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능립(能立)과 능파(能破)의 뜻 가운데에서 진실을 가려 지니고자 하는 까닭에 이 논서를 짓는다. 게송으로 설한다.
종(宗) 등의 언설을 능립이라 하고 이 가운데서 오직 자신의 뜻에 따라서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樂爲所成立]을 종이라 하네. 그것과 서로 어긋나는 뜻은 인정할 수 없네.
【문】 능립과 과실의 뜻은 진실한 뜻을 인증(印證)한다고 하여, 이 논에서 지금 “종(宗) 등의 언설들을 능립이라 말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 등의 이러한 언설은 유서(由緖)와 소전(所詮)과 소위(所爲)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유서란 모든 유정 등을 이익되게 함을 유(由)로 하고, 실마리[緖]를 연(緣)으로 하기 때문이다. 소전이란 설명하는 바[所詮]의 뜻으로 곧 “종(宗) 등”을 말한다. 소위의 일[所爲事]이란 진실한 뜻을 인증(印證)하여 결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유서 등의 결과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이 논서의 처음에 이런 언설을 놓아야 하겠지만, 이유[由]는 다른 곳에서 이미 이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치 현량(現量)의 경우와 같다. 무엇을 일컬어 다른 곳에서 논을 이해한 후에 유(由)가 드러난다고 하는가? 이것은 처음에 마땅히 설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논의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다른 언설로 이유[由]는 다른 곳에서 이미 이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치 현량(現量)의 경우와 같다. 무엇을 일컬어 다른 곳에서 논을 이해한 후에 유(由)가 드러난다고 하는가? 이것은 처음에 마땅히 설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논의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다른 언설로 이유[由]는 다른 곳에서 이미 이 뜻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이 인(因)은 성립하지 않는다. 논을 이해한 후에 바야흐로 뜻을 깨닫는다면 각혜(覺慧)가 유서(由緖) 등에 앞서 알게 된다. 만약 처음에 알지 못했다면 곧 전전함이 없다. 그로 말미암아 이해하기 때문이며, 바야흐로 후의 논의 부분이 없는 것과 계합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설사 그 의미와 같이 이미 경(經)이 없기 때문에 다시 그 풀이[釋]가 없어 반드시 그 지분(支分)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이 경(經)을 풀이할 것이며, 누가 이 풀이를 경증(經證)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치 하늘이 준 언어는 그 지분(支分)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논서의 유서(由緖) 또한 지분이 성립함을 알아야 한다. 이 인이 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음을 멀리 여긴다. 다른 사람이 다시 힐난하여 말한다. “이 논을 짓지 않는 것은 유서 등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미친 사람의 언설과 같이 이 인이 성립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답】 이른바 능립과 능립의 과실의 뜻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언설로 이와 같이 이 논을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서술하여 이미 뜻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마치 제2정리문(第二正理門)의 악차파타(惡叉波拖)1)가 이미 종(宗) 등의 모습을 설한 것과 같다. 이 인은 그 언설이 성립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찌 능립 등이 진실한 뜻을 인증(印證)함이 있지 않다고 하는가? 그러나 이 논서 등은 진실한 뜻을 인증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 과실[不成過]이다. 이제까지는 논주(論主)가 드러낸 종(宗)을 이야기하였다. 이 이하는 본문을 차례에 따라 해석하겠다. “종 등의 언설들을 능립이라 한다”는 것은 종(宗)ㆍ인(因)ㆍ유(喩)의 언설들로써 다른 사람이[他:敵者] 아직 요달하지 못한 뜻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설들은《논식(論式)》등에서 능립이라 말한다. 또한 하나의 언설로써 능립이라 한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의 능립의 성품이 이루어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결여된 것이 있다면 따라서 능립의 과실이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라는 말은 논의 실마리[論端]를 일으키는 뜻이며, 혹은 가려서 지닌다[簡持]는 뜻이다. 이러한 종 등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라고 하였다. “오직”이라고 말한 것은 가려서 분별함[簡別]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서”란 불고론종(不顧論宗)을 자신의 뜻에 따라 세운 것을 나타낸다.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樂爲所立]”이란 능히 성립시키는 성품이 되지 않는 것[不爲能成立性]을 말한다. 만약 이와 다른 것을 소립이라고 한다면 사인(似因)과 사유(似喩)도 종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으로 세운 것들은 종의 과실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서로 어긋나는 뜻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어긋나는 뜻을 가진 언성(言聲)은 인정하는 바가 아니라고 한다면, 예컨대 “일체의 언설은 모두 허망하다”고 세우는 것과 같다. 혹은 선인(先人)이 세운 종의 뜻과 서로 어긋나는 것으로 마치 훈호자(獯狐子)가 “소리는 항상하다”고 세우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 그 가운데에서 함께하지 않기[不共] 때문에 비량(比量)이 있지 않지만, 잘 성립하는 언설과 서로 어긋나는 뜻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토끼를 품은 달은 있지 않기 때문에”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유법(有法)에서 곧 그 소립(所立)이 잘 성립하는 현량(現量)과 비량에 서로 어긋나는 뜻을 인정한다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소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물병은 항상하다”는 등을 성립시키려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종과 인이 서로 어긋남을 이름하여 종에 어긋남이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종의 과실이 아니다. 이 가운데에서 “소리는 항상하다.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잘못된 유(喩)의 방편으로 이법(異法)을 세운 것이다. 합유(合喩)로 말미암아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인이 드러난다. 이 인은 (종의 유법에) 없다. 소리는 일체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혹은 이것[因]은 소립에 대한 일부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의 뜻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의 과실이라 이름한다. 유(喩)라 해도 또한 과실이 있다. 이법유(異法喩)는 먼저 종에 없음[宗無]을 드러내고, 후에 인에 없음[因無]을 설해야 하므로 이와 같은 것에서는 “무상한 것은 일체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뜻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뒤바꾸어 “일체는 무상하다”고 설하였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유(喩)라 해도 또한 과실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종(宗)과 사종(似宗)을 설하였다. 인(因)과 사인(似因)은 대부분 종[前陳]의 법이다. 이것의 차별된 모습을 이제 드러내 보이겠다. 게송으로 설한다.
종의 법[因]은 동품(同品)에 있거나[有], 있지 않거나[非有], 있거나 있지 않거나[俱] 하네. 이품(異品)에도 각각 셋으로 있거나, 있지 않거나, 그리고 있거나 않거나[二] 하네.
