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_0424_c_02L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전후 두 마음[二心]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가?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이것은 방생론(傍生論)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두 마음이 전전하여 상대방의 인(因)이 될 수 없음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전후의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렇게 설하긴 했지만 그 까닭은 설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전후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가? 【답】 제2의 차제연(次第緣)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설하는 심(心)ㆍ심수법(心數法)은 차제연에 의거해서 미래세법(未來世法)을 일으키고, 현재세법과 화합해서 그에 의지해서 현재세법을 일으키고 화합하지 않으면 현재세법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래세법에 차제연이 되면 일으키고, 차제연이 되지 않으면 일으키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전후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하기를 중생은 천연적으로 하나하나의 마음이 차례로 일어나고 두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제2의 차제연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은 앞에서 두 굴레가 서로 얽어매는 것과 같다고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제2의 차제연이 없는가? 【답】 중생은 하나하나의 마음이 차례로 일어나고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중생은 하나하나의 마음이 차례로 일어나고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없는가? 【답】 제2의 차제연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전하여 상대의 인(因)이 된다’고 대답한 의미이다. 가령 현재에 하나의 차제연이 있으면 미래에 하나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여기에서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비유하면 마치 양의 우리[羊園]에 많은 문이 닫혀서 협소해지면 우리의 좁은 문으로 양이 한 마리 한 마리씩 나오는 것과 같다. 저 심ㆍ심수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현재의 한 찰나가 미래의 한 찰나를 차례로 열어주는데, 설령 현재세에 여러 찰나가 있다 해도 미래의 여러 찰나를 차례로 열어주는 것은 없기 때문에 현재의 일찰나가 미래의 일찰나를 차례로 열어준다. 작의자(作義者)가 말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가? 【답】 어떤 사람은 “가령 명근(命根)이 한 찰나이면 명근을 의지하는 마음도 한 찰나이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가령 신근(身根)이 한 찰나이면 신근을 의지하는 마음도 한 찰나이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면 마음을 조복할 수 없다. 가령 지금의 한 마음도 오히려 드세어서 조복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두 마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만약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면 일시(一時)에 번뇌와 출요가 있게 되어 한 마음은 번뇌가 되고 한 마음은 출요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해탈도 없고, 번뇌를 떠남도 없고, 승(乘)도 없으니, 이와 같은 등등의 허물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만약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면 세 마음이 일어나는데 무슨 방애가 있겠는가. 만약 세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면 3계신(界身)을 일시에 받을 수 있다. 삼계신을 일시에 받을 수 있으면 삼계가 파괴되고, 삼계가 파괴되면 한 몸에 욕계의 몸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색계ㆍ무색계의 몸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해탈할 수 없다. 만약 세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면 네 마음이 함께 일어나는데 무슨 방애가 있겠는가. 만약 네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면 일시에 4생신(生身)1)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4생이 파괴되어 한 몸에 태생을 받을 수도 있고, 난생을 받을 수도 있고, 습생을 받을 수도 있고, 화생을 받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해탈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네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면, 다섯 마음이 함께 일어나는데 무슨 방애가 있겠는가. 