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곱 가지 뜻을 바로 이 논에서 말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모양[相]이요, 둘째는 장(障)이요, 셋째는 진실(眞實)이요, 넷째는 다스림을 닦아 익힘[硏習對治]요, 다섯째는 닦아 머무름[修住]이요, 여섯째는 과위 얻음[得果]에 의하여 이 게송을 말하다.
허망한 분별(分別)에서 있음이니 저 곳에는 둘이 있지 않는지라 저 가운데에는 공(空)만 있을 뿐이요 여기에도 역시 저것이 있네.
017_0306_a_13L虛妄分別有, 彼處無有二, 彼中唯有空,
於此亦有彼。
017_0306_b_01L 여기에서 허망한 분별이라 함은, 분별이 능히 집착함[能執]과 집착할 바[所執]를 말한다. 있음이라함은, 다만 분별만 있을 뿐이다. 저 곳이라 함은, 허망한 분별을 말한다. 둘이 있지 않음이라 함은 능히 집착함과 집착할 바인 그 둘이 영원히 없음을 말한다. 저 가운데라 함은, 분별의 가운데를 말한다. 공(空)만 있을 뿐이라 함은, 다만 이의 분별은 능히 집착할 바를 떠났기 때문에 공(空)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도라 함은, 농(能)가 공한 가운데를 말함이다. 역시 저것이 있다함은, 허망한 분별이 있음을 말한다. 만일 법이 이곳에 없으면 그 법으로 말미암아 이곳에는 공(空)하고 그 밖의 것은 있음이 된다고 할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이 안다면 곧 공한 모양의지혜에 뒤바뀜이 없을 것이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온갖 법은 공함도 아니고 공 아님[不空]도 아니며 있고 없고 그리고 있음이라 하나니 그를 중도(中道)의 이치라 이름하네.
017_0306_b_02L故說一切法, 非空非不空, 有無及有故,
是名中道義。
온갖 법이라 함은, 있음을 허망한 분별이라 이름하고 함이 없음을 공이라고 이름함을 의미한다. 공함도 아니라 함은, 공으로 말미암고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공 아님[不空]이 아니라 함은, 능히 집착함과 집착할 바로 말미암기 때문임을 말한다. ‘있고’라 함은,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임을 말한다. ‘없고’라 함은 능집, 소집이 없기 때문임을 말한다. ‘그리고 있음’이라 함은, 허망한 속에는 참다운 공[眞空]이 있기 때문이며, 진공 속에는 또한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중도(中道)의 이치라 이름한다 함은, 온갖 법이 한결같이 공함이 아니며, 또한 한결같이 공 아님[不空]도 아니다. 그와 같은 따위의 글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따위와 어기지 않나니, 경에서 온갖 법은 공함이 아니며 공아님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와 같이 허망한 분별의 모양 있음과 모양 없음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지금에는 다음으로 그 자체상(自體相)을 설명하겠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을 말한다.
대상과 감관과 ≺나≻와 그리고 식(識)임은 근본식(根本識)이 생기어 저와 같은지라 다만 식(識)만 있고 저가 없나니 저가 없으므로 식도 역시 없도다.
017_0306_b_15L塵根我及識, 本識生似彼, 但識有無彼,
彼無故識無。
017_0306_c_01L ‘대상[塵]과 같음이란, 근본식의 나타나는 모양이 빛깔 따위와 같음을 말한다. 감관[根]과 같음이란, 식(識)이 5근(根)과 같아서 자타(自他)의 몸에서 나타남을 말한다. ≺나≻와 같음이란, 의식(意識)이 아견(我見)과 무명(無明)따위로 더불어 서로 응하는 때문임을 말한다. 식(識)과 같음이란,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다. 근본식이란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말한다. 생기어 저와 같음이란, 대상 따위인 네 가지 물건과 같음을 말한다. 다만 식만 있다함은, 다만 산란한 식(識)만이 있음을 말한다. 저가 없다함은, 네 가지 물건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대상과 같고 감관과 같음은 진실한 형체의 식이 아니기 때문이요, ≺나≻와 같고식과 같음은, 나타남이 대상[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저가 없으므로 식(識)도 역시 없도다’라 함은, 대상이 이미 없으매 식도 역시 없다. 이 식(識)이 취하는 바 네 가지 경계(境界)란, 대상ㆍ감관ㆍ≺나≻ㆍ식(識)에 해당한 것들을 말함이니, 실로 그 체상(體相)이 없다. 취할 바[所取]가 이미 없으매 능히 취함(能取)인 산란한 식(識)도 역시 없다. 그와 같이 체상(體相)을 설명하였으니, 지금에 명의(名義)를 밝히겠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산란한 식은 허망한 성질임이 이 내용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나니 실로 있음과 실로 없음 아님이며 저를 없애기 때문에 해탈함이네.
017_0306_c_06L亂識虛妄性, 由此義得成, 非實有無故,
滅彼故解脫。
산란한 식은 허망한 성질임이 이 내용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함은, 온갖 세간(世間)은 다만 산란한 식뿐이다. 이 산란한 식을 어찌하여 허망함이라 이름하는가 하면, 대상이 진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이며, 그 자체가 산란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실로 있음 아니라 함은, 나타남에 네 가지 물건과 같으나, 네 가지 물건은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실로 없음 아니라함은, 온갖 것이 영원히 없음 아니라고 말함이니, 산란한 식(識)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산란한 식이 영원히 없다고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그러기에 게송에서 ‘저를 없애기 때문에 해탈함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영원히 계박이 없다고만 고집한다면 해탈이 모두 성취되지 못할 것이며, 곧 삿된 소견을 일으켜 청정한 법과 청정하지 않은 법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허망한 체상을 설명하였으니, 지금에 다음으로 허망에 해당하는 모양을 설명하겠다. 만약 허망뿐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3성(性)을 능히 포섭할 것인가.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을 말한다.
분별(分別)과 그리고 의타(依他)와 진실(眞實)이 오직 삼성(性)이니 대상과 산란한 식(識)이 없으며 그리고 둘이 없기 때문에 말함이네.
017_0306_c_18L分別及依他, 眞實唯三性, 由塵與亂識,
及二無故說。
017_0307_a_01L 분별성(分別性)이란, 6진(塵)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음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음을 말함이다. 의타성(依他性)이란, 오직 산란한 식(識)만 있을 뿐이고 진실함 아닌 것이 마치 눈흘림의 물건과 같음을 말한다. 진실성(眞實性)이란, 능히 취함[能取]과 취할 바[所取]는 둘다 없고, 진실은 있고 없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허망에 해당하는 모양을 설명하였으니, 지금에는 허망하여 아무것도 없는 방편에 들어가는 모양을 설명하겠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유식(唯識)에 의하므로 말미암아 대상의 실체 없다는 뜻이 성립되며 대상은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근본 식[本識]이 곧 생김 아니네.
017_0307_a_03L由依唯識故, 境無體義成, 以塵無有體,
本識卽不生。
온갖 3계(界)는 다만 식(識)만 있을 뿐이니, 그와 같은 뜻에 의하여 바깥 대상의 자체와 모양은 결코 있는 것 아닌 그 지혜가 성립된다. 소연(所緣)인 대상이 실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능연(能緣)인 유식도 역시 생김 아니니, 그러한 방편으로써 곧 능히 취함, 취할 바가 아무 모양이 없는 것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인식할 바엔 모든 대상이 이미 그 실체가 없으니, 그러므로 식의 성품없다는 이치가 성립된다.
017_0307_a_10L所識諸塵旣無有體,是故識性無理得成。
식(識)아님과 그리고 식 그것이 그 뜻으로 말미암아 다 평등하네.
017_0307_a_12L不識及與識疏本云應知識不識, 由是義平等。
식(識)아님이란, 제 성품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식이 아니다. 이 진실하여 아무것도 없는 법의 성품이 진실 아닌 대상을 능히 나타내기 때문에 식(識)이라 말한다. 허망하여 아무것도 없는 방편에 들어가는 모양을 설명하였으니, 지금에는 허망함인 총상(總相)을 설명해야겠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017_0307_b_01L 마음이란, 다만 대상의 전체적인 모양[通相]만을 분별하는 것이며, 만약 대상의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분별한다면 마음법이라 말하나니,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 따위를 의미한다. 이미 총상과 별상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니,다음으로는 생기는 모양을 밝히겠다.
첫째를 연식(緣識)이라 말하고 둘째는 바로 그 용식(用識)이며 대상에서 받아들이거나 분별하며 이끌어 행하는 것을 마음 법이라 하네.