【문】 전체적으로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樂所成立]으로써 합하여 종이라 하지 않고, 어찌하여 이 가운데에서 종이란 오직 유법(有法)만을 취한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과실이 있지 않다. 그 전체적인 이름인 “소리”라는 것은 개별적인 이름에서도 또한 전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탄 옷”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혹 종으로서 “소리”는 오직 법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이 가운데에서 종의 법[因]은 오직 입론자와 적론자가 결정코 함께 허용하는 것만을 취한다. 동품 가운데에 있거나, 있지 않거나 하는 등도 또한 그와 같다. 왜 그러한가? 지금 이것(종의 법:인)은 증험하여 요달한 인[證因]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단지 지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설한 바의 뜻을 요달하는 것이며, 생인(生因)과 같이 능히 작용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미 지혜를 취하여 요인(了因)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 언설은 곧 능립의 뜻에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그로 하여금 본래 잘 성립함을 기억하여 생각하게[憶念]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오직 입론자와 적론자[彼此]가 모두 결정코 허용하는 이치만을 취한다”고 한 것은 곧 잘 말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만약에 입론자와 적론자가 함께 허용하지 않는다면, 결정코 종의 법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소리는 무상하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라고 하여 성립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에 적로자가 함께 허용하지 않는다면 예컨대 성현론자(聲顯論者)에 대하여 “지어진 성질 때문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에 의심스럽다면[猶豫], 예컨대 연기 등에 의해서 의혹이 일어날 때에 “대종(大種)의 화합으로 불이 있다. 연기가 나타나기 때문에”라고 하여 성립시키는 것과 같다. 혹은 이곳에서 유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아(我)는 그 체성이 두루하다. 모든 곳에서 즐거움 등이 생하기 때문에”라고 하여 성립시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설한 일체의 품류들을 가진 언사는 모두 능립이 아니다. 그 동품(同品)에 있거나[有], 있지 않거나[非有] 등도 또한 응하는 바에 따라 이와 같이 설하여야 한다. 마땅히 설한 바의 인과 더불어 상위인[相違因]과 부정인[不定因] 가운데에서 오직 함께 허용하여 결정한 언사만을 능립이라 하며, 혹은 능파라 한다. 서로 불성[互不成]과 유예불성의 언사는 그렇지 않다. 다시 성립함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개 종의 법[因]을 세우는 이치는 다시 바른 법(종의 후진과 다른 법)으로써 인을 삼아 이 법(종의 후진)을 성립시켜야 한다. 만약에 곧 유법이 있다는 것을 성립시키거나, 혹은 없다는 것을 성립시켜서, 예컨대 어떤 사람[數論派]이 “최승[最勝:自性諦]은 있다[宗]”는 것을 성립시켜서 “나타나 보이는[現見] 개별의 사물은 종류(摠類)를 가지기 때문이다[因]”라고 하고, 혹은 어떤 사람은 “최승은 없다[宗],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因]”라고 하는 것과 같다면 그 뜻은 어떠한가? 이 가운데에서는 단지 개별의 사물은 결정코 하나의 인(因)만을 가지는 것을 종으로 세운다. 최승을 세우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과실이 없다. 만약 최승은 없다는 것을 세운다면 또한 얻을 수 없는 법을 임시로 안립하고 있으므로 또한 유법의 과실은 없다. 만약 유법으로써 다른 유법을 세우고, 혹은 그 법을 세운다면 예컨대 연기로써 불을 세우고, 혹은 불로써 접촉[觸]을 세운다면 그 뜻은 어떠한가? 지금 이 가운데에서 불과 접촉을 성립시킴으로써 종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과 상응하는 사물만을 성립시킨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연기에 의지하여 불을 세우고 불에 의지하여 접촉을 세움에 마땅히 종의 뜻[宗義]의 일부분만을 인(因)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는 불과 접촉의 존재성[有性]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가운데에서 성립시킨 주장[所成:宗]을 관하기 때문에 법과 유법을 세우는 것이다. 덕(德)과 유덕(有德)이 아니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거듭 게송으로 설한다.
유법(연기)에서 유법(불)과 (유법인 불로써) 법(접촉)을 성립시키지 않네. 이것은 유법을 성립시키지 않네. 다만 (종자 후진 이외의) 법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 법이 성립하며 이와 같이 하여 (종의 전진인) 유법이 성립할 뿐이네.
【문】 만약 어떤 사람이 “소리는 항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립시켜서 “업(業) 등은 마땅히 항상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함은 마땅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것을 종의 법[因]이라 이름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종과 인의 문[宗因門]으로 말미암아 그 성론파의 과실을 설하는 것이다. 성론파는 세우는 바[所立]가 있으므로 ‘마땅히’라는 언어를 설하는 까닭이다. 앞서 성론파가 소리의 항상함을 세워서 “형태와 질애[形礙]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을 후에 승론파가 종만을 세워서 그 인의 과실을 파척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소리는 무상하다. 지어진 것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하는 것은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다시 어떠한가? 이것은 유(喩)의 방편이다. 동법(同法)과 이법(異法)이 그 차례대로인 것과 같다. 그 인에 종이 결정코 뒤따르며[同法] 그리고 종이 없는 곳에 결정코 인이 없기[異法]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합작법(合作法)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성질이라는 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소리는 결정코 지어진 것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지어진 성질이 결정코 종의 법이다. 거듭 게송으로 설한다.
인은 종에 따른 것이며[同法] 종에 없는 것에는 인은 있지 않다[異法]라고 설하네. 제5전성(第五轉聲)에 의하여 유체(喩體)를 드러낸 것이며 합작법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인을 알게 하네.
