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외치는 소리가 같으면 어디에 있든 서로 호응하게 되고, 추구하는 도가 같으면 멀리 떨어져도 저절로 친밀하게 된다[聲同則應, 道合自鄰]1)고 한다. 이 때문에 법웅(法雄)은 불법의 근본 도리를 가르쳐 법자(法子)에게 그 도리를 널리 전할 것을 당부하였고, 공자[素王]2)는 역사 서술의 규범을 전하여 좌구명[素臣]3)에게 역사 서술을 부탁한 것이다. 대개 덕 있는 자는 반드시 뜻을 함께 하는 자가 있어 외롭지 않고, 성인의 가르침도 항상 호응하는 자가 있어 헛된 전달이 없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은 대승(大乘)의 가르침이 감춰진 보고[秘典]이다.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여 년이 지나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법을 다시 일으켰다. 마명보살은 당시 인도[五天]에서 ‘사해[四日]’4) 또는 ‘도왕(道王)’으로 불렸고, 물러서지 않는 불법의 바퀴[不退輪]를 굴렸으며 영원한 불법을 깨달아 흔들림이 없는 경지[無生忍]를 이루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지인(智印)을 새기고 궁극의 진공(眞空)에 거처하며, 파사(波奢)5)에게 불법의 전파와 부흥을 부탁받고 석가세존[釋尊]으로부터 아득히 이어져온 가르침도 잇게 되었다. 때문에 불법의 요체를 중생에게 잘 설법하였고 속세의 가르침이 잘못됐음을 크게 깨우치게 해서 중생을 불법의 세계로 잘 인도하였으며, 나아가 중생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신앙의 뿌리를 내려주고, 이해하기 어려운 불법의 씨앗을 심고자, 이 대승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이 대승기신론을 지은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고 가장 뛰어난 대승[上乘]의 가르침을 설명한 것이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불법의 가르침들이 오직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알려서, 모든 부처의 은미한 말씀들이 본래 일심(一心)에서 비롯됐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집착을 버려 불법의 진리를 잃지 않고, 청정한 마음을 수행하여 세속의 허상을 잊게 하여서, 적은 경문으로도 많은 불법의 의미를 섭렵하고, 속세의 현상이 허깨비임을 깨달아 깊은 불법의 진리로 들어가게 하였다. 홀로 환하구나!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는 지혜의 달[智月]이여, 도도히 흐르는구나! 불성의 바다로 넘실대며 흘러드는 선법의 강[禪河]이여. 미혹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이켜 불법의 진리로 귀의하는 데 이 대승기신론을 통하지 않음이 없구나.
이 대승기신론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질 때 범문이 모두 두 번 번역되었다. 첫 번째 번역본[初本]은 서인도(西印度) 삼장법사(三藏法師) 파라말타(波羅末陁)의 번역으로, 곧 진제(眞諦)가 양나라[梁] 무제(武帝) 승성(承聖) 3년 세차(歲次)로는 계유(癸酉, 553)년6) 9월 10일 형주(衡州) 시흥군(始興郡) 건흥사(建興寺)에서 양주(揚州) 출신 사문(沙門) 지개(智愷)와 함께 번역한 것이다.
017_0702_a_01L 그리고 현재 이 두 번째 번역본[此本]은, 먼저 우전국(于闐國) 삼장법사(三藏法師) 실차난타(實叉難陁)가 대승기신론 범문(梵文)을 인도에서 가져와 장안에 이르렀고, 또 서경(西京:장안) 자은탑(慈恩塔) 안에서 옛날 범문을 얻게 되어, 실차난타가 의학(義學) 사문(沙門)인 형주(荊州)의 홍경(弘景)ㆍ숭복사[崇福]의 법장(法藏) 등과 함께 대주(大周) 성력(聖曆) 3년 세차(歲次)로는 계해(癸亥)년7) 10월 임오삭(壬午朔) 8일 기축(己丑)에 수기사(授記寺)에서 화엄경(花嚴經)과 대승기신론을 차례로 번역하였다. 사문(沙門) 복례(復禮)가 번역문를 써서 2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옛 번역과 비교할 때 새로 첨가된 내용도 있고 없어진 내용도 있는데, 이것은 번역자의 뜻이거나 범문(梵文)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이치가 심오하면 믿기 어렵고 도가 높으면 마도[魔]가 왕성히 일어나니, 더구나 전쟁과 재해가 잇달아 더욱 많이 일어나는 말세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편견에 사로잡힌 무리들[偏見之流]이 『성유식(成唯識)』8)에 집착하여 이 대승기신론에서 진제[眞:출세간의 진리]와 속제[妄:세속의 진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한 것을 헐뜯고 깎아내려, 이미 말에서 편견이 형성되었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편견이 점점 커져서, 대승경전[方等]의 단이슬[甘露]을 바꾸어 독약(毒藥)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오직 부처와 부처[唯佛與佛]]9)만이 모든 불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남김없이 궁구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속세에 연연하는 중생[凡心]이 부처님의 가르침[聖旨]을 번번이 비난하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무릇 진여(眞如)란 모든 만물의 본성이므로, 헤아리기 어려운 업의 작용[業用]을 갖췄고 공허하지 않은 훌륭한 덕[勝德]을 쌓아서, 안으로 세속의 진리[妄法]에 스며들어 생사고락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승만경(勝鬘經)』10)에 이르기를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생사고락(生死苦樂)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한다”라고 하였다. 또 경(經)에 이르기를 “악행을 많이 행하여 착한 성품이 전혀 없는 사람[闡提之人]도 미래에 불성의 힘[佛性力] 때문에 착한 성품의 뿌리[善根]가 다시 생겨난다”라고 하였으니, 저 여의보주[淨珠]가 혼탁한 물을 맑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승의(勝義:궁극의 이치)가 항상 선하다는 것이니, 태허(太虛)에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불성(佛性)은 항상 존재함으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三世)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고, 허공(虛空)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三世)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현상의 공[事空]에 집착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일률적으로 만들려 하는가.
