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4_1143_b_01L아비달마법온족론 제8권
024_1143_b_01L阿毘達磨法薀足論卷第八


존자 목건련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024_1143_b_02L尊者大目乾連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3. 무색품(無色品)
024_1143_b_04L無色品第十三

어느 때 박가범은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무색(無色)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어떤 필추가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을 초월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애며 갖가지 생각을 사유(思惟)하지 않고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1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끝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2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식무변처를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는[無所有] 데로 들어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3이라 하느니라.
또 어떤 필추가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완전히 갖추어 머무르나니, 이것을 제4라고 하느니라.”
024_1143_b_05L一時薄伽梵在室羅筏住逝多林給孤獨園爾時世尊告苾芻衆有四無何等爲四謂有苾芻超諸色想有對想不思惟種種想入無邊空無邊處具足住是名第一復有苾芻超一切種空無邊處入無邊識識無邊處具足住是名第二復有苾芻一切種識無邊處入無所有無所有處具足住是名第三復有苾芻超一切種無所有處入非想非非想處具足住是名第四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다’고 함에 있어서 어떤 것이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인가? 안식(眼識)과 상응하는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等想]과 현전의 평등한 생각[現前等想]과 분명하게 이해함[解了]과 형상을 취함[取像]과 이미 낸 생각[已想]과 앞으로 낼 생각[當想]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 속에는 오직 안식과 상응하는 생각, 평등한 생각, 나아가 이미 낸 생각,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고 한다.
024_1143_b_16L超諸色想者云何諸色想謂眼識相應想等想現前等想解了取像已想當想摠名色想有作是說與五識相應想等想乃至已想當想摠名色想今此義中唯眼識相應想等想乃至已想當想摠名色想
024_1143_c_02L이와 같은 빛깔에 대한 생각을 그때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모든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다’고 한다.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앤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인가? 이식(耳識) 등의 네 가지 식[四識]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에(瞋恚)와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 속에는 이식 등 네 가지 식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나아가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통틀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024_1143_b_22L如是色想爾時超越等超越故名超諸色想滅有對想者云何有對想謂耳等四識相應想等想乃至已想當想摠名有對想有作是說瞋恚相應想等想乃至已想當想摠名有對想今此義中耳等四識相應想等想乃至已想當想名有對想
이와 같은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그때에 끊고 두루 알며 멀리 여의고 극히 멀리 여의며 조복하고 극히 조복하며 숨어 없어지고 제거되어 소멸하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앤다’고 한다.
‘갖가지 생각을 사유하지 않는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갖가지 생각[種種想]인가? 개(蓋)와 전(纏)이 있는 이의 온갖 염오(染汚)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의 생각과 온갖 착하지 않은 생각과 온갖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 아닌[非理所引] 생각과 온갖 선정[定]을 장애하는 생각을 통틀어 ‘갖가지 생각’이라고 한다.
024_1143_c_08L如是有對想爾時斷遍知遠離極遠離調伏極調伏隱沒除滅故名滅有對想不思惟種種想者何種種想謂有蓋纏者所有染污色聲香味觸想所有不善想所有非理所引想所有障礙定想摠名種種想
그런 생각을 그때에 다시는 이끌어내지 않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며 다시는 사유하지 않고 다시는 이미 사유하지 않았으며 다시는 앞으로도 사유하지 않을 것이므로 ‘갖가지 생각을 사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부변처(空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공무변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제4 정려(靜慮)를 사유해서 거칠고[麤] 괴롭고[苦] 막힌다[障]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공무변처를 사유해서 고요하고[靜] 미묘하고[妙] 여읜다[離]고 여겨야 한다.
024_1143_c_13L彼想爾時不復引發不復憶念不復思惟不復已思惟不復當思惟故名不思惟種種想入無邊空空無邊處具足住者云何空無邊處定加行何加行入空無邊處定謂於此定初脩業者先應思惟第四靜慮爲麤苦次應思惟空無邊處爲靜妙離
024_1144_a_02L그는 그때에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내닫고 한군데로 나아가지 못하며 생각을 지킬 수 없는지라 하나의 반연[一緣]에 머무르면서 공무변처정을 닦게 된다면 이 정도로는 아직 공무변처정의 가행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하지 못한다.
그가 만일 그때에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잡아서 산란하여 다른 경계에 내닫게 하지 않고 한 갈래로 나아가 생각을 머물러 하나에 반연하면서 공무변처정을 닦아 익히는 모양을 사유하며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일으켜 정진하되 세차고 날래고 왕성하게 하면서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공무변처정의 가행이라 하며 또한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한다.
024_1143_c_20L於爾時若心散亂馳流餘境不能一趣不能守念令住一緣脩空無邊處齊此未名空無邊處定加行亦未名入空無邊處定彼若爾時攝錄自令不散亂馳流餘境能令一趣住念一緣思惟脩習空無邊處定相如是思惟發勤精進勇健勢猛熾盛難制勵意不息是名空無邊處定加行名入空無邊處定
또 그는 이 도(道)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마음으로 하여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한 갈래로 나아가고, 평등하게 지니고,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게 하면 이 만큼으로도 이미 공무변처정에 들었다고 한다.
또 이 선정 속의 모든 심(心)ㆍ의(意)ㆍ식(識)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마음[心]이라 하고, 모든 사(思)와 평등한 사[等思]와 나아가 마음에서 짓는 뜻의 업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의업(意業)이라 하며, 모든 마음의 뛰어난 견해로서 이미 낸 승해와 앞으로 낼 승해를 공무변처와 함께 있는 승해(勝解)라 하고, 또 이 선정 속의 느낌과 생각과 나아가 지혜 등을 공무변처정과 함께 있는 모든 법[諸法]이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도 또한 공무변처정이라고 한다.