【문】 이것으로써 이미 반대로 논파하는 방편도 해석하였다. 지어진 성질은 무상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며 항상함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소리는 항상하지 않음이 성립한다. 항상하다면 마땅히 지어진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순하여 성립시키는 방편과 반대로 논파하는 방편이며 따로 인을 해석할 것이 아니다. 예컨대《파수론(破數論)》에서 내가 이미 널리 말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이와 같이 종의 법에는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 말하자면 동품(同品)에 있거나[有], 있지 않거나[非有], 그리고 있거나 있지 않거나[俱]한 것이다. 처음의 게송(제2게)에서는 ‘그리고’라는 글자가 제외되었다. 이 가운데에서 만약에 품(品)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소립이 없다면 이품(異品)이라 말한다. 동품과 서로 어긋나거나 혹은 성질이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에 서로 어긋나는 것에서라면 마땅히 오직 가려서 분별[簡別]해야만 할 뿐이다. 만약 따로 성질이 다른 것에서라면 마땅히 인이 있지 않게 된다. 이러한 도리로써 “지어진 성질 때문에”는 능히 무상 및 무아 등을 성립시킨다.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법[因]이 소립에 서로 어긋남을 이룬다면 이것은 상위의 과실[相違過]로서 곧 사인[似因]이라 이름한다. 어긋남이 없는 법[因]과 같이 상위의 인도 또한 그러하다. 성립된[所成] 법이 없으면 결정코 인도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물병 등에서 인은 의심스러운[猶豫]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에서는 인이 전전하여 없는 가운데에서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어진 성질은 병을 떠난 옷 등에서도 나타나 보이고 있으며, 무상을 떠난 무아 등에서는 이 인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별도의 법(지어진 성질)이 별도의 곳(물병 등)에서 전전하는가? 그것은 서로 흡사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름을 설하지 않는다. 즉, 이것이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만약 다르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인을 설하여 종의 법이라고 하는가? 이 가운데에서는 단지 결정코 이것이(지어진 성질) 종의 법[因]이라고 말할 뿐이며, 오직 이것만이 종의 법이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동품도 마땅히 또한 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병이라는 별도의 곳에서 소성[所成:宗]을 설하기 때문에 인에는 반드시 다름[異]이 없으므로 바야흐로 비량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상사(相似)가 아니다. 또한 이것(종의 법)의 하나하나에 세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일체 동품에 있는(同品有) 가운데에서 그 이품(異品)이 있거나[有], 있지 않거나[非有] 그리고 있거나 있지 않거나[有非有]한 것이다. 그 동품에 있지 않거나 그리고 있거나 있지 않거나[俱]한 것에서도 각각 이와 같이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 만약 소리의 무상을 종으로 하고 전혀 아픔이 없어서 허공 등이 있다고 세우지 않는 논자(경량부)를 상대한다면 어떻게 그곳(이품)에는 이것이 없다라고 설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것(이품)이 없다면 그것(이품)에는 전전하지 않아서 전혀 의심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과실이 없다. 이와 같이 합하여 아홉 가지 종의 법이 이루어진다. 그 순서에 따라서 그 모습을 간략하게 밝히겠다. 말하자면 “소리는 항상하다. 헤아려지는 성질 때문에”(제1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무상하다. 지어진 성질 때문에”(제2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무상한 성질 때문에”(제3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항상하다. 지어진 성질 때문에”(제4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항상하다. 들리는 성질 때문에”(제5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항상하다.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 때문에”(제6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한 성질 때문에”(제7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무상하다.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 때문에”(제8구)라고 세우고, 혹은 “소리는 항상하다. 접촉하여 상대함이 없기 때문에”(제9구)라고 세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를 두 게송으로 거두어들인다. 게송으로 설한다.
항상함[常]과 무상과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남[勤勇]과 항상[恒]과 상주[住]와 견뢰성(堅牢性:恒常性]과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음[非勤]과 변천[遷:무상]과 불변은 헤아려지는 성질 등의 아홉 가지 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네.
헤아려지는 성질[所量]과 지어진 성질[作]과 무상한 성질[無常]과 지어진 성질[作性]과 들리는 성질[聞]과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勇發]과 무상한 성질[無常]과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勇]과 접촉하여 상대함이 없는 성질[無觸]은 항상함 등이 아홉 가지 종에 의한 것이네.
【문】 이와 같이 분별하여 바른 인과 상위인과 부정인을 설하였다. 그러므로 본송(本頌)에서 설한다.
동품에는 있거나[有] 및 있거나 있지 않거나[二]와 이품에는 있지 않는 것[無:非有]이 바른 인이네. 이것을 뒤집은 것을 상위인(相違因)이라 하고 나머지 모두는 부정인(不定因)이네.
이 가운데에서 오직 두 가지만 바른 인이라 한다. 말하자면 동품에는 일체가 두루 있고 이품에는 두루 없는 것(제2구)과 동품에는 있거나 있지 않는 것[有非有]이 통하고 이품에는 두루 없는 것(제8구)이다. 처음과 뒤의 세 구에서 각각 한 구씩을 취하였다. 또한 오직 두 가지만을 설하여 상위인이라 한다. 능히 거꾸로 세웠기[倒立]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품에 있거나[有] 그리고 있거나 있지 않거나[二種]와 동품에는 일체가 두루 없는 것[非有]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가운데에서 처음과 뒤의 둘을 취하였다. 나머지 다섯 가지는 바른 인이라고도 상위인이라고도 모두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이 의심나는 인이라는 뜻이다. 또한 모든 인들의 모습 가운데에서 모두 다 동류(同類)를 한 단위로 하여 설하는 것이다. 두 모습이 곧 서로 어긋나 함께 한 곳에 모여서는 오히려 인 등이 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혹은 한 모습에서 똑같이 일을 짓는 까닭으로 두루하는 인을 이루지 않는다. 이치로는 마땅히 네 가지를 부정인이라 해야 한다. 둘 모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들리는 성질이라는 인은 어떠한가? 함께하지 않기[不共] 때문이다. 만약에 함께하지 않는 것으로 성립시킨 법이라면 그것이 가진 차별은 일체를 두루 거두어들이므로 모두 의심나는 인이다. 오직 그 유법[有性]에만 그것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여의기 때문이다. 있다는 것들이 모두에 함께하면 가려서 분별함[簡別]이 없는 인이다. 이것은 오직 그 갖추어진 것에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나는 인의 성질이다. 만약 그 가운데에서 모두이든 부분이든 있다[有]고 하면 또한 결정적인 인[定因:바른 인]으로서 다른 것을 가려서 분별하기 때문에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만약 소리의 성질이 있어서 소리가 항상하다고 허용하는 것에 대한다면 이것은 (들리는 성질이라는 인) 마땅히 인으로 성립한다. 만일 이때에 지어진 성질 등이 무상의 인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 (바른 인)의 뜻이 있음을 허용한다. 그러나 갖추어지면 하나의 뜻에 서로 어긋날 수 있다. (하나의 뜻에는) 있음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의심스러운 인[猶豫因]이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 현량과 교리의 힘이 수승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것에 의지하여 결정을 사량하고 구하여야 한다. 이상을 게송으로 설한다.
만약에 법[因]이 불공부정인이거나 공부정인이거나 결정상위인이거나 일체에 두루하다면 그것은 모두 의심나는 인이네.
법과 유법(有法), 자성과 차별을 삿되게 증득하게 되면 이들은 상위인을 이루게 되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긋나는 것이 없네.
종의 법을 관하여 자세히 관철하게 되거나 만약에 바라는 것에 어긋난다면 주저(躊躇:부정인)와 전도(상위인)를 이룬다네. 이것과 다른 것으로서 사인(似因)은 없다네.
