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제1품의 품명은 빠져 있음] 지금 대승의 뜻을 풀이해 들어가고자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대승의 뜻을 말하려고 하는가? 【답】내가 중생들의 고통의 원인[苦因]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니, 지금 그대는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악지식을 가까이하여 악에 의해 잘못 이끌리게 되면 치우치게 자기 자신의 법에 집착하거나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니 뒤바뀐 생각을 하므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으며,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한다.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하는 사람은 정법(正法)을 무너뜨리며, 정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큰 죄의 과보를 받게 되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법을 비방한 죄는 오역죄(五逆罪)보다 중하여 악도(惡道)가 길고도 멀며 오랜 동안 고통의 과보를 받는다.”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승법을 비방하면 결정코 악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나니 이 사람이 업보를 받는 것이라고 여실한 지혜 갖춘 이께서 말씀하셨네.
017_0664_b_12L誹謗大乘法, 決定趣惡道, 此人受業報, 實智之所說。
지옥 가운데 떨어지는 몸을 받아 태어나면 큰 불길이 치성하게 몸을 불태운다. 불에 타는 그 고통 극심하니, 그 업보의 죄가 과연 이와 같구나.
017_0664_b_14L生墮地獄中, 大火熾然身, 焚燒甚苦痛, 業報罪信爾。
불에 단 커다란 무쇠쟁기가 오백 세를 가득 채우는 동안 그 혓바닥 위를 쟁기질하며 두루 그 몸을 부수어 고뇌케 하네.
017_0664_b_15L熾然大鐵犂, 具滿五百數, 而耕其舌上, 遍碎身苦惱。
만약에 지옥으로부터 벗어난다 해도 다시 다른 악한 과보를 받으니 여러 감각기관이 결핍되거나 이상이 있어서 영원히 법음(法音)을 듣지 못하네.
017_0664_b_16L若從地獄出, 復受餘惡報, 諸根常缺漏, 永不聞法音。
설령 그것을 듣는다 하더라도 다시 법을 비방하는 곳에 태어나 법을 비방한 인연으로 다시 지옥에 떨어지네.
017_0664_b_18L設使得聞者, 復生於謗法, 以謗法因緣, 還墮於地獄。
법을 비방하는 중생은 이와 같은 말을 듣고서 대승 가운데서 의심을 내나니, 존자 제바(提婆)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64_b_19L謗法衆生聞如是說,於大乘中便生 疑心,如尊者提婆所說偈:
박복한 사람은 의심을 내지 않으나 의심을 내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존재의 세계[諸有]를 부수네.
017_0664_b_21L薄福之人, 不生於疑, 能生疑者, 必破諸有。
017_0664_c_01L
의구심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마땅히 법을 들으라. 듣고 나면 그 의미를 풀이하여 깨달음의 문을 열 수 있다. 깨달음의 문을 연 다음에는 신심을 내고 신심을 낸 다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낸다. 기쁨과 즐거움을 낸 다음에는 이와 같은 순서대로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일을 하며 나아가 완전히 갖추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다. 대승을 비방한 원인으로 악도에 떨어졌더라도 대승을 말미암으면 모든 신업을 일으킬 수 있으니,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땅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또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보리도에 나아가고, 또한 중생과 더불어 함께 화합된 세계를 이룬다. 만약에 중생을 떠난다면 보리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중생계로부터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보리가 출생하는 것이다. 존자 용수(龍樹)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65_a_01L“족성자여, 장(藏)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성문장(聲聞藏)ㆍ벽지불장(辟支佛藏)ㆍ보살장(菩薩藏)을 말한다. 족성자야, 성문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고, 또한 벽지불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보살이 대승을 배우는 까닭에 삼장이란 명칭을 얻는다. 왜냐하면 무릇 설법자가 삼승을 구족해야만 삼장이라 이름하니, 보살은 법을 설하여 삼승(三乘)을 구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삼장이라 한다’고 설한다.
족성자여, 세 가지 종류의 학인(學人)이 있으니 성문학ㆍ벽지불학ㆍ보살학이다. 성문승자는 벽지불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벽지불승자는 보살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족성자여, 오직 모든 보살만이 비록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수학하더라도 성문도(聲聞道)나 벽지불도(辟支佛道)를 취(取)하여 증득하지 않고, 보살승을 수학하여 보살이 행하는 법을 깊이 깨달아 알아서 항상 즐거이 수순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승자를 삼장이라 하며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의 경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경 가운데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만 간략히 설명할 따름이다.
그대가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은 삼장이라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단지 『증일아함』ㆍ『중아함』ㆍ『장아함』ㆍ『잡아함』의 백천(百千) 등의 게(偈)를 일장(一藏)으로 여기고 비니(毘尼)ㆍ아비담의 이백천(二百千)의 게를 이장(二藏)이라 여기며, 이들을 완전히 갖추어 닦아 익히는 것을 삼장(三藏)이라 여긴다.
017_0665_b_01L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삼장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머지 모든 경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러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함ㆍ비니ㆍ아비담 등이 또한 삼장이라면 『잡장(雜藏)』ㆍ『사두라경(舍頭羅經)』ㆍ『태경(胎經)』ㆍ『간왕본생(諫王本生)』ㆍ『벽지불인연(辟支佛因緣)』 등 이와 같은 팔만사천법장이나 존자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받아 지닌 이와 같은 일체의 경전들이 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만약에 이러한 과실을 없게 하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해진 것이 모두 장(藏)이라면 이는 곧 백천여 가지의 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규정한 삼장이라는 말은 저절로 무너진다. 또한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20년 후에 바야흐로 승중(僧衆)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매우 늙어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법을 공급하여 전해야 하는데 어느 누가 내가 법을 공급하면 그것을 섬길 수 있는지 마땅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 말해 보아라.”
그때 대중들 거의 모두가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난은 곧 함께 범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여래에게는 팔만사천의 법무더기가 있어서 제가 지금 다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나, 이전의 20년 동안에는 두 사람의 비구만이 받아 지닐 수 있었으니,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을 다문(多聞)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께 법을 설하시는 동안에도 아난은 실제로 법을 받아 지니는 일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아함』에서는 제석환인이 울다라(鬱多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자시여, 내가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염부제의 일체 중생을 관찰해보니 어느 누구도 불법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017_0665_c_01L이러한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이 일체의 불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문 제자나 아난은 불법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대승경에서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정월장천자(淨月藏天子)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은 양이 적어 ‘받아 지닌 것이 한량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말하지 못하였다. 아난은 내가 설한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지니지 못한다. 선남자여,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시방세계의 범석(梵釋)ㆍ사천왕ㆍ천룡ㆍ야차ㆍ건달바와 그리고 모든 보살이 다 모여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지혜를 밝히는 수다라의 게송ㆍ장구와 중생이 행해야 하는 모든 바라밀을 설하였고, 성문ㆍ벽지불승을 설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찬탄하였으며, 모든 바라밀을 만족하게 하였고, 나아가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법을 펴기를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하였다.