024_1144_a_06L彼於此道生已習多脩習故便令心住等住近住安一趣等持無二無退齊此名爲已入空無邊處定又此定中諸心意識名空無邊處定俱有心諸思等思乃至造心意業名空無邊處定俱有意諸心勝解已勝解當勝解名空無邊處定俱有勝解又此定中若受若想乃至若慧等名空無邊處定俱有諸法如是諸法亦名空無邊處定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하고’라 함은 그는 그때에 공무변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공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끝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의 가행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식무변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공무변처를 사유하면서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식무변처를 사유하면서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024_1144_a_15L超一切種空無邊處者謂彼爾時於空無邊處想超越等超越故名超一切種空無邊處入無邊識識無邊處具足住者云何識無邊處定加行脩何加行入識無邊處定謂於此定初脩業者先應思惟空無邊處爲麤苦障次應思惟識無邊處爲靜妙離餘廣說如空無邊處
024_1144_b_02L‘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함은 그는 그때에 식무변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식무변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無所有] 데로 들어가 무소유처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가행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무소유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식무변처를 사유하되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무소유처를 사유하되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024_1144_a_23L超一切識無邊處者謂彼爾時於識無邊處想超越等超故名超一切種識無邊處入無所有無所有處具足住者云何無所有處定加行脩何加行入無所有處定謂於此定初脩業者先應思惟識無邊處爲麤苦障次應思惟無所有處爲靜妙離餘廣說如空無邊處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한다’고 함은 그는 그때에 무소유처라는 생각을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무소유처를 초월한다’고 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고 함은 어떤 것이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비상비비상처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무소유처를 사유하되 거칠고 괴롭고 막힌다고 여겨야 하며, 다음에는 마땅히 비상비비상처를 사유하되 고요하고 미묘하고 여읜다고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공무변처에서와 같다.
024_1144_b_07L超一切種無所有處者謂彼爾時於無所有處想超越等超越故名超一切種無所有處入非想非非想處具足住云何非想非非想處定加行脩何加行入非想非非想處定謂於此定初脩業者先應思惟無所有處爲麤苦障次應思惟非想非非想處爲靜妙離餘廣說如空無邊處

14. 수정품(修定品)
024_1144_b_15L脩定品第十四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수정(修定)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殊勝智見]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024_1144_b_16L一時薄伽梵在室羅筏住逝多林給孤獨園爾時世尊告苾芻衆有四脩何等爲四謂有脩定若習若脩多所作能令證得現法樂住復有脩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殊勝智見復有脩定若習若脩若多所能令證得勝分別慧
024_1144_c_02L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諸漏永盡]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곧 자기 몸에 대하여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 인해서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充滿],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여읨에서 생긴 희락이 자기 몸 속에서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024_1144_b_23L復有脩定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諸漏永云何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令證得現法樂住謂有苾芻卽於自身離生喜樂滋潤遍滋潤充滿遍充滿適悅遍適悅故離生喜樂於自身中無有少分而不充滿是名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現法樂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하고 잘 사유(思惟)하며 잘 닦아 익히고 잘 통달하되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고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으며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어서 마음을 열고 개(蓋)를 여의며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고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해서 한량없는 선정을 닦나니,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024_1144_c_08L云何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令證得殊勝智見謂有苾芻於光明想善攝受善思惟善脩習善通達晝若夜無有差別若前若後無有差若下若上無有差別開心離蓋照俱心除闇昧心脩無量定是名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殊勝智見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고 느낌의 사라짐[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024_1144_c_15L云何脩定若習若脩若多所能令證得勝分別慧謂有苾芻知受生善知受住善知受滅盡沒此住念非不住念及善知想善知尋於此住念非不住念是名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勝分別慧
024_1145_a_02L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觀)하고 머무르되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물질[色]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발생[集]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소멸[滅]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발생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는 앞의 뜻을 거두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24_1144_c_20L云何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諸漏永盡謂有苾芻於五取薀數數隨觀生滅而住謂此是色此是色集此是色滅此是受想行識此是受想行識集此是受想行識滅是名脩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諸漏永盡爾時世尊爲攝前義而說頌言

탐욕의 생각[欲想]과 근심하는 번뇌를 끊고
혼침(惛沈)과 악작(惡作)을 여의면
청정한 사(捨)와 염(念)을 얻나니
법(法)에 심(尋)과 사(伺)는 그 앞에 행해진다.
024_1145_a_05L斷欲想憂惱
離惛沈惡作
得淸淨捨念
法尋伺前行

현법락주(現法樂住)가 처음이 되고
다음에는 뛰어난 지견(智見)과 지혜로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깨뜨리며
마지막에는 해탈의 과(果)를 증득한다.
024_1145_a_07L現法樂爲初
次勝知見慧
破無明等漏
後證解脫果

‘곧 자기 몸[身]에 대하여’라 함은 몸[身]도 또한 몸이라 하고 신근(身根)도 또한 몸이라 하며 5색근(色根)도 또한 몸이라 하고 4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무더기[聚]도 또한 몸이라 한다. 지금 이 뜻에서는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를 ‘몸’이라 한다.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이라 함은 초정려(初靜慮)에 있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며 평등한 느낌[平等受]이어서 느낌에 속한 몸의 가볍고 편안함[輕安]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니, 이것을 바로 기쁨과 즐거움이라 한다.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은 욕(欲)과 나쁜 법[惡不善法]을 여읨에서부터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기 때문에 ‘여읨으로 생긴 희락’이라 한다.
024_1145_a_08L卽於自身者謂身亦名身根亦名身五色根亦名身四大種所造聚亦名今此義中意說四大種所造聚名離生喜樂者謂初靜慮所有喜樂平等受受所攝身輕安心輕安是名喜樂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히 차고[充滿], 두루 가득히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한다’고 함은 곧 자기의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인 몸에서 여읨으로 인하여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해서 윤택해지고 두루 윤택해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一義]이요,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며,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어서 하(下)ㆍ중(中)ㆍ상(上)으로 말미암아 자라고 길러지는 것에 차별이 있다.
024_1145_a_14L如是喜樂從離欲惡不善法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離生喜滋潤遍滋潤充滿遍充滿適悅遍適悅者謂卽於自四大種所造聚身離生喜樂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滋潤遍滋潤是一義充滿遍充滿是一義適悅遍適悅是一義由下中上長養差別
비유하면 마치 농부가 처음에 적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 중간쯤 되는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맨 나중에 많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과 같다.
024_1145_a_21L譬如農夫初以少水漑灌畦壟爾時畦壟滋潤遍滋潤次以中水漑灌畦壟爾時畦壟充滿遍充滿後以多水漑灌畦壟爾時畦壟適悅遍適悅
024_1145_b_02L필추도 역시 그러하여 처음에 하품(下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는 중품(中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나중에 상품(上品)의 여읨을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며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기 몸속에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게 되나니, 곧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라고 기르는[長養] 일을 하면서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다.
