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0_1062_b_01L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020_1062_b_01L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강승회(康僧會)1) 서문[序]
020_1062_b_02L康僧會序


안반(安般)2)이라는 것은 여러 부처님들의 큰 가르침[大乘]으로, 세속에서 표류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안반의 선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것으로 6정[六情]을 다스린다. 정(情)에는 안[內]과 바깥[外]이 있는데,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心]은 안이고, 색(色)⋅성(聲)⋅향(香)⋅미(味)⋅촉감[細滑]⋅사념(邪念)은 바깥이라 한다. 경(經)에서 “여러 바다의 12가지 현상[事]”이라고 한 것은, 안과 바깥의 6정이 삿된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바다가 온 세상의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020_1062_b_03L夫安般者諸佛之大乘以濟衆生之漂流也其事有六以治六情情有內謂之內矣細滑邪念謂之外也經曰諸海十二事謂內外六情之受邪行猶海受
굶주린 사람이 꿈에서도 밥을 먹는 것은 대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음이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작은 것에도 6정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며, 그 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보아도 그것을 그릴 수 없고, 들어도 소리로 나타낼 수 없으며, 이것을 맞닥뜨려 알려 해도 그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좇아서 탐구해도 뒤에 남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은밀하고 너무나 오묘하여 그 모습을 터럭만큼도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범천[梵]·제석[釋]·신선[仙]·성자[聖]도 6정의 실체를 밝힐 수 없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마음에 심어져 고요히 생겨난 것이다.
020_1062_b_09L餓夫夢飯蓋無滿足也心之溢盪無微不浹怳惚髣髴出入無閒視之無形聽之無聲逆之無前尋之無後深微細妙形無絲髮梵釋僊聖所不能照明默種于此化生乎
육정의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을 ‘음[陰]’이라고 하니, 마치 그늘진 곳에 농부[種夫]가 땅을 깊게 파서 손수 씨앗을 덮어주면 씨앗이 셀 수 없을 만큼 열매를 맺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이루어진 과정을 알 수 없고, 씨를 뿌린 사람도 그 수(數)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하나가 썩어도 위에서는 만 가지가 생겨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960번을 변하게 되어, 하루 밤낮이면 13억의 생각[意]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마다 하나의 몸통[一身]이 있으나 마음[心]은 제 스스로 알 수 없으니, 저 씨 뿌리는 농부와 같은 것이다.
020_1062_b_13L彼非凡所謂之陰也猶以晦曀種夫深芬手覆種孳有萬億旁人不睹其形家不知其數也一朽乎下萬生乎上彈指之閒心九百六十轉一日一夕十三億意意有一身心不自知猶彼種夫也
이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이 날뛰지 않게 꽉 붙잡고 호흡을 시작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센다. 열을 셀 때까지 잘못되지 않으면 생각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짧은 입정[小定]3)은 3일을 하고, 긴 입정[大定]은 7일을 하는데, 고요히 다른 생각[念]은 없어지고 죽은 듯이 생각이 맑아지니, 이것을 첫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020_1062_b_19L是以行寂繫意著息數一至十數不誤意定在之小定三日定七日寂無他念怕然若死謂之一
020_1062_c_02L선(禪)은 버린다는 뜻이니, 13억의 더러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수를 세어 생각을 고요히 했고, 뜻[念]을 바꿔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르니, 더러운 생각은 열에 여덟이 제거되고 바로 두 가지 생각[二意]만 남게 된다. 이처럼 생각이 고요해지고 뜻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게 된 것은, 수를 세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도다.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가고 마음이 점점 맑아지게 되니, 이를 일러 두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020_1062_b_22L禪棄也棄十三億穢念之意已獲數定轉念著隨蠲除其八正有二意意定在隨由在數矣垢濁消滅心稍淸淨謂之二禪也
다시 그 나머지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코끝[鼻頭]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지(止)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는 지(止)의 선법을 얻으면 삼독(三毒)4)、사주(四走)5)、오음(五陰)6)、육명(六冥)7) 등의 모든 더러운 것이 소멸하게 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마음의 밝은 빛이 명월주(明月珠)의 빛보다 더 밝을 것이다. 음탕하고 거짓된 더러운 마음은 거울이 아주 더러운 진흙탕에 놓인 것과 같으니, 눕히면 하늘을 비출 것이고 엎어두면 땅만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스러우며 이치에 통달한 마음은 온 세상을 비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은 엿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한 까닭은 오직 그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혼탁해졌기 때문이니, 온갖 더러움에 물든 마음은 저 진흙탕에 놓인 거울보다 더 심한 것이 있는 것이다.
020_1062_c_04L又除其一注意鼻謂之止也得止之行三毒四走六冥諸穢滅矣㷡然心明踰明月婬邪污心猶鏡處泥穢垢污焉以照天覆以臨土聰睿聖達萬土臨雖有天地之大靡一夫而能睹以然者由其垢濁衆垢污心有踰彼鏡矣
만약 좋은 스승을 얻어 더러운 것을 깎아내고 마음을 잘 닦아내면, 마음에 남아 있던 적은 흠과 아주 작은 얼룩도 시원하게 씻기어 남은 것이 없게 되고, 이런 마음을 들어서 온 세상을 비춘다면 터럭과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이치까지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음에 묻은 흠이 없어지고 밝은 마음만이 남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情)은 생각[意]을 요동치게 하고 뜻[念]을 어지럽게 하여, 만 가지 이치 중에 하나라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시장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듣는다면 많은 소리들을 들으나, 집으로 돌아와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말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풀어지고 생각[意]이 흩어지면 그 총명함이 흐려지고 어둡게 된다. 만약 스스로 조용한 곳에 머물며 마음과 생각을 고요하게 한다면, 뜻[志]에 거짓된 욕망이 없게 되고, 귀를 기울여 고요히 듣게 되어서, 들은 불법의 모든 구절[萬句]을 조금도 잃지 않으며, 부처님의 한 마디 말씀[片言]도 분명하게 깨우치니, 마음[心]이 고요해지고 생각[意]이 맑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생각을 모아서 코끝에 집중하는 것, 이것을 세 번째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다.
