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비구가 방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가고자 하면, 먼저 방을 청소하고 치우고 바르고 고쳐 깨끗이 한다. 부구(敷具)는 접고 상을 벽에서 멀게 하고 부구를 상 위에 놓아야 한다. 좋은 것은 아래에 놓고 나쁜 것은 위를 덮는다. 두 종류의 부구는 위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갈 때는 마땅히 화상 아사리에게 여쭈어야 하며 만일 허락하면 가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머물러야 한다. 만약 법랍이 10년 이상이고 승법사(勝法事)가 있어 반드시 이익이 있다면 비록 화상 아사리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도 허물이 없다. 갈 때 절 밖에 나가면 마땅히 가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 마땅히 가는 도반은 도반 가운데 동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려서 가야 한다.
024_0541_a_02L또 다시, 이와 같은 같이 가는 도반이 ‘내가 마음속에서와 같이 짓는 바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여야 한다. 또 다시, ‘그 사람은 위의를 잘 다스릴 수 있는가, 이 사람이 게으른 사람은 아닌가. 이 사람이 나에게 이익되는가, 쇠퇴함이 되는가. 믿을 만한가, 믿을 만하지 않는가. 함께 갈 경우 괴로움이 될 것인가, 즐거움이 될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또, ‘본래부터 병이 있는가 없는가, 건강한가 건강하지 않는가, 혹은 길가는 도중에 상대방을 저버리지는 않는가’를 사유해야 하나니, 이와 같이 헤아려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을 가는 자(去者)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촉하고 난 연후에 절을 나와 갈 때 절 밖에 이르러 같이 가는 비구에게 물어야 한다. “그대들은 옷이나 발우나 일체 수발하여야 할 물건 중 잊은 것은 없는가? 또 교칙[誡勅]을 겸비하여야 하니, 모든 비구가 이제 함께 가면 그대들은 적게 말하고 모든 근(根)을 지켜 다스려야 하며, 도중에 사람을 보는 곳마다 모두 환희하고 그 착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동행하는 하좌는 모두 상좌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서 모두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마주하여 말한다. “가르쳐 주신 교칙대로 환희 봉행하겠습니다.”
024_0541_a_13L諸同行下座。聞上座所說誡勅。皆叉手合掌胡跪對曰。如所教勅歡喜奉行。
여러 비구가 길을 따라 갈 때 하좌 비구는 항상 상좌비구를 공경하고 찬탄하며 앞뒤에서 호위하여야 한다. 가고 머무르고 떠나는 곳곳마다 상좌비구는 떨어뜨린 물건은 없는가 살피고, 만약 있으면 가져가게 한다. 또한 상좌가 길을 가는 법은 하좌가 앞에 있고 상좌는 뒤에 있으면서 모든 하좌에게 말한다. “각자 스스로의 마음을 거두어 산란해서는 안 된다.”
만일 길을 가다가 하좌가 병이 나면 상좌는 마땅히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선심(善心)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며,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버리고 가서는 안 된다. 길을 가다가 하좌에게 만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좌는 마땅히 도와서 처리해야 하니, 첫째는 부모의 어려움, 둘째는 형제자매의 어려움, 셋째는 육친의 어려움, 넷째는 국왕 대신의 어려움, 다섯째는 도적의 어려움, 여섯째는 야수의 어려움이다.
024_0541_b_02L상좌는 그 있는 힘을 다하여 그 어려움을 벗어나게 하여야 하며, 만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 날 수 없으면 마땅히 마을의 군ㆍ현ㆍ성ㆍ읍의 승가람이 있는 곳이나 국민들이 중히 여기고 덕이 있는 비구가 있는 곳이나 믿음이 두터운 바라문, 모든 단월, 대신이 있는 곳에 나아가 말하여 처리하게 한다. 만일 벗어나면 다행이지만 만약 벗어나지 못하면 마땅히 스스로 국왕의 문 앞에 나아가 이치를 말하고 벗어날 수 있게 하며, 괴로움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비구가 때가 아닌 때에 마을에 들어가고자 하면, 마땅히 화상 아사리에게 아뢰고 옆자리 스님에게 말하고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마을에 들어가는 법이라고 한다.
024_0541_b_08L若比丘非時入聚落。應白和尚阿闍梨語比坐而入。是名入聚落法。
때가 아닌 때 모이면, 식사와 죽을 먹을 때와 달콤한 장(漿)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이와 같이 나머지 일체의 작법사(作法事)를 할 때 법과 같이 율과 같이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한다. 이것을 때 아닌 때 모임이라고 한다. 만일 때 아닌 때 모든 비구가 모일 경우 그 가운데 상좌가 있다면 상좌는 마땅히 모든 대덕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스님이 때 아닌 때 모이는가?”
두 종류의 집회가 있으니, 첫째는 대중이 마치고 밤에 경과 논의 뜻을 설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이 말없이 단정히 앉아 선정에 들어 사유하는 것이다. 또 5일에 한 번 모이는 법이 있으니, 모일 때 상ㆍ중ㆍ하의 세 대중 모두 모여야 한다. 모인 뒤에는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복장을 정리하며 몸을 단정히 하여 가만히 앉아 각기 서로를 공경하여야 한다. 위의법(威儀法)을 관하는 자는 싫어하는 바가 없어 능히 사람에게 착한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5일에 모여 만나는 법(聚會法)이다.
024_0541_c_02L듣는 자는 마음을 거두어 법에 머물고 다시 나머지 연(緣)이 없게 한다. 만일 법을 설하는 자가 벗어남이 있어 잊어버리거나 잘못 말한 것이 있다면, 듣는 사람들은 마땅히 각자 스스로 그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만일 잊어버리거나 잘못 말하는 것이 없다면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말이 풍부하다면 뜻이 막혀도, 법과 설법자 모두 마땅히 공경하여야 하니, 제석을 받들어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스스로 가벼이 하고 그리고 법사(法師)를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이 설하는 법 가운데 산란해서는 안 된다. 정심(定心)으로 듣고 념념히 서로 이어져 틈이 없게 하라.
법을 들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마땅히 다섯 가지 덕을 세워야 한다. 첫째는 아직 일찍이 듣지 못하였던 법을 이제 비로소 들을 수 있게 하고, 둘째는 이미 일찍이 들은 법은 이해가 통하게 하고, 셋째는 나의 의심하는 마음을 끊게 하고, 넷째는 나의 소견을 바르게 하고, 다섯째는 깨끗한 마음을 증장시키게 하는 이것을 안의 다섯 가지 덕이라 한다. 이러한 내용은 『증일아함경』 가운데서 밝히고 있으니,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법을 들으면 아홉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는 신심이 생기며, 둘째는 신심에 의하여 환희하며, 셋째는 환희하여 애락하며, 넷째는 이익을 탐하고 구하는 것을 버리고 법을 듣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바른 견해를 성취하게 되며, 여섯째는 무명을 끊어서 지혜심을 일어나게 하며, 일곱째는 마음의 결박을 끊으며, 여덟 번째는 사성제 가운데서 깨끗한 법의 눈을 얻으며, 아홉째는 5음(陰) 가운데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의 관(觀)을 얻는다. 이 관을 얻어서 마음으로 용약하여 신심을 한층 더 깊이 하여 무너지지 않게 한다. 번뇌를 떠나게 되어 열반도를 증득하고 해탈의 즐거움을 받는다. 이 뜻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024_0542_a_02L 상좌는 다시 이 법사가 설한 법과 차례의 의미와 변재를 관하기를, ‘이 문구는 앞과 뒤가 전도되었는가 아닌가, 글과 뜻이 차례로 상속하는가 단절되는가, 끊고 맺는 것이 있는가, 아울러 변재가 완벽한가, 설한 바가 삼장에 부합되는가, 또 법사가 법을 설한 바가 사람들의 뜻을 헤아리는가’를 관하여야 한다. 만일 설한 글과 구절 그리고 뜻이 삼장에 부합하지 않으며 언설이 분명하지 않아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상좌는 설법자에게, “간략히 법을 설해 주십시오. 대중 가운데 법사가 많아 모두 설법하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한다.
만약 법사가 설한 문구의 차례와 뜻과 이치가 또한 좋고 설한 변재가 완벽하고 삼장의 경에 부합되고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면, 상좌는 법사에게 감사하며 미묘함을 칭찬해야 한다. 대중 또한 마땅히 똑같이 함께 기뻐하며 찬탄하여야 한다. 이 자리에 신심이 두터운 단월이 있다면 상좌는 마땅히 널리 법을 듣는 인연과 이를 들어 얻는 이익을 설하고, 착한 마음을 증장하여 더욱 견고하게 하며 물러섬이 없게 한다. 이 자리 가운데 비구가 있어 네 대중[四衆]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자 하면 바로 설해서는 안 되며 먼저 주위 스님들께 말하여야 한다. 주위의 비구는 마땅히 상좌를 향하여 말해야 한다.
상좌도 설법을 갑자기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먼저 그 아는 바의 덕행을 관하여 만일 능한 자라면 상좌는 마땅히 대중의 앞에서 그 설법을 청하여야 한다. 만약 재주가 맡길 만하지 않은 것을 안다면 잠자코 놔둔다. 만약 외도가 있어 와서 모임에 이르러 정법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상좌는 마땅히 더불어 논의를 주고 받아 그 자를 항복시켜야 한다. 법과 같이 비니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그 뜻을 보여야 한다. 이와 같은 덕이 있는 자를 모임 가운데 상좌라 한다.