017_0307_b_02L第一名緣識, 第二是用識, 於塵受分別,
引行謂心法。
연식(緣識)이란,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말함이니, 여타의 식(識)이 생기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용식(用識)이란, 아리야식으로 인하여 대상 중에서 일어나는 것을 용식이라고 말한다. 대상에서 받아들임이란, 대상의 괴로움 따위를 받아들임을 말함이니, 느낌의 쌓임[受陰]을 의미한다. 분별하며 라고 함은, 대상의 차별을 이리저리 선택함을 말함이니, 생각의 쌓임[想陰]을 의미한다. 이끌어 행함이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택함이니, 욕망ㆍ사유(思惟)ㆍ작의(作意) 따위를 말하는 것으로써 그를 지어감의 쌓임[行陰]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느낌[受] 따위를 마음 법이라고 이름한다. 위에서 생기는 모양을 설명하였으니, 허망한 더러움[汚染]의 모양을 설명해야겠다.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덮어 가리고 또는 내세우며 잡아 인도하고 역시 껴잡으며 원만하게 하고 세 가지로 이루며 받아 접촉하고 또는 끌어당기네.
017_0307_b_12L覆藏及安立, 將導與攝持, 圓滿三分成,
領觸幷牽引。
집착하고 또는 앞에 나타나며 괴로움이기 세상은 괴롭기만 하고 세 가지 어려움, 두 가지 어려움 또 일곱 가지 어려움이 허망 때문이네.
017_0307_b_14L執著及現前, 苦故惱世閒,
三種二種難, 亦七由虛妄。
017_0307_c_01L 덮어 가림이란, 무명으로 말미암아 능히 실다운 견해를 가리기 때문이다. 내세움이란, 온갖 지어감[行]으로 말미암아 업(業)ㆍ훈습(薰習)을 본식(本識) 속에 다 능히 내세우기 때문이다. 잡아 인도함이란, 본식과 의식(意識)으로 말미암아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태어날 곳에 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껴잡음이란, 이름[名]과 물질[色]로 말미암아 능히 자체의 다섯 무더기[五趣]를 껴잡기 때문이다. 원만하게 함이란, 여섯 감관[六八]으로 말미암아 능히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이룸이란, 감관ㆍ대상ㆍ의식[識]에 의하여 모든 닿음[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받아 접촉함이란, 즐거움ㆍ괴로움 따위로 말미암아 덜하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끌어당김이란, 탐애(貪愛)로 말미암아 업으로 하여금 능히 후생에 태어남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집착함이란, 4취[取]로 말미암아 능히 모든 식(識)으로 하여금 애욕 따위의 4처(處)에 물들고 집착하여 그에 따라 나게 되기 때문이다.앞에 나타남이란, 업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이미 지은 모든 업이 내생에 나아가게 된다고 하여 과보에 힘을 줌이 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란, 나기[生]로 말미암아 늙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괴롭기만 함이란, 3계(界)는 무명(無明)과 그리고 늙어 죽음 따위에게 괴롭힘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언제나 괴로움과 어려움을 받기 때문이다. 세 가지 어려움, 두 가지 어려움과 또, 일곱 가지 어려움이 허망 때문이라 함은, 세 가지 어려움이란, 번뇌의 어려움, 업의 어려움, 나기의 어려움 따위를 말한다. 번뇌의 어려움이란, 무명(無明), 탐애(貪愛), 잡음[取]을 말한다. 업이 어려움이란, 지어감과 존재[有]를 말한다. 나기의 어려움이란, 그 밖의 일곱 부분을 말한다. 두 가지 어려움이란 이른바 원인의 어려움[因難], 결과의 어려움[果難] 그것이다. 원인의 어려움이란 번뇌업 부분을 말하고 결과의 어려움이란 그 밖의 부분을 말한다.
일곱 가지 어려움이란, 일곱 가지 원인을 말한다. 첫째는 뒤바뀐 원인이니 무명을 말하며, 둘째는 끌어당기는 원인이니 온갖 지어감을 말하며, 셋째를 잡아 인도하는 원인이니 본식(本識)과 의식(意識) 두 가지를 말하며, 넷째는 껴잡는 원인이니 이름과 물질과, 여섯 감관을 말하며, 다섯째는 수용하는 원인이니 닿음과 느낌을 말하며, 여섯째는 끌어내는 원인이니 욕망[愛]ㆍ잡음[取]ㆍ존재[有]를 말하며, 일곱째는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원인이니 나기와 늙어 죽음을 말한다. 허망 때문이라 함은, 그와 같은 괴로움과 어려움은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허망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아홉 가지 모양이 있으니, 이른바 있는 모양, 없는 모양, 제 모양, 포섭되는 모양, 모양 없는 방편에 드는 모양, 차별의 모양, 온갖 명칭의 모양, 생기는 인연의 모양, 더러움의 모양이 그것이니 그 뜻은 앞에서 밝혀졌다. 허망을 설명했는데, 앞으로는 방편을 설명하여 공(空)의 뜻을 밝히리니 그로 말미암아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한다.
자체와 모양과 그리고 뭇 명칭과 그의 내용과 또는 분별 그것과 이치를 성립함의 알아야함 그것을 그와 같이 대략 공을 해석하네.
017_0307_c_20L體相及衆名, 其義與分別, 成立理應知,
略解空如是。
어떻게 공(空)의 모양을 알아야 할 것인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017_0307_c_22L云何應知空相?偈言:
017_0308_a_01L 둘이 없고 이 없음만 있나니 그 둘을 공한 모양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있음 아니고 없음 아니며
다름 아니고 또한 같음 아니네.
017_0307_c_23L無二、有此無, 是二名空相, 故非有非無,
不異亦不一。
둘이 없음이란,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함[能取]이 없음을 말한다. 이 없음만 있다함은, 다만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없음만 있을 뿐임을 말함이다. 그 둘을 공(空)한 모양이라 말한다함은, 둘이 없음과 없음만 있는 그것을 바로 공한 모양이라 이름한다고 말함이니, 이것은 참다운 공[眞空]에는 둘의 모양이 없음을 밝힘이다. 그 법은 둘이 없는 것으로써 그 성품이 되었기 때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어찌하여 있는 것 아니냐 하면, 바로 둘이 없기 때문이며 어찌하여 없는 것 아니냐 하면, 바로 둘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있음 아니고 없음 아니다’고 말한 것이니, 그를 참다운 공의 모양이라 이름한다. 다름 아니고 또한 같음 아니라 함은, 허망한 분별과 다른 모양이 아니며, 또 한 같은 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만약 다르다면 법의 성품이 법과 더불어 다를 것이니, 그 뜻이 옳지 못하다. 비유컨대 5음(陰)이 무상(無常)의 성질과 괴로움의 성질과 더불어 다름과 같을 것이다. 만약 같다면, 청정한 경계의 지혜와 그리고 전체적인 모양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니 그와 같은 도리로 참다운 공이 허망한 것과 더불어 같은 모양, 다른 모양을 떠났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있는 모양이 아니며, 있지 않은 모양이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안이며, 다른 모양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뭇 명칭이라고 알아야 할 것인가.
여여(如如)와 그리고 실제(實際)와 모양 없음(無相)과 또는 진실(眞實)과 법계(法界)와 법신(法身) 따위 그것으로 공(空)의 뭇 명칭을 대략 말하네.
017_0308_a_16L如如及實際, 無相與眞實, 法界法身等,
略說空衆名。
어떤 것을 뭇 명칭의 내용이라고 알아야 할 것인가.
017_0308_a_18L云何衆名義應知?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음, 뒤바뀜 아님과 모양 없어짐과 거룩한 지혜의 경지와 거룩한 법의 원인, 그리고 의지가 바로 뭇 명칭 내용의 순서이네.
017_0308_a_19L非變異不到, 相滅聖境界, 聖法因及依,
是衆名義次。
017_0308_b_01L 다름이 없는 것으로 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여여(如如)라고 이름하며, 항상 그와 같아서 버리지 않고 뒤바뀜이 없는 것으로 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實際)라고 말한다. 뒤바뀜의 종류와 그의 경계가 아니고, 모양이 없어짐으로 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모양 없음이라고 말하며,온갖 모양을 떠나고 분별이 없고 거룩한 지혜의경계이고 제일의(第一義) 지혜로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진실(眞實)이라고 말한다. 거룩한 법의 원인으로 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법계(法界)라고 말하나니, 거룩한 법이 그 경지에 의하여 생기는데, 이 중에서는 원인인 뜻이 바로 계(界)라는 뜻이 된다. 법의 몸을 껴잡아 지니는 것으로 내용이 되었기 때문에 법신(法身)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와 같이 공에 대한 뭇 명칭의 내용을 이미 밝히었다. 어떤 것을 공(空)의 분별이라고 알아야 할 것인가.
어느 자리의 지위가 공(空)의 부정(不淨)이며, 어느 자리의 지위가 공(空)의 깨끗함인가.
017_0308_b_08L何處位空不淨?何處位空淨?
때[垢] 있음과 또한 때 없음이네.
