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25_0149_b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025_0149_c_01L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25_0150_a_01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10)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1)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2)가 중국의 중심13)에 흐르는 팔천(八川)14)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 : 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5)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6)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 : 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25_0150_b_01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 : 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17)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18) 이것은 법상(法相)19)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달・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 : 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색(色)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색깔[色]로서 모든 4대종(大種)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所造色]을 말한다. 4대종이라 함은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이며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라 함은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와 접촉되는 것[所觸]의 한 부분[一分]과 무표색(無表色)이다.
025_0150_c_01L심(心)이란 무엇인가?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을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6식신(識身)이니, 곧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심소법(心所法)이란 무엇인가? 어떤 법이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ㆍ작의(作意)ㆍ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ㆍ신(信)ㆍ근(勤)ㆍ심(尋)ㆍ사(伺)ㆍ방일(放逸)ㆍ불방일(不放逸)ㆍ선근(善根)ㆍ불선근(不善根)ㆍ무기근(無記根)과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智)와 모든 견(見)과 소유하고 있는 모든 현관(現觀)을 말한다. 또 그 밖에 이러한 종류의 법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니, 이를 통틀어 심소법이라 한다.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란 무엇인가? 어떤 법이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득(得)ㆍ무상정(無想定)ㆍ멸정(滅定)ㆍ무상사(無想事)ㆍ명근(命根)ㆍ중동분(衆同分)ㆍ의득(依得)ㆍ처득(處得)ㆍ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성(無常性)ㆍ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을 말하며, 또 그 밖의 이러한 종류의 법이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통틀어 심불상응행이라 한다.
무위(無爲)란 무엇인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허공(虛空)이요 둘째는 비택멸(非擇滅)이요 셋째는 택멸(擇滅)이다. 지계(地界)란 무엇인가? 단단한 성품[堅性]이다. 수계(水界)란 무엇인가? 축축한 성품[濕性]이다. 화계(火界)란 무엇인가? 따뜻한 성품[溫性]이다. 풍계(風界)란 무엇인가? 가벼우면서 함께 움직이는 성품[輕等動性]이다.
025_0151_a_01L색(色)이란 무엇인가? 지니고 있는 모든 빛깔[色]로서 좋은 현색[顯色]과 나쁜 현색과 또는 그 두 가지의 중간인 사현처색(似顯處色)20)이다. 이와 같은 모든 빛깔은 두 가지의 식[二識]으로 인식하게 되니, 안식과 의식(意識)이다. 이 가운데 한 종류를 안식이 먼저 알고, 안식이 받아들인 뒤에 의식이 그를 따라 알게 된다. 성(聲)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집수가 있는 대종[有執受大種]을 인(因)으로 삼는 소리[聲]와 집수가 없는 대종[無執受大種]을 인으로 삼는 소리이다. 이와 같은 모든 소리는 두 가지의 식으로 알게 되니, 이식과 의식이다. 이 가운데 한 종류를 이식이 먼저 알고 이식이 받아들인 뒤에 의식이 그를 따라 알게 된다. 냄새[香]란 무엇인가? 모든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냄새로서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와 평등한 냄새[平等香]21)이니 코로 맡는다. 이와 같은 모든 냄새는 두 가지의 식으로 알게 되니, 비식과 의식이다. 이 가운데 한 종류를 비식이 먼저 알고, 비식이 받아들인 뒤에 의식이 그를 따라 알게 된다.
