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409_c_01L변중변론(辯中邊論) 하권
017_0409_c_01L辯中邊論卷下
세친보살 지음
현장 한역
한길로 번역
017_0409_c_02L世親菩薩造
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6. 변득과품(辯得果品)
017_0409_c_04L辯得果品第六
이미 닦음의 위치[修位]를 설명하였는지라, 과의 얻음[得果]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리라.
017_0409_c_05L已辯修位得果云何頌曰
그릇[器]을 말하여 이숙(異熟)이라고 함과
힘(力)은 바로 그것의 더함[增上]과
좋아 즐김[愛樂], 더욱 자람[增長], 깨끗함[淨]이니
차례대로 이는 다섯 가지 결과[五果]이다
017_0409_c_06L器說爲異熟
力是彼增上
愛樂增長淨
如次卽五果
≪논≫ 그릇이라 함은, 착한 법에 따르는 이숙이며, 힘이라 함은, 저 그릇의 더 위가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착한 법으로 하여금 상등 품류 성품[上品性]을 이루게 한다. 좋아 즐김이라 함은, 전생에 자주 자주 닦았던 착한 힘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 착한 법에 대하여 깊이 좋아 즐기는 마음을 냄이며, 더욱 자람이라 함은, 현재에 자주 자주 닦는 착한 힘 때문에 닦는바 착한 뿌리가 빨리 원만할 수 있게 함이다. 깨끗함이라 함은, 장애를 끊는 것이어서 영원히 매임을 여의게 됨이다.
017_0409_c_08L論曰器謂隨順善法異熟力謂由彼器增上力令諸善法成上品性愛樂謂先世數修善力今世於善法深生愛樂增長謂現在數修善力令所修善根速得圓滿淨謂障斷得永離繫
이 다섯 가지는 차례대로 다음의 다섯 가지 결과이다. 첫째는 이숙의 결과[異熟果]요, 둘째는 더함의 결과[增上果]요, 셋째는 같은 종류의 결과[等類果]요, 넷째는 사람 작용의 결과[士用果]요, 다섯째는 얽매임을 여읨의 결과[離繫果]이다. 다시, 다음에 송으로 말한다.
017_0409_c_13L此五如次卽是五果一異熟果二增上果三等流果四士用果五離繫果復次頌曰
다시 간략히 그 밖의 결과를 말하면
뒤뒤[後後]와 처음[初]과 자주 익힘[數習]과
마지막[究竟]과 따름[順]과 장애 없앰[障滅]과
여읨[離]ㆍ훌륭함[勝]ㆍ위[上]와 위없음[無上]이다
017_0409_c_16L復略說餘果
後後初數習
究竟順障滅
離勝上無上
≪논≫ 간략하게 그 밖의 결과의 차별을 말하자면 열 가지가 있다.
017_0409_c_18L論曰略說餘果差別有十
017_0410_a_01L첫째는 뒤뒤의 결과[後後果]이니, 종성(種性)을 원인으로 하여 마음을 내는 결과를 얻으며, 이와 같은 결과가 차츰 나아가는 줄 알아야 함이요, 둘째는 맨 처음의 결과[最初果]이니, 맨 처음에 세간 벗어나는 법을 증득함이요, 셋째는 자주 익힘의 결과[數習果]이니, 이로부터 뒤로는 모든 배울 것 있는 이의 위치[有學位]요, 넷째는 마지막의 결과[究竟果]이니, 배울 것 없는 이의 위치[無學位]요, 다섯째는 따름의 결과[隨順果]이니, 점차적인 원인이어서 곧 이것은 뒤뒤의 결과에 소속되는 줄 알 것이다.
017_0409_c_19L一後後果謂因種性得發心果如是等果展轉應知二最初果謂最初證出世閒法三數習果謂從此後諸有學位四究竟果謂無學法五隨順果謂因漸次應知卽是後後果攝
여섯째는 장애 없앰의 결과[障滅果]이니, 능히 끊는 도이어서 곧 맨 처음의 결과로 장애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의 없앰이라고 말함이요, 일곱째는 얽매임을 여읨의 결과[離繫果]이니, 곧 자주 익힘의 결과와 마지막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어서 배울 것 있고 배울 것 없는 이의 위치에서 차례대로 번뇌의 얽매임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자못 훌륭한 결과[殊勝果]이니, 신통 따위의 자못 훌륭한 공덕이요, 아홉째는 위 있음의 결과[有上果]이니, 보살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어서 다른 승[餘乘]에서는 뛰어났지마는 아직 부처는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요, 열째는 위 없음의 결과[無上果]이니, 여래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위에 다시는 더 다른 훌륭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설명된 뒤의 여섯 가지 결과는 곧 마지막[究竟] 등인 앞의 네 가지 차별인데, 이와 같은 모든 결과는 간략하게 말하였을 뿐이요, 만약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량이 없다.
017_0410_a_02L六障滅果謂能斷道卽最初果能滅障故說爲障滅七離繫果謂卽數習及究竟果學無學位如次遠離煩惱繫故八殊勝果謂神通等殊勝功德九有上果謂菩薩地超出餘乘未成佛故十無上果謂如來地此上更無餘勝法故此中所說後六種果卽究竟等前四差別如是諸果但是略說若廣說卽無量
결과의 총괄한 뜻[總義]이라고 함은, 섭수하기 때문이요, 차별하기 때문이요, 전생에 익혔기 때문이요, 뒤뒤에 끌어 일으키기 때문이요, 표지하기 때문이며, 풀이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섭수한다 함은, 다섯 가지 결과요, 차별이라 함은 그 밖의 결과요, 전생에 익혔다 함은 이숙의 결과요, 뒤뒤에 끌어 일으킨다 함은 그 밖의 네 가지 결과요, 표지한다[標] 함은 뒤뒤[後後] 따위의 네 가지 결과요, 풀이한다【釋】함은 따름[隨順] 따위의 여섯 가지 결과이니, 앞의 네 가지 결과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017_0410_a_11L摠義者謂攝受故差別故宿習故後後引發故摽故釋故此中攝受者謂五果差別者謂餘果宿習者謂異熟果後後引發者謂餘四果摽者後後等四果釋者謂隨順等六果別前四果故
7. 변무상승품(辯無上乘品)
017_0410_a_16L辯無上乘品第七
이미 결과 얻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무상승(無上乘)을 이제 말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0_a_17L已辯得果無上乘今當說頌曰
통틀어서 세 가지 위 없음[三無上]으로 말미암아
무상승이라고 말하나니,
바른 행[正行]과 반연할 바[所緣]와
닦아 증득함[修證]의 위 없음이다
017_0410_a_18L摠由三無上
說爲無上乘
謂正行所緣
及修證無上
017_0410_b_01L≪논≫ 이 대승(大乘)중에는 통틀어서 세 가지 위 없음의 뜻으로 말미암아 무상승이라고 하나니, 세 가지 위 없음이라고 함은 첫째 바른 행의 위 없음이요, 둘째 반연할 바위 없음이요, 셋째 닦아 증득함의 위 없음이다.
이 중에서 바른 행의 위 없음이라고 함은 열 가지 바라밀다의 행[十波羅蜜多行]이다. 이 바른 행의 모양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0_a_20L論曰此大乘中摠由三種無上義故名無上乘三無上者一正行無上所緣無上三修證無上此中正行無上者謂十波羅蜜多行此正行相云何應知頌曰
바른 행에는 여섯 가지 있나니
가장 훌륭함[最勝]과 뜻 지음[作意]과
법을 따름[隨法]과 두 치우침을 여읨[離二邊]과
차별(差別)과 차별 없음[無差別]이 그것이니라
017_0410_b_02L正行有六種
謂最勝作意
隨法離二邊
差別無差別
≪논≫ 곧 열 가지 바라밀다에서는 닦는 차별에 따라서 여섯 가지 바른 행이 있다. 첫째는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이요, 둘째는 뜻 지음의 바른 행이요, 셋째는 법을 따름의 바른 행이요, 넷째는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읨의 바른 행이요, 다섯째는 차별의 바른 행이요, 여섯째는 차별 없음의 바른 행이다.