【문】 이와 같이 하여 바른 인과 사인(似因)을 밝혔다. 유(喩)와 사유(似喩)를 이제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설한다.
인이 종에 따르는 것[同法喩]과 종이 아닌 것에는 인이 있지 않는 것[異法喩]을 설하노니 이 둘을 비유(譬喩)라고 이름하네. 다른 것은 모두 이것과 서로 그릇된 것[似喩]이네.
【문】 유(喩)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동법과 이법이다. 동법이란 “소리는 무상하다.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 때문에”라고 세울 때에 “모든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모두 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유하면 병 등과 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법이란 “모든 상주함이 있는 것은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마치 허공 등과 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막으면서 설명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오직 넘치는 것을 그칠 뿐이다. 합작법과 이작법에 의해서 뜻을 견주어 헤아리는 것[比度]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실로 큰 허공[太虛空] 등이 있음을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종이 있지 않는 곳[宗異品]에는 인의 뜻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다시 무슨 인연으로 제1구에서 “인이 종에 따르는 것[同法喩]”이라고 설하고, 제2구에서 “종이 아닌 것에는 인이 있지 않는 것[異法喩]”이라고 설하며, 인이 아닌 것에는 종은 있지 않다고 설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설함으로써 능히 인이 동품에는 결정코 있으며[同品定有] 이품에는 두루 없다는 것[異品遍無]이 되어 전도된 언설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지어진 것이 아닌 것으로써 그 항상함을 증험하고 혹은 무상으로써 지어진 것을 성립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설하지 않은 것이 성립하네. 두루하지 않은 것이라면 하고자 하지 않은 것 등이 성립하네, 합작법과 이작법으로.
【문】 이와 같이 두 법의 합작법과 이작법의 따름과 뒤집음[順反]인 두 유[喩]를 설하였다. “이 밖의 나머지는 서로 그릇된 것이다”라는 이것은 사유(似喩)의 뜻이다. 무엇을 ‘이 밖의 나머지’라 하는가? 이른바 이곳에 소립과 능립에 대하여, 동품이 아닌 것에 비록 합작법과 이작법이 있으나 전도된 언설임을 말한다. 혹은 이곳에 합작법과 이작법을 짓지 않고, 오직 소립과 능립은 모두 있으면서 이품에는 모두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두 법에서 혹은 어느 한 쪽이 성립하지 않음[不成]과 보내지 않음[不遣]이 있거나 혹은 둘 모두가 성립하지 않음과 보내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소리는 항상하다. 접촉하여 상대함이 없기 때문에”라고 세워서 동법유(同法喩)로 “모든 접촉하여 상대함이 없는 그것은 모두 항상하다고 보아야 한다. 업과 같이, 극미와 같이, 병 등과 같이”라고 하고 이법유(異法喩)로 이른바 “모든 무상한 것은 접촉하여 상대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극미와 같이, 업과 같이, 허공 등과 같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이미 설하였다. 동법유 가운데에서 유법불성(有法不成)이란 항상하는 허공 등을 인정하지 않는 자[無空論者]들에게 상대한 것을 말한다. 반드시 두 가지 비유의 언사를 갖추어야 바야흐로 능립이 성립하는가? 그 인과 같이 단지 하나만을 설함을 따라도 되는가? 만약 정리(正理)에 나아간다면 마땅히 둘을 갖추어 설해야 한다. 이들이 구족함으로써 소립이 그 인을 여의지 않음을 드러내 보이고, 동품에 결정코 있으며 이품에는 두루 없음을 함께 드러내어 능히 상위인과 부정인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일부분에서 이미 성립한다면 일부분만을 설함에 따라도 또한 능립이 성립한다. 만약 소리의 두 뜻이 함께 허용된다면 모두를 설할 필요는 없다. 혹은 뜻에 기준함으로써 하나로 능히 둘을 드러낸다. 또한 비량(比量) 가운데에서는 오직 이 이치만이 보인다. 만약 견주어야 할[所比] 곳에 이 모습[因]이 결정코 두루하다면[審定] 나머지 동류(同類)에 이것이 결정코 있다고 생각되고, 그것이 없는 곳에는 이것이 두루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앎이 생긴다. 그러므로 본송(本頌)에서 설한다.
예컨대 자신에게 결정된 지식을 갖고 타인에게 결정된 지식이 생기기를 바라서 종의 법[因]과 상응[相應:同喩]과 소립[宗]을 설하며 나머지는 멀리 여읜다네.
【문】 견주어야 할 것[所比]에 종법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에 인의 연설을 설하고, 이것에서 (종과 인이) 서로 여의지 않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에 유(喩)의 언설을 설하고, 견주어야 할 것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에 종의 언설을 설한다. 견주어야 할 것[所比] 가운데에서는 이들을 제외하고 다시 다른 부분[支分]은 없다. 이로써 다른 심찰(審察) 등과 그리고 (오지작법의) 합(合)과 결(結)은 부정하여 버린다. 만약에 그렇다면 유(喩)의 언설은 이품의 부분(異分)이 아니다. 인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상[事]으로는 실로 그러할지라도 이 인의 언설은 오직 이종법의 성질(因의 第一相)을 드러내어 요달하기 위한 것일 뿐, 동품에 있는 성질(因의 第二相)과 이품에 없는 성질(因의 第三相)을 드러내어 요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따로 동품과 이품의 유(喩)의 언설을 설해야 한다. 만약 오직 인의 언설이 설명하는 뜻만을 설하여 인이라 이름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 다시 어떠한 덕(德)이 있는가? 따로 유(喩)의 지분을 설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덕이라 한다. 마땅히 세간에서 설한 방편과 같아서 그 인의 뜻과 더불어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 이러한 언설은 단지 마땅히 소립의 뜻에 유례일 뿐 공능(功能)은 없어서 능립의 뜻이 없다. 그것은 단지 ‘지어진 성질 때문에’의 유사한 동법(병 등)을 설하는 것일 뿐 능립으로서 성립하는 뜻을 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과 유를 따로 (말)하면 이것은 소립의 동법가 이법은 있다 하더라도 끝내 인과 소립이 서로 여의지 않는 성질은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단지 소립의 뜻에 유례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능은 없다. 무슨 까닭으로 공능이 없는가? 동유 가운데서 반드시 종법과 종의(宗義)에 서로 유사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다시 다른 비유로써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없이 반복함[無窮]이 성립한다. 또한 반드시 모든 품류(品類)에 결정코 있을 필요는 없다. 이품 가운데에서도 (소립)의 없는 성품을 드러내어 간별함(이작법)이 있지 않으면 능히 비유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설한다.
