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9_0227_a_01L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서문
019_0227_a_01L人本欲生經序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이란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조찰[照]하여 사성제(四聖諦)의 체제로 꾸민 것이니, 본(本)은 무명[癡]이요, 욕(欲)은 애(愛)요, 생(生)은 생사(生死)이다. 열두 가지에서 이 셋만을 간략히 들어 제목(題目)으로 삼으셨으니, 인간[人]이란 모두가 생사의 흐름에서 삼세(三世)에 얽매이고[浪滯], 구지(九止)에 헤매고[飄縈], 팔박(八縛)에 시달리는[稠繇] 주체이기 때문이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은 구지(九止)의 첫 단계인 인간(人間)과 하늘무리[天]의 몫이요, 사제(四諦)로 비출 곳[所鑒]은 구지(九止)요, 팔해(八解)로 바로잡을 것은 팔사(八邪)이니, 사(邪)가 바로잡아지면 편안[恬]치 않은 곳이 없고, 지(止)를 비추면 유쾌하지[愉] 않을 때가 없다.
019_0227_a_02L人本欲生經者照于十二因緣而成四諦也本癡也欲愛也生生死也擧十二之三以爲目也人在生死莫不浪滯於三世飄縈於九止稠繆八縛者也十二因緣於九止則第一人亦天也四諦所鑑鑑乎九止八解所正于八邪邪正則無往而不恬則無往而下愉
유쾌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능히 훤히 비추고[洞照], 곁으로도 통했으며[傍通],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능히 신비롭게 변화하고, 상황에 맞추어 응[應會]하나니, 신비롭게 변화하고 상황에 맞추어 응하면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고, 훤히 비추고[洞照], 곁으로도 통하면 말하지 않아도 감화된다. 말하지 않아도 다스려지기 때문에 버려야 할 사람이 없고,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기 때문에 버려야 할 물건이 없나니, 버려야 할 물건이 없고, 버려야 할 사람이 없다면 이야말로 선지(禪智)의 시초[由]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시기를 “도(道)는 선지(禪智)에서 생겨서 열반(涅槃)으로 가까워지게 한다.” 하셨으니, 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실로 가까이하고 귀의해야 할 금쪽같은 말씀이다.
019_0227_a_10L無往而不愉故洞照傍通無往而不恬故能神變應神變應會則不疾而速洞照傍通則不言而化不言而化故無棄人疾而速故無遺物物之不遺人之不斯禪智之由也故經曰道從禪智得近泥洹豈虛也哉誠近歸之也
이 경은 안세고삼장(安世高三藏)께서 번역하신 것 같은데 어법은 예스러우시나 문장이 자상[纖悉]하시고, 이치는 오묘하시나 이론이 완곡(婉曲:간곡)하시니, 내당[幽堂]의 아름다움만 보고, 정원[闕庭]의 풍요로움을 지나쳐버리는 이도 없지 않을 것이다.
019_0227_a_16L經似安世高譯爲晉言也言古文悉義妙理婉睹其幽堂之羙闕庭之富或寡矣
내가 늘 이 경을 손에 잡으면 쉽사리 놓지 못했었으니, 즐기어 음미했던 것은 삼관(三觀)의 묘함이요, 머릿속에 길이 간직하려던 것은 상념을 끊으라는 말씀[想滅之辭]이었다. 이제 감히 여가를 이용하여 주(註)를 내는데 같은 논리가 중복된 것은 거듭 풀이하지 않는다.
019_0227_a_19L安每攬其文欲罷不能樂而玩者三觀之妙也所思而在者想滅之辭也敢以餘睱爲之撮注義同而文別者無所加訓焉
019_0227_b_01L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
019_0227_a_22L佛說人本欲生經
후한(後漢) 안식삼장(安息三藏)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월운 번역
019_0227_b_01L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이와 같이 들었다.
019_0227_b_02L聞如是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국(拘類國)에 계실 적에 그 나라 수도[法治處]로 가셨다.[아난(阿難)께서 자신이 성교(聖敎)를 들으시던 곳을 기억해 내신 것이다. 법치처(法治處)는 곧 왕성(王城)이다.]
019_0227_b_03L一時佛在拘類國行拘類國法治處阿難記所聞聖敬土也法治處王城也
그때 현자(賢者) 아난이 한적한 곳에 홀로 앉았다가 홀연히 생각하기를 ‘이 뜻의 생겨남[意生 : 緣生]은 미증유(未曾有)하며, 이 뜻은 곧 미묘함의 근본이며, 생사 또한 미묘하고, 중간[中] 또한 미묘하건만 오히려 분명해서 나타나기 쉽도다[易現]’ 하였다.[‘나타나다[現]’라 함은 현(見), 즉 ‘보이다.’라고 해야 하고, ‘이 뜻은 미묘함의 근본이다[是意微妙本].’라고 해야 하거늘 문구가 도치[句倒]되었다.]
019_0227_b_04L是時賢者阿難獨閑處傾猗念如是意生未曾有是意是微妙本生死亦微妙中微妙爲分明易現現當爲見也是意微妙本句倒
그때 현자 아난은 날이 밝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로 갔다. 부처님 처소에 이르자 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한 쪽에 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제가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홀연히 생각하기를 이 뜻의 생겨남[意生]이 미증유(未曾有)하며, 이 뜻은 곧 미묘함의 근본이며[근본[本]이란 어리석음이니,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사성제(四聖諦)의 비춤을 받은 사람이다.], 생사(生死) 또한 미묘하며[생사는 가장 말단이지만 미세하고도 밝은 진리[諦]는 그 말단[末]까지 비춘다.], 중간[中]도 미묘하건만[중간(中間)이란 근본과 지말(支末)의 중간이니, 구용제(九用諦)로 비추어보면 역시 매우 미묘하다.], 다만 분명해서 쉽게 나타난다[易現]고 하였나이다.”[현(現)은 현(見)으로 고쳐야 한다. 말하자면 사제(四諦)로써 십일인연(十一因緣)을 관찰하면 요요(了了)하고도 분명(分明)해서 알아보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019_0227_b_07L便賢者阿難夜已竟起到佛已到爲佛足下禮已訖一處止已止一處賢者阿難白佛如是我爲獨閑處傾猗念如是意生未曾有是意是微妙本本癡也解癡者四諦之所照也死亦微妙生死極末也微明之諦達于末也中微妙中者本末之間九用諦燭之之亦甚微妙也但爲分明易現現當作見也言四諦觀十一因緣了了分明不難知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무나 분명해서 알아보기 쉽다고 말하지 말라. 깊고도 미묘하나니, 아난아, 근본이 있어 생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라. 아난아, 근본인연을 좇아 생사하는 것을 만일 어떤 이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면, 마치 세간의 베틀이 밟거나 당기는 대로 북[梭]이 오가는 것과 같으니라.[어리석음을 좇는 이에게 이 생사가 있다는 것이 지극히 깊고, 지극히 미묘하거늘 어찌 알기 쉽다고 하는가. 어리석음[癡]이 생긴 이래, 겁(劫)을 지내고 몸을 바꾸면서 유유(悠悠)히 지낸 비구(比丘)는 그 도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되돌아보건대 손에 잡은 듯이 아는 이는 만에 하나도 없거늘 어찌 분명하다 하는가.]
019_0227_b_14L佛告阿難勿說是分明易知易見深微妙阿難從有本生死是從本因緣生死如有不知不見不受令是世閒如織機躡撰往來言從癡者有是生死至染至妙何得言易見乎自有癡來經劫累身悠悠者比丘有不了諦反視如有者者萬無一人曷云分明耶
금생에서 후생으로 이르고, 후생에서 금생으로 이르는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更苦] 세간에 사노라 세간을 벗어나지 못하였느니라.[이는 생사의 고통이 곧 고제(苦諦)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죽으면 바로 후생(後生)이니, 생사란 마치 밤낮과 같거늘 어리석은 이는 태어나면 고마워하고, 죽으면 찡그리며 괴로워한다.]
019_0227_b_19L從是世後世從後世是世更苦世閒居令不得離世閒此說生死苦爲苦諦也今死則後身生生死猶晝夜而愚者以生而感死頻以成苦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깊고도 미묘한 것은 근본이 있기 때문에 생사(生死)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밝히는 일 또한 미묘하다는 것이니라.[태어남을 인하여 죽음이 있나니, 그러므로 인연(因緣)이라 하고, 금세(今世)에서 후세(後世)로 이어지면서 생사를 거듭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更苦] 하고, 삼세(三世)를 환하게 비추기 때문에 미묘(微妙)라 하셨다. 이상으로써 고제(苦諦)의 법문이 끝난다.]
019_0227_b_21L如是因緣阿難可知爲深微妙從有本生死明亦微妙由生有死故故曰因緣達今世後世累繼生死故曰更苦明照三世故曰微妙也結苦諦也
019_0227_c_01L만일 어떤 이가 묻되 늙고 죽음[老死]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이런 물음에는 얼른 대답하되 인연이 있다 하라. 아난이여, 무슨 인연으로 늙고 죽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태어남[生] 때문이라 하라.[죽음[死]은 태어남[生]을 인해서 있고, 생(生)을 훈습[習]시키는 법은 열이 있으니, 위는 괴로움의 실체를 알리셨고, 여기서부터는 그 습을 추궁하셨다.]
019_0227_b_23L若有問老死因緣問是便報有因緣何因緣阿難老死便報生故死因于生習生有十上知苦此推習也
만일 어떤 이가 묻되 태어남[生]의 인연(緣)이 있는가 하거든 이런 물음에는[태어남[生]의 인연(緣)이 있는가.’ 함은 생(生)에도 인(因)이 있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얼른 대답하되 인연이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생(生)하는가 하거든 유(有) 때문에 생한다 하라.[생(生)은 삼유(三有)를 인(因)한다.]
019_0227_c_02L有問有生因緣問是有生因緣猶生有所因不也便報有因緣何因緣生有故爲生生因乎三有也
만일 어떤 이가 묻되 유(有)의 인연[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유의 인연이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유가 있는가하거든 대답하되 수(受)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다 하라.[네 가지 수[四受]를 인하여 세 가지 유[三有]가 있다.]
019_0227_c_04L有問有因緣有便報有因緣有何因緣有受因緣有因四受有三有
만일 어떤 이가 묻되 인연이 있어 수(受 : 取)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인연이 있어 수가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수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애구(愛求)의 인연으로 수가 있다 하라. [말하자면 전생 몸[前身]으로부터 여덟 가지 애[八愛]를 훈습(薰習)했기 때문에 중음(中陰)에 네 가지 수[四受]가 있다. 네 가지 수를 다 누리면 바로 금생 몸[今身]이니, 이미 두 생[二世]이 밝혀졌으니, 그와 어울리기[與]를 생략하고, 그치라. 일상적인 습제(習諦)의 풀이는 끝났다. 십이인연(十二因緣)에 삼세(三世)가 구족하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금생과 내생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법칙에 마음을 써서 모두가 윤회(輪迴)를 알고, 사제(四諦)를 깨닫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교계[計挍]로써 본말(本末)을 교계하거니와 본말이 약(藥)이 된다 하노니, 약이라 함은 곧 사성제(四聖諦)이다.]
019_0227_c_06L若有問有因緣受有因緣受何因緣受爲愛求因緣受言從前身習八愛故中陰有四受四受旣受則有今身二世現故略而止與也常習諦皆竟十二因緣具三世癡人不知今世後世故令運心彌綸三世令知輪迴寤四諦也故曰癡人以挍計挍計本未本未爲藥爲藥謂斯四諦也
그러하니라. 아난아, 애구(愛求)의 인연으로 수(受)가 있고, 수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고, 유의 인연으로 생(生)이 있고, 생의 인연으로 노사우비고(老死憂悲苦) 등, 뜻에 맞지 않는 번뇌[不可意惱]가 생기나니, 이렇듯이 구족(具足)하고도 으뜸가는[最] 고통의 무더기[苦陰]가 생기느니라.[이들 다섯 가지 사안[五事]이 차례차례 인(因)이 되어 주는 것을 습(習)이라 하고, 이 다섯 사안[五事]이 고통인 줄 아는 것이 곧 고제(苦諦)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태(胎)에 드는 고통에 속하고, 생로(生老)와 비뇌(悲惱)는 진짜 고통의 무더기[苦藪]이다.]
019_0227_c_10L如是阿難從愛求因緣受受因緣有從有因緣生從生因緣老不可意惱生如是爲具足最苦陰如是五事展轉相因則名習也知五事苦爲苦諦也愛別離苦在有胎苦生老悲腦眞爲苦藪也
아난아, 이 습(習)이 생긴 이후로는,[문구[句]가 도치(倒置)되었으니, 바르게 말하면 “습(習)을 좇아 고(苦)가 생겼다.”고 해야 한다.] 아난아, 생(生)의 인연으로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것을 좇아 저것이 이루어진다 하였느니라.[그러므로 성현[聖]의 말씀을 좇아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좇아 행을 쌓아서 공[德]이 이루어지면 노사(老死)가 생기느니라.]
019_0227_c_14L從是有習句倒也言從習有是苦也生因緣阿難爲老死是故說是爲從是致有是是故從聖說從癡致行德生有是老死
아난아, 이런 사유로 분명한 것은 생(生)의 인연으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이니라.[분명(分明)하다 함은 체실(諦實)하고도 요요(了了)하게 습(習)을 알았다는 뜻이다. 인연(因緣)이라고 한 것은 모두가 습(習)을 가리킨다. 머지않아 거슬러 다하는 법[反盡]을 설하시려고, 다시 습(習)을 몰아다가 하나로 모으셨다.]
019_0227_c_16L當從是阿難分明爲生因緣老死分明者諦了了知習也諸言因緣皆習也將欲反盡故更椎習倂之也
아난아, 만일 태어남[生]이 없다면 물고기[魚]나 물고기의 종자[魚種]도 없을 것이요, 날짐승[飛鳥]이나 날짐승의 종자[飛鳥種]도 없을 것이요, 모기⋅등에[蚊虻]나 모기⋅등에의 종자[蚊虻種]도 없을 것이요, 용(龍)이나 용의 종자[龍種]도 없을 것이요, 신(神)이나 신의 종자[神種]도 없을 것이요, 귀(鬼)나 귀의 종자[鬼種]도 없을 것이요, 사람[人]이나 사람의 종자[人種] 등, 각각의 종자가 모두 없을 것이니라.[만일 진제(盡諦)를 깨달아서, 태어나는 이가 없어지면 어찌 오도(五道)가 생길 수 있으랴.]
019_0227_c_17L阿難無有生爲無有魚魚種無有飛飛鳥種爲無有蚊蝱蚊蝱種爲無有龍龍種爲無有神神種爲無有鬼鬼種爲無有人人種各各種假知晝諦無有生者何從得五道也
만일 어떤 이가 스스로 태어나지도 않고, 또한 태어나게 해 주는 이도 없어서,[진제(盡諦)인 진여심(眞如心)을 알면 태어남[生]도 없을 것이며, 또한 태어나게 하는 이도 없으리라.] 어디에도 아난아, 태어남[生]이 없더라도(없는데도) 노사(老死)가 있을 수 있겠느냐?”[태어남[生]이 없으면 죽음[死]도 없다 하시니, 참으로 거룩하시어라.]
