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745_a_01L방편심론(方便心論)
017_0745_a_01L方便心論一卷


길가야(吉迦夜) 한역
김철수 번역
017_0745_a_02L後魏西域三藏吉迦夜譯


1. 명조론품(明造論品)
017_0745_a_03L明造論品第一

만일 이 논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곧 모든 논법(論法)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깊고 그윽한 뜻을
이제 널리 설하리라.
017_0745_a_04L若能解此論
則達諸論法
如是深遠義
今當廣宣說

【문】논을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릇 논을 짓는다는 것은 성냄ㆍ원한ㆍ교만ㆍ방자함ㆍ거만함을 많이 일으키는 일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부드럽고 온화한 뜻이 적고, 다른 이의 악함은 드러내지만 자신의 착함은 스스로 칭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뭇 허물을 지혜로운 자는 꾸짖는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어진 성인들은 한량없는 방편으로 쟁론하는 것을 끊기를 독약이 든 그릇을 버리듯이 한다. 또한 논을 짓는 것은 내실은 조화롭고 유연한 것 같지만 외관은 많은 허물이 있다. 이런 까닭에 만일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런 쟁론의 법을 버려야 한다.
017_0745_a_06L問曰不應造論所以者何凡造論者多起恚恨憍逸貢高自擾亂心少柔和意顯現他惡自歎己善如斯衆過智者所呵是故一切諸賢聖人無量方便斷諍論者常樂遠離如捨毒器又造論者內實調柔外觀多過是以若欲自利利人應當捨此諍論之法
【답】그렇지 않다. 지금 이 논을 짓는 것은 논쟁에 이기려 하거나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착하고 악한 모든 상(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 논을 짓는 것이다. 세상에 논이 없다면 미혹한 자가 많아지고, 세간의 삿된 지식과 번지르르한 말솜씨에 모두가 미혹되어서 착하지 못한 업을 일으키고, 악도에 윤회하여 진실한 이익을 잃게 한다.
017_0745_a_13L答曰不然今造此論不爲勝負利養名聞但欲顯示善惡諸相故造此論世若無論迷惑者衆則爲世閒邪智巧辯所共誑惑起不善業輪迴惡趣失眞實利
만약 논에 통달한 자라면 곧 스스로 선(善)ㆍ악(惡)ㆍ공(空)의 모습을 분별하나니 온갖 마(魔)나 외도,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능히 어지럽히거나 부수지 못하고 장애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바른 논을 짓는 것이다. 또한 정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함이니, 마치 암바라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에 널리 가시나무를 심어 숲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열매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017_0745_a_18L若達論者則自分別善惡空相衆魔外道邪見之人無能惱壞作障㝵也故我爲欲利益衆生造此正論又欲令正法流布於世如爲修治菴婆羅果而外廣植荊棘之林防果故
017_0745_b_01L 지금 내가 논을 짓는 것 또한 이와 같이 정법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명성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대가 앞에서 쟁론이 쓸데없다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다. 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논을 지어야 한다.
017_0745_b_01L今我造論亦復如是欲護正不求名聞故汝前說長諍論者事不然爲護法故故應造論
【문】그대는 앞에서 이 논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모든 논법에 통달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모습을 설명하여라.
【답】이 논에서는 여덟 가지의 뜻1)이 있다고 분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의취에 통달하여 이해한다면 곧 능히 다른 모든 논법으로 확대된다. 마치 벼와 보리를 심고서 물을 대어 주면 곧 묘가 잘 자라서 번성하지만 피를 뽑아주지 않으면 좋은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이 여덟 가지를 듣더라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곧 모든 논법에 대해 전부 의혹을 일으킬 것이다. 만일 이 여덟 가지 뜻을 밝게 이해한다면 결정코 모든 논법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017_0745_b_03L問曰先言解此論者達諸論法當說其相
答曰此論分別有八種義若有能通達解其義趣則能廣爲其餘諸論種稻麥以水漑灌則嘉苗滋茂不去稊稗善穀不生若人雖聞此八不解其義則於諸論皆生疑惑設有明解斯八義者決定能達一切論法
【문】그대는 이 논을 이해하면 결정코 논법을 다 이해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모든 외도들도 논법이 있지 않는가?
017_0745_b_10L問曰汝言解此論者決了論法今諸外道有論法不耶
【답】있다. 위세사(衛世師)2)에게는 6제(諦)가 있으니, 이른바 타라표(陀羅驃)ㆍ구나(求那)ㆍ총제(總諦)ㆍ별제(別諦)ㆍ작제(作諦)ㆍ부작제(不作諦)3)이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논법(論法)이라고 이름하는데 비록 능히 통달하기는 하더라도 아직 모든 나머지 경론을 환히 분별하지 못한다.
017_0745_b_12L答曰如衛世師有六所謂陁羅驃求那摠諦別諦作諦不作諦如斯等比皆名論法雖善通猶不了別諸餘經論
이 같은 여덟 가지 심묘한 논법을 내가 이제 간략하게 설명하겠으니, 모든 논의의 문을 열기 위함이고 희론(戱論)을 끊기 위함이다. 첫째는 비유(譬喩)이고, 둘째는 수소집(隨所執)이고, 셋째는 어선(語善)이고, 넷째는 언실(言失)이고, 다섯째는 지인(知因)이고, 여섯째는 응시어(應時語)이고, 일곱째는 사인비인(似因非因)이고, 여덟째는 수어난(隨語難)이다.
017_0745_b_15L如此八種深妙論法我當略說爲開諸論門爲斷戲論故一曰譬喩二隨所執三曰語四曰言失五曰知因六應時語似因非因八隨語難
비유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구족유(具足喩)이고, 둘째는 소분유(少分喩)이다. 수소집이란 구경의(究竟義)이다. 어선이란 말은 뜻에 수순한다는 것이다. 언실이란 말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인이란 두 가지 인(因)을 능히 아는 것이니, 첫째는 생인(生因)이고, 둘째는 요인(了因)이다. 응시어란 먼저 계(界)와 입(入)을 말하고 뒤에는 5음(陰)을 말하면 이것을 불응시(不應時)라고 한다. 만일 말의 차례[言語次第]에 잘 통달했다면 이것을 곧 응시어라고 한다.
017_0745_b_19L喩有二種一具足喩二少分喩隨所執者名究竟義語善者謂語順於義言失者謂言乖於理知因者能知二因一生因二了因語應時者若先說界入後說五陰名不應時若善通達言語次第是則名曰應時語也
017_0745_c_01L 사인이란 마치 아지랑이[焰]가 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물이 아닌데 이것을 논하는 자가 말을 꾸며서 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사인이라고 이름한다. 수어난이란 마치 새 옷[新衣]이라고 말할 때에 곧 힐난하여 말하기를 옷은 때[時]가 아닌데 어떻게 새 것[新]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수어난이라고 이름한다.
내가 이러한 여덟 가지 뜻을 간략히 설명하였으니 이제는 차례로 그 모습을 자세하게 밝히겠다.
017_0745_c_02L似因者如焰似水而實非若有論者嚴飾言辭以爲水者名似因隨言難者如言新衣卽便難衣非是時云何名新如是等名隨言難也我已略說此八種義今當次第廣明其相
【문】그대는 앞에서 비유[喩]를 말하였는데 지금 세운 비유는 어떤 방편으로 짓는 것인가?
【답】만일 비유를 접하는 경우라면 범부와 성인이 똑같이 이해한 연후에 가히 설해야 한다. 마치 “이 마음의 움직임은 빠르게 부는 바람과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범부들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곧 마음이 가볍고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비유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017_0745_c_07L問曰汝前言喩今立喩者作何方便
答曰若說喩者凡聖同解然後可說如言是心動發猶如迅一切凡夫知風動故便得決了心爲輕躁若不知者不得爲喩
【문】어찌하여 그냥 바른 뜻만을 말하지 않고 비유로써 말하는가?
【답】무릇 비유를 말하는 것은 바른 뜻을 밝히기 위함이다.
017_0745_c_11L問曰何故不但說正義而說喩耶
答曰凡說喩者爲明正義
【문】그대는 앞에서는 범부와 성현이 똑같이 이해한 연후에야 비로소 비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무엇을 똑같다[同]고 하고 무엇을 다르다[異]고 하는가?
【답】마치 앞에서 든 바람의 비유가 똑같은 것이고, 성현은 열반을 얻지만 범부는 열반을 얻지 못하니 이것을 다르다고 이름한 것이다.
017_0745_c_13L問曰汝先言凡聖同解方得爲喩何者名同云何爲異
答曰如前風喩名之爲同聖得涅槃而凡不得是名爲異
【문】이미 비유의 모습을 말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집상(執相)인가?
【답】그 집착하는 바를 따라서 널리 인연을 인용하고, 뜻을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집(執)의 모습이라고 한다.
017_0745_c_16L問曰已說喩相執相云何
答曰隨其所執廣引因緣立義堅固名爲執相
【문】집법(執法)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체동(一切同), 둘째는 일체이(一切異), 셋째는 초동후이(初同後異), 넷째는 초이후동(初異後同)이다.
017_0745_c_18L問曰執法有幾
答曰有四一一切同二一切異三初同後異四初異後同
【문】그대는 이제 이 네 가지를 설명해야 한다.
問曰汝今應當說此四相
【답】무릇 뜻을 주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네 가지 지견(知見)에 의지해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직접 지각[現見], 둘째는 추리지[比知], 셋째는 비유지[以喩知], 넷째는 수경서(隨經書)이다.
017_0745_c_20L答曰凡欲立義當依四種知見何等爲四一者現見二者比知三以喩知四隨經書
일체동(一切同)이란 말하는 자가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말하면 묻는 자 또한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체동이라고 한다.
