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1) 의지ㆍ의욕[意用]ㆍ업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한량없는 정각이기2) 때문에 차이가 있다. 법신과 마찬가지로 수용신도 역시 그러하다. 의욕과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의지가 차이가 있다. 한량없는 의지신(依止身)이 전전하기 때문이다. 변화신도 역시 수용신과 같음을 마땅히 알라.
【釋】‘한량없는 의지신이 전전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이 한량없는 의지신이 있음은 이 수용신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욕과 업은 차이가 없으나 신체의 일에 차이가 있다. 마땅히 알라. 이 중에서 ‘의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모든 유정을 안락하게 하는 뜻이다. ‘업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정각과 반열반 등을 증득하는 작업을 나타낸다. 이 업이 차이가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067_a_01L【論】법신은 몇 가지의 공덕과 상응한다고 알아야 하는가?3) 가장 청정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ㆍ해탈ㆍ뛰어난 곳[勝處]ㆍ일체처(一切處)ㆍ번뇌가 없는 것[無諍]ㆍ서원대로 아는 것[願智]4)ㆍ네 가지 무애변(無碍辯)ㆍ여섯 가지 신통ㆍ32가지 대장부의 모습ㆍ80가지 훌륭한 모습ㆍ네 가지 모든 양상의 청정ㆍ열 가지 지혜의 힘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ㆍ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음[不護]5)ㆍ세 가지 생각에 머묾[念處]6)ㆍ법을 잃어버리지 않음ㆍ습기를 없앰ㆍ대비ㆍ18가지 불공법ㆍ모든 양상의 승묘한 지혜 등과 상응한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최고의 승의(勝義)를 성취하고 모든 지위에서 벗어나고 모든 중생 위에 이르러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네.
017_0067_b_05L“成就最勝義, 出過一切地, 至諸衆生上,
解脫諸衆生.
다함 없고 견줄 데 없는 덕과 상응하여 세간과 여러 대법회에서 친견할 수 있네.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과 하늘 등이네.
017_0067_b_07L無盡無等德, 相應世閒見,
衆輪亦不見, 一切天人等.”
【釋】법신은 이상과 같은 공덕과 상응한다. 다시 자성ㆍ원인ㆍ결과ㆍ업ㆍ상응ㆍ행사(行事) 등의 공덕이 있다. 이 중에서 ‘법신의 자성’은 최상의 승의를 성취함으로써 나타낸다. ‘최상의 승의를 성취함’은 청정한 진여를 말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자성이기 때문이다. ‘원인’이란 ‘모든 지위에서 벗어남’을 나타낸다. 모든 지위를 수행함으로써 그 부처님의 자체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 위에 이른다’는 것은 결과를 나타낸다. 이 결과가 모든 중생의 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을 해탈시킨다’는 것은 업을 나타낸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상응’이란 ‘다함 없고 견줄 데 없는 공덕의 상응’을 나타낸다. 이 중에서 ‘세간에서 친견한다’는 것은 화신을 친견하기 때문이다. ‘여러 대법회에서 친견한다’는 것은 수용신을 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하늘과 인간이 역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이 여러 대법회에서 자성신을 보지 못함을 말한다. 이것들은 불신의 행사의 차이를 나타낸다.
【論】그런데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매우 심오하고 가장 심오하다.26) 이 매우 심오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67_b_22L論曰:然此諸佛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云何可見?此中有偈:
017_0067_c_01L
모든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음을 태어남으로 삼고 머무는 곳이 없음을 처소로 삼도다.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것으로서 제4식(食)을 수용하네.27)
017_0067_c_01L“諸佛不生生, 無住處爲處, 諸事無功用,
受用第四食.
차별이 없고 한량없으며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업이네. 움직이지 않는 업과 움직임의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은 3신이 구족하네.28)
017_0067_c_03L無差別無量, 無數量一業,
不動及動業, 諸佛三身具.
정각을 증득해도 존재가 아니고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니네. 순간마다 한량없어서 존재와 비존재가 나타난 바이네.29)
017_0067_c_04L無有證正覺,
非不一切覺, 念念不可量, 有非有所顯.
탐욕이 없고 탐욕을 여읜 것도 아니니 또한 탐욕과 함께하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알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가네.30)
017_0067_c_05L無欲無離欲, 而亦與欲俱, 旣知欲非欲,
得入欲法如.
모든 부처님은 5음(陰)을 초월하면서도 5음 가운데 안주하네.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네. 버리지 않고서 적멸이네.31)
017_0067_c_07L諸佛過諸陰, 而亦住陰中,
與彼不一異, 不捨而寂滅.
모든 부처님이 사업을 같이함은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도다. 나는 이미ㆍ현재ㆍ장차 행하도다. 남을 이롭게 함에 이런 생각이 없네.32)
017_0067_c_08L諸佛同事業,
猶如大海水, 我已現當作, 他利無是思.
모든 죄인은 보지 못하나니 파손된 그릇 안의 달과 같도다. 널리 모든 세간에 두루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기 때문이네.33)
017_0067_c_09L諸罪者不見, 如破器中月, 普遍一切世,
法光猶如日.
혹은 정각을 나타내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도다. 태어남도 없고 또한 비존재이니 여래는 상주하는 불신이네.34)
017_0067_c_11L或顯示正覺, 或涅槃如火,
不生亦不有, 如來常住身.
부처님은 바르지 않은 법ㆍ 인간세계ㆍ살기 괴로운 세계ㆍ 청정한 행이 아닌 법 가운데 스스로 가장 뛰어난 분으로 머무시네.35)
017_0067_c_12L佛於非正法,
人及惡趣中, 於非梵行法, 自住最勝者.
모든 곳에서 행하여도 역시 행하는 바가 없도다. 모든 중생이 친견하지만 여섯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네.36)
017_0067_c_13L行於一切處, 而亦無所行, 一切衆生見,
然非六根境.
모든 번뇌를 조복해도 마치 주문이 모든 독을 제압함과 같네. 미혹으로써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족하도다.37)
017_0067_c_15L伏斷諸煩惱, 如呪制諸毒,
以惑至惑盡, 佛具一切智.
번뇌는 곧 깨달음이고 생사는 열반의 자체이네. 큰 방편이 있기 때문에 여래는 사량하기 어렵도다.38)
017_0067_c_16L煩惱卽菩提,
生死寂滅體, 有大方便故, 如來不思議.”
