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釋】【문】무엇을 위해서 논서를 짓는가? 【답】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應知]’이라고 함은 매우 심오하고 위대한 법성을 꿰뚫기 때문이다. 만약 불보살의 위력을 제외하고 잇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이것을 해석하겠는가? 또한 무슨 의미 때문에, 이 논서는 이와 같은 양상의 말을 하는가? 만약 ‘아비달마’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곧 이것이 성스러운 가르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경전의 명칭을 나타낸다. 『십지경(十地經)』이라고 말함과 같다.
이제 마땅히 그 경전의 명칭을 해석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수다라’라고 말한다. 그 수다라 중에서 이것이 아비달마의 법문임을 밝히기 때문이며, 또한 수다라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대승’이라고 말함은 성문의 아비달마와 다름을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성인이 말씀하신 아비달마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분별의 지혜로써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이다. 혹은 성문이 말한 것이거나, 혹은 세속의 지혜로운 이가 지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대승수다라’라는 말을 해서 성문 등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017_0001_b_01L또한 ‘아비달마’라고 말함은 보살장에 포섭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장(藏)에 포섭된다’고 함은 자신의 번뇌를 조복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대승 중에서 이것3)은 보살의 번뇌이다. 보살은 분별을 번뇌로 삼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는 매우 심오하고 대승을 꿰뚫음을 양상[相]으로 삼는다. 이 장(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수다라(修多羅:經藏)4)ㆍ아비달마(阿毘達磨:論藏)5)ㆍ비나야(毘那耶:律藏)6)이다. 이 3장(藏)은 뛰어난 교법과 열등한 교법의 차이로 인하여 2장을 이루니, 성문장(聲聞藏)과 보살장(菩薩藏)이다.
또한 이 세 종류와 두 종류는 어째서 장(藏)이라고 부르는가? 【답】능히 포섭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모든 의미를 포섭한다. 어째서 3장을 이루는가? 아홉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의혹을 다스리는 것은 수다라이다. 어떤 사람이 의미에 대해서 의혹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의미들에 대해서 결정을 얻게 하고, 두 가지 극단에 집착함을 다스리는 것은 비나야이다. 죄와 과실이 있는 극단적인 수용을 막기7) 위해서이니, 욕락의 극단에 집착함을 말한다. 죄와 과실이 없는 극단적인 수용을 가리기8) 위해서이니, 자신을 피로하게 괴롭히는 극단을 막는다. 자기 견해에 집착함을 다스리는 것은 아비달마이다. 전도됨이 없는 양상[相]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3학(學)9)을 말하는 것은 수다라이다.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10)과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을 구족함은 비나야이다. 계율[戒]을 지님으로써 후회 없는 것 등을 얻고 차례로 삼마제(三磨提)11)를 얻는다.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를 구족함은 아비달마이다. 전도됨이 없는 의미를 간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법과 의미를 말하는 것은 수다라이고, 법과 의미를 성취함은 비나야이다. 만일 수행인이 번뇌를 조복하면 그 가운데에서 통달하기 때문이다. 법과 의미에 대해서 훌륭하게 결정함은 아비달마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인연에 의해서 3장을 건립한다.이것들은 모두 생사를 해탈케 하기 위해서이다.
017_0001_c_01L또한 다시 어떻게 이러한 해탈을 얻는가? 훈습함ㆍ깨침ㆍ고요함ㆍ통함으로 인하여 해탈을 얻는다. 들음으로써 마음에 훈습하고, 사유함으로써 안다. 사마타(奢摩他)12)를 닦음으로써 고요하게 되고, 비발사나(毘鉢舍那)13)로써 통달한다. 이 수다라ㆍ비나야ㆍ아비달마는 간략히 말하면 각각 네 가지 의미가 있다. 보살이 이것을 알면 곧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를 증득한다. 성문은 한 게송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역시 번뇌가 다함[流盡]14)을 얻는다.
어째서 각각 네 가지 의미가 있는가? 첫째는 의지이고, 둘째는 양상이며, 셋째는 법이고, 넷째는 의미이다. 이것을 꿰뚫는 것은 수다라이며, 여기서 의지는 의지의 대상ㆍ의지하는 사람ㆍ의지하는 처소 때문에 말한다. 양상은 세속제의 양상과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양상이다. 법은 5음(陰)15)ㆍ18계16)ㆍ12입(入)17)ㆍ12연생(緣生)18)ㆍ4성제ㆍ4념주(念住)19)ㆍ선정20)ㆍ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21)ㆍ무색계ㆍ해탈ㆍ뛰어난 곳[勝處]22)ㆍ일체처(一切處)23)ㆍ37가지 보리분법24)ㆍ네 가지 걸림없는 변재[無碍辯]25)ㆍ번뇌가 없는 것[無諍]26) 등이다. 의미는 상속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첫째27)는 향함[向]이고, 둘째는 헤아림[數]이며, 셋째는 조복이고, 넷째는 널리 적집함이다. 마땅히 이것이 아비달마임을 알아야 한다. ‘향한다’는 것은 아비달마가 무주처열반법28)을 향하여 4성제ㆍ37가지 보리분법ㆍ세 가지 해탈문29)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헤아린다’는 것은 아비달마가 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법에 대해서 그 자상(自相)ㆍ공통된 양상[通相]30) 등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알고 한량없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조복’이라 함은 아비달마가 다른 이를 조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능히 다른 논의를 조복하여 종(宗) 등을 갖추어 안립하기 때문이다. ‘널리 적집한다’는 것은 아비달마가 널리 경전의 의미를 적집하기 때문이다.
017_0002_a_01L또한 비나야의 네 가지는, 첫째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둘째는 연기(緣起)31)이며, 셋째는 다시 청정해지는 것이고, 넷째는 벗어남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5편죄(篇罪)32)이다. ‘연기’라 함은 죄를 일으키는 것이다.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방일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청정해진다’는 것은, 청정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벌로 다스리는 법이 아니며, 금계(禁戒)처럼 거두어들여 지니기 때문이다. ‘벗어남’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말하여 드러냄이고, 둘째는 계율[學]33) 등을 주어서 벌로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는 한결같이 금하는 계율 조항을 제정하고 다시 별도의 도리에 의해서 허락하는 것이다. 넷째는 이미 푼 것[已解]이니, 대중이 동의하여 함께 풀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신체를 바꾸는 것이니, 비구와 비구니가 남녀의 형태를 바꾸어 공통되지 않은 죄34)와 같다. 여섯째는 진실한 관법이니, 뛰어난 법인(法印:法鬱陀那)35)에 대해 뛰어난 관찰을 짓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니, 4성제를 보고 나서 작은 죄와 수반되는 작은 죄가 자연스럽게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또한 비나야에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니, 이것에 의지해서 계율[學處]을 제정한다. 둘째는 제도를 건립함이니, 그 사람이 범한 허물을 말한 바에 따라 석존[大師]께서 대중을 모이게 하여 계율을 제정하신다. 셋째는 분별이니, 계율 조항을 제정하고 나서 다시 자세히 해석함을 말한다. 넷째는 결정하여 판단함이니, 그 가운데 무엇이 잘못을 범한 것이고 무엇이 잘못이 없는가를 결정해서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바가바(婆伽婆) 앞에서’는 공경함을 나타내고 다른 말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승에 잘 들어간다’는 것은 다라니(陀羅尼) 등의 공덕을 얻음을 말한다. 그 공덕을 얻고 나서 문장에 대해서도 의미에 대해서도 바르게 지니고 바르게 말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보살을 대승에 잘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위해서 말하는가? 대승의 위대한 자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나타낸다’는 것은 그 위대한 자체를 널리 말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승을 위해서’라는 것은 대승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열 가지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이란 열 가지 양상이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말한다. 이로 인하여 그것에 열 가지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이 있다. 또한 ‘뛰어난 말’이란 양쪽의 모습에서 이 사물이 저것보다 뛰어나다고 말함과 같다. 최상의 의미가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또한 원인의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결과인 말[語]도 뛰어나다. 이제 마땅히 그 열 가지를 말해야 한다.
