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189_b_01L
섭대승론석 제4권
017_0189_b_01L攝大乘論釋卷第四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017_0189_b_02L 無性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017_0189_b_04L所知相分第三之一

【論】이미 알아야 할 의지처[所知依]를 설하였다. 알아야 할 양상[所知相]은 또한 어떻게 보아야만 하는가?1) 이것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둘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며,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017_0189_b_05L論曰:已說所知依,所知相,復云何應見?此略有三種:一依他起相`二遍計所執相`三圓成實相.
【釋】‘이미 알아야 할 의지처를 설하였다’란 다시 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란 곧 알아야 할 양상이다.
‘간략하게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라는 것은 일체법에는 반드시 마땅히 알아야할 것과 마땅히 끊어야 할 것과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의타기상’이란 말하자면 업과 번뇌와 소취와 능취와 변계의 수념(隨念)’2)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어떤 표현에 의해서 알 수 있는가? 말하자면 의타기상이다.
‘변계소집상’이란 영원히 양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영원히 양상이 없다는 것은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것[遍計所執]이며, 소취와 능취의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의 유성(有性)의 소상(所相)3)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을 가히 소상(所相)이라고 하는가?
017_0189_b_08L釋曰:已說所知依者,謂不復當說.此者,此所知相.略有三種者,謂一切法要有所應知`所應斷`所應證差別故.依他起相者,謂依業煩惱,所取`能取,遍計隨合他,而得起故.如是相者,何所表知?謂依他起相.遍計所執相者,謂永無相.永無相者,是遍計所執,所取`能取,補特伽羅,及法有性之所相故.云何非有可爲所相?
017_0189_c_01L말하자면 이와 같이 분별하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 즉 “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지 않으며, 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실제로 있는 것을 실제로 있다고 알고,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라고 안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원성실상’이란 말하자면 저 변계소집의 소취와 능취의 자아와 법의 무성(無性)의 성품이다. 저것4)을 척도[量]로 삼아서 대상[境]의 성품을 알고 저것에 대해서 두루 알아 비로소 요별(了別)할 수 있으면 변계소집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 어긋남[相違]이 있는 성품이고, 대상[境]이 되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017_0189_b_17L謂卽如是而分別故.由薄伽梵說如是言:乃至實有,不知實有,乃至非有,不知非有是實有,知爲實有,若非實有,知非實有.圓成實相者,謂卽於彼遍計所執,所取`能取,或我或法,無性之性,用彼爲量所了境性.於彼遍知,方能了別,遍計所執,決定非有,有相違性故`非爲境性故.
【論】여기에서 의타기상5)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아뢰야식을 종자로 하는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섭수되는 모든 식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인가? 말하자면 신식(身識)6)ㆍ신자식(身者識)7)ㆍ수자식(受者識)8),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9) 과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10)ㆍ세식(世識)11)ㆍ수식(數識)12)ㆍ처식(處識)13)ㆍ언설식(言說識)14)ㆍ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15)ㆍ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16)이다.
이 중에서 신식ㆍ신자식ㆍ수자식ㆍ그 수용되는 식ㆍ그 수용하는 식ㆍ세식ㆍ수식ㆍ처식ㆍ언설식은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자타차별식은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선취악취의 생사식은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017_0189_c_03L論曰:此中何者依他起相?謂阿賴耶識爲種子,虛妄分別,所攝諸識.此復云何?謂身`身者`受者識`彼所受識`彼能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自他差別識`善趣惡趣死生識.此中若身`身者`受者識`彼所受識`彼能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此由名言熏習種子.若自他差別識,此由我見熏習種子.若善趣惡趣死生識,此由有支熏習種子.
이 여러 가지 식으로 말미암아 일체 계[三界]와 취[六趣]의 잡염에 섭수된 의타기상의 허망분별이 모두 현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식은 다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하는 것이며 오직 식[唯識]만을 성품으로 삼는다.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며 진실하지 않은 대상[義]이 현현하는 의지처[所依]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변계소집상17)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성실상18)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곧 저 의타기상에서 대상과 흡사한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데에 의거하는 성품이다.
017_0189_c_13L由此諸識,一切界趣,雜染所攝,依他起相,虛妄分別,皆得顯現.如此諸識,皆是虛妄分別所攝,唯識爲性,是無所有,非眞實義,顯現所依,如是名爲依他起相.此中何者,遍計所執相?謂於無義,唯有識中,似義顯現.此中何者,圓成實相?謂卽於彼,依他起相,由似義相永無有性.
017_0190_a_01L【釋】‘말하자면 신식과 신자식과 수자식’이란 뒤에 설명된 것과 같다. 안(眼) 등 여섯 가지의 내계(內界)19)를 성품으로 삼는다. 20) 그 상응하는 바대로 안 등의 5식의 소의인 의계(意界)를 신자식이라 이름하고, 제6의식의 소의인 의계를 수자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이란 뒤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이, 색 등의 여섯 가지 외계(外界)이다.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이란 뒤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이 곧 6식계(識界)이다.
‘세식’이란 말하자면 3시(時)21)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식’이란 말하자면 하나[一] 등 산수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017_0189_c_20L釋曰:謂身`身者`受者識者,如後當說,眼等六內界爲性.如其所應,眼等五識,所依意界,名身者識,第六意識,所依意界,名受者識,彼所受識者,如後當說,是色等六外界,彼能受識者,如後當說,是六識界.世識者,謂似三時影現.數識者,謂似一等算數影現.
‘처식’이란 말하자면 마을과 동산 등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2)
‘언설식’이란 말하자면 견문각지(見聞覺知)23)의 언설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타차별식’이란 말하자면 신 등의 식이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상속하고, 아와 아소의 집착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어서 타(他)와 타소(他所) 등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017_0190_a_04L識者,謂似聚落園等影現.言說識者,謂似見聞覺知,言說影現.自他差別識者,謂身等識,我`我所執,相續不斷,執我我所`他他所等,有差別故.
‘선취악취의 생사식’이란 천ㆍ인 및 나락가(捺落迦)ㆍ방생ㆍ아귀의 생사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신식ㆍ 신자식 등 내지 언설식은 즉 명언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며’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저 신식 등은 모두 명언훈습종자에 의해서 식이 변현하는 것으로써 다른 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타차별식은 즉 아견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며’란, 말하자면 염오의의 아견훈습을 원인으로 삼아 변현한 것이다.
또한 ‘선취악취의 생사식은 즉 유지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다’라는 것은 유지훈습을 원인으로 삼아서 변현하는 것이다.
017_0190_a_08L善趣惡趣死生識者,謂似天`人及捺落迦`傍生`餓鬼死生影現.此中若身`身者等,乃至言說識,此由名言熏習種子者,謂彼身等,皆由名言熏習種子,識所變現,無別事故.若自他差別識,此由我見熏習種子者,謂染污意,我見熏習,爲因變現.若善趣惡趣死生識,此由有支熏習種子者,謂由有支熏習,爲因變現.
017_0190_b_01L‘이와 같이 모든 식은 다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하는 것이며’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신식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소취ㆍ능취의 허망분별에 의해 안립된 것을 그 성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오직 식만을 성품으로 삼는다’란, 삿된 분별에 의해서 2분(分)24)이 현현할지라도 실제로는 오직 식만이 있다는 것이다. 선 등의 법에서는 비록 삿된 집착이 없을지라도 연기력 때문에 2분이 현현하지만 이것 또한 오직 식일 뿐이다.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며 진실하지 않은 대상[義]이 현현하는 의지처[所依]이다’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은 소취의 색 등이며, 진실하지 않다고 이름하는 것은 능취의 식 등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변계소집이며, 대상[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허망분별에 의해서 섭수되는 여러 가지 식은 바로 이 두 가지가 현현하는 인연이 되기 때문에 ‘의지처’라고 이름한다.
017_0190_a_17L如此諸識,皆是虛妄分別所攝者,如前所說,身等諸識,所取`能取,虛妄分別,安立爲性.唯識爲性者,由邪分別,二分顯現,實唯是識.善等法中,雖無邪執,緣起力故,二分顯現,亦唯是識,是無所有,非眞實義顯現.所依者,所取色等,名無所有,能取識等,名非眞實,此二皆是遍計所執,竝名爲義.虛妄分別,所攝諸識,是此二種,顯現因緣,故名所依.
‘이와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란 위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아뢰야식을 종자로 삼는 등을 모두 설하여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
‘말하자면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다’란 실제로는 소취와 능취의 대상은 없고 오직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된 여러 가지 식만이 있는 가운데에서 두루 계탁하여 취한 것[遍計所取]은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곧 저 의타기상에서 대상과 흡사한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데에 의거하는 성품이다’란, 말하자면 연기의 심(心)과 심법(心法)에서 현현되는 영상가운데 횡계(橫計)25)의 양상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이다. 이것을 바로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오직 식만을 성품으로 삼음을 모두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전도하고 횡계하여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모두 변계소집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의타기의 상(上)에 변계소집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게 되는 진여실성을 모두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90_b_03L如是名爲依他起相者,如上所辨,阿賴耶識,爲種子等,皆說名爲依他起相.謂於無義,唯有識中,似義顯現者,實無所取及能取義,唯有虛妄分別所攝.種種識中,遍計所執,似義顯現.謂卽於彼依他起相,由似義相,永無有性者,謂於緣起心及心法,所現影中,由撗計相,永無所顯,眞如實性,此卽名爲圓成實相.又一切法,從因緣生,唯識爲性,當知皆名依他起相.顚倒撗計,似義顯現,當知皆名遍計所執相.依他起上遍計所執,永無所顯眞如實性,當知皆名圓成實相.
비유하면 사슴이 갈증을 느껴서 자신의 상속력으로써 물과 흡사한 소취와 능취를 안립하여 삿되게 변계하는 성품과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횡계는 실제로 있어서 물과 같은 현상을 현현하는 것을 변계소집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이와 같이 사슴이 갈증 나는 현상 중에 횡계의 물의 형상26)은 결국에는 그 성품이 없음을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변계소집상은 곧 변계소집의 자성(自性)이며, 의타기상은 곧 의타기의 자성이며 또한 분별의 자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원성실상은 원성실의 자성이며 또한 법성의 자성이라고도 이름한다.
017_0190_b_16L譬如鹿愛自相續力,安立似水所取`能取,邪遍計性,當知名爲依他起相.撗計實有,水事顯現,當知名爲遍計所執相.卽於如是鹿愛事中,撗計水相,畢竟無性,當知是名圓成實相.又遍計所執相,卽是遍計所執自性,依他起相,卽是依他起自性,亦名分別自性,圓成實相,卽是圓成實自性,亦名法性自性
017_0190_c_01L 이와 갈은 세 가지는 즉 마땅히 알아야 할 것과 마땅히 끊어야 할 것과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이라는 세 가지 법으로써 잘 설명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서도 또한 설하기를 “부처님께서 자씨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이런 저런 행상(行相)의 현상에 대하여 두루 계탁하여 색(色)이라 하고, 수(受)라 하고, 상(想)이라 하고, 행(行)이라 하고, 식 (識)이라 하고 내지 일체 불법의 의지라고 한다. 명상(名想)으로 시설하고 언설로써 두루 계탁하여 모든 색의 자성 내지 일체 불법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이를 변계소집의 색 내지 변계소집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
017_0190_c_01L是三種,卽是宣說,應知`應斷`應證三法.如『大般若波羅蜜多經』中亦說,佛告慈氏:若於彼彼行相事中,遍計爲色`爲受`爲想`爲行`爲識,乃至爲一切佛法依止,名想施設,言說遍計.以爲諸色自性,乃至一切佛法自性,是名遍計所執色,乃至遍計所執一切佛法.
만약 다시 저 행상의 현상에 대해서 오직 분별 법성만이 있다고 안립하고, 분별을 연(緣)으로 삼아서 모든 희론을 일으키고 짐짓 명상을 세워서 언설을 시설하여 이것을 색이라 한다고 말하며 내지 일체 불법이라 한다고 말한다면, 이를 분별의 색 내지 분별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든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든 간에 법성은 안립하는 것이고 법계는 안립하는 것이다. 저 변계소집의 색에 의하기 때문에 이 분별의 색은 어느 때나 항상 진여의 성품이며 무자성의 성품이며 법무아의 성품이며 실제의 성품이니, 이를 법성의 색이라고 이름한다. 나아가 저것의 변계소집의 일체 불법에 말미암기 때문에 이 분별의 일체 불법은 어느 때나 늘……이를 법성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017_0190_c_09L若復於彼行相事中,唯有分別,法性安立,分別爲緣,起諸戲論,假立名想,施設言說,謂之爲色,乃至謂爲一切佛法,是名分別色,乃至分別一切佛法.若諸如來,出現於世,若不出世,法性安立`法界安立.由彼遍計所執色故,此分別色,於常常時,於恒恒時,是眞如性`,無自性性`法無我性`實際之性,是名法性色,乃至由彼遍計所執,一切佛法故.此分別一切佛法,於常常時,於恒恒時,乃至是名法性一切佛法.廣說如經.