020_1062_c_11L若得良師剗刮瑩磨薄塵微曀蕩使無餘擧之以照毛髮面理無微不察垢退明存使其然矣情溢意散萬不識一矣猶若於市馳心放聽廣採衆音退宴在思不識一夫之言心逸意散濁翳其聰也若自閑處思寂寞志無邪欲側耳靖聽萬句不片言斯著心靖意淸之所由也寂止意懸之鼻頭謂之三禪也
다시 그 몸을 관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반복하여 세밀히 살피면, 몸 안의 더러운 농과 빽빽하게 곤두선 머리털을 마치 눈물이나 고름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과 사물[物]을 모두 관찰한다면, 그 흥성함은 쇠망함과 같고, 존재하는 것은 쇠망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의 삼보(三寶)를 믿게 되고, 모든 어둠[冥]은 전부 밝아질 것이니, 이를 일러 네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020_1062_c_19L還觀其身自頭至足反覆微察內體污露森楚毛豎猶睹膿涕於斯具照天地人物其盛若衰無存不亡信佛三寶衆冥皆明謂之四禪也
020_1063_a_02L마음을 다잡아 고요히 하고 바른 뜻[念]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6정의 음(陰)이 다 소멸하게 되니, 이것을 환(還)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러운 욕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 그 마음은 곧바로 대상을 구분하는 의식작용(想)8)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을 정(淨)이라고 한다. 안반의 선법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곧장 밝아지고, 그 밝음으로 온 세상을 관찰한다면 아무리 깊이 감추어진 것도 관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지나온 셀 수 없는 겁(劫)의 시간, 현재와 미래의 일들, 사람[人]과 사물[物]의 변화, 현재 존재하는 방방곡곡의 모든 세상[諸刹],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다. 또한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교화, 그리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외고 학습하는 것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보지 못함이 없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없게 되어, 6정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모습도, 존재와 소멸의 시작과 그 이유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커지면 온 세상[八極]에 두루 미치게 되고, 가늘어지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것[毛釐]도 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수명(壽命)을 주관하며, 거룩한 덕[神德]을 발휘하고, 천병(天兵)9)도 무너뜨리며,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세상의 방방곡곡을 옮겨 다닌다. 이 여덟 가지 불가사의는 범천[梵]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신묘한 덕의 무한함은 안반의 여섯 가지 선법[六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020_1062_c_23L攝心還念陰皆滅謂之還也穢欲寂盡其心無謂之淨也得安般行者厥心卽明擧明所觀無幽不睹往無數劫方來之事人物所更現在諸剎其中所有世尊法化弟子誦習無遐不見無聲不聞怳惚髣髴存亡自由大彌八極細貫毛氂制天地住壽命猛神德天兵動三千移諸剎八不思議非梵所測神德無限六行之由也
세존께서 처음 이 경전을 말씀하려고 할 때, 큰 진동(震動)이 있어, 사람과 천신이 얼굴색을 바꾸어 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였고. 세존께서는 3일 동안 안반(安般)의 선법을 하시고 바로잡을 것[質]10)이 없게 되었다. 이 때 세존께서 변화되어 두 몸이 되었는데, 하나는 하등(何等)이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존주(尊主)라고 불렸으니, 이 당시의 일에서 그 뜻이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大士), 상인(上人), 육쌍(六雙), 십이배(十二輩)11) 모두 안반의 선법을 굳게 행하였다.
020_1063_a_09L世尊初欲說斯經時大于震動人天易色日安般無能質者於是世尊化爲兩一曰何等一尊主演于斯義出矣大士上人六雙十二輩靡不執行
이름이 안청(安清)인 보살이 있었는데, 자(字)는 세고(世高)이고 안식왕(安息王)12)의 정실 왕후의 자식이다. 그는 나라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다가13)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무르게 되었다. 또한 그는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며. 신묘한 모사[神摸]⋅천체의 운행[七正]14)⋅세상의 변화[盈縮]15)⋅풍기(風氣)⋅길흉(吉凶)⋅산사태[山崩]⋅지진[地動]⋅침놓기[鍼䘑] 등의 여러 기술에 통달했다. 낯빛을 보면 병을 알았고,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하늘과 땅[二儀]16)처럼 넓고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백성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먼저 자신의 귀를 세우고 자신의 눈을 열어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잘 보고 들으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백성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正眞]의 6도[六度]17)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안반의 비밀스럽고 오묘한 뜻을 번역해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그들의 더럽고 탁한 생각이 모두 없어졌으며, 맑고 깨끗한 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다.
020_1063_a_13L菩薩名安淸字世高安息王嫡后之讓國與叔馳避本土翔而後集處京師其爲人也博學多識貫綜神七正盈縮風氣吉凶山崩地動脈諸術睹色知病鳥獸鳴啼無音不懷二儀之弘仁愍黎庶之頑闇挑其耳卻啓其目欲之視明聽聰也乃陳演正眞之六度譯安般之秘奧學者塵興靡不去穢濁之操就淸白之德者也
020_1063_b_02L나는 말세에 태어나 땔감을 짊어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을 여의었고 세 분의 스승도 모두 돌아가셨다. 구름과 해를 우러러보았지만 슬프게도 질정을 받을 곳이 없게 되었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다.18) 오랫동안 쌓아온 복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선생님,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선생님, 회계(會稽)의 진혜(陳慧)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 분의 현자(賢者)들은 독실하고 철저하게 불도를 믿으셨고, 넓고 바른 덕을 지니고 계셨다. 또한 끊임없이 정진하셨으며 불도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내가 이 분들을 좇아 물음을 청하면, 세 분의 대답은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았고 그 의미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그리고 지혜를 베푸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내가 불도를 따져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제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비루한 데가 많고, 부처님의 뜻을 궁구하지도 못하였기에, 삼가 명철한 많은 현인들께서 함께 꼼꼼히 살펴봐주시고, 불법의 의미에도 군더더기가 많이 있으니, 성인들께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서 감춰졌던 부처님의 신묘한 뜻을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020_1063_a_23L余生末蹤始能負薪考妣殂落三師凋喪仰瞻雲日悲無質受睠言顧之潛然出涕宿祚未沒會見南陽韓林穎川皮業會稽陳慧此三賢者信道篤密執德弘正烝烝進進志道不倦余從之請問規同矩合無乖異陳慧注義余助斟酌非師所不敢自由也言多鄙拙不究佛意明哲衆賢願共臨察義有肬腨加聖刪定共顯神融矣
020_1063_b_09L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19)
020_1063_b_09L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此經多隨字除數息相隨之隨餘皆他本作隨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달진 번역
020_1063_b_10L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020_1063_b_11L佛在越祇國舍羈瘦國亦說一名遮匿迦羅國
이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아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시 홀로 90일 동안 앉아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 사람 및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020_1063_b_13L時佛坐行安般守意九十佛復獨坐九十日者思惟挍計欲度脫十方人及蜎飛蠕動之類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고 돌이켜서 안반수의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020_1063_b_15L我行安般守意九十日者安般守得自在慈念意還行安般守意已復收意行念也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020_1063_b_18L安爲身般爲息守意爲道
수(守)는 금함[禁]이고, 또한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금(禁)은 또한 보호함[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의(意)는 숨[息]이요, 또한 도(道)가 된다.
020_1063_b_19L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亦爲道也
안(安)은 생겨남[生]이고, 반(般)은 멸함[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가 된다.
020_1063_b_21L安爲生般爲滅意爲因守者爲道也
안(安)은 셈[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止]이 된다.
020_1063_b_22L安爲數般爲相隨意爲止也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020_1063_b_23L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안(安)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020_1063_b_24L安爲避罪般爲不入罪意爲道也
020_1063_c_02L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020_1063_c_02L安爲定般爲莫使動搖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유(有)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무(無)는 의(疑) 또는 공(空)이 된다.
020_1063_c_04L安爲有般爲無意念有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有者謂萬無者謂疑亦爲空也
안(安)은 본래의 인연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020_1063_c_07L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니, 다시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020_1063_c_09L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안(安)은 미(未)이고, 반은 기(起)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020_1063_c_12L安爲未般爲起已未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안(安)은 5음(陰)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020_1063_c_15L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020_1063_c_16L守意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수의(守意)는,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生]으로 인하여 죽음[死]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020_1063_c_19L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亦不死是爲道也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과 4제(諦)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020_1063_c_21L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수의(守意)는,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020_1063_c_23L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020_1064_a_02L수의(守意)는,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020_1064_a_02L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爲守意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와 의(意)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020_1064_a_04L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수의(守意) 가운데 네 가지 즐거움[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다.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得]은 도(道)가 된다.
