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775_a_01L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


무착보살(無着菩薩) 본송 지음
세친보살(世親菩薩) 해석
의정(義淨) 한역
송성수 번역


이제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선정(禪定)을 익혀서 빨리 모든 번뇌를 여의도록 하겠다. 이 때문에 이 방편을 서술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을 구하는 자 쌓아 모으되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물러서
세 가지 원만함을 얻고 난다면
그는 의지함이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리라

≪해석≫ 이 맨 처음의 한 게송이 여섯 문[六門]을 통틀어 표시한 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자’라고 말한 것은, 이 해탈 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요, ‘쌓아 모으되’라고 말한 것은 수승한 행[勝行]을 돕는 식량(食糧)을 쌓아 모을 수 있음을 일컫는 것이다.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물러서’라고 말한 것은, 반연하는 곳에 마음을 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선정’이라고 이르는 것은, 산란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어떻게 수습하는 것을 가리켜 ‘세 가지 원만함을 얻고 나면 의지함이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답】원만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원만한 것이요, 둘째는 반연하는 바의 원만한 것이요, 셋째는 뜻을 일으킴이 원만한 것이다. ‘의지함이 있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선정을 이르는 것이니, 첫째는 머트러운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는 선정이요, 둘째는 머트러운 생각은 없고 세밀한 생각만 있는 선정이요, 셋째는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는 선정이며,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 함은,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닦는 그러한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해탈을 원하고 즐거운 마음을 일으키고, 다시 일찍 해탈을 돕는 식량을 쌓아 모아서 그 마음을 선정이 의지한다면, 그는 스승과 제자 등 세 가지 원만함이 있어 이를 의지로 삼고, 의지함이 있으므로 해서 수습하며, 선정을 수습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세간의 모든 복과 또는 수승 원만한 과보[果]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와 같이 하여 그 차례를 순조로이 성립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대목을 ‘통틀어 표시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승(三乘) 안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이를
해탈 구하는 사람이라 이르고
두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는 이를
해탈한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네

집수(執受)와 식(識)이
바로 두 장애의 체성(體性)인 줄 알지니
의혹의 종자와 일체의 종자가
능히 두 사람을 얽어매기 때문이라

이미 번뇌의 장애는 제거했다 하더라도
아직 습기를 깨끗이 제거하지 못한
이 같은 것을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나니
나머지는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으시네

저 의혹이 비록 없더라도
거둥하는 것에 의혹됨이 있다면
이 습기가 바로 전생의 것이니
만약에 제거한다면 이와는 다르리라

≪해석≫ 이 네 게송은 해탈 구하는 자를 해석함이니, 이를테면, 성문승(聲聞乘) 따위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승 안에서 마음으로 해탈하기를 좋아하는 이를 해탈 구하는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을 해탈이라 하는가 하면, 두 가지 장애를 완전히 제거하는 그것을 해탈이라 하며, 어떤 것이 두 가지 장애이냐 하면, 제거란 그것이 바로 해탈을 뜻함이라, 집수(執受)와 식(識)이 곧 두 가지 장애의 체성인 줄 알아야 한다.
식이란, 아뢰야(阿賴耶)의 식이 그것이고, 고집 수란, 곧 의지한다는 뜻이 그것이라. 이를테면, 이 번뇌와 소지(所知)가 두 가지 장애의 체성인 것이다.
이는 또 무엇이냐 하면, 의혹의 종자[惑種]가 곧 번뇌장애의 자성(自性)이고, 일체 종자[一切種]가 곧 소지(所知)장애의 자성이다. 또 일체 종자는 곧 두 가지 장애의 종자이어서 능히 두 사람을 얽어매는지라, 번뇌장의 종자가 성문을 얽어맬 수 있고, 일체 종자가 보살을 얽어맬 수 있나니, 성문과 보살이 거기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을 이 두 가지 해탈의 차별이라 하는가 하면, 이른 바 성【문】사람은 아직 습기가 제거되지 못하고 번뇌장만 끊어서 해탈을 증(證)하는데, 불ㆍ세존께서만은 그 모든 것을 다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습기인가 하면, 저 의혹이 비록 짓는바 형용은 없으나 의혹됨이 있는 것 같은 이것을 습기라 하나니, 다시 말하자면, 저 의혹이 비록 그로 하여금 짓는바 형용은 없으나 의혹됨이 있는 것 같은지라, 이 이른바 동작과 거동에 의혹됨이 있는 것 같다 함은, 곧 이것이 인(因)에서 과(果)를 설하는 것이어서 이 때문에 저 성문(聲聞)ㆍ독각(獨覺)으로선 아직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습기인가 하면, 전생 때의 모든 관습된 일이 아직 그 남은 기운이 있는지라, 이제 비록 의혹이 다 되었다 해도 어떤 형상이 더러운 형상과 같은 것을 습기라 하나니, 만약에 다 끊을 수만 있다면 이와는 같지 않을 것이고, 응당 말하기를, ‘저 습기가 다 없어져 의혹된 것 같은 거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서
의심 없이 열뇌(熱惱)를 제거하고
법의 흐름에 청정하게 되는
이것을 쌓아 모음이라고 이르나니