이것은 곧 12가지 매우 심오함이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태어남ㆍ성장ㆍ업ㆍ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오함이며, 바르고 보편적인 깨달음의 매우 심오함이고, 탐욕을 여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5음을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성숙의 매우 심오함이고, 현현의 매우 심오함이며, 바르고 보편적인 깨달음과 열반을 나타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안주의 매우 심오함이며, 자체를 나타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번뇌를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불가사의의 매우 심오함이다.
017_0068_a_01L【釋】이제 마땅히 대승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야 한다. 곧 12가지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이 중에서39) ‘태어남ㆍ성장ㆍ업ㆍ의지하여 머무는 것[住] 등의 매우 심오함’은 하나의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음을 태어남으로 삼고’라는 것은 태어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음을 태어남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머무는 곳이 없음을 처소로 삼도다’라는 것은 성장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은 생사와 열반에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짓는 바가 의식적인 노력[功用]이 없다’는 것은 업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은 평등으로써 업을 삼으시고, 의식적인 노력이 없으시기 때문에 짓는 업이 모든 곳에서 평등하다. ‘제4식(食)을 수용하네’라는 것은 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네 가지 음식작용물은 부정한 신체가 의지하여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부정한 신체가 의지하여 머무는 곳이 아니다. 단식(段食) 등 네 가지 음식작용물40)에 의거해서 욕계의 중생들은 부정한 신체가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청정하거나 부정한 신체가 의지하여 머무는 곳은 이른바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이다. 이들은 하부 지위의 번뇌에 대해서 청정하고, 상부 지위의 번뇌에 대해서 부정하다. 이러한 청정하거나 부정한 신체는 오직 촉식ㆍ의사식(意思食) 등 세 가지 음식작용물41)이 있다. 단식을 여의고서도 그 신체는 머물 수 있다. 그 신체는 오직 세 가지 음식작용물로써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신체가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은 곧 단식 등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성문ㆍ연각 등에 있어서 이 청정신이 만일 세간에 머물면 이로 인하여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017_0068_b_01L‘나타내고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은 그 단식 등 네 가지 음식작용물의 나타냄이다. 즉 이로써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드신다. 이것을 네 번째 음식작용물로 삼아서 이로써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중생이 보시한 것을 수용하심은 환희를 일으키고 복덕을 쌓기 위해서이므로 음식을 드시는 일이 없다.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모든 부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여러 하늘이 가까이서 취하여[接取] 나머지 중생에게 베푼다.42) 이 인연에 의해 그 중생들로 하여금 장차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 게송은 동일한 매우 심오함이라고 한다. 또한 마땅히 알지니, 모든 부처님은 태어남의 양상에 열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어리석음과 다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섭지(攝持)함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머무는 것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버리는 것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두 가지가 없는 양상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오직 영상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요술로 나타난 것과 같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머묾이 없는 것을 머무는 것으로 삼기 때문이며, 열째는 깨달음의 의미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열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여래는 생사와 열반에 머무시지 않는다. 첫째는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멸이 아니기 때문이며, 셋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43) 넷째는 존재하지 않는 자성임을 알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얻는 바가 없고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의는 마음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마음의 증득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사물에 대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열째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불사가 성취된다. 첫째는 멸하여 여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마땅히 짓는 것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고, 넷째는 짓는 주체가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작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있는 바가 없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본래 옛부터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할 바를 다 마쳤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할 바를 아직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열째는 수행을 성숙시켜서 일체법에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열 가지 인연이 있어서 모든 부처님은 음식을 수용하신다. 첫째는 음식으로써 지켜지는 신체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복덕을 쌓게 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중생과 같이함44)을 시현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올바르게 음식을 드는 것을 수순해서 배우도록45) 하기 위해서이며, 다섯째는 만족을 아는 것을 수순해서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남에게 정진을 일으키기 위해서이고, 일곱째는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며, 여덟째는 자신에게 탐착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아홉째는 존중하는 업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이며, 열째는 본원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46)
017_0068_c_01L다음은47)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차별이 없고 한량없으며’라는 것은 안립의 매우 심오함이다. 이 중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법신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한량없다’는 것은 한량없는 신체가 깨달음을 증득하기 때문이다.48)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업’이란 숫자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교법은 한량없지만 모든 부처님은 동일한 업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업과 움직임의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은 3신이 구족하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부처님은 3신과 상응하시지만 수용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고, 화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곧 매우 심오하기 때문이다.
다음은49) ‘정각을 증득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정각을 증득해도 실재가 아니고’라는 것은 유정[人]과 법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니고’라는 것은 가명(假名)에 의거해서 모든 깨달음을 말하기 때문이다.50) 이 바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순간마다 한량없어서’라고 말한다. 이것으로써 나타낸다. 순간마다 한량없는 유정이 정각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나타난 바이네’라는 것은 진여를 나타낸다. 모든 존재와 비존재에 있어서 진정한 대상을 삼기 때문이다.
다음은51) ‘탐욕을 여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탐욕이 없고 탐욕을 여읜 것도 아니니’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탐욕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잡염된 바가 없고, 이미 잡염이 없기 때문에 역시 여의는 것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탐욕이 있다면 탐욕을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탐욕과 함께하네’라는 것은 오직 위로 드러난 마음의 탐욕을 끊고 수면(隨眠)52)의 욕망을 남겨두기 때문이다.53) 만일 수면의 욕망을 남겨두지 않으면 곧 성문처럼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알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가네’라는 것은 이른바 탐욕의 분별 가운데서 탐욕이 아님을 알면 곧 탐욕법의 진여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017_0069_a_01L다음은54) ‘5음을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모든 부처님은 5음을 초월하면서도 5음 가운데 안주하네’라는 것은 모든 여래는 이미 색음(色陰) 등 취착된 5음[五取聚]55)을 초월하고, 다만 무소득의 법여취(法如聚)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그것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이미 그 분별의 5취(聚)를 버렸더라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곧 그것의 법여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비록 화신의 분별이지만 곧 청정한 경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고서 적멸이네’라는 것은 진실성의 5취를 버리지 않고서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다음은56) ‘성숙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모든 부처님이 사업을 같이함’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작업이 평등함을 말한다. 모두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어째서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은가? 마치 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고기ㆍ자라 등이 수용함과 같다. 이처럼 이미 법계에 들어가면 다 같이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ㆍ현재ㆍ장차 행하도다. 남을 이롭게 함에 이런 생각이 없네’는 다음과 같다. 한순간이라도 “나는 세 가지 시기57)에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마니보주ㆍ하늘의 음악처럼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사업을 행한다.