017_0002_b_01L【論】모든 부처님 세존에게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應知依止]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應知]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에 들어감[入應知]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彼入因果]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그것36)의 원인ㆍ결과의 수행[彼安果修]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그 수행의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단멸[滅]37)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 지혜[智]38)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말한 경전의 문구는 대승이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낸다.
【釋】‘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이란 다음과 같다 알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그 잡염과 청정 등의 법이며, 곧 세 가지 자성39)이다. ‘의지처’는 원인의 의미이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는 곧 뛰어난 양상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의 뛰어난 양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뛰어난 양상이기 때문에 말[語]도 뛰어나다. 이것은 곧 아리야식(阿梨耶識)40)이다. 이와 같은 것은 약석(略釋)41)의 의미이고, 나아가 지혜의 뛰어난 양상도 역시 그러하다. 지혜가 곧 뛰어난 양상이기 때문에 ‘지혜의 뛰어난 양상’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이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자성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곧 양상이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이라고 부른다. 곧 세 가지 자성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에 들어가는 뛰어난 양상’은 다음과 같다. 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 가운데 깨달아 들어가는 대상과 들어가는 주체를 모두 들어감이라고 이름한다. 곧 유식이다. 곧 이 들어감을 그것에 들어감이라고 말한다. ‘그것에 들어감의 원인ㆍ결과’에서 유식을 들어감이라고 한 것이다. ‘원인’은 세간의 보시 등 여러 바라밀을 말한다. 곧 가행(加行)의 시기이다. ‘결과의 자체’는 곧 통달의 시기42)를 출세간의 자체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란 곧 앞의 원인ㆍ결과이다. 이 원인ㆍ결과 중에 수행의 차이가 있다. ‘수행’은 누누이 익히는 것이고, 이 누누이 익히는 것이 모든 지위에서 전전하여 뛰어나게 되기 때문에 차이라고 이름한다. 곧 10지(地)이다.
017_0002_c_01L‘이 수행의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수학[增上戒學]’에서, 계율의 수학을 매우 높은 계율이라고 부른다. 곧 10지 중에서이다. 모든 보살의 금계는 모든 불선에 대해서 다시는 마음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매우 높은 마음의 수학[增上心學]’은 내면적으로 마음을 관찰함이다. 이 마음이 곧 매우 높은 수학이다. 이른바 삼마제(三摩提)이기 때문이다. ‘매우 높은 지혜의 수학[增上慧學]’에서, 뛰어나게 지혜를 증득함을 매우 높은 지혜라고 하며, 이 지혜는 곧 매우 높은 수학이다. 매우 높은 지혜의 수학은 곧 무분별지혜[無分別智]이기 때문이다. ‘단멸의 뛰어난 양상’이란 이른바 가장 뛰어남과 종류43)와 자체에서 번뇌장(煩惱障)44)과 지장(智障)45)을 단멸하기 때문이며, 곧 무주처열반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에서, 장애가 없는 지혜를 지혜의 뛰어난 양상이라고 한다. 그 무분별지혜는 다스림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수면(隨眠)46)과 장애를 여읜다. 곧 무분별지혜의 뛰어남이다.
017_0003_a_01L【論】또한 무엇을 나타내는가? 말한 바 이들 열 가지 포섭처는 성문승(聲聞乘)에서는 설하지 않고 오직 대승에서만 설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려야식(阿黎耶識)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의 자체로 삼는다. 세 가지 자성, 즉 분별성ㆍ의지타성ㆍ성취성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의 자체로 삼는다. 유식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에 들어감의 자체로 삼는다. 여섯 가지 바라밀을 들어감의 원인ㆍ결과의 자체로 삼는다. 보살의 10지를 들어감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로 삼는다. 보살의 금계를 매우 높은 계율의 자체로 삼고, 건행(健行)47)삼마제ㆍ허공기(虛空器)48)삼마제 등의 여러 삼마제를 매우 높은 마음의 자체로 삼는다. 무분별지혜를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로 삼는다. 무주열반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로 삼는다. 모든 부처님의 3신, 즉 자성신(自性身)ㆍ공용신(共用身)49)ㆍ화신(化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로 삼는다. 이러한 열 가지 포섭처로 인하여 성문승보다 뛰어나게 다르다. 뛰어나게 다르다는 것은 최상이기 때문이고, 세존께서 보살을 위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지니, ‘모든 부처님 세존은 대승을 위해서 열 가지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씀이 있다’고 말한다.
【釋】‘무엇을 나타내는가?’는 어떤 양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여섯 가지 바라밀을 그것에 들어감의 원인ㆍ결과의 자체로 삼는다’는 것은, 이른바 유식관으로 세 가지 자성에 들어감을 얻는 것으로서, 곧 청정한 바라밀이 원인이다. 비록 세간이지만 능히 출세간을 이끌기 때문에, 10지의 지위에 들어간 다음에는 곧 청정해진다. 출세간의 결과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보살의 10지가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가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지위에서 3학(學)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결과’란 곧 이 3학의 결과 자체를 결과라 이름한다. 이 결과 중에서 단멸은 단멸의 결과 자체로서, 이른바 번뇌장(煩惱藏)과 지장(智障)을 단멸하기 때문이다.
017_0003_b_01L‘무분별지혜가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가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성문은 네 가지 전도됨50)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이름하고, 모든 보살은 일체법에 대해서 분별이 없다. 이것은 두 가지 무분별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불신이 증과인 지혜의 자체가 된다’는 것은 그 3학의 결과를 그 증과라 이름한다. 그 증과는 곧 지혜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인 지혜라고 말한다. 이 자체는 곧 그 증과인 지혜의 자체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자성신51)을 여의면 곧 법신이 없다. 마치 안근과 같다.52) 이것을 여의면 곧 보신이 없다.53) 마치 안식과 같다.54) 이러한 능히 의지하는 것[能依]과 의지처[所依]의 두 가지 법은 평등함55)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보신56)을 여의면 이미 큰 지위에 들어간57) 모든 보살들이 법을 수용함이 성취되지 않는다. 만일 법을 수용함이 없으면 깨달음의 자량이 원만히 이루어짐도 역시 성취되지 않는다. 마치 빛깔[色]을 보는 것처럼58) 화신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이것을 여의면 해행지(解行地)59) 중에 있는 모든 보살들, 모든 성문과 이해가 열등한 자가 처음 발심해서 수행함도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마땅히 3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승이 ‘성문승보다 뛰어나게 다르다’는 것은 성문승에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대승 안에서도 역시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다.
【論】또한 어째서 이 여래의 열 가지 뛰어난 양상과 뛰어난 말씀으로 인해서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또한 성문승이 대승과 다르다고 부정하는가? 이 열 가지 포섭처는 성문승에서는 설한 것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에서만 설하기 때문이다. 대보리를 이끌어 낸다. 이 열 가지 포섭처는 성취하고 수순하며 위배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ㆍ양상ㆍ들어감ㆍ 원인과 결과ㆍ수행의 차이ㆍ 3학ㆍ증과인 단멸과 지혜는 최상의 교법 가운데 뛰어나네.
017_0003_b_08L“應知依相入, 因果修差別, 三學果滅智,
上乘中殊勝.
이 말씀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네. 이것은 뛰어난 깨달음의 원인이므로 대승은 부처님의 말씀이네.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므로 뛰어나도다.