능히 간직하고 법 듣기를 좋아하여
그 두 가지 소견의 잘 제거하고
듣기만 하여도 마음으로 기뻐 만족하는
이것이 네 가지 일인 줄 알아 두라

≪해석≫ 이 두 게송은 쌓아 모으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경 가운데 “이 사람이 먼저 다문(多聞)을 닦아 익히고, 다시 바른 법을 듣고서 모든 소견의 열뇌(熱惱)를 이미 깨끗이 제거한다면, 마음의 덮임과 얽매인 것을 바로 항복받으리라.”고 설한 것과 같음이라, 이 글에 의지하기 때문에 처음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모든 선근을 쌓아 모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바른 법을 능히 간직하기 때문에 이것을 선두로 그 믿음 따위의 선한 법을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법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또 법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미 생겨났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의혹을 다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열뇌(熱惱)를 제거함’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두 가지 소견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소견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게 하려는 소견이고, 둘째는 스스로가 훌륭하다는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는 곧 생각하기를, ‘어쩌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이 덕을 갖춘 사람인 줄을 알게 할 수 있을까.’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게 하려는 소견이고, 이 소견에 의지하여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르되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는 소견이라 함이다. 이 두 가지가 능히 마음을 태워 덥게 하기 때문에 열뇌라고 이르는 것이며, ‘법의 흐름에 청정하게 됨’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번뇌를 능히 제거함으로써 다만 법을 들을 적에 마음껏 기뻐 만족하나니, 위의 제거[除]한다는 말이 여기까지 미친다. 이 때문에 법의 흐름에 들어가서 청정하게 되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법을 들을 그 때,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계속 흘러들어서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덮임과 얽매임이 그쳐 쉬는 것이다. 만약에 법 듣기를 싫어하지 않기를 쉬지 않는다면, 바야흐로 법의 흐름에 청정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니, 알아 두라. 이것이 곧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위에 의거하는 것이라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다음에 열여섯 게송이 있어서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무는 뜻을 해석했으니, 맨 처음의 한 게송은 통틀어 표시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따로따로 해석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반연하는 것과 그 자체가
차별되고 또 뜻을 일으키면
마음이 산란해 자량(資糧)에 머무르니
선정을 닦는 것만이 벗어나는 과(果)라네

반연하는 바를 말한 것이 그 세 종류가 있으니, 다음의 게송과 같다.

바깥과 위와 안의
이 세 종류가 반연할 바에서 나나니
머묾이 세 종류가 있으므로
그 자체와 마음 산란함이 없는 줄 알라

≪해석≫ ‘세 종류’라고 말한 것은, 첫째 바깥의 인연이고, 둘째 위의 인연이고, 셋째 안의 인연이라, 바깥의 인연이란, 이를테면, 흰 뼈 따위에 대해 그 나타나는 그림자나 형상을 관(觀)하는 것이니, 이는 처음 배우는 이들의 경계이다. 위의인연이란, 이를테면, 미지정(未至定)의 고요함을 인연하는 따위의 상(相)이 그것이다. 안의 인연이란, 이를테면, 그 뜻과 말에 따라 나타나는바 상을 그 인연하는 경계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자체란 것은, 이 마음에 산란한 상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니, 이를 머묾이라 하며,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란, 바깥 등 세 가지 인연에 처할 때 그 인연하는 바에 따라 마음이 동요되거나 산란하지 않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첫째의 머묾과 상응(相應)함은
안정된 마음 지닌 이가 볼 수 있나니
경계에 따라 옮기는 생각이 없고
상속하는 이가 명철한 사람이며

둘째의 머묾과 상응함은
싫어 여의는 마음이 고요하나니
전일한 뜻으로 생각이 옮기지 않고
상속하는 이가 이 명철한 사람이며

셋째의 머묾과 상응함은
앞의 경계에 엉기어 머무나니
안정된 뜻으로 옮기는 생각이 없고
상속하는 이가 이 명철한 사람이네.

≪해석≫ 이 세 게송은 그 차례대로 바깥 인연과 위 인연과 안 인연에 배속한 것이다. ‘경계에 따라 옮기는 생각이 없음’이란, 다른 경계에 대해 마음이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옮김이 없다’고 하였으며, ‘상속’이란 것은, 굳게 마음을 간직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명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혹시 자기의 생각에 따르거나 또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따르거나 선정[靜慮]의 법에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이러한 이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알아 두라. 차례대로 이러한 사람은 법을 따르는 행(行)과 믿음을 따르는 행의 종성(種姓)인 것이며, ‘싫어 여의는 마음이 고요하여 전일한 뜻으로 옮기는 생각이 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그 경계에 싫어 여의는 마음을 내되 과거엔 그 경계만을 보았을 뿐으로 싫음을 내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 와선 전일하게 마음을 쏟아 싫어 여읨을 내어서 산란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것이며, ‘앞의 경계에 얽히어 머묾’이란, 이른바 그 뜻과 말을 나타내는 경계에 있어서 이 경계를 인연할 적에 그 마음이 어울려 안정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안정된 뜻으로 생각이 옮기지 않고 상속하는 이가 명철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음을 굳게 잡음과
바른 생각을 쏟음과
그 뜻을 거듭 살핌과
점차 얻음과
마음으로 기뻐함과
대치품(對治品)이 생길 때와
의혹 나는 것을 능히 제거함과
가행(加行)이 항상 끊임없음과
저절로 운전되는 도를 행하는
산란하지 않는 아홉 가지를 알아야 하네.

