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0_1086_a_01L
음지입경 하권
020_1086_a_01L陰持入經卷下 此經多御字他本皆作行


후한 안식국 삼장 안세고 한역
본문; 김달진 번역
원주; 김두재 번역
020_1086_a_02L後漢安息國三藏安世高譯


저 애욕의 약(藥)은 무엇인가? 지(止)이니, 애욕에서 이미 벗어나고 뜻에서도 또한 벗어나서 뜻이 이미 벗어나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애욕이라는 병은 지(止)가 그 병을 고치는 약이 된다.
저 어리석음의 약은 무엇인가? 관(觀)이니, 어리석음을 이미 제거해 벗어나고 지혜를 좇아 해탈하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두 가지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첫째는 자(字)요, 둘째는 색(色)이다. 두 가지 법을 마땅히 버려야 하니, 첫째는 어리석음이요, 둘째는 애욕이다.어리석음과 애욕 등의 네 가지 음(陰)은 자(字)가 되고, 4대(大)는 물질이 되니, 그것이 몸속에 합해지거니와, 다만 어리석음과 애욕은 명(名)과 자(字)를 다 가지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지관법(止觀法)으로 따라가서 없애야 한다.
두 가지 법을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 하니,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해탈이다. 두 가지 법을 행해야 하니, 첫째는 지(止)요, 둘째는 관(觀)이다.
저 지(止)를 이미 행했으면 색(色)을 식별하고, 색을 이미 식별하면 애욕이 버려지며4대를 아는 것이 색(色)을 식별하는 것이다. 뜻≺意≻은 색을 물들이지 않으니, 색을 물들이지 않는다면 곧 바라봄≺望≻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색을 식별하여 애욕을 버리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020_1086_a_03L彼愛欲藥爲何等爲止愛已解意亦意已解病便愈愛之爲病止爲下藥彼癡藥爲何等爲觀癡已卻解從慧解脫爲病愈如是佛說如是二法當知一爲二爲色二法當捨一爲癡二爲愛癡與愛者謂四陰爲字四大爲色合身中伹有癡愛名與字御家當以止觀往消索也二法當自知一爲慧二爲解脫二法可御一爲止二爲觀彼止已御令識色已識令愛得捨知四大爲識色意卽不染色矣不染色者卽不墮望故言識色令愛得捨也
020_1086_b_02L애욕에서 이미 벗어나면 뜻이 곧 해탈을 얻어 스스로 증지(證知)하게 된다.
지(止)를 이미 행하여 만족하면 곧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고지(止)를 행하여 만족하면 곧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다., 어리석음을 이미 버렸다면 곧 지혜를 좇아 해탈을 얻어 스스로 증지(證知)하게 된다.
만일 비구가 이미 자(字)와 색(色) 두 가지 법을 알고, 두 가지 법으로 어리석음과 애욕을 버려 이와 같이 평등하면 곧바로 집착한 바가 없어서 어리석은 행(行)을 마치고지관(止觀)으로 어리석음과 애욕을 없애는 것이 수행을 마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세간을 건너려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유여(有餘)함이 되므로 무위(無爲)에는 아직 건너가지 않은 것이다.‘무위(無爲)에는 건너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니원(泥洹:涅槃)의 경지에는 이르렀으나 완전한 니왈(泥曰:열반)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무위를 마치고 나서이미 니왈의 경지를 증득한 것이다. 명상(命相)을 마치면다시는 나고 죽음과 수명 등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곧바로 고(苦)가 다하게 되어 다음에는 고가 없도록 하며, 저 소유한 음(陰)ㆍ지(止)ㆍ입(入)을 이미 다하고 적정함에 머물러다음에는 음ㆍ지ㆍ입이 없도록 해서 서로 이어짐도 없고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면악한 뜻이 소멸되면 다시는 나고 죽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여(無餘)한 것이므로악한 뜻이 다 사라져서 미세한 것도 남음이 없다는 말이다. 세간을 건너는 무위를 얻을 것이다. 이것이 두 종류의 무위(無爲)이다.
020_1086_a_14L愛已解意便得解脫自證知止已御滿足便得捨癡止御滿足便得捨癡已得捨癡便從慧得解脫自證知若比丘已二法自知字亦色已二法捨癡亦愛是齊是便無所著應御畢謂止觀除癡愛爲御畢也欲度世是爲尚有餘無爲未度無爲未度者謂已泥洹未泥日已無爲竟謂已得泥日也命已竟畢謂不復受生死壽命便爲苦盡令後無苦彼以有是陰亦持亦入已盡止寂然從後無陰亦持亦入無相連不復起謂惡意滅不復起生死是爲無餘謂惡意盡滅無微餘得度世無爲畢是爲二無爲種
무엇이 저 탐하지 않는 청정함의 근본인가? 삼계 가운데서 얻으려고 하지 않으며, 바라지도 않으며, 구하지도 않는 것을이미 세 가지 선정을 얻은 이는 6정을 다시는 삼계 안에서 구하여 찾지 않으니, 이를 일러 청정함의 근본이라고 한다. 탐하지 않는 청정함의 근본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탐하지 않음의 근본이 되는가? 몸이 청정하고 말이 청정하며 또한 다른 것을 청정한 법과 서로 연결하여 뜻으로 생각한 바가 근본이 되니다시 삿됨이 일어남이 없어서 생각하는 바가 37품경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탐하지 않는 청정함의 근본이다.
또한 청정함의 근본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행이 이 청정함의 근본이다. 저 세 가지 청정한 도종(道種)이 바로 탐하지 않음의 근본이 된다.
020_1086_b_05L彼不貪淸淨本爲何等爲三界中不得不求已得三定者六情不復於三界中有所求索也謂之淸淨本名爲不貪淸淨本是本爲誰爲不貪身淸淨言淸淨亦餘相連淸淨法意所念爲本謂無復邪起所念在三十七品經也是爲不貪淸淨本亦有淸淨本佛說爲八種是淸淨本彼爲三淸淨道種是爲不貪本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바른 방편으로 다스림이요, 둘째는 바른 생각이요, 셋째는 바른 정(定)이니, 이것이 세 가지 청정한 도종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탐하지 않는 청정한 근본이라고 한다.
저 성냄이 없어 법을 범하지 않음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忍)의 소행으로 미래에 성내지 않고, 인(忍)의 인연으로 성내지도 않으며, 성내지 않으므로 재앙을 받지 않으며, 성냄[恚]도 없고 화냄[瞋]도 없고 또한 화내지도 않으며성냄이 있으면 곧 화냄이 이르나니, 만약 성냄이 없으면 곧 화냄도 없어진다., 원망[怨]이 없고 또한 원망을 생각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성냄이 없어 법을 범하지 않음의 근본이 되며, 그러므로 이것을 성냄이 없어 법을 범하지 않음의 근본이라고 한다.
또한 세 가지 청정한 도의 씨앗[道種]이 있어서 성냄이 없어 법을 범하지 않음의 근본이 되니, 첫째는 바른 말, 둘째는 바른 업, 셋째는 바르게 이룬 이익도를 얻으면 이익을 이루니, 몸과 뜻을 좇아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도행(道行)을 취한다는 말이다. 또 뜻≺意≻을 발함을 좇아 멈추어≺止≻ 도를 얻음에 이름이 이익을 이룬다는 말이다.으로서 이 세 가지가 청정한 도종이 되며, 이것을 성냄이 없어 법을 범하지 않음의 근본이라고 한다.
020_1086_b_13L何等爲三一爲直方便治直念三爲直定是爲三淸淨道種本是故名爲不貪淸淨本彼無恚不犯法本爲何等若忍所御未來爲不出恚忍因緣爲不恚不恚不受殃無恚無瞋亦不瞋有恚卽瞋到若無恚卽無瞋也無怨亦不想怨是爲無恚不犯法本是故名爲無恚不犯法本亦有三淸淨道種無恚不犯法本爲正語二爲正業三爲正致利 謂得道者爲致利也從身意上前取八道御亦謂從發意止至得道爲致利也爲三淸淨道種是故名爲無恚不犯法本
020_1086_c_02L저 미혹되지 않은 청정함의 근본은 무엇인가? 혜(慧)를 좇아 4제(諦)가 여법하게 있음을 보고 여법하게 있는 것을 청정하게 응해 받아서 어리석지도 않고, 미혹되지도 않으며, 미혹을 따르지도 않고, 또한 미혹에 떨어지지도 않아37품경을 얻음으로써 이 온갖 의혹의 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혜가 밝아 상(相)을 밝히는 소견으로3독(毒: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이미 제거해 버리면 지혜로워져서 밝아지고, 8직도(直道:정도)를 통하면 상(相)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청정한 법을 좇으니, 이것이 미혹되지 않은 청정함의 근본이 된다.
어떤 것이 미혹되지 않은 청정함의 근본이 되는가? 몸의 행과 말의 행과 마음의 행이 청정한 법과 서로 연결되어 뜻으로 생각하는 법이 근본이 된다.‘법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37품의 법이다.
또한 두 가지 청정한 도의 씨앗이 미혹되지 않음의 근본이 되니, 첫째는 바른 소견, 둘째는 바른 행으로서 이것이 두 가지 청정한 도종의 근본이 되며, 그러므로 미혹되지 않은 청정한 근본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청정함은 여덟 가지 도의 씨앗이 되어 똑같이 곳에 따라 비상(非常)함에 응하는 것이 이와 같다.‘분(份)’의 음은 부분(部分)의 분(分)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응하여 37품에 응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020_1086_c_02L彼不惑淸淨本爲何等爲從慧見四諦如有如有應受淸淨不愚不惑不隨惑亦不墮惑 謂以得三十七品終不墮是諸惑事也慧明明相見謂三毒已除爲慧明通八直道爲相見也從淸淨是爲不惑淸淨本是本爲誰不惑淸淨所身御所言御所心御所相連淸淨法爲意思惟相念所法法本三十七品法也亦爲從二淸淨道種不惑本一爲直見二爲直御是爲從二淸淨道種本是故名爲不惑淸淨是爲三淸淨爲八種道已份在所隨應份音如部分之分隨佛教應應三十七品御也非常如是
저 비상상(非常想)은 무엇인가? 일체의 행하는 바가 바로 항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생각한 바를 계교해 알아서 받음이 바로 비상상이다.이미 생각하여 계교함이 있으면 곧 자신이 아는 것을 마침내 지어서 쉬지 않음이 ‘받음’이 된다.
또한 세간으로부터 여덟 가지 법이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이익이 있거나수행하는 사람은 지극한 공양의 이익을 얻음을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고덕을 닦는데도 얽매이고 줄어드는 것을 일러 ‘이익이 없다’고 하였다., 이름이 알려지거나덕의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이름이 알려짐’이라고 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수행이 갖추어지고 덕이 높으나 온갖 사(邪)에 저지당함을 일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의론(議論)이 있거나청정하고 담박(淡泊)한 것을 삿된 무리들이 거짓으로 비방함을 일러 논의(論議)라고 한다.
020_1086_c_15L彼非常想爲何等一切所御是非常想所想計知是爲受已有想計卽自知遂作不息爲受也是爲非常想亦從有世閒八法何等爲八有利御家獲極供之利心不悅豫矣無利修德而累耗謂之無利也名聞德馨遠香謂之名聞不名聞御備德高爲群邪所遏謂之不聞矣有論議淸淨淡泊邪黨虛謗謂之論議
020_1087_a_02L의론이 없고덕이 높아 비방을 막되 교만하지 않은 것이다., 괴롭다거나의지가 왕성하고 도를 지키지만 어려움과 근심이 계속 이어져서 혹은 사라져 없어지는 재앙이 있기도 하고 3악도에서 죄를 받기도 하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즐겁게천왕(天王)의 영화를 얻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한다. 여기는 뜻에 떨어지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아서즐거움에 떨어지는 것이다. 영광을 누리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행실이 타락(墮落)하지 않고, 삿된 무리의 교묘하고 찬란한 빛을 6정이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익이 있어도 기뻐하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 『법경경(法鏡經)』에서 이르기를, “이익≺利≻과 손해≺衰≻와 헐뜯음≺毁≻과 기림≺譽≻과 칭찬함≺稱≻과 나무람≺譏≻과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에 기울어져 동요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끗한 선정을 닦는 이가 우러러 흠모하는 것이다.,여러 가지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멈추어 호지(護持)하고 관하여 생각한다면 악이 멎을 것이니‘호지하고 관함’이란 적절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멈추다’란 멈추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을 실천하기 때문에 악이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비상상이다.
