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일체 유정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바른 무상보리(無上菩提)의 큰 원(願)을 일으킴과 동시에 세간에서 항상 여러 바르지 못한 심사(尋伺) 때문에, 폭풍의 산란한 마음을 상속하여 삿된 견해의 그물에 잡히고, 생사의 새장에 속박당하며, 무량한 근심과 고통의 독화살에 맞는 여러 존재들의 행한 바는 밝은 지혜를 모두 떠나 있음을 관한다. 그러므로 나는 청정한 허공과 같이, 일체 희론을 끊고 적정(寂靜)에 안락(安樂)하고, 승의제(勝義諦)의 이치에 의지하여 비원(悲願)의 마음을 묶었기에 저 중생의 괴로움의 원인을 보고 참지 못한다.
자타(自他)의 상속(相續)과 번뇌로써 단단히 결박당한 곳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하여, 불퇴전[無退壞]에 머물며 금강견고(金剛堅固)의 윤회[輪圍]를 뛰어넘고 증상의요(增上意樂)을 서원하는 곳에는 치우침이 없기에, 생사의 큰 바다 그 속에서 받는 무량한 많은 괴로움과 재난을 싫어하고, 금강유(金剛喩)의 무너짐이 없는 정진을 일으키는 바른 깨달음을 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요컨대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하여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일체 유정취(有情聚)의 근(根)ㆍ승해(勝解)ㆍ계(界)ㆍ행(行)의 차별을 바르게 안다. 또는 자타(自他)의 상속(相續)에서 일어나는 훈습되거나 훈습되지 않은 여러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번뇌의 그물을 잘 파열한다. 또한 남을 위하여 진실한 서원을 일으키고 견고하게 보살[大士]의 계행(戒行)을 지키지만 출세간의 무분별지를 증득한다. 요컨대 배움을 쌓아 능히 일체 삿된 견해의 눈꺼풀을 없애고 전도 없이 공을 관찰하여, 선나약(膳那藥)에 반드시 안주해야 한다.”
017_0649_b_01L이와 같이 익힘을 쌓아 전도 없이 공을 관찰하여 선나약에 안주한다면, 결국 일체 소연(所緣)의 자성(自性)을 부정하여 문혜(聞慧)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자세한 문장의 뜻은 바른 결택문(決擇門)에 의존한다. 이미 법성(法性)에 들어가기를 수차례 했지만 다시 꾸준히 닦아 행이 점차 나아지기에 자세한 문장의 뜻에 대해 결택할 경우 현전(現前)에 몹시 애써 일해도 마음에 권태를 일으키지 않고 다시 아직 법성에 들지 않아도 여기에는 이근(利根)이 있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진공을 증득하고 빨리 법성에 들어가기 쉽게 하기 위하여 간략하게 이 『대승장진론』을 짓는다.
여러 어리석은 범부는 승의제의 이치인 유위와 무위의 전도됨이 없는 성품을 바르게 깨달아 알지 못하여 헛되이 모든 법의 자성에 집착하고 차별하여 여러 삿된 견해의 그물을 더한다. 마치 두려워할 만한 야차의 모습이나 혹은 여인의 모습을 그려 놓고 눈이 아찔하고 어지러워져서 뜻에 실제로 있다고[實有] 하고는,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까닭에 스스로 두려워하거나 흑은 탐욕에 물듦을 일으키고, 저 경계에 대해서 수없이 헤아려 여러 견해의 그물이 증장하고 분별하는 것과 같다.
만약 승의제의 이치인 유위와 무위의 전도됨이 없는 성품을 바르게 깨달아 알면, 이 때 세간의 지혜로운 화공은 저것에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나니, 앞에서 설한, 유위와 무위의 경계를 차별하는 삿된 견해의 그물에 스스로 묶여 마치 누에가 고치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저것이 있지 않는 까닭에 무분별의 지혜에 나아가 행을 이룬다.
017_0649_c_01L이 뜻을 드러내어 먼저 유위를 변론하는 것은, 모든 세간은 이 유위의 경계에 대해 여러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성(眞性)에서 유위(有爲)는 공(空)하네. 마치 환(幻)과 같으니, 인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네”라고 말하는 것은 세간에서 존재[有]를 모두 용인하기에 자종(自宗)도 또한 세간의 존재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간의 현량(現量)이나 생기(生起)의 인연(因緣)도 역시 존재를 용인해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눈 등의 유위는 세속제(世俗諦)에 포함된다. 심지어 소치는 사람까지도 모두 다 눈 등의 유위를 실유(實有)로서 알기에, 이와 같이 자종(自宗)이 허락하는 현량이나 공지(共知)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성(眞性)으로써 간별하여 주장[宗]을 세운다. 진실한 뜻 자체를 ‘진성’이라 이름하니, 곧 승의제(勝義諦)를 말한다. 승의제에서 ‘유위(有爲)는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지만 세속제에서는 아니다.
뭇 인연이 합성하고 조작하는 것이 있기에 ‘유위’라 이름하니, 곧 12처(處)를 말한다. 그러나 법처(法處)의 일부에서 제외되는 것은 허공(虛空)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진여성(眞如性)이며, 여기에 다시 타종(他宗)이 허망하게 나타나는 환(幻) 등의 유위(有爲)를 용인하는 것도 제외된다. 왜냐 하면 환 등의 유위를 공이라 주장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유위는 승의제에서 실제로서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을 하여 이제 공을 세운다. 다시 눈과 같은 일종의 유위는 승의제에서 그 실체가 공함을 밝힌다.