017_0702_b_01L무릇 속제[妄:속세의 진리]를 논의하는 것은 이치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불성을 흐리게 하여, 이런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논의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그 흘러드는 곳에 따라 여러 가지 맛[種種味]이 난다”고 한 것이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여래장[如來藏]은 시작도 알 수 없는 때부터 허위(虛僞)와 악습(惡習)이 차츰 스며들게 되어 아뢰야장[識藏]으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밀엄경(密嚴經)』에서 이르기를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여래장(如來藏)은 아뢰야(阿賴耶)라 한다’고 하셨으나 ‘어리석은 지혜로는 여래장[藏]이 곧 아뢰야식(賴耶識)인 줄 모른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아직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불성의 본체는 깨끗하고, 불성은 변하지 않았으나 속세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그러나 약초[藥]의 진미(眞味)는 산에 그대로 있으니, 하늘에 있는 둥근 달[滿月]과 같은 것이다”11)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비록 오도(五道)12)에 처하여, 별도로 다른 몸[異身]을 받게 될지라도 이 불성(佛性)이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진제[眞:출세간의 진리)가 속제[妄:세속의 진리]에 스며들지 못하고 속제[妄]가 진제[眞]에 배어들지 못하면, 진제와 속제가 각각 별도로 존재하니, 어찌 중도(中道)에서 만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양(梁)나라 때 『섭론(攝論)』에서 이르기를 “지혜가 지극히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은 출세간의 진리[眞]와 세속의 진리[俗]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3)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은 진제[眞:출세간의 진리]가 속제[妄: 세속의 진리]의 본체가 되고, 속제는 진제를 의지해 만들어졌으니, 불성과 현상[性相]이 모두 융합된 것으로 보고 동일화[一]하는 것과 차별화[異] 하는 것의 두 갈래를 모두 부인한다. 그러므로 『밀엄경(密嚴經)』에 이르기를 “여래청정장(如來淸淨藏)이 세속의 아뢰야식[阿賴耶]이니, 마치 금(金)과 반지[指環]처럼 돌고 돌아 차별(差別)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聖教]이 이처럼 명백하니, 어찌 의심하는가. 진실로 현상[相]에 얽매여 진제[眞]를 거스르고 말단[末]을 탐구하여 근본[本]을 버리며, 말[言]은 법도[規矩]를 벗어나고 행동[動]은 헛된 논리[戲論]를 좇기만 하여, 스스로 부처님의 책망을 초래하니 너무나 슬프도다.
나는 젊을 때부터 이 대승기신론에 온 마음을 쏟았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으며 이것을 읊조리고 암송하는 데 피곤도 잊었다. 그 결과 서툴지만 대승기신론을 20여 회[遍]나 되풀이 전하게 되었다. 비록 아직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온전히 궁구하지 못하고 그 경문의 의미를 조잡하게 이해했을지라도,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밝힌 것은 이 대승기신론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로 여기노라. 바라건대 불심이 굳건한 후학[宗心之士]이 때마다 이 대승기신론을 열람하고 날마다 정진하여 공덕을 이루길 바라노라. 이에 서문을 짓노라.
이 가운데의 작인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요, 이양(利養) 등을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적인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승법을 감당해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약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켜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다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마음을 조복하여 삼독(三毒)을 여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관(止觀)을 닦아 범부나 소승들의 허물을 물리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일곱째는 대승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생각하여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끝내 대승의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덟째는 대승을 믿고 좋아하는 이익을 드러내 보여 모든 중생[含識]에게 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해 돌아오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7_0703_a_01L이 모든 말씀과 이치[義]는 대승경전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와 욕구가 같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반연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 논을 짓는다. 이는 다시 무슨 뜻인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가 뛰어나고 부처님의 모습과 마음도 수승하여 한 음성[一音]으로 끝없는 이치를 열어 연설하기 때문에 논이 필요치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엔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경을 조금만 보고도 많은 이치를 이해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경을 널리 보고서야 바르게 이해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지혜의 힘이 없어 광대한 논설을 두려워하고 간략한 논이 광대한 이치를 품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바른 수행을 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이제 마지막 부류의 사람을 위한 까닭에 여래의 가장 수승하고 심히 깊고 끝없는 이치를 묶어서 이 논을 짓는다.