다음은58) ‘현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만일 세간에서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데 “부처님은 그 불신이 상주한다”고 말하면, 이미 상주하는 불신이 있는데 어째서 보지 못하는가? 게송에서 ‘모든 죄인은 보지 못하나니, 파손된 그릇 안의 달과 같도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릇이 파손되면 물이 머물지 못하고, 물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달이 나타나지 않음과 같다. 이처럼 모든 중생들은 사마타의 맑고 빛남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은 삼마제에 비유하나니, 자체가 맑고 빛나기 때문이다. ‘널리 모든 세간에 두루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기 때문이네’는 다음과 같다. 비록 부처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역시 불사를 짓는다. 수다라 등의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비유하면 햇빛과 같아서, 이로써 불사를 짓고 역시 세간에서 중생을 성숙시킨다.
017_0069_b_01L다음은59) ‘바르고 보편적인 깨달음과 반열반을 나타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혹은 정각을 나타내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도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혹은 바르고 보편적인 깨달음을 보이고 혹은 반열반을 보이는데, 그 일이 마치 불[火]과 같다. 비유하면 불이 어느 때는 타오르고 어느 때는 소멸함과 같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다. 혹은 어떤 중생에게 마땅히 열반으로써 성숙시켜야 하면 곧 열반을 나타내신다. 마땅히 정각으로써 성숙시켜야 하면 곧 정각을 나타내신다. 해탈시키기 위해서이다. 마치 불의 속성이 다르지 않듯이, 오직 하나의 법신도 역시 그러하다.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게송의 나머지 반은 그 뜻을 알기 쉽다.
다음은60) ‘안주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부처님은 바르지 않은 법ㆍ인간세계ㆍ살기 괴로운 세계ㆍ청정한 행이 아닌 법 가운데서 스스로 가장 뛰어난 분으로 머무시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체로서 가장 뛰어나게 안주하고, 또한 성스러운 안주에 가장 뛰어나게 안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스러운 안주는 공(空)에 안주하기 때문이다.61) 천상의 안주는 선정에 안주함을 말하고, 청정의 안주는 자무량심 등의 한량없는 마음62)에 안주함을 말한다. 바르지 않은 법은 모든 불선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모든 불선법에 대해서 공의 안주에 머무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안주는 성스러운 안주이다.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는 중생을 반연하여 안주한다.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천상의 안주이다. 청정한 행이 아닌 법 가운데 자체로서 가장 뛰어나게 머문다. 이상과 같은 공의 안주는 곧 자체이다.
017_0069_c_01L다음은63) ‘자체를 현현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모든 곳에서 행하여도 역시 행하는 바가 없도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후득지혜는 선ㆍ불선 등에 대해서 차별하여 지혜가 생겨난다. 그러나 무분별지혜는 곧 행하는 바가 없다.64) 화신은 모든 곳에서 작용하더라도 나머지 불신65)은 그렇지 않다.66) 두 번째 의미 중에서 ‘모든 중생이 친견하지만’이라는 것은 곧 이 화신이 모든 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화신이 만일 지옥 중생이 볼 때,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곳에 나는 것이지, 화신의 자성이 아니다. 그 지옥 중생이 볼 때에 지옥의 신체이기 때문에 그 지옥 중생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다.67)
다음은68) ‘번뇌를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모든 번뇌를 조복해도 마치 주문이 모든 독을 제압함과 같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보살의 지위에 있을 때에 번뇌를 현행하며 번뇌를 소멸하지는 않는다.69) 수면의 미혹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문이 모든 독을 제압함과 같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독의 해를 입어서 주문의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여야만 해를 입지 않음과 같다.70) 번뇌도 역시 그러하다. 지혜로써 알기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미혹으로써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라는 것은71) 이른바 수면의 미혹을 남겨두기 때문에 성문이 반열반에 드는 것과는 다르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족하도다’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은 번뇌가 다할 때72) 곧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를 구족하기 때문이다.
다음은73) ‘불가사의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내는 게송이다. 이 번뇌들은 곧 그 보리분법이고 집제(集諦)이기 때문이다.74) 생사 등의 고제가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여래의 모든 말씀은 다 불가사의하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인연처럼 오직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 등으로서 사량의 경계가 아니다.
【論】모든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려면 몇 가지 생각으로써 생각해야 하는가? 간략히 말하면 모든 보살이 부처님을 생각함을 닦아 익히는 데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땅히 “모든 부처님은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시다”라는 염불을 닦아야 한다. 모든 세계에서 장애 없는 신통의 지혜를 얻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70_a_01L
장애가 있고 원인을 결여해서 중생세계에서 널리 두루하네. 두 가지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자재가 없네.
017_0070_a_01L“障㝵及闕因, 衆生界普遍, 二種決定故,
諸佛無自在.”
둘째는 “여래의 신체는 상주한다.”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를 여의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는 비방이나 혐오할 만한 것이 가장 없다.” 모든 번뇌장과 지장을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여래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모든 불사를 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여래는 크게 수용하신다.” 청정한 불국토를 큰 수용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래는 오염이 없다.” 세간에 태어나 머무시더라도 모든 세간법이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여래는 크게 이롭게 하신다.” 정각을 증득하고 열반에 들어감 등을 나타내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중생들은 성숙케 하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하게 하신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의지처가 없이 두루 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하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에 대해서 지혜로운 이는 이렇게 생각하네.
017_0070_a_14L無依止遍行, 平等於多人,
一切一切佛, 智人如是念.”
017_0070_b_01L 【釋】모든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려면 일곱 가지 양상과 같이 생각을 수행해야 한다. 이제 마땅히 이 수행의 의미를 나타내야 한다. 이 중에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시다’라는 것은 신통에 의해 일체법에 자재함을 얻으신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세계에서 장애 없는 신통을 얻으시므로 성문 등이 장애가 있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를 얻으신다면, 어째서 모든 중생이 열반을 얻지 못하는가? 이런 의미를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인연이 있으므로 능히 열반을 얻게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장애가 있고 원인을 결여해서’ 등의 게송을 말한다. 여기서 ‘장애’라는 것은, 업의 장애 등에 구애되기 때문에 비록 한량없는 부처님이라도 능히 그들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그 중생에 대해서 위와 같은 자재가 없다. ‘원인을 결여한다’는 것은 열반법의 종성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이 원인을 결여함이다. 그 종성이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결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업의 결정이고, 둘째는 과보를 받는 결정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결정에 대해서 부처님은 자재하시지 못하다. 마땅히 알지니, 이 중에서 과보의 장애는 어리석고 둔한 것 등이다. 과보를 받는 결정이란 결정적으로 지옥 등에 떨어지는 것이다. 과보와 과보를 받는 것은 이런 차이가 있다.