017_0745_c_23L一切同者如說者言無我我所問者亦說無我我所名一切同
017_0746_a_01L일체이(一切異)란 말하는 자가 다르다고 말하면 묻는 자가 곧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이(俱異)라고 한다.
017_0746_a_01L切異者說者言異問則說一是名俱
초동후이(初同後異)란 마치 말하는 자가 “직접 지각하는 법[現法]은 모두가 있으며 신(神)은 직접 지각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있다.”고 말하면, 묻는 자가 “어떤 때는 직접 지각의 법은 있다고 이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神)을 직접 지각할 수 없다면 어떻게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추리지로 말하여 신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직접 지각한 뒤에야 곧 추리할 수 있는 법인데 신은 직접 지각하는 법[現法]이 아니거늘 어떻게 추리할 수 있겠는가? 만일 또다시 비유로써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유사한 법[相似法]이 있은 연후에야 비유를 얻을 수 있거늘 신과 같은 부류를 무엇으로써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만일 경서(經書)에 따라서 신이 있다고 증명한다면 이 일도 있을 수 없다. 경서의 뜻 또한 이해하기 어려워서 어떤 때는 있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없다고 말하나니 무엇을 취하여 믿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초동후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6_a_03L初同後異者如說者曰現法皆有神非現見亦復是有問者或言現見之法可名爲有神若非現何得有耶若言比知而有神者要先現見後乃可比神非現法云何得比若復以喩明神有者有相似法然後得喩神類何等而爲喩乎若隨經書證有神者是事不可經書意亦難解或時言有或時言無云何取信是名初同後異
초이후동(初異後同)이란 마치 말하는 자가 “‘아’도 없고 ‘아소’도 없다.”고 말하면 묻는 자도 “‘아(我)’도 있고 ‘인(人)’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 두 논자가 모두 열반을 믿는 경우이다. 이것을 초이후동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6_a_11L初異後同者如說者言無我無所問者曰有我有人此二論者俱信涅是名初異後同
또다시 집법수의(執法隨義)에는 한량없이 많은 상(相)이 있으니 마치 12인연(因緣)ㆍ고습멸도(苦習滅道)ㆍ37품(品)ㆍ4사문과(沙門果)와 같은 이러한 법들은 부처님의 바른 뜻이라고 이름한다. 이른 아침에 예경하고, 살생하여 제사를 지내며, 온갖 향을 태우고, 모든 기름 등불을 바치는 이러한 네 가지를 이름하여 사화외도(事火外道)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63자(字)와 4구(句)의 뜻은 음성외도(音聲外道)이다.
017_0746_a_14L復次執法隨義有無量相如十二因緣苦習滅道三十七品四沙門果如是等法名佛正義如說晨朝禮敬殺生祭祠然衆香木獻諸油燈如是四種名事火外道十三字四句之義是音聲外道
017_0746_b_01L 약(藥)을 밝히는 데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약의 이름이고, 둘째는 약의 덕이고, 셋째는 약의 맛이고, 넷째는 약의 세력이고, 다섯째는 화합이고, 여섯째는 성숙이니 이것을 의법(醫法)이라고 이름한다. 6제(諦) 등과 같은 것은 위세사(衛世師)이다. 명초(冥初, puruṣa)는 하나이나 자아는 여럿이라고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승가(僧伽)4)이다. 여덟 가지 극미[入微]가 있으니 이른바 4대(大)ㆍ공(空)ㆍ의(意)ㆍ명(明)ㆍ무명(無明)이다. 8자재(自在)는 첫째로 능소(能小), 둘째로 위대(爲大), 셋째로 경거(輕擧), 넷째로 원도(遠到), 다섯째로 수소욕(隨所欲), 여섯째로 분신(分身), 일곱째로 존승(尊勝), 여덟째로 은몰(隱沒)이다. 이것을 유가외도(踰伽外道)5)라고 한다.
017_0746_a_19L明藥有六一藥名二藥德三藥味四藥勢五和合六成熟是名醫法如六諦衛世師有冥初一義多我異解僧伽有八微所謂四大無明八自在一能小二爲大三輕擧四遠五隨所欲六分身七尊勝八隱沒是名踰伽外道
명(命)과 무명(無命), 죄(罪)와 복(福), 루(漏)와 무루(無漏), 계구족(戒具足)과 박(縛)과 해(解), 5지(智)인 문지(聞智), 사지(思智), 자각지(自覺智), 혜지(慧智), 의지(義智)와 6장(障)인 불견장(不見障), 고수장(苦受障), 우치장(愚癡障), 명진장(命盡障), 성장(性障), 명장(名障)과 4탁(濁)인 진(瞋), 만(慢), 탐(貪), 첨(諂) 등이 있으니 이 모두를 니건타법(尼乾陀法)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6_b_03L有命無命罪福漏無漏差戒具足縛解五智聞智思智自覺慧智義智六障不見障苦受障愚癡障命盡障性障名障四濁是皆名爲尼乾陁法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체의 모든 법은 전부 유(有)인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것은 하나이다. 또 일체법은 모두가 구나(求那)가 있으므로 또한 하나라고 이름하며, 또 일체법은 명(冥)으로부터 처음에 생하였다. 근본이 하나이므로 이것은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또 머리와 발 등 몸을 이루는 것은 몸과 하나이다. 또 의지하는 것은 허공이므로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은 계일외도(計一外道)6)라고 이름한다.
017_0746_b_07L又有說言一切諸法盡是有故當知是一又一切法盡有求那亦名爲一又一切法從冥初生根本一故當知是一又頭足等成身與身爲一又依者是空當知是一如是等名計一外道
또 말하기를 “일체법은 다르다[異]. 왜냐하면 마치 머리와 발 등은 몸과 다른 것과 같다. 또 여러 모습은 차별되나니 마치 소가 말이 아닌 까닭에 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계이외도(計異外道)라고 이름한다. 만일 ‘일체법은 있기 때문에 같다[一]’라고 한다면, 유법(有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각(有覺)이고 둘째는 무각(無覺)이다. 어떤 것이 같은가? 인(因)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모두 이미 논파되었다.
017_0746_b_12L又言一切法異所以者何如頭足等與身爲異又衆相差別如牛非馬等故知法異如是等名計異外道若言一切法有故一者有法二種一有覺二無覺何爲一因不同故如是等法皆已摠
017_0746_c_01L논자들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고습멸도(苦習滅道)ㆍ12인연ㆍ유무(有無) 등의 법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한다면 이 모두 정인(正因)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같다고 말한다면 괴로움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고, 다르다고 말한다면 즐거움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같다거나 다른 것은 반드시 두 가지 경계에 떨어지니 부처님 법의 뜻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열반의 성품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아는가? 무릇 일체법은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 열반은 지각이 없는데 어떻게 즐겁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한다.
017_0746_b_18L論者言若有人說苦習滅道十二因緣有無等法爲一異者皆非正因所以者何若言一者則墮苦邊若言異者則墮樂邊是故有說若一若異必墮二邊非佛法義復次如有說言涅槃之性無苦無樂何以知之凡一切法以有覺故故有苦樂涅槃無覺云何言樂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즐거움은 있다. 왜냐하면 즐거움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낙수락(樂受樂), 둘째는 무뇌해(無惱害), 셋째는 무희구(無希求)이다. 열반 속에는 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열반은 즐겁다는 이름을 얻게 된다.”라고 한다.
017_0746_c_02L復有說者而言有樂所以者何樂有三種一樂受樂二無惱害三無悕求涅槃之中無所求故是故得名涅槃爲樂
【문】또 어떤 이는 묻기를 “나는 앞서 열반은 항상함을 이미 알았다. 지금 모든 행(行)과 더불어 다른 것인가?”라고 한다.
【답】그대가 만일 앞에서 열반이 항상함을 알았다면 무엇을 일러서 제행(諸行)이 같다고 하는가? 제행의 성품은 유전하며 무너지고 부서지지만 열반의 체(體)는 항상하고 즐거움이다. 어떤 지혜로운 자가 행과 같다고 말하겠는가?
017_0746_c_05L又有問言我先已知涅槃是常今與諸行爲異不耶
答曰汝若先知涅槃常者云何謂爲同諸行耶諸行之性流轉敗壞涅槃之體是常是樂誰有智者言同於行
【문】또다시 어떤 이가 묻기를, “신아(神我)의 성품은 비록 형색(形色)은 있더라도 아직 항상함과 무상함이 분별되지 못하였다.”【답】만일 일체법이 상대함과 장애[對碍]가 있다면 모두가 무상하다. 마치 장애가 있어서 파괴되는 것과 같다. ‘아’가 만일 이와 같다면 또한 반드시 무상할 것이다. 그런데 ‘아’가 형체가 있다고 경전에서 말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마치 모래와 자갈을 취하여 이것을 진귀한 보배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너 또한 이와 같아서 말에 거짓이 많다.”라고 말한다.
017_0746_c_09L復有問言神我之性雖有形色而未分別常與無常
答曰若一切法有對㝵者皆悉無常如甁有㝵則可破壞我若如是必亦無常然我有形非經所載無有道理如取沙礫名爲珍寶汝亦如是言多虛妄
【문】그대는 무엇 때문에 ‘아’는 형체가 없다고 하는가?
【답】나는 앞서 병에는 형상과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부서지거나 무너질 수 있다고 이미 말하였다. ‘아’가 만일 이와 같다면 또한 마땅히 마멸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는 형체가 없다고 설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 것인가?
또다시 부정집상(不定執相)이 있으니, 어떤 이가 묻기를 “사물로써 소리를 내면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한다. 답하기를, “나누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무상하니 소리 또한 나누어져서 이루어지는데 어찌 홀로 항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017_0746_c_15L問曰汝何故言我無形耶
答曰我先已說甁有形礙故可毀壞我若如是亦應磨滅云何復問何故而說我無形耶復次復有不定執相如或問言以物爲聲常無常乎答曰爲分成者皆悉無常聲亦分成豈獨常也
【문】무엇을 소리 내는 물건[聲物]이라고 하는가?