017_0308_b_09L有垢亦無垢。
만일 이 지위 중에 있어서 바로 온갖 때[垢]의 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와 함께 서로 어울리면 그 지위 자리에서는 부정(不淨)하다고 말한다. 또 만일 이 지위에 있어서 온갖 때[垢]를 벗어나면, 그 지위 자리에서는 깨끗함이라고 말한다. 만일 이미 때[垢]와 서로 어울리었다가 그 후에 때[垢]가 없다면 변하여 달라지는 법을 떠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어찌 무상(無常)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답이 있다.
먹는 이와 먹을 대상이 공했으며 몸과 그리고 의지할 곳도 공했으며 능히 보는 그것과 진리 그대로와 구할 바와 얻음에 도달함이 공했네.
017_0308_b_23L食者所食空, 身及依處空, 能見及如理,
所求至得空。
017_0308_c_01L
그 중에서 능히 먹는 이[能食]가 공했다 함은, 안의 감관에 의하여 말함이요, 먹을 대상[所食]이 공했다 함은 바깥 대상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몸은 바로 능히 먹는 이가 되고, 먹을 대상이란 의지할 곳이 되나니, 그 둘다 공하기 때문에 안팎의 공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요소[大]의공함이란, 그릇 누리[器世界]가 어디에나 두루하기 때문에 요소라고 말함이니, 그가 공한 것을 요소의 공함이라고 말한다. 안의 감관과 몸과 그리고 그릇 누리인 그 법이 공한 것을 분별이 없는 지혜로만이 그 공한 것을 볼 수 잇나니, 이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공이기에 공(空)의공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리 그대로는 제일의(第一義) 모양에 의해서만이 그 법의 그 법의 공함을 관찰할 수 있나니, 그를 제일의(第一義) 공함이라고 말한다. 이 보살이 공(空)을 닦아 행하는 것을 얻으려 함은, 바로 법공(法空)인데 무엇을 닦아 행하는 것이냐 하면, 첫째, 함이 있음의 선(善)과 둘째, 함이 없음의 선(善)인 두 선을 얻음을 달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를 함이 있음의 공함이 없음의 공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017_0309_a_01L언제나 남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나니, 한결같이 언제나 남을 이익하게 하기에 그 공(空)을 닦으므로 필경의 공함이라고 말한다. 보살은 나고 죽고 하는 것을 버리지 않기를 위하는데, 그 나고 죽음은 앞과 뒤가 없다. 중생들은 그것이 공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고달파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버리고 떠나려 하나니, 그 공한 것을 앞뒤가 없음의 공함이라고 이름한다. 착한 일 하기를 끝없이 하여 부처님은 남김 없는 열반에 들 수 있고, 그 공(空)으로 인하여 남을 이익하는 일을 버리지 않나니, 그를 버리지 않음의 공함이라고 이름한다. 청정한 계성(界性)이 되는 성품 이치란, 종류 이치를 저절로 얻기 때문에 성품이라 이름함이니, 그 공함 성품의 공함이라고 이름한다. 위대한 상호(尙好)를 얻기 위한 그 대인(大人)의 상호와 그리고 작은 상호인 그 두 상호를 얻기 위하여 그 공함을 수행하나니, 그를 모양의 공함이라고 이름한다. 부처님 법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보살이 저 십력(十力)ㆍ4무외(無畏) 따위와 부처님의 특수한 법을 닦나니, 청정하게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보살이 그 공함을 닦기에 그를 온갖 법의 공함이라고 이름한다. 그와 같이 열 네 가지 공함을 이미 내세웠으니, 응당 그 모양 분별함을 알아야 한다.그 열 네 가지 중에서 어떤 법을 공함이라고 이름하는가.
사람[人]과 법(法) 둘 다 모두 없기에 이 중에서 공함이라고 이름 함이니 저 없음과 없음 아님 그것 때문에 이 중에서 별다른 공함을 두었네.
017_0309_a_02L人法二皆無, 此中名爲空, 彼無非是無,
此中有別空。
사람과 법은 둘 다 없기에 그 법을 공하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바로 법 있는 것 아니어서 결정적으로 있는 그것도 역시 공한 것이니, 위에서 능히 먹는 이 따위인 열 넷의 자리를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두 법을 바로 공함이라고 이름한 것은 공(空)의 진실한 모양을 밝히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최후에 두 가지 공[二空]을 내세운 것이다. 첫째는 있음 아닌 공[非有空] 그것이다. 두 가지 공을 세운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하면, 사람과 법에 증가함을 떠나기 위해서이며, 사람과 법이 공했다고 훼방하는 것을 떠나기 위해서이다. 순서대로 그와 같이 공에 대한 분별을 알았으니, 어떤 것이 공의 성립함인 뜻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청정하지 않음이라고 말한다면 중생은 해탈할 수가 없을 것이며 만일 때[垢]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덕을 베풀 것이 없게 되리라.
017_0309_a_11L若言不淨者, 衆生無解脫, 若言無垢者,
功用無所施。
만약 모든 법의 공함에서 다스림이 있기 전에도 객진(客塵)에게 더렵히지 않았기 때문에 저절로 청정하다면, 번뇌장(煩惱障)이 없기 때문에 공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모든 중생이 응당 해탈을 얻을 것이며, 만일 다스림이 이미 일어났더라도 제 성품이 청정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해탈을 얻기 위하여 도를 닦는 공력도 보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더러움도 아니고 더러움 아님도 아니며 청정함도 아니고 청정함 아님도 아님은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번뇌인 객진에게 더럽힘이네.
017_0309_a_18L不染非不染, 非淨非不淨, 心本淸淨故,
煩惱客塵故。
017_0309_b_01L 어찌하여 더러움도 아니고 더러움 아님도 아니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청정함도 아니고 청정함 아님도 아니냐 하면, 번뇌인 객진에게 더럽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공(空)의 분별을 대략 설명하였다. 그리고 공의 뭇 내용을 내세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자체 모양이 됨이요, 둘째는 내세움이 됨인 그것이다.
어떤 것을 자체 모양이 됨이라 하느냐 하면, 모양이 있기 때문이며,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 모양이 있음이란, 있음의 모양 떠나고 없음의 모양 떠나며, 같은 모양 떠나고 다른 모양 떠난 그것이다. 내세움이란, 뭇 명칭 따위의 네 가지 내용을 응당 분별함인 그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위에서 『중변분별론』「상품(相品)」을 해석한 게송은 이미 끝냈다.
변장(邊障)과 일방장(一方障)과 중장(重障)과 평등장(平等障)과 그리고 취사장(取事場)이 있는데 지금에 두 가지 장(障)을 설명하리라.
017_0309_b_06L遍及一方重, 平等及取捨, 今說二種障。
그 중에 변장(邊障)이란, 번뇌장과 일체지장(一切智障)이니, 보살종성(菩薩種性)인 여러 사람들에게는 그 2장(障)이 두루 있기 때문이다. 일방장(一方障)이란, 번뇌장이니, 성문(聲聞)들의 여러 사람에게 한해서이다. 중장(重障)이란, 그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사람들의 욕심 따위인 온갖 지어감[行] 중에서 어느 거친 번뇌를 의미한다. 평등장(平等障)이란, 평등한 모든 지어감 중에서 그 지어 감을 따르는 어느 나고 죽음 그것을 의미한다. 취사장(取捨障)이란, 보살종성인 모든 사람들에게 머무름 없는 곳인 열반을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을 의미한다. 이치에 알맞게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장(障)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첫째는 보살종성인 사람이요, 둘째는 성문따위의 사람이다. 다시 번뇌의 모양에 관한 아홉 가지가 있다.
아홉 가지 모든 번뇌 결박을 이 중에서 번뇌장이라고 말한다. 그 번뇌장들은 무엇을 장애하는가.
017_0309_b_16L 九種諸惑結,此中說煩惱障。此諸煩惱障爲障誰?
싫어하는 마음과 제해 버리는 마음과 그리고 진실한 견해를 장애하네.
017_0309_b_18L厭離及除捨, 實見。
애욕인 결박은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을 장애한다. 마음이 굳게 가린 장(障)은 제해 버리는 마음을 장애하나니, 그 번뇌로 인하여 어기거나 걸리는 경계 중에서 능히 제해 버리는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한다. 그 밖의 결박은 진실한 견해를 장애한다. 어떻게 일어나는 장(障)이 바로 모든 번뇌의 순서와 그리고 신견(身見)인가.
017_0309_c_01L 신견(身見)에 의자한 모든 법과 사라짐과 도와 3보(寶)를 장애하며 이끗과 존경을 받으려는 따위와
재물 희사함과 만족 아는 것 장애하네.
