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釋】열 가지 뜻으로써 대승이 가지고 있는 요의(要義)를 총괄적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彼]6) 뜻은 능히 이 논의 체성(體性)을 드러낸다. 이것은 성교(聖敎)이기 때문에 이것을 문(門)으로 삼아 말을 펼치는 것이다. 『아비달마대승경』 등은 법을 간택하는 인(因)이기 때문에 혹은 함께 요달하기 때문에7) 아비달마의 상(想)을 표준으로 삼는다. ‘대승경’이란 말은 그 밖의 다른 곳8)을 간별한다. 만약 간략하게 해설하면 승(乘)이기도 하고 대(大)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승(大乘)이라고 이름한다. 9) 혹은 대성(大性)에 오르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인과(因果)가 크기 때문이고 업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과(果)는 10지(地)를 말한다. 만약 자세히 해석하면 일곱 가지 대성10)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보리분(菩提分)ㆍ바라밀다(波羅蜜多)ㆍ학지(學持)의 상(相) 등이다. 뚫어서 꿰매기 때문에 경(經)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곧 8시(時)11)에 따라 듣는 자의 식(識)에 맞고 맞지 않은 설을 모아서 현현(顯現)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017_0161_b_01L그렇다면 어떻게 보살이 설할 수 있는가? 보살은 설하는 주체[能說]이기 때문에 듣는 자의 식(識)이 아니다. 보살은 증상으로 생기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을 짓는다. 12) 비유하자면 천(天) 등의 증상력으로 인해 꿈속에서 논주(論呪) 등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식을 떠난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모든 계경(契經)의 구(句)를 설하시는가? 언어를 자성으로 삼은 것은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나하나 글자에 의해서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순서대로 생기고 같은 시간[俱時]에 머무르지 않아서 모임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저것의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언어에는 작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으며, 또한 글자에도 작용이 없어서 조그마한 이름이라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계경을 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설명된 경(經)과 같은 것이 자성의 이치에 부합한다. 여기에서 설명한바 『아비달마대승경』에서 ‘박가범’이란 모든 마(魔)를 파괴하고 능히 네 가지 큰 마원(魔怨)13)을 파괴하기 때문에 박가범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마(魔)란 첫째 번뇌마(煩惱魔), 둘째 온마(蘊魔), 셋째 천마(天魔), 넷째 사마(死魔)이다. 공삼마지(空三摩地)14)에 의지하면 능히 번뇌마인 일체의 추중(麤重)15)을 파괴하여 전의(轉依)의 모습[相]에 머무르고, 무량한 선근을 따라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또한 정진의 혜력(慧力)에 의지하면 능히 온마를 파괴하고, 자(慈) 등16)의 지(持)에 의지하면 능히 천마를 파괴하고, 신족(神足)을 닦는 데 의지하면 능히 사마를 파괴한다. 능히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마를 파괴하기 때문에 박가범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자재(自在) 등의 공덕과 상응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을 박가범이라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선설(宣說)하시는 불세존이기 때문이다. 저[彼] ‘앞에서’란 부처님의 허락을 나타내는 것이다. 『십지경(十地經)17)과 같이 널리 유통하는 데 있어서 친히 대사(大師)18)를 대신해도 다른 말이 없기 때문이다.
017_0161_c_01L‘능히 대승에 잘 들어간’이란 혹은 덕의 자취[德迹]에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 훤히 알기도 하여 그가 이미 대승에 잘 들어갔다는 것이다. 혹은 여기에 매우 잘 들어갔기 때문에 ‘능히 대승에 잘 들어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모든 다라니(陀羅尼)와 변재(辯才)의 공덕을 얻어 대승의 뜻을 능히 지키고 능히 선양(宣揚)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 의지하여 이와 같은 이름을 설한다.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소연경(所緣境)으로 삼기 때문에 보살이라 이름하고, 큰 서원이라는 말의 뜻에 의하여 보살이라는 소리를 세우는 것이다. 역시 다른 곳[餘處]을 참고하여도 소연경으로써 그 이름을 설한다. 마치 부정(不淨) 등을 소연경으로 삼는 두 가지 삼마지를 부정이라고 설명하고 공(空)이라고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곧 그 마음에 보리를 구하기 위한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대승의 체가 큼을 드러내기 위해서’란 깊고 깊으며 높고 넓어서 그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大)이며, 체(體)라는 것은 자성의 작용을 말한다. 마치 세상에서 불은 따뜻함을 체로 삼고 독은 해치는 것을 체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체가 크기 때문에 체가 크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드러내기’란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위해서’란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論】말하자면 “대승에 의거해서 불세존에게는 열 가지의 수승한 특징[十相殊勝]에 수승한 교설[殊勝語]이 있다”라고 한다. 첫째는 소지의(所知依)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둘째는 소지상(所知相)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첫째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넷째는 거기에 들어가는 인과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다섯째는 그 인과를 닦는 차별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다. 여섯째는 이와 같이 닦는 차별 중에서 증상계(增上戒)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일곱째는 바로 여기에 증상심(增上心)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여덟째는 바로 여기에 증상혜(增上慧)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아홉째는 그 과단(果斷)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으며, 열째는 그 과지(果智)의 수승에 수승한 교설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 설한 계경의 여러 구(句)에 의거해서 대승이 진실로 부처님 말씀임을 드러낸다.
017_0162_a_01L【釋】‘말하자면’이란 즉 설한바 열 가지 승처(勝處)에 대한 뜻을 간략히 나타낸다는 것이다. ‘대승에 의거해서’란 행한 일[所爲]과 설한 대상[所說]이 성문승이 아니며 또한 세간도 아니며 또한 대승을 들어 올려 결정적인 뜻을 삼는다는 것이다. 의지할 대상[所依]은 바로 이것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세간에 의지하면 그 밖의 다른 모습에 말미암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즉 게송에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분함도 없으며 조그마한 베풂도 바라지 않네’라는 이와 같은 등(等)과 다르게 된다. 만약 성문에 의지하면 그 밖의 다른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대승, 즉 게송에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며, 생멸(生滅)이 있는 법(法)이라네’라는 이와 같은 등과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거듭 대승이 이치에 합당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열 가지 등이 있다’란 숫자로써 뛰어난 부처님 말씀을 헤아려서 드러내어 논의체[論體]를 안립하는 것이다. ‘특징[相]’이란 종류이며, 곧 이것은 곧 전전(展轉)하여 차별이 있으며 섞임이 없기 때문에 ‘수승’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다시 저 성문 등의 법에 대해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증상(增上)이기 때문에 ‘수승’이라 이름한다. 능히 대보리(大菩提)를 이끌어 내어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특징은 수승하기 때문에 그 말도 또한 수승하다. 그러므로 ‘열 가지의 수승한 특징에 수승한 교설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불세존’이란 염오ㆍ불염오의 두 가지의 어리석음[癡]과 번뇌[睡]가 다하고 일체의 알아야 할 바 지혜[所知智]가 드러난다는 뜻이기 때문에 불(佛)이라고 이름한다. 사부(士夫)가 깨닫는 것과 같고 연화가 피어나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깨어나 드러낸다는 뜻이며 유시업(有時業)의 불계 (佛界)이다”라고 이와 같은 등을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162_b_01L【論】또한 어떻게 능히 드러내는가? 여기서 설명하는 10처(處)19)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오직 대승의 곳곳에서 설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체(體)라고 설명하고, 3종자성(種自性), 즉 첫째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둘째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셋째 원성실자성(圖成實自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의 체라고 설명하고, 유식성(唯識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入所知相]의 체라고 설명하고, 6바라밀을 그것에20) 들어가는 인과의 체라고 설명하고, 보살의 10지(地)를 그 인과의 닦음의 차별의 체라 설명하고, 보살의 율의(律儀)를 수행의 차별 가운데 매우 높은 계[增上戒]의 체라고 설명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21)ㆍ허공장(虛空藏)22) 등의 여러 가지 삼마지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체라 설명하고,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혜[增上慧]의 체라고 설명하고, 무주열반(無住涅槃)23)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果斷]24)의 체라고 설명하고,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첫째 자성신(自性身), 둘째 수용신(受用身), 셋째 변화신(變化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果智]25)의 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설명하는 10처에 의해서 대승은 성문승과 다름이 드러나고 또한 가장 뛰어남이 드러난다. 세존께서는 단지 보살을 위해서만 선설(宣說)26)하신다. 그러므로 대승에 의지한 모든 불세존만이 열 가지 뛰어난 특징에 뛰어난 교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釋】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기 때문에 ‘알아야 할 바[所知]’라고 이름하며, ‘의지처[依]’란 소의(所依)를 말한다. 이 소의라는 것은 능의(能依)의 잡염과 청정의 여러 가지 유위법을 가려내어 취하고 무위를 취하지 않는다. 거기27)에는 소의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란 바로 아뢰야식이다. 이것은 저것28)의 인이기 때문에, 능히 저것을 이끌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29)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알아야 할 바[所知]는 바로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가 되며, 이숙식(異熟識)은 이 알아야 할 바의 성품[性]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다. 이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가 바로 뛰어난 것이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즉 앞에서 설하신 모든 불세존의 말씀은 모든 곳30)에 따라서 전전한다.