017_0070_c_01L‘상주하는 불신’이란 곧 진여가 끊임없이 번뇌를 여의는 것이다. 이것이 상주와 같고, 이로써 신체를 삼는다. 그러므로 여래의 상주하는 신체라고 부른다. 마땅히 알지니 ‘여래는 크게 수용하신다’는 것은, 모든 여래는 청정한 불국토로써 큰 수용을 삼음을 말한다. ‘크게 이롭게 하신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은 큰 이익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숙시키고 해탈하게 함을 말한다. 마땅히 알지니, 성숙하지 못한 중생은 보리와 열반으로써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나머지 네 가지 양상의 염불은 의미가 알기 쉽다. 이 일곱 가지 염불을 다시 두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자기 마음에 따라서’ 등의 게송 중에서 일곱 가지 양상을 성취한다. 모든 보살은 처음에 부처님의 과보가 다 자기 마음에 따르는 것을 생각한다.75) 이것은 역시 곧 ‘상주함’이다. ‘청정에 상응함’은 선(善)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방이나 혐오할 만한 것이 가장 없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모든 불사를 지으시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큰 법락을 베푸네’라는 것은 곧 청정한 불국토이다. ‘의지처가 없이 두루 행하며’라는 것은 만일 의지처를 갖고 행하면 곧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의지처가 없이 교화를 행하신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신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기 때문에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런 과보를 생각해야 한다.
【論】또한 모든 부처님 국토의 청정한 양상을 마땅히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76) 『백천게수다라보살장』의 경전을 설하게 된 연기 중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바가바께서 다음과 같은 궁전에 머무셨다. 그곳은77) 매우 찬란하게 빛나는 7보 장엄이 대광명을 내어 널리 한량없는 세계를 모두 비추기 때문이고, 수많은 방위 공간을 연이어 묘하게 장식하기 때문이며, 주위가 끝이 없어 그 크기를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계에서 행하는 곳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이 일으킨 곳이기 때문이고, 가장 청정한 자재식을 모습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래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기 때문이며, 모든 대보살들이 운집하기 때문이고, 수많은 천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78)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존재[人非人]79)들이 항상 무리지어 따르기 때문이다. 큰 법의 맛을 기쁘고 즐겁게 지니기 때문이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에 안주하기 때문이며, 모든 번뇌의 핍박을 여의기 때문이고, 갖가지 마군[魔]80)을 여의기 때문이며, 보살 등의 모든 장엄보다 뛰어난 여래 장엄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함[大念慧行]81)이 생겨나기 때문이고, 큰 사마타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교법[乘]으로 삼기 때문이며, 뛰어난 공(空)ㆍ차별상이 없음ㆍ소원이 없음의 해탈을 들어가는 곳으로 삼기 때문이고,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하고 뛰어난 보배 연꽃으로 세워진 큰 궁전 가운데 노니시기 때문이다.”
017_0071_a_01L이상과 같은 문구들은 청정한 불국토를 나타낸다. 이른바 빛깔의 구족, 모습의 구족, 분량의 구족, 방위ㆍ처소[方所]의 구족, 원인의 구족, 결과의 구족, 주(主)의 구족, 조반(助伴)의 구족, 권속의 구족, 머물러 지님의 구족, 사업의 구족, 수순하여 섭수함의 구족, 두려움이 없음의 구족, 머무는 곳의 구족, 길[道路]의 구족, 교법[乘]의 구족, 문(門)의 구족, 의지(依持)의 구족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상과 같이 다 현현할 수 있다. 또한 그 청정한 불국토에는 모든 과보가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며, 한결같이 안락하고, 한결같이 혐오가 없으며, 한결같이 자재하다.
【釋】『백천게수다라』의 연기82)에서 불국토의 청정함을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 청정한 불국토는 어떤 뛰어난 공덕으로써 나타내는가? 처음의 두 문구는 ‘빛깔[顯色]의 구족’이니, 7보 등을 말한다. 7보 중에서 금ㆍ은ㆍ유리(琉璃)ㆍ산호(珊瑚)ㆍ마노(瑪瑙)83) 등의 보석이 포함된다. 말라갈다(末邏羯多)[옥의 종류로 녹색이다] 역시 이 보석도 포함된다. 마땅히 알지니, 적보(赤寶)는 적진주이다. 적충(赤蟲)에서 나오고, 그 안에 구슬을 내기 때문이고, 이 보주는 모든 보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광명이 한량없는 세계를 비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7보에서 나오는 모든 광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빛깔의 구족의 두 번째 문구이다.
다음의 한 문구는 ‘장엄의 구족’을 나타내고, 다음에 한 문구는 ‘분량의 구족’을 나타내며, 다음의 한 문구는 ‘방위ㆍ처소[方所]의 구족’을 나타낸다. 이것은 무엇을 원인으로 삼는가? 출세간의 무분별지혜와 그 출세간의 무분별후득지혜의 두 가지 선근이 일으킨 모든 선을 원인으로 삼는다. 이것은 곧 ‘원인의 구족’이다. 다음의 한 문구는 ‘결과의 구족’을 나타낸다. 그 불국토에서는 가장 청정한 식이 자재하게 전변함을 양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071_b_01L다음의 한 문구는 ‘주(主)의 구족’을 나타내고, 다음의 한 문구는 ‘조반의 구족’을 나타내며, 다음의 한 문구는 ‘권속의 구족’을 나타낸다. 이 권속의 구족 중에서 마후라가는 역시 용에 포함된다. 정토에서 만일 능히 신체를 머물러 지닌다면 이것은 머물러 지님의 구족이다. 또한 한 문구로써 나타낸다. 이것을 음식작용물로 삼아서 다시 무슨 사업을 짓는가? 다만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을 성취한다. 또한 한 문구로써 ‘수순하여 포섭함의 구족’을 나타내나니, 정토에는 번뇌가 없고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 문구로써 나타낸다. 그곳은 원한의 두려움이 없다. 마군이 없기 때문이다. 그 불국토에는 5음의 마군ㆍ번뇌의 마군ㆍ죽음의 마군ㆍ하늘의 마군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이 한 문구는 ‘두려움이 없음의 구족’을 나타낸다. 다음의 한 문구는 ‘머무는 곳의 구족’을 나타낸다. 또한 어떤 길에 의해서 그 청정한 불국토에 들어가는가? 대승 안에서 들어서 이루는 지혜ㆍ사유해서 이루는 지혜ㆍ수행해서 이루는 지혜를 자체로 삼는다. 곧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함이 그 순서와 같다. 이 한 문구는 ‘길의 구족’을 나타낸다.