017_0410_b_04L論曰卽於十種波羅蜜多隨修差別有六正行一最勝正行二作意正行三隨法正行四離二邊正行五差別正行六無差別正行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0_b_08L最勝正行其相云何頌曰
가장 훌륭함에는 열두 가지 있나니
넓고 큼[廣大]과 오랜 시간[長時]과
의지할 곳[依處]과 그지없음[無盡]과
끊임없음[無間]과 어려움 없는 성품[無離性]이며
017_0410_b_09L最勝有十二
謂廣大長時
依處及無盡
無閒無難性
자재(自在)와 섭수(攝受)와 일으킴[發起]과
얻음[得]과 같은 종류[等流]와 마지막[究竟]이다
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 건넘[十度]을 말하여
바라밀다라고 이름하게 된다
017_0410_b_11L自在攝發起
得等流究竟
由斯說十度
名波羅蜜多
≪논≫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에 열두 가지 있나니, 첫째는 넓고 큼의 가장 훌륭함이요, 둘째는 오랜 동안의 가장 훌륭함이요, 셋째는 의지할 곳의 가장 훌륭함이요, 넷째는 그지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다섯째는 끊임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여섯째는 어려움 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일곱째는 자재의 가장 훌륭함이요, 여덟째는 섭수의 가장 훌륭함이요, 아홉째는 일으킴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째는 증득함에 이름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한째는 같은 종류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두 번째는 마지막의 가장 훌륭함이다.
017_0410_b_12L論曰最勝正行有十二種一廣大最二長時最勝三依處最勝四無盡最勝五無閒最勝六無難最勝七自在最勝八攝受最勝九發起最勝至得最勝十一等流最勝十二究竟最勝
이 중에서 넓고 큼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마침내 온갖 세간의 부귀와 안락의 자재함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뜻이 높고 멀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셋의 수없는 겁[三無量劫]에 쪼이고 익혀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지할 고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널리 온갖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지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위 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에 회향하여 다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17_0410_b_18L此中廣大最勝者終不欣樂一切世閒富樂自在志高遠故長時最勝者三無數劫熏習成故依處最勝普爲利樂一切有情爲依處故盡最勝者迴向無上正等菩提無窮盡故
017_0410_c_01L끊임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자기와 남이 평등한 훌륭한 알음[勝解]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에 대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일으켜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려움 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다른 유정의 닦는바 착한 법에 대하여 깊이 따라 기뻐할뿐더러 자기가 하는 보시 등의 바라밀다로 하여금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410_b_23L無閒最勝者由得自他平等勝於諸有情發起施等波羅蜜多速圓滿故無難最勝者於他有情所修善法但深隨喜令自施等波羅蜜多速圓滿故
자재의 가장 훌륭함이라함은, 허공장 사마아디[虛空藏三昧] 등의 힘으로 말미암아 닦는바 보시 등으로 하여금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섭수와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분별이 없는 자리[無分別地]의 섭수하는 바로서 보시 등으로 하여금 극히 맑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으킴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훌륭한 해행 자리[勝解行地]의 가장 상등 품류의 알음[忍] 중에 있음이다. 증득함에 이름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극히 기쁨 자리[極喜地:第一地]에 있음이다. 같은 종류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그 다음의 여덟 자리[八地:第二地로부터 第九地까지이다]에 있음이다. 마지막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제10지[地] 및 부처님 자리[佛地]안에 있나니, 보살과 여래의 원인과 결과가 원만하기 때문이다.
017_0410_c_04L自在最勝者由虛空藏等三摩地力令所修施等速圓滿故受最勝者無分別智之所攝受能令施等極淸淨故發起最勝者在勝解行地最上品忍中至得最勝者在極喜地等流最勝者在次八地究竟最勝者在第十地及佛地中菩薩如來因果滿故
보시 등의 열 가지 바라밀다에는 모두 이와 같은 열두 가지가 가장 훌륭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모두 저 언덕에 이름[到彼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무엇이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0_c_11L由施等十波羅蜜多皆有如斯十二最勝是故皆得到彼岸名何等名爲十到彼岸頌曰
열 가지의 바라밀다라고 함은
보시[施]와 계율[戒]과 편안히 참음[安忍]과
힘써 나아감[精進]과 선정[定]과 반야(般若)와
방편(方便)과 소원[願]과 힘[力]과 지혜[智]이다
017_0410_c_13L十波羅蜜多
謂施戒安忍
精進定般若
方便願力智
≪논≫ 이것은 보시 등의 열 가지 건넘의 별명을 나타내는 것이니, 보시 등은 어떻게 저마다 따로 행위를 짓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0_c_15L論曰此顯施等十度別名施等云何各別作業頌曰
이롭게 함과 해치지 않음과 받음[受]과
공덕을 더함과 들임과 벗어남과
그지없음과 항상 일으킴과 결정함과
수용하여 다른 이를 성숙시킴이다
017_0410_c_17L饒益不害受
增德能入脫
無盡常起定
受用成熟他
≪논≫ 이것은 보시 등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의 저마다 달리 하는 일을 나타낸 것이니, 차례대로 알아야 한다.
017_0410_c_19L論曰此顯施等十到彼岸各別事業如次應知
017_0411_a_01L모든 보살은 보시(布施) 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유정에게 널리 이롭게 함이다. 깨끗한 계율[淨戒]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음이다. 편안히 참는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다른 이가 손해를 끼칠 적에도 깊이 참고 받음이요, 힘써 나아가는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공덕을 더욱 자라게 함이다. 선정[靜慮]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신통 등을 일으키어 유정들을 이끌어서 바른 법에 들게 함이다.
017_0410_c_21L謂諸菩薩由布施波羅蜜多故於諸有情普能饒益由淨戒波羅蜜多故於諸有情不爲損害由安忍波羅蜜多故他損害時深能忍受由精進波羅蜜多故增長功德由靜慮波羅蜜多故起神通等能引有情令入正法
반야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바르게 유정을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여 해탈할 수 있게 함이다. 방편의 교묘한[方便善巧]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에 회향하여 보시 등의 공덕을 그지없게 함이다. 소원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보시 등에 따르는 훌륭한 생(生)을 받아들여서 온갖 생중에 언제나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 공경하고 공양하면서 늘 보시 등을 일으킴이다.
017_0411_a_04L由般若波羅蜜多故能正教授教誡有情令得解脫由方便善巧波羅蜜多故迴向無上正等菩提能令施等功德無盡由願波羅蜜多攝受隨順施等勝生一切生中恒得値佛恭敬供養常起施等
힘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생각하여 가리는 힘[思擇力]과 닦아 익히는 힘[修習力]의 두 가지를 두루 갖추어서 모든 장애를 눌러 없애고 보시 등으로 하여금 언제나 결정코 옮아가게 함이다. 지혜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듣고 말하는 대로의 모든 법의 그릇됨을 떠나며 보시 등의 더 위가는 법의 즐거움[增上法樂]을 수용하여 뒤바뀜이 없이 온갖 유정들을 성숙시킨다.