017_0162_c_01L‘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이란 알아야 할 바의 자성이다. 이것은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이기 때문이다. 업운(業運)31)에 의지하여 설하면 많은 노다(魯茶)32)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소지(所知)ㆍ소단(所斷)ㆍ소증(所證)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구운(具運)33)에 의지하면 변계소집은 양상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이 없는 무성(無性)을 나타내며 , 원성실성은 그것의 공상(共相)을 나타내며, 의타기성은 그것의 자상[自相]을 나타낸다. 아(我)ㆍ유정(有情)ㆍ대상[義]ㆍ식(識)은 전전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지계(地界) 등을 그 견고함 등으로써 표현하는 주체[能表]의 양상으로 삼는 것과 같이 비록 무이성(無異性)일지라도 양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마치 큰 사부(士夫)의 양상34)을 선설하는 것과 같다. 경부(經部)35) 등의 논사들은 생(生) 등의 상36)들에 대해서 이 인연에 의거한다.
혹은 알아야 할 바[所知]란 바로 양상이다. 혹은 알아야 할 바의 양상 때문에 소지상이라 이름한다. 무이성(無異性)을 설하기 때문에, 무이성과 다름을 설하기 때문에,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이것 또한 이와 같다.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入所知相]’이란 말하자면 이것은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혹은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능히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감[入]’이란 말하자면 현관(現觀)37)하여 알아야 할 바의 양상, 즉 유식성(唯識性)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곧 뛰어나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그것에 들어가는 인과’란 말하자면 유식성을 설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승해행지(勝解行地)38)라고 하는 것이다. 가행(加行)39)을 닦을 때에는 세간의 아직 깨끗하지 않은 바라밀다를 그것에 들어가는 인이라 이름하고, 이미 깨달음에 들어갔을 때에는 출세간의 바라밀다가 청정한 증상의 의요(意樂)40)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들어가는 과(果)라고 이름한다. 저것에 들어가는 인과는 수승하며 저것이 수승하기 때문에 말씀 또한 수승하다. ‘그 인과의 닦음의 차별’이란 말하자면 유식성의 인과이다. 이것을 거듭 닦기 때문에 설명하여 닦음[修]이라고 하며, 분분히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들어가는 인과의 닦음의 차별성은 바로 10지(地)이다. 이것은 뛰어나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017_0163_a_01L곧 여러 지위[地]의 바라밀다의 닦음의 차별에서 뒤의 것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다시 부지런히 수학(修學)하는 것이니, 곧 이것을 의지로 삼아서 3학(學)을 안립하는 것이다. 첫째 ‘매우 높은 계의 수학[增上戒學]’은 말하자면 계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수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계학이라고 설명한다. 곧 여러 지위[地] 가운데에 보살의 율의(律儀)로써 모든 악을 멀리 여의며 유정을 요익하게 하며 모든 선을 거두어들이는 세 가지 깨끗한 계[三種淨戒]이다. 받아 지닌 시라(尸羅)는 과거에 이미 생긴 것과 머무르는 것 등 신(身) 등의 여러 가지 업을 지키고, 조어(調御)41)하는 자와 같이 매우 잘 조복하여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율의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곧 매우 높은 시라에 의지하여 수학하고 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학(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매우 높은 계[增上戒]는 뛰어나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둘째 ‘매우 높은 마음의 수학[增上心學]’은 말하자면 마음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수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심학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의 성품은 바로 허공장(虛空藏) 등의 여러 삼마지이다. 등(等)이란 그 밖에 현호(賢護) 등의 삼마지왕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또한 매우 높은 마음의 수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러 삼마지를 대사(大師)께서는 마음[心]이라고 설하시네. 마음에 의해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짓는바 현상의 업[事業]과 같도다.
017_0163_a_11L“卽諸三摩地, 大師說爲心, 由心彩畫故,
如所作事業.”
셋째 ‘매우 높은 혜의 수학[增上慧學]’은 말하자면 혜(慧)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수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혜학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의 성품은 무분별지(無分別智)이며 모든 희론분별(戲論分別)을 대치한다. 이 가운데 가행의 무분별지는 근본의 의지이며, 바로 이 근본의 무분별지는 후득(後得)의 의지이다. 이와 같은 의지는 이어서 설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계학ㆍ정학ㆍ혜학이 도(道)의 체성이다.
017_0163_b_01L저것의 증과[果]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단멸[斷]이며, 둘째는 지(智)이다.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그것의 증과인 단멸[果斷]’이란 그것의 모든 배움의 증과를 그것의 증과라고 이름한다. 그것의 증과는 곧 끊는 것[斷]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인 단멸[果斷]이라고 이름한다. 이 성품은 객장(客障)42)의 속박을 여의는 것ㆍ진여ㆍ해탈ㆍ무주열반이다. 그것의 적정(寂靜)을 보기 때문에 생사가 곧 열반이 된다. 곧 그것을 연하여도 염착이 없으며 무여의(無餘依) 반열반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이며 이것이 곧 뛰어난 것이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그것의 증과인 지[果智]’란 그것의 모든 배움의 증과를 그것의 증과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그것의 증과는 바로 지(智)이므로 그것의 증과인 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성품은 바로 세 가지 불신(佛身)이다.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으로서 무구(無垢)ㆍ무가애(無罣礙)의 지혜가 있으며 법신의 뜻이 있다. 지금 이것과 저 무분별지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이와 같은 두 가지에는 모든 분별이 모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것의 다스림이 있으면 마땅히 소작(所作)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저것의 결과라면 소작은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으로서 바로 후득지이다. 곧 이 지(智)의 수승한 힘으로 말미암아 여러 수승한 대보살 대중과 함께 불공(不共)의 미묘한 법락을 수용한다. 이와 같은 수용의 일들을 성취하기 때문에 수용신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와 같은 밖을 향한 청정한 지혜[外淸淨智]가 없다면 보살이 짓는 나머지 자량(資糧)은 마땅히 원만하지 않게 된다.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으로서 후득지의 차별이다. 곧 변화하는 주체를 변화신이라고 이름한다. 이 증상력43)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지혜[智]의 차별이다. 말하자면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논을 굴복시키고 모든 보살과 함께 법락을 수용하되 끊어짐이 없으며, 초업(初業)의 모든 보살중(菩薩衆)44)은 모든 성문들이 마땅히 지어야 될 일을 성취한다. 비유하면 안식(眼識)이 여러 가지 색을 분별하여 수용하는 것과 같다. 45) 저 자성신이 만약 없다면 변화신 또한 마땅히 없어야 한다. 이것이 뛰어난 것이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씀 또한 뛰어나다.
017_0163_c_01L‘여기서 설명하는 10처(處)에 의해서’란 말하자면 이것과 나머지 모든 대승에서 라는 뜻이다. ‘처(處)’란 대상[事]이라는 뜻이다. ‘성문승과 다름’이란 저기에서는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뛰어남이 드러난다’란 불과의 도를 최종적으로 선설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단지 보살을 위해서만 선설하신다’란 여기에서 마땅히 보살은 단지 보살을 위해서만 선설한다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의 현현에 의해서 부처님의 허락 하에서 선설하기 때문에 세존의 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십지경(十地經)』 등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앞에서 ‘박가범 앞에서’라고 설한 것이다.