020_1064_a_08L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爲四樂法爲行得爲道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에 안과 밖이 있다. 숨을 셈[數息]과 서로 따름[相隨]과 멈춤[止]은 밖[外]이 되고,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안[內]이 되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함과 서로 따름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된다.
020_1064_a_11L守意六事爲有內外止是爲外淨是爲隨道也何以故念息相隨止觀還欲習意近道故離是六事便隨世閒也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읨이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킴이 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일을 행할 뿐이다.
020_1064_a_15L數息爲遮意相隨爲斂意止爲定意觀爲離意還爲一意淨爲守意用人不能制意故行此六事耳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禪)을 얻지 못하는가? 습(習)을 다 버리며 도(道)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20_1064_a_17L以故數息用意亂故何以故不得不識故何以故不得禪用不棄習盡證行道故也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지(止)는 멍에가 되고, 관(觀)은 씨앗이 되며, 환(還)은 비가 되고, 정(淨)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020_1064_a_20L數息爲地相隨爲犂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乃隨道也
숨을 세어서 바깥을 끊고, 서로 따라서 안을 끓으며, 지(止)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관(觀)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還)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淨)이 된다.
020_1064_a_22L數息斷外相隨斷內爲止罪行觀卻意不受世閒爲還斷爲淨也
020_1064_b_02L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뜻을 끊으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도의 뜻을 얻으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5음(陰)을 향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돌이킬[還] 것이요, 소유가 없으려면 마땅히 청정[淨]해야 할 것이다.
020_1064_a_24L意亂當數息意定當相隨意斷當行止得道意當觀不向五陰當還無所有當爲淨也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 환(還)이 되며, 생각이 끊어지면 정(淨)이 된다.
020_1064_b_03L多事當數息少事當相隨家中意盡當行止畏世閒當觀不欲世閒爲還念斷爲淨也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5음(陰)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가? 5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지(止)하는가? 5음을 관(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5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가? 고(苦)를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환(還)하는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정(淨)하는가? 5음(陰)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020_1064_b_05L何以故數息不欲隨五陰故何以故相隨欲知五陰故何以故止欲觀五陰故何以故觀陰欲知身本故何以故知身本欲棄苦故何以故爲還生死故何以故爲淨分別五陰不受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道)를 얻고 따로 소원을 얻으니, 숨을 행할 때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출[止] 때는 정(定)을 따르며, 관(觀)할 때는 정(淨)을 따르며, 돌이킬[還] 때는 뜻을 따르며, 정(淨)할 때는 도(道)를 따르고 또한 행(行)을 따른다.
020_1064_b_11L便隨黠慧八種道得別爲得所願行息時爲隨數相隨時爲隨念時爲隨定觀時爲隨淨還時爲隨意淨時爲隨道亦爲隨行也
숨을 세는 것은 4의지(意止)가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4의단(意斷)이 되며, 멈춤[止]은 4신족념(神足念)이 되고, 관(觀)은 5근(根)과 5력(力)이 되며, 돌이킴[還]은 7각의(覺意)가 되고, 정(淨)은 8행(行)이 된다.
020_1064_b_14L數息爲四意止相隨爲四意斷爲四神足念觀爲五根五力還爲七覺意淨爲八行也
숨을 세는 것을 얻고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얻고도 멈추지[止]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을 얻고도 관(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관(觀)을 얻고도 돌이키지[還]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을 얻고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니, 청정함을 얻고 다시 청정해야 마침내 수의가 된다.
020_1064_b_17L得息不相隨不爲守意得相隨不止不爲守意得止不不爲守意得觀不還不爲守意還不淨不爲守意得淨復淨乃爲守意
이미 숨을 생각하여 악(惡)이 생겨나지 않는데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쇠(衰)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따름을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고, 멈춤[止]은 6쇠의 행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관(觀)은 6쇠의 행을 끊으려는 것이고, 돌이킴[還]은 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청정함[淨]은 6쇠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道)를 따르게 된다.
020_1064_b_21L已念息惡不生復數者爲共遮意不隨六衰故行相隨爲欲離六衰止爲欲卻六衰行觀爲欲斷六衰還爲欲不受六衰行淨爲欲滅六衰已滅盡便隨道也
020_1064_c_02L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데, 숨 가운데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이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惡)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020_1064_c_02L數息欲遮意息中有長短當復遮是長短意也何以故守意欲止惡故亦可守亦不可守何以故惡已盡當復守也
숨을 세는 것에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을 보고 마땅히 비상(非常)과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땅히 성냄ㆍ의심ㆍ질투함을 분명히 알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020_1064_c_06L數息有三事一者當坐行二者見色當念非常不淨三者當曉瞋念過去也
숨을 셈[數息]이 어지러운 것은 마땅히 인연을 좇아 일어난 바임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은 안의 뜻[內意]임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바깥 뜻[外意]의 허물이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오기 때문이요, 두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안의 뜻의 허물이니, 숨이 가운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요, 3ㆍ5ㆍ7ㆍ9번째는 바깥 뜻에 속하고, 4ㆍ6ㆍ8ㆍ10번째는 안의 뜻에 속한다. 질투ㆍ성냄ㆍ의심의 세 가지 뜻은 안에 있고,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의 일곱 가지 뜻과 나머지는 밖에 속한다.
020_1064_c_09L數息亂者當識因緣所從當知是內意一息亂者是外意過息從外入故二息亂者是內意過從中出故九屬外意十屬內意恚疑是三意在內兩舌惡口妄言綺語是七意及餘事屬外也
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밖이 되고, 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안이 된다. 숨은 뜻을 좇아 생기므로 생각과 숨을 합쳐 하나라고 세는데, 숨이 다 하면 하나를 세기도 하고 또한 하나를 세지 않기도 하는 것은, 뜻은 밖에 있는 채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돈을 세면서 뜻은 다섯 번째에 있는데 세기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숨을 셈[數息]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밖에는 7악(惡)이 있고 안에는 3악(惡)이 있으므로 적은 것이 능히 많은 것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020_1064_c_15L得息爲外不得息爲息從意生念息合爲一數息至盡數爲一亦非一意在外息未盡譬如數錢意在五數爲一也數息所以先數入者外有七惡內有三惡用少不能勝多故先數入也
숨을 셈에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본래의 뜻[本意]을 잃었기 때문이니, 본래의 뜻은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의 이치이다. 이 본래의 뜻을 잃고 뒤바뀜[顚倒]에 떨어지기 때문에 또한 사(師)를 잃어버린다. 사(師)는 처음 앉았을 때 첫 번째 들이 쉬는 숨[入息]에서 몸의 편안함과 차례대로 행함을 얻으니, 그 본래의 뜻을 잃었기 때문에 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020_1064_c_20L數息不得者失其本意故本意謂非常失是意墮顚倒故亦爲失師師者初坐時第一入息得身安便次第行爲失其本意故不得息也
020_1065_a_02L숨을 셈[數息]에 뜻으로 항상 마땅히 비상ㆍ고ㆍ공ㆍ비신을 생각해야 하며, 숨이 나와도 또한 없어지고 들어가도 또한 없어짐을 헤아려야 한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도를 얻음이 빠를 것이니, 마땅히 비상(非常)과 공(恐)의 뜻을 가져야만 하며, 이 뜻을 얻으면 곧 숨 세는 것을 얻는다.