만약 다섯 마음이 함께 일어나면 일시에 5도의 몸을 받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5도가 파괴된다. 만약 5도가 파괴되면 한 몸으로 지옥의 몸 내지는 하늘의 몸을 받게 된다. 만약 다섯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다면 여섯 마음이 함께 일어나는데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만약 여섯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면 일시에 6근(根)을 반연하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여섯 마음이 일어나는데 방애가 되지 않고 나아가 백천 미래세 가운데서 함께 일어나 한 찰나에 일어나고 한 찰나에 소멸된다면 미래가 없다.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기 때문에 과거가 있는데, 만약 미래가 없다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다면 과거가 없다. 만약 과거가 없다면 유위(有爲)가 없고 유위가 없으면 무위(無爲)가 없으며, 유위ㆍ무위가 없으면 일체제법이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일시에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없다.” 【문】 가령 여러 심수법의 경우는 일시에 일어나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허물이 없다. 만약 두 마음이 심수법처럼 일시에 일어난다면 또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 가령 하나의 마음이 미래의 일심(一心)에 차제연이 되어 화합하면, 일심과 화합하기 때문에 중생은 하나하나의 마음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관(觀)을 일으키면 미래의 일심과 화합하는 것처럼 일심과 화합하기 때문에 중생은 하나하나의 마음을 일으킨다. 만약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면 두 가지 수(受)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두 가지 수가 함께 일어나면 중생의 신법(身法)이 파괴된다. 중생의 신법이 파괴되면 두 종류의 몸이 있게 된다. 만약 두 몸이 있게 되면 10음(陰)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 차제연(次第緣)의 체성(體性)은 무엇인가? 【답】 가령 『파가라나(波伽羅那)』의 경우는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심(最後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과거ㆍ현재의 심ㆍ심수법이 체성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모든 과거ㆍ현재의 심ㆍ심수법이 차제연의 체성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아라한의 최후심에는 차제연의 의미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차제연이라고 하는가? 【답】 아라한의 최후심에는 허물이 없기 때문에 여타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저 최후심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데 만약 일어난다면 차제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차제연의 상(相)은 어떤 것인가? 【답】 체성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상이며,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체성이다. 일체제법은 체성과 분리시켜서 별도로 상을 세울 수 없다. 화수밀(和須蜜) 존자는 “서로가 [길을 열어주고] 피해주는 것이 차제연의 의미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자취를 인발(引發)해서 서로 피해주는 것이 차제연의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능히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차제연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 차제연이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능취(能取)의 의미가 차제연이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세력이 작용하는 의미가 차제연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차례로 마음을 일으키는 상(相)이 차제연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찰나에서 찰나를 일으키는 것이 차제연이다”라고 하였다. 아비담인(阿毘曇人)은 “상(相)이 다른 법을 함께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차제연이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자기와 비슷하게 일으키는 것이 차제연이다”라고 하였다. 