【論】 또한 어떻게 이 열 가지 수승한 특징과 수승한 여래의 말씀에 의해 대승이 진실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드러내고, 성문승의 종성은 대승[大乘性]임을 차단하는가? 이 열 가지는 성문승에게는 일찍이 설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의 곳곳에서만 설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열 가지는 대보리성(大菩提性)을 가장 잘 이끌 수 있다. 이것은 잘 성립하고 수순하며 어긋남이 없고 능히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釋】‘또한 어떻게 이것46) 등에 의해’란 오히려 아직 믿고 이해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힐난을 시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문승에서 6구의(句義)47) 등은 일찍이 아직 설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폐세사(吠世師)48) 등의 논의 곳곳에서 설하는 것을 보았다면 바로 폐세사 등의 논이 진실로 부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017_0164_a_01L앞의 답은 또 다른 이와 같은 비난을 허용하기 때문에 뒤에 소통하여 말하기를 ‘말하자면 이 열 가지는 대보리성을 가장 잘 이끌 수 있다’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또한 크기 때문에 대보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대성(大性)을 깨닫기 때문에 대보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의 대보리는 지단(智斷)49)의 수승을 자상(自相)으로 삼고 설명한 것과 같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는 것이다. 그것의 끊음에 말미암기 때문에 무구와 무가애의 지혜를 획득하게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모두 보리라고 이름한다. ‘가장 잘 이끌 수 있다’란 말하자면 이 열 가지가 능히 얻을 수 있는 성품이며 6구와 혹은 최승50) 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논은 진실로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잘 성립하고’란 말하자면 이와 같은 열 가지는 정량(正量)51)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넓게 결택(決擇)해야 하는 것과 같다. ‘수순하며’라는 말은 능히 대하여 향하고[對向] 능히 따른다는 뜻이다. ‘어긋남이 없고’라는 말은 그것에 허물이 없기 때문에 6구의 등과 같은 삿된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성문승에는 과실이 있기 때문에 불과(佛果)와 서로 어긋난다. ‘여기에 두 게송’이란 말하자면 이미 설한 것과 앞으로 설할 뜻을 읊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이 밖에서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며’란 말하자면 이 열 가지 수승한 교설은 대승의 곳곳에서는 설하는 것을 보아도 그 밖에 소승에서는 일찍이 설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論】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순서로 이 열 가지 도리[十處]를 설하는가?52) 말하자면 보살은 모든 법의 원인[法因]에 대해서 요컨대 먼저 잘 통달하고 바야흐로 연기에 대해서 선교(善巧)를 얻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 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相]을 잘 통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능히 잘 증익과 손감의 두 가지 변(邊)의 과실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017_0164_b_01L다음에 이와 같이 잘 수행한 보살은 마땅히 바르게 잘 취한 양상[所取相]에 통달하고, 모든 장애로부터 마음을 해탈시켜야 한다. 그 다음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에 통달하고 나서 먼저의 가행위(加行位)에서 6바라밀을 증득함으로써 마땅히 다시 매우 높은 의요[增上意樂]를 이루어야 하니, 청정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청정한 의요에 포섭되는 6바라밀다를 10지 가운데 분분히 차별하여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하며, 말하자면 요컨대 3무수대겁(無數大劫)을 경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삼보리(三菩提)의 수학[三學]53)을 마땅히 원만하게 해야 한다. 이미 원만하게 하고 나서 그것의 결과인 열반과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마땅히 현재 동등하게 증득[現等證]해야 하기 때문에, 열 가지 도리를 이와 같이 차례로 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설 가운데 일체의 대승은 모두 구경을 얻는다.
【釋】이것에 의해 대보리에 나아가는 것을 밝히기 위해 다시 순서대로 방편과 필요한 인(因)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요컨대 먼저 인(因)에 대해서 선교를 얻고 나서 비로소 연기에 대해서 마땅히 선교를 얻어야만 한다. 이 인에 의해서 그 과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과는 요컨대 이 인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인의 가르침을 떠나서 그것을 요지하는 것이 아니다. 인이란 바로 아뢰야식이다. 이것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곧 무인(無因)54)과 불평등인(不平等因)55)을 버린다.
그 다음에 연기에서 생겨난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알아야 한다. 증익과 손감의 변(邊)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는 무(無)에서 강제로 있다고 세우기 때문에 증익이라 이름하고, 원인이 없는 유(有)에서 강제로 없다고 피력하기 때문에 손감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증익과 손감을 모두 변(邊)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떨어진다[墜墮]는 뜻이다. 이 두 가지가 전전(展轉)할 때에는 중도를 잃게 된다. 자주 진실관(眞實觀)을 잘 닦음으로 해서 이 두 가지 변을 멀리 여의게 되면 선교다.
변계소집에서는 오직 증익만이 있고 손감이 없다. 모두 무(無)만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유에서 비로소 손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타기에 대해서는 증익이 있지 않다. 체(體)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유(非有)에서 비로소 증익이 있고 또한 손감이 없다. 오직 허망만이 있기 때문이다. 원성실(圓成實)에서는 증익이 없으니 이것은 실유(實有)이기 때문에 오직 손감만이 있으니 곧 이것에 의하기 때문이다.
017_0164_c_01L혹은 다음에 여기에서 ‘능히 잘 증익과 손감의 두 가지 변의 과실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의타기성에 있어서이다. 증익하는 것이 실제로 없는 것은 변계소집성이며 손감하는 것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자씨(慈氏)여, 너는 어찌 생각하는가? 모든 변계소집에서 실제로 있지 않은 성품을 색(色)ㆍ비색(非色)이라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의타기 중에 오직 명상(名想)을 시설한 언설만 있는 성품을 색ㆍ비색이라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원성실 중에 저 공(空)ㆍ무아(無我)의 성품을 색ㆍ비색이라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자씨여, 이 문(門)에 의하기 때문에 응당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모든 변계소집성은 결코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의타기성은 오직 명상을 시설한 언설만이 있을 뿐이며, 모든 원성실은 공ㆍ무아의 성품으로서 진실로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저것에 두 가지 헤아림[數]은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색 등에서 이와 같은 두 가지 변의 과실을 해탈하는 것이다.”
3자성(三自性)에 대해서 선교를 얻고 나서 유식성에 의해 마땅히 알아야 할 양상에 잘 통달해야 한다. ‘들어간다’란 곧 통달하여 증득하는 것이다. 혹은 이것으로 인해 능히 수순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곧 유식성에 수순하는 데에 통달하고 체(體)로써 닦은 바 6바라밀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승의(勝義)에 말미암기 때문에 다시 마땅히 청정한 의요를 증득하게 된다. 마땅히 다시 욕(欲)과 승해(勝解)를 섭수하는 것을 의요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56)는 이때에 수(數)를 보태지는 않지만 증정(證淨)을 섭수하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설한다. 그 다음에 곧 저 10지에서 3학(學)을 부지런히 수학하기 때문에, 3무수겁 동안 자주 닦고 익히기 때문에 마땅히 원만하게 된다.
017_0165_a_01L그 다음에 그것의 증과로써 번뇌장ㆍ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를 영원히 끊고, 무구ㆍ무가애한 일체지지(-切智智)를 마땅히 다시 증득해야 한다. 이와 같이 분별한 순차적인 방편과 필요한 인(因)이 바로 능히 대보리성을 따르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설명한 차례에 의해서 증익하지도 않고 손감하지도 않는 열 가지 도리[十處]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주된 논과 부수적인 논을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성문승의 도가 바로 불승(佛乘)의 도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57) 그 과(果)도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또한 모든 성문승에서 불도(佛道)를 설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고, 모든 보살을 위해서 불도를 널리 설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과 성문승에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師資)58)의 건립은 마땅히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도에 차별이 있음을 설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설하여 대승을 모두 포섭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대승의 강요(綱要)는 달리 설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작도 없는 때로 부터[無始時來]로 계(界)60)가 있으며 모든 법의 평등한 소의[依]라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윤회의 세계[趣]가 있고 또한 열반의 증득도 있네.
