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152_a_01L섭대승론석 제10권
017_0152_a_01L攝大乘論釋卷第十


세 친 지음
현 장 한역
김묘주 번역
017_0152_a_02L世親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1. 피과지분 ②
017_0152_a_04L彼果智分第十一之餘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매우 심오하고 가장 심오하다.1) 이 매우 심오한 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많은 게송이 있다.
017_0152_a_05L論曰:復次諸佛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相,云何可見?此中有多頌.
대승 안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12개의 게송으로써 12가지 매우 심오한 양상을 나타낸다.
017_0152_a_07L釋曰:於大乘中,諸佛法身,如甚深相,今當顯示.以十二頌,顯示十二甚深之相.

부처님은 태어남 없음을 태어남으로 삼고
역시 머무르지 않음을 머무름으로 삼고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것으로서
제4식(第四食)을 음식작용물[食]로 삼네.
017_0152_a_10L論曰:
佛無生爲生,
亦無住爲住,
諸事無功用,
第四食爲食.
017_0152_b_01L
여기서의 한 게송은 태어남ㆍ머무름ㆍ업ㆍ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음을 태어남으로 삼는다’라는 것은 태어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여래는 업의 번뇌가 없어도 범부나 어리석은 소승이 짓는 태어남과 같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태어남이 있고 그 양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태어남의 매우 심오함이라고 부른다.
‘역시 머무르지 않음을 머무름으로 삼는다’라는 것은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머무름이 없는 열반[無住涅槃]이 머무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열반을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이라 부른다.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업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업은 일체가 평등하기 때문에 업의 매우 심오함이라 한다.
‘제4식을 음식작용물로 삼는다’는 것은 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 음식작용물로 삼는 것은 부정(不淨)의 의지로서의 머무름 등의 네 가지 음식작용물 가운데 네 번째 음식작용물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음식작용물에서 첫째는 부정의 의지로서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이른바 단식(段食) 등 네 가지 음식작용물2)이다. 욕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청정과 부정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촉식(觸食) 등 세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청정과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이미 하부지위[下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이름한다. 아직 상부지위[上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청정과 부정의 의지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의지는 촉식ㆍ의사식ㆍ식식에 의거해서 머물고 단식을 제외한다.
017_0152_a_13L釋曰:此中一頌,顯示生住`業住甚深.佛無生爲生者,顯生甚深.以諸如來無業煩惱,同諸凡愚,所造作生,故名無生.然有與此相違之生,其相難了,名生甚深.亦無住爲住者,顯住甚深.無住涅槃,以爲住處,如是涅槃,名住甚深.諸事無功用者,顯業甚深,以諸如來無功用業,一切等故,名業甚深.第四食爲食者,顯住甚深,以佛所食是不淸淨依止住等,四種食中,第四食故.四種食者:一不淸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欲纏有情,不淨依止,而得住故二淨`不淨依止住食,謂觸等三食,令色無色纏有情,淨`不淨依止而得住故.由此依止已離下地諸煩惱故,說名爲淨,未離上地諸煩惱故,說名不淨,是故名淨,不淨依止.如是依止由觸`意`思`識食而住,除其段
셋째는 한결같이 청정한 것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다. 이른바 단식 등의 네 가지 음식작용물은 성문등으로 하여금 청정에 의지해서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오직 시현(示現)하고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 즉 제4식(第四食)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시현하여 그것을 수용해서 머물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음식작용물이다. 이 네 번째 시현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은 다음과 같다. 능히 베푸는 유정의 무리들로 하여금 청정한 믿음을 원인으로 복덕을 증장시키기 위해서이다. 음식작용물을 시현하여 수용하지만 음식을 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여래께서 음식을 들 때 여러 하늘이 받아서 유정에게 베푼다.3) 부처님의 취지는 이러하다. 나머지 모든 유정은 이런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들 유정은 속히 깨달음을 증득한다. 이상과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말하여 하나의 매우 심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7_0152_b_10L三一向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聲聞等,淸淨依止,而得住故四唯示現依止住食,謂卽四食,諸佛示現,受之得住.是故諸佛食,此第四示現住食,爲令能施諸有情類,淨信爲因,福德增長,雖現受食不作食事,如來食時,諸天受取.施佛意許,諸餘有情,由此因故,彼有情類,速證菩提.如是一切,應知摠說爲一甚深.
또한 다음의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의 태어남은 태어남이 없는 양상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어리석음과 다른 법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차별과 다른 법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섭수(攝受)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고, 넷째는 맡아 지니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버리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두 가지가 없는 양상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오직 그림자와 비슷할 뿐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요술로 나타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머묾이 없는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열째는 큰 사업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017_0152_b_18L又由十因,應知諸佛生無生相,一與愚癡不同法故`二與差別不同法故`三於攝受得自在故`四於住持得自在故`五於棄捨得自在故`六無二相故`七唯似光影故`八同幻化故`九住無住故`十成大事故.
017_0152_c_01L또한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여래께서는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두루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는 영원히 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셋째는 닦아 익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4) 넷째는 실재하지 않는 성품임을 알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얻는 바가 없고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멀리 여의는 마음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마음의 증득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현상[事]은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며, 열째는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사업이 성립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승묘하게 여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의지처가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짓는 대상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고, 넷째는 짓는 주체가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작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있는 바가 없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할 바를 이미 해마쳤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할 바를 아직 해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열째는 닦아 익힘을 순전하게 성숙시켜서 일체법에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알지니,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음식을 드는 일이 없이 음식을 수용함을 나타낸다.
017_0152_c_01L復由十因,應知如來不住生死及以涅槃,一非遍知故`二非永斷故`三非修習故`四知非有性故`五無所得無分別故`六遠離心故`七心證得故`八平等心故`九事不可得故`十可證得故.復由十因,應知諸佛無功用事,而得成立,一妙斷離故`二無所依故`三所作無功用故`四作者無功用故`五作業無功用故`六無所有無功用故`七本來無差別故`八所作已辦故`九所作未辦故`十純熟修習一切法中得自在故.復由十因,應知諸佛實無所食,而現受食,
첫째는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신체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모든 유정에게 복을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셋째는 같은 법이 있음을5) 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올바른 수용을 따라서 배우도록6) 하기 위해서이며, 다섯째는 검소한 행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정진행을 일으키기 위해서이고, 일곱째는 모든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며, 여덟째는 자신에게 탐착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아홉째는 공경하는 업을 도와서 지니게 하기 위해서이며, 열째는 본원의 생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7)
017_0152_c_13L一示現以食住持身故`二令諸有情福增長故`三爲欲示現有同法故`四爲令隨學正受用故`五爲令隨學廉儉行故`六爲令發起精進行故`七爲令成熟諸善根故`八爲顯自身無染著故`九爲恭敬業助任持故`十爲欲圓滿本願生故.

다름이 없으며 역시 한량없고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업이네.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구족하네.
017_0152_c_19L論曰:
無異亦無量,
無數量一業,
不堅業堅業,
諸佛具三身.
017_0153_a_01L
이 게송은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다름이 없으며 역시 한량없다’는 것은 안립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한량없음의 의지처로8) 등각(等覺)9)을 현현하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이름한다.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업’이란 숫자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부처님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 업이므로 매우 심오하다.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을 구족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여래께서는 3신과 상응한다. 그 수용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만, 그 변화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업을 매우 심오하다고 한다.
017_0152_c_22L釋曰:此頌,顯示安立數業甚深.無異亦無量者,顯安立甚深.諸佛法身無差別故,說名無異,無量依止,現等覺故,說名無量.無數量一業者,顯數甚深.佛雖無量,而同一業,是故甚深.不堅業`堅業,諸佛具三身者,謂諸如來三身相應,其受用身事業堅住,其變化身業不堅住,如是事業,名爲甚深.

등각을 현현해도 실재가 아니고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니네.
하나하나의 생각에 한량없어서
존재와 비존재의 나타난 바이네.
017_0153_a_07L論曰:
現等覺非有,
一切覺非無,
一一念無量,
有非有所顯.

이 게송은 등각의 현현함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등각을 현현해도 실재가 아니다’라는 것은 보특가라와 법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은 가명(假名)의 이치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등각을 현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0) 부처님께서 등정각을 현현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하나의 생각에 한량없는 부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하나하나의 생각 가운데 한량없는 부처님께서 계셔서 등정각을 현현함을 나타낸다. ‘존재와 비존재의 나타난 바’란 다음과 같다. 진여는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진여가 나타난 바임을 나타낸다.
017_0153_a_10L釋曰:此頌,顯示現等覺甚深.現等覺非有者,補特伽羅法非有故.一切覺非無者,由假名理,說一切佛現等覺故.云何知佛現等正覺?謂一一念,無量佛故,此卽顯示一一念中,有無量佛,現等正覺.有`非有所顯者,此顯眞如是有`非有,諸佛是此眞如所顯.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니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을 얻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알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가네.
017_0153_a_17L論曰:
非染非離染,
由欲得出離,
了知欲無欲,
悟入欲法性.
017_0153_b_01L
이 게송은 탐욕을 벗어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탐욕이 없기 때문에 잡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잡염이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역시 없다. 무슨 까닭인가? 탐욕의 잡염이 있으면 잡염을 떠남도 있어야 하는데, 잡염이 이미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없다.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을 얻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탐욕의 얽어맴[纏]11)을 조복하고 탐욕의 수면(隨眠)12)을 머물게 함으로써 구경의 벗어남13)을 얻는다. 만일 수면을 머물게 하지 않으면 마땅히 성문등의 반열반에 들어감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알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변계소집의 탐욕과 탐욕이 없는 성품을 알면 곧 능히 탐욕법의 진여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017_0153_a_20L釋曰:此頌,顯示離欲甚深.非染非離染者,貪欲無故,說名非染,以無染故,離染亦無.所以者何?貪染若有,可有離染,染旣是無,故無離染.由欲得出離者,由伏斷貪纏,留貪隨眠故,得究竟出離若不留隨眠,應同聲聞等,入般涅槃故.了知欲無欲,悟入欲法性者,了知遍計所執,貪欲`無貪欲性,卽能悟入欲法眞如.