019_0227_c_22L若如有如有生無有亦無應有令有生解盡諦眞如心則生無有也亦無有能令生有一切阿難有生爲有老死不
019_0228_a_01L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하지 못하나이다.”[태어남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는 이 말씀은 참으로 거룩하다.]
019_0228_a_01L阿難白佛言無生則無死誠哉此言也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마땅히 알라.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因)으로 삼고, 이를 연(緣)으로 삼아, 노사(老死)는 생(生) 때문에 있고, 생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노사가 있느니라.[이 인연을 좇는다[從是因緣] 함은 이 인연을 좇아 출발[發也]하고, 태어난다[生也]는 뜻이다. 무(無)의 이치를 이해하여 태어나지 않으면 노사(老死)의 고통도 없어지겠지만 무생(無生)의 도리를 요달(了達)치 못하는 이는 네 가지 습을 따라 생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苦)가 있다. 이 네 가지 습[四習]과 그 그침[止]은 애(愛)를 등지고 돌아서는 애환장(愛還章)에서부터 달라진다. 여기서부터 결구(結句)는 모두 반복(反覆)으로 곱씹어서 성립시킨다.]
019_0228_a_02L佛便告阿難從是因緣當知爲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老死爲生故生因緣阿難爲老死從是因緣從是因緣發也上也解無無生則不老死苦不了無者從四習生便有苦也此四習與止至愛還下異也自足下結句皆反覆而成也
아난아, 생의 인연으로, 노사가 있느니라.[거듭 맺으셨다.]
만일 어떤 이가 묻되 인연이 있어 생(生)하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인연이 있어 생한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생하는가 하거든 유(有)의 인연 때문이다 하라.
019_0228_a_05L生因緣阿難爲老死重結也若有問有因緣生可報有因緣生何因緣生爲有因緣故
아난아, 이런 인연으로, 마땅히 알라. 유(有)가 있기 때문에 유의 인연으로 생(生)이 있느니라.[삼유(三有)의 태(胎)에 들면 다시 태어남[生]이 있나니, 십이인연(十二因緣)이 이어지면서 일생[一世]이 된다.]
019_0228_a_08L從是阿難因緣當知令從是有因緣生墮胎三有更有生十二因連之一世也
아난아, 만일 유(有)의 연(緣)이 없다면 어찌 물고기나 물고기의 종자, 날짐승이나 날짐승의 종자, 모기⋅등에나 모기⋅등에의 종자, 용이나 용의 종자, 신(神)이나 신의 종자, 귀(鬼)나 귀의 종자, 사람이나 사람의 종자, 그 밖의 갖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겠느냐.[진제[盡諦]를 알아서 유(有)가 없어지면 오도(五道)도 없어진다.]
만일 응당 있어야 할 것[有]이 없고, 또한 있게 할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유(有)가 없어도 태어남[生]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8_a_09L阿難因緣無有寧有魚魚種飛鳥飛鳥種蚊蝱蚊蝱種龍種神種鬼種人種各各種解盡無有則無五道也如應應有有亦無有者爲有無有一切阿難爲有生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진여의 진리[眞如諦]를 터득하면,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또한 있게 할 이도 없다 하셨다. 이미 있게 하는 이[有]가 없다는 것으로 기준[辟]을 삼아, 유(有)를 무(無)로 보게 하시고는 “가령 모든 유(有)가 어디에도 유(有)하지 않더라도 태어남[生]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아난에게 반문(反問)하셨는데 아난이 대답하기를 “없사옵니다.” 하고 여쭈었다.]
019_0228_a_14L阿難言得眞如諦則便應有無有亦復有也旣以無有者爲辟有睹無有如令群有一切無有爲有生不反以質阿難阿難云無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생(生)은 유(有) 때문에 있나니, 그러므로 아난아, 유의 인연을 좇아 생이 있느니라.[이 네 가지 습[四習]을 지은 까닭에, 생(生)은 유(有)로써 근본을 삼는다.]
019_0228_a_15L是故阿難從是發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爲有有故從有因緣阿難爲生以作是四習故生以有爲本也
만일 어떤 이가 묻되 유(有)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아난이여, 어떤 인연으로 유가 있는가 하거든, 대답하되 수(受)의 인연이라 하라.
유(有)의 인연이 있는 것이 이렇듯이 분명하니, 수(受)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느니라.[네 가지 수[四受]를 인하여 세 가지 유[三有]가 있다.]
아난아, 만일 수(受)의 인연이 없고, 또한 수가 있게 할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수가 없어도 유(有)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019_0228_a_18L若有問有因緣有便言何因阿難可報爲受因緣有因緣有如是分明爲受因緣有因四受則有三有也受因緣無有亦無有受有一切無有受爲有現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수(受)의 연(緣)이 없으면 유(有)를 수용[受]할 길이 없다. 현(現)은 현(見), 즉 보이다로 읽어야 하니, 어디에도 수가 없더라도 유가 보일 수 있겠는가 하셨다.]
019_0228_a_22L阿難報無有受緣亦無有受現當爲見也一切無受爲有可見不也
019_0228_b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수가 있게 하였나니, 아난아, 수의 인연으로 유(有)가 있고, 유의 인연으로 아난아, 수가 있느니라.[만일 무(無)를 요달[達]치 못하면, 문득 네 가지 습[四習]을 좇는다. 영유수(令有受)는 구절이 도치(倒置)되었으니, 영수유(令受有), 즉 “수(受)로 하여금 있게 하다.”로 고쳐야 한다.]
019_0228_a_23L如是阿難爲從是起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令有受因緣阿難爲有有因緣阿難若不遶無便從四習也令有受倒宜言令受有也
아난이여, 인연이 있어 수(受)가 있는가 하고 누군가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하라. 무슨 인연으로 수가 있는가 하거든 애구(愛求)의 인연이라고 대답하라.
019_0228_b_03L有因緣阿難如是問爲有何因緣有受可報愛因緣
이런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애(愛)의 인연으로 수(受)가 있느니라.[유인연아난수(有因緣阿難受)는 문구(文句)가 도치(倒置)되었으니, 유수인연(有受因緣), 즉 수(受)의 인연이 있는가라고 해야 한다. 팔애심(八愛心)은 곧 태(胎)에 드는 이야기이다.]
019_0228_b_04L是因緣阿難當知爲愛因緣受有因緣阿難受句倒也言有受因緣也八愛心是則受胎也
아난아, 만일 애(愛)가 없으면 수(受)도 없고, 또한 장래의 수[當受]도 없으리라. 어디에도 아난아, 애(愛)가 없어도 수(受)가 있을 수 있겠느냐. 또한 수라는 명칭[受名]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8_b_06L阿難無有愛亦無有受亦無有當受一切阿難無有愛爲有受不亦有受名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무(無)의 도리를 깨달아, 애(愛)가 없어지면 수(受)와 그리고 장래의 수[當受]까지도 없어진다. 그리고 이를 되묻고, 되물으신 것은 그쪽 문장(文章)의 상례(常例)이다.]
019_0228_b_08L阿難言解無無愛則無受及當受也又反反以質文之常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애(愛)가 연이 되어 수(受)가 생기니, 애의 인연으로, 아난아, 수가 이루어지느니라.
019_0228_b_09L如是阿難爲從是發是本從是習從是因緣爲愛因緣受愛因緣阿難爲受
그러하니라. 아난아, 애(愛)의 인연으로 구함[求]이 있고, 구함의 인연으로 이로움[利]이 있고, 이로움의 인연으로 계교함[計]이 있고, 계교함의 인연으로 즐기려는 욕망[樂欲]이 있고, 즐기려는 욕망의 인연으로 구하러 떠남[發求以往]이 있고, (구하러 떠나는) 애착[愛]의 인연으로 버리지 않으려는 인색함[不欲捨慳]이 있고, 버리지 않으려는 인색함의 인연으로 마침내 집[家]이 있고, 집을 가진 인연으로 다시 지킴[守]이 있느니라.[알지 못하면 이것에 의하여 저것이 이루어진다고 거듭거듭 맺으셨다.]
019_0228_b_11L如是阿難爲愛因緣求求因緣利利因緣計計因緣樂樂欲因緣發求以往愛因緣便不欲捨慳以不捨慳因緣便有家以有家因緣便守不解則從是致是也重結也
아난아, 지키려는 행[守行]을 근본으로 하여 도장(刀杖)이 있고, 도장이 있음으로 서로 다툼[鬪諍]과 욕설[言語]과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上下侵欺]과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생기느니라.[다비폐법(多非弊法), 즉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 추악한 법은 지킴[守]으로부터 시작되니, 팔애(八愛)의 첫째이다.]
019_0228_b_15L從守行本便有刀杖從有刀杖便有鬪諍言上下欺侵若干兩舌多非一致弊惡法多非弊法從守始起也八愛之一也
아난아, 만일 근본[本]이 없고, 또한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또한 지키게 하는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지키는 일이 없는데도 도장(刀杖), 다툼[鬪爭], 욕설[語言],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欺侵],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8_b_18L阿難本無有亦無所守亦無有守一切阿難無有守爲有刀杖鬪諍語言上下欺侵若干兩舌多非一致弊惡法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멸제(滅諦)를 알아서 색(色)을 지키지 않더라도 숱한 폐악(弊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고 따져서 진리를 밝히셨는데 대답하시기를 보호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킬 일도 없다고 하셨다. 뒤의 역무(亦無) 두 글자는 구(句)를 포개신 것이다.]
019_0228_b_21L阿難言若解滅不守於色寧致若干弊惡不質以明理也云無所護故無所守也下亦無二字重合句耳
019_0228_c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도장(刀杖), 투쟁(鬪諍) 욕설[語言], 상하의 능멸[欺侵],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생기느니라.[지킴[守]과 지키지 않음[不守], 두 이치[二理]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건만 다시 네 습[四習]을 통틀어 하나의 지킴[守]으로 합치셨다.]
019_0228_b_22L如是阿難是從是發是爲本是爲習是爲因緣刀杖鬪諍語言上下欺侵若干兩舌多非一致弊惡法竝守不守一理已現欲受擧四習合爲守也
아난아, 지킴[守]을 일삼는 까닭에 문득 도장(刀杖), 서로 다툼[鬪諍], 욕설[語言], 상하가 서로 속이고 능멸함[上下欺侵]과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그 종류가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닌[多非一致] 추악한 법[弊惡法]이 있게 되었느니라. 이렇듯 하도 많은 고통들은 오직 오음(五陰)의 좇던 습(習)으로 이루어졌느니라.
019_0228_c_02L從守故阿難便有刀杖鬪諍語言下欺侵若干兩舌多非一致弊惡法如是伹爲多苦爲從五陰習致
[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어늘 색의 실체를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킨다. 도장(刀杖)등, 한두 가지가 아닌 악은 그것이 곧 크게 괴로운 고성제[大苦苦聖諦]임을 알 수 있다. 사유십이인연경(思惟十二因緣經)에 열두 가지 사안[十二事]마다에 모두 사제(四諦)가 있다고 하셨으나 모든 습제(習諦)의 근본을 추구하면 한 두 가닥[一端]이 아니다. 십이지(十二支) 뿐만이 아니라 열여섯 가지 무[十六無]와 무루(無漏)와 습이 다한 두 지혜[習盡二慧]와 다섯 가지 사견[五邪]이 그 근본을 추궁하면, 팔애(八愛)마다에 사습(四習)이 들어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애(愛)란, 더러움의 바다[穢海]인지라. 뭇 악[衆惡]이 모여들거니, 어찌 이 여덟 가지 뿐이겠는가. 여덟 가지만 말씀하신 까닭은 거친 것[麤]만을 거론(擧論)하셨기 때문이다. 욕계(欲界)에 준동(蠢動)하는 무리들이 언제인들 음행(淫行)을 하지 않는 날이 있겠는가. 불환과(不還果)에 이르러야 비로소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019_0228_c_05L不守者不了色而守之也刀杖非一惡卽知大苦苦諦也思惟十二因緣經十二事一一皆有四諦也諸習諦推本非一端也不根十二而止十六無無漏習盡二慧五耶推本叱則八愛盡有四習以此推之則可知也又愛爲穢海衆惡歸焉何但入耶言八擧其麤耳欲界蠢蠢何衣無婬至乎不還乃擧別耳
집[家]의 인연으로 지킴[守]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분명히 알라. 아난아, 집의 인연으로 지킴이 있느니라.[처실(妻室)이 있음으로써 중문(重門)과 순라군[擊柝] 등의 지킴이 필요하게 되었다. 진작부터 검소한 생활[棲遲高岸]을 했더라면 순라군[擊柝]이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누군가[說者]가 말하기를 이는 최상의 말씀[上言]이라 하였다.]
019_0228_c_08L家因緣令有守是故爲說是當從是知阿難爲家因緣守由有妻室則有重門擊柝之守也向使棲遲高岸擊柝何施也故說者云是上言爾也
만일, 집의 인연[家緣]이 없으면 받아들일 일[受]도 이미 없을 것이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집이 있겠느냐. 어디에도 집의 인연이 없어도 집이 있을 수 있겠느냐. 도장(刀杖), 투쟁(鬪爭), 시비[語言], 상하의 능멸함[上下相欺], 갖가지 이간질[若干兩舌] 등, 많아서 한두 가지가 아닌 악법이 생길 수 있겠느냐?”
019_0228_c_10L家因緣無有已無有受當何因緣有一切家因緣無有寧有家不寧有刀杖鬪諍語言上下欺侵若干兩舌多非一致弊惡法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 색[色法]을 받아들이지[受] 않는 사람에게는 집[家]을 가질 연(緣)이 없나니, 집을 가질 연이 없거늘 무슨 지킬 일이 있기에 큰 칼[刀]을 간수해야 하는 큰 고통[苦集]이 있겠는가.]
019_0228_c_14L阿難言不受此色人無緣有家無緣有家寧有守而惜刀大苦集不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유(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지켜야 할 일[令有守]과 지키는 일[爲守]이 있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집 때문에 지킴이 있느니라.[첫머리의 종시유(從是有)는 집[家]을 가짐으로써 지키는 일[守]이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 그 이유는 집이란 본래 습의 뭉치[習結]이기 때문이다. 집을 인하여 지킴[守]이 생기고, 지킴은 다시 집을 인하여 생긴다 하시니, 역시 전도된 상황을 교차(交叉)로 밝히신 것이다.]
019_0228_c_15L如是阿難從是有是本從是習從是因緣令有守爲守故從家阿難令有守上從是有者從家起有守也以家本習結因家守成守因於家亦顚倒相明也
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 때문에 집[家]이 있게 되었나니, 이 인연으로 인하여 이것[家]이 있느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 때문에 집이 있느니라.[머리속[腦]에 색욕(色欲)이 간직되어 떠나지 않기[思存不捨]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집[家]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이것을 연(緣)하여 저것이 있다 하셨다.]
019_0228_c_18L難捨慳因緣令有家從是因緣有是當從是因緣知阿難爲難捨慳因緣令有家腦因色欲思存不捨由之爲家也故曰是緣有是也
아난아, 만일 버리기 어려워하는 인색함[難捨慳]이 없다면 또한 얻음[受]도 없을 것이다. 이미 얻음이 없더라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난아, 어디에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이미 없어졌는데도 집[家]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8_c_20L若難捨慳阿難無有亦無有受已無有受寧當有慳難捨不一切阿難難捨已無有寧當有家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얻음(受 : 取支)이 없다면 수를 버릴 필요조차도 없으리라. 이미 수가 없거늘 무슨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이미 없어졌다면 어찌 집[家]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019_0228_c_23L阿難白佛無有無有受不捨受也已無有受寧當有慳難捨慳難捨已無有寧有家不
019_0229_a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집[家]을 누리게 되었나니, 아난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 때문에 집이 있게 되느니라.[이[是]라 함은 곧 아까워하는 마음[慳惜心]이다.]