설령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큼의 미진수와 같은 다문(多聞)의 지혜가 모두 아난과 같더라도 저 하루의 낮과 밤에 비하면 백천억분의 일만큼도 갖출 수 없으며, 나아가 다시 시방의 미진수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의 다문이 모두 아난과 같다 하더라도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한 법을 받아 지닐 수 없음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곳곳의 경전 가운데서 또한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감당하여 맡을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아난이 일체의 부처님 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7_0665_c_07L處處經中亦說,阿 難不任法器。以是義故,當知阿難不 能盡持一切佛法。
【문】 여래ㆍ세존께서는 아난에게 다문 가운데 제일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부처님께서 성문 대중들 가운데서 짐짓 아난을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보살이라고 일컫지는 않으셨다. 또한 그대들은 아난이 지닌 것도 다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대승이 갖추고 있는 깊은 뜻에 있어서랴. 그대의 생각이 만약 성문승을 보살승이라고 여긴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문승의 인(因)이 대승의 인과 다르지 않다면 과도 응당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과(果)가 다르기 때문에 인(因) 역시 다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단지 번뇌의 장애만을 끊고 무상행(無常行)을 관(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들어야 하지만, 보살은 미세한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고 나아가 일체법이 결국은 공(空)임을 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연지(自然智)ㆍ무사지(舞師智)를 얻어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성문승은 대승과 같을 수 없다.
017_0666_a_01L【문】 부처님께서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성문이 해탈할 때에는 자못 수미산 등으로 하여금 다 도량을 향하게 하고 그것들이 몸을 굽히도록 하거나, 광명이 시방세계의 80유순에 걸쳐 두루 비추어 일체의 악마들이 다 와서 항복하게 할 수 없으나, 보살이 해탈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전에서 비록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대소(大小)에는 실제로 차이가 있다‘고 하셨다. 비유하자면 충치나 겨자씨의 구멍이 비록 구멍[空]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시방세계 가운데의 공간[空]과는 동일하지가 않은 것처럼, 비록 빈 공간[空]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 예를 들면 반딧불을 태양이나 달빛에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고 또한 모기를 금시조와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사류지(娑留枝)비구가 부처님의 본행(本行)에 대해서 게송으로 설한 것과 같다.
일제의 모든 광명 가운데 등불이나 번갯불 별빛 그리고 달빛의 비춤에는 차이가 있으니 그 가운데 태양빛이 가장 으뜸이고
017_0666_a_08L一切諸光明, 燈焰與掣電, 星月照差別, 日光最第一。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짐승 가운데 모기나 날개미나 벌, 뭇 새들이 나는 것에는 가기 차이가 있으니 금시조가 가장 으뜸이어서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네.
017_0666_a_10L飛行諸禽獸, 蚊蟻及與蜂, 衆鳥飛各異, 金翅最不同。
이러하기 때문에 비록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인(因)에 이미 차이가 있다면 어찌 그 과(果)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와 같이 관찰하면 해탈이 똑같지는 않다. 성문해탈을 애진(愛盡)해탈이라 하나니, 이는 일체의 해탈은 아니다. 단지 둔한 근기를 지닌 지혜가 적은 중생을 위하여 짐짓 가명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대승의 해탈은 번뇌의 습기를 끊어 일체를 모두 다하는 것[盡]으로 근기가 뛰어난 보살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였다. 가령 그대가 지금 성문해탈이 곧 대승해탈이라고 한다면, ‘여래는 곧 일체종지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몸이 조금 편찮으시자 목련을 파견하여 기국(耆毱)이 있는 처소를 찾아가 어떤 약이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하셨다. 이때 기국이 이미 세상을 뜬 지 7일이 지나 도리천에 태어났기에 목련은 그 하늘의 처소에 찾아갔다. 그때 기국이 후원으로 들어오자, 목련이 곧 물었다. “여래께서 환후가 있으신데 어떤 약이 필요합니까?”
이에 답하였다. “우유를 발효시킨 소(酥)가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하온데 여래의 몸은 마치 금강과 같아서 모든 악이 이미 멸하였을 텐데 어찌 병환이 있을 수 있습니까?”
017_0666_a_23L答曰:用酥。如 來身者猶如金剛,諸惡已滅豈有疾 乎而問耆鞠?
017_0666_b_01L그러자 기국에게 답하였다. “예를 들면 바구라(婆拘羅)비구는 90겁 전에 같이 범행을 닦고 있었던 사람에게 하나의 약 열매를 보시한 공덕으로 몸에는 항상 병이 없었고 최후의 몸을 받아 사는 동안에는 그 나이가 80에 이르렀으나 처음부터 조금도 질병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아리륵과(訶梨勒果)를 조금 보시한 인연으로도 질병을 얻지 않았거늘 하물며 여래께서 억백천만아승기겁 동안에 단바라밀(檀波羅蜜)을 구족하고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며 나아가 몸과 수족을 잘라 골수ㆍ뇌ㆍ피ㆍ살을 병든 이에게 보시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어찌 병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경에서 설하는 대로라면 여래는 일체지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여래께서는 또한 어느 때 성으로 들어가 걸식한 후 발우를 비우고 돌아와 제바달다를 제도하여 출가시키셨다. 『고수경(枯樹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큰 불덩어리를 보고 그때 여러 비구들 가운데 퇴전하는 마음을 낸 자가 있자, 여래께서는 말을 부리는 만숙(滿宿)을 제도하기 위하여 바라문 탈뢰자(奪賴闍)ㆍ살차니건(薩遮尼乾)ㆍ손타리(孫陀利) 등을 꾸짖고 90일 동안 말보리죽을 드셨으며 목련ㆍ사리불도 질그릇 굽는 방에 들어가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만약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여래는 이미 일체의 모든 악을 다하였고 일체의 한량없는 공덕을 가득 구족하셨으니, 다른 악업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커다란 과실이다.” 그대는 일찍이 여러 경 가운데서 여래께서는 일제의 번뇌 업과 번뇌 습기를 영원히 끊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예컨대 마타차리(摩陀遮離)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일체의 번뇌 습기가 다하여 오로지 세상을 구원하실 분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어 지니시고 공덕을 모두 원만하게 이루셨네.
017_0666_b_21L一切結習盡, 唯有救世者, 一切智所有, 功德悉成滿。
017_0666_c_01L 세 가지의 습기가 있으니, 이른바 업습(業習)ㆍ번뇌습(煩惱習)ㆍ위의습(威儀習)이다. 이 세 가지 습기를 여래께서는 영원히 다하였다. 이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큰 과실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에 이것을 방편이라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은 먼저 부처님 몸이 실재한다고 말했지 방편이라거나 응화(應化)라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몸[佛身]은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다시 방편과 응화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어떤 경전으로부터 방편과 응화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경 가운데서는, ‘오로지 후변신(後邊身)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응화신이나 방편신과는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십주경(十住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니,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방편신이나 응화신과는 같지 않았다.