공(空)과 무성(無性)에는 허망현현문(虛妄顯現門)의 차별이 있으며, 이것을 주장명제로 세운다. 뭇 연에서 일어나는 남ㆍ여ㆍ양ㆍ사슴 등의 여러 환사(幻事)의 자성은 실체로서는 없어도 현현하여 있는 것과 같다. 세우는 목적과 그 내용에 두루 편재하여 동법(同法)의 비유가 되기 때문에 ‘환화와 같다’는 말을 한다.
017_0650_a_01L 그 상응하는 바대로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이 같음을 가설한다. 가설로서 같다고 말했기에 일체 동유상법(同喩上法)은 존재한다는 힐난을 할 수 없다. ‘여인의 얼굴이 마치 달과 같이 단아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모든 달[月法]이 얼굴 위에 있다는 힐난은 할 수 없다. 결송(結頌)에 법이 이 동법의 비유로써 설해지고 있으나 이와 같은 차례로 이 반송(半頌)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약본(略本)이기에 생략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여기에 비량을 건립하는가? 이른바 ‘진성(眞性)에서 눈의 속성은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체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진성의 입장에서 모두 그 자성은 공하다. 심지어 소치는 여인 등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위신(威神)과 주술(呪術)과 약의 효력[藥力]에다 초목ㆍ흙벽돌 등을 첨가하여 만든 뭇 연에서 나타난 남자ㆍ여자ㆍ코끼리ㆍ말ㆍ궁전ㆍ정원ㆍ물ㆍ불 등의 현상에 어리석은 범부가 정신이 팔리는 따위의 허망된 일들과 같다’는 것이다. 저 자성이 조금이라도 실체로서 있다면 마땅히 전도(顚倒)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법성(法性)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연하여 발생하는 법에는 다 자성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만약 연하여 발생하는 것을 안다면 곧 법성(法性)을 알게 된다. 법성을 안다면 공성(空性)을 알게 된다. 만약 공성을 안다면 지혜로운 자를 보게 된다.”
017_0650_b_01L여기서 일체불공논자(一切不空論者)는 여러 힐난을 설정하여 말한다. “일체 유위가 다 공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다시 색(色) 등도 없다. 마치 토끼의 뿔처럼, 현량지(現量智)로써는 발생의 이치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처럼, 색 등의 연을 현사하여 현량각(現量覺)이 또한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저 실체가 있기에 별개로 내증(內證)한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주장은 법성(法性)에 위배된다. 왜냐 하면 다시 현량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고, 또 공지(共知)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으며, 일체의 소치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눈 등의 실체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제 붕당(朋黨)에 집착하는 독소를 제거해야 하니, 머물면서 지혜로써 함께 생각하여 논의해야 한다. 내가 세운 주장은 자신의 상속(相續)에서 발행하는 현량에 위배[違害]되는가, 다른 것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는가? 만약 자신의 상속에서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된다는 말을 하면 현량각(現量覺)은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자성이 모두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꿈속에 현량각이 실제의 현량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도 자신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지 않는다. 다른 것의 상속 중에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된다고 할 경우 맑은 눈을 가지지 않은 자에게 흑은 저 많은 것이 현현하고 눈먼 사람이 실제가 아닌 머리털 파리 등을 보는 것은 허망된 현상이 된다. 현량과 위배되나 바른 도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은 다른 것의 상속에서 발생하는 현량에 위배되지 않는다.
017_0650_c_01L 만약 총상(摠相)을 말하면 마치 어리석은 범부 등의 일체 세속(世俗)에서 발생하는 현량처럼, 지금 세속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에 위배가 없는 것이다. 공지(共知)에 위배되는 과실이 있다는 말을 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만약 자신의 논이나 공지에 위배된다면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나의 논에서 허락하기 때문이다. 설령 나의 논에 위배되는 것이 우리의 주장에 위배되어도 저 공지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흑은 다른 논의 공지에 위배된다는 말을 해도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일체의 논의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다른 논이나 공지(共知)를 논파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소지는 사람 등도 모두 알 만한 것에 위배된다면 도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일체의 작용은 다 찰나에 소멸한다.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이기에 또한 유정(有情)은 없다’고 주장한다. 승론자(勝論者)들은 ‘실체는 색 등과 다르며 다른 실체 등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수론자(數論者)들은 ‘각(覺)의 실체는 사(思)가 아니니, 이미 소멸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실유(實有)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와 같은 말들로써 자신의 주장에 내포된 도리를 자세히 드러낸다. 모두 공지에 위배된다는 말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허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승의제(勝義諦)에서 일체법을 관찰한 것이며 소치는 사람 등의 공지(共知)에 관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또한 주장명제 중에서 승의제로써 간별하여 세운 것이기에 ‘위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또한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이것은 마땅히 도리가 아니다. 소치는 사람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극미(極微)로써 형성된 눈 등은 총괄적인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곧 저 법으로써 이유를 들기 때문에, 이 서로 비슷한 유법(有法)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류가 되고, 또한 비슷한 의지의 대상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도 오류가 된다.
옳지 못한 정리론자(正理論者)들이 다음의 난문을 한다. “만약 진성에서 눈 등은 다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면 눈 등이 이미 공한데 무엇을 연하여 발생하는가? 만약 연에서 발생한다면 어째서 실체가 공한가? 이와 같이 주장과 이유가 또한 서로 위배되기 때문에, 다시 주장과 위배되는 과실을 이룬다.”