017_0165_a_15L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
【釋】이것은 아급마(阿笈摩)61)를 인용하여 아뢰야식이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라고 이름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작도 없는 때[無始時]’라는 것은 처음의 끝[初際]이 없기 때문이다. ‘계(界)’란 인(因)이며 곧 종자이다. 무엇이 인인 종자[因種]인가? 말하자면 모든 법이다. 이것은 오직 염오만이 있고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는 아뢰야식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아뢰야식이 종자가 되는 것과 같이 다문훈습의 소의는 여리작의(如理作意)에 포함되어 사법(似法)ㆍ사의(似義)가 일어나게 되는 것 등이라고 나중에 언급하게 될 것이다.
017_0165_b_01L저 ‘모든 법의 평등한 소의’라고 하는 것은 능히 임지(任持)62)하기 때문이며, 인성(因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히 임지한다는 뜻은 소의의 뜻이며 인성의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소의와 능의의 성품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계(界)라는 말에서 이미 알 수 있으며63) 소의[依]라는 말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윤회의 세계[趣]가 있고 또한 열반의 증득도 있네’란 결택처(決擇處)64)와 같이 마땅히 자세히 분별해야 한다. 말하자면 잡염 등과 나락가(那落迦) 등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을 여의면 모두 유(有)65) 등과 생(生)66) 등을 얻을 수 없다. 잡염이 결국에 그치는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을 떠나면 마땅히 증득할 수 없다.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함[攝藏]은 일체종자식에 의해서 이네 그러므로 아뢰야라고 이름하며 가장 뛰어난 자에게만 나는 열어 보인다네.
017_0165_b_09L『由攝藏諸法, 一切種子識, 故名阿賴耶,
勝者我開示.”
【釋】다시 성인의 말씀에서 설하는 것을 인용하여 아뢰야식을 아뢰야라고 이름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능히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한다’란 소훈(所熏)과 습기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현료(顯了)한 법성을 최고로 간직하는 대(大)67) 등의 뜻과는 같지 않다. 아뢰야식이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저 뜻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다시 ‘일체종자식’을 언급하는 것이다. 일체종자와 함께 생기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轉識)은 서로 연이 되기 때문에 전전하여 거두어 저장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뛰어난[勝]’이라는 것은 바로 현료한 성품이라는 것과 같지 않다. 68) 스스로 드러내서 열세함69)과 구별하기 때문에 다시 ‘가장 뛰어난 자[勝者]에게만 나는 열어 보인다네’라고 설한다. 곧 대보리는 감능(堪能)70)이 있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나머지 열세한 자71)를 제외한 저들을 위해서 열어 보이는 것이다.
017_0165_c_01L【論】이와 같이 우선 아급마의 교증(敎證)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무엇 때문에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하는가? 일체 유생(有生)의 잡염품법(雜染品法)은 여기72)에 섭장되어 과의 성품[果性]이 되기 때문이다73). 또한 곧 이 식은 저것74)이 섭장되어 인성(因性)이 되기 때문이다75).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또는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섭장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에76)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釋】‘일체 유생(有生)’이란 모든 유위(有爲)를 말한다. ‘잡염품법’이란 청정법과 구별되는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법은 잡염의 성품이며, 일체 잡염의 창고는 대치해야 할 대상[所治]이면서 종자의 체성이 섭장된 곳이다. 능히 저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아서 인과의 성품이 된다. 77) 이것은 곧 도리이기 때문에 소의가 될 수 있다. 만약 대치할 대상[所治]이 있는 곳[處]이면 또한 대치할 주체[能治]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섭장되어’란 능히 습기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직 습기만을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 능히 습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과 같다. ‘또는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섭장하여 자아로 삼는다’는 것은 집착하여 취한다[執取]는 의미이다. 【論】또 다음에 이 식을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이름한다. 이에 대한 아급마는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釋】또한 그 밖의 가르침에서 설해진 다른 명칭을 인용하여 아뢰야식을 나타내고 건립하여 매우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매우 깊고’라고 말하는 것은 세간에 총명한 자가 가지고 있는 각혜(覺慧)79)로는 밑바닥 끝까지 궁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매우 미세하며’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성문들은 끝까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문들을 위해서는 이 식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저들은 미세한 일체지지(一切智智)80)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166_a_01L‘일체종자는 폭류(濕流)와 같다네’란 찰나에 끊어지지 않고 전전상속하여 마치 물의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연설하지 않나니’란 저들이 분별하여 아(我)라고 집착할까 두려워 아견(我見)을 품고 있는 자를 위해서는 열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저 부류들은 분별하고 계탁하여 궁생사제(窮生死際)81)를 허용하는가? 행상(行相)의 한 부류82)라서 고쳐지고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論】무슨 까닭에 이 식을 다시 아타나식이라고 설명하는가? 모든 감각기관[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의 자체(自體)가 취하는 의지처 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감각기관은 이것에 의해 집수되어 없어져 버리지 않고 목숨을 다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전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속하여 바로 생을 맺을[結生] 때에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 그러므로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釋】‘모든 감각가관을 집수하기 때문에’ 등이란 소리가 전변하는 인(因)83)을 나타내는 것이다. 능히 안(眼) 등의 감각기관들을 집수함으로써 편안함과 위급함[安危]을 함께 하여 목숨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한다. 그러므로 아타나식(阿陀那識)84)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마땅히 죽은 몸과 같이 곧 흩어지고 무너져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의 자체(自體)85)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등이란 말하자면 모든 것, 즉 하나이거나 많은 것을 소유한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의 성품이다. 만약 색 등의 근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거나 이미 생겨났거나 또는 무색계에서 자체가 생겨난 것을 상속이라고 이름한다. 저것을 섭수하기 때문에 ‘바로 생을 맺는다[結生]’라고 이름한다. 그 생을 받기 때문에, 그리고 정혈(精血)을 합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없으면 한 기간 동안 자체를 집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유하면 실택원(室宅院)이 광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한 기간 자체의 습기가 훈습되는 대상[所熏]이기 때문이다.
017_0166_b_01L【論】이것을 또한 심(心)이라고 이름한다.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를 설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 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86)의 의지처[所依止]의 성품이 되는 것이니, 무간멸식(無間滅識)이 능히 의식을 위해서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 두 번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둘째는 아만(我慢), 셋째는 아애(我愛), 넷째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바로 식87)의 잡염의 의지처가 된다. 식은 또한 저 첫 번째의 것을 의지처로 삼아서 생겨나고 두 번째의 것으로 잡염된다. 대상[境]을 요별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등무간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량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의(意)에는 두 가지 종류가 성립하는 것이다.
【釋】‘이것을 또한 심(心)이라고 이름한다’란 다시 그 밖의 가르침에서 안립한 다른 이름을 인용하여 이것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 ‘염오의’88)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 번뇌인 살가야견89) 등에 의해 염오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가야견’이란 굳게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는 성품을 말한다. 이 세력으로 말미암아 ‘아만’을 일으키고 아와 아소를 믿고 스스로를 높이 들어 올린다. 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다시 아탐(我貪)을 일으키는 것을 ‘아애’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무명을 인으로 삼는다. ‘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무지(無智)이며 밝음[明]에 의해 대치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식의 잡염의 의지처이다. 정(定)ㆍ부정(不定)의 선(善) 등의 위(位)에서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고 항상 현행(現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말하자면 선심이 있을 때도 역시 아를 집착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것을 의지처로 삼아서 생겨나고’라고 하는 것은 등무간멸(等無間滅)의 의(意)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것으로 잡염된다’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의(意)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아 등을 계탁함으로써 능히 잡염되는 것이다. ‘대상[境]을 요별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란 이것은 능히 대상을 취하여 대상과 흡사한 것을 현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식(識)의 명칭들을 풀이한 것이다. ‘등무간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량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의(意)에는 두 가지 종류가 성립하는 것이다’란 이것은 의(意)의 명칭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어원적인 바른 해석[訓釋]을 떠나서는 명칭이 갖는 뜻의 도리를 끝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017_0166_c_01L【論】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말하자면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공무명(不共無明)90)은 곧 있을 수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섯 가지 동법[五同法]91)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識身)은 반드시 안(眼) 등의 구유의(俱有依)92)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게 해석하는 어원[訓釋詞]도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정(無想定)93)과 멸진정(滅盡定)94)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상정은 염오의가 발현되는데 멸진정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선정은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한 기간의 생(生)중에서도 마땅히 염오가 없어야 한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만약 아집과 아만이 없게 된다면 그럴 것이다.
