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25_0001_b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025_0001_c_01L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25_0002_a_01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25_0002_b_01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16)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17) 이것은 법상(法相)18)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대각(大覺)이시며 깨달은 이 가운데 왕[覺中王]과 각왕(覺王)께서 주신 삼계(三界)의 해[日]21)와 해탈(解脫)과 묘법(妙法)과 지혜[智]가 귀착(歸着)하는 데와 지혜 있는 이가 귀의할 모든 성인들께 머리 조아립니다.
025_0002_b_17L稽首大覺覺中王, 覺王所供三界日,
解脫妙法智所歸, 智者所依諸聖衆。
아비달마(阿毘達磨)의 바다는 건너기 어렵고 부처님 입에서 흐르는 못물을 천 명의 성인이 마시며 경계[境]22)의 큰 어둠[巨溟]을 잘 풀어주시니 저는 지성으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025_0002_b_19L阿毘達磨海難渡, 佛口池流千聖飮,
於境巨溟能善決, 故我至誠今頂禮。
밝은 해로 인간을 비춰 주시지 않으신다면 빽빽한 숲의 어두움을 누가 밝히겠으며 만일 아비달마론(阿毘達磨論)이 없다면 지혜로 알바의 어두움을 누가 없애버리리까.
025_0002_b_21L朗日不擧照人閒, 稠林昏翳孰能遣,
若無阿毘達磨論, 智所知冥誰殄滅。
025_0002_c_01L 아비달마라는 바른 법의 등불은 마음속의 청정한 눈이요 지혜의 근본이며
알아야 할 숲 속의 해요 사론(邪論)을 [벨] 칼이며 개사(開士)23)의 위력이요 여래장(如來藏)24)입니다.
025_0002_b_23L阿毘達磨正法燈, 心中淨眼智根本,
所知林日邪論劍, 開士威力如來藏。
삼계를 비추는 광명이요 혜안(慧眼)의 도(道)이며 온갖 법의 등불이요 부처님 말씀의 바다이며 능히 뛰어난 지혜 일으키고 모든 의심 깨뜨리는 이것은 모든 성현의 법다운 길이옵니다.
025_0002_c_02L三界照明慧眼道, 一切法燈佛語海,
能發勝慧破諸疑, 是諸聖賢法衢路。
지혜로운 이의 지혜의 물이며 큰 못이요 지(智)ㆍ용(勇)ㆍ예(銳)ㆍ승(勝)을 구하는 기본이니 이 뛰어난 법을 깨달아 알면 총명에 이르고 이 거룩한 가르침을 깨치면 참다운 불자(佛子)입니다.
025_0002_c_04L智者慧水大陂池, 求智勇銳勝基本,
了此勝法至聰明, 悟斯聖教眞佛子。
2) 총올타남송(總嗢拕南頌)25)
025_0002_c_06L摠嗢拕南頌
처음은 목건련온(目乾連蘊)이요 다음은 보특가라(補特伽羅)26)이며 인(因)ㆍ소연(所緣)ㆍ잡(雜)27)이요 사구(四句)가 맨 나중이다.
025_0002_c_07L初目乾連蘊, 次補特伽羅, 因所緣雜類,
四句最爲後。
1. 식신족론(識身足論) 목건련온(目乾連蘊)28) ①
1) 올타남송(嗢拕南頌)
025_0002_c_09L識身足論目乾連蘊第一之一第一嗢拕南頌
근(根)ㆍ악행(惡行)ㆍ상(想)과 심(尋)ㆍ사(思)ㆍ계(界)ㆍ누(漏)와 화(火)ㆍ애(愛)ㆍ소유(所有)와 구(垢)ㆍ박(縛)이니 모두 세 가지씩이다.