따라서 대승경 가운데서 ‘부처님은 일체지이시다’라고 설하는 것에는 과실이 없다. 그대가 소승 가운데서 일체지를 말한다면 이에는 커다란 과실이 있으며, 만약에 ‘성문승이 곧 대승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대승은 성은승과는 차이가 있으니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생각하기를 만약에 ‘성문승 가운데서 대승을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성문승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고 대선(大仙)의 승(乘)은 삼보(三寶)의 종성(種性)을 계승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비유리보(毘琉璃寶)는 끝내 수정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 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017_0667_a_01L따라서 대승은 미묘하고 지극히 깊으며, 그 마음이 광대한 보살마하살이 차례대로 수학하여 초지(初地)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 제십지(第十地)에 이르도록 일체의 공덕과 지혜의 업을 완전히 갖춘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마하연승(摩訶衍乘)이라 하셨다. 만약에 성문승이 마하연승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십지를 수학하면 일체의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갖추어 삼승(三乘)의 선법(善法)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십지경』에서 금강장(金剛藏)보살이 해탈월(解脫月)보살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문자ㆍ장구는 자본(字本)이 그 근원이니, 모든 문자는 다 자본으로부터 출현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법(佛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地)를 그 근원으로 삼습니다.”또한 지(地)로부터 구경(究竟)을 얻으면 자연지(自然智)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대승을 지극히 깊다고 하며, 이는 일체 성문의 공덕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소승이 대승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십지는 마치 금덩어리를 가득 모아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 같으니,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래께서는 자비력으로 둔한 근기를 지닌 이들을 위하여 성문승을 설하셨으니, 그대는 이를 믿고 받아들여 스스로 편집되게 소승법을 받아 행하면서 대승의 평등한 바른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승이란 가장 길상하고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 세존께서 지난날에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한 후에 다가올 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쟁론을 일으켜, 이것은 불설(佛說)이니 이것은 비불설(非佛說)이니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법인(法印)으로 그것을 인증(印證)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약 그 뜻이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가고 비니(毘尼)를 수순하며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으면 이를 불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답】부처님께서 또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성문승은 이것을 내가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며 나아가 보살의 대승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름이 없고[不異] 평등한 하나의 양상[一相]이기 때문에 법인에 의해 인증할 수 있다. 그대가 말한 ‘들어간다[入]’는 것은 이 뜻이 수다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니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는 말인데, 만약에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면 이러한 처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이부경(十二部經)은 일체 문장이나 게(偈) 그리고 장구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로써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응당 알아야 한다.
017_0667_b_01L만약 뜻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그 뜻이 수다라의 뜻을 수순하여 법상(法相)과 상응하면 그 뜻이 드러난다. 따라서 수다라를 수순한다고 한다.
만약 성문법을 드러내 보이면 성문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벽지불법을 드러내 보이면 벽지불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보살법을 드러내 보이면 보살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내가 십지의 공덕을 드러내 보이고 보살행을 밝히면 이를 ‘진정으로 대승에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단지 그대의 생각은 편벽되고 독선적으로 소승의 삼장(三藏)에 들어가는 것만을 말한다. 대승의 삼장 가운데서 내가 이미 대승에 들어가는 것을 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삼장이란 곧 대승이다.
비불략이란 마하연이다. 왜냐하면 비불략의 경전에서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닦아 대치하는 법을 설하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한다. 또한 수많은 승(乘)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많은 장엄을 갖추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한량없는 커다란 과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칭량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일체의 모든 잘못된 견해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한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나의 성문법 가운데는 수다라와 게송의 장구를 널리 자세하게 설하고 있으므로 또한 비불략이다’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생각할 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함경』을 의지하여 비불략이라고 말하지만 단지 언어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언어뿐이라면 이는 믿을 수 없다.
017_0667_c_01L만약에 『아함경』 가운데 반드시 이러한 뜻이 있다면 어떤 곳의 장구가 성문을 위한 말씀인가? 이 비불략은 결정적인 문자ㆍ장구가 없다. 따라서 비불략이란 대승을 드러내는 것이지 성문 소승의 언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대의 성문 경전의 일부에서는 끝내 백천게(百千偈)의 찬탄 문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억만(億萬)의 광대한 찬탄언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여래ㆍ세존께서 모든 성문을 가르친 것은 오로지 무상(無常)을 현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생사를 싫어하게 하여 고통의 근본을 알게 함으로써 속히 열반을 구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하였고, 나아가 문구를 봉행하는 맛도 보잘 것 없어서 지극히 깊고 광대한 뜻이 없다. 대승 경전에서는 보살이 행해야 할 일이 지극히 깊고 광대하니, 예를 들면 『대유경(大喩經)』ㆍ『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ㆍ『해탈경(解脫經)』ㆍ『화수경(華首經)』 등 이와 같은 것들은 다 마하연이므로 모두 다 비불략이라 한다.
017_0668_a_01L해당비구는 보안법문의 장구를 받아들여 차례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설하였으며, 선재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일찰나 경에 보안법문을 받아 지녀 대해의 물을 다 사용하도록 먹을 갈아 거대한 종이 위에 쌓기를 마치 수미산처럼 하였다. 천하의 초목을 잡아 붓으로 삼고 삼천세계의 중생을 다 화가로 삼아 일찰나 경에 법문을 받도록 한다.” 백천분 가운데 그 일부분도 다 묘사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루 낮과 밤이나 나아가 12년 동안에 받아들인 지극히 깊고 한량없고 가없는 대분(大分)의 요의(要義)인 경우이겠는가?
선재동자가 한 선지식의 처소로부터 법을 들음이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없어 억천수(億千數)를 넘어서는데, 하물며 미진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 자문을 구하고 선지식으로부터 받아들인 교법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러한 인연으로 대승을 구족하니, 비불략은 한량없고 가없는 것이지 성문은 아니다. 이 뜻은 지극히 깊다. 따라서 일체의 성문이 수행하는 법이 다 마하연의 도(道)에 들어가면 가장 길상하게 된다. 이를 수다라의 뜻에 수순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는 다시 비니(毘尼)에 수순하는 것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삼승의 성도(聖道)가 모두 한결같이 탐욕과 진에와 우치(愚癡)를 끊는 것을 비니라 한다. 수다라는 인과를 분별하는 것이고, 아비담은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것이며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다. 마하연 역시 탐욕과 진에와 우치 및 번뇌 등 일체의 악법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성문에게 자신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하라고 가르치신 것을 비니라고 한다. 보살들에게는 그들의 삼업을 깨끗하게 하고 나아가 성불에 이르게 하며, 아울러 중생을 만족시키는 일체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을 가르치신다. 보살이 지니는 이 자성계(自性戒)는 보리심을 일으켜 진실한 과(果)를 얻는다. 그러므로 마하연이란 ‘비니를 수순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017_0668_b_01L‘법상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란 삼승의 경전에서는 십이인연을 위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승 역시 십이인연을 위배하지 않으므로 잘 관찰하면 대승이 곧 삼법인임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잘 관찰하지 못하면 대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승을 갖출 수도 없다. 만약에 마하연을 비방하면 이것은 큰 허물이 있는 죄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 이것이 악마가 말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모든 경전 속에는 진실로 이런 말이 없다고 하거나 만약에 단지 입으로만 대승을 말하면, 이는 악마의 말이니 끝내 믿을 수 없다. 만약에 그대가 이런 것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마치 사자의 몸속에 벌레가 생겨나 다시 사자를 잘아먹는 것과 같다. 삼승이 모두 다 그러하며 대승만 유독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마하연이란 악마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오로지 부처님만이 설하실 수 있는 것이다.