또한 모든 때[一切時]에 말하자면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 가운데 아집이 현행하는 것을 현재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오직 불선심만이 저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아와 아소의 번뇌가 현행하는 것이 있고 선ㆍ무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구유현행(俱有現行)95)을 세우고 상응현행(相應現行)96)을 세우지 않으면 이러한 과실은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게송으로 읊는다.
만약 불공무명(不共無明)과 그리고 다섯 가지 동법(同法)과 바르게 해석하는 어원과 두 가지 선정[定]의 차별이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017_0166_c_15L“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무상(無想)의 생에는 마땅히 아집의 전전함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네. 아집이 항상 모든 종류97)를 따르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니네.
017_0166_c_17L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염오의를 떠나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없고 세 가지는 서로 어긋남을 이룬다네. 98) 이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아집은 마땅히 있지 않아야 하네.
017_0166_c_18L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진실한 의미[眞意]를 마음에 생겨나게 하는 데에 항상 장애가 되며 모든 부분에 항상 현행하는 것을 불공무명이라고 한다네.
017_0166_c_19L眞義心當生, 常能爲障㝵,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017_0167_a_01L 이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99)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색ㆍ무색의 두 가지 번뇌[纏]100)와 같이 그 유부무기성에 포함된다.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가 섭장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 의(意)는 어느 때나 미세하게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釋】바른 이치를 인용하여 염오의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다시 간략하게 직설(直說)101)과 가타(伽吒)를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없다면 불공무명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경우이다. 만약 염오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불공무명이 있을 수 없다. 불공무명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양상을 설명해야 한다. 말하자면 능히 참다운 지혜[眞智]가 생기는 것을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것은 5식(識)에 있다고 설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능히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처소[處]에 대치할 수 있는 주체[能治]가 있으면 이 처소에는 대치할 대상이 있다. 5식에는 저 대치할 수 있는 주체가 없으니 여기에서는 견도(見道)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염오 의식 중에는 있지 않으니 저것에 의해 이것이 마땅히 염오의 성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염오의 의식 중에는 있는 것이 아니니 나머지 번뇌와 항상 상응할 때에는 불공무명이라는 이름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은 저것의 번뇌로 인해서 염오가 된다고 주장하면, 바로 결국 염오의 성품이 되어야만 하고 모든 보시 등의 마음은 마땅히 선(善)이 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것의 번뇌의 양상[相]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주장에서는 선심과 항상 함께 움직여서 저것의 번뇌가 있다고 한다. 곧 한결같이 저것과 상응하며 그 밖의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염오의 의식이 대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염오와 함께 별도의 선심이 능히 대치를 이끌고 능히 대치할 수 있는 주체[能治]가 생기기 때문에 대치할 대상[所治]은 곧 멸한다”라고 말하면 “마땅히 바른 도리이다”라고 한다.
017_0167_b_01L만약 그렇다면 성립된 불공무명 또한 성취되지 않으니, 신견(身見) 등 그 밖의 번뇌와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너의 힐난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저 나머지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저 혹은 나머지 곳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설한다. 비유하면 18불공불법(不共佛法)과 같아서 앞에서 설한 것 같은 그 밖의 번뇌와 상응한다면 그 이름을 성취할 수 없게 되니, 다른 곳에서 세운 것을 관하여 저 과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동법 또한 있을 수 없어서 과실을 이루네’란 이것은 62연(緣)102)으로부터 6식(識)이 전변한다고 주장한 뜻을 타파한다. 안(眼) 등의 5식은 저 의식과 같은 법성[同法性]이 있다. 말하자면 두 가지 연103)으로부터 생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염오의가 만약 없다면 이것과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른바 구생(俱生)의 증상연의(增上緣依)는 별도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안 등의 식은 각각 두 가지 연을 갖고 있는데 모두 식의 성품이다. 이와 같이 식의 성품은 아울러 안 등과 함께 전전하는 별도의 의지가 있고 오직 증상연만이 있고 인연 등은 있지 않다. 이것을 능유(能喩)로 하는 것이며 의식 또한 이와 같다. 104) 마땅히 이와 같이 차별적인 소의가 있어야 한다. 아뢰야식은 비록 의식과 구생하는 소의이지만 그러나 이 별도의 의지가 되는 것을 세워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동의 의지[共依]이기 때문이고 인연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105)
경부에서 주장한 바, 색을 의식과 함께 생하는 별도의 의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성취되지 않으며 도리에 맞지 않는다. 사택분별(思擇分別)106)과 수념분별(隨念分別)에 마땅히 모든 때에 분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여타의 부파107)에서 주장한 바, 가슴 속에 물체[色物]108)를 의식의 별도의 의지라고 하는 것 또한 성취되지 않는다. 설한 것과 같은 과실이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근을 의지하는 여러 가지 식109)과 같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힐난은 마땅히 넓게 결택해야 한다. ‘또한 바르게 해석하는 어원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과실을 이룬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의(意)의 명칭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사량의 성품을 의지하는 것이다. 만약 염오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이것은 어떤 곳에 의지하는가? 6식은 이미 시들어서 의(意)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체가 소멸하여 없기 때문이다.
017_0167_c_01L‘또한 무상정과 멸진정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과실을 이룬다’는 것은 만약 정(定) 가운데 염오의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즉 이것에는 있고 저것에는 없는 것이며110) 무상정은 범부의 상속에 있으며 멸진정은 성인의 상속에 있다. 이러한 차례와 같이 두 가지 선정에 차별의 도리가 성립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상수멸(想受滅) 등과 함께 하는 유식(有識)의 행(行)에는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제4선정에 있는 것과 제일유지(第一有地)111)에 있는 것의 차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리(出離)와 정주(靜住)와 욕(欲)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정(定)에는 차별이 있다. 두 가지의 자상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심(心)과 심법(心法)이 함께 멸하는데 어떻게 차이가 있겠는가? 지금 이것에 대해서 결택한다. 경부의 논사와 대조하면 조금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저 경량부에서 주장한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실제의 대상[實物]으로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 두 가지 정(定)에서 실로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한 기간의 생 중에 아집의 전전함이 없다고 하면 마땅히 과실을 이루게 된다. 무상이라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무상천에 태어나면 심과 심법이 소멸하고 처음 생을 이을 때, 저것은 별안간 생겨나서 이 이후로부터 상속하여 따라서 전전[隨轉]한다. 만약 저것에 염오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 기간 생에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한다. 일찍이 번뇌를 갖춘 이가 있음을 보지 못했다면 한 기간 생 중에는 모두 아집이 없어야 하며 또한 모든 성현은 모두 함께 싫어하기 때문이다. 112)
태어나는 찰나에 의식을 바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113) 아집의 소의는 세력을 끌어당기는 것이기 때문이며114)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아집이 있다고 이름하기 때문에, 경련 등을 일으키는 것115)과 같게 되어서 바른 도리에 맞다. 아집의 소의는 모두 시들어 소멸했기 때문에, 세력을 끌어당기는 것 또한 그 밖의 소의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116) 아집의 습기가 몸속에 있으면서 상속한다고 하는 것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색법이 훈습을 받아들인다는 것117)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감능(堪能)이 없기 때문이다. 118) 또한 경부의 논사들은 오직 색만을 심법이라고 설하지 않는다. 119)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색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과 심법은 반드시 네 가지 연(緣)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017_0168_a_01L만약 별도의 항상 함께 일어나는 마음이 있다고 설하면 아집의 소의는 이에 과실이 없다. 또한 모든 때에 아집이 따르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염오의가 있다고 설하지 않으면, 모든 때에 있어서 대상[義]과 잘 맞지 않는다. 보시 등의 선위(善位)에서도 항상 따라다니는 아집이 있어서 스스로 “나는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한다”라고 말한다. 무명을 떠나지 않고서는 아집이 따라다니니, 의지를 떠나지 않으면 무명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법이기 때문에 이것이 의지하는 대상[所依止]은 염오의를 며나서는 반드시 있을 곳이 없다. 즉 선심은 무명의 의지가 되지 않는다. 바른 도리에 합당한 것은 다음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염오의는 식의 소의이며 이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으면 식의 계박(繫縛)은 끝내 해탈을 이루지 못하네.