자세한 것은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論】이 중에 신식ㆍ신자식ㆍ수자식은 안계 등의 여섯 가지 내계(內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은 즉 색계 등의 여섯 가지 외계(外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은 즉 안식계 등의 여섯 가지 식계(識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나머지 여러 가지 식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의 차별임을 알아야 한다.
017_0190_c_20L論曰:此中身`身者`受者識,應知卽是眼等六內界.彼所受識,應知卽是色等六外界.彼能受識,應知卽是眼等六識界.其餘諸識,應知是此諸識差別.
017_0191_a_01L【釋】‘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이란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신식[身] 등을 처음으로 하고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차별’이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여러 식에는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유위(有爲)의 식 중에는 모두 다 과거의 행(行)과 현재의 행과 미래의 행이라는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3세(世)27)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식에는 모두 하나 등28)의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숫자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수용되는 식[所受識]에서는 상ㆍ하 등의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장소[處]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나머지 부류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91_a_01L釋曰:此諸識者,謂如前說,身等爲初`能受爲後.言差別者,是此諸識,差別性故,謂卽於此有爲識中,皆有已行`現行`當行差別性故,依之建立世影現識.於此諸識,皆有一等,差別性故,依之建立數影現識.於所受識,有上下等,差別性故,依之建立處影現識.餘類應知.

【論】또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은 모두 다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고 모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비유로 하여 나타내 보이는가? 꿈 등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 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꿈속에서는 모두 그 대상이 없고 홀로 식만이 있는 것과 같다. 갖가지 색ㆍ성ㆍ향ㆍ미ㆍ촉과 집과 숲과 땅과 산 등이 대상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날지라도 이 중에서는 모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유가 나타내는 것에 의해서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오직 식만이 있다고 마땅히 이에 따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말에 의해서 또한 마술의 속임, 사슴의 목마름, 그림자와 빛 등의 비유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91_a_09L論曰:又此諸識,皆唯有識,都無義故.此中以何,爲喩顯示?應知夢等爲喩顯示,謂如夢中,都無其義,獨唯有識.雖種種色`聲`香`味`觸`舍`林`地`山似義影現,而於此中,都無有義.由此喩顯,應隨了知,一切時,處皆唯有識.由此等言,應知復有幻誑`鹿愛`翳眩等喩.
만약 깨어났을 때에도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모두 꿈 등과 같이 오직 식만이 있다면, 꿈에서 깨어나 곧 꿈에서는 모두 다 식만이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 깨어있을 때에는 어째서 이와 같이 전전하지 않는가?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이 있을 때 또한 이와 같이 전전한다. 꿈속에 있을 때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전전하지 않지만 꿈에서 깨었을 때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이 곧 전전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이 전전하지 않으나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으면 이와 같은 깨달음은 곧바로 전전한다.
017_0191_a_16L若於覺時,一切時處,皆如夢等,唯有識者,如從夢覺,便覺夢中,皆唯有識,覺時,何故不如是轉?眞智覺時,亦如是轉,如在夢中,此覺不轉,從夢覺時,此覺乃轉.如是未得眞智覺時,此覺不轉,得眞智覺,此覺乃轉.
017_0191_b_01L【釋】일체는 오직 식만이 있고 모든 대상은 있지 않다는 것을 꿈 등의 비유로써 현시하는 것은 공동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꿈과 같다’ 등은 그 문장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017_0191_a_22L釋曰:一切唯識,都無有義.擧夢等喩,以顯示者,共成立故.如夢中等,其文易了,無勞重釋.
【論】그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자가 있으면 유식에 대해서 어떻게 미루어 알 수 있겠는가? 경전의 가르침[敎]과 바른 이치[理]에 의거하여 마땅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박가범께서 “이와 같은 삼계(三界)는 모두 오직 마음뿐[唯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박가범께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 말하자면 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씨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모든 삼마지29)에서 행하여지는[所行] 저 영상은 이 마음과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까?’
017_0191_b_02L論曰:其有未得眞智覺者,於唯識中,云何比知?由教及理,應可比知.此中教者,如『十地經』薄伽梵說:如是三界,皆唯有心.又薄伽梵『解深密經』亦如是說.謂彼經中,慈氏菩薩,問世尊言:諸三摩地所行影像,彼與此心,當言有異`當言無異?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대답하셨다.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 영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고 나는 식의 인식대상[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이 곧 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다시 이 마음을 취합니까?’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少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즉 이 마음이 이와 같이 생길 때에는 즉 이와 같은 영상이 현현함이 있는 것이다. 질(質)을 연으로 삼아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을 나는 지금 영상을 본다고 말하고, 질(質)을 떠나서 별도로 보이는 영상의 현현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이와 같이 생길 때 모습[相]과 흡사하면서도 다르게 보이는 영상이 현현한다.’”
017_0191_b_09L佛告慈氏:當言無異.何以故?由彼影像,唯是識故,我說,識所緣,唯識所現故.世尊!若三摩地所行影像,卽與此心,無有異者,云何此心,還取此心?慈氏!無有少法,能取少法.然卽此心,如是生時,卽有如是影像顯現.如質爲緣,還見本質,而謂我今見於影像,及謂離質,別有所見影像顯現.此心亦爾,如是生時,相似有異所見影現.
017_0191_c_01L곧 이러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른 이치 또한 현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의 마음[定心]에서 관하여 보는 바에 따른 모든 검푸름 등의 알아야 할 바의 영상에는 모든 특별한 검푸름 등의 현상이 없으며 단지 자신의 마음을 볼 뿐이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보살은 그 모든 식에 대해서 모두 오직 식만이 있고 경계는 있지 않다고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검푸른 모습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가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듣고 생각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억지식도 또한 과거를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현현하게 되는 영상은 오직 식만이 성립된다. 이와 같은 비량(比量)에 의해서 보살은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유식에 대해서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만 한다.
017_0191_b_18L卽由此教,理亦顯現.所以者何?於定心中,隨所觀見,諸靑瘀等,所知影像,一切無別,靑瘀等事,但見自心.由此道理,菩薩於其一切識中,應可比知,皆唯有識,無有境界.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見所緣境現前住故.聞思所成二憶持識,亦以過去,爲所緣故,所現影像,得成唯識.由此比量,菩薩雖未得眞智覺,於唯識中,應可比知.
【釋】‘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이치에 의거하여’란 지교량(至敎量)30)에 말미암고, 비량(比量)31)에 말미암아서 아직 유식(唯識)의 참다운 지혜[眞智]를 증득하지 않았을지라도 오직 식만이 있고 인식대상[境]은 없다는 것을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십지경』’이란 즉 저 경에서는 보살의 열 가지 지위[地]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십지 행상(十地 行相)의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32)을 안립하고 식이 변환하는 것을 취집하여 체로 삼는다. 말하자면 저 성자, 금강장보살33)의 식에 의해 변현된 영상을 증상연으로 삼아서, 듣는 자의 몸속에 있는 식의 영상이 저 법문과 흡사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지금에 전래된 것을 설하여 경전의 가르침[敎]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1_c_04L釋曰:由教及理者,由至教量,及由比量,雖未證得唯識眞智,應可比知,唯識無境.『十地經』者,於彼經中,宣說菩薩,十種地義,此卽安立十地行相名`句`文身,識所變現聚集爲體,謂彼聖者,金剛藏識,所變影像,爲增上緣,聞者身中,識上影現,似彼法門,如是展轉,傳來于今,說名爲教.
‘오직 마음뿐[唯心]이다’란 심식은 즉 하나이며 오직 소리[唯聲]라고 하는 소취의 경(境)인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저 대상이 없기 때문에 능취 또한 없다. 심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 대상과 심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심소유법(心所有法)34)이 없다면 심은 예전에 일찍이 전전한 적이 없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멸진정에는 무슨 까닭에 오직 심만[唯心]이 있는가? 이것은 저 종(宗)의 과실이다. 우리 대승종(大乘宗)에서는 만약 장소[處]에 마음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선정[定] 또한 심상응법이 있으며, 만약 장소에 심상응법이 없을 경우에는 심도 또한 반드시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뿐이다’라는 이 말은 삼계는 오직 식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017_0191_c_12L唯有心者,心識是一.唯聲,爲遣所取境義,由彼無故,能取亦無.不遮心法,由彼與心,不相離故.如說若無心所有法,心未曾轉.若爾,滅定何故唯心?是彼宗過.我大乘宗,若處有心,必定亦有心相應若處無有心相應法,心亦定無.如是三界,皆唯有心,此言顯示,三界唯識.
017_0192_a_01L‘삼계’라고 말하는 것은 욕(欲) 등의 애착의 결박[愛結]과 상응하여 삼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오직 식[唯識]’이라는 말은 오직 여러 가지 심과 심법만이 있고 삼계의 횡계(橫計)의 인식대상이 있지 않음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말은 진여의 인식대상과 의타의 인식대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도제(道諦)에 섭수되는 근본과 후득의 두 가지 인식대상 그것은 사랑함에 집착된 것이 아니며, 다스려져야 할 것이 아니며, 미혹에 혼란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계에 포섭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식을 떠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다.
017_0191_c_20L言三界者,謂與欲等愛結相應,墮在三界.此唯識言,成立唯有諸心`心法,無有三界,撗計所緣.此言不遣眞如所緣,依他所緣,謂道諦攝根本`後得二種所緣,由彼不爲愛所執故`非所治故`非迷亂故`非三界攝,亦不離識,故不待說.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2계(二界)를 설해야만 한다. 35) 왜냐하면 경량부에서는 무색계는 오직 심과 심법만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식의 소취(所取)의 대상은 모두 대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색만이 없는 것을 설하여 유식(唯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또한 없는가 하면 나머지 허공 등 식의 소취의 대상이다. 경량부의 논사들은 무색계의 여러 가지 심과 십법은 무색의 모습[無色相]이어서 체(體)가 없고 실(實)이 없다고 인정하지만, 소취의 경계인 대상이 현현하는 소의를 아마도 저들은 집착하여 심과 심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계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017_0192_a_03L若爾,應說如是二界,無色界中,經部唯有心`心法故.此難不然,識所取義,皆無義故,非但色無,說名唯識.何者亦無?餘虛空等,識所取義.經部諸師,許無色界諸心`心法,是無色相`無體無實,所取境義,顯現所依.恐彼執爲非心`心法,故說三界,皆唯有心.
『해심밀경』에서 밝히는 뜻은 10지(地)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다. ‘경(經)’이란 교법을 말한다. ‘삼마지’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게끔 하는 성품으로서 심법을 체로 삼는다. 이 반연하는 경계[所緣境]을 설하여 ‘행하여지는[所行]’이라고 이름한다. 본경(本境)을 ‘질(質)’이라고 이름하고, 저것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영상’이라고 설한다. ‘나는 식의 인식대상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란 나는 바깥에 있는 식의 반연하는 경계는 오직 안에 있는 식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이 반연하는 경계는 식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설명하여 식의 반연하는 경계는 오직 식 위에 나타나는 영상으로서 특별한 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017_0192_a_10L『解深密經』所明意趣,如十地釋.經謂教法.三摩地者,是能令心,住一境性.心法爲體,此所緣境,說名所行,本境名質,似彼現者,說名影像.我說,識所緣,唯識所現故者,我說,在外識所緣境,唯是內識之所顯現,卽是所緣境,識爲自性義.此意說言,識所緣境,唯是識上,所現影像,無別有體.
‘어떻게 이 마음이 다시 이 마음을 취합니까?’란 즉 자체에서 작용하는 바가 서로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少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란 이것은 앞의 힐난을 풀이해 준 것이다. 왜냐하면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체의 법은 작용도 작자도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길 때’라고 하는 것은 연기의 제법에는 위력이 크기 때문에 즉 하나의 체 위에 두 개의 영상이 생겨도 다시 서로 향하여 상즉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으며, 모든 심과 심법은 연기력에 의해서 그 성품이 법 그 자체[法爾]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017_0192_a_17L云何此心,還取此心者,此顯作用於自相違.慈氏,無有少法,能取少法者,此釋前難,無作用故,謂一切法作用作者,皆不成故.如是生時者,緣起諸法,威力大故,卽一體上,有二影生,更互相望,不卽不離.諸心`心法,由緣起力,其性法爾,如是而生.
