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통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깨끗함에 대하여 더 이상 닦아 다스릴 필요도 없으시며 세간을 구제하시고 세간에 대하여 다 논의해 마치신 가장 수승하고 존귀하신 분께 머리 숙여 예경하옵니다.
017_0325_a_04L智慧靡不通, 於淨更無治, 濟世論世盡, 頂禮最勝尊。
말씀하신 법은 정지도(靜地道)를 도(道)로 삼으셨으니 이 세 가지 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세간을 따라 윤회함이 마치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네.
017_0325_a_06L法如所說者, 靜地道爲道, 未解此三法, 世轉如輪轉。
성스러운 승중(僧衆)은 법에 머물러 번뇌의 결박 벗어나고 다른 나머지 범부 대중을 초월했으니 십분(十分) 가운데 팔분인(八分人)의 과도(果道)는 도과(道果)이기 때문이네.
017_0325_a_07L聖僧住於法, 過縛過餘衆, 十分八分八, 果道道果故。
가령 모든 대사(大士:보살)들이 논(論)을 짓고자 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이나 전도된 견해와 의혹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함이다. 이른바 그 이익은 바른 지혜[正智]로부터 생겨난다. 바른 지혜란 『출결정장론(出決定藏論)』에 이르기를 “본래 이미 지(地)에 관해 말한 바 있으나 이제 이 지(地)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고 풀이하여 문난(問難)에 잘 답하려 한다”고 하였다. 『오식지심지경(五識地心地經)』에서는 “아라야식(阿羅耶識)은 널리 모든 것의 근본 바탕[種本]이니 어떻게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래장에서 설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해절경(解節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대한 식(識)은 널리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며 깊고 미세한 흐름은 물이 넘쳐흐르는 것과 같다. 범부들에게는 설하지 않나니 아견(我見)을 생할까 염려해서이다.
017_0325_a_14L盛識普種本, 深細流如溢, 不爲凡人說, 恐生我見故。
울타남(鬱陀南)양나라 말로는 설할 내용을 간추려 밝히는 게으로 아라야식의 성질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017_0325_a_16L 鬱陁南◀梁言持散▶:
집지(執持)ㆍ본(本)ㆍ분명(分明)과 종본(種本)ㆍ비시사(非是事)와 신수(身受)ㆍ무식정(無識定)과 또한 기절하지 않은 자이라.
017_0325_a_17L執持本分明, 種本非是事, 身受無識定, 亦非氣絕者。
이 여덟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식을 떠나서 근(根)이 집지(執持)하는 게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이러한 이치는 없다.
017_0325_a_19L 以此八種因緣,知有阿羅耶識。若離 此識,根有執持,實無此理。
017_0325_b_01L집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아라야식은 선세(先世)의 업을 간직하고, 또한 현세의 인(因)으로부터 나중에 모든 식(識)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아비담에서 근(根)ㆍ진(塵)ㆍ심(心)의 업(業)으로 인해 모든 식이 생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선과 불선 등의 6식(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6식 가운데서 만일 하나의 무기식(無記識)이 존재하여 홀로 이것이 집착하여 섭지(攝持)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넷째, 모든 식은 각기 근을 의지하여 생겨나니, 따라 생겨난 어느 한 식의 근이 집지하는 것이 있다면 나머지 근들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근들이 자주자주 여러 번 집지한다는 뜻은 옳지 않다. 이상 다섯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으로 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근에 집지한다는 명칭이 존재하게 된다. 본(本)이란 처음부터 모든 식이 함께 생겨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두 가지 식은 함께 생길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예컨대 어떤 사람이 듣거나 보려고 하면 식들에는 각각 자신의 근과 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욕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으면 근ㆍ진도 다르지 않나니, 하나의 식이 생겨날 경우 나머지 식도 함께 생긴다고 한들 어떠하랴. 이는 진실한 뜻이니, 아함의 뒷부분에서 설하고 있다. 분명(分明)이란 모든 식을 함께 취(取)하지 않으면 그 경계를 훤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심식(心識)과 안식(眼識) 등이 동반하여 경계를 취한다면 이는 곧 분명히 그 경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찍이 여러 진(塵)을 취하는 행을 한 다음에 추억하고 사념하여도 대부분 분명하게 알지 못하니, 모든 식이 함께하지 않고 의식만이 물로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현량경계(現量境界)1)를 반연하는 경우에 쉽고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식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들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17_0325_c_01L종본(種本)이란 만약 아라야식을 떠나서 안(眼) 등 6식(六識)이 서로 바탕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식(善識)이 멸할 때 불선심(不善心)이 생기고, 불선식(不善識)이 멸할 때 선심(善心)이 다시 생하며, 선식과 불선식이 멸할 때 무기심(無記心)이 생긴다. 하계심(下界心)이 멸하면 중계식이 생기고 중계심(中界心)이 멸하면 상식(上識)이 생기며 상식이 또한 멸하면 하심(下心)이 다시 생긴다. 유루식이 멸하면 무루심이 생기고, 무루심이 멸하면 유루가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6식은 서로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례대로 마음[心]이 멸하면서 무수겁 동안에 또한 다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비시사(非是事)란 모든 식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기사(器事)이고, 둘째는 착신사(捉身事)이며, 셋째는 이를 아사(我事)라고 말하는 것이고, 넷째는 진사(塵事)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생각생각[念念]에 함께 생겨난다. 만약에 하나의 식이 한 생각 가운데서 네 가지 경우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수(身受)에 대해 말하자면, 만일 아라야식을 떠나 신수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 신수의 뜻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진실한 마음을 짓든 진실하지 않은 마음을 짓든 반드시 먼저 사유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정심(定心)이든 부정심(不定心)이든 모든 수(受)는 몸[身]에서 갖가지 많은 것을 생해야 온갖 수(受)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아라야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무식정(無識定)에서라면 이런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만일 무상정(無想定)이나 무식정(無識定)에 들어가면 6식은 다 멸하니 이 사람은 마땅히 죽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무심정(無心定)에 들어가도 식은 멸하지 않는다.
