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일곱 가지 그대로의 진여[如如]는 찬탄할만한 것이고 가장 지극한 두 가지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지혜란, 곧 세속의 진리에 대한 지혜[如量智]와 진여의 진리에 대한 지혜[如理智]가 그것이니, 이 지혜는 번뇌가 없어 범부를 벗어났기 때문에 찬탄할만한 것이고, 이승(二乘)을 뛰어났기 때문에 가장 지극한 것이다. 또 이 지혜는 바로 보살의 지혜이기 때문에 찬탄할만한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가장 지극한 것이며, 도 이 지혜는 뒤바뀜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나니, 이는 뒤바뀜이 없는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진실이라고 하나니 희론이 없는 것이란, 모양[相] 등류에 있어서 같다거나 또는 다르다는 그 허망함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모양의 등류란 이를테면, 모양과 이름의 분별이니 바른 지혜 등 네 가지 섭수[四攝]인 곧 다섯 가지 법장(法藏) 가운데의 네 가지 법장이다.
어떻게 같다거나 다르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가 하면, 다 과실(過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진여가 모양의 등류와 다르다고 한다면, 세 가지 과실이 있으니, 첫째는 이 진여가 곧 모양 등류의 실다운 체[實體]가 아닐 것이고, 둘째는 관하는 행[觀行]을 닦는 사람으로서 그 모양 등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방편으로 삼아 진여를 통달하게 될 것이고, 셋째는 진여를 깨닫고 나선 모양 등류의 모든 법은 응당 통달하지 않으리니, 서로가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93_c_01L만약에 진여와 모양 등류가 같다고 한다면, 역시 세 가지 과실이 있으니, 첫째는 진여가 이미 차별이 없으니 만큼, 모양 등류도 응당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만약 모양 등류를 본다면, 곧 진여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만약 진여를 보고서도 청정할 수 없는 것이 모양 등류를 보는 것과 같다면, 성인이 없음으로써 해탈할 수 없겠고 열반이나 또는 세간과 출세간(出世間)도 다름이 없으리니 이 때문에 같다거나 다르다는 그 모든 희론을 여읨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고,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곧 진실한 성품인 것이다.
【문】이 성품이 만약에 같다거나 다르다는 것을 여읜 성품이라면, 이 성품을 있는 것이라 합니까? 아니면 없는 것이라 합니까?
017_0693_c_02L問曰:此性若離一異者,爲有爲無?
【답】이 성품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만약에 이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일체 종류의 청정함을 얻을 수 없을지라, 왜냐하면 모양의 결성(結成)이 진실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이 성품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 종류란, 곧 진여의 진리[眞理]와 세속의 진리[如量]에 대한 지혜이고, 모양의 결성이란, 곧 분별하는 성품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다.
다시 이 성품이 진실히 있는 것은 청정한 경계이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만약에 마음이 이 경계를 반연할 경우엔 곧 청정함을 얻기 때문이다. 다시 이 성품은 진실히 있기 때문에 이를 이르되 항상 머무는 것이라 한다. 청정한 경계이기 때문에 이를 이르되, 선한 것이라 하고, 항상 머물기 때문에 이를 이르되 즐거운 것이라 하고, 진실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르되, 성품 없는 것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이 성품이란, 일체 희론(戱論)의 범인 진실의 체성(體性)이기 때문이다. 있음도 여의고 없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진실한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진실한 성품이란, 곧 지극한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에 또는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진실한 성품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017_0694_a_01L다음 남을 의지하는 가운데에서 분별의 도리를 잡아 말하기에 분별하는 성품이고 진실한 성품이고 성품 없는 성품이지만, 만약 진실한 성품 가운데라면, 진실함과 성품 없는 두 가지 뜻을 갖춰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체(體)가 진실한 것이고 성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을 의지하는 성품과 분별하는 두 성품 가운데라면 다만 성품 없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고, 진실함은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별하고 남을 의지함은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체가 다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성품 없는 것이 아니라면, 분별하고 남을 의자함도 진실의 있음을 이룩할 것이고, 만약에 분별하고, 남을 의지함도 진실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성품 없는 이치가 없으리니, 이 때문에 진실함과 성품 없는 두 가지 뜻을 갖춰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만약에 성품 없는 것을 진실한 성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치가 그럴 수 있거니와, 만약에 남을 의지함과 분별하는 것도 진실한 성품이라거나 성품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옳지 않으니, 진실이란 이름이 분별과 남을 의지하는 데에 혼동하기 때문이다.
【문】경(經) 가운데 다섯 가지 모양이 있는 것을 설하였으니, 첫째 이름과 말의 모양이고, 둘째 말하는 모양이고, 셋째 이름과 뜻의 모양이고, 넷째 집착하는 모양이고, 다섯째 집착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며, 또 세 가지 모양을 설하였으니, 이른바 분별하는 모양과 남을 의지하는 모양과 진실한 모양이다. 이 두 곳이 서로 섭수함에 있어서 어떻게 다섯 가지가 세 가지를 섭한다거나 세 가지가 다섯 가지를 섭수한다고 합니까?
【답】이제 세 가지 모양을 잡아서 다섯 가지 모양을 분별하겠으니, 알아 두라. 다섯 가지 모양 가운데 앞의 두 가지 모양은 공통으로 세 가지 모양의 섭수하는 것이 되고, 셋째의모양은 치우치게 분별하는 모양의 섭수하는 것이 되고, 넷째의 모양은 다만 남을 의지하는 모양의 섭수하는 것이 되고, 다섯째의 모양은 다만 진실한 모양의 섭수하는 것이 될 뿐이다.
≪해석≫ 맨 처음의 두 가지 모양이 공통으로 세 가지 모양의 섭수하는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맨 처음의 이름과 말이 곧 모든 법의 명자(名字)이고, 또 언설(言說)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과 말은 의식[識]의 짓는 것이고, 의식이 이름과 말의모양이 일어나는 것과 같음은 곧 분별하는 성품이니, 분별하는 의식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분별할 것의 이름과 말은 이미 아무것도 없고 분별하는 의식도 역시 아무것도 없는지라 이것이 곧 진실한 성품이니, 이 때문에 맨 처음의 모양이 곧 세 가지 성품의 섭수인 것이다.
둘째의 모양이 역시 세 가지 성품의 섭수인 것은 그 말하는 모양이 곧 이름과 말의 목적하는 뜻이니라. 이를테면 일체의 물질이 역시 식의 짓는 것이로되 다만 식과 같음이 있는 물질의 모양이 일어나는 것은 곧 분별하는 성품이고, 분별하는 식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인데, 역시 이 두 가지 성품이 함께 아무것도 없는 것은 곧 진실한 성품이다.
017_0694_b_01L셋째의 모양이 다만 분별하는 성품의 섭수함이 되는 것은 이 이름과 뜻이 상응(相應)하는 모양이니, 이를테면 물질을 위해 이름을 내세워서 그 물질과 더불어 상응하게 하과, 이름으로 인하여 물질을 나타나게 하는 것인데, 이 이름과 뜻이 실상 아무것도 없어 모양도 뜻도 없기 때문에 다만 분별하는 성품인 것이다.