017_0003_b_10L此說餘處無, 見此勝覺因,
故大乘佛語, 由說十處勝.”
【釋】이 의미는 무엇인가? 능히 대보리를 이끌기 때문에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이 열 가지 포섭처가 성취하고 수순하며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능히 대보리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고, ‘대보리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성취한다’는 것은 3학의 올바른 인식방법[量] 안에서 사량하고 관찰함이다. 마치 길 안내자가 길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수순한다’는 것은 뛰어난 증득 중에서 수행을 일으킬 때 수순하고 상응해서 안주하기 때문이다. 마치 길 안내자가 말한 것 가운데 수순해서 안주함과 같다.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지위에서 장애의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길 안내자가 말한 길 도중에는 도적 등 장애가 없음과 같다. 이른바 생사와 열반이 서로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003_c_01L【論】또한 이 열 가지 포섭처는 어째서 이와 같은 순서로 말하는가?60) 모든 보살은 처음에 이와 같은 모든 법에 대해서 원인을 잘 통달[善巧]하나니, 곧 연생(緣生)에 대해서 잘 통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에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에 대해서 그 양상을 잘 안다. 잘 알아서 증익과 손감의 두 가지 극단의 과실을 여의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등의 양상에 대해서 잘 상응하고 나서 다음에 그 잘 섭지하는 양상에 대해서 마땅히 통달해야 한다. 곧 장애 중에서 마음이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그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양상을 통달하고 나서 이전의 가행위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다의 뛰어남을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 내면의 마음에 의지해서 청정하기 때문에 이 내면의 마음이 청정에 포섭된다. 여섯 가지 바라밀은 10지 중에서 모름지기 3아승기겁을 필요로 한다. 부분마다 청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보살의 3학61)을 마땅히 원만케 해야 한다. 원만케 하고 나서 그 증과인 열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마땅히 바르게 깨쳐야 하기 때문에 열 가지 포섭처는 이와 같은 순서로 말한다. 이러한 말 가운데 모든 대승은 모두 구경을 얻는다.
【釋】‘어째서 이와 같은 순서로 말하는가?’라는 것은 이른바 처음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원인에 대해서’부터 이에 ‘그 증과인 열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닫는다’는 것 등이다. 이것은 모든 법의 원인을 잘 앎으로써 연생법에 대해서 잘 통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생겨난다. 자재천62) 등이 아니다.63)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지혜를 얻는다.
017_0004_a_01L그런 다음에 원인이 일으킨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알아야 한다. 그 양상은 어떠한가? 분별성64)으로 비존재인 것을 집착해서 존재로 삼음을 증익이라고 부른다. 비존재를 증익하여 참존재인 성취성65)을 손감한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과실을 떠나기 때문에 잘 통달[善巧]한다고 말한다. 다음에 취착된 인식대상[所取]에 대해서 마땅히 유식관에 의거해서 그 양상을 알아야 하고, 이 관찰에 의해서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런 다음에 유식성에 수순해 들어감에 있어서, 세간의 6바라밀을 세속제에 의지해서 얻고 나서 제일의제를 마땅히 증득해야 하며, 이른바 청정한 마음에 포섭되는 바라밀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 다음에 10지에서 3아승기겁을 경과하여 나누어 닦아야 한다. 성문이 3생(生) 가운데 뛰어나게 다스림을 일으켜서 문득 증득하고 해탈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다음에 그 수행 중에 계율 등 3학을 마땅히 원만케 해야 한다. 다음으로 수학의 증과인 열반으로 번뇌장의 단멸ㆍ아뇩다라삼먁삼보리ㆍ세 가지 불신을 마땅히 증득해야 한다.
대승의 순서는 이것과 가지런히 하여 궁극을 이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연생법을 말하고자 하면 곧 아리야식 안에 들어가고, 만일 양상을 말하고자 하면 곧 세 가지 자성에 들어가며, 만약 뛰어난 증득을 말하고자 하면 곧 유식성(唯識性)이다. 만일 바라밀을 말하고자 하면 곧 모든 바라밀 안에 들어가고, 만약 지위를 말하고자 하면 곧 10지의 지위에 들어가며, 만일 수학을 말하고자 하면 곧 수학의 포섭처에 들어간다. 만약 단멸과 지혜를 말하고자 하면 곧 무주처열반과 세 가지 불신에 들어간다. 부처님의 말씀은 이와 같기 때문에 이러한 순서로 말한다.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66). ‘대보리를 이끌어 낸다’는 것 등은 희론이 없고 분별이 없는 지혜를 능히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성취한다’는 것은 상응하기 때문이고, ‘수순한다’는 것은 세 가지 인식방법67)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먼저 수순하다가 나중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구함과 자비를 지니고 또한 모든 선68)에 수순해도 흑백의 아견에 증익도 없고 손감도 없네.
017_0004_a_18L“攝持求及悲, 亦隨順諸善, 非黑白我見,
有益亦有損.”
017_0004_b_01L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한다’는 것은 일체법에 대해서 간격 없이 모든 종류의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성취 등은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 성취함ㆍ수순함ㆍ위배되지 않음 등은 앞의 문구가 근본이 되고 나중의 문구가 해석이 된다. 어떻게 성취하는가?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례로 된다.
원인[界]70)의 자체는 아득한 옛적부터 모든 법이 함께 의지하네. 이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가 존재하며 열반의 뛰어남이 증득되도다.
017_0004_b_07L“界體無始時, 諸法共依止, 由此有諸趣,
及涅槃勝得.”
【釋】‘세존께서 『아비달마경』의 아함(阿含)71)에서 아리야식을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하셨다’는 것은 곧 이 논서의 서두에서 말한 『아비달마수다라』이다. 여기서 ‘계(界)’는 원인의 의미이다. ‘모든 법이 함께 의지하네’라는 것은 이 원인에 의거해서 일체법이 함께 의지함이다. 이른바 이것을 의지해서 원인의 자체로 삼는다. 이 일체법의 의지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윤회세계의 과보가 이로 인하여 생겨난다. 수많은 생 가운데 세력이 있어서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의 법에 대하여 그 의미를 알고, 혹은 다시 뛰어넘으며, 다음에 뛰어난 지위를 증득한다. 혹은 번뇌가 의지하는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매우 무거운 번뇌와 견고한 번뇌가 있다. 이러한 네 가지 과보 중에서 뛰어난 이의 신체는 감당할 능력이 있다. 마땅히 알라. 이것과 정반대인 이는 감당할 능력이 없다. 일체란 생사 중에서 어느 윤회세계인가? 오직 모든 윤회세계는 아니며, 역시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 번뇌가 있으므로 곧 열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함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의 의지처가 아리야식임을 나타낸다. 그 아함에서 다시 말한다.
모든 법이 의지하여 머무는 바는 일체종자식이네. 그러므로 아리야식이라 이름하나니 나는 뛰어난 이를 위하여 말하노라.
017_0004_c_02L“諸法所依住, 一切種子識, 故名梨耶識,
我爲勝人說.”
【釋】이 게송에서는 두 번째 문구에 의해서 첫 번째 문구를 해석한다. ‘뛰어난 이’는 모든 보살을 말한다.
017_0004_c_04L釋曰:此偈第二句釋第一句.勝人者,謂諸菩薩故.
【論】이러한 아함을 증명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식은 무슨 인연으로 아리야식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중생[有生]의 잡염법이 의지하여 머물러서 결과가 되고,72) 이 식도 역시 그 법에 의지해서 원인이 되기 때문에73) 아리야식이라 이름한다. 또한 중생이 의지하여 머물러서 자아로 삼기 때문에74) 아리야식이라고 부른다.
