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코[黙然]’라 함은 이미 청을 받은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마음을 집일에 얽매이지 말라.” 부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며 그 감당해 낼만한 바에 따라서 그를 위하여 설법하시고, 지금 세상과 뒷 세상을 말씀하시어서 다 실제로 알게 하셨으며, 공덕 중에서 다시 이미 받아 지닌 것을 힘써 부지런히 닦게 하시고, 여래는 법 비를 내리셨다. 법 비를 내리시고 부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도로 본래 처소를 향하시었다. 이때 바라문은 즉시 아들과 손자들을 모아 말하였다. “안타깝도다, 애들아. 나는 먼저 부처님을 석 달 동안 안거하시도록 청하고는 하루도 공양드리지 못하였구나. 나는 이제 석 달의 공양(供養)할 것을 합쳐서 내일에 베풀리라.” 말을 마치고 곧 음식을 마련하며 밤낮으로 요리하여 아침이 되자 쓸고 뿌리어 집안을 깨끗이 하고, 바르는 향 사르는 향이며 꽃다발과 영락을 쓰고 비단 번개를 걸며 평상 자리를 까니 모두 다 정밀하고 고았다. 가지가지의 공양을 갖추어 준비하고는 부처님에게 와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음식이 이미 준비 되었으며 때는 이제 되었나이다.” 그때 여래는 비구승들에게 둘러싸여 떠나가셨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부처님은 바라문의 집에 가시어 닿으시자마자 비구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하였다. 이때 바라문은 부처님과 비구승들에게 공양하였으니 비구승 중에 부처님은 상좌(上座)가 되셨다. ‘아주 맛이 있다[極美]’ 함은 더할 나위 없는 맛이다. ‘손으로써’ 함이란 스스로 손수 음식을 드리어 배부르게 하였다. ‘배부름’이란 만족하다는 말이며, 또한 뜻에 상쾌하다는 말이다. ‘물리침’이란 그만두게 함을 말하니, 그만둠에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손으로써 하고, 둘째는 눈으로써 하고, 셋째는 입으로써 함이다.
‘식욕이 끝났다’ 함은 이것도 알기 쉽다. 바라문은 세 가지 옷을 부처님께 드렸다. 세 가지 가사값은 돈으로 3천이요, 또 5백 대중 스님에게 흰 모직물을 각기 한 쌍씩을 드렸으니, 합친 값은 돈으로 50만이다. 바라문은 이렇게 보시를 하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그만두지 못하여 다시 진홍색의 흠바라(欽婆羅) 한 장[一長]과 또 발도나파타(鉢兜那波咤)42)를 보시하였다. 부처님은 비구들과 흠바라를 끊어서 각기 선정 띠[禪帶]와 바랑 끈을 만들고, 또 발도나파타를 끊어서는 허리띠와 물을 거르는 주머니의 두 가지를 만들었다. 또 백번 다린 약고(藥膏)가 있는데 한 그릇에 가득하였다. 값은 돈으로 1천이며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였으므로 몸에 발랐다. 법사가 말하였다. “사문에게 보시함에는 법에 네 가지만으로 그치는데 세상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제 이미 갖추어져서 만족하였습니다. 율본에서 ‘세 가지 옷을 보시하고, 네 가지에는 미치지 않았으나 나는 이제 일부러 연설할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라문은 이런 보시를 하여 마치고, 권속들과 함께 땅에 엎드려 부처님과 비구승들에게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았다. 그때 세존은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 바라문과 그 권속들이 나를 여름에 안거하도록 청하고는 석 달 동안에 악마의 방해를 받아 법요(法要)를 아직 듣지 못하였다. 나는 이제 그 석 달에 아직 듣지 못하였던 법을 합쳐서 하루에 단 이슬 법의 맛을 널리 펴 해설하여 그 권속(眷屬)들에게 각기 만족함을 얻게 하리라.’ 부처님은 바라문을 위하여 설법을 마치시고는 일어나 문을 나와 다른 나라를 향하시려 하셨다. 이에 바라문과 그 권속들은 각각 땅에 엎드려 부처님에게 예배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때에 다시 한 번 오시어 저희가 서로 뵙고 한이 없게 하소서.” 그때 세존은 비란야에서 머무르신지 사흘 만에 부처님의 경계에 드셨다.
비구들이 90일 동안 말이 먹는 보리를 먹고 신체가 파리하고 야위어 멀리 거닐 수 없음을 살피시고, 곧은 길로 떠나 가시어 수리국(須離國)에 닿으시고, 수리국에서 떠나시어 파야가처(波夜伽處)로 가셨다. 닿으시자마자 큰 강을 건너셨고, 건넌 뒤에 파라나사국(波羅那私國)을 향하시고 닿으시자 여기로부터 떠나시어 비사리(毘舍離) 성에 도착하셨다. 이때 세존은 마하구타라(摩呵句咤摩) 정사(精舍)에 머무르셨다. 법사가 말하였다. “율비바사에서 잘 구족[善具足]하였다고 하는 비란야 인연이 끝났습니다.” 가란타품(迦蘭陀品)은 이 비바사의 뜻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다른 법과 섞이지 않았으며 계상(戒相)을 분별하였다. 계율 가운데서 인연의 근본을 말씀한 것은 심히 알기 어려우나 이 비바사는 잘 일체의 율장을 분별하여 걸림이 없으므로 구족하였다고 한다.
세간 가운데 높으신 왕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므로 이제 비니장을 말씀하시어 중생들을 조복하게 하시며 또한 뭇 착한 행을 받들어 모든 나쁜 법을 없애시네.
그때 바사리성의 이와 같은 차례는 쉽게 알 수 있으니, 만약 깊고 오묘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말하리라. ‘가란타(迦蘭陀)’라 함은 산 쥐의 이름이다. 때에 비사리 왕은 여러 기녀들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재미있게 놀다가 왕은 때에 피곤하여 한 나무 아래서 잠을 잤더니, 기녀들은 좌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놀았다. 그때 나무 아래의 굴속에는 큰 독사가 있었는데, 왕의 술기운을 맡고 나와서 왕을 물려고 하였다. 나무 위에 쥐가 있다가 위로부터 내려와서 울부짖으며 왕을 깨우자 뱀은 곧 움츠러들었다. 왕이 깬 뒤에 다시 잠을 자자 뱀은 또 다시 나와서 왕을 물려고 하였다. 쥐는 다시 울부짖으며 내려와서 왕을 깨웠다. 왕은 일어나서 나무 아래 굴속의 큰 독사를 보고 놀라 두려워서 사방을 돌아보며 여러 기녀들을 찾았으나 다시 보이지 않았으므로 왕은 생각하였다. ‘내가 이제 다시 살아남은 것은 쥐의 은혜 때문이다.’ 왕은 곧 생각하고 쥐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때에 산 변두리에 마을이 있었는데 왕은 곧 마을에 명하였다. “지금부터는 나의 녹봉 한도에서 다 돌리어 쥐에 공양하라.” 이 쥐로 말미암아 이 마을을 가란타 마을이라 하였다. ‘가란타 아들’이란 이때 마을에 한 장자가 있었는데 돈이 40억이나 있었으므로 왕은 장자의 위를 주었으며, 마을 이름으로 인하여 가란타 장자라고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장자 혼자만 가란타라고 하였습니까, 다른 사람도 그러하였습니까?” “모조리 가란타라고 하였으니, 율본에서 ‘수제나(須提那)는 가란타 장자의 아들이다’고 하였습니다.” ‘아는 이가 많다’에서 아는 이[知識]란 괴로움과 즐거움을 공동으로 하는 이다. ‘때에 일이 있어서 비사리에 갔었다’에서 일[因緣]이라 함은 빚진 사람을 찾아간 것이다. 또 법사가 말하였다. “9월 9일은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 때문에 수제나는 가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세존은 9월의 전 15일에 비사리에 이르셨다. ‘보았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수제나는 맑은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여러 사람들이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갖가지의 꽃과 향을 지니고 가서 부처님에게 이르러 공양하고 법을 들으려고 성문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수제나가 보고 물었다. “아, 착한 이들은 어디를 가십니까?” 대답하였다. “지금 부처님께 가서 공양하고 법을 들을 것입니다.” 수제나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때 세존은 4부 대중에게 둘러싸여 범음으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었다. 수제나는 도착하여 부처님께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율본에서 ‘보았다’고 한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는 수제나의 옛날 복의 인(因)으로 그를 열어 깨닫게 한 것입니다.”
