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림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림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4선정 중에서 낙심(樂心)ㆍ고심(苦心)을 버림입니다. 또 명락(名樂)ㆍ명고(名苦)를 버림이라 합니다.” “낙심ㆍ고심은 제4선에서 언제 버리게 됩니까?” “제4선정의 문에서 버립니다.” “어디서 몸의 괴로움이 없어져 다합니까?”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욕심을 여의고 청정하여지면 제1선에 드니, 괴로움은 여기서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고심과 낙심은 어디서 없어지고 남음이 없게 됩니까?” “수행이 원만한 데서입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제4선정에서 없어지고 다하여 남음이 없어진다’고 하셨으니, 괴로움ㆍ즐거움ㆍ기쁨은 다 선정의 문에서 없어져 남음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선정에서 염사를 아직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움이요, 염과 사가 없어지면 괴로움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제2ㆍ제3ㆍ제4선정도 같으니, 염(念)이 처음이 되어 차례로 없어집니다. 기쁨은 제4선정에서 없어지고 다하며, 즐거움은 제4선정에 이르러, 즐거움에 들어서 사(捨)에 머물러 지나침이 없는 즐거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제4선 중에서 없어지고 다하여 남음이 없게 되니, 이를 괴롭지도 않고[不苦], 즐겁지도 않음[不樂]이라고 합니다. 이 법은 극히 세밀하여 뜻으로써는 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사나운 소를 소치는 이가 잡으려 하되 잡지 못하면 우리를 만들어 떼로 몰아 우리에 넣고서 하나하나 끌어내어 차례대로 이르다가 사나운 소에 다다르면 곧 이것이라고 한 연후에 잡게 되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먼저 즐거움을 취하기 때문에 일체 법에 들고 들으면 차례로 나오니, 이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마음[不苦心], 즐겁지도 않은 마음[不樂心]이요, 이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受]입니다.” “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잡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위의 구절에서는 어째서 잡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이름으로써 그 형상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잡게 됨과 같습니다. 말과 형상이 그와 같으니,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경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네 가지 반연이 있으니, 장로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에 의하고, 명해탈(名解脫)31)에 의하고, 삼매에 의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어 제4선정에 드니, 이것이 네 가지 반연입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명해탈에 의하고 삼매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제3도(道)의 삿된 견해는 모든 법으로 처음에 없어지게 되며 이것이 제3도를 찬탄하는 것처럼 이 가운데도 그와 같습니다.” “무엇을 모든 법이라고 합니까?” “성냄과 어리석음이 처음이 되니, 이와 같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제4선정 같은 것도 괴롭고 즐거움의 마음이 처음이 되니, 즐거움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욕심이 생기며, 괴로움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성이 생기며, 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제4선정에서 아주 멀어지니, 이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 합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그 형상은 어떤 것입니까?” “즐거움도 버리고 즐겁지 않음도 버림입니다.” “그 맛은 어떠합니까?” “괴로움도 버리고 즐거움도 버린 맛입니다. 또한 치우침이 없는 맛이라 합니다.” 사식정(捨識淨)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사식정이라고 합니까?” “사(捨)라 함은 의식을 깨끗하게 [淨潔]함이니, 이것이 제4선정의 의식이 깨끗함입니다. 의식이 깨끗해지면 세 가지 의식[三識]이 생기니, 다 이는 사(捨)의 할 일이요, 다른 법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사식정결(捨識淨潔)을 말하였습니다. 마치 달빛을 구름이 가리면 그 빛이 밝지 못하다가 구름이 걷히면 달의 광명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이 가운데의 사(思)의 즐거움도 그와 같으니, 사의 즐거움이 떠나면 의식은 곧 깨끗해집니다.” “앞의 세 가지 선정에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왜 의식을 내지 않습니까?” “사(思) 때문에 처음부터 가리워졌으므로 나오지 않습니다. 또 제4선정의 사(捨)는 밤의 의식[夜識]이요, 달의 참[月滿]이니, 이치가 합하면 연후에 달의 광명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1선 같은 것은 다섯 가지가 있고, 제4선 같은 것에도 세 가지의 사식일심(捨識一心)이 있으니, 널리 말하면 세 가지가 있고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경전 가운데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어느 때에 두 가지가 일어나느냐 하면, 제4선정 중에서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선정의 제4품은 끝났습니다. 이 제4선정이란 관지(觀地)를 지으려 함이 있고 일심(一心)을 하려 함이 있고, 또 통지(通地)를 지으려 하고, 멸제지(滅諦地)를 하려 함이 있고, 입생(入生)을 하려 함이 있으니 애욕이 다한 사람이면 일심을 구합니다. 무엇 때문에 선정에 들어 일심을 얻느냐 하면, ‘나는 즐거이 하루를 머물리라’고 하여 곧 가사나(迦私那)를 짓고, 8삼매학(三昧學)을 일으킵니다. 무릇 사람이 삼매로부터 일어난 뒤에 일심으로 자세히 살피며 ‘나는 관한다’고 하면 이것을 관지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8삼매를 이룩하고, 통선지(通禪地)에 들고, 삼매로부터 일어난 뒤에 신통을 짓기도 하여 혹 한 몸으로 천 가지 만 가지 몸을 짓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차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정으로써 통지가 됩니다. 또 어떤 이는 8삼매를 짓고 멸제삼매(滅諦三昧)에 들은 뒤에 칠일을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이는 세간의 열반이니, ‘나는 칠일의 즐거움을 지니리라’고 생각하면 이는 멸제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8삼매에 들어 선정에서 즐기지 않고, ‘나는 범천에 나기를 바라노라’고 하면 이는 입생지(入生地)입니다. 부처님은 제4선정에 들고 보리수 아래서 삼매로부터 일어나시어 여래는 지선(地禪)을 관하셨으니, 통지라고도 합니다. 또한 멸제지에 드시어 두 번 일체법ㆍ세간법ㆍ거룩한 이익의 법[聖利法]에 드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제 간략히 말함이 이와 같으니, 제4선정의 차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법으로써 제4선정에 들어 삼매, 일심의 이치에 의하니, 그러므로 깨끗하다고 합니다. 율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식정입니다.” 물었다. “무엇을 깨끗하다[淨]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하얗고 검지 아니함이니 광명이라고도 합니다. 즐거움으로 인하여 욕심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여의어, 이미 여의기를 마치면 마음은 청백하여 용(用)을 따라 감당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이미 가르쳐서 부드럽게 하였으므로 극처(極處)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만약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지면, 용을 따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마치 생금을 차례로 단련하여 부드러움을 이룩한 뒤에는 용을 따라 감당하게 되니, 만약 갖가지의 영락을 만들려고 하면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보내는 바에 따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하나의 법도 마음과 같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조복함에도 온화하게 하면서 욕보이게 함이 한번이 아니며 베풀어 행해야 할 것에도 견디면서 몹시 깨끗하게 하여 머무느니라. 이미 머물렀으므로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라 하며, 정진하기 때문에 게으름이 아니요, 한 마음도 움직이지 않고 다스린 뒤에는 들뜬 마음이 아니요, 지혜를 움직여 다스린 뒤에는 무명이 아니요, 의식의 다스리는 바가 됨을 가릴 수 있으면 망령됨과 욕됨이 아니요, 광명으로 다스린 바면 번뇌의 어둠으로 막힐 바가 아니니라. 이 여섯 가지 법의 다스린 바는 움직이고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와 같이 마음이 여덟 가지에 들은 뒤에는 맡은 바에 따라 모든 법을 분별하리라. 제4선정 삼매로써 일심을 얻고 나면 일심이므로 모든 개(蓋)는 멀리 떠나고 마음은 때와 혼탁함이 없으며, 염과 사가 이미 지나가면 마음은 청정함을 얻으리라. 지혜를 얻었으므로 일체의 모든 개는 덮어 가리지 못하며, 염(念)이 없으므로 곧 움직이지 않음에 이르며, 번뇌를 버려 버린 지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이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수다라 중의 말씀이니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숙명지(寂命知)라 함은 통지로부터 나오니, 숙(寂)이란 과거 세상의 음(陰)이요, 주(住)란 이 집에서 났다가 저 집에서 나고, 이 집에서 죽었다가 저 집에서 죽기도 하며, 다시 저 집과 이 집에 떨어지고, 이 집을 떠나서 저 집에 가서 나는 것을 스스로의 지혜를 써서 낱낱이 죄다 분별하여 압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숙명인 과거를 앎이니,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숙명지를 알며 알기 때문에 전생 몸이 살던 곳을 알며 태어남을 모두 다 아니, 혹은 1생ㆍ2생 이와 같이 차츰차츰 마음에 알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파라밀(波羅密)에 이르심과 같아서 이미 다시 조복할 것이 없으며, 마음이 나자 곧 그 자리에서 알게 되니, 처음 배우는 사람은 짓고 난 연후에야 알게 됩니다. 