025_0002_c_10L根惡行想, 尋思界漏, 火愛所有,
垢縛皆三。
사문 목련(目連)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無爲)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契經)29)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善語]과 좋은 문체[善詞]로 설하시되 ‘세 가지 불선근[三不善根]이 있나니, 탐내는 불선근이요 성내는 불선근이며 어리석은 불선근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그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관한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관한다고 한다면, 마땅히‘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고 또한 ‘과거는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관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요 또한 ‘미래는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2_c_21L若言觀未來,應說有未來,不應無未來;言未來無,不應道理。
025_0003_a_01L만일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한다면, ‘하나의 보특가라(補特伽羅)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非前非後] [한 찰나(刹那) 동안에] 하나는 곧 관할 대상이 되고 하나는 곧 관하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바로 관할 대상이 되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관하는 자인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곧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관하지 않는다 하면 곧 탐내는 불선근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선한 것이 아니다’라고 이미 관하였거나 지금 관하거나 앞으로 관할 것이 없으며, 만일 관할 수 없다면 이는 곧 이미 싫어하였거나[已厭] 지금 싫어하거나[今厭] 앞으로 싫어할[當厭] 것이 없다.
만일 싫어할 수 없다면, 곧 이미 잡염을 여의었거나[已離染] 지금 잡염을 여의거나[今離染] 앞으로 잡염을 여읠[當離染] 것이 없으며, 만일 잡염을 여읠 수 없다면 곧 이미 해탈하였거나[已解脫] 지금 해탈하거나[今解脫] 앞으로 해탈할[當解脫] 것이 없다. 만일 해탈할 것이 없다면, 곧 이미 반열반(般涅槃)30)하였거나 지금 반열반하거나 앞으로 반열반할 것이 없다.”
착하지 못한 것과 같아서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과 버릴 대상[所棄]과 등질 대상[所捨]과 끊을 대상[所斷]과 두루 다 아는[遍知] 것도 그러하다. 다시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어떤 이가 탐내는 불선근에 대하여 ‘후세에 괴로움[苦]의 이숙(異熟)을 받는다’라고 이미 관하였고 지금 관하며 앞으로도 관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관한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관한다고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또한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관한다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또한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3_b_01L만일 현재의 것을 관한다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역시 업(業)을 짓고 또한 곧 이 업의 이숙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역시 업을 짓고 또한 곧 이 업의 이숙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 않으면 곧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나니,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관하지 않는다 하면, 곧 탐내는 불선근에 대하여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는다’고 이미 관하였거나 지금 관하거나 앞으로 관할 것이 없다. 만일 관할 수 없다 하면, 곧 이미 싫어하였거나 지금 싫어하거나 앞으로 싫어할 것이 없으며, 만일 싫어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잡염을 여의었거나 지금 잡염을 여의거나 앞으로 잡염을 여읠 것이 없다. 만일 잡염을 여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해탈하였거나 지금 해탈하거나 앞으로 해탈할 것이 없으며, 만일 해탈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반열반하였거나 지금 반열반하거나 앞으로 반열반할 것이 없을 것이다.”
탐내는 불선근에서와 같이, 성내는 불선근ㆍ우치의 불선근도 그러하다. 몸의 악행[身惡行]과 말의 악행[語惡行]은 곧 착하지 못한 것[不善]이면서 결(結)이 아니며 박(縛)도 아니며 수면(隨眠)도 아니며 수번뇌(隨煩惱)도 아니며 전(纏)도 아니다. 이것은 버릴 대상[所棄]이요 등질 대상[所捨]이요 끊을 대상[所斷]이요 두루 다 아는 것[遍知]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025_0003_c_01L욕계(欲界)ㆍ에계(恚界)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해계(害界)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이 아니며 박도 아니요 수면도 아니며, 이것은 수번뇌이고 전이 아니며, 이것은 바로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욕루(慾漏)와 무명루(無明漏)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유루(有漏)는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탐의 화[貪火]ㆍ진의 화[瞋火]ㆍ치의 화[癡火]와 욕애(欲愛)는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탐의 소유[貪所有]ㆍ진의 소유[瞋所有]ㆍ치의 소유[癡所有]와 탐의 구[貪垢]ㆍ진의 구[瞋垢]ㆍ치의 구[癡垢]와 탐의 박[貪縛]ㆍ진의 박[瞋縛]ㆍ치의 박[癡縛]은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네 가지의 폭류가 있으니, 욕폭류(欲瀑流)와 유폭류(有瀑流)와 견폭류(見瀑流)와 무명폭류(無明瀑流)31)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그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어떤 이가 욕폭류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미 관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관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관하리라는 것에 대하여 그대는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3_c_22L彼答言:爾。復問彼言:汝然此不?謂有能於欲瀑流已觀、今觀、當觀是不善?