【문】 당신에게는 악마의 말이 아닌 것이 나에게는 악마의 말이 될 수 있는가? 【답】나와 그대 모두에게 악마의 말이 아니다.
017_0668_b_05L問曰: 汝非魔說,我是魔乎?答曰:我與汝等 俱非魔耶。
【문】 만약에 나와 당신에게 모두 악마의 말이 아니라면, 악마의 말이라는 이것이 부정되지 않겠는가? 【답】나의 대승법은 뛰어나고 중생과 더불어 법상에 수순하기 때문에 악마가 행하는 많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대승 가운데서 악마를 막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대의 소승법은 오로지 자신만을 제도하는 것이므로 악마가 교란하여 고뇌케 하지 않는데, 어찌 막는 일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일에 대해서는 여래께서 옛날에 『법화경』이나 『반야경』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당래세(當來世: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질투를 즐겨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비방으로써 악취(惡趣: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그대가 외워 익힌 어떤 부류의 경전에서, ‘마하연은 악마가 설한 말이다’라고 하였으나, 만약에 그대의 경전에서 ‘마하연은 악마가 설한 말이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악마의 말을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믿을 수 없다.
017_0668_c_01L그대가 만약에 성문법 중에도 또한 막고 끊는 것이 있으나 다만 그런 일이 이미 오래되어 멸하여 증거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가령 막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수호하는 것’이라면, 이 법은 겁이라는 세월이 경과하여도 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대가 말한 ‘오래되었다’는 말은 단지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설령 번뇌의 장애를 없앨 수 있고 정법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비록 악마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곧 정법으로써 부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대로라면 법에 의지하는 것이지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바른 이치를 좇는 것이지 명자(名字)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지장(智障:所知障)과 번뇌장을 멸한 자인데, 이 분이 곧 세존이다.
만약에 진실로 악마라면 끝내 보살법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마는 보살이 선정으로부터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지혜를 나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탐욕이나 악 등의 선하지 못한 법을 염리(厭離)하지 못한다. 이 대승의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으니, 초지로부터 나아가 제십지에 이르기까지의 이와 같은 차례와 사선(四禪)ㆍ사무량심(四無量心)ㆍ사무색정(四無色定)ㆍ멸수상정(滅受想定)ㆍ보리심ㆍ모든 바라밀ㆍ상황에 잘 맞는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시켜 섭수하는 법ㆍ십선도(十善道)ㆍ계(戒)ㆍ문지혜(聞智慧)ㆍ불방일ㆍ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떠남ㆍ팔성도(八聖道)ㆍ전법륜(轉法輪)ㆍ두타가 구족하는 공덕을 견고하게 지님ㆍ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적멸(寂滅)ㆍ십이인연ㆍ모든 선(禪)에 들고 남[出入]ㆍ삼해탈문ㆍ모든 다라니ㆍ삼십칠품조도법ㆍ모든 신통문ㆍ실제(實諦)ㆍ사변(四辯:사무애해)ㆍ선(禪)과 지(智)라는 두 바퀴 등으로 스스로를 장엄하고 다 화합하여 모든 법에서 노닐되, 생사나 열반 가운데서 생사를 배반하지도 않고 또한 열반에 취향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이 항상 악을 싫어하고 모든 지(地)를 정관(正觀)하며, 모든 지에서 벗어나 성문ㆍ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청정한 불국토가 수순하는 법인(法忍)은 무생법인3) 불퇴전지는 정위지(正位地)의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나 상호(相好), 법신 등을 받는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생사에 머물러[住] 구르는 것[轉]을 수순할 때는 결정적으로 따라 구르고 구르지 않는 것을 수순할 때는 결정적으로 구르지 않는다.
017_0669_a_01L이와 같은 인과(因果)의 차제법과 불공법과 비각법(非覺法)은 악마가 설할 수가 없으니, 악마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악마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만약에 악마가 음(陰)에 대해 ‘나는 끝내 부처님께는 오음(五陰)의 몸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거나, 또한 다시 만약에 이것이 진실로 악마의 말이라면 이와 같은 말은 미륵보살도 역시 응당 막아 그치게 할 것이다.
또한 존자 빈두로(賓頭盧), 존자 라후라 등 16인의 모든 대성문(大聲聞)들은 여러 저(渚)에 흩어져 있으며 다른 경전 가운데서는 99억 대아라한이 모두 부처님 앞에서 법을 취하여 헤아리고 수호하여 그 세계에 수명이 다하도록 머물러 동방의 불바제저(弗婆提渚)ㆍ맥저(麥渚)ㆍ속저(粟渚)ㆍ사자저(師子渚)ㆍ염부저ㆍ대염부저ㆍ발제리가처(跋提梨伽處)ㆍ계빈(罽賓) 내지 아뇩대지(阿耨大池)에는 모든 현성(賢聖) 등이 다 머물러 불법을 수호한다. 만약 마하연이 악마가 설한 것이라면 이는 불법의 큰 병폐일 것이며, 모든 현성들이 막아서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악마의 말이라는 것은 다 망어(妄語)이며 공연히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또 대보살과 모든 현성 등이 다 대승을 수호하니, 이 마하연은 삼보의 종성(種姓)을 계승하여 단절되지 않도록 한다.
【문】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만약에 마하연이 삼보의 종성이라면 모두 보살과 성문을 옹호하여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는 어찌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자를 막아 저지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악도로 취향해 가지 않도록 하고, 불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답】업보는 결코 끊어 없앨 수 없다. 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적으로 증장하는 것이요, 둘째는 결정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보살이나 성문 현성이 멸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니 구제받거나 그치게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구가리(瞿迦離)는 『마하연경(摩訶衍經)』이 악마가 설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는데, 이 비구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구할 자가 없을 것이다.
017_0669_b_01L【문】 당신은 마하연을 비방하면 악도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 또만 거친 말[麤言]이어서 나는 아직 믿을 수 없다. 【답】그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마하연을 악마가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또한 일체 중생이 커다란 적이 되며, 말한 것이 지극히 거칠고 모질어 응당 악구(惡口)의 선하지 못한 대가로 중한 과보를 받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를 설하셨다.
인간은 세간에서 살아가는 동안 마치 도끼를 입 속에 지니고 있는 것과 갈아 스스로 그 자신의 몸을 베어 해치니 이는 모두 악업으로 말미암는다.
