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합니다. 존자 아난이여, 눈[眼]이 있고 빛깔[色]이 있으며, 귀[耳]가 있고 소리[聲]가 있으며, 코[鼻]가 있고 냄새[香]가 있으며, 혀[舌]가 있고 맛[味]이 있으며, 몸[身]이 있고 감촉[觸]이 있으며, 뜻[意]이 있고 법(法)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비구는 이런 법들이 있어도 지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존자 아난이여, 그 비구는 생각[想]이 있으면서 지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지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존자 아난이여, 어떤 것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지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까?”
018_0911_c_14L復問尊者阿難:“何等爲有想於有而不覺知?”
존자 아난이 가마 비구에게 말했다.
018_0911_c_15L尊者阿難語迦摩比丘言:
018_0912_a_01L“만일 비구가 욕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멀리 여읨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선(初禪)에 완전하게 머물면, 이런 비구는 생각이 있지만 법이 있어도 지각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제2선ㆍ제3선ㆍ제4선ㆍ공입처(空入處)ㆍ식입처(識入處)ㆍ무소유입처(無所有入處)에 완전하게 머물면, 이런 비구는 생각이 있지만 법이 있어도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법이 있어도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비구가 모든 생각들을 기억하여 담아두지 않으면, 무상심삼매(無想心三昧)를 몸으로 증득하여 완전하게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비구가 존재하는 법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라 합니다.”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내 앞에서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다면[記說]1), 나는 마땅히 ‘훌륭하다’고 위로하고 인사하거나, 또는 네 가지 도를 요구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좌선하여 잘 머무는 마음[善住心]ㆍ집중하여 머무는 마음[局住心],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을 써서 마음을 항복 받고 지관(止觀)을 닦으며,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여 분별하고, 법을 헤아려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모든 번뇌[使]를 끊을 수 있다.’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내 앞에서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곧 이와 같이 ‘훌륭하다’고 위로하거나 또는 이것을 요구하리니, 이것을 첫 번째로 도를 설명하는 것이라 합니다. ‘비구나 비구니가 바르게 앉아 사유하여 법을 선택하고, 잘 머무는 마음ㆍ집중하여 머무는 마음,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을 헤아려 마음을 항복 받고 지관(止觀)을 닦으며,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여 이와 같이 바르게 향하고 많이 머물면 모든 번뇌를 여의게 된다.’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내 앞에서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훌륭하다’고 위로하거나 또는 이것을 요구하리니, 이것을 두 번째로 도를 설명하는 것이라 합니다.
018_0912_b_01L‘비구나 비구니가들뜨고 어지러운 마음에 붙들리면 마음을 항복 받아 앉고, 잘 머무는 마음ㆍ집중하여 머무는 마음,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에 바르게 앉아 마음을 항복 받고 지관을 닦으며,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여 이와 같이 바르게 향하고 많이 머무르면 곧 모든 번뇌를 끊게 된다.’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내 앞에서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곧 이와 같이 ‘훌륭하다’고 위로하거나, 또는 이것을 요구하리니, 이것을 세 번째로 도를 설명하는 것이라 합니다.
‘비구나 비구니가 지(止)와 관(觀)을 화합해 함께 행하고 이와 같이 바르게 향하고 많이 머무르면 곧 모든 번뇌를 끊게 된다.’ 만일 비구나 비구니가 내 앞에서 스스로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곧 이와 같이 ‘훌륭하다’고 위로하고 가르치거나 또는 이것을 요구하리니, 이것을 네 번째로 도를 설명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때 여러 비구들은 존자 아난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욕정(欲定)으로 끊기를 수행해 성취하는 여의족[欲定斷行成就如意足]과 정진정(精進定)ㆍ심정(心定)ㆍ사유정(思惟定)으로 끊기를 수행해 성취하는 여의족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제자는 욕정으로 끊기를 수행해 성취하는 여의족을 닦아, 욕심 여읨에 의해, 욕심 없음에 의해, 생사를 벗어남[出要]에 의해, 멸함에 의해, 평정함[捨]으로 향하면, 나아가서는 탐애를 끊게 되고, 탐애가 이미 끊어지면 그 의욕도 또한 쉬게 됩니다. 정진정ㆍ심정ㆍ사유정으로 끊기를 수행해 성취하기를 닦아, 욕심을 여읨에 의해, 욕심 없음에 의해, 생사를 벗어남에 의해, 멸함에 의해, 평정함으로 향하면, 나아가서는 탐애가 다하게 되고, 탐애가 이미 다하면 사유도 곧 쉬게 됩니다. 바라문이여, 당신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것이 끝이 아닙니까?”