020_1064_c_24L數息意常當念非常非身計息出亦滅亦滅已知是得道疾當持非常恐意得是意卽得息也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른 까닭은,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된다. 이런 까닭에 다른 것이니, 도인(道人)은 마땅히 이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020_1065_a_04L入息出息所以異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用是爲異道人當分別是意也
들이쉬는 숨은 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隨意]은 죄를 여의기 위함이며, 들이쉬는 숨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인연에 이르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위함이다.
020_1065_a_07L入息者爲不受罪出息者爲除罪守意者爲離罪入息者爲受因緣出息者爲到因緣意者爲不離因緣也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함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가 이름이요, 둘째는 행이 공교롭지 않아서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아서 이다.
020_1065_a_10L數息不得有三因緣一者罪到二者行不互三者精進也
들이쉬는 숨은 짧고 내쉬는 숨은 길며, 따라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罪)가 되니, 죄는 밖에 두어야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020_1065_a_12L入息短出息長無所從念爲道意有所念爲罪罪惡在外不在內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정(定)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긴 숨이 되고, 열 번째 숨을 얻은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休]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다. 숨이 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020_1065_a_13L數息時有離意爲喘息長得息爲喘息短不安行息爲長定爲短念萬物爲長息無所念爲短息未至十息復更數爲長息得十息爲短息得息爲短何以故止不復數故得息亦爲何以故息不休故爲長也喘息長自知喘息短自知謂意所在爲自知長意覺長短爲自知意不覺長短爲不自知也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려고 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춤을 얻을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020_1065_a_22L道人行安般守意欲止意當何因緣得止意聽說安般守意
020_1065_b_02L무엇이 안(安)이 되고, 무엇이 반(般)이 되는가? 안(安)은 들이쉬는 숨이라 하고, 반(般)은 내쉬는 숨이라고 한다. 생각과 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020_1065_a_23L等爲安何等爲般安名爲入息名爲出息念息不離是名爲安般意者欲得止意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네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두 가지 악(惡)을 제거하면 16승(勝)을 즉시 스스로 알아,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을 얻게 하리라.
020_1065_b_03L在行者新學者有四種安般守意行除兩惡十六勝時自知乃安般守意行令得止意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는 것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것이요, 셋째는 멈추는 것이요, 넷째는 관(觀)하는 것이다.
020_1065_b_05L等爲四種一爲數二爲相隨三爲止四爲觀
무엇이 두 가지 악(惡)인가? 열 번째 숨을 넘지 말 것과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말 것이다.
020_1065_b_07L何等爲兩惡莫過十息莫減十數
무엇이 16승(勝)인가? 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즉시 스스로 아는 열여섯 가지이다.
020_1065_b_08L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內無所復思喘息自知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是爲十六卽時自知也
무엇이 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은 것인가? 숨이 이미 다했는데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세는 것이 덜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서 놓친 것도 또한 악(惡)이요, 미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악이니, 이것이 두 가지 악이 된다.
020_1065_b_17L何等爲莫過十數莫減十數已盡未數是爲過息未盡便數是爲失數亦惡不及亦惡是爲兩惡
020_1065_c_02L두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긴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된다. 뜻이 긴 데에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왜 긴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니, 멈추면 집착이 된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한다[行息]고 이르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신명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했으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신명을 버리지 못한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道)가 되고, 긴 것은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숨이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도(道)보다 길면 짧음이 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된다.
020_1065_b_20L二息亂爲短息至九息亂爲長息十息爲快息相隨爲微意在長便轉我何以故念長意在短卽時覺不得令意止止爲著放棄軀命者謂行得道意便放棄軀命未得道意愛身故不放棄軀命也息細微爲道長爲生死短息動爲生死長於道爲何以故不得道意無知見故爲短也
숨을 세는 것은 단(單)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複)이 되며, 멈춤[止]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還]은 도를 행함이 되고, 청정함[淨]은 도에 들어감이 된다.
020_1065_c_05L數息爲單相隨爲複止爲一意觀爲知意還爲行道淨爲入道也
셀 때 생각이 열 번째 숨이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을 생각하고 공(空)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020_1065_c_07L數時爲至十息爲持是爲外禪念身不淨隨空是爲內禪也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을 ‘버린다’고 한다.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기(氣)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지 알아야 한다.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으면 또한 세지 못한다.
020_1065_c_09L禪法惡來不受名爲棄閉口數息隨氣出入知氣發何所滅何所意有所念不得數息遲疾大小亦不得數耳聞聲亂亦不得數也
숨을 셈에 뜻이 숨 세는 데만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뜻을 행하여야 마침내 멈춤[止]이 되며, 숨을 셀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은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氣)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는 것이다.
020_1065_c_13L數息意在息數爲不工行意在意乃爲止數息意但在息是爲不當知意所從起氣所滅是乃應數因緣盡便得定意也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惡)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된다.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니,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이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셈에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줄을 깨닫지 못해야만 이에 마땅히 한 생각을 지켜서 멈출 것이다.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으니, 인연을 얻어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으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020_1065_c_16L守意者念出入已念息不生惡故爲守意息見因緣生無因緣滅因緣斷息止也數息爲至誠息不亂爲忍辱數息氣微復覺出入如是當守一念止也息在亦在外得因緣息生罪未盡故有斷因緣息不復生也
숨을 셈에 제2선(禪)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다.
020_1065_c_22L數息以爲隨第二禪何以故用不待念故爲隨第二禪也
020_1066_a_02L숨을 세기만 하는 것은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숨은 들어오는 중이고 뜻은 다했으며 식(識)은 수를 세는 데 있다.
020_1065_c_24L數息爲不守意念息乃爲守意息從外入息未盡在入意在盡識在數也
열 가지 숨에 열 가지 뜻이 있어 열 개의 묶임[絆]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어 두 개의 묶임이 되며, 멈춤[止]에 한 가지 뜻이 있어 한 개의 묶임이 된다.
020_1066_a_03L十息有十意爲十絆相隨有二意爲二絆止爲一意爲一絆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수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으니, 이것이 조화가 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수 있다.
020_1066_a_05L不得息數爲惡意不可絆惡意止乃得數是爲和調可意絆也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을 버리며, 이미 멈춤을 얻었으면 멈춤을 버리고, 이미 관(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 것이니,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 뜻을 부리거나 또한 뜻이 숨을 부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
020_1066_a_06L已得息棄息已得相隨棄相隨已得止棄止已得觀棄觀莫復還莫復還莫復數息亦使意意亦使息也所念爲息使意無所念爲意使息也
숨에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바람, 둘째는 기운, 셋째는 숨, 넷째는 헐떡거림[喘]이다.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이 된다.
020_1066_a_10L息有四事一爲風二爲氣三爲息爲喘有聲爲風無聲爲氣出入爲息出入不盡爲喘也
숨을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은 안을 끊음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때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고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려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부터 나올 때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 바깥은 몸을 여읨이 되고, 안은 뜻을 여읨이 된다.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것이 되며, 나고 드는 숨 이것이 두 가지 일이 된다.
020_1066_a_13L數息斷外相隨斷數從外入爲斷外亦欲離外因緣數從中出爲欲離內因緣外爲身離內爲意離身離意離是爲相隨息是爲二事也
숨을 세는 것은 안과 밖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니, 무엇이 안과 밖인가? 안(眼)ㆍ이(耳)ㆍ비(鼻)ㆍ구(口)ㆍ신(身)ㆍ의(意)는 안이 되고,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ㆍ염(念)은 밖이 된다.