【문】 이미 차제연의 체상(體相)은 설하였지만 그 까닭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차제연이라고 하는가? 【답】 등무간(等無間)이 차제연의 의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심(心)은 심과 차제연이 되고 심수법과는 차제연이 되지 않으며, 심수법은 심수법과는 차제연이 되고 심과는 차제연이 되지 않는 것인가? 【답】 상사법(相似法)을 설할 때 사문이 설한 것처럼 심은 심과 차제연이 되고 수(受)는 수에 차제연이 된다. 따라서 그처럼 말하는 것은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탐욕심은 다시 탐욕심에 차제연이 되고, 진에(瞋恚)는 다시 진에의 차제연이 되고, 우치는 다시 우치에 차제연이 되고, 선(善)은 다시 선에 차제연이 되고, 불선(不善)은 다시 불선에 차제연이 되고, 무기(無記)는 다시 무기에 차제연이 되어서 이와 같이 말한다면 해탈열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은 심에 차제연이 되고 심수법과도 차제연이 되며, 심수법은 심수법에 차제연이 되고 심에도 차제연이 되며, 전심취(前心聚)가 후심취(後心聚)에 차제연이 된다”고 이처럼 말하는 것이 옳다. 【문】 만약 심과 심이 차제연이 된다면 심과 심은 서로 수순하면서 심수법은 수순하지 않는가? 또 심수법과 심수법이 차제연이 되면 서로는 수순하면서 심은 수순하지 않는 것인가? 【답】 만약 상사법을 설할 때 사문이 설한 것과 같다면, 심은 심을 수순하고 심수법은 심수법을 수순한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 되며, “심은 심수법에 차제연이 되고 심수법은 심에 차제연이 되며 전심취는 후심취에 차제연이 되어 모두 평등하므로 차별이 없다. 비유하면 콩무더기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문】 『파가라나』에서 설한 것과 같다면, 어떤 법이 상대법[彼法]에 차제연이 될 때 어떤 때는 차제연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답】 상대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문】 여기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자(前者)인가, 후자(後者)인가? 전법이 일어나지 않으면 후법을 차제라고 하지 않는데 만약 전법이 일어나면 차제라고 하는가? 또 후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전법을 차제라고 하지 않는데 후법이 일어나면 차제라고 하는가? 가령 세제일법(世第一法)과 고법인(苦法忍)이 차제가 되는 경우에, 세제일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고법인을 차제라고 하지 않는데 만약 일어나면 차제라고 하는가? 또 고법인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세제일법을 차제라고 하지 않는데 만약 일어나면 차제라고 하는가? 전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후법을 차제라고 하지 않고 일어나면 차제라고 한다면 심이 있을 때는 가능하지만 심이 없을 때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일칠(一七)의 경우와 일칠을 넘어선 경우에 출정심(出定心)과 입정심(入定心)을 차제라고 하는데, 제2 찰나심(第二刹那心)이 반드시 일어난다. 왜냐하면 가령 어떤 법이 상대법에 차제연이 되면, 필경 이 법으로 하여금 제2 찰나심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생도 없고, 법도 없고, 주술도 없고, 약초도 없고 불(佛)ㆍ벽지불(辟支佛)ㆍ성문(聲聞)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두 가지 정(定)은 체(體)가 없다. 후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전법을 차제라고 하지 않으며, 만약 후법이 일어나면 이것을 차제라고 한다고 한다면, 고법인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세제일법을 차제라고 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은 “전법(前法)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차제가 아니라고 한다”라고 말해야 된다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심이 있을 때는 가능하겠지만 심이 없을 때는 어떻게 가능한가? 【답】 심이 있을 때 그러하다면 심이 없을 때도 또한 가능하다. 왜냐하면 가령 무상정과 멸진정에 들어가면, 저 입정심(入定心)과 정(定)의 초찰나(初刹那)는 취과(取果)이기도 하고 여과(與果)2)이기도 하며, 나머지 모든 찰나와 출정심(出定心)은 단지 취과라고 하기 때문이다. 저 입정심이 소멸되어 과거가 되면 정(定)의 나머지 찰나와 출정심은 현재여서 여과가 된다. 이것은 그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차제연의 의미에는 어떤 때는 취과이고 어떤 때는 여과인 의미가 없고, 여과일 때가 바로 취과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 여과일 때가 바로 취과라면, 심이 있을 때는 가능하겠지만 심이 없을 때는 어떻게 가능한가? 【답】 가령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입정심과 정(定)의 처음 한 찰나는 취과이기도 하고 여과이기도 하다. 