나는 지금 간략히 말하였으니, 정도비비사(淨道毘婆沙)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율본의 해설을 따랐습니다.” 1생(生)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1생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한 번 태안에 들어가서 죽기까지의 이것을 1생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차례로 무수한 생에 이릅니다.” 삼발겁(三拔劫)32)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무수한 삼발겁이라고 합니까?” “차례로 없어짐이니 이것을 삼발겁이라고 합니다.” 비발이겁(毘拔夷劫)33)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비발이겁이라고 합니까?” “차례로 생김이니 이것을 비발타이겁이라고 합니다. 삼발겁을 취함이란 삼발차이겁(三拔扠夷劫)에 포함되어 들어가니, 이는 차이(扠夷)의 바탕입니다. 만약 비발겁(毘拔劫)을 취하면 비발차이에 드니, 이 겁(劫)은 마음이 나자 곧 자리에서 알게 됩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아승기겁(阿僧祗劫)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삼발타ㆍ삼발차이ㆍ비발타ㆍ비발차이이니라. 무엇을 삼발타(三拔咤)라고 하느냐 하면, 세 가지의 삼발타가 있느니라.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불의 삼발타ㆍ물의 삼발타ㆍ바람의 삼발타이니라. 세 가지의 삼발타 처소가 있으니, 아바사라천(阿婆沙羅天)ㆍ수바긴나천(修婆緊那天)ㆍ비협파라천(卑脅破羅天)이니라. 만약 불의 삼발타가 일어나는 때면 아바사라천에서 불을 내리어 모두 태워버리며, 만약 물의 삼발타가 일어나는 때면 수바긴나천에서 홍수를 내리어 모두 빠뜨려버리며, 만약 바람의 삼발타가 일어나는 때면 비협파라천에서 바람을 내리어 모두 날리어버리니, 넓이는 1불경계(佛境界)이니라.’ ” 법사가 물었다. “불경계란 무엇을 말합니까?” 대답하였다. “생경계(生境界)ㆍ멸경계(滅境界)ㆍ지경계(知境界)입니다.” “무엇을 생경계라고 합니까?” “10천세계(千世界)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나시면 10천세계가 모두 다 진동하니 부처님의 위덕은 백억 세계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보주(寶呪)ㆍ취주(聚呪)ㆍ타사주(他闍呪)ㆍ아타주(阿咤呪)ㆍ무라주(無羅呪)를 말씀하시면 듣고 쫓지 않는 이는 회오리바람이 나와서 백억(百億) 세계 밖에 떨어뜨립니다. 지경계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세 가지 경계는 멸경계와 생경계와 함께 모두 다 무너져버리고, 만약 번성하게 일어나면 또한 함께 성립됩니다. 나는 이제 간략히 해설하였나니, 『정도비바사』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으심이 1겁ㆍ2겁이 아니셨나니, 이와 같은 삼발타겁을 다 아십니다.” 혹은 처소에 남에서 대해서 이다. “무엇을 혹은 처소에 남이라 합니까?” “혹은 괴겁(壞劫)에 있을 때에 천상에 나기도 하고, 인간에 들기도 하며, 변화하여 나거나 태로 나기도 하고 습기로 나기도 하는 이와 같음을 차례로 다 압니다. 이는 나의 성씨요, 이는 나의 부모 이름이요, 나의 이름은 혹은 가섭이었고 성은 바라문이기도 하고 종족은 찰리이기도 하였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빛깔은 이와 같아서 희기도 하며 검기도 하였다. 음식도 이와 같아서 멥쌀ㆍ보리ㆍ조며 나무의 단 과일이며 맛 좋은 향기의 맛이다. 몸ㆍ입ㆍ뜻의 업은 이와 같은 행을 짓고, 수명의 길고 짧음도 이와 같았다. 세간으로부터 위로 제1천에서 범천까지 생을 받음도 이와 같이 차츰차츰 하였다. 뒤에 도솔천에 나서 일생보처(一生補處)였으며, 도솔에서는 천인과 성이 같아서 사다개다(斯多揩多)34)라 하였다. 몸은 황금빛이요, 음식은 단 이슬로서 하늘의 즐거움을 받고 수명은 57억 6만의 세간 나이었다. 천궁으로부터 내려와 백정반왕(白淨飯王) 집에 태어남을 의탁하여 마야부인에게 태를 받았다하는 과거 세상의 일체 난 곳ㆍ종족 성씨ㆍ받는 형상의 고움과 미움ㆍ가난함과 부유함ㆍ귀함과 천함의 모습을 아니, 이렇게 다 아는 것입니다.” 법사가 물었다. “부처님 한 분만이 아십니까, 다른 사람들도 압니까?” 대답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압니다. 벽지불ㆍ성문ㆍ외도 범지도 각기 분별을 하되 외도 범지는 40겁을 알지마는 이 밖은 모르니, 지혜가 좁고 열등하기 때문에 멀리는 알 수 없고 바로 받아 난 것만을 알 따름이요, 다른 일체는 다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좁고 열등하기 때문입니다. 큰 아라한은 80인이 있는데 10천 겁을 알며 두 우두머리 아라한이 있는데 1아승기겁과 또 10천 겁을 압니다. 벽지불도 1아승기겁과 또 10천 겁이 넘게 아니, 이는 행하는 바에 따라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아시는 바는 끝나거나 다하지 않습니다. 외도 범지는 차례로 알게 되니 혹은 생각하여 대강 알고자하여도 스스로가 분별하지 못합니다. 마치 맹인이 걸을 적에 차례로 하여야 갈 수 있으며 만약 차례대로 하지 않으면 가게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문의 앎은 두 끝이 합쳐야 될 수 있으니 벽지불도 그와 같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앎은 뜻대로 되시니 무수한 겁으로부터 위와 아래를 반복하여 다 아십니다. ‘이것을 나는 아느니라, 바라문이여’라 함은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보리수 아래서 위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과거 무수하게 오래인 겁을 아니, 나는 이제 무명의 어둠이 스러지고 지혜의 광명을 얻었느니라. 무엇으로부터 얻었겠느냐? 모두 힘써 부지런히 하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에서 얻었느니라. 마치 닭이 부리로써 알을 깨뜨리는 것과 같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숙명지는 부리가 되고, 무명으로 덮인 전생 몸의 숙명은 알이 되니, 나는 이제 부리로써 알을 깨뜨리고 알에서 앞서 나왔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무상지(無上智)라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숙명지품이다. “타생수지(他生隨知)라 함은 지혜로써 중생들의 떨어짐[墮]과 남[生]을 아니, 그러므로 남과 떨어짐의 앎[生墮知]이라 합니다. 하늘눈으로써 중생들을 살펴보시니, 여래는 이미 파라밀이 원만하기 때문에 비로소 살펴보시면 곧 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수행을 하여서야 알게 됩니다. 이제 나는 간략히 해설하였으니, 『정도비바사』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성스러움[聖]에 대해서 이다. “어째서 성스러움이라고 합니까?” “육안으로써도 성스런 눈과 다름이 없으니, 하늘 사람의 행한 바의 모든 선은 이 눈으로 이룩되며, 모든 육안을 여의고 모든 티끌과 때를 여의어 멀리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한 바인 ‘성스러운 눈으로써 살펴봄’이라 함이 이것입니다. 지혜 눈[慧眼]이라 함은 힘써 부지런히 함에서 얻어지니, 또한 성스런 눈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스러움에 머무른 연후에 얻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지혜 눈을 성스러운 눈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몸으로써 성스러움에 의지하는 까닭에 성스런 광명을 얻어 마음이 광명을 거두는 까닭에 멀리 살펴 볼 수 있어서 석벽을 통한 참된 밝음과 같아서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정한 지혜 눈으로써 중생들의 남과 떨어짐과 받아 남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도 범지는 떨어짐은 보지마는 남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斷]는 견해를 내고, 또 어떤 외도는 남은 보지마는 떨어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견해와 아홉 가지 중생지(衆生居)를 냅니다. 부처님은 항상하다는 견해도 살피시고 아주 없다는 견해도 살피시니,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하신 바 ‘지혜 눈으로써 중생들이 떨어짐과 남을 보신다’ 함이 그것입니다. 아주 깨끗하다[極淨] 함은 여래는 열한 가지의 번뇌를 여의시니, 그러므로 아주 깨끗하다고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아누루타에게 ‘의심은 마음의 번뇌이니, 알고 나면 버려버리라. 마음을 잡도리하지 못하면 이것도 번뇌며, 수심(睡心)ㆍ면심(眠心)도 번뇌다. 경희시심(驚喜施心)ㆍ대심(大心)ㆍ과정진심(過精進心)ㆍ극유심(極柔心)ㆍ극다언심(極多言心)ㆍ불분별심(不分別心)ㆍ극관색심(極觀色心)인 이와 같은 것은 번뇌의 마음들이다. 아누루타야, 이 열 한 가지 번뇌는 여래가 극히 힘써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이 번뇌를 여의었으며, 그 밖에 나는 물질을 보면서 빛깔을 보지 않았고 빛깔을 보면서 물질을 보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삼아서 여래는 이미 열한 가지 번뇌를 넘으셨고, 또한 사람의 눈을 넘으셨나니, 그러므로 율본의 말씀한 바 ‘성스런 눈의 청정함으로써 세간의 육안을 넘어서 보면 중생들의 육안과 같아서 다름 없으며, 중생들의 떨어짐과 받아 남도 본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처음에 나고 떨어짐을 보십니까?” 대답하였다. “처음에 나고 떨어짐은 보시되 중간에서는 보시지 않으시나니, 그러므로 율본(律本)에서 말씀한 바도 이와 같습니다.” 천(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천하다고 합니까?” “어리석은 행으로 나쁜 법을 행하는 것을 천하다고 합니다. 또 가난함에 때어남도 천함이요, 사람들이 미워함도 천함입니다.” 귀(貴)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귀하다고 합니까?” “지혜로운 마음으로 생을 받으니, 그러므로 귀하다고 합니다.” 좋은 빛깔이라 함은 성내지 않는 가운데서 옴이요, 나쁜 빛깔은 성내는 가운데서 옵니다. 착한 길[善道]이란 살면서 착한 길에 이르름이니, 혹은 많은 금ㆍ은과 값진 보배도 말하여서 착한 길이라고 합니다. 나쁜 길[惡道]이란 간탐에 종사하였으므로 가난하고 하천(下賤)한 데에 나는 것도 나쁜 길이라고 합니다.