017_0651_a_01L 이것이 만약 바로잡으려 주장명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라면 방편에 의해 이유를 드러낼 수 있겠지만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기에 다시 불성(不成)의 오류가 생긴다. ‘소리는 무상하다. 일체는 무상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이 방편으로써 일체가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유가 명료하지 않아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소리는 ‘일체’ 중에 섭수되기에 또한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는데 어떻게 ‘상주(常住)’이지만 ‘일체’는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도리가 아닌 것이다.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와 ‘마치 환화와 같다’는 비유는 모두 공지(共知)이기에 이유와 비유는 아울러 모두 성립한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힐난은 지혜로운 사람의 생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유성론자(有性論者)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대는 눈에 속성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체 무성(無性)은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처럼. 눈의 작용이 있어 이른바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마치 말하는 이유처럼 세력이 있기에 눈 등에 반드시 속성이 있다.”
이것은 또한 그것에 의해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니, 소치는 사람 등의 지혜로도 자성의 성립을 알 수 있다. 세속에 의하여 눈 등의 유위의 자성이 성립한다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혹은 승의제에서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어 오직 이품(異品)을 부정할 뿐이다. 즐겨하는 주장이 성립해도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다.
음성(音聲)의 상주(常住)를 계탁하는 논자의 ‘소리는 상주한다. 들려지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병 등은 무상하니, 들려지는 속성이 아니다. 소리는 이미 들은 것이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속성은 상주한다’는 말처럼, 또한 세간의 공지에서는 동법의 비유가 작용하기에 상위(相違)의 이유가 성립한다. 주장을 세우는 주체인 눈 등은 다 세속의 언설에 포함되니,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이 힐난을 한다. “유위가 공하다면 이유나 비유도 다 거기에 포함된다. 종류가 같으므로 비량이 없는 오류가 생긴다.”
017_0651_a_17L餘復難言:有爲空者,若因若喩,皆攝在中,種類同故,闕比量過。
017_0651_b_01L지금 이 게송에서는 총괄적으로 인식방법의 결과를 관찰하거나 인식방법을 세울 때, 눈 등을 낱낱이 달리 세워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오류는 없다. 총괄적으로 일체의 유위를 주장해도 이것은 오류가 아니다.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두 주장에서 다 허락하는 것이며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눈은 공하다. 그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이 말한 이유는 오류이며, 또한 비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환화(幻化) 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한 비유 가운데 환화 등을 들어 주장한다면 또다시 이미 세운 것을 세우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승론자는 힐난한다. “‘소리는 무상하다.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라는 주장을 하며, ‘소리로써 실체를 삼아도 또한 무상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도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여러 대론자[敵論者]들이 꾸준히 입론자(立論者)의 오류를 찾으려 해도 말한 이치대로는 다른 논을 궁극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 만약 이치라면 어디서 누가 비량(比量)을 잘 건립하여 내가 즐겨 말하는 도리를 파괴하겠는가?
다시 힐난하여 말한다.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는 끝내 세우려는 뜻을 능히 세울 수 없다. 속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소리와 같이. 이 이유는 스스로 불성의 오류가 생긴다. 혹은 다른 주장이 용인하는 것을 이유로 들어도 도리가 아니다. 다른 주장에서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그 뜻을 미처 이해 못한 것이다. 비유(非有)가 곧 이유의 명제가 된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非有)가 아니기 때문이다.
017_0651_c_01L 만약 허망하게 현현하는 존재[有]가 곧 이유명제라면 ‘석녀의 아이의 소리’란 궁극에는 없기 때문에, 이 비유에는 주장하려는 법이 없다. 또한 가상의 소리[化聲]로 인하여 부정인(不定因)의 오류가 생긴다. 그것은 수많은 유정에게 이익과 즐거움의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주장만 인정하는 이유는 아닌 것이다. 주장의 내용과 주장의 목적 중 하나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주장에서 성립하지 않는 이유처럼, 비량(比量)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큰 과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지혜 등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행온(行蘊)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마치 명칭 등과 같다”는 주장을 세우고, 승론자는 “허공 등은 다 상주가 아니다. 덕(德)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地) 따위와 같다”는 주장을 세우며, 수론자는 “아(我)는 사(思)가 아니다.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가장 뛰어난 것[最勝]과 같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부류는 일체 주장을 파괴하여 과실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두 주장 모두 허용됨을 마땅히 믿어야 한다. 이어 명칭을 이유로 든다. 이 도리로 인하여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얻을 수 없다.
다른 옳지 못한 정리론자가 주장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약 자성이 공하다면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을 다 성취할 수 없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음성처럼, 주장의 내용은 유위(有爲) 중에 포함되기 때문이니, 마치 저 주장의 목적처럼 그 속성도 또한 공하다. 모두 공하기 때문에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이 함께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장의 목적과 그 대상의 법제(法體)를 아울러 부정한다. 즉, 유법(有法)의 자상(自相)을 부정하여 주장명제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나 남이 서로 성립 못하고, 확정적이지 않으며, 비유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앞서 말한 것도 도리가 아니다. 설사 이단을 설정해도 끝내 자기주장의 과실을 숨길 수 없다.
017_0652_a_01L다른 사람이 또 다른 방편을 설정하여 자기주장의 오류를 비호하려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진성에서는 유위는 공하다’는 이 주장명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다 실체로서 있지 않다’는 이 주장명제를 세우면 그 말은 또다시 유위 속에 포함되기에 유위와 같아도 실체는 없어야 한다. 얘기한 말에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유위도 마땅히 실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자신이 세운 뜻을 논파하기 때문이니, 자기 말에 위배되는 주장을 세우는 과실이 있다. 마치 ‘일체 언어는 다 망집이다’는 주장과 같다. 만약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모두 무소유이다’라는 주장명제를 세우면 곧 ‘일체는 다 무소유이다’라는 말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주장의 목적은 거듭 사견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자아는 반드시 자아에 의지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에 의지한다는 말을 하는가? 지혜로운 자의 자아는 선을 살피기에 승천의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과 같이 그들은 세속에서는 마음을 자아라 하고 승의제에서는 자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에 자신의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주장명제의 과실도 또한 그와 같다. 이것은 세속의 속성에서 눈 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승의제에서는 그것이 다 공하다는 주장을 하므로 오류가 없다.