넷째의 모양이 다만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섭수함이 되는 것은 이 이름과 뜻의 두 가지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에 다만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고, 집착할 것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는 성품이 아니니, 앞의 셋째 모양은 다만 분별할 것을 내고 분별하는 것은 내지 않기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아닌 것이다.
다섯째의 모양이 다만 진실한 성품의 섭수함이 되는 것은 이 이름과 뜻의 두 가지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곧 이 경계의 지혜 차별이 없는 아마라식(阿摩羅識)이기 때문이다. 넷째와 셋째도 역시 진실한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다만 그 내세운 것이 바로 한 가지 뜻을 치우치게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논≫ 분별이 각각 다섯 가지 일의 작용이 있고, 다시 이 세 가지 성품이 그 낱낱 성품 가운데 다 다섯 가지 일의 분별하는 성품이 갖춰 있음을 알지니, 일의 작용이란, 첫째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내는 것이고, 둘째 남을 의지하는 성품 가운데에 이름과 말을 성립하는 것이고 셋째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을 내는 것이고, 넷째 두 가지 집착의 거칠고 무거움을 내는 것이고, 다섯째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서 의지하는 일을 짓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미혹을 일으키는 자로서 해탈하는 방편 얻는 것을 밝힘이고, 넷째의 것은 바로 미혹 일으키는 것을 밝힘이고, 다섯째의 것은 해탈하게 되는 것을 밝힘이니, 이러한 차례가 있는 것은 반드시 그 체가 있기 때문에 이름과 말을 성립하는 것이다. 이름과 말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고,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더욱 더 일으키는 것이므로 앞에는 다만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을 일으키니, 이것인즉 경미(輕微)하다 하겠지만, 이 뒤에 한량없는 미혹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그 뒤로부터 오랫동안 돌아다니고서야 바야흐로 의지할 수 있나니, 이것은 분별과 남을 의지함이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기 때문에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017_0694_c_01L≪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다섯 가지 일이란, 번뇌의 체를 이룩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분별과 진실 이 두 가지 성품의 의지가 되는 것이 그 둘째이고,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인 그 이름과 말의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 셋째이고, 사람과 법 두 가지 집착의 거칠고 무거운 의지가 되는 것이 그 넷째이고,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는 의지가 되는 것이 그 다섯째이다.
≪해석≫ 첫째의 번뇌의 체를 이룩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은 체가 있어서 분별하는 성품의 그 체 없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번뇌의 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분별과 진실, 두 가지 성품의 의지가 되는 것이란, 이를테면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그 집착이 사람과 법의 ≺나≻가 되는 것은 곧 분별하는 성품을 위하여 의지를 만드는 셈이다. 만약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분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줄을 안다면 분별이 이미 성품 없는 모양이기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나지 않겠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나지 않기 때문에 곧 진실한 성품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셋째의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인 그 이름과 말의 의지를 일으키는 것이란, 이를테면 이름과 말은 반드시 의지하는 데가 있어서 남의 성품을 의지해 일어나기 때문에 능히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인 그 이름과 말의 의지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의 사람과 법 두 가지 집착의 그 거칠고 무거운 의지가 되는 것이란, 이를테면 훌륭한 체하는 마음의 거칠고 무거운 그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을 내는 것이다. 다섯째의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는 의지가 되는 것이란, 이를테면 남을 의지하는 성품에 지나지 않으니만큼 곧 분별하는 성품의 모양 없는 것이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는 방편이 되는 줄을 알 것이다.
또 앞서 해석한 분별하는 성품이 모양이 없으니만큼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나는 것이 없음이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는 의지가 되는 줄을 알 것이다. 무릇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는 것을 처음 듣고 생각하는 지혜 가운데 있으므로 반드시 분별하는 성품의 모양 없음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의 나는 것 없음을 갖추어 안 연후에라야 진실한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017_0695_a_01L≪논≫ 앞의 분별하는 성품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각각 다섯 가지 일이 있는 것을 합하여 열 가지로 성립하였으니, 그 까닭은 두 성품의 다섯 가지 일에 대해 그 의지의 반연하는 것과 반연할 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삼승(三乘)의 성스러운 도가 바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앞의 두 성품의 다섯 가지 일을 능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앞의 분별하는 성품의 다섯 가지 일을 제거하는 것이란, 첫째 분별하는 성품의 그 모양 없음을 관(觀)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이름과 말이 곧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이름과 말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사람과 법의 두 가지 집착이 곧 생겨날 수 없는 것이고, 넷째는 두 가지 집착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모양의 종류와 추중(麤重)한 두 가지미혹이 곧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두 가지 미혹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곧 진실을 보는지라, 수고롭게 다시 방편을 닦아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다 성스러운 도를 얻으므로 말미암아 분별하는 성품의 다섯 가지 일이 아주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음 남을 의지하는 다섯 가지 일을 제거하는 것이란, 첫째 성스러운 도를 얻으므로 말미암아 남을 의지하는 번뇌의 체(體)가 제거되는 것이다. 둘재는 그 체가 제거됨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분별과 진실 두 성품의 의지를 짓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그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사람과 법, 두 가지 집착을 위해 이름과 말이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는 그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두 가지 집착을 위해 추중하고 훌륭한 체하는 마음이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미 진여를 보았기 때문에 수고롭게 다시 분별하는 성품에 찾아들어가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해석≫ 의지하는 곳의 반연하는 것과 반연할 것이란, 그 분별 없는 경계의 지혜 가운데에 지혜를 말하되 의지하는 곳이라 하고, 경계를 말하되 반연하는 것과 반연할 것이라 하나니, 곧 불ㆍ보살의 전의(轉依)하는 업이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의지하는 곳의 반연하는 것과 반연할 것이라고 한다.
017_0695_b_01L≪해석≫ ≺신견(身見)≻을 가진 사람으로선 모든 쌓임[陰]을 볼 수 없는 지라 이 때문에 모든 쌓임 위에서 ≺나≻와 ≺내 것≻을 그릇 계교하나니, 만약에 ≺나≻와 ≺내 것≻의 ‘공’함을 얻는다면, 그 때에 비로소 ≺나≻와 ≺내 것≻을 보지 않고, 바야흐로 모든 쌓임의 법뿐인 줄을 깨달을 수 있으며, 모든 쌓임의 법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번뇌의 ≺아견(我見)≻도 죄다 없어지나니, 이 때문에 알라. ≺인아≻의 집착이 곧 ≺법아≻의 집착으로부터 나는 것이다.
≪논≫ 【문】어떻게 ≺인아≻와 ≺법아≻의 두 집착을 없애지 못하면 부정한 품을 성립하고 이 두 집착을 없애고 나서야 바야흐로 청정한 품을 성립하는 것입니다.
017_0695_b_08L論曰:問曰:云何未滅人法兩執立不淨品,兩執滅已方立淨品?