017_0326_a_01L기절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만약에 아라야식이 떠나면 기절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두 사람의 목숨이 임종시에는 선한 사람은 발이 차가워지면서 위로 정수리까지는 따뜻하다. 정수리가 차가울 때 그 사람의 목숨은 곧 멸한다. 악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정수리로부터 차가워져 발에 따뜻한 기운이 없어졌을 때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친다. 의식이 항상 몸에 있는 것은 아라야식이 몸을 집지(執持)하기 때문이니 아라야식이 멸하면 몸이 곧 차가워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이 차고 따뜻한 두 가지 일은 의식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는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다시 상호간에 인연이 되며 함께 상응하여 생하고 번뇌와 함께 멸하네.
017_0326_a_03L 境界相賴起, 更互爲因緣, 得共相應生, 與煩惱俱滅。
간략히 말해서 네 가지 뜻이 있어 아라야식의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017_0326_a_05L 略說四義,知有阿羅耶識事。
일종의 나타났다가 멸하는 경계는 아라야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계가 생기니, 첫째는 내부를 집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외부의 기세간[器]을 집지하되 모든 상모(相貌)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내부를 집지함이란 그릇된 아견을 집착한 습기(習氣)의 세력이 근(根)ㆍ색(色)과 더불어 함께할 때 집지하면 경계가 된다. 이러한 경우는 욕계와 색계에 있고,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그릇된 아견에 집착한 습기의 세력만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되 상모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내부에서 아라야식에 의해 집지되면 곧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는 것이 된다. 비유하자면 등이 심지와 기름을 내부에 간직하면 외부로 비추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아라야식의 경우도 내외가 또한 그러하다. 이 경계는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고 미세하여 세간의 다문(多聞) 지혜인이라도 알 수가 없다. 이 경계는 항상하면서도 달라짐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라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최초의 일념으로부터 집지되어 온 경계와 나아가 생사에 이르기까지가 일미사(一味事)이기 때문이다. 아라야식은 경계 가운데서 생각생각에 생멸하는데 욕계 중에서는 경계를 취함이 미세하고, 색계 중에서는 경계를 취함이 광대하고, 무색계의 무량공처(無量空處)와 무량식처(無量識處)에서는 무량한 경계를 취하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미세한 경계를 취하며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에서는 깊고 미묘한 경계를 취한다.
017_0326_b_01L이렇듯 두 가지 내외의 경계이기 때문에, 미묘하기 때문에, 일미이기 때문에, 생각생각에 멸하기 때문에, 미소란 경계이기 때문에, 광대한 경계이기 때문에, 무량한 경계이기 때문에, 미세한 경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깊고 미묘한 경계이기 때문에 아라야식의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심수법은 미세하여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라도 훤히 알 수는 없다. 하나의 경계를 함께 반연하여도 다른 차이가 없으니 모두 함께 불고불락의 무기수(無記受)와 함께한다. 나머지 네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대지심수법(大地心數法)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같은 과보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미세하게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함께 하나의 결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비고비락(非苦非樂)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무기(無記)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본이란 무엇인가? 모든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의 식이 모두 아라야식으로 인하기 때문에 종본이라 한다. 의탁이란 아라야식이 모든 색과 근을 간직하면 5식(識)이 생겨나고 간직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으며, 아라야식이 존재할 때 의식은 6식을 생한다. 두 가지 현상으로 아라야식이 다시 상호 인연이 되니, 첫째는 현전(現轉)하여 증장하는 종본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미래에 태어나려고 할 때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017_0326_c_01L증장하는 종본이란 모든 식이 선이나 불선이나 무기를 낳아 생각생각에 훈수(熏修)하듯이 아라야식 또한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후에 모든 식을 생하여 선이나 악을 점차적으로 증장하여 더욱 더 우세하게 하니, 과보를 받는 사람이나 선이나 불선에 대해 식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미래세에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종본(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기 때문에, 의탁하기 때문에, 증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모든 식과 더불어 상호 인연을 짓는 것임을 알아라.
함께 상응하여 생함이란 아라야식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식과 함께 상응하여 생하니 예를 들어 마음(말나식)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에 아견(我見)이 있으면 교만함을 상(相)으로 삼아 의식이나 무의식에서 아라야식과 항상 상응하여 생한다. 이 아만심은 아라야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아 이것을 나[我]라고 말하거나 나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식이 함께 생하니 말나식과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세 가지 식이 함께 생하니 의(意)와 의식, 그리고 5식(識) 가운데서 하나의 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네 가지 식이 상응하여 생하니 5식 가운데 두 가지 식을 취하고 나아가 5식ㆍ6식ㆍ7식이 함께 생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 가지 진경계(塵境界)가 지금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이 의식은 마음[心, 즉 말나식]을 의지하여 성립한다. 마음[心]이 아직 멸하지 않았을 때에는 의식은 박(縛)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마음이 멸하게 되면 의식도 풀어진다. 의식에는 두 가지 경계가 있으니 타진경계(他塵境界)와 자진경계(自塵境界)이다.
욕계의 인간이나 천상, 축생, 아귀에는 약간의 3수가 존재하여 자신의 불고불락수와 더불어 함께 생한다. 지옥도(地獄道)에서는 고수(苦受)가 떠나지 않고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3선지(禪地)에서는 오로지 낙수(樂受)만이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4선(禪)에서부터 비상비비상지(非想非非想地)에서는 오로지 불고불락수만이 존재하여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이와 같이 6식 가운데의 선ㆍ불선ㆍ무기법은 아라야식과 상응하여 함께 생한다.
예를 들면 안식은 다른 식과 함께 경계를 생하여도 눈과 더불어 섞이지 않듯이 아라야식도 모든 식과 함께 경계를 생하여도 서로 섞이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다. 모든 심수(心數)는 똑 같이 심법이니 갖가지 상(相)이 상응하여 함께 생하여도 서로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처럼 아라야식이 7식(前七識을 뜻함)과 상응하여 함께 생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예를 들어 안식이 하나의 색과 하나의 종류와 하나의 상(相)을 취하든 많은 색과 많은 종류와 많은 상을 취하든, 이식(耳識)이 소리에 대해, 비식(鼻識)이 냄새에 대해, 설식(舌識)이 맛에 대해, 신식(身識)이 촉감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며 의식(意識)도 갖가지 모든 상을 널리 취하여도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으니, 6식을 분별하면 그 뜻이 이와 같다.