≪해석≫ 저 머묾 가운데에 차별이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최초의 머묾[最初住]과, 바른 생각의 머묾[正念住]과 거듭 살피는 머묾[覆審住]과 뒤 차별의 머묾[正別住]과, 조복하여 유순하는 머묾[調柔住]과 고요한 머묾[寂靜住]과 항복 받는 머묾[降伏住]과 공용의 머묾[功用住]과 저절로 운행하는 머묾[任運住]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아함경[阿笈摩經]』에 의지하여, 그 글귀에 따라 차례대로 닦아 익혀야 한다. 처음 배우는 이로서 경계를 반연할 적에 그 마음을 굳게 잡는 것을 ‘최초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그 이후로 그 바른 생각을 쏟아 넣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바른 생각의 머묾’이라 한다. 만약 여기에 의탁할 때 산란한 마음이 생긴다면, 다시 그 반연한 경계를 거듭 살펴서 머물러야 하나니, 이렇게 머무는 것을 ‘거듭 살피는 머묾’이라 한다. 다음은 뒤 때에 가서 점차로 그 차별을 얻는 것을 ‘뒤 때 차별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대치(對治)가 생기면, 마음에 자유를 얻어 기뻐하는 때게 오나니, 이렇게 머무는 것을 ‘조복하여 유순하는 머묾’이라 한다. 다음은 이 기쁨과 사랑을 거쳐서 기쁨도 사랑도 없는 그러한 마음으로 대치할 적에 사랑하거나 기뻐할 것이 없어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고요한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이미 생겨났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무거운 장애와 번뇌를 항복받기 때문이니, 그러한 것을 ‘항복 받는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갓 가행(加行)하는 마음으로 그 반연하는 경계에 끊임없이 한 가지 인연을 따라 머무는 것을 ‘공용의 머묾’이라 하며, 다음은 뒤 때에 가서 그 반연하는 경계에 마음으로 가행하는 것이 없어도 저절로 운행되고 다라 흘러서 끊임없이 선정에 들어가 관습(慣習)의 도에 머무는 것을 ‘절로 운행하는 머묾’이라 한다. 이 아홉 가지로 마음이 유동되거나 산란하지 않는 것을 ‘머묾’이라 하나니, 알아 두라. 이 산란하지 않는다는 말이 굳게 잡는다는 따위와 모두 서로를 배속(配屬)시켜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힘을 씀과 간극[隙]이 있음과
공용이 있고 또는 공용이 없는
이러한 백예순둘 가운데
네 가지 뜻 일으킴을 알지니

이른바 바깥과 안과 삿된 인연과
추중(麤重)한 것과 뜻을 일으킴의
이 산란한 마음이 다섯 가지 있음으로써
선정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게 되네

거기에 마음을 머무는 까닭에
고요하지 않아 바깥이 산란하고
흔들리거나 잠기거나 집착하기에
안이 또 산란해지기 마련이라
알지어다. 삿된 인연의 상이란
친족(親族)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이른 바 추중한 것의 산란함이란
두 가지 아집(我執)을 내는 것이네

앞 경계 보기를 분명히 하되
분별하여 그 상을 관함으로써
뜻을 일으킴이 산란한 것이니
이와 다른 것은 염(念)하는 마음일 뿐이라

뜻을 일으킴이 산란한 가운데
다시 그 산란한 상이 있으니만큼
승(乘)에서나 또는 선정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의 것을 응당 제거해야 하네

≪해석≫ 뜻을 일으킴에 그 네 종류가 있는 줄을 알지니, 첫째는 힘을 써서 부담[負荷]하여 뜻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간극이 있게 부담하여서 뜻을 일으킴이요, 셋째는 공용이 있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요, 넷째는 공용이 없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라, 이 가운데 굳게 잡아서 산란하지 않는 그것이 곧 힘을 써서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다. 처음에 공력(功力)을 써서 부담하기 때문에 그 다음 바른 생각을 쏟아 넣는 따위의 여섯 종류가 산란하지 않는 것이 곧 간극이 있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다. 중간에 자주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간극 없이 가행(加行)하는 그것이 곧 공용 있게 부담하여서 뜻을 일으킴이다. 다음으로 관습 된 도에 들어가는 그것이 곧 공용 없게 부담하여 뜻을 일으킴이니, 이와 같이 다 섭수[攝]하고 나면, 이것이 이른바 백예순둘이라, 바로 이것이 네 종류의 뜻을 일으키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음 산란한 것이 그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바깥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둘째는 안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셋째는 삿된 인연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요, 넷째는 추중(麤重)한 것에의 마음이 산란함이요, 다섯째는 뜻을 일으킴에의 마음이 산란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그 마음 머무는 경계에서 인연을 일으킬 때 드디어 다른 일을 인연하여 마음이 유동되거나 산란하기 때문이며, ‘안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이른바 들뜸 따위의 셋으로 그 반연할 바 경계에서 중간의 산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삿된 인연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선정을 닦을 적에 여러 가지 찾아 구하는 것이 있어서 친척과 친구 등 이러한 일에 그리워하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추중한 것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두 가지 아집(我執)이 있어 그 마음을 산란하게 함으로써 선정을 닦을 적에 이러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이익되는 것과 손해되는 것이라, 몸이 안온한 것을 이익이라 하고 몸이 쇠약한 것을 손해라 하여, 혹은 ‘내가 이제 즐거움을 얻었다’하고, 혹은 ‘내가 이제 괴로움이 있다’하거나, 혹은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라 하고, 혹은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라, 이 가운데 ≺나[我]≻라는 그것이 바로 집착이어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뜻을 일으킴에의 마음이 산란하다’함은, 그것이 세 종류가 있으니, 어떤 인연한 상(相)에 분명히 머묾은 이것이 사찰(思察)하는 성질이요, 혹은 이 승(乘)에 따르다가 다시 다른 승에 나아감이요, 혹은 이 선정에 따르다가 다시 다른 선정에 나아감이 그것이라. 이를테면, 너무나 분별하고 사찰하여 선정을 닦을 적에 드디어 마음을 산란케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마음의 산란이라 한다. ‘이와의 다른 것은 염(念)하는 마음일 뿐이다’함은, 이것이 그 처음 뜻을 일으킴에의 산란함을 대치할 수 있나니, 분별하지 않고서 경계에 인연하기 때문에 다만 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뿐이다. 이는 또 마음에 잊지 않고서 염할 것을 밝힘이다. 이 세 가지 산란 가운데 첫째와 둘째의 것은 버려야 하고, 셋째의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선정을 따라 선정에 나아가는지라, 뛰어나고 상위(上位)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허물은 아니다.