024_0542_b_02L설법자는 바라제목차를 지니고 스스로 몸과 입과 뜻을 잘 거두어 들여 세 가지 업을 행하며, 화상 아사리를 섬기고 상좌를 섬기기를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이 사람은 마땅히 4념처법(念處法)을 성취하고 작은 죄에서도 크게 두려운 생각을 일으켜, 마땅히 잘 이와 같이 수순하는 행법(行法)을 배웠으니, 만일 내가 설한 계행을 반드시 상대방으로 믿어 받게 한다. 법을 받들어 귀로 들은 자는 마음에 산란함을 연하지 않아 듣는대로 행하니, 이를 받드는 것이라 한다. 내가 지혜를 설하거나 혹은 선정을 설하거나 혹은 열반을 설하거나 그것을 들어 받아들여야 한다. 이근(耳根)을 잘 거두어서 나머지 소리에 집착하지 마라. 내가 설한 바는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또 다시 법을 설하는 비구는 먼저 스스로 아련야행을 행하고 찬탄하며, 나의 아련야행을 설한다면 마땅히 이근을 거두어서 잘 들어야 한다. 감히 설한 바가 있다면 반드시 걸식 내지 3의(衣) 설법을 이해하고자 하여야 한다. 설법자는 마땅히 스스로 이를 행해야 하며 또한 걸식 내지 3의를 찬탄하여야 한다. 또 사람을 가르쳐 행하게 하며, 사람을 가르쳐 찬탄하게 하며, 만일 내가 설한 걸식 내지 3의가 있다면 마땅히 잘 귀로 받아들여 수용해야 한다. 내가 이제 설한 것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다음에 설법 비구는 마땅히 대중에게 어떠한 법을 설하여야 수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지는 헤아려야 한다. 만일 대중이 마땅히 깊은 법을 듣고자 한다면 마땅히 깊은 법을 설하여야 하며, 마땅히 얕은 법을 듣고자 하면 얕은 법을 설하여야 한다. 상대방에게 이익되지 않은 것을 나쁜 설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상대방에게 이익되지 않는가. 이 얕은 법을 듣고서 듣고자 하지 않으며, 이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깊은 법이라 하는가. 계를 지니는 것을 논하며 선정을 논하며 지혜를 논하며 해탈을 논하며 해탈지견(解脫知見)을 논하며, 12인연(因緣)을 논하며 내지 열반을 논한다. 이것을 깊은 법이라 한다. 마땅히 깊은 것을 듣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법을 설하여야 한다. 즐겁게 청하여 듣고 생각하고 구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이익된 것이라 한다.
024_0542_c_02L만일 얕은 것을 좋아한다면 마땅히 얕게 설하여야 한다. 무엇을 얕은 것이라 하는가. 계를 지니는 것을 논하며 보시를 논하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논한다. 만약에 대중은 얕은 것을 좋아하는데 깊이 법을 설한다면 듣고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여 이해하지 않으니, 상대방이 이익되지 않는다. 이것을 나쁜 설[惡說]이라고 한다. 얕은 자를 위해서는 얕은 법을 설하여 이익되게 하므로 착한 설[善說]이라고 한다.
또 다시 설법 비구는 뜻과 글과 남녀의 소리를 알아야 하며, 다시 방편을 잘 사용하여 법을 설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아는 것을 남에게 이해시켜야 하며, 또 마땅히 글과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 앞과 뒤가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 만일 공교히 설하는 것 내지 미묘한 법은 능히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내지 마지막으로 행하는 자는 마지막으로 행하는 자라 말하는 까닭이니, 마지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지막에 설법하는 것이니 마지막이라 하며, 둘째는 설한 법이 가장 얕으므로 마지막이라 한다.
또 다시 설법자는 설법하고자 할 때에 마땅히 먼저 사부대중인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관하여야 한다. 비구ㆍ비구니를 위해서는 지계(持戒)ㆍ선정ㆍ지혜ㆍ열반을 설하여야 한다. 우바새ㆍ우바이를 위해서는 지계ㆍ보시ㆍ생천(生天) 내지 청정법에 대해 설해야 한다. 또 다시 법을 설하는 자는 탐내는 마음을 제거하고, 불염십(不染心)ㆍ불악심(不惡心)ㆍ불우치심(不愚癡心)ㆍ부자경심(不自輕心)ㆍ불경대중심(不輕大衆心) 하여야 하고, 자심(慈心)ㆍ희심(喜心)ㆍ이익심(利益心)ㆍ감인심(堪忍心)ㆍ부동심(不動心)ㆍ무혹심(無惑心)에 상응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마음을 세워서 마땅히 법을 설하여야 한다.
024_0543_a_02L또 다시 법을 설하는 자는 여타의 인연으로 법을 설해서는 안 되며 상응하기 때문에 법을 설한다. 법은 거듭 듣는 것이 어려우므로, 이 법은 보배와 같으며 약과 같아서 능히 사람을 이익되게 하므로 설하는 것이다. 설법자는 자심(慈心)과 비심(悲心)과 상응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해야 하고 내지 네 구절로써 능히 상대방을 실로 이해시켜야 한다. 긴 밤 가운데 이익과 안락이 있어 다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것을 사용하여 차제에 구절의 뜻을 만족하게 하여 듣는 사람에게 평등하게 이해하게 한다.’
또 설법하는 비구는 눈으로 이양을 보고 탐심을 내어 다른 사람에게 설법해서는 안 되며,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해 설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면 몸을 피곤하게 하고 더불어 또한 설한 말이 순차적이지 못하며 음(音)이 이해되지 않는다. 만일 법을 설하는데 미묘한 뜻이 아니라면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차례를 분명히 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면 의미가 모두 명료하다. 다시 법을 설하는 비구는 마땅히 차례로 수순하여 법을 설하여야 한다.
또 마땅히 대중을 위하여 싫어하고 걱정하는 법과 멀리 떠나는 법을 설하여야 하고 마땅히 상대방의 마음에 환희를 일으켜 해탈을 구하여 빨리 열반을 얻게 해야 한다. 설법 비구는 마땅히 늘 몸은 고이며 공이며 무상이며 무아이며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되, 그침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땅히 12념을 얻어야만 성법(聖法)을 이루기 때문이다.
024_0543_b_02L무엇을 12념이라 하는가. 첫째는 자기의 몸을 성취하기를 염하고, 둘째는 다른 이가 성취하기를 염하며, 셋째로는 사람의 몸을 얻도록 염원하는 것이며, 넷째로는 종성가(種姓家)에 태어나기를 염하며, 다섯째로는 불법 가운데 신심을 얻기를 염하고, 여섯째로는 태어나는 곳에 그 공(功)을 더하지 않고 깨닫는 법을 얻기를 염하며, 일곱째로는 태어난 곳에 모든 근이 완전히 갖추어지길 염하며, 여덟째로는 불세존께서 출현하시는 세상을 만나길 염하며, 아홉째로는 태어난 곳에 늘 정법을 설할 수 있기를 염하며, 열째로는 설하여진 법이 늘 오래 머물기를 염하며, 열한 번째로는 법이 오래 머물러 수순하게 수행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열두 번째로는 늘 모든 중생의 마음을 가엾이 여겨 이 열 두 가지 염을 구족하여 반드시 성법(聖法) 얻기를 염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법을 설하는 것이다. 얻기 어려운 법부터 이에 몸을 관하여 단절하지 않음이 설법자가 설법하는 내용인 것이다.
만일 법을 설하는데 대중 가운데 상좌가 있을 경우, 설법자가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보았을 때 상좌는 설법자에게, “장로여, 이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다섯 가지 일에 인연이 있어 정법이 머무는 것을 어렵게 하고, 법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없어져 나타나지 않게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전의 글을 암송하는 데 구족하지 않는 것이다. 학습한 법에 끝까지 궁구할 수 없으니,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문자를 구족하지 못하며 스승과 제자는 설한 대상에 대해 뜻을 알지도 못하고 다하지도 못한다. 둘째는 만약 학습자가 삼장을 모두 알아서 문장과 의미가 모두 설법한 내용에 있어서 명료함을 갖추고 있지만 사부대중과 제자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몸이 사라져 감에 법 또한 따라서 멸하여 간다. 셋째는 만일 승 가운데 상좌가 승가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어 삼업을 닦지 않고 세속의 생사 가운데의 업을 운영하는 것을 즐긴다면, 그 주변에서 배우고 익힌 무리들의 제자들은 삼업을 닦지 않고 세속의 일을 운영하는 것을 즐기므로 이와 같은 무리들은 능히 정법을 멸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어떤 비구가 있어 성질이 사나워 화내는 것을 즐기며 사람 말을 따르지 않으며 좋은 것을 들어도 나쁜 것을 들어도 모두 화내고 성질을 낼 경우, 만일 국토에서 귀중히 여기는 지견(知見)이 있는 비구가 있을지라도 모두 버리고 피하여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법을 멸하게 하는 근본이다. 다섯째로는 만일 비구가 있어 늘 다투고 소송하는 것을 좋아하며 친구끼리 무리를 지어 서로 도우며 함께 형세와 이양을 다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은 능히 빨리 정법을 멸하게 한다.
