상, 그것은 마음과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다르지 않소.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인식대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오. 나는 식이 나타난 바라고 말하오.’ ‘세존이시여, 만약 그 삼매 경계의 형상이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마음이 그 마음을 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어느 법도 능히 취할 수 있는 법은 없소. 그러나 이 마음이 이처럼 일어나면 곧 이와 같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있소. 비유하면 영상을 반연함으로써 오직 영상을 보고 내가 영상을 본다고 말하며, 이런 까닭에 그 영상을 떠나서 영상의 모습이 사현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같으며, 본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하오.’”
016_1268_b_01L이 아함의 가르침에 의해서 바른 논리의 증명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에서 보는 바에 따라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靑瘀] 등 알아야 할 영상에는 외부대상인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 등이 없고 다만 그 마음을 볼 뿐이다. 이렇게 수순하는 해석에 의해서 보살은 모든 식에 대해서 이와 같이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경계가 없음을 미루어 알아야 한다. 또한 그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 등은 생각하여 지니는 식[憶念持識]이 아니다. 현전에 그 인식대상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들어서 이루는 지혜,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 닦아서 이루는 지혜는 역시 생각하는 바에 지니는 식이다. 그것은 역시 과거를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나타난 영상은 오직 식이다. 이 비유로써 증명을 삼기 때문에 보살은 비록 진실한 지혜를 아직 깨닫지 못했어도 마땅히 유식의 도리를 헤아려야 한다.
갖가지 모든 식은 꿈과 같다고 말한다. 그 식은 수순하여 유식의 이치를 성취한다. 또한 안식 등 모든 식에는 이미 물질이 있는데 역시 오직 식만이 존재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도 역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함의 가르침과 해석에 수순한다. 만약 오직 그 모든 식이라면 무슨 까닭에 물질의 속성으로 현현하는가? 오랫동안 머무는 자체로서 전전하고, 전도 등 번뇌의 잡염처(雜染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시기에 대상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삼는 허망됨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번뇌장과 지장(智章)의 잡염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그것이 없으므로 청정법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이렇게 수순하는 의미가 성립된다.
허망됨의 인식대상과 허망된 생각을 말하여 모든 물질의 식과 물질이 아닌 식으로 삼아야 하네.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다네.
016_1268_b_10L妄念及妄想, 說爲諸色識, 及無非色識,
有彼非餘者。
무슨 까닭에 시식(時識) 등 갖가지 식은 말한 것처럼 작용하는가? 무시이래로 세간이 유전하여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고, 한량없는 중생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불세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지어지는 수많은 일들이 서로 가설적인 명칭으로 분별하는 원인이기 때문이고, 한량없이 섭취하여 수용하는 차별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업의 과보의 수용하는 차별의 원인이 한량없기 때문이고, 한량없이 생사를 받는 차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016_1268_c_01L또한 어떻게 이 모든 식이 유식(唯識)의 성품을 이루는가? 대략 세 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는 다만 그것이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가지 성품에 의거하니, 마찬가지로 염식(念識)과 견식(見識)84)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갖가지 성품에 의거하니, 화가가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모든 식은 대상[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식이다. 이와 같이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을 함께한다. 안식 등은 색식(色識) 등으로써 상분을 삼기 때문이고, 그 식을 견분으로 삼으며, 나아가 신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오직 의식(意識)은85) 안식 등과 법식의 모든 식으로써 상분[色等念]을 삼고, 의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의식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식의 모습으로 현현하기 때문이다.
유식과 그 두 가지의 성품에 관행자의 의지가 들어가네. 오직 그 마음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그 세력이 이것을 이루네.
016_1268_c_03L唯彼二種事, 行者入意識, 唯入彼心已,
彼力所成此。
다른 이는 “오직 그 의식이 여러 가지로 전전함으로써 그들 명칭을 얻는다. 역시 (의업을) 신업과 구업으로 이름함과 같다”고 한다. 모든 의지처에서 전전함에 마치 화가처럼 두 가지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서 전전한다. 오직 그 대상으로 사현한 영상과 분별의 영상이다. 또한 모든 곳에서도 접촉된 영상에 비슷하게 전전한다. 색계에서 그 의식은 신체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그 나머지 감각기관이 신체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리야식의 식을 대상의 식으로 분별하여 안립하면, 나머지 모든 식은 그 상분의 식[念相識]임을 알아야 한다. 오직 의식의 식과 의지처는 그 견분의 식이다. 그것은 이처럼 오직 상분의 식이다. 이 견분의 식이 생기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 사현할 때 그 견분의 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된다. 이와 같이 이 모든 식은 유식에 머무는 것이 성립된다.