【답】만일 아직 분별하지 못하였다면 어찌하여 묻는가?
017_0746_c_21L問曰何名聲物
答曰若未分別云何爲問
【문】‘아’와 몸과 목숨이 미래세에 홀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누리는가, 몸과 함께 받는가?
【답】이 몸이 멸하고 난 뒤에 ‘아’는 다른 몸을 받는다.
017_0746_c_22L問曰我身與命於未來世獨受苦樂共身受耶
答曰此身滅已我餘身受
017_0747_a_01L【문】무엇이 미래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은 ‘아’인가?
【답】그대는 앞에서 ‘아’라고 말하더니 어찌하여 다시 ‘아’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가?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017_0747_a_01L問曰何者是我於未來世受苦樂乎
答曰汝前言我云何復問有我不耶此非道理
【문】이미 집의(執義)를 모두 말하였다. 무엇을 어선(語善)의 모습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며, 문장의 문구를 잘 이해하고 상(相)에 응하여 법을 설하며, 말한 비유가 위배되지 않아 능히 경시하거나 질책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써 어선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7_a_03L問曰已說執義云何名爲語善相耶
答曰不違於理不增不減善解章句應相說法演譬喩而無違背無能輕訶以是因緣名爲語善
【문】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어떤 사람이 식(識)을 헤아려서 “이것을 ‘아’라고 한다. 제행(諸行)이 공하고 무아이기 때문이다. 일체행이 다 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행은 바로 식의 원인이며 원인이 무아이기 때문이니 식이 어떻게 ‘아’이겠는가?
017_0747_a_07L問曰不違於理其事云
答曰有人計識是我以諸行空無我故非一切行皆是於識此非道理行是識因因無我故識云何我
【문】일체의 모든 법이 전부 무상하나 소리는 일체가 아니므로 항상하다.
【답】그대는 일체라고 말하면서 소리는 무슨 까닭에 일체가 아닌가? 이것은 바른 인을 설한 것이 아니다. 또 일체법은 조작하는 자가 있으므로 모두 무상하다. 마치 불을 붙이는 것 등과 같이 소리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무상하다. 이것을 곧 불상위상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7_a_10L問曰一切諸法皆悉無常聲非一切是故爲常
答曰汝言一切聲有何義非一切耶此說非因又一切法有造作者皆悉無常如火傳等聲亦如是是故無常是則名爲不相違相
【문】무엇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는가?
017_0747_a_15L問曰云何名爲言不增減
【답】나는 이제 먼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상에 대해서 말하겠다. 줄어드는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인감(因減), 둘째는 언감(言減), 셋째는 유감(喩減)이다.
017_0747_a_16L答曰我當先說增減之相減有三種一因減言減三喩減
017_0747_b_01L 만일 “6식(識)은 무상하다. 마치 병과 같다.”고 말하면서 인연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인감이다. 만일 “이 몸은 무아이다. 여러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소리 또한 무아이니 조건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유감이다. 만일 “4대(大)가 무상하다. 마치 병이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언감이다. 위의 말들과 어긋난 것을 구족(具足)이라고 이름한다. 또 구족이란 만일 어떤 사람이 ‘아’를 말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대가 말한 ‘아’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만일 무상하다면 곧 제행(諸行)과 같나니 이것은 곧 단멸될 것이다. 만일 항상하다면 이것은 곧 열반인데 다시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곧 구족의 모습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7_a_18L若言六識無常猶如甁不說因緣是名因減若言是身無衆緣成故聲亦無我從緣而有名喩減若言四大無常如甁造作名言減與上相違名爲具足又具足若人言我應當問言汝所說我爲常無常若無常者則同諸行便是斷滅若令常者卽是涅槃更何須求是則名爲具足之相
【문】무엇을 늘어난다고 말하는가?
問曰何名言增
【답】늘어남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증(因增), 둘째는 유증(喩增), 셋째는 언증(言增)이다.
017_0747_b_03L答曰增亦三種一因增二喩增三言
만일 “소리의 법은 무상하다. 화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병이 조작되어서 곧 무상한 것과 같다. 또 소리는 바로 허공의 구나(求那)7)이고, 허공은 상대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며 소리는 바로 색법인데 어떻게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하면 이것을 인증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7_b_05L若言聲法無常和合成故如甁造作則爲無常又言聲是空之求那非對㝵聲是色法云何相依是名因
만일 “5근(根)은 무상하다. 마치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처럼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소리 또한 이와 같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입술과 입 등으로부터 이것이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이것을 유증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미세한 먼지는 가늘고 작으며, 허공은 두루하고 크나니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을 곧 항상하다고 이름한다. 소리는 이와 같지 않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것을 유증이라고 한다.
017_0747_b_08L若言五根無常如呼聲響造作法聲亦如是何以知之爲脣口等之所出故是名喩增如言微塵細小空遍大如此二法則名爲常聲不如故曰無常是名喩增
또한 설하기를 “소리는 무상하다. 뭇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항상하다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인(因)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형상에서 나온 것[從形出]이고, 둘째는 근으로 파악되는 것[爲根了]이다.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동이법은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이것을 언증(言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747_b_12L又說聲是無衆緣成故若言常者是事不然以者何有二種因一從形出二爲根云何言常又同異法皆無常故名言增
【문】어떤 말로 세간 사람들을 능히 믿고 받아 지니게 할 것인가?
【답】만일 어리석은 자를 위해서라면 깊은 뜻을 분별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은 다 공적하다.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니 마치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아 진실함이 없다. 이와 같은 깊은 뜻을 지혜로운 자는 곧 이해한다. 범부가 만일 이와 같은 말을 듣는다면 미혹되고 무너지나니 이것은 곧 응시어(應時語)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법에는 업(業)이 있고 과보[報]가 있으며 나아가 묶임[縛]과 풀림[解]과 작자(作者)와 수자(受者)가 있다고 말한다면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곧 믿고 받아들인다. 마치 부싯돌이 화합하면 곧 불을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설해진 것이 앞에서 응한다면 중생은 모두가 믿고 즐긴다. 이와 같은 것을 수시이어(隨時而語)라고 한다.
017_0747_b_16L問曰何語能令世人信受
若爲愚者分別深義所謂諸法皆悉空寂無我無人如幻如化無有眞如斯深義智者乃解凡夫若聞迷沒墮落是則不名應時語也若言諸法有業有報及縛解等作者受者智若聞卽便信受如鑽燧和合則火得生若所演說應前衆生則皆信樂如是名爲隨時而語
017_0747_c_01L【문】어떤 것을 언증(言證)이라고 하는가?
【답】비록 많이 설해진 것이라도 능히 잘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만일 모든 깊은 뜻을 펼쳐서 그 모양을 이해하면 세운 바가 견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고 즐겁게 한다. 모든 법은 전부 공하고 무주(無主)이나니 직접지각하는 만물은 뭇 조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언증이라고 한다.
017_0747_c_01L問曰何名言證
答曰雖多所說善能憶念若宣諸義深得其相所立堅固令人愛樂如言諸法皆空無主現見萬物衆緣成故是名言證
【문】어떤 것을 언실(言失)이라고 하는가?
問曰何名言失
【답】위의 내용과 상위한 것을 언실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두 가지 말도 실(失)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뜻은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말이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하나의 뜻을 거듭 분별하는 것인가? 마치 교시가(礬尸迦)를 천제석(天帝釋)이나 부란타나(富蘭陀那)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뜻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르면서 거듭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름과 뜻이 같은 것이란 마치 인다라(因陀羅)를 인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747_c_05L答曰與上相違名爲言失又二種語亦名爲失何等爲二一義無異而重分別二辭無異而重分別云何一義而重分別如言憍尸迦亦言天帝釋亦言富蘭陁那是名義一名異而重分別名義同者如言因陁羅又言因陁羅
이것을 이름과 뜻이 다르지 않은데 거듭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다시 무릇 언설하는 바가 다만 글월만이 수식되어 있을 뿐 뜻이 없으면 모두 실(失)이라고 이름한다. 또 비록 뜻과 이치가 있더라도 차례가 없으면 이것 또한 언실(言失)이라고 이름한다.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7_0747_c_11L是名義無異而重分別復次凡所言說但飾文辭無有義趣皆名爲失又雖有義理而無次第亦名言失如偈說

마치 어떤 사람이 찬탄하기를,
천제석의 여인을
금색이라고 이름하면서
손과 발이 뛰어나다고 한다.
017_0747_c_14L如人讚歎
天帝釋女
名曰金色
足手殊勝

다시 석제환인에게
설하면서
아수라의 세 가지 성(城)을
무너뜨리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차례가 없는 말이라고 한다.
017_0747_c_16L而便說於
釋提桓因
壞阿修羅
三種之城
如是名爲
無次第語

【문】어떤 것을 인(因)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가?
【답】인을 아는 것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직접 지각이고, 둘째는 추리지[比知]이고, 셋째는 비유지[喩知]이고, 넷째는 수경서(隨經書)이다. 이 네 가지 앎 중에서 직접 지각이 으뜸이다.
017_0747_c_18L問曰何名知因
答曰知因有四一現二比知三喩知四隨經書此四知現見爲上
017_0748_a_01L【문】어떤 인연으로 인해 직접 지각이 으뜸이라고 하는가?
【답】뒤의 세 가지 앎은 직접 지각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불에 연기가 있음을 보면 나중에 연기를 보고서 곧 불이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직접 지각이 가장 훌륭하다. 또 아지랑이를 보고서 물의 비유를 얻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먼저 직접 지각한 연후에 비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중에 직접 지각하여야 비로소 진실을 알 수 있다.