017_0309_b_24L身見所依法, 滅道三寶障, 利養恭敬等,
輕財知止足。
그는 바로 그 밖의 번뇌로서 그가 다섯 군데의 장(障)이다. 아만장(我慢障)이란, 신견(身見)을 없애거나 떠나려고 할 적에 다스리는, 즉 바르게 관찰하는 지혜의 다름있는 종류와 다름이 없는 종류를 장애하나니, 그 다름이 없음의 종류인 아만(我慢)이 자주 행하기 때문에 그 신견을 없애지 못하게 된다. 무명(無明)결박이란, 신견(身見)이 의지한 자리를 멀리 떠나려고 할 적에 진실한 견해의 장애가 되나니, 그로 인하여 잡음인 쌓임[取陰]을 멀리 떠나지 못한다. 소견 결박이란, 사라짐의 진리를 통달하려고 할 적에 장애를 일으키나니,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은 사라짐의 진리[滅諦]에서 두려움을 내기 때문이고 사견(邪見)은 사라짐의 진리에서 비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잡음인 결박(取結)이란, 도의 진미[道諦]를 통달하려고 한적에 장애를 짓나니, 별다른 도리에 의하여 생각하여 간택하며 청정함 얻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의심 결박이란, 3보(寶)를 통달하려고 할 적에 장애를 짓나니, 3보의 공덕을 믿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의 결박이란, 이끗과 존경받는 것을 멀리 떠나려고 할 적에 장애를 짓나니, 그것이 허물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색한 결박이란, 재물을 희사하거나 만족 아는 것을 행하려고 할 적에 장애를 짓나니, 재물 따위에 집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선법(善法)을 장애함에 있어 또 열이 있는데, 다시 열 가지 착한 법[善法] 따위를 별로 장애함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수행하지 않음과 옳지 못한 수행과 수행함이 진리에 합하지 못함이며 착함을 내지 않음과 바른 생각하니 함과 돕는 양식[資量]이 갖추지 못함이네.
017_0309_c_18L不行非處所, 所行不如理, 不生不思量,
資糧不具足。
성품과 그리고 벗이 걸맞지 못함과 마음이 지치기에 싫어서 떠남이며 수행함이 걸맞지 못하는 것과 나쁜 사람 원수와 함께 머무름이네.
017_0309_c_20L性友不相稱, 心疲故厭離,
修行不相稱, 惡怨人共住。
거친 허물과 번뇌인 셋 중의 어느 하나와 반야를 성취하지 못함인 그것이며 자성(自性)의 거친 번뇌와 게으름과 그리고 방일함이네.
017_0309_c_21L麤惑三隨一,
般若不成就, 自性重煩惱, 懈怠與放逸。
있음과 그리고 욕락에 집착함과 못난 것의 마음 역시 그러하며 믿지 않음과 원하는 것 없음과 말과 같이 그 뜻을 생각함이네.
017_0309_c_22L著有及欲塵, 下劣心亦爾, 不信無願樂,
如言思量義。
법을 존중 않음과 이곳 중히 여김과 중생에게 대비심이 없는 그것이며 들음이 없어 재앙됨과 들음이 적음과 삼매(三昧)의 양식이 줄어짐 그것이네.
017_0309_c_24L不敬法重利, 於衆生無悲,
聞災及少聞, 三昧資糧減。
017_0310_a_01L
그와 같은 여러 장(障)에서 어느 것이 착한 법이 되는가.
017_0310_a_01L如是諸障,何者爲善法?
착한 법과 보리(菩提)와 껴잡음과 지혜 있음, 미혹 없음, 장애 없음과 회향(廻向)과 두려움 없음, 질투함과 자재로움이 바로 착한 법의 열 가지이네.
017_0310_a_02L善菩提攝取, 有智無迷障, 迴向不怖嫉,
自在善等十。
그와 같은 착한 법 따위의 모든 법 중에서 어느 것이 장애를 받으며, 어느 것이 장애하는가를 알아야 하겠기에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겠다.
017_0310_a_04L如是善等諸法中,何者被障、何者爲障應知?答:
그 열 가지에 각기 셋의 장애가 열 가지 사실 중에 있다고 알리.
017_0310_a_06L此十各三障, 十事中應知。
착한 법에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옳지 못한 수행이요, 셋째는 수행함이 진리에 합하지 못함이다. 보리에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착함을 내지 않음이요, 둘째는 바른 생각을 내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돕는 양식이 갖추지 못함이다. 보리를 껴잡음이란, 보리 마음 내는 것을 바로 보리를 껴잡음이라고 이름한다. 그 마음에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성품과 걸맞지 못하는 행(行)이요, 둘째는 벗이 걸맞지 못함이요, 셋째는 마음이 몹시 지쳐서 싫어하고 떠남이다. 지혜 있음이란, 바로 보살의 체성(體性)이다. 그 법을 아는 데에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함이 걸맞지 못함이요, 둘째는 나쁜 벗들과 함께 머무름이요, 셋째는 나쁜 원수와 더불어 함께 머무름이다. 그 중의 나쁜 사람은 어리석은 범무를 의미하며, 나쁜 원수는 보살의 공덕을 장애하고 보살의 허물을 보는 이를 말한다.
017_0310_b_01L미혹 없음이란, 마음이 산란하지 않음이다. 거기에도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뒤바뀜인 거친 허물이요, 둘째는 번뇌 따위이니, 3장(障) 중의 어느 하나가 남은 그것이요, 셋째는 성취하도록 하는 해탈반야(般若)가 성취하지 못하고 원만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장애 없음이란, 온갖 장애를 없애고 떠나는 것을 바로 장애 없음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도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거친 번뇌요, 둘째는 게으름이요, 셋째는 방일함이다. 보리에 회향함에 셋의 장애가 있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딴 곳에 회양하게 하고 한결같이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지 못하게 한다.첫째는 온갖 있음에 집착함이요, 둘째는 돕는 양식이 있는 법에 집착함이요, 셋째는 못난 것의 마음이다. 두려움 없음이란, 거기에도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사람에게 믿거나 존중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다른 법에 대하여 원하거나 좋아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명자와 말과 같이 그 뜻을 생각함이다.
질투함이란, 거기에 셋의 장애가 있으니, 첫째는 바른 법을 존중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이끗과 존경 받음을 존중히 여김이요, 셋째는 중생에게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지 않음이다. 자재로움이란, 거기에도 셋의 장애가 있으니, 그 세 가지 장애로 인하여 자재로움을 얻지 못한다. 첫째는 들음이 없고 지혜가 없어서 듣는 이가 업과 혹[業惑]을 일으키어 바른 법의 재앙을 냄이요, 둘째는 들음의 지혜가 적고 미약함이요, 셋째는 삼매에 대한 일이 성취되지 않음이다. 또다시 그 착한 법 따위 모든 법을 장애하는 중에서 열 가지는 부분을 따라 원인을 만드나니, 그 뜻에 의하여 응당 그 장애 중에 어느 것이 열 가지 원인인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내는 원인이니, 비유컨대 눈의 감관이 눈의 인식에게 내는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둘째는 머무는 원인이니, 비유컨대 네 가지의 먹음[四食] 그것이 온갖 중생을 유지함과 같다. 셋째는 지니는 원인이니, 지닐바[所持]와 능히 껴잡아 지님[能攝持]으로서 비유컨대, 그릇 누리[器世界]가 중생들의 태어날 세계가 되는 것과 같다. 넷째는 분명하게 하는 원인이니, 광명이 빛깔에게 밝게 비춤과 같다. 다섯째는 변하여 달라지는 원인이니 불 따위가 익히고 만드는 일 따위를 하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서로 분리된 원인이니, 낫 따위가 베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일곱째는 회전하는 원인이니, 금ㆍ은을 다루는 사람이 모든 금ㆍ은을 회전하여 고리와 비녀를 만드는 것과 같다. 여덟째는 반드시 견주어 앎의 원인이니, 연기가 불 따위의 반드시 견주어 앎의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이홉째는 믿도록 하는 원인이니, 비유컨대 증거를 세운 원인 부분에서 세운바 내용과 같다. 열째는 얻음에 도달하는 원인이니, 도 따위가 열반 따위의 모든 과위에게 짓는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017_0310_c_01L그와 같이 냄의 장애[生障]란, 착함 그 곳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를 응당 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요, 머무름의 장애[住障]란, 보리 그 곳이니, 그를 응당 무너지거나 변동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요, 지님의 장애[持障]란, 보리를 껴잡는 그 곳이니,보리의 마음으로 능히 지니기 때문이요, 분명하게 함의 장애[明了障]란, 지혜 있는 곳이니, 그를 응당 분명해지게 하기 때문이요, 변하여 달라짐의 장애[變異障]란, 미혹이 없는 곳이니, 미혹을 전환하여 없애기 때문에 변하여 달라짐이 있음이요, 서로 분리됨의 장애[相離障]란, 장애가 없어지는 곳이니 그 장애가 서로 분리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요, 회전함의 장애[廻轉障]란, 회향(回向)하는 곳이니, 보리 마음에 회향함으로 그 자체 모양이 되기 때문이요, 반드시 견주어 앎의 장애[必非障]란, 두려움이 없는 곳이니, 믿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함이요, 믿도록 함의 장애[令信障]란, 질투가 없는 곳이니, 법에서 질투하지 않고 남에게 믿도록 하기 때문이요, 얻음에 도달함의 장애[至得障]란, 자재로운 곳이니, 계박하는 바가 없고 얻음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 자체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의처(依處)가 분명치 않음과 게으름과 삼매에서 두 가지가 부족한 그것과 심지 않음과 그리고 나약함과 소견이 허물과 추악한 허물 그것이네.