017_0411_a_09L由力波羅蜜多故具足思擇修習二力伏滅諸障能令施等常決定轉由智波羅蜜多故離如聞言諸法迷謬受用施等增上法樂無倒成熟一切有情
이와 같이 이미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뜻 지음의 바른 행[作意正行]의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말한다
017_0411_a_13L是已說最勝正行作意正行其相云頌曰
보살은 세 가지의 지혜로써
한결같이 대승을 생각하면서
베풀어 설치하는 법 그대로 하면
뜻 지음의 바른 행이라고 한다
017_0411_a_15L菩薩以三慧
恒思惟大乘
如所施設法
名作意正行
≪논≫ 만약 모든 보살로서 들음[聞]과 생각함[思]과 닦음[修]으로 이루어지는 미묘한 지혜로써 자주자주 뜻을 짓고 대승을 생각하며 보시 등에 의하여 베풀어 설치되는 계경[契經] 등의 법 그대로 하게 되면, 이와 같은 것을 뜻 지음의 바른 행이라고 한다.
017_0411_a_17L論曰若諸菩薩以聞思修所成妙慧數數作意思惟大乘依布施等如所施設契經等法如是名爲作意正行
이 모든 보살이 세 가지 지혜로써 대승을 생각한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a_20L此諸菩薩以三妙慧思惟大乘有何功德頌曰
이는 착한 경계[善界]를 더욱 자라게 함과
뜻에 들어감과 일을 이룩함이다
017_0411_a_22L此增長善界
入義及事成
017_0411_b_01L≪논≫ 들어서 이루어지는 지혜[聞所成慧]는 대승을 생각하며 착한 뿌리 경계[善根界]를 더욱 자랄 수 있게 함이다. 생각하여 이루어지는 지혜[思所成慧]는 대승을 생각하며 바르게 들었던 것의 진실한 뜻에 깨치어 들어감이다. 닦아서 이루어진 지혜[修所成慧]는 대승을 생가하며 소망하는 일을 이룩하여 원만하게 함이니, 다스림을 닦는 자리[修治地]에 나아가 들기 때문이다.
017_0411_a_23L論曰聞所成慧思惟大乘能令善根界得增長思所成慧思惟大乘能正悟入所聞實義修所成慧思惟大乘能令所求事業成滿謂能趣入修治地故
뜻 지음의 바른 행에는 어떠한 돕는 짝[助伴]이 있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作意正行有何助伴?頌曰
이 돕는 짝은 바로
열 가지 법의 행[法行]인 줄 알아야 한다
017_0411_b_05L此助伴應知
卽十種法行
≪논≫ 이와 같은 뜻 지음의 바른 행은 열 가지 법의 행으로 섭수하는 바로 말미암는 줄 알아야 하리니, 어떤 것을 열 가지 법의 행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b_06L論曰應知如是作意正行由十法行之所攝受何等名爲十種法行頌曰
쓰고 베낌과 공양함과
남에게 베품과 들음과 펼쳐 읽음과
받아 지님과 바르게 열어 폄과
읊고 욈과 그리고 생각함과 닦음이다
017_0411_b_08L謂書寫供養
施他聽披讀
受持正開演
諷誦及思修
≪논≫ 이 대승에는 열 가지 업의 행이 있나니, 첫째는 쓰고 베낌이요, 둘째는 공양함이요, 세째는 다른 이에게 베품이요, 네째는 만약 다른 이가 읽고 외면하는 마음을 오로지 자세히 들음이요, 다섯째는 스스로가 펼쳐서 읽음이요, 여섯째는 받아 지님이요, 일곱째는 바르게 다른 이를 위하여 글의 뜻을 열어서 폄이요, 여덟째는 읊고 욈이요, 아홉째는 생각함이요, 열째는 닦아 임힘이다.
017_0411_b_10L論曰於此大乘有十法行一書寫供養三施他四若他誦讀專心諦聽五自披讀六受持七正爲他開演文八諷誦九思惟十修習
열 가지 법의 행을 행하여 몇 가지 복을 얻게 되느냐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b_14L行十法行獲幾所福頌曰
열 가지 법의 행을 행하게 되면
복 더미를 얻음이 한량 없도다
017_0411_b_15L行十法行者
獲福聚無量
≪논≫ 이와 같은 열 가지 법의 행을 수행하면 얻게 되는 그 복 더미야말로 그 양이 그지 없다.
017_0411_b_16L論曰修行如是十種法行所獲福聚其量無邊
무엇 때문에 대승경등에서만 이 법의 행을 닦아서 가장 큰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고, 성문승에 있어서는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b_18L何故但於大乘經等說修法行獲最大果於聲聞乘不如是說頌曰
훌륭하기 때문이고 그지없기 때문이며
남을 거둬 주되 쉬지 않기 때문이다
017_0411_b_20L勝故無盡故
由攝他不息
017_0411_c_01L≪논≫ 이 대승에서 모든 법의 행을 닦음에는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니, 첫째는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지없기 때문이다. 다른 유정들을 거두어서 이롭게 하는지라, 그 때문에 대승을 말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비록 남음 없는 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 언제나 쉬지 않는지라, 그 때문에 대승을 말하여 그지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뜻 지음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법을 따름의 바른 행[隨法正行]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b_21L論曰於此大乘修諸法行由二緣故獲最大果一最勝故二無盡故由能攝益他諸有情是故大乘說爲最勝由雖證得無餘涅槃利益他事而恒不息是故大乘說爲無盡如是已說作意正行隨法正行其相云何頌曰
법을 따름의 행은 두 가지여서
모든 산란함이 없음[無散亂]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이 변하여 바뀜[轉變]이니
모든 보살은 알아야 한다
017_0411_c_04L隨法行二種
謂諸無散亂
無顚倒轉變
諸菩薩應知
≪논≫ 법을 따름의 행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란함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이요, 둘째는 뒤바뀜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이다. 보살은 이것을 바르게 환히 알아야 한다.
이 안에는 여섯 가지의 산란함이 없기 때문에 산란함이 없다고 한다. 여섯 가지 산란함이라고 함은 첫째가 제 성품[自性]의 산란함이요, 둘째가 바깥[外]의 산란함이요, 셋째가 안[內]의 산란함이요, 넷째가 모양[相]의 산란함이요, 다섯째가 거칠고 무거움[麤重]의 산란함이요, 여섯째가 뜻 지음[作意]의 산란함이다.
017_0411_c_06L論曰隨法正行略有二種一無散亂轉變二無顚倒轉變菩薩於此應正了知此中六種散亂無故名無散亂六散亂者一自性散亂二外散亂內散亂四相散亂五麤重散亂六作意散亂
이 여섯 가지 모양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此六種相云何應知頌曰
선정에서 나움[出定]과 대경에서 흐름[於境流]과
맛ㆍ흐림ㆍ들뜸[味沈掉]과 속여 보임[矯示]과
≺나≻라는 고집[我執]과 마음의 열등[心下劣]이니
지혜로운 이들은 알아야 한다
017_0411_c_12L出定於境流
味沈掉矯示
我執心下劣
諸智者應知
≪논≫ 이 중에서 선정에서 나옴은 다섯 알음 몸[五識身]으로 말미암아서이니, 곧 이는 제 성품의 산란함인 줄 알아야 한다. 대경에서 흐름이라고 함은 바깥 인연에 내달아 흩어짐이니, 곧 바깥의 산란함이다. 맛ㆍ흐림ㆍ들뜸이라고 함은 사마아디[等持] 맛에 집착함과 흐리멍덩함과 들뜸이니, 곧 안의 산란함이다. 속여 보임이라고 함은 곧 모양의 산란함이니, 속이는 모양을 나타내면서 선정을 닦고 행을 더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고집이라고 함은 곧 거칠고 무거움의 산란함이니, 난체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열등이라고 함은 곧 뜻 지음의 산란함이니, 낮은 승(乘)에 대하여 뜻 지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여섯 가지 산란한 모양에 대하여 두루 환하게 알아야 하며 빨리 제거하여 없애야 된다.