017_0747_c_21L問曰何因緣故現見上
答曰後三種知由現見故名之爲如見火有煙後時見煙便知有火是故現見爲勝又如見焰便得喩水故知先現見故然後得喩後現見時始知眞實
【문】세 가지 일이 직접 지각으로 말미암아서 알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이제 이직접 지각은 어떤 것이 가장 진실한가?
【답】5근(根)으로 알게 되는 것은 때때로 허위가 있을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서 모든 법을 바로 관하여야 하나니 이것을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 또한 더운 날의 아지랑이, 선화륜(旋火輪), 건달바성(乾闥婆城)을 보는 것은 직접 지각이라고 이름하기는 해도 진실한 것이 아니다. 또한 모습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보는 것이다. 마치 밤에 나뭇등걸을 보고서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고, 손가락으로 눈을 문지른 뒤에 곧 두 개의 달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공지(空智)를 얻으면 이것을 진실한 봄[見]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017_0748_a_03L問曰已知三事由現故知今此現見何者最實
答曰五根所知有時虛僞唯有智慧正觀諸法名爲最上又如見熱時焰旋火輪乾闥婆此雖名現而非眞實又相不明了故見錯謬如夜見杌疑謂是人以指按目則睹二月若得空智名爲實見
【문】이미 직접 지각의 모습을 알았다. 그렇다면 추리지의 모습[比相]은 무엇인가?
017_0748_a_09L問曰已知現相比相云何
【답】앞에서 이미 분별하였지만 지금 다시 설명하겠다. 추리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비(前比)이고, 둘째는 후비(後比)이며, 셋째는 동비(同比)이다. 전비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여섯 손가락이 있고 머리에는 종기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후에 장대해진 모습을 보고서 제바달(提婆達)을 듣고 곧 본래의 여섯 손가락의 아이였음을 기억해 내며 바로 지금 본 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전비라고 이름한다. 후비란 마치 바닷물을 마시고서 짠 맛을 알게 된 뒤에 물이란 똑같이 짜다고 아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후비라고 한다. 동비란 마치 이 사람이 나아가서 저곳에 이르며, 하늘에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비록 그 움직임을 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나아감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동비라고 이름한다.
017_0748_a_10L答曰前已分別今當更說比知有三一曰前比二曰後比三曰同比前比如見小兒有六指頭上有瘡後見長大聞提婆達卽便憶念本六指者是今所見是名前比後比者如飮海水得其鹹味知後水者皆悉同鹹名後比同比者如卽此人行至於彼天上日月東出西沒雖不見其動而知必行是名同比
【문】문견(聞見)이란 어떤 것인가?
【답】진실한 나이 많은 장로[耆舊長宿]나 제불보살을 보고 모든 현성들로부터 경법을 듣고 받아서 지견을 능히 일으키면 이것을 문견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약의 처방을 잘 알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일러주는 것을 선문(善聞)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현성들이 일체법을 증득하고서 큰 지혜가 있으면 그들로부터 듣는 것을 선문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8_a_19L問曰聞見云何
答曰若見眞實耆舊長宿諸佛菩薩從諸賢聖聽受經法能生知見是名聞見譬如良醫善知方藥慈心教授是名善聞又諸賢聖證一切法有大智慧從其聞者是名善聞
017_0748_b_01L【문】비유지의 모습[喩相]이란 어떤 것인가?
【답】만일 일체법이 모두 공하며 적멸한 것이 환(幻)과 같고 화(化)와 같으며, 상(想)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으며, 행(行)은 파초와 같고, 탐욕의 상은 종기와 같고 독과 같다고 하는 것을 비유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인(因)이라고 하며 능히 통달하는 것을 인을 안다[知因]고 이름한다.
017_0748_b_02L問曰喩相云何
答曰若一切法皆空寂滅如幻如化想如野馬行如芭蕉貪欲之相如瘡如毒是名爲喩如是四事名之爲因能通達者名爲知因
【문】어떤 것을 사인(似因)이라고 하는가?
【답】무릇 사인이란 논법 중에서 가장 큰 허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깨달아 알아서 빨리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 이 같은 사인을 내가 이제 설명하리니 사인은 모습에 따라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여덟 가지 뿐이다. 첫째는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고, 둘째는 동이(同異)에 대해서 생기는 허물이며, 셋째는 사인(似因)을 의심하는 것이고, 넷째는 때가 지난 말[過時語]이며, 다섯째는 유동(類同)이고, 여섯째는 설동(說同)이며, 일곱째는 언이(言異)이고, 여덟째는 상위(相違)이다.
017_0748_b_06L問曰何名似因
答曰凡似因者是論法中之大過也應當覺知而速捨離如此似因我當宣說似因隨相有無量義略則唯八一隨其言撗爲生過二就同異而爲生過三疑似因四過時語五曰類同六曰說同七名言異八曰相違
【문】이 여덟 가지 법을 널리 분별해야 할 것이다.
【답】나바(那婆, nava)에는 네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새 것[新]이고, 둘째는 아홉[九]이고, 셋째는 너의 소유가 아님이라는 것이고, 넷째는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입은 것은 바로 나바옷이다.”라고 하자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입은 것은 그저 하나의 옷인데 어찌하여 아홉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답하기를 “나는 나바, 즉 새 옷을 입었다고 말했지 아홉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어떤 것을 새것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한다. 다시 답하기를 “새로운 털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017_0748_b_12L問曰如此八法當廣分別
答曰言那婆者凡有四名一名新名九三名非汝所有四名不著如有人言我所服者是那婆衣難曰今汝所著唯是一衣云何言九答曰我言那婆乃新衣耳非謂九也難曰何名爲新答曰以那婆毛作故名新
【문】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털이 있는데 무엇을 새로운 털이라고 이름하는가?
017_0748_b_20L問曰實無量毛云何而言那婆毛耶
017_0748_c_01L【답】나는 앞서 이미 새것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나바는 숫자가 아니다. 힐난하여 묻기를 “지금 이 옷이 너의 것임을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답하기를 “나는 새 옷을 말했지 이 물건이 너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자,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금 눈앞에 그대가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어찌하여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새 옷이라고 말하였지 입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것을 사인(似因)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017_0748_b_21L答曰我先已說新名那婆非是數也難曰今知此衣是汝所有云何乃言非我衣乎答曰我言新衣不言此物非汝所有難曰今現見汝身著此衣云何而言不著衣耶答曰我言新衣不言不著是名似因亦名隨言而爲生過
또한 다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란, 비유하면 마치 ‘산이 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실제로는 초목이 타는 것인데 어찌하여 산이 탄다고 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나아가 모든 법이 전부 다 이와 같다. 또다시 제멋대로 말을 함에 따라서 생기는 허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둘째는 동이(同異)에서 생기는 허물이다. 마치 유위제법(有爲諸法)은 모두 공하고 적멸한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말할 때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둘은 전부 공하고 없는 것이다. 무성(無性)의 법은 곧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을 동이로부터 생기는 허물이라고 한다.
017_0748_c_06L又復隨言而生過者如說燒山難曰實焚草木何燒山是名隨言生過乃至諸法皆亦如是復次隨言生過凡有二種如前說二於同異而爲生過如言爲諸法皆空寂滅猶如虛空難曰二者皆是空無無性之法便同虛如是名爲同異生過
【문】어찌하여 생긴다고 이름하는가?
【답】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치 진흙에 병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진흙에 병의 성품이 있다면 진흙은 곧 병이며, 마땅히 도공과 물레의 화합을 빌려서 병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진흙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한다면 물 또한 있으니까 마땅히 병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이 있는데 병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흙에서만 병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동이심언생과(同異尋言生過)라고 이름한다.
017_0748_c_13L問曰何故名生
答曰有故名生如泥有甁性故得生難曰若泥有甁性泥卽是甁不應假於陶師輪繩和合而有若泥是有故生甁者水亦是有應當生甁若水是有不生甁者泥云何得獨生甁耶是名同異尋言生過
【문】사인(似因)에서 의심이 생겨나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어떤 나무의 그루터기가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에 만일 밤에 이것을 보면 곧 ‘이것은 그루터기인가, 사람인가’ 하고 생각한다. 이것을 사인에서 의심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다.
017_0748_c_20L問曰生疑似因其相云何
答曰如有樹杌似於人故若夜見之便作是念杌耶人耶是則名爲生疑似因
017_0749_a_01L【문】어떤 것을 때가 지난 사인[過時似因]이라고 하는가?
【답】마치 ‘소리가 항상하다. 베다 경전에서 소리가 나온 것이므로 항상하다’고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아직 소리가 항상한 인연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곧 베다가 항상하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면, 답하기를, “마치 허공이 형색이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처럼 소리 또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 말은 뒤에 설하였더라도 뜻은 역시 성취된다.”라고 말한다. 또다시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시간을 지난 것이다[過時]. 마치 집이 모두 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물로 집을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대가 바로 이와 같다.”라고 한다. 이것을 때가 지난 것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8_c_23L問曰云何名爲過時似因
答曰如言聲常韋陁經典從聲出故亦名爲常難曰汝今未立聲常因緣云何便言韋陁常乎答曰如虛空無形色故常聲亦無形是故爲常言雖後說義亦成就難曰此語過時如舍燒已盡方以水汝亦如是是名過時
【문】유동(類同)은 어떤 것인가?
【답】‘아’와 몸이 다르기 때문에 ‘아’는 곧 항상하다. 마치 병이 허공과 다르기 때문에 병은 무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유동이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아’가 몸과 다르므로 항상하다고 한다면 병 또한 몸과 다르므로 병도 마땅히 항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병이 몸과 다른 데도 무상하다고 한다면 ‘아’가 비록 몸과 다르다고 해도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을 동류(同類)라고 한다.