다시 ‘모든 발생하는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에 허망한 것이 없기에 자신도 태어났으니 마땅히 죽어 돌아가야 한다. 서로를 배제하지 않았기에 저 세운 주장에 의해 또한 죽어 돌아감을 증명하였으니, 이것을 용인하기에 자신의 말에 위배되지 않는다. 제시한 주장의 오류도 이와 같다.
‘진성에서 유위는 다 공하니,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하면 세우려는 주장도 이미 뭇 연에서 발생하므로 속성도 공해야 한다. 서로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우려는 주장의 말로써 능히 증명될 수 있으나 여기서 자신의 말도 속성이 공하다는 것을 용인하기에 세운 주장을 자신이 파괴하는 과실은 없다.
범지(梵志)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일체 자아(我)는 모두 참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지여, 이 일은 참아야 하는가, 참지 말아야 하는가?’ 세우려는 주장의 말로써 능히 증명될 수 있으나 여기서 범지가 굳세게 이 일을 참았지만 ‘일체 자아를 모두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허용한 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한 것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어디에도 이 과실은 있지 않다.
017_0652_b_01L 세존께서는 그 밖의 곳에서는 ‘일체의 작용에는 다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모든 작용은 무상하기에 생성과 소멸의 법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작용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생기겠지만 그렇지만 그러한 과실은 없다.
일체 작용 속의 자아의 속성 및 상주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 주장을 세우는 말 또한 마찬가지로 저 무아의 상주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이와 같이 유위공을 설하지만 주장을 세우는 말 역시 속성이 공함을 용인한다. 이것에 따라 자신이 허락하는 뜻을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 말은 자신이 세운 뜻을 파괴하기 때문이다’라는 이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수론(數論)에서 ‘모든 현상은 즐거움 등을 속성으로 한다’며 현상에 관하여 힐난할 때, 만약 즐거움 등으로써 속성을 삼는다면 세우려는 주장의 말도 저 즐거움 등으로써 속성을 삼아야 한다. 세우려는 주장의 말이 저 즐거움 등의 속성을 본성으로 하지 아니하면 현상도 마땅히 그것을 본성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우려는 주장에 이처럼 오류가 없으니, 마치 유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세우는 것처럼 또한 설한 주장과 같은 것에는 오류가 없다.
이 또한 이와 같이 설한 바의 오류는 없다. 의(意)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 대론자는 주장하는 바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힐난하여, ‘만약 진성에서 유위에 실체가 없다는 말을 하면 유위에 실체가 없다는 말에도 실체가 없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이 힐난은 자기주장의 오류를 모면하기 어렵게 되자 미망되게 다른 주장에도 그와 같은 과실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017_0652_c_01L 마치 세간의 어리석은 도적이 문초[推徵]를 받자 자신을 변명하려 사리를 따져 ‘그대도 도적이다’는 비방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치를 살피고 관찰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흑은 진성에서 일체 유위는 모두 무소유라면 이 주장명제의 뜻은 곧 모두 무소유라는 말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세우려는 주장은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 떨어진다. 여기 주장의 뜻은 앞에서 이러한 힐난을 이른바 공(空)과 무성(無性)에는 허망현현문(虛妄顯現門)의 차별이 있음을 일체의 종(種)을 다 비방하여 없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힐난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기주장의 허물을 은폐시키려 거짓되이 비방을 한 것이다. “어째서 모두 오류인가? 공론자(空論者)가 세우는 인식방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승의제를 비방하는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내용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대가 이 말의 드러남에 뛰어난 것으로 집착하여도 우리들은 이 말의 부정[遮止]을 뛰어난 것으로 삼는다.
이 ‘있지 않다’는 말이 오로지 ‘있음의 속성’만을 부정한다면 공능 이것이 소진하여 세력이 있지 않다. 또한 내용에 다른 뜻이 있다. 마치 세간에서 흰비단이 아니라는 말을 할 경우, 이 말의 내용이 검은 비단을 지시한다고 집착하여, 말한 사람에게 주장의 오류를 지적할 수 없는 것처럼, 흰비단이 아니라는 말이 다만 흰비단만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공능 이것이 소진하여 다시 나머지 힘인 검은 비단, 붉은 비단, 황금색 비단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지금 이 논에서는 승의제의 입장에서 유위의 경계에 대하여 치우친 상주(常住)의 견해를 피하고 또한 ‘있음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나머지 곳에서도 단견(斷見)을 피하려고 ‘없음의 속성’을 부정한다. 더불어 두 치우친 견해를 피하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속성’을 부정한다. 나머지 망집의 과실을 피하기 위하여, 마침내 일체 심소(心所)의 작용을 모두 다 부정한다. 심소의 작용이 소멸하면 마음도 바로 따라 소멸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아난다(阿難陀)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있음의 속성’에 집착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없음의 속성’에 집착하면 곧 단견에 떨어진다.”
017_0653_a_01L이와 같이 나머지 곳에서 가섭파(迦葉波)에게 말씀하셨다. “있음은 치우친 견해이고 없음은 다른 치우친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아급마(阿笈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고, 또한 말이 모든 도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내가 세운 주장은 저촉됨이 없으니, 마치 똥처럼 견해의 과실이 없다.