024_0543_c_02L또 다시 다섯 가지 법의 인연이 있으니, 능히 정법이 빨리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첫째는 경전의 문구를 암송하고 익히는 것을 구족하고, 앞뒤 순서의 모든 의미를 지니는 것을 모두 끝까지 파고 들어간다. 또 대중과 제자들은 자신이 아는 바와 같이 가르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능히 불법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한다. 둘째는 경ㆍ율ㆍ논의 삼장의 글의 뜻이 구족함을 자세히 아는 것이다. 또 능히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해하고 있는 대로 가르쳐, 그 몸은 비록 멸하지만 후대 정법이 계속 이어서 끊이지 않게 하니, 이와 같은 사람은 정법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셋째는 승가 가운데 사부 대중이 중히 여기는 대덕 상좌가 있으면 열심히 삼업을 닦아 세속의 일을 운영하지 않는다. 그의 대중과 제자들은 계속 이어져 모두 또한 이들과 같다. 이 또한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어떤 비구가 있어 그 성품이 부드러워 말에 거슬림이 없어 좋은 것을 들으면 그것을 따르며, 나쁜 것을 들으면 멀리하고 피한다. 만약 재주가 많고 지혜와 덕을 갖춘 자가 있어 지도하고 가르치면 그 말을 받들어 수행한다. 이것 또한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만일 비구가 함께 서로 조화하고 수순하여 형세와 이양을 위하여 무리끼리 서로 도와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는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로써 능히 정법이 널리 전하여 그치지 않게 하니, 이것을 설법 가운데 상좌라고 한다.
그때 병사왕이 누각 위에서 모든 재가자가 함께 서로 따라서 가는 것을 보고 주변의 사람에게 물었다. “모두 어디에 가는가?” 여러 신하들이 대답했다. “외도가 법을 설하는 곳이 있어 그곳에 법을 들으러 갑니다.” 왕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저곳도 이곳도 모두 법을 들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부처님에게 법을 들으러 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024_0544_a_02L그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계셨는데, 왕은 곧 부처님 계시는 곳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 앉아 세존께 여쭈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외도는 매일 매일 법을 설하여 모든 재가자가 매일 매일 공양을 크게 베풉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세존께서 매월 육재일(六齋日)에 사문들을 모아서 강설하고 논의하시면 제자들은 마땅히 갖가지로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고 아울러 법을 듣겠습니다. 외도들이 ‘참으로 나의 법은 옳고 바르다’고 하니, 부처님께서 만일 법을 설하시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삿된 길로 들어갈 것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인연으로써 곧 모든 비구를 모으셨다. 비구들은 모여서 잠자코 앉았고, 모든 단월들은 모인 뒤에 법을 듣고자 하여 여러 비구에게 말을 했다. 비구가 듣고서 세존께 아뢰니,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의 염불소리[唄]를 허락한다.” 염불소리란 언설(言說)의 말이다.
모든 비구는 부처님께서 이미 12부경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셨기에, 그 뜻을 시현하고자 하였으나 다시 의심이 생기기를, ‘만약 차례로 문장을 설하고자 한다면 대중이 문장이 많아서 부담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만약 줄여서 좋은 말을 가려 모아 놓으면 바로 뜻을 시현할 수 있을까?’ 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와 같은 사연을 모두 세존에게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의 경 가운데 중요한 말고 미묘한 문장을 끌어들여 바로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시자, 어떤 두 비구가 같은 좌석에 앉아서 나란히 함께 같은 법을 설하니, 여래께서 그것을 듣고서 계율을 제정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024_0544_a_19L爾時佛聽說法。時有二比丘。同一坐中竝共說一法。如來聞之卽制不聽。
당시에 모임에서 또 한 비구가 있어 부처님께서 멀리 가시지 않았는데 서서 높은 소리로 가음(歌音)을 지어서 경전을 읊으니, 부처님께서 듣고서 계율로 제정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 가음을 사용하여 경전을 암송하면 다섯 가지 일의 허물이 있으니, 위의 글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4_0544_b_02L외도의 가음을 사용하여 법을 설하는데 또 다섯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지니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로는 청중이 칭하는 것이 아니며, 셋째로는 모든 하늘이 즐거워하지 않으며, 넷째로는 말 또한 난해하며, 다섯째로는 말을 교묘히 하지 않기 때문에 뜻이 바르지 않아 난해한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 종류의 허물이라고 한다.
그때 병사왕이 삼보를 믿어서 만약 부처님과 스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뜻에 따라 주고자 하였으니, 연못에 이르기까지 모두 또한 이와 같았다. 병사왕이 이른 아침에 대장의 무리들과 연못에 이르러 씻으려고 하는데 멀리 연못 가운데서 말하는 소리, 경전을 외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려 곧 주변 사람에게 물었다. “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시종이 왕에게 아뢰었다. “이 자들은 여섯 무리의 비구입니다.” 왕은 시종이 가려던 것을 멈추게 하여 다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문이 놀랠까봐 오래도록 머물렀으나 비구가 목욕하는 것이 아직 끝나지 않으니, 왕은 씻지 못하고 곧 궁으로 돌아왔다. 이와 같은 일이 퍼져 세존께서 그것을 들으시고는 계율을 제정하였다. “모든 비구는 이제부터 앞으로 보름에 한번만 목욕하도록 허락한다. 목욕할 때 큰소리로 크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하는 법이라 한다.
그때 모든 비구는 한 곳에 모여서 마음으로 생각을 묶어 사유하고자 하여 말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의 의중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잠자코 있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생각을 묶어 사유하거나 혹은 잠자코 경행하거나 말하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사유하는 것 모두 허락한다.” 이것을 말하지 않는 법이라 한다.
무리들을 기르는 법은 마땅히 교수하는 것에 두 가지 일의 인연으로 마땅히 무리들을 거두어야 하니, 첫째는 법사섭(法事攝), 둘째는 의식섭(衣食攝)이다. 힘닿는 데까지 많든 적든 무리들을 거둬야 하며, 비구는 무리들을 기르는 데 주로 마땅히 방편을 써서 권속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며 많이 구하게 하지 마라.
024_0544_c_02L거두어서 좌선하며 경전을 읽으며 복을 닦게 해야 하니, 이 세 가지 일 가운데 마땅히 가르쳐 여러 가지 방편을 지어야 한다. 첫째는 많은 법을 구하는 것을 가르친다. 둘째는 버리지 말라고 가르친다. 셋째는 부지런히 방편을 지어서 수습하여 배울 것을 가르친다. 또 마땅히 그 무리들을 관찰해야 하니, ‘많이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가, 많이 말하는 것을 탐착하는가, 많이 말하는 가운데 힘써 방편을 짓지 않는가, 많이 자는 것을 즐기지 않는가, 자는 것에 탐착하는가, 잠자는 가운데 열심히 잘 수 있는 일을 구하지 않는가’ 등이다.
또 문도들을 관찰해야 하니, ‘재가를 많이 애락하고 있지 않는가, 재가를 탐착하지 않는가, 열심히 방편을 구하여 많은 재가의 연을 짓지 않는가’ 등이다. 또한 문도들을 관찰해야 하니, ‘많은 희롱과 환락을 모으고 쌓는 것을 즐기지 않는가, 희롱하는 것에 대하여 탐착하지 않는가. 또 열심히 방편하여 희롱하는 인연을 짓지 않는가’ 등이다.
또 마땅히 문도들을 관찰해야 하니, ‘문도 가운데 누가 여법하게 행하고 누가 여법하지 않게 행하는가’ 등이다. 만약 여법한 자이면 마땅히 옷과 음식을 더해주고 내지 법의 뜻을 자주 교수하여야 한다. 만약 여법하지 않은 이면 마땅히 말하여 떠나게 해야 한다. 나중에 벗어나 후회하여 마음을 고치면 다시 무리 속에 있는 것을 허락하며, 옷과 음식을 공급하고 그 법의 뜻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무리들을 기르는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비구 대중은 주로 대중의 법에 들어가면 마땅히 용모를 다듬고 복장을 정리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직시하여 겸손히 말하고 몸을 아래로 하여 상대방을 공경하여야 한다. 위의가 가지런하고 모든 감관이 적정하여 보는 사람이 혐오함이 없으면 승가의 법에 들어가 마땅히 이와 같이 덕행을 닦아야 한다. 대중[衆]이란 사중(四衆)이다. 사중 가운데 여법중(如法衆), 불여법중(不如法衆) 그리고 자기중(自己衆)이 있으면, 자기의 소행과 같이하여 대중법에 들어가 모두 마땅히 문도들을 가르쳐, 이와 같이 하여 대중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대중에 들어가는 법이라고 한다.
024_0545_a_02L비구가 중주법(衆主法)을 지을 때는 대중 속에 있으면서 마땅히 관찰해야 하니, ‘이 대중은 좌선ㆍ경행ㆍ묵념사유ㆍ언사왕반(言辭往返)ㆍ경의 뜻을 논설하는 데 어떠한 법을 즐기는가’ 등이다. 만일 언사논설을 즐기는 자는 어떤 경전을 익히느냐에 따라서 함께 익힌 것을 논하며 그것을 위반하고 거역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중주(衆主)의 법이라 한다.
대중 가운데 상좌는 때때로 사람을 관찰해야 하니, ‘마땅히 어떤 법을 즐기는가. 시론(施論)을 즐기는가. 지계론(持戒論)을 즐기는가, 생천론을 즐기는가, 열반론을 즐기는가’ 등이다. 대중이 어떤 논을 즐기느냐에 따라서 마땅히 그를 위하여 그것을 설하여야 한다. 또 마땅히 관해야 하니, ‘대중은 공(空)ㆍ무상(無常)ㆍ무원법(無願法) 가운데 마땅히 어떤 법을 즐기는가’ 등이다. 대중에게 마땅한 것을 따라서 그를 위하여 설하여야 한다. 이것을 무리들 가운데 법을 설하는 상좌의 법이라 이름한다.