025_0004_a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관한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관한다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는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관한다 하면, ‘미래는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는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관한다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바로 관할 대상[所觀]이요 하나는 곧 관하는 자[能觀]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바로 관할 대상이요 하나는 곧 관하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곧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관한다는 말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관하지 않는다 하면, 곧 욕폭류에 대하여 ‘이것은 바로 선하지 않다’라고 이미 관하였거나 지금 관하거나 앞으로 관할 것이 없으리니, 만일 관하는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싫어하였거나 지금 싫어하거나 앞으로 싫어할 것이 없으며, 만일 싫어하는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잡염을 여의었거나 지금 잡염을 여의고 있거나 앞으로 잡염을 여읠 것이 없다. 만일 잡염을 여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해탈하였거나 지금 해탈하고 있거나 앞으로 해탈할 것이 없으며, 만일 해탈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반열반하였거나 지금 반열반하고 있거나 앞으로 반열반할 것이 없다.”
마치 선하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과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요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도 그러하다. 다시 그에게 물으리라. “어떤 이가 욕폭류에 대하여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는다’라고 이미 관하였거나 지금 관하거나 앞으로 관할 것을 그대는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4_b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관한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관한다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관한다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관한다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역시 업을 짓고 또한 곧 이 업의 이숙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역시 업을 짓고 또한 곧 이 업의 이숙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 않으면, 곧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관한다고 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관하지 않는다 하면, 곧 욕폭류에 대하여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는다’라고 이미 관하였거나 지금 관하거나 앞으로 관할 것이 없을 것이다. 만일 관하는 것이 없다면, 곧 이미 싫어하였거나 지금 싫어하거나 앞으로 싫어할 것이 없으며, 만일 싫어할 것이 없다면, 곧 이미 잡염을 여의었거나 지금 잡염을 여의거나 앞으로 잡염을 여읠 것이 없다. 만일 잡염을 여읠 수 없다 하면, 곧 이미 해탈하였거나 지금 해탈하거나 앞으로 해탈할 것이 없고 만일 해탈할 것이 없다 하면, 곧 이미 반열반하였거나 지금 반열반하거나 앞으로 반열반할 것이 없다.
마치 욕폭류에서와 같아서 견폭류(見瀑流)와 무명폭류(無明瀑流)도 그러하다. 유폭류(有瀑流)는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면서 이것은 바로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과 버릴 대상[所棄]이요 등질 대상[所捨]이요 끊을 대상[所斷]이요 두루 다 아는 것[遍知]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異熟)을 받는 것이 아니다.
폭류에서와 같이 액(扼)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모든 취(取) 가운데서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요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025_0004_c_01L아어취(我語取)는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바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와 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요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계(繫)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이며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하는 것이다.
025_0005_b_01L모든 업도[十業道] 중 앞의 일곱 가지 업도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이면서 결도 아니며 박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요 수번뇌도 아니며 전도 아니고 이것은 곧 버릴 대상이요 등질 대상이며 끊을 대상이요 두루 다 아는 것이니, 후세에 괴로움의 이숙을 받게 한다.
결(結)ㆍ개(蓋)ㆍ각지(覺支)ㆍ심(心)ㆍ수(受)ㆍ의(意)와 조련(調練)과 타견(陀堅)이 맨 뒤이다.