017_0411_c_14L論曰此中出定由五識身當知卽是自性散亂於境流者馳散外緣卽外散亂味沈掉者味著等持惛沈掉擧卽內散亂矯示者卽相散亂矯現相已修定加行故我執者卽麤重散亂由麤重力我慢現行故心下劣者作意散亂依下劣乘起作意故菩薩於此六散亂相應遍了知當速除滅
이와 같이 이미 상관함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을 설명하였다. 뒤바뀜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1_c_22L如是已說無散亂轉變無顚倒轉變云何應知頌曰
017_0412_a_01L알고 봄[知見]의 글[文]과 뜻[義]과
뜻 지음[作意] 및 움직이지 않음[不動]과
두 모양[二相]과 더럽고 깨끗함[染淨]과 손[客]과
두려움도 뽐냄도 없음[無怖高]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017_0412_a_01L智見於文義
作意及不動
二相染淨客
無怖高無倒
≪논≫ 열 가지 일 안의 사실대로의 지견에 의하여 열 가지 뒤바뀜 없음의 일을 세우는 줄 알아야 한다.
이 안에서 어떤 것을 글에 있어서 뒤바뀜 없음이라고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a_03L論曰依十事中如實智見應知建立十無倒名此中云何於文無倒頌曰
서로 응함[相應]과 익힘[串習]과
혹은 이것을 뒤집음으로 말미암아
뜻이 있고 있지 않는 줄을 아니니
이것이 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017_0412_a_05L知但由相應
串習或翻此
有義及非有
是於文無倒
≪논≫ 만약 모든 글을 끊임없이 차례로 펴서 읽으면 말하되 서로 응한다고 하고 누구나 그런 이름을 인정하며, 그 일만을 지목하는 것에 대한 차츰차츰 기억하는 것을 익힌다고 한다. 이 두 가지만으로 말미암아 뜻이 있는 글이 되며,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면 뜻이 없는 글이 된다. 사실대로 이 두 가지 글을 알고 보면, 이것을 글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7_0412_a_07L論曰若於諸文能無閒斷次第宣唱說名相應共許此名唯目此事展轉憶念名爲串習但由此二成有義文與此相違文成無義如實知見此二文者應知是名於文無倒
뜻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a_12L於義無倒其相云何頌曰
두 가지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과
현실 같이는 실제 있음이 아님과
있음과 있음 아닌 것을 여읜 줄 앎이
이것이 뜻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017_0412_a_13L似二性顯現
如現實非有
知離有非有
是於義無倒
≪논≫ 두 가지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난다 함은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함[能取]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이니, 어지러운 식[亂識]이 저 행상(行相)과 비슷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현실 같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은 현실의 것과 같이는 실제로 그와 같이 있지 않은 것이다. 있음을 여읜다 함은, 이 뜻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이어서 성품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있음이 아님을 여읜다 함은, 저 어지러운 식이 나타나서 있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이 안의 뜻을 알고 보면, 이것이 뜻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7_0412_a_15L論曰似二性顯現者謂似所取能取性現亂識似彼行相生故如現實非有者謂如所顯現實不如是有離有謂此義所取能取性非有故離非有者謂彼亂識現似有故如實知見此中義者應知是名於義無倒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a_21L於作意無倒者頌曰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저 말의 훈습(熏習)함이
말의 뜻 지음이며 그의 의지라고 알지니
나타나서 두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017_0412_a_22L於作意無倒
知彼言熏習
言作意彼依
現似二因故
017_0412_b_01L≪논≫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말의 훈습한 바로서 말의 뜻 지음이라고 한다. 곧 이 뜻 지음은 바로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분별하는 의지할 바[所依]이다. 이것은 나타나서 두 가지 취함[二取]의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뜻 지음은 바로 쓸모없는 이론과 생각의 훈습한 바로 말미암아 말의 뜻 지음이라고 한다. 사실대로 이 뜻 지음을 알고 보면, 이것이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인 줄 알아야 한다.
017_0412_b_01L論曰所取能取言所熏習名言作意卽此作意是所能取分別所依是能現似二取因故由此作意是戲論想之所熏習名言作意如實知見此作意者應知是於作意無倒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이라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b_06L於不動無倒者頌曰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뜻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눈 흘림[幻] 따위인 줄 알지니
있음과 없음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017_0412_b_07L於不動無倒
謂知義非有
非無如幻等
有無不動故
≪논≫ 앞에서 모든 뜻[義]은 있거나 있지 않음을 여의었다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눈 흘림 따위와 같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눈 흘림으로 만든 모든 코끼리와 말 따위 같은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코끼리와 말 따위의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니로되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지러운 식이 저 모든 코끼리 또는 말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뜻은 나타나서 취할 바와 능히 취함에 비슷하지마는 결코 실제 있는 성품과 같은 것이 없으며, 또한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지러운 식이 저 취할 바와 능히 취함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위라는 말[等聲]은, 아지랑이와 꿈의 경계와 물의 달 따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알맞게 알아야 한다. 뜻이 눈 흘림 같음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있다 없다는 품류[有無品]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이거나 흩어지지 아니한다. 사실대로 이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보면, 이것이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인 줄 알아야 한다.
두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자기만의 모양이 있는 것과[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이 있는 안에서 모두 다 뒤바뀜이 없음이다.
017_0412_b_09L論曰前說諸義離有非有此如幻等非有無故謂如幻作諸象馬等彼非實有象馬等性亦非全無亂識似彼諸象馬等而顯現故如是諸義無如現似所取能取定實有性亦非全無亂識似彼所取能取而顯現故等聲顯示陽焰夢境及水月等如應當知以能諦觀義如幻等於有無品心不動散如實知見此不動者應知是於不動無倒於二相無倒者謂於自相及共相中俱無顚倒
자기만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b_20L於自相無倒者頌曰
자기만의 모양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온갖 것은 이름뿐인 줄을 알아서
온갖 분별을 여의는 것이니
으뜸가는 뜻의 제만의 모양[勝義自相]에 의한다
017_0412_b_21L於自相無倒
知一切唯名
離一切分別
依勝義自相
017_0412_c_01L≪논≫ 사실대로 온갖 눈의 빛깔[眼色]로부터 뜻의 법[意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뿐인 것을 알거나 보면, 곧 온갖 분별을 다스리나니, 이것이 제만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으뜸가는 뜻의 제만의 모양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세속에 한다면 이름이 있을 뿐만이 아니요, 갖가지 차별된 모양을 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017_0412_b_23L論曰如實知見一切眼色乃至意法皆唯有名卽能對治一切分別應知是於自相無倒此依勝義自相而說若依世俗非但有名可取種種差別相故
공통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於共相無倒者頌曰
참된 법계[眞法界]를 여읨으로써
따로 하나의 법도 없는지라
그러므로 이것을 통달한다면
공통의 모양에서 뒤바뀜이 없다
017_0412_c_05L以離眞法界
無別有一法
故通達此者
於共相無倒
≪논≫ 하나의 법으로서 법에 ≺나≻ 없음[法無我]을 여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참된 법계를 모든 법의 공통의 모양에 포섭한다. 사실대로 이의 공통한 모양을 알고 보면, 이것이 공통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017_0412_c_07L論曰以無一法離法無我者故眞法界諸法共相攝如實知見此共相者應知是於共相無倒
더럽거나 깨끗함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c_10L於染淨無倒者頌曰
뒤바뀜의 뜻 지음이 아직 사라지지 못함과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면
법계의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에 있어 뒤바뀜이 없음이다
017_0412_c_11L知顚倒作意
未滅及已滅
於法界雜染
淸淨無顚倒
≪논≫ 만약 아직 뒤바뀜의 뜻 지음을 끊어 없애지 못했다면 그 때에는 법계를 말하여 섞여 더러움이라 하고, 이미 끊어 없었을 때에는 말하여 맑고 깨끗함이라고 한다. 사실대로 이 더럽거나 깨끗함을 알고 보면 다음과 같이 바로 더럽거나 깨끗함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이다.