미[味]란 무엇인가? 모든 물질이 소유하고 있는 맛[味]으로서, 뜻에 맞는 맛과 뜻에 맞지 않는 맛과 순사처(順捨處)의 맛22)이니 혀로써 맛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맛은 두 가지의 식으로 알게 되니, 설식과 의식이다. 이 가운데 한 종류를 설식이 먼저 알고 설식이 받아들인 뒤에 의식이 그를 따라 알게 된다. 접촉되는 것23)의 일부분[所觸一分]이란 무엇인가? 매끄러운 성품[滑性]ㆍ껄끄러운 성품[澁性]ㆍ가벼운 성품[輕性]ㆍ무거운 성품[重性]ㆍ차가운 성품[冷性]ㆍ배고픈 성품[飢性]ㆍ목마른 성품[渴性]이니,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접촉[觸]과 4대종(大種)은 두 가지의 식으로 알게 되니, 신식과 의식이다. 이 가운데 한 종류를 신식이 먼저 알고 신식이 받아들인 뒤에 의식이 그를 따라 알게 된다. 무표색(無表色)24)이란 무엇인가? 법처에 속한 물질[法處所攝色]이다. 이것과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은 언제나 하나의 식으로 알게 되니 그 식은 의식이다.
025_0151_b_01L안식(眼識)이란 무엇인가? 안근을 의지하여 각각의 빛깔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식(耳識)이란 무엇인가? 이근을 의지하여 각각의 소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비식(鼻識)이란 무엇인가? 비근을 의지하여 각각의 냄새를 인식하는 것이다. 설식(舌識)이란 무엇인가? 설근을 의지하여 각각의 맛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식(身識)이란 무엇인가? 신근을 의지하여 각각의 접촉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의식(意識)이란 무엇인가? 의근을 의지하여 모든 법(法)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受)란 무엇인가? 받아들이는 성품[領納性]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로운 느낌[苦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樂受]이다. 상(想)이란 무엇인가? 형상을 취하는 성품[取像性]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작은 생각[小想]ㆍ큰 생각[大想]ㆍ한량없는 생각[無量想]이다. 사(思)란 무엇인가? 마음에서 조작하는 성품[造作性]이니, 곧 그것은 의업(意業)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착한 사[善思]ㆍ착하지 못한 사[不善思]ㆍ무기의 사[無記思]이다. 촉(觸)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가 화합된 성품[三和性]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즐거운 느낌을 따르는 접촉[順樂受觸]이요, 괴로운 느낌을 따르는 접촉[順苦受觸]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따르는 접촉[順不苦不樂受觸]이다.작의(作意)란 무엇인가? 마음을 일깨우는 성품[警覺性]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작의[學作意]ㆍ배울 것이 없는 이의 작의[無學作意]ㆍ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 이의 작의[非學非無學作意]이다.
욕(欲)이란 무엇인가? 조작하기를 바라는 성품[樂作性]이다. 승해(勝解)란 무엇인가? 마음이 바로 뛰어나게 알고[正勝解]ㆍ이미 뛰어나게 알았고[已勝解]ㆍ앞으로 뛰어나게 알[當勝解] 성품이다. 염(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明記性]이다. 정(定)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한 경계가 되는 성품[心一境性]25)이다. 혜(慧)란 무엇인가? 마음이 법을 가리는 성품[擇法性]이다. 신(信)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맑고 깨끗한 성품[澄淨性]이다. 근(勤)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용감하고 굳센 성품[勇悍性]이다. 심(尋)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거칠게 움직이는 성품[麤動性]이다. 사(伺)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성품[細動性]이다.
방일(放逸)이란 무엇인가? 착한 법을 닦지 않는 성품이다. 불방일(不放逸)이란 무엇인가? 착한 법을 닦는 성품이다. 선근(善根)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 있으니, 곧 탐냄이 없는[無貪] 선근, 성냄이 없는[無瞋] 선근, 어리석음이 없는[無癡] 선근이다. 불선근(不善根)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가 있으니, 탐하는[貪] 불선근이요, 성내는[瞋] 불선근이며 어리석은[癡] 불선근이다. 무기근(無記根)이란 무엇인가? 네 가지가 있으니, 곧 무기의 애(愛)요, 무기의 견(見)이며 무기의 만(慢)이요 무기의 무명(無明)이다.