025_0005_b_05L結蓋覺支心受意, 調練陁堅最爲後。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눈의 결[內眠結]이 있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눈의 결이 있다고 깨달아 알 것이요, 만일 안으로 눈의 결이 없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눈의 결이 없다고 깨달아 알아서 이와 같은 눈의 결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면 생긴 뒤에는 끊어지게 하고 끊어진 뒤에는 앞으로 다시는 생기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여실히 안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안다고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말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안다고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말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안다고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곧 알아야 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곧 아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면,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5_c_01L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눈의 결이 있으면 ≺나에게는 안으로 눈의 결이 있다≻ 고 여실하고도 분명히 알고, 만일 안으로 눈의 결이 없으면 ≺나에게는 안으로 눈의 결이 없다≻고 여실하고도 분명히 안다. 이와 같은 눈의 결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가 생기면 생긴 뒤에는 끊어지게 하고 끊어진 뒤에는 앞으로 다시는 생기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여실히 안다’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거나 어기고 거역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마치 눈의 결[眠結]과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결도 또한 그러하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 한다.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탐욕의 덮개[貪慾蓋]가 있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있다≻라고 깨달아 알 것이요, 만일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없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없다≻라고 깨달아 알아서, 이와 같은 탐욕의 덮개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면 생긴 뒤에는 끊어지게 하고 끊어진 뒤에는 앞으로는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여실히 안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안다고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안다고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6_a_01L만일 현재의 것을 안다고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아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알려고 하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면,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안다는 말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알지 못한다 하면, 이것은 곧 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있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있다≻라고 깨달아 알 것이요, 만일 안의 탐욕의 덮개가 없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탐욕의 덮개가 없다≻라고 깨달아 알아서, 이와 같은 탐욕의 덮개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면, 생긴 뒤에는 끊어지게 하고 끊어진 뒤에는 앞으로는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여실히 안다’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마치 탐욕의 덮개에서와 같아서 진에개(瞋恚蓋)ㆍ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ㆍ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 및 의개(疑蓋)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025_0006_a_11L如貪欲蓋,如是瞋恚、惛沈、睡眠、掉擧、惡作疑蓋亦爾。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염등각지(念等覺支)가 있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염등각지가 있다≻고 깨달아 알 것이요, 만일 안의 염등각지가 없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염등각지가 없다≻고 깨달아 알아서 이와 같은 안의 염등각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생기게 하고 생긴 뒤에는 머무르고 잊지 않고 닦아 익히고 완성시키며 더욱더 늘리고 광대하게 하면서 지혜로써 증득케 하는 것도 또한 여실히 안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6_b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안다고 말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안다고 말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所知]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자[能知]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알지 못한다 하면, 이것은 곧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안으로 염등각지가 있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염등각지가 있다≻라고 깨달아 알 것이요, 만일 안으로 염등각지가 없으면, 여실히 ≺나에게는 안으로 염등각지가 없다≻라고 깨달아 알아서 이와 같은 염등각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생기게 하고 생긴 뒤에는 머무르고 잊지 않고 닦아 익히고 원만하게 하며 더욱더 늘리고 광대하게 하면서 지혜로 증득하는 것도 또한 여실히 안다’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탐이 있는 마음[有貪心]이면 여실히 이것은 바로 탐이 있는 마음이라고 깨달아 알며, 만일 탐을 여읜 마음[離貪心]이면 여실히 이것은 바로 탐을 여읜 마음이라고 깨달아 안다’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6_c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안다고 하면 ‘과거는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안다고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안다고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所知]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자[能知]로서 두 개의 