【釋】‘이 식을 아리야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모든 법이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은 함께 전전하기 때문이다. ‘중생[有生]’이라는 것은 생기함이 있는 부류를 다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잡염법’이라는 것은 청정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중생이 의지하여 머물러서 자아로 삼는다’는 것은 집취(執取)이기 때문이다.
017_0005_a_01L 【釋】또한 『해절경』의 아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부처님께서 광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윤회세계의 생사에서 갖가지 중생들이 갖가지 중생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 중에서75) 자신이 생을 이어 출생한다. 그때 일체종자심이 최초에 성숙하고 곧 화합하여 두드러지고 증장하여 원만해진다. 두 가지 집수(執受)76)가 있나니, 부진근[依根]77)과 승의근[色根]78)을 집수하기 때문이고, 대상과 명칭과 분별의 세속 희론 등의 훈습으로 집수하기 때문이니라. 색계에서는 두 가지 집수가 있고, 무색계에서는 두 가지 집수가 없느니라.
광혜여, 이 식을 혹은 아타나식이라고 하나니, 신체에 널리 두루 지니기 때문이니라. 혹은 아리야식이라고 하나니, 신체에 일체법의 종자를 저장하며 널리 두루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혹은 심(心)79)이라고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등의 종자를 적집하고 증장하기 때문이니라.
광혜여, 아타나식에 의지해서 머무는 곳으로 삼아서 6식이 전변 생기하나니, 이른바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니라. 이 중에서 식이 있어서 안근과 색경을 연(緣)으로 삼아 안식을 일으키느니라. 곧 그 안식과 함께 작용하고 동시에 대상을 같이하는 분별 있는 의식이 생기하느니라. 만약 하나하나의 안식이 생기하면 따라서 하나하나의 분별 있는 의식이 안식과 함께 작용하고 동시에 대상을 같이하느니라. 어느 한때에 혹은 두 가지ㆍ세 가지ㆍ네 가지ㆍ다섯 가지 식이 전전히 생기하면 곧 그 한때에 하나의 분별의식이 5식과 함께 작용하여 동시에 대상을 같이해서 생기하느니라. 마치 큰 강의 흐름과 같아서 만약 한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이르면 하나의 물결이 일어나고,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이르면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그 강의 자체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다함이 없는 것과 같느니라.
017_0005_b_01L또한 깨끗하게 닦인 거울면에 하나의 영상이 비치는 조건이 이르면 오직 하나의 영상이 일어나고, 둘 또는 많은 영상이 비치는 조건이 이르면 둘 또는 많은 영상이 비치느니라. 그러나 이 거울면이 전변하여 영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상의 수용작용이 줄어들지 않음과 같느니라.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아타나식은 마치 큰 강과 같아서 이것을 의지해서 머무느니라. 만약 안식을 일으키는 조건이 이르면 곧 하나의 안식이 생기하고, 만일 5식을 일으키는 조건이 이르면 곧 5식이 생기하느니라.
광혜여, 이처럼 보살이 교법에 안주하는 지혜[法住智]80)에 머물고 심의식의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다 하더라도, 여래의 일체를 아는 지혜로는 보살이 이것에 한하여 심의식에 잘 통달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광혜여, 만약 보살이 내부나 외부에서 진리 그대로 아타나[用]를 보지 않고 아타나식[體]를 보지 않으며, 아리야를 보지 않고 아리야식을 보지 않으며, 자장(滋長)을 보지 않고 종종(種種)을 보지 않으며이 두 가지는 심(心)을 말한다, 안근과 색경 및 안식을 보지 않고, 이근과 성경[聲] 및 이식을 보지 않으며, 비근과 향경[香] 및 비식을 보지 않고, 설근과 미경[味] 및 설식을 보지 않으며, 신근과 촉경[觸] 및 신식을 보지 않으면, 광혜여, 이 보살은 교법에 안주하는 지혜에 의지하고 교법에 안주하는 지혜에 머물러서 심의식에 잘 통달했다고 하느니라.’” 또한 다시 이와 같은 의미를 게송에서 나타낸다. ‘아타나식이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며’라는 것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체종자식이 폭포의 흐름처럼 전전하도다’라는 것은 일체종자가 차례로 전변 생기하여 마치 물의 흐름처럼 순간순간 상속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아타나’는 별도의 명칭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분별해서 자아로 삼지 않게 함이니라’라는 것은 하나의 양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분별해서 자아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論】무슨 인연으로 이 식을 아타나식81)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감각기관[有色諸根]을 섭지(攝持)하기 때문이고, 자기 신체가 취하는 모든 것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며, 그 감각기관을 섭지해서 잃지 않고 나아가 목숨이 머물기 때문이다. 또한 상속해서 생을 받을 때 생을 취해서 자기 신체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타나라고 이름한다.
017_0005_c_01L【釋】‘모든 감각기관을 섭지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이 모든 감각기관을 그 식이 섭지함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목숨이 머문다’는 것은 곧 이 문구로써 해석한다. 왜냐하면 안근 등 모든 감각기관은 아리야식이 섭지하기 때문에 시체에 푸르딩딩함[靑瘀]82) 등의 모습이 머무는 것과 다르다. 만일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 식이 떠나기 때문에 곧 이 시체의 푸르딩딩함 등의 모든 모습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섭지로 인하여 수명이 다함에 이르기까지 파괴되지 않기 때문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든 신체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상속하여 생을 받을 때 생을 취하여 자기 신체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등으로 해석한다. 상속하여 생을 받음에 있어서 식이 그 상속이 태어나는 곳을 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능히 자신을 섭지하여 구족하기 때문이다. 아리야식 안에 구족해서 자신의 훈습이 머물기 때문이다. 그 ‘태어날 때’를 바꾸어 태어난다고 말하고, 그 ‘태어날 때 취하는 것’을 바꾸어 태어남의 취함이라고 부른다. 이 취함으로 인해서 자기 신체를 취득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아리야식을 아타나식이라고 이름한다.
【論】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하신 바와 같다.83) 여기서 의(意)84)에 두 종류가 있다85). 첫째는 차제연(次第緣)86)의 의지처이다.87) 식이 차례로 멸하고 의식이 이것을 의지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네 가지 번뇌와 항상 상응한다. 이른바 신견(身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ㆍ무명(無明)이다. 이 의(意)는 다른 식의 염오의 의지처이다. 다른 식이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기하고, 두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염오된다.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차례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念]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가 있다.
017_0006_a_01L【釋】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아려야식을 심이라고 이름함이다. 의(意)와 식의 두 가지에 별도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땅히 알라. 이 심에도 역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이것88)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차제연의 의지처이다’라는 것은, 만일 식이 차례로 멸하면 의식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이것이 첫 번째 의(意)이다. 다시 두 번째 염오의가 있다. 네 가지 번뇌 때문이다. 이 중에서 신견89)은 곧 아집이다. 이 집착으로 인하여 아만90)이 있게 되고, 자아를 취착해서 스스로 높인다. 이것들이 실제로는 무아인 것에 대해서 자아의 갈애를 일으킴을 아애91)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세 가지는 다 무명92)을 원인으로 삼는다.93) 무명은 무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식은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기하고 두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염오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식이 차례로 멸함을 의(意)라고 이름한다. 장차 생겨나는 식의 처소로서94) 그것이 생기하는 의지처95)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염오의는 염오의 의지처가 된다. 왜냐하면 착한 마음에도 역시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96)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차례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念]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대상을 취하는 의미 때문에 식이라 이름하고, 처소를 주는 의미 때문에 첫 번째 의97)라고 부르며, 아상(我相) 등 염오의 의미 때문에 두 번째 의98)라고 이름한다.