수제나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어떠한 인연으로 들어가서 법을 들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4부 대중들이 둘러싸여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었으므로 이동할 수가 없어 들어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 가란타의 아들 수제나는 대중 곁에 점점 가까이 하였다. 물었다. “왜 대중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대답하였다. “뒤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니, 이로써 대중들 곁에 가까이하여 앉았습니다. 율본에서 ‘가란타의 아들 수제나는 대중 처소에 가서 닿아 한 곳에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가란타의 아들 수제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물었다. “앉은 뒤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까, 법을 들은 뒤에야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이 계ㆍ정ㆍ혜를 찬탄하는 것을 들은 뒤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하나하나 분별하시어 설법하시니 나는 안 뒤에 반복하여 계ㆍ정ㆍ혜의 이치는 하나의 맛임을 생각하리라.’ 또 ‘나는 집에 있으면서는 계ㆍ정ㆍ혜의 범행을 닦으며 하루를 지나게 함도 그 일은 심히 어려우리니 집에 있음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갈고 쪼음과 같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갈고 쪼음이라 합니까?” “사람이 갈고 쪼아서 아주 희고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집에 있으면서는 닦기를 쪼음과 같이 하기는 또한 심히 하기 어려우므로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범행을 닦을 수 있을까? 나는 유위(有爲)의 집에서 나와 무위(無爲)의 집에 들을 수 있을까?’ 하였습니다.” “무엇을 유위의 집ㆍ무위의 집이라 합니까?” “유위의 집이란 밭을 갈고 심고 파는 여러 가지 사업이요, 무위의 집이란 모든 사업이 없고 고요하며 욕심이 없음이니, 이것을 유위의 집에서 나와 무위의 집에 듦이라 합니다.” ‘대중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서 부처님에게 이르렀다’고 함은 수제나는 대중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부처님에게 가서 출가를 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만약 출가를 구하면 형제 권속들이 앉아 있으면서 법을 듣고 있는지라 당연히 말리면서 이런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오직 아들이 너 하나만인데, 만약 출가를 구하면 누가 모시고 부양할 것인가?” 이런 말을 하고는 반드시 잡아서 돌아가려 하리니 나의 출가는 어려워지리라고 하고, 수제나는 대중과 함께 물러나며 몇 걸음까지 걷다가 방편으로 돌아와 부처님에게 가서 닿자마자 출가를 구하였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대중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서 수제나는 부처님에게 이르러서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라후라가 출가한 뒤로부터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면 부처님은 제도하지 않으셨으므로 부처님은 수제나에게 물으셨다. “너의 부모가 너의 출가를 허락하셨느냐?” 법사가 말하였다. “이 구절의 차례는 이해하기 쉬우니,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끝냈다’ 함은 수제나는 마음으로 출가를 즐기어 재미있게 노는 곳에서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았고, 여러 빚진 이들에게서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간에 몹시 급하게 돌아갔으니, 차례로 이해하기 쉽다. ‘아마(阿摩)와 다다(多多)’라 함은 아마는 어머니요, 다다는 아버지다. ‘너[汝]’라 함은 알기가 쉽다. ‘한 아들’이라 함은 오직 아들은 너 하나만이요, 형제가 없다고 함이다. 법사가 말하였다. “부모는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에서 살았다’ 함은 어릴 때부터 클 때까지 고생을 겪지 않았고,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유모가 안아 길렀으며, 커서는 백 가지 맛의 음식으로 한결같이 공급해 주고, 수레와 말로 출입하여 발로는 땅을 밟지 않았다. 이것을 기쁨과 즐거움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수제나에게 말하였다. “너는 조그마한 고통도 모르느니라.” ‘고통을 모른다’ 함은 하나의 고통을 쪼개어 열 개로 나누어서 나누어진 한 개의 고통에도 너는 아직 겪었거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너와 이별하지 못한다’ 함은 부모의 말이니, ‘내가 세상에 살 적에는 만약 네가 죽어도 버리지 않겠는데, 하물며 지금 살면서 이별이라는 이런 이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이 동안에 땅 위에 누었다’ 함은 모전 자리[氈席] 없이 땅 위에 누웠다는 말이다. ‘공양’에 대해서 이다.
“어떤 것을 공양이라 합니까?” “남녀의 기악인ㆍ거문고ㆍ소저ㆍ퉁소ㆍ공후ㆍ비파의 여러 가지 음악으로 여러 아는 이들과 재미있게 노는 것이니, 여러 아는 이들이 방편으로 달래서 그의 마음이 물러나게 하려 합니다.” ‘5욕 중에서 생활[食]한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생활한다고 합니까?” “생활한다 함은 자기의 몸이 부인과 5욕 중에서 함께 서로 즐겁게 논다는 것입니다.” ‘또 공덕을 지음’이란 불ㆍ법ㆍ승에게 공양하고 갖가지로 보시하며 착한 길을 닦고 다스리게 되는 것은 곧 덕을 짓는다는 말이다. ‘잠자코 있다’ 함은 부모가 여러 가지로 교화하여 그 마음을 쉬게 하려고 이와 같이 부모가 반복하여 세 번까지 하였으나 굳은 뜻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부모는 수제나의 벗을 불러서 말하였다. “이 그대들의 벗은 지금 땅 위에 누어있는데 나는 이미 세 번 청하여도 영영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출가를 그만두게 하라.” 이에 그 벗들은 수제나에게 가서 세 번이나 이렇게 말을 하였다. “벗이여, 그대의 부모는 오직 그대 아들 하나뿐인데 만약 반드시 출가해버리고 부모의 나이가 늙어지면 누가 공양할 것인가? 그대가 출가하면 근심 걱정에 지쳐서 파리하여 죽게 됨이 틀림없으리니, 그대에겐 무엇이 이롭겠는가? 그대는 부호요 귀인인데, 출가하면 기와 그릇을 잡고 밥을 빌되 추하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하며, 날에 한 번 먹고 또 혼자 잠을 잘 것이다. 그 밖에 범행을 닦아 익힌다는 이 법도 심히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도 영원히 물러나는 마음이 없었다. 그 벗들은 ‘이제 그의 출가를 허락해야겠구나’고 상의하고 곧 수제나의 부모에게 가서 놓아 주기를 권고하여 출가를 허락 받았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가란타의 아들 수제나의 벗은 부모에게 갔었다가 벗들은 수제나에게 ≺그대 부모는 이미 그대의 출가를 허락하셨다≻고 하자 수제나는 즉시 땅에서 일어나 기뻐서 뛰었다’고 하였다. 수제나는 이레를 먹지 않아 몸이 파리하고 야위었다. 부모는 향수의 탕으로서 목욕 시키고 기름을 몸에 바르며, 머리카락을 씻어 빗질하고 여러 가지 음식과 반찬을 먹었으므로 사나흘 동안에 체력은 회복되었다. 이에 수제나는 부모에게 예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이별하였다. 부처님에게 가서 ‘세존이시여, 나를 제도하여 출가시키소서’라고 하였다. 물었다. “여래가 제도합니까, 대중 스님이 제도합니까?” 대답하였다. “비구가 제도합니다.” 이때 세존의 곁에 한 걸식 비구가 있었는데 부처님은 걸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수제나의 출가를 제도하여 구족계를 주라.” 비구가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곧 수제나를 제도하여 사문을 만들고 존여(尊與) 비구라고 자(字)를 짓고 구족계를 주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이때 수제나는 부처님에게 출가함을 얻고 구족계를 받으며 두타(頭陀) 법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두타’란 한(漢)에서 번뇌의 티끌과 때를 떨어버림이라 말한다. ‘받음’이란 행함을 말한다. ‘아란야(阿蘭若)’라 함은 마을의 방과 집을 버려버리고 고요한 곳에 머무르며 걸식함이다. ‘걸식’이라 함은 좋은 이끗을 받지 않고, 열네 가지의 음식[十四食]을 버리는 것이다. ‘누더기를 받는다’ 함은 단월(檀越)의 옷을 받지 않음이다. ‘차례로 걸식한다’ 함은 순서를 넘지 않는다 함이다. ‘발사(拔闍) 마을’이라 함은 발사왕의 마을로서 재물과 보배가 한량이 없다. ‘재물’이란 아침저녁으로 받아쓰는 것이다. ‘보배’란 항상 덮고 감추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한량없다’ 함은 일정한 수를 넘는 것이다. ‘음식이 넉넉하다’ 함은 날마다 한결같이 가득하고 많은 음식이 있다는 것이다. ‘방과 집을 정리한다’ 함은 평상과 자리를 정돈하고 무명천을 말아 덮고 가리는 것이다. ‘60의 큰 은쟁반을 가져옴’이란 한 쟁반은 열 사람의 음식을 감당하므로 합치면 6백 대중 스님들의 음식을 공양한 것이다. ‘먹는다’ 함은 취하는 것이다. 물었다.