어떤 것이 입의분인가? 마하연(摩訶衍)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법(有法)1)과 법이다. 유법이란 일체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나니,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 그대로가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요, 이 심생멸(心生滅)의 인연(因緣)과 상(相)이 능히 대승의 체(體)ㆍ상(相)과 용(用)을 드러내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이란 간략히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가 염(染)에 있건 정(淨)에 있건 그 성품은 항상 평등하여 증감(增減)도 없고 달라짐[別異]도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본래부터 무량ㆍ무변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것[乘]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가 이를 타고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해석분(解釋分)인가? 여기에 세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보임[顯示實義]과 삿된 집착을 물리침[對治邪執]과 바른 도를 수행하는 모습을 분석한 것[分別修行正道]이다. 이 가운데 현시실의(顯示實義)란 한마음[一心]에 의하여 두 가지 문[二門]이 있으니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제각기 일체 법을 껴안고 있으니 이들은 서로서로가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703_b_01L심진여문(心眞如門)이란 온 법계를 하나로 묶는 큰 법문의 틀인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니 이 마음의 본성품은 생멸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법은 모두가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나 만일 망념을 여의면 경계의 차별된 모습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어(言語)의 길이 끊겼고 일체 문자로 드러내어 설명하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반연할 길이 끊겨서 아무런 모습도 없다. 끝내 평등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서 오직 일심이기 때문에 진여라 한다. 진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로 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모든 언어는 거짓일 뿐 진실하지 않나니 다만 망념을 따를 뿐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말은 하였으나 이 또한 상이 없나니 다만 모든 언어 가운데의 극치일 뿐이다. 이 말로써 저 말을 물리쳤을 뿐이요 그 본체나 본성에는 물리칠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다.
017_0703_c_01L또 진여란 것은 언어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두 가지는 차별이 있다. 첫째는 진실공(眞實空)이니 진실하지 못한 상을 끝까지 멀리 여의고 진실의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실불공(眞實不空)이니, 본 성품이 끝없는 공덕을 갖추어 자기 본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공이란 본래부터 모든 염법(染法)이 어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차별된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니 이로써 알라.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非有相],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非無相], 유상과 무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有無相], 유상과 무상을 모두 배제하는 것도 아니며[非非有無相], 단일한 형상도 아니며[非一相], 차별된 형상도 아니며[非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一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을 모두 배제한 것도 아니다[非非一異相].
간략히 말하건대 일체 중생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으나 사실에 의해 말한다면 망념이란 것도 있지 않고 공의 성품이란 것 또한 공하니, 막아야 할 것이 없으면 막는 이도 따라서 없기 때문이다. 진실불공(眞實不空)이란 망념이 공하여 없음으로써 진심은 항상하여 변치 않고 맑은 법이 원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는 뜻에서 불공(不空)이라 한다. 그러나 불공의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니, 망념의 마음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망념을 여읜 지혜로 증득할 경지이기 때문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하여 생멸심(生滅心)이 움직이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이 생멸과 화합해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일제 법을 껴안고, 일체 법을 내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각의 이치[覺義]요, 둘째는 불각의 이치[不覺義]다.
각의 이치[覺義]란 마음의 으뜸가는 성품[第一義性]으로서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다.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에 허공계와 동등해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 그대로의 모습이니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如來平等法身]이다. 이 법신(法身)에 의하여 일체 여래를 본각(本覺)이라 하니 시각(始覺)을 상대하여 본각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이 될 때가 곧 본각인지라 따로 다른 각(覺)을 세운 것은 아니다. 시각(始覺)이란 것은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017_0704_a_01L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님[非究竟覺]이라 한다. 예컨대 범부가 앞생각엔 불각이어서 번뇌를 일으키다가 뒷생각에서 제어하고 항복시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각이라 할 수는 있으나 역시 불각이요, 이승의 무리[二乘人]나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들이 생각 있음[有念]과 생각 없음[無念]의 본체와 형상이 다른 것을 깨닫고 거친 분별[麤分別]을 버리면 비슷한 깨달음[相似覺]이라 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이 모두 명상이 없는 것을 깨달은 뒤에 중품의 분별[中品分別]을 버리면 상당한 수준의 깨달음인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만일 보살의 경지를 초과하여 끝맺는 도[究竟道]가 만족해져서 잠깐 사이[一念]에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각이라 할 수 있는 시각(始覺)이요, 깨달았다는 상도 멀리 여의어 미세한 분별[微細分別]마저 끝까지 다하여 마음의 근본인 성품이 항상 머무르면서 눈앞에 나타나면 이것을 여래의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어떤 중생이 일체 망념이 모습 없는 줄로 관찰하면 이것이 곧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다만 세속을 따라 말했을 뿐이나 그 첫 모습을 구하면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하물며 처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각이라 하지 못하나니,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무명과 망념이 있어 이어지면서 잠시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망념이 쉬면 즉시에 마음의 모습인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이 모두가 모습이 없는 것임을 알리니, 한마음의 앞과 뒤가 동시일 뿐 모두가 서로 응하지 못하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시각이란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아나니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본각이 염의 분별[染分別]을 따라 두 가지 차별된 모습이 생기나니, 첫째는 지혜의 바탕이 청정한 상[淨智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중생을 교화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상[不思議用相]이다.