017_0749_a_08L問曰類同云何
答曰我與身異故我是常甁異虛空故甁無常是名類同難曰若我異身而名常者甁亦異身甁應名爲常若甁異身猶無常者雖異身云何常乎是名同類
【문】설동(說同)이란 어떤 것인가?
【답】마치 “허공은 항상하니, 촉감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 또한 이와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설동이라고 한다.
017_0749_a_13L問曰說同云何
答曰如言虛空是常無有觸故意識亦爾是名說同
【문】무엇을 언이(言異)라고 하는가?
【답】마치 “5진(塵)은 무상하니 근(根)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4대(大)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무상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거북의 털과 소금의 향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의식(意識)으로 얻어지는 바인데 어찌 무상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언이라고 한다.
017_0749_a_16L問曰何名言異答曰如言五塵無常爲根覺故四大亦爾是故無常難曰龜毛監香是無所有而爲意識所得豈無常耶是名言異
017_0749_b_01L【문】상위(相違)란 어떤 것인가?
【답】상위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비유의 상위이고, 둘째는 이치의 상위이다. 마치 말하기를 “‘아’는 항상하다. 형애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牛]와 같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비유의 상위라고 한다. 이치의 상위란 마치 “바라문은 왕의 일을 통치하고 도살이나 사냥 등을 가르치고 크샤트리야[刹利] 계급은 좌선과 염정(念定)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이치의 상위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2법을 어리석은 자는 이해하지 못하여 진실하다고 말하나니 이것을 상위라고 이름한다.
017_0749_a_20L問曰相違云何
答曰相違二種一喩相違二理相違如言我常無形㝵故如牛是名喩違理違者如婆羅門統理王業作屠獵等教剎利種坐禪念定是名理違此二法愚者不解謂爲眞實是名相違
【문】어떤 것을 불상위라고 이름하는가?
【답】위의 두 법과 다른 것을 불상위라고 이름하나니 이것을 사인(似因)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9_b_02L問曰何者名爲不相違耶
答曰異上二法名不相違是名似因

2. 명부처품(明負處品)
017_0749_b_04L明負處品第二

논자들이 말하기를 “앞에서 여덟 가지 논법을 이미 말하였다. 또다시 논쟁에 지는[負] 법이 많이 있으니 이제 널리 설하고자 한다.”고 한다.
017_0749_b_05L論者言已說如上八種論法復有衆多負法今當宣說
【문】어떤 것을 어법(語法)이라고 하는가?
【답】어떤 사람은 “4대(大)는 거짓 이름이다. 왜냐하면 색 등의 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4대는 실재로 있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견고함은 지(地)의 성품이고 내지 움직임은 풍(風)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실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상위하는 것으로 다시 다툼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마치 어떤 이가 “지(地)는 몸의 인연을 이루며 나머지 4대 중의 3대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지(地) 등은 또한 능히 일체의 사물을 이룬다. 어찌하여 오직 몸만을 이룬다고 말하는가?”고 한다. 이것을 틀린 말[非語]이라고 하며, 또한 이와 같지 않은 것을 옳은 말[是語]이라고 한다.
017_0749_b_07L問曰何名語法
答曰如言四大是假名所以者何色等法之所成故復有人言四大實何以知之堅是地性乃至動是風故知爲實更相違返便生諍訟有言地是成身因緣餘大亦爾難曰地等亦能成一切物云何而言唯成身乎是名非語若不如是是名是語
【문】어떤 것을 논쟁에 진다[負]라고 하는가?
【답】마치 “소리는 항상하다. 형색이 없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다.”라고 말한다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소리가 비록 형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근(根)으로 지각되고, 대(對)가 있고 애(碍)가 있다. 마치 만들어진 병과 같다. 그런데 허공의 성품은 이러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어떻게 비유될 수 있는가?”라고 하나니 이것을 논쟁에 지는 뜻[負義]이라고 이름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병은 바로 형체가 있어서 무상한 것이 될 수 있다. 소리는 형체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비유가 될 수 있는가?”라고 하면 힐난하여 말하기를, “소리가 비록 병과 다르지만 근(根)으로 지각되고,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017_0749_b_14L問曰何爲名負
答曰如言聲常無形色故如空難曰聲雖無形而爲根覺有對有㝵如甁造作而虛空性非是作法何得爲喩此名負義立曰甁是有形可爲無常聲無形法何得爲喩難曰聲雖異甁而爲根覺爲耳所聞是故無常
【문】어떤 뜻을 논쟁에 지지 않는 것[不墮負處]이라고 하는가?
【답】제행(諸行)은 식(識)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까닭에 무상하며 열반은 만들어지지 않는 까닭에 항상하다. 이와 같은 말의 구절은 참되고 올바르다. 이것을 논쟁에 지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017_0749_b_22L問曰何等之義不墮負處
答曰諸行與識作故無常涅槃非作故常如此之言句味眞正名非負處
017_0749_c_01L【문】무엇을 가히 힐난할 만한 것[可難]이라고 하는가?
【답】만일 말이 뒤바뀌고 인(因)을 내세운 것이 올바르지 않으며 인용한 비유가 같지 않으면 이것은 곧 힐난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상[想]은 능히 번뇌[結]를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묻는 이가 ‘어떻게 상이 곧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는 먼저 지(智)가 상(想)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상(想)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 말은 전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곧 힐난할 만하다.
017_0749_c_01L問曰何者之言而可難耶
答曰若語顚倒立因不正引喩不同此則可難如言想能斷結問者曰何以想便斷結耶以不先言智從想發直言想故此語顚倒則爲可難
【문】어떤 인연으로 거듭 이 말을 하는가?
017_0749_c_06L問曰何因緣故重說此語
【답】사람들로 하여금 주장 없는 이치[無執義]를 세우면 반드시 논쟁에 지고 말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또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고, 답해야 할 것은 답하지 않으며, 법의 요체를 세 번 설하여도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지 못하며, 스스로도 세 번 법을 설하여도 분별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 모두를 논쟁에 지는 것이라고 한다.
017_0749_c_07L答曰欲令人知立無執義必墮負處故說復次應問不問應答不答三說法要不令他解自三說法而不別知皆名負處
또 다른 이와 함께 논할 때에 상대편의 뜻에 결점이 있고 의미가 빠져 있지만 깨달아 알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 뜻은 잘못되었다.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 다른 이의 올바른 뜻에 허물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설법을 하는데 대중들이 모두 이해하였지만 홀로 깨닫지 못한다면 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물음 또한 그러하나니, 이와 같이 논쟁에 지는 것은 바로 의논(議論)의 커다란 가시가 되어 깊은 허물과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 마땅히 깨달아 알아서 속히 멀리 여의어야만 할 것이다.
017_0749_c_11L又共他論彼義短闕而不覺知餘人語曰此義錯謬汝不知乎卽墮負處又他正義而爲生過亦墮負處又有說者衆人悉解而獨不悟亦墮負處問亦如是如此負處是議論之大棘刺爲深過患應當覺知速宜遠離
【문】물음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017_0749_c_17L問曰問有幾種
【답】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동(說同)이고, 둘째는 의동(義同)이고, 셋째는 인동(因同)이다. 만일 모든 논하는 이들이 이 세 가지로써 문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틀리고 잘못되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답 중에서 만일 하나라도 결여되었을 때에는 곧 구족하지 못한 것이 된다.
017_0749_c_18L答曰有三種一說同二義同三因同若諸論者不以此三爲問答者名爲違錯此三答中若少其一則不具足
017_0750_a_01L 만일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물음에 자세하게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면, 내가 이해한 바를 따라서 곧 마땅히 서로 물어야 할 것이며 이것 또한 허물이 없다. 설동(說同)이란 마치 어떤 이가 ‘무아(無我)’라고 말한다면 다시 이 말에 의지해서 뒤에 비로소 질문을 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동(語同)이라고 한다. 의동(義同)이란 다만 그 뜻을 취하는 것이니 이것을 의동이라고 한다. 인동(因同)이란 다른 이의 뜻이 인하여 일어난 바를 아는 것이니 이것을 인동이라고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으면 이것을 논쟁에 지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만일 경질(輕疾)8)하여 듣는 자가 깨닫지 못한다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017_0749_c_21L若言我不廣通如此三問隨我所解便當相問是亦無過說同者如言無還依此語後方爲問是名語同同者但取其意是名義同因同者他意趣之所因起是名因同若能如名非負處若言輕疾聽者不悟墮負處
【문】오직 이것만 있고 다시 나머지 것은 없는가?
【답】있다. 이른바 어소(語少)ㆍ어다(語多)ㆍ무의어(無義語)ㆍ비시어(非時語)ㆍ의중(義重)ㆍ사본종(捨本宗) 등 이 모두가 논쟁에 지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것으로써 앞의 사람에게 말한다면 이 또한 논쟁에 지는 것이다.
017_0750_a_05L問曰唯有此等更有餘耶
答曰所謂語少語多無義語非時義重捨本宗等悉名負處若以此等爲前人說亦墮負處
【문】어떤 것을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違本宗]이라고 하는가?