017_0310_c_11L處不明懈怠, 三昧少二種, 不種及羸弱,
諸見麤惡過。
4념처(念處)에서는 의처(依處)가 분명하지 않음이 장애가 됨이며, 4정근(四正勤)의 진리에서는 게으름이다. 4여의족(如意足) 자리에서는 선정이 부족하고 두 가지 원만하지 못함이니 의욕ㆍ정신ㆍ마음ㆍ생각함인 네 가지에서 어느 하나가 못하거나 갖추어 성취 못된 돕는 양식[資糧]을 닦아 익히는 여덟 가지 법에서 어느 하나가 갖추어지지 못함이다. 5근(根)의 자리에서는 해탈분(解脫分)의 착한 법 종자를 심어두지 못함이요, 4력(力)의 자리에서는 5근(根)이 나약하여 도를 돕는 모양이 아닌 것과 서로 섞여 일어남이며, 칠각분(七覺分)의 자리에서는 온갖 소견의 허물이 견도(見道)에서 나타나며, 팔도분(道分:八正道)의 자리에서는 추악한 허물이니, 그는 수도(修道)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라밀장(波羅蜜障)이란,
부귀함과 그리고 착한 도와 중생을 버리지 않는 장애이며 공덕을 증가하고 허물을 줄임과 중생으로 들게 함을 장애함이네.
017_0310_c_22L富貴及善道, 不捨衆生障, 增減功德失,
令諸衆生入。
017_0311_a_01L 해탈과 그리고 다함이 없음과 착한 법으로 하여금 간단없게 함과
짓는 바를 언제나 결정함 그것과 함께 누리고 남들 성취함을 장애함이네.
017_0311_a_01L 解脫無盡量, 令善無有閒,
所作常決定, 同用令他熟。
그 열 가지 바라밀(波羅蜜)이 능히 이 법을 내는데, 이 법은 바로 바라밀의 결과이다. 바라밀의 결과를 장애하기 때문에 바라밀을 장애한다고 밝혀 말한 것이다. 단바라밀(檀波羅蜜)에는 어떤 법이 장애가 되느냐 하면, 자재로움이 더욱 증가하는 그것이 장애가 된다. 시바라밀(尸波羅蜜)에는 착한 도를 장애함이 장애가 된다.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의 장애는 중생을 놓아 버리지 않는 그것이다. 비리야(毗梨耶) 바라밀의 장애는 공덕을 증가하고 허물을 줄임인 그것이다. 선(禪)바라밀의 장애는 교화를 받을 중생들을 바른 지위[正位:四十心]에 들게 함인 그것이다. 반야(般若)바라밀의 장애는 남들을 해탈하도록 함인 그것이다.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方便善巧)바라밀의 장애는 단바라밀 따위가 다함이 없고 줄어짐이 없음인 그것이니, 보리에 회향하기 위하기 때문에 모든 바라밀이 다함없고 줄어짐이 없다. 파니타나(波抳陀那)바라밀의 장애는 온갖 나는 곳의 착한 법 중에 간단없이 생기는 그것이니, 원력(願力)에 의하기 때문에 수종(隨從)하는 착한 법이 생기는 곳을 능히 껴잡아 지님이다. 바라(波羅)바라밀의 장애는 착한 법이 결정된 일에서 생각하고, 간택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도를 돕는 것이 아닌 것을 능히 굴복시키지 못함이다. 사나(闍那)바라밀의 장애는 자신과 그리고 남들과 함께 법락(法樂)을 누림과 성취함인 두 곳에서 그들은 말대로 그 뜻을 통달하지 못함이다. 열 가지 지(地) 중에 다시 차제장(次第障)이 있다.
두루 원만함과 가장 수승함과 수승한 등류와 제일의 내용이며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음과 몸이 차별 없는 내용이네.
017_0311_a_19L遍滿最勝義, 勝流第一義, 無所繫屬義,
身無差別義。
더러움 없고 청정한 내용과 법문이 다름없는 내용이며 줄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음과 네 가지 자재함의 내용이네.
017_0311_a_21L無染淸淨義, 法門無異義,
不減不增義, 四自在依義。
이 법계(法界)의 무명(無明)인 그 더러움[染汚]이 곧 10장(障)이다 4지(地)가 아님은 돕는 때문이며 여러 지(地)는 바로 다스림이네.
017_0311_a_22L此法界無明,
此染是十障, 非十地扶助, 諸地是對治。
017_0311_b_01L 법계 중의 열 가지 내용은 온갖 곳에 두루하고 더러움이 없음인 무명이다.
그 무명을 열 가지 보살지(菩薩地) 중에서 차례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장애[障]이고 지(地)가 아니니, 도를 돕기 때문이다. 법계 중에서 무엇이 열 가지 내용이냐. 첫째는 두루 원만함인 내용이니, 보살의 초지(初地)에서 법계의 내용이 온갖 곳에 두루 원만함에 의하여 보살이 관(觀)에 들어 통달을 얻으며, 이 통달로 인하여 자타가 평등한 일부분을 보게 된다. 둘째는 가장 수승한 내용이다. 제2지(地)에 의하여 그 법을 관찰하고서 이러한 생각을 하되, ‘만일 저 함께 평등한 해탈에 의해서는 온갖 다스려 청정함인 해탈을 응당 부지런히 행해야겠다’고 한다. 셋째는 수승한 등류[勝流]의 내용이니, 3지 법계에서 흘러나온 것에 의하여 들은바 바른 법을 알며, 첫째로 그 법을 얻기 위해서는 넓이가 3천(千) 대천(大千) 세계와 같은 불구덩이라 해도 능히 몸을 그 속에 던질 수 있음이다.
넷째는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내용이니, 그 4지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 법의 애착[法愛]도 언제나 나지 않기를 관찰한다. 다섯째는 몸이 차별 없는 내용이니, 제5지의 열 가지인 마음이 청정 평등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서이다. 여섯째는 더러움 없는 청정한 내용이니, 제6지에서 12인연이 그 어느 하나도 더럽힘도 없고 청정할만한 것도 없음에 인하여 그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법문이 다름없는 내용이니, 제7지에서 모양 없는 것으로 인하여 수다라(修多羅) 따위인 법의 다른 모양이 행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줄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는 내용이니, 8지에서 만족해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음으로 인해서 부정한 것이거나 청정한 것 중에서 어느 한 법도 줄어짐이 있거나 증가함이 있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017_0311_c_01L그 중에는 다시 네 가지 자재함이 있다. 무엇이 넷이냐 하면, 첫째는 분별없이 자재함이요, 둘째는 정토(淨土)가 자재함이요, 셋째는 지혜가 자재함이요, 넷째는 업이 자재함이다. 그 중의 법계(法界)는 바로 첫째의 자재와 둘째의 자재가 의지하는 자리이다. 8지 중에서는 지혜가 의지하는 내용을 통달하고 9지에서 네 가지 걸림 없는 변재를 얻음으로 인해서이다.업이 자재한 내용은 10지에서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변화하여 중생에게 이익되는 일을 짓는다. 다시 대략 설명하겠다.
번뇌장과 그리고 일체지장을 이미 다 간추려 설명하였으니 그는 모든 장애[障]를 포섭하는 지라 그것을 다 없애면 해탈하게 되리.
017_0311_c_03L已說煩惱障, 及一切智障, 是攝一切障,
盡彼得解脫。
그 두 가지 장애[障]를 다 없애어 남김 없기 때문에 온갖 장애를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장애의 전체적인 내용이란, 첫째는 큰 장애이니, 그것은 바로 두루 원만함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적은 장애이니, 일방(一方)의 장애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닦아 행하는 장애이니, 무거운 번뇌이다. 넷째는 얻음에 도달하는 장애이니, 평등한 번뇌이다. 다섯째는 얻음에 도달하는 승부(勝負)의 장애이니, 취하거나 버리는 장애이다. 여섯째는 바르게 행하는 장애이니, 바로 아홉 가지 번뇌의 결박이다. 일곱째는 원인의 장애이니, 선(善) 따위를 장애하는 곳에는 열 가지 원인인 내용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진실에 들어가는 장애이니, 바로 돕는 도[助道]의 장애이다. 아홉째는 위는 없는 선(善)의 장애이니, 10바라밀의 장애이다. 열째는 승부(勝負)와 놓아 떠나는 장애이니, 10지(地)의 장애이다. 장애를 총괄하여 대략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해탈장(解脫障)이요, 둘째는 일체지장(一切智障)이다. 『중변분별론』 제2「장품(障品)」을 끝냈다.