020_1086_c_23L無論議德高遏謗不以憍也若苦殖志守道而艱患相或有灰滅之禍三塗之罪謂之苦若樂獲天王之榮從心之願謂之樂也意不墮不受墮樂也處榮不憍御不墮落邪巧炫耀六情在受不爲喜耗卽不憂『法鏡經』日:"利衰毀譽稱議苦樂不以傾動"斯淨定之仰者矣從若干思不受止護觀思惡得止護觀不使失適也止止不受上若干思想也御是二意故惡止也名爲非常想
저 고상(苦想)은 무엇인가? 일체 세간의 행은 이 고(苦)뿐이라고 생각하여 깨달아 알아서 받음을괴로움인 줄 알면서도 마침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니,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깨달아 없애 버린다. 바로 고상(苦想)이라고 한다.
020_1087_a_05L彼苦想爲何等爲一切世閒御是爲苦所想覺知受謂知苦而竟故御家當覺滅之也是名爲苦想
무엇이 이 요지(要旨)를 따르는 것인가? 고상(苦想)을 바라봄을 이미 익히고 증장하여 생각하는 바가 너무 많으면일체의 모든 괴로움은 습(習)을 따라 늘어나고 많아진다. 탐욕이 이미 풍족하며탐욕은 온갖 물질로부터 생겨나고, 욕망은 위태로움을 좇아 생겨나며, 성냄은 질투를 좇아 생겨나고, 우매함은 물어보지 않음으로부터 생겨나며, 어리석음은 어두움으로부터 생겨나니, 탐욕ㆍ욕망ㆍ성냄ㆍ화냄ㆍ우매함ㆍ어리석음이 풍족한 것이다., 탐욕에 떨어지지 않으며사람들은 탐내고 바람을 좇아 늙게 되고, 성내고 화냄을 따라 병이 들며, 우매하고 어리석음을 좇아 죽게 되고, 복과 덕을 좇아 태어나니,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37품(品)의 미묘한 법을 얻었다면 곧 탐욕에 떨어지지 않는다., 탐망하는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면 서로 끌리어 떨어지지 않고‘끌리어≺牽≻’는 이어지다≺連≻라는 의미이니, 말하자면 도를 수행할 마음이 이어져서 나고 죽음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뜻을 생각하지 않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호지(護持)하여 관함을 덕[己]으로 삼으면 악이 멎을 것이니‘기(己)’란 덕(德)이고, ‘악(惡)’이란 6정이며, ‘멎을 것이니≺得止≻’는 지관법(止觀法)을 얻은 것이다., 이 생각하며 바라봄을 좇아 이 요지가 이루어진 것이다.
020_1087_a_07L從是要爲何望苦想爲已習已增所念已多一切衆苦從習增多矣爲貪已足貪從萬物生望從危生願從嫉愚從不問生癡從冥生貪望瞋恚愚癡是爲足也爲不墮謂人從貪望得老從瞋恚得病從愚癡得死從福德生故御家已得三十七品妙御卽不隨貪爲意不受不墮相牽不墮牽連也言道意連屬不使墮生死不念不念惡也若干意護觀爲已惡爲得止已德惡六情也得止得止觀也從是思望致是要
저 비신상(非身想)은 무엇인가? 일체 법으로 몸을 억측하지 않고 신상(身想)에 떨어지지 않아서일체의 4대(大)에 대한 법을 몸이라고 헤아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몸은 항상한 물건이 아니니, 지혜로운 사람은 몸이라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다. 알고 생각하여 받음을 바로 비신상이라고 한다.
020_1087_a_15L彼非身想爲何等爲一切法不計身不墮身言一切四大法不計爲身身者非當之物明者不墮身想也爲想知想受是名爲非身想
무엇이 이것을 따르는 것인가? 비신상을 바라보고 이루어서 이미 생각이 되고, 생각이 이미 증장하여 이것으로 하여금 이것이 스스로 나[我]라고 억측하고는‘이것으로 하여금 이것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이것을 내 몸이라고 억측하는 것을 말한다. 옳다고 여겨서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84태(態)를 버리고‘태(態)’란 여든네 가지 자태이다. 이미 여든네 가지 자태를 깨닫고 나면 곧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머무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한다면 더러운 악이 멎게 되니‘머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멈추어 쉬지 않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능히 84태(態)를 물리친 이는 바로 오로(惡露)1)를 관찰함을 좇아서 지의(止意)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긴요함을 좇아 이루어진 것이다.‘요(要)’란 몸이 아니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니, 그러므로 긴요함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020_1087_a_18L從是爲何等望致非身想已爲念思爲已增令是是自計我是是者言自計是我身也爲是爲意不受捨若干態八十四態也言已覺八十四態卽捨不受也不受跓爲觀穢惡得止不受跓者不跓息也所以能卻八十四態者正從觀惡露得止意也是爲從是要致要者爲作非身想爲要致
020_1087_b_02L저 악한 부정상(不淨想)은 무엇인가? 일체 세간의 행은 부정하다고 생각하여스스로 알아서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상이라고 한다.
무엇이 이 상(想)을 따르는가? 부정상을 바라보고 이루어서 이미 생각이 되고 뜻이 되며, 이미 증장하여서 세간 5욕락의 뜻을 제거해 버려 끌리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한 가지가지 생각에도 다시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호지(護持)한다면 더러운 악에 머무르지 않으니, 이것은 이 긴요함을 좇아 이루어진 것이다.‘긴요함을 좇아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항상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짓는 것이다.
저 네 가지 사상(思想)으로 행을 생각함은‘네 가지 사상(思想)’이란 네 가지 선법(禪法)을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함’이란 끊어 버리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5음(陰)을 알게 하기 위한 까닭에네 가지 선법을 터득함으로써 곧 5음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를 말씀하시어 분별하신 것이다.
저 부정상(不淨想)의 행을 보임은 색음(色陰)으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하기 위함이다4대로 된 몸의 오로(惡露)는 모두 물질에 속한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몸 안에 있는 더러운 것으로 색(色)에 대한 탐욕을 물리치기 때문에 이것을 좇아 해탈한다고 하는 것이다.
020_1087_a_24L彼惡不淨想爲何等爲一切世閒御爲不所想自知受是名爲不淨想從是想爲何等望致不淨想已爲念爲思爲已增令世閒五樂意卻捨意不牽不受不復墮若干念以得護爲穢惡得跓是爲從是要致要致者作非常想意彼爲四思想念御四思想思想四禪也念斷不御也何以令知五陰謂以得四禪卽知五陰所從起故佛說是分別見彼不淨想御爲令色陰從是解謂四大惡露皆屬色御家存身內穢以卻色欲故日從是解也
저 고상(苦想)의 행은 통음(痛陰)으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하기 위함이요수행하는 사람은, 몸은 고통스러운 음(陰)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곧 멸하여 없앤다., 저 비신상(非身想)의 행은 사상음(思想陰)과 행음(行陰)으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하기 위함이요몸이 아니라고 터득한 생각을 가지고 상음과 행음, 이 두 가지 음을 멸하여 없앤다., 저 비상상(非常想)의 행은 식음(識陰)으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하기 위함이다.‘식(識)’이란 온갖 물체는 항상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니, 마음≺意≻에 탐하여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서 해탈한다고 말한 것이다.
020_1087_b_11L彼苦想御令痛陰從是解御家覺身苦痛陰滅也彼非身想御令思想陰亦御陰從是解得非身念想御二陰滅也彼非常想御令識陰從是解識萬物非常意不貪著故言識解也
020_1087_c_02L저 지(止)를 따라 행함은‘지(止)’란 거두어들인다≺攝≻는 뜻이다. 6정을 거두어들여 되돌아오게 하여 마음에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지상(止想)이다. 애(愛)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함이요, 저 관(觀)을 따라 행함은 어리석음[癡]으로 하여금 이것을 좇아 해탈하게 함이다.
저 탐하지 않음을 따르는 것은 탐을 버리기 위함이요화려함을 탐하는 것을 버려서 마음에 미세한 찌꺼기도 있지 않은 것이다., 저 성내지 않음을 따르는 것은 성냄을 버리기 위함이요, 저 미혹되지 않음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함이다.
저 비상상(非常想)을 따르는 것은 유상상(有常想)을 해탈시키고자 함이요, 저 고상(苦想)을 따르는 것은 낙상(樂想)을 해탈시키고자 함이요, 저 비신상(非身想)을 따르는 것은 신상(身想)을 해탈시키고자 함이요,저 부정상(不淨想)을 따르는 것은 정상(淨想)을 해탈시키고자 함이다.
020_1087_b_16L彼從止御止攝也攝六情還意不復受是爲止想也令愛從是解彼從觀御令癡從是解彼從不貪爲捨貪捨去華貪意無有微餘也彼從不恚爲捨恚彼從不惑爲捨癡彼從非常想令解有常彼從苦想爲解樂想彼從非身想爲解身想彼從不淨想爲解淨想
저 지(止)를 좇아 뜻을 거두어 능히 되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상(止想)이 되니, 이것을 좇아 선(禪)에 머물도록 한다.‘지(止)’란 멈춘다≺跓≻는 뜻이니, 네 가지 선법에 마음을 멈추는 것이다.
저 일체 법을 좇아 적정(寂靜)하여 능히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관상(觀想)이니, 일체지(一切知)에 머물도록 한다.관함≺觀≻을 좇아 멈추어 머무름을 얻나니, 일체를 관찰하여 분별하는 것이 일체지(一切知)에 머무는 것이다.
욕(欲)을 좇아 능히 환상(還想)을 얻음이 바로 탐하지 않는 상(相)이 되니, 주지 않는데 취함[不與取]을 돌이켜 멈추도록 한다.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細滑≻ㆍ삿된 생각을 이름하여 ‘주지 않는데 취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미 네 가지 선법을 증득하였으므로 6정을 돌이켜서 다시는 바깥 대상 경계의 여섯 가지 욕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주지 않는데 취함에서 되돌린다고 말하였다.
020_1087_c_03L彼從止攝意能得還是爲止想令從是止禪止跓也跓意於四禪彼從一切法寂然能得解受是爲觀令止跓一切知從觀得止住觀分別一切爲住一切知也從欲能得還想是爲不貪相令還不與取止色聲香味細滑邪念名之日不與取也御家已得四禪還六情不復受外六欲故言還不與取也
다음에 다시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바로 에상(恚想)이 없는 것이니 살생(殺生)을 돌이켜 멈추도록 하며, 일과 물건을 식별함이 바로 미혹되지 않은 상(相)이니 멈춤을 얻게 하며, 세간의 소행과 소법(所法)과 능수(能受)를 그치는 상(相)은 비상상(非常想)이 되며, 좇아 태어남을 알게 하고 또 좇아 멸함을 알게 하는 것은‘좇아 태어남’이라고 한 것은 탐욕이 생겨나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인지를 알고, 소멸하는 방법까지도 안다. 식(識)의 자리가 되며‘식(識)’이란 이 3독(毒)이 있는 곳을 아는 것이다., 세간의 행을 짓고 세간의 갱(更)을 짓는 것은 식상(識想)이니 고(苦)가 되며, 생각하는 대상이 바로 통종(痛種)의 자리가 되며, 일체 소법(所法)에 머물지 않는 상(想)이 바로 비신상(非身想)이 되니 사상(思想)을 그치게 되며, 몸뚱이 보기를 마치 시체가 이미 썩어서 문드러지고 불룩한 모양처럼 보는 것이 이 상(相)을 받아들임이 되며이것은 위에서 말한 죽음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끗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不淨思想]이니‘사상(思想)’이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깨끗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좇아 뉘우쳐서 물리쳐 적연(寂然)함에 머물도록 한다.
020_1087_c_10L已後不復生癡是爲無有恚想令從殺還得止識事亦物是爲不惑相令得止止所世閒所御爲所法能受是爲非常想令知從生亦知從從生者貪欲生御者知所從生知所可滅也識爲是識是三毒處也爲世閒御作世閒更所識想是爲苦爲所思想是爲痛種一切所法不住想是爲非身想爲思想是已見身屍已壞靑胮爲受是相謂是上說言受死相是爲不淨思想思想念上說爲不淨也從是爲悔卻令寂然止
020_1088_a_02L이 9품의 자리를 이미 분별하여 말해 드러냈으니9절(絶)2)을 드러낸 것이다., 일체의 무위부(無爲部)에서정부(定部)와 짝이 됨을 말한다. 구족하게 말하였다.