“존자 아난이여, 만일 어떤 이가 법을 설하여, 능히 탐욕을 항복 받고 성냄을 항복 받고 어리석음을 항복 받는다면, 그는 세상에서 법을 설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018_0913_a_06L“尊者阿難,若有說法,能調伏貪欲、瞋恚、愚癡,是則名爲世閒說法。”
“당신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만일 세상에서 탐욕을 항복 받고 성냄을 항복 받고 어리석음을 항복 받는 데로 향한다면, 그것을 세상에서 잘 향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만일 세상에서 이미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항복 받았다면, 그것을 잘 도달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사리국(毘舍離國) 미후지(獼猴池) 가에 있는 중각강당(重閣講堂)에 계셨는데, 존자 아난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니건(尼揵)5)의 제자 무외 리차(無畏離車)6)와 아기비(阿耆毘)의 제자 총명동자(聰明童子) 리차가 존자 아난의 처소로 함께 찾아와, 서로 인사하고 위로한 뒤에 한쪽에 앉았다. 그때 무외 리차가 존자 아난에게 말했다.
018_0913_b_01L“우리 스승 니건자(尼揵子)는 불타는 법[熾然法]을 끄고 청정하고 뛰어나시어, 제자들을 위해 이러한 도를 설하셨으니,‘숙명(宿命:前生)의 업은 고행(苦行)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다 없애고, 몸의 업[身業]을 짓지 않음으로써 연결다리를 끊어 미래 세상에서는 모든 번뇌가 다시는 없고 모든 업이 아주 다하며, 업이 아주 다했기 때문에 온갖 고통이 아주 다하고 온갖 고통이 아주 다했기 때문에 고통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존자 아난이여, 이 뜻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거룩한 제자는 깨끗한 계에 머물러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7)를 받고 위의(威儀)를 구족하며, 모든 죄를 믿어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렇게 받아 지니고서 깨끗한 계를 구족하면 전생의 업[宿業]이 점점 없어져 현세에서 불타는 법[熾法]을 여읠 수 있으며,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바른 법을 얻게 되어, 통달하고 밝게 보고 관찰하여 지혜로써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리차 장자여, 이것이 이른바 여래ㆍ응공ㆍ등정각께서 알고 보신 것으로 불타는 법을 여의고 청정하고 뛰어나게 하며, 일승의 도로써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고통과 번민을 없애며, 근심과 슬픔을 벗어나 진여법(眞如法)을 얻게 하기 위해 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삼매정수(三昧正受)가 있어,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사실 그대로 알고, 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ㆍ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跡聖諦]를 사실 그대로 압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마음을 구족하여 업을 다시 짓지 않으면, 전생의 업이 점점 끊어져 현세에서 바른 법을 얻어 모든 불타는 법을 여읠 수 있으며,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통달하고 밝게 보아 스스로 깨닫는 지혜가 생깁니다.
“나는 그 이치에 대해 생각하느라고 잠자코 있었을 뿐이오. 세존이신 사문 구담의 설법을 듣고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소? 만일 누군가 구담의 설법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의롭지 못하고 이익이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오.”
018_0914_a_01L존자 아난은 이른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그 비구니의 처소로 갔다. 그 비구니는 멀리서 존자 아난이 오는 것을 보고 벌거벗은 채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존자 아난은 멀리서 그 비구니의 몸을 보고 곧 모든 감각기관[根]을 추스리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비구니는 존자 아난이 모든 감각기관을 추스리고 몸을 돌려 등진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러워[慚愧], 일어나 옷을 입고 자리를 펴고, 존자 아난을 나가 맞아들여 앉기를 청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서 있었다. 그때 존자 아난이 그를 위해 설법하였다.
누이여, ‘더러운 음식을 의지해 더러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음식에 대해 분수를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먹되, 좋아하여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요,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른 병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梵行)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없애고 모든 새 감정을 생기지 않게 해, 숭상하고 익혀 증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접촉하거나 하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비유하면 마치 상인이 소유(酥油:타락 기름)를 그 수레에 칠할 때,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싣고 운반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또 마치 옴병[瘡病]을 앓는 사람이 소유를 바를 때, 집착하여 좋아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갈고 닦아내겠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옴병을 고치기 위해서인 것과 같소. 이와 같이 거룩한 제자는 분수를 헤아려 먹되,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이 없고 교만한 생각이 없으며,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고 예쁘게 꾸미겠다는 생각 없이,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요, 굶주리고 목마름을 고치기 위해서요, 범행을 거두어 닦기 위해서이니, 과거의 모든 감정을 떠나고 모든 새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해 혹은 노력하거나, 안락하거나, 죄 없이 접촉함에 있어서도 안온하게 머물러야 하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음식을 의지해 음식을 끊는다’는 것이오.