017_0192_b_01L‘질(質)을 연으로 삼아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을……같다’ 등이란, 비유하면 자신의 얼굴 등의 질(質)에 의지하여 거울 등의 속에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미혹의 혼란에 의하기 때문에 ‘나는 영상을 본다’고 말한다. 거울 등의 연(緣)의 위력이 크기 때문에, 비록 다른 영상이 아니지만 다른 영상이 있어서 현현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 마음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생길 때’ 등이란, 말하자면 심과 심법의 갖가지 억념과 분별 등의 연의 공능이 크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길 때 비록 다른 삼마지 등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있지 않지만 다른 영상이 현현하여 있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017_0192_b_01L如質爲緣,還見本質等者,譬如依止自面等質,於鏡等中,還見本質,由迷亂故,謂我見影.由鏡等緣威力大故,雖無異影,而似別有影像顯現.此心亦爾,如是生時等者,謂心`心法,種種憶念分別等,緣功能大故,如是生時,雖無有異三摩地等,所行影像,而似別有影像顯現.
즉 ‘곧 이러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른 이치 또한 현현하는 것이다’란 말하자면 이 가르침에 또한 겸하여 비량의 도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선정의 마음[定心]에서’ 등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가르침에 특별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검푸른 모습 등은 마음과 분리되지 않으니 원하고 바라는 것에 따라서 현현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꿈속에서 검푸름 등을 보는 것과 같다.
‘또한 이와 같은 검푸른 모습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다.’ 등이란, 저 다른 계탁을 할까봐 이와 같은 설명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계탁을 한다.
“즉 저 사람은 먼저 희미한 길 등에서 해골 등을 보고 지금 오히려 억지(憶持)에 의해서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으로 삼는다.”
017_0192_b_09L卽由此教,理亦顯現者,謂此教中,亦卽兼顯比量道理.所以者何?於定心中等者,序述教中,有別理義,謂靑瘀等不離於心,隨所樂欲,而顯現故,譬如夢中,所見靑瘀等.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等者,恐彼異計,故作此說.謂若有人,作如是計:由彼先於淡泊路等,見骨鎖等,今猶憶持,爲三摩地所行影像.
017_0192_c_01L이와 같은 계탁을 막기 위해서 ‘또한 이와 같은 검푸름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가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식대상이 곧 옛날에 억지한 것이라면 옛날에 본 그대로 방향과 장소가 결정된다. 옛날에 받아들인 대로 마땅히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지 않다.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智]는 진현량(眞現量)36)이어서 보이는 경계는 분명하게 현전한다. 억지식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들어서 이루는 것[聞所成]과 사유하여 이루는 것[思所成]의 두 가지 지혜와 상응하는 식은 본래의 현상을 억지한다. 저 두 가지 소행(所行)은 마땅히 식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옳지 않다. 왜냐하면 저 들음[聞] 등의 두 가지 억지식으로 말미암아 과거를 연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없기 때문에 인식대상의 영상은 아울러 오직 식일 뿐이다. 비유하면 옛날 자신의 젊었을 때를 기억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식이 현재 억지하는 것은 또한 오직 식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각의 대상[所念]은 공(空)이기 때문이다. 관행자(觀行者)가 생각한 것[所想]에서 부정한 해골과 여인의 영상이 현전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비량에 의해서’ 등이란 말의 뜻이 분명하므로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017_0192_b_17L爲遮此計,故言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見所緣境現前住故.若此所緣,卽是昔日,所憶持者,如昔所見,方處決定,如昔所受,應如是憶.然不如是,修所成智,是眞現量,所見境界,分明現前,非憶持識有如是事.若爾,聞`思所成兩慧,相應之識,憶持本事,彼二所行,應離於識.此亦不然,由彼聞等二憶持識,緣過去故,過去無故,所緣影像,竝唯是識.譬如憶昔,自己少年,是故此識現所憶持,竝唯有識,所念空故.如觀行者,所想現前,不淨骨鎖,女人影像.由此比量等,語義分明,不須重釋.
【論】이와 같이 여러 가지 식들은 꿈 등의 비유와 같다고 설하였다. 즉 이 중에서 안식 등의 식은 유식으로만 성립할 수 있다. 안식 등의 여러 식에서는 이미 물질[色]이 있는데 또한 오직 식만이 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또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이치에 의해서 알 수 있다.
【釋】‘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과 『해심밀경』을 말한다. ‘바른 이치’란 곧 경전에서 설한바 도리이다. 말하자면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과 그리고 꿈 등의 비유는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017_0192_c_07L論曰:如是已說,種種諸識,如夢等喩,卽於此中,眼識等識,可成唯識.眼等諸識,旣是有色,亦唯有識,云何可見?此亦如前,由教及理.釋曰:教卽『十地』`『解深密經』,理卽經中,所說道理,謂三摩地所行影像,及夢等喩,皆如前說.
【論】만약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 또한 그 자체가 식이라면, 무슨 까닭에 물질의 성품과 흡사하게 현현하는가? 한 부류로서 굳게 머물고 상속하여 전전하고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서 대상이라고 일으키는 전도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잡염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모든 청정법도 또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192_c_14L論曰:若此諸識,亦體是識,何故乃似色性顯現,一類堅住,相續而轉?與顚倒等,諸雜染法,爲依處故.若不爾者,於非義中,起義顚倒,應不得有.此若無者,煩惱`所知二障,雜染應不得有.此若無者,諸淸淨法,亦應無有.是故諸識,應如是轉.此中有頌:

산란한 양상[亂相]과 산란한 자체[亂體]를
마땅히 색식(色識)이라고 인정해야 하고
비색식(非色識)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네.
만약 없다면 나머지 것도 또한 없다네.
017_0192_c_21L亂相及亂體,
應許爲色識,
及與非色識,
若無餘亦無.
017_0193_a_01L
【釋】‘만약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 또한 그 자체가 식이라면’ 등이란 색식이 굳게 머물고 상속하고 전전하는 원인[因]으로서의 하나의 부류인가를 묻는 것이다.
‘한 부류’란 상사(相似)의 뜻이다.
앞과 뒤가 하나의 부류로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또한 중간에 끊어짐이 없기 때문에 ‘굳게 머물고’라고 하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것을 설하여 ‘상속하여 전전하는’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에서 ‘등’이라 하는 것은 즉 번뇌와 업과 생의 여러 가지 잡염법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된다. ‘의지처’란 원인[因]의 뜻이다. ‘때문이다’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저 질문의 뜻을 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아닌 것에 현현하여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이 굳게 머물러서 상속하고 전전하는 하나의 부류와 흡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말미암아 저 전도 등의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017_0192_c_23L釋曰:若此諸識,亦體是識等者,此問色識,一類堅住,相續轉因.言一類者,是相似義,前後一類,無有變異,亦無閒斷,故名堅住,卽此說名相續而轉.與顚倒等,諸雜染法,爲依處故者,等卽等取煩惱`業`生諸雜染法.眼等諸識,與顚倒等,諸雜染法,作所依處,所依處者,卽是因義.故者須也.觀彼問意,而作此荅,謂無義中,顯現似於眼等諸識,一類堅住相續而轉,由此起彼,顚倒等法.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란, 만약 이와 같이 전전하지 않는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대상을 일으키는 전도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전도가 없다면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의 잡염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잡염이 없다면 청정 또한 없다. 반드시 잡염을 쉬게 해야 청정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하는 것이다’란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의 힘[力]이 없는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라 하는 것은 질문에 따라서 대답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것은 필요한 것을 묻는 것이지 인종(因種)을 묻는 것이 아니다. 저것은 특별한 여러 가지 색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물을 뿐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색을 변하여 짓는 것이며, 오직 식만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017_0193_a_11L若不爾者,若不如是轉,於非義中起義顚倒應不得有.若無顚倒,煩惱`所知二障,雜染應不得有,無因緣故.若無雜染`淸淨亦無,要息雜染,顯淸淨故.是故諸識,應如是轉者,眼等諸識,應如是轉.爲不因力,諸法得生,非須力耶?不爾,隨問興荅言故.彼問所須,不問因種,由彼不執別有諸色,但問何須阿賴耶識,變作諸色,不唯作識,故作此答.
017_0193_b_01L‘산란한 양상[亂相]’이란 색과 흡사하게 변현한 식이라고 인정해야 하고, ‘산란한 자체[亂體]’란 색이 아닌 것[非色]이 변현한 식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결론에 수순하는 것은 게송의 법이기 때문에 문장을 뛰어넘어도 그 뜻은 서로 연결된다. 만약 색과 흡사하게 변현되는 원인[因]의 식(識)이 없다면 색이 아닌[非色] 과식(果識)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만약 경(境)이 없다면 경을 있게끔 하는 것 또한 없기 때문이다.
【論】무슨 까닭에37) 신식[身]ㆍ신자식[身者]ㆍ수자식(受者識)ㆍ수용되는 식[所受識]ㆍ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은 모두 몸속에서 함께 있어서[俱有] 화합하며 전전하는가? 능히 원만히 생겨나는 수용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017_0193_a_20L亂相許,爲似色變識,亂體許爲非色變識.順結頌法,故文隔越,其義相屬.若無似色,所變因識,非色果識,不應得有,以若無境,有境亦無.論曰:何故身`身者`受者識`所受識`能受識,於一切身中,俱有和合轉?能圓滿生受用所顯故.
【釋】‘무슨 까닭에 신식[身]’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능히 원만히’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이 5식(識)은 모든 몸속에서 구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수용이 드러나게 되어 한 가지[支]라도 빠트리면 원만하지 않게 된다.
【論】무슨 까닭에 설명한 것과 같은 세식[世]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차별적으로 전전하는가? 아득한 옛적부터[無始時來] 생사는 유전하여 끊임없고, 모든 유정계는 그 수가 한량없으며, 모든 자연계[器世間]의 그 수가 한량없으며, 모든 지어지는 일[所作事]이 전전하여 언설하는 그 수도 한량없으며, 각기 다르게 거두어들여 수용하는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으며, 사랑스럽고[愛]ㆍ사랑스럽지 않은[非愛] 모든 업의 과보인 이숙이 수용하는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으며, 받게 되는 생사의 갖가지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기 때문이다.
017_0193_b_04L釋曰:何故身等,如前爲問.能圓滿等,如前而答.由此五識,一切身中,無不具足,受用所顯,若闕一支,卽不圓滿.論曰:何故如說,世等諸識,差別而轉?無始時來,生死流轉,無斷絕故諸有情界,無數量故諸器世界,無數量故諸所作事展轉,言說無數量故各別攝取受用差別,無數量故諸愛`非愛業果,異熟受用差別,無數量故所受死生,種種差別,無數量故.
【釋】‘무슨 까닭에 설명한 것과 같은 세식 등의 여러 가지 식’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등’이 란 수식[數]ㆍ처식[處]ㆍ언설식[言說]ㆍ자타차별식[自他差別]ㆍ선취(善趣)와 악취(惡趣)의 사생식(死生識)의 여섯 가지 변현식(變現識)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아득한 옛적부터……받게 되는 생사의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기 때문이다’란, 수의 차례와 같이 세식[世] 등의 식이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017_0193_b_14L釋曰:何故如說,世等識等,如前爲問?等者,等取數`處`言說`自他差別`善趣惡趣及與死生六變現識.無始時來,乃至所受死生,差別無數量故者,如數次第,顯世等識,須說之果.
017_0193_c_01L【論】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을 안립하여 유식의 성품[唯識性]임을 세울 수 있는가? 간략하게 세 가지 특징[三相]에 의거한다. 첫째는 유식에 의거하니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가지의 성품에 의거하니 상이 있는 것[有相識]과 견이 있는[有見識] 두 가지38) 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갖가지 것에 의거하니 갖가지 행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모든 식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세울 수 있으며, 상분[相]과 견분[見]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세울 수 있다. 만약 안 등의 식일 경우에는 색 등의 식으로써 상분을 삼고, 안 등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으며 내지 신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만약 의식일 경우에는 모든 안식을 최초로 하고 법식(法識)을 최후로 하는 모든 식으로써 상분을 삼고, 의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이와 같이 의식에 분별이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식과 흡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193_b_19L論曰:復次云何安立,如是諸識,成唯識性?略由三相:一由唯識,無有義故二由二性,有相`有見二識別故三由種種,種種行相,而生起故.所以者何?此一切識,無有義故,得成唯識.有相見故,得成二種,若眼等識,以色等識爲相,以眼識識爲見,乃至以身識識爲見.若意識,以一切眼爲最初`法爲最後,諸識爲相,以意識識爲見.由此意識,有分別故,似一切識,而生起故.此中有頌:

오직 식[唯識]과 두 가지와 갖가지에
관행자의 의지[意]는 능히 들어간다네.
오직 마음[唯心]에만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저것 또한 능히 항복시켜 여의네.
017_0193_c_07L唯識二種種,
觀者意能入,
由悟入唯心,
彼亦能伏離.

【釋】‘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을 안립하여’ 등이란, 말하자면 앞의 이치에 의거하여 다시 다른 이치로써 갖가지로 질책하는 것이다.