017_0669_b_06L人生於世閒, 如斧在口中, 自斬害其身, 斯皆由惡業。
그대가 마하연도 이와 마찬가지로 거친 말이라고 비방하더라도 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다만 그대로 하여금 비방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병이 난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훌륭한 의사가 그 병을 진찰한 다음에는 음식을 금하거나 끊는 일에 관해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대를 가엾고 불쌍히 여겨 허망하게 꾸며낸 말로 ‘마하연은 악마가 한 말’이라고 한 것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미 마하연을 설하셨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응당 마하연을 설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지금 마하연을 설하신다. 이것을 ‘비방을 막아 끊는 마하연론’이라 한다. 보살은 대승을 비방하는 것을 끊는다.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데 있어 맨 먼저 「마하연론품」에 들어간다.
017_0669_c_01L【문】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대승을 비방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마하연행에 들어가는가? 【답】보살이 우선 종성(種性)을 갖추고 선행(善行)을 수순하면 깨달아 이해함이 광대해지고 내적인 마음이 광대해지며 계(界)의 영역이 광대해지고 종성이 광대해진다. 종성이 이미 구족되면 그 마음이 조화되어 부드럽고 점차적으로 번뇌를 여의며 탐진치가 적어지고 모든 선(善)을 닦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힘써 보살의 대승법을 외워 익힌다. 이와 같은 중생은 육근(六根)이 광대하여 커다란 원(願)을 발현할 수 있으므로 불도를 구하려고 한다. 그 종성의 양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하근하성(下根下性)은 도에 대해 뜻을 일으키는 것이 하(下)이고 원(願) 역시 하이다. 중근중성(中根中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중이고 원 역시 중이다. 상근상성(上根上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상이고 원 역시 상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 근성(根性)에 수순하시어 자애로운 마음으로 분별하여 가르치신다.
【문】 보살장(菩薩藏)이란 어떤 지(地)에 머무르는 것인가? 【답】열 가지 종류의 행(行)이 있으며 해탈지(解脫地)에 이른다. 보살장을 청문(聽聞)할 수 있을 때에는 열 가지 종류의 법행(法行)을 얻을 수 있고, 해탈행을 떠나 곧바로 보살의 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의 해탈행을 닦는 것이니, 많든 적든 다 닦아 익힌다. 둘째는 보살이 지니고 있는 법이 많든 적든 모두 베껴 쓰는 것이다. 셋째는 보살장의 법이 많든 적든 다 공양하는 것이다. 넷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펼쳐 읽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보살의 법이 말든 적든 다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일곱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익혀 외워 점차적으로 이로움에 통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분별하여 펼쳐 설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사육하여 그 의미를 잘 알아내는 것이다. 열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혼자 있는 처소에서 사유하고 닦아 지혜를 쌓아 늘리는 것이다. 이상을 보살의 십행(十行)이라 한다. 여덟 번째 것은 보살의 문혜(聞慧)라 하고, 아홉 번째 것은 보살의 사혜(思慧)라 하며, 열 번째 것은 보살의 수혜(修慧)라고 한다.
017_0670_a_01L【문】 보살이 이러한 문ㆍ사ㆍ수를 이미 얻었다면 어떤 행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답】이미 지(地)를 얻었으면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차례에 의해 문ㆍ사ㆍ수가 생하면 법계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지(地)에 대해 얻는 바가 있으면 세 가지 해탈문을 닦는다.
【문】 무엇을 세 가지 해탈문이라고 하는가? 【답】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행하는 것이다.
017_0670_a_05L問曰:何等名爲三 解脫門?答曰:行空、無相、無願。
【문】 공이란 무엇인가? 【답】나[我]와 남[人]과 중생(衆生)에는 자체(自體)가 존재하지 않아, 그 성(性)과 상(相)이 항상 적정(寂靜)함을 관조하는 것이다.
017_0670_a_06L問曰:云 何爲空?答曰:觀我人衆生無有自體、 性相常寂。
【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답】마땅히 십이인연에 들어가면 된다.
017_0670_a_08L問曰:云何解了?答曰:當入 十二因緣。
【문】 이 공해탈은 십이 인연법과 다른가? 【답】공과 십이인연은 똑같아서 다른 모습이 아니다. 공이 곧 십이인연이고 십이인연이 곧 공이다. 왜냐하면 인연은 가유(假有)로 일어나는 까닭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존자 응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십이인연이 공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니 가명인(假名因) 인연법, 이것이 곧 중도이네.
017_0670_a_13L十二因緣空, 我今欲解說, 假名因緣法, 此卽是中道。
일체의 모든 법은 다 공적하다. 왜냐하면 모두 인연에 속하여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017_0670_a_15L一切諸法悉皆空寂。何以故?皆屬因 緣,無自性故。
【문】 만약에 일체법이 인연생이라면 무엇 때문에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이른바 인연은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면 체성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멸함도 없고 무생무멸이니, 즉 진정한 적멸이다. 적멸이란 곧 일체 모든 법의 적멸을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나는 일체제법에는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017_0670_b_01L예를 들면 『노모경(老母經)』 가운데서 세존께서 누이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사람과 북채와 북을 원인으로 해서 갖가지 조건[緣]이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소리는 과거ㆍ현재ㆍ미래세에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안과 밖 그리고 중간에도 있지 않으니, 그 성품[性]이 공적하여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누이여, 지금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일체 모든 법의 체성도 역시 그러하다.”
『노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공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보살은 무량겁 동안 복덕을 쌓고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아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 생과 멸이 모두 공적함이 마치 허깨비ㆍ불꽃ㆍ건달바성과 같음을 잘 관찰하여 모든 것이 꿈속에서 변화된 것과 같다고 여긴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맨 먼저 십이인연이나 중생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찰나의 경각에 얻는 것이 허깨비나 불꽃이나 건달바성과 같네.
017_0670_b_08L初覺十二緣, 衆生皆悉空, 剎那頃所得, 幻炎乾闥城。
이러한 순서대로 공해탈문에 들어가면 그 마음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그 의의와 이익을 체득할 수 있다.
017_0670_b_10L如是次第入空解脫門,其心快樂,逮 得義利。
【문】 외도가 각기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면 어떻게 이를 막아 끊을 수 있는가? 【답】가령 외도가 내외(內外)의 색(色)에 대하여 모두 물들어 집착하면, ‘나[我]’라든가, ‘나의 것[我所]’이라고 취착하여 생사의 흐름에 따르게 된다. 그 자신[我]에 대해 집착함이란 자신이 음식이나 재물의 이로움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갖가지는 아견(我見)이나 중생견(衆生見) 등에 의지한다. 저 ‘나’와 ‘나의 것’이란 자신이 조작하여 ‘이것은 나의 항아리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칭 등은 아소(我所)에 의지한다. 그가 업을 지어 동일하든, 다르든, 동일하면서 다르든,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든 취하여 치우치게 집착하면, 단지 언어로써 세상을 속여 미혹하고 결국은 자신의 몸에까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법의 자성이 공임을 깨닫지 못한다.