016_1269_a_01L대상을 볼 수 있는데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부처님께서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일체가 모두 식으로서 대상의 비존재성에 통달할 수 있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86) (첫째는) 다른 자의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相違識相智]87)이기 때문이니, 역시 아귀ㆍ축생ㆍ사람 및 여러 하늘[諸天]과 같이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보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상이 없는데도 인식[不念見覺識]88)하기 때문이니, 과거ㆍ미래ㆍ꿈에서 나타난 모습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노력하는 중간과 전도가 똑같이 따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지혜[加意中間顚倒同順智]89)이기 때문이니, 어떤 대상 중에 그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마땅히 전도됨이 없음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진실한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넷째는) 세 가지 지혜에 수순함을 알기 때문이다.90)
이와 같이 보살로서 선정을 얻고 마음의 자재를 얻은 이는 생각하여 지니는 힘에 의해 이와 같은 사물을 현현시킨다. 사마타(舍摩他:止ㆍ定)를 얻어서 법의 관찰을 수행하는 이는 오직 생각하면 곧 대상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무분별지혜를 얻은 이는 그곳에 안주하여 모든 대상을 현현시킨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 지혜에 수순하는 의미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의 네 가지를 근본으로 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의미가 성립된다.
만약 오직 식뿐으로서 대상으로 사현(似現)하는 의지처라면 의타성이 어떻게 의타기를 이루며, 무슨 의미 때문에 의타성이라고 이름하는가? 자신이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고, 다른 것을 반연하는 성품이다.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고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고 부른다.91)
그 허망된 생각의 분별이 자성92)을 의지처로 하여 일찍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대상으로 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허망되게 분별하며 무슨 까닭에 그것을 허망된 분별성이라고 이름하는가? 한량없는 인식작용[相]은 허망된 분별의 전도된 모습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허망된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자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허망된 견해이기 때문에 허망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만약 성취상이 영원히 (분별성의) 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성취성을 이루고 무슨 인연으로 성취성이라 이름하는가? (변이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성취성을 이루고, 청정한 인식대상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근의 승묘한 의미의 원인이기 때문이고, 또한 최상의 의미이기 때문에 성취성이라 이름한다.
016_1269_b_01L또한 분별과 분별되어지는 것이 있어서 분별성을 말한다. 여기서 무엇이 분별이고 무엇이 분별되어지는 것이고 무엇이 분별성인가? 의식은 분별이니, 능히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고, 모든 식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량없는 인식작용으로 분별하여 전전하고, 모든 곳에서 분별하고 허망된 생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이라고 말한다.
또한 의타성을 허망된 생각[妄想]이라고 한다. 반연된 대상의 자성에 따라서 의타성이 허망된 생각이고, 그곳이 허망된 생각의 자성이다. 어떤 양상 때문이고, 어떤 의미 때문인가?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또한 무엇이 허망되게 분별하고, 무엇을 분별하는가? 어떤 경계를 반연하고,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 무엇에 의지해서 집착하고, 무엇에 의지해서 명칭을 가립(假立)하며, 무엇에 의지해서 대상과 명칭을 안립하는가? 모습을 반연하기 때문이고, 의타성 중에 그 모습을 취한다. 견해로 인하여 그것을 집착하고, 분별하여 구업을 일으키며, 보는 것 등의 네 가지 세간의 행 때문에 대상의 비존재에 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여 안립한다. 그리하여 분별하고 허망되게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자성은 같이 작용하는가, 다르게 작용하는가? 다르지 않으며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다른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은 의타성을 이루고,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허망된 분별성을 이루며,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성취성을 이룬다.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이 의타성을 이루는가? 훈습의 종자가 의타성의 원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그것이 이처럼 허망된 분별성을 이루는가? 허망된 분별과 모든 분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에 따라서 이처럼 허망되게 분별하고, 분별의 대상처럼 그것은 이렇게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69_c_01L몇 가지가 있는가? 의타상에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훈습된 종자의 의타상이고, 둘째는 잡염과 청정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 의타상이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의타상 때문에 의타상이라 이름한다. 허망된 분별성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분별[成分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차별의 분별[勝分別]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분별이라 이름한다. 성취성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성취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청정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名]에 의지해서 대상[義]을 분별함이니, 이러한 명칭에 이러한 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둘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함이니, 이러한 대상에 이러한 명칭이 있다고 말한다. 셋째는 명칭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함이니, 아직 결정하지 못한 대상의 명칭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대상의 자성을 분별함이니,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명칭의 대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지해서 두 가지의 자성을 분별함이니, 이 대상과 이 명칭은 이와 같은 성품이라고 분별한다.
또한 모든 의미를 포섭하면 열 가지 분별이 있다. 첫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아리야식을 말한다. 둘째는 형상의 분별[相分別]이니 색식(色識) 등을 말한다. 셋째는 인식대상[念]의 현현하는 모습의 분별[念現相分別]이니 안식 등의 의지처의 식이다. 넷째는 인식대상이 변이함의 분별[念異分別]이니, 늙음 등ㆍ즐거움의 감수작용 등ㆍ탐욕 등ㆍ남이 핍박함ㆍ시절의 전변 등ㆍ윤회세계ㆍ욕계 등의 변이(變異)를 말한다. 다섯째는 인식대상으로 나타난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念現相異事分別]이니, 앞에서 말한 변이와 같은 그 변이의 모습을 말한다. 남이 이끄는 분별[他所將分別]이니, 정법을 듣지 않거나 정법을 들은 이의 분별이다.