017_0006_b_01L【論】또한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99)도 역시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이 과실을 이룬다. 또한 다섯 가지 식과 비슷함도 역시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이 과실을 이룬다. 마치 5식은 동시적인 의지처[同時依止]100)가 있으므로 안식 등의 명칭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가 없게 되기 때문에 과실을 이룬다. 또한 무상정101)과 멸진정102)이 차이가 없으므로 이것이 과실을 이룬다. 무상정은 염오의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지만 멸진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또한 이 무상천의 한 기간의 생에 번뇌가 없으므로 이것이 과실을 이룬다. 혹은 그 하늘에 아집ㆍ아만 등이 없다면 그러하겠지만, 또한 언제나 아집은 현행한다. 이른바 선ㆍ불선ㆍ무기의 마음에서 현행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에서만 상응할 수 있다.103) 아집은 번뇌이기 때문에 마땅히 선ㆍ무기의 마음과 함께 작용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만일 함께 있고 함께 작용한다면 곧 이런 과실이 없으나, 만약 상응현행(相應現行)104)이라면 이런 과실이 있다. 여기서 게송으로 말한다.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없다면 과실이 있네. 아집이 수순하여 전전해서 모든 곳에 없어야 하네.
017_0006_b_05L無想天中生, 無我則有過,
我執隨順轉, 一切處不有.
염오의를 떠나서는 두 가지가 없고 세 가지는 위배되네.105) 이것이 없으면 역시 모든 곳에서 아집이 없어야 하네.
017_0006_b_06L離染意不有,
二三卽相違, 無此卽亦無, 一切處我執.
참된 의미의 마음이 작용할 때 항상 장애가 되니, 언제나 함께 작용함을 독행무명이라 이름하네.
017_0006_b_07L心行實義時, 常與爲障㝵, 一切時共行,
名獨行無明.”
017_0006_c_01L 【釋】이 두 번째 염오의는 어떤 도리에 의해서 성립하는가? 만일 이 의(意)가 없으면 곧 독행무명이 성립되지 않는다. 무엇이 독행무명인가? 아직 다스림을 일으키지 않은 때에 참다운 지혜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것은 5식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이곳에 대해서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다스림을 일으키는 곳이라면 곧 그것에 대해서 장애가 된다.106) 또한 염오의 의식에도 없다.107) 만일 염오의 의식이라면 과실이 있게 된다. 염오의 의식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번뇌와 함께 작용하므로 독행이라는 명칭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이 번뇌가 염오의 의식에 있다면 항상 염오라는 과실이 있다.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선(善)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항상 그것(번뇌)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만일 의(意)가 선법과 상응하여 생기한다고 말하면, 이것이 다스림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건립되어 염오의 의식을 능히 다스리게 된다.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선심이 염오의와 함께 생기한다고 말하면, 이 선심은 능히 다스림을 이끌어 내어 다른 식을 다스려서 소멸시킨다. 이런 소멸은 과실이 없다. 또한 5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108) 마치 안식 등 5식이 안근 등 5근이 있어서 동시에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다. 이 의식도 역시 반드시 동시적인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두 가지 선정이 차이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109) 만약 염오의가 그 무상정에는 있고 멸심정(滅心定:멸진정)에는 없다고 말하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선정 중에서 의식은 작용하지 않아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명칭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을 사량하기 때문에 의(意)라고 이름한다. 만일 자체가 없다면 이 명칭은 무엇을 의지처로 삼겠는가? 만약 여섯 가지 식이 차례로 지나가고 나서 이 식을 의(意)라고 이름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그것이 멸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천의 한 기간의 생에는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곳에 염오의가 없다면 그 생에는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하고, 모든 성인이 마땅히 혐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미 혐오하기 때문에 그곳의 생에는 반드시 아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집이 수순해서 전전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보시 등 여러 선에서도 다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아집은 만약 무명을 여읜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무명은 의지처를 떠나지 않는다. 이 의지처가 염오의를 여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論】이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는 무기[障礙無記]110)이며, 항상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한다. 마치 색계ㆍ무색계의 번뇌가 장애가 있는 무기로서 색계ㆍ무색계의 사마타(奢摩他)에 은장(隱藏)됨과 같다. 이 의는 언제나 잡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心)의 자체는 세 번째로서111)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심(心)으로 삼는다. 이것을 종자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의식 등이 전변 생기한다. 무슨 까닭에 심이라고 이름하는가? 갖가지 법의 훈습된 종자가 적집되기 때문이다.
017_0007_a_01L【釋】의(意)와 전식(轉識)이 아리야식을 원인으로 삼아서 생기하기 때문에 심의 자체가 다른 곳에는 있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식은 차제멸의(次第滅意)에 포섭된다. 그 식이 멸하고 나서 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또한 갖가지 법이 훈습된 종자가 적집되기 때문에 심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갖가지’라는 것은 일체법 각각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훈습된 종자’란 작용의 힘이 있음을 그 차별의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적집’이란 쌓이고 모여서 한 덩어리의 양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論】또한 어째서 성문승에게는 이 심(心)을 아리야식ㆍ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112) 미세한 경계113)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성문의 사람은 모든 대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비록 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해탈을 얻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모든 보살들은 모든 대상을 알고자 하므로 그들을 위해서 말한다. 이 지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釋】‘미세한 경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란 이것이 미세하면서 또한 경계이기 때문에 미세한 경계라고 이름한다. 또한 미세한 경계에 들어가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성문은 모든 대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지으려고 수행하기 때문이며, 그 두드러진 번뇌장을 오직 고제 등의 지혜로써 멸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자신과 남의 번뇌장과 지장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씀하신다.
017_0007_b_01L【論】그런데 성문승 중에도 역시 별도의 도리114)로써 아리야식을 말한다.115) 『증일아함경』에서 “중생은 아리야를 기뻐하고, 아리야를 즐기며, 아리야를 일으키고, 아리야를 희구한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아리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을 말할 때에 공경히 듣기 때문에 마땅히 귀를 포섭하고, 알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생각하며, 아리야를 멸하고자 하기 때문에 법을 받아들이고 법에 수순한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으로써 이 희유하고 얻기 어려운 법이 세간에 나타났다. 『여래출생사종가찬경(如來出生四種可讚經)』116)에서 이와 같은 별도의 명칭으로써 아리야식이 성문승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釋】‘중생이 아리야를 즐긴다’는 이 문구는 근본이고, 뒤에 현재ㆍ과거ㆍ미래의 3시로써 나머지 세 문구를 문장의 순서대로 해석한다. 다시 별도의 의미가 있다. ‘아리야를 기뻐한다’는 것은 현재를 말하고, ‘아리야를 즐긴다’는 것은 과거를 말한다. 이전 세상에서 아리야를 즐겼기 때문에 다시 아리야를 일으킨다. 아리야를 기뻐하고 아리야를 일으킴으로써 다시 미래세에 아리야를 희구한다. ‘법에 수순한다’는 것은 가르침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論】대중부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별도의 도리로써 이 식을 근본식(根本識)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나무가 뿌리에 의지함과 같다.117)
017_0007_b_14L論曰:摩訶僧祇阿含中,亦以別道理說此識,名爲根本識,譬如樹依根.
【釋】‘근본식은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함과 같다’는 것은 그 근본식이 모든 식의 원인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무의 뿌리는 가지ㆍ줄기 등 여러 사물의 원인으로서, 만약 뿌리가 없으면 가지ㆍ줄기 등이 존재할 수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아리야식이 있다면 모든 식의 근본이 됨도 역시 그러하다.
017_0007_c_01L【釋】‘역시 별도의 도리로써 궁생사취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이 식이 궁생사취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란 세계를 말하며, 무색계 중에서 물질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어느 때’란 선정에 머물 때로서 무상정 등과 같다. ‘아리야식 안의 종자가 단절이 없다’는 것은, 물질과 마음의 훈습이 원인이 되고 나중에 물질과 정신이 다시 이것으로부터 생겨남을 말한다.