만약 인이 오직 소립과 혹 차별되거나 서로 유사하기만 한다면 비유는 마땅히 다함이 없네[無窮]. 그리고 아픔을 막아버리네.
【문】 세간에서는 단지 종과 인이 이품의 같은 곳에 존재하는 성질을 드러내어 이법유라고 할 뿐이고, 종이 없는 곳에 인이 있지 않은 성질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코 공능이 없다. 만약에 오직 종법[因의 第一相]만이 인의 성질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부정(不定)이 있어도 또한 마땅히 인이 성립해야 한다. 어떻게 소립과 능립 그리고 (동품과) 이품의 법인 두 종류의 비유가 구족하게 있는데도 이러한 과실이 있다고 하는가? 만약 이때에도 소립의 이품이 한 종류라도 없다면 곧 이러한 과실이 있다. 마치 처음과 뒤의 세 가지 구에서 맨 뒤의 유(喩)와 같다. 그러므로 결정코 3상(因의 三相)은 오직 인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비록 모든 부분[三相]이 능히 인이 되어 소립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만, 그러나 오직 한 부분(因의 第一相)만을 설하여도 또한 인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간략하게 조 등의 3지(支)와 그릇된 3지를 설하였다. 곧 이러한 언설들을 능립과 사능립(似能立)이라 이름한다. 그 응하는 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능립과 사능립을 설한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는 오직 현량(現量)과 비량(比量)만이 있다. 저 성언량[聲]과 비유량[喩] 등은 이 가운데[比量]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오직 두 가지의 양뿐이다. 이는 능히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요달하기 때문이다. 이 둘을 떠나 별도의 소량(所量)으로 그들이 요달해 알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량을 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본송에서 말하였다.
현량은 (모든) 분별을 배제하네. 다른 것[比量]은 설한 바 인(因)에서 생하네.
【문】 이 가운데에서 현량은 분별을 배제한다란 지혜로 색(色) 등의 경계에서 일체의 종류(種類)와 명언(名言), 가립(假立), 무량(無量)한 모든 분별을 멀리 떠난 것을 말한다. 함께하지 않는 연[不共緣]으로써 나타나 따로 전전[現現別轉]하기 때문에 현량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한다.
유법(有法)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어서 근(根)에 의한 일체의 행(行)이 아니네. 오직 안으로 증득되어[內證] 언설을 떠난 이 색이 근의 경계이네.
【문】 의지(意地) 또한 모든 분별을 떠나 오직 내증하여 행함[行]만이 전전한다. 또한 탐욕 등에서의 자증분(自證分)과 수정자(修定者)가 교리에 의한 분별을 떠난 것은 모두 현량이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는 따로 양과(量果)가 없다. 즉 이 체(體)가 뜻에 흡사하게 생하기 때문이며, 작용이 흡사하게 있기 때문에 임시로 설하여 양이라고 한다. 만약 탐욕 등에서 모든 자증분을 또한 현량이라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이 가운데에서 분별지(分別智)를 제외하는가? 이 가운데에서 자증은 부정[遮]하지 않는다. 현량은 분별이 없는 것[無分別]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가운데에서 다른 경계의 부분을 요별하는 것은 현량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곧 기억[憶念]ㆍ추론하여 헤아림[比度]ㆍ바라고 구함[悕求]ㆍ의심나는 지[疑智]ㆍ미혹하여 산란한 지[惑亂智] 등은 거칠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모두 현량이 아니라고 설한다. 앞선 느낌에 따라 분별이 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 세속의 존재[世俗有] 가운데에서 병ㆍ수(數)ㆍ거취(擧取)ㆍ유성(有性)ㆍ병의 성품 등의 지(智)는 모두 사현량(似現量)이다. 실유(實有) 가운데에서 다른 행상(行相)을 지어 다른 뜻을 임시로 합하여 분별이 전전하기 때문이다. 현량을 설해 마쳤다. 비량[自比量]을 설하겠다. “다른 것[比量]은 설한 바 인에서 생한다”고 하는 것은 지[智:비량]는 앞선 지[현량]의 나머지를 말한다. 설한 바와 같이 능립의 인에서 생한다. 이것은 그 뜻을 연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추론된 것[所比]에서 자세하게 관찰한 지로서 현량으로부터 생하거나 혹은 비량으로부터 생하며, 그리고 이 인과 소립의 종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여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설한 바의 힘이 성립함으로 말미암아 인이 동품에는 반드시 있다는 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깝고 먼 인을 추론하여 헤아리기[比度] 때문에 모두 비량이라고 한다. 이것은 짓는 도구[作具]와 짓는 자[作者]에 의지하여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비량[他比量]도 또한 이것[自比量]을 여의지 않으므로 능립이 성립함을 얻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설한다.
하나의 현상[事]에는 많은 법이 있어서 하나의 모습으로 일체를 이해[行]할 수 없네. 오직 다른 것을 가려서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결정코 능히 뒤따름을 나타낼 뿐이네.
이와 같이 능상자(能相者)도 또한 많은 법이 있지만 오직 소상(所相)을 넘어서지 않으므로 능히 나타내 보일 뿐, 다른 것은 그렇지 않네.
【문】 무슨 까닭으로 이 가운데에서 앞의 현량과 달리 따로 비량을 건립하는가? 두 가지(현량과 비량)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곳에서 또한 마땅히 그 추론한 결과에서 비량이 됨을 설하고, 저곳에서 또한 마땅히 나타난 인[現因]에서 현량이 됨을 설하여 모두 부정하지 않는다. 능립과 사능립을 설해 마쳤다. 이제 능파(能破)와 사능파(似能破)를 설하기로 한다. 게송으로 설한다.
능파는 빠지는 것[闕] 등에 관한 언설이며 사능파는 모든 과실의 종류[過類]를 말하네.
【문】 이 가운데에서 “능파는 빠지는 것 등에 관한 언설”이란 앞에 설한 것에서 빠지는 것 등에 관한 언사(言詞)와 지분들의 과실에 관한 그 낱낱의 언사는 모두 능파를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는 능히 앞의 종이 선설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능파는 모든 과실의 종류를 말한다”고 한 것은 말하자면 동법 등의 상사과류(相似過類)를 사능파라 이름한다. 그 지분들이 잘된 비량에 대해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기 위해 시설되었기 때문이다. 앞의 종의 잘못된 점[不善]을 능히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으로 그가[敵者] 정리(正理)가 아닌 것으로 파척하였기 때문이며, 바르게 능파한 곳에까지 시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그 종류이다. 그러므로 설하여 과실의 종류라고 한다. 만약 정리가 아닌 것으로 세운 비량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시설하여 혹 비량의 과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거나, 혹 곧 그 과실문(過失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과실의 종류라고 하지 않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품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동법에 달리 세움으로 말미암아 동법상사(同法相似)이네. 나머지는 이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네.