자기주장에 오류나 곤란이 생기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은폐하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론자(性空論者)는 항상 무분별혜(無分別慧)를 원하지만 항상 일체 유위나 무위의 공성(空性)에 관해 분별하면 변계소집(遍計所執)과 허망분별을 세워 스스로 즐거움[樂]의 주장을 잃는다.” 이와 같이 또 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는 없다.
그밖에 사람이 다시 말한다. “공하다는 이유는, 세속 혹은 승의제의 자기주장이나 다른 주장에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53_a_07L有餘復言:所說空因,若就世俗,或就勝義,於自於他,因義不成。
두 주장을 모두 허락하여 차별을 드러내지 않는다. 총상(摠相)의 법문(法門)에서 바른 이치를 밝히는 것은 이유로 삼는 것을 용인하기 때문이니, 그대가 세운 힐난은 불성(不成)의 오류와 비슷하나 실제로 불성의 오류는 아니다. 승론자는 “소리는 무상하다.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성상론자(聲常論者)는 그 오류에 대해 말한다. “목 등의 작용 혹은 막대기 등의 작용을 이유로 들어 분별하나 이와 같은 분별에는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수론자가 주장한다. “듣는 주체인 다섯 유정근(有情根)은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색(色)은 아니다. 근(根)의 속성이기 때문이니, 마치 의근(意根)과 같다.”
017_0653_a_14L如數論者立能聞等五有情根非所造色,是根性故,猶如意根。
눈 등의 다섯 감관은 사대(四大)에 의해 만들어진 색이라 말을 하는 논자(論者)는 그 오류를 “‘근(根)의 속성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말하고, 만약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속성 혹은 즐거움 등의 속성이 자기주장과 다른 주장에서 이와 같이 이유명제를 분별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 두 설은 불성의 오류와 비슷해도 실제로 불성의 오류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가 아니며 이 역시 그와 같다.
017_0653_b_01L“주술 약의 효력에 꽃과 과실과 벽돌 등의 사물을 첨가하여 다양한 코끼리ㆍ말ㆍ토끼 등의 물질의 형상으로 현현시킬 때, 우리 주장에서는 그것의 자성이 공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법의 비유가 또한 빠져 주장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마치 환상의 코끼리나 말 등의 모습에, 실제의 코끼리 등의 속성이 있지 않은 것에 공하다는 명칭을 붙이는 것처럼 눈 등도 또한 그러하다. 다른 것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을 세운다면 다시 주장에 오류가 생기니, 다시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힐난은 옳지 않다. 주술이나 약의 효력에 꽃ㆍ열매ㆍ흙벽돌 등의 사물을 첨가한 뭇 연에서 발생한 코끼리ㆍ말 등의 현상에는 코끼리ㆍ말 등의 속성이 공함을 비유로써 들기에 세우는 주장은 성립한다. 만약 그대가 다시 환술로 만든 코끼리ㆍ말 등의 사물에 다른 실제의 코끼리ㆍ말 등의 속성은 없다는 말을 하면 그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 속성도 공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어찌 그 형상[相狀]이 현현(顯現)하지 않는데,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의 자성이 있겠는가?
그대가 용납하는 꽃ㆍ열매 등과 같다는 말을 하면 그렇게 환술이 만들어낸 코끼리와 말 등의 사물에 실체로서 코끼리나 말의 속성은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않다. 일체 환술이 만들어낸 코끼리ㆍ말 등의 사물의 자성이 모두 공함을 안다. 이 까닭으로 실체로서 있다. 세운 비유처럼 세운 주장도 성립하고 또한 이미 설립한 것을 세우는 과실도 없다. 자성이 공함에 의래 눈 등의 유위의 공함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공혜(空慧)가 다른 자가 있어 다른 비유로서 오류를 드러내 말한다. “모든 허깨비 장부는 실제의 장부가 아니기에 공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허깨비는 자성이 공하지 않다. 허망한 현현하는 허깨비 장부의 상체(相體)가 있기 때문이니, 이 도리로 인하여 앞서 세운 구절과 같은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힐난해야 한다. “이 허망하게 현현하는 허깨비의 상체(相體)는 연에서 발생하는가?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017_0653_b_22L今應詰彼:“此虛妄現幻士相體從緣生不?”
017_0653_c_01L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이것은 연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허망하다는 말을 하는가? 현현하는 대로 이와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눈 등도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마치 현현하는 대로 이와 같이 있지 않아 동법(同法)의 비유가 성립하기 때문에 속설이 공하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그대는 믿어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믿어서는 안 된다.” 허깨비 사물이 실제의 사물이 아니듯이, 실제의 장부를 상대하는 것을 깊이 관찰하면 이것이 허망하기에 공하다는 말을 한다. 그대들은 앞에서 말한 눈 등의 유위를 떠나 달리 눈 등이 있음을 깊이 관찰하여 그것을 상대하여 이렇게 눈 등의 속성이 공함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론자(敵論者) 자신의 지혜가 경미함을 드러내려 승론자(勝論者)가 “소리는 무상하니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 등처럼”이라고 말할 때, 힐난하여 “병 따위나 진흙덩어리로 만든 수레 등을 태우고 막대기를 격파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무상한 것이겠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아 무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 역시 법과 비유를 구별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상사(分別相似)의 오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눈 등의 속성이 공함을 믿어야 한다. 속성이 공한 것은 연하여 발생하는 원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형상이 현현하면 곧 자성이 있듯이, 앞에서 이미 논파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말은 자기주장의 오류를 회피할 수 없다.