019_0229_a_01L如是阿難從是起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受家慳難捨故阿難令有家是是慳惜心也
가서 받음[往受]을 인하여, 아난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인연을 좇아 저것이 생긴다 하였느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얻음을 위해 떠났음으로 얻음[受]이 있고, 얻음[受]을 좇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있느니라.[연인[好仇 : 戀人]을 연모(戀慕)함이 지나치게 간절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얻으러 떠남[往受]을 인하여 버리기 어려워함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얻으러 떠남[往受]을 인하여, 이 인색함[慳]이 생긴다고 하셨다.]
019_0229_a_03L從往受阿難因緣令有慳難捨是故有是言亦從是因緣有是如是當從是因緣阿難可解爲從發受從是受慳難捨卽彼好仇因之甚惜故曰往受令有難捨也是故上說說從往有是慳也
아난아, 만일 얻으러 떠남[發受]이 없다면 어찌 얻음[受]이 있을 것이며, 또한 무슨 인연으로 얻으러 떠나겠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얻음도 떠남도 모두 없어도 아까워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이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9_a_07L發受無有寧有受亦何因緣往受一切阿難無有發受寧當有慳難捨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얻으러 떠남[發往]이 없다는 도리를 알면 얻음[受]과 그리로 가는 일이 모두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얻으러 떠나지 않았거니, 어찌 인색하고, 아까워하는 마음[慳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출발[上]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阿難白佛言解無發往則不有受與至彼也普不往受豈慳惜也本未上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기점[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慳難捨]은 얻으러 떠남[發往受] 때문이요, 얻으러 떠나는 인연이 있는 까닭에 아난아, 다시 아까워서 버리기 어려워함이 있느니라.[찾아떠남을 인하여 다시 습(習)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버리지 못하기에 이른다.]
019_0229_a_10L如是阿難從是起從是本從是習是因緣令慳難捨爲發往受故亦爲有因緣故阿難令有慳難捨從發習發遂至不捨也
아난아, 욕탐(欲貪)의 인연으로,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아난아,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욕탐의 인연으로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음탐(淫貪)이 안으로 채워지면, 겉으로 넘쳐 나와 끝내 그쪽으로 치닫는다.]
019_0229_a_14L欲貪因緣阿難令有發是故說是當從是因緣阿難爲從欲貪因緣令發婬貪內足則發而適彼也
아난아, 만일 욕탐(欲貪)이 없다면 이미 연(緣)도 없어졌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욕탐이 생길 수 있겠느냐. 어디에도 아난아, 욕탐이 없어도 찾아 떠남[發往]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9_a_16L若欲貪阿難無有已無有因緣亦何因緣當有欲貪一切欲貪無有寧當有發往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어떤 수행인이 음욕(淫欲)의 인연이 원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어찌 다시 음탐(淫貪)을 일으킬 계교를 하겠는가. 어디에도 탐심(貪心)이 없다면 어찌 얻으러 떠남[往受]이 있겠는가. 무릇 위에서 없다[無有]고 하신 것은 모두가 그 인(因)이 없다는 것을 밝히신 말씀이요, ‘일체(一切)’ 이하는 인(因)과 연(緣)이 모두 없다는 말씀이다.]
019_0229_a_18L阿難言若行人解婬無有因緣亦何計當有淫貪耶普無貪心何有往受也凡上云無有皆明因無有也一切已下皆以因及緣無有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찾아 떠남[發]을 인하여 욕탐(欲貪)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욕탐을 좇아 찾아 떠나거나,[영발위유욕탐(令發爲有欲貪)은 문구가 도치[句倒]되었다.] 이미 떠났느니라.
019_0229_a_20L如是阿難從是發從是本是習從是因緣令發爲有欲貪故爲從欲貪阿難令發令發爲有欲貪句倒也已發
019_0229_b_01L찾아떠남[發往]으로써 욕탐(欲貪)이 있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욕탐이 있느니라.[이 찾아 떠나다[發往]는 꼭 만나고자 계교(計較)해서 떠나려는 길이다. 『음지입경陰持入經』에서는 가게 되기를 원하는 모습[願得往相]이라 했으니, 곧 셋째 계교이다. 고설(故說)이라 함은,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기를 계교[計]를 인하여 탐이 생긴다[因計生貪]고 하신 것을 지칭하신다.]
019_0229_a_22L從發往令有欲貪是故爲說當從是因緣爲從發往令有欲貪此發往計挍欲相造也陰持入曰願得往相也卽第三計也故說者是故上說因計生貪也
아난아, 만일 찾아떠남[發往]도 없고, 또한 찾아 떠나가게 하는 이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떠나는 일이 없어도 탐욕이 생길 수 있겠느냐?”
019_0229_b_02L若無有發往阿難亦無有令發往一切阿難雖發往若有貪欲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가령 무(無)의 도리를 알아서 머무를 요인이 없어졌더라도 또한 탐욕에 머무를 생각이 날 수 있겠느냐 하셨다.]
阿難言假解無無住之因亦住貪有生不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씨앗[有]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탐욕(貪欲)은 찾아 떠난[發往] 때문이요, 찾아 떠난 인연으로 다시 욕탐(欲貪)이 있느니라.[무(無)의 이치를 알면 위와 같이 되겠지만 만일 알지 못하면 위와 같이 습(習)을 이룬다. 모든 결구(結句)의 반복(反復)에는 모두 발왕(發往), 두 글자가 빠졌다.]
019_0229_b_04L如是阿難爲從是有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貪欲爲有發往因緣令有欲貪解無如上若不解則如上爲習也於皆結句反復少發往二字也
아난아, 이로움[利] 때문에 찾아 떠남[發往]이 있느니라. 이런 까닭에 말하노니, 이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이로움의 인연을 좇아 찾아 떠나게 되느니라.[이익을 좋아함이 심하면 찾아갈 생각이 머리에 남는다. 시(是)는 위에서 말한 시(是)니, 이익이 곧 찾아떠남[往]의 연(緣)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019_0229_b_07L從是利故阿難令發往爲從是說是當從是因緣知爲從利因緣令發往好利甚則思存往也是上說是當了利爲往緣也
아난아, 만일 이로움이 없다면 또한 구하러 떠나는 일도 없을 것이거늘 다시 무슨 인연으로 구함이 있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이미 이로움이 없어도 찾아 떠남[發往]이 있겠느냐?”
019_0229_b_09L阿難以無有利亦無有求亦何因緣有求一切阿難已無有利寧當有發往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이익을 알줄 알았더라면 구해야 할 이익도 없을 것이어늘 다시 무슨 이익이 있어 구할 연(緣)이 되겠는가. 어디에도 이로움이 없거늘 어찌 찾아떠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
019_0229_b_12L阿難言旣解知利則無有利之求何當有利求因緣耶普魚有利豈有發往乎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유(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찾아 떠나감[發往]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요, 이익 때문에 다시 구하러 떠남[發求]이 있느니라.
구하는 인연 때문에 이익이 있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노니, 이 인연을 좇아 분명히 알라. 구하게 하는 인연은 이로움이니라.[이 팔애장[八愛章]에서 혹은 고설(故說)이라 하고, 혹은 시설(是說)이라 하였으나 뜻은 다르지 않으니, 위 문장에 이미 갖추어진 사실을 이 두 방식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고운(故云)과 시고(是故)를 문장의 맨 첫머리에 놓으셨다.]
019_0229_b_13L如是阿難從是有從是本從是從是因緣發往利故利故亦發求從求因緣故令有利故說是從是因緣當知令從求因緣有利此八愛或言故說或云是說義不異也以具文於上此二解之故云是故首言爾也
아난아, 만일 구해야 할 인연이 없다면, 또 무슨 인연으로 구할 것이며. 또한 무슨 인연으로 구하겠는가. 어디에도 아난아 구하는 일이 없는데도 이익을 보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29_b_17L若求因緣阿難亦何因緣有求亦從何因緣求阿難以無有求若有見利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구하는 일이 본래 그 요인조차 없다면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어디에도 구하는 일이 없다면 이익을 볼 수 있겠는가 하셨다.]
019_0229_b_19L阿難若求本無所因亦何得求也善無求者利可見不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이로움[利]이 있는 것은 구했기 때문이요, 구하는 까닭에, 아난아, 다시 이로움이 있느니라.[혹은 찾아떠남[發]이라 하고, 혹은 생함[生]이라 하고, 혹은 기점[起]이라 하고, 혹은 존재[有]라 하셨으나 뜻은 같은데 글만 다르다.]
019_0229_b_20L如是阿難從是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爲有利爲有求故求故阿難令有利或曰發曰生或曰起或曰有義同文別耳
사랑함[愛]을 좇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노니, 이를 좇아 분명히 알라. 사랑함을 인하여 구함[求]이 있느니라.[사랑하는 마음[愛心]이 안[內]에는 없으나 구하노라면 생긴다.]
019_0229_b_23L從愛故令有求是故說當從是知令從愛求愛心內無求之由生
019_0229_c_01L아난아, 만일 애(愛)가 없으면 또한 구함[求]도 없을 것이요, 또한 구하는 인연이 없으면 애도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아난아, 애가 없더라도 구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29_c_01L阿難無有亦無有求亦無有因緣求亦無有一切阿難愛無有寧當有求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인연법을 설하신 여러 대목[章]에서 오직 이 한 대목[一說]만이 위의 애수장(愛受章)과 다르니, 卽 약무유애(若無有愛) 밑에 무유애(無有愛)를 두 번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데서는 일체(一切) 위에는 인(因)을 말씀하시고, 일체 밑에는 인(因)과 연(緣)을 말씀하셨었다.]
019_0229_c_03L難言諸因緣唯此一說反上愛受中卽若無有愛下曰二無有愛耳餘皆在一切上說因一切下說以因及緣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사랑함[愛]이 있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고, 구함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사랑함이 있게 되느니라.[사랑함[愛]이 불어나서 여덟이 되었다.]
019_0229_c_05L如是阿難從是有從是本從是從是因緣有愛故令有求求故令有愛愛之滋長成乎八也
아난아, 위에서 말하기를 욕애(欲愛)와 그리고 유애(有愛), 이 두 가지는 모두 통(痛)에서 만난다 하였거니와,[이는 애(愛)의 근본을 추궁하시는 문장의 끝이다. 욕애(欲愛)와 색애(色愛) 외에 다시 애(愛)가 있어 하나가 아니다. 경(經)에 이르시기를 마음에 가합(可合)해 하는 것이 욕(欲)이라 하셨다. 이 두 애[兩愛]는 통(痛)으로써 근본[本]을 삼고, 습[習]을 삼고, 인연(因緣)을 삼아 견해[解]를 내되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서로 만나다[相會] 함은 서로 인한다는 뜻이다.]
019_0229_c_07L阿難欲愛亦有愛二皆痛相會此推愛本文終也欲愛色愛也亦有愛非一也經曰心可則爲欲也是兩愛痛爲本爲習爲因緣從痛發解如有則無也相會猶相因也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묻되 통(痛)의 인연(因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어떤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경(更)의 인연으로 있다 하라.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마땅히 알라 경(更)의 인연으로 통(痛)이 있느니라.[질문을 던져 대답케 하셨으니, 여섯 가지 경[六更]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통[三痛]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 하셨다.]
019_0229_c_09L有痛因緣阿難若有問是便言何因緣有便言因緣有從是因緣阿難亦當知令更因緣痛設問敎答也有六更故三痛由生也
아난아, 만일 눈[眼]이 경촉(更觸)하지 않고, 또한 경촉하는 이도 없고, 또한 눈이 스스로 경촉하지도 않아서, 어디에도, 아난아, 눈이 경촉하지 않더라도 눈이 홀로 경촉[更觸]하는 일이 있겠느냐. 또한 눈 자체의 인연으로 즐거움[樂]이나 괴로움[苦]이나 혹은 불고불락(不樂不苦)이 생길 수 있겠느냐?”
019_0229_c_12L阿難眼不更亦無有應當更眼亦不得更一切眼已不更寧有眼更不亦有眼當因緣生不爲樂爲苦爲亦不樂亦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눈의 지각[眼知]이 경촉(更觸)하지 않고, 또한 눈의 경촉이 되어 주는 이도 없다면 어디에도[一復] 경촉이 생길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눈[普眼]이 이미 경촉하지 못한다면 어찌 눈이 경촉하는 인연으로 세 통각(痛覺 : 感覺)이 생긴다고 하겠느냐.” 하셨다.]
019_0229_c_16L阿難應若眼知如有不更眼亦無有應作眼更者一復不得此更也普眼已不更豈有眼更因緣生三痛不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눈[眼]이 통(痛)을 경촉(更觸)케 하고, 눈이 경촉하는 인연으로, 아난아, 눈이 통(痛)을 감지(感知)케 하나니, 귀[耳]도 그렇고, 코[鼻]도 그렇고, 혀[舌]도 그렇고, 몸[身]도 그러하니라.
019_0229_c_17L如是阿難從是有從是從是習從是因緣令眼更痛眼更因緣阿難令眼知痛耳亦如是鼻亦如是舌亦如是身亦如是
아난아, 만일 마음이 경촉하지도 않고, 또한 경촉할 상대도 없고, 또한 마음으로 경촉할 인연도 없어서, 어디에도 아난아, 마음이 경촉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경촉이 인연(因緣)을 찾아가서 통수(痛受)가 생기게 할 수 있겠느냐. 생긴다면 그것은 즐거운 통각[樂痛]이겠느냐. 괴로운 통각[苦痛]이겠느냐. 불고불락의 통각[不苦不樂痛]이겠느냐?”
019_0229_c_20L心不更亦無有當更亦無更因緣令心更一切阿難心無有更寧當有心更入因緣令有痛不令有樂不令有苦不令有不苦不樂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
阿難應
019_0230_a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통(痛)의 인연으로 경촉(更觸)이 있고, 경촉(更觸)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통(痛)이 있느니라.[경촉(更觸)에 세 통[三痛]이 있다는 것을, 아난을 불러 거듭 맺어 보이시니, 지난날의 전도상[於比倒相]을 분명하게 맺어 말씀해 주셨다.]
019_0230_a_01L如是是爲有是爲本是爲習是爲因緣痛令有更心更因緣阿難令有痛更卽有二痛乎阿難重結於比顚倒相明結言也
만일 어떤 이가 묻되 무엇인가의 인연이 있어 경촉(更觸)이 생기는가 하거든, ‘있다.’고 대답하라. 어떤 것이 경촉의 인연인가 하거든 명자(名字)가 그 인연이라 하라. 이로써 아난아, 분명히 알라. 명자의 인연을 좇음으로 인하여 경촉이 있느니라.[경촉(更觸)의 근본은 의당 육입(六入)이어야 하거늘 지금 명자(名字)라 하신 까닭은 육입(六入) 그대로가 육경(六更)으로 나타났고, 육경 그대로가 육정(六情)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명색(名色)에서 나왔다고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출경(出經 : 역경)할 때에 순서를 잃었을 것도 같다.]