“무엇을 취한다 합니까?” “4대의 힘을 취합니다.” ‘돌려 줌’이란 대중 스님들에게 베풀어 주고 마음에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가 들어가서 걸식하되 집안의 여종이 밤을 지난 남은 밥으로 주거든 중식(中食)하지 말고 밖에 나와 던져 버린다. 밤을 지나되 하루 이틀의 밤이 되면 밥은 쉬고 썩는다. 물었다. “이는 멥쌀입니까, 좁쌀입니까?” “조밥입니다.” ‘큰누이여’라 함은 출가한 사람은 여종이라고 부를 수 없으므로 누이라고 부른다. ‘나의 바리 안에 던지시오’에 대해서 이다. “출가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버리거나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버리고 던져버리는 물건은 ‘나에게 주어 나의 바리에 들여 놓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한 비구가 걸식하고 있다가 사람이 먹다 남은 묵은 밥을 가져다 던져 버리려는 것을 보고 비구는 ‘만약 꼭 버리겠으면 나의 바리에 놓으시오’라고 하였으므로 이 비구는 부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물었다. “오직 밥 한 가지만 그럴 수 있습니까, 다른 물건도 그럴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온갖 던져 버리는 물건이면 모두 구하거나 가질 수 있으니,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손과 발’에서 (손이란) 걸식에는 바리를 낮추어 밥을 받는 맨 손에서 팔목까지이다. 발이란 발뒤꿈치 위로부터 네 손가락 넓이이다. ‘음성’이라 함은 수제나가 부를 때에 들릴 만한 소리다. ‘기억하여 앎’이란 그 세 가지 형상[三相]을 앎이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지 12년 후에 수제나가 출가하였으니, 수제나는 다른 나라에 있은 지 8년에 도를 배우다가 8년 후에 가란타 마을에 돌아왔으므로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고 20년이었다. 수제나는 집을 떠난 지 8년을 지났으므로 여종은 이 때문에 알지 못하였다. ‘들어가서 상전에게 아뢰었다’에 대해서 이다. “어째서 바로 묻지 아니하고 들어가서 상전에게 아뢰었습니까?” “여종은 보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감히 문뜩 묻지 않았으므로 총총히 들어가서 아뢰었습니다.” ‘또 살핀다[審]’ 함은 살핌[諦]이다. ‘담 곁에서 먹는다’ 함은 그때 마을 안에는 집집마다 각각 담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음료수를 저장하였다가 걸식하는 사람이 쉬면서 필요한 것을 뜻대로 하게 하려 함이니, 그러므로 율본에 ‘문 밖으로 나가 담 곁에서 먹는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냐?’ 함은 아버지가 수제나에게 ‘어떤 사람인데 담 곁에서 먹고 남은 묵은 밥을 먹습니까? 출가인은 이와 같이 이런 밥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수제나에게 말하였다. “네가 집에 있을 때는 반찬과 음식에 대해서 투정을 부려 혹은 ‘추하다ㆍ나쁘다ㆍ차다ㆍ덥다ㆍ알맞지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너는 이제 이 먹다 남은 묵은 밥을 먹으면서도 단 이슬 먹듯하며 원망하는 말이 없구나.” 법사가 말하였다. “수제나의 아버지는 아마 이런 말을 하였으리라. 다만 아버지 마음이 쓰라려서 이와 같은 말만을 하지 않았을 것이나 스님과 스님들이 서로 전하여 이와 같이 풀이하였습니다.” ‘손을 잡고 함께 집에 돌아간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 때문에 속인과 함께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갔습니까?” “수제나의 사람됨이 지극히 효자였으므로 아버지가 손을 잡는지라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함께 집에 돌아갔습니다.” ‘청을 받아 잠자코 머물렀다’에 대해서 이다. “수제나는 위의 걸식하는 법을 받았으면서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청을 받았습니까?” “수제나는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인지라 만약 단월의 청을 받지 않으면 단월이 나쁜 마음을 내리니, 가엾이 여기어 그를 위하여 한 번의 청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받는다’ 함은 대접[知]하게 함이다. ‘금과 은의 무더기’에 대해서 이다. “덩어리입니까, 부스러기입니까?” “돈입니다.” ‘사람’이라 함은 키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다. ‘뒤에 장막을 베풀었다’ 함은 고요한 곳으로 하려고 사방 주위를 둘러서 장막을 친 것이다. ‘이른 아침에 옷과 바리를 입는다’ 함은 청에 응함이다. “어찌 단월이 와서 알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갔습니까?” “이미 알렸을 것이나 율문 중에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라 함은 다른 이를 낳는 것을 뜻으로 삼는다. ‘어머니의 물건’이라 함은 외가로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온 것이다. 아침저녁의 목욕에는 값이 다른 것을 사용했다.
‘나는 먼저 너의 어머니 물건을 주되 아직도 다 나오지 않았고, 나의 물건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너의 조부모의 물건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未出] 함은 재물이 한량없음을 말한다. ‘너는 세속으로 돌아와야 한다’ 함은 아버지가 수제나에게 “너는 출가의 의복을 버려버리고 세속으로 돌아와 좋은 의복을 입고 오욕의 즐거움을 받아라. 너의 출가는 왕사(王使)가 두려웠기 때문에 출가함도 아니요, 빚지고 출가하여 세속에 돌아올 수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수제나는 단월에게 “나는 범행을 극히 좋아하여 나는 세속에 돌아올 마음에 탐착이 없으니, 단월께서는 괴히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고, 수제나는 단월에게 “내가 아뢰는 것을 성내거나 꾸짖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좋도다, 좋도다≻라고 대답하였다’ 함은 아버지는 수제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기 때문에 “좋도다”라고 칭찬하고, 삼베를 가져다 큰 주머니를 만들어 금과 은을 속에 넣고 주머니 아가리를 단단히 묶어서 여남은 수레에 싣고 큰 강 속의 깊은 곳에 이르러 버렸다. ‘이런 일을 하였다’ 함은 수딘나가 “보배를 무엇에 쓰겠습니까? 이 보배 때문에 여러 번뇌가 일어나고, 물과 불과 도적이 다 이로부터 생깁니다”고 하였다. ‘털이 곤두선다’ 함은 혹은 어떤 국왕은 보물이 많음을 보고 와서 요구하기도 하고, 혹은 도둑이 와서 겁탈하기도 하고, 혹은 불에 타고 물에 표류하기도 하므로,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온 몸을 떨며 털은 곤두서게 된다. ‘밤낮으로 수호한다’ 함은 아직 어둡지 않을 때에 앞뒤에 분산하여 인력을 배치하고, 때때로 순찰하며 문을 닫고 잠가 아주 견고히 하고 강도가 들어오거나 원수가 엿볼 수 없게 하므로 수호라고 한다. ‘신부를 부른다’ 함은 수제나의 아버지가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 수제나를 세속에 돌아오게 하였으나 조금도 따르는 뜻이 없으므로 신부를 불러 “오직 너만은 먼저 서로가 사랑하고 생각하였으니 잘 그 마음을 돌려라. 왜냐하면 온갖 재물과 보배로도 파괴할 수 없지마는 오직 여인만은 사람을 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천상의 단정한 옥녀(玉女)를 위해서입니까?’라고 함은 이는 신부가 수제나에게 묻는 말이다. 신부는 여러 찰리와 여러 귀한 성씨가 여러 재물과 보배와 궁전이며 처자 권속들을 버리는 것을 보고 마음에 ‘여러 종족 성바지가 모두 다 하늘의 옥녀를 구하기 위하여 범행을 닦는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천상 옥녀를 위함이 아니라’ 함은 천상의 옥녀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부는 수제나가 누이동생이라는 말로 대답하는 것을 듣고 스스로 ‘먼저는 부부이어서 평상을 함께하여 자고 쉬었는데 이제는 누이동생이라고 부르니, 이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이로구나’라고 생각하다가 그 때문에 크게 괴로워하며 땅에 넘어져 기절해버렸다. ‘괴롭게 굴지 말라’ 함은 재물과 보배며 여인의 음욕으로 나의 마음을 헷갈리게 굴지 말라 함이다. ‘속종(續種)43)을 남겨라’ 함은 부모가 수제나에게 하는 말이니, “너는 한결 같이 범행을 닦아 허공에서 열반에 들라. 너는 한 아들을 남겨 종성을 잇고, 재물과 보배가 헛되이 잃어져서 주인이 없게 하지 말라. 우리들이 죽으면 반드시 리차비(梨車毘) 왕의 창고에 들어갈 것이므로 종자나 이어줄 것을 청구할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수제나는 “그런 일이라면 아주 쉬우므로 제가 잘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수제나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까?” “수제나는 마음으로 ‘만약 내가 종자를 주지 않으면 마침내 나를 놓지도 않겠거니와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리니, 나는 만약 아들을 주어 그런 마음을 쉬게 하면 다시는 나를 못견디게 굴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로 인하여 도의 문에 편안히 머물러 범행을 닦아 익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달꽃[月華]’44)이라 함은 다달이 생기는 물꽃이니, 이는 피의 이름이다. 여인의 법에 회태하려 할 때에는 아이 포(胞)가 있는 곳에서 하나의 핏덩이가 생기어 이레면 저절로 터져서 이로부터 피가 나온다. 