그때 세존께서 고요한 방 가운데 계시면서, ‘마땅히 비구를 위하여 계를 제정하리라’ 하셨다. 인연은 위의 글에서 설한 바와 같다. 다섯 가지의 설계(說戒) 또한 앞의 문장과 같다. 비구가 법랍이 5년이 되면 요컨대 바라제목차를 암송하여 이익이 있게 한다. 비구에게 계율을 설한 인연은 위의 글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1인이 포살하는 경우, 2인 3인이 포살하는 경우는 위의 글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포살 중에 짓는 일을 모두 갈마라 이름하니, 위의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안거를 받는 법은 또한 위의 글의 안거법과 같다. 객(客) 비구가 먼저 오래 머문 비구에게 말하였을 경우 만일 어려운 인연이 있어 안거를 허락하지 않으면, 다시 다른 곳에 찾기를 구해야 하며 억지를 부려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일 안거할 곳이 좋아도 단월의 허락하는 말이 없다면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세워서 안거법을 맺어야 한다.
비구는 하안거의 곳에서 승가람이나 별파연(別波演) 가운데의 나무 아래에 마땅히 먼저 가서 그것을 관해야 하니, ‘부구가 있는가. 그 주처에 소리가 시끄러워서 번거롭지는 않은가. 사자ㆍ호랑이ㆍ이리ㆍ도적ㆍ모기ㆍ벌레ㆍ물 등의 어려움은 없는가. 여기에서 안온한 안거를 마칠 수 있는가. 석굴에 돌 울타리가 있는가’ 등이다. 만일 있을 경우 그 가운데 초목이 있다면 모두 마땅히 처리하여 그것을 제거하여야 하며, 이 석굴 안을 모두 마땅히 고치고 수리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4_0545_b_02L비구는 하안거를 할 때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야 하니, ‘이곳의 안거 음식은 뜻과 같은가. 만일 병환이 들었을 때 병에 따라서 의술을 얻을 수 있는가’ 등이다. 다시 함께 머무르는 자를 관해야 하니, ‘서로 뜻을 맞춰 좋은 일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함께 머무는 자가 믿을 만한가. 함께 머물며 안온하게 도를 행할 수 있는가. 만일 행주좌와 함께 행할 때 내가 머무르는 데 어렵게 하지는 않는가. 만일 병이 들었을 때 버리고 가지 않는가’ 등이다. 이와 같이 헤아려서 대중이 화합하고서 그런 연후에 안거하여야 한다.
또 대중들을 관찰해야 하니, ‘하안거를 할 때 이 무리들 가운데 투쟁하는 자는 없는가. 나에게 나쁜 마음을 내어 거친 나쁜 말을 하지는 않는가. 능히 내가 머무는 데 어렵게 하지는 않는가’ 등이다. 또 다시 사유해야 하니, ‘세존께서 요컨대 하안거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의지해야 한다고 설하셨는데, 이 대중은 법을 알아 비니(毘尼)를 이해하고 마득륵가장(摩得勒伽藏)을 이해하는가. 내가 하안거 중에 해탈함이 없더라도 과오를 범한 바가 있어 이것을 없애고자 할 때 진전되는 것이 있는가’ 등이다. 또 사유해야 하니, ‘또한 세존이 설한 것처럼 어리석어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몸과 수명이 다하도록 의지함을 떠나서는 안 된다’ 등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사유해야 하니, ‘대중 가운데에 부모가 자식을 가르쳐 훈계하듯 하는 스님이 있는가. 명성과 덕망이 높아 재가와 출가인의 존중을 받는 자가 있는가’ 등이다. 만약 내가 죄를 범하면 그에게 가서 크게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면서 참회를 구해야 하고, 그 상좌는 연민의 마음으로 때때로 가르쳐 나에게 게으름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024_0545_c_02L‘세존께서 승가를 무너뜨리는 것은 큰 악이고 딱딱하고 껄끄러우며 쓰고 매워 즐거운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설하셨으니, 여기에 머문 대중 가운데에서는 싸우고 하안거 중에 승가를 무너뜨리는 인연의 일을 일으키지는 않는가. 내가 머무는 데 어렵게 하지 않는가’라고 헤아려야 한다. 이와 같이 어려움이 없는지 헤아리고 나서 그 다음에 안거를 받는다. 이것을 안거를 받고자 할 때의 주량법(籌量法)이라 한다.
모든 비구들이 안거법을 받는 데, 먼저 안거법을 받고 난 연후에 머물 방과 부구(敷具)를 받으라. 방은 바르고 수리하며 앉는 평상은 다 하나하나 손질해야 한다. 하안거 중에 인연이 없으면 다른 행을 할 수 없다. 인연이 있거나 불(佛)ㆍ법(法)ㆍ승(僧)이나 병 때문이면 7일법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곳에 안거한다. 음식이나 이익을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발우나 가사나 약이나 침이나 담요 때문이라면 7일법을 받아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때 발주왕자(鉢住王子)가 불법 중에 출가하였는데, 그 부왕이 탑을 만들어서 크게 공양하고 바로 신하를 보내 그 아들을 불러오게 하니, 아들이 와서 함께 탑에 공양하였다. 하안거 중에는 외출할 수 없기에 이러한 인연을 세존께 아뢰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탑을 위한 것이면 모든 비구들이 7일법을 받는 것을 허락한다. 7일이 채워지면 이곳에 돌아와 안거하라.”
모든 비구들이 하안거법으로 7일을 받을 때 7일을 채워야지 이것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7일째 밤에 안거하는 장소에 이르지 않으면 비구의 하안거법은 상실된다. 앞의 가사나 발우나 침, 이불의 인연은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 자는 이해하게 하고, 얻지 못한 자는 얻게 하며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닫게 해야 한다. 이것을 안거를 받는 법이라고 한다.
안거하는 대중 가운데 상좌는 큰 경계 표시 모습이 있는 곳을 물어야 하고, 또 가사를 잃어도 되는 곳과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을 물어야 한다. 또한 안거 장소를 깨끗이 했는지 물어야 하고, 포살(布薩)을 행하는 장소를 물어야 한다. 계를 설하고 법을 설하여 설법인(說法人)이나 주원인(呪願人)을 뽑거나 영사인(營事人)을 뽑거나 영사인을 위로하거나 행주인(行籌人)을 뽑거나 승정인(僧淨人)을 뽑아야 한다.
024_0546_a_02L모든 비구들이 경계 밖으로 벗어나되 7일, 15일 내지 한 달 동안이니, 백이갈마를 한다. 어린 비구를 가르치기 위해선 스스로 가르쳐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말하도록 권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은 모두 하안거 중에 상좌가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방을 돌아다니며 부구(敷具)를 누가 법답게 사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봐야 한다. 법답게 사용한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어 이롭고 기쁘게 하며 그 행을 찬탄한다. 법답지 않게 사용한 자에게는 충고하여 기억하게 하고, ‘장로여, 법답게 사용해야 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법답지 않게 사용한 자에게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여래가 제정한 계에 이러한 것이 있으니, 잘 기억해야 한다.
안거 중의 상좌법을 밝힌다. 중식(中食) 할 때, 죽을 먹을 때, 단 장(獎)을 마실 때는 대중 가운데 상좌는 ‘허락한 때가 이미 지났으니 나머지도 허락한 때에 먹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해야 한다. 만일 대중 가운데 상좌가 이렇게 행하면 스님들의 부모이거나 스님들이 스승이라 한다. 이것을 안거 중의 상좌법이라 한다.
계를 푸는 것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하나는 홍수로 표시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져 장소를 알 수 없는 것이고, 둘은 도적의 난으로 모든 비구들이 다 경계 밖으로 나간 것이다. 이러한 두 인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풀고 맺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치나의를 받는 것이고, 네 번째는 안거를 마치고 나서 부구(敷具)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자자 뒤의 인연이다.
024_0546_b_02L대중에는 4중(衆)이 있으니 즉, 비구중ㆍ비구니중ㆍ우바새중ㆍ우바이중이다. 또한 4중승(衆僧)이 있으니, 범부 같은 스님ㆍ성인 같은 스님 부끄러워하는 스님ㆍ부끄러워하지 않는 스님이 있다. 비구 승가란 하나나 둘 혹은 셋으로 이루어진 승가가 아니고, 네 명 내지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승가를 말한다.
4인승가는 백일(白一)이나 백이(白二)갈마는 행하나 자자는 행할 수 없고, 구족계를 줄 수 없고 아부가나(阿浮呵那)를 행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의 일을 다 할 수 있다. 5인승가는 자자와 포살을 할 수 있고, 변두리 지방에 율사가 있으면 구족계를 줄 수 있으나 중앙 지방에서는 할 수 없다. 중앙이나 변두리 모두 아부가나는 행할 수 없다.
20인승가는 모든 법의 일을 다 지으며, 10인승가는 아부가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의 일을 다 지을 수 있다. 네 사람이 법의 일을 행할 때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법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니, 법답지 않게 법의 일을 짓는다고 한다. 다섯 사람이 법의 일을 행하는 경우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법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법답지 않게 법의 일을 짓는다고 한다. 열 사람이 법사(法事)를 행하는 곳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법의 일이 성립되지 않으니, 법답지 않게 법의 일을 짓는다고 한다. 스무 명의 사람이 법의 일을 행하는 곳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법의 일이 이루어 지지 않으니, 법답지 않게 법의 일을 짓는다고 한다. 이것을 승가의 일이라 한다.