누가 많이 들음을 아는가? 들음이 적으면 지혜롭지 못한 이가 되니, 지혜롭지 못한 이는 언제나 경(經)에다 뜻을 두지 않고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분별관(分別觀)을 따르지 않고 비상상(非常想)을 얻지 못하니,비상상을 얻지 못하므로 이를 좇아 5욕락에 떨어지게 된다.
5욕락의 번뇌는 응하여 행하는 바를 따라 잃어버려서 고상(苦想)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5음(陰)을 받아 들어감에 떨어지게 해서 뜻으로 몸이 있다고 억측하게 하니, 하나의 근본이 아닌 가지가지 근본을 버리지 않고 관하지 않아서 비신상(非身想)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뜻을 안색과 즐거움에 두어 이 몸이 청정하다고 억측하며, 몸이 다만 피부에 덮여 있을 뿐이라고 헤아리지 않아서 부정상(不淨想)을 따르지 못하게 하여 머물러 받아 그치지 않으며‘받지 않음’은 어리석은 사람의 뒤바뀐 생각이다., 이 상(想)을 믿지 않아서 무유상(無有想)으로 하여금 기쁨을 받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을 좇아 네 가지 씨앗을 이미 제거하였다면‘네 가지’는 네 가지 항상하지 않음≺非常≻을 말한다., 무위(無爲)의 씨앗의 자리를 얻을 것이다.
020_1087_c_21L是爲九品處已分別說現九絕也爲一切無爲部謂定部伴說具足是爲誰知多聞聞不爲慧者不慧不爲常意在經意相連生爲從不分別觀令不得非常想不受非常想令從是墮五樂五樂覆蓋從所應御失令不解苦想墮五陰受入令爲意計是身若干本非一本不捨不觀令不墮非身想意在顏色樂計是身爲淨不計是皮肌覆令不墮不淨想不住受不受愚者倒想矣也是想不信令無有想不受喜從是四種已除四種四非常也墮得無爲種處
부처님께서 설하신 신근(信根)을 비구가 보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네 구항(溝港)에 있기를 구하여 청정한 법을 심으며안반(安般)의 여섯 가지를 실천해서 행(行)이 청정하게 되면 곧 4의지(意止)에 머물 것이다., 방편상(方便相)을 버리지 않고 청정함을 이루게 해서 청정함을 좇아 발기(發起)하여 4의지(意止)에 떨어지게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진근(精進根)을 비구가 보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4의단(意斷)에 있어 과거에 지나간‘지나간≺更≻’은 4의지법(意止法)이다. 상(相)을 생각하여 잊지 않을 것이니, 잊지 않음을 좇아 발기하여 4의지(意止)에 떨어진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염근(念根)을 비구가 보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4의지를 관하여 의근(意根)을 한결같이 할 것이니, 이것은 미혹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난 정(定)이므로 4선(禪)의 자리에 떨어지게 한다.
020_1088_a_10L佛說信根比丘欲見知當求在四溝港種爲淸淨法御安般六事得御爲淸淨乃墮四意止也不捨方便相令致淸淨從淸淨發起令墮四意止佛說精進根比丘欲見知當在四意過去所更更四意止矣相念不忘爲從不忘發生墮四意止佛說念根比丘欲見知當觀在四意爲一意想是爲定從不惑起令墮四禪處
020_1088_b_02L비구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근(定根)을 보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4선(禪)을 알아서호흡을 헤아리는 것≺數息≻은 신의지(身意止)가 되고, 모습을 따르는 것≺相隨≻은 통양의지(痛痒意止)가 되며, 멈춤≺止≻은 의의지(意意止)가 되고, 관(觀)은 법의지(法意止)가 되니, 이 네 가지를 몸에 대한 그침≺身止≻이라고 한다. 5음이 문득 그침이 바로 ‘되돌림≺還≻’이 되니, 청정함으로 되돌림이 바로 네 가지 선법에 호응하는 것이다. 근본을 좇아 계교함이 혜(慧)가 되어 능히 지(持)를 얻을 것이니‘지(持)’란 6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좇아 발기하여 4제(諦)에 떨어지게 한다.큰 지혜를 말미암아 6정을 다 지녀서 뜻이 4제(諦)에 있게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혜근(慧根)을 비구가 보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4제(諦)에 있어 네 바퀴를 얻을 것이니, 좋은 고장에 거하는 바퀴와 지혜 있는 이에게 의지하는 바퀴와 본래 세웠던 바른 원(願)의 바퀴와 숙세에 지었던 복의 바퀴이다.‘바퀴≺輪≻’라고 한 것은 수레바퀴에 비유한 것이다. 수레가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듯이, 사람도 이 네 가지 바퀴가 있으면 또한 실어서 도의 자리에 날라다 줌을 말한다. 네 바퀴는 4제(諦)에 응하며, 네 가지 선법(禪法)은 도를 수행하는 데 속한다. 백법사륜(百法四輪)의 뜻과 같다.
020_1088_a_20L佛說是比丘欲知定根當知在四禪數息爲身意止相隨爲痛痒意止止爲意意止觀爲法意止是四身止五陰便止是爲還還淨是應四禪也從本挍計爲慧有能得持持六情從是發起令墮四諦由大智摠持六情令意墮四諦佛說慧根比丘欲見當在四諦爲有四輪好郡縣居輪依慧人輪自本正願輪宿命有福輪輪者喩車輪也能載致物言人有是四輪亦載致人於道也四輪應四諦四禪爲屬道御也百法四輪義同也
저 도덕이 있는 이와 함께 거하는 상(相)이 바로 좋은 고장에 거함이니, 어진 이가 의지할 곳을 얻게 해서 도덕을 얻어 의지하는 상(相)이 바로 지혜 있는 이에게 의지함이다. 이것을 좇아 바른 원이 있는 곳에 떨어지게 되어 바른 원을 얻는 상(相)이 바로 몸의 바른 원이 되니 복된 곳에 떨어지게 되고, 청정한 행을 좇아 들어감이 있는 상(相)을 복이라고 하니 5락(樂)의 곳에 떨어지게 된다.5근(根)이 다섯 가지 즐거운 곳≺五樂處≻이 된다는 말이다.
저 계법(戒法)은 열한 가지가 근본이 되니, 첫째는 몸[色]에 계를 이미 가졌으므로 후회함이 없다‘색(色)’이란 몸이다. 몸이 계율을 잘 지켜서 일곱 가지 악(惡)3)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020_1088_b_06L彼爲道德共居相是爲好郡縣居得賢者依止處以得道德依猗相爲依慧人從是爲墮有正願處以得正願相是爲身正願令墮福處從淸淨行有所入相是名爲福令致墮五樂處謂五根爲五樂處也彼爲戒法十一本一爲色持戒無悔色身也身持戒不犯七惡
둘째는 이미 후회하지 않으므로 기쁜 뜻을 얻고몸이 악을 범하지 않기 때문에 뜻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이미 기쁨이 있으므로 애(愛)가 생기게 하고, 넷째는 이미 뜻에 애를 얻었으므로 몸이 의지함을 얻고, 다섯째는 몸이 이미 의지함을 얻었으므로 곧 즐거움을 얻고‘의지함’이란 4의지(意止)를 의지하는 것이고,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 것은 도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미 뜻에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곧 바른 지(止)를 얻고, 일곱째는 뜻이 이미 바른 지를 얻었으므로 곧 여(如)를 알고, 여덟째는 여를 이미 알았으므로 곧 고요해지고, 아홉째는 이미 고요하므로 곧 여읨을 얻고5음의 어두움을 여읜 것이다., 열째는 여읨을 이미 얻었으므로 곧 해탈을 얻고, 열한째는 해탈을 이미 얻었으므로 곧 지혜를 보는 것이다.항상한 것이 아니고, 괴로운 것이며, 공한 것이고, 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면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020_1088_b_13L二爲已不悔令得喜謂身不犯惡故令意喜三爲已有喜令愛生爲已意得愛爲身得猗五爲已身得猗便得樂猗四意止也得樂得道樂六爲已意得樂便得正止七爲已意得正止便知如有八爲已知如有便寂然九爲已寂然便得離離五陰冥十爲已得離便得解脫十一爲已得解脫便見慧謂已解非常苦空非身爲有慧
지혜가 있으면 곧 생사를 알아 이미 다하고12인연법이 멸하면 곧 나고 죽음도 다하게 된다., 도행(道行)을 이미 마치고, 지을 바의 행을 이미 끝내 다시 돌아와 고(苦)를 받지 않는다.3활(活)을 증득한 것을 ‘마쳤다’고 하고, 청정한 수행이 뜻을 만족하고 번뇌가 다한 것을 ‘끝냈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니원(泥洹:열반)에 들어가니, 삼계로 돌아와서 온갖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020_1088_b_22L有慧便知生死已盡十二因緣滅卽生死盡也道御已畢所作御已竟不復還受苦得三活謂之畢淨御足意漏盡謂之竟直入泥洹不還三界受衆苦也
020_1088_c_02L계의 상(相)은 무엇인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를 지녀서 이것을 좇아 후회함이 없음을 이루게 하여몸에 죄를 더하지 않는 상(相)이니, 후회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좇아 기쁨[喜]을 이루어 기쁜 곳을 얻게 하며, 뜻에 맞는 상(相)이 기쁨이 되니 애(愛)의 곳을 이루게 하고, 기쁨이 만족한 상(相)이 곳[處]이 되니‘만족’이란 가득 찼다는 뜻이다 의지할 곳을 이루게 하고37도품에 의지하는 것이다, 행을 좇음이 이 의지함을 얻은 상(相)이니 즐거운 곳을 이루게 하고, 번뇌를 이미 없앤 것이 즐거움의 상(相)이니 이것을 좇아 정(定)의 곳을 이루게 하고‘정(定)의 곳을 이루게 하고’라 함은 얻은 바 정처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는 악한 뜻을 소멸해 버리고 선한 뜻을 이룬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뜻이 따라서 잊어버리지 않게하는 것이 정(定)의 상(相)이 되니도의 힘이 뜻을 제어하여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진여 지혜의 곳을 이루게 하고, 진여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 서로 따르는 상(相)이니 적정(寂靜)한 곳을 이루게 되고, 만약 몸이 아님을 안다면 이것이 적정의 상(相)이 되니몸이 아니라는 생각을 얻으면 뜻은 곧 고요해져서 안정된다.
020_1088_b_24L戒相爲何等至命盡持戒令從是致無悔身不增罪相爲無悔從是致喜令得喜處可意相爲喜令致愛處喜足相爲處足滿令致有猗處猗三十七品從御爲是爲得猗相令致樂處已無𤺙爲樂相令從是致定處致定處者謂在所得定處一說言滅去惡意致著意著之處意隨使不忘爲定相道力能制意使之不忘也令致如有慧處不惑有相隨相是爲寂然處若知非身是爲寂然相得非身念意卽寂定
이것을 좇아 서로 여의는 곳을 이루게 하고, 가까이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서로 여읨이 되니뜻이 청정해지면 곧 더러운 것들을 여의게 되고, 덕이 높아지면 악과 만나지 않는다. 이것을 좇아 해탈을 이루게 하고, 이미 법을 행하지 않아도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이만약 불퇴전(不退轉)을 증득하면 구항도(溝港道:須陀洹) 에 이르게 되어 다시는 대산(大山:地獄)에서 숙세에 지은 죄를 받지 않는다. 바로 해탈의 상(相)이니 해탈의 혜견(慧見)을 이루게 한다.‘혜견(慧見)’이란 4제를 보는 지혜이다.
