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곧 법의 몸이신 여래이고 또는 성제(聖帝)의 진실한 열반이니 마치 물이 차가움과 더불어 떠나지 않듯이 불과(佛果)와 열반도 역시 그러하시네.
결과와 원인과 제 성품과 다른 이름과 또는 차별과 다른 모양과 더럽히지 않는 성품을 역시 항상 화합하는 것이라 하네.
있고 없는 뜻과 하나의 성품 등 대략 열두 가지가 있음을 설함이니 보리심(菩提心)의 이름에 대한 그 차례를 알아 두어야 하네.
≪해석≫ 이것이 논의 체(體)이다. 그 가운데 보리심의 과(果)를 먼저 보이고 다음에 공능(功能)이 저 원인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밝힘이다. 원인이 이미 일어나고 나면 곧 제 성품이 상모(相貌)의 다른 이름과 차별을 시설하여 몸 받는 곳을 따라 더럽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화합하는 것이라 한다. 별다른 선한 법의 상응하는 것이 없이 번뇌 속에 머무는 것을 없는 뜻이라 한다. 속박에 벗어나서 청정한 것을 있는 뜻이라 하고, 또는 하나의 성품이라 함이니, 모두가 열반이기 때문이다. 열두 가지 뜻을 차례로 알아 들지라.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보리심의 과인가 하면,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적멸한 열반이 그것이고 또는 그 밖의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미세한 습기(習氣)까지도 죄다 이미 끊었기 때문이며, 나는 것이 없다는 말은 뜻으로 이룩되는 모든 쌓임[蘊]이 본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늙음이 없다는 말은, 적멸한 공능(功能)이 수승함을 더하여 끝까지에 이르기 때문이고, 병이 없다는 말은, 일체 번뇌의 습기장(習氣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다 아주 끊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는 말은 부사의한 변역(變易)이 끝내 다하지 않기 때문이고, 쌓임이 없다는 말은 처음이 없는 무명(無明)의 머무는 자리를 죄다 끊었기 때문이다. 과환이 없다는 말은 일체 몸과 입과 뜻의 업이 다 과실이 없기 때문이고, 또는 일체의 공능을 초월했기 때문이라, 저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보리심을 따르게 되는가 하면, 가장 수승한 방편과 물러서지 않는 원인으로 능히 열반의 과를 열반이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법계의 성품이 법의 몸에 전의(轉依)하는 그것이 열반의 경계다. 이 때문에 나 이제 저 부사의한 보리의 마음에 엎드려 예경하는 바이니, 원인과 결과의 증장(增長)함이 점점 밝고도 왕성하여 초승달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 보리심의 종자란 것은, 일체 세간의 선한 법 곡식이 생겨나 그 의지(依持)하는 처소가 큰 땅과 같기 때문이다. 일체 성자(聖者)들의 법 보배의 나오는 처소가 큰 바다와 같기 때문이며, 일체 부처님들의 도 나무[道樹]의 따라 나는 그 차례의 원인이 종자와 같기 때문이니, 이것이 보리심의 결과인 것이다. 다시 무엇으로써 저 원인의 상응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마치 전륜왕(轉輪王)의 아들과 같음이다. 이른바 청정한 마음이란 것은, 곧 보리심의 종자이며, 수승한 지혜란 것은, 곧 수승한 반야(般若)가 능히 일체를 요달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어머니라 한다. 삼마지(三摩地)란 것은 선정으로써 태(胎)를 삼음이니, 일체 선한 법이 그 속에 편히 머물러 안락한 것으로써 체(體)를 삼음이다. 대비(大悲)란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생사 속에서도 지치거나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는 일체 갖가지의 지혜를 원만히 하여 보리심을 길러내어서 유모(乳母)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저 화합으로 인한 보리의 마음이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 들지니,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번뇌의 더러운 모양이 그것이고, 둘째는 청정한 법의 제 성품의 모양이 그 속에 더러워지는 것이다. 저 제 성품은 청정하여 항상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지만, 객진(客塵) 번뇌가 덮고 막아서 그 더러움에 물들게 되나니, 마치 불[火]의 제 성품이야 청정하지만, 재[灰]ㆍ진흙ㆍ구름ㆍ먼지 따위의 막히고 가리는 것과 같다. 또는 불과 보배구슬과 허공과 물의 제 성품이 더럽지 않음으로써 만약 재 따위를 떠난다면 불 내지 물의 제 성품이 다 청정하게 되는 것과 같음이다. 일체 중생들도 그러하여 제 성품의 마음이 다 똑같이 청정함으로써 탐욕 따위 번뇌에의 더럽힘이 되기는 하지만, 만약 탐욕 따위를 떠난다면 그 마음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도 어떻게 청정한 법의 모양이 역시 다 청정한 것인줄을 아는가 하면, 제 성품의 청정함이 곧 일체 청정한 법의 의지하는 곳이고, 일체 청정한 법도 그것을 따라 나는지라, 마치 수미산[蘇迷盧山]에서 출생하는 보배와 같기 때문이다. 보리의 마음도 그러하여 일체 기예(技藝)를 다 원만히 할 수 있고, 네 가지 큰 바라밀다(波羅蜜多)를 얻게 되느니라. 이 때문에 보리의 마음을 여래의 법 몸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경 가운데 설한바, “세존이시여, 여래의 법신이 바로 상(常)바라밀이고, 낙(樂)바라밀이고, 아(我)바라밀이고, 정(淨)바라밀이옵니다”라고 설한 것과 같음이다. 