【답】남을 의지하는 성품 가운데에서 ≺나≻를 집착함은 이 분별하는 성품의 훈습(熏習)한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부정한 품이라 하고, 만약 남을 의지하는 성품 가운데에서 진실함을 닦는 그 진실한 성품의 훈습이라면, 이를 이름하여 청정한 품이라 한다. 부정한 품을 말하되, 유전(流轉)있는 경계라 하고, 청정한 품을 말하되 유전 없는 경계라 하나니, 이 유전 없는 경계는 전의(轉依)하는 것으로써 그 체를 삼는지라, 이 전의하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전의는 그 지위를 잡음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한 부분만의 전의이니, 이를테면 이승(二乘) 사람들의 전의는 ≺아견(我見)≻과 ≺아애(我愛)≻만이 엇어졌기 때문에 그 유전 없는 상속이 범부보다 다른지라 이 지위를 한 부분만의 전의라고 말하는 것은 앞의 범부들의 의지하는 바 유전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017_0695_c_01L둘째는 구족한 부분의 전의이니, 이를테면 초지(初地)의 보살로서 사람과 법의 두 가지 ‘공’함을 갖춰 얻은 것이다. 셋째는 움직임이 있는 전의이니, 이를테면 칠지(七地) 이하의 보살은 드나드는 관[出入觀]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움직임이라 하는 것이다. 넷째는 공용[用]이 있는 전의이니, 이를테면 십지(十地) 이하의 보살은 일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공용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공용이 있는 전의라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구경(究竟)의 전의이니, 이를테면 여래의 지위는 원만함을 얻음에 이르신지라 이 때문에 구경의 전의라고 함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의 전의라 한다.
그리고 이른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스스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상할 수 없음을 성취한 것이라 이를테면, 일체 미혹과 일체 고뇌가 어기거나 해칠 수 없고, 한결같이 청정하게 항상 머물러서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성취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제 성품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전의는 곧 물질[色]을 제 성품이라 하기도 하고, 물질을 여읜 것을 제 성품이라 하기도 하여 다 상상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또한 의식과 여섯 느낌[六八]과 네 원소[四大]와 세 세계[三界]와 여섯 갈래[六道]와 열 방위[十方] 등이 그 자리에 있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기도 하여 다 상상할 수 없으니, 불성(佛性) 가운데 널리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는 적정(寂靜)함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전의는 즐거이 머무는 중에도 상상할 수 없고, 고요히 머무는 중에도 상상할 수 없고, 이와 같이 또한 마음이 있는 머묾이나, 마음이 없는 머묾이나 성인의 머묾이나 하늘의 머묾이나, 범(梵)의 머묾이나, 부처님의 머묾까지도 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는 공덕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전의는 대략 부처님의 공덕이 여섯 가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만함이 그 하나이고, 더러움 없음이 그 둘이고, 변동 없음이 그 셋이고, 같을 이 없음이 그 넷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일삼음이 그 다섯이고, 수승하고도 훌륭함이 그 여섯이다.
≪해석≫ 여덟 가지 머묾 가운데 첫째의 즐거이 머묾이란 삼선(三禪) 이하를 말하는 것이고, 둘째의 고요히 머묾이란 사선(四禪) 이상을 말하는 것이고, 셋째의 마음이 있는 머묾이란, 마음이 있는 선정을 말하는 것이고, 넷재의 마음이 없는 머묾이란, 생각이 없는 선정과 아무것도 없는 선정[滅盡定]을 말하는 것이고, 다섯째의 성인의 머묾이란, 일체 유전 없는 관[無流觀]을 말하는 것이고, 여섯째의 하늘의 머묾이란, 초선(初禪)으로부터 또한 생각 아닌 선정[非想定]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째의 범행의 머묾에서 범이란 한량이 없음을 말함이니, 네 가지 한량없는 선정[四無量定]을 말하는 것이고, 여덟째의 부처님의 머묾이란, 이른바 부처님은 생사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으시니, 그 머무는 곳이 없는 열반에 더 머무름을 말하는 것이다.
017_0696_a_01L≪논≫ 네 가지 도가 있어서 전의(轉依)할 수 있으니, 어떤 것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 성스러운 행이 네 가지이고, 둘째 찾아 생각하는 것이 네 가지이고, 셋째 여실히 아는 것에 네 가지이고, 넷째 경계가 네 가지이다. 첫째의 이른바 네 가지 성스러운 행이란, 바라밀(波羅蜜)이 그 하나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바라밀을 통틀어 하나의 바라밀의 행이라고 말하나니, 곧 대승(大乘)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인(因)을 밝힘이고 또는 반연하는 인연이라 하나니, 이 바라밀의 뜻은 중변론(中邊論)의 장품(障品)에 해석한 것과 같다.다음은 도의 행[道行]이 그 둘이니, 이른바 서른일곱 가지 품[三十七品]을 통틀어 도를 돕는 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행으로 말미암아 그 경계의 진실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인(因)이라 하고, 또는 이것을 반연하여 널리 도품(道品)을 밝히는 것이라 하나니, 『중변론』의 「수대치품(修對治品)」에 설한 것과 같다.
다음은 신통의 행[神通行]이 그 셋이니, 이른바 여섯 가지 신통을 통틀어 하나의 신통으로 말하는 것은 이 신통의 행이 능히 교화 받는 중생들로 하여금 귀향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서 진리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도 이 여섯 가지 신통은 곧 세 가지 바퀴이니, 첫째 몸의 신통은 곧 몸 신통의 바퀴로서 능히 가볍게 날아 멀리 가는가 하면, 다시 변동을 일으켜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귀향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둘째 기억하는 신통은 하늘눈과 하늘 귀와 남의 마음을 통해 능히 상대의 생각하는 각(覺)ㆍ관(觀)을 보고, 여실히 기억해 말함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셋째 바른 가르침의 바퀴는 곧 번뇌가 다된 신통으로서 괴로움을 여의고 쌓임을 끊고 사라짐을 증하고 도를 맑게 하나니, 이 전생 일 아는[宿命] 한 가지 신통에서 뒤의 두 가지 신통을 공통해 있는 것이다.
다음은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행이 그 넷이니, 이른바 네 가지 거둬 주는 법[四攝法]을 통틀어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하나의 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는 이미 진리에 들어가는 중생을 위하여 다시 재물과 법의 두 가지 보시로써 그들을 거둬 성숙하게 하는 것을 밝힘이니, 재물의 거둬줌은 이익되게 하는 방편으로써 성숙하게 하는 것이고 법의 거둬줌은 마음을 깨달아 행을 일으켜 수순하는 방편으로써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017_0696_b_01L≪해석≫ 보시의 거둬줌이 그들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는 것이란, 이 성숙은 지위를 따라 얕기도 하고, 깊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말로써 거둬줌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이로운 행으로서 거둬줌은 그들로 하여금 행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고, 행동을 같이하는 거둬줌은 그들로 하여금 수순하게 하는 것이다.