024_1145_a_24L苾芻亦爾初以下品離生喜樂長養大種所造聚身爾時自身滋潤遍滋潤次以中品離生喜樂長養大種所造聚身爾時自身充滿遍充滿後以上品離生喜樂長養大種所造聚身時自身適悅遍適悅離生喜樂於自身中無有少分而不充滿者謂從足至頂離生喜樂作長養事無不充滿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修定]이 있어서’라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자기의 몸에서는 여읨으로 생기는 희락으로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흩어지지 않고, 어지럽지 않고, 가다듬어 그치고, 평등하게 지니고,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024_1145_b_09L是名脩定者云何爲定謂卽於自身離生喜樂滋潤遍滋潤充滿遍充滿適悅遍適悅故心住等住近住安住不散不亂攝止等持心一境性摠名爲定
어떤 것을 ‘닦는다[修]’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또는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더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유자재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된다’ 함은 이 선정을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현재 법[現法] 가운데서 즐거움[樂]을 느끼며 편안히 머무름[住]을 증득하는 것이니,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고, 뜻에 맞아서 희망할 것도 없고 사모할 것도 없으며 고요하고, 안온하기 때문에 ‘낙주(樂住)’라 하며 이 낙주에 대하여 얻고 성취하며 친근하고 접촉해서 증득[觸證]하기 때문에 ‘증득(證得)한다’고 한다.
024_1145_b_14L云何爲脩謂於此定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摠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者顯於此定能得自能令證得現法樂住者謂於此定若習若脩若多所作於現法中證得樂住可愛可樂可欣可意無所悕望無所思慕寂靜安隱故名樂住於此樂住得獲成就親近觸證故名證得
024_1145_c_02L또 다음에는 초정려(初靜慮)에 속한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하여 ‘선정’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行)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고 짓는 바’는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 데에 대한 뜻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4_1145_b_21L復次初靜慮所攝離生喜樂俱行心一境性說名爲定卽於此定若脩若恒作常作加行不捨說名爲脩習若脩若多所作顯彼自在能令證得現法樂住義如前說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는 등에서 어떤 것이 광명정(光明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광명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定]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깨끗한 달[月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한 해[日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약물(藥物)ㆍ말니(末尼), 그리고 모든 천상의 궁전[諸天宮殿] 및 별[星宿]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등불이나 촛불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성읍(城邑)이나 하천이나 토지가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또 산이나 진펄이나 너른 들판이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열 짐[擔], 혹은 스무 짐, 혹은 서른 짐, 혹은 마흔 짐, 혹은 쉰 짐, 혹은 백 짐, 혹은 천 짐, 혹은 백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 짐, 혹은 한량없는 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천 짐의 땔나무가 불에 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한다.
024_1145_c_03L於光明想善攝受等者云何光明定加行脩何加行入光明定謂於此定初脩業者先應善取淨月輪相或復善取淨日輪相或復善取藥物末尼諸天宮殿星宿光明或復善取燈燭光明或復善取焚燒城邑川土光明或復善取焚燒山澤曠野光明或復善取焚燒十檐或二十檐或三十檐或四十檐或五十檐或百檐或千檐或百千檐或無量百檐或無量千檐或無量百千擔薪火光明
이들 불의 광명이 왕성하고, 극히 왕성하고, 환히 밝고, 극히 환히 밝은 어느 한 가지 광명을 취한 뒤에 자세히 살피고 사유(思惟)하며, 분명히 알고[解了], 관찰(觀察)하고, 뛰어나게 이해하고[勝解], 굳게 머물러서[堅住] 그것을 분별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내닫게 되고 한 갈래로 나아가지 못하며 생각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의 반연[一緣]에 머물러서 취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정도로는 아직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아직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지 못한다.
024_1145_c_14L此火光明熾盛極熾盛洞然遍洞然隨取一種光明相已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而分別之彼於爾時若心散亂馳流餘境不能一趣不能守念令住一緣思惟所取諸光明相齊此未名光明定加行亦未名入光明定
024_1146_a_02L그가 만일 그때에 자기의 마음으로 가다듬고 다잡아서 산란하여 다른 경계에 내딛지 않게 하고 한 갈래로 나아가 염(念)에 머물러 하나에 반연하게 해서 이러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며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일으켜 정진하되 나아가 격려하는 뜻을 쉬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며 또한 광명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도(道)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마음으로 하여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한군데로 나아가고, 평등하게 지니고,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게 해서 이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만큼으로도 이미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며 그러나 아직 광명정상(光明定想)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024_1145_c_20L彼若爾時攝錄自心令不散亂馳流餘境能令一趣住念一緣思惟如是諸光明相如是思惟發勤精進乃至勵意不息是名光明定加行亦名入光明彼於此道生已脩習多脩習故便令心住等住近住安住一趣等持無二無退思惟如是諸光明相齊此名爲已入光明定而未名爲光明定想
어떤 것을 광명정상이라 하는가? 곧 앞의 광명정(光明定)에 의지하여 앞과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는 모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과 분명한 이해와 형상을 취함[取像]과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광명정의 생각[想]이라 하며 이 광명정의 생각을 바로 광명상(光明想)이라 한다.
‘광명상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공경하면서 섭수하고 은근히 섭수하며 존중히 섭수하면서 그것의 인(因)과 그것의 문(門)과 그것의 이치[理]와 그것의 방편(方便)과 그것의 행상(行相)을 사유하기 때문에 ‘잘 섭수한다’고 한다.
024_1146_a_05L云何名爲光明定想謂卽依止前光明定思惟如前諸光明相諸想等想解了取像已想當想名光明定想光明定想名光明想於光明想善攝受者謂於此想恭敬攝受慇懃攝受尊重攝受思惟彼因彼門彼理彼方便彼行相故名善攝受
‘잘 사유(思惟)한다’고 함은 자주자주 광명상(光明想)을 일으킨 뒤에 자주자주 광명의 모양에 대한 생각을 사유하는 것이다.
‘잘 닦아 익힌다[修習]’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짓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잘 닦아 익힌다’고 한다.
‘잘 통달한다’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평등하게 알고[等了] 자세하게 알며[審了] 평등하게 살펴서 관찰하기 때문에 ‘잘 통달한다’고 한다.
024_1146_a_12L善思惟者數數起光明想已數數思惟光明相善脩習者謂於此想數習數脩數多所作故名善脩習善通達者謂於此想等了審了等審觀察故名善通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낮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밤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밤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낮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니, 그 때문에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024_1146_a_17L若晝若夜無有差別者謂如晝分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如前諸光明相夜分亦爾如於夜分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如前諸光明相晝分亦爾故名若晝若夜無有差別
024_1146_b_02L‘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마주 보고 대할 때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등뒤에 있을 때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등뒤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마주보고 대할 때에도 또한 그러하다.
