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일성(一性)ㆍ이성(異性)ㆍ비유(非有)라는 치우친 견해를 막기 위하여 대사(大師)께서는 단지 가시설(假施設)의 일[事]1)에 의지하여 법의 요체를 널리 말씀하셨다. 이는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방편을 취향해 들어가 이치에 맞게 생각을 짓고[作意] 그릇된 주장[宗]을 멀리 떠나며 영원히 번뇌를 끊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치우친 견해에는 모두 허물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풀어 밝혀 보고자 한다. 이 가운데 취인가설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총취(總聚)이고, 둘째는 상속(相續)이며, 셋째는 분위차별(分位差別)이다. 총취란 일시에 많은 법이 모여 세간을 수순(隨順)하는 것을 말한다. 일성(一性)이라고 말하며, 마치 몸[身]이나 숲[林] 등과 같다. 상속이란 다른 시간[異時]에도 원인과 결과가 서로 단절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일성에 대해 말하면 갈라라(羯羅羅)2) 등의 위(位)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이름하고, 싹 등의 전이(轉異)하는 과정을 통해 낱알이 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분위차별이란 한 가지 일에 여러 가지 성품[多性]이 있어서 시간적으로 다를 때 다르지 않을 때나 건립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색이 생하는 단계[位]는 변이[異]하므로 항상하는 성품이 없으며, 유견유대(有見有對)3)인 것과 같다. 업이 성품을 갖춘 이유 등과 같다.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밀의(密意)로 보온갈라(補嗢揭羅)4)와 증원적(證圓寂)5)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세 가지 뜻은 단지 가설(假設)일 뿐 일성(一性)이나 이성(異性) 그리고 총무성(總無性)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면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는 또한 총취(總聚)와 유취(有聚)6)를 분별할 수가 있다. 무이성의 입장에서 말하면 일[事]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가지 자성(自性)을 인정한다면 무이성을 부정하는 개별적인 것을 유취(有聚)라 하고, 총취는 개별적이지 않으므로 무이(無異)라 한다? 단지 남김없이 평등하므로 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만약 무이성의 체(體)가 차별이 없다면 유취는 서로 간에 무이를 이룰 것이네. 혹은 총취에 개별적인 일이 다르게 있다면 이것은 다시 곧 많은 종류의 체를 이루게 될 것이네.
【論】 만약 손 등(等)의 자성과 몸[身]이 한 가지라고 이름하고, 다르지 않다[無異]고 인정한다면, 이는 곧 몸에 개별적인 성품이 없기 때문에 손 등은 서로 간에 무차별을 이룬다. 손이 곧 발을 이룬다면 이는 세간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저 개별적인 지분(支分)들이 몸의 자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모여 집합을 이룰 때를 몸이라고 한다면 이는 총취 자체를 완전히 얻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이전의 뜻과는 다르기 때문에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개별적인 일에 총취의 자성이 없다면 자성의 차별은 개별적인 성품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여 집합을 이룰 때 어떻게 그것과 개별적인 자성이 없는 것이 함께 한다는 이치가 성립되겠는가? 총취가 자성을 버리지 않는 경우라면 이것은 다시 많은 종류의 체성을 성립시킨다. 총취가 많은 것들에 대하여 이성(異性)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이든, 총체적인 것이든 이성이 없다면 총(總)과 별(別)이 자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각적[頓]이든, 점차적[漸]이든 모두 다 많은 성품을 이룬다. 저 모든 일들이 이성이 없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두 가지의 헤아림의 과실을 분별해 보았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약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하여 그 밖의 나머지 성품을 부정한다면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非有] 그대의 주장은 허물이 있게 되네. 만약 하나의 성품이 있어 이것이 부정된다면 차별이 없지도 않기 때문이며 두 모습이 흡사하네.