020_1088_c_11L令從是致相別離不近會爲相別離意淨卽與穢離德遠不與惡會爲從是致解脫已爲非法御不受殃若獲不退轉及溝港道不復於太山受宿殃也是爲解脫相令致解脫慧見慧見見四諦慧也
네 가지 도덕의 자리가 있으니, 무엇을 행자(行者)의 네 가지 복이라고 하는가? 저 지(智)가 있어서세간 사람들은 다만 6입(入)만을 알 뿐이고, 도를 닦은 사람이 아는 것은 4지의(止意)를 아는 것이다. 도의 자취를 얻는 것을 견지(見地)라고 하니‘도의 자취’는 수다원(須陀洹)이다. 도복(道福)을 얻게 되고, 저 여(如)를 알아서 악을 물리치는 것을‘여를 알아서’란 여여한 법을 수행하여 37도품을 아는 것이니, 이미 37도품을 알고 나면 그 뜻이 청정해져서 문득 6정이 받아들이는 바를 미워하여 삼계를 여의게 된다. 박지(薄地)라고 하니 왕래복(往來福)을 얻게 되고‘왕래(往來)’란 사다함(斯陀含)이 머무는 자리이니, 3독(毒:貪ㆍ嗔ㆍ癡)이 적고 뜻을 안반(安般)에 둔다., 저 미워하여 물리치고 쓰지 않는 것을‘미워하여’는 이 몸뚱이를 미워하는 것이고, ‘쓰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영화를 누리지 않는 것이다. 상리지(相離地)라고 하니 저가 이미 서로 여의었으므로 이것이 불부환복(不復還福)이 되고‘불환(不還)’은 아나함(阿那含)이다.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 인간 세계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한다., 이것을 욕경지(欲竟地)라고 하니, 집착한 바가 없으므로 또한 행자(行者)의 복이다.
020_1088_c_15L爲有四道德地何等爲四爲四御者福彼若如有知智謂世閒人伹知六入耳道人所知者知四意止是爲見地爲得道迹道迹謂湏陁洹是爲得道福彼如有如有知是爲惡卻離如有知者言如事御知三十七品已知三十七品其意淸淨便惡六情所受爲卻離三界是名爲薄爲有往來福往來者謂斯陁含所住地三毒薄少義在安般彼以惡卻爲不用惡惡是身不用不用世榮是名爲相離地彼已相離是爲不復還福不還阿那含也終生天上不還人聞謂之不還也是名爲欲竟地無所著亦御者福是何義問義何趣爲道弟子有八種道御謂上四人道淸淨皆得入道御是名爲御者爲是是福是故名爲御者福
020_1089_a_02L무슨 뜻으로질문한 뜻은 어느 세계로 가느냐는 것이다. 도를 행하는 제자(弟子)라고 하는가?여덟 가지 도행이 있으므로위의 네 사람은 청정한 도를 심어서 모두 도행(道行)을 증득한 이들이다. 행자(行者)라고 하며, 이것이 옳은 복이 되니, 그러므로 행자의 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행이 청정한 것을 청정복(淸淨福)이라고 하며, 이것이 도덕이 되는가? 여덟 가지 청정한 도행이 바로 옳은 복이 되니, 그러므로 청정복이라고 한다.
저가 마땅히 도의 자취를 얻었으니, 무엇이 이미 제(諦)와 서로 응하는 도인가?이미 도적을 증득하고 나면 4제와 서로 호응하게 마련이다. 제자가 곧바로 세 가지 결박을 끊었기 때문이다.
저 세 가지 결박은 무엇인가? 첫째는 몸이 몸 아님을 아는 것이요, 둘째는 의심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거래[貿易]하지 않고 계(戒)를 행하는 것이다.계를 지키는 사람은 3활(活)을 취하여 무상정(無想定)을 닦아 삼계를 구제하니, 이 계율을 천상의 영화나 즐거움과 거래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결박을 이미 끊고 도를 행하는 제자는 곧바로 도의 자취에 떨어져 다시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마침내 도를 일곱 번 바꿔 하늘 위와 인간에 다시 나서 왔다갔다하면서 곧바로 고(苦)를 끊고 고를 좇아 해탈을 얻으 구항(溝港:수다원)이 일곱 번 죽고 일곱 번 태어나서 마침내 응의(應儀:阿羅漢)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것을 도적복(道迹福)을 얻은 견지(見地)라고 한다.‘견지(見地)’란 견도지(見道地)이다.
020_1089_a_05L何以故爲御淸淨爲名爲淸淨福是爲道德有八種淸淨道爲是是福是故名爲淸淨福彼爲應得道迹云何已諦相應道已得道迹與四諦相應也弟子便斷三縛結彼爲三縛結爲何等一爲知身非身二爲無疑三爲不貿易御戒持戒之土以取三活治無想定救濟三界不以此戒貿易天上榮樂已斷是三縛結道弟子便墮道迹不復墮惡道畢竟道七更天亦人間已更所在往來便斷苦苦得解謂溝港七死七生乃得應儀是名爲見地爲得道迹福見地見道地
저 무엇이 뜻으로 하여금 신상(身想)에 떨어지게 하고, 또한 이 몸인 줄 알게 하는가?묻기를 “어떤 수행이 마음으로 하여금 이 몸뚱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의혹하게 하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5음이 미혹시킨다”고 하였다. 어리석어서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간 사람으로서 보고 깨닫지 못한 이와 듣지 못한 이도 있지만, 교계(敎戒)를 받아 들은 이라도 또한 바른 법을 분별하고 나타내지 못해서 뜻으로 생각하기를, 색(色)이 곧 몸이라고 여겨서 색이 곧 몸이며, 이 색이 또한 몸이 되므로 색이 또한 내 몸이라고 두루 보니,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0_1089_a_16L彼何等爲令意墮是身亦知是身問:何御令心或有身以爲有乎?答日:五陰令惑矣癡爲以不聞爲世閒人不見覺者亦不從聞者受教戒聞者亦爲未分別現正法爲意念是色爲身睹色爲身是色亦爲身色亦是我身痛想御識亦如上說
020_1089_b_02L이와 같이 관하여 곧바로 5욕락을 받아들여서‘관하여’란 어리석은 사람이 사견(邪見)에 떨어져 5음을 몸으로 여겨 다섯 가지 탐욕을 기뻐하면서 즐거움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에서 이르기를, “의심하는 가운데 있어서 올바른 요점≺正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다’고 하셨다”고 하였다. 이 몸을 받아들이게 하고어리석은 사람은 다섯 가지 즐거움을 영화롭고 즐겁다고 여겨서 몸이라는 생각≺身想≻을 받아들임이 이와 같으니, 몸을 버리고 몸을 받아 돌고 돌면서 괴로움을 받는다., 신상(身想)에 떨어져‘떨어져’란 ‘빠지다≺沒≻’라는 뜻이니, 마음이 몸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나[我]라고 생각하게 한다.‘이것’이란 이 몸뚱이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것이 진실로 참되고 올바르니, 그것이 진리라고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020_1089_a_22L已如是得觀便受五樂得觀謂愚者邪見墮五陰爲身卽悅五欲以爲樂也『了本』日:"爲在疑中令疑正要如是佛說爲癡斯其義矣"令爲受是身愚者以五樂爲榮樂受身想如是捨身受身輪轉苦也爲墮身隨沒也意沒在身矣令意念我爲是是是身也云我所見實爲眞正其諦爾也
이것이 나라는 집착 때문에 서로 이어져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끌고 서로 따라서 고집하는 바가 있으며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의지가 숭상하고 있는 것을 옳다고 여겨서 속된 것에 얽히고 집착하여 나고 죽음을 따르고, 죄 받는 것을 견뎌내어 치욕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옳다고 여기는 뜻[可意]을 받아들이고 이미 받아들인 소견을 따라 행하니‘옳다고 여기는’이란 어리석은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니, 얼마 안 가서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이 행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것이 사견에 떨어져 이 몸을 받아들이게 된다.‘사견’이란 5음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보고 그것이 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저 다섯 가지 사견은 무명의 의혹에 떨어지게 되니이른바 삼존과 아울러 죄와 복의 과보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색을 이 몸이라고 보는 것과, 위에 말했듯이‘위에 말했듯이’란 앞에서 이미 말한 5음이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그렇게 보는 것이 다섯 가지 사견이니, 무명 의혹에 떨어지게 된다.
020_1089_b_04L我爲以是著相連不得自牽相隨如是有所忍愚者自可以爲已志之所尚者是也縛著于俗隨之生死忍受罪庶無所辱顏矣所可爲意爲可已受見隨御所可者愚心所可尋而受之心爲御首是爲邪見墮受是身耶見者見五陰身以爲吾我也彼爲見是五邪令墮疑無有謂無有三尊幷罪福報也何等爲五若爲所色爲見是身比前比前者前已說五陰識亦爾是爲五邪見令墮無有
다음 유상(有常)에 떨어져 이 몸이 있다고 보는 열다섯 가지를 이미 끊고 항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항상하다는 생각에 떨어진 것이다. 62사견을 이미 버렸다면이미 도를 얻은 이는 5음이 끊어지고 만다. 5음이 끊어지고 나면 62가지 사견(邪見)도 곧 소멸되고 만다., 상(常)과 비상(非常)에 떨어지지 않아 이미 비상과 상을 버리게 되니, 저 도를 행하는 제자는 사견에 전도됨이 없어서 다만 세간을 건너려고 한다.5음이 사라진 이는 모든 생각이 끊어져 고요해져서 항상 하다느니 항상 하지 않다느니 하는 생각이 없다. 『대명도경(大明度經)』에서 이르기를, “네가 생각이 없으면 이제 명도(明度)를 볼 것이다”고 하였는데, 명도란 이른바 세간을 건너는 것이다.
020_1089_b_12L後有餘十五令墮不止非常想而墮常想也如是見是身已斷便六十二邪見已捨謂已得道者五陰斷已五陰斷六十二邪見便滅也令不墮常非常已非常爲捨便道弟子無倒邪見但爲度世夫五陰滅者諸念寂盡無常非常之想『大明度)』日:"汝無念苦今睹明度"明度所謂度世者也
바른 소견은 무엇인가? 몸이 있다고 하는 사견에 떨어지지 않음이니, 만일 도를 행하는 제자가 듣는다면37도품을 듣고 행하면 건너갈 수 있다. 바른 소견이 되고, 경(經)을 통달한 이가 본다면아난(阿難)처럼 부처님께서 설하신 12부경에 달통한 것을 말한다. 이미 세간을 건너는 무위(無爲)를 받으며, 이미 세간을 건너는 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37도품을 깨달아 알면 세간법(世間法)에서 해탈하게 된다.
다시 색이 곧 몸이 된다고 보아서 두루 색이 곧 몸이라고 본다면, 이 색이 또한 몸이 되어서 색마다 또한 내 몸이라고 하겠지만, 통ㆍ상ㆍ행ㆍ식을 이미 이와 같이 보지 않는다면‘이와 같이’란 위에서 설한 5음의 해로움과 같은 것이니, 4의지를 얻은 사람은 5음이 바로 소멸된다. 아래에서 세 가지 결(結:번뇌)에 대하여 전부 풀이하였다., 곧 세 가지 결사(結使)를 해탈할 것이다.사번뇌(使煩惱)는 너무도 신속하게 일어나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020_1089_b_18L直見爲何等令不墮邪見身若道弟子爲聞聞三十七品御之得度也爲直見見通經家謂如阿難通佛十二部經爲已受度世無爲爲已解度世法解三十七品爲解脫世法復見是色爲身遍睹色爲身是色亦爲身色色亦是我身痛想行識已不如是如是如上所說五陰之安得四意止者五陰卽滅下三結便都解矣便解三結使使疾迅起哉無數也
020_1089_c_02L무엇이 세 가지인가?첫째는 이 몸이라고 보지 않음이요, 둘째는 성내지 않음이요, 셋째는 의심하지 않음이다. 이미 이와 같다면 도를 행하는 제자는 의심이 없으므로번뇌≺垢≻가 다하면 밝은 지혜가 커져서 온갖 의심이 다 풀린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아‘부처님에 대해서도’라는 것은 부처님은 높고 높은 지존(至尊)이시며 한량없이 많은 청정한 행을 실천하셨으니, 제자들도 또한 의심함이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르기를, “이미 다시 깨끗하게 할 것이 없어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뜻이 바로 그와 같은 의미이다. 믿고 기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여래(如來)ㆍ무소착(無所着)ㆍ정각(正覺)ㆍ혜행이족위락(慧行已足爲樂)나고 죽음이 끊어져 니원문(泥洹門:涅槃門)으로 향함을 일러 ‘즐겁다’고 말한 것이다.ㆍ세간이해(世間已解)세간을 교화하는 일을 이미 마치셨고 건너야 할 것을 이미 다 건너시어 남은 것이 있지 않다는 말이다.ㆍ무유과(無有過:無上師)ㆍ시법어(是法馭:道法御)ㆍ법수위사(法隨爲師:天人師)가 되시며‘어(馭)’는 ‘그치다≺止≻’라는 뜻이다. ‘법수(法隨)’란 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부처님이 가장 높으시니, 이것이 믿음을 얻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020_1089_c_02L何等爲三爲不見是身二爲不恚三爲不疑如是道弟子爲無疑垢盡明大衆疑解也在佛亦無疑在佛者佛巍巍至尊其爲無量淨行弟子亦無疑焉故偈云:"已無所復淨始不疑不轉"斯義如之也爲信爲喜爲佛如是如來無所著正覺行已足爲樂生死絕向泥洹門謂之樂也爲世閒已解言教化世閒已畢所度已度無有遺餘也無有過法馭法隨爲師馭止也法隨隨法御爲教天上天下爲佛最上是得信不疑
이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하여 결사(結使)를 없애고 의심을 없애며, 믿고 기뻐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법을 배울 수 있고 이룰 수 있음을 나타내며도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자기의 바뀐 소견을 나타내고말하자면 온갖 선하고 악한 일들을 부처님께서는 다 보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하여 보이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해탈을 얻어 기갈(飢渴)에 탐망하는 상(相)을 끊고사람의 감정은 육복(六服)에 배고프고 목마르지만,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이미 끊었다는 뜻이다., 수혹(隨惑)을 이미 끊었으며6정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음이 공(空)하니 응하여 얻을 것이 없고그 마음을 비우고 그 속을 깨끗하게 하여 뜻≺志≻이 화(禍)와 어긋나기 때문에 호응하지 않나니, 사(邪)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화를 받지 않는 것이다., 애(愛)를 이미 파괴하고‘파괴하고’는 ‘다하다≺盡≻’라는 의미이니, 욕애(欲愛)가 이미 다하였다는 말이다.