017_0654_a_01L수론(數論)논사가 다음과 같은 힐난을 한다. “우리들은 ‘사대(四大) 등이 전변(轉變) 화합하여 현현하는 속성이 된다’는 주장을 세우고,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기에 불성(不成)의 오류가 생긴다. 일체에는 다 일체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고, 모든 근은 모든 곳에 편재하기 때문이니, 저 허깨비 장부 속에도 이 실체가 있다. 이 속성이 공함을 주장하면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다.”
여기서 또한 ‘색을 깨달음’에 의하여 이른바 모든 색의 깨달음이 연에서 현현하는 것이 아님을 관한다. 저 다른 연을 따라 변이(變異)하기 때문이다. 진흙덩어리ㆍ수레바퀴ㆍ도공ㆍ마음의 욕락 등의 차별된 뭇 연에 따라 크고 작은 물항아리가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눈 등의 뭇 연의 차별은 색을 앎에 따라 다양하게 변이하고, 눈의 시력[明昧]에 따라 깨달음의 예리함과 둔함이 있기 때문이며, 푸른 색 등에 따라 경계의 차별이 있고 깨달음은 푸른 색 등과 비슷하나 다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 현현된 사물이 현재 보이나 저 연의 차별에 따라 전변하지는 않는다. 마치 빛ㆍ등불ㆍ약ㆍ구슬ㆍ해 등이나 현현하는 다양한 팔찌 등의 사물처럼, 색에 관한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 색에 관한 깨달음을 관하는 것처럼, 눈 등도 또한 그렇다. 이 뜻은 실제 세간 모두가 요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한 이유에는 불성의 오류가 없다.
또한 그대의 ‘일체에는 다 일체의 실체가 있다’는 말은 현현하는 사물에 의탁한 것인가? 은폐하는 일에 의탁한 것인가? 만약 현현하는 일에 의탁하여 일체의 실제가 있다는 집착을 한다면 병이 있는 곳에 병이 현현하는 일이 있듯이, 물동이 등이 있는 곳에도 마땅히 편재해야 한다. 이 병이 현현하는 일에는 편재하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병이 곧 헤아릴 수 없는 백천 유선나(踰膳那) 동안에 편만해야 한다. 병 등이 있는 곳에도 또한 함께 있어야 한다. 물항아리의 현사는 병의 현사가 아니다. 은은히 비취지기[隱映] 때문에 물항아리 등의 현사 또한 비춰지는 것이다. 형태와 양이 크기 때문이다. 형태와 양이 크다면 마땅히 큰 형태와 양으로 비춰져야 한다. 병 등이 현현하는 일에 물항아리 등이 현사가 비춰지기 때문에, 일체 장소와 시간은 성립할 수 없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주장이 그 현사에 의탁하여 일체에 다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하면 도리가 아니다.
017_0654_b_01L 만약 은은히 비춰지는 작용[隱用]에 의탁하여 일체에 실체가 있다는 집착을 한다면 이러한 집착은 자세히 관찰해야 바야흐로 실체와 비실체를 알 수 있으나 문장이 번쇄하면 아마 오류를 자세히 관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주장은 허깨비 장부가 드러나는 곳에서는 실제의 장부의 현현이 공하다는 것을 용인하므로, 내가 세운 비유에는 불성(不成)의 오류가 없다. 이 까닭으로 속성이 공하다는 주장의 뜻은 성립한다.
그대 수론사(數論師)는 오류[非處]를 남에게 돌린다. 또한 모든 근은 모든 곳에 편재하지 않는다. 원인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근(根)이 의지하는 곳과 같다. 이와 같이 능히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ㆍ깨달음은 발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여러 증인(證因)도 자세히 말해야 한다. 모든 근이 모든 곳에 편재함을 논파하기 때문이다. 허깨비 장부 속에는 모든 근의 실체가 없어, 세우려는 공도 없고 동법의 비유도 없다. 이 까닭으로 그대는 허망분별을 이룬다. 도깨비에게 흘려 이와 같은 계탁을 한 것이다.
상응론사(相應論師)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대는 ‘진성에서 유위는 공하다’는 주장을 하고,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만약 이 주장이 유위법은 뭇 연에서 발생하며, 자연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에 무성(無性)에서 발생하는 그것을 주장하여 공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상응론사의 주장이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로 인하여 공하여 그 실체는 없다.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공하여 이 실체는 있다.”
017_0654_c_01L 의타기성이 있는 곳에는 변계소집성이 본래 없다. ‘그것으로 인하여 공하다’면 곧 허망한 계탁으로서 그 자성은 없다. ‘이것에 인하여 공하다’면 곧 연하여 발생하는 일로서 이 자성은 존재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단멸이 된다. 무슨 사물에 대해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이 연하여 발생하는 일은 곧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이것에 의하여 색(色)ㆍ수(受)ㆍ상(想) 등의 자성을 차별하여 속성의 전변을 가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가법(假法)도 역시 없다. 다시 무견(無見)을 이루어 같이 말해서도 안 되고 함께 머물러서도 안 된다. 스스로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또한 다른 것도 떨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이 변계소집성의 공하고, 의타기자성이 존재한다면 정리(正理)에 계합하게 된다. 만약 이 뜻이 의타기성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주장을 하면 그대는 곧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고 다시 세존의 성스런 가르침을 비방하는 과실을 이루게 된다.”