019_0230_a_04L若有問有因緣更不爲有何等更有因緣爲名字因緣當從是阿難可知令從名字因緣更更本應是六入而今是名字六入同出六更六更同出六情大情之本則名字是故想曰名色也亦應出經時失次
만일 곳곳마다[從所處]의 유정[有]이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리[應受]면 명신취(名身聚)가 이루어지느니라.[문구가 도치[句倒]되었으니, 간곳마다[在所處]에 있는 네 가지 몸[四身]이라 해야 한다. 간곳마다[所處]라 함은 곧 삼유(三有:三界)이다. 머지않아 무색계[無色]의 법을 말씀하시려고 응하여 누림[應受]과 유(有)를 말씀하셨으니, 누림[受]이 있고, 유(有)가 있으면 곧 명색(名色)이라 이름한다.]
아난아, 만일 곳곳마다의 유(有)가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릴 수[應受]가 없어도 명자(名字)가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30_a_08L若從所處有亦從所處應受令名身聚有句倒云在所處四身爲在所處三有也將欲說無色故云受之眞有也有受有有乃有名色也阿難從所處有亦從所處應受無有爲有更有名字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어떤 이가 수(受)와 유(有)가 모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경촉(更觸)이 명자(名字)를 인하여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
019_0230_a_11L阿難言如有知無受之與有豈有更而因名字耶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곳곳마다의 유(有)가 곳곳마다에서 응하여 누림[應受]이 없고, 명신(名身)이 있을 수 없어도 상대하여 경촉(更觸)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019_0230_a_12L阿難從所處有亦從所應受無有令名身有無有寧當有對更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반복해서 밝히셨으니, 위 구절에는 ‘이르시기를 어찌 경촉(更觸)이 명자(名字)를 인해서 생기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고, 여기서는 이르시기를 ‘어찌 명자가 경촉에게 인(因)이 되어주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다.]
019_0230_a_14L阿難言反覆明之上句云豈有更因名字不此句言寧有名字與更對爲因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도 아난아, 명자(名字)와 그리고 색신(色身)이 없어도 경촉[更]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한 그를 좇아 생길 경촉이 있겠느냐?”
019_0230_a_15L一切阿難名字亦色身無有爲有更不爲從有更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위 세 대목에서는 반문(反問)하시고, 이 한 물음에서는 ‘어디에도 명색(名色)이 없거늘 경촉[更]이 어디로 좇아 생기겠느냐.’ 하셨으니, 대체로 천축의 말[天竺言]이 원래 이렇게 순박[質]한지라 지나치게 상세하다고 탓하지 말라.]
019_0230_a_16L阿難言此上三反問於此一問云普無名色何從有更乎天竺言質無慊其悉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출발점[發]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因緣)으로 삼아, 경촉(更觸)으로부터 명자(名字)가 생기게 되었거니와 명자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경촉이 있느니라.[위 여러 곳에서 처음에는 ‘이 인연으로 이것이 있다[是因緣是有].’ 하시고, 다음에는 ‘이것이 없으면 취할 것도 없다[無是則無取].’ 하시고, 뒤에는 ‘찾아 떠나고 익힌 인연[發習因緣]이라.’ 하신 까닭은 바로 위 구절의 ‘이것을 좇아 저것이 있다[從是有是].’ 하신 말씀을 성립(成立)시키기 위했기 때문에 문세(文勢)가 모두 이렇다.]
019_0230_a_17L如是阿難爲從是是發爲從是是本爲從是是習爲從是是因緣從是是更令從是名字字因緣阿難令有更凡上云是因緣是有次云無是則無取後云從發習因緣卽成上句從是有是故皆如是也
019_0230_b_01L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묻되 명자(名字)의 인연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어떤 것이 명자의 인연인가 하거든 대답하되 식(識)의 인연으로 있다 하라. 이런 인연으로, 아난아, 분명히 알라. 식의 인연으로 명자가 있느니라.[중음(中陰)의 음식(淫識)이 태(胎)에 들면 바로 오음(五陰)이 생긴다.]
아난아, 만일 식(識)이 어머니의 배에 들지 못하더라도 명색(名色)이 정(精)을 따라 머물 수 있겠느냐?”
019_0230_a_21L阿難有名字因緣設有問便對爲有何因緣名字識因緣爲有當從是因緣阿難解知爲識因緣名字中陰淫識遂處胎有五陰若識阿難下母腹中當爲是名色隨精得駐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가령 중음(中陰)의 음식(淫識)이 없더라도 정(精)이 홀로 가서 태(胎)에 의지해 머물러서 명색(名色)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느냐 하셨다. 명색 이후로 유(有)까지는 중세(中世)요, 식(識) 이전은 전세(前世)니, 삼세(三世)에 걸쳐 십이지(十二支)가 이루어진다.]
019_0230_b_02L阿難言設無中陰淫識當有猗精住成名色不名色已後至有中世也識已前前世也三世成十二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식(識)이 어머니의 배에 들었으나 머무르지 못하더라도 명자(名字)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아난이 여쭙되 모르겠사옵니다[不識] 하였다.
019_0230_b_04L若識阿難母腹已下不得駐去爲有名字得致不阿難言
아난아, 만일 본래 남아(男兒)였거나, 또는 여아(女兒)였다가 어느덧 무너졌거나 죽어서 형체가 없어졌더라도 명자(名字)가 자라나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겠느냐. 아난이 여쭙되 없사옵니다.”하였다.[만일 중음(中陰)이 정(精)을 따라 태(胎)에 들어갔더라도 한 두 이레 만에 죽었다면 어찌 이 몸[身]이 있을 수 있겠느냐. 혹 남녀의 근[性根]이나 목숨[命根]이 이루어졌더라도 한 순간 떨어져서 태(胎)가 상했다면 어찌 오음의 몸[五陰身]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하셨다. 모태(母胎)에 드는 瞬間을 음식(淫識)이라 하고, 한두 이레[一二七日]를 지나서 남녀의 근(根)이 나누어지면 이때부터를 명자(名字)가 形成된다고 한다.]
019_0230_b_05L阿難爲本若男兒若女兒已壞已亡令無有爲得名字令增長令所應足不難言縱使中陰乘精入胎或一二七日而亡豈有此身耶或成根男女及命便墮傷胎寧得五陰身不乎自下母胎則淫識也一二七日男根女根已是名字之成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존재[有]로 삼고, 시작[起]으로 삼고,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 이를 습(習)으로 삼고, 이를 인연으로 삼아, 명자(名字)는 식(識)을 좇아 생기고, 식의 인연으로 아난아, 다시 명자가 있느니라.[매양, 결구(結句)에 이르러 거듭 첩[輒重]하신 까닭은 명색(名色)에 의하여 식(識)이 생기고, 식(識)을 연(緣)하여 명색(名色)이 생긴다는 것을 곱씹어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019_0230_b_09L如是阿難是起有從是本從是習從是因緣名字從識識因緣阿難爲有名字每至結句輒重者云名色從識注識爲名色因緣反覆言也
아난아, 누군가가 묻되 식(識)의 인연(因緣)이 있는가 하거든 얼른 대답하되 있다 하라. 무슨 인연으로 식이 있는가 하거든 명자(名字)의 인연으로 식이 있다 하라.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분명히 알라. 명자의 인연으로 식이 있느니라.[식지(識支 : 惟識)의 근본[本]을 밝힌 것이다. 식지의 근본은 의당 행지(行支)이어야 하거늘 지금 명자(名字)라 한 까닭은, 오대(五大)를 식(識)이라 하고, 육대(六大)를 어리석음[癡]이라 하는데 육대(六大)의 어리석은 마음[癡心]으로 음행(淫行)을 행(行)하면 음행하는 동안의 심식(心識)이 모두가 육대(六大)에서 나왔기 때문에 명자(名字)라 하느니라.]
019_0230_b_12L有因緣阿難若問便對從何因緣有識名字因緣有識當從是因緣阿難分別解爲名字因緣識惟識之本本當是行而今言名字五大名識也卽六大癡也有六大癡心作淫行淫行中有識共出六大故名字也
아난아, 만일 식(識)에 명자(名字)가 머무르지 못하거나 식에 머물렀더라도 무럭무럭 자라지도 못했어도 능히 생⋅노⋅사 등의 괴로운 습[苦習]을 이룰 수 있겠느냐?”
019_0230_b_16L阿難識不得名字駐已識不得駐得增上爲有生能致有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문장을 살피건대 총명한 또래[上乘]의 망식(望識)이 태(胎)에 들어 명자(名字)의 지위[身]를 차지한지 혹은 칠일, 혹은 삼칠일 만에 근(根)이 이루어지자 모태(母胎)가 손상되었더라도 여전히 자라나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만일 그렇더라도 위 말씀들을 완벽하게 끝낸 것은 아니다. 또 여기서 ‘명자가 없다’[無名字]한 것은 죽었다[無常]는 말이지, 고제(苦諦)가 다했다는 말씀은 아니다. 지금 행(行)이 빠졌고, 문장 또한 어지러우니, 아마도 경을 번역[出經]할 때에 교정[皮缺]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대로 회통(會通)한다면 어리석음[癡]이 없어지면 망행(望行)이나 망식(望識)도 없어진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대저 모든 어두움[萬冥]은 어리석음에서 생기고, 모든 밝음[萬照]은 지혜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어리석음으로 근본을 삼으시고, 지혜[諦]로써 대안[對案]을 삼으셨다.]
019_0230_b_20L阿難言省文有似上乘望識入䏩受有名字身或七日或三根成而胎傷寧滋長成十二緣不也若當爾者與上不畢也又此說無名字是無常之說非盡諦言也而今少行又文亂似出經時未皮缺也就而通之者云大不信無癡豈得望行與望識不也夫萬冥存乎癡萬照存乎慧故此經以癡爲本以諦對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를 태어남[致]으로 삼고,[치(致)는 태어남[生]이니, 육대(六大)로부터 망식(望識)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를 근본[本]으로 삼고,[망식(望識)은 육대(六大)로 이루어졌다.] 이를 습(習)으로 삼고,[치(癡)를 훈습하여 식(識)을 이룬다.] 이를 인과 연으로 삼아,[어리석음을 인하여 식의 연[識緣]이 생긴다. 위의 스무 가지 사안[二十事]에서 열여덟 가지 사안[十八]이 모두 그렇다.] 식(識) 때문에 명자(名字)가 있고, 명자의 인연으로 다시 식이 있느니라.[열두 가지 사안[十二事]이 여기에서 끝났다.]
019_0230_b_21L如是阿難從是致致生也從六大生望識也是本望識以六大爲從是習習癡以成識也從是因緣因癡有識緣也上二十事實有十八皆然也
019_0230_c_01L그러하니라. 식(識)의 인연으로 명자(名字)가 있고, 명자의 인연으로 식이 있거니와 여기서 모두 그치노니, 명자의 풀이[說名]도 여기서 그치고, 대답하게 함[對]도 여기서 그치노라.
다툼의 싹수[諍本]가 나타나거든 지혜로운 이를 좇을지언정 받아들이지 말라.[명자(名字)의 풀이를 반복하시고는 맺으시기를 여기서 그치라[止是] 하신 까닭은 열두 가지 사안[十二事]의 풀이가 이 명자(名字)를 설하신 곳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대답도 여기서 그치라[對止是] 하심은 위 여러 곳에서 이르시기를 만일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 하셨던 일들이다. 다툼의 근본[諍本]이 엿보이다 함은 세 가지 삿된 소견[三耶見]이니, 삿된 소견에 떨어지면 정관(正觀)을 잃기 때문이다. 정관이란 네 가지 지혜[四慧]이다. 현(現)은 현(見), 즉 “엿보이다.”로 고쳐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다툼의 근본[諍本]이 보이거든 지혜로운 이를 좇을지언정 받아들이지 말라 하셨다.]
019_0230_b_23L識令有名字名字因緣有十二事窮此是如是爲識因緣名字名字因緣識止是說名止是處對止是諍本現當從有慧莫受稱名字反覆而結之云止是者十二事終是說名字處也對止是者上諸云便對也諍本見者三耶見也墮耶見則失正觀正觀四慧也現當見也故曰諍本見當從慧莫受也
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통(痛)을 계교하여 신(身)이라고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이 법은 정히 본래의 부처님이시옵기에 근본이신 부처님께 스스로 귀의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시와 저희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말씀을 분명히 이해[解利]하게 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착하고도 착하도다.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현자(賢者) 아난이 화답하고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019_0230_c_05L幾因緣阿難爲計痛是爲身難言是法本從佛是法正本佛自歸本佛願令佛說令從佛說是說受解佛言阿難善哉善哉諦受念便說賢者阿難應唯然從佛聞
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통(痛)을 신(身)이라 여기고,[세 경[三更 : 三觸]을 잃을까 근심하다가 어리석게도 신(身)이라고 여기는 허물에 빠졌다.] 혹, 어떤 이는 통(痛)을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다만 신(身)의 경법(更法)과 통법(痛法)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며,[단위(但爲) 이상은 통(痛)이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신경통법(身更痛法)이라 한 것이 누분포(漏分布)에서 삼통(三痛)은 신경지(身更知)라 하신 것과 같다. 위에서는 삼통 모두가 경지(更知)한다 했으니, 신경(身更)이 다르다.]
019_0230_c_09L佛便說是阿難有見是痛爲身失憂三更而愚墮爲身或有見是痛計非身但爲身更痛法見是爲身但爲已上稱痛而云無也此云身更痛法與漏分布三痛身更知同也上三痛亦皆云更知也以身更爲異耳
혹 어떤 이는 신(身)이 곧 통(痛)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그렇게 보지 않고, 또한 통법(痛法)도 아니니, 통법을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고, 다만 신만으로써 신이라 여기느니라.[단위(但爲)이상은 亦是 위 두 가지 사안[事]이 없다고 하셨다. 견(見)은 뒤의 해석(解釋章)에는 깨닫지 못하다[不覺]로 되었고, 뒤의 세 가지 사안[三事]을 묻고 대답하실 때에는 또 보다[見也]로 되었으니, 깨닫다[覺]와 보다[見]는 뜻은 같지만 쓰임새[有爲]는 다르다. 불(不)은 그렇게 알지 않았다는 뜻이니, 바르게 깨달았다는 말이다. 『누분포경(漏分布經)』에 이르시기를 세 통[三痛]은 마음[心]과 경(更)과 지(知)라 하신 것과 그 사안이 비슷하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당 말하기를 세 통[三痛]의 각지(覺知)가 신(身)을 말미암아 생긴다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하기를 세 통[三痛]의 경촉(更觸)이 신(身)을 말미암아 생긴다 하신 것은 여섯 감각[六覺]과 여섯 경촉[六更]의 사례이다. 이 아래에도 종종 세 통의 병폐[三痛病]를 말씀하셨으나 그 문장이 빠지고, 뒤섞였으니, 지혜가 얕은 이들이 이 세 가지 사안의 중복(重複)된 논리를 차례대로 해설[解]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019_0230_c_13L或一身爲是痛見不爲身亦不爲痛法見痛法計是不爲身爲見是身爲身但爲已上亦稱上二事云無也見後解中云不覺乃後問解三事亦云見也覺見義同耳但有有爲異也不不解也覺悟之稱也漏分布曰三痛心更知似其事也若不爾者宜言三痛覺由身也上言三痛更由身也猶六覺六更也此下散說爲三痛病其文亡而錯得下慧心解三事之重釋以次此非其事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가 통(痛)을 계교하여 신(身)이라 여긴다하거든,[통(痛)을 말미암아 식신[身]을 찾는 공부니, 이는 뒤 도혜장(道慧章)의 통을 푸는 논리[解痛文]이다. 그러나 그 차례를 거슬러 꾸미면 그것은 곧 통병(痛病)이 된다.] 이렇게 말하라.[이 문장의 뜻은 위의 痛을 계교하여 身이라고 여기는 이[計痛爲身者]를 집착한 사람으로 가정[辟:假定]한 것이다. 아래 색(色)을 거듭 풀이하는 장[色重解章]에서는 빈주(賓主)의 격식, 즉 문답의 형식을 쓰지 않았다.]