근본(根本) 진실(眞實)과 모양[相]진실과 뒤바뀜이 없는 진실 그것이며 결과와 원인 둘 다 진실과 미세함 거칠음의 진실이네.
017_0311_c_17L根本相眞實, 無顚倒眞實, 果因俱眞實,
細麤等眞實。
성취함인 진실과 청정한 경계 진실과 성취함의 진실과 분해함의 진실이며 수승한 지혜 진실이고 그도 열 가지인데 아집의 소견 다스리기 위함이네.
017_0311_c_19L成就淸淨境, 攝取分破實,
勝智實十種, 爲對治我見。
017_0312_a_01L 그와 같은 열 가지 진실인데, 무엇이 열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근본 진실이요, 둘째는 모양 진실이요, 셋째는 뒤바뀜이 없는 진실이요, 넷째는 결과와 원인 진실이요, 다섯째는 미세함과 거칠음의 진실이요, 여섯째는 성취함의 진실이요, 일곱째는 청정한 경계 진실이요, 여덟째는 성취함의 진실이요, 아홉째는 분해함의 진실이요,열째는 수승한 지혜의 진실이다. 수승한 지혜에 또 열 가지 진실이니, 열 가지 아집(我執)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는 쌓임[陰]이 수승한 지혜요, 둘째는 계(界)가 수승한 지혜요, 셋째는 느낌[入]이 수승한 지혜요, 넷째는 인연이 수승한 지혜요, 다섯째는 처비처(處非處)가 수승한 지혜요, 여섯째는 감관[根]이 수승한 지혜요, 일곱째는 세(世)가 수승한 지혜요, 여덟째는 진리[諦]가 수승한 지혜요, 아홉째는 법이 수승한 지혜요, 열째는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수승한 지혜이다. 그 중에 어떤 것이 근본 진실의 세 가지 자성(自性)이냐 하면, 첫째는 분별자성(分別自性)이요, 둘째는 의타자성(依他自性)이니, 그 밖의 온갖 진실은 모두 위의 것에 의해서 세운 것이다. 3성(性) 중에 어떤 법을 진실이어서 믿고 받을만한 것이라고 하는가.
3성(性)중에 첫째는 항상 없음이요 둘째 있어도 진실이 아니며 셋째는 있고 없음이 진실이니 그 세 가지가 본래 진실이네.
017_0312_a_11L性三一恒無, 二有不眞實, 三有無眞實,
此三本眞實。
분별성(分別性)의 모양은 언제나 있는 것 아니니, 그 모양은 분별성 중에서 진실이고 뒤바뀜이 없기 때문이다. 의타성(依他性)의 모양은 있으나 진실이 아니니, 오직 산란의 집착만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양은 의타성 중에서 진실이다. 진실성(眞實性)의 모양은 있고 없음이 진실이니, 그 모양은 진실성 중에서 진실이다. 어느 것이 모양 진실[相眞實]인가.
017_0312_b_01L 사람 따위와 그리고 법 따위에서 더하는 비방이 있는 소견과 줄어드는 비방이 있는 소견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법을 알아보기 때문에 그 법이 분별성 중에 바로 진실 모양이다. 능히 집착함과 집착할 바에서 더하는 비방과 줄어드는 비방인 소견이 일어나지 않나니, 그러한 법을 알아보기 때문에그 법이 의타성 중에 바로 진실 모양이다. 있음 중에서와 없음 중에서 더하는 비방과 줄어드는 비방인 소견이 일어나지 않나니, 그러한 법을 알아보기 때문에 그 법이 진실성 중에 바로 진실 모양이다. 그와 같은 근본 진실 모양을 모양이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뒤바뀜이 없는 진실이란, 항상하다고 하는 따위의 뒤바뀜을 다스린다. 그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無常)함이요, 둘째는 괴로움이요, 셋째는 공(空)함이요, 넷째는 ≺나≻가 없음이다. 그 넷이 어찌하여 근본 진실에서 세워진 것이냐. 그리고 그 중의 무상함이란,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무상함의 내용에 세 가지 있나니 없음인 내용과 생김 사라짐 내용이며 때[垢] 있고 때 없음의 내용인데 그것이 근본 진실 중의 순서이네.
017_0312_b_08L無常義有三, 無義、生滅義, 有垢無垢義,
本實中次第。
근본 진실 중에 세 가지 성품이 있다. 그 성품 중의 순서에는 세 가지 무상함의 내용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물건이 없는 것으로 내용이 된 것이기에 무상함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생김과 사라짐으로 내용이 됨이요, 셋째는 때[垢]가 있고 때가 없음으로 그 내용이 되었다.
괴로움에 세 가지 괴로움 있나니 첫째는 취(取)하는 괴로움 그것이요 둘째는 모양 괴로움[相苦]이며 셋째는 서로 어울리는 괴로움이네.
017_0312_b_13L苦三一取苦, 二相三相應。
근본 진실 중에 차례로 세 가지 괴로움이 있다. 첫째는 취(取)하는 괴로움이니, 인집(人執), 법집(法執)으로 추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양 괴로움[相苦]이니, 3수(受)와 3고(苦)로 그 모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어울리는 괴로움이란, 유위(有爲)와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며, 유위법의 공통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 세 괴로움을 차제성(次第性) 중에 응당 세울 것이다.
분별성(分別性)이란, 딴 도리가 없음이니, 있는 그것을 물건 없다고 하는 그것이 그 공함인 것이다. 의타성(依他性)의 모양이란, 분별한 그대로가 있지 않으며, 한결같이 그 법이 업는 것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이 바로 그 공함인 것이다. 진실성(眞實性)의 모양이란, 2공(空)의 제 성품이니, 그러므로 제 성품 공함[自性空]이라고 말한다.
017_0312_c_01L
모양 없음과 그리고 다른 모양과 제 모양이 셋의 무아(無我)이네.
017_0312_c_01L無相及異相, 自相三無我。
분별성이란 모양 자체가 있음 아니니, 그러므로 그 모양 없음이 바로 그 무아(無我)이다. 의타성이란, 모양 있음이 분별함 그대로가 아니니, 그대로가 아닌 모양이 바로 그 무아이다. 진실성이란 바로 두 무아(無我)이니, 그러므로 자체가 바로 그 무아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를 근본 진실 중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세 가지 무상함이 있으니, 첫째는 물건 없는 무상(無常)이요 둘째는 생기고 사라지는 무상이요셋째는 때[垢] 있고 때 없는 무상이다.세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취(取)하는 괴로움이요, 둘째는 모양 괴로움이요, 셋째는 서로 어울리는 괴로움이다. 세 가지 공함이란, 첫째는 엇어서 공함이요, 둘째는 같지 않아 공함이요, 셋째는 제 성품 공함이다. 세 가지 무아(無我)란, 첫째는 모양 없는 무아요, 둘째는 다른 모양인 무아요, 셋째는 제 모양 무아이다. 결과와 원인인 진실이란, 이 근본 진실 중에서 응당 어느 것을 결과, 원인이라고 내세우느냐 하면, 괴로움의 진리, 쌓임의 진리, 사라짐의 진리, 도의 진리이다. 어떻게 근본 진실이 성립하게 되느냐, 괴로움의 모양을 이미 설명하였으니, 괴로움의 진리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뒤바뀜이 없는 진실 중의 3고(苦)와 3무상(無常) 따위와 같아서 그 네 가지 뒤바뀜으로 인하여 괴로움의 진리라고 알아야 한다. 세 가지 쌓임[集]의 진리는 무엇이 세 가지가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쌓임의 진리에 또 셋이 있나니 훈습함과 그리고 발기(發起)함과 또는 서로 떠나지 않은 따위이네.
017_0312_c_19L集諦復有三, 熏習與發起, 及不相離等。
017_0313_a_01L 훈습함의 쌓임 진리란, 집착하고 분별하는 성질로 훈습함이요, 발기함의 쌓임 진리란 번뇌와 업이요, 서로 떠나지 않는 쌓임의 진리란, 여여(如如)가 번뇌장과 서로 떠나지 않는 그것이다. 세 가지 사라짐의 내용으로 사라짐의 진리라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제 성품이 생김 없으며, 능히 집착함[能執]과 집착할 바[所執] 두 법이 생기지 않는다. 더러움과 적멸(寂滅) 두 가지에서 첫째 심수(心數)인연이 사라짐과 둘째 법이 그대로 여여(如如)함 그것이 세 가지 사라짐이니, 첫째는 실체가 없어 사라짐이요, 둘째는 두 가지가 사라짐이요, 셋째는 제성품이 사라짐이다. 도의 진리에 세 가지가 있나니, 세 가지 근본 진실 중에 어떻게 내세우는가 하면, 관찰하는 지혜와 그리고 제해 없앰과 도에 증득해 도달함인 세 가지이네.