모든 부처님께서는 5온을 초월하면서도
5온 가운데 안주하시네.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네.
017_0153_b_06L論曰:
諸佛過諸薀,
安住諸薀中,
與彼非一異,
不捨而善寂.

이 게송은 5온을 단멸함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5온을 초월하면서도 5온 가운데 안주한다’는 것은 모든 여래께서는 색온 등 취착된 5온[五取蘊]14)을 초월하고, 무소득의 법성온(法性蘊)에 안주함을 말한다.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미 변계소집의 5온을 버렸더라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의 법성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지도 않다. 만일 같은 것이라면 변계소집은 마땅히 법성과 마찬가지로 청정한 경계를 이루어야 한다.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다’는 것은 원성실성의 5온을 버리지 않고서 매우 승묘한 열반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017_0153_b_09L釋曰:此頌,顯示斷薀甚深,諸佛過諸薀.安住諸薀中者,謂諸如來,超過色等,五種取薀,住無所得法性薀中.與彼非一異者,雖已捨遍計所執諸薀,而與彼非異,以卽安住彼法性故.亦復不一,若是一者,遍計所執應同法性,成淸淨境.不捨而善寂者,謂不棄捨圓成實薀,卽是妙善涅槃體故.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임은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네.
나는 이미ㆍ현재ㆍ장차 행한다고
남을 이롭게 함에 이런 생각이 없네.
017_0153_b_17L論曰:
諸佛事相雜,
猶如大海水,
我已現當作,
他利無是思.
017_0153_c_01L
이 게송은 성숙(成熟)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인다’는 것은 모든 여래께서 유정을 성숙시키는 모든 사업은 전부 평등함을 말한다. 그 비유는 어떤 내용인가?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다’는 것은 비유하면 큰 바다는 여러 강의 흐름이 유입된 것으로서 그 물이 서로 섞이고 고기ㆍ자라 등을 다 같이 수용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다. 다 같이 법계에 들어가고, 짓는 사업이 화합하여 둘이 없으며, 평등히 유정을 성숙시키는 수용이 된다.
‘나는 이미ㆍ현재ㆍ장차 행한다고’는 세 시기15) 중에서 어느 한 시기에 짓는 것이다. ‘남을 이롭게 함에 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내가 남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행한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도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을 행한다. 비유하면 세간의 마니보주ㆍ하늘의 음악과 같다.
017_0153_b_20L釋曰:此頌,顯示成熟甚深.諸佛事相雜者,謂諸如來,成熟有情,一切事業,悉皆平等.其喩云何?猶如大海水者,譬如大海衆流所入,其水相雜,爲魚鼈等,同所受用.諸佛亦爾,同入法界,所作事業和合無二,等爲成熟有情受用.我已現當作者,於三時中,隨一時作.他利無是思者,不作是思:我於他利,已現當作.然無功用,能作一切利益安樂諸有情事,譬如世閒末尼`天樂.

중생의 죄 때문에 나타나지 않으니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네.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 같기 때문이네.
017_0153_c_08L論曰:
衆生罪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이 게송은 현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만일 모든 세간에서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불신이 상주한다고 말하면, 불신은 이미 상주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하는가? 중생의 죄 때문에 나타나지 않으니,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파손된 그릇에는 물이 머물 수 없고, 물이 머물 수 없기 때문에 달이 나타나지 않듯이, 이처럼 유정의 신체에 사마타의 물이 없으면 부처님의 달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은 선정[等持]에 비유하나니, 자체가 맑고 빛나기 때문이다.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 같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지금 세간에 부처님께서 시현하지 않더라도 모든 곳에서 두루 불사를 베풀고 있다. 계경ㆍ응송 등의 법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햇빛이 세간에 두루 가득하듯이, 모든 불사를 지어서 유정을 성숙시킨다.
017_0153_c_11L釋曰:此頌,顯示顯現甚深.若諸世閒,不見諸佛,而說諸佛其身常住,佛身旣常,何故不見?衆生罪不現,如月於破器者,如破器中,水不得住,水不住故,月則不現如是.有情身中,無有奢摩他水,佛月不現.水喩等持,體淸潤故.遍滿諸世閒,由法光如日者,謂今世閒,佛雖不現,然遍一切,施作佛事.由說契經`應頌等法,譬如日光,遍滿世閒,作諸佛事,成熟有情.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네.
이것은 일찍이 비존재가 아니니,
모든 불신은 항상하기 때문이네.
017_0153_c_21L論曰:
或現等正覺,
或涅槃如火,
此未曾非有,
諸佛身常故.
017_0154_a_01L
이 게송은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데에 있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혹은 성불을 나타내고 혹은 열반을 나타내는데, 그 일이 불처럼 어느 때는 타오르고 어느 때는 소멸한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다. 혹은 미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반열반을 나타내고, 혹은 이미 성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불과의 성취함을 나타낸다. 그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유하면 한 가지 불의 속성은 차별이 없듯이, 법신도 역시 그러하다. 마땅히 알지니, 오직 하나일 뿐이다.
게송의 나머지 반은 그 뜻이 알기 쉽다.
017_0154_a_01L釋曰:此頌,顯示示現等覺涅槃甚深.或現等正覺`或涅槃,如火者,謂諸如來或現成佛`或現涅槃,其事如火,或時燒然`或時息滅.諸佛亦爾,或於未熟諸有情類,現般涅槃,或於已熟諸有情類,現成佛果,爲欲令彼得解脫故.譬如一火性無差別,法身亦爾,應知唯一.餘半頌文其義易了.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법ㆍ
인간세계ㆍ살기 괴로운 세계ㆍ
청정한 행이 아닌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시네.
017_0154_a_09L論曰:
佛於非聖法,
人趣及惡趣,
非梵行法中,
最勝自體住.
017_0154_b_01L
이 게송은 안주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법 가운데,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惡趣] 가운데, 청정한 행[梵行]이 아닌 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기 때문이다.16)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는 것은 성스러운 안주 등으로 인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스러운 안주는 공해탈문(空解脫門) 등17)의 안주를 말한다. ‘천상의 안주’는 모든 정려(靜慮)의 안주를 말하고, 청정의 안주는 자(慈)무량심 등의 한량없는 마음18)의 안주를 가리킨다.
‘성스럽지 않은 법’은 불선법(不善法)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안에서 공해탈문등의 안주에 머무신다. 이 공해탈문등은 성인(聖人)이 안주하는 바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안주라고 부른다.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는 그 유정을 반연하여 모든 정려에 안주함을 말한다. 머무는 바인 정려를 천상의 안주라고 이름한다. 청정한 행이 아닌 법은 그 법에 대해서 자(慈)ㆍ비(悲) 등 네 가지 청정의 안주에 머무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거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안주에 머문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안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체의 모든 안주에 안주함을 나타낸다.
017_0154_a_12L釋曰:此頌,顯示住甚深.佛於非聖法中`人趣惡趣中`非梵行法中`由最勝自體住最勝住,由聖住等而安住故.此中聖住者,謂空等住.天住者,謂諸靜慮住.梵住者,謂慈等無量住.非聖法者,謂不善法.佛於其中,住空等住,由此空等聖所住故,名爲聖住.人趣及惡趣者,謂緣彼有情,住諸靜慮,所住靜慮,名爲天住.非梵行法者,謂於彼法,住慈悲等,四種梵住.最勝自體住者,謂由如是最勝自體住最勝住,此顯諸佛於諸住中,安住最勝自體諸住.

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행하면서도
또한 한 곳에서도 행하지 않도다.
모든 곳에서 불신(佛身)을 나투어도
여섯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네.
017_0154_b_02L論曰:
佛一切處行,
亦不行一處,
於一切身現,
非六根所行.

이 게송은 자체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행하시면서도 또한 한 곳에서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후득지혜는 선ㆍ불선ㆍ무기 등에 대해서 분별하여 전전하지만, 무분별지혜는 한 곳에서도 행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는 이른바 변화신은 모든 곳에서 작용하더라도 그 나머지 두 불신19)은 한 곳에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불신을 나투어도’라는 것은 변화신이 두루 모든 곳에서 보이는 것이다. ‘여섯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변화신은 그 지옥[那落迦] 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생을 나타내더라도 지옥 등에 생을 받은 유정은 화신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20) 알지 못한다. 다만 지옥의 유정 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화신은 결정적으로 그 지옥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경계가 아니다.
017_0154_b_05L釋曰:此頌,顯示自體甚深.佛一切處行,亦不行一處者,謂後得智於善`不善,無記等中,分別而轉,無分別智不行一處.第二義者,謂變化身一切處行,其餘二身,不行一處.於一切身現者,卽變化身,遍於一切處處可見.非六根所行者,卽變化身.爲欲化彼那落迦等,現於彼生.那落迦等,受生有情,見化身時,不如實見`不能了知,但謂卽是那落迦等,是故化身決定非彼那落迦等,六根所行.