계행에 머물러 계행이 청정하다면
이는 자량(資糧)이 머무는 곳이라
모든 감관[根]을 잘 옹호하는 것이
네 가지 청정한 인(因)인 줄 알라

경계를 바르게 행하여야
의지하는 데를 더불어 서로 합하고
선한 일을 부지런히 닦아야
모든 과실을 제거할 수 있나니

최초에 뜻 일으킴을 얻고
그 다음에 세간의 청정함을 얻고
다시 출세간의 머묾을 더한다면
세 선정으로써 세 세계를 초래하네

≪해석≫ ‘자량의 머무는 곳’이라 함은 이른바 계행이 바로 그지없는 공덕의 의지하는 곳이므로, 반드시 계행에 먼저 머물러야 계행이 청정하여 모자라거나 범하는 일이 없는지라, 만약에 계행의 청정함을 구하려면, 네 가지 인(因)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음식에 있어서 그 분량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초저녁과 새벽에 능히 스스로가 깨우치어 선정과 더불어 상응(相應)하는 것이요, 넷째는 네 가지 위의[四威儀] 가운데 바른 생각으로써 머무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모든 감관을 잘 옹호하여 계행을 청정하게 하고, 경계를 바르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지하는 바와 더불어 서로 합하고 선한 일을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과실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하면, 첫째의 인(因)은 바로 그 행하는 경계에서 청정함을 행하기 때문이며, 둘째의 인은 그 의지하는 데에 몸소 서로가 합하여 수순함으로써 음식을 받음에 있어서도 많고 적음을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의 인은 선한 일에 대해 정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넷째의인은 과실을 제거함에 있어서 그 나아가고 물러나는 거둥에 마음을 잘 쓰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인(因)으로 말미암아 계행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라. 세 가지 선정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출리(出離)하는 길을 얻는지라, 바깥 경계를 인연할 적에 뜻 일으킴의 머묾을 얻고, 위의 경계를 인연할 적엔 세간의 청정함을 얻고, 안의 마음을 인연할 적에 출세간의 청정함을 얻는다. ‘머묾’이란, 그것이 곧 아주 출리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열반에 나아가 다시는 퇴전(退轉)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부지런히 수습(修習)함에 머문다’는 것을 해석해 둔다. 게송으로 말한다.

들음이 많고 또 진리를 보고
설법을 잘하고 자비심이 있어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낸다면
이 사람에겐 선정을 가르칠 만하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일 그대로를 설하되
아는 바의 경계를 잘 풀이한다면
이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 하리며

들음으로 말미암아 뜻을 내어서
적멸(寂滅)의 인(因)을 설한다면
이는 그 인에 대해 뜻을 일으킴이니
가장 원만한 사람이라고 이르리라

≪해석≫ 원만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원만한 것이요, 둘째는 반연한 것의 원만함이요, 셋째는 뜻을 일으키는 것의 원만함이다. 이 가운데 맨 처음의 게송은 스승과 제자의 원만함을 설한 것이니, 이는 그 사람의 잘 가르치는 것이 원만함과, 증오(證悟)하는 것이 원만함과, 잘 설하는 것이 원만함과, 더럽히지 않은 마음이 원만함과 상속하여 설법하는 데에 있어서의 그 가행(加行)이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이것은 교수하는 스승의 뭇 덕이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스승의 원만함을 말미암아 바른 법을 듣게 되고 증오하는 것이 있다. 다음은 반연한 바의 원만함을 밝히기 위해 둘째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모든 일에 대하여 그 모든 일 그대로를 다 설하되 아는 바의 경계를 잘 설하는지라, 이는 스승과 제자가 모든 일을 설함에 있어서 끝까지 다하여 아낌이 없음을 밝힌 것이므로, ‘인연한 바의 원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음은 또 뜻을 일으킴의 원만함을 밝히기 위해 셋째의 게송을 설한 것이니, 이는 들은 것으로써 인(因)을 삼아 뜻을 일으켜 말하는 것이 능히 성스러운 도[聖道]와 열반을 더불어 바로 인(因)이 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라, 이 뜻을 반연하여 말하기에 그 모든 뜻을 일으킴이 다 원만하게 되는 것이니, 이 가운데 말을 인하여 들은 거슬 나타내니 만큼 그 뜻이 바로 말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멸’이라 함은, 이것이 바로 열반이고 또 도의 진리[道諦]이니, 자체가 이미 적멸한데다가 또 능히 적멸함에 나아가기 때문에 이를 통틀어서 말하기를, ‘적멸의 인’이라 하는 것이며, 뜻을 일으킴이라 함은 이 뜻을 일으킴이 곧 적멸의 인에 인연하는 것임을 밝힘이다. 어째서 그 인연하는 것이 법의 성품 없음을 요달하는가 하면, 이와 같이 인연할 적엔 바로 그 인이 역시 적멸이기 때문이다. 이 뜻 일으킴을 이르되 ‘적멸의 인’이라 함은, 이것이 전체의 해석이며, 또 이것을 인연하여 뜻 일으킴을 이르되, 역시 ‘적멸의 인’이라 함은, 이것이 별구(別句)의 해석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른바 말과 뜻을 찾아 구함이란
이 뒤에 살펴야 하리니
뜻도, 말도 없는 그것이 선정이라
선정의 상(相)이 세 가지가 있네