또 이전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지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지금에 그렇게 한 것처럼 이전에도 또한 그러하였나니, 그 때문에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024_1146_a_22L若前若後無有差別謂如對面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如前諸光明相背面亦如於背面對面亦爾復次如於前時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如前諸光明相今時亦爾如於今前時亦爾故名若前若後無有差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하방(下方)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상방(上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또한 상방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방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그 때문에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마음을 연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하게 비추어서 선명(鮮明)하고 청정(淸淨)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024_1146_b_06L若下若上無有差別者謂如於下方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如前諸光明相於上方亦爾如於上於下方亦爾故名若下若上無有差別開心者謂發起光明照了鮮淨俱行之心
‘개(蓋)를 여읜다’고 함은 혼침(惛沈)ㆍ수면(睡眠)의 전개(纏蓋)를 멀리 여의고 마음의 작용이 명료(明了)한 것이다.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는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히 비추어서 선명하고 청정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한다’고 함은 이 마음 가운데서는 어두운 모양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광명의 모양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마치 등불이나 촛불이 환히 비추어서 어두움을 없애는 것과 같이 한다.
024_1146_b_11L離蓋者謂遠離惛沈睡眠纏蓋心用明了脩照俱心者謂脩習光明照了鮮淨俱行之心除闇昧心謂此心中不起闇昧相唯起光明如燈燭光照了除闇
‘한량없는 선정을 닦는다’고 함은 한량없는 광명 모양[無量光明相]의 선정을 닦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광명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해서 일으킨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024_1146_b_15L脩無量定者謂脩無量光明相定是名脩定者何爲定謂卽於光明審諦思惟解了觀察勝解堅住分別所起心住等住乃至心一境性摠名爲定云何爲脩謂於此定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摠名爲脩
024_1146_c_02L‘익히고 또는 닦고 또는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自在)하게 됨을 나타낸다.
‘뛰어난 지견(智見)을 증득하게 된다’고 함에 어떤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아서 원만한 지위에 이르면 옛 육안(肉眼) 쪽에서 색계(色界)의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天眼)에 일어나며 이 천안에 의하여 청정한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안식에 의하여 전후와 좌우와 상하의 모든 빛깔을 두루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색계의 대종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이 옛 육안 쪽에서 생기되 여여(如如)하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청정한 안식을 내며 이 안식에 의하여 저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024_1146_b_21L若習若脩若多所作顯於此定能得自在能令證得殊勝智見者云何名爲殊勝智見謂於此定若習若脩若多所作至圓滿位於舊眼邊發起色界大種所造淸淨天眼依此天眼生淨眼識依此眼識能遍觀察前後左右上下諸色如如色界大種所造淸淨天眼舊眼邊起如是如是生淨眼識依此眼識領受觀察彼彼諸色是名此中殊勝智見
어떤 이는 말하기를 ‘뜻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이해하고 보게 되는데 곧 사람의 육안이 변하여 천안이 되는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에서는 곧 앞에서 말한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를 말하여 지(智)라 하고 또한 견(見)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천안의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가 저마다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게 되는 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024_1146_c_07L有作是說由意淨故勝解觀見卽人肉眼變成天眼名勝智見今此義中卽前所說淸淨眼識相應勝慧說名爲智亦名爲見謂天眼識相應勝慧領受觀察彼彼諸色是名此中殊勝智見
그는 이 선정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니, 뛰어난 지견을 얻고 성취하며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證)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광명상(光明想)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다’고 함은 그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4_1146_c_13L彼於此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證得殊勝智見得獲成就親近觸證殊勝智見故名證得復次光明想俱行心一境性說名爲定卽於此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顯彼自能令證得殊勝智見義如前說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며 느낌의 소멸[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안다’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觀)하고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아는 것이다.
024_1146_c_19L善知受生善知受住善知受滅盡沒謂審觀受生審觀受住審觀受滅盡沒於此住念非不住念者謂審觀受生時具念正知審觀受住時具念正知審觀受滅盡沒時具念正知
024_1147_a_02L‘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안다’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의 생김을 자세히 관하고 생각과 거친 생각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생각과 거친 생각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이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과 거친 생각이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생각과 거친 생각이 사라짐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안다는 것이다.
024_1146_c_24L善想善知尋者謂審觀想尋生審觀想尋住審觀想尋滅盡沒於此住念非不住念者謂審觀想尋生時具念正知審觀想尋住時具念正知審觀想尋滅盡沒時具念正知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그는 그때에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법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해서 착하지 않은 법은 일으키지 않고 모든 착한 법을 일으키며 무기의 법[無記法]을 일으키지 않고 유기의 법[有記法]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은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모든 착한 법은 오래 머무르게 하며 무기의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유기의 법은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024_1147_a_06L是名脩定云何爲定謂彼爾時作如是念於諸法應正思惟不起不善法起諸善法不起無記法起有記法令不善法不久住令諸善法得久住令無記法不久住令有記法得久住
그는 그러할 때에 또한 마음을 관찰하고 또한 심소법(心所法)도 관찰하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이 심ㆍ심소법을 관찰할 때에 일으키는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하여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024_1147_a_11L彼於爾時亦觀察心亦觀察心所法彼觀察心心所法時所起心住等住乃至心一境性摠名爲定云何爲脩謂於此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者顯於此定能得自在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된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온갖 착하지 않은 지혜와 이치대로 이끈 것이 아닌 지혜와 온갖 착하지 않아서 선정을 장애하는 지혜로 하여금 모두 다 파괴되고 버려 두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지혜는 생장하면서 굳건히 머무르게 되나니, 이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한다’고 한다.