여섯째는 고요하지 않은 사유[不寂靜思惟]이니, 정법을 듣지 않은 모든 외도를 말한다. 일곱째는 고요한 사유[寂靜思惟]이니, 정법과 같은 법을 듣는 것을 말한다. 여덟째는 집착의 분별[妬分別]이니, 바르지 않은 사량으로서 신견(身見) 등 62가지 국집된 견해 그것에 수순하는 분별이고, 산란된 분별[散分別]이다.93)
016_1270_a_01L모든 보살에 열 가지 산란된 분별이 있으니, 비존재 양상의 산란이기 때문이고, 존재양상의 산란이기 때문이며, 바르게 안립함의 산란이기 때문이고, 비방함의 산란이기 때문이며, 한결같은 성품의 산란이기 때문이고, 다른 성품의 산란이기 때문이며, 자성의 산란이기 때문이고, 명칭에 수순하는 대상의 산란이기 때문이며, 대상에 수순하는 명칭의 산란이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문구의 산란된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서 무분별지혜와 모든 반야바라밀을 말한다. 마땅히 알지니, 이처럼 그 장애와 다스림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한다.
만약 다른 명칭의 의미에 의하면 의타성에 세 가지 자성이 성립된다. 어째서 세 가지 자성은 무차별이 성립되지 않는가? 그 다른 의미에 따르면 의타성은 그 허망된 분별성이 아니고 성취성이 아니다. 그 다른 의미에 따르면 허망된 분별성은 그 의타성이 아니고 성취성이 아니다. 그 다른 명칭에 따르면 성취성은 이와 같이 그 의타성이 아니고 허망된 생각이 아니다.
또한 의타성과 같이 허망된 분별상이 현현하더라도 체성과 같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본래 명칭에 지각[慧]이 없어서 스스로 원인을 멸하기 때문이고, 명칭이 많아서 의지처가 많음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며, 명칭이 결정적이지 않아서 의지처의 잡염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다.
본래 명칭에 지각이 없기 때문이고 많은 명칭,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를 이룸, 의지처가 많음, 의지처의 잡염이 위배되기 때문이네.
016_1270_a_14L本名無慧故, 多及不定故, 成彼自多身,
穢身相違故。
모든 법의 자체를 인식할 수 있고 잡염과 청정 등을 보네. 마땅히 알지니, 요술과 같으며 또한 허공 등과 같네.
016_1270_a_16L覺見諸法事, 及見染淨等,
如幻應當知, 及如虛空等。
또한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한 의타성의 모습은 일체가 전혀 비존재는 아닌가? 그것이 비존재이면 성취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의타성과 성취성이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과실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잡염과 청정을 보기 때문에 일체가 다 비존재는 아니다.
016_1270_b_01L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대승의 방광(方廣)의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허망된 분별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명칭과 대상이 비존재라고 안다. 의타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지니 비유하면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거울의 영상ㆍ그림자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와 같다. 성취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청정법이 있다.
네 가지 청정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자성청정[性淨]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진여ㆍ공ㆍ실제ㆍ무상(無相)ㆍ진실의(眞實義)ㆍ법계이다. 둘째는 번뇌를 여읜 청정[離垢淨]이니, 이처럼 모든 장애의 번뇌를 여읜 것이다. 셋째는 그것을 증득한 수행의 청정[行淨]이니, 이른바 모든 보리분법과 바라밀 등이다. 넷째는 그것이 생기하는 원인의 인식대상의 청정[因念淨]이니, 이른바 대승을 말하는 교법이다.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원인 때문에 허망된 생각이 아니다. 청정한 법계를 원인으로 하는 성품이므로 의타성이 아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에 일체의 청정법을 포섭한다.”
요술 등은 생겨남을 말하고 허망된 계탁(計度)은 비존재라고 말하네. 네 가지 청정에 대해서는 진실의 청정이라고 말하네.
016_1270_b_13L幻等說故生, 妄計無有說, 於諸四淨中,
說爲眞實淨。
자성청정, 번뇌를 여읜 청정, 수행의 청정, 인식대상의 청정 때문이며, 그 청정은 모두 네 가지 의미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016_1270_b_15L淨性離垢行念故,彼淨諸攝四種義故。
또한 어떤 양상 때문에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타성을 요술 등의 비유로 밝히는가? 다른 이가 의타성에 대해서 갖는 허망되고 전도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또한 다른 이는 의타성에 대해서 어떻게 전도된 의심을 갖는가? 다른 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가 이루어지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수순하는 의미가 성립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일이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한다.
016_1270_c_01L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의 업과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못함의 결과가 따르고, 따르지 않는 일이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의 영상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갖가지 식이 수순하는 일이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갖가지 명칭과 언어를 가립하는 일이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실제로 삼매의 경계를 능히 인식하는 일이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한다.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모든 보살은 전도됨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애써 하기 위해서 생을 받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를 말한다.