‘유식에 의거하니’란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설하여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라고 말하는 것이다. 설한 ‘유[唯]’라는 말은 오로지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상이 없다는 도리에 대해서는 일부를 이미 설하였고 그 나머지 일부를 앞으로 설하겠다.
‘두 가지의 성품에 의거하니’란 상분[相]과 견분[見]에 의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식에서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으며, 두 가지 부분은 함께 전변하니 상과 견의 2분(分)은 상즉하지도 않고 서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안식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지 신식에 이르기까지 부류에 따라서 각각 달리 변하여 색 등의 갖가지 상(相)의 식이 되는 것을 설하여 상분(相分)이라 이름하고, 안 등의 모든 식이 경계를 요별하여 능히 대상의 끝[義邊]을 보는 것을 설하여 견분(見分)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소취분(所取分)을 상분[相]이라고 이름하고, 능취분(能取分)을 견분[見]이라고 이름하며, 이를 두 가지 성품이라고 이름한다.
017_0193_c_09L釋曰:復次云何安立,如是諸識等者,謂依前理,更以別理,種種徵問.由唯識者,是無義義,故次說言,無有義故.所說唯言,專爲遣義,無義之理,少分已說`少分當說.由二性者,謂相及見.於一識中,有相`有見,二分俱轉,相見二分,不卽不離.始從眼識,乃至身識,隨類各別,變爲色等,種種相識,說名相分.眼等諸識,了別境界,能見義邊,說名見分.又所取分名相,能取分名見,是名二性.
017_0194_a_01L‘갖가지 것에 의거하니’라고 하는 것은 갖가지 행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식 중에서 1분(分)은 소취상(所取相)과 흡사하게 변이하고 1분은 능취견(能取見)과 흡사하게 변이하며, 2분(分)은 각기 갖가지 차별적인 행상이 있으나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의 식이 같은 시간에 갖가지로 상응하게 된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시간에 갖가지 대상[境]을 느낄 수 없다.
‘만약 의식일 경우에는 모든 안식을 최초로 하고’ 등이란 말하자면 저 의식은 능히 같은 시간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증상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처음으로 하고 법식(法識)을 마지막으로 하여 안립하는 바의 상은 그것의 상분이다. 즉 이 의식이 대상의 끝[義邊]을 요별하는 것을 설하여 견분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두루 분별하기 때문이고 모든 식과 흡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설하여 상분[相]이라 이름하고, 견분[見]이라 이름하며, 또한 갖가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3_c_20L由種種者,種種行相,而生起故.於一識中,一分變異,似所取相,一分變異,似能取見,此之二分,各有種種差別行相,俱時而起.若有不許一識一時有種種相,應無一時覺種種境.若意識,以一切眼,爲最初等者,謂彼意識,有能一時取一切義.增上勢力,眼識爲初`法識爲後,所安立相,是其相分.卽此意識,了別義邊,說名見分.由此意識遍分別故`似一切識而生起故,是故意識說,名相`名見,亦名種種.
가타(伽陀)39)에서 유가사들은 능히 유식[唯識]과 두 가지 성품[二性]과 갖가지에 들어가 바깥의 경계를 없앤다. 마침내 능히 취하는 마음을 항복시켜 여의기 때문이다. 소연이 없기 때문에 능연(能緣)의 식도 또한 있을 수 없다. 요별이 없기 때문에 요별하는 자도 없다. 요별이 없어서 요별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경계의 상이 없어서 분별의 현상도 없다. 또한 경계가 있어 능히 분별하는 마음[有境能分別心]이라고도 한다. 만약 출세간심일 경우에는 분별의 능취ㆍ소취를 여읠지라도 안으로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聖智]의 소의가 있을 경우에는 능연과 소연은 평등한 성품으로 존재한다.
017_0194_a_08L於伽陁中,諸瑜伽師,能入唯識,二性種種,遣外境界,竟爲伏離,能取之心,所緣無故,能緣之識,亦不得有.了別無故,了者亦無,非無了別,而有了者.勿境界相,無分別事,亦名有境.能分別心,若出世心,雖離分別,能取`所取,然有內證,聖智所依,能緣`所緣,平等性在.
017_0194_b_01L【論】또한 여기에 대해 어떤 한 부류의 논사가 설하기를 “하나의 의식뿐이며 저것들에 의지하고 전전하여 저것들의 이름을 얻으니, 의사업(意思業)을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釋】‘또한 여기에 대해 어떤 한 부류의 논사가 설하기를, ≺하나의 의식뿐이며……≻’ 등이란 여러 논사의 소견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어떤 한 부류의 보리살타(菩提薩埵)는 “오직 하나의 의식성만을 있게끔 하기 위해서 저것들 안(眼) 등을 의지하여 생겨날 때 저것들의 이름을 얻으니, 이른바 안식 내지 의식이다. 이 중에는 특별한 나머지 식의 종류는 없다. 이것은 어떻게 의사업과 같은가? 하나의 의사(意思)가 몸이라는 처소에 있어서 몸을 발동시키면 곧 신업(身業)이라고 이름하고, 말의 처소에 있어서 말을 발동시키면 어업(語業)이라고 이름하며, 의(意)와 상응하면 의업(意業)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의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한다.
017_0194_a_15L論曰:又於此中,有一類師,說一意識,彼彼依轉,得彼彼名,如意思業,名身語業.釋曰:又於此中,有一類師,說一意識等者,此顯諸師,所見差別.謂有一類菩提薩埵,欲令唯有一意識性,依於彼彼眼等生時,得彼彼名,所謂眼識,乃至意識,此中無別餘識種類.此如何等?如意思業.如一意思,在身處所,發動於身,則名身業在語處所,發動於語,則名語業與意相應,名爲意業.意識亦爾.
【論】또한 모든 의지처[所依]에서 전전할 때 갖가지 모습에 흡사하게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하니, 말하자면 오직 대상의 영상과 분별의 영상이다. 또한 모든 곳에서도 접촉된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 유색계(有色界)에서 즉 이 의식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머지 감각기관[色根]이 몸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017_0194_b_04L論曰:又於一切所依轉時,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義影像,及分別影像.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轉,有色界中,卽此意識,依止身故,如餘色根,依止於身.
【釋】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의식은 마땅히 분별이 없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의지처[所依]가 둔하기 때문이니 마치 안 등의 식과 같다. 무릇 능히 의지하는 것[能依]는 모두 소의를 따르며 염오의가 잡염의 의지가 되는 것과 같이 의식이 모두 전전하는 것 역시 잡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의지처[所依]에서 전전할 때’ 등이라고 설한다. ‘모든 의지처’라고 하는 것은 안 등을 말한다. ‘의지처가 전전할 때’란 일어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갖가지 모습에 흡사하게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하니’란 말하자면 갖가지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다음에 다시 ‘말하자면 오직 대상의……’ 등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의식이지만 1분(分)은 대상과 흡사한 영상으로 현현하고, 제2분(第二分)에서는 대상에 대해서 분별함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분별이 없다는 과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017_0194_b_09L釋曰:或謂若爾,如是意識,應無分別,所依鈍故,如眼等識.夫能依者,皆順所依,如染污意,爲雜染依,意識俱轉,亦成雜染.爲解此難,說於一切所依轉等.一切所依者,謂眼等.所依轉時,者,生起時.似種種相,二影像轉者,謂似種種所取`能取,二影像轉.爲釋此故,次復說言,謂唯義等.唯一意識,一分似義,影像顯現,第二於義,分別而生,是故無有無分別過.
017_0194_c_01L‘또한 모든 곳에서도 접촉된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란, 말하자면 선정[定] 가운데 가볍고 무거운 등의 감촉을 받아들여 분별해서 산란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선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유색계에서’란 무색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즉 이와 같은 의식은 몸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머지 감각기관[色根]이 몸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마치 나머지 안 등의 모든 감각기관들[有色諸根]과 같이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곧 이 몸에 대해서 능히 손해와 이익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 또한 이와 같다. 유색계에서는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 몸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분별하여 능히 손해와 이익을 짓는다.
017_0194_b_19L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轉者,謂於定中,領納分別,輕重等觸,而非散亂,隨順彼故.有色界中者,非於無色界.何以故?卽此意識,依止身故.如餘色根,依止於身者,如餘眼等,有色諸根,依止身故,卽於此身,能作損益.意識亦爾,有色界中,依止身故,卽於此身,領納分別,能作損益.
【論】이것에 대한 게송이 있다.
017_0194_c_04L論曰:此中有頌:

멀리 작용[行]하거나 홀로 작용하거나
몸 없이 동굴 속에서 잠자네.
조절하기 어려운 마음, 즉 이것을 조절하는 것을
나는 진정한 범지(梵志)40)라고 한다네.
017_0194_c_05L若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調此難調心,
我說眞梵志.

【釋】하나의 의식을 설명하는 데에 보리살타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멀리 작용[行]하거나’ 등이란 모든 인식의 대상[境]에 두루 놀기 때문에 ‘멀리 작용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홀로 작용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는 없기 때문이다.
‘몸 없이’라고 하는 말은 형질(形質)이 없기 때문이다.
‘동굴 속에서 잠자네’라고 하는 것은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절한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마음41)에 대해서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조절하기 어려운 마음’이란 성품이 사납거나 슬퍼하기 때문이다.
017_0194_c_07L釋曰:說一意識,菩提薩埵,引教證言.若遠行等,遊歷一切所識境故,名爲遠行.爲證此義,復說獨行,無第二故.言無身者,無形質故.寐於窟者,居在內故.言調此者,於如是心,作自在故.難調心者,性𢤱悷故.
【論】또한 경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이와 같은 5근(根)이 행해지는 경계를 의식[意]은 각각 능히 수용하며 의식은 저것의 의지처가 된다.
【釋】다시 두 번째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증명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의식은 각각 능히 수용하며’란 이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오직 의식이 하나하나 각각 달리 능히 영수(領受)한다는 뜻이다.
‘의식은 저것의 의지처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論】또한 말씀한 바와 같이 12처(處) 중에서 6식신(識身)을 설하여 모두 의근의 포섭처[意處]라고 이름한다.
017_0194_c_13L論曰:又如經言: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意爲彼依.釋曰:復引第二聖教爲證.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者,謂此五根,所行境界,唯是意識,一一各別,能領受義.意爲彼依者,由此增上,彼生起故.論曰:又如所說,十二處中,說六識身,皆名意處.
017_0195_a_01L【釋】다시 세 번째 성교를 인용하여 증명을 하는 것이다. ‘6식신을 설하여 모두 의근의 포섭처라고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의식의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論】어떤 경우에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이라고 하지만, 이 경우에서도 나머지 모든 식은 그것의 상분의 식[相識]42)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의식의 식과 의지처는 그것의 견분의 식[見識]43)이다. 저 상분의 식은 이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때에 반연의 상[緣相]이 되기 때문에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할 때,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모든 식을 안립하고 유식의 성품[唯識性]이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194_c_21L釋曰:復引第三聖教爲證.說六識身,皆名意處者,所謂宣說,意識事故.論曰:若處安立阿賴耶識,識爲義識,應知此中,餘一切識,是其相識.若意識識,及所依止,是其見識,由彼相識,是此見識,生緣相故,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如是名爲安立諸識,成唯識性.
【釋】‘어떤 경우에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이라고 하지만’에서 의(義)란 원인[因]의 뜻이다. 곧 아뢰야식을 안립하여 원인의 식[因識]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식’이란 말하자면 신(身) 등의 식이다.
‘그것의 상분의 식’이란 소연의 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행해지는 대상[所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식의 식과 의지처’란 말하자면 여섯 번째 의식과 의지처로서 끊임없는 과거의(過去意)와 염오의(染汚意)를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능히 잡염을 일으키는 의지처의 성품을 짓기 때문이다.
‘그것의 견분의 식이다’라고 하는 것은 능히 분별하기 때문이다.
017_0195_a_06L釋曰:若處安立阿賴耶識,識爲義識者,義是因義,卽是安立阿賴耶識,以爲因識.餘一切識者,謂身等識.是其相識者,是所緣相,是所行故.若意識識及所依止者,謂第六識及所依止,無閒過去意,及與染污意,此二能作生起雜染,所依性故.是其見識者,能分別故.
‘저 상분의 식은 이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데에 반연의 상이 되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아뢰야식이 변한바 다른 모습[異相]은 두 가지로써 견분의 식이 반연의 상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할 때’란 말하자면 의식의 견분의 식[意見識]이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때를 말한다.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란 말하자면 안 등의 식은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다.
017_0195_a_14L由彼相識,是此見識,生緣相故者,謂阿賴耶識,所變異相,是二見識,生緣相故.似義現時者,謂意見識,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者,謂眼等識,能與見識,作生依事.