승가에 들어오는 법은 용모를 단정히 함에서부터 마침내 사람이 착한 마음을 내는 것이니, 위의 문장에서 설함과 같다. 승가 중에 들어갈 때 마음을쓰는 법은 비로 마당을 쓰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보지 않고 두루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승가에 들어가야 하니, 이것을 승가에 들어가는 법이라 한다.
승가 중에 들어가 앉는 법을 밝힌다. 승가 가운데에 들어갈 때는 상좌를 공경해야 한다. 스스로 앉을 자리를 알아야 하나, 다시 느리거나 제멋대로 하면 대개 앉을 자리를 얻을 수 없다. 승가 가운데에서 법답지 않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충고하려 할 때, 승가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우면 잘 알아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한다.
024_0546_c_02L비구가 승가 가운데에 들어올 때는 승가가 법의 일을 짓는 것이 법다운지 법답지 않은지, 율과 상응하는지 상응하지 않는지를 잘 헤아려야 한다. 상응하면 좋지만, 상응하지 않을 경우 마음이 일치되고 법답게 율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충고한다. 만약 없으면 조용히 앉아 있는다. 이것을 승가 중에 들어오는 일이라 한다.
스님이 모여 있을 때 대중 가운데 상좌는 중좌(衆座)와 하좌(下座)가 위의를 갖추어 앉고 일어남이 여법한지, 맨몸이 드러나지 않았는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 앉음이 법답지 않고 맨몸이 드러났으면 상좌는 손가락을 튕겨 재빨리 중좌와 하좌가 알게 해야 하나, 아직도 알지 못하면 사람을 보내 말해주어야 한다. 승가의 일은 이와 같이 상좌가 모두 처리해야 한다.
중좌 비구가 대중 가운데에 앉을 때는 상좌와 하좌가 앉은 것이 법다운지, 의복이 몸을 잘 가리고 있는지 잘 살펴야만 한다. 법답지 않으면 손가락을 튕겨 빨리 알게 해야 하나, 아직도 알지 못했으면 법을 아는 사람을 보내 ‘상좌시여, 스스로 때를 아십시오’라고 말하고, 하좌에게는 ‘장로(長老)여, 스스로 때를 알라’고 말해야 한다. 이때에 상좌 쪽에서는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해야 한다. 이것을 중좌법이라 한다.
하좌가 대중 가운데에 앉는 법을 밝힌다. 대중들이 앉아서 선정에 들면 상좌와 중좌가 앉아 있는 것과 의복이 법다운지를 잘 보아야 한다. 법답지 않으면 손가락을 튕겨 빨리 알게 해야 하나, 만약 알지 못하면 법을 아는 사람을 보내 ‘대덕(大德)이시여, 스스로 때를 아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상좌와 중좌는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해야 한다. 하좌는 승가에 물을 얻어 땅에 뿌리고 청소하여 깨끗이 하고 스님의 욕실(浴室)에 불을 때야만 한다. 부처님께서는 하좌가 승가 가운데에서 해야 할 법을 제정하셨으니, 다 실천해야 한다. 이것을 하좌법이라 한다.
정심계(淨心戒)란 선계(禪戒)를 말한다. 마음을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아 선정과 합하기에 심계(心戒)를 얻는다고 한다. 정혜계(淨慧戒)란, 이 지혜를 지녀 산란하지 않게 하여 4제(諦)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믿는 마음으로 계를 지니면 마음을 내어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만약 미세한 계를 범하더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어야 하니, 중계(重戒)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이러한 지계(持戒)를 행하는 것은 범행이 청정한 것이고 수지한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도 청정한 것이다. 모두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닦아 선행(善行)을 얻고 내지 신(身)ㆍ구(口)ㆍ의(意)를 제어하여 10악을 짓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행해야 할 법이라 한다.
그때 세존께서 비사리에 계셨는데 모든 이거자(離車子) 등이 식사를 마련하여 스님을 청하였다. 갖가지 맛있는 음식이 있었는데 스님이 지나치게 많이 먹으니, 모두 걱정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기바(耆婆)는 의왕(醫王)이니, 병이 난 곳을 관하여 약을 쓰되, ‘만일 욕실을 얻는다면 이 병은 차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기환정사(祇桓精舍) 가운데 목욕실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써 비구가 세존께 나아가 여쭈니,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욕실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다.
024_0547_b_02L욕실을 짓는 법은 마땅히 진흙을 개어서 만들되, 만일 흙을 구할 수 없는 곳이라면 나무를 사용하여 그것을 만들고 마땅히 진흙을 발라야 한다. 이 목욕실의 한쪽 벽의 아래에는 불을 때서 덥힐 수 있게 하고, 다른 벽 아래에는 상을 펴서 씻고 목욕할 수 있게 한다. 욕실에 들어가 씻는 법은, 상좌에 따라 더운 것을 필요로 하면 문을 닫고 차가운 것을 필요로 하면 마땅히 열어야 한다. 하좌는 상좌에게 거역해서는 안 된다. 욕실에 들어가 씻을 때는 상좌는 마땅히 먼저 들어가 좋은 평상을 취하여 씻고 목욕하여야 한다. 이 욕실에 들어가 씻는 법은 여섯 무리의 비구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제정하시었다.
얼마 후 모든 비구들이 모두 벌거벗은 몸으로 욕실에 들어가 함께 씻으며 각각 서로 보며 모두 부끄러워하였다. 이러한 일이 퍼져 마침내 세존께 전해지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벗은 몸으로 함께 욕실에 들어가 씻을 수 없다.” 또 서로 씻겨줄 수 없으니, 만일 한 사람은 옷이 있고 한 사람은 옷이 없을 경우 옷이 있는 자는 옷이 없는 자에게 물을 뿌리고 또한 그를 씻을 수 있으며, 옷이 없는 자는 물을 뿌리거나 다른 이를 씻을 수 없다. 만일 욕실이 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욕실에서 연못물을 뿌리는 것을 허락하고 또한 우물을 팔 수 있다. 욕실에 들어가 씻는 법은 이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욕실에 들어가 씻을 경우 승가의 상좌는 욕실이 몹시 더우면 조금 문을 열어 잠시 차갑게 하며, 또 다시 욕실에 들어가는 뭇 스님들을 위하여 씻는 인연을 설하여야 한다. 씻는 것은 몸을 장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이 하기 위하여 씻는 것이다. 마땅히 그들을 위하여 몸을 싫어하고 걱정하도록 법을 설하라. 다시 그들을 위하여 마음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법을 설하라. 마땅히 자비스러운 마음을 일으켜 욕심을 적게 하고 족함을 알게 하는 법을 설해야 한다. 또 다시 법을 설하되, 씻고 목욕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몸에 풍냉병을 없애서 안온하게 도를 행하게 할 수 있으므로 씻는다. 이것을 욕실 가운데서 상좌가 지어야 할 법의 용(用)이라고 이름한다.
024_0547_c_02L함께 행하는 제자와 함께 묵는 제자는 화상 아사리를 받들어 섬겨야 하며, 화상 아사리가 제자를 간직하는 법은 모두 위의 문장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4_0547_c_02L共行弟子共宿弟子奉事和尚阿闍梨。和尚阿闍梨畜弟子法。此皆如上文所說。
사미의 법을 밝힌다. 사미는 풀을 뽑고 깨끗한 땅을 만들어야 하며 양지(楊枝)를 취하고 꽃과 과일을 취할 수 있으며, 취하여 가지고 와서는 화상에게 아뢰야 한다. 화상 아사리는 이를 받아서 사용한다. 사미의 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며, 마땅히 잘 머물러 스승을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법 가운데 게으르거나 방자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스스로 몸과 입을 조심하여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를 존경하여야 한다.
늘 계를 지니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며, 떠들며 노는 것을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마땅히 자신의 재주와 힘을 믿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가볍게 굴거나 조급해서도 안 되니,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정해진 바 없이 어지러운 말을 말해서는 안 되니, 말을 할 때는 이치에 맞아야 한다. 항상 스스로 청정한 법과 청정하지 않은 법을 알아야 하며, 항상 화상 아사리를 따라 다니며 경법(經法)을 독송하여야 한다. 모든 스님들 가운데서 지어야 할 것은 모두 위반하거나 거역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널리 알아야 한다.
도반과 함께 갈 때 앞에 가는 비구의 법을 밝힌다. 앞에 있는 이는 마땅히 뒤에 오는 이를 돌아보고, 입은 옷이 정리되어 있는지 어긋남이 없는지 이그러졌는지 아닌지, 마음을 잘 거두었는지, 위의를 갖추지 않고 가는지, 만일 다른 집에 들어가 미묘한 색에 대해 염심(染心)을 일으키지 않는지, 만일 귀하고 진기한 보물을 보고 훔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비구가 있으면 승가는 비구를 단월의 주변에 보내어 참회하게 한다. 심부름을 하는 비구는 단월의 집에 이르러 맨 앞에 들어가서 단월에게 말을 하되, ‘이 비구는 승가 대중이 이미 벌을 내려 마쳤습니다. 이 비구의 참회를 받아주십시오’라고 한다. 이것을 앞에 가는 비구의 법이라 한다.