도의 진리를 설명함에 이와 같나니, 첫째는 분별성(分別性)을 관찰함이요, 둘째는 관찰하여 의타성(依他性)을 재해 없앰이요, 셋째는 관찰하여 진실성(眞實性)에 증득해 도달함이니, 그와 같이 그 중에서 관찰하여, 재해 없이며, 증득해 도달하기 위하여 도의 진리를 내세웠다고 알아야 한다. 거칠고 미세한 진실[麤細眞實]이란, 세속 진리와 그리고 진실 진리이다. 그 두 진리를 근본 진실 중에서 어떻게 성립하는가.
거칠고 미세한 진실에 셋이니 명칭 세움과 취해 행함[取行]과 분명하게 아는 그것을 세속 진리라 하네.
017_0313_a_13L麤義有三種, 立名及取行, 顯了名俗諦。
세속 진리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을 세우는 세속 진리요, 둘째는 취해 행하는 세속 진리요, 셋째는 분명하게 아는 세속 진리다. 그 세 가지 내용으로 인하여 근본 진실 중에서 세 가지 세속 진리를 내세웠다고 차례로 알아야 한다. 진실 진리의 셋 중에 하나인 수승한 경지의 진리란, 하나의 진실성(眞實性) 중에 그것이 수승한 경지라고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진실 그것인가.
017_0313_b_01L 의(義) 진실이란, 법이 그대로 이어서 진실 지혜의경계이기 때문이요, 얻음에 도달하는 진실이란, 열반의 공덕을 완성함이요, 바르게 행하는 진실이란, 거룩한 도의 없음이고 수승한 경지이다. 어찌 하여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법이함께 얻음인 진실성(眞實性)에 해당함인가를 다음 게송(偈頌)으로 말한다.
분별성 중에서 그 물건이라고 세우게 된 곳에는 공동으로 세우고 인정하고 자주 습관에 젖기 때문이니, 그 세운바와 인정으로 인하여 세속 지혜를 일으킨다. 모든 세상 사람이 한 곳에서 동일한 세속 지혜를 일으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땅이요, 불이 아니라 함과 이 물건은 빛깔이요, 소리가 아니라 함과 같음이다. 그와 같은 따위는 그 세속 지혜가 이루는 것으로서 하나인 성질에 속한다.
3성(性)에 대하여 상류인 사람들은 그 내용이나 그 이치를 밝게 알며 각관(覺觀)의 경지에서 3량(量)과 4도리(道理)에 의하여 그중 하나의 도리에 의해서 물건이나 사실이 성취하게 되나니, 그 둘을 도리가 성취함이라고 이름한다. 청정한 경계 진실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장을 청정하게 하는 지혜의 경계요, 둘째는 지장(智障:所知障)을 청정하게 하는 지혜의 경계이다. 그와 같은 청정한 지혜의 경계 진실이란.
생기진실(生起眞實)은 2성(性)에 포섭되고 의처(依處)와 사행(邪行)도 역시 그러하네 상(相)진실ㆍ식(識)진실ㆍ청정(淸淨)진실과 정행(正行)진실은 모두 진실성에 포함되네.
017_0313_c_09L生實二性攝, 處邪行亦爾, 相識及淸淨,
正行眞性攝。
첫째는 생기진실(生起眞實), 둘째는 상(相)진실이요, 셋째는 식(識)진실이요, 넷째는 의처(依處)진실이요, 다섯째는 사행(邪行)진실이요, 여섯째는 청정(淸淨)진실이요, 일곱째는 정행(正行)진실이다. 그 중에 생기는 진실은 근본 진실 중에서 두 곳에 있으니, 분별성(分別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 두 곳이라고 알아야 한다. 생기진실가 같아서 의처진실과 사행진실도 역시 그것처럼 근본성 중의 두 성(性:分別性ㆍ依他性)에 포섭된다. 상진실과 식진실ㆍ청정진실ㆍ정행진실인 네 가지 법은 한 진실성(眞實性)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가 어떻게 한 진실성에 포섭되느냐 하면, 성인의 경지인 거룩한 지혜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승한 지혜진실[勝智眞實]이란, 열 가지 아견(我見)을 다스리기 위해서 말한 것이다. 어떤 것이 쌓임[陰] 따위의 곳에 의한 열 가지 아견(我見)인가.
017_0314_a_01L 그와 같은 열 가지 나라고 하는 삿된 집착이 쌓임[陰] 따위 모든 법에서 일어나므로그 열 가지 삿된 집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열 가지 수승한 지혜를 말하게 된다. 무엇이 열 가지라고 하는 삿된 집착이냐 하면, 첫째는 하나라고 하는 고집이요, 둘째는 원인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셋째는 받는 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넷째는 짓는 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다섯째는 자재로움이라고 하는 고집이며, 여섯째는 증상(增上)함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일곱째는 항상 머무름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여덟째는 더러운 것, 깨끗한 것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아홉째는 관찰하는 이라고 하는 고집이요, 열째는 속박, 해탈을 짓는 것이라고 하는 고집이다. 어찌하여 열 가지 수승한 지혜가 근본진실 중에서 성립될 수 있느냐 하면, 세 가지 성(性) 중에 5음(陰) 따위 온갖 법이 그대로 그 도리대로 포섭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3성(性) 중에 있게 되는 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한다.
색음(色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별색(分別色)이니, 색처(色處)의 분별성이요, 둘째는 종류색(種類色)이니, 색처(色處)의 타성[依他性]의 종류이다. 어찌하여 의타성이라고 이름하였느냐 하면, 이 5법(法)을 세운 중에 그 체성(體性)이 같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종류를 내세워 색(色)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셋째는 법연색(法然色)이니, 색처(色處)의 진실성(眞實性)은 색(色)의 공통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색(色)과 같아서 느낌[受] 따위의 모든 음(陰)도 역시 그러하며 18계(界), 6입(入)의 모든 법도 그와같나니, 3성(性) 중에 응당 동일하게 포섭되기 때문이다. 열 가지 수승한 지혜 진실을 근본 진실 중에서 그오 같이 알아야 한다. 이미 열 가지 아견(我見)과 5음(陰) 따위 수승한 지혜를 설명하였으나, 5음(陰) 따위의 내용을 설명하지 못했으니, 그 내용을 지금 설명해야겠다.
017_0314_b_01L 음(陰)을 세운 내용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의 세운 내용은 바로 음(陰)의 명칭이다. 거기에 세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는 길이라는 뜻이요, 둘째는 불타 뜨거움이라는 뜻이요, 셋째는 무거운 짐이라는 뜻이다. 다시 모임[聚]이라는 뜻이 바로 음(陰)이라는 뜻이다. 모임이라는 뜻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많다는 뜻인데,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물질[色]의 과거ㆍ현재ㆍ미래와멀음ㆍ가까움ㆍ거침ㆍ미세한 따위라’고 하신 것이며, 또 경에서 널리 말씀하시기를, ‘이 물질이 많기 때문에 모임이라고 말하나니, 그와 같은 따위 물질이 한곳에 포섭되어 있다’고 하셨으니, 그 말씀은 물질 따위 모든 음(陰)의 자체와 모양이 여러 가지이며, 번갈아 서로 모양 없음에 포섭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차별이 있다고 말한 것에 그 세 가지 내용이 있으니, 첫째는 많음이요, 둘째는 통틀어 말함이요, 셋째는 차별이니 그를 모임의 뜻이라고 이름한다. 모임이 바로 음(陰)이라는 뜻인데, 그 뜻은 세상의 모임이라는 것과 같다.
다시 달리 포섭되는 것은 계(界)라고 이름한다. 계(界)란 무슨 뜻을 말함이냐 하면, 종자라는 뜻을 말함이다. 능히 취함의 종자(種字)란, 눈[眼] 따위의 모든 계(界)를 말한다. 취할 바의 종자란, 물질 따위의 모든 계(界)를 말한다. 취함의 종자란 식(識) 따위인 모든 계(界)를 말한다.
다시 별다른 법이 있어 입(入)이라고 이름한다. 그 중에 3수(受)가 받아들이는 작용이 되나니, 3수(受)의 문이 되기 때문에 여섯의 내입(內入)이라고 말하며, 대상을 분별함과 수용함의 문이 되기 때문에 여섯 가지를 외입(外入)이라고 말한다. 어느 것이 12인연(因緣)인가.