다른 인연도 없고 상도 없으면서
마음이 문자를 인연해 머무는
이것이 곧 마음의 적멸한 곳이니
이를 사마타(奢摩他)라고 이르며

저 갖가지 경계를 관하는 것은
비바사나[毘鉢舍那]라고 이르고
다시 하나의 유가(瑜伽)는
12분(分)의 선정이라고 이르네

추중(麤重)한 장애와 견(見)의 장애는
이 사마타ㆍ바바사나의 두 선정이
능히 저 장애를 대치할 수 있어
훌륭한 방편을 일으키는 줄 알라

≪해석≫ 다음은 의지함이 있는 모든 선정 닦는 사람으로선 반드시 의탁할 데가 있음을 밝힘이다. 이를테면 세 가지 선정에 의지함이니, 그 심구(尋求) 따위를 설함이 그것이다. ‘심구’라 함은 이 머트러운 생각[尋]이 있는 것을 나타냄이니, 이미 머트러운 생각이 있는 것을 말한다면, 이에 준하여 세밀한 생각[伺]도 있는 줄을 알지라. ‘세밀한 살핌’이라 함은, 이 머트러운 생각은 없고 세밀한 생각만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뜻도 말도 없음’이라 함은, 머트러운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음을 나타내려는 거시니,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다 뜻과 말대로 그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이는 사마타(奢摩他)의 법에 의거하여 그 정의(定義)를 밝힘이다.
그리고 ‘다른 인연도 상도 없음’이란, 그 차이(差異)가 없다는 뜻을 밝힘이다. 다만 그 문자를 인연하여 마음이 머물게 됨으로써 다른 인연이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며, 다만 그 문자를 인연해 이치와 모양을 관하며 모든 뜻을 일으킴은 저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양을 ‘사마타’라고 이르는 것이다. ‘사마’란 것은, 고요히 그친다는 뜻이고, ‘타’란 것은 곳이라는 뜻이라, 사마만으로 그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그 마음이 고요히 그치는 곳에 의거해 마음이 엉켜 머물러서 선정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선정이 곧 엉킨 마음의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사마타’라고 한다. 이와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비바사나[毘鉢舍那] 법에 의거하여 그 정의(定義)를 밝히기 위해 다음의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많은 경계에 의지하는 것을 ‘뭇 관’이라 하고, ‘저’라고 말한 것은 저 두 가지를 더불어 함께 서로가 매여 붙는 것이니, 곧 사마타와 또는 인연하는 문자가 그것이다. 이는 사바타에 의거해 비바사나를 얻어서 문자의 곳에 의지하는 것이니, 모든 이치가 모든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고요히 그치는 곳의 모든 뭇 이치가 문자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뭇 이치를 반연하여 관찰을 일으키는 것을 ‘뭇 관’이라 한다. ‘12분의 선정’이라 함은 혹시 고요한 곳은 있되 뭇 관이 없거나, 혹시 뭇 관은 있되 고요한 곳이 없거나, 혹시 다 함께 있기도 함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바로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운행하는 것이다. 또 사마타와 비바사나에 두 가지 장애가 있으니, 이른바 추중(麤重)한 장애와 견(見)의 장애가 그것이라. 두 선정이 곧 장애를 대치(對治)하나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어째서 이 두 선정을 이르되, ‘훌륭한 방편을 길러낸다’고 하는가 하면, 선한 법의 방편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방편의 법으로 하여금 훌륭한 청정을 얻게 하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상(相)을 닦는 것이니
고요히 그침과 들뜸을 억제함과
버릴 줄 아는 이것을 차례대로 닦아야 하네

만약에 마음이 가라앉을까 염려되면
묘한 일에 대해 인연을 일으키고
만약에 들떠서 흔들릴까 염려되면
묘한 일에 대해 인연을 일으키고
만약에 들떠서 흔들릴까 염려되면
싫증을 내어 제거하게 할지며

가라앉음과 들뜸을 아주 여의려면
그 마음을 버리는 것에 머물지니
공용이 없이 저절로 운행하려면
항상 세 가지 상을 닦아야 하네

설정이란 이 세 가지 상을 닦고
한 가지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음 따위의 잘못을 막기 위해
다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네

≪해석≫ 앞에서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청정한 선정을 구하는 자는 세 가지 상을 닦나니, 그 세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고요히 그침[止]과 들뜸을 억제함과 ㅂ림이 그것이며, 다시 어떻게 닦느냐 하면, 차례대로를 따름이니, 그 의혹의 장애가 생길 때를 따라 응당 차례대로 닦아 익히되, 어떤 일에 다시 어떤 상을 닦아야 함이 그것이다. 또 들뜬 것을 억제하는 상을 변론하건대, 만약에 마음이 가라앉음으로써 빠질까 염려되는 자라면, 세 가지 상을 아래와 같이 닦을지니 알아 두라. 마음이 가라앉은 것을 닦거나 들뜬 것을 억제하는 상이라면, 그 상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묘한 일에 인연을 일으켜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는 것을 그 상으로 삼으며, 또 고요히 그치는 상이란, 만약에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봐 염려될 경우엔 응당 고요한 곳을 닦을지니, 어떻게 닦느냐 하면, 싫증을 내어 제거하게 하되 그 반연한 경계에 대해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어서 자신의 속마음에 허물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버리는 상이란, 이른바 가라앉거나 들뜸을 여의는 것이니, 어떤 마음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마음을 버림에 머묾이 그것이라, 이 버리는 상이 바로 ‘공용이 없이 저절로 운행하려면 항상 세 가지 상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상을 차례로 닦을 적에 모든 선정을 닦는 자는 그 청정한 상을 얻는 것이며, 또 사마타(奢摩他) 같은 것이 바로 이 선정인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상에 있어서 한 가지만을 닦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라앉은 따위의 잘못을 막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함’이란, 만약에 그치는 것만을 닦는다면 속마음이 가라앉는지라, 이미 가라앉을 때엔 곧 들뜸을 억제된 것이어야 하는데, 만약에 들뜸을 억제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거나 흩어질 경우엔 부정(不淨)한 경계를 관하여 싫어 여읨을 나게 할지니, 이 버리는 상을 올바르게 닦아 익힐 적에 비로소 바른 선정으로써 능히 번뇌를 다할 수 있다고 하겠다.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마음을 지극히 청정하게 할 수 있으리니, 알아두라. 이 가운데엔 다 바른 경전의 문구(文句)에 수순하여 이치 그대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벗어나거나 또는 즐거워하는 것은
바르게 머무는 이라야 그럴 수 있나니
이 장애와 의혹을 다 제거한다면
선정을 닦는 자로서 마음이 청정하리라