018_0914_b_01L‘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고 했는데 어떤 것을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有漏]가 다하여, 번뇌 없이 심해탈(心解脫)ㆍ혜해탈(慧解脫)하고, 현세에서 스스로 자신이 증득한 줄을 알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저 거룩한 제자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되오. 그러면 그는 그때 곧 모든 번뇌를 끊고……(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교만을 의지해 교만을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탐애를 의지해 탐애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아무 존자와 아무 존자 제자는 모든 번뇌를 다하여……(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들은 어째서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했는가?……(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는데, 그는 그때 모든 번뇌를 끊고……(내지)……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오. 누이여, 이것이 이른바 ‘탐애를 의지해 탐애를 끊는다’는 것이오. 누이여, 행하는 바가 없으면 음욕과 화합하는 다리[橋樑]도 끊어지는 것이오.”
존자 아난이 이렇게 설법하자, 그 비구니는 티끌과 때를 멀리 여의고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그 비구니는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으며, 의심을 벗어나, 남을 의지하지 않고도 바른 법과 율에서 마음에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존자 아난의 발에 예배하고 존자 아난에게 말했다.
018_0914_c_01L“당신은 이제 진실로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았구려. 어리석고 착하지 못해 짝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그대는 스스로 알았고, 그대는 이제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미래 세상에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것이오. 나는 이제 가엾게 여겨 그대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그대로 하여금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게 하겠소. 왜냐하면, 만일 스스로 죄를 보고 스스로 죄를 알아 능히 잘못을 참회하는 사람은 미래 세상에서 구족계를 얻고, 착한 법이 더욱 자라나 끝내 물러나거나 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존자 아난은 이렇게 그 비구니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교지(橋池)9)족 땅에 계시면서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존자 아난과 함께 바두촌[婆頭聚落] 국경 북쪽에 있는 신서림(身恕林)으로 가셨다. 그때 바두촌의 여러 소년들은 존자 아난이 교지 땅에서 그 마을을 유행하다가, 바두촌 북쪽에 있는 신서림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 그들은 서로를 불러모았고 존자 아난의 처소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존자 아난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그때 존자 아난이 여러 소년들에게 말했다.
“제종(帝種)10)들이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께서는 네 가지 청정함을 말씀하셨으니, 계의 청정[戒淸淨]ㆍ마음의 청정[心淸淨]ㆍ견해의 청정[見淸淨]ㆍ해탈의 청정[解脫淸淨]이다.
018_0914_c_16L“帝種,如來、應、等正覺說四種淸淨,戒淸淨、心淸淨、見淸淨、解脫淸淨。
어떤 것을 계의 청정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계, 즉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머물러 계가 차츰 자라고 위의(威儀)를 구족하여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내며, 학계(學界)를 받아 지닌다. 계가 몸에 완전히 배지 않은[不滿] 사람은 완전히 배게 하고, 이미 완전히 밴 사람은 그대로 지속시켜 정진방편(精進方便)으로 뛰어나고자 하며, 용맹하게 꾸준히 힘써 모든 몸과 마음의 법을 감당하고 늘 능히 받아들인다. 이것을 계가 청정하여 끊는 것[戒淨斷]11)이라 한다.
018_0915_a_01L고종(苦種)이여, 어떤 것을 마음이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욕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내지)……제4선에 구족하게 머문다. 그리고 선정이 몸에 완전히 배지 않은 사람은 선정이 몸에 완전하게 배게 하고, 이미 완전히 밴 사람은 그대로 지속시켜 정진하고자 하며 나아가 항상 받아들인다. 이것을 마음이 청정하여 끊는 것[心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어떤 것을 견해가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大師]의 설법을 듣되, 이러이러하다고 설법하면 곧 이러이러함에 들어가 사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고, 이러이러한 기쁨을 얻고 따라 기뻐하며 부처님을 따르게 된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는 못했으나, 다른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로부터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이러이러하다는 설법을 들으면 곧 이러이러함에 들어가 사실 그대로 관찰하고, 이러이러하다고 관찰하고는 그 법에서 기쁨을 얻고 따라 기뻐하며 바른 법을 믿는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또한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더라도,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우고는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은 이러이러하다고 거듭 외우고 나서는 이러이러하다는 그 법에 들어가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며, 또 이전에 들어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워 익힐 수가 없더라도, 이전에 들었던 법을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하고, 이전에 들었던 법은 이러이러하다고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하고서는 이러이러하다는 그 법에 들어가 바른 지혜로 관찰하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018_0915_b_01L다시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의 설법도 듣지 못하고, 지혜가 밝고 존중할 만한 범행자의 말도 듣지 못하며, 또 이전에 받아 지녔던 것을 거듭 외워 익힐 수도 없으며, 이전에 들었던 법을 남을 위해 널리 설명할 수도 없더라도, 이전에 들었던 법을 혼자 고요한 곳에서 생각하고 관찰하고,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고 관찰하고는 이러이러하다는 바른 법에 들어가며, 나아가 바른 법을 믿는다.