017_0704_a_17L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差別相,一淨智相、二不思議用相。
017_0704_b_01L정지상(淨智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해서 공행(功行)이 만족해지면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전식(轉識)의 모습을 멸하면 법신의 청정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체 심과 식의 모습[心識相]은 그대로가 무명의 모습이거니와 본각과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무너지는 것도 아니요,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나니 파도가 바람을 인해 움직이지만 물의 성질은 움직이지 않고 바람이 멈출 때엔 파도는 사라지나 물의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무명이라는 바람이 흔드는 까닭에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모두가 형상이 없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본성의 청정한 마음은 요동하는 식의 근본이니 무명이 멸할 때에 요동하는 식은 따라서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또 각의 모습에는 네 가지 큰 이치가 있어 청정함이 허공 같고 밖은 거울 같으니, 첫째는 진실로 공한 큰 이치[眞實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과 그리고 깨달음의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은 큰 이치[眞實不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법이 원만히 성취되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품이며,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그 안에서 나타나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항상 머무는 한마음이며, 일체 물든 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며, 지혜의 바탕에 끝없는 무루의 공덕을 구족한 것으로 인(因)을 삼아 일체 중생의 마음에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장애를 여의는 큰 이치[實不空離障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두 가지를 영원히 끊고 화합식(和合識)이 멸하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경지에서 항상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시현하는 큰 이치[眞實不空示現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장애를 여읜 법에 의하여 응화(應化)해야 할 계제에 따라 여래 등의 갖가지 빛과 소리를 시현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017_0704_c_01L불각의 이치[不覺義]란 끝없는 옛적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깨닫지 못하는 마음[不覺心]이 일어나서 망념(妄念)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망념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바른 방위에 의한 까닭에 미혹했으나 미혹이란 것이 자체가 없어서 본래의 방위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과 망념이 있어 미혹이 생긴다. 그러나 그 불각은 원래 실체가 없어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또 불각을 상대하여 진각(眞覺)을 말하거니와 불각이 이미 없으므로 진각 또한 없다.
또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이 있어 세 가지 모습을 내어 서로 여의지 않는다.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움직이면 업이 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는 주체인 능견상(能見相)이니, 마음의 움직임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주체도 없다. 셋째는 보이는 대상인 경계상(境界相)이니, 보는 견에 의하여 허망한 경계가 나타나고 견을 여의면 경계도 없어진다.
허망한 경계인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을 낸다.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이른바 경계를 반연하여 사랑스럽다거나 사랑스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이른바 지혜에 의하여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느낌을 내어 상응함이 끊이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집착상(執着相)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이 이어짐에 의하여 집착이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집명등상(執名等相)이니, 이른바 집착에 의하여 명칭 등 모든 나열된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이른바 명칭 등에 집착함에 의하여 갖가지 온갖 차별된 업을 일으키는 것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이른바 업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염법(染法)은 모두가 제 모습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무명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또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017_0704_c_22L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一同相、二異相。
017_0705_a_01L동상(同相)이란 것은 마치 갖가지 토기(土器)가 모두 같은 흙의 모습이듯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갖가지 요술 같은 작용은 모두가 같은 진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열반에 들었고, 보리는 닦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생겨나는 모습도 아니어서 끝내 얻을 수도 없고, 어떤 색상으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염(染)을 따르는 요술 같은 작용일 뿐이요, 지혜가 색(色:물질)처럼 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지혜의 모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많은 것을 경전들에서 말씀하셨다. 이상(異相)이란 마치 갖가지 토기가 제각기 같지 않은 것같이 이 일도 그러하여서 무루와 무명의 요술 같은 작용의 모습이 차별된 것뿐이다.
또 생멸하는 동기인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모든 중생이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하여 무명과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보고[能見]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고[能取境界] 분별하여 상속하는 것[分別相續]을 의(意)라 한다.
이 의(意)에 다시 다섯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니 이른바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둘째는 전식(轉識)이니 움직인 마음에 의하여 경계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현식(現識)이니 이른바 일체 경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밝은 거울이 뭇 색상(色傷)을 나타내는 것 같이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가 이르기만 하면 곧 나타나되 전후도 없고 다른 공력을 말미암지도 않는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니 이른바 염과 정의 온갖 차별된 법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니 이른바 항상 뜻을 지어 상응하기를 끊이지 않아 과거의 선악 등의 업을 잘 간직하여 잃거나 무너짐이 없게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키되 어기거나 뛰어넘음이 없게 하고, 이미 지난 일을 흘연히 기억하게 하고, 아직 지나지 않은 일들을 공연히 분별하게 한다.