【論】 ‘만약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하여 그 밖의 나머지 성품을 부정한다면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非有] 당신의 주장은 허물이 있게 된다’는 것은 만약 유취(有聚)에 있어서 따로 총취가 없는 것을 무이(無異)라고 한다면, 이는 상호간에 의대(依待)하여 무이성(無異性)을 이룬다. 만약 한 처소[一處]에서 무이의 뜻이 존재한다면 제2의 처소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니, 어찌 그대는 이러한 과실을 면할 수 있겠는가? 총취가 없는 것처럼 유취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무이라는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하나의 성품이 있는데 이것이 부정된다면, 설령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이 집착하는 유분(有分)의 실재적인 일[實事]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직 이것을 부정하여 무이(無異)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낱낱의 일들이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양처(兩處)가 서로 유사하게 된다. 무이라는 말에 따르면 한 처소에서 이미 그러하면 다른 곳도 역시 그러한 것이니, 처음의 무이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땅히 단지 한 처소만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오직 그것만을 부정할 뜻이었다고 말하면 그 유분은 없다고 말할 수만 있으니 무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의 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다르다[異]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야흐로 이치에 맞는 것이다. 또한 다른 뜻이 있으니 차별적인 것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모습[兩相]이 유사하다는 것은 만일 손 등을 떠나서는 다시 별도의 몸이 없는 것과 같다. 그것들이 유분(有分)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손 등도 역시 손가락 등을 의대하여 성립하므로 유분인 손 등도 몸과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음[非有]도 이와 같다. 나아가 극미(極微)는 소리[聲] 등을 의대하고, 소리 등은 다시 살타(薩埵)7) 등을 의대하며, 살타 등은 다시 희(喜) 등을 의대한다. 다른 공능을 의대한다는 것은 유분과 유분이 똑같은 유분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가 집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별하여 무이성을 인정한다면 두 가지의 허물이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성(異性) 또한 그러하여 하나의 치우친 견해로 지분(支分)의 처소에서 개별적으로 작용하며[轉] 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에는 무한 오류의 허물[無窮遍]이 있어 혹은 하나도 아니며 전부 없음[全無]도 아니라네.
【論】 ‘이성도 그러하다’는 것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이에 흘러 이르면[流至]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지분(支分)에서 작용할[轉] 때 개별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또한 보편적으로 두루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먼저 개별적으로 작용하는 뜻을 분별해 보기로 한다. 만약 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로 손 등의 처소에서 유분이 작용할 때라면 그것 또한 마치 손 등에서와 같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이니, 또다시 마땅히 하나의 치우친 견해가 뒤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작용하여 무한 오류의 허물이 있게 된다. ‘혹은 하나가 아니며’라는 것은 다르기[異] 때문에 무한오류의 허물이 있으므로 ‘혹은’이라는 말을 앞에 둔 것이다. 만약 몸의 부분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이어서 다시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어떤 하나의 유분도 없다는 뜻이며, 유분을 이루더라도 오직 하나의 치우친 견해만 존재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오직 손 등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어찌 번거롭게 자기의 지분을 집착하여 유분이 작용하게 하는가? ‘또는 전부 없음[全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가 무궁하여 다시 허물이 있는 데 이르기 때문에 ‘또한’이란 말을 한 것이다. 이 하나의 치우친 견해로 지분에서 작용할 때 이것은 어떠한 유분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전부 없다. 손이나 발등과 같은 유분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의 치우친 견해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유분이 손 등을 떠난다고 말할 때에는 개별적인 지분은 없다. 유분의 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저 개별적인 지분의 처소에서 각각 두루 작용하는 일이 성립된다. 오직 이 두 가지 과실이 있을 뿐, 헤아려 보아도 다시 제3의 분별집착은 없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약 두루하다면 그것은 많은 종류의 성품을 성립시키며 또한 손 등에 대해 상호 차별이 없으며 혹은 이것이고 저것이 아님이 성립하며 온갖 일[事]은 다 동일한 극미의 성품이네.
【論】 만약 두루하다고 말한다면 유분(有分)과 지분의 양(量)이 같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처소에서 두루 보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많은 종류의 체성을 이룬다. 또한 다른 뜻[異義]이 있기 때문에 ‘또한’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한 곳으로부터 두루하여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개별적인 처소의 성품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나머지 지분에 서로 차별이 없다. 그것들이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곳에 처할 때는 일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손이 있는 곳에 발이 있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 세간이 다 같이 인정하는 이치를 위배하는 것이다. ‘혹은 이것이고 저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또한 다름[異]이 있음을 헤아리기 때문에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앞의 과실을 피하기 위하여 유분의 체를 말한 것이니, 발[足]에서 작용할[轉] 때 손 등의 유분이 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 지분들이 똑같은 곳에 처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종기를 눌러 짰는데 오히려 눈알이 나오는 것과 같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일체의 유분은 하나의 실재적인 일[事]을 이룬다. 그러면 모든 일은 하나의 극미를 이루게 된다. 그 유분들이 자기의 지분에서 작용을 일으킬 때에도 결국 오직 하나의 실재적인 극미만이 존재하게 되며, 그 머무는 처소를 얻을 수 있다. 이 하나의 지분은 곧 유분들과 함께 동일한 극미이므로 이 유분들을 집착하여 진리를 성립해도 소용이 없 고, 자신의 주장에 위배된다. 만약 색(色) 등을 떠나서 별도로 극미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허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색 등의 처소에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허물이 없다. 이치도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에 또한 두 가지를 집착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인정하게 되면 개별적인 방분(方分)이 존재하거나 혹은 방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겠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방분8)의 성품[方分性]이 존재하면 이는 극미가 아니니 일성(一性)이나 이성(異性)을 부정하기 때문이며 방분이 없으면 많은 것들이 모이지 못하거나 다시 하나의 극미에 무리의 것들이 있게 되네.