무엇으로써 교법[乘]을 삼는가? 사마타ㆍ비발사나를 교법으로 삼아서 그것에 나아간다. 이 한 문구는 ‘교법의 구족’을 나타낸다. 어떤 문으로써 그 국토에 들어가는 문을 삼는가? 대승 가운데 공(空)ㆍ무상ㆍ무원의 해탈84)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이 한 문구는 ‘문의 구족’을 나타낸다. 다음의 한 문구는 ‘의지(依持)의 구족’을 나타낸다. 마치 대지가 풍륜(風輪)을 의지처로 삼음과 같다. 그 청정한 불국토는 무엇을 의지처로 삼는가?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된 뛰어난 보배 연꽃을 의지처로 삼는다. 이 문구는 의지의 구족을 나타낸다. 그 정토 가운데 ‘과보가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다’는 것은 거기에는 더러운 분뇨 등 부정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안락하다’는 것은 거기에는 오직 즐거운 감수작용만이 있고, 괴로운 감수작용이 없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작용도 없음을 말한다. ‘한결같이 혐오가 없다’는 것은 거기에는 불선과 무기(無記)가 없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자재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힘에 의해서이고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071_c_01L【論】또한 이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는 어느 때나 다섯 가지 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업이다. 귀먹은 이ㆍ장님ㆍ미친 이 등의 고통을 오직 보기만 해도 곧 구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살기 괴로운 세계[惡道]를 구제하는 업이다. 불선의 장소로부터 빼내어 선한 장소에 두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이 아닌 것을 구제하는 업이다. 외도 등은 방편이 아닌 것으로써 해탈을 구하므로 깨달음을 열어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 안에 두기 때문이다. 넷째는 아견을 구제하는 업이다. 삼계를 벗어나는 가르침으로써 길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법을 구제하는 업이다. 다른 교법에 나아가려는 보살들과 부정종성의 성문들을 빼내어 안전하게 두어서 대승을 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 다섯 가지 업은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업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원인ㆍ의지신(依止身)ㆍ사업ㆍ생각ㆍ행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네. 세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으나 스승에게는 그런 차이가 없네.
017_0071_c_11L“因依事念行, 別故業有異, 世閒有此異,
導師無彼別.”
【釋】‘모든 부처님의 법계’란 곧 법신이다. 마땅히 알지니, 그것에 다섯 가지 업이 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업’이란 부처님을 친견함으로써 장님 등이 곧 눈 등을 얻기 때문이다.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하는 업’이란 이 업으로써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불선의 장소로부터 옮겨서 선의 장소에 두기 때문이다. ‘아견을 구제하는 업’이란 삼계를 초월하는 수도를 설함을 ‘구제한다’고 말한다. 세간을 삼계라고 부르나니, 곧 이것을 아견으로 삼는다. 나머지 두 문구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마땅히 알지니, 이러한 다섯 가지 업은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업이다.
017_0072_a_01L이러한 의미들을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만일 모든 부처님이 평등한 업이고 세간의 중생은 불평등한 업이라면, 이러한 인연은 ‘원인ㆍ의지신ㆍ사업ㆍ생각ㆍ행’ 등의 한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세간에서 ‘원인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지옥의 원인이 다르고, 인간과 천상의 원인이 다르며, 나아가 아귀의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다. ‘의지신의 차이’란 의지신이 다르기 때문에 작업에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사업의 차이’란 상업을 하거나 혹은 농업을 경영하는 등 이러한 사업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의 업의 자체가 다름을 말한다. ‘생각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생각을 의욕이라고 이름한다. 이 의욕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의 업은 역시 차이가 있다. ‘행의 차이’란 곧 유위법의 행이다. 지은 바 유위법의 행의 업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누가 이런 차이가 있는가? 게송에서 ‘세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으나 스승에게는 그런 차이가 없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모든 사업이 다시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음을 말한다. 곧 원인 등 다섯 가지 차이가 없어서 모든 부처님의 작업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한 부류를 이끌어 섭수하고 나머지를 안주시키기 위함이니 이 부정종성[不定性]에 대해서 정각의 일승을 말씀하시네.
017_0072_a_15L“爲引攝一分, 及安住餘者, 於此不定性,
說正覺一乘.
법ㆍ무아ㆍ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종성이 같지 않음ㆍ 두 가지 의욕을 얻음ㆍ열반ㆍ 구경 때문에 오직 일승이네.
017_0072_a_17L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涅槃, 究竟唯一乘.”
017_0072_b_01L 【釋】이 두 게송은 일승을 말씀하신 취지를 나타낸다. ‘한 부류를 이끌어 섭수하기 위해서’란 이른바 부정종성의 성문 등을 대승에 이끌어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85) 어떻게 그 부정종성의 성문을 대승 안에서 반열반하게 할 수 있는가? ‘나머지를 안주시킨다’는 것은 부정종성의 보살을 대승에 안주시킴을 말한다.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대승을 버리지 않고 성문승에서 반열반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의미 때문에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다. ‘부정종성’ 등의 두 문구의 의미는 알 수 있다. ‘법ㆍ무아ㆍ해탈’의 한 게송 중에서 별도의 취지로 일승을 말씀한다. 무엇이 별도의 취지인가?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무아가 평등하기 때문이며,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법은 곧 진여이고, 이 진여는 평등하다. 모든 성문 등이 다 같이 그 진여로 나아가기 때문에 승(乘)이라고 이름한다. 평등하기 때문에 일승이라고 부른다. ‘무아가 평등하기 때문’이란 유정의 자아가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미 유정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성문이다”, “이것은 보살이다”라고 말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86)
이 무아의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성문 등도 역시 마찬가지로 번뇌를 해탈한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세존께서 “해탈과 해탈 등87)에 각각의 양상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종성이 다르다’는 것은 근기의 성품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교법에 있어서 불결정종성의 성문 등도 역시 성불할 수 있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두 가지 의욕을 얻기 때문’이란 다음 두 가지의 의욕을 얻기 때문이다. 평등의 의욕이란 일체 중생이 하나의 자체에 포섭되기 때문에 나는 곧 그이고, 그는 곧 나이다. 이렇게 섭수하고 나서 정각을 얻고, 곧 그들도 정각을 얻는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두 번째 의욕은 『법화경』에서 성문의 수기 같은 것이다. 이 의욕을 얻음으로써 다만 모든 불법을 얻고, 평등의 의욕처럼 법신을 얻지 않는다. 이 평등의 의욕을 얻음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법여(法如)는 곧 나의 법여이다”라고 생각한다.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 그 대중 가운데 많은 보살이 있어서 성문들88)과 이름을 같이해서 수기를 받는다.