이와 같이 남에게서 듣고서 안으로 바르게 생각하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바른 소견을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바른 소견은 더욱 넓힌다는 것이요, 또 이것이 계가 몸에 아직 배지 않은 사람은 배게 하고, 이미 밴 사람은 그대로 거두어 받아들이며, 정진방편으로 항상 거두어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견해가 청정하여 끊는 것[見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어떤 것을 해탈함이 청정하여 끊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탐하는 마음에 욕망이 없어 해탈하고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에 욕망이 없어 해탈한다. 이와 같이 해탈이 아직 배지 않은 사람은 배게 하고, 이미 밴 사람은 그대로 거두어 받아들이며, 정진하여 항상 거두어 받아들이려 한다. 이것을 해탈함이 청정하여 끊는 것[解脫淨斷]이라 한다. 고종이여.” 존자 아난이 이 법을 설하자, 바두촌의 여러 소년들은 존자 아난의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菴羅)부락 암라림(菴羅林)12)에서 많은 상좌 비구(上座比丘)13)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질다라(質多羅)14) 장자가 여러 상좌 비구들에게 찾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때 여러 상좌 비구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하였고,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 비구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나가달다(那伽達多) 비구의 방으로 찾아가 나가달다 비구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서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때 나가달다 비구는 질다라 장자에게 물었다.
푸른 틀에 흰 천을 덮고 한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여 결박을 여의고 관찰하며 오는 자 흐름을 끊어 다시는 얽매이지 않네.
018_0915_c_02L枝靑以白覆, 一輻轉之車, 離結觀察來,
斷流不復縛。
장자여, 이 게송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018_0915_c_04L長者,此偈有何義?”
질다라 장자가 말했다.
質多羅長者言:
“존자 나가달다여, 세존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셨습니까?”
018_0915_c_05L“尊者那伽達多,世尊說此偈耶?”
“그렇습니다.”
018_0915_c_06L答言:“如是。”
질다라 장자가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質多羅長者語尊者那伽達多言:
“존자여, 잠깐만 조용히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그 뜻을 사유해보겠습니다.”
018_0915_c_07L“尊者,須臾默然,我當思惟此義。”
그리고 잠깐동안 잠자코 생각한 뒤에, 존자 나가달다에게 말했다.
018_0915_c_08L須臾默然思惟已,語尊者那伽達多言:
“‘푸르다’는 것은 계를 말함이요, ‘흰 덮개’는 해탈을 말하며, ‘한 바퀴’란 몸에 대한 생각[身念]이요, ‘구른다’는 것은 굴러 나아간다는 뜻이며, ‘수레’란 지관(止觀)을 말합니다. 여의는 ‘결박[結]’에 세 가지 결박이 있으니, 이른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입니다. 저 아라한은 모든 번뇌[漏]가 이미 다하고 이미 멸하고 이미 알아서, 마치 다라(多羅)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이미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멸해15) 일어나지 않는 법이게 합니다. ‘관찰한다’는 것은 본다는 뜻이요, ‘오는 자[來]’란 그 사람을 가리키며, ‘흐름을 끊었다’는 것은 애욕으로 나고 죽음에 흐르는데, 저 아라한 비구는 모든 번뇌를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아,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세 가지 얽맴[縛]인 탐욕의 얾맴ㆍ성냄의 얽맴ㆍ어리석음의 얾맴에서, 저 아라한 비구는 모든 번뇌를 이미 다하고 이미 끊고 이미 알아,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베어내면 다시는 생기지 않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018_0916_b_01L“어떤 법은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으며, 어떤 법은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
018_0916_b_01L“有法種種義、種種句、種種味,有法一義種種味。”
다시 장자에게 물었다.
復問長者:
“어떤 법에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까?”
018_0916_b_02L“云何有法種種義、種種句、種種味?”
장자가 대답하였다.
018_0916_b_03L長者答言:
“무량(無量)삼매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마음이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중후한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히고 두루 인연해 일방(一方)에 충만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2방ㆍ3방ㆍ4방ㆍ상하의 일체 세간에 마음이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원망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성냄도 없어, 너그럽고 넓고 중후한 마음으로 한량없이 닦아 익혀 모든 곳에 충만하게 하고, 일체 세간에 두루 인연해 머뭅니다. 이것을 무량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무상(無相)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일체 모양을 생각하지 않아서 무상심삼매를 몸으로 증득합니다. 이것을 무상심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무소유심(無所有心)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일체 한량없는 식입처(識入處)를 건너, 소유함 없이 소유함 없는 마음에 머뭅니다. 이것을 무소유심삼매라 합니다.
어떤 것이 공(空)삼매인가? 이른바 거룩한 제자는 세상이 공한 것을 세상은 공하다고 사실 그대로 관찰하여, 공함에 항상 머물러 변함 없이 나[我]도 아니요 내 것[我所]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을 공심(空心)삼매라 합니다. 이것이 법에 여러 가지 뜻과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맛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존자여, 이른바 탐욕은 한량이 있으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이것은 가장 한량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탐욕은 모양[相]이 있고 성냄과 어리석음도 모양이 있으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이것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은 곧 소유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소유이나 만일 다툼이 없으면, 곧 소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다툼이 없으면 공하여 탐욕에 대해 공하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해 공하여, 공함에 항상 머물러 변함 없이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면, 이것을 법이 뜻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맛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매우 깊은 부처님 법에서 현재에 성현의 지혜의 눈을 얻어 들어가게 되었군요.”