024_1147_a_17L能令證得勝分別慧謂於此定若習若脩若多所作令一切不善慧非理所引慧所有不善障礙定慧皆悉破壞捨置不起相違慧生長堅住由此故說能令證得勝分別慧
024_1147_b_02L그리고 곧 이 지혜를 얻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득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다음에 느낌과 생각과 거친 생각을 자세히 관하는 것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는 데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4_1147_a_22L卽於此慧得獲成就近觸證故名證得復次審觀受想尋俱行心一境性說名爲定卽於此定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說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顯彼自在能令證得勝分別慧義如前說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生滅]을 따라 관해서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물질[色]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알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안다.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5취온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해서 머무를 적에 일어난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된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024_1147_b_04L於五取薀數數隨觀生滅而住等者謂如實知色生及變壞如實知受想行識生及變壞是名脩定者云何爲謂於五取薀數數隨觀生滅而住所起心住等住乃至心一境性摠名爲定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함에서 번뇌라 함은 세 가지 번뇌이니, 곧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그는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이 세 가지 번뇌로 하여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고, 두루 다하고, 마지막까지 다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고 하며 이 영원히 다함을 획득하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명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024_1147_b_10L云何爲脩謂於此定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摠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者顯於此定能得自能令證得諸漏永盡者漏謂三漏卽欲漏有漏無明漏彼於此定若習若脩若多所作能令三漏盡等盡遍盡究竟盡故名諸漏永盡於此永盡得獲成就親近觸證故名證得
또 다음에, 제4 정려(靜慮)에 속한 청정한 사(捨)와 염(念)과 함께 행하는 아라한에 나아가는 무간도(無間道)에 딸린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心一境性]을 ‘선정’이라고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여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에서 그것의 자재함을 나타내는 것과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하는데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24_1147_b_17L復次第四靜慮所攝淸淨捨念俱行趣阿羅漢無閒道所攝心一境性說名爲卽於此定若脩若習恒作常作加行不捨說名爲脩若習若脩若多所作彼自在能令證得諸漏永盡義如前說


15. 각지품(覺支品) ①
024_1147_b_22L覺支品第十五之一
024_1147_c_02L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어떤 필추가 부처님께 나아가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 물러나 한 쪽에 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일찍이 ‘각지(覺支)’라고 말씀하셨는데 각지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각지라는 말은 7각지(覺支)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이른바 염각지(念覺支)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희각지(喜覺支)ㆍ경안각지(輕安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이니라. 이와 같은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024_1147_b_23L一時薄伽梵在室羅筏住逝多林給孤獨園時有苾芻來詣佛所到已頂禮世尊雙足卻住一面而白佛言尊嘗說覺支覺支此言何義世尊告此覺支言顯七覺支何等爲七念覺支擇法覺支精進覺支喜覺支輕安覺支定覺支捨覺支如是覺支漸次而起漸次而得脩令圓滿
그때에 저 필추는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것을 닦아서 원만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필추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몸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물러 정념(正念)에 편안히 머무르며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염각지(念覺支)가 일어나 염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이 염(念)으로 말미암아 법에 대하여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遍尋思]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여[遍伺察] 자세히 살피면 그때에 곧 택법각지(擇法覺支)가 일어나 택법각지를 얻으며 그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024_1147_c_08L時彼苾芻復白佛言云何覺支漸次而起漸次而得脩令圓滿佛告苾芻若有於身住循身觀安住正念遠離愚癡爾時便起念覺支得念覺支脩令圓滿彼由此念於法簡擇極簡擇遍尋遍伺察審諦伺察爾時便起擇法覺支得擇法覺支脩令圓滿
그는 법을 간택함으로 말미암아 근(勤)을 발하여 정진하되 마음이 하열하지 않으면 그때에 곧 정진각지(精進覺支)가 일어나 정진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정진으로 말미암아 뛰어난 기쁨을 내어 탐애(貪愛)하는 맛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희각지(喜覺支)가 일어나 희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그는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져서 거칠고 무거운 것을 멀리 여의면 그때에 곧 경안각지(輕安覺支)가 일어나 경안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하느니라.
024_1147_c_15L彼由擇法發勤精進心不下劣爾時便起精進覺支得精進覺支脩令圓滿彼由精進發生勝喜遠離愛味爾時便起喜覺支得喜覺支脩令圓滿彼由此喜身心輕安遠離麤重爾時便起輕安覺支得輕安覺支脩令圓滿
024_1148_a_02L그는 가볍고 편안함[輕安]으로 곧 쾌락을 느끼고 쾌락 때문에 마음이 안정해지면 그때에 곧 정각지(定覺支)가 일어나 정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그는 마음이 안정해지므로 탐애를 없애고 증상(增上)의 사(捨)에 머무르면 그때에 곧 사각지(捨覺支)가 일어나 사각지를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에 대하여 순수관(循受觀)과 순심관(循心觀)과 순법관(循法觀)에 머무르는 것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니, 이와 같아서 각지는 차례대로 점점 일어나고 차례대로 점점 얻으며 그것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느니라.”
024_1147_c_21L彼由輕安便受快樂樂故心定爾時便起定覺支得定覺支脩令圓滿彼由心定能滅貪憂住增上捨爾時便起捨覺支得捨覺支脩令圓滿於受住循受心法觀廣說亦爾如是覺支漸次而起漸次而得脩令圓滿
어떤 것이 염각지(念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가 이 안의 몸[內身]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물러 만일 정근(正勤)ㆍ정지(正知)ㆍ정념(正念)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貪]와 근심[憂]을 제거하고 그의 밖의 몸[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물러 만일 정근ㆍ정지ㆍ정념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며 안팎의 몸[內外身]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물러 만일 정근ㆍ정지ㆍ정념을 갖추면 세간의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게 되나니, 안과 밖과 안팎의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 이 세 가지에 대하여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고 하셨다.
024_1148_a_04L云何念覺支謂世尊說若聖弟子此內身住循身觀若具正勤正知正除世貪憂於彼外身住循身觀具正勤正知正念除世貪憂於內外身住循身觀若具正勤正知正念世貪憂於內外俱受法三廣說亦
이와 같은 4념주(念住)를 닦아 익힐 때에 있는 모든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모든 염(念)과 따라 염하는 것과 오로지 염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잃지 않는 것, 빠뜨리지 않는 것, 새지 않는 것, 잃지 않는 법의 성품[不失法性]이요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心明記性]을 통틀어 염(念)이라 한다. 또한 이를 염근(念根)이라 하고 또한 염력(念力)이라고도 하며 또한 염각지(念覺支)라고도 하며 또한 정념(正念)이라고도 한다.
024_1148_a_11L脩習如是四念住時所有無漏作意相應諸念隨念專念憶念不忘不不遺不漏不失法性心明記性名爲念亦名念根亦名念力亦名念覺支亦名正念
이것은 곧 성스럽고[聖] 세간을 벗어나며[出世] 번뇌가 없고[無漏] 취가 없으며[無取] 도(道)에 따르는 행[隨行]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俱有] 도에 따라 굴러서[隨轉]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그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마지막[究竟]에 이르게 되며 모든 행 가운데서 자세히 그의 허물[過患]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하여 마지막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모든 염과 따라 염하는 것 나아가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이니, 이것을 바로 염각지라고 한다.