무슨 의미가 있기에 『범왕경(梵王經)』에서 “나는 세간을 보지 않고 열반을 증득하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가운데 허망된 분별성과 성취성에 의거하므로 세간과 열반의 성품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타성은 허망된 분별성 때문에 세간을 말하고, 성취성 때문에 열반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대승아비담경』에서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잡염분과 청정분과 그 두 부분이다”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중에서 허망된 분별성은 번뇌분이고, 성취성은 청정분이며, 다시 의타성은 그 두 부분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의 비유로 나타낸다. 마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서 세 가지 사물을 볼 수 있음과 같다. 첫째는 지진(地塵)이고, 둘째는 흙이며, 셋째는 금이다. 이 중에서 지진이 있기 때문에 흙을 보고 금을 보게 된다. 만약 불에 넣으면 흙은 볼 수 없고 다만 금만 보인다. 지진을 흙으로 볼 때는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고, 금으로 볼 때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진에 두 부분이 있다.
016_1271_a_01L이와 같아서 이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에 닿지 않으면 그 식의 허망된 분별성이 나타나고 성취성이 현현하지 않는다.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에 닿으면, 그 식의 진실된 성취성이 현현하고 허망된 분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허망된 분별식인 의타성에 두 부분이 있는 것이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있는 지진과 같다.
여래께서 혹은 일체법이 상주한다고 말씀하고, 혹은 일체법이 무상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일체법이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의미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씀하시는가? 의타성은 성취분에 의해서는 상주함이고, 허망된 분별성에 의해서는 무상하며, 그 두 부분에 의거해서는 상주도 무상도 아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상주ㆍ무상ㆍ상주도 무상도 아닌 것처럼, 이와 같이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 청정ㆍ부정ㆍ청정도 부정도 아님, 공ㆍ불공(不空)ㆍ공도 불공도 아님, 자아ㆍ무아ㆍ자아도 무아도 아님, 고요함[定]ㆍ고요하지 않음ㆍ고요함도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님, 자성이 있음ㆍ자성이 없음ㆍ자성이 있음도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님, 생겨남ㆍ생겨나지 않음ㆍ생겨남도 생겨나지 않는 것도 아님, 소멸ㆍ불멸ㆍ소멸도 불멸도 아님, 영원히 고요함ㆍ영원히 고요한 것이 아님ㆍ영원히 고요함도 아니고 영원히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님, 자성적멸ㆍ자성적멸이 아님ㆍ자성적멸도 아니고 자성적멸이 아닌 것도 아님, 세간ㆍ열반ㆍ세간도 열반도 아닌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문구의 차별은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뜻의 말씀이다. 이 세 가지 자성의 문구로써 마땅히 수순해야 한다. 상주 등의 모든 문구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모든 법이 존재하지 않듯이 현재 한 종류가 아니듯이94) 이처럼 법이고 법이 아닌 것이네. 둘이 아닌 의미에서 말한 바이네.
016_1271_a_18L如諸法所無, 及如見非一, 如是法非法,
不二義所說。
그 한 부분에 의거함으로써 역시 존재라고 말하네. 두 부분에서 보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진실한 말이네.
016_1271_a_20L彼一分事故, 亦說名爲事,
二分不名事, 非事眞實說。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본다고 말하네. 이처럼 그것은 역시 볼 수 있으므로 따라서 비존재라고 말하네.
016_1271_a_21L如見非如有,
是故說爲見, 如是彼亦見, 是故說爲無。
자체에 스스로 비존재이므로 자체에 머물지 않네. 취하는 것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성이 없다고 말하네.
016_1271_a_22L自體自無故, 自事中不住, 取者本亦無,
故說爲無性。
016_1271_b_01L자성이 없는 의미 때문에 이루어지고 다음다음의 의지처의 의미이기 때문이네.
생겨남도 없고 역시 소멸함도 없으며 영원히 고요하여 자성이 적멸이기 때문이네.
016_1271_b_01L無性義故成, 上上依義故,
無生亦不滅, 永寂性滅故。
그런데 네 가지 취지와 네 가지 비밀스런 말의 순서가 있다.95)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시니 마땅히 수순해서 해석해야 한다. 첫째는 법이 동등한 취지이니, 이른바 “나는 한량없는 옛적에 비바시정진정각(毘婆尸正眞正覺)이라고 이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둘째는 시절의 취지이니, 이른바 “만일 다보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이는 결정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한 『무량수경』에서 “만일 어떤 중생이 무량수세계를 발원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셋째는 의미 중에서 다른 취지이니, 경전에서 “조금만 공양해도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가까이함과 같으며 대승법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넷째는 중생의 마음에 수순하는 취지이니, 혹은 어떤 중생을 위해서 보시를 찬탄하고 다시 비방함과 같다. 보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지계와 나머지 수행도 역시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네 가지 취지를 말한다.