020_1066_a_17L數息爲欲斷內外因何等爲內謂眼意爲細滑念爲外也
숨 쉼을 행하는 것은 뜻을 공(空)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인데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려고 한다면 어떻게 공으로 향하겠는가? 숨 가운데는 숨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020_1066_a_19L行息爲使意向空但欲止餘意何以爲向空息中無所爲故也
숨을 셀 때 뜻이 달아나는 것 아닌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 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020_1066_a_21L數息意走不卽時覺者罪重意輕罪引意去疾故不覺
도(道)를 행하여 이미 숨 쉬는 것을 얻으면 저절로 숨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이 숨 쉬는 것을 얻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도 또한 그렇다.
020_1066_a_23L行道已得息自厭息意欲轉不復欲如是爲得息相隨止觀亦爾也
020_1066_b_02L나고 드는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모습[相]을 얻고, 생사(生死)를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모습을 얻는다면, 이미 4선(禪)을 얻은 것이니, 다만 공(空)을 생각하여 도(道)를 심을 것이다.
020_1066_a_24L出入息滅滅爲得息相知生死不復用爲得生死相已得四禪但念空爲種道栽
숨 쉬는 것을 행하여 이미 정(定)을 얻어서 다시 기(氣)의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관(觀)할 수 있으니, 첫째 마땅히 55가지 일을 관해야 하고, 둘째 마땅히 몸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020_1066_b_03L行息已得定不復覺氣出入便可觀當觀五十五事當觀身中十二因緣也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에 나고 드는 곳이 있는가?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그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그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生)ㆍ사(死)ㆍ식(識)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坐]이 된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고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020_1066_b_06L息出入寧有處不息入時是其處出息時是其處數息身坐痛痒思想生死識止不行是爲坐也念息得道復挍計者用息無所知故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가?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려고 하지만, 비록 숨을 세더라도 다만 악(惡)이 생겨나지 않을 뿐이요 지혜는 없으니, 마땅히 어떤 행으로 지혜를 얻어서 첫 번째로부터 열 번째까지 이르러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여 약(藥)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觀)을 따른다.
020_1066_b_09L念息得道何以爲無所知意知息不知意是爲無所知人不能得挍計意便令數息欲令意定雖數息但不生惡無有黠智當何等行得黠從一至十分別定亂識對行藥得定意便隨黠慧得挍計爲墮觀也
무엇이 세는 것[數]이 되는가? 센다는 것은 일[事]을 말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 번째까지 정하여 한 번 뜻을 일으키면 첫 번째가 되고, 두 번 뜻을 일으키면 두 번째가 되어, 세기를 열 번째에서 마치니, 열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020_1066_b_15L何等爲數數者謂事譬如人有事更求是爲數罪道人數福何以故正爲十一意起爲一二意起爲二終於十至十爲竟故言十數爲福
또한 죄가 있다는 것은, 능히 숨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6정(情)의 여섯 가지 일에다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을 합한 열 가지는 안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고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020_1066_b_19L有罪者用不能壞息故爲罪亦謂意生死不滅墮世閒已不斷世閒事爲罪也六情爲六事痛痒思想生死合爲十事應內十息兩舌妄言綺語嫉妒瞋恚應外十息謂止不行也
020_1066_c_02L무엇이 열여섯 가지 일인가? 열여섯 가지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름을 말하니, 즉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을 이 열여섯 번째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020_1066_c_02L何等爲十六事十事者謂數十六者謂數相隨是爲十六爲行不離爲隨道也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色)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應)하는가? 뜻을 행함이 세는 데에 있고 색과 기(氣)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이 도가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두 가지를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앉음[坐]이고, 둘째는 행함[行]이다.
020_1066_c_05L數息念風爲隨色何以應道行意在數不念氣盡便滅墮非常知非常爲道也道人欲得道要當知坐行二事一者爲二者爲行
앉음과 행함은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등 이 여섯 가지 일을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앉음[坐]이 되고, 뜻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이 되며, 이미 뜻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도 되고 또한 앉음도 된다.
020_1066_c_09L坐與行爲同不同有時同有時不同數息相隨此六事有時爲坐有時爲行何以數息意定是爲坐意隨法是爲行已起意不離爲行亦爲坐也
좌선(坐禪)하는 법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지 않고,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센다는 것은, 첫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두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된다.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두 번 들어왔는데 겨우 첫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된다.
020_1066_c_13L坐禪法一不數二二不數一一數二者謂數一息未竟便言二是爲一數二如是爲過精進二數一者謂息已入二甫言是爲二數一如是爲不及精進
세 번째로부터 네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로부터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로부터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로부터 열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첫 번째에 있어서는 첫 번째를 세고, 두 번째에서는 두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곧바로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020_1066_c_17L三至四五至六七至八九至十各自有分部當分別所屬在一數一在二數二是爲法行便墮精進也
앉음[坐]으로 도를 따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다.
020_1066_c_20L有三坐墮道一爲數息坐二爲誦經坐三爲聞經喜坐是爲三也
020_1067_a_02L앉음[坐]에 3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요, 둘째는 정좌(淨坐)요,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다.
무엇이 미합좌인가? 뜻이 행을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가 된다. 무엇이 정좌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가 된다. 무엇이 무유결좌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가 된다.
020_1066_c_22L坐有三品一爲味合坐二爲淨坐三爲無有結坐何等爲味合坐謂意著行不離是爲味合何謂爲淨坐謂不念爲淨坐何等爲無有結坐謂結已盡爲無有結坐也
숨[息]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다.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이 되고, 세어서 열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이 되고,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이 된다.
020_1067_a_03L息有三輩一爲雜息二爲淨息三爲道息不行道是爲雜息數至十息不是爲淨息已得道是爲道息也
숨에 세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 있다.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이요, 멈추고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이요, 멈추고 4선(禪)을 얻는 것은 미식이다.
020_1067_a_06L息有三輩有大息有中息有微息口有所語謂大息止念道中息止得四禪微息止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셨는가?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을 어지럽힘을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020_1067_a_09L佛何以教人數息守意有四因一者用不欲痛故二者用避亂意三者用閉因緣不欲與生死會故四者用欲得泥洹道故也
비유컨대 해가 광명이 없다고 설하는 것에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처럼,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020_1067_a_12L譬喩說日無光明者有四因緣一者用有雲故二者用有塵故三者用有大風故用有煙故數息不得亦有四因緣一者用念生死挍計故二者用飮食多故三者用疲極故四者用坐不得更罪地故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상(相)이 있으니, 앉아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상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상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 다만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상이요, 4면(面)으로 앉았기만 하여 한 숨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罪地)의 상이다. 만일 죄가 됨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으면 또한 화(禍)가 소멸될 것이다.
020_1067_a_18L此四事來皆有相坐數息忽念他事失息意是爲念挍計相節盡痛不能久坐是爲食多相身重意瞪瞢但欲睡眠是爲疲極相四面不得一息是爲罪地相以知罪經行若讀經文坐意不習罪亦禍消也
020_1067_b_02L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할 것이니, 무엇이 근본인가? 심(心)ㆍ의(意)ㆍ식(識)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보이지 않아서 이미 생겨났다가 곧바로 멸하여 근본의 뜻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된다. 근본의 뜻이 이미 소멸하면 고통이 있지 않으며,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진다.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가 되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止]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觀)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한다. 정(定)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한다.