017_0195_b_01L【論】모든 대상[義]은 현전에 분명하게 현현하는 데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보살이 네 가지 법[四法]을 성취하면, 능히 모든 것은 유식뿐이며 모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44)
첫째는 서로 어긋나는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相違識相智]45)를 성취한다. 아귀ㆍ방생(傍生) 그리고 모든 천인들이 똑같은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저 인식하는 것에 차별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전에 가히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無所緣識現可得智]46)를 성취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와 꿈의 영상 속에서 얻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땅히 노력[功用]을 떠났어도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應離功用無顚倒智]47)를 성취한다.
017_0195_a_18L論曰:諸義現前,分明顯現,而非是有.云何可知?如世尊言:若諸菩薩,成就四法,能隨悟入一切唯識,都無有義.一者成就相違識相智,如餓鬼`傍生及諸天人,同於一事,見彼所識,有差別故二者成就無所緣識,現可得智,如過去`未來,夢影緣中,有所得故者成就應離功用,無顚倒智
마치 대상이 있는 것 가운데 능히 대상을 연하는 식이 있는 것과 같이, 마땅히 전도됨이 없어서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변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三種勝智隨轉妙智]48)를 성취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의 자재[心自在]를 얻는 것이니, 모든 보살로서 정려를 얻은 자는 뛰어난 이해의 힘[勝解力]에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 49) 둘째는 사마타를 얻어 법의 관찰[法觀]을 닦는 자는 잠시 작의(作意)할 때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 50) 셋째는 이미 무분별지를 얻은 자는 무분별지가 현전할 때 모든 대상은 다 현현하지 않는다. 51)
이와 같이 설명한 것처럼 세 가지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변하는 묘한 지혜와 그리고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세 가지 인연에 의해서 모든 대상은 대상이 없다는 도리가 성립된다.
017_0195_b_03L如有義中,能緣義識,應無顚倒,不由功用,知眞實故四者成就三種勝智,隨轉妙智.何等爲三?一得心自在,一切菩薩,得靜慮者,隨勝解力,諸義顯現二得奢摩他,修法觀者,纔作意時,諸義顯三已得無分別智者,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由此所說,三種勝智`隨轉妙智,及前所說,三種因緣,諸義無義道理成就.
【釋】다시 경(境)이라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그 밖의 가르침과 그 밖의 도리를 인용하여 ‘모든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 어긋나는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相違識相智]’란 다시 서로 위반하기 때문에 상위라고 이름한다. 상위하는 자의 식을 상위식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생기게 하는 식의 원인을 설하여 상(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상은 오직 내심(內心)이 변한 것이지 바깥의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요지하는 것을 설하여 ‘지(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5_b_12L釋曰:復爲成立無有境義,故引餘教及餘道理,謂諸菩薩,成四法等.相違識相智者,更相違反,故名相違.相違者識,名相違識.生此識因,說名爲相.了知此相,唯內心變,外義不成,故無有義,說名爲智.
017_0195_c_01L‘아귀ㆍ방생[傍生] 그리고 모든 천인들이 똑같은’ 등이란 아귀는 자기 업의 변화한 증상력에 말미암아 보는 대상인 강과 하천을 모두 고름과 피로 꽉 차 있는 곳으로 보고, 물고기 등의 방생(傍生)은 곧 집이나 놀며 걸어 다니는 도로로 보고, 천(天)은 갖가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사람은 이곳에 맑고 시원한 물이 있어서 물결이 일고 소용돌이가 친다고 본다. 만약 허공무변처정(虛空無邊處定)에 들어가면, 이곳에서는 오직 허공만을 볼 뿐이다. 하나의 실물에 대해서 서로 어긋남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품류가 아닌 지혜를 생기게 하는 인성(因性)이 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어떻게 이미 고름과 피와 똥오줌이 꽉 차 있는 이 하나의 강하(江河)에 대해서 칼자루를 잡은 사람이 두 언덕에서 지키고 있고, 다시 갖가지 깨끗한 향내가 나는 사택(舍宅)과 청정한 길과, 뭇 보배로 장식된 땅과, 맑고 시원한 아름다운 물결과 소용돌이와, 허공정(虛空定)의 경계가 있는가? 만약 바깥의 사물에는 모두 실성(實性)이 없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것은 다 내심에서 변현하여 모든 현상을 다 이루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195_b_18L如餓鬼`傍生及諸天人等者,謂於餓鬼,自業變異,增上力故,所見江河,皆悉充滿膿血等處等傍生,卽見舍宅,遊從道路天見種種寶莊嚴地人見是處,有淸冷水,波浪湍洄若入虛空無邊處定,卽於是處,唯見虛空.一物實有,爲互相違,非一品類智生因性,不應道理.云何於此一江河中,已有膿血屎尿充滿,持刀杖人兩岸防守復有種種香潔舍宅,淸淨街衢,衆寶嚴地淸冷美水,波浪湍洄虛空定境.若許外物,都無實性,一切皆從內心變現,衆事皆成.如有頌言:

한 명의 잘 치장한 음녀(婬女)의 몸에 대해서
출가한 이와 욕심에 탐착하는 이와 굶주린 개[餓狗]는
각기 악취 나는 시체, 아름다운 여인, 맛있는 음식이라 하니,
세 가지 분별은 각기 같지 않다네.
017_0195_c_08L於一端嚴婬女身,
出家耽欲及餓狗,
臭屍昌豔美飮食,
三種分別各不同.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전에 가히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無所緣識現可得智]’란 과거와 미래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경량부와 함께 인정하여 성취한다. 꿈속의 경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모든 사람은 함께 느낀다. 모든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억지(憶持)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된다. 물과 거울의 표면 등의 영상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경계는 없으나 식은 성립될 수 있다.
‘마땅히 노력[功用]을 떠났어도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應離功用無顚倒智]’ 부분의 본문은 그 의미가 드러났을지라도 조금 더 부연하겠다. 만약 욕심이 있어서 얻게 되는 대상과 같이 곧 진실이 있다면 마땅히 공들이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은 다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017_0195_c_10L無所緣識,現可得智等者,過去`未來,皆非實有.此與經部,共許成就夢境實無一切共了.諸三摩地所行影像,已說非有,亦非憶持.水鏡等中,面等影像,都無所有,如前已說.此中無境,而識得成,應離功用,無顚倒智,本文雖顯,而少助說.若有欲令如所得義,卽眞實有,應不用功,自然解脫,一切有情,皆見實故.
017_0196_a_01L‘마음의 자재를 얻는 것이니’란 마음을 조절하고 수순하여 능히 짓는 일에 대해서 감능이 있는 것이다.
‘정려를 얻은 자’란 모든 성문과 독각들을 말한다. 이미 청정한 정려심에서 일경성(一境性)을 증득하였거나 정사려(靜思慮)를 즐기는 것을 정려자(靜慮者)라고 이름한다.
‘뛰어난 이해의 힘에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란, 말하자면 뛰어난 마음의 이해[增上意解]52)의 세력에 따라서 바라는[願樂] 대로 땅 등을 변화시켜 물 등이 되게끔 하고자 하면 모두 다 현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타를 얻은’이란 말하자면 이미 사마타정을 증득하고 상속을 윤택하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정려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017_0195_c_19L得心自在者,得心調順,堪有所作.得靜慮者,謂諸聲聞,及獨覺等.若已證得,淸淨靜慮,心一境性.樂靜思慮,名靜慮者.隨勝解力,諸義顯現者,謂隨增上,意解勢力,如所願樂,欲令地等變成水等,皆悉顯現.得奢摩他者,謂已證得奢摩他定,滋潤相續,令心寂靜
언급한 ‘닦는다’는 것은 공경(空境)과 상응하거나 4성제의 소연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지(止)ㆍ관(觀)이 나란히 움직이기 때문에 상응이라 이름하고 이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법의 관찰[法觀]’이란 말하자면 후득(後得)으로서 계경(契經) 등의 바른 법을 관하는 묘혜(妙慧)이다.
‘잠시 작의할 때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란 말하자면 계경 등의 바른 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 가지 무상 등의 뜻에 대해서 찰나로 속히 멸하는 등의 성품을 작의하고 사유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한 가지 품류가 아닌 경계를 현현하는 것이다.
017_0196_a_03L所言修者,空境相應,或四聖諦,所緣相應,止觀雙運,故名相應.與此相應故,名爲修法觀者,謂此後得,觀契經等,正法妙慧.纔作意時,諸義顯現者.謂契經等,正法教中,隨於一種無常等義,如如作意思惟,剎那速滅等性.如是如是,非一品類境界顯現
‘무분별지가 현전할 때 모든 대상은 다 현현하지 않는다’에서 무분별지는 나중에 자세히 해석할 것이다. 대상이 만약 실제로 있다면 이 지혜는 마땅히 없어야 한다. 분별이 있지 않은 데에서 무분별은 성립한다. 대상이 만약 실제로 있는데도 무분별지가 생겨나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지혜는 여실하게 경계인 대상을 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설명한 도리와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인연에 의해서 모든 대상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017_0196_a_10L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者,無分別智,後當廣釋.義若實有,此智應無,非有分別`無分別成.義若是實有,無分別智生,不應不顯現,此智如實緣境義故.由此無閒所說道理,及前所說,三種因緣,諸義皆無,道理成就.
【論】만약 의타기자성이 실제로 오직 식만이 있어서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의지처라면, 어떻게 의타기가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가?53) 스스로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서 다른 조건[緣]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생겨난 찰나 이후에는 공능이 없고 자연스럽게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017_0196_a_16L論曰:若依他起自性,實唯有識,似義顯現之所依止,云何成依他起?何因緣故,名依他起?從自熏習種子所生,依他緣起故,名依他起.生剎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名依他起.
017_0196_b_01L【釋】‘어떻게 의타기가 될 수 있으며’란 해석된 법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가’란 풀이된 구절을 물어서 해석하지 않은 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나란히 관계되어서 능히 대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가지 자성에 대한 두 가지 질문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의거하여 그에 상당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등이란 변계소집의 명언훈습의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종자로부터……다른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저 자체[體]가 다른 것을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생겨난 찰나 이후에는 공능이 없고 자연스럽게 머물기 때문에’란 저 자체는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017_0196_a_21L釋曰:云何成依他起者,問所解法.何因緣故,名依他起者,問所釋詞,解不解品.由此雙關,能了義故,餘二自性,兩問亦爾.依此諸問,兩兩酬答.從自熏習種子等者,謂從遍計所執,名言熏習種生,依自種子,他所生故,名依他起,此說彼體依他而生.生剎那後,無有功能,自然住者,此說彼體依他而住.由此二因,名依他起.
【論】만약 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에 의지하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변계소집이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하는가? 한량없는 인식작용[行相]은 의식이 두루 계탁하고 전도하여 생겨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이름한다. 자상은 실제로 없을지라도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된 것만을 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설하여 변계소집이라 이름한다.
017_0196_b_07L論曰:若遍計所執自性,依依他起,實無所有,似義顯現,云何成遍計所執,何因緣故,名遍計所執?無量行相意識遍計,顚倒生相故,名遍計所執.自相實無,唯有遍計所執可得,是故說名遍計所執.
【釋】‘의타기에 의지하여’란 말하자면 유식인 의타기성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이란 말하자면 실제로는 체가 없고 단지 그 대상과 흡사한 모습[相貌]만이 현현한다는 것이다.
만약 체가 실제로 없다면 어떻게 대상이라 이름하는가? 이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설하기를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명언훈습종자에 의해서 비록 실제로는 체가 없지만 대상이 있는 것과 흡사하게 모습이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환상(幻像) 등과 같이 있는 것과 흡사하게 현현한다.
017_0196_b_13L釋曰:依依他起者,謂依唯識依他起性,實無所有.似義顯現者,謂實無體,但似其義,相貌顯現.若體實無,云何名義?爲避此難,是故說言,似義顯現.謂由名言熏習種子,雖無實體,而似有義,相貌顯現,是故名義如幻像等,似有顯現.
‘현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명료하게 대상은 없을지라도 있는 것과 흡사하고 명료하게 현전하기 때문에 ‘현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이 대상과 흡사한 것을 저것의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 자성과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인식작용’이란 갖가지 아(我)ㆍ법(法)의 경계의 영상이다.
‘의식이 두루 계탁하고’란 즉 의식을 설하여 두루 계탁함[遍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6_b_20L言顯現者,是明了義,無而似有,明了現前,故名顯現.卽此似義,爲彼自性,如自性受.無量行相者,種種我法,境界影像.意識遍計者,謂卽意識說名遍計.
017_0196_c_01L‘전도하여 생겨나는 모습’이란 산란한 식[亂識]의 소취와 능취이다. 대상의 양상이 생겨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한다’란 말하자면 변계소집의 대상의 양상을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한다는 것이다.
‘자상은 실제로 없을지라도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된 것만을 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란, 말하자면 실제로는 아(我)와 법(法)이 없는데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영상인 모습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6_c_01L顚倒生相者,謂是亂識,所取`能取,義相生因故.名遍計所執者,謂卽遍計所執義相,名爲遍計所執自性.自相實無,唯有遍計所執可得者,謂於實無,我及法中,唯有遍計所執影像,相貌可得,由此故名遍計所執.