네 가지 비밀스런 말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권하여 일으키는 순서이니, 성문승에서 혹은 대승에서 중생과 법의 자성의 차이가 있다고 함은 세속제의 도리에 수순해서 말한 바이다. 둘째는 양상의 순서이니, 이곳에서 모든 법의 양상을 나타내 보인다. 셋째는 다스림의 순서이니, 이곳에서 8만 4천 가지 중생의 행을 말한다. 넷째는 발원의 순서이니, 이곳에서 별도의 의미로써 언어ㆍ음성ㆍ문자의 의미를 다르게 말한다.
이 중에서 인연을 모아서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법, 그것은 다시 그것과 같네. 과보식과 수순하는 식[順識]96)은 다시 서로 조건이 되어 생겨나네”라고 말한 바와 같다. 또한 그 수순하는 식의 양상의 법은 다 같이 유상식[念識]과 유견식[見識]이 있는 자성이다. 그것은 생각하여 지니는 것의 양상이고, 분별의 양상이며, 법의 자체인 양상이다. 이런 까닭에 세 가지 자성의 양상을 나타낸다. “다 같이 유상식과 유견식이 있으니, 그 세 가지 양상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
또한 그 양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분별상은 의타성 중에서 비존재이고, 성취성은 존재한다. 그 두 가지의 존재와 비존재, 인식할 수 있음과 인식할 수 없음, 진실을 보지 못함과 진실을 보는 것이 동시에 있다. 그 의타성 가운데 중생의 분별성은 존재하지 않고 중생의 성취성은 존재한다. 작용할 때 그것을 인식하면 곧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게송에서 “분별성과 의타성 가운데 성취성이 그곳에 있네. 인식하지 못함과 인식함이 있기 때문에 간략히 그 두 가지 극단을 말하네”라고 한 바와 같다.
말해진 내용의 의미를 해석하면, 먼저 첫 번째 문구를 말하고, 다음에 나머지 문구로써 분별하여 나타낸다. 혹은 공덕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고, 혹은 의미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공덕의 매우 뛰어남이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한다.97) 매우 청정한 깨달음이고,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으며, 형상이 없는 법이고, 부처님의 행을 궁극적으로 모두 행하며, 모든 불법을 증득하고, 장애가 없는 도에 이르셨다. (외도 등에 의해) 퇴전하지 않는 법으로서 장애가 없는 경계이고, 불가사의함에 안주한다.
삼세에 통달하고, 모든 세계에 두루 몸을 나타내며, 모든 법에 대해서 의문이 없고, 일체를 아는 지혜를 성취하셨다. 모든 법에 대해서 지혜가 의혹이 없고, 분별이 없는 지혜이며, 모든 보살이 바로 수용하는 지혜이다. 두 가지가 없는 부처님의 행을 증득하여 최상의 궁극적인 경지이고, 여래의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지혜를 다 이룬다.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에 이르고, 법계를 통달하며, 가장 허공의 성품을 이루고, 미래 세상을 다한다.
016_1272_a_01L매우 청정한 깨달음의 부처님이란 마땅히 알지니 이 문구는 나머지 문구로써 해석된다. 이렇게 해서 법의 체성을 잘 말하게 된다. 매우 청정한 깨달음은 부처님 여래의 매우 청정한 깨달음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것에 열아홉 가지 부처님의 공덕이 포섭된다.
지혜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가 없고 분별이 없는 공덕, 존재와 비존재의 두 가지 양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청정함에서 자연스럽게 불사(佛事)를 짓고 휴식 없이 행하는 공덕, 법신의 의지처ㆍ마음ㆍ사업에 대해서 분별이 없는 공덕,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법에 오염되지 않는 공덕, 정법에 안주하는 공덕, 수기(授記)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서 보신과 응신을 나투는 공덕, 의심을 완전히 끊은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미래에 법의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믿음에 따라 시현하는 공덕, 무량한 신체로 중생을 교화하는 가행의 공덕, 평등한 법으로 바라밀을 성취하는 공덕, 믿음에 따라서 다른 불세계를 시현하는 공덕, 세 가지 불신의 설법이 중단되지 않는 공덕, 나아가 세간을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도와서 일체의 즐거움을 이루는 공덕, 다함없는 공덕이다. 이로 인하여 그렇게 말한다.
또한 의미의 매우 뛰어남이란 경전에서 “보살이 32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일체 중생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깊은 마음이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지혜에 계합하기 때문이고, 아만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후덕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며, 친하지 않은 이와 친한 이에게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가까이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고, 좋은 말로 기쁘게 먼저 말하기 때문이고, 그런 마음이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며, 수용한 일98)에 대해서 쉬지 않고 피로나 권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교의의 의미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72_b_01L자신의 죄에 대해서 그 허물을 보기 때문이고, 남이 지은 잘못을 보고 들춰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보살의 마음을 행하기 때문이고, 보시에 대해서 과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윤회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계율을 닦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인욕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근법을 섭수하고자 정진하기 때문이고, 무색계를 여의고 선정을 닦기 때문이며, 방편에 수순하여 지혜를 닦기 때문이다.