≪논≫ 다시 이 네 가지 거둬주는 법을 다섯 가지 거둬주는 것으로 집착하여 이를 이르되, 거둬주는 종류라 하나니, 그 다섯 가지란 첫째 거둬 주어 자기 집안을 이룩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재물의 보수로써 원수 맺은 사람들을 거둬 주어 그 미워하거나 성내는 것을 버리고 자기 친속(親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이르되, 한 집안을 이룩하는 것이라 한다. 둘째 가르침을 받게 하는 거둬줌이니 이를테면, 사랑스런 말로써 자기 집안사람들을 거둬주어 그 바른 가르침을 받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바른 노력을 일으키는 거둬줌이니, 이를테면 이로운 행으로써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거둬 주어서 그 바른 행을 일으키지 못하는 자에게 이치대로 부지런히 행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착한 일을 성숙시키는 거둬줌이니, 이를테면 거듭 이로운 행으로써 바르게 행하는 자를 거둬 주되, 그 버리지 못한 것을 버리게 하고,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탈하게 하는 거둬줌이니, 이를테면 행동을 같이하는 이익으로 제4의 사람을 거둬주어 미혹의 장애와 일체지혜의 장애를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017_0696_c_01L첫째인 이름과 말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살이 이름 가운데에 찾아 생각함으로써 그 이름에 대한 말을 볼 뿐이고, 이름에 대한 자체[體]는 보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름은 본래 물질들의 모든 뜻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 물질들의 뜻을 모양으로 잡거나 이미 성취되지 않으니만큼 이 이름은 곧 나타낼 수 없을진대, 이름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문에 이름이 이름을 이룩하지 못하거늘, 그런데도 이 이름이 물질들을 더불어 같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다르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물질들이 이미 없으니, 이름도 같이 없어야 하겠고, 만약에 다른 것이라면, 이 세계엔 곧 토끼 뿔과 같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든 분별함과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보살이 찾아 생각하되, 이름에 대한 말만을 듣고 이름에 대한 자체는 보지 않음이니, 여기에 자체를 말함은 곧 이름을 지적하여 자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인 이치와 종류를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살이 이치와 종류를 찾아 생각하되, 종류만을 보고 나머지 이치는 보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이치를 찾아 생각함은 이 이치가 보살의 나타내는 그대로이고 이치의 본래 있는 것과 같지 않는지라, 다만 난식(亂識)이 있을 뿐,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나니, 종류를 본다는 것은 이 종류가 반연할 것이 이미 없고, 반연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 이치와 종류를 찾아 생각하되, 다만 모양도 없고 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아야만 이것이 진실한 이치이고 종류인 것이다.
≪해석≫ 이치와 종류를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이른바 이 이치는 다섯 가지 쌓임[五陰] 가운데 각각 별다른 이치가 있는 것과 같음이다.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 되는 그것을 이르되, 이치라 함이니 물질이 눈[眼]을 대하는 것으로써 이치를 삼는 것과 같음이다. 이른바 종류는 흔히 물질의 기질 등류를 가르쳐 종류라고도하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아니고, 보살이 이 다섯 가지 쌓임을 관하여 분별을 짓는 것이니, 다만 난식(亂識)을 곧 식(識)의 종류라고 말할 뿐이다.
만약 시종(始終) 말을 짓는다면, 바로 이 난식편의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을 취하여 종류라고 하리니, 이 종류는 반연할 것이 이미 없고, 반연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보살이 이 종류를 찾아 생각하는 데에 있어선 다만 모양도 없고 나는 것도 없음을 보는 그것이 진실한 이치이고, 종류인 것이다.
≪논≫ 셋째인 제 성품과, 그 가명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살이 제 성품을 찾아 생각하되 다만 그 가명을 볼 뿐이고 다른 것은 보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이 물질들의 가명을 난식(亂識) 가운데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에도 역시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모양을 여의고, 나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가명이란, 다만 조작하는 법을 더할 뿐이고, 그 체(體)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나니, 이 때문에 보살이 찾아 생각하는 것은 다만 제 성품의 가명을 볼 뿐, 정작 제 성품은 보지 않는 것이다.
017_0697_a_01L≪해석≫ 제 성품과 그 가명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다섯 가지 쌓임[五陰]을 제대로 내세우는 것을 이르되 제 성품이라 하거늘, 보살이 찾아 생각하는 것은 다만 저 성품편의 가명을 볼 뿐이고 정작 제 성품은 보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고 말함이니 다른 것이란, 곧 제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 물질 쌓임 등의 가명을 해석함에 있어서 난식가운데에 내세울 수 없음은 곧 내세워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양을 여의고 나는 것을 여읨이란, 모양을 여읨은 곧 분별하는 성품을 여읜 것이고, 나는 것을 여읨은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여읜 것이다. 이 가명은 다만 한결같이 조작하는 것을 더할 뿐이거늘, 만약에 쌓임의 체를 끝까지 찾는다면 유일한 그대로의 진리[如如]만이 그 체가 더함도, 덜함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난식으로 내세운다면, 이미 한번 증가(增加)를 거듭했는데다가 난식 가운데 나아가서 다시 분별하여 다섯 가지 쌓임을 성립함으로써 두 번 다시 증가를 거듭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보살이 찾아 생각하는 것은 다만 제 성품 편의 가명을 볼 뿐이고 가명 편의 제 성품은 보지 않는 것이다.
≪논≫ 넷째인 차별과 그 가명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보살이 이것을 찾아 생각하되, 다만 차별의 가명만을 보고 다른 것을 보지 아니하나니, 다만 차별의 가명만을 보고 다른 것을 보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이 가명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기 때문이고, 모양도 없고 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름과 종류와 모양의 다른 것을 보는 동시에 다르지 않는 것도 보나니, 다름을 보는 것이란, 이름과 이치를 모두 객(客)으로 보는 것이고,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란, 열 가지 뒤바뀜 없는[十無倒] 가운데 이름과 글귀 맛의 이치가 있고, 이치가 없는 그 뒤바뀜 없는 가운데의 해석한 것과 같음이다.
017_0697_b_01L≪해석≫ 차별과 그 가명이란, 다섯 가지 쌓임 가운데에 다시 분별하여 모든 법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니, 이를테면 물질의 살핌 가운데에 감관[根]과 원소[大] 등을 내세우는 것과 같음이다. 보살이 이것을 찾아 생각하되, 다만 차별 부분의 가명만을 보고 가명 부분의 차별은 보지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다음에 이 차별을 해석함에 있어서 만약 난식(亂識)을 가르쳐 차별이라 한다면, 이는 곧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고, 만약 진실한 성품으로써 차별이라 한다면, 체(體)가 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보살이 이름과 종류와 모양의 다른 것을 보는 동시에 다르지 않는 것도 보는데, 이름과 종류를 말하는 것은 이름이 나타내는 것이고, 종류는 이 나타낼 바 이치의 종류라, 만약에 이름과 종류가 서로 상응(相應)하지 않는다면, 이 이름은 객(客)이니 이것인즉 다르다 하겠다. 다르지 않음도 보는 것이란 열 가지 뒤바뀜 없는[十無倒] 가운데 해석한 것처럼 만약에 이름과 이치가 상응함으로써 그 차례를 의지해 자주자주 수습(修習)한다고 말한다면, 이 이름은 종류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인즉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또 보살이 찾아 생각함에 있어서 이름과 종류가 만약 다른 것이라면, 일체 세간의 법이 이 이름과 종류를 벗어나지 않거늘, 보살이 이미 다른 것임을 찾아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은 이름을 이룩하지 못하고, 종류를 이룩하지 못하는 지라, 이 두 가지 근본이 이미 성취되지 않으니 만큼, 이것을 합하여 제 성품이라 하는 것도 성취되지 않고 두 제 성품 중에서 분리하여 차별이 되는 것도 역시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논≫ 그러므로 논에 이르기를, ‘보살이 이름과 종류의 다름을 보는 동시에 다르지 않음도 본다’고 하였으니, 다름을 보는 것이란, 이름과 종류를 분리한 그 같지 않음을 잡아 말한 것이다.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란, 제 성품과 차별이 합하여 이름과 종류가 성취된 것을 잡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가 바로 보살이 찾아 생각하는 경계인 것이다.