024_1148_a_15L是聖出世無漏無取道隨行道俱有道隨轉能正盡苦苦邊際諸有學者如所見諸行思惟觀察令至究竟於諸行中深見過患於永涅槃深見功德若阿羅漢如解脫心思惟觀察令至究竟所有無漏作意相應諸念隨念乃至心明記性是名念覺支
024_1148_b_02L어떤 것이 택법각지(擇法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는 착한 법[善法],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과 죄가 있는 법[有罪法], 죄가 없는 법[無罪法]과 닦아야 할 법[應修法],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과 하열한 법[下劣法], 승묘한 법[勝妙法]과 검은 법[黑法], 흰 법[白法]과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과 인연으로 생기는 법[緣生法]을 사실대로 아느니라”고 하셨다.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착한 법[善法]인가? 착한 신업(身業)ㆍ어업(語業)과 착한 심(心)ㆍ심소법(心所法)과 착한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택멸(擇滅)이니, 이것을 착한 법이라 한다.
024_1148_a_22L云何擇法覺支謂世尊說若聖弟子能如實知善不善法有罪無罪法脩不應脩法下劣勝妙法黑白法敵對法緣生法能如實知善不善法云何善法謂善身語業善心心所善心不相應行及擇滅是名善法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인가?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과 착하지 않은 심ㆍ심소법과 착하지 않은 심불상응행이니, 이것을 착하지 않은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正慧]로써 사실대로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遍尋思]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遍伺察]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024_1148_b_05L云何不善法謂不善身語業不善心心所法不善心不相應行是名不善彼於如是善不善法以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察審諦伺是名能如實知善不善法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죄가 있는 법[有罪法]인가? 3악행(惡行)과 3불선근(不善根)과 10불선업도(不善業道)이니, 이것을 ‘죄가 있는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죄가 없는 법[無罪法]인가? 3묘행(妙行)과 3선근(善根)과 10선업도(善業道)이니, 이것을 ‘죄가 없는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죄가 있고 죄가 없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024_1148_b_10L能如實知有罪無罪法者云何有罪法謂三惡行三不善根十不善業道是名有罪法云何無罪法謂三妙行三善根十善業道是名無罪法彼於如是有罪無罪法以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察審諦伺察是名能如實知有罪無罪法
‘닦아야 할 법과 닦지 않아야 할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닦아야 할 법[應修法]인가? 3묘행과 3선근과 10선업도와 훌륭한 사람[善士]에게 친근히 하는 것과 바른 법[正法]을 듣는 것과 이치대로 작의[如理作意]와 법ㆍ수법행(法隨法行)과 공경하면서 듣는 것과 감관 문[根門]을 은밀히 보호하는 것과 음식(飮食)에 분량을 아는 것과 초저녁과 새벽에 일찍 잠을 자지 않는 것과 부지런히 힘써서 모든 선행(善行)을 닦는 것이니, 이것을 ‘닦아야 할 법’이라 한다.
024_1148_b_17L能如實知應脩不應脩法者云何應脩法謂三妙行善根十善業道親近善士聽聞正法如理作意法隨法行恭敬聽聞密護根門飮食知量初夜後夜曾不睡眠勤脩諸善是名應脩法
024_1148_c_02L또 4념주(念住)ㆍ4정승(正勝)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등각지(等覺支)ㆍ8지성도(支聖道)ㆍ4정행(正行)ㆍ4법적(法迹)ㆍ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도 또한 닦아야 할 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인가? 3악행과 3불선근과 10불선업도와 훌륭하지 않은 사람[不善士]을 친근히 하는 것과 바르지 않은 법[不正法]을 듣는 것과 이치대로가 아닌 작의[不如理作意]와 법이 아닌 행[非法行]을 행하는 것과 공경하면서 듣지 않는 것과 공경하면서 묻지 않는 것과 감관 문을 은밀히 보호하지 않는 것과 음식에 분량을 모르는 것과 초저녁과 새벽에 항상 잠을 익히는 것과 부지런히 힘써서 선행을 닦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닦지 않아야 할 법이라고 한다.
024_1148_b_22L復次四念住四正勝四神足五根五力七等覺支八支聖道四正行四法迹奢摩他鉢舍那亦名應脩法云何不應脩法謂三惡行三不善根十不善業道近不善士聽聞不正法不如理作意行非法行不恭敬聽不恭敬問不密護根門飮食不知量初夜後夜常習睡眠不勤脩善是名不應脩法
그는 이와 같이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닦아야 할 법과 닦지 않아야 할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하열한 법과 승묘한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하열한 법[下劣法]인가?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니, 이것을 하열한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승묘한 법[勝妙法]인가? 모든 착한 법[善法]과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이것을 승묘한 법이라 한다.
024_1148_c_07L彼於如是應脩不應脩法以如實正慧簡極簡擇遍尋思遍伺察審諦伺察是名能如實知應脩不應脩法能如實知下劣勝妙法者云何下劣法不善法及有覆無記是名下劣法何勝妙法謂諸善法及無覆無記名勝妙法
그는 이와 같이 하열하고 승묘한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하열한 법과 승묘한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검은 법과 흰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검고 흰 법인가? 착하지 않은 법을 검다[黑]하고 착한 법을 희다[白] 하며 죄가 있는 법을 검다 하고 죄가 없는 법을 희다 하며 닦지 않아야 할 법을 검다 하고 닦아야 할 법을 희다 하며 하열한 법을 검다 하고 승묘한 법을 희다 하는 것이니, 이것을 검은 법[黑法]과 흰 법[白法]이라 한다.
024_1148_c_14L彼於如是下劣勝妙法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審諦伺察是名能如實知下劣勝妙法能如實知黑白法者云何黑白謂不善法名黑善法名白有罪法名無罪法名白不應脩法名黑應脩法名白下劣法名黑勝妙法名白名黑白法
024_1149_a_02L그는 이와 같이 검고 흰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거칠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검은 법과 흰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적대가 있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인가? 탐내는 것과 탐냄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敵對)이고, 성내는 것과 성냄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이며, 어리석은 것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서로가 적대인 것이니, 이것을 적대가 있는 법이라 한다.