017_0670_c_01L【문】 이 모든 외로움은 인연을 이해하지 못하여 네 가지 집작을 일으킨다는데, 무엇이 그 허물인가? 【답】승거(僧佉)4)가 말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헤아리는 허물이 있으니, ‘지음[作]’과 ‘지어진 것[作者]’이 동일하고 ‘나눔[分]’과 ‘나누어진 지분[有分]’이 동일하다고 여기는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동일하다고 한다. 우루거(優樓佉)5)는 다르다고 헤아린다. 니건타(尼健陀)6)는 동일하거나 다르다고 헤아린다. 약제자(若提子)7)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헤아린다. 일체의 외도과 마타라(摩他羅)8)등은 각기 다르게 헤아리지만 모두 다 이와 같은 네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문】 승거인은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하다고 말하는데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답】말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지음은 인(因)이고 지어진 것은 과(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지어진 것은 지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음과 지어진 것은 전후(前後)의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 전과 후가 하나의 동일한 공용(功用)이 있는 경우, 즉 예를 들면 종자가 싹을 틔울 때 비록 먼저와 나중이 있더라도 다만 유사한 상속(相續)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답】이 역시 허물이 있다. 만약에 지음이 먼저 있고 지어진 것이 나중에 있거나 생겨남과 아직 생겨나지 않음이 다르다면 어떻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항아리가 있다고 할 경우 끝내 서로 다른 물질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으며, 소의 뿔이 서로 인(因)이 되어 생겨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지음과 지어진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닌 까닭은, 소리가 다르고 뜻이 다르며 인연이 다르고 때[時]가 다르며 팔자가 다르고 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을 동일한 하나로 본다면 많은 허물이 있게 된다. 만약에 단지 동일한 하나일 뿐이라면 두 가지 명칭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소리ㆍ뜻ㆍ체(體)ㆍ양상[相]의 선후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는 도공은 한꺼번에 바퀴ㆍ노끈ㆍ우유제품 등의 사물을 모두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의 동일함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017_0671_a_01L예를 들면, 나의 마음은 동일한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만약에 이것이 동일한 하나라고 한다면 허물이 있다. 마음은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항상함이 없다. 이러하기 때문에 지음[作]과 지어진 것[作者], 상(相)과 상자(相者), 양(量)과 양자(量者), 분(分)과 분자(分者)는 모두 함께 논파된다. 존재하는 동일한 하나의 항아리 등도 역시 응당 논파되어 부정된다. 예를 들면 색(色)과 항아리가 동일하다거나 흰 무명천ㆍ푸른 잎사귀ㆍ길고 짧음ㆍ네모와 둥근 원 등 이와 같은 사물들이 응당 부정된다.
【문】 비사사(比舍師)9)는 다르다고 헤아리는데,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고 해도 역시 큰 허물이 있다.
017_0671_a_02L問曰:比舍師計 異,有何過耶?答曰:若作與作者異,亦 有大過。
【문】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그것을 설명해주기 바란다. 【답】만약에 항아리와 진흙이 다르다면 항아리를 만들 때 무명실을 취할 수 있고, 무명천을 짤 때 진흙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아리를 만들때 실제로는 무명실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항아리와 진흙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진흙덩어리는 미세한 흙먼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고 항아리는 진흙덩어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만일 항아리가 진흙과 다르다면 항아리는 몸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흙덩어리가 항아리를 이루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진흙덩어리는 미세한 흙먼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로부터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 해도 진흙과 미세한 흙먼지와 항아리는 단지 그 명칭만 다를 뿐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지음과 지어진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무명실을 바탕으로 무명천이 이루어지고 부들[蒲]을 바탕으로 자리[席]가 이루어지는 것 등, 모든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하나의 항아리가 다르다고 한다면 일체의 법은 무너진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어떤 하나의 사물이 항아리가 아니라면 항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떠난 것이고, 만약에 어떤 하나의 사물이 항아리라면 많은 항아리가 있게 된다. 어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되니, 이러하다면 항아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3대가 다르다고 헤아린다면 일제의 법이 무너진다.
017_0671_b_01L【문】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일체의 법은 무너뜨리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의 사물을 의지하여 항아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면 항아리 등 모든 사물이 성립하게 된다. 【답】만약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가 항아리와 합해지면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는 응당 항아리이다. 만약 항아리가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와 합해지면 항아리 역시 응당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물 하나와 합해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이 동일하거나 다르다면 마치 흰색 무명천과 같은데 이 또한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흰색이 곧 무명천은 아니며 무명천 역시 곧 흰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흰색과 무명천은 다르다. 다른 사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무명천을 태울 때 흰색은 응당 불타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무명천을 태울 때 흰색 또한 타오른다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지금 사물이 다르고 그 모습들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그대는 앞서 여섯 가지 일이 각기 다르다고 말했었는데, 이 일들은 응당 부정된다.
【문】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만약 지음이 곧 지어진 것이라면 이런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면 이 일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인(因)과 과(果)가 서로 각기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여러 인연이 모여 과를 이루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짓는 모습[作相]과 지어진 모습[作者相]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 가령 항아리의 모습[相]은 파괴될 수 있으나 그 체(體)는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으니, 제가 존재하는 것은 볼 수 있으나 그 모습은 파괴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항아리를 파괴할 때 본래 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답】만약에 동일한 하나라고 말하면 승거의 견해와 같아 논파된다. 만약에 다르다고 한다면 비사사(比舍師)의 견해와 같아 논파된다. 잎사귀와 푸른색, 무명천과 흰색 또한 모두 함께 논파된다.
【문】 약제자(若提子)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헤아리는데,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습니까? 【답】앞의 세 가지 헤아림에는 각기 집착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대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응당 다르다는 것이고, 만약에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곧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가? 만약에 집착할 것이 없는데 허망하게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는 곧 법상(法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문】 당신이 대승을 설하면서 대승에도 역시 집착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신도 일체의 법상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내가 집착한다고 말했던 것은 세간에 드러나는 것으로, 즉 인연법이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단지 전도되어서 법상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법상이란 무엇인데, 내가 법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인가? 【답】체와 상(相)이 없는 것이 곧 법상의 체와 상이다.
017_0671_b_23L問曰:何者是法相,而說 我壞法相耶?答曰:無體相者卽是體 相。
017_0671_c_01L【문】 어떻게 체와 상이 없는데, 체와 상이 된다는 것인가? 【답】공하므로 체와 상이 없다고 한다.