마음의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알아야 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곧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알지 못한다 하면, 이것은 곧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만일 탐이 있는 마음이면, 여실히 이것은 바로 탐이 있는 마음이라고 깨달아 알며, 만일 탐을 여읜 마음이면, 여실히 이것은 바로 탐을 여읜 마음이라고 깨달아 안다’라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마치 탐심이 있는 마음과 탐심을 여읜 마음에서와 같아서 진이 있는 마음[有瞋心]ㆍ진을 여읜 마음[離瞋心]과 치가 있는 마음[有癡心]ㆍ치를 여읜 마음[離癡心]과 거두어진 마음[略心]38)ㆍ산란한 마음[散心]과 위축된 마음[沈心]ㆍ뽐내는 마음[擧心]과 들뜬 마음[掉動心]ㆍ들뜨지 않은 마음[不掉動心]과 고요하지 않은 마음[不寂靜心]ㆍ고요한 마음[寂定心]ㆍ안정되지 않은 마음[不定心]ㆍ안정된 마음[定心]과 닦지 않은 마음[不修心]ㆍ닦은 마음[修心]과 해탈하지 않은 마음[不解脫心]ㆍ해탈한 마음[解脫心]을 여실하고도 분명히 아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025_0007_a_01L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느낌[受]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하나는 몸의 느낌[身受]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느낌[心受]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具壽)39)여, 만일 어느 때에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을 받아들인다면 그때에는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는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몸의 느낌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느낌으로서 두 개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몸의 느낌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느낌으로서 두 개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곧 현재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느낌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하나는 몸의 느낌이요, 다른 하나는 마음의 느낌이다’라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즐거운 느낌[樂受]이요, 둘째는 괴로운 느낌[苦受]이며,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7_b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만일 어느 때에 즐거운 느낌 등 세 가지의 느낌을 받아들인다면, 그때에는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또한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첫째는 즐거운 느낌이요, 둘째는 괴로운 느낌이요,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첫째는 즐거운 느낌이요, 둘째는 괴로운 느낌이며,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 이것은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말씀하시되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즐거운 느낌이요, 둘째는 괴로운 느낌이며,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뜻[意]과 법(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意識)이 발생한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025_0007_c_01L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만일 어느 때에 의식이 일어난다면, 그 의식은 그때에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뜻과 의식의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뜻과 의식의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발생한다’라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착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이[齒]로써 이를 부지하고 혀끝을 잇몸에 붙이며, 다시 그 마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항복받고 붙잡아 지니고[執持] 조련하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어느 것을 조련하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조련한다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조련한다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8_a_01L만일 현재의 것을 조련한다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조련하는 대상[所調練]이요, 다른 하나는 조련하는 자[能調練]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조련하는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조련하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의 것을 조련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조련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조련하지 않는다 하면, 이것은 곧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이[齒]로써 이를 부지하고 혀끝을 잇몸에 붙이며, 다시 그 마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항복받고 붙잡아 지니고 조련하라’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저 구수 보색게라사리(補穡揭羅娑利) 필추에게 ‘열여덟 가지의 의근행[十八意近行]이 있는 것을 일컬어 사부(士夫)40)라 한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만일 어느 때에 눈이 물질[色]을 본 뒤에 기쁜 곳[喜處]을 따르는 모든 물질의 근행[色近行]이 있으면 그때에 열일곱 가지의 나머지 의근행(意近行)은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8_b_01L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열여덟 가지의 의근행이 동시에 현행(現行)하는 일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열여덟 가지의 의근행이 동시에 현행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하면, 이것은 곧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저 구수 보색게라사리 필추를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열여덟 가지 의근행이 있는 것을 일컬어 사부라 한다’고 하신 이와 같은 계경에서의 세존의 말씀을 그대는 곧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하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계경을 비방하고 어기고 거역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무소연(無所緣)과 정려(靜慮)와 이생(異生)과 대사(大士)와 수(羞)와 유정들의 거처[有情居]를 널리 펴 설하는 것과 식(食)과 성제(聖諦)와 누를 끊는 것[斷漏]이다.