≪해석≫ 경계가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란, 첫째 이름이고, 둘째 종류이고, 셋째 제 성품이고, 넷째 차별이니, 이름[名]은 분별하는 성품이고, 종류와 제 성품과 차별은 분별함과 남을 의지하는 두 가지 성품에 공통되는 것이다. 이름은 본래 종류를 이름함이니, 종류가 이미 성립되지 않으며 이름도 성립되지 않는지라, 이 이름과 종류를 합하여 제 성품이라 하여도 제 성품이 성립되지 않으면, 이 제 성품을 분리하여 차별이라 하여도 차별이 성립되지 아니하나니, 남을 의지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 셋째의 이른바 네 가지 여실한 지혜란, 이름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 그 첫째이고, 종류를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 둘째이고, 제 성품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 그 셋째이고, 차별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 그 넷째이다.
017_0697_c_01L첫째인 이름을 찾아 생각하여 그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란, 보살이 이름을 찾아 생각함은 다만 이름을 얻을 뿐이고, 그 이름의 체(體)는 얻지 못하나니, 보살이 이 이름은 세간이 종류 가운데에서 내세운 것인 줄을 여실히 알아야 하는지라. 이 이름은 무릇 세 가지 뜻을 위해서이니, 생각하기 위해서가 그 하나이고, 보기 위해서가 그 둘이고, 말하기 위해서가 그 셋이다. 물질 등의 종류 가운데에 세간이 만약 물질들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능히 이 물질의 명색을 생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생각할 수가 없다면, 더하거나 덜 하는 소견의 집착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소견이 없고 집착이 없다면, 펼쳐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런 뜻이기 때문에 세간이 이름을 내세운 것이라 보살이 이 이름을 이와 같이 여실히 아는 것을 이르되 이름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라 한다.
≪해석≫ 여실히 이 이름을 아는 것이란, 두 가지 여실히 아는 것이 있으니, 하나는 세간을 잡아서 세 가지 뜻을 위해 이름을 내세운 것인 줄을 여실히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세간(出世間)을 잡아서 이 이름이 종류를 잡기 때문에 일어난 것인 줄을 여실히 관하는 것이다. 종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름도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논≫ 둘째인 종류를 찾아 생각하여 그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란, 보살의 종류를 찾아 생각함에 있어서 일체 언설(言說)을 떠나는 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들의 종류를 보는데 있어서도 일체 언설을 떠나는 것은 보살이 남을 의지하는 종류를 관하는 것이 다만 난식(亂識)일 뿐이어서 분별하는 성품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일체 언설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이 난식이 분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인데, 분별이 이미 없고 난식도 사라지는 것이 곧 진여(眞如)인지라,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이치의 종류를 찾아 생각하여 그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다.
017_0698_a_01L셋째인 제 성품을 찾아 생각하여 그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란, 보살이 물질들의 종류에 대해 제 성품과 그 가명을 찾아 생각하되, 이 종류가 제 성품은 없지만, 제 성품의 가명으로 말미암아 제 성품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함이니, 보살이 이 제 성품은 눈홀림과 그림자와 메아리와 물속 달의 형상과 같아서 그 체(體)는 사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인 줄을 여실히 보는지라 이와 같이 제 성품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은 매우 같은 이치로써 그 경계를 삼음이니, 왜냐하면 이름과 종류를 모두 제거하여 한꺼번에 다 ‘공’하기 때문이다.
≪해석≫ 맨 앞 첫째의 찾아 생각함은 다만 이름을 제거할 뿐이니, 이것인즉 얕은 것이라 하겠으며, 둘째의 찾아 생각함은 차례로 그 종류를 제거함이니, 이것인즉 중간을 차지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제 셋째의 찾아 생각함은 능히 이름과 종류를 함께 제거함이니, 이 때문에 매우 깊은 이치로써 그 경계를 삼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말한 바와 같이 체(體)가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 그 체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진여의 진리이기 때문에 물질이 없는가 하면, 세속의 진리이기 때문에 물질이 없는 것도 아니며, 그 가운데 가명으로 물질을 말하기 때문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 같으면서도 물질이 아니니, 이와 같이 볼 수 있기도 하고 볼 수 없기도 하며, 거리낌이 있기도 하고 거리낌이 없기도 한지라, 모든 나머지 차별의 도리가 다 이러한 것임을 알지니, 보살이 만약에 이 가명이 있음도 여의고 없음도 여읜 두 가지 성품을 여읜 것인 줄을 안다면, 이것이 곧 이치의 차별을 찾아 생각하여 여실한 지혜를 얻는다고 할 것이다. 또 이것을 이르되 찾아 생각하여 네 가지 여실한 지혜를 얻는 것이 바로 듣고 생각하는 지혜 가운데 있는 것이라 한다. 넷째의 네 가지 경계란, 첫째 두루 가득 찬 경계이고, 둘째 닦아 행하는 경계이고, 셋째 수승한 지혜의 경계이고, 넷째 미혹을 청정하게 하는 경계이다.
두루 가득 찬 경계가 또 네 가지 있으니, 분별하는 모양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분별하는 모양 없는 것이 그 둘이고, 종류의 구경(究竟)이 그 셋이고, 바른 일의 성취가 그 넷이다. 분별하는 모양이 있는 것과 분별하는 모양이 없는 것은 이른바 경계의 종류이고, 또 등분(等分)이라고 하나니 이는 고요한 선정의 지위이다. 경계란 곧 비바사나(毘婆舍那)의 반연이 그것이다.
017_0698_b_01L 경계의 종류란 곧 유식(唯識)이 그것이니, 왜냐하면 일체 세간과 세간을 뛰어난 경계가 유식을 벗어나지 않는지라, 이것이 세속 진리[如量]의 경계이기 때문이고, 이 세속 진리를 말미암아 이 때문에 두루 가득 찬 경계인 것이며, 또 한편 등분이란 것은, 이 유식이 바깥 경계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인데, 바깥 경계가 이미 없고 유식도 없고 경계가 모양이 없어 유식도 나는 것이 없으니만큼 이 일체 법의 평등함이 곧 진여의 진리[如理]로서의 공통 되는지라 이 때문에 등분이라고도 하고, 두루 가득 찬 경계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고요한 선정의 경계란, 법부와 이승(二乘)들의 얻는 그 선정을 뛰어났기 때문에 고요하다 한다. 산란한 마음의 반연할 바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선정이라 함이니, 보살이 깊고 깊은 관(觀)에 들어가야만 바야흐로 이 이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고요한 선정의 경계라고 한다. 이 가운데 만약 비바사나가 이길 경우엔 분별이 있음을 내세우는 것이고, 사마타(奢摩他)가 이길 경우엔 분별이 없음을 내세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분별이란, 분별하는 성품이 아니고, 다만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를 분별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셋째 종류의 구경이란, 앞에 말한 분별이 있고 분별이 없는 경계와 또는 진여의 진리와 세속의 진리인 두 가지 품류(品類)가 일체 진여와 세속의 구경을 거둬 다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두루 가득 찬 경계라고 말한 것이다. 바른 일의 성취란 이른바 보살이나 부처님의 전의(轉依)하는 그분별 없는 지혜의 반연하는 것을 바른 일이라 하고, 다시는 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성취라 하고, 모든 경계의 지혜를 거둬 다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두루 가득 찬 경계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인 닦아 행과는 경계란, 스스로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정(不淨)함을 관하는 경계가 그 하나이고, 한량없는 마음의 경계가 그 둘이고, 인연으로 관하는 경계가 그 셋이고, 경계를 분별함이 그 넷이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出入息]으로 염(念)하는 경계가 그 다섯이다. 처음의 부정함을 관하는 경계란 네 가지 욕심을 제거함이니, 이를테면 빛과 모양과 위의와 닿임의 욕심이 그것이다. 한량없는 마음의 경계란, 곧 네 가지 한량없는 관으로써 네 가지 진심[瞋]을 제거함이니, 이를테면 살해하고 괴롭히고 질투하고 불안하게 함이 그것이다.