017_0072_c_01L‘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내가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수많은 백천 번을 성문승에서 반열반하였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모든 중생을 보고서 마땅히 성문승으로써 조복할 자는 그들에게 반열반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구경(究竟)’은 곧 일승이다. 구경에 별도의 취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별이 있는 것은 성문승 등이 불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세존은 오직 일승을 말씀하신다.
【論】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은 동일한 법신인데 부처님이 많이 계신다. 이것은 무슨 인연에 의해 볼 수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72_c_07L論曰:如是一切諸佛,同一法身,而有多佛,此以何因緣可見?此中有偈:
한 세계에 두 분은 없으나 동시에 많은 분이 성취되네. 순서가 있음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이 있게 되네.
017_0072_c_09L“一界無有二, 一時多成就, 次第非道理,
故成有多佛.”
【釋】이 인연에 의거해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평등한 법신이다. 혹은 한 분이고 혹은 많은 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음에 나타내 보여야 한다. 마땅히 알지니, 이 중에서 ‘한 분’이라는 것은 법계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이것으로써 자체로 삼는다. 마땅히 알지니, 법계가 평등하기 때문에 한 분의 부처님이다. 또한 마땅히 알지니, 한 분의 부처님이란 동시에 한 세계에서 두 분의 부처님이 함께 출현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한 분의 부처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듯이, 한 분이기도 하고 많은 분이기도 하다.
017_0073_a_01L이른바 ‘한 세계에’ 등에서 ‘한 세계에 두 분은 없으나’는 이 한 문구는 한 분의 의미를 나타낸다. 한 세계에 두 분의 부처님이 함께 세간에 출현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구는 많은 부처님을 나타낸다. ‘동시에 많은 분이 성취되네’라는 것은 동시에 수많은 보살이 다 같이 수행하여 자량이 원만히 성취됨을 말한다. 만일 이들이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히 성취하고서도 불과를 얻지 못하면 이러한 자량은 허망된 것이 된다. 많은 보살이 다 같이 수행하여 자량이 원만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처님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순서가 있음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라는 것은 순서대로 정각을 얻는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만약 깨달음의 자량을 수행할 때 순서를 기다려서 성취한다면, 정각을 증득할 때에도 역시 순서가 있다. 그러나 많은 보살은 자량을 수행하는 것이 순서가 없기 때문에 정각을 증득할 때도 역시 순서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論】법신 가운데 모든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지 않고 역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73_a_07L論曰:於法身中,諸佛非畢竟涅槃`非非畢竟涅槃,云何可見?此中有偈: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해야 할 바가 끝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고 역시 반열반에 들지 않네.
017_0073_a_09L“解脫一切障, 所作未究竟, 佛畢竟涅槃,
亦不般涅槃.”
【釋】또한 다른 부파의 논사들이 “모든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부파의 성문승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신다”고 말한다. 이처럼 두 가지 취지가 있으므로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등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번뇌장과 지장을 해탈하시면, 이런 취지에 의해서 ‘모든 부처님께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신다’고 말한다. ‘해야 할 바가 끝이 없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시킨다. 마땅히 이런 일들을 하셔야 하며, 이런 취지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지 않는다. 만약 이것과 다르면 곧 성문의 열반과 같다.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야 할 서원이 문득 결과가 없게 된다.
017_0073_b_01L【論】어째서 수용신은 곧 이와 같이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89) 여섯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색신(色身)이 나타나기 때문이고, 둘째는 한량없는 부처님의 여러 법회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시현하는 자체가 일정하지 않게 나타나기 때문이고, 넷째는 각각 다르게 현현하는 자체의 변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보살ㆍ성문ㆍ여러 하늘 등의 여러 대중의 법회에서 섞여서 나타나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아리야식과 생기식(生起識)90) 등의 전의가 상응하지 않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 의미가 성립된다.
【釋】이제 다음으로 이 도리에 의거해서 자성신이 수용신을 성립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첫째로 색신이 나타나기 때문’이란 부처님의 색신은 법신이 아님을 말한다. 볼 수 있는 색신은 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법신이 아니다. 또한 이 수용신은 차별이 있다. 모든 부처님의 큰 법회의 차이 때문이다. 법신은 이러한 차이가 없다. 이 도리에 의거해서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그 좋아하는 바에 따라 수용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수다라에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황색으로 친견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청색으로 친견한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갖추어 말씀한다. 수용신은 이와 같이 체상이 일정하지 않다. “자성신의 경우 체성이 일정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곧 도리에 맞지 않다. 자성신은 이처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073_c_01L또한 수용신은 어떤 중생이 처음에 다른 색깔로 보고 나중에 그 신체를 다시 다른 색깔로 본다. 법신이라면 자성의 변동은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항상 하늘 등 여러 대중과 섞여 있지만, 자성신이 이렇게 섞여 있다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아리야식이 전의하고서 곧 자성신을 증득한다.91) 만일 이 자성신이 수용신이라면, 생기식이 전의하면 다시 어떤 불신을 증득하는가? 그러므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이 여섯 가지 불상응에 의거함으로써 두 불신은 하나가 아니다.
【論】어떤 인연 때문에 화신 역시 자성신이 아닌가?92) 여덟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퇴전하지 않는 삼마제를 얻으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일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거 세상에서 글씨ㆍ산술ㆍ조각ㆍ공예ㆍ잡론 등과 욕락을 수용하는 행에 있어서 지혜가 없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93) 셋째는 이미 잘못 말했거나 훌륭하게 말해진 교설을 알면서 외도의 처소에 간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삼승의 수도를 잘 알면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만억의 염부주를 버리고 한 곳에서 정각을 이루고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만일 정각을 증득하는 등의 방편을 나타내지 않고서 그 나머지가 다 화신으로써 불사를 짓는다면, 곧 마땅히 도솔천에서 정각을 증득해야 한다. 일곱째는 어째서 모든 염부주에서 평등히 부처님이 출현하시지 않는가? 이미 그렇지 않다. 아함과 도리로써 증명할 수 없다.94) 여덟째는 한 세계에서 두 분의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는 일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많은 화신의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한 세계란 하나의 사주(四洲) 세계이다. 두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출현하지 않음과 같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모든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평등하게 많은 모태에 드네. 모든 종류의 정각을 현현하기 위해서 생을 받네.
017_0073_c_22L“諸佛微細化, 平等入多胎, 一切種正覺,
爲顯現受生.”