018_0916_c_04L“汝得大利,於甚深佛法,現賢聖慧眼得入。”
질다라 장자는 존자 나가달다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018_0916_c_05L質多羅長者聞尊者那伽達多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568. 가마경(伽摩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018_0916_c_06L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부락 암라림에서, 여러 상좌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 비구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여러 상좌 비구들에게 예배한 뒤에, 다시 존자 가마(伽摩) 비구의 처소에도 찾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앉아 존자 가마 비구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날숨ㆍ들숨을 몸의 행이라 하고, 각이 있고 관이 있는 것을 입의 행이라 하며, 생각과 의도를 뜻의 행이라 합니까?”
018_0916_c_16L復問:“何故出息、入息名爲身行?有覺、有觀名爲口行?想、思名爲意行?”
“장자여, 날숨ㆍ들숨은 곧 몸의 법으로서 몸을 의지하고 몸에 속해 있고 몸을 의지해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날숨ㆍ들숨을 몸의 행이라 합니다. 각이 있고 관이 있기 때문에 곧 입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각이 있고 관이 있는 것을 곧 입의 행이라 합니다. 생각과 의도는 곧 뜻의 행으로서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에 속해 있고 마음을 의지해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의도는 곧 뜻의 행이라 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 몸을 버릴 때 그 몸은 송장이 되어 땅에 눕고 다시 그것을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네.
018_0917_a_03L若人捨身時, 彼身屍臥地, 棄於丘塚閒,
無心如木石。
라고 합니까?” “장자여,
018_0917_a_05L答言:“長者,
목숨과 더운 기운 또 의식은 몸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네.
라고 합니다.”
018_0917_a_06L壽暖及與識, 捨身時俱捨, 彼身棄塚閒,
無心如木石。
“존자여, 만일 죽는 것과 멸진정수(滅盡正受)에 드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018_0917_a_08L復問:“尊者,若死、若入滅盡正受,有差別不?”
“목숨과 더운 기운을 버리면 모든 근(根)은 다 허물어져 몸과 목숨은 갈라지게 되나니, 이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멸진정(滅盡定)17)이란 몸ㆍ입ㆍ뜻의 행만 멸하는 것으로서, 수명을 버리지 않고 더운 기운도 여의지 않으며, 모든 근도 허물어지지 않아 몸과 목숨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목숨이 끝나는 것과 멸진정수에 드는 것과의 차별적인 모습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부락 암라림에서 많은 상좌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 비구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여러 상좌 비구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잠자코 있었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열 손가락을 모아 합장하고, 여러 상좌들에게 청하였다.
018_0917_c_01L그때 여러 상좌들은 잠자코 그 청을 받아주었다. 그러자 그 장자는 여러 상좌들이 잠자코 그 청을 수락한 줄 알고, 발에 예배하고 떠나갔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 갖가지 음식을 마련하고 자리를 깔고, 이른 아침에 사람을 보내 때가 되었음을 알리게 했다. 그때 여러 상좌들은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장자 집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장자는 상좌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갖가지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공양하였다. 여러 비구들은 식사를 마친 뒤에 손을 씻고 양치하고 발우를 씻었다. 질다라 장자는 낮은 평상 하나를 펴고 상좌들 앞에 앉아 법을 경청하였다. 그때 여러 상좌들은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세상의 여러 견해들은 혹은 내가 있다[有我]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중생을 말하며, 혹은 수명을 말하고, 혹은 세상의 길흉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존자들이시여, 이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은 무엇을 근본으로 하고, 무엇이 원인[集]이며, 어디서 생겼고, 무엇이 변한 것입니까?”
“존자시여, 무릇 세상의 견해들은 무엇을 근본으로 하고, 무엇이 원인이며, 어디서 생겼고, 무엇이 변한 것입니까?”
018_0918_a_12L“尊者,凡世閒所見,何本、何集、何生、何轉?”
존자 이서달다가 대답하였다.
018_0918_a_13L尊者梨犀達多答言:
“장자여, 무릇 세상의 견해들은 혹은 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중생을 말하며, 혹은 수명을 말하고, 혹은 세상의 길흉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견해들은 모두 신견(身見)을 근본으로 하고, 신견이 원인이며, 신견에서 생긴 것이요, 신견이 변한 것입니다.”