여기 다른 승(乘) 및 여러 외도(外道)라도 인색함과 질투가 없는 사람에게 잘 말하기 위하여 자세히 쟁론을 일으키는데, 어찌 하물며 똑같이 일승(一乘)으로 나아가는 논사(論師)일 때랴. 논의할 때 적어도 이 일을 함께 결택하여 널리 진실의 감로에 들어가 이미 모두 분별하였기에 거듭 변론하지 않겠다. 상세한 문장을 두려하는 자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은 뭇 연에서 발생하며 자연히 있는 것은 아니기에 무성에서 발생하는 그것을 공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뜻이 눈 등의 유위는 의타기성의 원인에서 발생하지 않고 소멸이 항상 없는 눈 등의 자성은 궁극적으로 없기에 공이라 말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같은 부류인 승론학파나 승론학파의 주장에서도 모두 다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55_a_01L 그렇지만 눈 등의 작용이 없어 공하고, 자성은 공하기 때문에 마땅히 발생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공하다. 마땅히 ‘무(無)의 속성에서 발생하는 그것이 공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생기할 때 승의제에서 자성이 발생한다면 어째서 발생에 자성이 없는 것인가? 실제 발생이 없다면 이 실제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유식(唯識)이 실제의 속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자기주장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의타기성은 자연히 발생하여 속성이 공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는 말을 한다면 이미 세운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이미 의타기성은 뭇 연에서 발생함을 허락하여 실제로는 공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공이라 이름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미망된 상응론사의 뜻이 성립하겠는가?
또 마치 “그것들로 인하여 공하니, 그것은 실제로 없다. 이것에 의탁하기 때문에 공하며 이것은 실제로 있다고 하는 등과 같다. 만약 인연력에서 발생한 눈 등이 일체 세간에서 모두 실체로서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생각[覺慧]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자성이 현현하는 것 같으나, 승의제의 깨달음으로써 살펴 구하면, 마치 허깨비 장부와 같이 모두 실체의 속성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인하며 공하며 저것은 실체로서 없다’는 말은 치우친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버리기 위해 그것이 없다는 말을 하듯이, 또한 단멸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버리기 위해 이것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른바 인연의 힘에서 발생하는 눈 등은 세속제에 섭수되며 자성이 있다. 허공의 꽃처럼 모든 사물은 전혀 있지 않으며, 다만 진성에서 이것은 공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이것에 의탁하기 때문에 공하고 이것은 실제로 있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은 곧 천인사(天人師)가 여실(如實)하게 말한 것이다.
만약 이 주장에 대해 의타기자성이 있다는 말을 하면 잘 말한 것이다. 이러한 자성은 우리들도 용인하기 때문이고, 세간의 언설에 포함되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의 두 자량이 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가립하여 의지하는 것이기에 가법(假法) 역시 있다. 그렇지만 다시 ‘이것이 없다면 가법도 없어 다시 무견(無見)을 이루니, 말에 상응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017_0655_b_01L 또 만약 ‘의타기자성은 세속이기에 있다’는 말을 주장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 속성은 승의제에 있다’는 주장을 세우면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다. 속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집착을 부정했듯이, 무성(無性)이 또한 반드시 있다는 집착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의타기자성은 증익과 손멸을 한다’는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주장한 허깨비 등에 말과 무관한 실체로서의 속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면 동법의 비유가 없기에 주장의 내용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 ‘말과 무관한 실체로서의 속성이란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류는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외도들이 언어의 실상을 떠났다는 집착을 할 때, 자아 등을 무엇으로써 부정하겠는가? 그들도 또한 ‘실성이 있다. 자아 등에는 지혜와 말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만약 뭇 연의 힘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의타기자성이 승의제에서 자성이 있다면 허깨비 사대부는 실체로서 사대부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 타성(他性)이 있어도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소에 당나귀의 속성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작용과 비작용의 속성, 실체의 유무(有無), 속성의 유무 둘 모두에 포함된다면 이와 같이 세우는 주장에는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고 또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두 오류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치가 아닌 것이다.
또한 연하며 발생하는 일체 유위법의 속성이 승의제에서 있음을 용인한다면 ‘작용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그 속성의 공함을 증명하고 그 속성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세우는 주장이 비량(比量)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일체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모두 다 알게 된다. 세속의 존재의 속성이 승의제에 반드시 있다는 집착을 하면 이 이치로써 저 주장을 부정해야 한다. 또 그것이 논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승의제에서 두 가지로 분별하면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017_0655_c_01L또 ‘주장의 내용에는 주장의 목적의 속성이 있지 않듯이, 주장의 목적에는 주장의 내용의 속성이 있지 않다’는 말처럼, 적론자(敵論者)는 여기에 대해 의심이 없기에,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오류라며 부정한다. 또한 ‘의타기자성이 있는 곳에 변계소집자성은 본디 없다’는 말처럼, 이 또한 다른 논에서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에, 이미 세운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라며 부정한다.
만약 ‘주장의 내응과 그 목적으로서의 변계소집자성에 집착하여 힘이 온갖 번뇌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부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금수들은 주장의 내용과 그 목적이 상응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경계에 대해 이치대로 이해하지 않고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요(意樂)가 있고, 또한 여러 가지의 미묘한 성인의 말이 있어, 변계소집자성이 공하다는 가르침은 일체에 전혀 편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만이 이것을 공이라 주장한다. 다만 부수적인 논의를 그치고 마땅히 바른 논의를 변론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앞에서 도리대로 눈의 자성이 공함이 이미 다 성립하였다.