019_0230_c_18L阿難或爲在是痛計爲身由痛而修身也此卽下道慧解痛文也而逬續此爲痛病也當爲對說此文意稱上計痛爲身者辟而執之也下色重解不稱爲賓主也
현자(賢者)여, 이 통(痛)에는 세 또래[三輩]가 있나니, 낙통(樂痛)과 고통(苦痛)과 불고불낙통(不苦不樂痛)이다. 현자여, 그대는 이 세 가지 통에서 어느 통을 신(身)이라 여기는가 하라.
019_0230_c_20L是痛賢者爲三輩有樂痛有苦痛有不樂不苦痛三痛見何痛應作身
019_0231_a_01L아난아, 낙통(樂痛)이요 할 때에는 이때에 두 통[二痛]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니, 고(苦)와 불고불낙(不苦不樂)이니라. 아난아, 이때엔 다만 낙경(樂更)뿐이려니와 낙통(樂痛)은 항상하지 않고, 괴롭고, 사라지는 법이니라. 아난아, 낙통이 이미 사라져서 신(身)을 떠난 뒤에는 신이라는 계교조차 필요치 않느니라.[장차 몸 없는 도리[無身]를 밝히시려고, 짐짓 이르시기를 통(痛)은 셋이로되 신(身)은 하나뿐이니, 어느 것으로 신이라 하겠느냐 하셨다. 낙통(樂痛)이 신이요 한다면 바야흐로 낙경(樂境)을 즐길 때엔 고(苦)와 불락불고(不樂不苦)는 없으리라. 痛이 셋이어야 하거늘 지금에는 樂痛 하나뿐이라 하니 身 아님[非身]이 더욱 분명하다. 또 흐느껴 우는 이[熙譃]로 하여금 영원함[常]을 관찰(觀察)케 하고, 썩은 시신(屍身)을 진리[諦]로써 관하게 하니, 신(身) 아님이 더욱 분명하다.]
019_0230_c_22L樂痛時阿難是時二痛已爲滅爲苦亦不樂亦不是時但爲樂更樂痛阿難非常要滅阿難痛已滅離身不在身計將時無身故云痛有三而身一何適爲身耶欲言樂痛男身當其親難則無苦與不樂不苦三痛而今一樂非身明矣又令譃觀其常身死敗滅以諦照之復非身明白矣
분명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때에 괴로운 통(痛)의 편(便)이 되면 두 통[兩痛]은 이미 사라졌으리니, 즐거움과 또한 괴로움뿐이니라. 이때엔 다만 괴로운 경촉(更觸)이 괴로움을 느낌[痛]뿐이거니와 아난아, 이 느낌은 항상치 않고, 괴롭고, 다함이 있는 법이니라. 아난아, 괴로운 느낌[苦痛]이 다한 뒤에는 신(身)이 더 이상 경촉해서 알지[更知] 못하느니라.
019_0231_a_04L是如是是時阿難苦痛便時是時爲兩痛已滅爲樂亦是時但爲更苦痛阿難痛非常苦盡法阿難痛已盡身不復更知
아난아, 이때에[낙통(樂痛)과 이론이 같으므로 달리 풀이하지 않는다. 이 대목[此中]의 낙역고(樂亦苦)는 고(苦) 위에 세 글자[三個字]가 빠졌으니, 의당 낙역불락불고(樂亦不樂不苦)라 해야 하고, 편자(便字)는 문맥(文脈)에 따라 경(更)으로 보아야 한다.] 고(苦)도 아니며 낙(樂)도 아닌지라. 어떠한 통(痛)도 경촉(更觸)하지 않는다. 이때에 두 통[二痛]은 이미 멸했으니, 통과 그리고 괴로움이리라. 이때엔 다만 고도 낙도 아닌 경촉[不苦不樂更]만이 통수(痛受)하려니와 아난아, 불고불락의 통법(痛法)이란 항상치 않고, 괴롭고, 다함이 있는 법이니라. 아난아, 통법이 다한 뒤에는 신(身)이라 할 것도 없거늘 공연한 계교(計較)만 있느니라.
019_0231_a_07L是時阿難與樂痛同義不別解也此中樂亦苦苦上少三字宜言樂亦不樂不苦也便字從宜爲更也亦不苦亦不樂不更是痛是時兩痛滅痛亦苦但爲是時不苦不樂更是痛不苦不樂阿難痛法非常不苦不樂阿難痛已盡應無有身自有是計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역시 위 두 이치[二義]와 같되 아래의 불자(不字)는 군 것[長]이다. 중간의 통역고(痛亦苦)는 낙역고(樂亦苦),즉 즐거움 또한 고(苦)라 해야 한다. 지나치게 즐거워하지 않고,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으면 중품중(中品中)의 수행인(修行人)은 된다.] 무상법[非常法]인 통(痛)을 신(身)으로 보리라고 계교하며,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항상, 세 통[三痛]을 관찰하여 신(身)이라는 견해를 계교한다.]
019_0231_a_14L阿難爲行道亦同上二義也長下不字也中云痛亦苦宜云樂亦苦也又大樂不大苦中中人也爲是非常法痛爲計見身或有阿難爲行道常觀三痛計身之見也
낙통과 고통이 모두 사라진 것[放散樂苦痛]으로써 자신의 신[識身]이라고 계교하거니와,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아, 통(痛 : 覺)으로써 신(身)이라고 계교하거나 신(身)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하느니라.[밝은 지혜로 관찰하는 힘을 얻으면 세 통[三痛]과 모두 사라진 방산(放散)의 인연이 영원히 멈춰서 통을 신(身)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영원히 없어진다.]
019_0231_a_15L放散樂苦痛爲自見計身如是阿難因緣不應可爲痛作身見身得明慧觀則三痛放散因緣長息水無痛之作身想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통(痛)을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않고, 다만 경법(更法)과 통법(痛法)만으로 신(身)이라 여긴다 하거든,[단위(但爲) 이상은 통(痛)이 없다고 칭(稱)하셨다. 단운신경통(但云身更痛)은 신(身)이 세 통[三痛]에 두루하면서 신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니, 『누분포경(漏分布經)』에 삼통신경지(三痛身更知)라 하신 것이 곧 이것이다.]
019_0231_a_18L阿難或不痛計見是身但爲身法更痛但爲上稱痛而云無也但云身更痛者身歷三痛而作身也漏分布日三痛身更知卽此事也
얼른 대답하되 현자(賢者)여, 만일, 통(痛)이 경촉(更觸)하는 일이 없다면 또한 경촉(更觸)할 대상을 볼 수도 없을 것이거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라.[위에서 경(更)과 통(痛)으로 신(身)이라고 계교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분부하시기를 “그대들이여 ‘통(痛)으로도 신(身)이라고 계교할 수 없거늘 어떻게 신의 경촉[身更]으로 신을 닦을 수(신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하라.” 하셨고, 위에서 통(痛)과 경(更)이 신(身)이라고 칭(稱)해야 할 자리에서는 도리어 ‘경법(身更法)이라’. 하셨고, 신경법(身更法)이라 해야 할 자리에는 경(更)이 생략되었고. 두 가지로는 볼 수 없을[二不見] 때에는 ‘완전히 단멸(斷滅)인 것 같다[似盡滅].’ 하셨고. 누군가가 설문(設問)을 하거든 “신(身)이라고 계교할 수도 없거늘 어찌 이 법이 경촉(更觸)할 수 있겠느냐. 하라” 하셨다.]
019_0231_a_20L便可報賢者無有痛更亦不見所更寧當應有是不上更痛計爲身佛敎答曰尚不痛計身寧稱有身更可修身耶上痛更稱反身更法身更法言所更約耳言二不見似盡滅也設問對計非身寧應是法更
019_0231_b_01L아난아, 이때에 어떤 비구가 생각하기를 통은 신(身)이 아니라고 여기고, 신이 아니라고 계하면서도 법(法)을 경(更)하거나 통(痛)할 수 있겠느냐?”
019_0231_b_01L是時阿難比丘不痛爲見計非是身寧應是法更痛亦見是身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미 통(痛)과 경(更)이 없으면 신(身)을 닦을 연(緣)이 없다고 대답하라 하시더니, 이제는 그것으로 아난에게 따져물으셨다. 불통위견계(不痛爲見計), 즉 통(痛)으로써 신(身)이라고 보거나 계교하지 않는다 함은 제이가(第二家)의 신(身)ㆍ경(更)ㆍ통(痛)에는 제일가(第一家)의 통(痛)으로 신이라고 계교한 것이 없다는 말씀이니, 둘과 셋에 모두 없으면 항상치 않은 법[非常]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곧장 어찌[寧應]라 하신 까닭은 이 두 가지 사안이 모두 위 세 통[三痛]에 의했기 때문에 ‘어찌.’라 하였으니, 어찌[寧應]란 두 통[兩痛]이 이미 사라졌는데 어떻게 신(身)만이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시다. 우아한 진리[雅理]는 겹겹이 나열되었으니, 그 이론[義]이 홀로 성립되지는 않는다.]
019_0231_b_02L難言旣敎答無痛更無緣修身又反以質阿難也不痛爲見計非是者言第二身更痛無第一痛計身也二與三都無非常盡滅直言寧應者此二事皆仍上三痛故云寧寧者旣兩痛滅安得獨稱身耶雅理竝羅義不隻立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인연으로 어느 누구라도 통(痛)은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말고, 다만 경(更)과 통(痛)만으로 신이라고 여겨야 하느니라.[단위(但爲) 이상은 역시 칭(稱)이요, 반칭(反稱)은 결구(結句)이다.]
019_0231_b_05L如是阿難是因緣亦不應亦不可令或一無有痛計是身但爲身更但爲已上亦稱也反稱結句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통(痛)을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또한 통을 신이 아니라고 보지도 않으며,[장차 셋째[第三]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첫째 것[第一]이 없다고 하셨다.] 신(身)의 경통(更痛)도 아니며, 또한 통법(痛法)으로도 신이라고 여기거나 계교하지도 않고,[둘째 것[第二]도 없다 하셨다.] 다만 계교하기를 나는 각지(覺知)하지 않는 신[是身]으로써 신[是身])이라 여긴다 하거든[각(覺)은 보다[見]의 뜻이니, 세 통[三痛]을 신(身)이라고 여기는 주체를 일러서 각지하지 않는 각[不覺覺]이라 한다.] 얼른 대답하되 현자(賢者)들이여, 스스로를 신(身)이라 계교하고,[각지(覺知)뿐이라고 계교하니, 각지[覺]가 곧 신(身)이라는 것이다.] 경(更)과 통(痛)이 없다면,[문구가 도치[句倒]되었으니, 둘째 것[第二]이 없다.]
019_0231_b_07L阿難所不計痛爲身亦不見是痛非身將說第三云無第一也亦不身更亦痛法不見不計是身云無第二也但爲計我爲不覺是身是身覺見也覺三痛計爲身也云不覺覺便可報一切賢者自計身計獨覺也覺是身也不更痛句倒也卽無第二也
어떻게 신(身)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라.[이 말씀에는 스스로 각지하는 신[自覺身]으로써 신이라 여김[爲身]과 경과 통의 법이 없는 법[不更痛法]으로써 신이라 여김[爲身]과 또 통각이 없는 것不痛[]으로써 신이라 여김[計身]등 세 종류의 명칭이 병렬(竝列)되었거늘 어찌 각지하는 신[覺身] 하나만으로써 身이라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위 세 통[三痛]에서 어느 통(痛)을 신(身)이라 하겠는가. 만일 어느 하나라면 나머지 둘은 사라졌을 것이거늘 어떻게 한꺼번에 다 열거할[並稱] 수 있겠는가 하라 하셨다.]
019_0231_b_12L寧應有身不此言自覺身爲身不更痛法又不痛計身三名竝寧應獨覺身是身耶獨上三痛何痛應作身也當一兩滅何得竝稱也
이때에 어떤 비구가 통(痛)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更痛]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의 법[更痛法]으로도 신이라고 여기거나 보지 않고,[둘이 없으니, 첫째[第一]와 둘째[第二]이다.] 다만 각지하지 않는 것만을 신(身)이라 하거니와 이렇게 신을 관하는 것이 신에 부합될 수 있겠느냐?”
019_0231_b_13L是時比丘不痛爲身身亦不更痛痛法亦不爲身有身二無第一第二也但爲不覺身耳如是觀身寧應身不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말하자면, 세 가지 사안[三事]이 모두 나열[並列]되어야 하거늘 어찌 신(身)만이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위에서는 설문(設問)에 대답케 하시더니, 여기서는 아난에게 직접 물으셨다.]
019_0231_b_16L阿難言云三事竝列何得獨有身也上設問對此問阿難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인연으로, 통 없는 [無有痛]것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신과 경과 통[身更痛]으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신과 경과 통의 법[身更痛法]으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한 각지하지 않는 실체[不覺身]로써 신이라고 여기지도 말지니라.
그러하니라. 아난아, 모든 통을 신이라고 여긴 뒤에 통[痛見]을 신이라고 볼지니라.[사안으로 보아 어디에도 신(身)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019_0231_b_17L如是因緣阿難不應令無有痛爲身亦不身爲更亦不應法爲亦不應不覺身爲身如是阿難切痛爲作身已痛見見是身事無適作身也
019_0231_c_01L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통(痛)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보지 않는 실체[不見身]로써 신(身)이라고 여기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으로부터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이 말씀을 받자옵고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
019_0231_b_20L幾因緣阿難或爲行道不爲痛作身爲見不見身阿難報是法本從佛敎令亦從佛願佛爲說佛說已弟子當令是說當爲解利佛告阿難聽是受是諦受重受念是當爲說如是賢者阿難從佛聞
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비구는 통(痛)을 신(身)이라고 작심하지도 않고, 또한 통을 신이라고 보지도 않으며,[수행자가 네 가지가 무상함을 아는 지혜[四非常解]와 진제의 지혜[盡諦慧]를 얻으면 세 가지 통[三痛]에 신(身)이 있다고 계교하지 않는다. 이미 세 가지 통(痛)을 계교하지 않게 되면 통을 신이라고 여기는 견해에 맛들여서 몸이란 생각[身想]에 집착되지 않는다.]
019_0231_c_03L佛便說是阿難比不爲痛作身亦不見痛爲身行者得四非常解盡諦慧者不計三痛而有身也旣不計三痛則不快痛之見著身想也
또한 경촉[身更]으로 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경과 통법[身痛法)으로 신이라고 계교하지 않으며,[통(痛)과 법(法)이 나뉘어졌는지라. 통과 법은 의당 합쳐야 한다. 또한 위의 삼통(三痛)은 단순히 신경지(身更知)였으나 심경지(心更知)로써 대조[望]하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견의 신[身見]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며,[견(見)은 각(覺)의 뜻이니, 위에서는 신경(身更)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신견 즉 신각(身覺)이라 하신 점이 다를 뿐이다.] 또 어떤 이는 신(身)이 있다고 해도 좇지 않고, 또한 견(見)이 곧 신이라 해도 좇지 않느니라.