017_0168_a_08L“如是染污意, 是識之所依, 此未滅識縛,
終不得解脫.”
‘두 가지가 있을 수 없고’란, 말하자면 불공무명과 다섯 가지 동법(同法)이다. ‘세 가지는 서로 어긋남을 이룬다네’란, 말하자면 바르게 해석한 어원과 두 가지 정의 차별과 무상천에 태어나는 데에 있어서 아집이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는 모두 서로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불공무명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지금은 자세히 풀이하기 위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진실한 의미를 마음에 생겨나게 하는 데에’ 등이란, 말하자면 능히 진실한 의미를 보는 것을 장애하니 저것이 만약 현전에 있으면 이것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에 항상 현행하는 것’이란, 선ㆍ불선ㆍ무기의 위(位) 중에 항상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뜻이다.
017_0168_b_01L【釋】‘심의 체성은 세 번째로 만약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달리 얻을 수 없다’란 의(意)라는 말은 염오의를 설하는 것이며, 무간멸(無間滅)의 의식이라는 말은 곧 여섯 가지 전식(轉識)을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심이라는 말은 저 두 가지를 떠나서 체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체성이 있지 않으면 능전(能詮)120)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소전(所詮)이 다르기 때문에 이문(異門)121)의 의와 식의 두 가지 말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체성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소전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성취함으로’ 등이란 아뢰야식은 심이라는 말의 소전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論】무슨 까닭에 또한 심이라고 설명하는가? 갖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훈습된 종자가 적집(積集)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017_0168_b_04L論曰:何因緣故,亦說名心?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釋】‘갖가지 법으로 말미암아’란 말하자면 갖가지 품류의 전식에 섭수된 모든 법에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훈습된 종자’란 말하자면 소훈(所熏)이 이룬 공능의 차별이다. ‘적집하는 곳’이란 말하자면 잡종의 품류가 그 속에 적집하는 것이다. ‘때문이다’란 곧 문(門)의 뜻, 의지의 뜻이다. 이것은 곧 심이라는 소리가 전변하는 인을 나타내 보인다.
【論】또한 무슨 까닭에 성문승에게는 이 심을 아뢰야식이라고, 아타나식이라고 설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깊고 미세한 경계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들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智]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저들에게 비록 이러한 설을 하지 않아도 지혜[智]를 이루게 되어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설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보살일 경우에는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 설하는 것이다. 만약 이 지혜를 떠나면 일체지지(-切智智)를 증득하기 쉽지 않다.
【釋】‘이것은 깊고 미세한 경계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란 이것은 아뢰야식은 또한 깊고 미세하며 또한 알아야 할 경계[所知境]임을 나타낸 것이다. 깊고 미세하기 때문에 성문들에게는 선설하지 않는다. 저들은 거칠고 얕은 알아야 할 바의 경계에 포함되어 마땅히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깊고 미세한 경계의 지혜는 저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성문들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智]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란 이것은 곧 저들에게는 공능(功能)과 희귀한 원[希願]의 양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017_0168_c_01L‘그러므로 저들에게 비록 이러한 설을 하지 않아도’ 등이란, 말하자면 성문들에게는 비록 그들을 위해서 아뢰야식을 설하지 않아도 단지 거칠고 얕은 색(色) 등의 경계와 고(苦)ㆍ집(集) 등의 성품과 무상 등의 행에 말미암아 바르게 관찰할 때, 곧 능히 영원히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세존께서 계신 곳에 의지하여 범행(梵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거칠고 얕다”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모든 색법의 체상(體相)은 거칠기 때문이다. 수(受) 등의 법들을 연하는 바의 행상[所緣行相]은 분별하기 쉬우니, 그 행상(行相)122)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서로 다르며, 그 상응한 바에 따르는 아뢰야식은 깊고 미세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법도 아직 통달하지 않았고 두루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는 설하지 않는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은 밀의(密意)의 설이다. 별상123)으로써 번뇌를 끊지 않고 총상(總相)124)의 도리로 하여서 모든 번뇌를 각각 따로 끊지 않으며, 혹은 공상(共相),125) 무상(無相) 등의 행을 취하기 때문에126) 아뢰야식을 설하지 않아도 과실이 없다. 127) ‘만약 보살일 경우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한다’란 보살에게 종성(種姓)의 세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능과 희귀한 원의 양상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일체지(一切知)의 성품은 기대하는 곳[所期處]이 달라서 타인의 이익[義利]을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지는 다른 사람의 의요와 수면과 계(界)와 근(根)의 뛰어남ㆍ열악함과 유능(有能)ㆍ무능(無能)과 시분의 차별을 알아서 수순하고 감능함이 없어서 모든 다른 이의 이익을 지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등의 일들은 보살이 구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 아뢰야식을 설하는 것이다.
‘만약 이 지혜[智]를 떠나면’ 등이란 만약 아뢰야식의 지혜를 떠나서는 영원히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義]에 대해서 변계(遍計)하여 저것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무분별지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능히 일체소지(一切所知)의 공상을 증득하는 것은 바로 분별지이며, 변계하는 대상의 자상을 아는 분별은 전전하여 같지 않고 무변(無邊)하기 때문에 반드시 일체에 대해서 증득할 수 없다.
017_0169_a_01L만약 오직 아뢰야식만이 능히 습기를 전변할 수 있는 힘을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상과 유정과 아(我)를 현현하여 전변한다고 안다면, 이때 소취(所取)의 대상은 없다고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또한 능히 능취(能取)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무분별지를 증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득지(後得智)는 관습(串習)128)하는 바에 따라 법성을 통달한다. 일체법의 공상이 나타나게 되므로 진여가 하나의 맛이면서 일체법임을 안다.
1찰나에서도 또한 증득하기 쉽다. 일체경지(一切境智)는 무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설하여 3무수겁을 반드시 경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광대한 자량을 적집하여 마침내 능히 광대하고 수승한 일체종상(-切種相)과 미묘한 과상(果相)을 증득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한 묘한 지혜의 자량은 능히 법무아의 경계를 증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설한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식을 알고 모르는 것에 따라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쉽고 증득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와 같은 종지에 의거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일체 법무아를 아는 자가 아니라면 일체지라 이름할지라도 저들은 비록 일체지(一切智)는 있으나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없는 것이다.
1)성자(聖者)의 군중(群衆)이란 뜻으로 불(佛)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을 말한다.
2)이 경은 본 논이 쓰이는 데 근원이 된 경전이다. 유가행유식학파(瑜伽行唯識學派)에서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을 기원으로서 중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본 논(論)에서는 그 이상으로 이 경이 중시되고 있다. 서(序)의 처음에 언급되는 바와 같이 본 논의 근본은 이 경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본 논의 교리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이 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현장(玄奘) 역(譯)에서는 『아비달마대승경』이라고 되어 있지만 진제(眞諦) 역(譯)에서는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대승의 수다라[大乘修多羅]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정백수(宇井伯壽)의 『섭대승론연구(攝大乘論硏究)』에서는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및 대승수다라(大乘修多羅)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3)범어 bhagavān이나 bhagavat의 음역. 제불통호(諸佛通號)의 하나. 바가바(婆伽婆), 바가법(婆伽梵)이라고도 쓰며, 세존(世尊)ㆍ중우(衆祐)라고 한역한다. 박가범에는 유덕(有德)ㆍ자재ㆍ치성(熾盛)ㆍ단엄(端嚴)ㆍ명칭ㆍ길상ㆍ존귀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역(意譯)하지 않는다. 오종불번(五種不飜)의 하나이다.
4)일정불변(一定不變)하는 사물의 근본으로 현상계의 소의(所依)ㆍ본체(本體)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본체를 체(體)라 하고 그 활동 및 응용을 용(用)이라고 한다. 석(釋)에서는 자성의 작용이라고 풀이한다.