020_1067_a_23L道人行道當念本何等爲本謂心意識是爲本是三事皆不見已生便滅本意不復生得是意爲道意本意已無爲痛更因緣生便斷也定意日勝日勝爲定意有時從息得定意時從相隨得定意有時從止得定意有時從觀得定意隨得定因緣直行
숨 쉬는 것을 행하여 또한 탐(貪)에 떨어지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지기 때문이니, 곧바로 마땅히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면 몸이 생겨나고,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
020_1067_b_07L行息亦墮貪何以故意以定便喜便當計出息入息念滅時息生身生息滅身滅尚未脫生死苦何以故已計如是便貪止也
숨을 세는 것은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느리게 하려고 하며, 때로는 숨 세는 것을 마땅히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을 빠르게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셀 때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세는 것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한다. 서로 따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020_1067_b_10L數息欲疾相隨欲遲有時數息當安徐相隨時當爲何以故數息意不亂當安徐數亂當爲疾相隨亦同如是也
첫 번째로 세는 것과 또한 서로 따르는 것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비록 숨을 세더라도 마땅히 기(氣)의 나고 듦을 알아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것과 지와 관을 행한다면, 이른바 숨 쉬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전생의 습(習)이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을 얻더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 세는 것으로부터 일으켜야 한다.
020_1067_b_13L第一數亦相隨所念異雖數息當知氣出入意著在數也數息復行相隨止觀者謂不得息前世有習在相隨止觀雖得相止觀當還從數息起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지 않으면 이것은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숨을 셀 때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곧 죄에 떨어진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의 뜻을 증득하고 멈춤[止]을 알 것이다. 멈춤은 관(觀)과 같고 돌이킴[還]은 정(淨)과 같다.
020_1067_b_17L數息意不是爲法離爲非法數息意不隨罪意在世閒便墮罪也數息爲不欲亂意故意以不亂復行相隨者證上次意知爲止止與觀同還與淨同也
도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그 뜻이 어긋났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거나 경(經)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禪)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으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
020_1067_b_21L道得微意當倒意者謂當更數息讀經已乃復行禪微意者謂不數息及行相隨也
020_1067_c_02L부처님은 여섯 가지 깨끗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 능히 형체 없는 것을 제어하신다.
020_1067_b_24L佛有六潔意謂數息相隨是六事能制無形也
숨은 또한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니, 왜냐하면, 셀 때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는 뜻과 숨이 각자 스스로 행동하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020_1067_c_03L息亦是意亦非何以故數時意在息爲是不數時意息各自行是爲非意從意生息已止無有意也
사람이 뜻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淨)에서 『37품경』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며 욕심을 따르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020_1067_c_06L人不使意意使人使意者謂數息相隨念『三十七品經』是爲使意人不行道貪求隨欲爲意使人也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때[垢]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3명(冥) 가운데서 가장 극심한 것이 이 구식이다. 무엇이 3명인가? 3독(毒)이 일어날 때는 몸속이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한다. 3독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瞋恚], 셋째 어리석음[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이 세 가지 일로 인해서 죽는 까닭에 독(毒)이라고 한다. 숨을 셀 때는 뜻이 숨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선한 뜻도 있고, 악한 뜻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뜻도 있다.
020_1067_c_09L息有垢息垢不去不得何等爲息垢謂三冥中最劇者爲息垢何等爲三冥謂三毒起時中正冥故言三冥三毒者一爲貪婬二爲瞋恚三爲愚癡人皆坐是三事故言毒也數息時意在數息未數有三意有善意有惡意有不善不惡意
사람이 숨 쉬는 상(相)을 얻었는지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觀)해서 뜻이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숨 쉬는 상을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의 뜻을 행함을 없애려고 해야 한다. 이른바 6정(情)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이다.
020_1067_c_16L欲知人得息相者當觀萬物及諸好色意不復著是爲得息相意復是爲未得當更精進行家中意欲盡者謂六情爲意家貪愛萬物皆爲意家也
서로 따르는 것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음(陰)과 6입(入)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020_1067_c_20L相隨者謂行善法從是得脫與相隨亦謂不隨五陰六入息與意相隨也
020_1068_a_02L세 번째 멈춤[止]은,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어 있는가?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모두 코로부터 나고 드니, 뜻으로 옛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이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禪)이니, 어떤 때는 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사(邪)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한 가지 일로 똑바로 관하여, 모든 악이 와도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020_1067_c_22L第三止何以故止在鼻頭用數相隨皆從鼻出入意習故處亦爲易識以是故著鼻頭也意來者斷爲禪有時在鼻頭止有時在心中止在所著爲止邪來亂人意直觀一事諸惡來心不當動心爲不畏之哉也
멈춤[止]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것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것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것이다.
020_1068_a_06L止有四一爲數止二爲相隨止三爲鼻頭止四爲息心止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5락(樂)과 6입(入)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그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춘다는 것이요, 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춘다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문득 한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또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이 된다.
020_1068_a_07L止者謂五樂六入當制止之也入息至盡鼻頭止謂惡不復入至鼻頭止出息至盡著鼻頭謂意不復離身行向惡故著鼻頭亦謂息初入時便一念向不復轉息出入亦不復覺是爲止也
멈춘다는 것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는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 뜻을 서로 관(觀)해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되 실패한다면 문득 상(相)을 받아들여 생사를 두려워해서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相)을 따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어 5음(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止]이 된다.
020_1068_a_13L止者如如出息入息覺知前意出不覺後意出覺前意爲意相觀便察出入息見敗便受相畏生死便卻便隨道意相也莫爲相隨者但念著鼻頭五陰因緣不復念罪斷意滅亦不喘息是爲止也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으며, 다시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한다.
020_1068_a_18L莫爲相隨者莫復意念出入隨五陰因緣不復喘息也
네 번째 관(觀)한다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숨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020_1068_a_20L第四觀者觀息敗時與觀身體異息見因緣生無因緣滅也
마음과 뜻으로 상(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른바 뜻에는 얻으려고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함을 헤아려서 곧바로 하고 싶은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020_1068_a_22L心意受相者謂意欲有所得心計因緣會當復滅便斷所欲不復向是爲心意受相也
020_1068_b_02L인연을 인식하여 상(相)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의 인연을 인식해 알아서, 내쉬는 숨도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숨도 또한 관한다는 것이다. 관(觀)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두 가지 인연이 되어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한다.
020_1068_a_24L以識因緣爲俱相觀者謂識知五陰因緣出息亦觀入息亦觀觀者謂觀五陰是爲俱觀亦應意意相觀爲兩因在內斷惡念道也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 쉬는 숨이 다름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陰)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것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또한 내쉬는 숨이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숨을 생긴다고 하며, 들이쉬는 숨을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숨이 생긴다고도 한다.
020_1068_b_05L觀出息異入息異者謂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隨因緣起便受陰意所向無有常是故爲異道人當分別知是亦謂出息滅入息生入息滅出息生也
연고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으니, 이것이 바로 연고가 없는 것이다.
020_1068_b_10L無有故者謂人意及萬物意起已滅物生復死是爲無有故也
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숨이며, 들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숨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때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때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020_1068_b_12L非出息是入息入息是出息非謂出息時意不念入入息時意不念出息所念異故言非也
중신(中信)은, 이른바 도(道) 가운데 들어가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이다.