017_0705_b_01L그러므로 삼계의 일체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 제 성품을 삼나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주체로 삼아 망념을 좇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은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고 명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은 모두가 중생의 무명과 망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를 얻을 수 없건만 오직 허망한 분별심을 따라 일어난 것뿐이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이란 이른바 일체 범부가 상속식(相續識)에 의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갖가지로 여섯 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이니, 각기 다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하고, 사물을 분별해 알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견(見)과 애(愛) 등의 훈습에 의해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적부터의 무명의 훈습으로 일어난 식(識)은 범부나 이승(二乘)들의 지혜로는 알 바가 아니요, 해행지보살(解行地菩薩)이라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야 조금 알고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러도 다 알지 못하고 오직 여래만이 끝까지 분명히 아신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였으나 무명의 힘 때문에 물든 마음의 모습이 나타났고,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밝고 맑아서 변함이 없다. 또 본성이 분별이 없는 까닭에 비록 일체 경계를 두루 내지만 변하고 바뀜이 없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서로 어울리지 못하여 무명의 분별이 일어나서 온갖 물든 마음을 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매우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부처님만이 능히 아실뿐 다른 이의 경계는 아니다.
017_0705_c_01L이렇게 생겨난 물든 마음[染心]에는 여섯 가지 다름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執]이며, 상응하는 염심[相應染]이니, 성문과 연각과 그리고 신과 상응하는 지위[信相應地]로서 보살이 능히 멀리 여읜다. 둘째는 끊이지 않고 상응하는 염심이니, 신의 지위에 있는 보살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힘 때문에 조그만큼 여의고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다. 셋째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상응하는 염심이니, 구계지(具戒地)로부터 구혜지(具慧地)에 이르는 사이에 능히 조그만큼 여의고, 무상행지(無相行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멀리 여읜다. 넷째는 현색(現色)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不相應染]이니, 이는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끊어 없앤다. 다섯째는 견심(見心)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끊는다. 여섯째는 근본업(根本業)이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와 여래지(如來地)에서 끊는다.
염심(染心)이란 번뇌장(煩惱障)이니 진여를 아는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소지장(所知障)이니 세간을 건지는 업의 자재한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염심에 의하여 한량없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와 허망한 경계를 집착하여 일체법의 평등한 성품을 어기는 것이다. 일체 법의 성품은 평등하고 적멸하여 생기는 모습이 없지만 무명과 불각이 허망되게 각(覺)과 어긴다. 그러므로 일체 세간의 갖가지 경계와 차별된 업용(業用)에 대하여 모두를 여실히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706_a_01L또 생멸의 모습[生滅相]을 분별하건대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거친 것[麤相]이니 이른바 상응의 마음이요, 둘째는 미세한 것[細相]이니 이른바 불상응의 마음이다. 추 중의 추[麤中之麤]는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추 중의 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細中之麤]는 보살의 지혜 경계이다. 이 두 가지 모습은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는 힘을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은 불각이요, 연은 망령된 경계[妄境]이다.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의 마음이 멸하고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의 마음이 멸한다.
【답】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멸한다는 것은 다만 마음의 모습이 멸했을 뿐 마음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바람을 인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다가 바람이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멸하나 물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물이 멸한다면 움직이는 모습도 끊어지리니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하는 바[所依]가 없기 때문이거니와 물의 본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움직이는 모습은 상속한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거니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마음의 본체는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중생이 끊어지나니 능의도 소의도 없기 때문이거니와 마음의 본체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은 상속된다.
또 네 가지 법이 훈습(熏習)의 이치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일어나서 끊이지 않나니, 첫째는 정법이니 이른바 진여(眞如)요, 둘째는 염인(染因)이니 이른바 무명(無明)이요,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이른바 업식(業識)이요, 넷째는 망령된 경계[妄境]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훈습의 이치란 마치 세상의 의복이 본래는 구린내도 아니요 향내도 아니지만 어떤 물건으로 훈습하느냐에 따라 그 향기를 띄는 것같이, 진여인 정법의 성품은 물듦이 아니지만 무명이 훈습하기 때문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인 염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지만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맑은 기능인 정용(淨用)이 있다고 말한다.
017_0706_b_01L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켜 모든 염법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무명은 바로 진여를 훈습하나니, 이미 훈습한 뒤에는 망념(妄念)이 생긴다. 이 망념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된 경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망념으로 훈습하는 힘 때문에 갖가지 차별된 집착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은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
망경훈습(妄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分別熏]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執取熏]이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업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根本業熏]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일체 보살들로 하여금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계고(業繫苦)를 받게 하는 것이다. 무명훈습(無明熏習)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훈(根本熏)이니 업식(業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요, 둘째는 견애훈(見愛熏)이니 분별사식(分別事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眞如)로 무명에 훈습하는 것이니,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념심(妄念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게 한다. 이렇듯 망심으로 싫어하거나 구하는 인연으로 다시 진여를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어 그 본 성품이 청정함을 스스로 믿고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였을 뿐이어서 끝내 실체가 없는 줄로 안다.