번뇌를 조복해도 소멸하지 않으니
독이 주문에 해를 입는 것과 같네.
미혹을 머물게 하고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증득하네.
017_0154_b_16L論曰:
煩惱伏不滅,
如毒呪所害,
留惑至惑盡,
證佛一切智.
017_0154_c_01L
이 게송은 번뇌를 단멸함이 매우 심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번뇌를 조복해도 소멸하지 않으니, 독이 주문에 해를 입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보살의 지위에서 번뇌의 얽어맴을 조복해도 아직 번뇌를 소멸하지는 못한다.21) 수면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갖가지 독이 주문의 힘에 해를 입어서 독 그 자체는 아직 남아 있어도 해를 입지 않음과 같다.22) 번뇌도 역시 그러하다. 지혜로 알기 때문에 번뇌의 자체가 아직 남아 있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
‘미혹을 머물게 하고 미혹이 다함에 이른다’는 것은23) 수면의 모든 번뇌를 머물게 함으로써 성문처럼 속히 반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번뇌가 다함에 이를 수 있다.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은 번뇌가 다할 때24)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증득함을 말한다.
017_0154_b_19L釋曰:此頌,顯示斷煩惱甚深.煩惱伏不滅,如毒呪所害者,菩薩位中,伏煩惱纏`未滅煩惱,有隨眠故.譬如衆毒呪力所害,體雖猶在,而不爲害.煩惱亦爾,智了知故,體雖猶在,而不爲害.留惑至惑盡者,以留隨眠諸煩惱故,不如聲聞速般涅槃得,至究竟諸煩惱盡.證佛一切智者,煩惱盡時,得一切智.

번뇌는 깨달음을 이루고
생사는 열반이 되네.
큰 방편을 갖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017_0154_c_05L論曰:
煩惱成覺分,
生死爲涅槃,
具大方便故,
諸佛不思議.

이 게송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다. 보살은 큰 방편을 갖추고25) 번뇌의 집제(集諦)가 전환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생사의 고제(苦諦)는 곧 열반이 된다.26)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 이른바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득하기 때문등이다.
017_0154_c_08L釋曰:此頌,顯示不可思議甚深.謂諸菩薩,具大方便,煩惱集諦,轉成覺分,生死苦諦,卽爲涅槃.如是一切諸佛聖教,如前所說,三因緣故,不可思議,謂自內證故等.
마땅히 알지니, 이상과 같이 말한 매우 심오함에 12가지가 있다. 이른바 태어남ㆍ머무름ㆍ업ㆍ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오함이며, 등각을 현현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탐욕을 여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5온을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성숙의 매우 심오함이고, 현현의 매우 심오함이며,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매우 심오함이고, 안주의 매우 심오함이며, 자체를 나타내 보이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고, 번뇌를 단멸하는 것의 매우 심오함이며, 불가사의의 매우 심오함이다.
017_0154_c_13L論曰:應知如是所說甚深,有十二種:謂生住業住甚深`安立數業甚深`現等覺甚深`離欲甚深`斷薀甚深`成熟甚深`顯現甚深`示現等覺涅槃甚深`住甚深`顯示自體甚深`斷煩惱甚深`不可思議甚深.
이 12가지는 모두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심오하다고 말한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양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154_c_19L釋曰:此十二種,皆難覺了,故名甚深.一一別相,如前已說.
017_0155_a_01L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려면 몇 가지 생각에 의거해서 이런 생각을 닦아야 하는가?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함을 간략히 말하면 일곱 가지 생각에 의거해서 이 생각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轉轉)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모든 세계에서 걸림없는 신통을 얻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54_c_21L論曰:若諸菩薩,念佛法身,由幾種念,應修此念?略說菩薩念佛法身,由七種念,應修此念:一者諸佛於一切法,得自在轉,應修此念,於一切世界,得無㝵通故,此中有頌:

유정세계에서 두루하더라도
장애를 갖추면서 원인을 결여하네.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에게는 자재가 없네.
017_0155_a_03L有情界周遍,
具障而闕因,
二種決定轉,
諸佛無自在.

둘째는 마땅히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라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가장 뛰어나고 죄가 없다”라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아울러 끊기 때문이다. 넷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모든 불사(佛事)는 쉼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큰 부귀와 즐거움을 수용한다”라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청정한 불국토는 매우 부유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모든 오염을 여읜다”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세간에 머무시더라도 일체의 세간법이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능히 큰 사업을 성취한다”라는 생각을 닦아야 한다. 등각과 반열반 등을 시현하여, 아직 성숙하지 않은 유정들은 능히 성숙케 하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017_0155_a_05L二者如來其身常住,應修此念,眞如無閒解脫垢故三者如來最勝無罪,應修此念,一切煩惱及所知障,竝離繫故四者如來無有功用,應修此念,不作功用,一切佛事無休息故五者如來受大富樂,應修此念,淸淨佛土,大富樂故六者如來離諸染污,應修此念,生在世閒,一切世法,不能染故七者如來能成大事,應修此念,示現等覺般涅槃等,一切有情,未成熟者,能令成熟,已成熟者,令解脫故.此中有二頌:

원만은 자기 마음에 속하고
상주와 청정을 갖추며
의식적인 노력 없이 능히
유정에게 큰 법락을 베풀고
017_0155_a_17L圓滿屬自心,
具常住淸淨,
無功用能施,
有情大法樂.