017_0698_c_01L인연으로 관하는 경계란, 곧 열두 가지 인연의 관으로써 세 세상[三世]의 무명(無明)을 제거함이 그것이다. 경계를 분별함이란 경계에 나아가 관에 들어가서 ≺나≻와 ≺내 것≻을 제거함이 그것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으로 염하는 경계란, 머트러운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을 제거함이 그것이니, 이에 대한 넓은 해석은 여러 의과(義科)에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인 수승한 지혜의 경계도 스스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쌓임[集]에 대한 수승한 지혜가 그 처음이니, 이 지혜는 쌓임의 덩어리 가운데 하나를 고집하는 ≺아견(我見)≻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쌓임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세 세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물질들의 차별이 있으므로 다르다는 것이고, 셋째는 여러 가지 화합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고 다른 것이 화합하여 한 세간이 된 것을 이름하여 쌓임이라 하거늘, 외도들은 이와 반대로 ≺나≻를 고집하는 것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나≻가 항상한 것임을 고집하기 때문에 세 세간이라는 뜻으로써 파괴하고, 둘째는 ≺나≻가 하나인 것임을 고집하기 때문에 차별이라는 뜻으로써 파괴하고, 셋째는 ≺나≻가 진실히 있는 것임을 고집하기 때문에 화합이라는 뜻으로써 파괴하는지라 만약에 이 세 가지 뜻을 보는 사람이라면, 쌓임의 덩어리 가운데에서 ≺나≻가 하나라는 고집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다음은 경계[界]에 대한 수승한 지혜이니, 이 지혜는 ≺나≻를 고집하여 인(因)이라고 하는 것과 제지하기 위해서다.
경계가 열여덟 가지 있는데 그 경계를 내세우는 것은 종자의 뜻을 나타냄이다. 눈[眼] 등 여섯 가지 경계는 집착하는 종자로서 자기 종류 가운데에 같은 분야의 인을 삼기 때문이니, 앞의 눈 등 감관이 뒤의 눈 등 감관을 내는 그러한 것이다. 물질 등 여섯 가지 경계는 집착할 것의 종자로서 자기 종류 가운데에 같은 분야의 인을 내기 때문이니, 앞의 물질 등이 뒤의 물질 등을 내는 그러한 것이다. 안식(眼識) 등 여섯 가지 경계도 집착하는 종자로서 자기 종류 가운데에 같은 분야의 인을 내기 때문이니, 앞의 안식 등이 뒤의 안식 등을 내는 그러한 것이다.
017_0699_a_01L세 가지 무명(無明)을 제거하기 위해 이 때문에 몸 가운데에서 세 가지 종자를 나타냄이니, 세 가지 무명이란, 첫째 조작하는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종자를 설함이다. 둘째 업의 무명을 제거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의 종자를 설함이니, 왜냐하면 다만 물질 등이 그 업을 조작할 것이 되니만큼, 이 물질 등을 떠나서는 별다른 업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일의 무명을 제거하기 때문에 역시 집착하는 종자를 설함이니, 왜냐하면 다만 눈 등 여섯 가지 식(識)으로써 그 업의 일을 조작하니 만큼, 이 식을 떠나서는 별다른 업의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와 같이 경계를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고집하여 모든 법의 나는 인(因)이라고 하지 않으리니, 이 때문에 경계에 대한 수승한 지혜가 능히 ≺나≻를 인이라 함을 제거하는 것이며, 다음은 느낌[入]에 대한 수승한 지혜이니 이 지혜는 느끼는 이의 ≺아집(我執)≻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느낌이 열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느낌이란, 수용(受用)을 위해 받아들이는 문(門)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눈 등 여섯 가지 감관[六根]이 능히 괴로움과 즐거움과 버림을 수용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받아들이는 문이기 때문이다. 물질 등 여섯 가지 대경[六塵]이 능히 원수와 친한 이와 또는 그 중간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이 세 가지 생각을 받아들이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수용은 인(因)이란 뜻이고, 받아들이는 문이란, 감관과 대경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여섯 가지 감관이 능히 수용을 위한 받아들이는 문인 것이고, 여섯 가지 대경이 능히 수용을 위한 생각하는 문인 것이다. 이 감관과 대경이 다시 별다른 법이 없으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문이라고 함이니, 만약에 이 받아들이는 느낌을 깨달아 통달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고집하여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답】고집하는 것이 하나가 있으니, 이를테면 ≺나≻라는 그것이 능히 감관과 대경을 수용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를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 받아들임을 깨뜨리신 것이, 바로 안의 가관과 바깥의 대경을 빌어 능히 인연을 지어서 받아들임을 수용해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달아 아는 그것을 밝힌 것이다.
넷째는 인연 생기(生起)에 대한 수승한 지혜이니, 이 지혜는 ≺나≻를 고집하여 조작하는 그 소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인연 생기가 열두 가지 있으니, 이른바 무명(無明)으로부터 늙어 죽음까지가 그것이다.
017_0699_a_18L四者緣生勝智,爲除執我爲作者見。緣生有十二種,謂無明乃至老死。
017_0699_b_01L인연 생기가 두 가지 뜻이 있고, 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두 가지란 첫째 늘지 않음과, 둘째 줄지 않음이 그것이니,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와 일의 세 가지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다. 세 가지 뜻이란, 이른바 항상함이 없음과 일이 없음과 공능[能]이 있는 것을 말함이니, 이 세 가지가 바로 인연의 모양이다. 느는 원인이란, 항상 머무는 법을 고집하여 지어감[行]의 원인과 또한 일체 평등하지 않는 원인을 삼음이니, 이를테면 가는 티끌과 제 성품과 자재천(自在天) 따위가 능히 지어감과 또한 늙어 죽음을 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느는 원인이라고 한다.