【論】 이와 같이 극미를 집착한다면 이치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극미에는 방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방분으로 말미암아 다시 더 나눌 수 있다. 또한 그것들은 일성(一性)이나 이성(異性)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의 지분처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오직 이 두 가지만 있고 제 3의 계착(計△)은 없으니, 이미 그 허물을 다 배척했기 때문이다. 극미란 존재하지 않으니, 방분이 있기 때문이다. 방분이 없다면 가령 함께 모인다고 해도 화합하여 섞이지 못한다. 가령 똑같은 처소를 허용할지라도 모두가 다 똑같은 하나의 극미가 되어야겠지만, 이 극미들은 화합하여 한 덩어리가 될 수 없다. 하나의 극미와 여러 극미가 서로 장애하기 때문이다. 여러 극미의 체(體)가 하나에서 다 함께 이루어진다. 동일한 처소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이미 총취와 유취의 같거나 다름[一異]이라는 허물을 지적하면서 말한 바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상속이 만약 한결같아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리고 점차로 소년의 단계에 이르면 마땅히 자신의 모습을 잃어 달라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만약 잃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체상(體相)이 서로 섞이게 되네.
【論】 만약 상속을 인정하여 이어지는 일에 있어서 이성(異性)이 없다면 마땅히 자성을 인정하게 되어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이로 말미암아 상속의 자성을 말하거나 혹은 단지 그 밖의 것을 부정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앞의 총취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 가운데 개별적인 것들을 지금 다시 결택(決擇)하기로 한다. 만약 개별적인 단계에서 받아들일[領受] 때에는 앞 단계를 버려야 한다. 앞 단계를 받아들이고 뒤의 단계를 버리지 않으면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존재하는가? 만약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리고 소년의 단계에 이르면 마땅히 자신의 모습을 잃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받아들인 후에 버리지 않는 것을 인정하여 어린아이의 단계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전이(轉移)하여 바뀔 때에는 자체(自體)가 마땅히 사라질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성(異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종파에서는 ‘무릇 모든 실재적인 일[事]에서 개별적인 법의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는데, 개별적인 법이 생겨서 전변(轉變)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그렇지만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전이하는 단계[位]가 개별적이어서 마치 편안함과 위험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이것이 곧 저것이 된다. 이와 같이 버린다[轉捨]는 허물을 논의해 보았다. 만약 잃지 않는다면 법상이 서로 섞여서 어린아이의 단계를 버리고 소년의 단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단계와 소년 등의 단계의 체상이 서로 섞여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미 불이성(不異性)의 허물에 관해서는 말하였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약 체(體)가 이성(異性)이라면 몸이 편안하지 못할 경우에 편안함을 구하려는 노력은 허망한 시설(施設)이며 작용함[轉]도 생멸(生滅)과 상응하지 않으며 만약 체가 개별적인 것이라면 실재적인 일[事]을 이루네.