025_0008_b_10L無所緣靜慮, 異生大士羞, 宣說有情居,
食聖諦斷漏。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無所緣心]이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필추는 요별(了別)하나니, 요별하기 때문에 일컬어 식(識)이라 한다. 어느 것을 요별하느냐 하면, 이른바 물질[色]을 요별하고 소리[聲]ㆍ내음[香]ㆍ맛[味]ㆍ촉감[觸]ㆍ법[法]을 요별하느니라’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주어야 하리라.] “그대는 이미 논의에 지고 있다[墮負]. 만일 그대가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 있다 한다면 곧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필추는 요별하나니, 요별하기 때문에 일컬어 식이라 한다. 어느 것을 요별하느냐 하면, 이른바 물질을 요별하고 소리ㆍ내음ㆍ맛ㆍ촉감ㆍ법을 요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나니, 이와 같은 말씀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8_c_01L그대는 지금 만일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되 ‘필추는 요별하나니, 요별하기 때문에 일컬어 식이라 한다. 어느 것을 요별하느냐 하면, 이른바 물질을 요별하고 소리ㆍ내음ㆍ맛ㆍ촉감ㆍ법을 요별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인정한다면, 곧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란 반드시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그것이냐 하면, 이른바 과거를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미래를 반연하기도 하는 것이다.”
025_0008_c_03L彼作是言:無所緣心決定是有。何者是耶?謂緣過去或緣未來。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본래 어부였던 사저(沙底) 필추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저 여러 가지의 인(因)으로 말미암고 저 여러 가지의 연(緣)으로 말미암아 식(識)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저 여러 가지의 범주[數]에 떨어지나니, 눈과 물질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안식(眼識)의 범주에 떨어지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그리고 [소리ㆍ내음ㆍ맛ㆍ촉감]ㆍ법으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의식(意識)의 범주에 떨어진다’ 하셨는데, 그대는 그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주어야 하리라.] “그대는 논리에 지고 있다. 만일 그대가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면 곧 이른바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본래 어부였던 사저 필추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저 여러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고 저 여러 가지의 연으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며, 식이 생긴 뒤에는 저 여러 가지의 범주에 떨어지나니, 눈과 그리고 물질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안식의 범주에 떨어지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그리고 [소리ㆍ내음ㆍ맛ㆍ촉감]ㆍ법으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의식의 범주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야 하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9_a_01L그대가 이제 만일 이른바 계경에서 세존께서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본래 어부였던 사저 필추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저 여러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고 저 여러 가지의 연으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저 여러 가지의 범주에 떨어지나니, 눈과 그리고 물질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안식의 범주에 떨어지며,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그리고 [소리ㆍ내음ㆍ맛ㆍ촉감]ㆍ법으로 말미암아 식을 일으키고 식이 생긴 뒤에는 의식의 범주에 떨어진다’고 하신 말씀을 인정한다면, 곧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은 반드시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반드시 반연할 대상이 없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만일 나쁜 짓 한 것을 부끄러워하고[慚羞]ㆍ애락(愛樂)을 막아 수호하고 배운 것에 오래오래 있으면서 잘 머물면[善處] 세간의 네 가지 정려를 증득한다고 하니, 그것을 그대는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저 구수(具壽)가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는 여러 가지로 도리에 밝으며 범행을 같이한 어떤 이가 와서 말하기를 ‘구수여, 그대 스스로가 증득한 바를 기별(記別)해야 합니다’고 하면, 그는 말하기를 ‘구수여, 나는 지금 이미 세간의 네 가지 정려를 증득하였습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묻겠다. 곧 저 구수는 언제 증득한 것을 기별하는 것인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만일 과거의 것을 기별한다고 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의 것을 기별한다고 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의 것을 기별한다고 하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바로 기별할 대상[所記]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기별하는[能記]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며, 또 선정 가운데 있어서는 특이한 말[異語]을 해야 하나니,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바로 기별할 대상이요, 다른 하나는 곧 기별하는 자로서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또 선정 가운데 있어서의 특이한 말을 하지 않으면, 곧 현재의 것을 기별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의 것을 기별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것을 기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빈 것이어서 남보다 뛰어난 법[勝過人法]이 없으면서도 자칭 ‘있다’고 말할 뿐이니, 그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025_0009_a_22L若言不記過去、未來、現在,是則空無勝過人法,自稱言有,彼應毀壞。
025_0009_b_01L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의 근(根)이 있으니, 이른바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이니라.