020_1068_b_15L中信者謂入道中見道因緣是爲中信也
다섯 번째 돌이킨다[還]는 것은, 묶임[結]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여섯 번째 정(淨)은, 묶임을 버리는 것이니, 뜻의 세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還]고 하며, 돌이킨다는 것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020_1068_b_16L第五還棄結者謂棄身七惡第六淨棄結者爲棄意三惡是名爲還還者爲意不復起惡惡者是爲不還也
몸을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인 돌이킴[還]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고 한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020_1068_b_19L身者謂還惡得第五還尚有身亦無何以故有意有身無意無身意爲人種是名爲還還者謂意不復起惡起惡者是爲不還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니,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것이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것이 된다.
020_1068_b_23L亦謂前助身後助不殺兩舌惡口妄言綺語爲助身不嫉瞋恚是爲助意也
020_1068_c_02L5음(陰)을 돌이킨다는 것은, 비유컨대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듯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이 된다.
020_1068_c_02L五陰者譬如買金得石便棄捐地不人皆貪愛五陰得苦痛便不欲是爲還五陰也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본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이미 소유가 없다면 무슨 까닭에 ‘곳’이라고 하는가? 무소유한 곳이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곳을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곳을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곳을 삼고, 넷째 법은 관(觀)으로 곳을 삼는다.
020_1068_c_05L何等爲便見滅盡處無所有是爲滅處已無所有何以故爲處者無所有處有四處一者鳥以空中爲處二者羅漢以泥洹爲三者道以無有爲處四者法在觀處也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서 5음의 상(相)을 받는다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하여,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가 생기고 5음의 상을 받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상(相)을 받지 않음을 받는 것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 소멸한다는 것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020_1068_c_10L出息入息受五陰相者謂意邪疾轉還正以生覺斷爲受五陰相言受者謂受不受相也以受五陰相知起何所滅何所滅者爲受十二因緣人從十二因緣生亦從十二因緣死不念者爲不念五陰也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며, 또한 몸과 기(氣)가 생기고 소멸함도 생각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이다.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니, 이 생사의 도를 끊음이 이 생사 가운데 있으며, 일체의 악한 일이 모두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020_1068_c_15L知起何所何所謂善惡因緣起便復滅亦謂身亦謂氣生滅念便生不念便死意與身同等是爲斷生死道在是生死閒一切惡事皆從意來也
지금은 먼저가 아니고 먼저는 지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먼저 생각한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은 먼저 생각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福)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한 바의 선(善)은 먼저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의 숨은 지금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020_1068_c_19L今不爲前不爲今者謂前所念已滅今念非前亦謂前世所作今世所作各自得福亦謂今所行善非前所行惡亦謂今息非前息前息非今息也
020_1069_a_02L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뜻은 생각이 생겨나면 곧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말 한 것이다.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고 마니, 왜냐하면, 모두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문득 다하기 때문이니, 이미 다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할 것이다.
020_1068_c_23L爲生死分別者爲意念生卽生念滅卽滅故言生當分別萬物及身過去未來福爲索盡何以故盡以生便滅滅便盡已知當盡力求也
앞을 봄에 좇아서 온 바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온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 된다고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온 바가 있다고 하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 스스로 얻음이 바로 좇아 온 바가 없는 것이다.
020_1069_a_04L視上頭無所從來者謂人無所從來意起爲人亦謂人不自作來者爲有所從來人自作自得是爲無所從來也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을 분별함을 안다는 것이며, 또한 무상(無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020_1069_a_07L生死當分別者知分別五陰亦謂知分別意生死意爲常知無有常亦爲分別也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이 생사의 즈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020_1069_a_09L後視無處所者爲今現在不見罪人在生會當得無有脫於罪故言後視無有處所
아직 도의 자취를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열다섯 가지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를 것이다.
020_1069_a_12L未得道迹不得中命盡謂已得十五意不得中死要當得十五意便墮道亦轉上至阿羅漢也
중도에 도의 자취를 얻어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 것은, 숨과 뜻과 몸의 세 가지 일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마땅히 도의 자취를 얻었다가 또한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또한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020_1069_a_14L中得道亦不得中命盡爲息意身凡三事善惡意要當得道迹亦復中壞息死復生善意起復滅身亦不得中死也
무엇이 정(淨)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淨)이 된다.
무엇이 5음(陰)의 상(相)인가? 비유컨대 불은 음(陰)이 되고 땔감은 상(相)이 된다.
020_1069_a_17L何等爲淨謂諸所貪欲爲不淨除去貪欲是爲淨何等爲五陰相譬喩火爲陰薪爲相也
숨을 세는 것[數息]으로부터 정(淨)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관(觀)이 되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고 밖의 뜻으로 나쁜 인연을 끊음이 바로 두 가지 뜻이 된다.
020_1069_a_20L從息至淨是皆爲觀謂觀身相隨止觀還淨本爲無有意數息外意斷惡因緣是爲二意也
020_1069_b_02L무슨 까닭에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고 돌이키고 청정함을 하는가? 뜻이 청정하지[淨] 않기 때문에 몸을 보지 못하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 도(道)가 있음을 다 본다. 열아홉 가지 행이 있는데,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瞋恚]을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가?’라고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愚癡]을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된다.
020_1069_a_22L何以故不先內外觀身體反先數相隨用意不淨故見身意已淨便悉見身內外道行有十九行用人有十九病故亦有十九觀身念惡露是爲止貪婬藥念四等心是爲止瞋恚藥自計本何因緣是爲止愚癡藥安般守意是爲多念藥也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할 것이니, 무엇이 신(身)이 되고, 무엇이 체(體)가 되는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정(情)이 합하여 체가 된다.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움[細滑]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된다.
020_1069_b_07L內外自觀身體何等爲身等爲體骨肉爲身六情合爲體也等爲六情謂眼合色耳受聲鼻向香口欲味細滑爲身衰意爲種栽爲癡爲有生物也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은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020_1069_b_11L內外身體所以重出者謂人貪求有大小有前後謂所欲得當分別觀
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해 보이게 되니, 관한다는 것은 즉 아는 것이다.
020_1069_b_13L觀者見爲念念因見觀者爲知也
신체를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識)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020_1069_b_14L身觀止者坐念起起念意不離在所行意所著爲識是爲身觀止也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한 때가 되는가? 나고 듦을 생각하여 기(氣)가 다했을 때 뜻과 숨이 소멸하는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비유컨대 허공에 그리려 해도 그릴 곳이 없는 것처럼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모두 그러하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숨과 뜻을 설명할 수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한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한 때가 된다.
020_1069_b_16L出息入息念滅時何等爲念滅時謂念出入氣盡時意息滅出息入息念滅時譬如畫空中無有處生死道意俱爾也出息入息念滅時亦不說息意息說滅時出息入息念滅時物從因緣生斷本爲滅時也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된다.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의 맞는 뜻은 내양(內痒)이 되고 안의 맞지 않는 뜻은 내통(內痛)이 된다.
020_1069_b_21L內外痛痒見觀者爲見痛痒所從起便觀是爲見觀也內外痛痒者謂外好物爲外痒外惡物爲外痛內可意爲內痒內不可意爲內痛
020_1069_c_02L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痒)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으로 내키지 않는 것이 바로 통(痛)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진다.