만약 피가 나와서 끊어지지 않으면 남자의 정수가 머무르지 않고 곧 함께 흘러나온다. 만약 다 나왔으면 남자의 정수가 그 곳에 되돌아간 뒤에야 아이를 밴다. 비유컨대 농가에서는 갈고 다스려서 고르게 익게 했지마는 너무 많은 물이 곡식 가운데에 내리면 곡식은 물위에 떠서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물이 많아서 곡식이 진흙에 붙지 못하므로 뿌리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인도 그와 같아서 만약 피가 다하고 남자의 정수가 머무르게 되면 곧 아이를 밴다. ‘부인의 팔을 잡는다’ 함은 이는 안아 가지고 깊은 곳에 들어가 함께 성교를 하는 것이다. 그때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20년 동안 아직도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시지 않으셨다. 제자들은 이미 새로 겪고 배우기 때문에 부처님은 아직 계율을 제정하시지 않으셨으므로 수제나는 죄의 형상을 모르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수제나가 죄의 형상인 줄 알았으면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범했겠는가. ‘세 번 부정(不淨)을 행하였다’ 함은 세 번 부인을 잡고 함께 부정을 하였으니, 부정을 행하였기 때문에 곧 아이를 배었다. 법사가 말하였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무엇을 있다고 하느냐 하면, 첫째는 몸이 서로 닿고, 둘째는 옷을 대고, 셋째는 정수를 내려뜨리고, 넷째는 손으로 배꼽 아래를 만지고, 다섯째는 보고[見], 여섯째는 소리[聲] 듣고, 일곱째는 냄새[香] 맡고 이니, 이 일곱 가지 일로 여인은 아이를 뱁니다.” “무엇을 어루만지며 닿는다고 합니까?” “어떤 여인이 달거리가 생길 때에 남자와 즐기며 혹은 남자가 몸으로 그 하나하나의 몸 부분에 닿으면 곧 탐착이 생기어 아이를 배니, 이는 서로가 닿아서 아이를 배는 것입니다.” “무엇을 옷을 댔다고 합니까?” “우타이(優陀夷) 비구와 같으니, 부인과 함께 출가하여 떨어진지 오래여서 우타이는 비구니 처소에 갔습니다. 둘의 정욕과 사랑이 그치지 않아 각기 서로가 발개(發開)하여 음욕의 정수가 나와 우타이의 옷을 더럽혔는데 옷을 비구니에게 주었습니다. 비구니는 얻은 뒤에 곧 핥고 다시 여근(女根) 안으로 넣었으므로 곧 아이를 배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달거리가 나올 때에 남자의 옷을 대는 것을 옷을 댐이라 합니다. “무엇을 정수를 떨어뜨린다고 합니까?” “녹자 도사(鹿子道士)의 어머니와 같으니, 옛날 어느 한 암사슴이 가다가 차례로 한 도사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도사가 소변하는데 정수 기운이 함께 떨어졌습니다. 암사슴은 그 때에 바로 달거리를 내었는데 소변 즙(汁)을 맡아 보고 음욕의 마음이 나서 마셨더니, 마침내 아이를 배고 녹자 도사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정수를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배꼽 아래를 만진다 함은 섬(睒) 보살의 부모와 같습니다. 눈을 감으려 하자 하늘 제석이 미리 알고 내려와 그 처소에 이르러 ‘마땅히 음양을 합하여 아이를 낳으십시오’하니, 부부가 이미 모두 출가하여 도를 닦으므로 ‘우리들은 이미 출가하여 법에 그러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제석은 다시 ‘만약 음양을 합하지 않으려면 손으로 배꼽 아래를 만지십시오’라고 하였으므로 말을 따랐더니 곧 아이를 배서 섬을 낳았으니, 이를 손으로 배꼽 아래를 만진다고 합니다. 민타바야(閔陀婆耶)와 전타발수다(栴陀鉢殊多) 두 사람도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났습니다.” “무엇을 본다고 합니까?” “어느 한 여인이 달거리는 이루어졌으나 남자와 합할 수 없었으므로 욕정이 극히 왕성하여 오직 남자만이라도 보는 것을 뜻으로 삼았습니다. 비유컨대 왕궁 채녀도 그와 같아서 곧 아이를 배니, 이것을 본다고 합니다.” “무엇을 소리 듣는다고 합니까?” “비유컨대 백로와 같으니 다 암컷이고 수컷은 없지마는 봄의 볕 기운이 이르고 비로소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면 암컷은 오직 일심으로 소리만을 듣다가 곧 새끼를 뱁니다. 닭도 어떤 때는 이와 같아서 다만 수컷 소리만을 듣고도 새끼를 배니 이것을 소리 듣는다고 합니다.” “무엇을 냄새 맡는다고 합니까?” “진우(秦牛)라는 어미 소와 같으니, 다만 수소의 냄새만을 맡고서 새끼를 뱁니다. 이것을 냄새 맡는다고 합니다.” 수제나는 이와 같지 않았으니, 실제로 부정한 법을 행하여 남녀의 욕색(欲色)이 함께 합하여 의탁되어 낳았고 세 번 같이 합한 연후에 아들을 낳았으니, 수딘나는 이와 같았다. 이때 지신(地神)은 수제나가 부정한 법을 행함을 보고 크게 부르짖었다. 온갖 나쁜 법을 지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 지으면 몸을 보호하는 신이 보고, 다음에는 남의 속을 아는 하늘과 사람이 안다. 이와 같이 사람ㆍ하늘ㆍ신이 모두 보았으므로 크게 부르짖었다. ‘차츰차츰 서로 이어받아서 범천에 이르렀다’ 함은 무색계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듣고 알았다 함이다. ‘때에 아들은 점점 자라서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였다’ 함은 속종(續種:수제나의 아들의 이름)의 나이 여덟 살에 속종의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였다. 어머니는 비구니를 의지하고 속종은 비구승을 의지하여 각각 선지식을 얻었으므로 율본에서 ‘곧 함께 출가하여 차례로 아라한의 결과를 얻었다’고 하였다. ‘곧 뉘우치는 마음을 내었다’ 함은 전에 이미 부정한 행을 지었으므로 늘 낮이나 밤이나 뉘우치는 마음을 내었다. ‘이로움에 있어서 나는 이로움을 얻지 못하리라’ 함은 불법 가운데서 맑은 행을 닦아 익혀서 3달지를 얻는 것인데, ‘나는 이 이로움을 얻지 못한다’ 함이니, 이것을 ‘이로움에 있어서 나는 이로움을 얻지 못하리라’ 한다. ‘나는 나쁜 이익[惡利]을 얻으리라’ 함은 다른 사람은 출가하여 좋은 이익[利]을 얻지만 나는 좋은 이익을 얻지 못하고 나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맑은 행’이라 함은 계ㆍ정ㆍ혜의 갈무리를 통틀어 지니는 것인데, ‘나는 통틀어 지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파리함’이라 함은 스스로의 한 일을 뉘우치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하였으므로 피와 살이 마르고 작아졌다는 것이다. ‘형체와 얼굴이 변하였다’ 함은 나뭇잎이 시들고 누렇게 되어 떨어지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힘줄과 혈맥이 다 나타났다’ 함은 살과 피가 없어서 힘줄과 혈맥이 다 나타난 것이다. ‘마음도 가리어 막혔다’ 함은 마음 구멍이 다 닫혔다는 것이다. ‘부끄러워 머리를 숙였다’ 함은 청정한 행에서 스스로 선하지 못한 줄 살피고서 부끄럼을 낸다는 것이다. 때에 비구들이 각기 방 앞에 나와서 즐겁게 놀다가 수제나가 파리한 것을 보고 물었다. “먼저는 얼굴 모습이 훌륭하고 원만하였던 이요, 신체가 아름답고 원만하며 손발이 평정하며 살지고 씩씩했는데 지금은 어째서 파리합니까?” 비구들이 수제나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맑은 행 가운데서 왜 근심하고 한탄하시오? 출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오?” 수제나가 대답하였다. “장로들이여, 나는 맑은 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청정한 법을 은근한 마음으로 닦고 다스리지만 나는 이미 나쁜 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쁨을 지었다’ 함은 이미 나쁜 법을 얻었으므로 언제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비구들이 수제나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한 일은 족히 의심할 만 하도다.” 물었다. “무엇을 의심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청정한 법 가운데서 부정한 행을 하였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고 맑은 행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비구들은 방편을 써서 수제나의 마음을 풀어주면서 말하였다. “그렇지 않도다, 장로여. 부처님은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 설법하시어 탐욕을 여의게 함은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삼계에서 5욕의 법을 말씀하시어 다 탐욕을 여의게 하신 소이입니다.” ‘합할 수 없게 한다’ 함은 말은 다르되 뜻은 같다. ‘설법하시어 탐욕이 다하게 한다’ 함은 열반에 이르고 삼계에 머무르지 않게 하므로 사랑하지 않게 하니, 부처님은 이미 이렇게 탐욕을 말씀하시어 분별하여 함께하지 않게 하셨다. ‘너는 지금 합하였다’ 함은 부처님은 부정한 행을 여읠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옛 아내와 부정한 행을 하였다 함이니, 이 뜻은 이해하기 쉽다. ‘부처님은 가지가지로 설법하시어 헷갈림을 여의게 하셨다’ 함은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신 까닭에 설법하시어 헷갈림을 없애게 하셨다는 것이다. ‘갈애(渴愛)를 끊는다’ 함은 일체 중생은 5욕을 갈망하는 까닭에 부처님은 법을 말씀하시어 중생에게 갈애를 끊어 없애기 때문이다. ‘씨를 끊는다’ 함은 부처님은 법을 말씀하시어 삼계의 씨를 끊게 하신다는 것이다. ‘애욕이 다한 열반’에서 애욕이란 삼계의 애욕이니, 중생들이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애욕에 묶였기 때문이요, 다함이란 없애서 애욕이 다하게 된 것이요, 열반을 얻는다 함은 삼계 안의 4생(生)ㆍ5도(道)ㆍ7식주(識住)ㆍ9중생거(衆生居)와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르고 저기로부터 여기에 돌아옴이 마치 실로 수놓은 옷 구멍이 서로서로 꿰뚫어서 얽히고 풀리지 않음과 같다. 