이와 같이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법을 닦고 갖가지로 모든 수순하는 행을 일으키되 분별하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이 무량아승기겁을 지나면 관습의 힘 때문에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의 모습이 멸한다. 이와 같이 일체 염인(染因)과 염연(染緣)과 그리고 염과(染果)의 마음 자취[心相]가 모두 사라지면 비로소 열반을 얻어 갖가지 자재한 업용(業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017_0706_c_01L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分別事識熏)이니 일체 범부와 이승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상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의훈(意熏)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발심이 용맹하여서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빨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체훈(體熏)이요, 둘째는 용훈(用熏)이다. 체훈(體熏)이란 이른바 진여가 끝없는 옛적부터 일체 무량한 무루법을 갖추고 있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경계에 대응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항상 끊임없이 중생들의 마음을 훈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되 자기의 몸에 진실한 법이 있음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017_0707_a_01L또 부처님들의 법에는 인도 있고 연도 있나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그 일을 끝낼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품 같나니, 이것이 불의 진짜 인[正因]이거니와 만일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설사 안다 해도 아무런 공을 베풀지 않고도 불이 나와 나무를 태우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않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진여가 체훈(體熏)하는 정인(正因)의 힘이 있으나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의 연(緣)을 만나지 못했거나 설사 만났더라고 수승한 행을 닦지 않거나 지혜를 내지 않거나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고자 하면 옳지 못하다. 또 비록 선지식의 연이 있더라도 안에서 진여가 훈습해 주는 정인의 힘이 없다면 역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구족하여야 비로소 옳다.
어떤 것이 구족함인가? 이른바 스스로가 상속하는 가운데 훈습하는 힘과 불ㆍ보살님이 자비로 거두어 주심이 있으면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이 있음을 믿고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 성숙하게 하고, 여기에 다시 불ㆍ보살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이롭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심을 만나면 수승한 행을 닦아 마침내 성불하여 열반에 든다.
용훈(用熏)이란 곧 중생들의 바깥 인연[外緣]의 힘이니, 무량한 차별이 있으며 간략히 두 종류를 말한다. 첫째는 차별된 연[差別緣]이요, 둘째는 평등한 연[平等緣]이다.
017_0707_a_07L用熏者,卽是衆生,外緣之力,有無量義。略說二種,一差別緣、二平等緣。
차별연(差別緣)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처음에 발심하여 성불하기까지 불ㆍ보살 등 모든 선지식이 알맞은 분에 따라 몸을 나투어 보이시는 것이니, 부모ㆍ처자ㆍ권속ㆍ노비ㆍ친우ㆍ원수거나 혹은 천왕의 모습이거나 혹은 사섭(四攝), 혹은 육도(六度), 나아가서는 일체 보리행의 연과 대비(大悲)라고 부드러운 마음과 광대한 복과 지혜로써 갈무리하여 교화해야 할 일체 중생에게 훈습해서 그들로 하여금 보거나 듣게 하고 나아가서는 여래의 형상 등을 마음에 새겨 선근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이 연(緣)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연[近緣]이니 속히 보리를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 연[遠緣]이니 오랜 다음에야 비로소 얻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차별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이 늘어나는 연[增行緣]이요, 둘째는 도에 드는 연[入道緣]이다.
017_0707_b_01L이러한 지혜와 원으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불ㆍ보살님을 기억하게 하다가 항상은 뵙거나 혹은 들은 이에게 이익을 주고, 청정한 삼매에 들어 장애를 끊은 분에 따라 걸림이 없는 눈[無礙眼]을 얻고 잠깐 잠깐 사이에 일체 세계에서 평등하게 그리고 훤하게 한량없는 불ㆍ보살님을 뵙게 한다.