【論】 상속이란 이어짐을 뜻한다. 그런데 만약 체가 다르다면 먼저 병이 났을 때 나중에 병이 차도가 있도록 시도하는 모든 노력은 다 허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흘러 이어진다[流轉]는 이치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나 말 등과 같은 개별적인 체가 있는 사물이 상속하는 경우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事]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 비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떠나면 세간사의 인과지처(因果之處)에서는 이러한 일을 볼 수가 있으니 다른 곳에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예컨대 식초가 술의 맛을 좋아지게 하려 하거나 마음이 산란한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적정(寂定)함에 이르려는 시도나 노력도 다 무익한 일이 된다. 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성품이 다르다면[異性] 생하고 멸하는[生滅] 이치 또한 상응하지 않는다. 온갖 생멸하는 것들이 상속을 일으킨다는 것은 현재의 지분처(支分處)에서만 작용하는데, 과거ㆍ현재ㆍ미래는 어찌하여 작용한다고 하는가? 하나의 지분이 전체에 두루한 경우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미 논파하였다. 또한 성품이 다르다면 상속의 체가 다르기 때문에 생멸과 상응하지 않게 되는데, 여기에는 또한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약 개별적이라 말한다면 유위상(有爲相)이 달라 상속이 실재적인 일[事]을 이룬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이후에 상속의 일이(一異)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미 그 허물을 밝혔다. 또한 분위차별(分位差別)이 있는데, 과성(果性) 등에서 그 일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과성(果性) 등의 분위처(分位處)에서 그러한 일들을 취하게 되면 언설을 시설한 것이며 만약 그것들과 다르다면 일에는 체가 없으니 불이성(不異性)의 두 가지 허물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네.
【論】 ‘과성(果性) 등의 분위처에서 그 일들을 취하게 되면 언설을 시설한 것이며, 그와 다르면 일에 체가 없다’는 것은 색(色) 등에서 인과(因果)와 일이성(一異性)과 자타성(自他性)과 유견유대성(有見有對性) 등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일들이 이와 다르다면 이는 곧 인과가 아닌 것 등을 이루며 또한 자체가 없게 된다. 하나의 일도 없기 때문에 덕(德, guna)과 자체의 처소를 기다리지 않고도 언설을 이룰 수 있다. 이 불이성(不異性)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으니, 앞에서 총취(總聚)에 관해 말할 때 이미 그 허물을 밝힌 바 있다. 처소를 따르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 만약 유법(有法)에 대해 무이성(無異性)이라 말한다면 사성(捨性)이나 불사성(不捨性)은 앞에서 분별하여 밝힌 바와 같다. 혹은 이는 몸에서 상속하여 작용할 때 차별성이 있다. 비유하면 소의 맛과 같고, 열병을 앓는 이도 능히 그치게 할 수 있고, 또한 능히 이에 대해 발동(發動)케 하는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세 가지 가설(假設)의 일에 관해서는 이미 말하였다. 이성(異性)과 불이성(不異性)이 갖고 있는 허물을 총체적으로 뽑아 없애는[撥無] 것에 관해서는 바로 다음에 분별하여 해설하기로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약 몸이 실유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도된 언설도 없고 법도 마땅히 무익할 것이네. 또한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도 없고 또한 차별적인 작용의 일도 없네.
【論】 신처(身處)에 대해 전도(顚倒)되면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고 말하고, 전도되지 않으면 4념주법(念主法)9)이라 말한다. 만약 몸[身]이 없다면 마땅히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만약 상속(相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능치(能治)10)와 소치(所治)11)는 곧 차별을 이룬다. 예컨대 그 밖의 다른 몸에 대해 집착하여 항상하다고 하는 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하여 그 밖의 다른 몸이 무상(無常)하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소용없는 일이다. 또한 만약 분위의 차별이 없다면 무상(無常) 등의 법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소용없는 일이다. 또한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이 보시를 하는 일도 없고 보시를 받는 일도 없다는 등과 모든 총취가 갖고 있는 복에 관한 일을 말하여도 마땅히 그릇된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옷과 음식 등 모든 보시물은 모두가 다 총취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은 불지 않으며 시내는 흐르지 않는다”고 하여 상속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삿된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불교(佛敎)는 아니다. 그 바람 등에 실유하는 업용(業用)을 인정한다. 비록 바람이 부는 등의 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방향을 향하여 상속이 생기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속함이 없다면 이와 같은 온갖 사견의 일도 없다. 만약 분위차별이 없다면 하나의 색처(色處)에서 고(苦)ㆍ집(集) 두 가지 양상이 뽑혀 없어질 때 사견의 차별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색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업을 짓는 일에도 차별이 없다. 또 만약 총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비하라(毘訶羅)12)나 솔도파(窣堵波)13) 등의 복덕의 차이는 마땅히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또 상속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복덕에 차이가 있다. 예컨대 세존께서 용건장자(勇健長者)에게 “만약 비구가 음식을 받아먹었으면 무량의정(無量意定)에 들어가 정념(正念)에 머물라”고 말씀하신 이와 같은 등의 복덕의 차별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분위차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차별 때문에 업용(業用)의 차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사물이 비록 특별하게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세력에 차이가 있으면 그 작용에는 또한 차별이 있다. 이는 모두가 함께 인정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독약은 다른 사물과 어울릴 때 목숨을 해칠 수 있지만,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은 그러한 일[事]을 뽑아 없애면 모두 과실이 있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이 갖가지 과실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실물로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이는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실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일성(一性)과 이성(異性)을 부정하기 때문에 전전(展轉)하여 쌓여서 원인[因]을 이루지 않으며 자체 또한 언설로 표현할 수 있으나 대상과 흡사할 것[似境]을 오로지 식(識)으로부터 비롯되네.