이 역시 옳지 않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범지여, 알아야 한다. 일체의 실체ㆍ비실체란 말은, 나는 모두 실체가 아니고 허망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017_0655_c_15L此亦不然。如世尊說:“梵志當知!一切所說實非實言,我皆說爲非實非妄。”
성스런 가르침 및 이미 설한 것으로써 장차 도리를 말할 수 있지만 승의제에서는 실체 및 비실체를 다 세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없다. 또 그대의 생각처럼, 설한 도리에 주장의 대상이 없기에 능리 부정의 주체도 없다. 부정의 주체는 없지 않아 부정의 대상도 있다. 다만 부정의 대상인 본성은 없기에 부정의 주체도 또한 없다. 부정의 주체만이 부정의 대강이 본시 무자성임을 알 수 있지만 부정의 대상을 파괴할 수는 없다.
017_0656_a_01L 또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살은 공으로써 일체법을 공이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일체법의 본성은 자체가 공하다”라고 자세히 설해진다. 또한 비춤의 주체가 비춤의 대상을 조명할 때, 마땅히 말하여 ‘병ㆍ옷 등의 사물의 비춰지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비춤의 주체도 역시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또한 ‘비춰지는 사물의 속성은 본디 없지만 지금은 있다’는 말을 마땅히 해서는 안 된다.
또 내가 세운 부정의 주체와 부정의 대상, 주장의 주체(能立)와 논파의 주체[能破], 전도와 전도되지 않은 것은 다 세속에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주장의 목적과 그 주체를 부정한다면 곧 자기주장에 위배되며, 이 부정의 주체는 마땅히 주장의 주체가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 속성은 실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소리처럼. 그대는 이미 주장의 주체인 비량이 있음을 허용한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다. 세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존재들은 번쇄한 문구를 두려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렵기에 자세한 쟁론은 그만두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비량은 장애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세우는 주장인 ‘진성에서 눈의 속성이 공하다’라는 도리는 성취된다. 또 세운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간략하게 명칭의 내용을 들어, 눈 등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그밖에 이유가 있다. 이른바 ‘괴멸하기 때문에’ ‘연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 능히 사도 및 정도의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에’라는 이들 이유로 인하여 그 상응하는 바대로 대치되는 것을 마땅히 바르게 부정해야 한다.
또 마땅히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그 진성에서 5온(蘊) 및 18계(界)가 성립한다. 연기(緣起)ㆍ염주(念住)ㆍ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바라밀다(波羅蜜多)ㆍ여러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ㆍ여러 무애해(無礙解)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ㆍ불공법(不共法) 등과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다 자성이 공하다. 관행(觀行)을 닦는 자도 마땅히 이와 같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 여러 외도들의 변계소집인 대(大)ㆍ아집(我執)ㆍ유(唯)ㆍ양(量)ㆍ근(根)ㆍ대(大)ㆍ실(實)ㆍ덕(德)ㆍ업(業) 등의 유위의 구절은 모두 다 12처(處) 중에 포함되니, 즉 그것은 명상이 있기 때문이다. 관행을 닦는 자는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이 사택력(思擇力)에 의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 증득하면 수습력(修習力)은 없어진다. 비유하면 뭇 새의 날개가 처음 생겼을 때는 아직 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다시 꾸준히 정진하여 수습력을 익힌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어둠을 제거하는 약을 복용하여 눈이 맑아져 거친 사대로 형성된 털ㆍ모기ㆍ파리 등이 없는 밝은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017_0656_c_01L일체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하는 자 및 받는 자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보시하는 자와 받는 자 및 보시의 결과에 취착하지 않기에, 두 종류의 삼륜(三輪) 모두 다 청정함을 얻는다. 이에 바르게 잘 정근하여 수많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섭수하여 둘 양쪽에 메고 현재나 현재가 아닌 과보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의 일과 현재가 아닌 시기의 과보에 관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의 일이나 미래의 과보에 친근공양하며 덕이 많은 천신을 좋아한다. 덕을 짓는 자가 되고 자아를 짓는 자가 되고 자재천(自在天)과 극미의 속성 등을 항상 닦는다는 집착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미 말하였기에 지금 다른 이치를 말하여 일체 유위와 무위의 논파의 대상과 그 주체인 법의 성이 공함을 증득시킨다.
017_0656_c_04L如是等事,皆由已說、當說正理,證得一切有爲無爲、所破能破法性空故。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땅히 모든 일에 안주하여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되며, 모두 안주하는 것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자세히 말씀하셨다. 또 세존께서는 “만약 보살들이 유정의 상(想)을 바꾼다면 마땅히 진실한 보살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세존께서는 “조금이라도 법이 있지 않아야 보살승(菩薩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여러 보살들은 오히려 반열반을 희구하지 않고 꾸준히 범행을 닦는데 하물며 삼계(三界)의 생사를 끊는 것이랴. 이와 같이 일체 유위의 속성이 공함을 닦는 수행을 바르게 관했지만 다시 한 번 바르게 관해야 한다. 만약 자성이 공하다면 곧 출생이 있지 않다. 또한 출생이 있지 않다면 곧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고 그 삼계에 대해 장애가 있지 않다. 삼세(三世)가 모두 청정한 모습임을 바르게 관한다.
앞에서 말한 전도 없는 이치에 의탁하여 삼륜청정(三輪淸淨)하면 대보리(大菩提)로 나아간다. 물음과 같다. “만수실리여, 어떻게 보살은 대보리로 나아갑니까?” 답한다. “범지(梵志)여, 마땅히 보리와 같아야 한다.” 다시 묻는다. “무엇을 보리라고 합니까?” 답한다. “범지여, 이것은 과거도 아니요, 또한 미래 및 현재도 아니다. 이 까닭으로 보살은 마땅히 모든 삼세의 청정한 모습을 바르게 관하여 삼륜청정에 의해 대보리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