하천함이란 음식을 얻기 어려워서 아침 저녁에 이바지 하지 못함입니다. 업을 따라 행한 바를 여래는 다 아시며, 또 중생들이 지옥 가운데서 여러 고통 받음을 보시며, 여래는 보시고 이런 생각을 하십니다. ‘이 중생들은 무슨 죄의 뿌리를 심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으며 낮에나 밤에도 쉬지 못하는가?’ 여래는 자세히 살피시고는 ‘이 중생들은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에 이에 이 갚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다시 천상을 살피시며 여러 천인들이 이타원림(難陀園林)ㆍ미사원림(眉沙園林)ㆍ파류사가원림(波留沙迦園林)에서 천인들이 구경하며 즐겁게 놀음을 보십니다. 여래는 보시고 ‘이 중생들은 무슨 복업을 지었기에 이곳에 와서 나서 하늘의 복 자리를 받는가? 여러 선한 업을 심었기에 이와 같은 갚음을 얻느니라’고 하시니, 이는 행업(行業)으로 아시는 바요, 장차 오는 세상을 알음도 그와 같으니, 여래는 성스런 눈의 앎으로써 큰 신통을 얻으셨습니다.” 몸으로 나쁜 업을 지음에 대해서 이다. 물었다. “무엇을 몸으로 나쁨을 지음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나쁨이란 여러 가지 더럽고 깨끗하지 못함이니, 몸으로 나쁜 업을 지음이 그와 같습니다. 여래는 다 아시니, 입으로 나쁜 업을 짓고 뜻으로 나쁜 업을 지음도 다 앞 글귀에서 말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헐뜯음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착한 사람이라 합니까?”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과 내지 속인으로서 수다원의 도도 착한 사람이라 합니다.” “무엇을 헐뜯음이라 합니까?” “모든 선한 법을 없애며 욕설을 퍼붓고 꾸짖는 것이니, 이것이 헐뜯는 말입니다. 다시 다른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은 다 나쁜 법이요, 바른 법이 아니며, 선정의 법도 없고, 열반의 법도 없고, 불도의 결과인 법도 없다’고 함이니, 이와 같은 헐뜯고, 이와 같은 말을 하며, 혹은 알고서 헐뜯고 혹은 모르고서도 헐뜯으니, 다 착한 사람들을 헐뜯는 데에 듭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은 무거운 업을 지으니, 무거운 업 때문에 천상의 문은 닫히고 지옥의 문은 열립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증거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한 마을에 두 비구가 있었는데 한 분은 늙었고 한 분은 젊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을에 들어가 처음 한 집에 이르러 뜨거운 죽 한 그릇을 얻었습니다. 늙은 비구는 죽을 얻고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뱃속에 풍병이 있으니 이 죽으로 다시 데우리라. 만약 이 죽을 먹으면 뱃속의 풍병이 없어질 것이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나무 한 조각을 가지고 문지방을 만들려고 하여 한 쪽에 던져두었습니다. 이에 늙은 비구는 곧 나무 위에 앉아서 죽을 마셨더니, 나이 젊은 비구는 늙은 비구가 죽을 들이마시는 것을 보고 깔보면서 ‘마가라(摩呵羅)35)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구나’고 하였습니다. 늙은 비구는 죽을 들이마신 뒤에 절에 돌아왔습니다. 닿자마자 나이 젊은 비구에게 물었다. ‘장로여, 불법 가운데서 얻은 바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수다원의 도를 얻었습니다.’ 늙은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나아가 다른 도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애욕이 다한 비구를 비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나이 젊은 비구는 듣자마자 허물을 뉘우쳤습니다. ‘대덕이시여, 나는 대덕에게 착하지 못한 법을 지었습니다. 원컨대 허물을 참회합니다.’ 곧 기쁨을 받고 떠나갔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나 큰 비구를 욕설하고 꾸짖었으면 이렇게 말을 하십시오. ‘장로여, 저는 이제 장로에게 참회하오니, 장로는 받아 주소서.’ 만약 젊은이면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합장하여 이렇게 말을 하십시오. ‘대덕이시여, 이는 저의 허물이니 대덕들 가운데서 저는 이제 참회합니다. 대덕은 받으소서.’ 만약 받지 않으면 다른 데로 가되 절에 이르면, 거기의 비구에게 가서 만약 늙은이면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합장하여 ‘대덕이시여, 이는 저의 허물이오니 대덕은 받으소서’라고 하십시오. 만약 젊은이면 ‘장로여, 이는 나의 허물이니, 나는 이제 참회합니다. 장로는 받으십시오’라고 하십시오. 만약 열반에 들었으면 열반한 곳에서 참회를 하십시오. 참회를 하고 나면 이와 같은 하늘의 길과 열반의 길의 문은 닫히지 않으리니, 앞과 같아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삿된 견해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삿된 견해라 합니까?” “뒤바뀐 견해이니, 이것이 삿된 견해입니다. 이미 삿된 견해의 형상을 받아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니, 입의 나쁨 때문에 성인을 비방하며, 뜻의 나쁜 업도 그와 같습니다. 이미 삿된 견해를 지녔으므로 일체의 나쁜 업은 삿된 견해에 포함되어 들어갑니다. 삿된 견해는 큰 죄업이며 역죄(逆罪)를 지은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는 계율을 지니되 두루 갖추고 삼매와 지혜를 완전히 갖추라. 자신의 바른 견해로 차츰 딴 사람들을 가르침도 이와 같다. 사리불이여, 삿된 견해도 그와 같나니, 몸과 입과 뜻을 여의지 않음이 마치 사람이 흙을 뭉쳐서 던져도 땅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삿된 견해인 나쁜 업도 지옥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니라.’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쁜 업은 삿된 견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보니, 아주 으뜸가는 큰 죄이니라.’ ” 만약 몸이 죽으면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죽음이라고 합니까?” “죽음이란 죄로 지옥에 떨어지면 벗어날 수 없는 때요, 또 4대가 무너져 흩어짐이라 하며, 다시 받아서 남이라고도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지옥으로 나아가면 하늘 길[天道]과 해탈문이 막힙니다. 또 말하자면 만약 나쁜 길로 나아가면 아귀ㆍ축생ㆍ아수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말하자면 지옥이란 아비(阿鼻)를 처음으로 하여 희고 검은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또 말하자면 착[善]한 길이란 인간도 착한 길입니다.” 물었다. “하늘이란 무슨 뜻입니까?” 대답하였다.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이 가장 훌륭한 것을 하늘이라 합니다. 앎(知)이란 눈으로 앎이니, 나머지 것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간략히 성스런 눈의 품[聖眼品]을 말하여 끝마칩니다.