017_0671_c_02L問曰:云何無體相爲體相耶?答曰: 空名無體相。
【문】 어떤 것을 ‘공’이라고 하는가? 유위공(有爲空)인가, 무위공(無爲空)인가? 【답】나는 어떤 뜻이 있어서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뜻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유(有)와 무(無)를 떠나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존자 응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문】 십이인연은 어떻게 증명해야 그것이 공이 됨을 알 수 있는가? 【답】항아리에 비유하자면 진흙덩어리ㆍ물레ㆍ노끈 및 도공 등 여러 조건이 화합한 후에야 항아리를 이룬다. 진흙덩어리를 곧 항아리라 할 수 없고, 또한 진흙덩어리를 떠나서도 항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가명으로 항아리라고 말할 뿐 뭇 인연에 속하여 그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으며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체와 상이 적멸하다.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모든 법이 결정적으로 자체(自體)가 존재한다면 인연에 가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상(自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항아리는 없는 것이며, 항아리가 없기 때문에 일체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2_a_01L 어떤 하나의 법이 만약에 체가 존재한다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일체법은 본래 없으니
인연화합한 것이므로 다 공하다.
017_0671_c_23L一法若有體, 諸法亦復然, 一切法本無, 因緣皆悉空。
진실로 어떤 하나의 법을 관찰해 보면 모든 법은 따로 두 가지 모습이 없네. 진정으로 이것이 공임을 깨달으면 일체가 다 공임을 알아볼 수 있네.
017_0672_a_02L眞實觀一法, 諸法不二相, 諦了是空已, 則見一切空。
【문】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이 곧 체와 상인가? 【답】그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체와 상이 존재하든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든 그대가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인연법이 체와 상이 된다면 인연법은 다른 것을 따라서 생겨나는 것인데, 어떻게 체가 존재하겠는가? 체와 상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性]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에 인연에 속하면 자성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니, 비유하자면 빌린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연법은 다른 것들을 빌려 성립하는 것이어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용수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은 자성이 존재하지 않네.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체와 상이 있을 수 있으리오.
017_0672_a_11L因緣所生法, 是卽無自性, 若無自性者, 云何有體相。
【문】 모든 법의 체와 상은 세간에 드러나 보이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답】이 말은 옳지 않다. 무릇 어리석은 이들의 망령된 견해이니, 이는 믿을 수 없다. 생멸의 법은 모두 공이다. 생멸의 흐름은 빨라 잠시도 정지할 때가 없이 유사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허망하게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비유하자면 등잔이 불꽃과 같으니 생각마다 생겨나고 멸하지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의 불꽃으로 여긴다. 이것은 또한 마치 준마와 같이 달리는 물의 흐름ㆍ그림자ㆍ음향ㆍ마술사가 만들어 낸 불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술이나 마술로 지어진 것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망되게 보는 자는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실재하는 것들이라면 아귀는 물을 불로 보지 않을 것이고, 모래와 자갈을 피와 고름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선악에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의 업에 따라 보게 된다.
017_0672_b_01L만약에 마음이 깨끗한 근기가 훌륭한 중생은 공하다고 볼 것이고, 아귀와 야차는 멀리서 물로 보나 가까이에 이르면 불로 보고 의흑을 낸다. 만약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없고, 두 가지 견해가 있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허망한 견해일 뿐이니, 일체 모든 법은 다 그 체와 살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체와 상이 없기 때문에 모두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는다.
【문】 만약에 일체법이 생겨남이나 멸함이 없다면 어떻게 오고 감이 있어서 단(斷)과 상(常)의 허물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답】종자[種]를 봄으로써 오고 감을 헤아리지만 만약에 법이 공하다는 것을 증득하면 단과 상을 떠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자(種子)를 바탕[因]으로 하여 싹ㆍ줄기ㆍ가지ㆍ잎사귀ㆍ꽃ㆍ열매가 차례대로 존재하지만, 싹이 생겨났기 때문에 종자가 멸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이 끊이지 않고 나아가 열매가 생겨났기 때문에 꽃은 멸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상(無常)의 허물에 관해서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모든 법이 상속하여 존재하면 이는 단멸함이 아니며 인(因)이 멸하는 까닭에 과(果)가 생겨나면 항상하다고 할 수 없네.
017_0672_b_10L諸法相續有, 則非是斷滅; 因滅故果生, 不得名爲常。
이러하기 때문에 인연법이 공함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곧 단과 상을 떠난다.
017_0672_b_12L以是故,見因緣空卽離斷常。
017_0672_c_01L【문】 어리석은 인연을 행한다면 어떻게 단과 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가? 【답】무명(無明)을 인(因)하여 선과 악의 행이 존재하며, 나아가 생(生)을 인하여 노(老)와 사(死)가 존재한다. 범부는 인연의 상속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허망되이 실재한다고 헤아린다. 무명은 그 체가 공하기 때문에 행(行) 역시 그 체가 공하며, 나아가 생의 체가 공하기 때문에 노와 사의 체도 공하다. 세간의 가명(假名)은 상속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멸이라는 허물이 없으며 생각마다 머 물지 않기 때문에 항상함이라는 허물이 없다. 범부중생은 이곳에서 죽어 저곳에서 태어나니 유사하게 상속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서는 어떤 중생도 이곳에서 죽어 저곳에서 태어나는 일이 없다. 단지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가명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식(識)이 종자이면 행업(行業)은 밭이다. 교만은 흙이 덮는 것이고 무명(無明)은 분뇨이며 애(愛)는 물을 주어 적시는 것이다. 부모의 정기(精氣)와 여러 인연조건들이 화합하면 명색(名色)이라는 싹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명색에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상의 다리[床脚]와 같으니 상(相)을 빌려 사용하는 것이다. 수태된 첫 명칭은 가라라(歌羅羅)이고, 두 번째는 안부타(安浮陀)라 이름하며, 세 번째는 육단(六段)이라 이름하고, 네 번째는 견실(堅實)이라 이름하며, 다섯 번째는 제포개장(諸炮開張)이라 이름하고, 여섯 번째는 촉(觸)이라 이름한다. 태어나는 법의 차례는 상(相)을 빌려 존재하므로 단(斷)이라 하지 않는다. 보살은 인연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공함을 안다. 인연법이 공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하며, 법이 공함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단이나 상의 허물이 없다. 예컨대 『출태경(出胎經)』 중에서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고 있다.
【문】 만약에 일체의 법이 체가 없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도 허물이 있다. 현재 당신이 말하는 그것이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만약에 법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물이 된다. 하지만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어찌 언어에 허물이 있겠는가? 때문에 모든 법은 처음과 같이 나중도 역시 그렇게 공하다. 만약에 모든 법이 결정적으로 그 체와 사이 존재한다면 나중에 열반할 때 응당 단멸되어야 한다. 만약에 앞서 공하지 않은 것이 나중에 공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이며 정법을 무너뜨리고 또한 해탈할 수도 없다.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처음에는 공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공하다고 여기고 내가 마땅히 열반을 얻었다고 하면 이것은 그릇된 견해로써 열반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있네.
017_0672_c_19L不空而見空, 我應得涅槃; 邪見非涅槃, 如來之所說。
017_0673_a_01L 모든 법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항상 공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부처님께서 보셨던 공상(空相)은 지금도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내가 인연법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허물이 없다. 이와 같이 먼저 제일의제를 세우고 나중에 분별세제(分別世諦)를 설하니, ‘나’와 ‘중생’, ‘지음’과 ‘지어질 것’ 나아가 ‘동일함’과 ‘다름’이 아무런 허물이 없다. 존자 용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분별제(分別諦:세제)를 설하지 않으면 실제(實諦: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만약에 실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네.