024_0548_a_02L앞에 간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승가의 명을 받고 가서 재가인의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가 말을 하기에 이름하여 앞에 가는 것이라 한다. 또 다시 같은 길을 올 때도 승가는 이 비구로 하여금 앞에 있으면서 인도하여 단월이 있는 곳에 이르게 하기에 앞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뒤에 가는 비구는 마땅히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 첫째, 갈 때 앞에 가서는 안 된다. 둘째, 뒤에 멀리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차례대로 뒤에 간다. 셋째, 앞에 있는 비구가 만일 화상 아사리 혹은 상좌라면 그 말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만일 길을 가는 것, 경전을 암송하는 것, 닦는 업을 물으면 마땅히 진실되게 답하며 감추거나 숨겨서는 안 되지만, 선을 얻고 성스런 과(果)를 얻은 것은 제외한다. 만일 앞에서 설한 선법(善法)이 뛰어나면, 마땅히 기뻐하고 찬탄하여야 한다. 넷째, 이해하지 못하고 잊어 잘못된 곳이 있다면 마땅히 이곳에서 설한 것이 부처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나니, 옳은 것이 아닌 곳을 말하려면 가려지고 굽은 곳에서 한다. 다섯째, 법답게 재물을 얻고, 발우에 집어넣어 얻은 것은 모두 취하여 처리한다. 이것을 나중에 가는 비구의 다섯 가지 법이라고 한다.
만일 비구가 재가인의 스승이 되어 교화하여 복전을 지을 경우, 다섯 가지 일은 할 수 없다. 첫째는 단월의 집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된다. 둘째로는 마음을 계박하여 그 이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셋째로는 단월을 위하여 모두 설법하여 그 이익과 기쁨을 보이고 가르쳐서는 안 되며, 따로이 나머지 법 닦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나머지 법이란 보시와 지계와 8재(齋)를 받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 그것을 설한다. 넷째로는 재가인과 즐겁게 떠들며 함께 서로 오락을 즐겨서는 안 된다. 다섯째로는 마음을 계박하여 늘 서로 보고자 해서는 안 된다.
024_0548_b_02L다시 다섯 가지 일을 할 수 없다. 첫째는 친하지 않은 단월의 집에는 억지로 옛 정을 만들어 갈 수 없다. 둘째로는 그 형세를 구하여 단월의 집안 가업을 경영할 수 없다. 셋째로는 사사로이 단월과 함께 말해서는 안 된다. 넷째로는 단월에게 좋은 때, 좋은 날,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다섯째로는 친한 단월의 집에 있을 경우, 구하는 바를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
비구는 마땅히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단월에게 존중과 공경을 받게 된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 친하지 않는 집에 가고 오고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스스로 형세를 구하기 위해 단월의 가업을 경영해서는 안 된다. 셋째, 단월과 함께 사사로이 이야기해서 다른 집으로 하여금 의심을 내게 해서는 안 된다. 넷째, 단월에게 귀신에게 제사지내기 좋은 때, 좋은 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다섯째, 도가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비구가 단월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 첫째는 들어갈 때 적게 말한다. 둘째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단속한다. 셋째로는 마음을 거두어 낮추고 공손히 행동한다. 넷째로는 모든 감관[根]을 거두어 잘 다스린다. 다섯째로는 가르치는 곳에서는 위의를 갖추고 다른 이에게 선심(善心)을 낸다. 이것을 단월의 집에 들어가는 다섯 가지 법의 용(用)이라 하는 것이다.
비구가 아홉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단월의 마음을 안다면 앉아서 법을 설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비구가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갈 때 단월이 예배를 하더라도 진실로 공경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안다면 앉아서는 안 된다. 둘째는 갔을 때 환영하여 맞이할지라도 마음이 은근하고 두텁지 않으면 앉아서는 안 된다. 셋째는 비키어 앉게 하더라도 마음이 진실하지 않는 것을 안다면 앉아서는 안 된다. 넷째는 청하여 앉게 하더라도 공경하지 않는 곳에서는 또한 앉아서는 안 된다. 다섯째는 법다운 말과 법답지 않은 말을 설할 경우 마음으로 채록(採錄)하지 않으면 앉아서는 안 된다. 여섯째는 덕이 있음을 들어도 그것을 믿고 받들지 않는다면 또한 앉아서는 안 된다. 일곱째는 만일 찾는 것이 매우 많은 것을 알고도 조금 준다면 또한 앉아서는 안 된다. 여덟째로는 그 집에 이를 때 설령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베풀어 주지 않고 거친 음식을 주면 또한 앉아서는 안 된다. 아홉째로는 필요한 것을 공급할지라도 시장에서 흥정하는 법처럼 해서 준다면 또한 앉아서는 안 된다.
024_0548_c_02L또한 아홉 가지 일이 있으니, 단월의 마음을 안다면 마땅히 앉아서 설법하여야 한다. 첫째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안다. 둘째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을 안다. 셋째로는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청하여 들이는 것을 안다. 넷째로는 두터운 마음이 있으므로 높은 곳에 자리를 펴는 것을 안다. 다섯째로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법다운 말과 법답지 않은 말 모두를 거두어 수용하는 것을 안다. 여섯째로는 그 덕을 듣고서 믿음을 내는 것을 안다. 일곱째로는 조금 얻기도 어려운데 다시 많이 얻음을 안다. 여덟째로는 먼저 거친 음식이 있는데, 다시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안다. 아홉째로는 바라는 바가 있어 좋은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을 안다. 이 아홉 가지 인연으로써 단월의 마음을 안다면 마땅히 앉아서 단월을 위하여 설법하여야 한다.
비구가 만일 재가인의 집에 들어갈 때는 달빛의 비유처럼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 만일 마을에 들어가 행할 경우, 마땅히 낮추고 공손하게 부끄러움을 알고 행하여야 하며 거만한 마음으로 방일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지러이 행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거두는 법은, 비유하면 사람이 발로 높은 산에 매달린 바위의 위험한 아주 좁은 부분을 밟고 있어 생각 생각마다 두려움이 일어나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것처럼, 또 어떤 사람이 매우 험한 곳에서 깊은 연못에 다다라 단지 두려운 마음만 생기지 다시 다른 생각을 할 여가가 없는 것처럼, 마을에 들어갈 때는 마음을 거두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비구들은 마음을 거두어 마을에 들어갈 때는 가섭이 마을에 들어갈 때 행한 것과 같이 하라.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너희들은 마을에 들어가 달과 같이 서행(徐行)을 하는가. 부끄러움이 있는가. 너희들은 스스로 잘 기억하여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행하는가. 높은 산, 깊은 연못의 비유와 같이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는가. 신ㆍ구ㆍ의를 지니는가. 방일한가. 너희들은 두터운 털을 가진 양이 가시덩굴에 들어가 달라붙음에 따라서 머무는 것과 같지 않는가. 세속의 이양에 끌려서 머무는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감옥이나 칼이나 쇠고랑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하는가. 그대들이 마을에 들어갈 때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를 그물에 걸린 사슴이 벗어나듯 하는가. 본래의 처소를 기억하여 생각하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러므로 비구가 마을에 들어갈 때는 위에서 설명하는 여러 가지 비유와 같이 마땅히 행하여야 한다.
024_0549_a_02L마을에 들어갈 때, 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색깔과 향기를 감소시키지 않고 맛을 즐기는 것처럼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집착하지 말라. 단지 그 선(善)을 위하여 마을에 간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만약 비구가 있어 마을에 들어가고자 할 때, 이와 같은 생각을 내어 ‘단월이 가진 것을 모두 나에게 베풀고 다른 이에게는 주지 말라. 나에게 많이 주고 적게 주지 말라. 좋은 것을 베풀고 나에게 나쁜 것을 주지 말라. 마음으로 공경하여 주고 공경하지 않고 주지 말라’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마을에 들어가면 구하는 것 여러 가지가 모두 원하는 것 같지는 않을 것이다. 구하는 모든 곳에서 물러서는 마음이 일어나, 시름과 근심과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즐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비구가 있어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고자 할 때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단월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나에게 베풀고 다른 이에게는 주지 말라. 나에게 많이 주고 적게 주지 말라. 좋은 것을 베풀고 나에게 나쁜 것을 주지 말라. 내지 공경하지 않고 주지 말라.’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 않고 마음에 들어갈 때 얻은 바의 많고 적음이나 좋고 나쁜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시름과 근심과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024_0549_b_02L 너희들은 부구(敷具)가 있거나 없거나 집에 얽매였거나 벗어났거나 홀로 앉아서 스스로 묶기를
누에가 고치에 있듯이 하여라.
024_0549_a_24L汝敷具有不, 家繫縛脫未, 猶座而自纏,
如蠶虫處繭。
그러므로 벌의 비유와 같이 마을에 들어갈 때 6진(塵)에 대하여 그 맛을 취하지 말라. 허공에 있는 손이 장애가 없는 것과 같이 촌락에 들어갈 때 마음에 장애가 없는 것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세존께서 설하여 모든 비구에게 알린 바와 같다. “너희들의 뜻에는 어떠한 행을 행하여야 비구가 단월의 집을 위해 스승이 되는가?”
세존께서 즉시 손을 공중에 움직이며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 손은 이제 공중에서 회전시켜도 걸림도 없고 묶임도 없다. 모든 비구가 세상에 나갈 때는 마음에 걸린 묶임이 없어야 하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재물을 구하려면 마음먹고 몸을 절제한 연후라야 얻을 수 있다. 만일 복을 얻고자 한다면 마음을 묶고 몸을 부지런히 하여야 과보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비구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마음을 평등하게 내어,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면 자신이 이익을 얻는 것과 같이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 이와 같은 비구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스승이 될 수 있다.