017_0412_c_13L論曰若未斷滅顚倒作意爾時法界說爲雜染已斷滅時說爲淸淨如實知見此染淨者如次是於染淨無倒
나그네[客]에게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c_16L於客無倒其相云何頌曰
법계의 본래 성품은
맑고 깨끗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더럽거나 깨끗함이 주인이 아님을 안다면
이것이 나그네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017_0412_c_17L知法界本性
淸淨如虛空
故染淨非主
是於客無倒
≪논≫ 법계의 본래 성품은 깨끗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이로 말미암아 먼저의 더러움과 뒤의 깨끗한 두 가지 차별된 모양은 바로 손이어서 주인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사실대로 이 손의 모양[客相]을 알고 보면, 이것이 손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7_0412_c_19L論曰法界本性淨若虛空由此應知先染後淨二差別相是客非主如實知見此客相者應知是名於客無倒
두려워함이 없고 뽐냄이 없음에 있어서 다 같이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2_c_22L於無怖無高俱無顚倒者頌曰
017_0413_a_01L유정(有情)과 법(法)은 없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함의 성품조차 없나니
이 두렵거나 뽐냄 없음을 안다면
이것이 두 가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017_0412_c_23L有情法無故
染淨性俱無
知此無怖高
是於二無倒
≪논≫ 유정과 법은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는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성품도 모두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뜻을 모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한 품류[染淨品]는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다. 이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는 두려워함도 없고 난체함도 없나니, 사실대로 두려워하거나 뽐냄이 없음을 알고 보면, 이것을 두 가지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7_0413_a_02L論曰有情及法俱非有故彼染淨性亦俱非有以染淨義俱不可得故染淨品無減無增由此於中無怖無慢如實知見無怖高者應知是名於二無倒
뒤바뀜이 없는 행의 총괄한 뜻[總義]이라 함은 글[文]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그침과 살핌[止觀]의 두 가지 모양에 통달한다. 뜻[義]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모든 뒤바뀜의 모양에 통달한다. 뜻 지음[作意]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뒤바뀜의 인연에 있어서 바르게 멀리 여의며 움직이지 않음[不動]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저 모양을 잘 취한다. 제만의 모양[自相]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 다스림의 분별없는 도[無分別道]를 닦으며, 공통한 모양[共相]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바르게 본래 성품의 맑고 깨끗함에 통달한다. 더럽거나 깨끗함[染淨]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아직 끊지 못했거나 이미 끊은 장애를 분명히 알며, 나그네[客]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실대로 더럽거나 깨끗한 두 가지 모양을 분명히 안다. 두려워함이 없음[無怖]과 뽐냄이 없음[無高]의 두 가지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장애는 끊어 없어져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017_0413_a_07L無倒行摠義者謂由文無倒能正通達止觀二相由義無倒能正通達諸顚倒相由作意無倒於倒因緣能正遠離由不動無倒善取彼相由自相無倒修彼對治無分別道由共相無能正通達本性淸淨由染淨無倒了知未斷及已斷障由客無倒如實了知染淨二相由無怖無高二種無諸障斷滅得永出離
이 열 가지 뒤바뀜이 없음은 차례대로 저 열 가지 금강글귀[金剛句] 안에 벌려 세워진다. 무엇을 열 가지 금강글귀라고 하느냐 하면, 있거나 있지 않음[有非有]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과 의지할 바[所依]와 눈 흘림 따위의 비유[幻燈喩]와 분별이 없음[無分別]과 본래 성품의 맑고 깨끗함[本性淸淨]과 섞여 더러움이 맑고 깨끗하여짐[雜染淸淨]과 허공의 비유[虛空喩]와 줄어짐이 없음[無滅] 및 더함이 없음[無增]이 그것이다.
017_0413_a_16L此十無倒如次安立於彼十種金剛句中何等名爲十金剛句謂有非有無顚倒所依幻等喩無分別本性淸淨雜染淸淨虛空喩無減無增
이와 같은 열 가지 금강 글귀를 포섭하기 위하여 두 게송이 있다.
017_0413_a_20L爲攝如是十金剛有二頌言
알아야 하리니 있거나 없거나 있지 않음과
뒤바뀜이 없음과 의지할 바와
눈 흘림 따위와 분별이 없음과
본래 성품이 언제나 깨끗함이며
017_0413_a_21L應知有非有
無顚倒所依
幻等無分別
本性常淸淨
그리고 섞여 맑고 깨끗하여짐과
성품의 깨끗함을 허공에 비유함과
줄어짐도 없고 더함도 없음이니
이것이 열 가지의 금강 글귀이다
017_0413_a_23L及雜染淸淨
性淨喩虛空
無減亦無增
是十金剛句
017_0413_b_01L첫째는 열 가지 금강 글귀를 벌려 세웠나니, 제 성품[自性]이라고 함은 제 성품 때문이요, 반연할 바[所緣] 때문이요, 분별이 없기[無分別] 때문이요, 어려움을 풀이하기[釋難] 때문이다.
제 성품 때문이라고 함은 세 가지 제성품[三自性]있어서 원성실성(圓成實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니, 이것이 첫 세 글귀이며, 차례대로 알아야 한다.
017_0413_b_01L且初安立十金剛句自性者謂自性所緣故無分別故釋難故自性故謂三自性卽圓成實遍計所執及依他起是初三句如次應知
반연할 바 때문이라고 함은, 곧 세 가지 제 성품이요,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함은, 이로 말미암아 분별이 없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이고 여기에서 분별이 없는 것은 곧 본래 성품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차례대로 경계[境]와 지혜[智]를 벌려 세우는 것인줄 알지니, 세 가지 제 성품과 분별이 없는 것이요, 어려움을 풀이하기 때문이라고 함은 그 나머지 글귀이다.
017_0413_b_05L所緣故卽三自性無分別故者謂由此無分別卽無分別智及於此無分別本性淸淨如次應知安立境智謂三自性及無分別釋難故者謂所餘句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제 나름대로 분별성과 서로 의지성의 모양이 만약 실제로 이것이 없다 하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실제로 이것이 있다고 하면, 모든 법은 본래 성품이 맑고 깨끗하지 않아야 하리라’고 하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눈 흘림 따위의 비유를 말하나니, 눈 흘림의 일 따위 같은 것은 비록 실제로는 이것이 없으면서도 나타나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017_0413_b_09L且有難言遍計所執依他起相若實是無云何可得若實是有不應諸法本性淸淨爲釋此難說幻等喩如幻事等雖實是無而現可得
또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만약 온갖 법이 본래 성품은 맑고 깨끗하다 하면, 어떻게 먼저는 더러웠다가 깨끗함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더럽거나 깨끗함이 있는 것과 허공의 비유를 설명하나니, 허공과 같은 것은 비록 본래 성품이 깨끗하면 서로 섞여 더러움과 맑고 깨끗한 시기가 있다.
017_0413_b_13L復有難言若一切法本性淸淨如何得有先染後淨爲釋此難說有染淨及虛空喩謂如虛空雖本性淨而有雜染及淸淨時
또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한량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한 분 한 분이 한량없는 유정들을 제도하여 나고 죽음을 벗어나 열반에 들게 하신다면 어째서 나고 죽음에는 아주 없다는 허물이 없겠는가. 열반 경계 안에는 더욱 늚이 없는 허물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더러움과 깨끗한 것에 줄음이 없고 더함이 없음을 설명하나니, 또 유정 경계와 맑고 깨끗한 품류는 모두 다 한량없기 때문이다.