017_0074_a_01L
【釋】이제 다음으로 자성신이 곧 변화신이라는 것은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 의미를 나타낸다.95) 여덟 가지 불상응이 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불상응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한량없는 겁에 퇴전하지 않는 삼마제를 얻는다. 오히려 도솔타천 등 여러 하늘에도 태어나지 않는데, 하물며 다시 인간세상이랴? 그러므로 세간에서 친견하는 것은 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모든 보살이 이미 숙명의 지혜를 얻고서 글씨ㆍ산술 등의 일을 모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화신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또한 보살은 3아승기겁 동안 수행할 때 바른 교설과 삿된 교설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최후에 정각을 증득할 때 능히 알 수 있는가? 그러므로 화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만억의 염부주를 버리고 오직 한 곳에서 정각을 이루고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화신이 성취되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시현한다. 그러므로 화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만약 오직 한 곳에서 정각을 이루고 다른 곳에서는 화신을 나투어서 권속을 포섭한다고 말하면, 어째서 도솔타천에 머물러서 정각을 증득하지 않고 모든 4대주에서 화신을 나타내는가? 만일 “모든 4대주에서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런 의미는 옳지 않다. 아함과 도리로써 증명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불국토 가운데 하나의 4대주에서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
017_0074_b_01L만일 그대가 그렇다고 말하면 수다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전에서 “마땅히 알지니 두 분의 부처님이 동시에 출현하시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 경전에서 말씀한 것은 전륜성왕으로 비유한다. ‘두 분의 전륜성왕이 함께 출현하는 일이 없음과 같다’는 것은 하나의 4대주에서 함께 출현하시지 않음을 말하며, 하나의 불국토는 아니다. 두 분의 부처님이 함께 출현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의 세계는 하나의 4대주를 말한다. 이 중에서 게송으로써 정각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이 곧 그 의미이다. 부처님이 도솔타천궁에 머무시다가 만일 아래로 내려와서 모태에 들어가면 곧 그때 상좌 사리불 등 권속과 함께 하신다. 마땅히 알지니, 그들은 다 변화로 시설된 바이다. 이렇게 시설하고서 모든 모습 중에서 정각을 증득함을 나타내신다.
【釋】여기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의미를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해서 큰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신다. 이미 이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취지를 갖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따라서 행하신다. 만일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신다면 그 서원과 행은 문득 결과가 없게 된다. 만일 그대가 “여래의 법신은 상주한다”고 말하면, 수용신과 화신은 무상한데 어째서 상주하는 불신이라고 부르는가? 이제 이 의미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論】수용신과 화신의 두 불신은 무상한데 어째서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상주하는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수용신과 변화신의 이 두 불신은 과보를 받아서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자주자주 화현하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듯이, 항상 음식을 베풀 듯이, 불신이 상주함도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017_0074_c_01L【釋】두 불신이 상주한다는 것은, 상주하는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 두 불신이 상주한다. 또한 수용신은 수용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 화신은 항상 정각을 증득하고 반열반 등을 나타냄이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 이 두 불신에 대해서 비유로써 그 상주함을 나타낸다.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함과 같다. 끊임없는 즐거움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사람이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함과 같다. 항상 음식을 베풀지는 않고 어느 때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도 역시 그러하다.
【論】여섯 가지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 세존의 화신은 궁극적으로 안주하지 않는다. 첫째는 해야 할 바를 마치는 것이다. 중생을 성숙시켜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반을 즐기는 생각을 전환시키기 위해서이다.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일으킨 겉도는 수행을 전환하기 위해서이다. 매우 심오한 법의 바른 교설에 대해서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깊이 존경함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자주 보더라도 싫증이 없이 만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97) 다섯째는 스스로 정진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바르게 알고 말하는 이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정진을 일으켜서 무거운 멍에98)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아비달마대승수다라』 안의 「섭대승품」을 해석하였다. 아사리100) 아승가(阿僧伽)가 지었다.
017_0075_a_03L阿毘達磨大乘修多羅中攝大乘品解釋竟.阿闍梨阿僧伽造.
【釋】이 중에서 “만일 법신이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한량없다면, 이런 까닭에 중생을 이롭게 함을 감당할 수 있다. 어찌 이것을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비판한다. 그 비판을 막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그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바는 차별이 없고 한량없다. 이것을 원인으로 삼아서 마땅히 바른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이 아득한 옛적부터’라고 말함은 일체가 과실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때나 원인을 이루지 않은 과실[不成因過失]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인을 단멸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101) 모든 보살은 대자비에 마음을 두어서 모든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마치 외아들 대하듯이 한다. “다른 이가 스스로 한다. 내가 할 바가 아니다”102)라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마땅히 “다른 이가 짓거나 짓지 않아도 나는 모두 한다”고 해야 한다. 『섭대승석론』은 대승부 중에서 한량없는 것을 저술하였다. 뛰어난 논사 아사리 바수반두가 지었다.
3)이하 산문과 게송에서 법신의 공덕을 밝힌다. 현장 역본은 게송에 대한 해석이 없지만, 진제 역본에는 게송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있다. 또한 무성석(無性釋)에는 산문과 게송이 모두 자세하게 해석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4)서원대로 대상을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아는 것이다. 세속지(世俗智)를 그 본성으로 하고 제4선(禪)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5)여래의 신업ㆍ구업ㆍ의업은 청정하여 과실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처럼 감추어 지킬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6)부처님은 바른 생각ㆍ바른 지혜에 머물러서 중생의 신봉(信奉)과 비방에 흔들림이 없다. 이에 세 가지가 있으니, 제1 염주(念住)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해도 희심(喜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무는 것이다. 제2 염주는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해도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다. 제3 염주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희심과 우심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다.
7)이 게송은 4무량심을 나타낸다.
8)이 게송은 해탈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를 나타낸다.
9)이 게송은 무쟁(無諍)을 나타낸다
10)이 게송은 서원대로 아는 것[願智]을 나타낸다.
11)모든 교법, 즉 계경 등 12분교(分敎)를 가리킨다.
12)12분교의 소전(所詮)의 의미를 말한다.
13)앞에서 말한 소의와 능의이다.
14)이 게송은 네 가지 무애해(無碍解)를 밝힌다.
15)이 게송은 여섯 가지 신통을 나타낸다.
16)이 게송은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분임을 밝힌다.
17)이 게송은 네 가지의 모든 양상의 청정을 밝힌다. 즉 의지처[所依]의 청정, 인식대상[所緣]의 청정, 마음의 청정, 지혜의 청정이다.
18)이 게송은 10력(力)을 밝힌다.