또 저 여래의 법신도 번뇌 때문에 번뇌를 따라 더럽히게 되는지라,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란, 이 다른 이름으로 설하는 것이니, 경 가운데 설한 바, “사리불(舍利弗)이여, 이 선한 법은 여실히 진여의 법계 제 성품과 청정한 마음의 상응한 법체(法體)인지라, 나 이 제 성품과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여 중생들을 위해, 이 때문에 부사의한 것을 설하노라고 하신 말씀과 같음이다. 다시 저 마음이 모든 중생들에게 열 가지 사업의 차별 없는 모양이 되나니, 이른바 조작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도 없고 나지도 않기 때문이고, 끝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거리낌이 없는 제 성품의 광경이기 때문이고, ≺공≻한 지혜로써 일체 법의 그 한 가지 맛과 모양이 성품 없는 것과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성품 없는 그것이 곧 모양 없는 것이어서 모든 감관의 경계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곧 성자(聖者)들의 행하는 바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일체 법의 의지하는 바 그 더럽고 깨끗한 모든 법의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고, 상견[常]으로 보는 더러운 법을 아주 떠나서 상견이 없기 때문이다. 단견[斷]으로 보는 청정한 법을 아주 떠나서 단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모양이 있으니, 이른 바 부정한 것이란, 곧 처음에 설명한 중생계(衆生界)가 그것이고,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는 것이란, 곧 다음에 설명한 보살이 그것이고, 지극히 청정한 것이란, 곧 최후에 설명한 여래가 그것이다. 경(經)에 설한 바, “사리불(舍利弗)이여, 곧 이 법계에 항하사보다 더 많은 그지없는 번뇌의 껍질에 둘러싸여서 처음이 없는 세간으로부터 항상 생사의 물결에 떠돌아다녀 오고 가고 나고 사라지면서 항상 그 중류(中流)에 처해 있는 것을 이르되 중생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곧 이 법계에 그지없이 생사를 싫어 여의면서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일체 욕심 세계[欲界] 가운데 머물러서 열 가지 바라밀(波羅蜜)을 행하고 8만4천의 법문을 섭수하여 보리의 행을 행하는 그 때를 이르되 보살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곧 이 법계에 일체 번뇌를 해탈하고 일체 고뇌를 제도하고 일체 번뇌의 속박을 아주 떠나서 청정함을 증득해 가장 지극히 청정한 법성(法性) 가운데 머물러서 일체 중생들이 다 우러러 보게 되고, 일체 지혜에 머물러 큰 세력을 얻어서 장애도 없고 집착도 없어 일체 법 가운데에 자재한 힘을 얻으신 이를 여래ㆍ응공(應供)ㆍ등정각(等正覺)이라 하느니라. 이 때문에 사리불이여, 차별이 없는 중생계이고, 차별이 없는 법의 몸이라, 중생계가 곧 법의 몸이고, 법의 몸이 곧 중생계이니, 이는 두 가지 뜻의 문자(文字)차별이 없느니라”고 한 말씀과 같음이다. 이것이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부정한 때에 있어서 번뇌에 더럽히는 것은 마치 구름 덩어리가 밝은 햇빛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음이다.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도 본래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객진(客塵)번뇌를 이미 제거하고 나면, 햇빛의 밝은 광명이 온 허공에 두루 가득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거늘 어떻게 또 이 성품을 항상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마치 겁화(劫火)가 허공을 사르지만, 허공의 경계는 함이 없어서 본래 태우는 모양이 없는 것과 같음이다. 법계의 함이 없음도 그러한 것이어서 늙고 병들고 죽는 불이 태우거나 무너뜨릴 수 없나니, 이 때문에 경(經)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세간에서 이른바 생사가 있다는 것은 여래장(如來藏)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죽음이란, 낡은 모든 감관이 무너지는 것이고, 나는 것이란, 새로운 모든 감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함이 있는 경계의 모양을 여의고 항상 머물러 고요합니다. 이 여래장의 성품이 이미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고 발기(發起)할 수 없는데 어떻게 부처님 법과 더불어 상응할 수 있는가 하면, 마치 등(燈)의 그 밝음과 따뜻함과 빛이 다시 차별의 모양이 없는 것처럼 법과 법의 몸도 그러한 것이겠나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사리불이여, 마치 등(燈)이 두 가지 법이 없고 공능(功能)이 다르지 않음은 그 등의 광명과 따뜻함과 빛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보배 구슬의 광명과 형색이 서로 떠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여래가 설한 바 법의 몸도 법과 더불어 서로 떠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와 공능의 하는 일이 항하사보다 더 많은 것이 바로 여래의 법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음이다. 