【論】만약 원성실자성은 변계소집의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원성실이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하는가?
변이(變異)가 없는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선법의 가장 뛰어난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뜻에 의해 원성실이라 이름한다.
017_0196_c_07L論曰:若圓成實自性,是遍計所執,永無有相,云何成圓成實?何因緣故,名圓成實?由無變異性故,名圓成實.又由淸淨所緣性故`一切善法最勝性故,由最勝義,名圓成實.
【釋】‘변이가 없는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한다’ 등이라 하는 것은 이 성품은 항상 변이가 없기 때문에,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선법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을 그 성품으로 삼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017_0196_c_12L釋曰:由無變異性故,名圓成實等者,應知此性常無變故.又由淸淨所緣性故`一切善法最勝性故,圓滿成就眞實爲性.
【論】또한 능변계(能遍計)가 있고 소변계(所遍計)가 있을 때 변계소집자성은 마침내 성립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무엇이 능변계54)이고, 무엇이 소변계55)이며, 무엇이 변계소집자성56)인가? 분별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능변계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스스로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고, 모든 식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끝없는 인식작용은 계속 분별하고 널리 모든 것에 대해서 분별하여 헤아리기 때문에 변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6_c_16L論曰:復次有能遍計`有所遍計,遍計所執自性乃成.此中何者能遍計?何者所遍計?何者遍計所執自性?當知意識是能遍計,有分別故.所以者何?由此意識用自名言熏習爲種子,及用一切識名言熏習爲種子,是故意識,無邊行相,分別而轉,普於一切,分別計度,故名遍計.
017_0197_a_01L 또한 의타기자성을 소변계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 의타기자성으로 하여금 소변계가 되게끔 하면, 여기에서 이를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란 이것과 같은 대상이다.
또한 무엇을 변계라고 하며, 능히 변계하여 계탁한다고 하는가? 어떤 경계를 반연하며, 어떤 모습을 취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집착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며, 어떤 것에 의해서 말을 설하며, 어떤 곳을 증익하는가?
말하자면 명칭[名]을 반연하여 대상[境]으로 삼고,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저 모습을 취한다. 견해[見]에 의해서 집착하고, 심(尋)57)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고, 보고 듣는 등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키고, 대상이 없는 곳에서 증익하여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변계에 의해서 능히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017_0197_a_01L又依他起自性,名所遍計.又若由此相,令依他起自性,成所遍計,此中是名遍計所執自性.由此相者,是如此義.復次云何遍計,能遍計度?緣何境界?取何相貌?由何執著?由何起語?由何言說?何所增益?謂緣名爲境,於依他起自性中,取彼相貌,由見執著,由尋起語,由見聞等四種言說,而起言說,於無義中,增益爲有,由此遍計,能遍計度.
【釋】‘또한 능변계가 있고’ 등이란 변계소집을 분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설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능변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시(顯示)58)와 수념(隨念)59)의 분별이 있어서 잡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고’란 아득한 옛적부터 생사의 모든 의식은 희론과 명언으로 훈습된 종자를 이것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는다’란 말하자면 끝없는 색 등의 영상의 식인 명언으로 훈습된 종자를 원인으로 삼으니, 저것60)과 흡사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끝없는 인식작용은 계속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017_0197_a_10L釋曰:復次有能遍計等者,爲欲分別遍計所執,故說此言,當知意識,是能遍計.有分別故者,由有顯示,隨念分別,所雜糅故.用自名言熏習,爲種子者,無始生死,所有意識戲論,名言熏習種子,爲此生因.及用一切識,名言熏習,爲種子者,謂用無邊色等,影識名言熏習種子爲因,似彼生故,是故一切無邊行相,分別而轉.
017_0197_b_01L‘또한 의타기자성을 소변계라고 이름한다’란 말하자면 이것의 일부분의 안 등의 모든 모습[相]은 소변계의 업(業)이다.
‘또한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 의타기자성으로 하여금 소변계가 되게끔 하면 여기에서 이를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란 말하자면, 이 품류의 반연의 상[緣相]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대상이다’란 이와 같은 품류의 반연의 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무엇을 변계라고 하며, 능히 변계하여 계탁한다고 하는가?’란 변계소집자성의 차별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질문을 만들어 묻는 것이다.
‘명칭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고’란 말하자면 색(色)ㆍ수(受) 등과 천여(天與)61) 등의 명칭은 대상과 상응하여 모든 변계를 일으키고 달라진 인식작용[行相]을 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명칭이 있어서 능히 그 대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017_0197_a_19L又依他起自性,名所遍計者,謂此一分眼等諸相,是所計業.又若由此相,令依他起自性,成所遍計,此中是名遍計所執自性者,謂由此品類緣相,是名遍計所執自性.是如此義者,是如此品類緣相義.復次云何遍計,能遍計度者,作問生起,爲欲宣說,遍計所執自性差別.緣名爲境者,謂色受等,天與等,名於義相應,起諸遍計,說異行相,爲識其名,非無有名能於其義起諸分別.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저 모습을 취한다’란 자상을 집착한다는 뜻이다. 능취상에 의거하여 상(想)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그 소상(所想)과 같이 이 언설을 만드는 것이다. 혹은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안 등이 모습(相)을 취한다.
‘견해에 의해서 집착하고’란 다섯 가지 품류에 의해서 추구하고 계속해서 행하여 모든 집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모습[相貌]를 취하고 나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모습에 대해서 굳게 집착한다는 뜻이다. 견해에 의해서 추구하고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심(尋)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고’란 계경에서 “심(尋)에 의해서 사(伺)에 의해서 어언(語言)을 설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심ㆍ사가 없이는 어언을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17_0197_b_07L於依他起自性中,取彼相貌者,是執自相義.由能取相,說名爲想.如其所想,作是言說,或於依他起自性中,取眼等相.由見執著者,由五品類,推求行轉,起諸執著.取相貌已,起執著故,是於相貌,堅執著義.由見推求,於義決定,起執著已,欲爲他說.由尋起語者,如契經說:由尋由伺,而說語言,非無尋伺能說語言.
‘보고 듣는 등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키고’란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뱀과 비슷한 새끼줄 등의 모습을 반연하는 것과 같이, 꼬불꼬불함 등의 갖가지 모습을 취하여 스스로 집착하고 나서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는 이미 뱀을 보았다. 나는 이미 뱀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남들이 이것을 듣고 나서, 다시 증익하여 “실제로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197_b_16L由見聞等,四種言說,而起言說者,由見聞覺知,四種言說,而起言說.如緣似蛇繩等相貌,取盤曲等,種種相貌,自執著已,爲覺悟他,說如是言:我已見蛇.我已見蛇.此亦如是,他聞是已,復更增益,謂爲實有.
017_0197_c_01L【論】또한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성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마땅히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타기자성은 다른 부문[異門]에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기가 되고, 즉 이 자성은 다른 부문에 말미암기 때문에 변계소집이 되며, 곧 이 자성은 다른 부문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 된다. 62)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의타기는 의타기가 되는가? 다른 훈습 종자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자성은 변계소집이 되는가?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대상의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것에 의해서 두루 계탁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자성은 원성실이 되는가? 소변계와 같이 결국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3)
017_0197_b_22L論曰:復次此三自性,爲異`爲不異?應言非異非不異.謂依他起自性,由異門故,成依他起.卽此自性,由異門故,成遍計所執.卽此自性,由異門故,成圓成實.由何異門,此依他起,成依他起?依他熏習種子起故.由何異門,卽此自性,成遍計所執?由是遍計所緣相故,又是遍計所遍計故.由何異門,卽此自性,成圓成實?如所遍計,畢竟不如是有故.

【釋】‘다른 것도 아니고’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은 있음[有]과 있지 않음[非有]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있음을 있다고 바래서 가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있지 않은 토끼뿔 등은 없다고 바라지 않는 것이다.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있음과 있지 않음이 하나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타기성과 원성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성품이 청정하지 않고,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다른 부문[異門]의 의취(意趣)에 의지하면 이 세 가지 자성은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성품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성품이 된다.
017_0197_c_09L釋曰:非異者,謂依他起性,與遍計所執,有`非有故.有望於有,可得言異,非望非有兔角等無.非不異者,有與非有,不成一故.依他起性,與圓成實,亦復如是,性不淸淨`性淸淨故.今復依止異門意趣,此三自性,或成一性`或成異性.
017_0198_a_01L‘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대상의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것에 의해서 두루 계탁되어지기 때문이다’란 의타기는 아(我)와 색(色) 등의 변계소집의 의지처[所依止]이기 때문에, 또한 의타기는 아와 색 등이 의식의 변계에 의해서 변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취에 의해서 짐짓 의타기를 변계소집이라 설하는 것이다.
‘소변계와 같이 결국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타기에서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은 결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곧 세 가지 자성은 모두 다른 것이 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 관대(觀待)64)가 다르기 때문이다. 훈습된 종자가 생겨나게 되는 의변(義邊)을 관대할 때 의타기가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성품을 성립시킬 수 없다. 변계의 소연을 관대할 때 변계소집이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상을 성립시킬 수 없다. 변계소집이 결국 없는 변(邊)을 관대할 때 원성실이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성품을 성취할 수 없다.
017_0197_c_16L由是遍計所緣相故,又是遍計所遍計故者,由依他起,是我色等,遍計所執,所依止故.又依他起,是我色等,意識遍計所遍計故.由此意趣,假說依他起,爲遍計所執.如所遍計,畢竟不如是有故者,於依他起,如所顯現,畢竟無故,如是卽說,三種自性,不全成異,亦非不異,觀待別故.若時觀待,熏習種子,所生義邊,成依他起,不卽由此,成餘二性.若時觀待,遍計所緣,成遍計執,不卽由此,成餘二性.若時觀待,遍計所執,畢竟無邊,成圓成實,不卽由此,成餘二性.
【論】이 세 가지 자성에는 각기 몇 종류가 있는가? 말하자면 의타기에는 약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것이 훈습하는 종자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잡염과 청정의 성품은 성립되지 않음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의타의 차별에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변계소집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변계집에 말미암고, 둘째는 차별의 변계집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에 말미암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한다.
원성실성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원성실에 말미암고, 둘째는 청정원성실에 말미암는다. 이것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 되는 것이다.
017_0198_a_05L論曰:此三自性,各有幾種?謂依他起,略有二種:一者依他熏習種子而生起故`二者依他雜染`淸淨性不成故.由此二種,依他別故,名依他起.遍計所執,亦有二種:一者自性遍計執故`二者差別遍計執故,由此故名遍計所執.圓成實性,亦有二種一者自性圓成實故`二者淸淨圓成實故,由此故成圓成實性.
【釋】‘다른 것이 훈습하는 종자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란 인연에 의탁하여 생기게 되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른 잡염과 청정의 성품은 성립되지 않음에 의하기 때문이다’란 분별할 때에는 잡염의 성품이 되고, 분별하지 않을 때에는 청정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 두 가지 부분에 의지하여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자성의 변계’란 말하자면 모든 안 등이 유법(有法)의 사체(事體)를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다.
‘차별의 변계’란 말하자면 항상[常]과 무상(無常) 등의 대상에 대해서 특별한 법의 대상이라고 특별히 집착하여 취한다는 뜻이다.
‘자성원성실’이란 때가 있는 진여[有垢眞如]를 말한다.
‘청정원성실’이란 때를 여읜 진여[離垢眞如]를 말한다.
017_0198_a_14L釋曰:依他熏習種子,而生起故者,由託因緣,而得生故,名依他起.依他雜染`淸淨性,不成故者,由分別時,成雜染性,無分別時,成淸淨性,依二分故,名依他起.自性遍計者,謂摠執取眼等,有法事體.差別遍計者,謂別執取常`無常等義別法義.自性圓成實者,謂有垢眞如.淸淨圓成實者,謂離垢眞如.
017_0198_b_01L【論】또한 변계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변계[自性遍計]이고, 둘째는 차별의 변계[差別遍計]이며, 셋째는 유각의 변계[有覺遍計]이고, 넷째는 무각의 변계[無覺遍計]이다. 유각이라 하는 것은 명언(名言)을 잘 아는 것을 말하고, 무각이라 하는 것은 명언(名言)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釋】‘명언을 잘 아는 것’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취(意趣)가 말 앞에서 행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족하기 때문에 유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과 어긋나는 것을 설하여 무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198_a_23L論曰:復次遍計有四種:一自性遍計`二差別遍計`三有覺遍計`四無覺遍計.有覺者,謂善名言,無覺者,謂不善名言.釋曰:善名言者,謂自意趣,在語前行,領解具足,故名有覺與此相違,說名無覺.