【論】또한 다른 논사가 “심의식은 의미가 하나인데 명칭이 다르다”고 국집해서 말한다. 이런 의미는 옳지 않으니, 의(意)와 식의 의미를 보기 때문이다. 그 심의 의미는 역시 반드시 차이가 있다. 또한 다른 논사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리야를 기뻐하고’ 등의 여러 문구에서 이 가운데 5취취(取聚)120)가 아리야이다”라고 국집해서 말한다. 또한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모든 감수작용이 아리야이다”라고 국집해서 말한다. 또한 다른 논사는 “신견이 아리야이다”라고 국집해서 말한다. 이러한 여러 논사는 아함과 수행의 증득에 미혹하기 때문에 아리야식에 대해서 이런 집착을 일으킨다. 이 성문승에서도 도리를 성립하는데, 그들이 성립한 도리는 상응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아리야식의 체상에 미혹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성립한 것을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함이 가장 뛰어난 것이 된다. 어째서 가장 뛰어난가?121) 가령 5취취(取聚)를 아리야라고 하자. 살기 괴로운 세계[惡趣] 중에서 한결같이 괴로운 곳에 태어날 경우, 곧 혐오를 일으키고 그곳의 중생은 한결같이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이 집착의 처소라고 말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는 항상 떠나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017_0008_a_01L가령 탐욕과 함께하는 모든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리야라고 하자. 제4선 이상에서는 이 감수작용이 없다. 이미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생이 그것을 집착의 처소로 삼음은 도리에 맞지 않다. 가령 신견이 아리야라고 하자. 불법 안의 사람은 무아를 믿고 이해하며 그것에 대해서 혐오를 일으킨다. 따라서 그것을 집착의 처소로 삼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나 아리야식 안에서 내면의 자아는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결같이 괴로운 감수작용의 처소에 태어나서 오직 괴로움의 5취(聚)를 여의기를 구하지만, 아리야식 가운데 아애에 계박되어 아직 여의기를 구하지 않는다. 또한 제4선 이상에 태어나는 이는 비록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싫어하지만, 아리야식 가운데 아애의 계박이 아직 남아 있다. 또한 불법 안의 사람은 비록 무아를 믿고 이해하며 아견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 가운데 아애의 계박이 역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가 성립한 아리야로써 아리야식의 자체를 성취함이 가장 뛰어나다. 이것이 아리야식의 별도의 도리를 안립함이다.
【釋】여기서 ‘미혹하지 않은 자’는 모든 보살을 가리킨다. ‘살기 괴로운 세계’란 아귀ㆍ축생ㆍ지옥 등의 괴로움의 세계이다. ‘한결같이 괴로운 곳’이란 그 윤회세계의 과보 자체가 한결같이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처소에서 만일 즐거움의 감수작용이 생겨나는 일이 있으면 등류과[津液果]122)이다. 그 처소에 태어나는 이는 그 과보가 오직 괴로움이다.
017_0008_b_01L탐욕과 함께하는 모든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리야라고 하자. 제4선 이상에서는 이런 감수작용이 없다. 이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 처소의 중생’이란 네 가지 선정 이상과 제4 선정이기 때문이다. ‘그 처소’란 그 곳에서 생을 얻기 때문이다. ‘내면의 자아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식을 취하여 내면의 자아로 삼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5취(聚)를 여읨을 구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감수작용을 버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리야식 가운데 아애의 계박(繫縛)’이란 아리야식을 자아로 삼고, 이 갈애(渴愛) 때문에 계박을 이룸을 말한다.
4)수다라(修多羅)는 범어 sūtra의 음역으로서 소달람(素怛纜)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을 말한다. 경전[正經]ㆍ계경(契經:경전의 뜻이 위로는 진리에 계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맞고 뜻에 합당하며, 의리(義理)를 꿰어 중생을 잡아 거둔다는 뜻)으로 의역(意譯)한다.
5)범어 abhidharma의 음역으로서 아비담(阿毘曇)ㆍ비담(毘曇)이라고도 한다. ‘교법에 대한 연구’의 의미로서,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ㆍ논(論)으로 번역한다.
6)비나야(毘那耶)는 범어 vinaya의 음역으로서, 비나야(毘奈耶)ㆍ비니(毘尼)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말하며, 율(律)ㆍ멸(滅)ㆍ조복(調伏)이라 의역한다.
7)극단적인 쾌락행과 극단적인 고행을 가리킨다.
8)가린다는 것은 무죄(無罪)로 규정해서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즉 자신을 괴롭히는 극단적인 고행을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9)계율[戒]ㆍ선정[定]ㆍ지혜[慧]의 3학(學)이다.
10)진제 역본은 의계학(依戒學)이라 한역하고 있다. 보살의 계율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11)범어 samādhi의 음역으로서 정(定)ㆍ등지(等持)라고 번역한다.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12)범어 śamatha의 음역으로서 ‘고요ㆍ평온’의 의미이다. 지(止)ㆍ지식(止息)ㆍ적정(寂靜)ㆍ능멸(能滅)이라고 의역한다. 선정삼매를 본질로 하며 삼매(三昧:三摩地)ㆍ정(定)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한다.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정신통일의 상태[心一境性]에서 신체와 마음의 평안함[輕安]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사마타를 행함으로써 8선정(색계 4ㆍ무색계 4)을 이루고 5신통(神通)을 성취할 수 있다.(漏盡通은 위빠사나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13)vipaśyanā. 꿰뚫어 봄ㆍ통찰ㆍ관찰의 의미로서 관(觀)ㆍ관찰ㆍ견ㆍ능견(能見)으로 번역한다. 사마타[止]에 의해 심신의 평안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연기ㆍ무아ㆍ중도ㆍ진여의 이법(理法)을 통찰한다. 위빠사나에 의해 8선정이 완전함을 이루게 되고 멸진정(滅盡定)이 가능해진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완전히 소멸하고 견성ㆍ해탈ㆍ열반을 성취한다.
14)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무루(無漏)의 성과(聖果)인 아라한과를 말한다. 이로써 생사윤회의 흐름이 그치게 된다.
15)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다섯 가지 요소[色陰ㆍ受陰ㆍ想陰ㆍ行陰ㆍ識陰]로 분류한 것이다. 현장 역본에는 5온(蘊)으로 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색온(色蘊)은 물질(신체와 자연계), 수온(受蘊)은 감수작용, 상온(想蘊)은 표상ㆍ개념화작용, 행온(行蘊)은 짓고 유지하는 작용, 식온(識蘊)은 식별작용 또는 식별작용의 주체이다. 유정의 심신은 이 다섯 요소가 잠정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五蘊假和合]으로서 나[我]라고 집착할 실체가 없다.
16)일체법을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界]ㆍ여섯 가지 인식대상[六境界]ㆍ여섯 가지 식[六識界]으로 분류한 것이다.
17)일체법을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12가지 요소[6根ㆍ6境]로 분류한 것이다. 현장 역본에는 12처(處)로 되어 있다. 이에 눈[眼根]ㆍ귀[耳根]ㆍ코[鼻根]ㆍ혀[舌根]ㆍ몸[身根]ㆍ의지[意根]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6根:6內處]과, 빛깔[色境]ㆍ소리[聲境]ㆍ냄새[香境]ㆍ맛[味境]ㆍ감촉[觸境]ㆍ법[法境]의 여섯 가지 대상[6境:6外處]이 있다.
18)일반적으로 12지연기(支緣起)ㆍ12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12단계로 설명한다. 즉 무명(無明:진리에 대한 無知)→행(行: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식(識: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명색(名色: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6입(入: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촉(觸:6根과 6境과 6識의 화합)→수(受:감수작용)→애(愛:갈애)→취(取: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유(有: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생(生:태어남ㆍ삶)→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이다.