무명이 과거의 숙명을 덮은 것을 숙명인 부리로 쪼아 무명으로 덮인 알을 깨뜨리는 것처럼 현재 타락지(墮落知)도 같습니다. 누진지(漏盡智)라 함은 아라한의 도에서 번뇌[漏]가 없어져 다하는 지혜이니, 이것을 누진지라고 합니다. 과하치심(過下置心)이라 함은 이는 관심(觀心)입니다. 관심으로 괴로움을 알며, 이 사라짐[滅]에서 일체의 고제 모습과 의미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모두 다 통탈하여 압니다. 또 고제를 관하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느냐 하면 쌓임[集]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이 집제입니다. 또 괴로움의 사라짐을 관하니 이것이 멸제입니다. 멸제에 이르려고 함이란 곧 도이니, 4제를 관하여 마치면 모습이 이와 같아서 진실로 다름이 없으며 통달하여 다 압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나는 4제를 아니,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욕루(欲漏)라 함은 욕루로부터 뛰어남이니, 이는 과(果)를 가리킴이요, 과 안에서 나는 이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또 아는 마음[知心]을 덮는 것이 있으니 관한 뒤에야 알며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한 바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법사가 물었다. “이것은 과거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현재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장차 오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만약 과거에 태어남을 말하면 과거에는 태어났다가 이미 죽었고, 만약 현재의 태어남을 말하면 현재는 태어나서 이미 살고 있고, 만약 장차 오는 세상의 태어남을 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의 태어남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태어남이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인(因)을 끊었기 때문에 이를 태어나지 않음[不生]이라 합니다. 머무름[住]이란 범행(梵行)에 머무르는 것이고 범행(梵行)이란 모든 착한 사람[善人]들과 일곱 가지 배우는 이[七學]들과 함께 머무름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출가한 사람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할 일을 다 하였다 함이란 4제ㆍ4도(道)에서 할 일을 이미 끝냈다 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할 일을 이미 끝냈으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느니라’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무엇을 돌아오지 않음[不還]이라 합니까?” “모든 번뇌가 나의 곳에 돌아와 이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돌아오지 않으며, 다시 힘써서 부지런히 할 것이 없습니다. 여래는 관하여 아심이 이와 같으므로 이를 누진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바라문에게 열어 보이려 하기 때문이었고, 부처님은 이미 3달지인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지혜를 얻으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말로 스스로 칭찬하지 않으셔야 하는데 왜 여래로서 스스로 칭찬하십니까?” “부처님은 세간과 바라문들을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나는 성인이다. 나는 으뜸가는 어른이며 위없는 높은 이다. 일체지(一切智)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예배를 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갖가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기쁨을 내어 곧 부처님 앞에서 허물을 뉘우치고 ‘구담 사문은 이와 같은 거룩한 이익이 만족하셨는데 나는 진실로 몰랐구나. 구담 사문이야 말로 전생의 공덕이 두루 갖추었도다’하고, 바라문은 스스로를 몹시 꾸짖었습니다. 꾸짖은 뒤에 설법을 듣고 곧 찬탄하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구담 사문이시여. 법의 맛[法味]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훌륭하십니다’라고 찬탄하였습니까?”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 가운데의 찬탄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바라문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기쁘면서 사례할만한 대답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노래로써 읊었기 때문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바라문은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은 그 뜻이 깊고도 멀며 그 말씀은 좋은 맛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잘 들며 큰 자비를 내고 심히 기쁘게 하신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저는 엎어진 바리와 같았는데 부처님께서 이제 설법하시어 저에게 들을 수 있게 하셨으니 바리가 똑바로 놓여 단 이슬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고, 사람이 풀과 나무로 값진 보배를 덮어 감춘 것을 어떤 사람이 지시하여 알게 하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길을 잃어 헤매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잡고 착한 길을 지시해 준 것과 같고, 크게 어두운 곳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등불과 촛불을 주어 길을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으니, 저도 그와 같습니다.’ ” 법사가 말하였다. “바라문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다시 이 뜻을 펴겠습니다. 바라문의 마음은 엎어진 바리와 같아서 단 이슬 맛을 받을 수 없었는데 부처님이 이제 열어 보이시어 단 이슬을 받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로 덮어 감춰진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가섭 부처님으로부터 뒤에는 삿된 견해가 풀과 나무가 되어 바른 법을 덮고 감추어서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제 부처님의 지시로 알게 한 것입니다. 길을 잃어 헤맴이란 외도와 삿된 견해가 길이 되어 묘한 도 가운데에서 헷갈려 헤매면서 착한 길을 보지 못했는데 부처님은 법을 손으로 삼아 길을 가리켜 제도 해탈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리석고 어둠으로 삼계를 보지 못하였는데 부처님은 법을 등불과 촛불로 삼아 베풀어 주어서 광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비란야 바라문은 찬탄을 하고 마음이 극히 청정하여 세존에게 ‘나는 이제 구담 사문께 귀의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귀의함이란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지함을 말하니, 부처님은 번뇌를 죽이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귀의법(歸依法)과 귀의승(歸依僧)에서 귀의법이란 여래는 수행을 쌓으셔서 이 법을 얻으셨으므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법을 따라 법을 곧 느끼면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지 않으니, 법이란 뜻의 느낌[受]입니다. 또 성인의 도와 열반을 말합니다. 도(道)라 함은 법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법은 지음이 아니요[不作]36), 8지도(支道)37)는 여러 가지 법에서 으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간략히 해설하였습니다. 또 바라문이 있었으니, 차다마나바(車多摩那婆)라고 하는데, 노래로 읊으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칭송하였습니다.
024_0338_b_02L 이와 같이 바라문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제가 이미 3귀의를 받았는 줄 아옵소서.’ ”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여기에서 3귀(歸)를 해설하면 복잡해질 것입니다. 만약 알려고 하면 『아비담비바사(阿毘曇毘婆沙)』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구담 사문이시여, 저가 이미 우바새가 된 줄로 아소서. 부처님은 제가 바로 부처님의 우바새라고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우바새라고 합니까? 누가 우바새이며, 누가 우바새가 아닙니까? 어떠한 계율이 있기에 우바새가 되며 마음이 있기에 우바새가 됩니까? 어째서 우바새라 하며, 어째서 우바새라 하지 않습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이 뜻은 심히 많아서 이 가운데서는 말할 수 없으므로 『수다니비바사(修陀尼毘婆沙)』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라고 함은 ‘지금으로부터 목숨을 마치기까지 딴 스승을 받들지 않음을 부처님은 아소서. 만약 어떤 사람이 칼로 저의 머리를 끊으면서 저에게 부처님을 비난하고 법을 비난하고 비구승을 비난하는 말을 하게 하여도 저의 머리가 차라리 땅에 떨어질지언정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라문은 몸과 목숨으로써 여래에게 받들어 의탁하며 스스로 공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세존은 저의 청을 받으소서. 비란야국에서 전 여름 석달은 비구승들과 함께 계시옵소서.’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이미 우바새가 되었습니다. 여래는 저를 가엾이 여기시어 저의 청을 비란야국에서 받으시옵소서.’ 여래는 잠자코 청을 받으셨습니다.” 법사가 물었다. “부처님은 어째서 바라문의 청을 대답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세간 사람들은 몸과 입으로써 대답해야 하나 세존은 인정하는 마음으로 대답하심은 바라문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청을 받으신 줄로 알았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청을 받으셨다고 합니까?” “만약 청을 받지 않으셨다면 입과 몸으로 대답하실 것이나 세존은 잠자코 얼굴빛이 기쁘셨으므로 부처님께서 청을 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바라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세 번 돌고 사방에서 예배하고 떠나가되, 손을 합장하여 정수리 위에 놓고 물러나며 걷다가 여래가 아주 보이지 않자 다시 예배하고 앞으로 돌아서 떠나갔습니다. ‘이때 비란야국에서 극도로 크게 흉년이 들었다’에서 이때란 부처님께서 비란야 바라문에게서 전 여름 석달 동안의 (청을) 받은 때입니다. 