마음(말나식)의 경계는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멸함에 이를 때까지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서로 섞여 생한다. 아견(我見)ㆍ교만ㆍ아욕(我欲)ㆍ무명 이 네 가지 번뇌는 정지(定地)나 부정지(不定地)에서, 선법이나 불선법이나 무기법 가운데서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으니 이는 곧 예오무기(穢汚無記)4)의 법이다. 따라서 아라야식이 모든 식과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또한 3수(受)와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또한 선(善) 등과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러한 이치 때문에 그러므로 아라야식이 상응하여 함께 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17_0327_b_01L번뇌와 함께 멸함이란 아라야식이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라는 데 그 근거가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능히 중생세간을 일으키는 근본 바탕이며, 5근(根)이나 6식(識)을 생하며, 또한 국토세간을 일으키는 근본 바탕이며, 일체의 업이 모들 인연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또한 서로 간에 과보를 이끄는 근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다른 중생이 3수를 생하지 않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서로 간에 증상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아라야식은 일체의 근본 바탕이기 때문에 현재의 세간에서는 고제(苦諦)의 체(體)이고, 미래의 세간에서는 능히 집제(集諦)를 생할 수 있다. 이것이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 된다.
세존께서는 아라야식이 일체의 종본(種本)이라는 것에 의탁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말하자면 안계와 색계와 안식계 및 나아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아라야식에는 갖가지 성품[性]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종본을 쌓아 모으는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니, 선법을 닦기 때문에 이 식을 멸할 수 있다.
017_0327_c_01L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모든 범부인들이 선한 사유를 일으켜 모든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 마음을 편안히 하여 맨 처음 모든 제(諦)를 관찰한다. 만일 4제(諦)를 증득하여 눈 밝은 지혜를 얻었으면 아라야식5)을 능히 파괴할 수 있다. 아직 4제를 깨닫지 못한다면 파괴할 수 없으니 어느 때 아라야식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앞으로 나아가 만일 모든 성문인이 불퇴지(不退地)에 들어가고 또한 모든 보살이 불퇴지에 들어가서 법계를 통달하면 능히 알 수 있다. 이 식 가운데서는 모든 번뇌의 덩어리를 알 수 있으니 내부에 대해서든 외부에 대해서든 자신의 몸이 번뇌의 결박임을 알 수 있다. 내부에 대해서 자신의 몸은 삼계의 추악한 번뇌와 온갖 괴로움[苦]이 결박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일체행(一切行)에 갖가지 번뇌를 섭지(攝持)한 이는 아라야식 중에 쌓아 놓은 진여 경계를 얻어서 더욱 행하고[增上行] 수습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아라야식을 끊으면 범부의 성품을 전환하고 범부의 법을 버려서 아라야식을 멸한다. 이 식이 멸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멸하며, 아라야식이 대치되기 때문에 아마라식(阿摩羅識)이 증득된다.
아라야식은 무상(無常)이며 유루법이다. 아마라식은 항상[常]하며 무루법이다. 진여 경계의 도(道)를 증득하기 때문에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다. 아라야식은 추악한 고과(苦果)가 따르는 것이고 아마라식에는 일체의 추악한 고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라야식은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지만 성스러운 도[聖道]가 아니므로 근본을 짓지 못한다. 아마라식은 또한 번뇌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없으나 다만 성스러운 도이므로 도(道)를 증득하고 짓는 근본이 된다.
017_0328_a_01L 아마라식은 성도(聖道)가 의지하는 인(因)을 짓지만 생인(生因)을 짓지는 않는다. 아라야식은 선(善)이나 무기(無記)에 대해 자재 할 수 없으며, 아라야식이 멸할 때에는 다른 상모가 존재하니 말하자면 미래세에는 번뇌나 불선(不善)의 인(因)이 멸하며, 인이 멸하기 때문에 미래세의 5성음고(盛陰苦)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현재세에서는 일체 번뇌와 악의 인(因)이 멸하기 때문에 범부의 음(陰)이 멸한다.
이 몸이 자재해지면 변화가 가능하고 일체의 추악한 과보를 버려 벗어나고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는 인연을 얻기 때문에 이 몸의 수명은 자재함을 얻을 수 있다. 수명의 인연은 능히 몸을 멸할 수 있고 또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다하여 남김없이 멸하면 모든 수(受)가 다 청정함을 얻으며, 나아가 경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일체 번뇌의 모습이기 때문에, 통달분에 들어가기 때문에, 선한 사유[善思惟]를 닦기 때문에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다. 따라서 아라야식은 번뇌와 함께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의식(心意識)을 분별하여 진실하게 해석했으니, 이렇게 심의식을 해석했기 때문에 삼계(三界) 가운데 일체의 번뇌법에서 모든 청정법을 증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설하는 심의식이란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중생이 아직 깊은 지혜가 없어도 쉽게 신해(信解)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단지 6식(識)만을 설한 것을 말한다.
【문】어떤 사람에게 아라야식도 있고 6식도 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6식은 있고 아라야식은 없는가?
017_0328_a_13L問曰:有人有 阿羅耶識有六識不?有人有六識無 阿羅耶識不。
【답】여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사람이 무심(無心)하게 수면 상태에 있을 때, 의식이 민절(悶絶)되거나 혼미(昏迷)하여 인사불성일 때, 무상정(無想定)에 들었을 경우,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났을 경우, 아나함인(阿那含人)이 멸진정에 들었을 경우이니 이 다섯 종류의 사람에게는 아라야식은 존재하나 의식은 없다. 둘째, 아라한ㆍ벽지불ㆍ불퇴 보살(不退菩薩)ㆍ여래 세존 이 네 종류의 사람은 마음이 있는 곳에 6식을 존재케 하지만 아라야식은 얼다.
017_0328_b_01L셋째, 범부인이나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은 마음이 있는 곳에 6식도 존재하고 아라야식도 존재한다. 넷째, 모든 아라한ㆍ벽지불ㆍ보살ㆍ세존께서 멸진정에 들었을 경우나 또한 세존께서 무여열반에 들었을 경우에는 아라야식도 없고 6식도 없다. 일체의 내외법(內外法)에는 각기 일정한 성품이 있어 상(相)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다.