차별을 분별하는 것을 분별상사라 하네. 동일함을 응하여 무이상사(無異相似)가 성립하네. 소립의 나머지 인을 드러내는 것을 가득상사(可得相似)라 하네.
뜻을 분별하기 어려워 인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유예상사(猶豫相似)라 이름하네. 이품의 뜻을 설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음을 의준상사(義准相似)라 하네.
【문】 이 가운데 “이품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동법에 달리 세움으로 말미암아 동법상사이다”라고 한 것은 전도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에 달리 세움[異立]이라 한다. 이것은 짓는 도구[作具]와 짓는 자[作者]에 의하여 설하고 있다. 동법(同法)이 곧 상사(相似)이기 때문에 동법상사라 한다. 일체를 세운 가운데 상사의 과류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상사라는 말은 불남성[不男聲:中性]이다. 능파와 상응하기 때문이며, 혹은 결송(結頌)에 따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동법상사를 능파라 하는가? 지어진 것[所作] 가운데 능히 지음[能作]을 설하기 때문이며, (능립에 의지하여) 전전하여 생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을 짓는다. 뒤의 (과류도) 응하는 바에 따라 또한 이와 같이 설한다. 지금 이 가운데에서 동법유가 전도하여 성립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설하여 동법상사라 한다. 어떤 사람이 “소리는 무상하다.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이기 때문에”라고 성립시킨다면 여기에서는 허공이 이법유가 된다. 어떤 사람은 허공을 드러내어 동법유로 한다. 질애[質] 등이 없기 때문이라 하여 소리가 항상하다고 세운다. 이와 같은 것은 곧 그 설한 바 인(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 가운데에서는 병이 마땅히 동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품인 허공을 동법으로 설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동법상사라 설한다. “다른 것은 이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란 이법상사(異法相似)를 말한다. 이것은 전의 동법상사의 나머지로써 이품을 나타내 보인다. 이법유를 전도함을 말미암아 성립한다. 두 종류의 비유 가운데에서 앞에서 안립한 것과 같이 병을 이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법상사라 설한다. “차별을 분별하는 것을 분별상사라 한다”는 것은 앞에서 나타내 보임 등이라 설하기 때문이며, 지금 차별을 분별함이라 설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동법의 차별을 분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병은 동법이 된다. 그 동법에 태울 수 있는 것[可燒] 등의 차별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병은 마땅히 무상하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다. 소리는 마땅히 항상하다. 태울 수 없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별로 말미암아 전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상사라 말한다. “동일함을 응하여 무이상사(無異相似)가 성립한다”는 것은 동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앞에서 이미 설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과 그것이 마땅히 동일함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이란 무엇인가? 다시 다른 방편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며, 서로 인접하여 가깝기 때문이다. 이 종[宗]이 다름이 없음[無異]을 성립한다면 다름이 없음이 과실이 성립함을 알아야 한다. 곧 이 언설로 말미암아 뜻을 알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설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과 무엇이 함께 다름이 없음을 성립한다고 하며 따로 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 이것의 일체는 바로 그것의 일체이다. 어떤 사람이 만약 병 등에 동법(지어진 성질)이 있기 때문에 곧 나머지 법(소리) 또한 따로 다름이 없게끔 한다면 일체의 병의 법(태울 수 있고 볼 수 있는 성질)은 소리에도 마땅히 다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일체는 다시 서로에 법이 같아 마땅히 동일한 성품이 성립한다. 이 가운데에서는 억지로 따로 다름이 없다고 하는 과실이 성립한다. 또한 병과 소리의 차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도 앞의 분별상사와 아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따로 설해야 한다. 만약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무상이 성립한다고 하여 모두는 필경의 성품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곧 종과 인이 따로 다름이 없다는 과실이 성립한다. 이것을 억눌러 따로 다름이 없는 성품을 이루게 하기 때문에 무이상사라 설한다. 어떤 사람이 이 인은 성립된 법[所成立法聲]과 성립한 법[能成立法]이 같아 또한 능히 이 서로 어긋나는 법에도 성립한다고 말한다. 따로 다름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무이상사라 말한다. “소립의 나머지 인을 드러내는 것을 가득상사(可得相似)라 한다”고 하는 것은 만약 세워진 종법(宗法)의 나머지 인을 얻을 수 있다면 이를 곧 가득상사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앞에서 소리가 무상함을 세운 것과 같다. 이것은 바른 인이 아니다. 번개 등에서 (빛이) 나타나 보이는[現見] 등의 나머지 인으로부터 무상이 성립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떠나서 그것이 있음을 얻는다면 이것은 그것의 인이 아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이것에서 별도로 방편을 지어서 이것은 그 무상의 바른 인이 아니라고 한다. 두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총림(叢林)은 모두 사려(思慮)가 있다. 수면(睡眠)이 있기 때문에”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뜻을 따로 하기 어려워 인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유예상사(猶豫相似)라 한다”고 하는 것은 과류(過類)에 상응하기 때문에 여성(女聲)으로 설한다. 이 가운데에서 종의 뜻을 따로 다르게 분별한다면 인의 부정(不定)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유예상사라 설한다. 혹은 다시 인의 뜻을 따로 다르게 분별하기 때문에 유예상사의 과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마치 앞에서 소리의 무상함을 성립하여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성질이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혹은 드러나고[顯] 혹은 생함[生]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유예가 성립한다. 지금 성립된 것[所成立]은 드러나는가, 생하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因)으로는 증인(證因)해서는 안 된다. “이품의 뜻을 설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음을 의준상사(義准相似)라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만약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써 무상을 설한다면 뜻에 기준하여[義准] 곧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번개 등은 다 항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의준상사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뒤의 구절(상사)를 생략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단지 유예, 의준이라고만 한 것이다. 다시 무슨 뜻으로 말미암아 이 동법 등의 상사과류는 인명 논사들이 말한 순서[次等]와 다른가? 사능파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설한다.
이 동법 등의 상사들은 대개 의심스러우므로 사능파이네.