이 체와 용의 훈습[體用熏習]에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서로가 만나지 못하는 미상응(未相應)이요, 둘째는 서로가 만나는 이상응(已相應)이다. 미상응(未相應)이란 이른바 범부와 이승(二乘)과 초행보살(初行菩薩)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되 오직 믿음의 힘에 의하여 수행할 뿐 분별없는 마음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재한 업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7_0707_c_01L또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제불이 조금의 증감(增減)도 없다. 앞 시간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뒷 시간에 멸하는 것도 아니니 항상하고 완벽하다. 끝없는 예부터 본성품은 일체 공덕을 갖추었으니, 이른바 큰 지혜 광명의 이치와 온 법계에 두루 비추는 이치와 여실타계 분명히 깨닫는 이치와 본 성품이 청정한 마음인 이치와 항상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한 이치와 적정해서 변치 않는 이치 등이다. 이렇듯 항하사 수를 지나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부사의한 불법이 끊임이 없다. 이러한 이치에 의한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어떻게 세워졌는가? 일체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실로 분별이 없건만 불각(不覺) 때문에 분별의 마음이 일어나서 경계(境界)가 있는 것으로 보니, 이를 무명(無明)이라 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본래 맑은 것이므로 진여 그 자리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이치를 세운다. 만일 마음의 성품이 경계를 본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거니와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진여 그 자리에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이치[遍照法界義]를 세운다.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아니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것도 아니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도 아니며 적정(寂靜)도 아니어서 변함[變異]이며 자유롭지 못함[不自在]이다. 그런 까닭에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허망한 잡염(雜染)이 일어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움직임이 없으므로 그 자리에 진실되게 깨달아 아는 이치[眞實了知義]와 나아가서는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청정공덕상의 이치[淸淨功德相義]를 세운다.
마음에 일어남[起]이 있어 바깥 경계를 분별해 구할 것이 있다고 보면 안의 법[內法]에 부족한 바가 있겠거니와 끝없는 공덕은 그대로가 한마음 제 성품이어서 어떤 다른 법을 다시 구할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족함이 항하사를 지나되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고 부사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은 끊임이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말하며, 또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하며 또는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한다.
017_0708_a_01L또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일체 부처님들께서 인지(因地) 때에 큰 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과 사섭(四攝) 등의 행을 닦아 행하고, 중생이 자기 같다고 관찰하여 두루 구제하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겁의 수효를 정하지 않으며, 나와 남이 평등함을 여실히 알되 중생이란 상을 짓지 않으셨다. 이러한 큰 방편의 지혜로 끝없는 예로부터의 무명을 멸하고 본래부터 있는 법신을 깨달아 자유로이 부사의한 업[不思議業]을 일으키되 갖가지 자재하고 차별된 작용이 법계에 두루하여 진여와 꼭 같으나 그 용의 모습은 찾을 수도 없으셨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일체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뿐이기 때문이니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세제(世諦)의 경계와 작용이 없건만 다만 중생들의 보고 들음 등을 따르기 때문에 갖가지 작용이 있어 같지 않다.
이 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하는 것이다. 이른바 범부나 이승들이 마음으로 보는 바이니, 이를 화신(化身)이라 한다. 이 사람은 전식(轉識)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밖에서 왔다고 여겨 색(色)의 영역을 취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화신은 한량이 없다.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한 뒤로부터 구경지(舊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바로서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 한다. 몸에는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잘 생긴 모습이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에도 무량한 공덕과 장엄이 갖추어졌다. 보는 근기에 따라 무량하고 끝도 없고 가도 없고 끊어짐도 없지만 마음 밖에서 이렇듯이 보지는 않는다. 이 모든 공덕은 모두가 바라밀 등 무루행(無漏行)의 훈습과 부사의한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끝없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덕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도 한다.
017_0708_b_01L또 범부들이 보는 바는 거친 용[麤用]이니 육취(六趣)의 갖가지 차별에 따라 끝없는 공덕의 즐거운 모습이 있으니 이를 화신이라 한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들이 보는 바는 중품의 용[中品用]이니 진여의 실체를 깊이 믿기 때문에 조금만 보아도 여래의 몸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끊임도 없어서 오직 마음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라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미세한 분별을 여의지 못했나니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심지(淨心地)의 보살이 보는 바는 미세한 용[微細用]이니, 이와 같이 차츰 수승해져서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면 보는 일이 바야흐로 다한다. 이 보살의 미세한 용을 수용신(受用身)이라 하나니,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에 수용신이 있다고 보거니와 업식을 여의면 볼 수가 없다. 일체 여래는 모두가 법신이어서 피차가 차별된 색상으로 마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 부처님의 법신에 갖가지 차별된 색과 모습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 색과 모습을 나타내는가?
017_0708_b_12L問:若佛法身無有種種差別色相,云何能現種種諸色?
【답】 법신은 색의 실체이기 때문에 갖가지 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의 본 성품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인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고 마음의 본 성품이 곧 색의 자성인 것을 법신(法身)이라 한다. 법신에 의해 일체 여래께서 나투신 색신이 일체 처소 어디에나 두루하여 끊임이 없거든 시방의 보살이 자기의 능력과 좋아함에 따라 무량한 수용신과 무량한 장엄국토가 제각기 차별되지만 서로가 장애치 않고 끊임이 없음을 본다. 이렇게 나타난 색신은 일체 중생의 마음ㆍ뜻ㆍ의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나니, 이는 진여의 자재하고도 심히 깊은 용(用)이기 때문이다.