5)『유가사지론』 100권과 같은 광대한 논서를 독파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간결한 약석(略釋)을 저술함을 밝힌다.
6)열 가지 뜻을 말한다.
7)‘함께 요달하기 때문’이란 대승과 소승이 함께 요달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8)‘그 밖의 곳’이란 소승을 말한다.
9)범어에서는 복합어(합성어)를 해석하는 데 여섯 가지 방법, 즉 6합석(合釋)이 있다. 여섯 가지 방법에는 의주석(依主釋)ㆍ상위식(相違釋)ㆍ지업석(持業釋)ㆍ대수석(帶數釋)ㆍ인근석(隣近釋)ㆍ유재석(有財釋)이 있다. 승이기도 하고 대이기도 하다는 것은 동격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6합석 중에서 지업석에 해당한다. 6합석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의주석:범어 tat-puruṣa의 의역(意譯)으로 의사석(依士釋)ㆍ즉사석(卽士釋)이라고도 한다. 복합사(複合詞) 중의 전절(前節) 부분은 명사 또는 명사와 같이 보아야 할 것으로서 이것이 후절(後節) 부분에 대해서 항상 격(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② 상위석:범어 dvandva의 번역. 두 개 이상의 명사를 대등(對等)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열거하는 것이다.③ 지업석:범어 karma-dhāraya의 번역으로 동의석(同依釋)이라고도 한다. 전절의 말이 후절의 말에 대해서 형용사ㆍ부사 또는 동격의 명사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후절의 단어는 항상 명사 또는 형용사이다.④ 대수석:법어 dvigu의 의역. 전절의 말이 수사(數詞)이고 취합(聚合)의 의미를 가진다.⑤ 인근석:범어 avyayībhāva의 의역으로 부사적 복합어이다. 실제로는 달라도 그것에 근접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⑥ 유재석:범어 bahu-vrīhi의 의역으로 다재석(多財釋)이라고도 한다. 복합사의 전체가 형용사의 작용을 하고 있는 경우로 앞에 말한 복합사는 모두 유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10)일곱 가지 대성이란 일반적으로 첫째 경대성(境大性), 둘째 행대성(行大性), 셋째 지대성(智大性), 넷째 정진대성(精進大性), 다섯째 방편선교대성(方便善巧大性), 여섯째 증득대성(證得大性), 일곱째 과대성(果大性)을 말하지만, 석(釋)에서는 보리분ㆍ바리밀다ㆍ학지 등이라고 하여 세 가지만 밝히고 있다.
11)주야팔시(晝夜八時)의 부처님의 설법한 때를 말한다. 또는 8시에 『화엄경』의 8회(會)를 설했는데, 8전성(轉聲)에 나누어 해석하여 팔전팔시(八轉八時)라고도 한다.
12)이것은 앞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보살이 설법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대자대지(大慈大智)의 증상력으로 인해 보살의 인식에서 교상(敎相)을 생기게 한다는 의미이다.
13)악마는 부처님의 원적(怒敵)이므로 마원이라 한다. 또는 사람들의 원한을 사는 원적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14)공삼매(空三味)를 말한다. 공삼매란 모든 법은 다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므로 아(我)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으며, 또한 그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삼매이다.
15)번뇌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16)자(慈) 등이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말한다.
17)『십지경』을 예로 든 것은 금강장보살이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을 받아서 부처님 앞에서 10지를 설했기 때문이다.
18)여기서 대사(大師)는 위대하신 스승이신 불세존을 가리킨다.
19)열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 즉 위에서 밝힌 열 가지 수승한 특징을 말한다.
20)유식에 들어감을 가리킨다.
21)범어 śūraṁgama의 음사어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 번역한다. 건상(健相)ㆍ건 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意譯)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을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22)4무색정(無色定) 가운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을 말한다. 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23)무주처열반ㆍ무주상열반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열반(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상열반) 가운데 최상의 열반이다. 부처님께서는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으시고 대비(大悲)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으신다.
24)증과인 단멸[果斷]은 열반을 가리킨다.
25)열반을 과단(果斷:斷果)이라 하는 데 대해서 보리(菩提)를 이렇게 부른다.
26)교법을 연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27)무위를 말한다.
28)능의(能依)의 잡염과 청성의 여러 가지 유위법.
29)인이 되기 때문에 잡념과 상응하고 이끌기 때문에 청정과 상응한다는 뜻이다.
30)‘모든 곳’이란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뿐만 아니라 나머지 아홉 처(處)도 이러한 도리가 해당함을 말하는 것이다.
31)범어의 업격, 즉 목적격을 말한다. 알아야 할 것[智]의 목적격으로서의 상(相)을 소지(所知)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32)후접자(後接字)를 말하고 대성(大聲)이라 풀이한다.
33)범어의 어격(語格)을 나타낸다. 범어에 있어서 어격은 작구(作具)나 능작자(能作者)를 드러낸다. 여기에서는 소상(所相)으로서의 아뢰야식을 ‘알아야 할’이라는 동사의 구격으로서 해석해서 3성(性)을 배대(配對)한다.
34)불타의 32상을 설명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의 양상에 대한 예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35)경량부를 말한다.
36)생(生)ㆍ주(住)ㆍ이(異) 멸(滅)의 유위의 4상(相)을 말하다.
37)범어 abhisamaya의 번역. 현전(現前)에서 직접 명료하게 관하는 것. 구사종(多舍宗)에는 견도(見道)의 위(位)에 있어서 번뇌를 여읜 지혜인 무루지(無漏智)를 가지고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하는 것. 자세히 말하면 성제(聖諦)의 현관(現觀)이라 한다.
38)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回向)을 말한다.
39)범어 prayoga의 번역이며, 공용(功用)을 더하여 행한다는 뜻이다. 정행(正行)에 대한 준비가 되는 수행으로서 가행에 의해 얻어지는 것을 가행득(加行得)이라 하고, 가행에 의해 행해진 선을 가행선(加行善)이라 부른다. 이것은 둘 다 생득(生得: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말이다.
40)범어 asaya의 번역. 아세야(阿世耶)라 음역(音譯)한다. 휴식처(休息處)ㆍ생처(生處)ㆍ사의(思意)ㆍ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의요(意樂)ㆍ의욕(意慾)ㆍ지원(志願)이라고 한역(漢譯)한다.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하는 생각이다.
41)조복제어(調伏制御)의 뜻. 중생의 탐(貪)ㆍ진(瞋)ㆍ치(痴)의 3업(業)을 조복하여 일체의 나쁜 행위를 멸제(滅除)하므로 바르게 인도(引導)함을 뜻하는 말. 또한 조어장부(調御丈夫)라 할 때는 부처님의 10호 중의 하나이다.
42)객진번뇌(客塵煩惱)를 말한다.
43)부처님의 큰 지혜와 대비를 말한다.
44)초업(初業)의 모든 보살중이란 초지에 들어간 보살을 말한다.
45)이 문구는 자성신과 변화신을 비유하는 것이다. 안식은 자성신을 의미하고, 여러 가지 색은 변화신을 의미한다.
46)열 가지 수승한 특징에 수승한 여래의 말씀을 생략한 것이다.
47)실(實)ㆍ덕(德)ㆍ업(業)ㆍ동(同)ㆍ이(異)ㆍ화합(和合)의 여섯 가지 범주를 말한다. 6구의는 주로 인도의 바이셰시카 학파에서 조직하였던 교리이다.
48)인도의 육파철학 중에 vaiséṣisk 학파를 말한다.
49)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가리킨다.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지덕이라 하며, 번뇌를 끊어버리는 것을 단덕이라 한다. 곧 보리와 열반을 의미한다.
50)인도의 육파철학 중 수론파(數論派)가 주장하는 2원론 중의 자성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51)시비(是非)를 판정하는 것을 양(量)이라 하고 이 양에 그릇됨이 없다는 뜻이 정(正)이다. 그러므로 정량은 바른 인식의 척도라는 뜻이다.
52)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다(第2 十義次第章).