두루 행하여 의지가 없으며
평등하게 많은 생을 이롭게 하는 분으로서
지혜로운 이는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마땅히 모든 생각을 닦아야 하네.
017_0155_a_19L遍行無依止,
平等利多生,
一切佛智者,
應修一切念.
017_0155_b_01L
이제 마땅히 보살이 부처님 법신을 생각하려면 일곱 가지 생각에 의거해서 그 생각을 닦아야 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할 수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신통을 얻음으로써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다. 여래께서는 모든 세계에서 걸림없는 신통을 얻기 때문에, 성문등이 아직 장애가 있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여래께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한다면, 어째서 모든 유정의 무리는 열반을 얻지 못하는가? 따라서 지금의 한 게송은 이런 원인 때문에 모든 유정의 부류가 궁극적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017_0155_a_20L釋曰:今當顯示,若諸菩薩,念佛法身,由七種念,應修其念.於一切法,得自在轉者,由得神通,於一切法,自在而轉.以諸如來,於一切世界,得無㝵神通,非如聲聞等猶有障㝵故.若諸如來,於一切法,自在而轉,何故一切有情之類,不得涅槃?故今一頌,顯由此因,諸有情類,不能證得究竟涅槃.
‘유정세계에 두루하더라도 장애를 갖추면서 원인을 결여하네’는 다음과 같다. 모든 유정에게는 업 등의 장애가 있으므로 장애를 갖춘다고 말한다. 장애를 갖추기 때문에 한량없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반열반을 얻게 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자재함이 없다. 만일 모든 유정이 열반법이 없다면 원인을 결여한다고 말한다. 이 취지는 그들에게 열반의 원인이 없고 종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자재함이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결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업의 결정이고, 둘째는 과보[異熟]를 받는 결정이다. 이에 대해서 결정이라고 이름함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 두 가지 결정에 대해서 자재함이 없다. 완고하고 어리석음 등의 신체를 이숙장애의 결정27)이라고 부르나니, 장차 지옥 등에 떨어지는 것을 이름하여 이숙을 받는 결정이라고 한다.
017_0155_b_05L情界周遍具障,而闕因者,謂諸有情,有業等障,名爲具障.由具障故,雖無量佛,出現於世,不能令彼得般涅槃,諸佛於彼無有自在.若諸有情,無涅槃法,名爲闕因.此意說彼無涅槃因,無種性故,諸佛於彼,無有自在.二種決定轉者,決定有二種:一作業決定`二受異熟決定,當知此中,說名決定.諸佛於此,二決定中,無有自在.頑愚等身,名異熟障決定,當墮那落迦等,名受異熟決定,
017_0155_c_01L이 가운데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를 해탈하기 때문이다’는 진여의 이체(理體)는 끊임없이 모든 장애의 번뇌를 해탈하고 법신을 성취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그 몸이 상주한다. ‘여래께서는 큰 부귀와 즐거움을 수용한다’는 것은, 마땅히 알지니 여래의 청정한 불국토를 큰 부귀와 즐거움이라고 부른다. ‘여래께서는 능히 큰 사업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등정각ㆍ반열반 등을 현현하고 큰 이익을 성취하여,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하게 하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케 한다.
나머지 염불의 수행은 그 의미가 알기 쉽다. 다시 두 개의 게송으로써 이렇게 일곱 가지 염불을 나타낸다. 이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의 일곱 가지 원만을 널리 말하여 염불을 수행하게 한다. 모든 보살은 처음에 여래께서 자신의 마음에 따르는 원만을28) 생각하고, 다음에 여래의 몸이 상주하는 원만을 생각한다. 다음에 여래께서 청정한 선을 구족하는 원만을 생각함이니, 이것은 곧 가장 뛰어나고 죄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 여래께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음의 원만을 생각함이니, 불사를 짓는 데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여래께서 큰 법락을 베푸는 원만을 생각함이니, 청정한 불국토에서 보살 대중에게 큰 법락을 수용케 함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음에 여래께서 모든 잡염을 여읜 원만을 생각한다. 곧 두루 행함에 의지하는 바가 없으니, 만일 의지하는 바가 있으면서 두루 행하면 곧 고난이 있다. 의지하는 바가 없이 두루 행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괴로움이 없고 잡염을 떠나서 두루 행한다. 다음에 여래께서 평등하게 많이 이롭게 하는 원만을 생각함이니, 부처님의 능히 큰 사업을 성취함을 생각한다.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고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155_b_16L應知此中,二種差別.如來身,常住眞如無閒解脫垢故者,謂眞如理無閒解脫一切障垢顯成法身,是故如來其身常住.如來受大富樂者,應知如來淸淨佛土,名大富樂.如來能成大事者,謂諸如來現等正覺般涅槃等,成大義利,已成熟者,令得解脫未成熟者,令其成熟.餘修念佛其義易了.復以二頌,顯釋如是七種念佛.於此頌中,宣說諸佛,七種圓滿,令修念佛,謂諸菩薩,初念如來隨屬自心圓滿次念如來其身常住圓滿次念如來具足淸善圓滿,卽是最勝無罪次念如來無功用圓滿,謂作佛事無功用故次念如來施大法樂圓滿,應知卽於淸淨佛土受大法樂次念如來離諸染污圓滿,卽是遍行,無所依止.若有所依,而遍行者,卽有苦難,由無所依,而遍行故,佛常無苦,離染遍行.後念如來平等,多利圓滿,卽是念佛,能成大事,成熟解脫諸有情故.
017_0156_a_01L또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마땅히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29) 보살장의 백천 가지 계경의 서품에서 아래처럼 말한 바와 같다.
“박가범께서 다음과 같은 궁전에 머무셨다. 그곳은30) 매우 찬란하게 빛나는 7보 장엄이 대광명을 내어 널리 한량없는 세계를 모두 비추고, 수많은 방위 공간을 연이어 묘하게 장식했으며, 주위가 끝이 없어 그 크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삼계에서 행하는 곳을 벗어났으며,31)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이 일으킨 곳이고, 가장 자재한 청정식(淸淨識)을 모습으로 삼는다.32) 여래께서 도읍으로 삼은 곳이며, 모든 대보살들이 운집하고, 수많은 천ㆍ용ㆍ약차ㆍ건달박ㆍ아소락ㆍ게로다ㆍ긴날락ㆍ모호락가 등33)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존재[人非人]34)들이 항상 무리지어 따른다. 광대한 법의 맛을 기쁘고 즐겁게 지니고, 중생의 모든 이익을 나타내 지으며, 티끌 같은 번뇌들을 모두 없애고, 갖가지 마(魔)35)를 멀리 여의며, 모든 장엄보다 뛰어난 여래 장엄의 의지처이다.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함[大念慧行]36)을 노니는 길로 삼고, 크게 그침[止]과 미묘한 관찰[觀]을 교법[乘]으로 삼으며, 뛰어난 공(空)ㆍ차별상이 없음ㆍ소원이 없음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 것 등,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하고 뛰어난 보배 연꽃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상과 같은 청정한 불국토는 빛깔[顯色]의 원만, 형체[形色]의 원만, 분량의 원만, 방위ㆍ처소[方所]의 원만, 원인의 원만, 결과의 원만, 주(主)의 원만, 보익(輔翼)의 원만, 권속의 원만, 맡아 지님[任持]의 원만, 사업의 원만, 섭익(攝益)의 원만, 두려움이 없음의 원만, 머무는 곳의 원만, 길[路]의 원만, 교법[乘]의 원만, 문(門)의 원만, 의지(依持)의 원만을 나타낸다.
017_0155_c_14L論曰:復次諸佛淸淨佛土相云何?應知如『菩薩藏百千契經』「序品」中說,謂薄伽梵,住最勝光曜七寶莊嚴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無量方所妙飾閒列,周圓無際,其量難測,超過三界所行之處,勝出世閒善根所起,最極自在淨識爲相,如來所都,諸大菩薩衆所雲集,無量天`龍`藥叉`健達縛`阿素洛`揭路荼`緊捺洛`莫呼洛伽`人`非人等,常所翼從,廣大法味,喜樂所持,作諸衆生,一切義利,蠲除一切煩惱災橫,遠離衆魔,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大念慧行,以爲遊路,大止妙觀,以爲所乘,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之所建立大宮殿中.如是現示淸淨佛土,顯色圓滿`形色圓滿`分量圓滿`方所圓滿`因圓滿`果圓滿`主圓滿`輔翼圓滿`眷屬圓滿`任持圓滿`事業圓滿`攝益圓滿`無畏圓滿`住處圓滿`路圓滿`乘圓滿`門圓滿`依持圓滿.
또한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하는 데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며, 한결같이 안락하고, 한결같이 죄가 없으며, 한결같이 자재하다.
017_0156_a_13L復次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一向安樂`一向無罪`一向自在.
017_0156_b_01L보살장의 백천 송경(頌經)37) 서품에서 청정한 불국토를 말씀한 바와 같다. 이 청정한 불국토가 나타내는 것은 어떤 뛰어난 공덕이 있는가? 처음의 두 문구는 청정 불국토의 빛깔의 원만을 나타낸다. 7보라고 함은 첫째는 금이고, 둘째는 은이며, 셋째는 유리(琉璃)이고, 넷째는 모파락보(牟波洛寶)38)이며, 다섯째는 알습마게파보(遏濕摩揭波寶)39)로서, 이것은 마땅히 알지니 말라갈다(末囉羯多)40) 등의 보배를 든다. 여섯째는 적진주보(赤眞珠寶)이다. 이 적진주는 적충(赤蟲) 안에서 나오며, 모든 보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일곱째는 갈계달락가보(羯雞怛諾迦寶)41)이다. 대광명을 내어 널리 한량없는 세계를 모두 비춘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7보에서 나오는 모든 대광명이다. 이상의 두 문구는 다 같이 빛깔의 원만을 나타낸다.
다음의 한 문구는 형체의 원만을 나타낸다. 다음에 한 문구는 분량의 원만을 나타내며, 다음의 한 문구는 방위ㆍ처소의 원만을 나타낸다. 다음의 한 문구는 원인의 원만을 나타낸다. 이것은 무슨 원인인가? 출세간의 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를 말한다. 이 후득지혜를 뛰어난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후득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선근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곧 이 선근을 원인의 원만이라고 이름한다. 다음의 한 문구는 결과의 원만을 나타낸다. 청정한 불국토는 지극히 자재한 청정식으로써 양상을 삼는다.
017_0156_a_15L釋曰:如『菩薩藏百千頌經』「序品」中說,淸淨佛土,此淨佛土,顯示何等殊勝功德?謂初二句,顯淨佛土顯色圓滿.言七寶者,一金二銀三琉璃四牟娑洛寶五遏濕摩揭婆寶,擧此應知卽擧末囉羯多等寶六赤眞珠寶,此赤眞珠赤虫中出,一切寶中,最爲殊勝七羯鷄怛諾迦寶.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者,謂次前說,七寶所放諸大光明.此上二句,皆同顯示顯色圓滿.次有一句,顯形色圓滿.次有一句,顯分量圓滿.次有一句,顯方所圓滿.次有一句,顯因圓滿,此何所因?謂出世閒無分別智,及後得智,此後得智,說名爲勝,此後得故,從此二種善根所起,卽此善根,名因圓滿.次有一句,顯果圓滿,謂淨佛土,以極自在淨識爲相.
다음의 한 문구는 주(主)의 원만을 나타내고, 다음의 한 문구는 보익(輔翼)의 원만을 나타내며, 다음의 한 문구는 권속의 원만을 나타낸다. 앞에서 용(龍)을 들고 지금 여기서 다시 모호락가(莫呼洛伽)42)를 든 것은 큰 구렁이를 포함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음의 한 문구는 맡아 지님의 원만을 나타내니, 곧 음식을 말한다. 다음의 한 문구는 사업의 원만을 나타내니, 이 음식을 먹고서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 다음의 한 문구는 섭익의 원만을 나타내니, 정토에는 모든 번뇌를 여의고 모든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017_0156_b_09L次有一句,顯主圓滿.次有一句,顯輔翼圓滿.次有一句,顯眷屬圓滿,前已擧龍,今此復擧莫呼洛伽,爲攝大蟒.次有一句,顯任持圓滿,卽是飮食.次有一句,顯事業圓滿,謂食此食已辦諸衆生一切義利.次有一句,顯攝益圓滿,於淨土中,離諸煩惱,無諸苦故.
다음의 한 문구는 두려움이 없음의 원만을 나타내니, 처하여 원한이 없으면 곧 두려움이 없다. 원한이란 네 가지 마군을 말한다. 이 정토에는 모든 번뇌의 마군ㆍ5온의 마군ㆍ죽음의 마군ㆍ하늘의 마군이 모두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다음의 한 문구는 머무는 곳의 원만을 나타내고, 다음의 한 문구는 길의 원만을 나타낸다. 이 청정한 불국토는 어떤 길에 의해서 들어가는가? 이른바 대승의 들어서 이루는 지혜ㆍ사유해서 이루는 지혜ㆍ수행해서 이루는 지혜는 그 순서대로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하는 것으로서 즐겁게 들어가는 길이 된다.
017_0156_b_16L次有一句,顯無畏圓滿,若處無怨,卽無怖畏.怨謂四魔,此淨土中,諸煩惱魔`薀魔`死魔及以天魔,悉皆無有,是故無畏.次有一句,顯住處圓滿.次有一句,顯路圓滿.此淨佛土,由何路入?謂大乘中,聞`思`修慧.如其次第,大念慧行,爲遊入路.
017_0156_c_01L다음의 한 문구는 교법[乘]의 원만을 나타내니, 사마타ㆍ비발사나에 의지해서 즐겁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다음의 한 문구는 문(門)의 원만을 나타낸다. 이 정토는 어떤 문에 의해서 들어가는가? 이른바 대승의 대공(大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43)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다음의 한 문구는 의지(依持)의 원만을 나타낸다. 대지(大地) 등이 풍륜(風輪)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처럼, 이 청정한 불국토는 무엇이 의지하는 곳인가? 한량없는 공덕들로 장엄한 곳, 뛰어난 보배 연꽃[大紅蓮華]44)으로 건립된 곳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하는 데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하다’는 것은 정토 중에는 부정하고 더러운 일들이 없음을 말한다. ‘한결같이 안락하다’는 것은 정토에는 오직 즐거운 감수작용만이 있고, 괴로운 감수작용이 없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작용도 없음을 말한다. ‘한결같이 죄가 없다’는 것은 정토에는 불선(不善)이 없고 역시 무기(無記)도 없음을 말한다. ‘한결같이 자재하다’는 것은 정토에는 외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모든 바가 자기 마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017_0156_b_23L次有一句,顯乘圓滿,乘奢摩他`毘鉢舍那,而遊趣故.次有一句,顯門圓滿,謂此淨土,由何門入?謂大乘中,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次有一句,顯依持圓滿,如大地等,依風輪住.此淨佛土,何所依持?無量功德,衆所莊嚴,大紅蓮華之所建立.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者,謂淨土中,無有不淨糞穢等事.一向安樂者,謂淨土中,唯有樂受,無有苦受`無無記受.一向無罪者,謂淨土中,無有不善,亦無無記.一向自在者,謂淨土中,不待外緣,一切所欲,隨自心故.
또한 마땅히 알지니,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법계는 어느 때나 다섯 가지 업을 짓는다. 첫째는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잠깐 볼 때에도 문득 능히 장님ㆍ귀먹은 이ㆍ미친 이 등의 모든 재난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모든 유정을 빼내어 불선의 장소에서 나와서 선한 장소에 두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이 아닌 것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모든 외도로 하여금 방편이 아닌 것을 버리고 해탈의 행을 구하도록 해서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 안에 두기 때문이다. 넷째는 유신견[薩迦耶]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능히 삼계를 벗어나는 도를 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법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다른 교법에 나아가려는 보살과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들을 빼내어 안전하게 두어서 대승의 행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작용은 평등하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56_c_12L論曰:復次應知,如是諸佛法界,於一切時,能作五業:一者救濟一切有情災撗爲業,於暫見時,便能救濟盲聾狂等,諸災橫故二者救濟惡趣爲業,拔諸有情,出不善處,置善處故三者救濟非方便爲業,令諸外道,捨非方便,求解脫行,置於如來聖教中故者救濟薩迦耶爲業,授與能超三界道故五者救濟乘爲業,拯拔欲趣餘乘菩薩,及不定種性諸聲聞等,安處令修大乘行故.於此五業,應知諸佛業用平等.此中有頌:
017_0157_a_01L
원인ㆍ의지신(依止身)ㆍ사업ㆍ품성ㆍ행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하네.
세간에는 이런 힘의 차이가 있으나
스승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네.45)
017_0157_a_01L因依事性行,
別故許業異,
世閒此力別,
無故非導師.