020_1089_c_11L爲隨是御爲在法無結無疑爲信爲喜說是法現可學可致謂可致於道也現自更言諸善惡事佛悉見故爲人見之也已解爲慧爲是所貪飢渴相近已斷人情飢渴于六服道御者已斷之隨已斷謂不隨六情也空無所應得空其心淨其內志與𥛔違故日不應不應邪也得受不受不受𥛔也愛已壞壞盡夢欲已盡也
이미 여의고 이미 다하여애욕을 여의고 바람이 다하여 삼계에 대한 마음이 없으니, 이것을 ‘불원정(不願定)’이라 한다. 무위에 이르니탐욕이 없고 뜻이 고요해져서 삼계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법경경(法鏡經)』에서 이르기를, “뜻에 간직해 두지 않고 니원(열반)을 구하니, 어찌 하물며 수고롭다는 생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무위(無爲)라고 말한다., 이것이 두 번째 결사를 없애고하나는 기갈(飢渴)이고, 다른 하나는 상연(相延:서로 통함)이니, 두 번째 결사가 없어짐에 따라 12인연과 5음의 번뇌≺結≻가 없어지는 것이다. 의혹을 없애는 것이다.결사가 이미 풀어지면 곧 바른 법에 대해 의심하는 바가 없다.
020_1089_c_18L已離已盡離愛願盡無三界之志斯謂不願定無爲謂欲無欲志寂無三界想矣『法鏡經』日:"不以意存求於泥洹何況有勞想哉?"斯無爲之云矣以是第二無結謂飢渴二相比第二結爲無有無十二因緣五陰之結也無疑謂結已解卽於正法無所疑也
020_1090_a_02L법을 따르고 법을 행하는 것이‘법(法)’이란 4의지법(意止法)이고, ‘따르고’란 그 행(行)을 따르는 것이다. 이 동학(同學)의 모임[聚]이니, 결사를 없애고 의혹을 없애어 받음이 있고 기뻐함이 있는 것‘받음’이란 도품(道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를 얻은 제자들이 동학의 모임[聚]이 된다.‘취(聚)’는 ‘회(會)’와 같은 의미이니, 동지(同志)들과 함께 삼계의 탐욕을 다 알아서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배우는 모임을 말한다.
정수행(正受行)에 같이 응하여계를 받아 세우고 나면 정(定)이 이미 정해져서 혜(慧)를 이미 얻고 해탈을 이미 이루니, 혜해탈(慧解脫)이 이미 나타나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정수행’이란 4의지(意止)의 행을 받는 것이고, ‘같다’는 것은 아래의 일과 같이 상응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를테면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도지견(度知見)의 일을 수행하는 이가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020_1089_c_22L得法隨法御法謂四意止法隨隨其御爲同學聚爲無結無疑已有受有喜受受道品之也如是受得道弟子爲學聚聚會謂與同志尚偕三界欲學還本無之聚會也正受御爲如應受戒已立定已定慧已得解脫成解脫慧已現已致正受御謂受止御也如如下事相應受之謂戒定慧解脫度知見事御者正受也
바로 불제자가 된다.행자가 모여 네 사람이 되면 네 쌍의 행을 좇으므로 여덟 사람의 도행이라고 하니‘네 쌍,’ ‘여덟 사람’이란 응의득(應儀得:阿羅漢果)ㆍ응의향(應儀向:阿羅漢向)ㆍ불환득(不還得:阿那含果)ㆍ불환향(不還向:阿那含向)ㆍ빈래득(頻來得:斯陀含果)ㆍ빈래향(頻來得:斯陀含向)ㆍ구항득(溝港得:須陀洹果)ㆍ구항향(溝港向:須陀洹向)이니, 이것을 네 쌍 여덟 사람이라고 한다., 세간에서 존중하는 바가이 여덟 사람은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기에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며 높이 대접하는 것이다. 되어 견줄 데가 없다.
제사 지낼 만하고, 섬길 만하고, 공경할 만하여 이보다 더한 복지(福地)가 없으므로 하늘과 사람이 모두 섬기니신(神)에게 제사하여 복을 바라는 것은 이 여덟 분 성인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니, 그 복이 매우 크다., 이것이 세 번째‘세 번째’란 빈래(頻來:斯陀含)를 말한다. 의심을 없애는 법이 된다.『안반수의경』 주해에서 이르기를, “빈래(사다함)는 욕과(欲果) 중에 있으면서 이미 네 가지 큰 뒤바뀜을 버렸기 때문에 남은 의심과 번뇌가 없다”고 하였다.
020_1090_a_05L是爲佛弟子御者聚爲四人從御四雙名爲八人道御四雙八人者謂以得應儀向應儀道已得不還向不還者得頻來向頻來者得溝港向溝港者是謂四雙八人者也爲世閒所重所尊謂斯八人爲世明者所重愛敬而尊之爲無有比可祠可事可恭爲福地無是天亦人所事祠神以望福莫若供養斯八聖其福大也是爲第三第三者謂頻來已爲無疑法『安般』解日:"頻來在欲果中已捨四廣倒無餘疑結也"
법을 따르고 일체 행을 행하여 고(苦)를 그치고재앙을 받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된다. 의결(疑結)을 없앤다면 이미 받고 이미 기뻐하게 된다.
애(愛)를 좇아 습(習)이 되고부처님의 말씀을 믿으면 곧 번뇌≺結≻가 풀려서 법을 받아 기뻐한다. 사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습(習)’이 되니, 습이란 도습(道習)을 말하는 것이다. 도(道)란 도를 증득하는 것이다., 고(苦)도 또한 애(愛)를 따르니괴로움은 애욕으로부터 생기니, 괴로움을 괴로움인 줄 모르는 것은 그것을 익힌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습(習)을 그치고 의결을 없앤다면 이미 받고 이해하며 기뻐하여 애(愛)가 이미 다했으므로, 이 고를 다하고 곧바로 의결을 없애는 것이다.
이미 받았으면 곧바로 기쁨을 얻고, 이미 애(愛)가 다했으므로 고(苦)가 다하여 의결이 없으며, 이미 이해하여 받아들이면 곧바로 기쁨을 얻어 여덟 가지 도행이 되니, 이것을 받아 행함을 좇아 고(苦)가 다하고 의혹이 없게 되며, 의혹이 없으므로 다시 결사(結使)가 없어 이해하여 기뻐함을 얻게 된다.
020_1090_a_13L隨法御一切御爲苦殃榾御爲苦也已無疑結已受已喜愛爲習信佛言卽結解受法喜愛之無倦爲習習道習也得道矣苦亦從愛習苦由愛欲生不知苦之爲苦者以其習之久矣已無疑結已受已解已喜已愛盡是爲苦盡便無疑無結已得是受便得喜已愛盡是爲苦盡疑結已解受便得喜爲八種道御從是受御令苦盡便不疑不疑不復結墮解得喜
020_1090_b_02L만일 본래 있던 의혹을 풀지 못한다면 부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도 이해하지 못하며, 행자의 모임에‘본래’는 과거≺宿≻를 말하니, 불(佛)ㆍ법(法)ㆍ승(僧)에 의심이 있다가 지금 다 이해하고 나서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본래 의혹이 있다면 고(苦)와 습(習)과 진(盡)과 도행(道行)에 대해전생≺宿命≻에는 혹 의심이 있었으나 뜻을 4제(諦)에 두어 지금은 모두 이미 아는 것이다. 의혹을 풀지 못하여뜻이 의혹을 따르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무엇을 부스럼[瘡:의혹]이라고 하는가? 이를 해탈하여 근본이 이미 끊어졌다면 마치 나무가 다시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처럼‘부스럼’이란 의혹의 부스럼이니, 5음(陰)ㆍ6쇠(衰)ㆍ3독(毒)을 이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6쇠를 향하여 달려가 받은 사람은 3백 개나 되는 치창(豸瘡)이 나는데도 그 사람은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 사람의 몸속에는 1천8백 개나 되는 치창이 있으니, 이른바 눈이 색(色)을 받아들여서 몸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얻게 하는 것은 눈의 죄가 된다. 다른 6정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무수한 5음의 근본을 이미 깨달아 끊어 버림을, 비유하자면 마치 나무가 이미 땅을 가르고 다시 머물러 서 있지 않은 것과 같다.
020_1090_a_22L若本有疑不解在佛不解在法不解在御者聚本宿也有疑在佛法今悉已解不復疑也若本有疑在苦在習在盡在道宿命或有疑意在四諦今悉已解御所惑所不解隨志所疑惑是如是云何是瘡爲是已解本已斷樹不復住疑惑瘡也是五陰六應三毒經日:"六衰所向夫受之者劇柀三百豸瘡人但不覺之"一人身中凡千八百豸瘡謂眼受色令身得苦爲眼罪也六情俱爾是無數五陰本已解斷譬如樹已擗地不復住立也
이미 흩어져 다시 나타나지 못하여5음과 6쇠가 이미 녹아 흩어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본래의 법이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5음의 법이 멸하여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저 계를 지녀 행하면서 뜻을 굴려 찾아 바꾸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갈애(渴愛)에 떨어짐이요, 둘째는 계를 지녀 행하면서 해탈하지 않고 굴려 찾아 구하는 데마땅히 계를 지켜 도를 수행하고 천상에서 영화를 누리겠다는 뜻을 바꾸었기 때문에 ‘해탈하지 않고’라고 말했다. 또 『안반수의경』 주해에서 이르기를, “계율의 본원(本願)을 굴려 마땅히 계율로써 도를 구해야 하는데 도리어 천상의 영화와 낙을 구한다. 이것을 일러 ‘계율을 굴린다≺轉戒≻’라 하니, 본원은 도를 구하면서 (도리어) 도를 어기는 데로 나아갈 것인가. 불환(不還)의 행에는 (이런 일이) 다시 있지 않기 때문에 ‘다했다≺盡≻’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뜻을 향함이다.
이를 좇아 계를 행하고 거두어 지키면서 이를 좇아 마땅히 하늘에 태어나 또한 하늘과 나란히 하고, 마땅히 하늘 위의 집에서 갑옥녀(甲玉女)와 함께하며 서로 즐겁게 같이 살기를 이렇듯 탐망(貪望)하고 좋게 여긴다.‘좋게 여기며’란 천상의 옥녀(玉女)들과 서로 즐거워하며 함께 사는 것을 좋게 여기는 것이다.