흉년이란 음식을 얻기 어려움이요, 혹은 사람이 청정하고 지극한 마음이 아니면 바로 음식이 있지마는 주지 않는 것도 흉년이라고는 하나 비란야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오곡(五穀)이 결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가지 의심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두 가지 의심이라 합니까?” “두 가지 의심이란 두 가지 마음의 의심입니다.” “무엇을 두 가지 마음의 의심이라 합니까?” “마음에 의심됨이니, 여기의 여름 석 달 동안에 걸식하면 얻을 수 있을까를 의심하기도 하고, 얻지 못할까를 의심하기도 하며,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생활할 수 없으리라고 의심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마음의 의심입니다. 흰 뼈라 함은 가난하고 하천한 사람들이 밥을 빌었으되 얻지 못하여 굶어서 죽었으므로 버린 시체의 뼈가 넓은 들에 낭자하였으니 이것을 흰 뼈라고 합니다. 또 오곡의 결실이 잘되지 아니하여 희어서 뼈와 같았으니 역시 흰 뼈라고 한 것입니다. 산가지와 같다 함이란 벼가 비로소 패다가 큰 가뭄을 만났으므로 뿌리와 줄기가 꼿꼿이 서서 산가지와 같았으니 이것을 산가지와 같다고 합니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흉년일 때에는 저자에서 산가지를 쓰는데 이것을 산가지와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자에 다달았을 때에 강한 이는 들어갈 수 있되 약한 이는 들어 갈 수 없으므로 밖에서 크게 부르짖습니다. 쌀을 파는 사람이 그 약한 이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며 평등한 마음을 내어 문을 열어서 들게 하면 차례로 앉고 먼저 값을 받은 연후에 쌀을 주며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산가지를 써서 셈합니다. 비구들은 ‘여기서는 흉년에 모두 다 산가지를 이용하여 셈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때에 그 비구들은 일곱 여덟 마을을 지나면서도 조금씩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는 이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때에 상인이 북쪽에서 말 5백 마리를 몰고 남쪽을 향하여 가면서 화물을 팔았는데 혹은 두세 배의 이익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익을 구한 까닭에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다가 차례로 비란야국에 이르러서 여름 넉 달을 머물렀습니다.” 물었다. “말을 파는 상인이 어째서 떠나지 않고 넉 달을 머물렀습니까?” “비와 물이 많았기 때문에 말이 통행할 수 없어서 성 밖에 마굿간을 세우고 아울러 자기들의 집을 짓고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구들은 상인의 처소에 가서 걸식하였는데, 사람마다 말이 먹는 보리를 각각 다섯 되씩을 얻은 것입니다.” “보리를 비구들에게 준 것은 믿음 때문입니까, 믿지 않음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말을 파는 상인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날마다 비구들이 걸식하되 빈 바리로 돌아감을 보았습니다. 본 뒤에 상인들은 돌아가 그 동무들을 향하여 위와 같은 일을 말하였으므로 각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걸식에 몹시 피곤하고 괴로운데도 도무지 얻는 거의 없으니, 함께 논의해 봐야겠구나. 우리들 상인이 만약 날마다 공양하면 아마 그 아침 나절은 돌면서 우두커니 서 있지는 않으리라. 우리들은 다 함께 말 몫을 가져다 각기 다섯 되씩을 비구들에게 주면, 비구들은 이 말이 먹는 보리를 얻어서 피로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의 말에도 심한 손해가 되지도 않으리라.’ 상인들은 비구들에게 가서 예배하고 아뢰었다. ‘대덕들이여, 저희의 보리를 받으십시오. 나날이 사람마다 다섯 되씩으로 잡식을 뜻대로 만드셔서 잡수소서.’ 그러므로 율본에서 ‘날마다 비구에게 보리를 보시하였으므로 의복을 입고 아침에 가서 걸식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아침이라고 합니까?” “새벽부터 한낮[中]까지를 아침이라고 합니다. 의복을 입는다 함은 가사로 몸을 싸는 것입니다. 분위(分衛)라 함은 비란야 마을에서 걸식을 하되 얻지 못하였으니, 마을을 두루 다녔으나 도무지 나와서 응대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보리를 가지고 절에 돌아옴이란 가서 걸식하는 곳곳마다 보리를 얻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가져다 찧어서 먹는다 함은 늙은 비구에게 정인(淨人)이 없고, 또 지어 줄 이가 없으므로 몸소 가서 갈아 밥을 지으니, 혹은 여덟 혹은 열씩 같이 지은 뒤에 나누어서 먹었습니다. 어진이 아난은 여래의 몫을 가져다 손수 갈았습니다. 아난은 지혜가 구족하여 밥을 아주 맛있게 지었는데, 여러 하늘이 다시 단 이슬을 넣어서 만들기를 마치니, 부처님은 받아서 잡수시고 곧 삼매에 드셨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는 다시 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대덕 아난이 부처님을 모셨습니까?” “모셨습니다. 여래가 보리수 아래로부터 일어나신지 20년 동안에 부처님을 모신 이는 모두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대덕 나가(那伽)였고, 혹은 대덕 나기다(那耆多)였고, 혹은 대덕 미기야(彌耆耶)였고, 혹은 대덕 우가바(優伽婆)였고, 혹은 대덕 사가다(沙伽多)였고, 혹은 대덕 수나가다(須那訶多)였습니다. 이와 같은 대덕들은 뜻에 즐거우면 모시고 왔다가 즐겁지 않으면 떠나갔고, 혹은 죄다 가버렸으니 때에 대덕 아난이 와서 모셨습니다.” “나라 안이 흉년이었다고 해도 어째서 적은 밥이라도 나누어서 뭇 상가들을 공양하여 공덕을 짓는 사람이 한 분도 없었으며, 또 바라문이 세존을 청하였으면서 전 여름 석 달을 공양조차 안 하였습니까?” “왜냐하면 하늘의 악마 파순이 1유순 안을 덮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도무지 공양하는 마음이 없게 하고는 가리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마음에 과연 악마가 가린 줄 모르셨습니까?” “아셨습니다.”38) 또 물었다. “여래는 어째서 사위의 왕사성이나 딴 나라에 가셔서 안거를 맺으시지 않고 이 나라에 오셨습니까?” “사위의 왕사성 나라는 그만두고 바로 울단월(鬱單越)에 가서 닿거나, 혹은 도리천(忉利天)에 오르더라도 악마왕은 역시 와서 가릴 것이므로 숨거나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해에 악마왕은 크게 성을 내고 있었으므로 여래는 이미 스스로 두루 살피시어 오직 비란야국의 말을 파는 상인들만을 의지하여 안거할 만하셨기 때문입니다.” “악마왕은 이미 다른 사람들은 가릴 수 있었으면서 무슨 뜻에서 말을 파는 상인을 가려서 부처님과 뭇 상가들이 밥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가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왕이 이미 떠나간 뒤에 말을 파는 상인이 뒤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이로써 가리지 못한 것입니다.” “악마왕은 왜 다시 말을 파는 상인을 가리지 않았습니까?” “모두 가리지는 못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네 가지 악마가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첫째는 아침과 점심의 공양이요, 둘째는 탕약(湯藥)의 넉넉함이요, 셋째는 여래의 수명이요, 넷째는 여래의 광명입니다. 해와 달의 법왕도 여래에 이르면 광명이 숨고 가려져서 나타나지 않으므로 악마 왕은 가지가지의 방편으로서도 가려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절구를 찧는 소리를 들으셨다’ 함은 비구들이 말이 먹는 보리를 얻어서 돌아와 찧었으므로 소리가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일부러 물으셨다, 알면서도 묻지 않으셨다’에서 알면서도 일부러 물으심이란 부처님은 인연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 할 줄 아셨으므로 물으신 것이요, 알면서도 묻지 않으심이란 이익이 없으므로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때여야 물으셨다’ 함은 만약 물으시면 바로 그때여야 물으셨으므로 때여야 물으셨습니다. ‘묻지 않으셨다’ 함은 여래는 때가 아닌 줄 알면 묻지 않으셨으며, 뜻이 있어야 물으셨고 뜻이 없으면 묻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의 일이 있으면 물으셨으니, 첫째는 설법을 하려고 하기 위하여, 둘째는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제정하는 인연이 혹은 가볍고 혹은 무거웠어야 하셨으니 이 때문에 물으셨습니다. ‘아난아, 이 소리는 무슨 물건의 소리냐?’ 아난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비구들이 보리를 찧는 소리이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좋구나, 좋구나, 아난아.’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찬탄하시며 ‘좋구나’라고 하셨겠습니까? 계율을 제정하고 설법을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요, 이미 훌륭하니라. 미래의 비구들은 벼의 알맹이를 찾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래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야 합니다. ‘아난아,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로다. 흉년일 때에는 걸식하되 얻기가 어렵거늘, 이미 족한 줄을 알기 때문에 바른 법을 보호하고 지녔으므로 훌륭하니라. 흉년일 때에 탐심을 눌렀으므로 훌륭하니라. 다른 마을 가운데는 벼와 쌀이 넉넉하며 단 과일과 특이한 맛이 심히 많거늘 가는 이도 없으며, 대중 가운데서는 도무지 한 사람도 생각하는 이ㆍ성내는 이ㆍ원망하는 말을 하는 이가 없으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머무르실까? 세존은 어째서 저 넉넉한 마을에 나아가시어 음식을 얻기 쉽게 하시지 않으실까?≻라고 하는 이런 말은 도무지 없고, 또한 원망하지도 않으며, ≺비란야 바라문은 무엇 때문에 우리들 청하여 여기에 와서 여름에 앉아 있게 하고 공양하지 않을까?≻, 또한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이끗을 행하며 구하려고 하는 이가 없고, 또한 서로가 찬탄하며 ≺이 사람은 도를 얻어서 남에게 알 수 있게 하고 공양을 희망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이 없고, 각자가 입을 다물어 잠잠하며 다만 일심으로 여래를 의지하여 머무를 뿐이므로 훌륭하니라.’
미래의 비구들은 절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음식을 얻기가 쉬우면 교만한 마음을 내며 ‘밥이 거친 곡식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너무 물렀다’라고 하고, 혹은 ‘너무 되다’라고 하고, 혹은 ‘싸라기다’라고 하고, 혹은 ‘시고 짜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말은 벼의 알맹이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후세의 비구들을 위하여 선한 법의 인연을 지었느니라. 너희들의 법으로써 미래의 비구들이 만약 음식을 얻으면 좋거나 나쁘거나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고, ≺옛날 법왕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큰 아라한들도 오히려 말이 먹는 보리를 잡수셨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이런 음식에서 싫어하고 가벼이 여기겠는가≻라고 말하리라’ 하셨습니다.”