애욕은 곧 얽힘이요, 다함은 곧 없앰이니, 애욕이 다함이란 곧 열반이다. 또 ‘열반’에서 열(涅)은 아님[不]을 말하며 반(槃)은 베를 짜는 것[織]을 말하니, 베를 짜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애욕 없앨 것을 말씀하신다’ 함은 5진욕(塵欲)과 번뇌욕(煩惱欲)을 다 없애게 한다는 것이다. ‘탐욕을 안다’ 함은 온갖 탐욕을 알맞게 하나하나 안 뒤에 조복하니, 이를 안다고 한다. ‘탐욕에 애쓴다’ 함은 여러 탐욕 가운데서 몹시 탐욕을 구한다는 것이다. ‘탐욕을 생각한다’ 함은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탐욕과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다. ‘탐욕에 번민한다’ 함은 5욕 가운데서 얻지 못할까 생각해서 번민을 내는 것이다. 이 말은 다 도제(道諦)에서 말한 바로서 앞 구절은 세간의 법을 말하였고, 뒤의 구절은 출세간의 법을 말하였다. “장로여,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으므로 믿는 이에게 나쁜 법을 짓게 하기 때문에 아직 신심 없는 사람은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장로여, 신심이란 다시 그 마음을 돌림이니, 마음을 돌리다 함은 법 가운데에 믿는 마음으로 뉘우치고 한탄을 일으킴입니다. 혹은 사람이 도 때문에 믿는 마음은 비유컨대 수미산을 사방에서 바람으로 흔들어도 구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이 신심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신심) 있는 사람은 이와 같고 (신심) 없는 사람은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때에 비구들은 (이) 일로써 세존께 아뢴 것이다. 비구들은 수제나가 한 일이 나쁜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 아뢰어 알게 한 것이요, 마음에 부처님이 홀로 자기를 칭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또한 부처님이 천히 여기게 함도 아니다. 수제나를 청정한 법에서 나가게 하거나, 또 이 나쁜 법으로서 싸우고 어지럽히려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지의 이치대로만 말하였다. 비구들은 각각 스스로가 ‘더러운 법은 이미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하고 세존에게 아뢰었다.
“이제 더러운 법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옵소서.” 이 일 때문에 비구승을 모았다 함은 수제나가 행한 악은 성인의 법에서 잘못이기 때문에 비구승을 모은 것이다. ‘부처님은 곧 수제나를 천히 여기신다’ 함은 혹은 사람이 나쁜 법을 지으면 천히 여겨야 하므로 여래는 곧 천히 여기시며, 어떤 사람이 잘 계율을 지니고 힘써 나아가면 찬탄해야 하므로 여래는 곧 찬탄하신다. 이와 같이 착하고 악한 행에는 부처님은 덮거나 감추시지 아니하시니, 수제나와 같은 이는 천히 여겨야 하므로 율본에서 ‘천히 여겨야 함에는 여래께서 자비하신 마음으로써 천히 여기신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보람이 없고 지니는 것이 없구나.” ‘어리석음’이라 함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며, 순종하지 않고 하는 것이 곧 부정한 것이니, 부정이기 때문에 사문의 법이 아니다. 부처님이 물으셨다. “무슨 일로써 이와 같은 일을 하였느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탐욕을 여의는 것을 말하리라.” 하나하나 앞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수제나가 이미 나쁜 법 지었음을 보시고 자비하신 마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비유컨대 인자하신 부모가 아들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또한 그 아들을 꾸짖으며 ‘어리석은 사람아,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하였느냐?’고 함과 같으셨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어리석은 사람아, 너는 남근(男根)을 독사의 입에 넣을지언정 여근(女根) 속에는 넣지 말라’고 하였다. ‘독사의 입’이라 함은 만약 사람이 독사의 입에 물리면 살이 곧 문드러지니 이런 죽음은 좋은 것이다. 만약 사람이 남근을 여근 속에 넣으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 나올 기약이 없으리라.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입에 넣음도 그와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곧 문드러져버려 이 때문에 목숨을 마치더라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여근 속에 넣으면 지옥을 전전하리라. 차라리 남근을 큰 불 무더기 가운데에 둘지언정 여근에 넣지 말 것이니,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불 무더기에 두면 혹은 죽기도 하고 죽지 않기도 한다. 혹은 죽더라도 실제로 몸은 잠깐의 작은 고통을 받음이요, 이 일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하지 못한 여러 법’이라 함은 나쁜 사람의 법이다. ‘산과 들 사람의 법’이라 함은 산과 들 사람의 법이다. ‘큰 죄’라 함은 큰 번뇌이다. ‘뒷물[末水]의 법’이라 함은 그릇된 법을 끝내고 난 뒤에 물을 쓰기 때문에 뒷물이라고 한다. ‘고요한 곳에서’라 함은 오직 두 사람만이 있으면서 부정(不淨)한 행을 지을 수 있으므로 온갖 나쁜 법의 처음이 된다.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대답하였다. “청정한 법에서 수제나가 더러움을 지었으므로 ‘수제나가 청정한 법에서 맨 처음에 더러움을 범하였다’고 합니다.” ‘여래는 가지가지의 방편을 썼다’ 함은 가지가지로 천히 여김이다. ‘이 사람은 기르기 어렵다’ 함은 덮어 감춤의 법에서 스스로 그 몸을 보호하지 못하므로 이를 기르기 어렵다고 한다. ‘족한 줄을 모른다’ 함은 덮어 감춤의 곳에 머무르기 때문에 족한 줄을 모른다고 한다. 만약 값진 보배 얻기를 수미산과 같이 하여도 뜻에 맞지 않으므로 족한 줄을 모른다고 한다. ‘몸을 말하며 한 곳에 모였다’ 함은 같이 한군데에 모여 서로가 탄하기도 하고 혹은 번뇌(煩惱)를 찬탄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이라 함은 여덟 가지 하는 일이 있는데 다 두루 갖춤이다. 여래는 방편으로 욕심이 적음[小欲]ㆍ족한 줄 앎[知足]ㆍ기르기 쉬움[易養]ㆍ자라기 쉬움[易長]을 찬탄하셨다. ‘욕심이 적음’이라 함은 인색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음이니, 혹은 하나의 공양(供養)에 있어서도 그 얻은 바대로 함이다. ‘혹은 기르기 쉬움을 지닌다’ 함은 잘 6정(精)을 바로 잡아 6진(塵)을 따르지 않음을 기르기 쉬움이라고 한다. ‘자라기 쉬움’이라 함은 네 가지 공양에서 분량을 알고 족한 줄을 아는 것을 자라기 쉽다고 한다. 거칠거나 정세(精細)하거나 나아가 얻고 받음은 욕심이 적기 때문이니 곧 이는 족한 줄 앎이다. ‘깨끗하다[淨]’ 함은 욕심이 적고 족한 줄 앎이니 이는 깨끗하다고 한다. 이미 깨끗하기 때문에 티끌과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곧 이는 떨어버림[抖擻 ]이요, 티끌의 더러움을 떨어버림으로 인하여 이를 단정(端正)하다고 한다. 또 세 가지 업이 모두 깨끗하고 세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을 버려 없앴으므로 헐뜯는 사람이 없는 것을 단정이라고 말한다. ‘모으지 않는다[不聚]’ 함은 몸에 덮어 감춰진 번뇌를 개발하게 하고 분산되게 하는 것을 모으지 않는다고 한다. 모으지 않았으므로 곧 용맹스럽게 정진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제정한 계율을 착한 이는 비구답게 믿어 받고 따라 응하리라. 왜냐하면 만약 욕심이 적고 족한 줄 아는 사람이면 받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계율의 근본을 말씀하시되, 오색의 꽃을 차례로 꿰는 것과 같고 또한 칠보의 구슬을 꿰어 차례로 함과 같고 지금 세상과 뒷세상의 말씀으로 두렵게 하셨다. 혹은 사람이 배움을 즐기어 배움의 자리[學地]에 머무르면 아라한을 얻고 사다함ㆍ아나함ㆍ수다원을 얻기도 하며, 혹은 인연이 없어도 하늘에 남을 얻으며, 만약 부처님께서 『장아함』ㆍ『단아함』을 말씀하시면 착한 이는 믿어 받으리라. ‘계율’이라 함은 배움의 자리이다. “무엇을 배움의 자리라고 합니까?” “선정 삼매의 법입니다. 무엇을 배움의 자리냐 하면 열 가지 법을 인함이니, 열 가지 법으로 인하여 계율을 정하고 뭇 승가를 안온하게 합니다. 안온이라 함은 위태롭지 않은 것이니, 만약 사람이 여래의 말씀하신 계율을 받을 수 있으면 장차 오는 세상에 극히 크게 안락하리니 안온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만약 사람이 나의 말을 받아들이면 나는 계율을 정할 것이요. 만약 사람이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계율을 말하지 않고 다만 근본의 인연만을 말할 것이며, 굳이 조복도 않으리라.” 그러므로 율본에서 ‘열 가지 법으로 인하여 뭇 상가를 안락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런 지음은 죄가 되지 않으며, 이런 지음은 죄가 되며, 이때는 해야 하고, 이때는 하지 않는다’ 함은 배움을 즐겨 하기 때문이니 의심되게 말라. 