【문】 대부분의 언설은 혹 다른 힐난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거나 그릇되어 인이 성립하지 않는 것[似不成因]의 과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내가 설한 비유의 방편과 전혀 상응하지 않으며, 또한 세간의 비유 방편에 따르고 있다. 비록 인이 결정의 성품을 드러내지 않으나 그 체(體)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을 한다. 동법 등의 부정인(不定因)으로 자신의 종을 성립함으로써 방편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도 또한 이러한 법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릇된 공부정[似共不定]이 성립하거나 혹은 다시 그릇된 상위결정[似相違決定]이 성립한다. 만약 오직 자신의 종을 성립시키기 위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부정이 능파라는 이름을 얻는가? 곧 이것을 설하여 능파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을 힐난하는 언설을 부정이라 한다. 능전(能詮) 가운데에서 소전(所詮)을 설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실은 없다. 나머지 곳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안립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입자가) 세운 입량에 부정의 과실이 있거나, 혹은 다시 결정의 동법 등의 (적자의) 인으로서 (종을) 성립하였다면 곧 능파라 이름한다. 이러한 것들은 힐난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타나 보이는 힘[現見力]이 있다면 비량도 그 성품을 능히 막아 보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병 등과 같이”라고 하여 성립시키지만 소리는 들리는 것이 나타나 보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들리는 성질로써 무상을 막아 보낼 수 없다. 오직 보이지 않는 것만이 능히 막아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한 마땅히 항상함도 보내버려야 한다. 두 번째의 무이상사는 그릇된 불성인(似不成因)의 과실이다. 그것은 본래는 없으나 생하는 것으로써 소립에 더하여[增益] 종과 인이 동일함을 이루는 과실을 짓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래는 없으나 생하는 것으로써 인의 법을 잘 이루어[極成] 멸한 후의 없음을 증명한다. 만약 곧 그것을 세운다면 능파를 이룰 수 있다. 세 번째의 무이상사는 소립에 어긋나 해치는[違害] 것을 성립시키는 곤란함 때문에 그릇됨[似]이 성립한다. 태울 수 있음 등의 결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으로써 결정된다고 하면 상위(相違)가 이루어질 수 있다. 가득상사는 소립이 부정(不定)이기 때문에 그 그릇됨[似]이 성립한다. 만약 소립의 인이 항상함에서도 있다면 능파가 성립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가득상사는 비록 이것이 두루하지 않으나 나머지 종류가 없기 때문에 그릇되어 성립하지 않음[似不成]의 과실이다. 만약 소립에 없다면 능파라 말할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 일체는 모두 무상이라고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유예상사는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써 멸하여 무너짐[滅壞]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만약 생기로써 소립에 더하여[增益] 부정의 과실을 짓는다면 이것은 그릇된 부정[似不定]이다. 만약에 소립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인만을 간별(簡別)하여 생기에 대해 힐난을 하였다면 이것은 그릇되어 성립하지 않는 것[似不成]이다. 이 가운데에서는 오직 생함만을 바라지 않아 무너짐이 성립한다. 혹 생하거나 혹 드러나는 것 모두 다 멸하여 무너짐[滅壞]이다.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준상사는 전도되어 부정으로 힐난하였기 때문에 그릇된 부정이라 말한다. 만약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함과 무상을 세우게 된다. 혹은 오직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무상이며 나머지 것이 아니라면 능파가 성립할 수 있다. 게송으로 설한다.
만약 인이 이르고 이르지 않음과 삼시에 바라지 않는 언설이 있다면 지비지상사이며 무인상사(無因相似)이네. 이것은 그릇된 인의 빠짐[似因闕]이라 하네.
【문】 “만약 인이 이르고 이르지 않음과 삼시에 바라지 않는 언설이 있다면 지비지상사이며, 무인상사(無因相似)이다”라고 하는 것은 이르고 이르지 않은 것에서 바라지 않는 언설을 짓는 것이다. 만약 능립의 인이 소립의 종에 이르러서 종이 성립한다면 종과 인이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응당 소립이 아니어야 한다. 마치 연못의 물과 바다의 물이 서로 합하면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만약 종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인의 모습은 이르지 않아야 한다. 소립이 만약 성립한다면 이것은 누구의 인인가? 만약 능립의 인이 소립에 이르지 않는다면 이르지 않음은 인이 아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성립하지 않음[不成]의 인이다. 이를 지비지상사라 이름한다. 또한 “삼시에 바라지 않는 언설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만약 능립의 인이 소립의 앞[前]에 있다면 아직 소립이 있지 않은 것으로 이것은 누구의 인인가? 만약 능립의 인이 뒤[後]에 있다고 말한다면 소립은 이미 성립한 것으로 다시 어떠한 인을 필요로 하는가? 만약 함께[俱時]라면 마치 소의 양 뿔과 같이 인과 유인[有因:宗]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무인상사(無因相似)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에서 앞과 순서가 다른 것은 모두 그릇된 인이 빠졌기[似因闕] 때문이라고 설한다. 무슨 까닭인가? 정리가 아닌 것으로 일체의 인을 비방하여 없애버리기[誹撥]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서 무슨 도리로 오직 이르지 않음과 이르름[不至同]이기 때문에 비록 인의 모습과 상응하더라도 또한 인이라 이름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무슨 도리로 오직 소립의 앞에 있어서 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곧 능립이 아니라고 하는가? 또 이 가운데에서 (적자) 자신을 해치는 이르름[同]을 막아 보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또한 언설의 인[言因] 및 지혜[慧]로 소립하는 가운데에서는 그릇된 인의 빠짐이 있다. 뜻의 인[義因] 가운데에서는 그릇되어 성립하지 않음[似不成]이 있다. 정리가 아닌 것으로 모든 법의 인[因]을 비방하여 없애버리기[誹撥]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 인과 같이 뜻으로 소립한 것은 모두 지어진 것[所作]과 능히 짓는 것[能作]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정리(正理)가 아니다. 만약 정리로써 비방하여 없애버릴 때에는 능파라 이름할 수 있다. 게송으로 설한다.
설하기 전에는 인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소립이 있지 않다는 것을 무설상사(無說相似)라 이름하네. 생함의 무생(無生)도 또한 그러하네.
소작(所作)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소립(所立)이 성립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을 이름하여 소작상사(所作相似)라 하네. 대개는 사종(似宗)에서 설한 것과 같네.