025_0151_c_01L결(結)에는 아홉 가지[九種]가 있다.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무명결(無明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의결(疑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 애결(愛結)이란 무엇인가? 3계(界)를 탐하는 것이다. 에결(恚結)이란 무엇인가?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만결(慢結)이란 무엇인가? 일곱 가지의 만[七慢]을 말하는 것이니, 곧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만(卑慢)ㆍ사만(邪慢)이다. 만(慢)이란 자기보다 못한 이에 대하여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이요, 혹은 자기와 같은 이에 대하여 자기와 같다고 여겨서,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傲慢)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과만(過慢)이란 자기와 같은 이에 대하여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기보다 나은 이에 대하여 자기와 똑같다고 여겨,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만과만(慢過慢)이란 자기보다 나은 이에 대하여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아만(我慢)이란 5취온(取蘊)에 대하여 평등하게 따라 관[等隨觀]하면서 나[我]와 내 것[我所]을 고집하며,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증상만(增上慢)이란 증득하지 못한 가장 수승한 증득할 법[上勝證法]에 대하여 ‘나는 이미 증득했다’고 말하며, 아직 이르지 못한 가장 수승한 증득할 법에 대하여 ‘나는 이미 이르렀다’고 말하며, 아직 접촉하지 못한 가장 수승한 증득할 법에 대하여 ‘나는 이미 접촉하였다’고 여기며 아직 증득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수승한 증득할 법에 대하여 ‘나는 이미 증득하였다’고 여겨서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비만(卑慢)이란 나보다 훨씬 나은 다른 이에 대하여 스스로 조금만 하열하다 여겨서,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사만(邪慢)이란 진실로 덕이 없으면서 ‘나는 덕이 있다’고 여겨서 이로 말미암아 지금 막 오만하고 이미 오만하였고 앞으로도 오만한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025_0152_a_01L무명결(無明結)이란 무엇인가? 3계(界)에서 지혜가 없는 것[無智]이다. 견결(見結)이란 무엇인가? 4견(見)이니,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이다. 유신견(有身見)이란 5취온(取蘊)에 대하여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하여, 이로 말미암아 인(忍)ㆍ낙(樂)ㆍ혜(慧)ㆍ관(觀)ㆍ견(見)26)을 일으키는 것이다. 변집견이란 5취온에 대하여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혹은 아주 없어지는 것[斷]이라거나 혹은 항상 있는 것[常]이라고 고집하여, 이로 말미암아 인ㆍ낙ㆍ혜ㆍ관ㆍ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견이란 원인[因]을 비방하고 결과[果]를 비방하며 혹은 작용(作用)을 비방하기도 하고 혹은 실제의 일[實事]을 파괴하기도 하여, 이로 말미암아 인ㆍ낙ㆍ혜ㆍ관ㆍ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취결(取結)이란 무엇인가? 2취(取)가 있으니, 곧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이다. 견취라 함은 5취온에 대하여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최상이라고 고집하고 수승하다고 고집하며 으뜸이라고 고집하고 지극하다고 고집하여, 이로 말미암아 인ㆍ낙ㆍ혜ㆍ관ㆍ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계금취라 함은 5취온에 대하여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청정한 것이라 고집하고 해탈할 수 있다고 고집하며 벗어날 수 있다고 고집하여, 이로 말미암아 인ㆍ락ㆍ혜ㆍ관ㆍ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결(疑結)이란 무엇인가? 진리[諦]에 대하여 망설이는 것이다. 질결(嫉結)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질투하고 꺼리는 것이다. 간결(慳結)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비루하고 인색한 것이다.
욕탐(欲貪)의 수면은 다섯 가지가 있다. 욕계에 매인[欲界繫] 견고(見苦)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탐(貪)이다. 진(瞋)의 수면은 다섯 가지가 있다.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진(瞋)이다. 유탐(有貪)의 수면은 열 가지가 있다. 색계계(色界繫) 다섯 가지와 무색계에 매인[無色界繫] 다섯 가지이다. 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란 색계에 매인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탐(貪)이다. 무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도 마찬가지이다.