무엇 때문에 18계(界) 가운데 단지 6식만을 말하는가? 일정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계(界)는 근(根)이나 진경계(塵境界)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식은 낮이나 밤, 모후라(牟㖃羅)ㆍ라바(羅婆)ㆍ찰나6)를 넘어서기 때문에 갖가지 인연을 지으니 안(眼) 등 모든 근(根)과 색(色) 등 모든 진경계와 심수(心數)를 짝으로 삼아 갖가지 인연을 낳는 것이다. 그 생하는 처소에 따라 이름을 얻으니, 이름이 같지 않다.
안 등의 계(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과보가 무기(無記)여서 다양한 모습이 존재할 수 있으나 식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식계(識界)는 분별할 수 있으나 다른 나머지 계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 만약에 어떤 비구가 식의 덩어리[聚]를 알고자 하면 이러한 행을 닦아 익혀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많은 종류의 상모를 훤히 알 수 있는 마음에는 간략하게 말해 세 가지가 있으니 번뇌를 즐겨 집착하는 경우와 물든 마음이 허물이 되는 경우와 번뇌[惑]를 끊는 방편인 경우이다.
어떻게 비구는 번뇌를 알 수 있는가?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즉 ‘이 마음은 오랜 옛날부터 번뇌를 즐겨 집착하였고 번뇌를 즐겨 한 까닭에 설령 다시 그 마음을 뽑아 버리고 무욕처(無欲處)에 안치하여도 탐욕에 이끌려 잠깐 머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신속히 다시 퇴전하여 돌아가 다시 욕처로 들어간다. 이와 같이 탐욕처ㆍ진에처ㆍ우치처(愚癡處)ㆍ수면처와 나아가 방일처(放逸處)까지도 설령 다시 그 마음을 뽑아버리고 무방일처에 안치하여도 신속히 퇴전하여 돌아가 방일처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라고. 이와 같이 비구는 번뇌에 대해서 이해한다.
017_0328_c_01L어떻게 물든 마음[染心]이 허물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마음에 물듦이 있으면 그것은 자신을 손상시키고 또한 다른 사람도 손상시키며, 현세에 악을 일으키고 내세에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이 짓는 근심[憂]ㆍ슬픔[悲]ㆍ고통[苦]ㆍ고뇌[惱] 등 모든 악한 인연과 나아가 방일에 이르기까지 허물과 병통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고(苦)를 받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 자신의 마음에 모든 허물과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번뇌를 끊는 방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허물과 근심ㆍ슬픔ㆍ고통ㆍ고뇌가 있음을 알고 나는 지금 이와 같은 마음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모든 고뇌를 받지 않아야겠다고 응당 자신의 마음이 아(我)를 쫓아 따르는 것을 억제하고 내[我]가 마음을 쫓지 않아야겠다고 사량(思量)하며 마음에는 탐욕[欲]이 있음을 알아 욕심을 뽑아버리고 무욕처에 안치하여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금 복리(福利)를 볼 수 있게 하며, 나아가 방일심을 뽑아버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선근(善根)을 쌓고 익히면 이 때 이 마음은 다시는 다른 나머지 인연이 없으며 모든 선법에 대하여 닦아 익혀 증장하여 안주함을 얻는다. 번뇌와 증오는 앞서의 허물과 병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는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 이미 ‘즐겨 번뇌를 집착함’을 아는 까닭에, 이미 ‘물든 마음이 허물과 병통임’을 아는 까닭에, ‘번뇌를 끊는 방편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신속히 무상청정무루심(無上淸淨無漏心)을 증득한다.
또 별도로 마음을 알아 또한 전심(轉心)을 말하니 이른바 가명이다. 또 별도로 마음을 알아 또한 전심을 말하니 이른바 타인(他因)이다. 마음을 잘 닦게 되면 두 가지 공덕이 있으니 공덕을 얻어 과보를 얻을 때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우며, 선법(善法)을 닦아 익히면 자재 무애하게 된다.
3처란 무엇인가? 첫째는 해탈에 머무는 것이고, 둘째는 해탈문(解脫門)에 머무는 것이며, 셋째는 해탈지(解脫至)에 머무는 것이다.
017_0328_c_22L云何三處?一者住 於解脫;二者住解脫門;三者住解脫至。
017_0329_a_01L인연법은 6행으로 말미암아야 하니, 첫째는 달라짐이 없는 행[無有異行]이고, 둘째는 마음을 한 곳에 섭수함[攝心一處]이며, 셋째는 선근을 생할 수 있음이고, 넷째는 헤아려 진리를 보고 다른 맛을 보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증상만이 없음이고, 여섯째는 믿음의 보시[信施]를 바르게 사용함이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시를 받는 사람의 보시[信施]이고, 둘째는 보시를 하는 사람의 보시[施者施]이다. 보시의 과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크게 부유하게 되는 과보이고, 둘째는 경사스럽고 즐거운 일의 과보이다. 마땅히 미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마땅히 미래에 이루어져 미래법이 되는가? 없지도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마땅히 행상(行相)을 생한다. 어떻게 머무를 수 있는가? 만약에 미래법이 있으면 행상이 생기고, 만일 이르기[度] 때문에 생한다면, 미래로부터 현재로 이르는 것이니, 이것으로부터 저것이 생기고 미래세로부터 목숨을 마친 사람은 현세에서 몸을 받아 태어난다. 미래법으로 인해 현세법이 생기니 이와 같이 머무르면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 미래법으로 인해 나머지 현세법이 생하고 미래세로부터 현세의 온갖 법들이 비롯되지만 미래세나 현세의 모든 법은 아직 업(業)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세에 어떤 현상이 생기면 이미 구체적인 모습[相]이 생긴 것이다. 미래세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모습이 있지 않으나 현세에서는 구체적인 모습이 생긴다. 만일 미래세에서 다른 모습[異相]이 생한다면 미래성(未來性)을 말미암기[因] 때문이고, 인성(因性)을 말미암기[因] 때문이니 이 두 가지 성품 때문이다. 현세 가운데 이미 다른 모습을 생했다면 현세성(現世性)이기 때문이고, 과성(果性)이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미래세의 법은 어떤 뜻도 낳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처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으로부터 저 곳으로 이른다[度]는 이러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아직 생하지 않았는데 어찌 사라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현세의 법은 만약에 미래법으로 말미암으면 현세법이 생긴다. 미래세의 모든 법은 마땅히 모든 법을 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흔들리는 모습[動相]이 없으니 자상(自相)을 떠나기 때문에 별도의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017_0329_b_01L미래와 현재가 만일 같은 모습이라면 현세 중의 법만이 홀로 업이 있게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업이 생기지 않았어도 지금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면 제행(諸行)은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의 바른 말씀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파괴된다. 여기서는 지금 업이 무상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니 만약에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제행이 항상[常]하다고 한다면 승거(僧佉)7)에서 말하는 “이 법이 본래 존재하지 않았으면 생긴다는 의미를 얻을 수 없고 이미 모든 법이 생겼으면 멸한다는 의미가 없다”는 견해와 같으니, 이 말이 마땅히 이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법은 아직 생기지 않았어도 마땅히 곧 수생(受生)할 수 있으며, 생겨났던 것은 마땅히 멸한다. 만일 그대가 이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모든 법들은 동일한 모습이 돼 버리니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에 분별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무궁하여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길 수 있으니, 어찌 상(相)을 존재케 할 수 있겠는가? 미래법의 성품은 색(色) 등으로부터 상응하니 별도의 다른 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현세법이라는 것은 곧 과(果)를 말하나니 이러한 뜻이 없다. 마땅히 성취되기 때문에 존재하나니 이 진실한 말은 증험하여 믿을 수 있다. 미래의 모든 법은 아직 행상(行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긴다는 뜻이다. 미래법과 같이 과거법도 또한 그러하다.