017_0673_a_03L不說分別諦, 不得於實諦, 若不得實諦, 則無得涅槃。
또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3_a_05L復次說偈:
모든 부처님들께서 펼쳐 설하신 법은 항상 이제(二諦)에 의존하나니 세제로부터 분별함과 그리고 제일의제라네.
017_0673_a_06L諸佛演說法, 常依於二諦, 分別於世諦, 及與第一義。
만약에 진속(眞俗) 두 가지 성제(聖諦)를 잘 분별할 수 없어서 이와 같다면 불법의 깊고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하리.
017_0673_a_08L若不能分別, 眞俗二聖諦, 如是則不知, 佛法甚深義。
따라서 인연법이 공한 것을 진여ㆍ법성ㆍ실제(實際)라 이름하며, 이는 제일의선(第一義禪)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인연법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 곧 공해탈문이다. 만약에 공을 보면 모든 법의 상(相)을 보지 않으므로 이를 무상해탈문이라 한다. 상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원하여 구하는 바가 없으니, 이를 무원해탈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해탈문에 안주하여 식(識) 종자가 삼계 내에서 다시는 명색(名色) 등의 싹을 생하지 않으며, 식이 취착함이 없어 삼유(三有)10)의 고(苦)가 멸한다. 삼유의 고가 멸하기 때문에 적멸열반을 얻는다. 존자 제바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였다.
식(識)은 종자의 뜻이니 육처(六處)를 유행(遊行)하네. 만약에 모든 객진[塵]이 공하다고 보면 존재의 세계[有]라는 싹은 단멸되네.
017_0673_a_17L識是種子義, 遊行於六處; 若見諸塵空, 有芽則斷滅。
017_0673_b_01L 【문】 보살이 공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벗어나는데, 어떻게 성문보다 뛰어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답】보살은 세간의 이익과 출세간의 이익을 얻어 이염지(爾炎地)를 건너기 때문에 비록 세간을 벗어나더라도 세간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나, 성문은 그렇지 않다. 생과 사를 두려워하여 신속히 멸도(滅度:열반)에 이르기를 구한다. 출세간의 도(道)로 법계를 보고, 법계를 본 다음에는 열반의 언덕에 도달한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의 고를 보고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여 견고하게 안주하고 장엄하게 마기 위하여 아승기겁 동안에 출세간의 도를 닦아 일념의 경각에 일체의 법계를 관조하고, 법계를 관조한 후에는 중생을 위하는 인연 때문에 도중에 열반의 과를 취하여 증득하지 않으며 중생들을 인도하여 해탈시킨다. 부처님께서 『아뇩대지경(阿耨大池經)』에서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두 사람이 산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하자. 한 사람은 힘이 있고 선교방편이 있었다. 그 오묘한 방편 때문에 비록 뛰어내렸어도 다시 일어나 산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힘이 부족하고 또한 방편이 없어서 한번 뛰어내려 떨어진 뒤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보살은 무위법 가운데서 취하여 증득하지 않으니, 훌륭하고 오묘한 방편을 지닌 사람만이 산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성문인은 무위를 증득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마치 방편이 적은 사람이 굴러 떨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어떤 장자에게 오로지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가 배를 곯고 풍족치 못한 형편으로 멀리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한편 장자는 한 커다란 성 안에 살았는데, 그는 큰 부자여서 값비싼 보배를 많이 쌓아두고 있었다. 장자는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였기 때문에 아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보살에게는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 동안의 공덕이 있어서 이염지(爾炎地)에 이르고 열반을 향하지만, 중생을 애민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 생사에 들어가 아승기겁 동안 오래도록 애쓰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한다. 보살마하살의 수레[乘]는 커다란 수고스러움의 수레이니, 위없는 과(果)를 구함이 불가사의하여 일체의 성문ㆍ벽지불을 넘어서며 일체의 공덕과 지혜를 구족한다. 따라서 그들을 넘어서서 이염지에 이르는 것이다.
017_0673_c_01L무엇 때문에 보살의 수레를 커다란 수고스러움의 수레라고 하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갔는데, 몹시 심한 바람을 만나 파도가 산더미 같았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어려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다급해져 큰 공포를 일으켰으나, 이때 선장이 돛을 잘 조정하여서 온갖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복덕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벗어나서 커다란 보배를 얻을 수 있으니,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바다에 처해서도 역시 이와 같다. 그렇지만 악지식은 믿음이 없어 어려움에 처하면 악도로 취향한다. 제1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지행(地行)을 닦아 청정한 해탈을 구한다. 제2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선정행(禪定行)을 닦는다. 제3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지혜행(智慧行)을 닦아 이염지의 장애를 제거한다. 따라서 보살승을 수고스러움의 수레[苦乘]라 한다. 십지를 원만하게 갖추어 닦고 의혹이나 장애가 없음을 증득하면 일체의 행이 구족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따라서 이염(爾炎)의 지혜로 커다란 과를 이룰 수 있다.
1)이 소제명(小題名)은 본래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빠져 있으나 여러 증상을 참작하여 역자가 넣은 것이다.
1)범어로 vaipulya이며, 방광(方廣)이라 번역하는데, 일반적으로 대승을 방광이라 한다. 이는 어의적으로는 ‘갖가지 깊은 법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한 것’이란 말로서, 본래는 소승부파에서 광설한 경전을 가리켰는데,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승경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예컨대 『대방광불화엄경』의 경우에서와 같다.
2)범어로는 upadesa이며, 논의(論義)라고 번역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요약에 대한 해설을 의미하고 상세한 주석적인 설법을 가리킨다.
3)일체의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이치를 진실로 깨달아 흔들림 없는 마음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4)수론(數論)이라 하며, 범어로는 Sāṃkhya이다. 승거(僧佉)는 그 음역이다. 수론학파는 인도의 육파철학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되었다. 그 시조는 kapila 선인(仙人)이라 한다. 이 학파는 일체의 사물은 모두 자성(自性), 즉 일종의 원시적 물질인 세성(世性)이 전화(pariṇāma)된 것이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일체의 사물에는 그 원형인 ‘자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5)범어로는 Ulūka이다. 육파철학 가운데 승론(勝論)학파의 시조이다. 승론학파는 과(果)는 새로 생긴 것이지 결코 인(因) 가운데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6)인도 고대 육사외도 가운데 하나로서 고행을 하고 세간의 옷과 음식의 속박을 떠나면 번뇌의 결박과 삼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7)자이나교의 개조(開祖)이다.
8)세계 만물의 성립 원인이 하나의 인(因)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외도 가운데 하나이다.
9)범어로 Vaiśeṣika이며 승론학파를 말한다.
10)유(有, bhava)는 존재라는 의미로써 ‘유’에는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의 삼유가 있다. 또한 유는 넓게는 현상적 존재세계를 지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