025_0152_b_01L만(慢)의 수면은 다섯 가지가 있다. 욕계에 매인 다섯 가지와 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와 무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이다. 욕계에 매인 다섯 가지란 욕계에 매인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만(慢)이다.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각각 다섯 가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무명(無明)의 수면은 열 다섯 가지가 있다. 욕계에 매인 다섯 가지와 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와 무색계에 매인 다섯 가지이다. 욕계에 매인 다섯 가지란 욕계에 매인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무명이다.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각각 다섯 가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견(見)의 수면은 서른 여섯 가지[三十六種]가 있다. 욕계에 매인 열 두 가지와 색계에 매인 열 두 가지와 무색계에 매인 열 두 가지이다. 욕계에 매인 열 두 가지란 욕계에 매인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과 견고(見苦)와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와 견집(見集)ㆍ견멸(見滅)에서 끊어야 할 사견과 견취이다.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각각 열 두 가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의(疑)의 수면은 열 두 가지가 있다. 욕계에 매인 네 가지와 색계에 매인 네 가지와 무색계에 매인 네 가지이다. 욕계에 매인 네 가지란 욕계에 매인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의심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각각 네 가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번뇌(隨煩惱)란 무엇인가? 모든 수면을 또한 수번뇌라고도 한다. 수번뇌를 수면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있나니, 수면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더러워진[汚染] 행온(行蘊)의 심소(心所)를 말하는 것이다. 전(纏)은 여덟 가지가 있다.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수면(睡眠)ㆍ악작(惡作)ㆍ질(嫉)ㆍ간(慳)ㆍ무참(無慙)ㆍ무괴(無愧)이다.
025_0152_c_01L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혜에는 열 가지가 있다. 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타심지(他心智)ㆍ세속지(世俗智)ㆍ도지(道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이다. 법지(法智)란 무엇인가? 욕계에 매인 모든 행[諸行]과 모든 행의 원인[因]과 모든 행의 소멸[滅]과 모든 행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의 지혜[無漏智]이다. 또 법지와 법지지(法智智)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의 지혜가 있으니, 이 또한 법지라 한다. 유지(類智)란 무엇인가?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과 모든 행의 원인과 모든 행의 소멸과 모든 행의 끊을 수 있는 길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의 지혜이다. 또 유지와 유지지(類智地)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의 지혜가 있으니 이 또한 유지라 한다. 타심지(他心智)란 무엇인가? 지혜를 닦아 이룬 것이니 이것은 수행의 결과이다. 수행에 의지하여 이미 얻어 잃지 않고 욕계와 색계에 매인 것이 화합하여 눈앞에 나타난 다른 이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일부분 무루(無漏)인 다른 이의 심ㆍ심소를 아는 것이니, 이 모두를 타심지라 한다. 세속지(世俗智)란 무엇인가? 모든 유루의 지혜[有漏慧]이다.
고지(苦智)란 무엇인가? 5취온(取蘊)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非常) 괴로운 것(苦)이며 공(空)하며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사유(思惟)하여 일으킨 무루의 지혜이다. 집지(集智)란 무엇인가? ‘유루(有漏)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결과를 내는 원인[因]이며 발생하여 나타나게[集] 하며 상속하여 나게[生] 하며 이루게 하는 연(緣)이다’라고 사유하여 일으킨 무루의 지혜이다. 멸지(滅智)란 무엇인가? 택멸(擇滅)에 대하여 ‘물(物)ㆍ심(心)의 속박이 없는 진리(滅)이며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는 고요함(靜)이며 3계(界)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妙) 온갖 재액(災厄)을 여의었다[離]’고 사유하여 일으킨 무루의 지혜이다. 도지(道智)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도[聖道]에 대하여 ‘그것은 진리에 들어가는 길(道)이며 올바른 이치에 계합[如]하는 것이며 열반의 적정한 경지에 가게[行]하는 것이며 생사계를 벗어나게[出] 하는 것이다’라고 사유하여 일으킨 무루의 지혜이다.