【論】 색(色) 등은 실유하기 때문이고 일성과 이성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야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총취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으면 몸은 그 밖의 다른 몸을 마주 대하여야 한다. 어떻게 명칭이 다른가? 이는 서로 상호 간에 원인이 되지 못한다. 무릇 모든 사물은 만약 그것을 버리고 마음으로 이것을 취하면 이를 취인가설(取因假設)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원인을 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 등에서는 서로가 의대한다. 만약 그것을 버릴 때 뜻[意]이 이것을 취하지 않으면 이것을 바야흐로 취인가설이라 한다. 만약 색 등을 버리면 그 총취는 없다. 그러므로 단지 자기 일[自事]의 일성(一性)과 이성(異性)의 성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일체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분위차별은 이성 등에서 상호 명칭이 다르니, 그것을 가(假)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색 등의 처소에서 도 또한 취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실유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지만 그 이치는 마땅히 그렇지 않다. 그것의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한 체(體)와 상(相)의 차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나머지 일에 대해서 버리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대상과 흡사한 것도 역시 식(識)으로부터 일어난다. 그것에서 모든 경계상을 소유한다. 만약 식을 떠나면 그것이 가진 자성(自性)을 알 수 없으니, 이 또한 가설(假設)이다. 따라서 허물이 없다. 게송으로 말한다.
아귀와 방생(傍生)14), 인간과 천상은 각기 그 응하는 바에 따르며 똑같은 처소에서도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경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유(實有)는 아니네.
또 총취 등은 실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유위(有爲)의 성품도 무위의 성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은 다 유위나 무위의 성품에 속하지만, 이는 유위의 모습이 아니다. 게송으로 말한다.
상(相)은 불상응하여 유위가 아니며 만약 있다고 설하는 것, 이것이 밀의(密意)이니 삭취취(數取趣)에 대해서도 보인다고 말하네. 만약 이것이 무위라면 마땅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네.
【論】 만약 유위라면 마땅히 식(識) 등과 같아 태어남[生]이나 머묾[住] 등의 유위상(有爲相)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와 같지 않다. 총취 등에서 두 개의 극미가 취합할 때, 그 상(相)은 가없으므로 무한오류[無窮過]가 있게 되니, 이는 가시설(假施設)의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있으면 하나의 일이 곧 있게 된다. 모습이 가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가시설의 일이 있어 취합하여 모이는 일 등이 있을 때에 곧 생명이 있음을 헤아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총취 등은 유위상(有爲相)이라고 말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쌓여 모인 것은 다 흩어 없어지고 숭고한 것은 반드시 타락하며 만나면 결국 헤어지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음으로 돌아가네.
이는 삼모하(三謨揀) 등을 일컬으며 멸상(滅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비하라(毘訶羅) 등은 생상(生相)에 관해 설한 것이다. 비록 이런 말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밀의(密意)이지 승의(勝義)에는 이러한 상(相)이 없다. 이 생상 등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으로 가처(假處)에서 존재하며 그와 같이 일[事]을 법이라 설한다. 이를 수순함으로써 탐욕의 일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승의는 아니더라도 청정함을 수순하기 때문이고, 모든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여인을 보면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여겨 마땅히 어머니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말은 모두가 가시설(假施設)이다. 어찌 생상 등이 밀의(密意)로 설한 것이지 승의(勝義)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보온갈라(補嗢揭羅)에서 생상 등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세간에 출현하면 많은 이익이 있다고 말하고, 또 일체의 유정은 모두 식(食)을 의지하여 머문다고 말하며, 또한 나는 지금 늙어 쇠약하니 다른 사람들이 공양하고 받들어 모셔야 하며, 모든 유정은 다 죽음 등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태어나는 등의 일이 없다. 이와 같이 분별해 보면 총취 등에서는 유위의 성품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무위성(無爲性)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무위라면 마땅히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무위법은 멸하여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총취 등은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 등과 같다. 총취 등은 실재적인 일[實事]을 이룰 수 없다. 유위든 무위든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찌 또한 세간 사람들이 현재의 일[事]의 처소에서 일성(一性)과 이성(異性) 등이 있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이와 같이 말하여도 현재의 세상 사람들은 옷 등의 처소나 실[絲縷] 등에 대해서 일성과 이성 등을 헤아려 생각하지 않고서도 모두 다 사고파는 등의 일을 한다. 세존께서는 세간을 이익되게 하시기 위하여 방편을 베풀어 설하셨으나, 그 일성과 이성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존께서는 번뇌를 끊게 하기 위하여 저 세간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에 맞추셨으나 일성(一性)이나 이성(異性)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방편으로 법을 설하여 중생을 교화하셨네.