19)현장 역본에는 4식(食)으로 되어 있다.
20)범어로는 dhyāna이며 선나(禪那)ㆍ선(禪)ㆍ사유수(思惟修) 등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으로서, 정(定)과 혜(慧)가 균등하다. 현장 역본에는 정려(靜慮)라고 의역하고 있다.
21)4무량심(無量心)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한량없는 중생을 상대로 하고, 또한 한량없는 복과를 얻기 때문에 무량(無量)하다고 한다. 자(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며, 희(喜)는 남이 즐거워함을 보고 같이 즐거워함이고, 사(捨)는 남에 대해서 애증원친(愛憎怨親)의 마음이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22)승처(勝處)는 제입(制入)ㆍ제입(除入)ㆍ제처(除處)라고도 한다.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누어 8승처라고 한다. 즉, 욕계의 색처(色處:볼 수 있는 대상, 즉 色想)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내서 탐욕을 제거하는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이다. ①색상(色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서 탐욕을 없앤다. ②다시 색처의 대부분에도 이겨낸다. ③마음속에 색처가 멸했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④다시 색처의 대부분도 이겨낸다. ⑤이와 같이 마음속에 색상이 없고 다시 대경(對境)의 색채의 청(靑)ㆍ⑥황(黃)ㆍ⑦적(赤)ㆍ⑧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 중에서 ①②③④는 초선(初禪)과 제2선에 의하고, ⑤⑥⑦⑧은 제4선에 의한다. 또한 ①②는 8해탈(解脫)의 제1, ③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참고로 8해탈은 탐심은 버리지만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23)일체처(一切處)는 변처(遍處)ㆍ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 등 열 가지 법이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다. 열 가지는 지ㆍ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이며, 각기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한다.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한다.
24)37보리분법은 37조도품(助道品)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의 경지(열반)를 실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37가지의 실천수행법을 말한다. 이에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가 있다.
25)4무애지(無碍智)ㆍ4무애변(無碍辯)이라고도 한다. 마음의 측면에서는 지(智)ㆍ해(解)라고 하며,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고 한다. 첫째,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碍)이다. 둘째,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碍)이다. 셋째,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碍)이다. 넷째,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碍)이다.
26)여기서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다.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아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의 하나이다.
27)이하 논장을 해석한다.
28)진여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모두 벗어난 열반이다. 네 가지 열반(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처열반) 가운데 최상의 경지이다.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대비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하더라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29)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 즉 공해탈문(空解脫門)ㆍ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ㆍ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다. 첫째, 공해탈문은 사람과 법의 본성이 공함을 관조하는 것이다. 둘째, 무상해탈문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다. 셋째, 무원해탈문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30)현장 역본에는 공상(共相)으로 한역하고 있다.
31)현장 역본은 등기(等起)로 한역하고 있다. 범어 samutthāna의 번역어로서,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業)에서 의업이 원인이 되어 신업과 구업을 이끌어 내어 함께 작용함을 말한다.
32)비구ㆍ비구니의 죄를 다섯 부문[五科]으로 나눈 것, 즉 바라이(波羅夷)ㆍ승잔(僧殘)ㆍ바일제(波逸提)ㆍ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ㆍ돌길라(突吉羅)이다.
33)여기서 학(學)은 계율을 말한다. 현장의 한역본에는 백중학(百衆學)을 예로 들고 있다. 비구와 비구니의 복장ㆍ위의ㆍ식사 등에 관한 세칙을 규정한 것을 중학(衆學)이라고 한다.
34)비구ㆍ비구니의 어느 한 편에서 규정된 죄과(罪過)를 가리킨다.
35)울타남(鬱陀南)은 범어 udāna의 음역으로서 울타나(鬱陀那)라고도 한다. ①무문자설(無問自說:12部經의 하나) ②법인(法印)ㆍ집시(集施)로 번역한다. 많은 의미를 함축한 게송을 말한다. 네 가지 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36)유식에 들어감을 가리킨다.
37)증과인 단멸[果斷]은 열반을 가리킨다.
38)열반을 과단(果斷, 斷果)이라 하는 데 대해서 보리(菩提)를 이렇게 부른다.
39)의타성ㆍ분별성ㆍ성취성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의타기성ㆍ변계소집성ㆍ원성실성으로, 진제(眞諦)의 역본에는 의타성(依他性)ㆍ분별성ㆍ진실성으로 되어 있다.
40)범어 ālaya-vijāna의 음역으로서 8식(識) 가운데 제8식이며, 유정의 근본적인 식체(識體)이다. ālaya는 저장ㆍ집착ㆍ무몰(無沒)의 의미이다. 이 식에 종자를 ‘저장’하고, 제7 말나식에 의해 상주불변의 자아로 착각 ‘집착’되며, 아득한 옛적부터 해탈에 이르기까지 이 식의 흐름이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근본식ㆍ본식ㆍ장식(藏識)ㆍ이숙식(異熟識)ㆍ일체종자식ㆍ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한다. 진제는 아리야식(阿梨耶識)ㆍ아려야식(阿黎耶識)으로 음역하고 무몰식(無沒識)으로 의역하였다.
41)6합석(合釋)의 하나이며, 지업석(持業釋)이라고도 한다. 지업(持業)은 어떤 체(體)가 그 용(用)을 능히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전절(前節)의 문언(文言)이 후절(後節)의 문언에 대해 형용사ㆍ부사 또는 동격의 명사의 관계를 갖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장식(藏識)이라고 할 경우에 장(藏)은 용(用)이고 식(識)은 체(體)로서, 식[體]에 장[用]을 갖고 있으므로 지업석이다.
42)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이 지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 10지 중에서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의 수행위이다.
43)전의의 품류(品類)의 차이를 말한다.
44)중생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여기서 번뇌는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그리고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집착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아집의 번뇌로 인해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에 유전케 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45)알아야 할 모든 대상을 덮어서 바른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인식대상[所知]의 참다운 모습[法空]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知障)이라 한다. 법집(法執)을 근본으로 하며 보리를 장애한다. 참다운 지혜가 발현함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ㆍ보리장(菩提障)이라고도 한다. 현장의 역본에는 소지장(所知障)으로 되어 있다.
46)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 번뇌의 잠재세력이다. 이에 대해 현재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이라고 한다.
47)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으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한다.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意譯)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48)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49)수용신(受用身)을 말한다.
50)현상계 존재들의 실상(實相)이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고(苦)ㆍ부정(不淨)임을 알지 못하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전도(顚倒)된 견해를 일으킴을 말한다.
51)2공(空) 소현(所顯)의 진여로서의 자성을 말한다. 자성신은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 이전에 본래부터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성품이 현현된 상태이다. 본래의 자성청정세계ㆍ진여 법성이 전의(轉依)에 의해 드러난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 그 자체이다.
52)안근(眼根)에 의지해서 안식이 일어남과 같다는 뜻이다.
53)수용신은 법신에 의지하면서 불국토에서 법락을 향수하기 때문이다.
54)안근이 있기 때문에 안식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55)감각기관[根]이 의지처[所依]이고 식이 의지의 주체[能依]인 것처럼 법신과 자성신도 역시 각각 의지처ㆍ의지의 주체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56)복덕과 수행을 닦아서 성취되는 불신(佛身)이다. 스스로 대승 법락을 향수할 뿐만 아니라 지상(地上) 보살을 위해 대승법을 설하여 법락을 수용하게 하므로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한다.
57)10지 중의 초지위(初地位)에 들어감을 말한다.
58)안근에 의지하여 안식을 일으켜서 빛깔[色]을 봄으로써 인식작용이 완료됨과 같다는 의미이다.