진지(盡智)란 무엇인가?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苦]을 알았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滅]을 증득하였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닦았다’라고 두루 알아서 이로 말미암아 일으키는 지(智)ㆍ견(見)ㆍ명(明)ㆍ각(覺)ㆍ해(解)ㆍ혜(慧)ㆍ광(光)ㆍ관(觀)을 모두 이름하여 진지라 한다. 무생지(無生智)란 무엇인가?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을 끊었으므로 다시는 더 끊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으므로 다시는 더 증득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으므로 다시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아서 이로 말미암아 일으키는 지ㆍ견ㆍ명ㆍ각ㆍ해ㆍ혜ㆍ광ㆍ관을 모두 이름하여 무생지라 한다.
025_0153_a_01L존재하는 모든 견해[見]란 모든 지(智)를 또 다른 이름으로 견이라고 한다. 견이면서도 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여덟 가지 현관변(現觀邊)27)의 인(忍)이다. 첫째는 고법지인(苦法智忍)이요, 둘째는 고류지인(苦類智忍)이며, 셋째는 집법지인(集法智忍)이요, 넷째는 집류지인(集類智忍)이며, 다섯째는 멸법지인(滅法智忍)이며, 여섯째는 멸류지인(滅類智忍)이요, 여덟째는 도류지인(道類智忍)이다. 존재하는 모든 현관(現觀)이란 지(智)와 견(見)을 다함께 이름하여 현관이라 한다.
득(得)이란 무엇인가? 모든 법을 얻는 것[得]이다. 무상정(無想定)이란 무엇인가? 이미 변정천(邊淨天)의 번뇌[染]는 여의었으나, 아직 그 윗세계의 번뇌를 여의지 못하고서 벗어났다는 생각[出離想]을 마음으로 내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심ㆍ심소가 소멸한 것이다. 멸정(滅定)이란 무엇인가? 이미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의 번뇌[染]를 여의고 멈추어 쉰다는 생각[止息想]으로 마음을 내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심ㆍ심소가 소멸한 것이다. 무상사(無想事)란 무엇인가?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나서 심ㆍ심소가 소멸한 것이다. 명근(命根)이란 무엇인가? 3계(界)의 수명(壽命)을 말하는 것이다. 중동분(衆同分)이란 무엇인가? 유정으로서 같은 종류가 되는 성품[同類性]을 말하는 것이다.
의득(依得)이란 무엇인가? 의뢰할 대상[所依]이 되는 처소를 얻는 것이다. 사득(事得)이란 무엇인가? 모든 온(蘊)을 얻는 것이다. 처득(處得)이란 무엇인가? 내외처(內外處)를 얻는 것이다.
025_0153_a_09L依得云何?謂得所依。處事得云何?謂得諸蘊。處得云何?謂得內外處。
생(生)이란 무엇인가? 모든 온(蘊)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노(老)란 무엇인가? 모든 온으로 하여금 익게 하는 것[熟]이다. 주(住)란 무엇인가? 이미 생긴 모든 행(行)으로 하여금 파괴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무엇인가? 이미 생긴 모든 행으로 하여금 소멸하고 파괴되게 하는 것이다.
명신(名身)이란 무엇인가? 증어(增語)이다. 구신(句身)이란 무엇인가? 글자가 원만한 것[字滿]이다. 문신(文身)이란 무엇인가? 글자가 모여 있는 것[字衆]이다. 허공(虛空)이란 무엇인가? 그 자체가 텅 비고 넓고 장애하는 것이 없어서 물질이 움직이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다. 비택멸(非擇滅)이란 무엇인가? 멸(滅)이 계박을 여의지[離繫] 못한 것이다. 택멸(擇滅)이란 무엇인가? 멸(滅)이 계박을 여읜 것이다.
025_0153_b_01L 10지(智)가 있으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법지(法智)란 무엇을 반연하는가? 욕계에 매인[欲界繫] 모든 행(行)과 일부분의 무루법(無漏法)을 반연한다. 유지(類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과 일부분의 무루법을 반연한다. 타심지(他心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욕계에 매인 것과 색계에 매인 것이 화합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이의 심ㆍ심소(心心所)와 일부분 무루의 다른 이의 심ㆍ심소를 반연한다. 세속지(世俗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온갖 법[一切法]을 반연한다.