네 가지 포섭하는 법99)에 들어가는 방편이기 때문이고, 계율을 파하고 계율을 지킨다는 두 가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간절하고 공경스럽게 승묘한 법을 듣기 때문이고, 즐겁게 아련야(阿練若)100)에 머물기 때문이며, 세간의 갖가지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고, 대승 안에서 큰 이익을 보기 때문이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며, 네 가지 범행(梵行)101)을 청정히 행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신통102)에서 노닐기 때문이고,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바른 행에 머물거나 혹은 바른 행에 머물지 않는 중생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결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이고, 참다운 말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보살의 마음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상과 같은 문구들은 첫 번째 문구를 분별한 것이다. 일체 중생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마음 때문에 16가지 작업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16가지 작업은 (첫째는) 전전하여 가행하는 작업이고, (둘째는) 퇴전이 없는 작업이며, (셋째는) 남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행하는 작업이고, (넷째는) 성내지 않는 작업이다. (다섯째는) 과보를 바라지 않는 작업이니, 세 가지 문구로 과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익이 있으며, 이익이 없어도 성내지 않고 기뻐하며, 나아가 다음 생에도 따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서로 비슷한 구업과 신업이니, 이에 두 가지 문구의 차이가 있다. (일곱째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한 작업이고, (여덟째는) 겁약(怯弱)하지 않은 작업이며, (아홉째는) 퇴전하지 않는 작업이고, (열째는) 방편으로 섭수하는 작업이다.
016_1272_c_01L(열한째는) 장애를 제거하는 작업이니, 두 문구의 차이가 있다. (열두째는) 상속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는 그 마음의 작업이고, (열셋째는) 뛰어나게 이르는 작업이다. 이에 일곱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6바라밀의 바른 수행이고, 포섭하는 행103)의 바른 일이다. (열넷째는) 가행을 성취하는 작업은 여섯 문구의 차이가 있다.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정법을 청해 들으며, 아련야를 좋아하고, 나쁘게 헤아리는 생각을 버린다. 바른 생각의 공덕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이가 있고, 대승의 공덕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이가 있다. (열다섯째는) 성취하는 작업은 세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한량없이 청정하고, 위력을 얻으며, 증득하는 공덕이다. (열여섯째는) 그것을 안주하게 하는 작업은 네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고, 의혹을 없애고 가르치며, 재물과 법을 포섭하는 마음이고, 잡염심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는 첫 번째 문구의 해석의 차이이다. 경전에서 “최초의 문구에 의지하기 때문에 문구의 구별은 공덕이 있다. 최초의 문구에 의지하기 때문에 문구의 구별과 의미의 구별도 그러하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이 지혜의 양상을 해석하였다.
2)급다(笈多)의 역본과 진제(眞諦)의 역본에는 ‘응지(應知)’로, 현장(玄奘)의 역본에는 ‘소지(所知)’로 되어 있다.
3)현장 역본은 의타기성[依他起自性]ㆍ변계소집성[遍計所執自性]ㆍ원성실성[圓成實自性]으로 되어 있으며, 진제 역본은 의타성(依他性)ㆍ분별성(分別性)ㆍ진실성(眞實性)으로 되어 있다.
4)수릉엄(首楞嚴)은 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이다.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意譯)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5)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6)고려대장경본에 ‘증상심사(增上心事)’로 되어 있는데, ‘증상혜사(增上慧事)’의 오자(誤字)로 보아야 한다.
7)현장 역본에는 자성신(自性身)ㆍ수용신(受用身)ㆍ변화신(變化身)으로 되어 있다. 진제 역본에는 자성신(自性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으로 되어 있다.
8)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한 장(章)이다.
9)아승기는 범어 asaṁkhya의 음역어로서, 원래 발음은 아승기이지만 흔히 아승지라고도 한다. 무수겁(無數劫)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번역어이다.
10)현장 역본과 진제 역본에서는 보살의 3학(學)으로 되어 있으며,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를 말한다.
11)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한 장이다.
12)현장 역본과 진제 역본에서는 계(界)로 되어 있다. 계(界)는 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는 원인ㆍ요소의 의미이다.
13)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4)이하 심(心)ㆍ의(意)ㆍ식(識)의 명칭을 해석한다.
15)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되어 있다.
16)게송 전에 급다 역본과 진제 역본, 현장 역본에는 어째서 염오의(染汚意)가 있는지에 대한 산【문】형태의 설명이 있으나, 본 역본에는 그 부분이 빠지고 바로 게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17)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독행무명(獨行無明)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으로 되어 있다. 무명은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18)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19)이하 성문승에도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먼저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20)이하 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21)급다의 역본에는 궁생사취(窮生死聚)로, 진제의 역본에는 궁생사음(窮生死陰)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궁생사온(窮生死蘊)으로 되어 있다.
22)이하 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가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내는 장(章)이다.
23)이하 아리야식의 양상에 관한 장이다.
24)이하 훈습에 관한 장이다.
25)이하 아리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을 논하는 장이다.
26)이하 아리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에 관한 장이다.
27)이하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 개별이 아닌 속성을 띠는 것에 관한 장이다.