59)10신ㆍ10주ㆍ10회향의 지위를 가리킨다. 이 역본의 다른 부분에서는 신행지(信行地)라고도 하였다. 현장의 역본에는 승해행지(勝解行地)로 되어 있다.
60)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다.
61)매우 높은 계율[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이다.
62)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가리킨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 계(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 천주라고도 한다).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63)자재천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64)현장 역본은 변계소집이라 하고 있다.
65)현장 역본은 원성실성이라 하고 있다.
66)‘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라는 문장부터 ‘이렇게 차례가 된다’까지는 앞의 2) 십의차제장 윗부분 즉 ‘이른바 생사와 열반이 서로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문장 뒤에 이어져야 앞뒤 내용상 맞게 된다. 현장 역본은 이와 같이 되어 있다.
67)바른 인식방법[量, pramāṇa]으로서 현량ㆍ비량ㆍ성교량을 말한다. 첫째, 현량(現量, pratyakṣa)은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아는 감각지(感覺知)이다. 예를 들면 안식이 눈[眼根]을 통해서 빛깔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 등이다. 둘째, 비량(比量, anumāna)은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비교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추측해서 아는 추리지(推理知)이다. 예를 들면 연기가 있음을 미루어서 불을 안다거나, 나비와 벌이 모이는 것을 미루어서 꽃이 있음을 아는 것 등이다. 셋째, 성교량(聖敎量, śabda)은 성언량(聖言量)ㆍ정교량(正敎量)ㆍ지교량(至敎量)이라고도 한다. 성자의 말씀에는 잘못이 없다고 해서 이것에 의해 여러 가지 사실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68)현장 역에는 ‘불선(不善)’으로 되어 있다.
69)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다.
70)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는 원인ㆍ요소의 의미이다.
71)범어 Āgama의 음역이다. 일반적으로 아함(阿含)이라 번역한다. 여기서는 광의(廣義)의 성교(聖敎)의 의미이다. 즉 교증(敎證)으로서 열거한다.
72)제8식의 3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자상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能藏ㆍ所藏ㆍ執藏) 가운데 능장을 해석한다.
73)소장(所藏)의 의미이다.
74)집장(執藏)의 의미이다. 제7식이 제8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함을 말한다.
75)유정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를 말한다. 태생은 모태를 통해 태어나는 것으로서 사람이나 짐승 등이다.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서 조류 등이다. 습생은 습기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파리ㆍ모기 등이 있다. 화생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업력에 의해 변화로써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서 하늘이나 지옥에 나는 것이다.
76)범어는 upātta로서 감수 유지작용의 의미이다. 외부대상을 접촉하여 그것을 섭지(攝持)해서 잃어버리지 않고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지각하는 작용이다.
77)의근(依根)은 부진근(扶塵根)을 가리킨다. 외부대상[塵]을 파지하는[扶] 감각기관으로서 안구ㆍ귀 등 눈에 보이는 기관이다
78)여기서 색근(色根)은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킨다. 승의근은 ‘뛰어난 의미[勝義]의 감각기관’이라는 뜻이다. 미세 청정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즉, 신경(神經)과 신경전달물질이다. 감각기관[根]의 기능인, 식을 일으켜서 대상을 파지하는 것[發識取境] 가운데 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79)범어는 citta로서 집기(集起)의 의미이다. 제8식에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인식내용이 종자의 형태로 적집되고 성장되므로 심이라고 부른다.
80)여래의 교법에 안주해서 법문을 안립하고 시설하는 지혜이다.
81)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82)5욕락을 즐기는 미혹을 없애기 위한 관법인 부정관(不淨觀) 가운데 구상관(九想觀)은 시체의 부정한 모습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습[脹相], 시체의 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오장이 썩는 모습[壞相], 시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습[血塗相], 시체에서 고름과 벌레가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서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습[濃爛相],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서 피고름이 엉겨 푸르퉁퉁한 모습[靑瘀相],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습[霙相], 가죽과 살이 없어지고 뼈만 붙어 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습[散相], 백골이 낭자한 모습[骨相],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가 되는 모습[燒相]이 있다.
83)이하 심(心)ㆍ의(意)ㆍ식(識)의 명칭을 해석한다.
84)제7 말나식을 가리킨다.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 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意)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85)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자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낸다. 후자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86)4연(緣) 가운데 하나이다. 전념(前念)의 식의 멸함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됨을 말한다. 현장의 역본에는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되어 있다.
87)차제멸의(次第滅意)라고 한다. 현장의 역본에는 무간멸의(無間滅意)로 되어 있다.
88)심ㆍ의ㆍ식의 세 가지 차별상을 가리킨다.
89)신견(身見)은 범어로는 satkāya-dṛṣṭi이며 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 음역하고, 유신견(有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제7 염오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고 집착함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과 아애(我愛)를 일으킨다.
90)신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와 나의 소유[我所]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의미했었다. 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91)즉 자아에 대한 애착은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92)무명, 즉 근본적인 무지는 자기 본질의 이치[無我]를 모르는 아치(我癡)를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ㆍ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93)여기서 무명은 구체적으로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我癡), 즉 제7식이 제8식을 대상으로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의 자아로 착각함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번뇌가 이 무명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이 네 가지 근본번뇌가 생겨나는 순서는 무명[我癡]→신견→아만→아애이다.
94)전찰나의 식이 멸하는 곳에 다음의 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95)다음 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라는 의미이다.
96)선심(善心)도 번뇌가 있는[有漏] 동안은 아집을 근본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를 의지처로 한다.
97)차제멸의(次第滅意)를 말한다.
98)염오의(染汚意)이다.
99)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100)현장의 역본에는 구유의(俱有依)로 되어 있으며, 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된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101)무상정(無想定)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다.
102)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의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다.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103)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다.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104)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을 가리킨다.
105)두 가지는 독행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106)앞의 문장의 의미에 대한 까닭이다. 능히 다스리는 지혜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미혹의 장애가 있다. 그런데 5식에는 능히 다스림[能治]이 없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것[所治]도 역시 없다는 의미이다.
107)이하 독행무명은 염오의 의식에 있지 않음을 밝힌다.
108)이하 5식과 비교해서 염오의(染汚意)를 성립한다.
109)무상정ㆍ멸진정의 차이에 의해서 염오의를 성립한다.
110)현장 역본에는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 하였다. 유부무기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을 말한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된다.
111)식을 첫 번째로 말하고, 의(意)를 두 번째로 말하며, 이제 세 번째로 심(心)을 말한다.
112)이하 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먼저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113)세간의 총명한 지혜로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표현한다.
114)현장 역본에는 이문밀의(異門密意)로 표현하고 있다. 이문밀의에서 이문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115)이하 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116)『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에 있다.
117)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118)현장 역본에는 궁생사온(窮生死蘊)으로 표현하고 있다.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윤회하는 주체의 의미이다.
119)진제의 역본에는 대왕의 길이라 표현하는 이유를 세 가지 의미로써 자세히 말한다. 첫째는 대왕의 길은 곧고 갈림길이 없으며, 둘째는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고, 셋째는 광명이 장애가 없다. 본식도 역시 그러해서, 곧고 갈림길이 없다는 것은 선정이 의심할 바가 없음에 비유하고,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다는 것은 대ㆍ소승이 모두 이런 의미를 널리 펴는 것에 비유하며, 광명이 장애가 없다는 것은 한량없는 도리를 인용함으로써 이 식을 증명함에 비유한다.
120)현장 역본에는 5취온(取蘊)이라 하였다.
121)이하 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가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다.
122)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진액과가 현장의 역본에는 등류과(等流果)로 되어 있는데, 편의상 여기서도 그 번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