017_0413_b_17L復有難言有無量佛出現於世一一能度無量有情令出生死入於涅槃云何生死無斷滅失涅槃界中無增益過爲釋此難說染及淨無減無增又有情界及淸淨品俱無量故
둘째, 저 제 성품을 벌려 세운다함은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413_b_21L第二安立彼自性者如有頌言
어지러운 경계[亂境]의 제 성품[自性] 원인[因]과
어지러움이 없는 제 성품 경계와
어지럽고 어지러움이 없는 두 결과와
저 둘의 편[二邊際]이 그것이다
017_0413_b_22L亂境自性因
無亂自性境
亂無亂二果
及彼二邊際
017_0413_c_01L이와 같이 이미 법을 따름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두 치우침을 여읨의 바른 행[離二邊正行]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하면, 보적경(寶積經)에서 말씀하신 중도의행[中道行]과 같다. 이 행은 어떤 것의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의는가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3_c_01L如是已說隨法正行離二邊正行云何應知如『寶積經』所說中道行此行遠離何等二邊頌曰
다른 성품[異性]과 동일한 성품[一性]이고
외도(外道)와 그리고 성문(聲門)이며
더욱 늘임[增益]과 줄어짐[損減]의 치우침은
유정과 법의 두 가지씩이다
017_0413_c_04L異性與一性
外道及聲聞
增益損減邊
有情法各二
다스릴 바[所治]와 능히 다스림[能治]이고
항상 머무름[常住]과 아주 없음[斷滅]이며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치우침이요
더러움과 깨끗함의 둘에는 세 가지 있다
017_0413_c_06L所治及能治
常住與斷滅
所取能取邊
染淨二三種
두 치우침[二邊]의 성품을 분별한다면
다시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지니
있는 것과 있지 않음의 치우침이며
능소(能所)의 고요함[寂]ㆍ두려움[怖]ㆍ무서움[畏]이다
017_0413_c_07L分別二邊性
應知復有七
謂有非有邊
所能寂怖畏
취할 바와 능히 취함과 바름[正]과 삿됨[邪]이고
쓸 데 있음[有用]과 쓸데없음[無用]이며
일으키지 않음[不起]과 시간[時]따위이니
이것이 두 치우침을 분별함이다
017_0413_c_08L所能取正邪
有用幷無用
不起及時等
是分別二邊
≪논≫ 만약 빛깔[色] 따위에서 ≺나≻는 다름이 있다고 집착하거나 이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저마다 한편이 되므로 이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中道行]을 설명한다. 나와 선비에 이르기까지 없다고 자세히 살핀다. 내가 있다고 본다면 반드시 이런 집착을 일으키나니, 나는 몸에서 다르다고 하거나 혹은 바로 그것이 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빛깔 따위에 집착하여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의 편이요, 항상 함이 없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성문의 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빛깔 따위는 항상 하거나 항상 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자세히 살피는 그것이다.
017_0413_c_10L論曰若於色等執我有異或執是一各爲一邊爲離此執說中道行謂觀無我乃至儒童見有我者定起此執我異於身或卽身故若於色等執爲常住是外道邊執無常者是聲聞邊爲離此執說中道行謂觀色等非常無常
반드시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유정들을 더 늘리는 편이요, 반드시 ≺나≻가 없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유정들을 줄이는 편이니, 그것은 역시 거짓인 유정을 아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나≻거나 ≺나≻없음[無我]이라는 두 치우침의 중간 지혜[中智]에 머무르는 그것이다.
반드시 마음은 실제가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법을 더 늘리는 편이요, 반드시 마음을 실제가 없다고 집착한다면 이것을 법을 줄이는 편이므로 이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한다. 이곳에는 마음[心]도 없고 생각[思]도 없고 뜻[意]도 없고 의식[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017_0413_c_17L定執有我是增益有情邊定執無我是損減有情邊彼亦撥無假有情故爲離此執說中道行謂我無我二邊中智定執心有實是增益法邊定執心無實是損減法邊爲離此執說中道行謂於是處無心無思無意無識
017_0414_a_01L착하지 못한 따위[不善等]의 모든 섞여 더러운 법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다스릴 바의 편이요, 착함 따위의 모든 맑고 깨끗한 법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능히 다스리는 편이므로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두 치우침에 있어서 따르거나 권하거나 찬양하지 않는 그것이다.
유정과 법에 대해 반드시 집착하여 있다고 하는 이것은, 항상 머무른다는 편이요, 결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집착하면 이것은 아주 없다는 편이므로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곧 이 두 치우침에 대한 중간 지혜가 그것이다.
017_0413_c_23L執有不善等諸雜染法是所治執有善等諸淸淨法是能治邊離此執說中道行謂於二邊不隨觀於有情法定執爲有是常住邊執非有是斷滅邊爲離此執說中道謂卽於此二邊中智
무명(無明)이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고, 만약 밝음[明]이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이와 같이 다스릴 바의 모든 행과 능히 다스리는 무위(無爲)와 또한 늙어 죽음과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모든 다스림의 도[對治道]가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고, 이 다스릴 바와 능히 다스리는 것의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곧 이는 검은 품류[黑品]와 흰 품류[白品]의차별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밝음과 무명은 둘이 없고 둘로 나누어진 것이 없다라고 더 널리 설명한다. 밝음과 무명 등의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은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7_0414_a_05L執有無明所取能取各爲一邊若執有明所取能取各爲一邊如是執有所治諸行治無爲乃至老死及能滅彼諸對治道所取能取各爲一邊此所能治所取能取卽是黑品白品差別爲離此執說中道行謂明與無明無二無二乃至廣說明無明等所取能取皆非有故
섞여 더러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번뇌의 섞여 더러움[煩惱雜染]과 업의 섞여 더러움[業雜染]과 태어남의 섞여 더러움[生雜染]이다.
번뇌의 섞여 더러움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모든 소견[諸見]이요, 둘째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모양[貪瞋癡相]이요, 셋째는 후생 몸의 소원[後有願]이다. 이를 능히 다스리는 ≺공≻의 지혜[空智]와 모양 없음의 지혜[無相智]와 소원 없음의 지혜[無願智]이다.
업의 섞여 더러움에는 짓는바 착하거나 나쁜 업이니, 이의 능히 다스림의 것은 짓지 않음의 지혜[不作智]이다.
태어남의 섞여 더러움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후생 몸의 태어남이요, 둘째는 태어난 뒤에 임자 마음, 딸린 마음[心心所]이 생각생각에 일어남이요, 셋째는 후생 몸의 계속이다. 이의 능히 다스림의 것은 남이 없는 지혜[無生智]와 일어남이 없는 지혜[無起智]와 제 성품 없는 지혜[無自性智]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섞여 더러움이 제거되어 사라지는 것을 맑고 깨끗함[淸淨]이라고 말한다.