024_0340_b_02L ‘그때 대목건련’에서 대(大)란 성문들의 신력과 지혜에서 가장 컸으므로 대라고 하였다. 목건련은 성이다. ‘부처님께 아뢰었다’라고 함은 세존을 향하여 말한 것이다. 물었다. “무엇 때문에 세존을 향하여 말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대덕 목건련은 출가한지 이레 만에 성문 파라밀을 얻었으므로 여래는 다시 찬탄하시어 ‘신통 제일 목건련’이라고 하셨습니다. 목건련은 신통력이 있는 까닭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란야국은 크게 흉년이어서 비구승들이 걸식하기 어려워서 아주 피로하고 있다. 나는 이제 땅을 뒤집어서 지비(地肥)를 가져다 뭇 상가에게 공양하리라’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땅을 뒤집으면서 세존께 아뢰지 않으면 여래와 신력을 다투는 것이니 곧 우리들의 법에 어긋난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땅이 처음에 이루어질 때의 지비는 마치 생소(生酥)와 같고 꿀맛과도 같습니다.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땅을 뒤집어서 땅 아래 지비를 가져다 뭇 상가들에게 공양하려 하옵니다.’ ‘뒤집는 다[反]’ 함은 아래의 것을 가져다 위로 돌림이니, 왜냐하면 뭇 상가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허락하려 하시지 않고, 목건련에게 사자후를 짓게 하시면서 부처님은 목건련에게 물으셨습니다. ‘일체 중생들과 성ㆍ읍ㆍ마을은 다 이 땅에 의지하므로 허공에 매달아 놓을 수는 없는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목건련이 대답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한 손으로는 변화로 땅을 만들어 성ㆍ읍ㆍ마을과 일체 중생을 받아서 땅과 다름없게 하고, 한 손으로 중생들이 의지한 땅을 뒤집겠습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만두라, 목건련아.’ ” 물었다. “무엇 때문에 세존은 목건련이 땅을 뒤집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대답하였다. “중생들의 주거(住居)가 뒤바꿈을 가엾이 여겼기 때문이니, 혹은 ‘이것이라’하고 혹은 ‘나의 사는 곳이 아니라’고 하며, 혹은 성ㆍ읍ㆍ마을에 대해서 서로 놀라고 괴히 여기면서 ‘이것은 우리의 성ㆍ읍ㆍ마을ㆍ밭ㆍ동산ㆍ못ㆍ숲이 아니다’고 할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오직 신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신력 없는 이는 안 될 것이지마는, 한 때만의 흉년이 아니요, 미래도 흉년은 있을 터인데 가령 흉년을 만났을 때에 누가 목건련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미래의 성문 제자들이 조그마한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서 만약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면 사람들이 보고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세상에 계실 적의 성문 제자들은 계율을 지니어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신통력을 얻어서 흉년일 때에는 대지(大地)를 뒤집어 지미를 가져다 뭇 상가에게 공양했다. 지금의 뭇 상가는 계율을 지니어 갖추지 못하였구나. 만약 완전히 갖추었다면 전과 같아서 다름이 없으리라.’ 다시는 조그마한 몫도 보시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뒤바뀐 견해 때문에 성인을 업신여기고, 업신여기기 때문에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존은 목건련에게 ‘땅을 뒤집기를 즐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건련은 부처님께 나아가 땅을 뒤집기를 빌었으나 하지 못하고 다시 달리 청하였습니다.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만두라고 말씀하시는군요.’ ” 법사가 말하였다. “거룩하십니다고 하는 문구부터는 앞에 말한 바와 같으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조금 다른 것은 있으니, 무엇인가 하면 목건련은 다시 울단월의 땅을 끌어다가 도로 염부리의 땅에 잇대려고 하였습니다.” 물었다. “바다는 어떻게 합니까?” “바다는 소 발자국과 같게 하여 한 걸음이면 건너서 비구들이 여러 마을에 가서 밥을 먹게 할 것입니다.”
024_0340_c_02L 우파리는 율장의 근본을 증명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사리불은 고요한 데서부터 일어나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물었다. “무엇을 고요함[靜]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조용하고 소리가 없음이니, 또한 한 마음이 되어 조용함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 법이 오래 머무르느냐 함은 비바시(毘婆尸) 부처님에서 대답하였으니, 나머지 것의 뜻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물었다. “사리불은 어째서 자신의 신력으로 살펴보아 알지 못하고 와서는 부처님께 아뢰었습니까?” “될 수 없었습니다. 사리불은 혹시 신력으로 살펴보아 바로 모든 부처님의 오래 머무름과 오래 머무르지 못함을 알 수 있지마는 만약 모든 부처님의 인연을 분별하는 데는 통달하여 환히 알 수 없습니다. 대덕 대연화(大蓮華)는 할 수 있다 하니, 왜냐하면 우두머리 아라한은 16종지(種智)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는 족히 어려운 것은 아니로되 여래에 의지하여 세존이 으뜸 됨을 나타내려 하였으므로 와서 부처님께 아뢰며 물었고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머지 율문 구절은 차례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냐 하면, 이 이치는 알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비바시 부처님을 처음으로 말하리라. 모든 부처님은 게으르시지 않으셨으니, 혹은 한 사람 두세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점점 많아져서 일체 삼천대천 세계의 중생들에게 설법하시되 저마다 다른 마음을 내셨으니, 그것은 대중들이 적으면 간략히 말씀하시고, 대중들이 많으면 자세히 말씀하셔야 되었기 때문이니라. 또한 높고 낮은 설법을 하시지 않았고 다 평등하게 한 가지로 설법하셨으니, 마치 사자가 이레 만에 한 번 일어나서 먹이를 찾다가 중생들을 잡으려 할 적에는 크게 작음이 없이 먼저 외치고서 잡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 만약 사자가 중생을 잡을 때에 먼저 크게 외치지 않으면 마음에 가벼이 여기어 혹은 달아나게 될 수도 있으므로 모두 외쳐서 중생들이 무서워서 복종하게끔 하고 잡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에게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은근히 말씀하시느니라. 만약 간략히 말씀하면 중생들이 혹은 부지런한 마음으로 닦아 익히지 않기도 하리라. 왜냐하면 여래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 세존의 설법은 마치 큰 바닷물이 동일한 맛인 것처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그와 같았느니라. 그러나 중생들이 마음은 가르치기 쉬우니, 이제 한 게송의 이치를 말하여 4제에 들게 하리라. 그러므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법인 수등(修登)ㆍ게야(偈耶)를 널리 말씀하시지 않았느니라.” 법사가 말하였다. “앞 구절은 이미 말하였으므로 거듭 말하지 않습니다.” ‘성문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지 않는다’에 대해서 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왜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지 않았습니까?” “그 성문 제자들이 그릇됨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위덕바라제목차(威德波羅提木叉)도 정하지 않았으며 반 달[半月] 한 달의 설계를 않은지도 6년에 이르렀습니다. 6년이나 그만두셨다가 교수바라제목차(敎授波羅提木叉)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래가 스스로 말씀하셨음이요, 성문들에게 말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염부리의 땅 반두마저(槃頭摩底) 왕사성(王舍城) 교마(翹摩) 녹야원(鹿野園)은 비바시 부처님이 머무르셨던 곳이니, 일체 비구승들이 다 모여서 부처님의 포살(布薩)ㆍ뭇 상가의 포살ㆍ3인의 포살ㆍ2인의 포살ㆍ1인의 포살이 있었습니다. 옛날 염부리의 땅에는 8만 4천의 절이 있었고, 혹은 10만이나 20만의 비구들이 있었는데, 시끄럽지도 아니하고 모두 고요하게 살았습니다. 이때 여러 천인들의 생각은 부처님의 설계를 들으려고 하여 항상 해를 세다가 6년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을 모아 부처님에게 나아가서 부처님 설계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비구들은 신력이 있는 이면 왔고, 신력이 없는 이는 하늘들이 와서 아뢸 때에 가야겠다고 하고 옷과 바리를 지니어서 비구들은 천인들의 신력을 입고서야 포살하는 당(堂)에 닿았습니다. 가서 닿자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매, 때에 비바시 부처님은 대중들이 모였음을 알고 교수바라제목차를 말씀하셨습니다.