019_0231_c_05L亦不爲身更亦不痛法計爲身分痛法耳宜合痛法亦上三痛但身更知心更知望得知爲異也亦不見身見爲身見覺也上身更此身覺爲異耳亦不從或有是身亦不從是見見是身已
이미 이렇게 보면 다시는 세간의 업을 짓지 않고, 다시는 세간의 보를 받지 않게 되느니라.[신(身)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통(痛)에 신이 있다고 계교하였거니와 세 가지 사안[三事]에서 두 가지를 더듬어보았는데 이미 절반이상이 없기 때문에 다시 세간에 이르지 않는다. 치(致)는 이르다[至]의 뜻이다.]
019_0231_c_08L如是見不復致世閒令不復受世閒有是身者故上計痛有是身也撮三事之二云旣無半則不致受世閒也致至也
이미 세간의 보를 받아 누리지 않게 되었다면 더 이상 근심할 일이 없고, 이미 근심할 일이 없다면 문득 걸림 없이 세상을 거닐면서 생⋅노⋅병⋅사가 이미 다했음과 근심과 걱정이 이미 끝났음을 스스로 알게 되느니라.[세 통[三痛]의 신(身)이 다하면, 다시는 열한 번째 고통도 받지 않게 된다.]
019_0231_c_10L不復受致世閒便不復憂已不復憂便無爲度世便自知爲已盡生老病死憂已三痛身盡則不致不受十一苦也
수행이 이미 만족해지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내고는 다시 이 세간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계통위신(不計痛爲身 : 痛을 身이라고 계교하지 않는 공부)을 자신의 방편으로 삼으리라하고, 또한 보지 않는 것[不見]으로써 신이라 여기리라하느니라.[제(齊)는 이르다[至]의 뜻이니, 이 신(身)의 최후, 마지막 몸[竟身]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몸이 여기서 끝나, 다시는 경촉(更觸)하는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不還世間] 하셨다.]
019_0231_c_13L行已足所應作已作不復還在世閒齊是阿難或爲行道不計痛爲身自方便作亦不見見爲齊至也至此身最後竟身也身則畢於此不受更身故曰不還世問也
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색(色)을 신(身)이라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에게서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잘 받자옵고 그 뜻을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
019_0231_c_16L幾因緣或爲行道爲色作身阿難報法本從佛敎令亦從佛願佛爲說佛說已弟子當受令是說當爲解利佛告阿聽是受是諦受重受念是當爲說如是賢者阿難從佛聞
019_0232_a_01L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少色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며,[신(身)을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 대견한 일[慇勤]이 아니겠는가.]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少色行]을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둘째 수승함[二勝]에 오르기 위해 첫째 것[第一]을 없다고 하셨다.] 또한 색무유량행(色無有量行)을 신(身)이라 여기고, 다만 소불색행(少不色行)을 신이라고 여기며, [단위이자(但爲二字)는 의당 색무량(色無量) 위로 옮겨야 하고, 불위소불색(不爲少不色)은 중등(重騰 : 衍)이다. 무량(無量)이라 함은 내외의 색[內外色]을 탐냄이 간절하다는 뜻이다.]
019_0231_c_21L佛便說是阿難或爲行道爲少色行爲身少貪身不乃慇阿難或爲行道爲不少色行爲身捋及二勝一無也亦色無有量行爲身但爲少不色行爲身但爲二字宜上在色無量上也不爲少不色重騰焉也無量者慇勤貪內外色也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소색(少色)도 아니요, 무유량색(無有量色)도 아니고,[제일(第一)과 제이(第二)가 없어지고 제삼(第三)에 이른다는 구절이 빠졌다.] 또한 불색소행(不色少行)을 신(身)이라 여기며,[불색소(不色小)는 제일가(第一家)의 주장을 뒤집으신 것이다. 안으로 조그만치의 탐냄도 없으면 밖으로 조금쯤은 드러난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소행[少色]이나, 또는 색무유량[無有量色行]이나, 또는 불색소행(無有少色行)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위 세 가지가 모두 없다.] 다만 불색무유량행(不色無有量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느니라.[둘째 것[第二]을 뒤집은 것이다. 안[內]으로 불색무유량(不色無有量)이 되면 겉모습이 근엄해[慇勤]진다.]
019_0232_a_02L阿難爲行道亦不爲少色亦不爲無有量色騰無第一第二及三也亦不色少行爲不色小及第一也內不少貪外微著也或有阿難爲行道不爲少色亦不爲無有量色亦不無有少色行爲身騰無上三但爲不色無有量行爲身反第二也內不色無有量外慇勤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로 삼느니라.
019_0232_a_08L阿難或爲行道少色行爲身現在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 신이라 여기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으리라 하고, 수행으로 상대함[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현재(現在)라 함은 곧 소색행(少色行)을 탐하는 과정이다. 소색행을 탐내면서 수행을 시작한 이는 몸[身]이 비록 죽어서 없어졌더라도 몸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이 그림자[想像]처럼 남아있나니, 어리석음에 얽매인 수행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리들과 짝이 되어서 어리석음과 함께하거나 이 몸[身]의 요인을 만들어 되돌아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대하다[對] 함은 짝하다[匹也], 함께 하다[俱也]의 뜻이요, 제시(齊是)는 이르다[至]의 뜻이니, 죽어도 무상(無常)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말라는 것이다.]
019_0232_a_09L阿難或爲行少色行爲身已身壞死令復見身相像如是不爲是對行對如是致亦如是齊是現在猶是計貪少計貪少色以起者身時雖身死亡續貪身思存想像未知繫癡行道不應與此爲匹而愚與俱以致此身此而還也對匹也俱也齊至也死而不解無常也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行]으로써 신(身)이라 여기는 공부를 스스로의 방편(方便)으로 삼아 그것을 지으리라고 계교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行)으로 신(身)이라고 여기는 공부로 스스로의 방편으로 삼으리라고 계교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a_13L阿難或爲行道色少行爲身自方便計作齊是阿難或爲行道色少行爲身方計作齊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으로 신이라고 여기리라하여 마침내 결(結)과 사(使)를 이루느니라.[스스로 방편을 계교하다[自計方便] 함은 방편으로 색(色)을 탐하여 목숨[命]이 다할 때까지 끊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방어[坊閑]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므로 身結과 身使가 이루어졌다. 지난날 스스로 방편을 계교할 때에 처리[過下]를 했더라면 오늘날 어찌 한 가닥의 길[一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기는 병통[病]을 말씀하시는 대목인데 도리어 행도(行道)라 하신 까닭은 도(道)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019_0232_a_16L阿難或爲行道色少行爲身令結使自計方便方便貪色命終不絕也不自坊閑至此而止故爲身結身使也上自計方便如當過下寧也可無一條耳此說病耳而云行道道當知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行]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다만 색의 무유량[色無有量]만을 신이라 여기리라고 계교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을 신(身)이라고 계교하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고, 수행으로 상대함[對]도 그렇게 하고,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a_18L阿難或爲行道不少色爲作行身但爲色無有量計作爲是身現是阿難或爲行道色無有量爲計作身身已壞死令復現身相像如是不爲是對行對如是致亦如是齊是
019_0232_b_01L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자기의 신(身)은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어야 한다고 계교하고는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을 신(身)이라 여기리라 하다가 사(使)와 결(結)을 맺느니라.
019_0232_a_23L阿難或爲行道爲計身色無有量齊是阿難或爲行道色無有量爲身令使結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이나 또는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계교하지 않고, 다만 소색(少色)으로써 신이라고 계교하리라 하여 현재의 자리[現在]로 여기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의 소량[不色少]을 신(身)이라 여기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상대[不爲是對]하지도 않으리라 하고, 수행으로 상대함[行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b_02L阿難或爲行道不少色亦無有量色計但爲念少色爲身現在阿難或爲行道不色少爲計身身壞死令復見身相像是不爲是對行對如是致亦如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소량[少]으로 신(身)을 이루리라고 스스로 계교하고는,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소량[少]으로 (身이라) 호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느니라.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이나 또는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나 또는 무유색의 소량[無有色少]으로 신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무유색의 무유량[無有色無有量]으로 신[行身]을 내릴 곳으로 여기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를 삼느니라.
019_0232_b_07L阿難或爲行道不色少自計爲致齊是阿難或爲行道不色少令身使結阿難或爲行道亦不色少不色無有量亦不無有色少亦不無有色無有量爲墮行身現在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量]이나, 또한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이나, 또한 불색의 소량[無有色少]으로 신이라 여기지 않고, 오직 불색[無有色]의 무유량[無有量]으로써 태어날만한 곳이라는 계교를 하다가 죽어 뭉그러졌다가 다시 자신의 모습과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상대[對]하지도 않을 것이며, 수행으로 상대함[行對]도 그렇게 할 것이며, 성취함[致]도 그렇게 하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b_11L阿難爲行道亦不色少亦不色無有量不無有色少亦不無有色無有量計墮身已身壞死令復見身相像是不爲是對行對如是致亦如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스스로 계교하여 신(身)을 이루리라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不色 : 不色無有量)으로 (신을 이루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기에 이르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스스로가 신(身)을 이루리라고 계교하여 신을 이루느니라.
아난아, 몇 가지 인연으로,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色不行]으로 신(身)이라 여기느냐. 아난이 여쭈었다. 이 법은 본래 부처님에게서 나왔고, 분부[敎令] 역시 부처님에게서 나오셨으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잘 받자옵고 그 뜻을 잘 이해[解利]할 수 있겠나이다.
019_0232_b_16L阿難或爲行道不色無有量自計爲致身齊是阿難或爲行道令不色爲使結齊是阿難或爲行道自計爲致身身幾因緣阿難爲行道色不行作身阿難報是法本從佛敎令亦從願佛爲說佛說已弟子當受令是說當爲解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아난아,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자세히 받아들이고, 거듭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라. 이 법을 말해 주리라. 현자(賢者)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019_0232_b_22L佛告阿難聽是受是重受念是當爲說如是賢者阿難從佛聞
019_0232_c_01L부처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色]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사대(四大)에 신[身相]이 있다는 것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색을 신(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며,[소색(少色)이라 해야 할 것인데 소(少)자가 빠졌다. 말하자면 도를 아는 행자는 조그만치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신(身)이라는 집착에 걸리지 않는다.] 또한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으며,[양이 많으면 사대[四大]에 집착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많은 색[多色] 탐내는 마음을 쉬라 하셨다.]
019_0232_c_01L佛便說是阿難爲行道不爲色作身計四大有身相也都日也亦不爲色計爲身少色也脫少字云解道行者不起小色而滯身也亦不爲色無有量量多普四大息此多色也
또한 색의 소량[色少]으로도 (신이라 여기지) 않으며,[‘위(爲)’자 밑에 ‘무(無)’자가 빠졌으니, 무색 의소[無色少]는 첫째 것[第121-15항]을 뒤집었으며, 또한 그 결(結)을 쉬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십보경(十報經)에 이르시기를 내심(內心)에 소량의 색[少色]도 없으면 밖으로 보기에 조금 더 단정(端正)해진다 하였다.] 또한 색의 무유량(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계교하지 않느니라.[“위(爲)”자 밑에 역시 “불(不)”자가 빠졌으니, 이는 둘째 것[第二]을 뒤집는 뜻이며, 또한 행제(行諦)가 끝났다는 말씀이다. 『십보경(十報經)』에 이르시기를 안으로 단정한 색[端正色]을 생각하거나 찾아가지 않으면 겉으로 색을 보아도 단정한 것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하셨다.]
019_0232_c_05L亦不爲色少爲下小無字也無色小反第一也亦息此結也十報內無有小色外見小端正也亦不爲色無有量計爲身爲下亦少不字也此反第二也行諦亦癈之也十報內不念不趣端正外見色不趣端正色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행[色少行]으로써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리라 하여,[도(道)와 같이 도를 행하는 것이 행제(行諦)이다. 이 지혜를 얻은 이는 조그만치라도 사대(四大)의 색(色)에 집착할 생각을 잊었다.]
현재의 자리[現是]로 삼느니라.
019_0232_c_07L阿難爲行道不少色爲作身不爲計是身如道行道行諦也得此慧者忠少著四大色也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을 내려놓을 곳[墮是身]이라고도 여기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다시 이 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현시(現是)라 함은, 지금 당장이라는 뜻이니, 지금 소량의 색[少色]을 탐내지 않는 때이다. 신(身)이 무상하게 끝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금생의 몸으로 색에 집착할 생각이 영원히 끊어진다.] 그것을 상대[對]하지도 않고, 수행으로써 대함도 이와 같이 하리니, 이들은 원래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대(對)하다 함은 지금의 몸과 내생의 몸이니, 몸[身]과 의지할 곳[猗]이 없어서 이 하나에 이르렀다.]
019_0232_c_08L爲行道不爲少色作身亦不爲墮是身已身壞死令不復見是身相像現是猶是時也是行時不貪小色見身非常滅盡永絕今身著色之想也不爲是對行如是是無有齊是對今身後也無有身猗之至此一也
아난아,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少色]을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신이라고 계교하지도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소량[色少]을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맺지 않느니라.[말하자면, 신 없는 상[無身之相]에 이르면 신(身)을 탐하는 칠사(七使)와 구결(九結)이 모두 없어진다는 것이다.]
019_0232_c_12L阿難爲行道爲不少色爲身亦不計爲是身齊是阿難爲行道爲不少色爲身不使結云至此無身之相則無貪身之七使九結也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으며, 또한 색의 (무유량)을로 신이라고 단정하지도 않으리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또한 신(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고는 자신이 죽어 뭉그러진 뒤에 자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와 상대하지도 않으리니, 이러이러한 것들은 진정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c_15L阿難或爲行道不爲色無有量爲身亦不作色爲身現在阿難爲行道不色無有量爲身亦不計是身已身壞死令不復見身相像不爲是對如是如是是爲無有是齊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써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 곳[墮身]이라고 계교하지도 않다가, 아난아, 분명히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의 무유량[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고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와 결[使結]을 이루지 않느니라.
019_0232_c_20L阿難爲行道色無有量爲身亦不墮身計如是齊是或爲行道不色無有量爲身不使結
019_0233_a_01L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不色少]으로 써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태어날 곳[墮身]이라는 계교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의 소량행[不色少]을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만한 곳[墮身]이라는 계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뭉그러져서 자신의 형상이나 그림자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와 상대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를 이러이러한 것들은 진정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하여 끝내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2_c_23L阿難或爲行道不爲不色少爲身亦不墮身計現阿難爲行不色少爲身亦不墮身計已身壞死令不復見身相像不爲是對是如是是爲無有是齊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행[不色少]으로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태어날만한 곳[墮身]이라는 계교도 하지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불색의 소량행[不色少]으로 써 (신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하여, 사(使)와 결(結)을 이루지 않느니라.