【문】 “설하기 전에는 인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소립이 있지 않다는 것을 무설상사라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앞에서 세운 것과 같이 만약 이 인으로 말미암아 무상성을 논증한다면 이 인은 아직 설하기 전에는 전혀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인이 있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무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무설상사라 이름한다. “생함의 무생(無生)도 그러하다”고 하는 것은 (소리가) 생하기 전에는 인이 없기 때문에 세우는 바[所立]가 없으니, 또한 곧 무생상사(無生相似)라 한다. “또한 그러하다”라는 말은 소리의 전에 인이 있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세우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유례(類例)이다. 지금 이 가운데에서 세우는 바가 없는 것과 같이 또한 소립의 상위(相違)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설하였다. 예컨대 앞의 소립(소리는 무상하다)에서 만약 이와 같이 소리가 아직 생기기 이전이라면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없어서 마땅히 무상이 아니어야 한다. 또한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여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무생상사라 이름한다. “소작(所作)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소립이 성립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을 소작상사라 이름한다”는 것은 성립시키는 바인 “지어진 성질 때문에”라는 것이 “비유하자면 병 등과 같이 소리는 무상하다”고 말한다. 만약 병이 “지어진 성질 때문에”와 다르다면 무상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소리의 현상을 예상하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소작상사라 한다. “대개는 사종(似宗)에서 설한 것과 같다”란 이와 같은 무설상사 등은 대부분 그릇된 소립[似所立]에서 설한 것이다. (무설과 소작의 상사에서) 불성인(不成因)의 과실과 같이 대개의 언설이 그릇된 나머지 것[似餘]과 같음을 말하거나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지금 이 가운데에서 무설상사는 비량을 더한다[增益]. 이른바 논자가 언사로 설하여 무상성을 세운 것에서 아직 설하기 전에는 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힐난하는 것은 그릇되어 성립하지 않음[似不成]이다. 혹은 그릇된 인의 빠짐이다. 아직 설하기 전에 능립을 더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가운데에서 뜻이 있지 않음을 드러내거나 또는 입량할 때에 언설이 없다면 능파가 성립할 수 있다. 무생상사는 소리가 아직 생하기 전에 소립을 더하여 인이 없다고 힐난하기 때문에 곧 사능파라 한다. 만약 성립할 때에 이것이 없음을 드러낸다면 능파가 성립할 수 있다. 만약 아직 생하기 전에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항상하도록 한다고 힐난한다면 의준(義准)의 부분이기 때문에 또한 그릇된 부정이다. 소작상사는 세 종류가 있다. 만약 병 등의 지어진 성질이 소리의 위에서는 없다고 힐난한다면 이것은 그릇된 불성[似不成]이다. 만약 소리의 지어진 성질이 병 등에서는 없다고 힐난한다면 이것은 그릇된 상위[似相違]이다. 만약, 즉 이것이 항상함의 위에서도 없다고 힐난한다면 이것은 불공부정(不共不定)이기 때문에 곧 그릇된 부정이다. 혹은 그릇된 유[似喩]의 과실이다. 동법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오직 전체적인 법만을 취하여 비량을 건립하고 개별적인 (법을) 취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개별적인 뜻을 취한다면 결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비량은 마땅히 없어야 한다. 게송으로 설한다.
모두는 허락한다 할지라도 인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생과상사(生過相似)라 이름하네. 이것은 유(喩)에 힐난을 시설하는 것으로 그릇된 유[似喩]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네.
【문】 “모두는 허락한다 할지라도 인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생과상사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앞의 소립에서와 같이 병 등은 무상하다는 것은 다시 어떤 인이 증인이 되느냐고 힐난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유(喩)에 힐난을 시설하는 것으로 그릇된 유[似喩]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한다”는 것은 병 등이 무상하다는 것을 함께 성취함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릇된 유에서 힐난하였기 때문에 사유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게송으로 설한다.
무상성이 항상함에 따른다고 하는 것을 상주상사(常住相似)라 이름하네. 이것은 상주성의 과실이 성립하는 것으로 종의 과실에서 설한 것과 같다네.
【문】 어떤 사람이 힐난하여 말하였다. 앞에서 세운 바와 같이 “소리는 무상하다”고 하는 이것은 마땅히 상주(常住)가 무상성과 함께 결합한다. 모든 법의 자성은 항상함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상주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곧 상주상사라 이름한다. 이것은 그릇된 종[似宗]의 과실이다. 소립의 무상성에서 더했기[增益]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서는 전혀 별도의 참된 무상의 성품이 있어서 이것에 의지하여 항상함이 전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것의 자성은 본래 없다가 지금 있고, 잠시 있다가 없음으로 돌아가기[本無今有暫有還無] 때문에 무상이라 하는 것이다. 곧 이 분위(分位)에서 자성을 연(緣)함으로 말미암아 무상성이라 이름한다. 마치 과(果)의 성품 등과 같다. 이와 같은 과류(過類)는 족목(足目)이 설한 것이 대부분인데 사능파로 하여 설하였다. 성품이 가장 잘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논서에서 설한 것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하여 성립한다. 즉, 이러한 과류는 단지 조그마한 부분의 방편이 다름으로 말미암을 뿐이며 가없는 차별로서 과류를 건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하지 않는다. 즉, 이 가운데 사람들이 설한 증익ㆍ손감ㆍ유현(有顯)ㆍ무현(無顯)ㆍ생리(生理)ㆍ별유(別喩)ㆍ품류상사(品類相似) 등과 같은 것은 이러한 방향[方隅]으로써 모두 자세하게 관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된 비량의 방편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지어 전전하고 유행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여기서는 다른 논서에서 설한 것이 무궁하기 때문에 다시 설하지 않는다. 또한 부처(負處:패배)에 대하여 옛 인명 논사들이 설한 것은 혹 어떤 것은 능파 가운데 포섭되어 있기도 하고, 혹 어떤 것은 아주 거칠기도 하고, 혹 어떤 것은 도리가 아니다. 궤변의 종류[詭語類]와 같기 때문에 여기에는 수록하지 않는다. 다른 논사의 종 등이 소유하는 구의(句義)도 또한 이와 같이 분별하여 건립하여야만 한다. 이와 같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부분 등은 모두 정치에 상응하지 않으며 설한 바 모습[所說相]에 어긋나므로 모두 무지(無智)라고 이름한다. 정리와 아주 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과실에 관한 언사는 내가 스스로 속하는《논식(論式)》등에서 이미 굴복시키고 있다. 또 이러한 방향은 내가 고인명론(古因明論)을 논파하는 가운데에 이미 모두 분별하였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 게송으로 설한다.
지인(智人)이 지혜로 독과 약을 (분별해) 열기 위하여 이 정리문(正理門)의 묘한 뜻을 계발하노니 모든 외도의 주장에 미혹한 자들로 하여금 삿된 길을 벗어나 참된 뜻에 계합(契合)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