024_0341_c_02L 이와 같은 방편으로써 일체 과거 모든 부처님은 이 게송으로 바라제목차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수명장단이십니다. 그러므로 같이 짧은 목숨을 말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셨으며, 이것이 위덕바라제목차이니, 여래의 말씀이 아니요, 성문 제자들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20년 동안 모두 교수바라제목차를 말씀하셨으며, 또 어느 때에는 부바승가람(富婆僧伽監)과 미가라모(眉伽羅母) 궁전에서 비구들이 앉자마자 곧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에 나는 포살을 짓지 않겠으며, 나는 교수바라제목차를 말하지 않으리니, 너희들이 스스로 말하라. 왜냐하면 여래는 청정하지 못한 대중들의 포살에서 바라제목차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성문 제자들이 위덕바라제목차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문 중의 말씀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모든 부처님은 위덕바라제목차를 말씀하지 않으셨고, 교수바라제목차를 말씀하셨으며, 비바시 (등의) 세 부처님은 바라제목차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니라. 세 부처님이 이미 열반에 드시고 성문 제자들도 열반에 들었으니, 최후의 성문 제자의 성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이름도 한 가지가 아니어서 성은 구담이기도 하고, 성은 목건련이기도 하며, 이름은 불무덕(佛無德)이기도 하고 이름은 담무덕(曇無德)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가지가 아니어서 혹은 바라문 종족이요, 혹은 거사 종족이요, 혹은 찰리 종족이다. 또 한 가지의 집이 아니어서 혹은 부자 집이요, 혹은 가난한 집이요, 혹은 하천한 집이었으니, 따라서 이와 같이 갖가지어서 하나의 집이 아니었느니라. 하나의 성씨 등이 출가하여 맑은 행을 지음이 아니고 한 종족ㆍ성씨ㆍ이름이 바른 법에 들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 그 뜻하는 곳을 써서 부처님 법에 서로 이어받지 못하였으니, 부처님 법이 오래 세상에 머무르지 못한 소이는 이들 때문이었느니라.’ ” 물었다. “비구들은 어째서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지 아니하여 바른 법이 속히 무너져 없어지게 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먼저 대덕들이 오히려 잘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하고, 각자가 법장을 수호하지 않았으므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속히 없어지게 했을 뿐입니다.” ‘실로써 꿰뚫지 못함’이란 바람이 불면 곧 흩어지리니 꿴다고 함은 잡아맴을 말한다. 비유컨대 여러 가지의 꽃을 실로 꿰지 않으면 바람에 불리어서 곧 흩어져버리는 것처럼 부처님 법도 그와 같아서 계율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써 먼저 관한 뒤에 성문을 가르친다’에 대해서 이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먼저 성문들의 마음을 관한 뒤에 가르치셨으니, 성문(聲聞)들을 반연하여 이치를 깨닫기가 쉽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세히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의 숲’이란 이 숲에 만약 들어가는 이가 있으면 곧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너희들은 생각하라’ 함은 세 가지 생각39)이 있는데 출가가 처음이 도니, 그대들은 부지런히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함은 세 가지 나쁜 법40)이 있는데 탐욕을 생각함이 처음이 도니 그대들은 부디 이와 같은 것을 생각지 말고, 그대들은 마음에 기억하고 지니어서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할 것이요, 마음에 한결같이 기억하고 지니어서 이런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생각하지 말라’ 함은 무상을 항상 하다고 하는 이치로 생각지 말며, 부정을 깨끗하다고 생각지 말지니 그대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함은 모든 나쁜 법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으켜서 머물러야 한다’ 함은 선한 법은 그대들이 일으켜야 하니, 만약 이미 하였다면 늘리고 자라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뇌를 일으키지 않음으로부터 마음에 해탈을 얻는다’ 함은 마음에 번뇌를 지니지 않는 까닭에 해탈함이요, 또한 없앰[滅]으로 일으키지 않고 없앰에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음으로부터 마음에 해탈함을 얻느니라’고 하였으니, 일체가 다 아라한이다. 비유컨대 연꽃이 햇빛이 나자마자 피어남과 같다. ‘사리불이여, 옛날 두려움의 숲 안에서’라 함은 만약 사람이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하고 이 숲에 들어가면 숲에 위엄이 있는 형상이 있으므로 모두가 머리털이 곤두선다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이것이 인연이니라’에 대해서 이다. 법사가 말하였다. “다음 구절의 뜻은 쉬우니,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비바시 부처님의 수명은 8만세요, 성문들도 그와 같았으니 부처님이 세간에 계심으로부터 최후의 성문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법이 세간에 머무르기 백천 6만세였다. 시기(尸棄) 부처님의 수명은 7만세에 성문 제자의 수명도 그러하였고, 유위(惟衛) 부처님의 수명은 6만세에 성문의 수명도 그와 같았으니, 두 부처님 수명과 최후의 성문에 이르러서 부처님 법이 세간에 머무르기 백천 42만세로서 차례로 등급이 있었으므로 부처님의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이에 사리불은 세 부처님의 불법이 오래지 않았음을 들었다. 듣고는 마음에 다시 부처님 법이 오래 머무름을 묻고자 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써 불법이 오래 머무르십니까?” “모든 부처님의 수명에 구나위(拘那衛) 부처님의 수명은 4만세요,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부처님의 수명은 3만세요, 가섭 부처님의 수명은 2만세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명은 1백세이며, 그 성문 제자들의 수명도 그와 같으므로 불법이 오래 머무르느니라. 나 지금의 세존은 가섭의 반의 수명인 1만세를 취하여 이때에 세간에 나와야 하나, 중생들의 근기가 익지 못했음을 살펴보고는 5천 세로 나와야 하고, 차례로 5백 세에 나와야 하고, 또 다시 근기가 익은 중생들이 없으면 1백세까지 이르니, 그런 뒤에야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에 수명이 짧아지고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으므로 불법의 오래 머무름은 앞과 같느니라. 세 부처님의 법은 수명과 함께 없어졌으므로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나 뒤의 세 부처님은 부처님이 비록 멸도하여도 불법은 오히려 세상에 있나니 이를 오래 머무름이라 하느니라.” 이에 사리불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고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시옵소서.” 율본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리불은 삼매로부터 일어나서’라고 하였으니, 나머지 두 글귀는 차례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그만두라, 그만두라.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느니라’고 하시자 사리불은 거듭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시옵소서.”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이 법은 성문 연각이 알 바가 아니요, 부처님과 부처님만이라야 아실 뿐이니라.” ‘아직 때[垢]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때라고 합니까?” “때라 함은 지금의 세상과 후세에 여래의 법에서 잘못함이니, 이를 때라고 합니다.” ‘아직 성문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지 않았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 때문에 성문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번뇌[漏]가 없는데 여래께서 계율을 정하면 중생들은 비방하는 생각을 내니, ‘어째서 구담 사문은 여러 성문 제자들처럼 다 귀한 성바지요, 혹은 왕위였는데도 그 재물과 궁전과 처자 권속들을 버리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모두 족한 줄을 알며 세간에서 바라고 구하는 바가 없는데, 어째서 구담은 도리어 바라제목차로써 잡아매실까? 구담은 아직 세상 사람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시는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계율을 정하면 세상 사람으로서도 공경과 존중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리라. 비유컨대 의사가 병을 잘 다스리지 못함과 같다. 사람에게 처음 악창(惡瘡)이 생기려 함을 보고 악창의 성질은 있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크게 곪지도 않았으면 곧 그것을 따고, 딴 뒤에는 피가 나와 낭자하여 크게 고통을 받는 것을 약을 발라 악창이 도로 아물었다고 하자. 의사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위하여 병을 다스렸으니 나에게 값을 치러야한다.≻ 환자가 대답하였다. ≺이 어리석은 의사야, 만약 나에게 병이 있었다면 나를 치료하는 게 좋았으리라. 나는 본래 아픔도 없었는데 억지로 살을 째서 피가 흘러나오고 큰 고통을 생기게 하고는 도리어 나에게 값을 요구하니, 어찌 미치광이가 아니겠느냐.≻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만약 먼저 계율을 정하면 비방을 일으켜 ≺나 자신이 죄가 없는데 억지로 계율을 정하시는구나≻고 하리라. 그러므로 여래는 먼저 계율을 정하지 아니하노라.’ ” ‘만약 번뇌가 일어나면’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번뇌가 일어난다고 합니까?” “만약 번뇌가 상가 중에서 이미 일어났다면 이때 여래는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여 바라제목차를 지시하셨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진 의사가 병에 알맞게 약을 베풀어 낫게 하고 크게 상을 타며 또 칭찬을 받되, ‘이는 좋은 의사로서 나의 병환을 잘 다스렸도다’라고 하는 것처럼 여래도 그와 같아서 죄에 따라서 제정하면 기쁘게 받아 지니며 원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그만두라, 그만두라. 사리불이여, 만약 번뇌의 법[漏法]이 생기면 연후에 세존은 계율을 정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머지의 글귀는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불법 중에서 누가 먼저 출가했느냐 하는 것인데, 붕건다아(崩揵多兒)의 이름은 우파사나(憂波斯那)였습니다. 