019_0233_a_04L阿難爲行不爲不色少爲身亦不墮身計阿難齊是爲行道不爲不色少令不使結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여기에 태어나지도 않으리라 하는 것으로 현재의 자리[現在是]를 삼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도 않고, 또한 거기에 태어나서 신을 이루리라는 계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이 죽어 무너져서 이 몸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하더라도 이 계교를 대하지 않으리니, 이런 것들은 원래 없는 것이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3_a_07L阿難或爲行道不行不色無有量爲身亦不墮計是身現阿難爲行道不爲不色阿難爲身不墮計爲成身已身壞死如是身令不復見是計不爲是對如是如是是爲無有是齊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여기에 태어나리라는 계교도 하지 않으리라 하여, 끝내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019_0233_a_12L阿難爲行道不行不色無有量爲身亦不墮計是身齊是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이라고 여기는 행을 하지 않고, 또한 사(使)와 결(結)을 이루지도 않으리라 하여, 거기에 도달[齊是]하느니라.
아난아, 혹 어떤 이는 도를 행하되 색 아닌 것[不色]의 무유량[不色無有量]으로 신(身)이라 여기지 않고, 또한 (그것으로) 신(身)을 이루리라 하지 않고, 또한 거기에 태어나리라고 하지도 않느니라.
019_0233_a_13L阿難爲行道不行不色無有量亦令不使結齊是阿難或爲行道不行不色無有量爲身亦不成身亦不墮計是身
아난아, 또한 일곱 곳[七處]이 있어서 식(識)이 머물게 하고, 또한 두 곳[二受行]이 있어서 지혜를 얻게 하느니라.[삼도(三道)는 욕계(欲界)를 벌려서 다섯으로 만들고, 삼계의 하늘은 합쳐서 하나로 했다. 구신지처(九神止處)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는 나누고, 욕계(欲界)는 합쳐서 하나로 했다. 오도(五道)를 논(論)할 때에는 윤회(輪廻)에 끄달려서 고통 받는 것이 큰 손실(損失)이기 때문에 삼악도(三惡道)는 자세히 나누고, 하늘은 통틀어 하나로 했다. 구지(九止)를 설(說)하신 이유는 교학(敎學)을 펴고, 삼관(三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리를 중심으로 논(論)했기 때문에 인간(人間)으로부터 시작하고, 삼고(三苦 : 三惡道)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의 수[一受]만을 연다면 정(精)과 조(粗)가 뒤섞여서 관법(觀法)의 차이가 없어진다. 이수(二受)는 모두가 원만필경[滿畢]의 지위이기 때문에 해(解)라는 칭호(稱號)를 붙였다.]
019_0233_a_17L亦有是七處阿難令識得駐有二受行從得解五道則張欲界爲五幷三界天爲一九神止處則分色無色合欲爲一也論王道者以流浪受苦爲失故精說三惡道總天爲一也說九止者論能弘敎受三觀者故自人始不及三苦也分一受者精粗相從觀法不異也二受皆居滿畢之位故有解名也
019_0233_b_01L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갖가지 몸[若干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인간[人]이나 하늘[天]의 또래이니, 이는 첫째, 식이 머무는 곳[第一識止處]이니라.
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장수천(長壽天)이 본래 머물렀던 범천(梵天)이니, 이는 둘째, 식이 머무는 곳[第二識止處]이니라.
019_0233_a_20L有色爲令從是有若干身若干思想辟或人是爲第一識止處有色爲令從是一身若干思想辟天名爲梵天長壽本在處是爲第二識止處
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명성천(明聲天)의 무리이니, 이는 셋째, 식이 머무는 곳[第三識止處]이니라.
어떤 유색중생[有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동일한 몸[一身]과 동일한 형상[一像]과 동일한 생각[思亦一]을 이루면 변정천(遍淨天)의 또래이니, 이는 넷째, 식이 머무는 곳[第四識止處]이니라.
019_0233_b_02L有色爲令從是一身若干思想辟天名爲明聲是爲第三識止處有色爲令從是一身一像思亦一天名爲遍淨是爲第四識止處
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색에 의지하던 생각[色想]에서 벗어나 많은 생각[多想]이 소멸하고, 끝없는 허공[無有量空]에 이르러 공의 지혜[空慧]로 선정[受意止]을 누리면 공혜행(空慧行)이니, 이는 다섯째, 식이 머무는 곳[第五識止處]이니라.
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공행(空行)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한량없는 식의 세계[無有量識]에 이르러 지혜로 누리는 선정[慧受意止]을 이루면 식혜천(識慧天)의 또래니, 이는 여섯째, 식이 머무는 곳[第六識止處]이니라.
019_0233_b_06L有不色爲令從是一切從色想度想滅爲無有量空空慧受意止辟天名爲空慧行是名第五識止處有不色爲令從是一切從空行竟無有量識從慧受意止辟天名爲識是名爲第六識止處
어떤 무색중생[不色]이 거기서 시작하여 식혜[識慧]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무유량불용의 세계[無有量不用]에 이르러 지혜로 누리는 선정[慧意受止]을 이루면 불용종수혜천(不用從受慧天 : 감각의 지혜마저 필요치 않은 하늘)의 또래니, 이는 일곱째 식이 머무는 곳[第七識止處]이니라.
019_0233_b_12L有不色爲令從是一切從識慧過度無有量不用從是慧意受止辟天名爲不用從受慧是爲第七識止處
아난아, 어떤 것이 또한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두 곳[二受行從得解]인가.
어떤 이가 색계의 인연[有色因緣]으로 도를 행하되 더 이상 사(思)와 상(想)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불사상천(不思想天)이니, 이는 첫째,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一受行從得解 : 第一受解處]이니라.
어떤 이가 무색계의 인연[不色因緣]으로 도를 행하되 불용처(不用處)를 완전히 벗어나서 생각이 없으나 또한 생각이 없지 않은 선정[不思想亦有思想受行止]을 이루면 불사상역유사상천(不思想亦有思想天)의 또래니, 이는 둘째, 바른 공부[受行]로 지혜를 얻는 곳[二受行 從得解]이니라.
019_0233_b_15L何等爲阿難亦有二受行從得解從色因緣行道令不更思想辟天名爲不思想是爲一受行從得解有從不色因緣行道一切從不用得度爲受不思想亦有思想受行止辟天名爲不思想亦有思想是爲二受行從得解
019_0233_c_01L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첫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갖가지 몸[若干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思想]을 이루면 이는 인간[人]의 또래이거나 또 다른 한 곳[亦一處]이라 하였거니와,[색(色)은 몸[身]이며, 소유하다[有]의 뜻이니, 욕계의 몸[欲之形]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색(色)이라 하고, 욕계(欲界)의 몸[身]을 의지해서 도제(道諦)를 행하기 때문에 행도(行道)라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 이하는 그 형색[形]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若干]라 하였고, 마음씨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갖가지 생각[若干想]이라 하였다. 벽(辟)은‘가면’ 또는 ‘또래’의 뜻이다.]
019_0233_b_22L阿難所第一識止處爲從色因緣行道若干身若干思想辟名爲人亦一處色身也有也有欲之形故曰色也由欲界身行道諦故曰行道也六天已下其形非一故曰若干也心亦各異故曰若干想也辟行字也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거기가) 식지처(識止處)임을 이미 알고,[욕천(欲天)과 인(人)을 알았다는 것이다. 『음지입경(陰持入經)』에서는 신(身)으로써 근본을 삼았다.] 또한 이 식지처(識止處)가 습(習)으로 (생겼음을) 알며,[습(習)은 천상(天上)이나 인간(人間)들이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줄 아는 이는 지혜롭다.] 또한 결국에는 사라질 것[沒]임을 알며,[사라진다[沒] 함은 다하다[盡]의 뜻이니, 하늘로부터 인간[人身]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모든 것이 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씻은 듯[如篾]한 것을 다했다[盡]고 한다.] 또한 즐길 만한 곳임을 알며,[『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 번뇌의 결(結)을 매(昧)라 하시고, 천상(天上)과 인간(人間)의 몸[身]을 탐낙(貪樂)하기 때문에 즐긴다[樂] 하시고, 그런 줄 아는 것을 다함[盡]이라 하셨다.]
019_0233_c_02L阿難行道識止處已知知欲天及人陰持入身爲本也亦知是識從是習習天及人識不能捨也知者慧也亦知從是沒沒盡也從天及人身天下滅者諦知如篾曰盡也亦知是所樂七處結日時也貪樂天及人身故曰樂也知之爲盡
또한 고를 느끼게 하는 것[更苦]임을 알며,[천상에서 인간[人身]에 이르기까지 이것[之]을 말미암아 고(苦)를 받거니와 한결같이 괴롭다는 것을 알면 지혜롭다.] 또한 이에 따라 출요(出要)하되 진여에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019_0233_c_06L亦知是更苦天反人身由之受苦也知一苦則慧也知是從得出要如有知
[출요(出要)는 법구경[法句]에 이르시기를 요체[要]를 얻어 생사를 다함[得要生盡]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 이르시기를 욕(欲)을 능히 다스리고[能治], 능히 버리고[能棄], 능히 건넌다[能度] 하셨다. 진제(盡諦)에 네 가지 사안[四事]이 있는데 벗어남[出要]이 그 하나[一]이다. 무릇 여섯 가지 사안[六事]에서 모두 알았다[知] 하셨으니, 도제(道諦)를 행하는 지혜요, 여섯 가지 사안에서 모두 이것[是]이라 하셨으니, 이것이란 곧 육천(六天) 이하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유정들이 몸과 마음[身識]을 기대는 곳이다. 『칠처삼관경』에 이르시기를 한결같이 모두가 오음(五陰)의 하나임을 알아야 하나니, 음(陰)마다에 육정(六情)이 있기 때문이요, 하나하나가 모두 음(陰)임을 알아야 하나니, 음(陰)에는 습(習)이 셋이요, 넷은 음(陰)이 다해서 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셨다. 또 이르시기를, 색의 맛[色味]을 알고, 또한 색에서 벗어나는 길을 아는 것, 이것이 칠처(七處)라 하셨다. 삼관(三觀)이란, 신의 색[身色]을 관하고, 오음(五陰)을 관하고 육정(六情)을 관하는 것이다. 삼관은 칠처(七處)마다 첫 자리의 음(陰)과 입(入)이니, 말하자면 도제(道諦)와 진제(盡諦)와 고출요제(苦出要諦)로서 음(陰)과 입(入)과 그리고 낙(樂)에 가려진 번뇌를 관(觀)하라는 것이다.
『오음각개경(五陰殼蓋經)』에는 오음으로 다섯을 삼고, 습(習)과 다함[盡]으로 일곱을 삼고, 어두움에 처함[處昧]과 괴로움[苦]과 거기서 벗어나는 요체[出要]를 셋이라 한다 하셨으나, 문장을 보면 좀 다르지만 뜻은 대체로 같다. 『신삼경(身三經)』 중,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만 도제(道諦)가 있고, 나머지 두 경에는 모두 칠사(七事)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행도(行道)라 했으니, 역시 도제(道諦)의 뜻이요, 모두에서 안다[知] 했으니, 안다는 것[知], 역시 도제(道諦)의 진리이다. 예컨대 지극하게 안다.[如至識知] 하셨고, 혹은 근본과 같이 알다[如本知] 하셨으니, 그 알았다[知]는 것이 도제의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다[知]와 관하다[觀]는 그 정의(定義)가 같다. 구(九)는 구지(九支)니, 하늘의 몸[天身]으로 관행의 바탕[觀地]을 삼아, 하늘의 습[天之習]을 익힌다. 하늘의 몸[天之身]은 끝내 사라질 것임을 알고, 도를 행하여 하늘의 쾌락[天樂]에 맛들이[味樂]되 하늘 쾌락의 즐거움[天樂]에는 반드시 괴로움[苦]이 있음을 알고, 능히 하늘의 탐욕[天貪]을 끊으면 가위 살아나는 길[活道]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벗어나는 길목[出要]이라 하셨으니, 모두가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으로 구처(九處)를 관(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은미[微]하면서도 드러났고[顯], 간략[約]하면서도 구족하다 할 것이다. 『십보경(十報經)』은 음(陰)과 습(習)이 다하는 곳에서 끝났다.]
019_0233_c_07L出要法句言得要生盡也故七處曰欲能治能棄能度也盡諦有四事出要是其一也凡六事皆曰知行道諦之慧也六事皆曰是是六天已下下及人身識所依也七處三觀經一皆知五陰之一而陰有六惰也一一皆知陰陰有習三四知陰盡行道又曰亦知色味亦知色出要此七處也三觀者觀身色觀五陰觀六情也三觀卽七處之每第一陰入也言以道諦盡諦苦州要諦觀陰入及樂而陰之也五陰㲉蓋經以五陰爲五習盡爲七處昧苦出要爲三觀文小異大同身三經唯七處三觀經有道諦二經皆七事而已然俱曰行道亦道諦也皆曰知知亦諦也如至識知或曰如本知知非諦何也知觀同義也九九止卽天身爲觀地習天之習天之身會滅行道味樂天樂天樂樂必有苦能斷天貪可名活道故曰出要也皆四諦觀觀九處也所謂微而顯約而具也十報單用陰習盡而止也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識止處)를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3_c_14L是時阿難行道所識止處可應求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만일 도를 행하는 지혜로운 이가 사성제의 관법[四諦觀]으로 인간의 몸[人身]을 관찰하고도 여전히 인간의 몸을 탐하여, 이 식지처[識止處]에 머무르기를 희망하거나 연연(戀戀)하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는데 대답하시기를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하였다.]
阿難言若行道慧以四諦觀睹人身寧有貪求望想此住止處不答曰無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둘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갖가지 몸[身]과 하나의 생각[一想]을 이루면, 이는 장수천(長壽天)이 본래 머물렀던[本第一在處], 범신천(梵身天)이라 하였거니와[비로소 초선천[一禪]에 올라 네 범천[四梵]에 태어나면 범소천(梵小天), 범무량천(梵無量天), 대범천(大梵天), 범보천(梵輔天)의 몸 모양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몸[若干身]이라 하셨으니, 마치 인간들의 잘나고 못난 것과 같고, 마음이 순일(純一)하지 못하므로 한 생각이 아니라[非一想] 하셨다.]
019_0233_c_16L阿難第二識止處爲從色行因緣行道若干身一想辟天名爲梵身壽本第一在處始行一禪生四梵名梵小梵無量大梵梵輔身不相類故曰若干身猶此人之優劣也心未紽一故曰非一想也
019_0234_a_01L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終當)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고(苦)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하게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3_c_20L阿難行道是識止處以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沒亦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是從得出要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求可應望可應住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
阿難對言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셋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하나의 몸[一身]과 갖가지 생각[若干想]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명천(明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식지처(識止處)임을 이미 알고,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 만 한 곳임을 알고, 또한 고(苦)를 느끼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그 수행자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a_02L阿難第三識止處爲從色行因緣行道一身若干想天名爲明阿難爲行道是識止處已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亦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是從要得出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求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선천(二禪天)으로 진입하는 행상(行相)이니, 안으로 염담(恬澹)한 덕을 길음으로 써 염지(念持)의 공이 쌓여서 이 사명천(四明天)에 태어나니, 몸의 표면에 광채가 찬란한 것은 대체로 같지만[大齊] 마음은 여전히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갖가지 생각[若干想]이라 하셨다.]