“장자여,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색(色)은 곧 나[我]다, 색은 나와 다르다, 색 안에 내가 있다, 내 안에 색이 있다’고 보고, 수(受)ㆍ상(想)ㆍ행(行)도 마찬가지며, ‘식(識)은 곧 나다, 식은 나와 다르다, 내 안에 식이 있다, 식 안에 내가 있다’고 봅니다. 장자여, 이것을 신견이라 합니다.”
018_0918_b_01L“장자여, 이른바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색은 곧 나다’고 보지 않고, ‘색은 나와 다르다’고도 보지 않으며, ‘내 안에 색이 있다’거나 ‘색 안에 내가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수(受)ㆍ상(想)ㆍ행(行)도 마찬가지며, ‘식(識)은 곧 나다’고 보지 않고, ‘식은 나와 다르다’고도 보지 않으며, ‘내 안에 식이 있다’거나 ‘식 안에 내가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견이 없어진 것이라 합니다.”
존자 이서달다는 잠자코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때 존자 이서달다는 질다라 장자의 청을 받았으나 그 공양이 장애가 되어 오랫동안 세존의 처소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여러 상좌 비구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여러 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하였고,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질다라 장자는 따라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018_0918_c_01L여러 상좌들은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목장에 있는 질다라 장자의 집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손수 여러 가지 음식을 공양하였다. 공양을 마친 뒤에 발우를 씻고 손을 씻고 양치질을 마치자, 질다라 장자는 낮은 평상 하나를 깔고 상좌들 앞에 앉아 법을 들었다. 그때 여러 상좌들은 질다라 장자를 위해 갖가지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하였고,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는데, 질다라 장자도 그 뒤를 따랐다. 여러 상좌들은 소락(酥酪)과 꿀을 배불리 먹은 데다 늦은 봄 더운 때라, 길을 걷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때 마하가(摩訶迦)라는 하좌(下座) 비구가 여러 상좌들에게 말했다.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 방일(放逸)하지 않은 것이 근본이 되고, 방일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며, 방일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요, 방일하지 않은 것이 변한 것으로서,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이것이나 그 밖의 다른 공덕도, 모두 다 방일하지 않은 것이 근본이 되고, 방일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며, 방일하지 않은 데서 생기고, 방일하지 않은 것이 변한 것으로서,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그 밖의 다른 도품법(道品法)을 얻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숲에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마땅히 목숨이 다하도록 의복ㆍ음식과 병에 따른 탕약을 공양하겠습니다.”
018_0919_a_15L“願常住此林中,我當盡壽衣、被、飮食、隨病湯藥。”
그러나 존자 마하가는 가봐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질다라 장자는 설법을 듣고는 따라 기뻐하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떠나갔다. 존자 마하가는 공양의 이익이 장애가 되어 죄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난 뒤로, 끝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018_0919_b_01L“여러 존자들이시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른바 눈이 색(色)을 얽어매는 것입니까, 색이 눈을 얽어매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귀와 소리ㆍ코와 냄새ㆍ혀와 맛ㆍ몸과 감촉도 마찬가지며, 뜻과 법에 있어서 뜻이 법을 얽어매는 것입니까, 법이 뜻을 얽어매는 것입니까?”
“제 생각 같아서는 눈이 색을 얽어매는 것도 아니요, 색이 눈을 얽어매는 것도 아니며,……(내지)……뜻이 법을 얽어매는 것도 아니요, 법이 뜻을 얽어매는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에 욕탐(欲貪)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에 얽매이는 것이니, 비유하면 검고 흰 두 마리의 소에게 하나의 멍에를 씌워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검은 소가 흰 소를 얽어맨 것인가, 흰 소가 검은 소를 얽어맨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바른 물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들이시여, 눈이 색을 얽어맨 것도 아니요, 색이 눈을 얽어맨 것도 아니며,……(내지)……뜻이 법을 얽어맨 것도 아니요, 법이 뜻을 얽어맨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에 있는 욕탐이 바로 그것을 얽어맨 것입니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여러 상좌들의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그것은 법(法)과 율(律)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쁜 지식으로서 번뇌를 벗어나는 법[出要法]도 아니요, 바른 깨달음이라 말할 수도 없으며, 찬탄할 것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부질없이 출가했다는 이름으로 20년을 지내면서 벌거벗은 몸으로 삭발하고 걸식하며 인간 세상을 유행하고 재[灰] 속에서 뒹굴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사문 구담 제자가 된 지 20년이 지났다면, 당신은 인간을 뛰어넘는 법과 훌륭하고 궁극적인 지견(知見)을 얻었습니까?”
018_0919_c_18L“汝爲沙門瞿曇弟子過二十年,復得過人法,勝、究竟知見不?”
질다라 장자가 대답했다.
018_0919_c_19L質多羅長者答言:
“당신은 이제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질다라 장자는 결코 다시는 어머니 태로 말미암아 생을 받지 않을 것이요, 또 무덤을 보태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혈기(血氣)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하분결(下分結)에 있어서 끊지 못한 번뇌[結]를 한 가지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한 가지 번뇌라도 끊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장차 다시 돌아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여러 상좌들은 곧 출가시켜, 수염과 머리를 깎이고 가사를 입혔다. 그는 출가하고 나서 생각하였다.