무엇이 과거의 행법인가? 멸하여 없어진 모습[滅相]이란 생겨난 이래로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무엇이 현재의 행법인가? 이는 아직 멸하지 않은 모습이니 생겨남으로부터 아직 지나가 버리지 않았고 오직 생길 때 머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미래의 행법인가? 현세법의 인(因)이지만 아직 자상(自相)을 생하지 않아 자신의 몸을 받지 못한 것을 말한다.
무엇이 인연인가? 근(根)에 색(色)이 있으면 의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식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이 두 가지 법은 일체종(一切種)이 된다. 일체의 색근종(色根種), 일체의 색법종(色法種), 일체의 심심법종(心心法種)은 다 색근(色根)을 의지하며 또한 식(識)을 의지한다. 하지만 4대색(大色)은 제외된다. 이 4대색은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첫째는 4대종(大種)이고, 둘째는 11일종(種)이다. 이 종(種)들이 상속하여 모든 법에 의지하는 것을 일컬어 인연이라 한다.
만약에 이 식이 색종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범부인은 무색계에서 태어나지만 그 곳에서의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 사라져 아래의 세계[下界]8)에 태어나게 될 경우 이 색종이 없다면 마땅히 다시는 태어나지 못해야 하는데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식은 색근의 근본이다.
세속도(世俗道)를 쫓아 초선정(初禪定)에 들어 초선지(初禪地)에서 태어나면 욕계의 부정법(不淨法)이나 정법(淨法)은 이미 파괴되어 없어졌어도 그 종본(種本)은 아직 다 굳어져 제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선정으로부터 퇴전하여 다시 부정법을 일으키면 초선의 처소로부터 물러나 욕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끊음[斷]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피단(避斷)이고, 둘째는 괴단(壞斷)이며, 셋째는 정단(定斷)이고, 넷째는 본영발단(本永拔斷)이다.
017_0329_c_21L斷有四種:一者避斷;二者 壞斷;三者定斷;四者本永拔斷。
017_0330_a_01L피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욕락을 집착하는 경우에 그 욕락을 끊기 위하여 욕락을 끊는 계를 받아 범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키고 이를 증장하게 한다. 증장하기 때문에 다시는 집착욕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욕심으로 인한 번뇌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 피단이라 한다.
본영발단(本永拔斷)이란 무엇인가? 성인(聖人)이 출세간의 도를 닦아 삼계의 물듦을 떠나면 삼계 가운데 있는 모든 번뇌의 근본 바탕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세 중에 무욕(無欲)을 증득하여 끝내 퇴전하지 않고 이미 위의 세계[上界]에 태어나 다시는 퇴전하여 아래의 세계[下界]에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벼나 보리 등 모든 종자들이 허공이나 건조한 땅에 심어지면 영원히 싹이 날 수 없더라도 종자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만약에 불이 그것을 태워 모두 다 불살라 없애면 종자의 상(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모든 번뇌의 근본도 끊어 없어짐이 또한 이와 같다. 성인이 만약에 무여열반에 들면 선(善)이나 무기(無記)의 종본(種本)은 다 잠복[伏]한다.
【답】이미 불선(不善)의 종본(種本)은 끊어서 미래세에 과보를 낳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생하지도 않으니 이를 본영발단이라 한다. 완전히 번뇌에 결박된 사람은 마음이 생(生)하면 고(苦)가 있고, 낙(樂)이 있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게 된다. 이 일체의 마음은 세 가지가 그 종본이다. 선과 불선과 무기의 법도 또한 그것의 종본이다.
017_0330_b_01L모든 학인(學人)은 세간의 선심(善心)과 염오심(染汚心)과 무기심(無記心)이 있으니 수도위(修道位)에서 번뇌[惑]를 끊는 것을 종본으로 삼는다. 세간의 선심(善心) 등은 다시 다른 법[餘法]이 되어 근본이 된다. 무학인(無學人)은 번뇌를 끊어 없애 세간의 선심이 존재하니 세간에 속하는 것과 같다. 만약 출세간이나 무기(無記)라면 일체의 모든 번뇌흑이 근본이 되지 않고 일체의 선법과 무기법이 근본이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근본을 분별하였으나 이들의 처소를 아라야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처소를 말하자면 모든 세속법은 아라야식이 다 근본이 된다. 모든 법 가운데 출세간의 무단도법(無斷道法)은 아마라식이 그 종본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여, 모든 아라한이 심법(心法)을 배우기 위해서는 4선(禪)에 의지하여야 하며, 안락함에 머묾[安樂性]을 나타내는 것도 또한 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퇴전하여 떨어지면 낱낱의 처소에 가게 된다고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답】퇴(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퇴(失退)이고, 둘째는 주퇴(住退)이다. 실퇴란 범부인에 해당한다. 주퇴란 범부나 성인 모두에 통한다. 세속도에 의거하여 번뇌가 이미 떠났다가 후에 다시 일어나는 것을 퇴실퇴(退失退)라 하고 또한 주퇴퇴(住退退)라고 하기도 한다. 출세간도에 의거하여 번뇌가 이미 끊어지면 마음이 어떤 것에 매달려 일을 하더라도 짓는 마음[作心]을 내지 않기 때문에 이 중간에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안락함에 머묾[安樂住]을 나타내니 그 전후의 사정이 이와 같다. 또한 다시는 아래 지위[下地]의 번뇌[惑]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 주처(住處)의 퇴는 퇴실퇴가 아니다.