마땅히 알지니,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법계는 어느 때나 다섯 가지 업을 짓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신은 항상 다섯 가지 업을 지음을 말한다.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등은 장님이나 귀먹은 이 등이 잠깐이라도 부처님을 친견할 때는 문득 눈 등을 얻는 것이다.46)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등은 이른바 살기 괴로운 곳에서 빼내어 살기 좋은 곳에 두는 것을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한다’고 말한다. ‘유신견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등은 세간을 위해서 능히 삼계를 벗어나는 성스러운 수도를 설하는 것이다. 곧 삼계를 유신견으로 말한다.47)
나머지 두 문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마땅히 알지니, 모든 부처님의 업은 평등하다.
017_0157_a_03L釋曰:應知如是諸佛法界,於一切時,能作五業者,謂佛法身,恒作五業.救濟一切有情災橫,爲業等者,謂盲聾等暫見佛時,便得眼等.救濟惡趣.爲業等者,謂拔惡處,置於善處,名救惡趣.救濟薩迦耶,爲業等者,謂爲世閒,說能超出三界聖道,卽說三界,爲薩迦耶.所餘二句,其義可知.於此五業,應知諸佛諸業平等,
이런 의미 가운데 다시 한 게송을 말한다. 이른바 ‘원인ㆍ의지’ 등이다. 이 인연에 의거해서 모든 여래의 업은 평등하고, 일체 세간의 업은 불평등하다. 한 게송으로써 총체적으로 간략히 세간의 원인을 나타낸다.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세간은 원인의 차별에 의해서 지옥에 태어나고, 원인의 차별에 의해서 하늘에 태어나며, 원인의 차별에 의해서 인간이나 아귀에 태어난다. 원인의 차별에 의거함으로써 업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017_0157_a_12L於此義中,復說一頌.謂因依等,由是因緣,一切如來,諸業平等,一切世閒,業不平等,以一伽他,摠略顯示世閒因別.故許業異者,謂諸世閒,由別因故,生那落迦,別因生天,別因生人,乃至餓鬼,由因別故,許業有異.世閒依別故,許業異者,依謂身體,由依別故,許業有異.
017_0157_b_01L‘세간에 의지신[依]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의(依)는 신체를 말한다. 의지신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세간의 사업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세간에는 상업의 일의 차이, 농업을 경영하는 일의 차이 등 이들 사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세간의 품성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품성은 취향을 말하며,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세간의 행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행동하는 업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업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모든 부처님의 작업은 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고, 모든 원인 등의 차이의 세력이 없다. 따라서 스승에게는 업의 차이가 없다.
017_0157_a_19L世閒事別故,許業異者,謂諸世閒,商賈事別`營農事別,此等事務,有差別故,許業有異.世閒性別故,許業異者,性謂意趣,意趣別故,許業有異.世閒行別故,許業異者,由作行業,有差別故,許業有異.諸佛作業,皆無功用,一切因等,差別力無,是故導師,非有業異.
만일 이 공덕의 원만과 상응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성문승ㆍ독각승과 공통되지 않는다. 어떤 취지에 의해서 부처님은 일승(一乘)을 말씀하셨는가?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017_0157_b_03L論曰:若此功德,圓滿相應,諸佛法身,不與聲聞`獨覺乘共,以何意趣,佛說一乘?此中有二頌:

한 부류를 이끌어 섭수하고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니
부정종성(不定種性)으로 인하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승을 말씀하시네.
017_0157_b_06L爲引攝一類,
及任持所餘,
由不定種性,
諸佛說一乘.

법ㆍ무아ㆍ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종성이 같지 않음ㆍ
두 가지 의욕을 얻음ㆍ화현ㆍ
구경 때문에 일승을 말씀하시네.
017_0157_b_08L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樂化,
究竟說一乘.

여기서의 두 게송은 모든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 취지를 밝힌다. ‘한 부류를 이끌어 섭수하기 위해서’란 이른바 부정종성의 성문등을 이끌어 포섭하기 위해서이다.48)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성문등으로 하여금 모두 대승에 의거해서 반열반하게 할 수 있는가? ‘나머지를 맡아 지닌다’는 것은 부정종성의 보살 대중을 맡아 지녀서 대승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모든 보살 대중으로 하여금 대승을 버리지 않고 성문승으로 반열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 때문에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다. 부정종성 등의 문구의 의미로 인하여 이미 법ㆍ무아ㆍ해탈을 말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7_0157_b_09L釋曰:此中二頌,辯諸佛說一乘意趣.爲引攝一類者,謂爲引攝不定種性諸聲聞等,令趣大乘,云何當令不定種性諸聲聞等,皆由大乘,而般涅槃.及任持所餘者,謂爲任持,不定種性諸菩薩衆,令住大乘,云何當令不定種性諸菩薩衆,不捨大乘,勿聲聞乘,而般涅槃.爲此義故,佛說一乘.由不定等句義,已說法無我解脫,乃至廣說,
017_0157_c_01L이 중에서 다시 별도의 취지의 힘에 의거해서 오직 일승을 말씀하신다. 어떤 별도의 취지인가? 이른바 ‘법이 평등하기 때문’ 등이다.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란 여기서 법은 진여로서 모든 성문등이 다같이 돌아가야 할 곳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 평등하기 때문에 일승이라고 말한다. ‘무아가 평등하기 때문’이란 성문등에는 보특가라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다. 무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문이다, 이것은 보살이다’라고 말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49) 이 무아의 평등한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성문등은 번뇌장에 대해서 다 같이 해탈을 얻기 때문에 일승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해탈과 해탈에50) 차이는 없다.
017_0157_b_19L此中復由別意趣力,唯說一乘.何別意趣?謂法等故等.法等故者,法謂眞如,諸聲聞等,同所歸趣,所趣平等,故說一乘.無我等故者,謂聲聞等,補特伽羅,我皆無有.由無我故,此是聲聞`此是菩薩,不應道理.由此無我平等意趣,故說一乘.解脫等故者,謂聲聞等,於煩惱障,同得解脫,故說一乘.如世尊言:解脫解脫無有差別.
‘종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란 종성의 차별 때문이다. 부정종성의 모든 성문등도 역시 장차 성불할 수 있으므로,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두 가지 의욕[意樂]을 얻기 때문’이란 다음 두 가지의 의욕을 얻기 때문이다. 첫째는 섭수의 평등의 의욕이니, 이로 인하여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그는 곧 나이고, 나는 곧 그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섭수하고 나서 스스로 이미 성불하고, 그들도 역시 성불하게 한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둘째는 법성 평등의 의욕이니, 이른바 모든 성문은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부처님 법성의 평등한 의욕을 얻었지만 아직 법신을 얻지 못했기에 이렇게 사유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성은 곧 나의 법성이다”라고 한다. 다시 다른 의미가 있으니, 그 대중 가운데 많은 보살이 있어서 그들51)과 이름을 같이하고 부처님의 수기를 받는다. 이 법여(法如)의 평등한 의욕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017_0157_c_04L性不同故者,種性差別故,以不定性諸聲聞等,亦當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得二意樂故者,得二種意樂故.一攝取平等意樂,由此攝取一切有情,言彼卽是我`我卽是彼.如是取已,自旣成佛,彼亦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二法性平等意樂,謂諸聲聞,法華會上,蒙佛授記,得佛法性平等意樂,未得法身.由得如是平等意樂,作是思惟:諸佛法性,卽我法性.復有別義,謂彼衆中,有諸菩薩,與彼名同,蒙佛授記.由此法如平等意樂,故說一乘.
‘화현[化]이기 때문’이란 부처님께서 성문승 등으로 변화됨을 말한다. 세존께서 “내가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한량없는 성문승에 의지해서 반열반하였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성문승으로 변화되었으므로 유정은 이것을 봄으로써 반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를 나타낸다.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란 오직 이 일승만이 가장 구경임을 말한다. 이것을 지나서 다시 다른 뛰어난 교법이 없기 때문이다. 성문승 등에는 나머지 다른 뛰어난 교법이 있으니, 바로 불승(佛乘)이다. 이런 취지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다.
017_0157_c_16L化故者,謂佛化作聲聞乘等.如世尊言:我憶往昔,無量百返,依聲聞乘,而般涅槃.由此意趣,故說一乘.以聲聞乘,所化有情,由見此故,得般涅槃,故現此化.究竟故者,唯此一乘,最爲究竟,過此更無餘勝乘故.聲聞乘等,有餘勝乘,所謂佛乘.由此意趣,諸佛世尊,宣說一乘.
017_0158_a_01L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는 동일한 법신인데, 부처님께서 많이 계신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볼 수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58_a_01L論曰:如是諸佛,同一法身,而佛有多,何緣可見?此中有頌:

한 세계에 두 분이 없나니
동시에 한량없는 이가 원만하게 되네.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께서 계시게 되네.
017_0158_a_03L一界中無二,
同時無量圓,
次第轉非理,
故成有多佛.