우파사나로 인하여 계율을 제정하셨으니 아직 10납(臘)이 차지 않았는데도 제자를 위하여 구족계를 주었는데, 우파사나는 2납이요, 제자는 1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차례로 이로부터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만약 10납이 차지 못하면서 제자를 위하여 구족계를 주면 돌길라(突吉羅) 죄를 범하느니라.’ 부처님은 계율을 정하여 마치셨는데, 다시 어떤 비구가 10납이 찼거나 10납이 넘었지만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데도 제자를 위하여 구족계를 주었으므로 부처님은 또 계율을 정하시며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서 남을 위하여 구족계를 주면 돌길라 죄를 얻느니라.’ 부처님이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허락하신다 함은 10납이거나 10납을 넘었거나 하여 잘 가르칠 수 있으면 제자를 위하여 구족계를 주는 것을 허락하심입니다. ‘아직 많지 않다’ 함은 대중 스님 가운데 늙고 젊은이가 아직 많지 못하며 방사도 아직 크지 못한데 만약 대중 스님들이 많으면 번뇌의 법을 범하는 이가 있을 것이므로 이때에 여래는 연후에 계율을 정하십니다. 만약 비구가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이와 함께 자되 두세 밤을 지내면 이 비구는 파야리(波夜提) 죄를 얻습니다. 만약 비구가 해마다 제자를 제도하면 이 비구는 파야리 죄를 얻습니다. 만약 비구니가 해마다 제자를 제도하면 이 비구니는 파야리 죄를 얻습니다. 이미 하신 말씀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큰 이끗[大利養]’이라 함은 만약 대중 스님들이 큰 공양을 얻으면 유루법(有漏法)이 생기니, 이때에 여래는 계율을 정하실 것입니다. 만약 비구가 나형(裸形) 외도의 남자나 여자가 손수 음식 주는 것을 받으면 이 비구는 파야리 죄를 얻습니다. ‘아직 많이 듣지 못하였다’ 함은 대중 스님 가운데 아직 많이 들은 이가 없다 함이니, 만약 비구승 가운데서 많이 듣고는 번뇌 법을 내되 1아함이나 5아함을 읽고 외워서 환히 알면서도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써 뒤바뀐 뜻을 해설하고, 그릇된 계율을 옳은 계율이라 하며, 그릇된 법을 옳은 법이라 하므로 부처님은 계율을 정하십니다. 만약 비구로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은 내가 이미 안다’고 이런 말을 하면 이 비구는 파야리 죄를 얻으니, 다음에 사미가 하는 말 같은 것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유루법을 원인하셨지마는 우리가 어떻게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겠습니까?” “어떤 것을 번뇌라고 합니까?” “도둑입니다.” “무엇을 도둑이라 합니까?” “불법에서 계율을 범하면 바로 도둑입니다.” “어째서 도둑이라 합니까?” “사문이 아닌 이가 스스로 나는 사문이라 하며 4배(輩)41)의 물건을 겁탈하므로 계율에서 ‘번뇌 법이 아직 없으면 겁탈하는 사람이 아직 없으며 계율을 범하는 사람도 아직 없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음’이란 번뇌가 없음을 말하며, 또한 근심도 없고 계율을 범함이 없음을 말한다. ‘검은 법[黑法]에 물들지 않음’이란 검은 법은 파계(破戒)로 말하고, 또한 대중 스님들이 깨뜨리지 않음을 말한다. ‘지극한 청정[極淨]’이란 지극한 광명에 머무름을 말한다. ‘진실지(眞實地)’란 계(戒)ㆍ삼매ㆍ지혜ㆍ해탈가 진실한 자리에 머무름이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차례로 말하겠습니다.” 비란야국에서 전 여름 석 달에 5백의 비구들은 최소한 수다원의 도를 얻었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수다원 도라고 합니까?” “수다원은 유(流)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유라고 합니까?” “도(道)이니, 만약 사람이 이 유의 도에 들면 수다원도라고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수다원을 어째서 수다원이라고 하느냐?’고 묻자 사리불은 ‘이는 세존이시여, 여덟 가지 도를 잘 꿰뚫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 도라 함은 첫째 정견(正見)이요, 둘째 정사(正思)요, 셋째 정구(正口)요, 넷째 정행(正行)이요, 다섯째 정생(正生)이요, 여섯째 정근(正勤)이요, 일곱째 정식(正識)이요, 여덟째 정삼매(正三昧)이옵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물었다. “무엇을 수다원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사람이 여덟 가지를 꿰뚫기 때문에 착한 도에 이르는 것을 수다원이라 하며, 이와 같은 이름과 이와 같은 성은 도(道)로 인하여서 과(果)를 이름하므로 수다원이라 하니, 그대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떨어지지 않는 법[不墮落法]’에서 않는다[不]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인데, 수다원인 사람은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짐이 없다. 왜냐하면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 도(道) 때문이다. ‘곧 보리에 회향한다’ 함은 앞의 세 가지 도에 회향하여 반드시 이를 것이니, 왜냐하면 도(道) 때문이다. 이와 같이 큰 지혜인 사리불은 여래께 대답하여 마쳤고, 비란야에서 여름 석 달의 큰 자자(自恣)가 끝났다. ‘그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에서 말씀하셨다[告]는 것은 말한 것이고, 또한 깨닫게 하셨음[覺]을 말한다. 불법에 오랫동안 이런 법이 있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사람의 별청(別請)을 받은 뒤에 떠날 수 있다’고 하셨으나 성문 제자는 별청이거나 별청이 아니거나 뜻대로 떠나간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시려고 하셨다’에서 부처님이 여러 나라를 다니신다 함은 부처님의 다니심에 세 가지의 경계가 있다. 첫째는 대경계(大境界)이요, 둘째는 중경계(中境界)요, 셋째는 소경계(小境界)인데 세 가지의 경계에 뜻대로 다니셨다. 물었다. “무엇을 대경계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9백 유순입니다.” “무엇을 중경계라고 합니까?” “6백 유순입니다.” “소경계는 어떠합니까?” “1백 유순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대경계에 다니시려고 할 적에는 큰 안거가 끝나고 9월 1일에 비구승들에게 둘러싸여 떠나시며, 차례로 마을에 닿으시어 교화하시고 설법하시며, 여러 음식을 받으시며, 제도해야 할 이는 곧 제도하시고, 아직 제도할 수 없는 이는 복과 이익을 얻게 하셨다. 아홉 달을 다니시는데 여름 석 달 중에 많은 비구들이 삼매의 법을 행하여 아직 마치지 못하면 여래는 큰 자자를 하시지 않고 작은 자자가 도달함을 기다려 9월 15일에 마치고서 떠나셨다. 중경계(中境界)에 다니실 때는 여덟 달을 다니셨다. 소경계에는 먼저 중생들의 근기가 익음을 살피시고 머무르며, 다음에 근기가 익으면 떠나시니, 11월 1일이 되면 비구승들에게 둘러싸여 떠나시며, 일곱 달을 다니셨다. 이 세 가지의 경계 중에서 곳곳의 중생들에게 번뇌를 여의고 네 가지 도의 과를 얻게 함은 교화를 위해서이니, 비유컨대 꽃을 따는 사람이 산중을 두루 다니다가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음을 보면 문득 따가지고 가는 것처럼 여래도 그와 같으셨다. 또 부처님 법이 있으니, 맑은 아침나절에 선정의 즐거움에 들었다가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큰 자비로써 시방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시어 제도해야 할 이면 여래는 곧 가시어 제도하셨다. 또 모든 부처님 법이 있으니, 새로 다른 나라로부터 오는 이가 있으면 여래는 곧 서로 위문하고 설법하여 그 인연으로 계율 정함을 발기하려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도법(道法)이다. 물었다. “무엇을 성문의 법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두 번 대중들을 모았으니, 무엇이 두 번이었느냐 하면, 첫 번은 처음 여름에 들어 앉아 선정을 취하려 함이요, 둘째 번은 여름에 앉기를 끝나면 실제로 얻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성문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아난에게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간다’고 함은 바라문을 이별함이니, 이별이라 함은 바라문에게 ‘안거가 이미 끝났으니, 나는 이제 다른 나라를 다니려고 합니다’라고 함이다. 그때 세존은 가사를 입으시고 의복을 정돈하시어 새벽에 떠나시자 아난이 시종하여 가서 성문에 닿았다. 닿으시자마자 들어가시어 큰 광명을 놓아 성안의 거리와 집들을 두루 비추시니, 모두가 금덩이와 같아서 검붉고 누르며 다섯 가지 빛깔이 번개빛과 같았다. 곧 비란야 바라문 집을 향하여 문에 당도하여 서시니, 심부름꾼이 갑자기 부처님 광명을 보고 들어가서 바라문에게 아뢰었다. “구담 사문께서 지금 문 밖에 계십니다.” 바라문은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깨닫고 곧 일어나 모직물을 가져다 평상자리에 깔아 두고 몸소 나가 맞이하면서 세존께 아뢰었다. “이 길로부터 들으시옵소서.” 이에 부처님은 들이시어 앉으셨다. 그때에 비란야 바라문의 본심은 세존 곁에 가까이 앉으려고 하였으나 앉을 수 없으므로 자리 곁에 합장하고 섰다. 법사가 말하였다. “차례로 다음 구절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바라문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드려야 할 것을 아직도 못 드렸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는 바라문이 먼저 허락했던 것을 일으켜서 여래를 공양하려 한 것입니다.” 바라문이 말하였다. “제가 먼저 여래께 석 달 여름 안거를 청하였으니, 날마다 밥ㆍ죽ㆍ단 과일ㆍ음료(飮料)를 보내어 세존을 공양하였어야 할 터인데 곧 어리석게도 잊어버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없어서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받들어 베풀 수가 없어서 입니다. 저는 속인인 까닭에 여러 사무가 많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핍박하여 헷갈리고 어지러워 저의 마음에서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바라문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악마 왕이 헷갈리게 한 줄을 모르고 스스로를 꾸짖으며 속인으로서의 일 때문에 마침내 세존을 잊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라문은 생각하였다. ‘나는 부처님을 청하여 석 달이나 공양할 것을 도무지 베풀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제 석 달 동안에 공양할 것을 합쳐서 하루에 베풀리라.’ “세존께서는 가엾이 여기시어 받아들이소서”라고 하였다. ‘명일(明日)’이라 함은 바라문이 여래를 공양하되 명일에 곧 준비함이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마음이 극히 크게 기뻐함을 살피시고, 부처님은 가엾이 여겼기 때문에 ‘만약 내가 청을 받지 않으면 이 바라문은 나쁜 마음을 내어 이런 말을 하리라. ≺구담 사문은 석 달 동안의 청에 아직 공양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원한으로 나의 청을 받지 않는 것이다.≻ 또 이런 말을 하리라. ≺구담 사문은 일체지가 아니요, 능히 잠깐도 참지 못하는구나.≻ 혹은 이와 같은 말을 하며 여래를 가볍고 천히 여기어 큰 죄의 과보를 얻으리라. 그러므로 나는 이제 청을 받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