017_0708_c_01L또 중생들로 하여금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색 등의 모습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으로 관찰하게 하나니, 어떻게 성취되지 못하는가? 이른바 거친 색을 분석하여 차츰 미진(微塵)에 이르고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이 미진을 분석한다. 그러므로 거칠거나 미세한 모든 색은 오직 허망한 마음의 그림자일 뿐 실제로 있지 않다. 다른 온법(蘊法)을 추구하여 차츰 찰나(刹那)에 이르나 이 찰나의 상도 달라서 하나가 아니다. 무위(無爲)의 법도 이와 같아서 법계를 떠나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시방의 모든 법도 모두가 그러한 줄로 알라.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동쪽을 잘못 알아 서쪽이라 여기나 방위는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서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고 여기지만 실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일 움직이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치 않는 것임을 안다면 곧 진여의 문에 들어간다.
1)『장단경長短經』 논사(論士) 제7편에는 “무릇 사람은 같은 사물을 보게 되면 서로 보는 것이 같고, 같은 소리를 듣게 되면 서로 듣는 것도 같게 되며, 마음이 추구하는 덕이 같으면 아직 만나지 못했어도 마음으로 서로 친하게 되고, 퍼뜨리려는 도가 같으면 사는 곳이 아무리 달라도 서로 마음으로 호응한다[夫人同明者相見, 同聽者相聞, 德合則未見而相親, 聲同則處異而相應]”라고 하였다.
2)소왕(素王):공자를 가리킨다. 소왕은 제왕(帝王)의 덕을 지니고도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성인(聖人)을 이르는 말인데, 후한(後漢)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초기편(超奇篇)에 “공자는 왕을 하지 않았으니, 소왕의 업은 『춘추(春秋)』에 있다”라고 하였다.
3)소신(素臣):『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지은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孔子)를 소왕(素王)이라고 한 데 대하여 좌구명이 공자가 지은 『춘추』의 전(傳)을 지었기 때문에 소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4)사일(四日):당시 사람들이 고인도(古印度) 동부의 마명(馬鳴), 남부의 제바(提婆), 서부의 용수(龍樹), 북부의 구마라다(鳩摩羅多)를 합쳐 ‘네 개의 해’라고 불렀다.
5)파사(波奢):파도제파존자(波闍提婆尊者) 또는 협존자(脇尊者)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불타의 법계 제10조(祖)로서 숭배한다. 마명보살의 스승이다.
6)양 무제 승성(承聖) 3년은 계유(癸酉)년이 아니라 갑술(甲戌)년이다. 기록된 내용의 착오인 것 같다.
7)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측천무후가 사용한 연호 성력(聖歷)은 3년은 없고 2년까지만 있다. 그리고 성력 2년은 기해(己亥)년으로 서기 699년이다.
8)성유식(成唯識):중국 유식학(唯識學)의 승려 현장(玄奘)이 인도의 유식학과 관련된 고승 10인의 저술을 한 책으로 엮은 유식학의 기본서이다.
9)유불여불(唯佛與佛):부처가 몸소 체득한 깨달음은 언어로써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안다는 뜻이다.
10)승만경(勝鬘經):대승경전 가운데 『능가경』과 더불어 모든 중생이 여래가 될 바탕을 갖추고 있다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천명한 경전이다.
11)『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7에는 “비유컨대 설산(雪山)에 한 가지 맛이 나는 약초[一味藥]가 있는데 ‘낙미(樂味)’라고 불렀다. 그 맛은 아주 달콤했으나, 산속 깊은 덤불 아래 있어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향기를 맡고 곧 이 땅에 이 약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전륜왕(轉輪王)은, 이 설산(雪山)에서 이 약초를 만들었다. 곳곳에 나무 대롱[木筒]을 만들어 이 약초와 접하게 했다. 그리고 이 약초가 잘 익었을 때 그 즙이 땅을 따라 흘러나와 나무 대롱 가운데 모이는데 그 맛이 진미〔真正〕였다. 왕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 이 약초는 혹 시고 혹 짜고 혹 달고 혹 쓰고 혹 맵고 혹 담백한 맛이 났다. 이 약초의 일미(一味)가 그 흘러든 곳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맛이 났기 때문인데, 이 약초의 진미(真味)는 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니 마치 하늘에 둥근 달[滿月]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譬如雪山有一味藥,名曰樂味。其味極甜,在深叢下,人無能見。有人聞香,即知其地當有是藥。過去往世有轉輪王,於此雪山為此藥故,在在處處造作木筒,以接是藥,是藥熟時,從地流出,集木筒中,其味真正。王既歿已,其後是藥,或醋、或醎、或甜、或苦、或辛、或淡,如是一味,隨其流處有種種異,是藥真味停留在山,猶如滿月]”라는 내용이 있다.
12)오도(五道):천상, 인간세상, 지옥, 축생, 아귀의 다섯 세계를 의미한다.
13)『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권1에 보면 “지혜가 막혀 지극히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은 출세간의 진리와 세속의 진리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智障極盲闇, 謂眞俗別執]”라고 하였다.
1)전진유법(前陳有法)의 준말이니 어떤 사물의 정의를 제시할 때 사물의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물이 시원하다 할 때 물은 유법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