필추야, 만일 이 다섯 가지의 근이 있으면 상품(上品)에 해당하며, 맹렬하고 날카로우며[猛利] 고르고 좋으며[調善] 원만하기 때문에 아라한(阿羅漢)ㆍ구분해탈(俱分解脫)41)을 이루나니, 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층 미약하고 둔해져서 혜해탈(慧解脫)을 이루고, 이로부터 아래로 더 내려가면 한층 더 미약하고 둔해져서 신증(身證)을 이루며, 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또 한층 미약하고 둔해져서 견득(見得)을 이루고, 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또 한층 미약하고 둔해져서 신해탈(信解脫)을 이루며, 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한층 미약하고 둔해져서 수법행(隨法行)을 이루고, 이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더 한층 미약하고 둔해져서 수신행(隨信行)을 이루느니라.
필추야, 이와 같이 근바라밀다(根波羅密多)42)를 반연하여 과바라밀다(果波羅密多)43)가 시설된 줄 알아야 하며, 과바라밀다를 반연하여 보특가라(補特伽羅)44) 바라밀다가 시설된 줄 알아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다섯 가지의 근은 헛되이 버려짐이 없느니라. 비구야, 만일 이 다섯 가지의 근에 대하여 일체가 다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생(異生)45)을 벗어난 곳[外異生品]에 머무른다≻고 하느니라.’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유학(有學)46)이 번뇌에 얽힌 마음[纏心]을 일으킬 때에 이 다섯 가지의 근은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25_0009_c_01L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배우는 마음[學心]이요, 다른 하나는 번뇌의 마음으로서 이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야 하나,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한 보특가라에게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한 찰나 동안에] 하나는 배우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번뇌의 마음으로서 이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곧 현재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에 있다고 말함은 도리에 맞지 않다.
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구수 무멸(無滅)47)을 위하여 사람[大士]의 거친 생각[尋思]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욕탐심이 적은 것은 곧 법이지만 욕탐이 많은 것은 법이 아니니라[非法]’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욕탐이 적은 것은 곧 무슨 법인가? 이것은 심소유법[心所有法]이어서 마음과 상응한다[心相應]. 구수여, 만일 아라한이 몸은 욕계(欲界)에 있으면서 현재 멸정(滅定)에 들었다면 이와 같이 욕탐이 적은 것은 어느 세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곧 ‘현재 멸정에 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 멸정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아라한의 몸이 욕계에 있으면서 현재 멸정에 들어있을 때는 조금의 욕탐도 없어야 한다.”
025_0010_a_01L사문 목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고 현재와 무위는 있다.” 그에게 물어야만 하리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훌륭한 말씀과 좋은 문체로 설하시면서 구수 라호라(羅怙羅)48)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라호라야’ 만일 바르게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면서 남에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함이 없거나 그런 짓을 한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가 나쁜 업을 짓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리라’라고 하셨는데, 그대는 이 말씀을 옳다고 여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물어야 하리라.] “구수여, 남에게 부끄러워하고 자신에게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바로 어떠한 법인가? 이것은 심소유법(心所有法)이어서 마음과 상응한다고 하면, 구수여 만일 아라한이 몸은 욕계(欲界)에 있으면서 현재 멸정(滅定)에 들어 있을 때는 저 부끄러움은 어느 세상에 있어야 하는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고 말하면 ‘과거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과거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미래에 있다고 말하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 하고, ‘미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현재에 있다고 말하면 ‘현재 멸정에 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니, ‘현재 멸정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아라한의 몸이 욕계에 있으면서 현재 멸정에 들어 있을 때는 응당 부끄러움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