024_1148_c_21L彼於如是黑白法以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察諦伺察是名能如實知黑白法能如實知有敵對法者云何有敵對法貪無貪互相敵對瞋無瞋互相敵對癡無癡互相敵對是名有敵對法
그는 이와 같은 적대가 있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크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적대가 있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緣生法]인가? 인연으로 생기는 법[緣起法]과 인연으로 이미 생긴 법[緣已生法]을 통틀어서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에 대하여 바른 지혜로써 사실대로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며 두루 크게 생각하고 두루 세밀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살피게 되면, 이것을 ‘인연으로 나는 법을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024_1149_a_03L於如是有敵對法以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察審諦伺察名能如實知有敵對法能如實知緣生法者云何緣生法謂緣起法及緣已生法摠名緣生法彼於如是緣生以如實正慧簡擇極簡擇遍尋思遍伺察審諦伺察是名能如實知緣生法
그는 착한 법ㆍ착하지 않은 법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사실대로 아는 때에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간택하고, 지극하게 간택하고, 가장 지극하게 간택하며 분명하게 알고, 평등하게 알고, 가까이 알며, 기민한 슬기가 있고, 막힘 없이 환히 통하고, 자세히 살피고, 뛰어나게 각(覺)과 명(明)과 혜(慧)의 행이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통틀어 혜(慧)라 하고 또한 혜근(慧根)이라 하며 또한 혜력(慧力)이라 하고 또한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하며 또한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024_1149_a_11L彼如實知善不善法廣說乃至緣生法時所有無漏作意相應於法簡擇極簡擇最極簡擇解了等了近機黠通達審察聰睿覺明慧行鉢舍那摠名爲慧亦名慧根亦名慧亦名擇法覺支亦名正見
이것은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함[取]이 없으며, 도(道)를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究竟]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를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간택하고 나아가 비발사나를 택법각지라 한다.
024_1149_a_16L是聖出世無漏無取道隨行道俱有道隨轉能正盡苦作苦邊際諸有學者如所見諸行思惟觀察令至究竟於諸行中深見過患於永涅槃深見功德阿羅漢如解脫心思惟觀察令至究所有無漏作意相應於法簡擇乃至毘鉢舍那是名擇法覺支
024_1149_b_02L어떤 것이 정진각지(精進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성스러운 제자는 이미 생긴 악한 법[已生惡不善法]을 끊기 위하여 욕(欲)을 일으키고 근(勤)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策心] 마음을 지니며[持心],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한 법[未生惡不善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未生善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이미 생긴 착한 법[已生善法]을 굳게 머무르고 잊지 않으며, 수행하고 원만하게 하며, 갑절이나 더하고 광대하게 해서 지혜로 증을 짓게[作證]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발하여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느니라”고 하셨다.
024_1149_a_23L云何精進覺支謂世尊說若聖弟子爲令已生惡不善法斷故起欲發勤精進策心持心爲令未生惡不善法不生故起欲發勤精進策心持心令未生善法生故起欲發勤精進策心持心爲令已生善法堅住不忘脩滿倍增廣大智作證故起欲發勤精進策心持心
그는 이와 같은 4정승(正勝)을 닦을 때에 생겨나는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힘쓰고 정진하고 세차고 날래며, 왕성하게 해서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는 것을 통틀어 정진(精進)이라 하고 또한 정진근(精進根)이라 하며, 또한 정진력(精進力)이라 하고 또한 정진각지(精進覺支)라고 하며, 또한 정근(正勤)이라고 한다.
이것은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함[取]이 없으며, 도(道)를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며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024_1149_b_08L彼脩如是四正勝時有無漏作意相應諸勤精進勇健勢猛熾盛難制勵意不息摠名精進名精進根亦名精進力亦名精進覺亦名正勤是聖出世無漏無取道隨行道俱有道隨轉能正盡苦作苦邊際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힘쓰고 정진하며 나아가 격려하는 뜻을 멈추지 않는 것을 정진각지라 한다.
024_1149_b_14L諸有學者如所見諸行思惟觀察令至究竟於諸行中深見過患永涅槃深見功德若阿羅漢如解脫思惟觀察令至究竟所有無漏作意相應諸勤精進乃至勵意不息名精進覺支
024_1149_c_02L어떤 것이 희각지(喜覺支)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대명(大名:摩訶男)아, 알아야 한다.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隨念]하는 것이니, ‘이 세존은 바로 여래(如來)ㆍ아라한(阿羅漢)ㆍ정등각(正等覺)ㆍ명행원만(明行圓滿)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장부(無上丈夫)ㆍ조어사(調御士)ㆍ천인사(天人師)ㆍ불(佛)ㆍ박가범(薄伽梵)’이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부처님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貪]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瞋]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癡]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여래에 대한 그의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을 얻어 위세 있고[威勢] 법(法)을 얻어 위세가 있느니라.
024_1149_b_19L云何喜覺支謂世尊說大名當知聖弟子以如是相隨念諸佛謂此世是如來阿羅漢正等覺明行圓滿善逝世閒解無上丈夫調御士天人薄伽梵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佛時貪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於如來所其心正直心正直故義威勢得法威勢
여래에 대하여 반가움[欣]을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喜]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不平等]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하게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惱害]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모든 부처님을 따라, 염함[隨念]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證)하게 되느니라.
024_1149_c_04L於如來所能引起欣故生喜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故心定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害得預法流於諸佛所脩隨念故乃至能證究竟涅槃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바른 법[正法]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바른 법은 착한 말씀[善說]이요 현재 보는[現見] 것이며, 뜨거움이 없고[無熱] 때에 응하며[應時], 가르쳐 이끌어주고[引導] 가까운 관[近觀]이어서 지혜로운 이는 안에서 증[內證]한다’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법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바른 법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024_1149_c_09L復次大名若聖弟子以如是相隨念正法謂佛正法善說現見無熱應時引導近觀智者內證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法時貪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心於正法所其心正直心正直故得義威勢得法威勢
바른 법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하게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바른 법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024_1149_c_15L於正法所能引起欣欣故生喜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故心定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害得預法流於正法所脩隨念故乃至能證究竟涅槃
024_1150_a_02L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승가(僧伽)를 따라 염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제자는 묘한 행[妙行]과 질박 정직한 행[質直行]과 이치대로의 행[如理行]과 법ㆍ수법행(法隨法行)과 화경행(和敬行)과 수법행(隨法行)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또 부처님의 제자는 예류(豫流)의 향(向)이 있고 예류의 과(果)가 있으며, 일래(一來)의 향이 있고 일래의 과가 있으며, 불환(不還)의 향이 있고 불환의 과가 있으며, 아라한(阿羅漢)의 향이 있고 아라한의 과가 있나니, 이와 같이 하여 통틀어 4쌍(雙) 8척(隻)의 보특가라가 있다.