020_1090_b_07L已散不復言五陰六衰已消散不復現也從來本法不復生五陰法滅不復生也彼持御戒轉摸貿爲二輩一爲渴愛二爲不解避持御戒轉摸貿當以戒御而轉意貿易天上故言不解避也又『安般』 解日:"轉戒本願當以戒求道反求天上榮樂也是謂轉飛矣本願求道而違道就耶?不還之還無復有故日盡也爲意向從是御戒攝守從是當爲得天亦天比當爲天上彼字爲玉女當爲是俱相樂共居如是望如是可可天上五女相樂共居也
이렇듯 서로 만나는 데 생각이 맺혀 뜻을 향하는 것이 바로 갈애(渴愛)이니, 비록 계를 지녀 행할지라도 찾아 바꾸는 데 떨어져 해탈하지 못한다.
계를 지녀 행하면서 굴려 찾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계를 행하는 이가 계를 굴려 바꾸는 것이다. 굴려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뜻을 일으켜 계를 좇아 청정함을 얻으며, 계를 좇아 해탈을 얻으며, 계를 좇아 요지(要旨)를 얻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좇아 건너감[度]을 얻으며다시는 죄와 복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어서 니원을 얻는다., 혹은 뜻을 일으켜 원(願)을 좇아 건너감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해탈하지 않고 계를 지녀 행하면서 굴려 찾아 바꾸는 것이다.이미 행한 계율을 마땅히 더 높은 것으로 바꾸어 37도품을 행하여 계율을 그치고 세상을 해탈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불사(不辭4))’라고 말한 것이다.
020_1090_b_17L如是思結相見意向是爲渴愛雖持御戒爲墮摸貿彼爲不解持御戒轉摸貿爲何等戒御者爲轉貿戒轉貿爲何等爲意生從戒得淨從戒得解脫從戒得要爲從苦樂得度不復更罪福之苦樂得於泥洹意生從願得度是爲不解持御戒轉摸貿已御戒當轉上御三十七品而上戒願求望度世故言不辭
020_1090_c_02L무슨 인연으로 해탈하지 않고 굴려서 찾아 바꾸는가?뜻을 일으켜 2업(業)의 옷[被服]을 따르며‘옷’이란 비구의 세 가지 법의(法衣)이다. 일설에는 천상에서 입는 옷이라고 한 데도 있다., 또한 원(願)을 좇아 세간을 건넘을 얻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좇아 제거하여 여읨을 얻으니즐거움과 괴로움을 제거하여 여읜다는 말이다., 이것을 좇아 2업의 옷이 되며, 또한 찾기를 원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 2계(戒)의 옷을 찾는 것인가? 바라는 뜻으로 계교해서 이것을 좇아 해탈을 얻으며, 이것을 좇아 요지(要旨)를 얻으며, 이것을 좇아 고락(苦樂)에서 벗어나며, 이 고락을 좇아 무위(無爲)를 얻으며, 이것을 좇아 바르지 않게 법을 계교하니라.‘바르지 않게 계교한다不正計’란 삿된 것을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다.
020_1090_b_24L何因緣爲不解轉摸貿意生從被被服比丘三法衣也一說云爲天上被服亦從願得度從苦樂得卻離謂卻離樂與苦也爲從是二業被服亦願爲摸何等爲摸爲是二戒被服願意計從是得解脫從是得要從是得過苦樂從是苦樂爲得無爲從是不正計法不正計者以邪爲眞也
이것을 좇아 해탈하는 것이 아니요, 뜻으로 계교해서 이것을 좇아 해탈한다.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다고 억측하며, 이것을 따라 이와 같이 행하여 고집[忍]과 가의(可意)와 탐망(貪望)과 결견(結見)을 두고도‘고집’은 나고 죽는 것이다.‘가의(可意)’란 뜻≺意≻으로 하늘의 영화를 좋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결견(結見)이 되니, 참다운 견해가 아니다. 이것을 좇아 해탈하려 하니견해를 좇고 욕망과 부합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이는 해탈하지 않고 계를 지니면서 굴려 찾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두 가지 결(結)이니, 도를 얻은 제자는 이미 버리고이미 얻은 사람이 버리고 바꾸는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무명(無明)의 뿌리를 끊기를다시 계와 원의 뿌리가 없는 것이다. 마치 이미 뽑힌 나무가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듯 하여, 이런 법이 다음에 다시 생겨나지 않고 곧바로 계가 청정해진다.
020_1090_c_08L不從是解脫意計從是解脫不正計爲是正隨是御如是有隨是上諸行如是便有生死忍可意望結見忍生死也可意意可天榮如是爲結見眞見也是從是爲解從見合望解也是爲不解持戒轉摸貿是爲二結得道弟子已言已得者爲捨貿易之御也爲無有本已斷無復戒願本也樹已拔不復現從後不復生法便爲已淨
만일 도를 얻고 계를 따라 행하여 파괴되지 않으며이미 도를 얻은 이는 계율을 잘 지켜 깨뜨리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뚫리지 않으며‘뚫리다≺穿≻’는 것은 ‘새다≺漏≻’라는 뜻이다. 자신이 이미 37도품을 구족(具足)하고 그 행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안반수의경』의 주해에서 이르기를, “정진(精進)은 수행에 달려 있으니,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삿된 생각이 그 중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일러 ‘새지 않음≺不漏≻’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말이다., 잃어버리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고 다만 지혜가 늘어나면지혜 있는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능히 빼앗아 갈 수 없으니이른 바 법대로 행하면 그 사람의 뜻과 행을 빼앗아 선정에 들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020_1090_c_16L戒如得道戒隨御不爲已得道者謂持戒不破缺不爲穿穿渴也謂已已具足三十七品其御不漏又『安般』解日:"精進在行首尾相屬邪念不得入其中聞之不漏是之謂矣不爲失不爲悔伹有增如慧者可言爲慧者所可也無有能奪所謂御如共有能奪其志御便不得定
이것을 좇아 정(定)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세 가지 묶이고 매임[縛結]이니, 도를 얻은 제자는 이런 결박을 이미 끊고 도의 자취에 떨어져 다시는 악법(惡法)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세간을 건너 하늘 위와 인간에 일곱 번씩 왔다갔다하며, 왔다갔다하는 기한을 마치면구항(溝港:수다원)은 일곱 번 나고 일곱 번 죽으며 천상과 인간 세계를 왕래하는데, 이와 같이 일곱 번 되풀이해서 비로소 응의(應儀:阿羅漢)를 증득하고 나서야 나고 죽음을 왔다갔다하는 기한을 마쳤다고 말한다. 곧바로 고(苦)에서 벗어나는 요체(要體)를 얻게 된다.‘고에서 벗어나다’란 삼계를 벗어나 온갖 괴로움을 여의는 것이다.
020_1090_c_21L爲得從是致定是爲三縛結道弟子爲已斷已墮道迹不復墮惡法必度世在七往來天上亦人中來期畢謂溝港七生七死往來生天人中如是七反乃得應儀也言往來生死期畢矣便得出苦要出苦出三界離諸苦
020_1091_a_02L네 가지 서로 응함이 있으니,무엇이 네 가지 서로 응하는 것인가? 첫째는 이미 해탈하여 서로 응함이요괴로음을 이미 해탈한 것이니, 구항(溝港)이 이미 도를 얻었다는 말이다., 둘째는 이미 끊고 버려 서로 응함이요, 셋째는 스스로 증득하여 서로 응함이요불환(不還)을 설명한 말이다. 괴로움이 이미 다하여 끊어졌다는 말이다., 넷째는 늘리고 가득 채워서 서로 응함이다.응의(應儀:阿羅漢)는 행이 이미 구족하여 원만하다는 말이다.
저 도덕이 있는 제자는 고(苦)를 좇아 이미 해탈한 것이 서로 응하며‘괴로움을 좇아 이미 해탈했다’는 것은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응하여 해탈한 것이다., 습(習)을 좇아 이미 끊고 버린 것이 서로 응하며, 진(盡)을 좇아 스스로 증득한 것이 서로 응하며‘진(盡:滅)을 좇아 스스로 증득했다’는 것은 5음ㆍ6쇠ㆍ12인연이 다하여 증득했다는 말이다., 도(道)를 좇아 늘리고 가득 채운 것이 서로 응한다.
저 관(觀)과 지(止)를 함께 따라 행한다면4제와 지관(止觀)의 법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의[적연(寂然)하여 아무 생각이 없음에 처하는 것이다.] 본래 구경(究竟)에 이르러서는 네 가지 일을 짓게 된다.
020_1091_a_02L有四相何謂四相應一爲已解相應已解苦溝港已得道也二爲已斷捨相應三爲自證相應謂不還也言苦已書斷之謂也四爲增滿相應謂應儀御已具足滿彼道德弟子從苦爲已解相應從苦已解爲應解苦諦也從習爲已斷捨相從盡爲自證相應盡白證者謂之五陰六衰十二因緣盡之證也從道爲增滿相應彼爲止觀俱隨行謂四諦止觀一切俱行一處一時一意處寂然無意也本來有是有意令爲作四事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고(苦)이니 고를 좇아 이미 해탈하였으므로 고와 서로 응하고, 둘째는 습(習)이니 습을 좇아 이미 끊어 버렸으므로 습과 서로 응하고, 셋째는 진(盡)이니 진을 좇아 스스로 증득하였으므로 진과 서로 응하고, 넷째는 도(道)이니 도를 좇아 도를 늘리고 가득 채웠으므로 도와 서로 응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고(苦)를 좇아 해탈한 것과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습(習)을 좇아 끊어 버린 것과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진(盡)을 좇아 스스로 증득한 것과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도(道)를 좇아 늘리고 가득 채운 것과 서로 응하는가?4제를 다 깨달았으므로 원만함과 서로 응한다고 말하였다. 비유컨대 물 위에 거품이 떠다니는 것과 같으니물이 거품을 (등에) 지고 건너게 한다는 말이다., 위로 구경에 이르러 네 가지 행이 있어서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에 이르며, 건너고 나서 맥(脈)을 끊는 것이다.수맥(水脈)을 끊는 것이다.
020_1091_a_11L何等爲四一爲苦從苦已解爲苦相二爲習從習已斷捨爲習相應爲盡從盡自證爲盡相應四爲道道增滿令道相應何以故從苦已解相應何以故從習已斷捨相應何以故從盡已自證相應何以故從道已增滿相應謂說四諱盡滿相應也爲有譬喩水中沬行言水負沬使度上至竟爲有四御從是岸邊致度岸邊度就斷脈斷水脈也
020_1091_b_02L지(止)와 관(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함께 행한다면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으로 위로 반드시 구경에 이르러수행하는 사람이 지(止)와 관(觀)의 두 칼로 12인연의 맥을 끊어 흐름을 끊고 도를 취함을 말한 것이다. ‘전일한 곳’란 니원(泥洹:열반)이니, ‘전일한 때’와 ‘전일한 뜻’도 똑같은 뜻이다. 네 가지 일을 이루게 된다.
비유컨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위로 구경에 이르러서는 네 가지 일을 지으니, 밝음을 이루어 어둠을 파괴하며, 색(色)을 나타내어 구경을 비춘다.이 네 가지 일을 4제에 비유한 것이다. 이 뜻은 『안반수의경』의 내용과 동일하다. 비유컨대 배로 건넘에이 언덕을 떠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으니보살의 수행은 마치 뱃사공이 사람과 물건을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으며, 보살이 건너는 바도 이와 같다는 말이다., 물(物)을 이루면 맥(脈)을 끊는 것이다.