28)이하 인연법에 관한 장이다.
29)인도의 6파철학(派哲學)의 하나인 상캬(Sāṃkhya)학파의 주장이다. 여기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ṛ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勝因] 등의 의미이다.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神我:순수 청정한 정신성)와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서 프라크리티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의 세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이 세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그 중의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프라크리티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즉, 붓디(buddhi:大, 智)→아만→5유량(唯量:色 ㆍ聲 ㆍ香 ㆍ味 ㆍ觸)→5대(大:地ㆍ水ㆍ火ㆍ風ㆍ空)→11근(根: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이 전개된다고 한다.
30)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의 주장이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이 있을 뿐으로서, 현재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초감할 수 없다고 하였다.
31)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논파한다.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 계(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이 자재천의 인(因)이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한다.
32)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六句義], 즉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大有性]ㆍ특수성[異:同異性]ㆍ내재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에서 떠나 별도로 상주의 자체[體]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33)원문에 ‘식(食)’으로 되어 있는데 ‘수(受)’의 오자로 보아야 한다.
34)능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돌이다. 보통 산석(山石)이라고 부른다.
35)이 게송 이후에 현장 역본과 진제 역본, 급다 역본 등에는 내부 종자와 외부 종자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두 게송이 있다는 산문과 함께 두 게송이 이어지고 있으나 본 역본에는 빠져 있다.
36)아리야식을 가리킨다. 모든 식이 전변 생기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37)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고 한다.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 즉 전식(轉識)이다.
38)여기서 심(心)은 심소법(心所法, 심리작용)을 의미한다.
39)이하 네 가지 연[四緣]에 관한 장이다.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이 발생함에 있어서 그 연(緣)을 인연ㆍ증상연ㆍ염연(念緣)ㆍ차제연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40)증상연(增上緣)은 그것이 생겨나는 데 외부로부터 도와주는 힘을 말한다. 이에는 유력(有力) 증상연과 무력(無力) 증상연이 있다. 전자는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는 조건[緣]이고, 후자는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조건이다.
41)여기서 염(念)은 생각 속의 인식대상, 즉 소연(所緣)의 의미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소연연(所緣緣)으로 되어 있다. 소연연은 소연(所緣:마음의 대경(對境))이 마음에 대해 연(緣)이 되어 활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인식대상[所緣]인 대경이 있어서 비로소 식이 생기하기 때문에 그 인식대상을 연(緣)으로 삼는다.
42)현장 역본은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한역하였다. 등무간연은 전찰나의 생각이 사라지면서 다음 찰나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전 찰나의 식이 멸하여 다음 찰나의 식에 그곳을 주지 않으면 식이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전 찰나의 식을 등무간연이라 이름한다.
43)이하 앞에서 말한 이문(異門)과 양상들이 오직 아리야식에만 있고 다른 식에는 없으므로 아리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을 번뇌의 잡염ㆍ업의 잡염ㆍ태어남의 잡염ㆍ세간의 청정ㆍ출세간의 청정ㆍ도리에 수순함이 성립되는 순서대로 설명한다.
44)이하 아리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45)수번뇌(隨煩惱)는 근본번뇌[貪ㆍ瞋ㆍ癡ㆍ慢ㆍ疑ㆍ惡見]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분노[忿]ㆍ원한[恨]ㆍ질투[嫉]ㆍ속임[誑]ㆍ아첨[諂]ㆍ게으름[懈怠]ㆍ혼침(婚沈)ㆍ들뜸[掉擧] 등 20가지를 말한다.
46)일반적으로 무상천(無想天)이라고 한다.
47)이하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업의 잡염품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48)이하 아리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49)중음은 중유라고 하는데, 중유는 4유(有) 가운데 하나로서, 죽은 뒤 다음의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50)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갈라람(羯羅藍),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요소[四大]가 화합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된다.
51)다른 역본에는 ‘명색(名色)’으로 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번역어를 사용한다.
52)4식(食)의 하나이다. 이것은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첫째,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서[分分段段] 먹어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둘째,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6식에 상응하는 심소(心所:심리작용)이다.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게 된다. 셋째, 의사식(意思食 또는 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기 때문이다. 넷째,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53)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며, 무색계의 제4천이다. 이 하늘은 삼계의 최고 위치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칠은 표상작용[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眞涅槃處]이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54)무색계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을 말한다.
55)이하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56)이하 아리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57)문훈습(聞熏習)을 가리킨다.
58)이하 도리에 수순함에 관한 장이다.
59)아리야식을 가리킨다.
60)이하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61)이하 아리야식의 품류의 차이에 관하여 논한다.
62)현장 역본은 명언훈습(名言熏習)ㆍ아견훈습(我見熏習)ㆍ유지훈습(有支熏習)으로 되어 있다.
63)현장 역본은 인발차별(引發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연상차별(緣相差別), 상모차별(相貌差別)로 되어 있다.
64)수용의 양상이란 종자의 작용의 힘[功能]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는 바가 없다.
65)일반적으로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한다.