고지(苦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5취온(取蘊)을 반연한다. 집지(集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유루의 원인[有漏因]을 반연한다. 멸지(滅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택멸(擇滅)을 반연한다. 도지(道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유학ㆍ무학(有學無學)의 법을 반연한다. 진지(盡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온갖 유위법(有爲法)과 택멸을 반연한다. 무생지(無生智)는 무엇을 반연하는가? 온갖 유위법과 택멸을 반연한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法智)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와 일부분의 무루법을 반연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와 모든 행위의 원인과 모든 행위의 소멸과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類智)는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와 일부분의 무루를 반연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와 모든 행위의 원인과 모든 행위의 소멸과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타심지(他心智)는 욕계에 매인 것과 색계에 매인 것이 화합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이의 심ㆍ심소와 일부분 무루의 다른 이의 심ㆍ심소를 반연하는가? 【답】타심지는 욕계에 매인 것과 색계에 매인 것이 화합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이의 심ㆍ심소와 일부분 무루의 다른 이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세속지(世俗智)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가? 【답】세속지는 온갖 법이 혹은 이치대로 이끄는 것[如理所引]과 혹은 이치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과 혹은 이치대로 이끈 것도 아니고 이치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고지(苦智)는 5취온을 반연하는가? 【답】고지는 5취온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괴로운 것이며 공이며 나가 아니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集智)는 유루의 원인을 반연하는가? 【답】집지는 유루의 원인이 고과(苦果)를 내는 원인[因]이며 발생하여 나타나게[集] 하며 상속하여 나게[生] 하며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025_0153_c_01L【문】무엇 때문에 멸지(滅智)는 택멸을 반연하는가? 【답】멸지는 택멸이어서 물ㆍ심의 속박이 없는 진리[滅]이며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靜],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妙] 온갖 재액을 여의었다[離]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도지(道智)는 유학ㆍ무학의 법을 반연하는가? 【답】도지는 유학ㆍ무학의 법이 진리에 들어가는 길[道]이며 올바른 이치에 계합[如]하는 것이며 열반의 고요한 경지에 가게[行] 하는 것이며 생사계를 벗어나게[出]하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진지(盡智)는 온갖 유위의 법과 택멸을 반연하는가? 【답】진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을 알았고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을 끊었으며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고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무생지(無生智)는 온갖 유위의 법과 택멸을 반연하는가? 【답】무생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을 끊었으므로 다시는 더 끊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으므로 다시는 더 증득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으므로 다시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법지(法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少分]인가? 【답】법지는 바로 법지의 전 부분이요, 7지(智)의 일부분이니, 타심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ㆍ진지ㆍ무생지이다. 【문】유지(類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유지는 바로 유지의 전 부분이요, 7지의 일부분이니, 타심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ㆍ진지ㆍ무생지이다.
【문】타심지(他心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타심지는 바로 타심지의 전 부분이요, 4지의 일부분이니, 법지ㆍ유지ㆍ세속지ㆍ도지이다. 【문】세속지(世俗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세속지는 곧 세속지의 전 부분이요, 1지의 일부분이니, 타심지이다.
025_0154_a_01L【문】고지(苦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고지는 곧 고지의 전 부분이요, 4지의 일부분이니, 법지ㆍ유지ㆍ진지ㆍ무생지이다. 집지(集智)와 멸지(滅智)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도지(道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도지는 곧 도지의 전 부분이요, 5지(智)의 일부분이니, 법지ㆍ유지ㆍ타심지ㆍ진지ㆍ무생지이다.