저 입정심이 소멸되어 과거가 되고, 정의 나머지 찰나와 출정심이 눈앞에 나타나면 취과ㆍ여과이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어떤 때는 취과이고 어떤 때는 여과인 의미가 없게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과거법(過去法)이 작위함[作爲]이 있는가? 【답】 과거법은 작위하여 과를 취하거나[取果] 과를 취하는데 힘이 되어 줄 수는 있어도[與果] 과(果)는 없다. 과거세(過去世)는 색을 보고[見色] 법을 아는[知法] 작용은 없고, 힘이 되어서 과를 취하도록 하는 작용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후법(後法)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전법(前法)을 차제라고 하지 않고, 후법이 일어나면 전법을 차제라 한다”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고법인(苦法忍)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면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차제라고 하지 않는가? 【답】 차제(次第)라고 할 수는 있지만 차제연(次第緣)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만약 고법인이 일어나면 차제라고 하며 또한 차제연이라고도 한다. 차제와 차제연의 경우처럼, 차제ㆍ유차제(有次第)와 상속(相續)ㆍ유상속(有相續)과 의(依)ㆍ유의(有依) 같은 경우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문】 미래세(未來世) 중에는 차제연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제법(諸法)은 미래세 가운데 차례로 머물러 있어야 하므로 정방편(正方便)을 닦는다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聖道)가 미래세 가운데 이미 차례가 정해져 있어서 시절이 도래하면 일어나는 것이니, 정방편을 닦는다 해도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또 큰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탐욕을 제어하고 조복하여 부정관(不淨觀)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를 제어하고 조복하여 대치관(對治觀)을 일으킬 수 없으면 해탈열반을 얻을 수 없다. 만약 미래세에 차제연이 없다면, 『팔분경(八分經)』]에서 “이 사람은 12겁 내지 20겁 동안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한 것과 어떻게 의미가 통할 수 있으며, 어떻게 3업(業)의 차별인 현법보(現法報)ㆍ생법보(生法報)ㆍ후법보(後法報)를 알 수 있는가? 또 무엇 때문에 일체시(一切時)에 세제일법은 단지 고법인 만을 일으키고 진지(盡智)3) 등의 제법은 일으키지 않으며 무엇 때문에 금강유정(金剛喩定)은 단지 진지만을 일으키고 나머지 법은 일으키지 않는가? 【답】 미래세 가운데는 차제연이 없다고 해야 한다. 【문】 만약 없다면 앞에서 말한 모든 허물이 없겠지만 『팔분경』에서 설한 것과 어떻게 의미가 통할 수 있는가? 【답】 세존께서 과거ㆍ현재의 모습을 비교 관찰하여 또한 미래도 알기 때문이다. 【문】 그것은 어째서인가? 【답】 세존께서는 과거세를 관하여 저 중생이 이와 같은 업을 닦아서 그 만큼의 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아셨고, 이 중생이 이와 같은 업을 닦아서 그 만큼의 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신다. 또 모든 중생이 과거세에 이와 같은 업을 닦아서 현세 중에서 이와 같은 보(報)를 받음을 알며, 모든 중생이 그와 같은 업을 지어서 어떤 경우에는 생보(生報)를 받고 어떤 경우에는 후보(後報)를 받음을 알고,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업을 지어서 어떤 경우에는 현보(現報)를 받고, 어떤 경우에는 생보를 받고, 어떤 경우에는 후보(後報)를 받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중생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의 상(相)이 있어서 중생신(衆生身)에 머무는데, 세존께서는 선정이나 신통을 인유하지 않고 중생신 가운데 이러한 법이 있어서 그 만큼의 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을 알며, 이 상을 보고 즉시에 이 중생이 현법보(現法報)를 받고 다음에 생보를 받고 다시 후보를 받음을 안다”고 하였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비상지(比相智)만 있고 요달지(了達智)는 없음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따라서 “세존게서는 요달지가 있어서 미래를 아실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미래법이 어지러워서 정(定)의 차제가 없어도 여래는 명정지(明淨智)로 미래법이 어지러워서 정의 차제가 없음을 알고,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업을 지어서 이 소겁을 지나면서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현보를 받고 다음에 생보를 받으며, 다시 후보를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오류가 없다. 가령 산수법(算數法)으로도 곡식의 무더기를 분명하게 알아서 오류가 없는데, 하물며 여래께 자연지(自然智)4)가 있음에랴. 【문】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차례로 고법인을 일으키고 진지(盡智) 등의 제법은 일으키지 않는가? 