19)이 게송은 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無所畏]을 밝힌다.
20)이 게송은 세 가지 보호하지 않음[不護]과 세 가지 생각에 안주함[念住]을 밝힌다.
21)이 게송은 잃어버림이 없는 법[無忘失法]을 밝힌다.
22)이 게송은 습기를 제거함을 밝힌다. 참고로 말하면 현장 역본에는 이 게송과 위의 게송이 순서가 바뀌어 있다.
23)이 게송은 대비(大悲)를 밝힌다.
24)이 게송은 18가지 공통되지 않는 법[不共法]을 밝힌다.
25)이 게송은 모든 양상의 승묘한 지혜를 밝힌다.
26)이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12가지로 설명한다.
27)이 게송은 12가지 매우 심오함 중에서 태어남ㆍ머무름ㆍ업ㆍ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28)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29)정각을 현현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0)탐욕을 벗어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1)5온(蘊)을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2)성숙시키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3)현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4)정각과 반열반을 시현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5)안주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6)자체를 나타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7)번뇌를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8)불가사의(不可思議)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39)이하 12게송 가운데 첫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40)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이다.
41)촉식ㆍ의사식ㆍ식식이다.
42)모든 부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여러 하늘이 가까이서 받아서 나머지 유정들에게 베푼다. 이 인연으로 해서 그 유정들은 장차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43)열반은 수습(修習)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적멸이기 때문이다.
44)중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 음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45)제자로 하여금 여법(如法)하게 음식을 수용함을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46)본원(本願)에 의지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받은 생을 원만하게 한다.
47)이하 두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48)한량없는 신(身)이 이 법신에 의지해서 불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이다.
49)이하 세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50)앞의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인 보특가라와 법은 비존재임을 밝힌다. 이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이 비존재이긴 하지만, 깨달음의 주체 자체를 가명에 의거해서 부처님[覺者]으로 삼음을 말한다.
51)이하 네 번째 게송을 나타낸다.
52)번뇌의 잠재력이다.
53)벗어남[出離]은 해탈의 의미이다. 미혹을 머물게 해서 생사에 왕래하고 부처님의 행을 닦음으로써 구경의 해탈을 얻는다.
54)이하 다섯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55)5음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됨을 말한다. 5음과 5취음은 같은 것이라고도,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5음에 탐욕이 있는 것이 5취음이다.
56)이하 여섯 번째 게송을 나타낸다.
57)과거ㆍ현재ㆍ미래이다.
58)이하 일곱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59)이하 여덟 번째 게송을 나타낸다.
60)이하 아홉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61)세 가지 해탈문, 즉 공해탈문ㆍ무상해탈문ㆍ무원해탈문을 가리킨다.
62)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63)이하 열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64)게송 중에서 전반부 두 문구의 해석이다.
65)자성신과 수용신이다.
66)게송에서 후반부 두 문구의 해석이다.
67)변화신의 실체를 보지 못함을 말한다.
68)이하 열한 번째 게송을 해석한다.
69)번뇌를 조복한다는 것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제압함이고, 번뇌를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의 근원을 단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70)독을 입어도 주술의 힘에 의해 그것을 제압하면, 그 독 자체는 멸하지 않더라도 그 효력은 억압되어 해를 입히지 않음과 같다.
71)수면(隨眠)의 번뇌를 머물게 하여 단멸시키지 않음으로써 생사에 왕래하고 보살의 조도법(助道法)을 닦아서 궁극의 증과를 얻는다.
72)번뇌의 습기까지 모두 소멸하여 청정하게 될 때이다.
73)이하 열두 번째 게송을 나타낸다.
74)번뇌, 즉 집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는 조도법(助道法), 즉 도제(道諦)를 성취하고, 생사의 고제는 도제로 인하여 열반, 즉 멸제(滅諦)를 이룬다.
75)외부 조건[外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문구는 첫 번째인 모든 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하 순서대로 앞의 일곱 가지에 상응한다
76)이하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18가지 원만상으로 나타낸다.
77)이하 바가바께서 삼매 속에서 현현하신 정토의 광경을 18가지 측면에서 서술한다. 이러한 18가지 원만상은 세존께서 과거 보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타행을 펼치신 선근에 의해 이루어진 보토(報土)이다.
78)호법신장인 8부중(部衆)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라는 음역어가 많이 사용된다.
79)인비인(人非人)의 뜻에는 첫째로 긴나라의 별명, 둘째로 천룡팔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 셋째로 사람과 사람 아닌 이를 일컫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승경전 서두에서 법회대중 가운데 천ㆍ용 등 8부중에 이어져 나오는 인비인의 경우는 8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이다. 그들은 원래 사람이 아니지만 법회석상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면 법회에 모인 사람들이 놀랄 것이므로 사람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80)번뇌마ㆍ음마(陰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 등 네 가지 마군이다.
81)크게 기억함[大念]은 문혜(聞慧)를, 크게 판별함[大慧]은 사혜(思慧)를, 크게 수행함[大行]은 수혜(修慧)를 말한다. 대승을 반연하기 때문에 큰 것이라고 표현한다.
82)진제의 역본 『섭대승론석』에서는 보살장 가운데 『정토경』의 한 종류, 또는 『화엄경』에서 정토상을 광설하는 문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문은 『불지경(佛地經)』 「서품」ㆍ『해심밀경』 「서품」에 나온다.
83)범어 musāragalva의 음역(音譯)으로서 차거(車渠, 硨磲)로 번역하며, 보통 자거라고 읽는다. 그 색깔이 말의 뇌와 같기 때문에 마뇌(馬腦)라고도 한다.
84)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解脫門]이다. 공해탈문은 자아[我]와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조하는 것이다. 무상해탈문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85)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과 독각은 소승의 근성을 벗어나서 대승에 통달할 만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일승을 말하여 이끈다.
86)성문의 무아와 보살의 무아가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한다.
87)성문의 해탈과 보살의 해탈이다.
88)법화회상에서 부처님께 수기받은 성문들을 가리킨다.
89)이하 수용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한다.
90)현장 역본에는 전식(轉識)으로 되어 있다.
91)자성신은 진여와 진지(眞智)가 독존하는 이지명합성(理智冥合性)의 불신이다. 이것은 진여 그 자체가 지성(智性)을 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성신이 단순히 진여법성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고 진여가 ‘현현(顯現)된’ 상태로서 전의(轉依)에 의해 아공ㆍ법공의 2공(空) 소현(所顯)이기 때문이다.
92)이하 화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93)과거 수많은 세상에서 닦아 익힌 효력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바르게 알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