또 경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공하고 공하지 않는 지혜가 있으니, 그 두 가지가 어떤 것이냐 하면, 세존이시여, 이른바 공한 여래장이란 번뇌의 껍질과 더불어 화합하여 차별이 없으므로 해탈할 줄을 모르는 것이고, 공하지 않는 여래장이란, 항하사 겁을 지나도록 이탈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부사의한 불법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이르되 여래의 법 몸이라 합니다”라고 설한 것과 같음이다. 왜냐하면 법 몸은 만덕(萬德)이 원만하고 공덕이 구족하거늘, 중생들이 무엇으로 인해 해탈하지 못하겠는가. 마치 연꽃이 삿된 소견의 그물 잎에 덮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진금(眞金)이 의혹의 더러움 속에 떨어진 것과 같기 때문이며, 가득한 달이 아만(我慢)의 라후(羅睺)에 먹힌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맑은 못 물이 탐욕의 진구(塵垢)에 흐려진 것과 같기 때문이며, 저 금산(金山)이 진심(瞋心)의 진흙에 더럽힌 것과 같기 때문이다. 크나 큰 허공이 우치(愚癡)의 구름 덩어리에 가린 것과 같기 때문이며, 햇빛이 미처 솟아나지 않을 때 무명(無明)의 머【문】자리에 막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대경[六處]의 큰 쌓임[蘊]이 태장(胎藏)속에 머무는 것도 기세간(器世間)의 모양이 이룩되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두 가지 인연의 화합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연꽃과 진금과 가득한 달과 못 물과 금산과 크나 큰 허공과 햇빛과 큰 땅과 구름과 같이 불성도 객진 번뇌에 더럽히네.
번뇌가 공능(功能)을 덮으면 불사를 일으킬 수 없는지라 대략 아홉 가지 비유를 설하니 더러움과 깨끗함이 상반됨을 알아야 하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변신이 또한 그러하나니, 일체 객진 번뇌의 장애를 다 여의었기 때문에, 또는 제 성품의 공능을 구족했기 때문에 응공(應供)을 성취하게 되어 일체 중생들이 공동으로 수용(受用)하며 항상 적정(寂靜)하고 청량(淸凉)하고 부사의한 열반의 경계에 머물 것을 증득함이다. 이른바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란, 그러한 것이고, 여래의 법신 이외에 따로 열반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미 설한 바와 같이 중생의 경계일지라도 청정함을 얻을 적엔 곧 그것이 법의 몸이고, 법의 몸이 곧 열반의 경계이고, 열반의 경계가 곧 여래인 줄을 알아야 하리라. 경 가운데 설한 바, “세존이시여, 더 없는 등정각이란 곧 열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열반의 경계가 바로 여래와 법신이 다르지 않음이니, 이는 곧 괴로움이 멸한 것이겠나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음이라, 이 대문에 경에 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파괴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멸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괴로움의 멸한 것이란, 처음도 없고 지음도 없고 나는 것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다하는 것도 없어서 다함을 여의었으니, 항상 머무르고 변동하지 않고 적정(寂靜)하고 제 성품이 청정하여 일체번뇌의 껍질을 깨뜨리고 항하사 겁을 지나도록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부사의한 불법을 구족했으므로 이를 여래의 법신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여래장은 번뇌의 껍질을 벗지 못한 것을 여래장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곧 모든 부처님의 의한 지혜이오니,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일체 성문(聲聞)ㆍ연각(緣覺)으로선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과거에 일찍 얻지 못했는데, 오직 여래께서 증득하고 또 일체 번뇌의 껍질을 깨뜨려 일체 괴로움의 멸하는 도를 수습(修習)하셨는지라, 이 때문에 물과 차가움의 다름이 없는 것처럼, 깨닫는 성품과 열반은 둘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일승(一乘)의 불성과 혹은 그 밖의 열반 아닌 것을 말하기도 하고, 또는 동일한 법계에 있어서 혹은 작은 열반, 혹은 중간 열반, 혹은 큰 열반을 말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니, 하(下)이건, 중(中)이건, 상(上)이건, 원인 가운데 결과를 얻는 것은 응당 동일한 것이겠나이다. 원인이 이미 차별이라면, 결과도 또한 차별이겠지만,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하이건, 중이건, 상이건 할 것 없이 다 열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평등한 법이라든가, 평등한 지혜라든가, 평등한 해탈이라든가, 해탈 지견(知見)이란 것이 다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열반의 경계가 동일한 맛이고, 평등한 맛이란 것은 곧 이른 바 해탈의 맛을 밝히는 것이겠나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