【답】 이것을 수(數)는 정해져도 사상(事相)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법인법(苦法忍法)은 6지(地)에 있지만 어느 지인지를 아직 알지 못하고, 고법인은 3근(根)과 상응하지만 어느 근과 상응하도록 정해졌는가를 알지 못하며, 4행(行)을 행하지만 어느 행을 행하도록 정해졌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증상인(增上忍)에 머물 때에는 지(地)ㆍ행(行)ㆍ근(根)은 정해져도 찰나(刹那)는 정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 찰나가 있으므로 어느 찰나가 일어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제연도 또한 부정(不定)이다. 세제일법에 머물 때는 지(地)ㆍ근(根)ㆍ행(行)ㆍ차제(次第)ㆍ찰나(刹那)의 5사(事)가 정해진다. 이것을 수는 정해져도 사상은 정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떤 법이 전법(前法)에 의지해서 상속하여 일어나면 반드시 차제연이 필요하지는 않다. 비유하면 외물(外物)이 차제연이 없이 전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데, 가령 싹이 전에 뿌린 씨앗에 의지해서 상속하여 일어날 수 있고, 나아가 열매가 앞의 꽃에 의지해서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내법(內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차제연을 인유하지 않고 전법에 의지해서 상속하여 일어난다. 고법인은 세제일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상속하여 일어나고, 나머지 진지(盡智) 등은 세제일법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금강유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또한 이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세법(未來世法)은 현재에 속하는 것이어서 현재와 화합하면 일어나지만 화합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세제일법이 후에 수도(修道)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분별하기 위해서 세제일법이 수도와 화합한다고 가설하면 이때에는 일어나겠지만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고법인은 세제일법에 속하기 때문에 일어나지만 나머지 법 내지는 진지(盡智) 등은 세제일법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미래세 중에 차제연이 있다”고 하였다. 【문】 만약 미래세에 차제연이 있다면, 제법이 차례로 머물러야 한다. 【답】 미래세 중에는 차제연(次第緣)의 의미는 있지만 차례로 머무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미래세법이 어느 차제연을 따라서 일어나는가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차례로 머무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후법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어느 연을 따라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도 정해지고 차례로 머무는 것도 정해진다. 비유하면, 마치 여러 비구들이 한 곳에 섞여서 거처할 때 납수(臘數)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항렬(行列)은 정해지지 않았다가, 후에 차례를 정해서 거주할 때는 납수도 정해지고 항렬도 정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어떤 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느 연에 속해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데 차례로 머무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가 후에 어떤 법이 일어나면 어느 연을 따라서 일어나는가도 정해지고 차례로 머무는 것도 정해진다. 【문】 만약 그렇다면 정방편(正方便)을 닦아도 소용없고 해탈열반도 얻을 수 없게 된다. 【답】 일심이 일어나는 차제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데, 선심(善心)과 염오심(染汚心)이다. 만약 정방편을 닦으면 선심은 곧바로 일어나고 염오심은 일어나지 않으며, 만약 삿된 방편을 수행하면 염오심은 곧바로 일어나고 선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치 하나의 종자에서 싹이 트는 경우와 썩는 경우의 두 가지가 일어나는데, 싹이 트는 인연을 만나면 곧 바로 싹이 나오고 썩는 인연을 만나면 썩어 버리는 것과 같다. 일심이 차례로 두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評】미래세 가운데는 차제연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차제연은 차례가 정해져서 머무는 법인데 미래세는 차례가 정해져서 머무름이 없고, 차제연은 차례가 섞여 있지 않은 법(不亂法)인데 미래법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미래세에 차제연이 있다면, 선(善)을 닦는 사람은 항상 선을 닦아야 한고, 악을 지어서는 안 되며 악을 닦을 때는 항상 악을 닦아야 하고 선을 닦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현재 제바달다(提婆達多)를 보면 본래는 선을 닦으려 했지만 후에 악을 지었고, 앙굴마라(央掘魔羅)와 같은 기허악인(氣噓惡人)은 본래 악을 지으려 했지만 후에 선을 닦았다. 