평등하지 않다는 말은 저 외도들이 고집하기를, ‘원인은 항상하되 결과는 항상함이 없고 원인은 남을 따라 나지 않으면서 다만 결과를 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원인과 결과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는 것이며, 주는 원인이란 이른바 모든 지어감이 자연히 있어서 원인을 따라 나지 않음을 고집하는 것이라 이를 주는 원인이라고 한다. 통틀어 늘고 주는 원인이라 함은 만약에 원인의 용(用)을 논한다면, 반드시 항상함이 없음과 일이 없음과 공능이 있는 이 세 가지가 늘거나 줄 수 없는 것이거든,
만약에 외도들의 고집하는 바와 같이 따로 항상하는 법이 있어서 가는 티끌도 능히 지어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이 세 가지 뜻을 늘게 하는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느는 원인이라 할 것이다. 또 외도들의 고집하는 바와 같이 지어감 따위가 자연히 있는 것이어서 원인을 따라 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세 가지 뜻이 뒤바뀌는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주는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느는 결과란 이른바 그 지어감이 본래부터 체(體)가 있어 무명을 반연하여 나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을 느는 결과라 한다. 주는 결과란 이른바 그 지어감 따위가 없되 무명을 따라 나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을 주는 결과라 한다. 느는 일이란, 이른바 무명도 따로 공용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무명과는 다르고, 또 지어감과는 다름을 고집하는 것이니, 따로 이 공용이 있기 때문에 무명이 바야흐로 지어 감을 낼 수 있다고 고집하는 지라, 이것을 이르되 느는 일이라 하고, 주는 일이란 이른바 그 무명이 공능은 없지만 능히 지어 감을 낼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만 무명은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지어감의 원인이 무명의 공능을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하는지라 이것을 이르되, 주는 일이라 함이니, 만약에 이 세 가지 곳의 늘고 주는 것을 여읜다면, 이것이 곧 느는 것도 없고 주는 것도 없는 열두 가지 인연 생기리라 말하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다만 지어감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과 원인으로 말미암아 나지 않는 것만을 근거로 삼아 말하고, 무명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들은 말하지 아니합니다.
017_0699_b_21L問曰:何故但據行由因生、不由因生,不說無明由因等耶?
017_0699_c_01L【답】지어감이 이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치우치게 이 행을 말했으나 그 뜻은 무명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항상함이 없고 일이 없고 공능이 있음을 인연의 모양이라고 한 것은 항상함이 없음이란, 이른바 법은 있지 않으면서도 없는 것이라 만약에 이것으로써 원인을 삼는다면 능히 평등하지 않는 원인이라든가, 또는 원인이 없다는 고집을 깨뜨릴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있지 않으면서도 없다는 것은 항상하다는 원인을 깨뜨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항상함이 없는 것을 이르되 원인이 있고 또는 평등한 원인이라 하는 것이며, 일이 없음이란, 이른바 일체 있다는 법은 같은 종류가 모이고 쌓임이 그것이라, 이 모이고 쌓임을 따라 과거에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 생겨나게 되나니, 이 같은 종류의 원인이 다만 모이고 쌓이는 것이 있음으로써 능히 뒷날의 결과를 낼 수 있을 뿐이고 별다른 공용은 없으니 만큼, 이것으로써 원인을 삼는다면 그 따로 일이 있다는 고집을 깨뜨릴 것이다.
이른바 같은 종류란, 원인과 결과가 서로 같다는 말이니, 원인이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결과도 역시 항상함이 없는 것이다. 공능이 있음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기 때문에 저것이 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저것이 있고 저것이 나는, 그 저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고 나는 것이지, 스스로를 말미암아 있고 나거나 그 밖의 남으로 말미암아 있고 나는 것이 아닌지라, 결정코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고 나는 것이니 만큼, 이 때문에 이것이 저것에 대해 반드시 공능이 있으니, 이를 이르되 공능이 있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무명이 저 지어감을 내는 것도 지어감이 스스로 나지 않고 무명으로 말미암아 나는지라, 이 때문에 저것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지, 스스로를 말미암아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재(自在) 따위로 말미암아 나지 않기 때문에 남을 말미암아 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는 것은 원인이 없다는 그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고, 이것이 나기 때문에 저것이 나는 것은 항상한 원인이라는 그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다. 항상한 법은 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기 때문에 저것이 나는지라, 이 때문에 이것이 저것에 대해 별일을 짓지 않는 줄을 아는 것은 곧 별일이 있다는 그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을 떠나서는 저것이 이룩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저것에 대해 자유로히 운전하는 공능이 없지 않는 줄을 아는 것은 곧 공능이 없다는 그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니, 만약에 이 수승한 지혜를 얻는 사람이라면, 그는 곧 조작하는 ≺아집≻을 제거할 것이다.
017_0700_a_01L끝으로 그럴 수 있는 곳과 그럴 수 없는 곳을 아는 수승한 지혜이다. 이 지혜는 ≺나≻와 자재라는 고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른바 그럴 수 있는 곳과 그럴 수 없는 곳이란, 다른 데에 계속(繫屬)되어 자재롭지 못한 것을 그 뜻으로 삼음이니, 이 계속되는 것을 이르되 그럴 수 있는 곳이라 하고, 계속되지 않는 것을 이르되 그럴 수 없는 곳이라 한다. 그럴 수 있는 곳과 그럴 수 없는 곳이 일곱 가지가 있으니,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사랑스러운 것이 그 둘이고, 청정한 것이 그 셋이고, 같이 태어나는 것이 그 넷이고, 증상(增上)한 것이 그 다섯이고, 얻음에 이른 것[至得]이 그 여섯이고, 수행이 그 일곱이니, 중생이 이 일곱 가지 곳에 계속되어서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017_0700_b_01L사랑스럽지 않는 것이란, 이른바 중생으로서 나쁜 갈래[惡道]에 계속된 것이다. 사랑스러운 것이란, 이른바 중생으로서 좋은 갈래[善道]에 계속된 것이고, 또는 그 좋은 갈래에 계속되어 있지는 아니했더라도 반드시 좋은 갈래에 태어날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청정한 것이란, 이른바 중생이 일곱 가지 깨달음[七覺]을 닦지 못하고 다섯 가지 가림[五蓋]을 제거하지 못하고 괴로움의 언저리를 다 끊지 못해 번뇌에 계속됨으로써 그 청정한 법에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같이 태어나는 것이란, 이른바 두 여래나 두 전륜성왕(轉輪聖王)은 결코 같은 때, 같은 곳에 같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같이 태어남에 자재로움을 얻지 못한 것은 그 같을 이 없는 이의 태어남에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증상한 것이란, 이른바 여인(女人)으로선 전륜성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전륜성왕만이 자재로움에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얻음에 이른 것이란, 이른바 여인으로선 연각(緣覺)과 부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이 얻음에 이르는 것은 대장부에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이른바 바른 소견을 갖춘 사람은 살생 따위 나쁜 행을 짓지 않고 다만 범부들이 짓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수행은 진리를 본 이에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대략 설하자면 세 가지 계속이 있으니, 이른바 업과 미혹과 태어남이 그것이다. 맨 처음의 두 가지는 업에 계속된 것이고, 다음의 한 가지는 미혹에 계속된 것이고, 뒤의 네 가지는 태어남에 계속된 것이니, 만약에 이 일곱 가지 그럴 수 있는 곳과 그럴 수 없는 곳을 요달하는 사람이라면, 곧 ≺나≻와 자재라는 고집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그럴 수 있는 곳과 그럴 수 없는 곳을 아는 수승한 지혜라 한다. 이 다섯 가지를 이름하여 수승한 지혜의 경계라 한다. 수승한 지혜가 바로 ≺인아(人我)≻의 ‘공’한 지혜이니, 이 다섯 가지 법문은 다섯 가지 ≺인아≻의 ‘공’한 이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넷째인 미혹을 청정케 하는 경계란, 두 가지 경계가 있으니 세간 도(道)의 경계가 그 하나이고, 세간을 뛰어난 도의 경계가 그 둘이다. 세간 도의 경계가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하품의 지위가 세 가지 모양이니 이를테면 추중한 움직임과 근심의 핍박과 두터운 장애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품의 지위가 또한 세 가지 모양이니 이를테면, 적정함과 미묘함과 멀리 여읨이 그것이다. 둘째, 세간을 뛰어난 도의 경계가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번뇌의 장애를 여의기 위해 네 가지 진리의 관[四諦觀]을 닦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체 지혜의 장애를 여의기 위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관[非安立諦觀]을 닦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계가 능히 세 가지 장애를 제거할 수 있으니, 앞의 세간 도를 관하는 경계는 범부의 장애 곧 가죽[皮]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
다음의 네 가지 진리를 관하는 경계는 이승(二乘) 장애 곧 살[肉]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 맨 뒤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관하는 경계는 보살의 장애 곧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미혹을 청정케 하는 경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행[聖行]의 네 가지 찾아 생각하는 것과 네 가지 여실한 지혜와 네 가지 경계를 밝힘은 이 네 가지 도로 말미암아 능히 전의(轉依)를 얻음이다. 이 밖에 다시 세 가지 전의가 있는 것은 곧 삼승(三乘)의 전의가 그것이다. 이승(二乘) 중에 또 성문(聲聞)으로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한결같이 적정(寂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菩提)에 회향하는 것이다.