그러므로 율본에서 ‘부끄러워[慚愧]하는 비구는 말하지 아니하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구를 바로잡으니, 이 법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안락함을 얻게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구는 대중에 들어가 상가의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를 못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하는 비구는 안락함을 얻으니, 왜냐하면 선정삼매를 얻어들지마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구는 할 수 없으니, 거슬리며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부끄러워하는 비구는 안락함을 얻으니 지금 세상의 번뇌(惱漏)를 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의 번뇌’라 함은 5정(情)을 넘어뜨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지금의 몸으로 부정한 행을 지어 혹은 남이 붙잡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혹은 스스로가 허물을 뉘우침이니, 이와 갖가지의 괴로움을 끊어서 제도 해탈을 얻게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구를 바로 잡는다’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함은 계율을 깨뜨림이요, 또 이미 착하지 못한 법을 지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므로 이와 같은 사람을 부처님은 바로 잡으신다고 한다. 혹은 여래께서 바로 잡으신 뒤에도 나쁜 법을 짓고는 도리어 남에게 “내가 한 무슨 일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으며, 내가 무슨 죄를 얻느냐?”라고 물어 이와 같이 뭇 상가를 괴롭히고 어지럽힌다. 만약 계율을 정하면 뭇 상가가 비니 법으로 계율을 깨뜨린 비구를 꾸짖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므로 율본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구를 바로 잡으며, 부끄러워하는 이는 안락함에 머무름을 얻으리니, 만약 부끄러워하는 비구가 있으면 배움ㆍ법ㆍ계율을 즐기어 이는 해야 하고, 이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미래의 번뇌[漏]를 끊어 없앤다’ 함은 5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쁜 법을 행하여 뒤의 몸은 지옥 속에 떨어져서 여러 가지의 고통을 받으니, 다만 한번만 받는 것이 아니요, 돌고 구르며 그 속에 무수하고 오랜 겁을 지내므로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계율을 말씀하고 이 인연을 끊으며 아직 신심 없는 이를 믿게 하신다. 여래가 계율을 정하시는 소이는 만약 착한 비구가 계율을 따르면 위의가 완전히 갖추어지니, 만약 신심 없는 이가 보면 신심을 내어 “이 사문 석가 종족의 제자는 은근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하기 어려움을 잘 하고 한 일이 극히 소중하구나”라고 하고, 이와 같은 일을 보고는 신심을 내며, 만약 외도가 비니장을 보면 “부처님과 비구들에게도 위타(圍陀)가 있어서 우리들과 같아 다르이 없구나”라고 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아직 믿음이 없으면 믿게 하고, 이미 믿은 이는 더욱 자라게 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신심이 있어 출가하여 계율에서 말씀한 바를 따르면 남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매우 공경하게 된다. 또 ‘어떻게 하면 수명을 다할까?’라고 하면 하루에 한 끼에 그치고서 맑은 행을 닦고 계율을 보호하여 지닐 것이니, 이러함을 보면 신심이 더욱 자라나리라. 그러므로 율본에서 ‘이미 믿는 이는 더욱 자라게 한다’고 하였다. ‘정법(正法)을 오래 머무르게 한다’ 함은 정법에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 배움(學)의 정법이 오래 머무름이요, 둘째 믿어 받음[信受]의 정법이 오래 머무름이요, 셋째 얻은 도[得道]의 정법이 오래 머무름이다. 물었다. “무엇을 배움의 정법이 오래 머무른다 합니까?” 대답하였다. “배움의 삼장 일체가 오래 머무름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법이라 합니다. 삼장 중에서 12두타(頭陀)ㆍ14위의ㆍ82대위의계(大威儀戒)ㆍ선정삼매를 믿어 받음의 정법이 오래 머무름이라 하고, 네 가지 사문의 도의 결과와 열반을 얻은 도의 정법이 오래 머무름이라고 합니다. 여래는 계율을 정하였으므로 비구에게 따르게 하였습니다. 만약 따르면 두루 갖추어져서 거룩한 이익을 얻으므로 배움이 처음이 되어 정법이 오래 머무릅니다.” ‘계율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함은 계율을 정함이 있으셨기 때문이니, 부장비니(覆藏毘尼)ㆍ기사비니(棄捨毘尼)ㆍ조직비니(調直毘尼)ㆍ결계비니(結戒毘尼)의 이 네 가지 비니가 극히 사랑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비니장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였다. “온갖 어구(語句)의 처음이나 중간이나 뒤를 그대들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계율 중의 죄와 복을 비구는 배워야 하므로 율본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너희는 마땅히 계율을 말할지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물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비구에게 ‘나는 이미 계율을 정하였으니, 너희는 말할 것이요, 지닐 것이요, 배울 것이요, 다른 사람을 가르칠 것이니라’고 하시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비구로서 음욕의 법을 행하면 바라이(波羅夷) 죄를 얻어 함께 살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이 (악의) 뿌리를 끊는 법을 굳건히 지으신 뒤에 처음에 바라이를 정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원숭이를 붙들어 정하려고 하셨으니 이제 그 근본을 말하리라.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셨으므로 율본에서 ‘비구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셨다’고 하였다. 처음 정하는 품[初結品]을 끝마친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구절의 뜻이 알기 어려우면 내가 이제 말할 것입니다.” ‘그때 어느 한 비구가 있었다’ 하는 이 구절의 뜻은 알기가 쉽다. ‘음식으로 원숭이를 꾀어냈다’ 함은 이때 큰 숲 속에서 많은 비구들이 자비스런 마음을 행하였다. 자비로웠기 때문에 많은 축생들이 두려워함이 없이 노루ㆍ사슴ㆍ원숭이ㆍ공작ㆍ물총새ㆍ기러기ㆍ꿩 등 여러 짐승들이 선방(禪房) 앞에서 거닐며 즐겁게 놀았다. 그때 한 비구가 있었다. 원숭이 때에 한 암 원숭이가 있었는데 모양이 살찌고 건강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이 비구는 음식으로써 꾀어 함께 부정한 법을 행하였다. 이것이 비구가 부정한 법을 행하였다 함이다. ‘다니다가 방사를 살펴본다’ 함은 비구(比丘)들이 다른 나라로부터 와서 세존께 문안하고 그리하여 여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비구들은 이른 아침에 아건다식(阿犍多食)45)을 얻어먹고는 ‘우리들은 비구들의 방사를 가서 살피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율본에서 ‘가서 방사를 살피려고 비구들의 처소에 가서 닿았다’고 하였다. 이 원숭이는 먼저 한 비구와 부정한 행을 하였으므로 원숭이는 비구들이 오는 것을 보고 ‘비구들은 다 먼저 비구와 다름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곧 비구들에게 이르러 음욕스런 마음으로 몸짓을 하면서 앞서 함께 음행했던 비구와 같이 다름없이 하여 곧 음부를 비구들에게 향하여 그 음탕한 모습으로 꼬리를 들고 나타내 보이며 기다렸다. 혹은 그 비구들 모두가 음탕한 뜻이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가 하여 스스로 그 음탕스런 모습을 지어 비구들에게 보였으므로 비구들은 원숭이가 음탕한 일을 하고 싶어함을 알고 비구들은 말하였다. “우리들은 안 보인 데 있으면서 밥을 빌러 간 도인이 돌아옴을 엿보다가 그의 하는 일을 보리라.” ‘틀림없이 그 장로이리라’에서 틀림없다 함은 사실일 것이요. 헛되지 않음이다. 강도가 일일이 그 장물을 거두어 감히 숨기거나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실제로 장로는 그와 같이 행한 것이 아니겠느냐. 여인의 음부나 축생의 암컷의 음부는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하심도 모두 이 일 때문이시다. ‘사람의 여인으로 본다’ 함은 보거나 붙잡거나 만지거나 하는 일이 부정한 행이면 축생의 암컷도 그와 같으니, 온갖 하는 일이 다 나쁜 법이다. ‘너희 장로야, 이런 방편으로 짓거나 내지 축생과 함께 하면 바라이 죄를 얻으며 함께 살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만약 축생의 암컷과 함께 부정한 행을 지어도 바라이 죄를 이룬다고 한다. 법사가 말하였다. “붙들어 정하여 굳건하게 한 것입니다. 계율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세간의 자연죄(自然罪)요, 둘째는 성인의 말씀을 어기어 죄를 얻음입니다. 만약 마음에 나쁜 법을 숭앙하면 세간의 자연죄의 법이요, 나머지는 여래께서 계율로 정하신 죄입니다. 세간 법에 붙따라 제정하심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견고하게 하심이니, 오직 꿈속에서만은 제외하며, 꿈속에서는 범함이 아닙니다. 제정하시는 가운데 무성죄(無性罪)를 붙따라 정하셨으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먹음[展轉食]과 따로 모여 먹음[別衆食]은 무성죄로서 붙따라 정함이니, 이와 같은 세간법을 범하지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붙따라 정한 계율을 마치겠습니다.” 원숭이 품이 끝났다.