이와 같은 등등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미래세에 차제연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색법(色法)은 차제연이 없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만약 어떤 법이 소의(所依)가 정해져 있고, 소행(所行)이 정해져 있고, 소연(所緣)이 정해져 있으면 그 때문에 차제연이 있지만, 색법은 소의도 없고, 소행도 없고, 소연도 없기 때문에 차제연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만약 어떤 법이 상응(相應)이고, 소의가 있고, 소행이 있고, 세용(勢用)이 있고, 소연이 있으면 그 때문에 차제연이 있겠지만, 색법은 상응하지 않고, 소의ㆍ소행ㆍ세용ㆍ소연이 없다. 그 때문에 차제연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차제연은 차례로 머무는 법이지만 색법은 차례로 머무는 법이 아니어서 어떤 때는 2만 겁이나 4만 겁, 혹은 6만 겁, 혹은 8만 겁 동안 단절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차제연이 눈앞에 나타날 때는 섞여 있지 않지만 색법이 눈앞에 나타날 때에는 섞여 있어서 일시(一時)에 욕계ㆍ색계의 계(繫)인 색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욕계의 계ㆍ불계의 색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색계의 계ㆍ불계의 색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화수밀(和須蜜) 존자는 “욕계에서는 색을 증익시켜 소멸되지 않게 하고, 색계에서는 색을 증익시켜 일어나게 한다”고 하였다. 불타제바 존자는 “소색(少色)이 쉴 새 없이 다색(多色)을 일으키고, 다색이 쉴 새 없이 소색을 일으킨다. 소색이 쉴 새 없이 다색을 일으키는 것은 가령 공중의 적은 구름이 많은 구름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작은 종자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과, 작은 가라라(迦羅羅)5)가 후에 큰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색이 쉴 새 없이 소생을 일으키는 것은 가령 커다란 풀더미를 태워서 소량의 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색이 쉴 새 없이 다색을 일으키고, 다색이 쉴 새 없이 소색을 일으키기 때문에 차제연이 없다”고 하였다. 【문】 가령 심수법(心數法)에서 적은 법이 쉴 새 없이 많은 법을 일으키고 많은 법이 쉴 새 없이 적은 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무각문관지(無覺無觀地)에서 다음에 무각유관(無覺有觀)을 일으키고 차례로 유각유관(有覺有觀)을 일으키면,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적은 법이 쉴 새 없이 많은 법을 일으킨다고 한다. 【문】 가령 유각유관지(有覺有觀地)에서 무각유관을 일으키고 다음에 무각무관을 일으키면,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많은 법이 쉴 새 없이 적은 법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답】 지(地)로 정해서는 안 되고 법수(法數)로 정해야 한다. 만약 1수(受)가 차례로 2수를 일으키거나 2수가 차례로 1수를 일으키면 위와 같은 허물이 있겠지만,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허물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에는 차제연이 없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만일 어떤 법이 소의(所依)가 정해져 있고, 소행(所行)이 정해져 있고, 소연(所緣)이 정해져 있으면 그 때문에 차제연이 있지만, 심불상응행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색법은 삼계의 계(繫)이고 심불상응행도 삼계의 계이다. 나머지는 앞의 색법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 심차제(心次第)임은 설하면서 무상천(無想天)은 설하지 않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마땅히 설해야 하는데 설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남겨놓은 설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용공(用功)6)과 난득(難得)7)인 경우는 설하였고, 용공이 아니고 난득이 아닌 경우는 설하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선법(善法)인 경우는 설했는데 저 무상천은 무기법(無記法)이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상정ㆍ멸진정은 심차제이고 차제연이 아닌가? 