비구들이여, 가섭이 마을에 들어갈 때는 걸림이 없고 묶임도 없고 취함도 없어서 이익을 얻고자 하면 이익을 구했고 복을 얻고자 하면 복을 구했으며, 자기가 이익을 얻어 기쁜 것처럼 다른 이가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면 기뻐함이 그와 같았으니, 마치 손이 공중에서 움직이되 걸림도 없고 묶임도 없는 것과 같았느니라.”
만일 마을에 잘 들어가 이익이 적더라도 마음이 평등하면 범천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도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024_0549_b_22L若善入聚落, 衰利心平等, 同梵共入聚,
不生嫉妒心。
너희가 가까이 아는 집과 친구의 집을 구별하지 않는 것 이것을 스승이 행하는 법이라 이름한다.
024_0549_b_24L汝所親識舍, 無別親舊處,
是名師行法。
024_0549_c_02L
비구가 단월의 집에 들어가 행하는 법을 밝힌다. 즐겁게 떠들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믿고 교반해서도 안 된다. 경솔하거나 조급해서는 안 되며, 꺼리는 것 없이 어렵게 설해서도 안 된다. 뒤섞어 어지럽게 두서없이 말해서는 안 되며 멀리 앉았기 때문에 몸을 숙여 다른 사람과 말해서도 안 된다. 또 서로 자리를 좁혀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한 쪽으로 걸터앉아 위험하게 앉아서도 안 되며 크게 웃어서도 안 된다.
위의를 갖추었더라도 덕 있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앉아서는 안 된다. 허벅지를 포개어 앉아서도 안 되고 무릎을 포개고 앉아서도 안 되며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도 안 된다. 좌우 손을 만지작거려서도 안 되며 가만히 있지 않고 다리를 흔들며 앉아서도 안 되며 커다란 옹기 위에 앉아서도 안 된다. 비구니와 홀로 조용한 방안에 앉아서도 안 되며 여인과 홀로 방안에 앉아서도 안 된다. 낮은 자리에 앉아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위하여 설법해서는 안 된다. 비구는 마땅히 모든 이익이 쇠잔한 가운데서도 늘 인욕하여야 하니, 이것을 집안에 들어가는 비구의 좌법이라 이름한다.
집안에 들어갈 때의 상좌 비구법을 밝힌다. 상좌는 마땅히 때를 알고 한량을 알며, 자기의 몸을 알고 다른 대중을 알고 다른 사람의 덕행의 높고 낮음을 알아야 하며, 모든 비구들에게 위의를 가르치고, 재가인을 위하여 법답게 설해야 한다. 법을 듣도록 가르쳐야 하며 경을 독송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와 같이 널리 여러 가지 선법(善法)을 가르쳐야 하며, 주원(呪願)을 할 때에 이르면 주원을 해야 한다. 이것을 집안의 상좌의 법이라 이름한다.
024_0550_a_02L그때 세존께서는 사위국에 머무셨다. 교사라국(憍娑羅國)의 한 곳에 머물던 많은 비구들은 하안거를 하고자 하여 서로 논의하여 말했다. “우리들이 하안거 하는 동안 어떻게 해야 안온하고 안락하게 도를 행할 수 있을까?” 다시 서로 의논하여 말하였다. “안온하게 도를 행하고자 하면 함께 제한을 두되, 서로 말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리라. 필요하면 마땅히 손을 사용하여 모습을 지어 구해야 한다.”
하안거를 마치고 나서 모든 비구는 세존이 계신 곳에 이르러 예배하고 안부를 물었다. 부처님께서 보시고는 아시면서 물었다. “하안거 중에 안온하고 안락하게 도를 행했는가?” “안온하고 안락하게 도를 행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너희들은 제한을 두었느냐?” “서로 말하지 않는 제한을 두었습니다.”
승가가 모였을 때, 단월이 오면 설법하는 것이 능하지 못하고 능히 위로하는 답변도 하지 못하니, 단월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기를, ‘승가 대중은 어떤 인연으로 보고도 싫어하여 설하지도 않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퍼지니, 세존께서 그것을 들으시고는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승가 대중이 모였을 때 재가인이 온다면 상좌는 마땅히 설법하여 위로해야 한다. 상좌가 만약 능하지 않다면 마땅히 두 번째 상좌에게 말해야 하니,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죄를 얻는다. 만약 두 번째 상좌에게 말했는데, 그가 말을 수용하지 않으면 역시 스스로 죄를 얻는다.”
만약 화상 아사리가 범함이 있어 승가 대중이 갈마를 행하여 쫓아내면 갈마를 이룬 후에는 제자는 곧 의지를 잃는다. 만일 제자가 죄를 범하여 승가 대중이 갈마를 이루면 또한 의지를 잃는다. 만약 제자가 화상 아사리에게 이르길, “지금부터 나는 주변에서 머물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마음을 결정하면, 그때 곧 의지를 잃는다. 날이 밝기 전에 화상 아사리와 따로 하면 역시 의지를 잃는다.
만약 비구가 승가 가운데에서 범한 일이 있으면 승가는 적합한 벌을 준다. 만약 이 비구가 빌기를 하루에서 후일에 이르면 상좌는 마땅히 가책(呵責)갈마ㆍ구출(驅出)갈마ㆍ발기선심(發起善心)갈마ㆍ실시현(實示現)갈마ㆍ복발(覆鉢)갈마ㆍ불어(不語)갈마를 허락해야 한다. 이와 같이 갈마 참회한 후에 승가 대중은 사(捨)갈마를 한다. 이것을 방사법(放捨法)이라 한다.
경행처에서 경행하고 다른 곳에서 경행해서는 안 된다. 좌선하는 곳에서 좌선하고 다른 곳에서는 안 되고, 행할 때는 피로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되고, 도중에 산란심을 내면서 행해서는 안 된다. 만약 경행처가 평평하지 않으면 그것을 평평하게 해야 하나니, 높거나 낮게 해서는 안 된다.
그때 세존이 바라기국(波羅祇國)에 계시면서 시자 나가바라(那伽波羅)에게 이르시길, “내 목욕 옷을 가지고 오라” 하시고는 얻은 뒤에 옷을 입으시고 경행하셨다. 부처님께서 경행하실 때 제석이 금으로 된 절을 화작(化作)하고는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세존에게 아뢰기를, “이 금으로 지은 절을 받으시고 경행하소서”라고 하였다.
024_0550_c_02L한 때 부처님께서 비사리에 계시면서 경행하셨다. 여섯 무리의 비구가 가죽신을 신고 부처님을 따라서 경행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의 법은 화상 아사리 앞에서 가죽신을 신거나 경행처에서 경행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내 앞에서 가죽신을 신고 내 경행처에서 경행하는가” 하셨다. 이와 같이 널리 알아야 한다.
또 어느 때 비구니의 머무는 곳에서 하좌 비구니가 상좌 비구니 앞에서 경행하였으니, 교만이 스스로 커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여섯 무리 비구니는 여러 하좌 비구니가 상좌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배워 일부러 상좌 앞에 와서 경행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서 세존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하좌 비구니가 상좌 앞에서 경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상좌 비구니의 경행처에서 하좌 비구니가 경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024_0551_a_02L모든 비구가 나중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노지에 불을 피워 스스로 따뜻하게 해도 앞이 따뜻하면 뒤가 춥고 뒤가 따뜻하면 앞이 추워 능히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방 가운데 연기가 나지 않게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는 것을 허락하시었다.
모든 비구가 주처하는 방 앞 길 주위가 곳곳이 소변으로 더럽혀져 땅에서 냄새가나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모든 비구는 절 안에서 소변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땅히 한 가려지고 굽은 곳에서 와병이나 나무통을 땅에 묻고서 거기에다 소변을 보아야 한다. 소변을 본 뒤에는 물건으로 윗부분을 닫아 냄새가 나지 않게 하라.”
모든 비구가 사용하는 발우가 갈라지고 부서져 갈라지고 부서진 부분에 음식물이 끼어 냄새가 나서 사용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훈발로(熏鉢爐)를 만드는 것을 허락하시었다. “혹은 마자 혹은 호마자를 찧어 부셔 발우를 바르는데 사용한다. 화로 위에 발우를 중간에 놓아 그을린다. 이 화로에서 발우가 다 그을리면, 잘 간직하여 비를 맞게하지 말아라.”
만일 비구가 신통력을 사용하여 공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계를 받고자 할 경우, 스승과 승가 대중이 땅에 있으면 계를 받을 수 없다. 만일 스승이 공중에 있고 계를 받는 자와 승가 대중이 땅에 있으면 계를 받을 수 없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승가 대중이 모두 공중에 있을 경우 또한 계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중에는 경계를 결정할 만한 제한(齊限)이 없기 때문이다.
024_0551_b_02L만일 비구가 밤중에 3의를 어깨에 걸치고 신통으로 위로 올라 다른 곳을 향하여 가면 옷을 잃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옷이 땅에 있으면서 비구가 신통으로 공중에 있을 경우 날이 밝기 전에 도로 내려와 옷이 있는 땅을 밟으면 옷을 잃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날이 밝아서 내려와 옷이 있는 곳을 밟지 않으면 옷을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은 경계의 밖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구가 신통을 이용하여 공중에서 물을 마시고자 하니, 부처님께서 그것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셨다. 비록 물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어떻게 마시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만일 옷을 가지고 물에 들어간다면, 물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고, 만일 언덕 위에 벗어놓으면 또한 옷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물을 구하려고 할 때 한쪽 다리를 물에 넣고 한쪽 다리를 언덕위에 두고 물을 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을 공중에 있는 법이라 한다.