024_0353_b_02L이제 딴 법이 일어났으니 다 발사자(拔闍子)로 인하여 일어났다. 조달(調達)이 발사자의 무리를 얻어서 화합한 상가를 깨뜨림과 같은 것이 발사자의 일어남이다. 또 부처님 열반하신 후 1백 세에 법이 아니고 비니가 아니고 불교가 아님을 지은 것은 다 발사자의 일어남이다.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이미 계율을 정하여 마치셨다. 발사자는 멋대로 먹고 멋대로 잠을 자며 욕심을 낸다. 또 계율을 버리지 않고 음욕법을 행함으로서 뒤에는 권속들이 무너진다. ‘무너짐[壞敗]’이라 함은 각기 흩어져 달아나고, 왕의 벌을 받으며, 혹은 사망하고 이별하기도 하니, 이것을 권속들이 무너진다고 한다. ‘혹은 병고가 핍박한다’에서 병이라 함은 신체가 파리하고 상(傷)하며 파리하고 상함으로써 큰 고통이 생긴 것이다. ‘대덕 아난이여, 우리들은 여래를 훼방함이 아닙니다’ 함은 여래의 죄를 말하지 않으며, 법을 비방하지 않으며, 뭇 상가를 헐뜯지 않고, 우리들 스스로 몸에 복과 덕(德)이 없고 위엄 있는 풍채가 없음을 헐뜯는다는 것이다. ‘이제 바른 법을 닦아 지닌다’ 함은 서른여덟 가지의 관법(灌法)이다. ‘우리들의 무리는 차례로 보리의 법을 자세히 살핀다’ 함은 아라한의 도이다. ‘지혜의 인[慧因]을 닦아 모은다’ 함은 보다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머무른다’ 함은 속인의 사는 곳을 버리고 청정한 곳에 머무르면서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난이 ‘장하도다’라고 대답하였으니 그때 아난은 다른 이의 마음을 모르고 오직 큰 서원의 말을 하는 것만을 듣고, 만약 그와 같을 수 있다면 아주 크게 장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은 ‘장하도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럴 수가 없다’는 이 말씀은 딱 자르는 말씀이니, 만약 결과에 응하면 곧 그럴 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했을 것이나 결과가 없으므로 그럴 수가 없으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아난에게 ‘그럴 수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여래는 이미 발사자 등이 인연이 없음을 살피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발사자 등에게 구족계를 주셨다면 이들은 이미 바라이 죄를 얻어 함께 살지 못하므로 율본에서 ‘그럴 수가 없다. 만약 오더라도 구족계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뭇 상가가 구족계를 주면 청정한 법이 아니므로 사문이 되지 못하고 사미(沙彌) 자리에서 머무른다. 만약 사미 자리에 머물러 바른 법을 존중하면 닦는 바를 얻으리라. 부처님은 이들을 가엾이 여김으로써 구족계를 주지 않기도 하시고 구족계를 주시기도 하신다. 왜냐하면 계율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청정한 법에서 공경하고 존중하면 이 인연이 있으니 머지않아 도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혹시 출가하여도 구족계를 주기도 하고 구족계를 주지 않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법을 이미 갖추시어 여래는 계율을 정하시려고 비구들에게 ‘너는 이와 같이 계율을 말하라. 만약 비구가 응(應)하면 함께 살지 못한다’고 하셨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 율본은 이미 자세하니, 나는 이제 분별하여 말하겠습니다.” ‘만약’이라 함은 통틀어 이름함이요,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계율의 구절 가운데서 계율본 가운데서 문난(問難)하는 가운데서 만약 알려고 하면 네 가지의 비니가 있으니, 마땅히 아십시오.” 여러 대덕으로서 신통이 있는 이면 추려내어 남에게 알게 하라. 그때 대중들이 모이는 때46)였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합니까?” “첫째는 근본[本]이요, 둘째는 근본을 따름[隨本]이요, 셋째는 법사의 말[法師語]이요, 넷째는 스스로의 뜻[自意]입니다.” “무엇을 근본이라고 합니까?” “일체의 율장이니, 이를 근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근본을 따름이라고 합니까?” “네 가지 큰 것[四大處]을 근본을 따름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부정하다고 하되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부정함에 붙따라 들어가고 청정함에는 들지 않으면 이것을 부정이라 한다’라고 하셨고,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부정하다고 하되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청정함에 붙따라 들면 이것을 청정이라 한다’라고 하셨으며,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내가 청정하다고 허락은 한다. 그러나 이는 부정함에 붙따라 들어가고 청정함에 들지 않으면 이는 너희들에게 있어서 부정이다’라고 하셨고,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내가 청정하다고 허락은 한다. 그러나 이는 청정함에 붙따라 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청정이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네 가지 큰 것입니다.” “무엇을 법사의 말이라고 합니까?” “모인 대중이 5백 아라한일 때에 부처님은 먼저 근본을 말씀하시고, 5백 아라한은 널리 분별하여 유통하니, 이것을 법사의 말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까?” “근본을 제외하고 근본을 따름을 제외하고 법사의 말을 제외하고 뜻으로써 제도하며, 방편을 써서 제도하며, 수다라로써 자세히 말하며, 아비달마로써 자세히 말하며, 비니로써 자세히 말하며, 법사의 말로써 하면 이것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다.” 또 물었다. “그 이치는 무엇입니까?” “곧 지녀서 행하지 마십시오. 먼저 근본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다음에 구절의 뜻을 살피며, 낱낱이 분별하여 서로 헤아린 뒤에 법사의 말을 자세히 살피십시오. 만약 문구와 같으면 지니고, 만약 살펴서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말 것이니, 이것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뜻에 따른 이가 법사의 말이 굳고 강하면 법사의 말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근본을 따르는 문구가 같으면 지녀야 하고, 만약 문구가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마십시오. 법사의 말을 따르되 근본을 따름이 굳고 강하면 근본을 따름이 문구 이치가 같음을 살펴서 지니어야 하고 만약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말 것입니다. 근본을 따름에 쫓되 근본이 모두 굳고 강하면 움직이거나 흔들릴 수 없으니, 뭇 상가의 갈마와 같고 또한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심과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근본을 따름을 살펴서 스스로 환히 알 수 없으면 수다라의 근본 이치와 주석을 살펴야 하니, 모두 같으면 지니십시오.” 법사가 말하였다. “두 비구가 서로 힐문하되, 첫째 비구는 청정이라 하고, 둘째 비구는 부정이라고 하면 다시 근본과 근본을 따름을 살펴보십시오. 만약 근본과 근본을 따름에서 청정이라 하면 좋지만 부정이라 하면 지니지 마십시오. 만약 첫째 비구는 근본을 살펴보아 이미 청정하고 또 문구의 이치와 증명이 많은데, 둘째 비구는 문구의 이치가 적으면 첫째 비구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두 비구의 문구의 이치가 모두 같으면 반복하여 헤아리고 이치의 근본을 상의하여 지니거나 지니지 말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의 비니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만약 율사면 세 가지 법이 있는 연후에 성취합니다.” 물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첫째는 근본을 외우고 통달하며 구절의 이치를 가리어 익히며 문자를 잊지 않는 것이 첫째의 법이요, 둘째는 율본 가운데서 굳게 지니어 잡스럽지 않음이요, 셋째는 스승으로부터 차례로 받아 지니어 잊지 않게 함입니다.” 