020_1069_c_02L在內爲內法在外因緣爲外法亦謂目爲內色爲外爲內聲爲外鼻爲內香爲外口爲內味爲外心爲內念爲外見好細滑欲得是爲痒見麤惡意不用是爲痛俱墮罪也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뚝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저 일체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을 멈춤이 된다.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데에 집착한 바가 없으며, 스스로 몸을 아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도 또한 멈춤[止]이 된다.
020_1069_c_07L痛痒觀止者若人臂痛意不作痛反念他一切身痛如是以意不在痛爲止痛亦可念亦不可念念痛無所著自愛身當觀他人身意愛他人身當自觀身亦爲止也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色]를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어서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 관함에 많거나 적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하는 도를 두 가지로 분별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한다.
020_1069_c_11L內外痛痒所以重出者何謂人見色愛有薄厚其意不等觀多與少異故重分別觀道當內觀有癡當外觀以自證也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자 다르니, 춥고 더움 그리고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 통(痛)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 양(痒)이 된다. 마음의 통(痛)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만 가지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통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 양(痒)이 된다.
020_1069_c_15L身心痛痒各自異得寒熱杖痛極是爲身痛得美飯載車好衣身諸所便是爲身痒心痛者身自憂復憂他人及萬事是爲心痛心得所好及諸歡喜是爲心痒也
뜻의 상(相)을 관하는 것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락(樂)ㆍ6쇠(衰)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020_1069_c_19L意相觀者有兩因緣在內斷惡念道一者謂五樂六衰當制斷之
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麤)와 세(細)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면 숨도 또한 이 뜻이요, 세는 것도 또한 이 뜻이니, 셀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020_1069_c_21L觀者自觀身身不知麤細以得乃覺是爲意意相觀意相觀息亦是意數亦是意數時觀爲意意相觀也
020_1070_a_02L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음탕[婬]한 짓을 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하지 않으며, 성[瞋恚]을 내려고 하면 제지하여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 하면 제지하여 짓지 않으며, 탐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구하지 않아서, 모든 악한 일을 일절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된다. 또한 『37품경』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된다.
020_1069_c_24L意觀止者欲婬制爲欲瞋恚制不怒欲癡制不作欲貪不求諸惡事一切不向是爲觀止亦謂以知『三十七品經』常念不離爲止也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다[盡]하고 정(定)하여 문득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것은 죄가 다함을 말하고, 정은 숨이 뜻을 멈춤을 말한다.
020_1070_a_05L出息入息盡定便觀者盡謂罪定謂息止意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춤[盡止]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더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된다. 숨을 일으키는 곳에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삿됨을 생각하여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러함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020_1070_a_06L定觀者謂觀止還淨也盡止者謂我能說是曉是遍更是是爲盡止也所起息若布施作福一切善法已起便滅更意念耶向習罪行亦無古世今世意不如是相隨他人亦已知覺當斷已斷爲內外意意觀止也
안팎의 법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의 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은 다른 사람을 말하며,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본받는 것이다.
020_1070_a_12L內外法法者內法謂身外法謂他人有持戒法有不持戒法是爲內外法法也
안의 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뜻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이 된다. 밖의 법은, 생사를 따르고 생사를 행하면 문득 생사를 얻어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만 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020_1070_a_14L內法謂行黠不離『三十七品經』一切餘事意不墮中行道得道爲內法外法謂墮生死謂生死行便得生死不脫一切當斷已斷爲內外法觀止也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몸을 제 몸인 줄 알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내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눈도 또한 몸이 아니고 색도 또한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識)이 있을 뿐이지 또한 몸은 아닌 것이다.
020_1070_a_18L法觀止者一切人皆自身爲身諦挍計非我身何以故有眼有色亦非身色亦非身何以故人已死眼無所見亦有色無所應身如是有識亦非身
왜냐하면, 식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또한 그러하며, 이렇게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020_1070_a_22L何以故識無有形亦無所輕止如是計眼意亦爾得是計爲法觀止亦謂不念惡爲止念惡爲不止何以故意行故也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강승회(康僧會) : 지겸에 이어 3세기 중반부터 활동한 역경승이다. 그는 오의 손권(孫權)에 이어 손호(孫皓)에 이르기까지 수도였던 건업(建鄴,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육도집경』및『구잡비유경』등을 번역하였다. 이상옥,「고역(古譯) 경전에 나타난 ‘참회(懺悔)’ 용어의 번역과 정착 과정」,『한국선학』33호, 한국선학회, 2012, 168~169쪽 참조.
  2. 2)안반(安般) : 범어 ‘anapana’를 음사한 말로 아나파나(阿那波那) 혹은 안나반나(安那般那)로 표기되던 것을 줄여 안반이라 고 한 것이다. 같은 말로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하는데, 수를 헤아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집중시키는 관법이다.
  3. 3)소정(小定) :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4. 4)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 따위를 독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5. 5)사주(四走) : 마음이 사방으로 치닫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명확하지 않다.
  6. 6)오음(五陰) :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이다. 물체인 색(色), 감각인 수(受), 인식 작용의 상(想), 의지 작용인 행(行), 마음 작용의 식(識)을 이른다.
  7. 7)육명(六冥) : 직역하면 여섯 가지 어둠을 뜻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전의 번역에서는 6도(六道)로 번역해 두었으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육도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8. 8)상(想)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의식 작용을 말한다.
  9. 9)천병(天兵) : 황제의 군대를 의미하기도 하며 혹은 하늘이 내려 보낸 군사나 수많은 군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10. 10)질(質) : 질정(質正)을 의미한다. 즉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11. 11)십이배(十二輩) : 십이배는 십이천(十二天)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십이천은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이란 의미로 그곳을 지키는 열두 신(神). 사방(四方), 사유(四維)의 팔천(八天)에 상, 하의 2천(天) 및 일(日), 월(月)의 2천(天)을 더한 것이다. 곧 동에 제석천(帝釋天), 동남에 화천(火天), 남에 염마천(閻魔天), 서남에 나찰천(羅刹天), 서에 수천(水天), 서북에 풍천(風天), 북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에 대자재천(大自在天), 상(上)에 범천(梵天), 하(下)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 월천(月天)을 이른다.
  12. 12)안식왕(安息王) : 고대 이란계 왕국인 파르티아의 왕을 말한다.
  13. 13)상이후집(翔而後集) :『논어』「향당(鄕黨)」의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는 내용에서 나온 말이다.
  14. 14)칠정(七正) : 일(日)ㆍ월(月)과,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성(五星)인데, 순 임금이 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길흉을 판단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한다.
  15. 15)영축(盈縮) : 진퇴(進退)ㆍ굴신(屈伸)ㆍ다소(多少)ㆍ장단(長短)ㆍ수요(壽夭)ㆍ영허(盈虛) 등 온갖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16. 16)이의(二儀) : 양과 음, 또는 하늘과 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7. 17)육도(六度) :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을 말한다.
  18. 18)머리를 돌려 ~ 흐를 뿐이다. :『시경(詩經)』「대동(大東)」에 “주나라가 가는 길은 숫돌처럼 판판하여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길이요 소인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내가 머리를 돌려 그 길을 돌아보며 줄줄 눈물을 흘리노라.[周道如砥 其直如矢 君子所履 小人所視 睠言顧之 潸焉出涕]”라는 내용이 있다.
  19. 19)이 경에서는 수(隨)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하는데, 수식상수(數息相隨)의 수 자를 생략한다. 나머지 다른 모든 본(本)에서는 수 자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