기운[氣]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트림, 둘째는 방귀이다. 내보낼 때는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입을 벌려 내보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사람 없는 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입을 벌리고 내보내라. 만약 방귀가 나오려고 할 때는 대중 속에 내보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방편을 만들어 밖으로 나와 사람 없는 곳에서 뀌고, 그런 후에 대중 속으로 들어와야 하니, 대중에게 혐오스럽고 더럽고 천박스러움을 주지 말라.
탑 가운데 들어갈 때 방귀를 뀌어서는 안 되며, 탑사 가운데나 탑을 놓은 나무 아래나 대중 가운데 모두 기운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 스승 앞에서 대덕 상좌의 앞에서 또한 방귀를 뀌어서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만약 배속에 병이 있어 급한 자는 마땅히 밖으로 나가고 사람으로 하여 더럽고 천하다는 마음을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024_0551_c_02L그때 세존께서 왕사성에 계시었다. 바라문 종성의 한 비구가 있었는데 깨끗하지 않은 것을 매우 싫어했다. 뒷간에 있을 때 산대와 풀로서 항문을 닦았는데 다 닦기도 전에 항문이 다쳐 안색이 좋지 않으니, 여러 비구가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안색이 초췌한가. 어떤 걱정이 있는가?”
“나는 뒷간에서 일을 볼 때 이곳이 깨끗하지 않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산대를 사용하여 거듭 닦아 스스로 몸을 상하게 했다. 그러한 까닭에 즐겁지 않다.” 모든 비구가 앞의 이러한 인연을 낱낱이 세존께 아뢰니, 부처님께서 이 비구를 불러서 물으셨다. “네가 실로 그러했느냐?” “실로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오히려 스스로 그 몸을 싫어하는데 하물며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부처님께서 갖가지로 이 비구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마땅히 스스로 몸을 옹호하여야 하니, 만일 변을 보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힘을 써서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서서히 점차적으로 내어야 한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먼저 갈대와 풀을 쥐고는 문 앞에서 이르러 세 번 손가락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어 사람이나 비인(非人)에게 알도록 해야 한다. 문 앞에 옷을 두는 곳에 옷을 벗어 위에 둔다. 만일 하늘에서 비가 들이쳐 옷을 둘 곳이 없으면 옷을 가지고 스스로 몸에 잘 두른다. 문일 열어 뒷간의 내부를 살펴 독충이 있는가 없는가 보아야 한다. 살핀 뒤에 변을 보고자 할 때는 마땅히 천천히 옷을 추켜올리고 갑자기 옷을 추켜올려 몸을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앉고 일어서는 법은 측면에 기대서는 안 되고 가운데 앉아야 하며 뒷간의 양쪽을 더렵혀서는 안 된다. 일어서고자 할 때는 옷을 차례로 천천히 내리며 갑자기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뒷간을 사용하는 법은 하나하나 삼마도(三摩兜)건도 가운데 자세히 밝혀져 있다.
모든 비구가 뒷간을 사용할 때에 앉고 일어서는 곳이 위험하니, 부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가고 오는 곳에 좋은 판을 두는 것을 허락하였다. “높거나 낮게 하여 평평하지 않게 하지 말라.”
024_0551_c_20L諸比丘上廁時。坐起處危疲寄。佛聞此已。聽行來處安好板。莫令高下不平。
024_0552_a_02L용변을 마치고 나서 산대를 사용하여 깨끗이 한다. 산대가 없을 경우 벽에 문질러서 깨끗하게 해서는 안 된다. 뒷간의 판 위에다 문질러서 깨끗이 하여서는 안 된다. 돌을 사용해서도 안 되며 푸른 풀을 사용하는 것도 안 된다. 모든 비구는 흙덩어리, 연한 나무껍질, 연한 나뭇잎, 기이한 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모두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나무ㆍ대나무ㆍ갈대로 된 산대이다.
도량법은 긴 것은 1걸수, 짧은 것은 네 손가락이다. 이미 사용한 것을 털어서는 안 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 것은 깨끗한 산대 속에 넣어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뒷간에서 산대를 사용하는 법이라고 한다. 존자 가섭유가 설하여 이르길, ‘돌을 사용하고 기와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담무덕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뒷간에는 두 곳이 있다. 첫째는 용변을 보는 곳, 둘째는 물을 사용하는 곳이다. 물을 사용하는 곳에서 앉고 일어서고 옷을 걷는 것은 일체 용변을 보는 곳과 다름이 없다. 뒷간 문 앞에는 깨끗한 물병을 놓아두어야 하며 또 하나의 작은 물병을 놓아두어야 한다. 만일 자신의 병이 있다면 마땅히 자기 것을 사용하여야 하고 만일 병이 없다면 뒷간 옆에 작은 물병을 사용해야 하며 승가의 큰 물병의 물을 사용하여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것을 뒷간의 물쓰는 법이라 한다.
양지를 씹는 법은, 그때 모든 비구는 양지를 씹지 않아서 싫어할 정도로 입에서 냄새가 났다. 양지를 씹지 않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입에서 냄새가 나며, 둘째로 목구멍이 깨끗하지 않으며, 셋째로는 가래와 먹은 음식이 풍랭(風冷)하여 소화가 되지 않는다. 넷째로는 입맛이 없으며, 다섯째로는 사람의 눈 병이 늘어간다.
024_0552_b_02L또 여러 비구가 나무껍질로 양지를 만들었다. 또 여러 비구가 짧은 양지를 사용하여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근심거리를 만들자, 부처님께서 또한 계율로 제정하시어 허락하지 않으셨다. 양지의 법도는 긴 것은 일걸수, 짧은 것은 네 손가락 길이이다. 제자의 법은 마땅히 저녁ㆍ아침으로 양지를 가지고 화상 아사리께 가져다주어야 한다. 가섭유가 설하여 이르길, “양지를 씹는 법은 짧은 것을 네 손가락 길이로 하며 두 손가락 길이를 씹는다”고 하였다.
모든 비구가 식사를 한 뒤에 이쑤시개가 필요할 경우 동ㆍ철ㆍ뿔ㆍ대나무ㆍ갈대를 사용하되, 머리가 크고 뾰족하게 하여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를 쑤시고 나면 헹궈야 하니, 음식 찌꺼지를 남겨 다른 이로 하여금 혐오하게 하지 마라. 이것이 이를 쑤시는 법이라 이름한다.
여러 비구들이 귓속에 먼지와 때가 그득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동ㆍ철ㆍ뿔ㆍ대나무ㆍ갈대를 사용하여 만들어 귓속에 때를 없애는 것을 허락하시었다. 새벽에 일어나 양지를 씹은 뒤에 반드시 혀를 닦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동ㆍ철ㆍ나무ㆍ대나무ㆍ갈대를 사용하여 닦는 기구를 만들 수 있다고 허락하셨으니, 이것을 혀를 닦는 법이라 한다.
소변을 보는 법은, 느껴질 때는 반드시 일어나 가야 한다. 오랫동안 참고 머물러서는 안 되니, 이것을 소변을 보는 법이라 한다. 소변보는 장소에서는 나막신을 신어야 한다. 변을 볼 때는 마땅히 나막신을 신어야 하며 침을 뱉거나 소변으로 위를 더럽히지 말라. 비구가 머무는 곳에 늙거나 병들어서 멀리 뒷간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사로이 가려진 장소에 혹은 커다란 항아리나 나무통을 땅에 묻어 용변 보는 것을 만드는 것을 허락한다. 위를 잘 덮어서 사람들이 보게 하지 말라. 가고 오는 곳 위에 마땅히 좋은 판자를 두어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써 여기를 더럽히게 하지 말라.
무엇을 불행(不行)이라고 하는가. 구족계를 받는 것을 행이라 하고, 구족계를 받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고 한다.
024_0552_b_23L云何名爲不行。受具足者名之爲行。不受具足名爲不行。
024_0552_c_02L무엇을 이름하여 법을 행하는 사람이라 하는가. 구족계를 받는 것을 법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구족계를 받지 않는 것을 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행법(行法)이라고 한다. 또 행이란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행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은 비록 행하더라도 불행이라 이름한다.
무엇을 또한 행이라 이름하는가. 법은 법이라 하고 법이 아닌 것은 법이 아닌 것이라 하고 가벼운 것은 가볍다고 하며 무거운 것은 무겁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행(行)이라 한다. 법을 법이 아니라고 하며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하며 가벼운 것을 무겁다고 하며 무거운 것을 가볍다고 하는 것은 비행법(非行法)이라 한다.
또 다시 행이란 몸의 세 가지 업(業) 내지 열 가지 착한 업이 이것이다. 불행이란, 몸의 세 가지 업 내지 열 가지 착하지 않은 업이 이것이다. 또 행이란 8정도가 행이며 8사도(邪道)는 비행(非行)이다. 또 행이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행하되 수순하여 행하는 것을 행이라 하고 수순하지 않으면 비행(非行)이라 한다. 이것이 행(行)과 비행(非行)의 법이다. 저 세 가지 일을 줄여서 일체 장구(章句)라 하니, 이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