【論】이와 같이 변계에는 다시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명칭[名]에 의지하여 대상[義]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명칭에 이와 같은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상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대상에 이와 같은 명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칭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아직 알지 못하는 대상의 명칭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넷째는 대상에 의지하여 대상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아직 알지 못하는 명칭의 대상을 계탁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지하여 두 가지65)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이와 같은 명칭과 이와 같은 대상은 이와 같은 체성이 있다고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017_0198_b_07L論曰:如是遍計,復有五種:一依名遍計義自性,謂如是名有如是義二依義遍計名自性,謂如是義有如是名三依名遍計名自性,謂遍計度未了義名四依義遍計義自性,謂遍計度未了名義五依二遍計二自性,謂遍計度此名此義如是體性.
【釋】‘명칭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야자주(椰子洲)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 ‘소[牛]’라고 하는 소리66)로 설하는 것을 듣고, 그 대상을 알지 못하고 자주 이와 같은 ‘소’라고 하는 소리를 분별하는 것과 같다.
‘대상에 의지하여 대상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란, 말하자면 일찍이 익히지 않은 상(想)과 유상(有想)67)이 다시 서로 상응하여 홀연히 소의 몸을 보고 자주 이와 같은 소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두 가지에 의지하여 두 가지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란 말하자면 가립(假立)된 능전과 소전68)에 의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분별하는 것이다.
017_0198_b_14L釋曰:依名遍計,名自性者,謂如生在椰子洲人,聞說牛聲,不了其義,數數分別,如是牛聲.依義遍計義自性者,謂曾未習想與有想,更互相應,欻見牛身,數數分別,如是牛義.依二遍計二自性者,謂依假立能詮`所詮,分別二種.
017_0198_c_01L【論】또한 모든 분별을 종합적으로 포함시키면 대략 열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아뢰야식을 말하고, 둘째는 반연의 모습의 분별[緣相分別]이니 색 등의 식을 말하고, 셋째는 현현함의 모습의 분별[顯相分別]이니 안식 등의 의지처의 식을 말한다. 넷째는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緣相變異分別]이니 늙음 등의 변이와 낙수(樂受) 등의 변이와 탐 등의 변이와 핍해(逼害)ㆍ시절의 대사(代謝) 등의 변이와 나락가 등의 여러 윤회세계[趣]의 변이와 욕계 등의 여러 세계[界]의 변이를 말한다. 다섯째는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顯相變異分別]이니 즉 앞에서 설한 변이와 같은 모든 변이를 말한다.
017_0198_b_21L論曰:復次摠攝一切分別,略有十種:一根本分別,謂阿賴耶識二緣相分別,謂色等識三顯相分別,謂眼識等,幷所依識四緣相變異分別,謂老等變異`樂受等變異`貪等變異`逼害時節代謝等變異`捺落迦等諸趣變異,及欲界等諸界變異五顯相變異分別,謂卽如前所說,變異所有變異
여섯째는 남이 이끄는 분별[他引分別]이니 정법이 아닌 부류를 듣거나 정법의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일곱째는 진리가 아닌 분별[不如理分別]이니 여러 외도들이 정법이 아닌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여덟째는 진리 그대로의 분별[如理分別]이니 정법 가운데에서 정법의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아홉째는 집착의 분별[執著分別]이니 진리가 아닌 작의(作意)의 부류를 말한다. 즉 살가야견을 근본으로 삼고 62가지 국집된 견해[見趣]와 상응하는 분별이다. 열째는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散動分別]이니 모든 보살의 열 가지 분별을 말한다.
017_0198_c_06L他引分別,謂聞非正法類,及聞正法類分別七不如理分別,謂諸外道,聞非正法類分別八如理分別,謂正法中,聞正法類分別九執著分別,謂不如理作意類,薩迦耶見爲本,六十二見趣相應分別十散動分別,謂諸菩薩,十種分別.
【釋】‘근본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 이것은 나머지 분별의 근본이 되며 자성 또한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분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반연의 모습의 분별’이란 색 등에 이와 같은 반연의 모습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현현함의 모습의 분별’이란 안식 등과 함께 의지처의 식을 말하는데 저 인식대상과 흡사한 모습을 현현하기 때문이다.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이란 색 등의 영상이 식과 흡사하게 변이하여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017_0198_c_13L釋曰:根本分別者,謂阿賴耶識,是餘分別根本自性,亦是分別,故名根本分別.緣相分別者,謂分別色等,有如是緣相.顯相分別者,謂眼識等,幷所依識,顯現似彼所緣相故.緣相變異分別者,謂似色等,影識變異,所起分別.
017_0199_a_01L‘늙음 등의 변이’란 색 등이 식과 흡사하게 되어 늙음 등의 모습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변이를 말한다. 왜냐하면 내외의 색 등에는 모두 늙음 등의 전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등’이란 병들고 죽는 변이를 똑같이 취한다. ‘낙수 등의 변이’란 즐거움의 감수작용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몸의 모습이 변이하는 것이다. ‘낙’이란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등’이란 괴로움의 감수 작용[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수 작용[不苦不樂受]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탐 등의 변이’란 탐 등으로 말미암아 몸의 모습이 변이하는 것을 말한다. ‘등’이란 성냄[瞋]ㆍ어리석음[癡]ㆍ분(忿) 등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분 등은 추악한 형색 등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핍해ㆍ시절의 대사 등의 변이’란 죽이고 포박하는 것 등은 몸의 모습 등으로 하여금 변이를 일으키게 함을 말한다.
017_0198_c_19L老等變異者,謂色等識,似老等相,起諸變異.何以故?外內色等,皆有老等,轉變相故.等者,等取病死變異.樂受等變異者,由樂受故,身相變異,如說樂者,面目端嚴.等者等,取苦及不苦不樂受.貪等變異者,謂由貪等,身相變異.等者,等取瞋癡忿等,如說忿等,惡形色等.逼害時節代謝等變異者,謂殺縛等,令身相等,生起變異
시절의 대사69)도 또한 내외의 몸과 나무 색깔 등의 형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추위 등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몸 등이 변이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나락가 등의 여러 윤회 세계의 변이’에서 ‘등’이라 하는 것은 모든 괴로운 세계[惡趣]를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색 등의 변이는 모두 함께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욕계 등의 여러 세계[界]의 변이’란 색계를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무색계에서는 색 등과 흡사한 영상의 식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천(天)과 정려(靜慮) 중에서도 또한 유정과 자연계[器世間]라는 색 등의 갖가지 변이가 있다. 마니주[摩尼珠]와 같은 것은 위신력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깨끗하고 묘한 광색을 변이한다.
017_0199_a_05L時節代謝,亦令內外身樹色等,形相改變,如說寒等,所逼切時,身等變異.捺落迦等,諸趣變異者,等卽等取一切惡趣,彼處色等,變異共了.及欲界等,諸界變異者,等取色界`無色界中,無似色等影像識故.於諸天中,及靜慮中,亦有有情及器色等,種種變異,如末尼珠,威神力故,種種淨妙光色變異.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이란 안 등이 의지하는 근[所依根]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색 등과 흡사한 영상을 현현시키는 안 등의 식은 갖가지로 변이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 있어서도 모든 분별을 일으키니, 곧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늙음 등의 변이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 등의 근에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고, 식에는 앎과 무지함이 있다고 설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표색(無表色)의 의지처가 변이하는 것과 같이 저것 또한 변이한다. 낙수 등의 변이에 의한 것 또한 이와 같다. ‘낙’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은 마음이 안정하기 때문이며, ‘고’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은 마음이 틀어져 움직이기 때문이다. 탐 등의 핍해와 시절의 대사의 변이도 또한 이와 같다. 나락가 등과 욕계 등은 몸에 의지하여 변이하고 식도 또한 변이함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무색계 중에서도 또한 감수작용[受] 등이 작용하게 되는 변이가 있어서 모든 식은 분별하는 것이다.
017_0199_a_13L顯相變異分別者,謂由眼等,所依根故,令似色等,影像顯現.眼識等識,種種變異,卽於此中,起諸分別.卽如前說,老等變異,隨其所應,而起變異.何以故?如說眼等根有利鈍`識明昧故.如無表色,所依變異,彼亦變異.由樂受等變異亦爾,如說樂者,心安定故.如說苦者,心散動故,貪等逼害時節代謝變異亦爾.捺落迦等,及欲界等,依身變異,識亦變異,如應當知.無色界中,亦有受等,所作變異.諸識分別
017_0199_b_01L‘남이 이끄는 분별’이란 선하고 악한 벗과 친히 가까이해서 일으키는 것과 바르고 바르지 않은 법을 듣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외도의 가비라(迦比羅)70) 등과 정법 중에 모든 소게다(騷揭多)71)의 모든 분별은 진리가 아닌 분별과 진리 그대로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능히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에 상응하는 두 가지 분별을 낳는다.
살가야견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게 되는 62견과 상응하는 분별이다. 즉 『범망경(梵綱經)』72)에서는 전제(前際)ㆍ후제(後際)ㆍ중제(中際)로 분별한다. 말하자면 나는 과거에 일찍이 있는 것인가라고 분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을 ‘집착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국집된 견해[見趣]’라고 말하는 것은 품류의 뜻이다.
017_0199_b_01L他引分別者,謂善`惡友,親近所起,及與聽聞正`非正法,爲因分別.卽是外道,迦比羅等,及正法中,諸騷揭多,所有分別,名不如理`如理分別.如是二種,隨其所應,能生邪見`正見相應二種分別.薩迦耶見爲因,所起六十二見相應分別,卽『梵網經』中,前際`後際中際分別,謂我過去爲曾有耶?如是等分別,名執著分別.言見趣者,是品類義.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散動分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산란하여 어지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산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분별이다. 그러므로 설하여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분별지를 어지럽게 혼란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해서 반야바라밀다를 어지럽게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보살의 열 가지 분별을 말한다’란 모든 보살은 능히 어언(語言)을 발하여 다른 사람을 이끌어서 진리라고 칭할 수 없는 열 가지 분별을 전변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체증[證會]해서 만약 곧바로 현전하면 가히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017_0199_b_11L散動分別者,散亂擾動,故名散動.此卽分別,是故說名散動分別.此卽擾亂,無分別智.何以故?由此擾亂,般若波羅蜜多故,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多.謂諸菩薩,十種分別者,謂諸菩薩,能發語言,他引而轉,不稱眞理,十種分別.何以故?證會眞理,若正現前,不可說故.
017_0199_c_01L【論】첫째는 비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無相散動]이고, 둘째는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有相散動]이며, 셋째는 증익의 산란한 움직임[增益散動]이고, 넷째는 손감의 산란한 움직임[損減散動]이며, 다섯째는 한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一性散動]이고, 여섯째는 다른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異性散動]이며, 일곱째는 자성의 산란한 움직임[自性散動]이고, 여덟째는 차별의 산란한 움직임[差別散動]이다. 아홉째는 명칭[名]과 같이 대상[義]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如名取義散動], 열째는 대상과 같이 명칭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如義取名散動]이다. 이러한 열 가지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모든 반야바라밀 중에서 무분별지를 설한다. 이와 같은 다스려지는 것[所治]과 능히 다스리는 것[能治]은 반야바라밀다의 뜻을 모두 포섭하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99_b_18L論曰:一無相散動`二有相散動`三增益散動`四損減散動`五一性散動`六異性散動`七自性散動`八差別散動`九如名取義散動`十如義取名散動.爲對治此十種散動,一切般若波羅蜜多中,說無分別智.如是所治`能治,應知具攝般若波羅蜜多義.
【釋】모든 『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모두 이와 같은 열 가지 산동의 대치를 설하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사리자여, 이 보살은 실로 존재하는[實有] 보살이어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색의 자성은 공(空)이지만 공에 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은 공이라서 색이 아니며 색은 공을 여의지 않는다.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왜냐하면 사리자여, 이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고 이를 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자성은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물듦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짐짓 객(客)의 명칭을 세워서 갖가지 법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킨다.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킨다. 언설하는 대로, 그렇게 그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은 보지 않으니,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을 생하지 않는다. 설명한 바와 같이 색에서도 내지 식에서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199_c_02L釋曰:於一切般若波羅蜜多中,具說如是十種散動對治.且如說言:世尊!云何菩薩,應行般若波羅蜜多?舍利子!是菩薩,實有菩薩,不見有菩薩.何以故?色自性空,不由空故,色空非色.色不離空,色卽是空`空卽是色.何以故?舍利子!此但有名,謂之爲色.此自性無生無滅`無染無淨,假立客名,別別於法,而起分別,假立客名,隨起言說,如如言說,如是如是,生起執著.如是一切菩薩不見,由不見故,不生執著,如說於色,乃至於識,當知亦爾.
이 중에서 ‘비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저 경전에서 설하여 “실로 존재하는[實有] 보살이라서”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로 존재함[實有]의 공을 보살의 체로 삼는다.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보살이라고 보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변계소집자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증익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의 자성은 공이지만”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즉 변계소집 자성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감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공에 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법성(法性)은 실유(實有)이기 때문이다.