024_1149_c_20L復次大名若聖弟子以如是相隨念僧伽謂佛弟子具足妙行質直行理行法隨法行和敬行隨法行又佛弟子有預流向有預流果有一來向有一來果有不還向有不還果有阿羅漢向有阿羅漢果如是摠有四雙八隻補特伽羅
이와 같은 승가는 계율[戒]이 구족하고 선정[定]이 구족하며 지혜[慧]가 구족하고 해탈(解脫)이 구족하고 해탈지견(解脫智見)이 구족하다. 청(請)에 응하고 굴(屈)에 응하며 공경에 응하는 위없는 복전[無上福田]이어서 세간의 공양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승가를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승가에 대하여 그의 마음은 바르고 곧으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024_1150_a_04L如是僧伽戒具足具足慧具足解脫具足解脫智見具應請應屈應恭敬無上福田世所應供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僧時貪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心於僧伽所其心正直心正直故得義威勢得法威勢
승가의 처소에서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승가의 처소에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024_1150_a_10L於僧伽所能引起欣欣故生喜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樂故心定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得預法流於僧伽所脩隨念故至能證究竟涅槃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 계율[戒]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나의 청정한 계율은 이지러지지 않고[不缺] 뚫어지지 않으며[不穿], 뒤섞이지 않고[不雜] 더러워지지 않아서[不穢] 공양을 받을 만하며 숨기거나 어두움이 없고 잘 마쳤으며 잘 받아 지니고 있으므로 지혜로운 이가 칭찬하면서 언제나 헐뜯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의 계율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024_1150_a_15L復次大名若聖弟子以如是相隨念自戒謂我淨戒不不穿不雜不穢堪受供養無隱昧善究竟善受持智者稱讚常無譏毀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自戒時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心於自戒所其心正直心正直故得義威勢法威勢
024_1150_b_02L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자기 자신의 계율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024_1150_a_22L於自戒所能引起欣欣故生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樂故心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害得預法流於自戒所脩隨念故乃至能證究竟涅槃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스스로 보시[施]하며 염하는 것이니, ‘나는 지금 뛰어난 이익을 잘 얻은지라 비록 한량없는 간탐의 때[慳垢]에 얽힌 중생들 가운데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온갖 간탐의 때를 멀리 여의고 보시를 능히 행하며 비록 집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온갖 재보(財寶)에 집착하지 않고 손을 펴서 보시하며 크게 제사를 지내고 복전(福田)에 공양하며 은혜로운 평정[惠捨]을 완전히 갖추고 평등한 분포(分布)를 좋아하고 있다’라고 하느니라.
024_1150_b_04L復次大名若聖弟子以如是相隨念自施謂我今者善得勝利雖居無量慳垢所纏衆生衆中而心遠離一切慳垢能行惠施雖處居家而能不著一切財寶舒手布施作大祠祀供養福田惠捨具足樂等分布
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자기 자신의 보시를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보시한 곳에 대하여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자기 자신이 보시한 곳에 대하여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자기 자신의 보시에 대하여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
024_1150_b_10L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自施貪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心自施所其心正直心正直故得義威得法威勢於自施所能引起欣故生喜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故心定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害得預法流於自施所脩隨念故乃至能證究竟涅槃
또 대명아, 성스러운 제자는 이와 같은 모양으로 모든 하늘[天]을 따라 염하는 것이니,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과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사다천(覩史多天)과 낙변화천(樂變化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다. 이와 같은 모든 하늘들은 그들이 성취한 믿음[信]ㆍ계율[戒]ㆍ들음[聞]ㆍ평정[捨]ㆍ지혜[慧]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저 천상에 태어나 모든 쾌락을 받는 것이니, 나도 역시 믿음과 계율과 들음과 평정과 지혜가 있으므로 역시 장차 그곳에 나서 모든 하늘과 함께 동일한 쾌락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느니라.
024_1150_b_18L復次大名若聖弟子以如是相隨念諸天謂有四大王衆天三十三天夜摩天睹史多天樂變化天他化自在天如是諸天就信故戒故聞故捨故慧故從此處沒生彼天中受諸快樂我亦有信亦當生彼與諸天衆同受快
024_1150_c_02L저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따라 염할 때에는 탐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성냄이 마음을 얽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마음을 얽지 못하며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그 마음은 바르고 곧나니, 마음이 바르고 곧기 때문에 뜻[義]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고 법(法)의 위엄 있는 기세를 얻느니라.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반가움을 끌어 일으키게 되나니, 반가워하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은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평등한 데에 머무를 수 있고, 괴롭히고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는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데에 머무르며, 예법류(豫法流)를 얻고 모든 하늘의 처소에서 따라 염함을 닦기 때문에 나아가 마지막 열반을 증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024_1150_c_02L彼聖弟子以如是相隨念天時不纏心瞋不纏心癡不纏心於諸天所其心正直心正直故得義威勢法威勢於諸天所能引起欣欣故生心喜故身安身安故受樂樂故心心定故於不平等諸有情類得住平等於有惱害諸有情類住無惱害得預法流於諸天所脩隨念故乃至能證究竟涅槃
그는 이와 같은 6수념(隨念)을 닦을 때에 무루(無漏)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의 반가움과 지극히 반가움과 현전에서 지극히 반가움과 반가워하는 성품과 반가워하는 종류와 뜻에 알맞은 것과 뜻을 즐겁게 하는 것과 기꺼워하는 성품과 기꺼워하는 종류와 화합하기를 좋아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과 능히 감당해 냄이 있는 성품과 좋아서 뛰는 것과 좋아서 뛰는 성품과 기뻐하는 것과 기뻐하는 성품을 통틀어 기쁨[喜]이라 하며 또한 희각지(喜覺支)라 한다.
024_1150_c_10L彼脩如是六隨念時所有無漏作意相應心欣極欣現前極欣性欣類適意悅意喜性喜類和合不別離歡欣悅預有堪任性躍踊躍性歡喜歡喜性摠名爲喜名喜覺支
이것이야말로 거룩하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가 없고 취(取)가 없으며, 도(道)에 따르는 행이요, 도와 함께 있으며, 도에 따라 굴러서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
모든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者]는 보는 대로 모든 행(行)을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모든 행 가운데서 깊이 그 허물을 보고 영원한 열반에 대하여 깊이 그 공덕을 보지만, 만일 아라한이면 해탈한 마음 그대로 사유하고 관찰해서 최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마음의 반가움과 지극히 반가움과 나아가 기뻐함과 기뻐하는 성품을 ‘희각지’라고 한다.
024_1150_c_15L是聖出世無漏無取道隨行道俱有道隨轉能正盡苦住苦邊諸有學者如所見諸行思惟觀察令至究竟於諸行中深見過患於永涅槃深見功德若阿羅漢如解脫心思惟觀察令至究竟所有無漏作意相應心欣極欣乃至歡喜歡喜性名喜覺支
,說一切有部法薀足論卷第八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