018_0920_a_12L諸上座卽令出家,剃除鬚髮,著袈裟衣。出家已,思惟:
‘선남자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도를 배우는 까닭은 범행을 깨끗이 닦아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해서이다.’
018_0920_a_13L“所以善男子剃除鬚髮,著袈裟衣,出家增進學道,淨修梵行。”得阿羅漢。
574. 니건경(尼揵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018_0920_a_15L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암라부락 암라림에서 여러 상좌(上座)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니건약제자(尼揵若提子)20)는 5백 권속들과 함께 암라림으로 와서, 질다라 장자를 꾀어 제자로 삼으려 하였다. 질다라 장자는 니건약제자가 5백 권속들을 거느리고 암라림으로 와서, 자기를 꾀어 제자로 삼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곧 그곳으로 가서 서로 인사를 마치고 제각기 한쪽에 앉았다. 그때 니건약제자가 질다라 장자에게 말했다.
“장자여, 당신은 아첨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순박하고 곧으며, 순박하고 곧은 데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장자여, 만일 각(覺)과 관(觀)을 쉴 수 있다면 노끈으로 바람을 잡아맬 수도 있을 것이요, 만일 각과 관을 쉴 수 있다면 한줌의 흙으로 항하[恒水]의 흐름을 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늘 앎[知]과 봄[見]을 일으킵니다.”
“믿음이 앞에 있는 것입니까, 지혜가 앞에 있는 것입니까? 믿음과 지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이며, 어느 것이 훌륭한 것입니까?”
018_0920_b_08L“爲信在前耶?爲智在前耶?信之與智,何者爲先?何者爲勝?”
니건약제자가 대답하였다.
018_0920_b_09L尼揵若提子答言:
“믿음이 마땅히 앞에 있고, 그 뒤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지혜를 서로 비교하면 지혜가 더 훌륭한 것입니다.”
018_0920_b_10L“信應在前,然後有智,信智相比,智則爲勝。”
질다라 장자가 니건약제자에게 말했다.
018_0920_b_11L質多羅長者語尼揵若提子:
“저는 이미 각과 관이 쉬게 됨을 구해 얻고 나서, 안으로 깨끗한 한 마음이 되어 무각무관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제2선에 구족하게 머뭅니다. 저는 낮에도 이 삼매에 머물고, 밤에도 이 삼매에 머물며, 밤이 새도록 언제나 이 삼매에 머뭅니다. 이미 이러한 지혜가 있는데, 세존에 대한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은 아까는 나를, 아첨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순박하고 곧으며, 순박하고 곧은 데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더니, 지금은 어째서 아첨하고 거짓되고 곧지 않으며, 곧지 않은 데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만일 당신이 먼저한 말이 진실이라면 뒤의 말은 거짓이요, 뒤의 말이 진실이라면 먼저한 말은 거짓일 것입니다. 당신은 아까 ‘나는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늘 앎[知]과 봄[見]을 낸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앞뒤의 조그마한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을 뛰어넘는 법을 알며, 또 앎과 봄과 안락하게 머무는 일을 알겠습니까?”
018_0920_c_01L“한 가지 물음ㆍ한 가지 해설ㆍ한 가지 주장에서부터 나아가 열 가지 물음ㆍ열 가지 해설ㆍ열 가지 주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한 가지 물음ㆍ한 가지 해설ㆍ한 가지 주장에서부터 나아가 열 가지 물음ㆍ열 가지 해설ㆍ열 가지 주장이 없다면, 어떻게 나를 꾈 수 있다고 이 암라림에 와서 나를 꾀려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니건약제자는 숨이 막혀 머리를 내저었고, 팔짱을 끼고 나가서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
“여러 친족들이여, 제가 지금 잘 생각해보니 저는 다시는 어머니 태로 말미암아 생을 받지 않을 것이요, 또 무덤을 보태지도 않을 것이며, 다시는 혈기(血氣)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하분결(下分結)을 저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고, 제가 끊지 못한 번뇌는 한 가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일 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이 세상에 도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묘한 과보 얻음은 아끼는 마음 없기 때문이라서 어디고 태어나는 그 곳마다 일찍이 즐겁지 않은 곳 없으리.
018_0921_a_16L獲斯妙果報,
以無慳悋故。 在所處受生, 未曾不歡喜。
질다라 장자는 이 게송을 말하고는 이내 목숨을 마쳐 불번열천(不煩熱天)에 태어났다. 그때 질다라 장자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018_0921_a_17L質多羅長者說此偈已,尋卽命終,生於不煩熱天。爾時,質多羅天子作是念:
‘나는 여기에 머물지 말고 당장 저 염부제(閻浮提)로 가서 여러 상좌(上座) 비구들께 예배해야겠다.’