≪해석≫ 이는 청정의 이익을 밝힘이다. ‘거진경(去塵經)’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속마음의 청정함을 구하려 할 적에 의혹의 장애가 있어서 현전에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제거하려는 자로선 먼저 불선한 업(業)과 도(道)에 큰 허물을 짓지 말고, 죄악의 견(見)을 지식시킨 다음 출가를 구하여 벗어날 것을 희구하여라. 만약 이 번뇌 속에 처하여 탐욕ㆍ진심ㆍ살해의 뜻으로 죄악을 일으킨다면, 그 머트러운 생각의 장애가 애락(愛樂)을 이길 것이니, 이 장애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는 애락하는 이라고 말하리라”고 하셨으니, 그 누구나 미세한 권속에의 머트러운 생각과 세간에의 머트러운 생각과 죽지 않는 것에의 머트러운 생각이 있다면, 이것이 그 바르게 머무는 것을 막는다. 이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바르게 머물 것을 말함이다. 만약에 공용이 있어서 바야흐로 선정에 든다면 이 선정은 곧 충분히 감당하는 성질이 아니고, 만약에 이것을 제거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능히 의혹을 제거한다면, 충분히 감당한다고 말할 것이니, 이는 청정한 선정의 사람으로서 네 가지 수승한 이익 얻는 것을 나타냄이다. 어떤 것을 이르되 ‘선정을 닦는 사람의 과(果)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 선정의 문(門) 가운데에
이른바 바르게 닦아 익힘이란
세속의 선정을 다 분명히 요달하고
또 출세간의 선정을 아는 것이네

이 게송의 뜻은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鉢舍那]를 닦아 익히는 자는 현재의 과(果)를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건 이른 바 선정의 상에 의지하여 닦아 익힐 적엔 모든 세간의 수승한 과를 얻는 것이 원만하고, 또 출세간의 과를 얻나니, 앞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문】이상과 같이 설한 것은 무슨 일을 밝히려는 것입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의요(意樂)의 의지하는 곳인
그 본래의 의지함가 바르게 의지함을 나타냄이니
세간의 선정을 원만히 하고 나선
아울러 출세간의 선정을 요달하는 것이네