019_0234_a_08L阿難對言進行二禪以知養恬陰乎念持生此四明天身喪光相渨然大齊心猶不一故曰若干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넷째 식지처(識止處)에서 색행(色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하나의 몸[一像身]과 하나의 생각[一思想]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변정(遍淨)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식지처(識止處)라는 것을 이미 알고, 또한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 만 한 곳임을 알며, 또한 고(苦)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이렇게 알면서도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a_10L阿難第四識止處爲從色行因緣行道一像身一思想辟天名爲遍淨阿難爲行道是識止處已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沒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從是要得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求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이는 제삼천(第三天)이니, 의당 정천천(淨天天)이라 해야 한다. 겉모습이 훤히 밝은 것이 네 하늘[四天]이 한결같고, 그 마음이 평온[恬豫]해서 항상 선정[禪思]에 노닐기 때문에 하나[一]라 했다.]
019_0234_a_16L阿難對言此是第三天也宜言淨天天也容表暉炎四天若一其心恬豫恒遊禪思故曰一
019_0234_b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다섯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무색[不色行 : 無色]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색(色)에서 벗어나서 땅 같은 생각[地想]이 이미 사라지고, 끝없는 허공[無有量空]에서 공의 지혜[空慧]로 누리는 선정[受止]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공혜천(空慧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고,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을 알되 분명하게 알고서도, 아난아, 이때에 도를 행하던 이가 생각하기를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만한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a_17L阿難五識止處爲從不色行因緣行道切從色得度地想已沒無有量空空慧行受止辟天名爲空慧阿難行道是識止處已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沒亦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從是要得出如有知是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求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땅[地]이라 함은 싫어하는 마음[恚心]과 없애려는 마음[滅心]이 땅 두께 같았다는 것인데 이제 그런 생각[想]이 사라지고, 구하려는 마음마저 끊어지니, 그대로가 한량없는 허공뿐이라는 것이다.]
019_0234_b_02L阿難對言地者恚疲心如地也想已沒斷求也無量空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여섯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불색행(不色行 : 無色界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공혜(空慧)를 지나 식무유량(識無有量)에 이르러 지혜로써 누리는 선정[受慧行止]을 이루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식혜천(識慧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이 식지처에서 도를 행하던 이가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苦)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b_03L阿難第六識止處爲從不色行因緣行道一切從空慧度識無有量受慧行止辟天名爲識慧爲行道是識止處已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沒亦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從是要得出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공정(空定)과 식정(識定)을 마주 관찰하면 식과 공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019_0234_b_10L阿難對言空識定者觀對識空不本來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일곱째 식지처(識止處)에서 불색행(不色行 : 無色界行)의 인연으로 도를 행하여 모든 식혜(識慧)를 지나 무유량불용(無有量不用)에 이르러 사수(捨受)로 누리는 선정[慧行]을 이루면 이는 불용수혜행천(不用受慧行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어떤 이가) 이 식지처(識止處)에서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가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나는 길[出要]이 있음도 알되 분명하게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지처(識止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b_11L阿難第七識止處爲從不色行因緣行道一切從識慧度有量不用已捨受慧行辟天名爲不用受慧行阿難爲行道是識止處已知亦是識止處從是習亦知從是亦知是所樂亦知是更苦亦知從是要得出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所識止處可應求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육신[色]을 싫어하여 (이 하늘에) 태어나려했었기에 (이 하늘에) 내태어나자마자 바로 (몸을) 버렸다. 종일토록 공부[觀]를 해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치 않다.]
019_0234_b_18L阿難對言色惠求生生而卽遣不俟終曰觀而後知也不用觀也
019_0234_c_01L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첫째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第一受行從得解]에서 색의 인연[色因緣]으로 도를 행하여, 생각[想]도 없고, 느낌[受]도 없는 데 이르면 이는 하늘의 무리인 불사천(不思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여기가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임을 이미 알고, 또한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며,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며,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며, 또한 이것이 고를 느끼는 곳임을 알며, 또한 여기서 벗어날 길[出要]이 있음을 알되 분명히 알면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들 수해처(受解處)는 구해야 할 곳이며, 희망해야 할 곳이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b_19L第一受行從得解有從色因緣行無有想亦不受辟天名不思爲行道已知是從受亦知從受習亦知從是沒亦知是所樂亦知是更亦知從是要得出如有知是時爲行道是受行從得解可應求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불사(不思)는 無結愛天이니, 네 아나함[四阿那含]의 넷째 하늘이다. 네 아나함[四阿那含]이 몸[身]을 사랑하여 제사선천(第四禪天)에 태어나니, 육증(六增)의 두 번째[第二]이다. 여기서부터 위로 네 하늘은 무루(無漏)의 제사선(第四禪)으로 국한[局]되었다. 선천(四禪天)의 여섯째 하늘을 애승(愛勝)이라 하는데 이는 무사천(無思天)과 같은 하늘에 있다.]
019_0234_c_03L阿難對言不思無結愛天也四阿那含之第四天也四阿那含愛身生第四禪六增之第二已上四天此無漏第四禪局也四禪之第六天名愛勝是無思天共在一天上耳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이가 둘째 바른 공부로 지혜[解]를 얻는 곳[第二 受行從得解]에서 불색의 인연[不色因緣]으로 도를 행하여 지혜를 쓰지 않는 경지[不用從慧]를 모두 지나, 생각이 없으나 생각을 여의지도 않은 경지[無有思想亦未離思想]에 도달하여 바른 선정[行止]을 누리면,[바야흐로 선정[定]을 누린다.] 또래로는 하늘의 무리인 생각이 없되 이해하는 하늘[無有思想解天]이라 하였거니와,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이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受行從得解]에서 도를 행여, 습(習)으로 이루어졌음을 이미 알고, 또한 종당에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또한 즐길만한 곳임을 알고, 또한 고를 느끼게 하는 곳임을 알고, 또한 여기서 벗어날 길[出要]이 있음도 알되 분명하게 알고서도, 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곳[受行從得解]을 구해야 할 곳이라고 여기며, 희망해야 할 곳이라고 여기며, 머무를 곳이라고 여기는 일이 있겠느냐?”
019_0234_c_05L阿難第二受行從得解從不色因緣行道一切不用從慧得過無有思想亦未離思想爲受行正受定也辟天名爲無有思想解阿難爲行道是受行從得解已知爲是解從是習亦知從是沒亦知是所樂知是更苦亦知從是要得出如有知是時阿難爲行道是受行從得解應求可應望可應住處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없사옵니다.”[무상(無想), 즉 생각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공(空)임을 알고 생각을 제어[制想]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상의 팔지(八止)도 모두 그렇게 알라. 이들 여덟 곳[八處]에서 습(習)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다함[盡]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즐거워 할 곳임[樂]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괴로운 곳임[苦]을 알고, 이들 여덟 곳에서 벗어나는 길[要得出]이 있음을 아는 것이, 그 이론[義]이 같기 때문에 거듭 풀이하지 않았다.]
019_0234_c_13L阿難對言無想者知空而制想不令起也此上八止皆如應知此八處亦知八處習亦知八處盡亦知八處樂亦知八處苦亦知八處要得出義同故不二訓之也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서도 말하기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 하거니와, 만일 이런 결사(結使 : 惑)가 있는 이는 때로는 항상하다고도 하고, 때로는 항상하지 않다고도 하며,[바라문(婆羅門)들은 단멸(斷滅)을 항상함[常]이라고 본다.] 때로는 세간의 근본[本]이 있다고도 하고, 때로는 세간의 근본이 없다고도 하며,[근본[本]이란 요점[要]이니, 요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한다.] 때로는 도(道)를 얻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하고, 때로는 도를 얻으면 죽지 않는다고도 하며,[혹은 일곱 번 생사에 왕복하는 이[七返生死]를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하고, 혹은 니유선천(尼惟先天)에 이르는 이가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한다.]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며,[혹은 세상을 건너갈 수 있다하고, 혹은 세상을 건너갈 수 없다한다.] 세상을 건넨다고도 하고, 죽는다고도 하여, 이로 인해 결(結)과 사(使)를 이루느니라.
019_0234_c_15L阿難爲行道如是知是見說爲不知不見若有是結使時應說爲常是時應說非常波羅門云斷滅見常也是時應說世閒有本是時應說世閒無有本本要也有要無要耳是時應說得道以死復生是時應說得道不得死或見七反生死者故曰死復生或至尼惟先天者故曰不死也爲有無有或曰有度世或曰無度世度世從是結使
019_0235_a_01L아난아, 이때에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식이 머무를 일곱 곳[七識止處]과 바른 공부로 지혜를 얻는 두 곳[二受行從得解]에서 분명, 진리[諦]대로 지혜롭게 보고, 여기서 뜻이 열려 해탈을 얻으면 이를 일러 아라한[阿難]이 집착 없는 도를 행하여 지혜롭게 해탈을 얻었다 하느니라.[“도를 얻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곧 오사결사(五耶結使 : 五邪結使)라고 뒤집어 말씀하신 것이니, 수행자가 구지(九止)의 끝까지를 사제(四諦)로 관찰해서 잘못된 견해를 쉬면 아라한(阿羅漢)이 된다.]
019_0234_c_22L是時阿難爲行道是七識止處二受行從得解如是如有從諦慧見從是意已解已得解脫是名阿難爲行道無所著從慧得解脫反稱得道不得死是五耶結使經乎九止行者以四諦觀之長得息解成阿羅漢也
아난아, 또한 여덟 가지 해탈처(解脫處)가 있나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색(色)으로 색을 관(觀)하면 첫째 해탈처(解脫處)니라.[내신(內身)과 외신(外身)에 두루 집착되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관해야 한다.]
안으로는 색을 관하지 않고, 밖으로만 색을 관하면 둘째 해탈처니라.[밖의 몸[外身]에 두루 집착한다.]
019_0235_a_03L亦有阿難八解脫處何等爲八色觀色是爲第一解脫處內外身著觀兩事也內觀色不想外觀是爲第二解脫處徧著外身也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을 관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관행(觀行)을 닦으면 셋째 해탈처(解脫處)니라.[두루 자기의 몸[己身]을 집착하기 때문에 삼십육물(三十六物)로 나누어 관(觀)하라 하셨으니, 초선천[第一禪]으로부터 제사선천[四禪]까지는 모두 삼관(三觀)을 닦는다. 사람[人]과 병통[病]이 같지 않아서 자기의 몸[己身]만을 탐(貪)하거나, 외부의 물질[外色]만을 탐하거나 안팎의 것[內外]을 함께 탐하기 때문에 삼관(三觀)이 있다. 사의지관(四意止觀)도 이와 같거니와 단순히 선의 요체[禪要]만으로 논(論)한다면 역시 삼관뿐이요, 만일 차츰차츰 제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사선(四禪)이어야 한다.]
019_0235_a_06L觀三十六物淨身受觀行止是爲第三解脫處遍著已身則三十六物觀也從第一禪至四禪皆三觀也人病不同或貪已身或貪外色內外俱貪故有三觀也四意止觀亦復如是單奉禪要則三觀也耳其轉除則四禪也
모든 색상(色想)을 이미 벗어나서,[이미 색계의 사선천(四禪天)을 벗어나서 다음의 공처(空處)로 온 것이다.] 땅 같은 생각[地想]이 사라지고,[없애려거나 싫어하는 마음[滅恚心]이 흙먼지[土塵]와 같기 때문에 땅 같다[如地]고 하셨다.] 갖가지 생각[若干想]도 일어나지 않고 무유량공(無有量空)의 지혜[空慧]를 누리어 공혜천(空慧天)의 또래를 이루면 넷째 해탈처(解脫處)니라.[사공정(四空定)은 문장[文]이 동일하기 때문에 낱낱이 풀이하지 않는다.]
공혜천(空慧天)의 모든 것에서 무유량식혜(無有量識慧)에 이르러 선정을 이루어 식혜천(識慧天)의 또래를 이루면 다섯째 해탈처(解脫處)니라.
019_0235_a_09L一切從色想已已遇四禪色天次及空也滅地想滅惠心如土塵故曰如地也若干想不念無有量空慧已受竟辟天名爲空慧是名爲第四解脫處四空定文同故不一一解也一切從空慧已度無有量識慧受竟辟天名爲識慧是名爲第五解脫處
식혜(識慧)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무소유불용(無所有不用)에 이르러 지혜로운 선정을 이루어 불용무소용혜행(不用無所用慧行)의 또래를 이루면 여섯째 해탈처(解脫處)니라.
불용혜(不用慧)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유사상역불무유사상(無有思想亦不無有思想)에 이르러 선정[竟受止]을 누리면 또래로는 사상천(思想天)의 무리 이니, 일곱째 해탈처(解脫處)니라.
019_0235_a_14L一切從識慧得度無所有不用受慧竟行辟天名爲不用無所用慧行是爲第六解脫處一切從不用慧得無有思想亦不無有思想竟受止辟天名爲思想是名爲第七解脫處
일체 무유사상[無有思想]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이미 사공정(四空定)이 끝나고, 다음은 멸진정[滅定:滅盡定]으로 오르려한다.] 사(思)와 상(想)이 사라지고, 또한 신(身)까지도 다했음을 각지[覺]한 뒤에 경촉이 끝난 상황[更竟]에서 선정[受止]을 누리면 이는 여덟째 해탈처[第八解脫處]니라.[마음의 흐름[心之流放]은 잠깐사이[眴息生滅之間]에 우주의 표면을 몽땅 어루만지거니와[爯撫宇宙之表] 육신에 가려졌기 때문[身之所復]에 반드시 수행[無不待行]을 가자(假資)해야 한다. 자비의 정[慈定]을 행하는 이가 마음의 알음알이[心想]와 상념(想念)과 몸의 감각[身知]을 모두 소멸해서 자신을 낮추기[屈]로는 썩은 그루터기[根株]와 같이 하고, 마음을 모으기[冥然]로는 식은 재[死灰]와 같이 하면 우뢰[雷霆]도 그의 정념[正念]을 깨뜨리지 못할 것이요, 겁화[山燋]도 그의 정려[靜慮]를 해치지 못한다. 소연(蕭然)하여 그 부피가 태허(太虛)와 같고, 염연(恬然)해서 그 교유[遊]함이 대자연[造化]과 같으므로 멸진정[滅定]이라 한다.]
019_0235_a_19L一切從無有思想竟得度將已竟四空次及滅定也思想亦覺盡身已更竟受止是爲第八解脫處心之流放眴息生滅之間爯撫宇宙之表矣身之所後無不待行行慈定者滅心想身知屈如根株冥如死灰雷霆不能駭其念山燋不能傷其慮蕭然與大虛齊量恬然與造化俱遊曰滅定也
019_0235_b_01L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도를 행하되 이 칠식지처(七識止處)와 이수행종득해탈(二修行從得解脫)과 또한 팔해탈처(八解脫處)도 이와 같이 수행하였더라도 이러한 지혜가 생긴 뒤에 다시 생각하기를 종전에 익히던 공부는 모두 멈추고[戢卻], 이미 얻은 해탈도 활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탕[本福]으로 삼아 신의 경촉을 멈춘 선정[身更竟止]을 이루면, 이를 일러 아라한[阿難 : 阿羅漢 : 阿羅訶]이 도를 행하되 두 가닥 길에 집착됨이 없는 행[兩行]으로 해탈을 이루었다 하느니라.”
019_0235_a_23L阿難行道七識止處二受行從得解脫亦是八解脫處是如有是慧已更見從是竟戢卻不用已得解脫是本福已身更竟止是名阿難行道無所著從兩行得解脫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아난이 받들어 행하였다.
019_0235_b_05L佛說如是難受行
佛說人本欲生經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