018_0921_a_20L“我不應停此,當往閻浮提,禮拜諸上座比丘。”
그리고 마치 역사가 팔을 굽혔다 펴는 만큼의 짧은 시간에 하늘의 신통력으로 암라림으로 내려가 몸에서 하늘의 광명을 뿜어내어 암라림을 두루 비추었다. 그때 어떤 비구가 밤에 일어나 방밖으로 나가 한데를 거닐다가, 훌륭한 광명이 숲을 두루 비추는 것을 보고, 곧 게송으로 말했다.
2)팔리어로는 brahmacariya라고 함. 바라문들은 음행(淫行)을 끊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하늘에 태어나기 위한 네 가지 청정한 행을 행하는 것을 범행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음행을 끊고, 탐욕을 여의며, 잘못을 여의어 청정한 것을 범행이라 하는데 열반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행(行) 가운데 하나임.
3)여기서 ‘욕(欲)’은 희망(希望)ㆍ발심(發心)을 가리킴.
4)네 가지 선정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말한다. 네 가지 선정이란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심정(心定)ㆍ사유정(思惟定)임.
7)팔리어로는 pātimokkha이며, 한역하여 별별해탈(別別解脫) 혹은 별해탈계(別解脫戒)라고도 함. 그릇되고 잘못됨에서 따로따로 해탈한다는 뜻. 즉 계행(戒行)을 지켜 능히 따로따로 몸과 입의 잘못을 방지함으로써 점차로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게 된다. 승단 가운데 비구ㆍ비구니라면 마땅히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의 근본조문.
8)고려대장경 본문에는 단지 애욕(愛欲)으로만 되어 있으나, 이것은 앞서 기술한 탐애와 음욕의 줄임말로 보여 앞 내용을 따랐다.
9)팔리어로는 Koḷiya라고 하며, 종족 이름임.
10)고려대장경 본문에는 ‘제종(帝種)’ 혹은 ‘고종(苦種)’이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팔리본에는 일괄적으로 Vyagghapajja[호로(虎路)에 머무는 자]로 되어 있어 ‘제(帝)’자를 ‘호(虎)’자로 해석하고 있다. 팔리본 내용을 참고로 할 경우, ‘호종’은 바두(婆頭)촌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외에 송ㆍ원ㆍ명 3본에는 이 글자가 모두 ‘고(苦)’자로 되어 있다.
11)고려대장경 본문에는 ‘계정단(戒淨斷)’으로 되어 있으나, 앞 내용에 대한 부연설명이라면 ‘계청정(戒淸淨)’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문장 내용도 ‘청정’이 ‘정단(淨斷)’으로 대치되었고, 송ㆍ원ㆍ명 3본에도 ‘정단’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라 해석하였다.
12)암바라녀(菴婆羅女)가 보시한 동산숲을 말함.
13)상좌(上座)에 앉은 사람이라는 뜻. 승려에 대한 2인칭의 경어. 장로. 교단 중에서 수행을 쌓은 지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함. 덕(德)이 뛰어난 수행승으로서 대덕(大德)ㆍ존자(尊者)ㆍ구수(具壽) 등은 그에 대한 경칭. 10년 이상 수행을 쌓은 승려의 호칭. 일반적으로 수행승의 경칭으로도 쓰여짐.
14)팔리어로는 Citta이며, 부처님 재가(在家)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인 인물임.
15)고려대장경 본문에는 ‘멸(滅)’자로 되어 있으나, 명본(明本)에 의거하면 ‘성(成)’자로 되어 있고, 이후 본문의 반복되는 문장에도 ‘성’자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자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16)팔리본에는 앞의 각 삼매들이 해탈로 되어 있다.
17)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함. 구차제정(九次第定)에서 최고경지로서 이 선정에 들어간 사람은 이미 감수[受]작용과 생각[想]의 두 가지 심소(心所)가 멸하게 된다.
18)팔리어로는 lsidatta라고 함. 또는 음사하여 예서달다(隷犀達多)ㆍ이사달다(尼師達多)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선수(仙授) 혹은 선시(仙施)라고도 함. 존자의 이름임.
19)팔리어로는 uttari-manussa-dhamma이며, 열 가지 선업도(善業道, dasa-kusala- pathā)를 말함.
20)팔리어로는 Niganṭha Nātaputta이며, 한역하여 니건타약제자(尼乾陀若提子)라고도 함. Jaina교(敎)의 개조(開祖), 혹은 중흥조(中興祖)라고도 하며, 육사외도(六師外道) 가운데 한 인물. 경전에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 부처님께서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고 한다.
21)팔리어로는 cakkavattin라고 하며, 인도 종교 가운데 전통적 행위인 인덕(仁德)ㆍ10선(善) 등을 행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정법(正法)으로만 전세계를 통치하는 이상적 제왕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