017_0750_a_08L問曰云何名爲違本宗耶
【답】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식(識)은 항상한 법이다. 왜냐하면 식의 체(體)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식체의 생함[生]이고, 둘째는 식체의 쓰임[用]이다. 병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병체(甁體)의 생함이고, 둘째는 병체의 쓰임이다. 그런데 식이 생할 때에는 곧 쓰임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항상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병의 체가 생하고 난 뒤에 비로소 쓰임이 있으니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017_0750_a_09L答曰如言識是常法所以者何識體二種一識體生二識體用甁亦二種一甁體生二甁體用然識生時卽有用故故名爲常甁體生已後方有用故是無常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생겨남으로써 곧 쓰임이 있는 것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등불이 생할 때에 곧 쓰임이 있으니 이 또한 마땅히 항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등불은 눈으로 보고 소리는 귀로 듣는다. 어떻게 비유가 되는가?”라고 하니 이것은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捨本宗]이며 논쟁에 지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신(神)은 항상하다. 무엇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근(根)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근으로써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017_0750_a_14L難曰若以生便有用名爲常者燈生時卽用應當是常答曰燈爲眼見聲爲耳聞云何爲喩是捨本宗名墮負處復次有說神常何以知之非根覺故如虛空不爲根覺故常
017_0750_b_01L힐난하여 말하기를 “미진도 근으로써 지각할 수 없지만 무상하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 미진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앞에서는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서 지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본래의 주장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대가 나의 말에 어긋나니 그대야말로 틀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상(相)은 그 이치가 있는 것인데도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말 자체가 앞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틀린 것을 말했을 뿐이다. 또한 그대가 앞에서 한 말은 크게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의심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틀린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의심으로써 틀린 것이 되었다. 또한 논쟁에 진 것이다.”라고 한다.
017_0750_a_20L難曰微塵不爲根得而是無常答曰神非作故常微塵造作故無常難曰汝前言非覺今言不作是違本宗答曰汝言我違汝乖我言豈不違乎難曰如此之相可有斯理我言違者汝之所說自乖前義故言違耳又汝前言不大分別故我生疑非我違汝如是以疑爲違亦墮負處

3. 변정론품(辯正論品)
017_0750_b_05L辯正論品第三

논자가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중생(衆生)은 있고 내지 또한 수자(壽者)와 명자(命者)도 있다.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근으로써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여열반은 근으로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神)은 항상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아라한과(阿羅漢果)와 같이 오직 당시에만 있을 뿐이고, 전후에는 없기 때문에 없는 것임을 안다. 마치 제2의 머리, 제3의 손 등도 본래는 없는데 지금 있기 때문에 앞에는 없는 것이었음을 안다. 있은 뒤에 또한 멸하기 때문에 뒤에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신은 이와 같지 않으므로 이로써 항상한 것이다.”라고 한다.
017_0750_b_06L論者言若人說有衆生乃至亦有壽者命者何以知之爲根覺故如無餘涅槃不爲根覺故無衆生不爾故知是有神是常法何以故如阿羅漢果唯當時有而前後無故知爲無如第二頭第三手等本無今有故知前無有已還滅故知後無神不如是是以爲常
힐난하여 말하기를 “마치 나무뿌리와 지하의 물이 보이지 않아서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라한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은 없는 법이 아니다. 그대는 스스로 증명되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물은 땅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라한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도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로써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다.
017_0750_b_14L難曰如樹根地下水不見言無阿羅漢者亦復如是非是無法汝自不證立曰不然水以地障是故不見今阿羅漢有何障㝵而不見乎是以知無
017_0750_c_01L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제2의 머리, 제3의 손도 가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은 옳지 못하다. 비록 제2의 머리가 없더라도 제1의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모두 없는 것이니 어떻게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또 그대는 지각할 수 없음으로써 열반이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마치 대해의 물은 몇 방울인지 알지 못한다고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물방울의 숫자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바다는 있는 것이다. 열반 또한 그러하다. 비록 지각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실재로 이것 자체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인연을 설한다. 만일 능히 설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은 저절로 무너진다. 이것은 곧 법다운 논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750_b_18L難曰汝以第二頭第三手不可見故明無羅漢是事不然雖無二頭非無第一言無羅漢乃是悉無何得爲喩又汝言以無覺知無涅槃者是亦不如大海水不知幾渧可言無耶不知渧數而猶有海涅槃亦然雖不可覺實自有之而言無者應說因緣若不能說汝義自壞是則名爲如法論也
또한 만일 지각할 수 없음으로써 열반이 없음을 증명한다면 다른 이가 곧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마치 밤에 나무를 보고서 마음으로 그루터기인지, 사람인지 의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 나무는 사람의 인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고, 그루터기의 인으로 결정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일 지각할 수 없는 것이 열반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면 마땅히 의심을 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업보는 훼멸할 수 없기 때문에 열반은 있다. 비유하면 마치 큰 불이 산과 숲을 태우면 불은 그 멸인(滅因)이 된다. 지금 이 업보는 어떤 멸인이어서 멸함을 얻겠는가? 만일 열반을 얻으면 곧 흩어지고 무너질 것이다.”고 한다.
017_0750_c_04L復次若以無覺明無涅槃他則生疑如夜見樹心便生疑杌耶人耶當知此樹非定人因非定杌因若令無覺定與涅槃爲無因者不應生疑又諸業報不可毀滅故有涅槃所以者何譬如大火焚燒山林故火是滅因此業報是何滅因而得滅耶若得涅槃則便散壞
주장하여 말하기를, “실제로 멸인이 있다.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역시 열반이 있으니 다만 어리석음의 장애로 말미암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또한 그대가 지금 만일 모든 업에 멸인이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뜻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만일 멸인이 없어서 설하지 않는다면 또한 장애가 없을 것인데 무엇하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것 등의 조건으로써 업은 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곧 법다운 논이다.”고 한다.
017_0750_c_12L立曰實有滅因障故不難曰亦有涅槃但以癡障故不見復次汝今若不分別諸業有滅因汝義自壞若滅因無故而不說者亦無障㝵何須說耶以是等緣知業不滅是則名爲如法論也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바다의 물이 있기 때문에 열반이 있음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면 어찌 다시 능히 제2의 머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설령 제2의 머리가 있을 수 없다면 열반이 어떻게 홀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바닷물의 비유는 능히 주장되어질 수 없다. 열반은 있는데 어떻게 능히 제2의 머리가 있음이 성립하겠는가?”고 한다.
017_0750_c_17L立者曰若以海水有故成有涅槃豈復能令二頭有耶若設二頭不可爲有涅槃云何獨得有耶汝海水喩尚不能立涅槃爲有何能成於二頭有乎
017_0751_a_01L 힐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뜻은 만일 열반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없음은 있는 것인가?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인가? 만일 없는 것을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열반이 없음을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없음이 있다면 어떻게 전혀 있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없는 열반의 법이 비록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것은 없음이 있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열반이 있지 않다고 하는가? 마땅히 인연을 설해야 한다. 만약 능히 말하지 못한다면 열반은 결정코 실제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 또한 법다운 논이라고 한다.”고 한다.
017_0750_c_21L難曰汝意若謂涅槃無者爲有是無爲當無無若無無者云何覺知無涅槃耶若有此無云何而言都無所有若言雖有是無涅槃之法猶自無者尚有是無何故不得有涅槃耶當說因緣若不能說當知涅槃決定實有是亦名爲如法論也
묻기를, “신(神)은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하자, 주장하여 말하기를, “신은 조작된 것이 아니므로 항상하다. 병 등은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상하다.”고 한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일 지어진 것이 아님으로써 신이 항상한 것을 증명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이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일 만들어지지 않은 신이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한가, 무상한가라고 하는 의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의심을 내는 까닭에 허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017_0751_a_05L問曰神爲是常爲無常乎立曰神非造作故常甁等作法故是無常難曰若以無作明神常者是事不然何以知之生人疑故若非造作神卽常者不應生疑爲常無常以生疑故當知有過
주장하여 말하기를, “이 허물은 오직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논자들 모두에게 이런 허물이 있다. 마치 소리는 항상하나니 형색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몸이 있나니 숙명지(宿命知)로써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입의(立義)도 앞에서와 같이 의심을 일으키므로 전부 이러한 허물이 있는 것이다.”고 한다.
017_0751_a_11L立曰此過非但唯獨我有一切論者皆有斯過如言聲常無形色故有過去身以宿命智知故如是立義如前生疑故一切處皆有是過
힐난하여 말하기를, “비유는 의심을 해결한다. 그대가 인용한 비유는 나에게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비유로써 성립하지 못한다. 비유가 성립하지 못한다면 뜻은 곧 저절로 무너진다.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곧 말하기를 모든 것이 허물이 있으니 오직 나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스스로의 허물이지 나머지 사람들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신들려서 스스로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모두 다 도둑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 자신도 도둑인 것과 같다. 그대 또한 이와 같아서 논쟁에서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17_0751_a_14L難曰喩者決疑汝所引喩令我生疑是不成喩喩不成者義則自壞卽墮負處而汝乃言一切有過非獨我有斯則自咎非餘過也所以者何如人被誣而不自明而言一切皆悉是盜當知此人卽自爲盜汝亦如是故墮負處
017_0751_b_01L 지금 그대가 만일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치가 옳아야 한다. 반드시 다시 설하고자 한다면 곧 많은 허물에 빠질 것이다. 그대의 첫째 주장은 둘째에서 이미 논파하였고, 셋째 이치는 내가 다시 비난하였고, 제5의 것으로써 허물을 멈추고자 한다면 처음 또는 그대의 나중 이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곧 중복되는 것이다. 만일 거듭 허물이 있다면 곧 논쟁에 지게 될 것이다.
017_0751_a_20L今汝若欲自宣明者理極於先必欲復說則墮多過汝第一立第二已破第三之義我又爲難欲以第五而止過者不出於初及汝後義是則爲重若有重過卽墮負處
【문】설령 제6의 사람도 곧 물을 수 있겠는가?
【답】제5의 사람이 이미 허물을 이루었는데 무엇 하러 다시 제6의 사람이 물을 수 있겠는가? 만일 반드시 이것을 설한다면 앞에서와 같은 허물일 것이니 물음에 이미 허물이기 때문에 답은 마땅히 침묵해야만 한다. 또한 제6의 사람이 과실이 있어도 제5의 사람은 이것을 힐난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제5로 말미암기 때문에 제6의 사람이 곧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스스로 허물이 있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순서를 바른 법의 논이라고 한다.