이제 마땅히 이 인연에 의거함을 나타내 보이겠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같이하면서도 혹은 한 분이기도 하고, 혹은 많은 분이기도 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라는 것은 법계를 같이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 마찬가지로 법계를 자체로 삼는다. 법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마땅히 한 분의 부처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한 분의 부처님’이란 동시에 한 세계에서 두 분의 부처님께서 출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한 분의 부처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혹은 한 분, 혹은 많은 분을 나타낸다.
017_0158_a_05L釋曰:今當顯示,由此因緣,應知諸佛,雖同法身,而或成一,或復成多.應知一者,法界同故,諸佛皆同法界爲體,法界一故,應知一佛.又一佛者,以於一時,一世界中,無二佛現,故知一佛.又伽他中,顯示諸佛,或一或多.
‘한 세계에 두 분이 없다’는 이 문구는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이 계심을 나타낸다. 한 세계에서 두 분의 부처님께서 동시에 출현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이 계신다고 말한다. 나머지 문구는 부처님께서 많이 계심을 나타낸다. ‘동시에 한량없는 이가 원만하게 된다’는 것은 한량없는 보살이 같은 시기에 자량이 원만해짐을 말한다. 만일 모든 보살의 복과 지혜의 자량이 동시에 원만해도 성불을 얻지 못하면, 이와 같은 자량은 마땅히 헛되어 결과가 없어야 한다. 많은 보살은 자량을 닦아 모아서 동시에 원만해진다. 그러므로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심을 알아야 한다.
017_0158_a_11L一界中無二者,此句顯示,唯有一佛.一世界中,無有二佛俱時出現,是故說言,唯有一佛.餘句顯示,諸佛有多.同時無量圓者,無量菩薩,同一時中,資糧圓滿.若諸菩薩,福智資糧,同時圓滿,不得成佛,如是資糧,應空無果衆多菩薩,修集資糧,同時圓滿,是故應知一時多佛.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순서대로 전전하여 성불하는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만약 보살이 자량을 닦을 때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관찰하여 원만히 성취한다면, 성불할 때도 이전과 이후의 순서가 있다. 그러나 모든 보살은 자량을 닦을 때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기다리지 않고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에, 성불할 때도 역시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이루는 의미가 없다. 이런 까닭에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
017_0158_a_19L次第轉非理者,無有次第轉成佛義.若諸菩薩,修資糧時,觀待次第前後成滿,可得佛時,前後次第然諸菩薩,修資糧時,不待次第前後成滿,故得佛時,亦無次第前後成義.是故同時,有衆多佛.
017_0158_b_01L어째서 마땅히 법신 안에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고 역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58_b_01L論曰:云何應知於法身中,佛非畢竟入於涅槃,亦非畢竟不入涅槃?此中有頌:

모든 장애를 벗어나기 때문이고
해야 할 바가 끝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고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네.
017_0158_b_04L一切障脫故,
所作無竟故,
佛畢竟涅槃,
畢竟不涅槃.