017_0199_c_14L中爲對治無相散動故,彼經說言,實有菩薩等,謂實有空,爲菩薩體.爲對治有相散動故,卽彼經言,不見有菩薩等,謂遍計所執自性,永無有故.爲對治增益散動故,卽彼經言,色自性空等,謂卽遍計所執自性,永無有故.爲對治損減散動故,卽彼經言,不由空故等,謂彼法性,是實有故.
017_0200_a_01L‘한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은 공이라서 색이 아니며”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경계의 성품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은 공을 여의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변계소집의 색의 자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즉 이것은 공이기 때문이다.
‘자성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이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고 이를 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199_c_22L爲對治一性散動故,卽彼經言,色空非色等,淨`不淨境,性各別故.爲對治異性散動故,卽彼經言,色不離空等.謂遍計所執色自性無所有,卽是空故.爲對治自性散動故,卽彼經言,此但有名,謂之爲色等.
‘차별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등이 라고 말하는 것이다.
‘명칭과 같이 대상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갖가지 법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킨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상과 같이 명칭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킨다. 언설하는 대로, 그대로 그렇게 그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은 보지 않으니,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을 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 명칭에서도 대상에서도 여실하게 안다면 허망한 집착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017_0200_a_05L爲對治差別散動故,卽彼經言,無生無滅等.爲對治如名取義散動故,卽彼經言,假立客名,別別於法,而起分別等.爲對治如義取名散動故,卽彼經言,假立客名,隨起言說,如如言說,如是如是,生起執著.如是一切菩薩不見,由不見故,不生執著,此意說言,於名於義,如實了知,無妄執著.
【論】다른 부문[異門]에 의하면 의타기자성에 세 가지 자성이 있다. 어떻게 세 가지 자성은 차별이 없음이 성립되지 않는가?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의타기를 성립시키면, 즉 이것으로 인해서 변계소집과 원성실은 성립될 수 없다.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변계소집을 성립시키면, 즉 이것으로 인해 의타기와 원성실은 성립될 수 없다.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원성실을 성립시키면, 즉 이것에 의해서 의타기와 변계소집은 성립될 수 없다.
【釋】이것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므로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017_0200_a_13L論曰:若由異門,依他起自性,有三自性.云何三自性,不成無差別?若由異門,成依他起,不卽由此成遍計所執,及圓成實.若由異門,成遍計所執,不卽由此,成依他起及圓成實.若由異門,成圓成實,不卽由此,成依他起及遍計所執.釋曰:此義如前,不須重釋.
攝大乘論釋卷第四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알아야 할 양상[所知相], 즉 현상계와 본체계의 전개 양상을 의타기상ㆍ변계소집상ㆍ원성실상의 세 가지[三自性]로 분류해서 설명한다.
  2. 2)수념분별을 뜻하며 원래 역본에는 수념을 수합(隨合)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일 것이다.
  3. 3)유위상(有爲相)을 나타내는 작용.
  4. 4)원성실상(圓成實相)을 말한다.
  5. 5)의타기상(依他起相, paratantra-svabhāva)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依他起] 속성을 지니는 법의 양상이다. 그것은 일체법의 연생(緣生)의 자성,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다. 의타기상은 변계소집상처럼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소생법이므로 상주실유(常住實有)가 아니고 세속제(世俗諦)에서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의타기상은 인연소생법이므로 오위백법(五位百法) 가운데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위(位) 아흔네 가지 법이 포섭되지만, 식일원론의 입장인 유식학에서 의타기상은 결국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6. 6)눈[眼根]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다.
  7. 7)번뇌에 오염된 식을 말한다.
  8. 8)의근(意根)이다.
  9. 9)응수식(應受識)이라고도 하며, 색식(色識) 등 6식(識)을 말한다.
  10. 10)정수식(正受識)이라고도 하며, 안식 등 6식이다.
  11. 11)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식을 말한다.
  12. 12)하나 내지 아승기수(阿僧祇數)의 식이다.
  13. 13)자연계[器世間]를 말한다.
  14. 14)감각ㆍ지각 작용[見聞覺知]의 모든 언설에 의한 것이다.
  15. 15)자신과 타신(他身)이 의지하는 차별식을 말한다.
  16. 16)선악양도차별식(善惡兩道差別識)이라고도 하며, 생사의 여러 종류의 차별이다.
  17. 17)변계소집상(parikalpita-svabhāva)에서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한다[周遍計度]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계탁함으로써 잘못 보이는 집착된 대상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미혹의 근원을 특히 명칭이나 언설에서 찾는다. 변계소집상은 명칭에 의해 가정적으로 안립된 자성차별이다. 그것은 허망분별에 의해 실체[實我實法]로 착각되고 집착된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假法]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데도, 범부들은 미혹하여 허망한 견해를 내어서 마음 밖에 실법(實法)이 존재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집착한다. 변계소집상은 범부들의 허망한 견해에 의해 인연소생의 가아가법(假我假法) 위에 오인되어진 실아실법에 대한 미혹된 집착이다. 공허한 환상과 같은 것이어서 체성(體性)이 전혀 없다.
  18. 18)원성실상(圓成實相, pariniṣpanna-svabhāva)은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성품[圓滿成就眞實性]의 법의 양상이다. 현상계의 모든 법의 본체인 진여이다. 진여는 모든 법에 두루하고[圓],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으며[成],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한 법이 아니다[實].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이다.
  19. 19)여섯 가지의 내계(內界)란 5근과 7심계(心界)를 말한다.
  20. 20)신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21. 21)과거ㆍ미래ㆍ현재를 말한다.
  22. 22)즉, 기세간을 말한다.
  23. 23)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ㆍ혀ㆍ몸으로 냄새ㆍ맛ㆍ촉감을 감각하고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다.
  24. 24)상분(相分)과 견된(見分)을 말한다.
  25. 25)그릇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26. 26)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을 말한다.
  27. 27)과거ㆍ현재ㆍ미래를 말한다.
  28. 28)‘하나 등’이란 하나, 둘, 셋이라 하는 숫자를 말한다.
  29. 29)『해심밀경』 본문에는 ‘위빠사나 삼마지’로 되어 있다.
  30. 30)성교량(聖敎量)ㆍ정교량(正敎量)ㆍ량(量)이라고도 한다. 불교 논리학의 3량(量) 중의 하나이며 지식의 규준으로서 성인께서 가르치신 문장과 말을 의미한다.
  31. 31)3량(量) 중의 하나로서 진비량(眞比量)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비교하여 추측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꿀벌과 나비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꽃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하는 것이다.
  32. 32)근본을 나타내는 것을 명(名)이라 하고, 뜻을 설명하는 것을 구(句)라 하고, 구가 연결된 것을 문(文)이라 한다. 다시 말해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표현되며, 명신을 모아 구신을 만들고, 구신을 모아 문신을 만드는 것이다. 성교능전(室敎能詮)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33. 33)금강장보살은 『십지경」을 설한 사람이다.
  34. 34)심소법(心所法)을 말한다.
  35. 35)욕계(欲界)와 색계(色界) 두 세계만이 오식 심이 있다고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36. 36)현량이라고도 한다. 전오식(前五識)에 의해 현상 그대로의 상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37. 37)이하 제2차별장(差別章)이다.
  38. 38)유상식(有相識)은 상분(相分)을 말하며, 유견식(有見識)은 견분(見分)을 말한다.
  39. 39)범어 gāthā의 음역으로 ‘게송’이나 ‘게’로 번역한다. 좁은 의미로는 운문의 형식을 취한 경문을 말하고 흔히 교설의 끝 부분에 서술된다.
  40. 40)범어 brahmacārin으로서 범사라고도 음사하고 정예(淨裔)ㆍ정행(正行)이라고도 번역한다. 바라문의 생활 가운데 4기(期)가 있는데, 이것은 제1기로서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는 스승에게 가서 훈식(熏食)을 피하고, 몸에 치장하는 것을 금하고, 모든 정욕을 멀리하고, 매일 아침에 나아가 밥을 빌어다가 스승에게 바치고, 스승이 먹고 난 뒤에 자기가 먹는다. 또한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 스승의 잠자리를 돌보는 등 여러 가지 고행을 하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성지(聖智)에 이르기 위하여 정진한다.
  41. 41)조절하기 어려운 마음을 의미한다.
  42. 42)상분(相分)을 말한다. 심식(心識)이 인식작용을 일으킬 때, 인식할 영상을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여 대상으로 삼는 것을 상분이라고 한다.
  43. 43)견분(見分)을 말한다. 견분은 객관의 형상을 보는 인식작용으로서 상분을 아는 작용이다. 심체(心體)가 전변하여 사물을 아는 공용을 일으켜서 이에 의해 능히 알게 되기 때문에 견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44. 44)이하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다.
  45. 45)인식하는 주체가 각기 다른 것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는 지혜를 말한다.
  46. 46)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인식이 현재 실재하는 대상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47. 47)의식적인 노력[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일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48. 48)다음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49. 49)자재자(自在者)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것이다. 즉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50. 50)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뀐다. 지관(止觀)을 닦는 유가사(瑜伽師)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51. 51)무분별지를 따라 바뀐다.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는 어떤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52. 52)의해(意解)란 마음에 의한 요해를 말한다.
  53. 53)이하 제3초 분별장이다.
  54. 54)변계소집을 일으키는 분별인 능변계가 어떤 식인가에 대해서 이 논서에서는 의식만을 들었지만, 후대의 『성유식론』 제8권에서는 의식과 제7말나식을 든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착각하고, 의식이 5온을 대상으로 또한 실아로 착각한다.
  55. 55)소변계(所遍計)는 능변계의 계탁 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어지는 대상, 즉 비슷하게 현현된 자아[似我]와 법[似法]이다. 분별망집은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소변계는 의타기의 법, 즉 5온ㆍ12처ㆍ18계 등의 인연소생법이다.
  56. 56)변계소집상은 소변계가 능변계의 식 위의 상분으로 떠올라 있을 때, 그것이 마음밖에 실재한다고 집착하여, 그 허망한 생각 앞에 나타나는 실아실법(實我實法)의 허망한 모습이다.
  57. 57)심[尋, vitarka]의 심소는 부정심소(不定心所) 중의 하나이다. 말을 일으키기 전에 심구 사량하는 심리작용으로서,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尋求)한다. 참고로 말하면 사찰[伺, vicāra]의 심소가 그 대상을 세밀하게 분별하여 사찰(伺察)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이나 불안이 있게 되므로 부정심소라 한다.
  58. 58)계탁분별을 말한다. 즉 널리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에 걸쳐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일들을 미루어 상상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59. 59)수념분별(隨念分別)을 말하는 것으로 끝없는 과거의 일들을 추억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제 6식의 작용이다.
  60. 60)색 등의 외경(外境)을 가리킨다.
  61. 61)천수(天授)의 착오로 보여진다.
  62. 62)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잡염분이고,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청정분이다.
  63. 63)우리는 아득한 옛적부터 의타기의 자성 위에 집착해서 아법(我法)을 분별하고 아법의 모습을 띤 제법(諸法)의 종자를 심식에 훈습시켜 왔기 때문에, 그 습성에 의해 아법에 비슷하게 잡염의 의타기상을 일으킨다. 그 생기된 잡염의 의타기상에 다시 잠재의식에 의해 전도의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은 다시 서로 연(緣)이 되어 생사에 전전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다. 청정한 눈을 지닌 사람의 눈에 여러 안질의 증상들을 멀리 여의고 어지러운 경계가 항상 없는 것이 원성실상이다.
  64. 64)대망(待望)한다는 뜻이다.
  65. 65)명칭[名]과 대상[義]을 말한다.
  66. 66)‘소’라고 하는 명칭을 의미한다.
  67. 67)상(想)이라 하는 것은 ‘소’라고 하는 개념이 표상화된 것을 말하고, 유상(有想)이란 이러한 표상을 ‘소’라는 실체로서 느끼는 것이다.
  68. 68)가립(假立)된 능전과 소전에서 능전은 명칭이고 소전은 명칭에 의해서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능전은 명칭[名]에 해당되고 소전은 대상[義]에 해당된다.
  69. 69)시절의 대사(代謝)라고 하는 것은 춘하추동의 4계절의 변화를 말한다.
  70. 70)범어 Kapila의 음사로 황두(黃頭) 또는 금두(金頭)라고 번역한다. 수론학파(Sāṁkhya)의 개조(開祖)의 이름이다.
  71. 71)범어 sugata의 음사로서 선서(善逝)라고 번역한다. 부처님 10호 중의 하나.
  72. 72)대승의 범망경이 아니라 아함부에 있는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을 말한다. 이 경에서는 전ㆍ중ㆍ후로 나누어 62견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