017_0751_b_02L問曰設第六人更可問乎
答曰第五之人已成於過何有第六得爲問耶若必說之則同前過問旣有過答應默然復次第六人過而第五者不得詰之所以者何由第五故是第六人便得爲問旣自有過何由過彼如是等名正法論也

4. 상응품(相應品)
017_0751_b_09L相應品第四

【문】그대는 이미 법다운 바른 논을 분별하였다. 무엇을 상응의(相應義)라고 이름하는가?
017_0751_b_10L問曰汝已分別如法正論云何名爲相應義耶
【답】물음과 답이 상응하는 것에 스무 가지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스무 가지의 뜻으로써 바른 이치를 내는 것을 도울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곧 진실한 논을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논의의 법에 통달하였다고 이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스무 가지는 간략하게 말하면 곧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름[異]이고, 둘째는 같음[同]이다. 같음으로써 뜻을 드러내는 것을 같음(同)이라고 하고, 다름으로써 뜻을 드러내는 것을 다름(異)이라고 한다. 무릇 뜻이 되는 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이 둘은 스무 가지 법에 통한다. 어떤 것을 같음이라고 이름하는가?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번뇌가 다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공의 성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을 같음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을 다름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열반은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고 하자 곧 모든 행은 지어졌으므로 무상하다고 아는 것이다. 이것을 다름이라고 한다.
017_0751_b_12L答曰問答相應有二十種若人能以此二十義助發正理是人則名解眞實論若不如是不名通達議論之法此二十種要則有二一異二同以同顯義名同以異顯義名異凡爲義者必依此二故此二者通二十法云何名同如言煩惱盡處是無所有虛空之性亦無所有是名爲同云何名異如說涅槃非作故常則知諸行作故無常是名爲異
【문】이 같음과 다름의 뜻은 어떻게 힐난하는가?
017_0751_b_22L問曰此同異義云何爲難
017_0751_c_01L【답】같음을 힐난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색은 눈으로 보고 소리는 귀로 듣는다. 어떻게 같다고 말하는가? 만일 색이 소리와 다르면 색 자체는 무상하고 소리는 마땅히 항상해야 한다.”
017_0751_b_23L答曰欲難同者作如是言色以眼見聲爲耳聞云何言同若色異聲色自無常聲應是常
만약 다름을 힐난하고자 한다면 “색은 근으로써 지각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아’는 근으로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 병과 ‘아’는 모두 존재[有]가 있다. 만약 같다고 한다면 병은 이미 무상하니까 ‘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만약 병의 존재와 ‘아’의 존재가 다르다고 한다면 ‘아’는 항상하지만 병은 무상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언제나 존재함이 이미 같으므로 ‘아’도 응당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017_0751_c_03L若難異者以色根覺故無常我非根覺故常甁我俱有若同者甁旣無常我亦應爾若說甁有異我有者可言我常而甁無常有旣同我應無常
이와 같은 힐난은 스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증다(增多), 둘째는 손감(損減), 셋째는 동이(同異), 넷째는 문다답소(問多答少), 다섯째는 답다문소(答多問少), 여섯째는 인동(因同), 일곱째는 과동(果同), 여덟째는 변동(遍同), 아홉째는 불변동(不遍同), 열째는 시동(時同), 열한째는 부도(不到), 열두째는 명도(名到), 열셋째는 상위(相違), 열넷째는 불위(不違), 열다섯째는 의(疑), 열여섯째는 불의(不疑), 열일곱째는 유파(喩破), 열여덟째는 문동(聞同), 열아홉째는 문이(聞異), 스무째는 불생(不生)이다. 이것을 스무 가지의 문답법(問答法)이라고 한다.
017_0751_c_07L如斯難者有二十一曰增多二曰損減三說同異問多答少五答多問少六曰因同曰果同八曰遍同九不遍同十曰時同十一不到十二名到十三相違十四不十五疑十六不疑十七喩破十八聞同十九聞異二十不生是名二十問答之法
【문】이 스무 가지의 법을 분별하여 말하여라.
017_0751_c_14L問曰此二十法應分別說
【답】증다(增多)란 것은 마치 “‘아(我)’는 항상하다. 근(根)으로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허공도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다. 일체가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가 항상하지만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항상할 수 없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힐난하여 말하기를 “허공은 앎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 ‘아’는 앎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허공에 앎이 있다면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만일 ‘아’가 앎이 없다면 허공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앎이 있는 것은 반드시 무상하다.”라고 한다. 이것을 증다라고 이름한다.
017_0751_c_15L答曰增多者如言我常非根覺故空非覺是故爲常一切不爲根所覺者盡皆是常而我非覺得非常乎虛空無知故常我有知故云何言若空有知則非道理若我無知同於虛空如其知者必爲無常是名增
손감(損減)이란 만일 허공에 앎이 없지만 ‘아’에게는 앎이 있다면 어떻게 허공으로써 ‘아’를 비유하겠는가? 이것을 손감이라고 이름한다.
017_0751_c_22L損減者若空無知而我有知云何以空喩於我乎是名損減
017_0752_a_01L동이(同異)란 마치 ‘아’의 항상함을 허공의 비유를 인용하여 주장하는데, 허공과 ‘아’가 같다면[一] 하나의 법이 될 것인데 어떻게 허공으로써 ‘아’를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르다면 서로 비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동이라고 이름한다.
017_0751_c_23L同異者如立我常引空爲喩空我一者一法何得以空喩我若其異者不得相喩是名同異
또한 그대가 “‘아’는 항상하다.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어서 항상한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근이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모두 항상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문다답소(問多答少)라고 한다.
017_0752_a_03L復次汝立我常言非根覺如虛空非根覺故常然非根覺不必盡常何得爲證是名問多答少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면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근으로 지각되지 않는 법에는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미진(微塵)은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허공은 지각되지 않는데 이것은 항상한 법이다. 그대는 어떻게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번째인 문소답다(問少答多)라고 한다.
017_0752_a_05L復次汝立我常言非根覺非根覺法凡有二種微塵非覺而是無常虛空非覺而是常法汝何得言非覺故常是名第五問少答多
또한 그대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님을 원인으로 하여 ‘아’가 항상함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허공과 ‘아’는 다른데 어떻게 함께 지각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하겠는가? 이것을 인동(因同)이라고 이름한다.
017_0752_a_09L復次汝以非覺爲因故知我常者空與我異云何俱以非覺爲是名因同
또한 5대(大)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다 무상하다. 허공과 ‘아’도 또한 5대로 이루어졌다.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과동(果同)이라고 이름한다.
017_0752_a_11L復次五大成者皆悉無虛空與我亦五大成云何言常名果同
또한 그대는 허공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허공은 온갖 곳에 두루해 있는데 온갖 곳에 있는 사물이 어떻게 지각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이름하여 변동(遍同)이라고 이름한다.
017_0752_a_13L復次汝以虛空非覺故常虛空者遍一切處一切處物豈非覺是名遍同
또한 미진은 두루하지 않지만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상한 법이다.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불변동(不遍同)이다.
017_0752_a_15L復次微塵非遍而非根覺是無常法我非根覺云何爲常不遍同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여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것은 현재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만일 과거라고 말한다면 과거는 이미 멸해 버렸으며, 미래라고 말한다면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며, 현재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인(因)이 될 수 없나니, 마치 두 개의 뿔이 나란히 생겨나는 것과 같아서 곧 서로의 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을 시인(時因)이라고 말한다.
017_0752_a_17L復次汝立我常言非根覺爲是現在過去未來若言過去過去已滅若言未來未來未有若言現在則不爲因如二角竝生則不得相因是名時因
또한 그대는 ‘아’의 항상함을 주장하면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도달하는 것[到]으로 인(因)이 되는가, 도달하지 않은 것[不到]이 되는가? 만일 도달하지 않을 때에는 곧 인을 이루지 못하나니 불이 도달하지 않았을 때 곧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고, 칼이 도달하지 않았을 때에 곧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인이 된다고 하겠는가? 이것을 부도(不到)라고 이름한다.
017_0752_a_21L復次汝立我常以非根覺到故爲因爲不到乎若不到則不成因大不到則不能燒如刀不到則不能不到於我云何爲因是名不到
017_0752_b_01L또한 만일 도달하여 원인이 되는 것이라면 도달하자마자 원인의 뜻이 없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도(到)라고 한다.
017_0752_b_01L次若到因者到便卽是無有因義名爲到
또한 그대는 일체가 무상하지만 ‘아’는 일체가 아닌 까닭에 항상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아’는 곧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해야 할 것이다. 마치 헝겊이 조금일 때는 타지만, 많을 때는 타지 않는 까닭에 타지 않는다[不燒]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상위(相違)라고 이름한다.
017_0752_b_03L復次汝以一切無常我非一切故常者我卽是有故應無常如㲲少燒以多不燒應名不燒是名相違
또한 그대는 ‘아’가 근으로 지각되지 않아 허공과 같으니, 허공은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아’가 지각된다면 허공 또한 마땅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허공과 ‘아’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상위(不相違)라고 한다.
017_0752_b_05L復次汝以我非根覺同於虛空虛空不覺我亦應爾若我覺者虛空亦應覺於苦樂虛空與我無有異故是不相
또한 ‘아’는 존재[有]와 같은 까닭에 일정하게 항상하지 않으며, ‘항상한가, 항상하지 않은가’라고 의심을 일으켜도 좋다고 인정한다. 이것을 의(疑)라고 한다.