66)이하 지혜의 양상[智相], 즉 현상계와 본체계의 전개양상을 의타상ㆍ분별상ㆍ성취상의 세 가지[三自性]로 분류해서 설명한다.
67)현장 역본은 의타기상(依他起相)ㆍ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ㆍ원성실상(圓成實相)으로 되어 있다.
68)눈[眼根]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다.
69)현장 역본은 신자식(身者識)이며, 번뇌에 오염된 식을 말한다.
70)현장 역본은 수자식(受者識)이며, 의근(意根)을 말한다.
71)현장 역본은 소수식[所受識], 진제 역본은 응수식(應受識)이라고 하며, 색식(色識) 등 6식(識)을 말한다.
72)현장 역본은 능수식[能受識]이며, 진제 역본은 정수식(正受識)이라고 하며, 안식 등 6식이다.
73)현장 역본은 세식(世識)이며, 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식을 말한다.
74)하나 내지 아승기수(阿僧祇數)의 식이다.
75)현장 역본은 처식(處識)이며, 자연계[器世間]를 말한다.
76)현장 역본은 언설식(言說識)이며, 감각ㆍ지각 작용[見聞覺知]의 모든 언설에 의한 것이다.
77)현장 역본은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이며, 자신과 타신(他身)이 의지하는 차별식을 말한다.
78)현장 역본은 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이며, 진제 역본은 선악양도차별식(善惡兩道差別識)이라고 하며, 생사의 여러 종류의 차별이다.
79)현장 역본은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의타기상(paratantra-svabhāva)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依他起] 속성을 지니는 법의 양상이다. 그것은 일체법의 연생(緣生)의 자성,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다. 의타기상은 변계소집상처럼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소생법이므로 상주실유(常住實有)가 아니고 세속제(世俗諦)에서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의타기상은 인연소생법이므로 5위100법(五位百法) 가운데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위(位) 94가지 법이 포섭되지만, 식일원론의 입장인 유식학에서 의타기상은 결국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80)현장 역본은 변계소집상이며, 변계소집상(parikalpita-svabhāva)에서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한다[周遍計度]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계탁함으로써 잘못 보이는 집착된 대상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미혹의 근원을 특히 명칭이나 언설에서 찾는다. 변계소집상은 명칭에 의해 가정적으로 안립된 자성차별이다. 그것은 허망분별에 의해 실체[實我實法]로 착각되고 집착된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假法]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데도, 범부들은 미혹하여 허망된 견해를 내어서 마음 밖에 실법(實法)이 존재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한다. 변계소집상은 범부들의 허망된 견해에 의해 인연소생의 가아가법(假我假法) 위에 오인되어진 실아실법에 대한 미혹된 집착이다. 공허한 환상과 같은 것이어서 체성(體性)이 전혀 없다.
81)현장 역본은 원성실상(圓成實相)이며, 원성실상(pariniṣpanna-svabhāva)은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성품[圓滿成就眞實性]의 법의 양상이다. 현상계의 모든 법의 본체인 진여이다. 진여는 모든 법에 두루하고[圓],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으며[成],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된 법이 아니다[實].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이다.
82)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을 말한다.
83)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을 말한다.
84)현장 역본은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식은 주관적인 식과 객관적인 식으로 이분됨으로써 인식작용이 이루어진다. 유상식은 객관적인 인식대상[所緣]으로 현현한 식, 즉 상분(相分)이다. 유견식은 주관적인 식[能緣識], 즉 견분(見分)을 말한다.
85)세 번째인 여러 가지에 의거함을 해석한다.
86)이하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다.
87)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됨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하늘세계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88)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89)의식적인 노력[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일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90)다음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91)현장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작용의 힘이 없고 자연히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 부른다[生刹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名依他起]”라 하였다. 본 불타선다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고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고 부른다[生已刹那後自住有力故說他性]라 하여 현장 역본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92)의타성을 가리킨다.
93)현장 역본에는 남이 이끄는 분별[他引分別]을 여섯째로 하여 열 가지를 들고 있으나, 본 불타선다 역본에서는 남이 이끄는 분별[他所將分別]을 여섯째로 하고 있지 않고 번호에서 제외되었으며, 현장 역본의 일곱째를 여섯째로 하고 있으며, 아홉째, 열째 또한 명확하게 하지 않고 있다.
94)법은 실재하지 않으면서 무량한 종류를 나타냄을 말한다.
95)이하 네 가지 취지와 네 가지 비밀스런 말에 관한 장(章)이다.
96)제8 아리야식을 제외한 일곱 가지 식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생기식(生起識)ㆍ전식(轉識)이라고 한다.
97)이하 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最淸淨覺)을 말하고 나서 21가지 별덕(別德)을 들어서 그 원만함을 나타낸다.
98)받은 대승의 교법을 의미한다.
99)4섭법(攝法)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다.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는 일이다.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는 일이다.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몸ㆍ말ㆍ뜻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다.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협력하는 일이다. 중생과 같이 일하며 제도한다.
100)아련야는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장소[空閑靜處]를 말한다.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