≪해석≫ 간략하게 설한 것이지만, 그 뜻이 두루하니, 앞서의 일을 풀이하기 위해 이 게송을 설하였다. 최초에 이른바 ‘해탈을 구하는 자’라 함은, 의요(意樂)의 원만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요, ‘쌓아 모음’이라 함은, 의지하는 처소의 원만함이니, 이는 그 선정 닦는 데에 마음을 둔 자로선 반드시 의탁하여 돕는 식량을 쌓아 모을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수습함에 머묾’이라 함은, 그 본래 의지하는 곳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경 가운데 설한 바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먼저 선정에 의지해야만 번뇌를 다할 수 있으리니 이것이 내가 설하여 두는 바이다. 만약에 생사의 바다에 벗어날 것을 구하려는 자라면, 바른 선정을 떠나선 별다른 방편이 없으리라.”고 하심과 같음이요, 다음으로 ‘세 가지 원만함을 얻음’이라 함은, 바르게 의지하는 것의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이는 그 스승과 제자가 질문하고 결정하는 것에 의지할 수 있음을 밝힘이다.
‘의지하는 데가 있어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 함은, 그 닦아 익히는 것의 원만함을 나타냄이니, 모든 슬기 있는 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방일(放逸)을 멀리 여의고서 바르게 수행할 적에 세간의 모든 선정을 죄다 원만히 하고, 또 출세간의 선정을 함께 증오(證悟)하여 현저히 그 과(果)를 얻는 것이 원만하기 마련이다.
017_0775_a_01L六門教授習定論一卷無著菩薩本世親菩薩釋三藏法師義淨奉 制譯今欲利益一切有情令習世定及出世定速能捨離諸煩惱故述此方便頌曰求脫者積集 於住勤修習 得三圓滿已有依修定人釋曰此初一頌摠摽六門言求脫者謂是求解脫人積集者謂能積集勝行資糧於住勤修習者於所緣處令心善住名之爲定由不散亂不動故問云何修習謂得三圓滿已有依人圓滿有三一師資圓滿二所緣圓滿三作意圓滿有依謂是三定一有尋有伺定二無尋唯伺定三無尋無伺定修定人者謂能修習奢摩他毘鉢舍那若人能於解脫起願樂復曾積集解脫資糧心依於定有資等三而爲依止有依修習由定故能獲世閒諸福及以殊勝圓滿之果先作如是安立次第故名摠摽頌曰於三乘樂脫 名求解脫人 二種障全除斯名爲解脫 應知執受識 是二障體性惑種一切種 由能縛二人 已除煩惱障習氣未蠲除 此謂聲聞乘 餘唯佛能斷若彼惑雖無 作儀如有惑 是習氣前生若除便異此釋曰此之四頌釋求解脫者謂於聲聞乘等有差別故於三乘中心樂解名求解脫云何解脫二種障全除斯名爲解脫何者是二障除之名脫應知執受識是二障體性識者卽是阿賴耶識執受者是依止義謂是煩所知二障體性此復云何惑種卽是煩惱障自性一切種卽是所知障自性又一切種者卽是二障種子縛二人煩惱障種子能縛聲聞一切種子能縛菩薩由與聲聞菩薩爲繫縛故云何此二解脫差別謂聲聞人習氣未除斷煩惱障而證解脫唯佛世尊能摠除故云何習氣彼惑雖無所作形儀如有惑者是名習氣此中應言若惑雖無令彼作相如有惑者此言作儀如有惑者卽是於因說果名故彼謂聲聞獨覺未知此是誰之習氣謂是前生所有串習之事尚有餘氣今雖惑盡所爲相狀似染形儀名爲習氣若能除斷與此不同應云若彼習皆無不作儀如惑頌曰種植諸善根 無疑除熱惱 於法流淸淨是名爲積集 能持樂聽法 善除其二見但聞心喜足 是四事應知釋曰此之二頌釋積集義如經中說此人先應修習多聞復聽正法諸見熱惱已正蠲除心之蓋纏能正降伏依此文義故說初頌云何積集所有善根謂能持正法故以此爲先令其信等善法增故云何無疑謂樂聽法由知法故已生未生所有疑惑能除滅云何除熱惱謂除二見故見云何一者欲令他識知見二者自起高擧見謂作是念如何令他得知我是具德之人是則名爲令他識見此見故自欲高擧名自高見此二能令心焦熱故名爲熱惱云何法流淸淨謂能除遣但聞法時心生喜足故上之除字流入於此於法流淸淨謂聽法時心無散亂相續而流淸淨故蓋纏止息若聽法無厭更能進思勤修不息方得名爲法流淸淨當知此據聞思修位如次應知次有十六頌釋於住勤修習初一摠餘是別釋頌曰所緣及自體 差別幷作意 心亂住資糧修定出離果言所緣者有其三種外上及以內 此三所緣生 應知住有三自體心無亂釋曰言三種者一外緣二上緣三內外緣謂白骨等觀所現影像是初學境界上緣謂未至定緣靜等相緣謂從其意言所現之相爲所緣境自體謂是心無亂相名之爲住心亂者於外等處三種緣時隨其所緣心無動亂頌曰第一住相應 定心者能見 於境無移念相續是明人 第二住相應 厭離心寂靜專意無移念 相續是明人 第三住相應於前境凝住 定意無移念 相續是明人釋曰此之三頌如其次第配外上內言於境無移念者謂於餘境心無散亂故名無移相續者堅守持心令不斷絕言明人者或因自思或從他教於靜慮法而起加行是謂明人應知如次是隨法行及隨信行種性言厭離心寂靜專意無移念者謂於其境生厭離心前唯觀境未能生厭今時專注心生厭離而不散動於前境凝住者謂於意言所現之境緣此境時其心凝定故云定意無移念相續明人頌曰堅執及正流 幷覆審其意 轉得心歡喜對治品生時 惑生能息除 加行常無閒能行任運道 不散九應知釋曰於彼住中差別有九謂最初住正念住覆審住後別住調柔住寂靜降伏住功用住任運住此等竝依阿笈摩經隨句次第而爲修習若於最初學緣境時其心堅執名最初住次於後時令其正念流注不斷名正念住若依託此有亂心生更覆審察緣境而住名爲覆審住於後時轉得差別名後別住次於後對治生起心得自在生歡喜時謞柔住於此喜愛以無愛心對治生無所愛樂其心安靜名寂靜住於後時所有已生未生重障煩惱爲降伏故名降伏住次於後時以加行於所緣境無閒隨轉一緣而住爲功用住次於後時於所緣境心無加行任運隨流無閒入定緣串習道名任運住此之九種心不流散名之爲住應知以此不散之言與堅執等皆相配屬頌曰勵力幷有隙 