017_0330_c_01L모든 아라한은 일체의 번뇌를 다한 과위인데 만약에 불선법(不善法)이 아직 그 종본을 끊지 못했다면 어떻게 아라한의 마음이 잘 해탈하여 모든 누(漏)를 이미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불선법의 종본이 이미 끊어졌다면 어떻게 아라한이 마음에 바르지 못한 생각[不正思惟]을 상속하겠는가? 어찌 다시 생하겠으며, 어떻게 모든 번뇌[惑]가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출세간도에 의지하여 이미 번뇌를 끊어 없앴으면 퇴실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설한 바와 같이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인(生因)이고, 둘째는 방편인(方便因)이다.
차제연(次第緣)이란 모든 심수법(心數法)이 차례에 따라 나머지 다른 법들이 생기는 것이니, 이 심수법은 생겨나는 것의 연이 된다. 어느 하나의 식은 그 식이 차제연을 지으니 의(意)라 이름하기도 하고 의입(意入)이라 이름하기도 하며 심계(心界)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 차제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미 멸함[已滅]이요, 둘째는 처소를 이주함[移處]이다.
증상연(增上緣)이란 안(眼) 등 내입(內入)이 함께할 때 생기는 것으로 안식(眼識) 등과 더불어 증상연이 되어 마음으로 하여금 짓게 만든다. 경계 가운데서 만일 함께하면 마음[心]과 심수법은 서로 연(緣)이 된다. 과거에 지은 선업과 불선업은 미래세에서 여의(如意)하게든 불여의(不如意)하게든 과보를 생하게 하는 증상연이 된다. 밭과 물과 거름 등이 모든 종자에게는 증상연이 되는 것처럼 세간의 기술이나 모든 다양한 행위의 업은 모든 지혜의 증상연이 된다. 이 증상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불리(不離)이고, 둘째는 유공(有空)이다.
017_0331_a_01L이 인연(因緣)은 주체적으로 생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 세 가지 연은 오직 증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행(行)의 연이 갖추어졌을 때에는 함께 이르지만[同至] 이 행의 종본(種本)은 갖가지 행을 낳기 때문에 모든 행은 연을 갖추지 않았을 때에도 생긴다. 네 가지 연을 의지하여 열 가지 인을 훤히 알 수 있으니 보살지에서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과거행을 반연하여 마음이 생기고 미래행을 반연하여 또한 마음을 생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과거행이나 미래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떤 법에 대하여 마음이 경계를 삼는다는 것인가? 이러한 경계에 의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이 마음은 곧 경계를 삼는 것이 없게 된다.
【문】만약에 마음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분명하다면 쌍쌍을 의대(依對)함을 말미암아 모든 식이 생겨나는데 쌍쌍이란 눈이 색을, 귀가 소리를, 나아가 마음이 법을 의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진정으로 부처님 말씀이라면 어떻게 무방할 수 있겠는가?
【답】여기서의 법진(法塵)은 5식(識)이 경계로 삼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진(塵)을 법연(法緣)이라고 하셨다. 마음이 반연[緣]하는 법은 무릇 심식이 방편으로 생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말씀하셨으니, 다시 무슨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 심식은 과거의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온갖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지 않으니 과거나 미래의 모든 식의 법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에 법이 있다고 하면 유법상(有法相)이 모이고, 법이 없다고 하면 무법상(無法相)이 모이게 된다.
이 심식이 법이 있다는 생각을 바르면 법이 있다는 뜻[有法義]을 취하고 법이 없다는 생각을 따르면 법이 없다는 뜻[無法義]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식이 없는 것[無者]을 경계로 삼는다는 것을 믿어 알 수 있다. 만약에 이 식이 유(有)나 무(無) 두 가지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체법의 뜻을 취할 수 없다. 만일 심식이 유나 무를 경계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실단다(悉檀多)의 이치를 방해하는 것이다.
【문】이 식이 만일 없는 법[無法]을 경계로 취한다면 식도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017_0331_a_19L問曰:此識若取無法爲 境,識亦應無。
【답】과거나 미래인 경우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으나 현재의 경우에는 식이 존재한다.
017_0331_a_20L答曰:去來故無識,現在 故有。
【문】예컨대 안식(眼識)은 없는 것[無]을 경계로 취할 수 없는데, 심식은 어떻게 없는 것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
017_0331_a_21L問曰:眼識不得取無爲境,心識 云何能取無耶?
017_0331_b_01L【답】삼세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세히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이로써 심식이 없는 것[無]을 경계로 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을 떠나서 나[我]라는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我)가 없다는 것은 유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 이렇듯 모든 식은 무아(無我)를 취하여 경계로 삼는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총상법(摠相法)을 알면 믿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뜻이다.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이라는 네 가지 진(塵)을 떠나면 전당(殿堂)ㆍ수레ㆍ음식ㆍ의복 및 나머지 여러 기구들을 헤아려 알 수가 없다. 이 전당 등의 법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유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식은 전당 없음[無殿堂]을 취하여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총상법을 알면 믿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뜻이다.
모든 옳지 못한 견해[邪見]는 일체를 비방하는 것이니,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고 번뇌의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한다. 이 모든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치에 따라 이 모든 법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사견이 아니다. 이것들은 진실로는 모두 다 존재하지 않는다. 옳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없음[無]을 취하여 경계로 삼으니 식을 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세 번째 뜻이다.