017_0314_c_01L 원인ㆍ결과와 그리고 작용하는 일이 증가하지도 아니하고 손감하지도 않는 내용을 바로 12인연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증거 하는 원인 지어감[行] 따위의 온갖 분별에서 평등한 원인을 세우기 때문이다. 손감하는 원인이란, 분별에서 원인이 없다는 내용을 세우기 때문이다. 증가하는 결과란, 지어감 따위의 온갖 분별과 ≺나≻ 있음이 무명(無明)에 의하여 그와 같은 분별을 내게 된 것이다. 손감하는 결과란, 지어감 따위의 온갖 법이 무명으로부터 생김이 없음이다. 증가하는 일이란, 무명 따위의 모든 원인이 지어감 따위의 모든 결과와 시절과 분별을 내어 작의(作意)하는 일이 있다. 손감하는 일이란, 분별이 그 공용(功用)이 없기 때문에 원인ㆍ결과ㆍ일중에서그 두 집착을 떠난다. 그 내용이 증가함도 없고 손감함도 없음이니, 그것이 12인연의 내용이라고 알아야 한다.
하려고 않음과 하려고 함과 청정함과 같이 태어남과 그리고 증상(增上)과 얻음에 도달함과 일으킨 수행이 딴 것에 얽매임으로 그 내용 되었네.
017_0314_c_03L不欲欲淸淨, 同生及增上, 至得及起行,
繫屬他爲義。
처비처(處非處)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남에게 얽매이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응당 알아야 할 그 중에는 첫째 딴 것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함이란, 나쁜 행으로 인하여 결코 나쁜 갈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음이요, 둘째 딴것에 얽매이려고 함이란, 착한 행으로 인하여 착한 갈래에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결코 착한 갈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음이요, 셋째 청정하게 딴 것에 얽매임이란, 5개(蓋)를 없애지 아니하거나 7각분(覺分)을 닦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맨 끝에 도달하지 못함이다. 넷째 같이 태어남이 딴 것에 얽매임이란, 선후가 없이 두 부처님과 두 전륜왕(轉輪王)이 한 세계에 같이 날수가 없음이요, 다섯째 증상(增上)함이 딴 것에 얽애밍이란, 여자는 전륜왕이 될 수 없음이요, 여섯째 얻음에 도달함이 딴 것에 얽매임이란, 여자는 벽지불(辟支佛)이나 부처가 될 수 없음이요, 일곱째 일으키는 수행이 딴 것에 얽매임이란, 4체(諦)를 이미 본 사람은 살해하는 따위의 온갖 행위를 짓지 아니하고, 범부들만이 그런 일을 한다. 다계경(多界經)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그와 같이 따라 생각하고 간택해야 한다. 근(根)이란, 스물 두 가지인데, 여섯의 내용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스물두 가지 근(根)을 세웠다. 다시 여섯 가지 내용이 있으니, 무엇이 여섯인가.
017_0315_a_01L 능히 취(取)함이 내용이 되고 나아가서는 두 가지 청정이 그 내용이 되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사실 중에서 증상(增上)함이 되기 때문에 스물두 가지 법을 근(根)이라고 이름한다. 6진(塵)을 능히 취하는 일이 증상하기 때문에 눈 따위 여섯 법을 근(根)이라고 말한다. 몸을 껴잡아서 머무르도록 함이 증상하며, 나아가서는 나고 죽음을 머무르도록 함이 증상하기 때문에수명(壽命)을 근(根)이라고 말한다. 처세함에 있어서 서로 닿는 것이 증상하기 때문에 남자, 여자의 두 근(根)을 말한 것이다. 수용함이 증상하기 때문에 5수(受)를 근(根)이라고 말하나니, 의업(意業) 따위가 수용함을 받기 때문이다. 세간청정(世間淸淨)이 증상하기 때문에 믿음[信] 따위 다섯 법을 근(根)이라고 말한다. 출세청정(出世淸淨)이 증상하기 때문에 미지(未知)ㆍ욕지(欲知) 따위의 3무루(無漏)를 근(根)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3세(世)라고 별명한 것이 있으니, 그 내용과 서로 걸맞음이다. 결과와 원인이 이미 수용되었으므로 과거세(過去世)를 세우며, 결과와 원인이 수용되지 않음으로 미래세(未來世)를 세우며, 원인은 이미 사라졌고 결과는 아직 사라지지 않으므로 현재세(現在世)를 세운 것이다.
느낌과 그리고 느낌[受]의 양식이며 저 지어감을 내는 원인이 되며 그를 없앰과 그리고 다스림 그것이니 그가 바로 부정(不淨)을 깨끗이 함이네.
017_0315_a_10L受及受資糧, 爲生彼行因, 滅彼及對治,
爲此不淨淨。
다시 4체(諦)라고 별명한 것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첫째는,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어떤 법을 괴로움이라 하느냐 하면, 느낌과 그리고 느낌의 양식[受資糧]이니, 경에서 ‘온갖 느낌은 모두가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느낌의 양식과 느낌이 생기는 인연과 감관ㆍ대상 따위의 모든 법이 저 지어감을 내는 원인이 된다고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쌓임의 진리[集諦]이냐 하면, 온갖 괴로움을 불러들이는 온갖 삿된 행을 말한다.
공덕과 과실과 무분별지(無分別智) 남에게 의함과 남에게 의지 안 하며 지혜로 인해 스스로 벗어남이네.
017_0315_a_22L得失無分別, 智依他出離, 因智自出離。
017_0315_b_01L 다시 3승(乘)이라고 별명한 것이 있으니, 그 내용과 서로 걸맞음이다. 응당 알아야 할 것은열반의 공덕과 나고 죽음의 과실에 대한 관지(觀智)로 벗어나는 인과(因果)를 남에게서 듣거나 남에게서 얻기 때문에 성문승(聲聞乘)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 지혜로 인하여 벗어나는 인과를 남에게서 듣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하여 행하지 아니함을 벽지불승(辟支佛乘)이라고 말하여, 무분별지에 의하여 스스로 벗어나는 인과를 얻는 것을 바로 대승(大乘)이라고 말한다.
말이 있음과 원인이 있음과 모양 있음을 유위(有爲)법이라 하며 고요함의 내용과 그의 경지를 다음에 말하는 무위(無爲)라 하네.
017_0315_b_06L有言說有因, 有相有爲法, 寂靜義及境,
後說無爲法。
유위ㆍ무위라고 별명한 것이 있다. 말이란, 명(名)ㆍ구(句)ㆍ미(味) 따위이며, 원인이란, 종자에 해당되는 아리야식(阿梨耶識)이다. 모양란, 세계ㆍ몸 그리고 수용하는 바와 생기식(生起識)에 해당하는 마음과 그리고 잡음, 분별이니, 그와 같은 따위의 법은 말이 있고 원인이 있고, 모양이 있고 서로 응함이 있는 법인데, 그를 유위(有爲)법이라고 말한다. 무위(無爲)법이란, 고요함의 내용과 그리고 고요함의 경지이다. 고요함의 내용이란, 사라짐의 진리[滅諦]요, 고요함의 경지란, 도의 진리 즉 여여(如如) 그것이다. 그 중에서 도의진리를 어찌하여 고요함이라고 하게 되느냐 하면, 그 법이 만일 경계에 반연하거나 만일 과위[果]를 나타낼 적에는 고요함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 뜻으로 인하여 5음(陰) 따위 10처(處)와 거룩한 지혜와 그리고 거룩한 지혜 방편을 열 가지 수승한 지헤라 말한다고 알아야 한다.
017_0315_c_01L 진실에 합하는 내용이란, 대략 간추려 말하면, 진실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드러나는 진실이니, 마치 거울과 같고, 둘째는 드러날 바[所顯]의 진실이니, 마치 그림자와 같다. 어느 것이 능히 드러나는 진실이냐 하면, 3근본진실(根本眞實)이니,그 밖의 진실이 그것에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드러날 바의 진실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둘째는 뒤바뀜을 다스리는 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셋째는 성문승(聲聞乘)의 벗어남 그것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넷째는 벽지불의 벗어남 그것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다섯째는 대승(大乘)의 벗어남 그것에서 드러나는 진실이니, 그 거친 진실로 인하여 중생과 법을 성취한다. 미세한 진실이란 것은 중생과 법을 해탈함이다. 여섯째는 모든 논설이 굴복을 당하게 하는 데에서 드러난 진실이니, 바른 비유에 의하고 바른 도리에 의하여 능히 모든 말들을 굴복을 당하도록 함이다. 일곱째는 대승(大乘)을 밝히는 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여덟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알아 그것으로 모든 법을 포섭하는 거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아홉째는 같음 아님과 같음 그것을 분명히 밝히는 데에서 드러나는 진실이요, 열째는 아집(我執)이 의지하고 있는 법의 자리에 모든 내용 뜻으로 들어감에서 드러나는 진실이다. 『중변분별론』「진실품(眞實品)」은 위에서 끝났다.
교정하여 말한다. “드러날 바의 진실을 ‘아홉 가지가 있다’라고 하였으나, 펼쳐보니 열 가지이다. 원효(元曉)의 『중변분별론소』에서는 ‘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모두 똑같이 네번째의 결과와 원인[果因]이니, 모두 진실로 바르다. 이는 번역했을 때 집필한 자의 잘못이므로 처음 잘못된 것을 따라서 후대에 수를 모두 잘못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