017_0700_c_01L보살의 전의는 빠른 방편을 닦기도 하고, 두 가지 없는 지혜에 의지하기도 하나니, 빠른 방편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더없는 법계(法界)를 통달함이니, 곧 반야(般若)가 그대로 그 경계를 삼는 것이요, 둘째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함이니, 곧 대비(大悲)가 일체 중생들을 반연함으로 그 경계를 삼는 것이요, 셋째 바른 노력의 공용(功用)이 스스로 두 가지가 있으니, 미혹을 조복하거나 미혹을 섭수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지혜를 닦거나 지혜를 조복하는 것이 그 둘이다. 미혹을 조복하는 것이란 다른 범부들을 위해서이니 만약에 미혹이 많다면 스스로를 이익되게 할 수도 없거늘, 하물며 남을 이익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부지런히 미혹을 조복하는 것이다. 미혹을 섭수하는 것이란, 다른 이승(二乘)들을 위해서이니, 만약에 미혹이 없는 사람으로서 한결 열반에만 나아간다면, 부처님 법을 성숙하여 중생들을 교화할 수 없는지라, 이 때문에 보살이 부지런히 미혹된 중생들을 섭수하는 것이고 지혜를 닦는 것이란, 역시 다른 범부들을 위해서이니, 만약에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러움에 물이 들어서 곧 생사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부지런히 지혜를 닦는 것이다.
지혜를 조복하는 것이란, 역시 다른 이승(二乘)들을 위해서이니, 만약에 치우친 지혜만을 닦는다면 생사를 버리고서 스스로를 이익되게 하거나 남을 이익되게 할 수 없을지라 이 때문에 빠른 노력을 일으켜 이승들의 지혜를 조복함이니, 이것을 이르되 바른 노력에 대한 차생의 공용이라 한다. 그리고 넷째 중생들의 일을 관함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제거하는 것이니, 만약에 보살이 스스로의 이익만을 관하여 생사를 제거한다면, 이승들과 같을 것이다. 만약에 보살이 중생들만을 관하여 생사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 세간 범부들의 부모(父母)와 같을 것이다. 만약에 이 두 가지 행을 번복한다면 능히 자타(自他)의 공통된 이익을 함께 성취하리니, 이것을 이르되 중생들의 일을 관하는 것이라 한다. 다섯째 견줄 데 없고 더없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이니, 견줄 데 없는 지혜란, 여래의 지혜를 말함이다. 이 지혜는 함이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로서 그 체(體)를 살기 때문이고, 함이 없는 것도 아니니, 지견(知見)으로써 그 체를 삼기 때문이다.
≪해석≫ 함이 없는 것도 아님이 그 지견으로써 체를 삼기 때문이란 것은 소승(小乘)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라야 다시는 지견이 없고 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없는 지혜란 것은 신지(信智)ㆍ승지(承智)ㆍ증지(證智)ㆍ지지(至智)이 네 가지 지혜 가운데에 가장 마지막이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보살의 방편이 이승(二乘)과 다른 것이다.
017_0701_a_01L이 다섯 가지 방편이 곧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의 방편은 진여의 진리로써 체(體)를 삼고, 둘째의 방편은 세속의 진리로써 체를 삼음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가 경계를 근거로 하여 지혜를 내는 지라, 그 내는 경계를 잡아서 방편의 체를 삼는 것이다. 셋째의 방편은 바른 행으로써 체를 삼고, 넷째의 방편은 공통된 이익으로써 체를 삼고, 다섯째의 방편은 의지하는 것으로써 체를 삼음이니, 비록 다섯 가지 뜻이 있기는 하나 역시 네 가지 이치를 벗어나지 않으니, 맨 앞의 두 가지는 방편의 반연하는 것과 반연할 것이다. 그 다음의 한 가지는 바른 방편인 것이고, 넷째의 것은 방편의 결과이니,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자타(自他)의 두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다섯째의 것은 방편의 의지이니 한편 이것을 이름하여 인인(因因)의 지혜라 함은 이 지혜를 의지하여 방편이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가지 없는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란, 인위(因位) 가운데 있어서 생사와 열반의 두 곳에 장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을 사랑하고, 생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과위(果位) 가운데 있어서 열반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있나니, 소승에 설하기를, ‘부처님은 마음 없는 선정에 드시었다가 도로 다시 마음을 일으키신다’는 것과 같음이다. 이 지혜는 인위(因位)와 과위(果位)에 있어서 집착하거나 집착하지 않음이 없고,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음이 없나니, 집착하거나 집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란, 범부 또는 이승과 다르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에 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017_0701_b_01L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란, 과의 지위[果地]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이승들은 남음이 있는 열반에 의지하지만, 이 지혜는 남음이 엇는 열반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마음을 일으킴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는 같을 이가 없는 지혜인 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지혜는 혹 생사에 집착하기도 하고 혹 열반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지 않으신지라, 이 지혜는 능히 일체 중생들을 다 이익되게 하나니, 왜냐하면 이 지혜는 능히 자기의 이익과 남을 이익되게 함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지혜는 혹 자기를 이익되게 할 뿐이거나, 혹은 자기와 남을 다 이익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 가지 곳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는 공능(功能)이 되는 것이다. 열반과 열반 아님을 다 해탈했기 때문에 세 가지 성품 없는 품의 구경(究竟)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