또한 모든 행은 상주함이 없으니, 이 상주함이 없는 것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지만 이 모든 식은 무상(無常)을 경계로 취하지 않음도 없다. 지혜 있는 사람은 총상법이 식을 생하지 않음이 없으며 항상 경계가 없는 식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에 일체의 행을 낳지 못하여 항상함을 볼 수 없어 아무런 뜻도 없다면 바른 지혜를 의지하여도 싫증냄[厭]을 낳을 수 없고 무염(無染)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해탈도 없으며 열반도 얻을 수 없게 된다. 만약에 이런 이치대로라면 일체 중생의 모든 번뇌혹(煩惱惑)은 영원히 결박되어 풀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뜻이다.
과거의 생은 선과 불선의 업을 지었나가 이미 사라졌으나 미래세에 좋아할 만하거나[愛] 좋아할 만하지 못한[不愛] 과보를 받는다. 이 행의 상속은 업종자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업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두 가지 취지가 있다. 첫째는 정인(正因)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집착을 막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재천ㆍ범석(梵釋)ㆍ여러 천신[諸天]ㆍ자성(自性)ㆍ신아(神我)ㆍ시절(時節)ㆍ미진(微塵)이 존재하며 이런 법들을 바탕으로 중생의 고와 낙이 모두 나 생긴다고 말한다. 둘째는 어떤 근본 원인도 없다[無因]고 말하는 사람들의 집착을 막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말하고, 중생들에게 깨끗함[淨]이 있거나 깨끗함이 없거나[不淨] 한 것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컨대 나무나 돌 등의 사물이나 또는 존중하는 일이나 경만(輕慢)하는 일 등은 이러한 일을 나타내고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과거의 행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이 처소[處]에 집착하지 않고서도 안락하게 머문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과거의 모든 행은 과(果)를 낳기 때문에 존재하고 미래의 모든 행은 인(因)이 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현재의 온갖 행[諸行]에 대해서는 어떻게 믿어 알 수 있는가? 세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나니, 과거행의 과이기 때문이고, 미래행의 인이기 때문이며, 자상(自相)이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뜻을 의지하여 이 두 가지 법을 나타낸다. 첫째, 과거행이나 미래행이 진실하다고 여기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함이 만약에 과거행이나 미래행의 모습[相]이 실유(實有)하는 것이라면 과거나 미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無見人]은 과거나 미래가 없다고 말하고 또한 현재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들을 끊기 위함이다.
017_0332_a_01L부처님께서는 “과거나 미래의 세계도 있고 현재의 세계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뜻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종자가 상속하여 이미 과를 생한 경우에는 이 뜻을 과거라고 하며, 생기려고 하는 것의 종자가 상속하는 것을 미래라고 한다. 현재의 온갖 종자의 과(果)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를 현재계(現在界)라 한다. 따라서 이런 뜻[意]을 설한 것이다.
비구가 종자의 상속이 한 가지의 경계가 아닌 한량없는 법임을 아는 것을 계(界)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色) 등의 음(陰)으로부터 태어남[生]ㆍ늙음[死]ㆍ머물[住]ㆍ멸함[滅]이 비롯되나니, 다시 별도의 법이 없으며 또한 실유(實有)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미래의 행은 실유함을 부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어 진실로 있다[實有]는 뜻을 끊는다. 어떻게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는가? 미래의 생(生)은 스스로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능히 다른 것을 생하겠는가? 현재의 모든 생도 능히 생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현재의 법을 낳을 수도 없다.
이 생하는 모습[生相]을 온갖 행이 이루어진다거나 온갖 행이 일어난다거나 온갖 행이 나타나 있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의 뜻을 밝히고 있으나 다른 많은 명칭이 존재한다. 이 많은 명칭을 떠나 다시 생하는 모습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들 명칭을 생하는 양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모든 법에는 각기 종자의 인(因)이 정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생함[生]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 생함이라는 것은 허약하여 이를 가명이라 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무릇 생함이란 행이 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을 생하는 것인가? 만약에 생함이 스스로의 행으로 행법을 능히 생할 수 있다면 생함이 있는 곳에 행법이 발생하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능히 일으키는 것이라면 이를 행이 생한다[行生]고 한다. 하나의 행 가운데에 응당 두 가지 생함이 있게 되니, 능히 생하는 것과 모든 행이 스스로를 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생의 뜻은 나머지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017_0332_b_01L만약에 이 네 가지 법이 유위의 양상[有爲相]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세 가지 양상, 즉 생과 멸과 주이(住異)만을 설하셨는가? 일체의 행법은 삼세(三世)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래세로부터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세에 의지하여 발생되는 것은 유위상(有爲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생긴 것이 아니므로 취착(取著)할 처소가 없다. 이미 생겼던 것은 과거세에서 이미 다 멸하였으니 과거세에 의지하면 이를 멸이라 한다. 이는 유위상이며 또한 취착할 처소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이기 때문이다.
현세에 나타난 것은 머무는[住] 것이니, 현세에 의지하면 이는 유위상이며 취착할 처소가 존재하지만 이 머무는 것은 또한 다시 달라짐이 있으니 많은 허물이 존재한다. 이것이 생(生)의 모양인데 누구라서 감히 그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길상한 일이든 길상하지 못한 일이든 이에 따르므로 머무름과 달라짐[異]을 합하여 하나의 양상[相]으로 여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서 유위법의 모습[有爲法相]이 나타난다.
만약에 이 세 가지 양상이 성인들에 의해 사량(思量)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음(陰) 가운데서 기상(起相)과 멸상(滅相)을 관찰하시고 법을 의존하여 머무르셨을까? 또한 왜 주이상(住異相)을 관찰하지 않으셨을까? 생(生)과 주이(住異) 이 두 가지는 기(起)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과 주이 이 두 가지 양상을 합하여 하나로 말씀하신 것이다. 일어남이 끝에 이르는 경우에는 일어남의 양상을 관찰하여 머문다고 말하고 그 밖의 한 양상은 제2분에서 한 끝자리에 안치하는 경우에는 이를 멸상을 관찰하여 머문다고 말한다.