有用及無用 此中一六二四作意應知 謂外內邪緣 麤重幷作意此亂心有五 與定者相違 於彼住心緣不靜外散亂 掉沈心味著 內散亂應知應識邪緣相 謂思親族等 生二種我執是名麤重亂 見前境分明 分別觀其相是作意散亂 異斯唯念心 於作意亂中復有其亂相 於乘及靜慮 初二應除遣釋曰應知作意有其四種一勵力荷負作意二有閒荷負作意三有功用荷負作意四無功用荷負作意此中堅執不散是勵力荷負作意初用功而荷負故次正流等六種不散有閒荷負作意中閒數有亂心起故無閒加行是有功用行荷負作意串習道是無功用行荷負作意如是攝已謂一六二應知卽是四種作意又心散亂有其五種一外心散亂內心散亂三邪緣心散亂四麤重心散亂五作意心散亂外心散亂者住心境起緣之時遂緣餘事心流散內心散亂者謂掉擧等三於所緣境中閒亂起故邪緣散亂者於修定諸有尋求親識等事而生顧戀重心散亂者有二我執令其心亂修定時有此二事謂益及損若身安隱名之爲益身體羸弱卽是其損云我今得樂或云我今有苦或云是我之樂或云是我之苦此中我者執取義言作意心散亂者有其三種於所緣相分明而住是思察性或從此乘更趣餘乘或從此定更趣餘定謂極分別思察定時遂使心亂名心散亂異斯唯念心者此能對治初作意散亂由不分別而緣於境但有念此明成就心不忘念此三散亂二應捨第三由是從定趣定希勝上亦非是過頌曰住戒戒淸淨 是資糧住處 善護諸根等四淨因應知 正行於境界 與所依相扶於善事勤修 能除諸過失 最初得作意次得世閒淨 更增出世住 三定招三界釋曰住資糧者謂戒卽是無邊功德所依止處必先住戒戒行淸淨無有缺犯若求戒淨有四種因一善護諸二飮食知量三初夜後夜能自警與定相應四於四威儀中正念而何故善護諸根等令戒淸淨由正行於境與所依相扶善事勤修能除於過初因卽是於所行境行淸淨故二於所依身共相扶順於受飮食多少故三於善事發起精勤故四能除過失進止威儀善用心故由此四戒得淸淨如是應知由三種定三出離緣外境時得作意住緣上境得世淸淨緣內心時得出世淨卽是永得出離必趣涅槃更不退已釋於住勤修習頌曰多聞及見諦 善說有慈悲 常生歡喜心此人堪教定 盡其所有事 如所有而說善解所知境 斯名善教人 由聞生意言說爲寂滅因 名寂因作意 是謂善圓滿釋曰圓滿有三一師資圓滿二所緣圓滿三作意圓滿此中初頌說師資圓滿意顯其人善教圓滿證悟圓滿善語圓滿無染心圓滿相續說法加行圓滿此顯教授師衆德圓滿由此師故得聞正法有所證悟次明所緣圓滿說第二頌盡所有事如事而說善所知境名爲善說此明師資能說諸事窮盡無悋故名所緣圓滿次明作意圓滿說第三頌此顯以聞爲因所起意言能與聖道涅槃爲正因故緣此意言所有作意皆得圓滿此中因言顯聞卽是意言之因言寂滅者卽是涅槃及以道諦自體寂滅及能趣滅故摠言之寂因作意者明此作緣寂滅因何謂所緣了法無性是緣時卽是其因亦是寂滅故此作意名爲寂因是一體釋又緣此作意亦名寂因此別句釋頌曰准如是釋應 云寂因作意舊云如理作意者非正翻也謂尋求意言 此後應細察 意言無卽定靜慮相有三 無異緣無相 心緣字而住此是心寂處 說名奢摩他 觀彼種種境名毘鉢舍那 復是一瑜伽 名一二分定麤重障見障 應知二種定 能爲此對治作長善方便釋曰次明有依諸修定者必有依託謂依三定說尋求等言尋求者顯是有尋旣言有尋准知有伺言細察者顯無尋唯伺意言無者欲顯無尋無伺皆以意言爲性此據奢摩他明其定義說無異緣等此明無差異義但緣其字而心得住名無異緣亦名無相但緣其字於觀義所有作意非彼相故此住名奢摩他奢摩是寂止義他是處義非獨奢摩得盡於事謂據其心寂止之處心得凝住依止於定此定卽是凝心住處故奢摩他異此便無次據毘鉢舍那法明其定義說次一頌謂依多境名爲衆觀所言彼者謂與彼二俱相屬著卽奢摩他及所緣字是依奢摩他得毘鉢舍那依於字處所有諸義起諸觀故於寂止處所有衆義依仗於字謂緣衆義而起觀察名爲衆觀名一二分定者或時但有寂處而無衆觀或有衆觀而非寂處或時俱有應知卽是止觀雙運又奢摩他毘鉢舍那有二種障謂麤重障及見障應知二定是此對治如次應配何故此二長善方便能長善法之方便故云何令方便法得善淸淨耶頌曰此淸淨應知 謂修三種相 寂止策擧捨隨次第應知 若心沈恐沒 於妙事起緣若掉恐擧生 厭背令除滅 遠離於沈掉其心住於捨 無功任運流 恒修三種相定者修三相 不獨偏修一 爲遮沈等失復爲淨其心釋曰爲答前問求淨定者修三種相云何爲三謂止復云何修隨次應知隨其惑障生起之時應次修在於何時復修何相且辯策擧相若心沈恐沒定者修三相如下當知若心沈沒可修策擧相何者是耶妙事起緣令心喜爲相又寂止相者若心掉擧或恐掉擧應修寂處此云何修厭背令除滅於所緣境極生厭於自內心令過止息捨相者謂離沈掉於何心中謂心住捨此捨相者卽是無功任運流恒修三種相如是次第修三相時諸習定者得淸淨相又奢摩他等卽是定者於此三相獨修一何以故爲遮沈等失復爲淨其心若但修止內心沈沒旣沈沒時便應策擧若因策擧心掉散者不淨境令生厭離於此捨相正修時名爲正定能盡有漏由此遂令心極淸淨應知此中皆是隨順正經文句如理應思頌曰出離幷愛樂 正住有堪能 此障惑皆除定者心淸淨釋曰此明淸淨之益依去塵經說佛告諸苾芻若人欲求內心淨時有惑現前不能除滅欲斷除者先於不善業道勿造大過息罪惡見而求出希求出離若處中煩惱害意起惡尋思障勝愛樂能除此障說愛言若有微細眷屬尋思世閒尋思不死尋思障其正住對治此故說正住言若有功用方入定者此定卽非堪任之性若能除此顯有堪任能除於惑說堪能言此顯淨定之人得四種勝益云何修定人果頌曰於此定門中 所說正修習 俗定皆明了亦知出世定此頌意顯修習奢摩他毘鉢舍那者獲現果故若人能依所說定相修習之時得諸世閒勝果圓滿及出世果如前已說問曰如上所說欲明何事答曰顯意樂依處 本依及正依 世閒定圓滿幷了於出世釋曰略說義周爲會前事故說斯頌如最初云求脫者爲顯意樂圓滿集者依處圓滿此明有心修定必須依託積集資糧故於住勤修習者顯本依圓滿如經中說佛告諸苾芻等先當依定能盡有漏是我所說欲求出生死海者離於正定無別方便得三圓滿者顯正依圓滿明師資承稟決定可依有依修定人者此顯修習圓滿諸有智者如前所說遠離放逸正修行時世閒諸定悉皆圓滿及出世閒咸能證悟顯得果圓滿六門教授習定論一卷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