【문】진지(盡智)는 몇 가지 지혜의 전 부분이고 몇 가지 지혜의 일부분인가? 【답】진지는 곧 진지의 전 부분이요, 6지의 일부분이니, 법지ㆍ유지ㆍ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이다. 무생지(無生智)도 마찬가지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法智)는 곧 법지의 전 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欲界繫] 모든 행위[諸行]와 모든 행위의 원인[因]과 모든 행위의 소멸[滅]과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法智)는 곧 타심지(他心智)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서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고지(苦智)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5취온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괴로운 것이며 공이며 나가 아니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집지(集智)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은 고과(苦果)를 내는 원인이며 발생시켜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 하며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멸지(滅智)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은 물ㆍ심의 속박이 없는 진리이며,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 온갖 재액을 여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도지(道智)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법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며 올바른 이치에 계합하는 것이며 열반의 적정한 경지에 가게 하는 것이 생사계를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025_0154_b_01L【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진지(盡智)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법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괴로움을 알았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을 끊었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을 증득하였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법지는 곧 무생지(無生智)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법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을 끊었으므로 다시는 더 끊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을 증득했으므로 다시는 더 증득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으므로 다시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類智)는 곧 유지의 전 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와 모든 행위의 원인과 모든 행위의 소멸과 모든 행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類智)는 곧 타심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에서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고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5취온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괴로운 것이며 공이며 나가 아니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집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은 고과(苦果)를 내는 원인이며 발생시켜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 하며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멸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은 물ㆍ심의 속박이 없는 진리이며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 온갖 재액을 여의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도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란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며, 올바른 이치에 계합하는 것이며 열반의 고요한 경지에 가게 하는 것이며, 생사계를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진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이 괴롭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의 원인을 끊었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을 증득하였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유지는 곧 무생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유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을 끊었으므로 다시는 더 끊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을 증득했으므로 다시는 더 증득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으므로 다시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025_0154_c_01L【문】무엇 때문에 타심지(他心智)는 곧 타심지의 전 부분이라 하는가? 【답】타심지는 욕계에 매인 것과 색계에 매인 것이 화합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이의 심ㆍ심소와 일부분 무루의 다른 이의 심ㆍ심소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타심지는 곧 법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타심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서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타심지는 곧 유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타심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서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타심지는 곧 세속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타심지는 다른 이의 유루(有漏)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타심지는 곧 도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타심지는 성스러운 도[聖道]에서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세속지(世俗智)는 곧 세속지의 전 부분이라 하는가? 【답】세속지는 온갖 법을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거나 혹은 이치대로 이끌지 않는 것이거나 혹은 이치대로 이끄는 것도 아니요 이치대로 이끌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세속지는 곧 타심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세속지는 다른 이의 유루의 심ㆍ심소를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고지(苦智)는 곧 고지의 전 부분이라 하는가? 【답】고지는 5취온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괴로운 것이며, 공이요 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고지는 곧 법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고지는 욕계에 매인 5취온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괴로운 것이며, 공이요 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문】무엇 때문에 고지는 곧 유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고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5취온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괴로운 것이며, 공이요 나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025_0155_a_01L【문】무엇 때문에 고지는 곧 진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고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을 알았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고지는 곧 무생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고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集智)는 곧 집지의 전 부분이라고 하는가? 【답】집지는 유루의 인(因)은 고과(苦果)를 내는 원인이요 발생시켜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 하고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는 곧 법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집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은 고과를 내는 원인이요 모아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 하고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는 곧 유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집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원인은 고과를 내는 원인이요 발생시켜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 하고 이루게 하는 연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는 곧 진지의 일부분이라 하는가? 【답】집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을 끊었다’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집지는 곧 무생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집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의 원인을 끊었으므로 다시는 더 끊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멸지(滅智)는 곧 멸지의 전 부분이라 하는가? 【답】멸지는 택멸(擇滅)은 물질과 마음의 속박이 없는 진리요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고 온갖 재액을 여읜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멸지는 곧 법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멸지는 욕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을 물질과 마음의 속박이 없는 진리요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고 온갖 재액을 여의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멸지는 곧 유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멸지는 색계에 매인 것과 무색계에 매인 모든 행위의 소멸은 물질과 마음의 속박이 없는 진리요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고 온갖 재액을 여읜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멸지는 곧 진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멸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멸지는 곧 무생지의 일부분이라고 하는가? 【답】멸지는 스스로 ‘나는 이미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였으므로 다시는 더 증득해야 할 것이 없다’라고 두루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