【論】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세간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 어려운 생각을 떠나게 하시려고 모든 중생의 의요(意樂)와 차별적인 성품에 따라 수면위(隨眠位)에 매여 있는 그들의 온갖 번뇌를 끊어주기 위하여 법의 요체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그대들은 세상 사람들이 짓는 것과 똑같은 무익한 생각[思慮]을 짓지 말라. 나는 온갖 유루(有漏)를 다하였음을 능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알거나 보지 못함이 없으며, 나아가 이치에 맞게 생각을 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니,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은 번뇌를 끊는 정인(正因)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은 온갖 괴로움을 생하므로 마땅히 그릇된 생각은 추방해 버리고 바른 생각[正念]을 따라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뜻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나 방편으로 바꾸기는 지극히 어렵네. 색이나 명(命)은 잠시라도 멈추지 않으니 지혜 있는 이라면 마땅히 속히 닦아 익혀야 하네.
1)범어로는 artha이며 인연생의 일체유위법을 가리킨다. 즉 우주간의 천차만별한 현상을 말한다.
2)범어로는 kalala이며 부모의 양정(陽精)이 처음으로 화합하여 응결된 것을 말한다. 태내(胎內) 5위(位)의 하나로 포태(胞胎)된 이후 최초의 7일간의 상태이다.
3)색(色)은 유견유대(有見有對)ㆍ무견유대(無見有對)ㆍ무견무대(無見無對)의 세 가지로 나뉜다. 유견유대란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장애함도 있다는 뜻이다. 차별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유견(有見)이라 하고, 장애함이 있기 때문에 유대(有對)라 한다.
4)범어로는 pudgala이며, 보특가라(補特伽羅)ㆍ부특가라(富特伽羅)ㆍ불가라(弗伽羅)ㆍ복가라(福伽羅)라고 음사한다. 의역하여 인(人)ㆍ중생(衆生)ㆍ삭취취(數取趣)ㆍ중수자(衆數者)라고 한다. 이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주체를 뜻한다.
5)원적(圓寂)은 범어로 Parinirvāṇa이며 음역으로는 반열반(般涅槃)이고 의역하여멸도(滅度)ㆍ입멸(入滅)이라 한다. 그 의미는 온갖 덕이 원만하고 온갖 악을 적멸(寂滅)한 상태를 뜻한다.
6)총취를 이루는 개별적인 구성 요소를 뜻한다.
7)범어로는 sattva이며 보통 유정(有情)이라 번역하지만 본래는 존재ㆍ생ㆍ실(實)ㆍ진(眞)ㆍ선(善)ㆍ미(美)ㆍ현(賢)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8)극미에는 상(上)ㆍ하(下)ㆍ전(前)ㆍ후(後)ㆍ좌(左)ㆍ우(右)의 방위가 있어 공간을 점유하는 체적(體積)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방분이라 한다.
9)37조도품의 하나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잡념과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진리를 얻는 네 가지 방법이다. 즉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몸[身]은 부정(不淨)하다고 관(觀)하고, 감수함[受]은 고(苦)라고 관하며, 마음[心]은 무상(無常)하다고 관하고, 법(法)은 무아(無我)라고 관하여 차례대로 정(淨)ㆍ낙(樂)ㆍ상(常)ㆍ아(我)의 네 가지 전도된 것을 대치하는 관법을 말한다.
10)대치(對治)하는 주체를 말한다.
11)대치되는 대상을 말한다.
12)범어로는 vihāra이며 승방(僧房, 僧坊)이라 한다. 승중(僧衆)이 일상적으로 머물며 지내는 방사(房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