017_0414_a_13L雜染有三謂煩惱雜染業雜生雜染煩惱雜染復有三種一諸二貪瞋癡相三後有願此能對治謂空智無相智無願智業雜染謂所作善惡業此能對治謂不作智生雜染有三種一後有生二生已心心所念念起三後有相續此能對治謂無生智無起智無自性智如是三種雜染除滅說爲淸淨
017_0414_b_01L≺공≻ 따위 지혜의 경계는 ≺공≻ 따위 법을 말하는 것이어서 세 가지 섞여 더러움은 그의 알맞음에 따라서 ≺공≻ 따위의 지혜가 ≺공≻ 따위를 짓게 한 것은 아니니, 그의 본래 성품은 바로 ≺공≻한 성품 따위로 말미암아서요, 법계의 본래 성품은 물듦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계에 대하여 혹은 섞여 더러움이라고 집착하거나 맑고 깨끗함이라고 집착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으로 됨이니, 본래 성품은 물듦이 없어서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행을 설명하나니, ≺공≻을 연유하지 않고서 법을 공하게 하며 법의 성품은 스스로 ≺공≻한 것이라고 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017_0414_a_21L空等智境謂空等三種雜染隨其所應非空等智令作空等由彼本性是空性等法界本來性無染故若於法界或執雜染或執淸淨各爲一邊本性無染非染淨爲離此執說中道行謂不由空能空於法法性自空乃至廣說
다시 일곱 가지가 있어서 둘의 치우침을 분별한다. 무엇이 일곱 가지냐 하면, 있다고 분별하거나 있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며, 그는 실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고 집착함은 무너져 없어지는지라, ≺공≻한 성품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나≻없음[無我]에서 분별하여 없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보특가라를 없애기 위하여 비로소 ≺공≻한 성품을 세운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그 ≺공≻한 성품은 본래 성품이 저절로 ≺공≻한지라, 과거도 ≺공≻하고 미래도 ≺공≻하고 그 중간의 때 역시 ≺공≻하다라고 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017_0414_b_04L復有七種分別二邊何等爲七謂分別有分別非有各爲一邊彼執實有補特伽羅以爲壞滅立空性故或於無我分別爲無爲離如是二邊分別說中道行謂不爲滅補特伽羅方立空性然彼空性本性自空前際亦空後際亦空中際亦空乃至廣說
고요할 바[所寂]를 분별하고 능히 고요함[能寂]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나니, 끊을 바[所斷]가 있고 능히 끊음[能斷]이 있다고 집착하여 ≺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허공의 비유를 말한다.
두려울 바[所怖]를 분별하여 그로부터 생기게 되는 무서울 만한 것[可畏]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제 나름대로 분별성의 빛깔 따위가 있어서 두려움이 생길만 하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며, 그로부터 생기게 되는 괴로움의 법[苦法]이 있어 무서움을 낼 만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는 이의 비유를 말한다. 앞의 허공에 관한 비유는 성문을 위하여 말한 것이요, 지금의 그림 그리는 이의 비유는 보살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017_0414_b_11L分別所寂分別能寂各爲一邊執有所斷及有能斷怖畏空故爲離如是二邊分別說虛空喩分別所怖分別從彼所生可畏各爲一邊執有遍計所執色等可生怖故執有從彼所生苦法可生畏故爲離如是二邊分別說畫師喩前虛空喩爲聲聞說今畫師喩爲菩薩說
취할 바를 분별하고 능히 취함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나니,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요술사의비유를 말한다. 의식뿐인 지혜[唯識智]로 말미암아 경계 없는 지혜[無境智]가 생긴다. 경계 없는 지혜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다시 의식뿐인 지혜를 버리나니, 경계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식 역시 이는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반연할 바[所緣]에 의탁하여 의식은 비로소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유할 바[所喩]와 비유[喩]는 똑같은 법이다.
바른 성품을 분별하고 삿된 성품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017_0414_b_19L分別所取分別能取各爲一邊爲離如是二邊分別說幻師喩由唯識智無境智生由無境智生復捨唯識智境旣非有識亦是無要託所緣識方生故由斯所喩與喩同法分別正性分別邪性各爲一邊
017_0414_c_01L사실대로 살핌[如實觀]을 바르다 하고 삿되다고 함은 두 가지의 성품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양쪽 나무로 불을 내는 비유를 설명한다. 양쪽 나무에 비록 불의 모양은 없으나 서로 뚫며 비빔으로 말미암아 능히 불을 내고 불을 낸 뒤에는 도리어 양쪽의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다.
017_0414_c_01L執如實觀爲正爲邪二種性故爲離如是二邊分別說兩木生火喩謂如兩木雖無火相由相鑽截而能生火火旣生已還燒兩木
이 사실대로 살핌도 그와 같아서 비록 성인 도의 바른 성품의 모양은 없으나 바른 성품의 거룩한 지혜를 능히 발생시키며 이와 같은 바른 성품의 거룩한 지혜를 발생시킨 뒤에는 다시 이 사실대로 살핌을 능히 제거하여 보낸다. 이로 말미암아 비유는 똑같은 법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살핌에는 비록 바른 성품의 모양은 없으나 바른 성품에 따르기 때문에 또한 삿된 성품의 모양이 없다.
017_0414_c_05L此如實觀亦復如是雖無聖道正性之相而能發生正性聖慧如是正性聖慧生已復能除遣此如實觀由斯所喩與喩同法然如實觀雖無正性相順正性故亦無邪性相
쓸데 있음을 분별하고 쓸데없음을 분별하면 어느 한 편이 되나니, 거룩한 지혜[聖智]는 반드시 먼저 분별하여야 물듦을 없앨 수가 있고 혹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고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처음의 등불 비유를 설명한다.
일으키지 않음을 분별하고 시간 등을 분별하면 어느 한편이 되나니, 저 능히 다스림[能治]은 마침내 일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거나 혹은 물듦과 시간의 길이를 같이 해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뒤의 등불 비유를 설명한다.
017_0414_c_10L分別有用分別無用各爲一邊彼執聖智要先分別方能除染或全無用爲離如是二邊分別說初燈喩分別不起分別時等各爲一邊彼執能治畢竟不起或執與染應等時長爲離如是二邊分別說後燈喩
이와 같이 이미 둘의 치우침을 여의는 바른 행[差別無差別正行]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4_c_15L如是已說離二邊正行差別無差別正行云何頌曰
차별과 차별이 없음이라고 함은
알아야 한다. 10지(地)에 있어
열 가지의 바라밀다의
더함[增上]과 평등한 것[等]의 닦아 모음이다
017_0414_c_17L差別無差別
應知於十地
十波羅蜜多
增上等修集
≪논≫ 10지 중에서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十到彼岸]의 어느 하나를 더 위 가게 닦아 모으면 차별의 바른 행이라 말한다. 온갖 자리[一切地]에서 모두 평등하게 보시 등의 열 가지 바라밀다를 닦아 모으면 이와 같은 바른 행을 차별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017_0414_c_19L論曰於十地中十到彼岸隨一增上而修集者應知說爲差別正行於一切地皆等修集布施等十波羅蜜多如是正行名無差別
017_0415_a_01L여섯 가지 바른 행의 총괄한 뜻[總義]에는 곧 이와 같은 품류의 가장 훌륭함[最勝]이니, 이로 말미암아 베풀어 설치하게 되는 그대로 대승법 등을 생각한다. 이와 같은 품류의 어지러움이 없이 변하여 바뀜[無亂轉變]으로 말미아아 사마타(奢摩他)를 닦고 뒤바뀜이 없이 변하여 바뀜[無到轉變]으로 비파사나(毘鉢舍那)를 닦으며, 이와 같은 뜻을 위하여 중도의 행을 닦아서 벗어나기를 구하며, 10지 중에서는 차별과 차별이 없는 행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바른 행의 위 없음을 설명하였다.
017_0414_c_23L六正行摠義者謂卽如是品類最勝由此思惟如所施設大乘法等由如是品無亂轉變修奢摩他及無倒轉變修毘鉢舍那爲如是義修中道行而求出離於十地中修習差別無差別行如是已說正行無上
반연할 바 위 없음[所緣無上]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리라.