020_1091_a_20L是亦如是止觀雙俱行一處一時一上要至竟謂御家以止觀二劍斷十二因緣之脈截流取道矣一處者泥一時一意亦然爲成四事譬如曰上至竟爲現作四事致明壞冥現竟此四事以譬四諦也義與『安般』同矣譬如船渡捨是岸邊致渡岸邊謂菩薩作御如波船師致人物於彼岸也菩薩所度亦如是致物斷脈
지(止)와 관(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함께 일으켜 행한다면‘일으켜 행함≺發行≻’은 함께 행하는 것이다.,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으로 위로 반드시 구경에 이르러 네 가지 일을 지으니, 고를 해탈하였으므로 응하듯 서로 비추며, 습을 끊었으므로 응하듯 서로 응하며, 진을 스스로 증득하였으므로 깨달음에 응하듯 서로 응하며, 도의 요체를 행하였으므로 응하듯 서로 응하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고(苦)는 바꿈[更]을 좇아 해탈하여 서로 응하고, 습(習)은 끊음[斷]을 좇아 해탈하여 서로 응하고, 진(盡)은 괴로움[苦]을 증득함을 좇아 해탈하여 서로 응하고, 도(道)는 요체를 행함을 좇아 해탈하여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지(止)와 관(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함께 서로 이어서 행한다면,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으로 위로 반드시 구경에 이르러 구경의 네 가지 일을 행하니, 고(苦)를 바꾸고, 습(習)을 끊으며, 진(盡)을 스스로 증득하고, 도(道)를 행하여 가득 채우게 된다. 비유컨대 등촉(燈燭)을 켜 놓은 것과 같아서 위로 구경에 이르러 네 가지 일을 지으니, 밝음을 짓고 어두움을 제거하며 색(色)을 나타내고 의혹을 물리치는 것이다.‘물리치는≺卻≻’은 녹여 없앤다는 뜻이니, 의심하여 풀리지 않는 일들을 녹여 없애는 것이 마치 불이 능히 사라지게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020_1091_b_04L止觀亦如是雙發行從行俱行爲一處一時一意要至竟爲作四事爲解苦如應相燭爲斷習如應相應爲盡自證如應解相應爲御道要如應相應何以故苦從更解相應習從斷解相應盡從苦證解相應道御要解相應止觀亦如是雙相連行一處一時一意止要至竟爲御竟四事爲苦更爲習斷盡自證爲御道滿譬如然燈燭上至竟爲作四事爲作明爲去冥爲現色爲卻疑卻消也言卻疑不解火能消卻之也
지(止)와 관(觀)도 또한 이와 같아서 네 가지 일을 지으니, 고(苦)를 식별하고, 집(集)을 끊으며이미 37도품을 증득하고 나면 지혜가 생겨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盡)을 스스로 증득하고, 도(道)를 행하여 가득하게 된다. 비유컨대 등불을 켜 놓은 것과 같아서 위로 구경에 이르러 네 가지 뜻이 있으니, 밝음을 나타내고 어두움을 제거하며 색을 나타내고 기름과 심지가 다하는 것과 같다.
지와 관도 또한 이와 같아서세간의 병폐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쌓임이며, 도(道)의 즐거움은 지(止)와 관(觀)이니, 마치 기름과 심지가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 함께 따라 행한다면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으로 구경에 이르러 네 가지 일을 지으니, 고(苦)를 식별하기 때문에 고와 서로 응하고, 습(習)을 끊었기 때문에 습과 서로 응하며, 진(盡)을 스스로 증득하였기 때문에 진과 서로 응하고, 도(道)를 행하여 가득 채웠기 때문에 도와 서로 응하게 된다.
020_1091_b_15L止觀亦如是爲作四事爲識苦爲斷集已得三十七品爲知不復受之爲盡自證爲御道滿譬如然燈上至竟爲有四義爲現明爲去冥爲現色爲盡膏炷止觀亦如是世之爲病唯苦與習道之爲樂止與觀如然膏炷至盡也雙隨行一處一時一意止至竟爲作四事爲識苦苦相應斷習習相應爲盡自證盡相應爲御道滿道相應
020_1091_c_02L무슨 까닭에 고를 식별하였기 때문에 고와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습을 끊었기 때문에 습과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진을 스스로 증득하였기 때문에 진과 서로 응하며, 무슨 까닭에 도를 행하여 가득 채웠기 때문에 도와 서로 응하는가?
무엇을 좇아 응하여 지(止)와 관(觀)을 좇으며, 무엇이 응하는 것이 되며, 응은 무엇을 지니는가? 뜻을 관(觀)에 매어 두어야 하니, 뜻을 이미 관에 매어 두었다면 곧 5음(陰)의 고(苦)를 볼 것이다. 저 뜻을 매어 두는 것은 지(止)가 되고, 이미 5음이 고(苦)가 됨을 보는 것은 관(觀)이 된다.위에서 분별한 4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저 5음상(陰相)을 가까이하여5음과 6정(情:根)이 서로 의지하여 가깝다는 말이다. 일으키고 욕착(欲着)해서 상(相)을 얻어 가기를 원하므로 습(習)과 습의 대상을 버리지 못하니, 이것을 이미 끊고 이미 다하며 지(止)와 관(觀)의 도(道)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면, 이 도와 덕의 4제(諦)로 하여금 전일한 곳, 전일한 때, 전일한 뜻으로 위로 구경에 이르러 4제로 하여금 이와 같은 도와 서로 응하게 한다.
020_1091_b_23L何以故爲識苦苦相應何以故爲斷習習相應何以故爲盡自證盡相應何以故爲御道滿道相應爲從誰應爲從止觀何等爲應應云何持意繫觀已意繫觀便見五陰苦彼所意繫是爲止見五陰爲苦是爲觀謂上分別四諦之成敗也所爲五陰相近謂五陰與六情相依近也可發往欲著願得相往不捨習所是已斷已止觀道亦如是令是道德四諦處一時一意上至竟爲令四諦相應
도와 덕의 제자가 이 법을 서로 본받아 이미 응한 것을 견지(見地)라고 하니도의 자취≺道跡≻를 본 것이다., 이미 도의 맥(脈)을 얻고 도의 자취에 머물러 다시 지(止)와 관(觀)을 한다면다시 거듭 관하여 더욱 지(止)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 욕애(欲愛)의 번뇌[縛使]를 다시 제거하게 된다.욕애를 다한다는 것은 욕애의 번뇌를 다 끊는 것이다.
도를 얻은 제자는 왔다갔다하며 받은 것으로 이 행을 만족하여, 이미 왔다갔다하는 것을 좇아 곧바로 고(苦)의 뿌리를 무너뜨리니, 이것이 박지(簿地)가 된다.
곧바로 왔다갔다하는 복(福)을 마치고 나서 덕을 얻어 머물고도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다시 지(止)와 관(觀)을 늘려서 남아 있던 애욕과 성냄의 번뇌를 다 버린다면, 아직 다 버리지 못했던‘아직 다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사결(使結:번뇌)이 동하여 문득 다시 5음의 어두운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020_1091_c_10L如是道道德弟子爲是法相法已應是名爲見地見道迹也已得道脈至道迹跓爲復止觀復重觀增御止令是欲恚使縛爲復除爲欲愛盡所迹使也得道弟子爲往來受以是御足已從往來便壞苦本是爲薄地便已竟往來福已來得在德止在道德止復增止觀令餘愛欲恚所使爲畢捨欲恚未畢捨未畢捨爲使結輒還入五陰冥中也
020_1092_a_02L애욕과 성냄의 번뇌가 이미 다하게 된다.
도를 얻은 제자는 곧 아래 5결(結)을 해탈하여 이미 마쳤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몸을 이 몸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요, 둘째는 의심이 풀린 것이요, 셋째는 미혹되지 않아서 계(戒)를 바꾸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탐망하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성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5결을 이미 마친 것이다.
도를 얻은 제자는 다시 세간에 돌아오지 않으니, 저 세간을 건너가 다시 세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바로 각지(却地)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불환복(不還福)이다.
이미 불환복을 얻고‘각지(却地)’란 모든 악의 자리를 물리친 것이며, ‘불환(不還)’이란 도를 얻고 나서다시는 세간에 돌아와 괴로움을 받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다시 지(止)와 관(觀)을 증장한다면 위의 5결(結)을 풀어 버리게 되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색욕(色欲), 둘째는 불색욕(不色欲), 셋째는 어리석음, 넷째는 교만(憍慢), 다섯째는 해탈하지 못함이다.
위 다섯 가지 행을 구족하여 이미 5결(結)을 버렸다면, 곧바로 집착한 바가 없어서 이미 세간을 건너가며, 누(漏)가 없어 이미 구경에 이르러 해탈을 얻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필지(畢地)가 된다.응의(應儀)는 세간에 처함이 마치 허공에 처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무소착(無所着)’이라 하며,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맺힌≺結:번뇌≻ 행을 이미 다 녹여 없앴기 때문에 해탈하여 마쳤다고 하는 것이다.
020_1091_c_19L使結令畢已畢爲得道弟子便解不五結已畢何等爲五一爲見身是非二爲解疑三爲不惑不貿戒四爲不望五爲不恚是爲五結已畢便得道弟子不復還世閒彼度世不復還是世閒是名爲卻地是爲不還已致得止不還福卻地卻諸惡地也不還謂於彼得道不還世閒受苦身也復增翅止觀令爲解捨上五結何等爲五一爲色欲二爲不色欲三爲癡四爲憍慢五爲不解已上五御足爲已捨五結便無所著已度世無有漏已竟從正得解脫爲畢地言想儀處世如虛空故日無所著上五結御皆已消盡甚日解脫畢
집착한 바가 없으면 오히려 오묘한 무위(無爲)가 있으며, 5결(結)을 이미 버리고 마치면 세간의 명근(命根)이 다하고 또한 세간의 고(苦)가 다하며, 다시는 고가 생겨나지 않으므로 음(陰)ㆍ지(持)ㆍ입(入)도 이미 다하여 고요해지며, 음ㆍ지ㆍ입이 있지 않아 서로 이어지지도 않고 다시 일어나지도 않으므로이 경 앞에서 이미 풀이하였다. ‘다시 서로 이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5음과 6입이 다 끊어졌다는 말이고, ‘다시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은 5음과 6입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고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5결을 이미 마친 무위(無爲)라고 한다.
이미 제(諦)와 서로 응함을 설하였고, 또한 부분이 서로 응함을 설하였으며‘부분’이란 4제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지(地)를 설하였고네 가지 자리≺地≻이다., 또한 복(福)을 설하였으며, 단(斷)을 설하였고모든 악을 끊은 것이다., 또한 죄(罪)를 설하였으며, 여읨[離]을 설하였고, 두 가지 무위(無爲)를 설하였으니, 일체를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하였다.
020_1092_a_09L無所著尚有妙無爲爲捨畢已世閒命根盡亦世閒苦盡不復生苦彼以爲是陰持入已盡寂然不有陰持入不相連不復發此經上已解之不復相連者謂與五陰六入絕不復發者不復發起五陰大入也是謂寂然矣故日不復發也是名爲已畢無爲爲已說諦相應亦說份相應份份部四諦也亦說地四螟者地亦說福說斷斷諸惡也說罪說離說二無爲爲一切如是說
020_1092_b_02L부처님께서는 이미 다시 세간을 건너기를 마치셨으니, 만일 사람이 세간을 건너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이 아홉 번째 사유(思惟)와 정정(正定)인가? 4선(禪)도 색정(色正)이 없으며, 4정(定)도 이미 다하여 정(定)을 마친 것이 아홉 번째 정정(正定)이 되니, 저 첫 번째 선(禪)은 이미 다섯 가지를 버리고 정(正)의 다섯 가지를 따른다.
이미 버린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다섯 가지 덮개[盖]이니, 첫째는 애욕(愛欲), 둘째는 성냄[瞋恚], 셋째는 수면(睡眠), 넷째는 불료회(不了悔), 다섯째는 의심함,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 위의 선(禪)은 이미 버렸다.
저 애욕의 덮개는 무엇인가? 애욕은 5욕락을 애착하여 일으켜서 구할 수 있으며, 원(願)을 따라 일으켜 번뇌[使]를 버리지 않고 발기(發起)하는 것이니,이것을 애욕의 덮개라고 한다.
020_1092_a_17L佛已更度世畢若人欲度世當御是彼何等爲九次第思惟正定爲四禪亦無色正四定亦已盡畢定爲九次第正定彼第一禪已捨五種隨正五種已捨五種爲何等爲五蓋愛欲瞋恚睡眠不了悔爲疑是爲五種上禪已捨彼愛欲蓋爲何等愛欲名爲所爲五樂愛著發往可求隨願發不捨使發起名爲愛欲蓋
저 성냄의 덮개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행을 일으켜 성냄의 상(相)을 끌어당긴다면, 성냄은 비법(非法)의 근본이 되어 부려지고 따라서 일어나니, 이것을 성냄의 덮개라고 한다.