017_0752_b_09L復次我同有故不定爲常容可生疑爲常無常是名爲疑
또한 그대가 근에 지각되지 않는 ‘아’가 있다고 말하면 의심이 들 수 있다. 어떤 장애가 있으므로 지각할 수 없는가? 인연을 말해 보라. 만약 인연이 없다면 ‘아’의 뜻은 저절로 무너진다. 이를 불의(不疑)라고 말한다.
017_0752_b_10L復次汝言有我非根所覺則可生疑有何障故非根覺耶當說因緣若無因緣我義自是名不疑
또한 그대는 말하기를 ‘아는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항상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나무의 뿌리나 땅 밑의 물 또한 근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지만 무상하다. 어떻게 ‘아’가 항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유파(喩破)라고 이름한다.
017_0752_b_13L復次汝以我非根覺故爲常者樹根地下水亦非根覺而是無常我云何常是名喩破
또한 그대는 “경(經)에서 설하기를 ‘아’는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함을 안다.”고 말하였다. 경 속에는 또한 ‘아’와 ‘아’소가 없다고 설하였다. 니건(尼乾, Jaina)의 법 속에서도 ‘아’가 항상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아’가 항상하다고 정해졌으면 모든 경에서 같다고 해야지, 다르다고 하지 않았어야 한다. 이것을 문동(聞同)이라고 한다.
017_0752_b_15L復次汝以經說我非覺故知是常者經中亦說無我我所尼乾法中明我非常定常者諸經不應有異有同是名聞
또한 만일 그대가 하나의 경을 믿어서 ‘아’가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또 마땅히 다른 경에서 ‘아’가 무상하다고 한 것을 믿어야 한다. 만일 두 가지를 믿는다면 하나의 ‘아’가 곧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문이(聞異)라고 한다.
017_0752_b_19L復次若汝信一經以我爲常亦應信餘經我爲無常若二信者一我便應亦常無常是名聞異
017_0752_c_01L또한 그대는 인(因)이 있어서 ‘아’가 있음[有]을 안다고 한다면 사라수의 씨앗[娑羅樹子]이 이미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라(多羅)나무를 낳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없기 때문에 없음을 안다면 다라나무의 씨앗 속에는 나무의 형상이 없으므로 나무를 낳을 수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있으면서도 낳지 못하고, 없으면서도 낳지 못한다면 ‘아’도 또한 그와 같다. 만일 반드시 있다고 한다면 근(根)이 지각하지 못함을 인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만일 ‘아’가 반드시 없으면 근이 지각하지 못함을 가지고 존재하게 할 수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017_0752_b_21L復次汝以有因知有我者娑羅樹子旣是有故應生多羅若以無故而知無者多羅子中無樹形相不應得生若有亦不生無亦不生我亦如是若定有者不須以根不覺爲因我若定無以根不覺不可令有是名不生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리는 항상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또한 위의 스무 가지 법의 동이(同異)로써 이것을 논파한다.
017_0752_c_04L若復有人立聲是常亦以如上二十種法同異破之
【문】이 스무 가지는 곧 인연이 있어서 스스로 해설하는가?
017_0752_c_05L問曰此二十種更有因緣自解說耶
【답】스스로 있다. 마땅히 물어서 말하기를, “‘아’가 있음으로써 말미암아 그대는 ‘아’를 논파한다. 만일 무아라면 그대는 무엇을 논파하겠는가? 논파하는 주체[能破]가 있음으로써 논파되는 대상[所破]이 있다.”고 한다.
017_0752_c_06L答曰自有應當問言由有我故汝破於我若無我者汝何所破以有能破故有所破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치로서는 실로 무아이다. 그대가 멋대로 집착해서 있다고 하는 까닭에 나는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대가 ‘논파되는 대상이 있음으로써 ‘아’가 있다’고 한다면 논파하는 주체가 있음으로써 무아임을 알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그대가 ‘아’의 뜻에 집착함으로써 무아를 밝힌다고 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않다. 그대의 뜻을 이용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가 스스로 내가 집착한 것을 채택할 뿐이다.”고 한다.
017_0752_c_09L難曰理實無我汝撗計爲有故我難汝言以有所破故有我者以有能破故知無我若言汝執我義以明無是事不然非用汝義今汝自用我所執耳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어떻게 내가 그대의 뜻에 집착함을 아는가? 마땅히 인연을 설해야 한다.”고 한다.
017_0752_c_14L立曰汝云何知我執汝義應說因緣
힐난하여 말하기를 “내가 앞에서 그대의 뜻에 집착함이 아니라 그대가 다른 주장에 집착한다고 말하였다. 무슨 까닭에 지금 ‘어떤 것이 내가 그대의 뜻에 집착함을 아는가?’라고 다시 묻는가? 그대의 말은 자신에게 틀리며 곧 논쟁에 지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처음에 근이 지각하지 못하는 까닭에 실로 ‘아’가 있음을 안다고 하고, 후에 뭇 법으로써 증명하였지만 인(因)을 내세우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주장하는 이치도 그릇되어 또한 논쟁에 지고 말았다. 그대의 뜻이 이미 무너졌다. 내가 만일 다시 설하여도 처음을 벗어나지 못하며, 말을 받음에도 허물이 많다.
017_0752_c_15L難曰我前已言非執汝義汝執他立何故復問云何知我執汝義耶汝言自違卽墮負處又汝初以根不覺故知實有我後以衆法而爲證明立因不定違失義宗亦墮負處汝義已壞我若更說不出於初受言多過
무릇 문답에 있어서 답은 기껏 다섯 가지를 넘지 못한다. 이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모두 허물이라고 이름한다. 만일 지혜가 있어서 깊이 이치를 사유하면 널리 비유를 설하여 능히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논한 내용도 이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017_0752_c_20L凡問答者答極至於五過此更言皆名爲過若有智慧思惟深理廣說譬喩能解於義然其所論不出此法
017_0753_a_01L논자가 말하기를, 이미 위와 같이 모든 논법의 요체를 설하였다. 이 논의 요체는 모든 논의 근본이다. 논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널리 문답을 일으키고 지혜를 자라게 한다. 만일 종자가 좋은 땅을 만나면 뿌리와 줄기가 무성해지지만, 나쁜 밭에 뿌려지면 열매가 생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법 또한 그러하다. 만일 지혜가 있어서 능히 잘 사량할 때에는 곧 널리 모든 논을 일으키지만, 만일 지혜가 적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이 논을 익히더라도 능히 통달할 수 없고, 곧 진선지견(眞善知見)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실지(實智)를 낳아서 선악을 분별하려는 모든 이들은 마땅히 이 정법론을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할 것이다.
017_0752_c_23L者言已說如上諸說法要此論要者諸論之本由此論故廣生問答增長智慧譬如種子若遇良地根莖滋茂若種惡田無有果實此法亦爾若有智慧能善思量則廣生諸論若愚癡人少於智慧雖習此論不能通達則不名眞善知見是故諸有欲生實智分別善惡當勤修習此正法論
方便心論一卷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방편심론』에서 논법의 중요한 항목으로서 들고 있는 여덟 가지 사항으로, 후에 자세하게 논의되겠지만 이름만을 열거해 보면 비유(譬喩)ㆍ수소집(隨所執)ㆍ어선(語善)ㆍ언실(言失)ㆍ지인(知因)ㆍ응시어(應時語)ㆍ사인비인(似因非因)ㆍ수어난(隨語難)이다.
  2. 2)외도 가운데 한 종류이다. 현장은 승론(勝論)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인도의 자연철학파이며 우주만유를 해부적으로 해석하는 학파인 수론(數論)과 함께 고대 인도철학의 쌍벽을 이룬다.
  3. 3)승론파의 주장은 폐세사가경에 잘 나타나 있다. 6제 또는 6구의(句義)라는 것을 주장한다. 첫 번째 타라표는 실체(dravya)의 구역어(舊譯語)이고, 두 번째 구나(gu。na)는 덕(德)의 뜻이며, 세 번째 총제는 동(同), 네 번째 별제는 이(異)이고, 다섯 번째 작제는 업(業)이고, 여섯 번째 불장제는 화합(和合)의 구역어이다. 이 6제는 승론철학에 있어서는 만상을 요소로 환원시켜서 이것을 여섯 개의 범주로 통섭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형이상학적 그리고 인식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4. 4)상키야(Saṃkhya), 즉 수론(數論)을 가리킨다. 승론(勝論)과 함께 고대 인도의 6파철학(派哲學)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우주만유가 전개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물질적 본체로서의 자성(自性, prakṛti), 정신적 본체로서의 신아(神我, puruṣa)의 두 가지 근본원리를 내세우고, 나아가 그 발전하는 순서를 25제(諦)로써 설명하는, 질서정연하고 가장 이론적인 학파이다.
  5. 5)요가(Yoga)학파. 수론파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으며, 수론의 이론을 실제적으로 행법화시킨 학파로 수론이 이론적인 것에 대해서 요가파는 직관적이다.
  6. 6)『유식론(唯識論)』 1, 『동술기(同述記)』 1의 끝에 외도의 4견(見), 4집(執)을 제시하면서 “첫째로 하나[一]에 집착하는 것이 수론(數論) 등과 같고, 둘째로 다름[異]에 집착하는 것이 승론(勝論) 등과 같다.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계일외도, 계이외도는 각기 수론, 승론의 이칭(異稱)이라고 볼 수 있다.
  7. 7)구나(求那, gu。na)란 원질(原質)의 의미인데 이런 뜻에서 활동, 작자(作者)의 뜻이 되었고, 마침내 덕(德)이라는 뜻이 되었다. 승론(勝論)의 6구의(句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여기에서는 소리로써 ‘공대(空大)가 갖는 덕’이라는 의미이다.
  8. 8)말하는 이의 말과 발음이 지나치게 빠른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