所緣無上其相云何頌曰
반연할 바라 함은 안립(安立)과 법계(法界)와
세울 바[所立]와 능히 세움[能立]과 지녀 있음[任持]과
새겨 지님[所持]과 안에 지님[內持]과 통달함[通達]과
더함[增]과 분증(分證)과 등운(等運)과 가장 훌륭함[最勝]이다
017_0415_a_06L所緣謂安界
所能立任持
印內持通達
增證運最勝
≪논≫ 이와 같아 반연할 바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017_0415_a_08L論曰如是所緣有十二種
첫째는 법을 벌려 세워 시설함의 반연할 바[安立法施設所緣]요, 둘째는 법계의 반연할 바[法界所緣]요, 셋째는 세울 바의 반연할 바[所立所緣]요, 넷째는 능히 세움의 반연할 바[能立所緣]요, 다섯째는 지녀 있음의 반연할 바[任持所緣]요, 여섯째는 새겨 지님의 반연할 바[印持所緣]요, 일곱째는 안에 지님의 반연할 바[內持所緣]요, 여덟째는 통달함의 반연할 바[通達所緣]요, 아홉째는 더욱 넓음의 반연할 바[增廣所緣]요, 열째는 분증의 반연할 바[分證所緣]요, 열한째는 등운의 반연할 바[等運所緣]요, 열두째는 가장 훌륭함의 반연할 바[最勝所緣]이다.
017_0415_a_09L一安立法施設所緣二法界所緣三所立所緣四能立所緣五任持所緣六印持所七內持所緣八通達所緣九增長所緣十分證所緣十一等運所緣二最勝所緣
이 안에서 맨 처음은 벌려 세우는 바 저 언덕에 이름[到彼岸] 등의 차별된 법문(法門)이요, 둘째는 진여(眞如)요, 셋째는 차례대로 곧 앞의 두 가지 것인 줄 알아야 하리니, 저 언덕에 이름 따위의 차별된 법문은 반드시 법계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의 경계이니, 안에서 따로 지니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초지(初地) 중의 견도위(見道位)의경계요, 아홉째는 수도위(修道位) 안에서 7지(地)의 경계까지요, 열째는 곧 7지 중의 세간과 세간 벗어난 도의 품류 차별이어서 부분부분으로 증득함[分分證]의 경계요, 열한째는 제8지의 경계요, 열두째는 제9와 제10의 여래자리[如來地]의 경계이다.
017_0415_a_14L此中最初謂所安立到彼岸等差別法門第二謂眞如第三第四如次應知卽前二種到彼岸等差別法門要由通達法界成故第五謂聞所成慧境任持文故第六謂思所成慧境印持義故第七謂修所成慧境內別持故第八謂初地中見道第九謂修道中乃至七地境第十謂卽七地中世出世道品類差別分分證境第十一謂第八地境第十二謂第九第十如來地境
017_0415_b_01L이 안의 첫째와 둘째도 모든 뜻의 위치에 따라 그 여러 이름을 얻는 줄 알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반연할 바 위 없음을 설명하였다.
017_0415_b_01L應知此中卽初第二隨諸義位得彼彼名如是已說所緣無上
닦아 증득함의 위 없음[修證無上]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修證無上其相云何頌曰
닦아 증득함이란 모자람이 없음[無闕]과
헐뜯지 않음[不毁]과 요동 않음[不動]과 원만함[圓濟]과
일으킴[起]과 견고함[堅固]과 고르고 부드러움[調柔]과
머무르지 않음[不住], 장애 없음[無障], 쉼이 없음[無息]이다
017_0415_b_03L修證謂無闕
不毀動圓滿
起堅固調柔
不住無障息
≪논≫ 이와 같은 닦아 증득함에는 톻틀어 열 가지 있다.
017_0415_b_05L論曰如是修證摠有十種息
첫째는 종성의 닦아 증득함[種性修證]이니, 인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믿고 앎의 닦아 증득함[信解修證]이니, 대승을 훼방하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마음 냄의 닦아 증득함[發心修證]이니, 낮은 승(乘)에 요동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바른 행의 닦아 증득함[正行修證]이니, 바라밀다가 원만할 수 있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이생에 듦의 닦아 증득함[入離生修證]이니, 성인의 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017_0415_b_06L一種性修緣無闕故二信解修證不謗毀大乘故三發心修證非下劣乘所擾動四正行修證波羅蜜多得圓滿故五入離生修證起聖道故
여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킴의 닦아 증득함[成熟有情修證]이니, 견고한 착한 뿌리가 오랜 동안에 모이기 때문이요, 일곱째는 깨끗한 국토의 닦아 증득함[淨土修證]이니, 마음이 고르고 부드럽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물러나지 않는 자리의 수기를 얻음의 닦아 증득함[得不退地受記修證]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이 두 가지에서 물러나 옳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아홉째는 부처 자리의 닦아 증득함[佛地修證]이니,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이요, 열째는 보리를 나타내 보임의 닦아 증득함[示現菩提修證]이니,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017_0415_b_10L六成熟有情修證堅固善根長時集故七淨土修證心調柔故八得不退地受記修以不住著生死涅槃非此二種所退轉故九佛地修證無二障故十示現菩提修證無休息故
무상승(無上乘)의 총괄한 뜻[總義]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무상승의 뜻이 있나니, 바른 행의 위 없음[正行無上]이요, 바른 행을 지님의 위 없음[正行持無上]이요, 바른 행의 결과의 위 없음[正行果無上]이요, 바른 행의 결과의 위 없음[正行果無上]이다.
017_0415_b_15L無上乘摠義略有三種無上乘義謂正行無上正行持無上故正行果無上故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변중변(辯中邊)이라고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017_0415_b_17L故此論名『辯中邊』頌曰
이 논의 변중변은
깊고 은밀함[深密]과 굳고 착실함[堅實]의 뜻과
넓고 큼[廣大]과 온갖 것[一切]의 뜻을 말하여
모든 상서롭지 않은 것[不吉祥]을 없앴네
017_0415_b_18L此論辯中邊
深密堅實義
廣大一切義
除諸不吉祥
017_0415_c_01L≪논≫ 이 논은 중간과 갓의 행을 말씀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한다. 곧 이는 중도에 머무름[處中]과 두 치우침[二邊]의 능히 반연하는 행[能緣行]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또, 이는 중간과 갓의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하나니, 곧 이는 중도에 머무름과 두 치우침의 반연할 바 대경[所緣境]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혹은 이것은 처음과 뒤를 여읜 중도의법을 말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한다.
017_0415_b_20L論曰此論能辯中邊行故名辯中邊卽是顯了處中二邊能緣行義又此能辯中邊境故名辯中邊卽是顯了處中二邊所緣境義或此正辯離初後邊中道法故名辯中邊
이 논에서 말한 바는 바로 깊고 은밀한 뜻이니, 모든 머트러운 생각으로 하는 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굳고 착실한 뜻이니, 다른 이의 말을 능히 꺾고 그에게 조복되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넓고 큰 뜻이니, 자기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017_0415_c_02L此論所辯是深密義非諸尋思所行處故是堅實義能摧他辯非彼伏故是廣大義能辯利樂自他事故
바로 온갖 것의 뜻이니, 널리 3승(乘)의 법을 결단하여 알기 때문이다. 또 모든 상서롭지 않는 것을 제거하여 없앰이니, 영원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기 때문이다.
017_0415_c_05L是一切義普能決了三乘法故又能除滅諸不吉祥永斷煩惱所知障故
내가 말한 이 논의 모든 공덕을
모두 지녀 중생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훌륭한 남[勝生]을 얻고 복과 지혜 더하여
넓고 큰 삼보리를 빨리 증득하게 하리
017_0415_c_07L我辯此論諸功德
咸持普施群生類
令獲勝生增福慧
疾證廣大三菩提
辯中邊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