물었다. “무엇을 근본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의 비니장을 근본이라고 합니다.” ‘외우고 통달한다’ 함은 혹 어떤 사람이 차례로 구절을 묻지 아니하여도 생각할 필요 없이 묻는 대로 대답하는 것이다. ‘구절의 이치를 가리어 익힌다’ 함은 율본의 구절 이치를 잘 분별할 수 있고 뜻과 주석에 다 아는 것이다. ‘굳게 지니어 잡스럽지 않다’ 함에서 부끄럼의 뜻이 있는 것을 굳게 지님이라 하니, 혹시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비록 많이 듣고 뜻을 알며 공경하며 존중하고 공양을 하더라고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이는 법 가운데 가시나무이다. 왜냐하면 화합한 상가를 잘 깨뜨리고 상가도 잘 괴롭히기 때문이다. 부끄럼이 있는 이는 계율에 한결같이 부끄럼을 내어서 죽더라도 공양 때문에 바른 법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부끄럼이 있는 이를 반연하여서 계율이 있는 것이다. ‘잡스럽지 않음’이라 함은 문구 가운데에 서로 뒤섞여 어지럽지 않음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물으면 차례로 대답하며, 가령 율본의 이치와 주석을 뒤바꿔도 대답하니 비유컨대 사람이 가시덤불 속을 가매 지나가기 어려운 것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이치로 물으면 곧 저 말로 대답하며, 만약 말 잘하는 이가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하여 탈락함이 없음이 마치 금 주발에 사자고(師子膏)를 담으면 새거나 없어짐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잡스럽지 않음이라 한다. ‘차례로 스승으로부터 받아 지니어 잊지 않는다’ 함은 우파리는 여래로부터 받았으며, 타사구(陀寫俱)는 우파리로부터 받았으며, 수제나구(須提那俱)는 타사구로부터 받았으며, 실가바(悉伽婆)는 수제나구로부터 받았으며, 목건련의 아들 제수(帝須)는 실가바로부터 받았으며, 또 전타발(栴陀跋)로부터 받았다. 이와 같이 스승과 스승이 서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른 것이니, 만약 이러함을 알면 이것을 굳게 받아 지님이라고 한다. 만약 차례로 다 스승이 이름을 알 수 없으면 모름지기 한 둘의 이름자는 알아야 한다. 만약 잘 세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면 율사라고 한다. 만약 율사면 뭇 상가 모인 데서 여러 다툼의 일을 판단하되, 율사는 그 가운데서 먼저 여섯 가지 일을 살펴 편안하고 자세히 대답한다. 물었다. “무엇이 여섯 가지입니까?” 대답하였다. “첫째 곳을 살피고[觀處], 둘째 근본을 살피고, 셋째 문구를 살피고, 넷째 삼단(三段)을 살피고, 다섯째 중간죄(中間罪)를 살피고, 여섯째 무죄(無罪)를 살핍니다.” “무엇을 곳을 살핀다고 합니까?” “풀이거나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와야 하는데 ‘만약 몸을 가리지 않고 나체로 절에 들면 돌길라(突吉羅)를 얻는다’라고 이와 같이 죄상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곳을 살핀다고 합니다.” ‘근본을 살피다’에 대해서 이다. “무엇을 근본을 살핀다고 합니까?” “만약 일부러 거짓말[故妄語]을 하면 바야제(波夜提)를 얻으니, 이와 같은 5편죄(篇罪)를 5편에서 낱낱이 죄의 성품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근본을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문구를 살핀다고 합니까?” “몸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이면 투란차(偸蘭遮)를 얻으니, 이와 같은 7취죄(聚罪)의 상을 낱낱이 죄의 성품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각각 문구를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삼단이라고 합니까?” “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에 삼단이 있고, 바야제에 삼단이 있습니다. 삼단에서 살피어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간죄를 살핀다고 합니까?” “불을 피움은 돌길라 죄를 얻으니, 이와 같이 계율의 근본에서 중간죄를 살피고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중간죄를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무죄라고 합니까?” “즐거움을 받지 않고, 도둑질하려는 마음이 없고, 죽이려는 마음이 없고, 거짓말의 뜻이 없고, 내려는 마음이 없고, 일부러 짓지 아니하고 모르고 함이니, 이와 같이 낱낱이 무죄의 상을 살피고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앱니다. 만약 비구가 네 가지 비니 법을 알고, 또 세 가지 법을 잘하고 여섯 가지 일을 살피면 이미 다툼 없애는 법을 이룩한 것입니다. 만약 비구가 없애는 법을 모두 함께 등지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심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비구가 계율을 범하면 곧 율사에게 가서 스스로 의심한 것을 묻되, ‘이 일은 어떻게 합니까?’ 합니다. 율사는 먼저 잘 살피어 만약 죄가 있으면 ‘죄가 있다’고 대답하고 죄가 없으면 ‘죄가 없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참회해야 할 이면 ‘참회하라’고 하며, 아부가나(阿浮呵那)를 주어야 할 이면 ‘준다’고 하며, 만약 주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라이 죄상을 보면 ‘너는 바라이를 얻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처음의 바라이로서 음욕과 헛된 거짓말은 그 형상이 나타나기 쉽지만 살생과 투도의 두 가지 계율은 그 형상이 알기 어려우므로 자세한 것으로 인하여 얻고 자세함을 따라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을 향하여 ‘너는 바라이 죄를 얻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스승이 있는 이면 ‘너는 지금 너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라’고 하고 보냅니다. 이에 율사에게 가서 ‘이 죄는 어떠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만약 이 율사가 그 죄상을 살피어 다스릴 수 있으면 이 비구는 율사의 말을 얻고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되, ‘다스릴 수 있습니다’고 하십시오. 율사는 ‘좋도다’고 하고, 말대로 할 것입니다. 만약 스승이 없는 이면 같이 배우는 이에게 묻게 하고 같이 배우는 이가 ‘다스릴 수 있다’고 대답하면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고, 율사는 ‘좋도다’하고 대답합니다. 만약 같이 배우는 이가 없으면 제자에게 묻게 하고 제자 또한 ‘다스릴 수 있다’고 대답하면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고, 율사(律師)는 ‘좋도다’하고, 말대로 합니다. 혹시 제자로서 죄 있는 형상을 보았다 하여도 ‘당신은 바라이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법사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기 어렵고, 출가도 하기 어렵고, 구족계 받기도 심히 어렵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을 치고 율사는 곧 방사를 깨끗이 쓸고 뿌리어 의심하는 비구를 해가 다하도록 앉게 한다. 앉히고는 서른 가지 선정법을 주어 그가 스스로 자세히 살피도록 한다. 만약 계율에 병폐가 없으면 자세히 살피는 이에게 선정법이 나타나고 위의가 정연하며 마음은 곧 정(定)에 든다. 앉아서 정의 가운데 있으면 하루가 지나더라도 깨닫거나 알지 못하니, 어두워져 율사가 그 곳에 이르러 ‘장로여, 마음이 어떠합니까?’고 하면 ‘대덕이시여, 저의 마음에는 오직 정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율사는 또 ‘장로여, 출가는 사람으로서 심히 하기 어렵습니다. 사문의 법에 부디 게으르지 말고 다 닦고 배워야 합니다’라고 한다. 만약 계율을 깨뜨린 이면 선정의 마음에 들어도 안정되지 못하고 가시덤불에 앉은 것과 같다. 왜냐하면 허물을 뉘우치는 불에 타는 바가 되며 또한 달군 돌 위에 앉음과 같아서 안정함을 얻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율사가 그 곳에 이르러 ‘장로여, 마음이 어떠합니까, 안정이 됩니까?’고 하면 ‘안정되지 못합니다’고 하리라. 율사는 ‘사람이 세간에서 죄의 행위를 하면 덮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처음 지을 때에는 몸을 보호하는 선신(善神)이 먼저 살펴보고 알며, 또 사문 바라문도 대강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니, 그대는 마땅한 대로 편안히 머무를 곳을 찾으시오’라고 한다. 네 가지 비니와 율사의 세 가지 법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