저 수명(睡瞑)의 덮개는 무엇인가? 수(睡)는 몸을 멈추게 하고, 뜻을 멈추게 하며, 몸을 쉬게 하고, 뜻을 쉬게 하며몸과 뜻을 멈추어서 다시는 이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몸을 어리석게 하고, 뜻을 어리석게 하며, 몸을 무겁게 하고, 뜻을 무겁게 하며, 몸을 불편하게 하고, 뜻을 불편하게 하며, 몸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뜻을 부리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수(睡)이다. 명(瞑)은 무엇인가? 뜻이 서로 좇아서 잠이 오게 하면 동상(動相)이 움직여버리기를 다 마치지 못하면 사(使)번뇌와 결(結)번뇌가 되고, 동상(動相)이 움직이면 잠에 이르게 된다. 일을 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명(瞑)이다. 첫머리에서는 수(睡)를 말하였고, 뒤에서는 명(瞑)을 말했으니, 이것을 합쳐 수명의 덮개라고 한다.‘덮개’란 막(膜)이 눈을 덮어서 눈이 볼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덮개라고 하였다.
020_1092_b_03L彼瞋恚蓋爲何等若人爲發御拖𤺙恚相恚非法本所使所從起是名爲瞋恚蓋彼睡瞑蓋爲何等睡爲身跓爲意跓爲身止爲意止謂得身意止不復隨是五蓋也爲身癡爲意爲身重爲意重爲身不便爲意不便爲身不使爲意不使是爲睡瞑爲何等爲意相從令瞑動相動未畢捨爲伎結重相動至瞑也令不作事是爲瞑上頭爲睡後爲瞑是共名爲睡瞑蓋蓋由瞙覆眼令目無所見故日蓋也
저 불료회(不了悔)의 덮개는 무엇인가? 몸에 후회가 그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가(可)하고 불가(不可)함을 생각하면 후회하지 않는다. 첫머리는 불료(不了)가 되고, 뒤는 후회함이 되니, 이것을 합쳐 불료회의 덮개라고 한다.
저 의심의 덮개는 무엇인가? 만약 부처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고, 행자의 모임을 믿지 않으며‘행자의 모임’이란 비구승(比丘僧)을 말한다.,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5)의 잇달아 있는 번뇌[結使]를 풀지 않고‘잇달아’는 자주 번뇌≺結使≻가 있다는 뜻이다. ’잇달아‘는 또한 ’차례로‘라는 뜻이다., 또한 따르고 일으킨다면, 이것을 의심의 덮개라고 한다.
020_1092_b_13L彼不了悔蓋爲何等爲身不悔爲何等爲所念可不可不得悔是上頭爲不了後爲悔是共名爲不了悔蓋彼疑蓋爲何等若不信佛不信法不信御者聚御者聚比丘僧不解苦道比結使比數有結使也比亦比次也亦從是名爲疑蓋
또한 다섯 가지 의심이 있으니, 나라와 고을에 있는 의심말하자면 군(郡)이나 현(縣)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를 설하지만 같지 않으므로 행자(行者)가 뜻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교(敎)를 펴려는 의심, 도를 분별하려는 의심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설법하는데 가르침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의심한다’고 하는 것이다., 정(定)을 행하려는 의심, 도복(道福)을 얻으려는 의심이다. 이와 같은 것은 정(定)을 설하기 위한 의심이니, 이것이 의심의 다섯 가지 덮개이다.‘다섯 가지 덮개’에 대해서는 위의 장구(章句)에서 이미 다 설하였다. 옛날 사람이 『불가사왕경(佛迦沙王經:弗迦沙王經 또는 佛說蓱沙王五願經)』에서 또 설하기를, “다섯 가지 덮개는, 첫째는 음질(婬姪)이고, 둘째는 진노(瞋怒)이며, 셋째는 수명(睡瞑)이고, 넷째는 낙(樂)이며, 다섯째는 회의(悔疑)이니, 멈추지 않는 마음이 이 덮개와 같다”고 하였다.
020_1092_b_19L亦有五疑有縣聚疑言郡縣多人說道不同御者意疑也有發教疑有道分別疑言有人發口教不同故日疑也有欲御定疑得道福疑如是是爲說定疑是爲五蓋五蓋上已章向說之上人『佛迦沙王經』亦說:"五蓋一爲婬妓爲瞋怒三爲睡瞑四爲樂五爲悔疑不止之心與此蓋同也"
020_1092_c_02L덮개는 무엇을 말하는가? 덮개는 상대를 막는 것이니, 일체의 청정한 법을 막는 것이다.막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욕은 청정함을 막고, 성냄은 평등한 뜻을 막고, 수(睡)는 지(止)를 막고, 명(瞑)은 정진(精進)을 막고, 5욕락(欲樂)은 행 또는 지(止)를 막고, 결(結)은 후회하지 않음을 막고, 의심은 지혜를 막고, 근본을 좇아 일어남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해명(解明)을 막는다.다섯 가지 덮개에 덮이는 바가 되지 않기 때문에 ‘명해(明解)’라고 말한다.
020_1092_b_24L蓋說爲何等蓋爲卻對爲卻一切淸淨卻云何愛欲爲卻淸淨瞋恚爲卻等意睡爲卻止瞑爲卻精進五樂爲卻御亦止結爲卻不悔疑爲卻慧知本從起爲卻解明不爲五蓋所故日明解也


불설혜인백육십삼정해(佛說慧印百六十三定解)
020_1092_c_06L陰持入經卷下
佛說慧印百六十三定解

마땅히 알지어다. 사리불(舍利佛)이여, 여래의 몸은, 몸도 없으며, 소작(所作)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으며, 멸함도 없으며, 유(有)를 좇음도 없으며, 일찍이 조립(造立)함도 없었으며, 합(合)함도 없으며, 노닒도 없으며, 이름[至]도 없으며, 앎도 없으며, 훈습함도 없어 모두 청정하며, 쌓아 놓음[畜]도 없으며, 미워함도 없으며, 행함[行]도 없으며, 멈춤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으며, 갚음[報]도 없으며, 소견도 없으며, 틈[間]도 없으며, 냄새도 없으며, 맛봄[甞]도 없으며, 바꿈도 없으며, 알음알이도 없으며, 깨우침도 없으며, 비유도 없으며, 참음[忍]도 없으며, 뜻도 없으며, 생각도 없으며, 뜻도 아니며, 뜻을 여의었으며, 뜻이 평등하며, 평등함이 없어서 뜻을 버렸으며, 주는 것도 없으며, 5도(道)가 없으며, 5도를 끊었으며, 요(要)를 구족하였으며, 문[門戶]도 없으며, 번뇌도 없으며, 소유도 없으며, 두려워함도 없으며, 옳음도 없으며, 옳지 않음도 없으며, 업(業)도 없으며, 이룸[成]도 없으며, 말도 없으며, 연약함도 없으며, 나타나지 않으며, 밝음도 아니며, 어두움도 아니며, 멸함도 아니며, 멸하지 않으며, 멸을 여의었으며, 이미 멸하였으며, 청정하고 더욱 청정하나 저 청정함을 쓰지 않으며, 기꺼워함도 아니며, 사랑함도 아니며, 저버림도 아니며, 저버림을 여의었으며, 이미 머물러 무(無)의 자리에 응하였으며, 가버림[逝]도 아니며, 망(亡)함도 아니며, 죽음[沒]도 아니며, 법도 아니며, 법이 없는 것도 아니며, 흙[土]도 아니며, 흙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진(盡)도 아니며, 진(盡)이 있는 것도 아니며, 진(盡)을 버렸으며, 성냄도 없으며, 하늘도 여의었으며, 메아리도 여의었으며, 설(說)함도 여의었으며, 생각도 여의었느니라.
020_1092_c_08L當知舍利弗如來之身爲無身無作無起無滅無從有未曾造無合無遊無至無知無無畜無憎無止無生無閒無臭無更無識無知忍無忘無思非意離平去意無所無五道五無閨無惱無畏無可無不可無業無成無言無耎不現非明非冥非滅不滅離滅已滅爲淨極淨彼淨不用非悅非愛非負離負已住應於無處非逝非亡非沒非法非無法非亡非無亡非盡無有盡捨盡無怒離於天離於嚮於說離於思
020_1093_a_02L합함도 아니며, 합하지 않음도 아니며, 극치(極致)도 아니며, 극치가 아님도 아니며, 버림도 아니며, 버리지 않음도 아니며, 두 가지도 아니며, 즐거워하지 않음도 아니며, 저것을 받아들임도 없으며,보는 바도 없으며, 상(相)도 없으며, 상을 여의었으며, 상을 구하지도 않으며, 명철하고 평안하고 조용하며, 집착도 없으며, 집착을 여의었으며, 믿음을 세워 진여를 두 가지로 칭함이 없으며, 진여를 살피며, 진여의 이치를 살피며, 남을 저버리지 않으며, 제도할 수 없는 것을 제도하며, 제거할 수 없는 것을 제거하며, 구원할 수 없는 것을 구원하며, 무(無)를 설하며, 둘[二]임을 설하며, 등(等)도 없으며, 견줄 수도 없으며, 허공과 같이 평등하며, 처소가 없이 평등하며, 생김이 없이 평등하며, 얻음이 없이 평등하며, 숨을 쉼도 없으며, 숨을 여의었으며, 이미 적정하고 또 적정하며, 원만히 적정하여 심해탈을 얻었으며, 선한 행을 굴려 요체(要體)에 이르며, 일체 보(報)를 끊으며, 구족함을 이루어 매우 진실하며, 몸이 밝으며, 바탕이 청정하며, 스스로 헤아림이 없으며, 행하는 바도 없으며, 행을 해탈하였으며, 해탈함도 없으며, 응함도 없으며, 가지런하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으며, 둥글지도 않으며, 모나지도 않으며, 5음(陰)을 찬탄하지도 않으며, 종자를 칭하지도 않으며, 명예를 들이지 않으며, 이 수(數)도 아니며, 수를 이루지도 않으며, 다시 태어나지도 않으며, 볼 수 없으며, 앎이 있지 않으며, 또한 죽지도 않으며, 세간의 인연도 아니며, 인연 아님도 없으며, 몸을 도사리지도 않으며, 거처함도 없으며, 끝도 아니며, 처음도 아니며, 생각도 아니며, 걱정도 아니며, 일도 아니며, 다툼도 아니며, 나쁜 상(相)도 아니며, 멸도(滅度)도 아니며, 멸하여 다함도 아니며, 나아감[進]도 아니며, 노닐지 않음도 아니니라.이 아래의 한 장은 品次에 의거해 보건대 기록이 없다. 비록 『음지입경』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다른 경전이기 때문이라면 송본에 의거해서 뽑아내었을 것인데, 이미 조성하였으므로 차마 훼손하지 못한다.
020_1092_c_22L非合非不合非極非不非去非不去非二非不樂無彼受無所視無相離相不求相安徐離著造信亦無二稱如爲審如審如義不負人度無度除無除救無救說無說二無有等無比等與空等處等無生等無得等無休息離息寂而寂滿寂散解心善行轉至要切報斷成具甚眞身明質淨無自惟無所行行解無解無應不齊不長不方不讚陰不稱種不譽入不是不致數不復生不可見不有知不死不世因無不因身然不趺無有居處非終非始非念非憂非事非諍非惡相非滅度非滅訖非所造非不此後一紙准品次錄無雖非陰持入應是別經故者節出寄之卷宋旣已彫成不忍毀壞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아기를 낳은 뒤 생식기가 정상 상태로 회복되는 산욕(産褥) 기간 중에 나오는 자궁과 질의 분비물이다.
  2. 2)지(止)ㆍ관(觀)ㆍ불탐(不貪)ㆍ불에(不恚)ㆍ불치(不痴)ㆍ비상(非常)ㆍ위고(爲苦)ㆍ비신(非身)ㆍ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痴)ㆍ애(愛)ㆍ탐(貪)ㆍ에(恚)ㆍ혹(惑)ㆍ수(受:取)ㆍ갱(更:觸)ㆍ법(法)ㆍ색(色)의 9품(品)과 대치(對治)되는 것이다.
  3. 3)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말한다.
  4. 4)‘사(辭)’는 ‘해(解)’의 오자인 듯하다.
  5. 5)고ㆍ집ㆍ멸ㆍ도와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