53)국역일체경에는 3보살로 되어 있으며, 범어본에는 trayaśīkṣā로 되어 있다. 범어본을 참고하면 3학(學)으로 번역해야 한다.
54)모든 법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무인론(無因論)을 말한다.
55)모든 법은 조물주인 자재천(自在天)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56)욕과 승해를 말한다.
57)성문승의 도와 불승의 도가 같다면 이라는 뜻이다.
58)스승과 제자를 말한다.
59)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다(第3 衆名章).
60)범어의 dhātu로서 여기서는 세계(世界)ㆍ삼계(三界)의 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역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원인으로서 기인(基因)을 의미한다. 6계(界)ㆍ18계(界)라고 하는 의미와 상통한다.
61)아함을 말한다.
62)범어 ādhāna의 번역으로 맡아 있는 것을 뜻한다.
63)게송의 제1구의 ‘계(界)’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며 제2구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64)『유가론』의 「결택분」을 말한다.
65)12인연 중의 유를 말한다.
66)생로병사의 과보를 말한다.
67)현료(顯了)한 법성을 최고로 간직하는 대(大) 등이란 수론(數論)학파에서 주장하는 설이다. 즉 자성으로부터 대(大:mahat)를 내고 대로부터 아집인 아만(ahaṃkāra)을 낸다. 다시 이 아만으로부터 지ㆍ수ㆍ화ㆍ풍ㆍ공의 5대를 내는데 이상의 8요소는 다른 것을 출생하므로 근본자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색ㆍ성 향ㆍ미ㆍ촉의 5유(有)와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지근(知根)과 어(語)ㆍ수ㆍ족ㆍ생식기ㆍ비세기의 5작근(作根)과 의근이 나타난다고 한다.
68)수론파에서 주장하는 25제(諦)의 내용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69)수론파의 주장이 열세하다는 것이다.
70)일을 잘 감당할 만한 능력 또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71)외도를 의미한다.
72)아뢰야식을 말한다.
73)제8식의 3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자상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能藏ㆍ所藏ㆍ執藏] 가운데 능장을 해석한다.
74)잡염품법을 의미한다.
75)소장(所藏)의 의미이다.
76)집장(執藏)의 의미이다. 제7식이 제8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함을 말한다.
77)청정법은 능히 잡염법을 대치하기 때문에 염(染)과 정(淨)은 서로 수순하여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즉 인이 되면서 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법도 이 식을 소의로 삼는다.
78)이 게송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아뢰야식의 존재에 대한 제3교증(敎證)으로 인용하고 있다.
79)사고하여 분별하는 의식(意識)의 지력(智力)을 의미한다.
80)불지(佛智)를 의미한다. 일체지(-切智)는 성문과 연각에게도 있는 지혜이지만 일체지지는 일체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불지에만 있다.
81)생사의 제(際)를 궁구하여 일관하는 실아(實我)의 견(見)을 말한다. 이 문구는 아집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82)‘행상의 한 부류’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은 전변하고 바뀌는 것이 없고 한 부류로 상속하여 고정된 아(我)라고 보는 주장을 말한다.
83)‘소리가 전변하는 인(因)’이란 아타나식이라 하는 명칭을 다시 세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84)집지식(執持識)이라고도 한다. 아타나는 범어 ādāna의 음사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이 식의 힘이 능히 선악의 업인(業因)과 유정의 신체를 꽉 잡아 유지하여 무너지지 않게 하므로 집지식이라고 번역한다.
85)본체(本體)를 의미한다.
86)범어 samanantara-pratyaya의 번역으로 4연 가운데 하나. 심ㆍ심소가 전법(前念)에서 후념(後念)으로 옮겨 변할 때, 전념에 없어진 마음이 길을 열어 뒤에 생기는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 원인이 됨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두 마음이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하지 않으므로 전념이 같은 식의 영역에서 떠나서 그 위치를 주지 않으면 후념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에 전념과 후념의 심ㆍ심소의 수는 전후가 평등하여 하나이므로 등(等)이라고 하고 후념은 전념과의 사이에 다른 마음이 끼어들지 않고 곧바로 생기므로 무간(無間)이라 한다. 이 등무간연은 심법에만 국한되고 다른 법에는 통하지 않는다. 진제 역 『섭대승론석」에서는 등무간연을 차제연(次第緣)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직전의 식이 직후의 식에 대한 등무간연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특히 이것을 개도의(開導依)라고 부른다.
87)전6식을 말한다.
88)염오의에 대하여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다른 식들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구유의(俱有依)라고 보고 이것은 제6의식 및 제8식이 생기는 기반이 되며 또한 전5식에 대해서는 그 염오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89)살가야견(薩迦耶見)은 범어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하며 신견(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제7염오말나식이 제8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고 집착함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과 아애(我愛)를 일으킨다.
90)범어 aveṇikyavidyā로 진제 역에서는 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 번역한다. 독두무명(獨頭無明)이라고도 한다. 홀로 일어나는 무명을 말한다. 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91)제6의식과 전5식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5동법은 5식을 의미한다.
92)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된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93)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다.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인데,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한다.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으며,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94)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다. 무색계의 제4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95)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 하는 아집을 의미한다.
96)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이다.
97)선ㆍ불선ㆍ무기를 말한다.
98)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99)유부무기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을 말한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된다.
100)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번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01)게송에 대한 장행(長行)을 의미한다.
102)6식이 근경(根境)의 두 가지 연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103)구유의 (俱有依)와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104)전5식은 가자의 근을 별도의 구유의로 삼아서 생기하는 것을 유(喩)라 하고 제6의식도 또한 별도의 소의가 있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105)공동의 의지[共依]이기 때문이란 아뢰야식은 의식의 소의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5식의 소의도 되기 때문에 공동의 의지라고 하는 것이다. 인연의 성품 때문이란 네 가지 인연 가운데 인연으로서 아뢰야식만이 모든 법의 친인연이 된다는 뜻이다.
106)계탁분별(計度分別)을 말한다. 즉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에 걸쳐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일들을 미루어 상상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107)상좌부를 말한다.
108)몸속에 있는 심장을 의미한다.
109)5식을 말한다.
110)이것에는 있고 저것에는 없다는 것은 무상정에는 염오의가 있고 멸진정에는 염오의가 없다는 뜻이다.
111)무색계의 제4천(第四天)을 말한다.
112)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도 모든 성현들은 가책하여 싫어하는데 이것은 그곳이 진실한 해탈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천은 아집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113)무상천에 태어나는 찰나에 아집의 근본이 되는 의식이 바로 일어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다.
114)아집의 소의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뒤[後]를 끌어당기게 되면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지라도 간헐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15)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란 경련이 일어나서 한때 의식불명인 상태를 말한다.
116)앞의 주장을 잘못되었다고 타파하는 것이다.
117)색법이 훈습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아집에 습기가 있다고 하는 주장을 타파한다. 무상천은 무의식이면서 육체의 습기를 상속한다고 하면 곧 색법(육체)에 훈습을 받는 것이 되어서 훈습의 도리에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118)감능이 없다는 것은 색법에는 훈습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119)경량부의 논사들은 색과 심이 서로 훈습한다는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유식종에서는 7전식(轉識)의 현행(現行)을 능훈법(能熏法)이라 하고, 제8아뢰야식을 종자가 저장되어 있는 소훈처(所熏處)라고 한다.
120)전(詮)은 나타내는 것이며 어구(語句)ㆍ문장ㆍ교법 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이에 따라 나타나는 의의와 내용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121)문파(門派)를 달리하는 것으로 다른 종이나 다른 파를 의미한다.
122)심식(心識)이 작용하는 상태를 말한다.
123)특수한 상(相)을 의미한다.
124)보편의 상을 의미한다. 즉 생공진여(生空眞如)를 말한다.
125)공통의 상을 의미한다.
126)소승은 4제(諦)를 무상 등으로 관하며 고제(苦諦) 가운데 아뢰야식이 포함되기 때문에 특별히 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를 공상에 의하여 아뢰야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127)그들을 위해서 아뢰야식을 설하지 않는 것은 과실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28)관습(串習)한다는 것은 무분별지를 거듭 닦고 익히는 힘에 의해서 후득지가 생겨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