다른 부파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는 일이 없다”고 한다. 또한 다른 부파의 성문승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게송에서 두 가지 취지를 나타낸다.
‘모든 장애를 벗어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해탈하기 때문에, 이런 취지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다고 말씀하신다. ‘해야 할 바가 끝이 없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널리 모든 유정에 대해서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인 이 사업은 궁극의 시기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신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면 마땅히 성문이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는 것과 같아야 한다. 그러면 곧 본원(本願)이 헛되어 결과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017_0158_b_06L釋曰:有餘部說,諸佛無有畢竟涅槃,復有別部聲聞乘人說,諸佛有畢竟涅槃故,此頌中顯二意趣.一切障脫故者,由佛解脫一切煩惱`所知障故,依此意趣,說言諸佛畢竟涅槃.所作無竟故者,由佛普於一切有情,未成熟者,欲令成熟已成熟者,欲令解脫,是所應作,此事無有究竟之期,故佛畢竟不入涅槃.若異此者,應如聲聞畢竟涅槃,是則本願,應空無果.
어째서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가?52) 여섯 가지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첫째, 색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한량없는 부처님의 여러 법회의 차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뛰어난 이해에 따라 보는 것은 자성을 일정하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각기 다르게 보는 것은 자성을 변동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보살ㆍ성문ㆍ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 섞여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아뢰야식과 전식(轉識)의 전의(轉依)는 도리에 맞지 않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수용신이 곧 자성신이란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17_0158_b_16L論曰:何故受用身,非卽自性身?由六因故,一色身可見故`二無量佛衆會差別可見故`三隨勝解見自性不定可見故`四別別而見自性變動可見故`五菩薩聲聞及諸天等種種衆會閒雜可見故`六阿賴耶識與諸轉識轉依非理可見故,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道理.
017_0158_c_01L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수용신이 곧 자성신이라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색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수용신은 색신을 볼 수 있어도 부처님의 법신은 그렇지 않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니다.
017_0158_c_01L釋曰:今當顯示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正理.色身可見故者,佛受用身,色身可見,非佛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卽法身.
또한 수용신에는 부처님의 여러 법회의 차이를 볼 수 있지만 법신에는 이와 같은 차이가 없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뛰어난 이해에 따라서 본다. 계경에서 “혹은 부처님을 뵈니 오직 황색뿐이고, 혹은 부처님을 뵈니 오직 청색뿐이다”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한다. 만일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면 이 자성신은 마땅히 자체가 일정하지 않아야 하고, 일정하지 않은 것을 자성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한 무리의 유정이 이미 다름을 보고 이 다음 시기에 다시 다름을 보지만,53) 부처님의 법신의 자성은 변동하지 않는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수용신은 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서 항상 서로 섞여 있지만, 자성신은 이렇게 섞여 있지 않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158_c_05L又受用身,有佛衆會,差別可得,法身無有,如是差別.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隨勝解見,如契經說:或見佛身,唯有黃色,或見佛身,唯有靑色,如是廣說.若受用身,卽自性身,此自性身,應不決定,體不決定,名自性身,不應正理.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一類有情,先見別異,卽此後時,復見別異,非佛法身,自性變動.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有諸天等,種種衆會,常相閒雜,非自性身,有此閒雜.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
또한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자성신을 얻는다.54) 만일 수용신이 자성신이어서 모든 전식(轉識)을 전환하면 다시 어떤 불신을 얻겠는가?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도리에 맞지 않는 이유로 두 가지는 하나를 이루지 않는다.
017_0158_c_18L又轉阿賴耶識,得自性身,若受用身,卽自性身,轉諸轉識,復得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由此六因,不應理故,二不成一.
017_0159_a_01L어떤 원인 때문에 변화신은 자성신이 아닌가?55) 여덟 가지 원인 때문이다.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으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과거 세상을 생각해 보건대, 글씨ㆍ산술ㆍ조각ㆍ공예 기술 등과 욕락의 경계를 수용하는56) 행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57)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잘못 말했거나 훌륭하게 말해진 교설을 알기 때문에 외도의 처소에 간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능히 삼승의 바른 수행을 잘 알기 때문에 삿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모든 보살은 백 구지(拘胝)의 많은 섬부주(贍部洲)를 버리고 다만 한 곳에서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시현하지 않고서 오직 화신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불사를 짓는다면, 곧 마땅히 오직 도솔천에서만 등정각을 이루어야 한다. 어째서 두루 모든 섬부주에서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현함을 시설하지 않는가? 이미 시설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바른 논리도 없다.58) 많은 화신이 있지만 그 두 분의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일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주(四洲)에서 세계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세상에 출현하지 않음과 같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58_c_21L論曰:何因變化身,非卽自性身?由八因故,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於睹史多及人中生,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書算數印工巧論中,及於受用欲塵行中,不能正知,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知惡說,善說法教,往外道所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能善知三乘正道,修邪苦行,不應道理.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離示現成等正覺,唯以化身,於所餘處,施作佛事,卽應但於睹史多天,成等正覺,何不施設,遍於一切贍部洲中,同時佛出?旣不施設,無教無理.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言,由一四洲,攝世界故,如二輪王不同出世.此中有頌: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대부분 모태에 처하여 평등하네.
모든 종류의 등각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전전하네.59)
017_0159_a_16L佛微細化身,
多處胎平等,
爲顯一切種,
成等覺而轉.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자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서원과 행이 결과가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017_0159_a_18L爲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畢竟涅槃,不應道理,願行無果,成過失故.
017_0159_b_01L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변화신이 곧 자성신이라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60) 여덟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한량없는 겁에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는다. 오히려 도솔천에도 태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세상에서이겠는가? 그런데 이 세간에 시현하여 생을 받는 것은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항상 과거생을 생각하여 글씨ㆍ산술 등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음은 도리에 맞지 않다. 다만 많은 유정을 조복하기 위해서 변화하여 이런 일을 한다.
017_0159_a_21L釋曰:今當顯示,佛變化身,卽自性身,不應正理,由八因故.此中最初不應理者,謂諸菩薩,從久遠來,已無量劫,得不退定,尚不應生睹史多天,況於人中?然此世閒現受生者,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於書筭等,不能正知不應道理,但爲調伏諸有情故,化爲此事.
또한 모든 보살은 3무수겁 동안 복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서 잘못 말해지거나 훌륭하게 말해지거나 삿된 고행의 일을 바르게 알 수 없다면, 최후신에서 보리를 증득할 때 어떻게 능히 단박에 깨닫겠는가? 이 도리로 인하여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또한 모든 보살은 백 구지의 섬부주를 버리고 다만 한 곳에서만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변화신이 모든 곳에서 두루 동시에 시현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다. 따라서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159_b_06L又諸菩薩,三無數劫,勤修福慧,不能正知惡說`善說,邪苦行事,於最後身,證菩提時,何能頓悟?由此道理,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變化身,遍一切處,同時現化,應正道理.故變化身,非自性身.
만일 다른 부파에서 이렇게 국집하여 “부처님께서는 오직 한 곳에서 진실로 등각을 이룬다. 다른 곳에서는 화신을 나투어서 불사를 짓는다”고 말하면, 어째서 다만 도솔천에 머물러서만 진실로 등각을 증득하고, 두루 모든 사대주(四大州)에 화신을 시현하여 불사를 지음을 인정하지 않는가? 또한 모든 사대주에서 등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바른 논리도 없기 때문에 맞지 않는 말이다. 이 불국토 중에서 사대주에서의 성불을 보이지 않는다.61)
017_0159_b_13L若諸異部,作如是執,佛唯一處,眞證等覺,餘方現化,施作佛事.若爾,何故不許但住睹史多天,眞證等覺,遍於一切四大洲渚,示現化身,施作佛事?又於一切四大洲中,不現等覺,無教無理,故不應說,此佛土中,有四洲渚,不現成佛.
017_0159_c_01L만일 어떤 이가 비록 이런 일이 있다고 말하지만 계경에 위배된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두 분의 여래께서는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땅히 알지니, 이 경전은 전륜성왕도 마찬가지여서 전륜성왕이 두 사람이 함께 출현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의 사대주에 의지하고 하나의 불국토는 아니다.62) 두 분의 여래께서 동시에 출현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하나의 사대주를 하나의 세계로 이름한다.
이제 다시 게송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등각을 변화로 시현함을 나타낸다.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은 여기서의 의미를 말한다. 만약 그때 부처님께서 나타나서 도솔천에 안주하고 그곳으로부터 생을 다하여 모태에 들어가는 것 등을 시현하면, 곧 그때에 존자 사리자(舍利子) 등의 한량없는 권속을 변화로 지어서 역시 모태에 들어가고 출생하는 등의 일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변화의 권속을 안립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깨달음의 뛰어난 불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마땅히 여래께서 궁극적으로 반열반에 드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겠다. 모든 유정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큰 서원을 세우고 큰 행을 닦으며, 항상 스스로 원을 세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부지런히 바른 행을 닦게 하겠다”고 한다. 만일 처음으로 성불하고 나서 문득 반열반에 든다면, 곧 수행한 서원과 행은 헛되이 되고 결과가 없다. 이처럼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니다.
017_0159_b_20L若有說言,縱有是事,便違契經故,經中說,無二如來俱時出現.應知此經,同轉輪王,如說輪王無二竝出,依一四洲,非一佛土.無二如來俱時出現,當知亦爾,此中意說,一四大洲,名一世界.今復以頌顯示,諸佛化現等覺.佛微細化身等者,此中義說,若於爾時,佛現安住睹史多天,示從彼沒,入母胎等,卽於彼時,化作尊者,舍利子等,無量眷屬,亦現入胎出生等事.安立如是,變化眷屬,當知爲顯一切種覺,殊勝佛事.今當顯示,如來畢竟,入般涅槃,不應道理.謂爲化度一切有情,先發大願,及修大行,常自誓言:我當利樂一切有情,勤修正行.若始成佛已,便般涅槃,卽所修願行空無有果.由此非理,是變化身,非自性身.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무상한데 어째서 경전에서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고 말씀하는가? 이 둘의 의지처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등류신(等流身)과 변화신은 항상 수용하여 중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고, 자주자주 나투어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듯이, 항상 음식을 베풀듯이, 여래의 몸이 상주함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59_c_13L論曰: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經說,如來身常?此二所依法身常故.又等流身及變化身,以恒受用無休廢故`數數現化不永絕故,如常受樂`如常施食.如來身常,應知亦爾.
017_0160_a_01L경전에서 “여래께서는 그 몸이 상주한다”고 설하지만,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모두 무상하다. 어째서 몸이 상주하는가? 따라서 다음으로 두 불신의 상주의 의미를 성립한다. 이 두 불신은 법신에 의지해서 머문다.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한다. 또한 수용신은 수용하여 중단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한다. 그 변화신은 항상 등각과 반열반을 나타내고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한다.
다시 비유로써 이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고 말함과 같다. 수용하는 즐거움이 오직 끊임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이것을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세간이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함과 같다. 이 음식을 베푸는 것은 항상 끊임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017_0159_c_18L釋曰:經說如來其身常住,佛受用身及變化身,皆是無常,云何身常?故次成立二身常義.謂此二身依法身住,法身常故,亦說爲常.又受用身,受用無廢,故說爲常.其變化身,恒現等覺般涅槃等,相續不斷,故亦名常.復以譬喩,顯此二身,是常住義.猶如世閒,言常受樂,雖所受樂,非唯無閒,而得說言,此常受樂.又如世閒,言常施食,非此施食,恒無閒斷,而得說言,此常施食.應知二身,常義亦爾.
여섯 가지 원인 때문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현하는 화신은 궁극적으로 머물지 않는다. 첫째는 해야 할 바를 마치는 것이니, 유정을 성숙시켜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니, 여래의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63) 셋째는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김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니, 매우 심오한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존경함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이니, 자주 보는 자가 권태로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신에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이니, 바르게 말하는 이는 만나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모든 유정을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게 하기 위해서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멍에64)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017_0160_a_06L論曰:由六因故,諸佛世尊,所現化身,非畢竟住.一所作究竟,成熟有情,已解脫故二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三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四爲令於佛深生渴仰,恐數見者,生厭怠故五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六爲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此中有二頌:

해야 할 바를 마치고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며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김을 여의고
깊이 존경심을 일으키며
017_0160_a_15L由所作究竟,
捨不樂涅槃,
離輕毀諸佛,
深生於渴仰.

내면에서 스스로 바른 정진을 일으키고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화신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 머물지 않네.
017_0160_a_17L內自發正勤,
爲極速成熟,
故許佛化身,
而非畢竟住.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원인에 대한 산문과 게송은 부처님의 화신이 궁극적으로 머물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 문장이 알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017_0160_a_18L釋曰:如是六因,直說及頌,證佛化身,非畢竟住.其文易了,故不煩釋.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한량없다. 마땅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는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160_a_20L論曰: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不應爲得,更作功用.此中有頌:

부처님의 증득은 차별없고 한량없는 것이 원인이네.
만일 유정이 정근(精勤)의 의식적인 노력을 버리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네.
이와 같은 원인을 단멸함은 도리에 맞지 않도다.
017_0160_a_22L佛得無別無量因,
有情若捨勤功用,
證得恒時不成因,
斷如是因不應理.
017_0160_b_01L
이 중에서 비판하기를 “만일 부처님의 법신이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한량없는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을 짓는다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들을 능히 해내야 한다. 불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마땅히 다시 정근(正勤)의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017_0160_b_01L釋曰:此中有難:若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能辦有情,諸利樂事,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
이런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나타낸다.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한량없다. 만일 이 유정이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을 버린다면 이런 비판65)이 있어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불과를 얻음에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66) 그러나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한량없는 것으로서, 항상 유정에게 불과를 얻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비판이 맞지 않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한량없는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을 짓는다. 불과를 얻기 위해서 다시 올바른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증득한다. 유정은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을 버려서는 안 된다. 또한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한량없는 것으로서 불과를 구하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이 된다.
017_0160_b_04L爲釋此難,以頌顯示,諸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若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可有此難,諸佛證得,於得佛果,無始時來,不成因故.然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恒與有情,作得佛果,勤精進因,故不應難.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是故諸佛,證得法身,非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又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作求佛果,勤精進因.
만일 유정이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을 버리면, 이와 같은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원인을 단멸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모든 보살은 자비와 서원의 마음에 매여서 모든 유정에 대하여 외아들처럼 연민한다. 모든 유정의 무리는 큰 감옥에 처하여 온갖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보살이 유정의 이롭고 안락함에 대해서 “다른 이는 이미 능히 짓는다. 나는 장차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67)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항상 이런 마음을 지어서 “다른 이는 이 사업에 대해서 혹은 짓거나 혹은 짓지 않아도 나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러한 원인을 단멸하지 않아야 한다.
017_0160_b_15L若諸有情,捨勤功用,如是證得,恒不成因故.又斷此因,不應道理,謂諸菩薩,悲願纏心,於諸有情,愍如一子,諸有情類,處大牢獄,具受艱辛,是故菩薩,於諸有情,利益安樂.若作是心:餘旣能作,我當不作.不應道理.恒作是心:餘於此事,若作`不作,我定當作.是故不應斷如是因.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 안의 「섭대승품(攝大乘品)」을 나 아승가(阿僧伽:무착)는 간략히 해석해 마친다.
017_0160_b_22L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攝大乘品」,我阿僧伽,略釋究竟.
017_0160_c_01L바르게 대승에 나아가서 한량없는 뛰어난 것을 저술한다. 논사 아사리[軌範]68)인 세친(世親)이 간략히 해석해 마친다.
017_0160_c_01L釋曰:正趣大乘,制造無量殊勝,論者軌範世親,略釋究竟.
攝大乘論釋卷第十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12가지로 설명한다.
  2. 2)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이다.
  3. 3)모든 부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여러 하늘이 가까이 받아서 나머지 유정들에게 베푼다. 이 인연으로 해서 그들 유정은 장차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4. 4)열반은 수습(修習)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적멸이기 때문이다.
  5. 5)중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 음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6. 6)제자로 하여금 여법(如法)하게 음식 수용함을 부처님에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7. 7)본원(本願)에 의지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받은 생을 원만하게 한다.
  8. 8)한량없는 신(身)이 이 법신에 의지해서 불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이다.
  9. 9)등정각(等正覺)을 말한다. 진리를 깨달아서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내용이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도 한다.
  10. 10)앞의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인 보특가라와 법은 비존재임을 밝힌다. 이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이 비존재이긴 하지만, 깨달음의 주체의 자체를 가명에 의거해서 부처님[覺者]으로 삼음을 말한다.
  11. 11)탐욕의 번뇌가 현행함을 말한다.
  12. 12)번뇌의 잠재력이다.
  13. 13)벗어남[出離]은 해탈의 의미이다. 미혹을 머물게 해서 생사에 왕래하고 부처님의 행을 닦음으로써 구경의 해탈을 얻는다.
  14. 14)5취온(取蘊, pañca-upādāna-skandhāḥ)은 5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됨을 말한다. 5온과 5취온은 같은 것이라고도,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5온에 탐욕이 있는 것이 5취온이다.
  15. 15)과거ㆍ현재ㆍ미래이다. 게송에서 이미, 현재, 장차는 세 때[三時]를 나타낸다.
  16. 16)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법에 있어서 성스러운 법으로 안주하고,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천상의 머무름으로 안주하며, 청정한 행이 아닌 법에 있어서도 청정한 행으로 안주한다. 가장 뛰어난 자체 때문에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고 말한다.
  17. 17)세 가지 해탈문, 즉 공(空)해탈문ㆍ무상(無相)해탈문ㆍ무원(無願)해탈문을 가리킨다.
  18. 18)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慈ㆍ悲ㆍ喜ㆍ捨]이다.
  19. 19)자성신과 수용신이다.
  20. 20)변화신의 실체를 보지 못함을 말한다.
  21. 21)전(纏)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말한다. 그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제압함이고, 번뇌를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의 근원을 단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22. 22)독의 해를 입어도 주술의 힘에 의해 그것을 제압하면, 그 독 자체는 멸하지 않더라도 그 효력은 억압되어 해를 입히지 않음과 같다.
  23. 23)수면(隨眠)의 번뇌를 머물게 하여 단멸시키지 않음으로써 생사에 왕래하고 보살의 조도법(助道法)을 닦아서 궁극의 증과를 얻는다.
  24. 24)번뇌의 습기까지 모두 소멸하여 청정하게 될 때이다.
  25. 25)수행단계[因位]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갖추고 불과(佛果)를 성취하고서는 3신(身)을 갖춤을 말한다.
  26. 26)번뇌, 즉 집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는 조도법(助道法), 즉 도제(道諦)를 성취한다. 생사의 고제는 도제로 인하여 열반, 즉 멸제(滅諦)를 이룬다.
  27. 27)네 가지 살기 괴로운 세계[惡趣: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의 이숙의 과보를 받을 것이 결정된 것을 말한다.
  28. 28)외부 조건[外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문구는 첫 번째인 모든 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하는 것에 상응한다. 이하 순서대로 앞의 일곱 가지에 상응한다.
  29. 29)이하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18가지 원만상으로 나타낸다.
  30. 30)이하 박가범께서 삼매 속에서 현현한 정토의 광경을 18가지 측면에서 서술한다. 이러한 18가지 원만상은 세존께서 과거 보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타행을 펼치신 선근에 의해 이루어진 보토(報土)이다.
  31. 31)삼계는 미혹의 업으로 초감(招感)된 유루의 과보이고, 정토는 이런 경계를 초월한 곳이다.
  32. 32)이 정토는 번뇌가 없고 매우 청정한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식 위에 나타난 체상(體相)이다.
  33. 33)호법신장인 8부중(部衆)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라는 음역어가 많이 사용된다.
  34. 34)인비인(人非人)의 뜻에는 첫째로 긴나라의 별명, 둘째로 천룡팔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 셋째로 사람과 사람 아닌 이를 일컫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승경전 서두에서 법회대중 가운데 천ㆍ용 등 8부중에 이어져 나오는 인비인의 경우는 8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이다. 그들은 원래 사람이 아니지만 법회석상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면 법회에 모인 사람들이 놀랄 것이므로 사람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35. 35)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 등 네 가지 마군이다.
  36. 36)크게 기억함[大念]은 문혜(聞慧)를, 크게 판별함[大慧]은 사혜(思慧)를, 크게 수행함[大行]은 수혜(修慧)를 말한다. 대승을 반연하기 때문에 큰 것이라고 표현한다.
  37. 37)진제의 역본[陳本]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보살장 가운데 『정토경』의 한 종류, 또는 『화엄경』에서 정토상을 광설하는 문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경문은 『불지경(佛地經)』 「서품」ㆍ『해심밀경』 「서품」에 나온다.
  38. 38)범어 musāragalva의 음역(音譯)으로서 차거(車渠, 唓磲)로 번역하며, 보통 자거라고 읽는다. 그 색깔이 말의 뇌와 같기 때문에 마뇌(馬腦)라고도 한다.
  39. 39)aśmagarbha의 음역으로서, 적색보(赤色寶)로 번역한다.
  40. 40)mārakata의 음역으로서, 녹색보(綠色寶)로 번역된다.
  41. 41)karketana의 음역으로서, 매괴(玫瑰)로 번역된다.
  42. 42)mahoraga의 음역으로서, 큰 구렁이[大蛇] 또는 대복행(大腹行)으로 번역된다.
  43. 43)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三解脫門]이다. 공해탈문은 보특가라[人]와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조하는 것이다. 무상해탈문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44. 44)대(大)는 뛰어남[勝]의 뜻이고, 보배꽃 중의 왕[大寶華王]은 붉은 연꽃을 가리키며, 중(衆)은 그 연꽃잎이 많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첫째로 깨달음의 경지ㆍ원각(圓覺)ㆍ진여ㆍ원성실성의 뛰어나고 미묘한 공덕, ② 그러한 경지는 연꽃과 같은 보살 수행으로 이룬 것임을 상징한다.
  45. 45)문장이 이해하기 어렵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세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지만 스승에게는 그런 차이가 없네’로 되어 있다. 스승[導師], 즉 부처님에게는 업의 차이가 없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46. 46)장님은 눈을 뜨게 되고, 귀먹은 이는 소리를 듣게 됨을 말한다.
  47. 47)유신견에 의지해서 삼계에 계박되기 때문이다.
  48. 48)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과 독각은 소승의 근성을 벗어나서 대승에 통달할 만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일승을 말하여 이끈다.
  49. 49)성문의 무아와 보살의 무아가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한다.
  50. 50)성문의 해탈과 보살의 해탈이다.
  51. 51)법화회상에서 부처님께 수기받은 성문들을 가리킨다.
  52. 52)이하 수용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한다.
  53. 53)사람이 볼 때에 따라서 색상(色相)을 달리한다는 의미이다.
  54. 54)자성신은 진여와 진지(眞智)가 독존하는 이지명합성(理智冥合性)의 불신이다. 이것은 진여 그 자체가 지성(智性)을 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성신이 단순히 진여법성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고 진여가 ‘현현(顯現)된’ 상태로서, 전의(轉依)에 의해 아공ㆍ법공의 2공(空)이 현현한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신과 5법[眞如ㆍ4智]의 포섭관계에 있어서 자성신은 이지명합의 성격이므로 진여와 대원경지에 포섭시킨다.
  55. 55)이하 변화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56. 56)가무(歌舞)ㆍ음식(飮食) 등을 말한다.
  57. 57)과거 수많은 세상에서 닦아 익힌 효력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바르게 알 수 있어야 한다.
  58. 58)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이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59. 59)전전함을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생을 받음을 나타내네’로 되어 있고, 진제(眞諦)의 역본[陳本]에는 ‘세간에 시현하네’로 되어 있다.
  60. 60)이하 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신 석존에 비추어서 변화신을 말하여 자성신이 아님을 밝힌다.
  61. 61)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하나의 불찰(佛刹) 중에서 어느 하나의 사대주에서의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62. 62)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하나의 사대주 안에 함께 출현하는 일이 없다. 하나의 불찰(佛刹)은 아니다’로 되어 있어서 의미가 분명하다.
  63. 63)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열반을 즐기는 생각을 바꾸어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고, 진역(陳譯)에는 ‘만일 해탈을 얻어서 반열반을 구하면 그로 하여금 반열반의 생각을 버리고 상주하는 불신의 얻음을 구하게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둘 다 소승을 돌려서 대승으로 향하는[廻小向大] 의미이다. 아마도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64. 64)중생제도의 무거운 임무를 의미한다.
  65. 65)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유정 스스로 발심 수행하여 정진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비판이다.
  66. 66)유정이 정진하지 않고 불과(佛果)를 얻는 일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67. 67)유정들이 스스로 발심하여 수행하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방임하는 의미이다.
  68. 68)아사리(阿闍梨)는 범어 ācārya의 음역어로서,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으로 번역한다.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그 궤범이 될 수 있는 스승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