또한 별도의 뜻이 있으니 이 멸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무염(無染)을 증득할 수 있으며 유루(有漏)의 괴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해탈을 증득할 수 있다. 오직 두 가지 양상(즉 기상과 멸상)만을 관찰하여 이를 사유하여 모든 행법이 무상(無常)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유루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된다. 이른바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생겼다가 무너져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 하니, 이를 무상이라 한다.
017_0332_c_01L찰나에 일어난다는 것은 찰나찰나에 모든 행이 생기는 것이니, 이를 찰나생이라 한다. 수생생이란 번뇌의 결박을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처처에 따라 떨어져 그 각각의 처소에서 갖가지 음(陰)이 생기는 것을 수생생이라 한다. 기생생이란 영아에서부터 청장년, 노인에 이르는 것을 기생생이라 한다. 별심생이란 갖가지 연(緣)과 갖가지 수(受)와 갖가지 선(善) 등과 갖가지 도(道)를 의지하여 해탈을 증득하였든 아직 해탈을 얻지 않았든 한량없는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 별심생이라 한다.
불여의생이란 지옥, 아귀, 축생의 세 악취(惡趣)에서 온갖 고뇌를 받는 것이니, 이를 불여의생이라 한다. 여의생이란 인간이나 천상 세계에서 쾌락의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하생이란 욕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중생(中生)이란 색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상생이란 무색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첫 번째 수태(受胎)된 경우를 하생이라 하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수태된 경우를 중생이라 하며, 네 번째 수태된 경우를 상생이라 한다.
또한 온갖 악과(惡果)를 받는 것을 하생이라 하고, 모든 무기법(無記法)에서 선과(善果)를 일으키는 것을 제외한 경우를 중생이라 하며, 일체의 선법이 일체의 선과를 낳는 것을 상생이라 한다. 유상생(有上生)이란 욕계의 처소로부터 나아가 무불용처(無不用處)에 이르기까지이다. 무상생(無上生)이란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또한 유상생이란 아라한이 태(胎)에 든 것으로부터 아직 최후 1찰나의 음(陰)에 이르지는 않은 상태를 말하며, 최후의 일념을 무상생이라 한다.
늙음[老]의 의미를 분별해 보면 또한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신체의 늙음[身老]ㆍ마음의 늙음[心老]ㆍ수명의 늙음[壽老]ㆍ변하여 달라지는 늙음[變異老]ㆍ음의 늙음[陰老] 등이 있다.
017_0332_c_19L分別老義復有多種。何者?身老、心老、 壽老、變異老、陰老。
017_0333_a_01L신체의 늙음이란 머리가 희어지고 이빨이 떨어져 나가며 피부가 늘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들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몸에는 갖가지 모습이 잇다. 마음의 늙음이란 낙수(樂受)와 상응하던 마음이 변하여 달라져 생기는 것을 말하니, 만일 선심(善心)이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바뀌면 즐기는 사물에 대해 애착처(愛著處)를 낳지만 다시 생겨나 변하여 달라지므로 이 처(處)는 아무런 과(果)가 없다. 이것을 마음의 늙음이라고 한다. 수명의 늙음이란 낮과 밤, 찰나, 라바, 모후라가 경과하기 때문에 수명이 점차 줄어들어 나아가 차례대로 모든 것이 점차적으로 촉박하게 하니, 이를 수명의 늙음이라고 한다.
변하여 달라지는 늙음이란 일체의 자재함과 부귀영화와 병이 없던 색력(色力) 등이 점차적으로 감소하여 일실되는 경우를 말한다. 음(陰)이 달라져 늙음[變異老]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 음이 점차적으로 증장하여 이곳으로부터 사라져 악도의 하천한 곳에 태어나니 이를 음이 달라지는 늙음이라 한다. 또 별도의 한 가지 늙음의 반연[緣]이 있으니, 이 한 가지 늙음은 전에 말한 바 있는 늙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행이 찰나찰나 생겨나면서 달라지는 것을 별도의 한 가지 늙음이라 한다.
머묾[住]의 뜻을 분별해 보면 또한 많은 종류가 있으니, 찰나주(刹那住)ㆍ상속주(相續住)ㆍ의연주(依緣住)ㆍ일심주(一心住)ㆍ여제법주(如制法住) 등이다.
017_0333_a_10L分別住義亦 復多種:剎那住、相續住、依緣住、一心 住、如制法住。
찰나주란 오직 생길 때만 머무르는 것이고, 상속주란 처소를 따라 이미 생긴 모든 음이나 의복ㆍ음식과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와 또한 외부 세계인 기계(器界)와 나아가 겁이 다할 때까지를 상속주라 한다. 의연주란 고락 등의 수(受)와 선악 등의 법이 각각 현재를 연하여 이를 따라 간직하며 머무르는 것을 의연주라 한다. 일심주란 바른 선정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이전의 선정상태와 같이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일심주라 한다. 여제법주란 처소의 경계에 따라 왕이 율령으로 다스리는 국가나 성읍이나 취락에는 네 가지 종성(種姓)의 사람들이 앞서 제정한 일에 의거하여 주지(住止)하는 것을 여제법주라 한다.
017_0333_b_01L괴무상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생겨났으면 곧 멸하는 것을 달하니, 이를 괴무상이라 한다. 변이무상이란 진애할 만한 행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기는 것을 말하니, 이를 변이무상이라 한다. 별리무상이란 친애할 만한 사물이 분산되어 떠나버린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무상이 미래세에 있게 되는 경우를 당생무상이라 한다. 또 이들 세 가지가 현세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지무상이라 한다.
오욕락을 받아도 스스로 간직할 수 없고 떨어져 나가고 영락(零落)하니, 친애하는 것과 멀어지게 되며 이런 일이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고뇌를 준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경에 따르면 탐탐치 않게 여겨 싫어해야 하는 것들이다. 법을 행하는 가운데 모든 외도 무리들은 얼마간 이것들이 무상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지만 오직 욕계만 떠날 뿐이며 모든 행법에서 부분적으로 싫어 떠나는 마음을 낸다. 만일 성문(聲聞)들이 이것들이 무상하다고 원만하게 갖추어 사유하면 마침내 이것들을 모두 싫어하여 떠남으로써 무염(無染) 내지 해탈을 증득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