【답】 어떤 사람은 “만약 어떤 법이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을 증익시키고, 마음을 취하면 차제연이지만, 저 정(定)이 일어날 때는 마음에 머물고, 마음을 장애하고, 마음을 부려서 상속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차제연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 정은 심을 단절시키고 심행처(心行處)를 막아서 불상응(不相應)이고 세력으로 작용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차제연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 무상정과 멸진정에 들어간 심(心)과 출정심(出定心)은 차제이지만, 중간에 있는 많은 상속하는 정(定)은 무엇 때문에 차제라고 하는가? 【답】 이 중에 나머지 다른 심이 없기 때문에 차제라고 할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한 사람은 앞에서 가고 한 사람은 뒤에서 올 때 다른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묻기를 “누구와 함께 옵니까?”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의 뒤에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데, 그 둘의 중간에 촌락과 수목(樹木)과 축생 등의 물건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음에 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저 두 마음의 중간이 텅 비고 멀지만 나머지 심이 없기 때문에 차제(次第)라고 할 수 있다. 【문】 모든 법이 심차제(心次第)이면 또한 심무간(心無間)인가? 【답】 어떤 때는 심차제이지만 심무간이 아닌 경우도 있고, 심무간이면서 심차제가 아닌 경우가 있고, 심차제이면서 심무간이기도 한 경우가 있고, 심차제도 아니고 심무간도 아닌 경우가 있다. 심차제이지만 심무간이 아닌 경우는 정(定)의 초찰나와 나머지 심법(心法)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과 출정심(出定心)인데 이것을 심차제이면서 심무간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심무간이면서 심차제가 아닌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심법의 생(生)ㆍ주(住)ㆍ무상(無常)인데 이것을 심무간이면서 심차제가 아닌 것이라고 한다. 심차제이면서 심무간인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모든 심법(心法)인데 이것을 심차제이면서 또한 심무간인 것이라고 한다. 심차제도 아니고 심무간도 아닌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심법의 생ㆍ주ㆍ무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의 찰나와 출정심의 생ㆍ주ㆍ무상인데, 이것을 심차제도 아니고 심무간도 아닌 것이라고 한다. 【문】 모든 법이 심차제(心次第)이면 또한 정무간(定無間)인가? 【답】 4구(句)로 대답해야 한다. 심차제이면서 정무간이 아닌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모든 심법인데 이것을 심차제이면서 정무간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정무간이면서 심차제가 아닌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심법의 생ㆍ주ㆍ무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과 출정심의 생ㆍ주ㆍ무상인데, 이것을 정무간이면서 심차제가 아닌 것이라고 한다. 심차제이면서 또한 정무간인 경우는 정의 초찰나와 나머지 심법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과 출정심인데, 이것을 심차제이면서 또한 정무간인 것이라고 한다. 심차제도 아니고 정무간도 아닌 경우는 정의 초찰나 생ㆍ주ㆍ무상과 나머지 심법의 생ㆍ주ㆍ무상인데 이것을 심차제도 아니고 정무간도 아닌 것이라고 한다. 관(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별상관(別相觀)ㆍ총상관(總相觀)ㆍ허상관(虛相觀)이다. 별상관은 5온에서 ‘색(色)은 색상(色相)이다’라고 관하고 나아가 ‘식(識)은 식상(識相)이다’라고 관하며, 4대에서 ‘지(地)는 견상(堅相)이다’라고 관하고 나아가 ‘풍(風)은 동상(動相)이다’라고 관하는 것인데, 이것을 별상관이라고 한다. 총상관은 열여섯 가지 성행관(聖行觀)을 총상관이라고 하며, 허상관은 부정(不淨)ㆍ안반(安般)ㆍ무량(無量)ㆍ제입(除入)ㆍ해탈(解脫)ㆍ일체처(一切處)등을 허상관(虛相觀)이라고 한다. 【문】 이 세 가지 관에서 어떤 관이 차례로 성도(聖道)8)에 들어갈 수 있으며, 성도에서 나올 때는 어떤 관이 최초로 눈앞에 나타나는가? 【답】 어떤 사람은 “성도에 들어갈 때 세 가지 관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성도에서 나올 때 세 가지 관이 모두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총상관으로 성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에서 나올 때는 세 가지 관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문】 만약 허상관(虛相觀)으로 성도에 들어갈 수 없다면, 가령 이 경에서 “부정관(不淨觀) 다음에 염각의(念覺意)를 닦는다”고 설한 것과 어떻게 의미가 통할 수 있는가? 【답】 이것은 전전하여 상대의 인(因)이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니 마치 자손법(子孫法)과 같은 것이다. 【문】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먼저 부정관으로 심을 잘 조복하여 심을 지식(止息)시켜 모든 번뇌를 감당해 내고 질박하고 곧고 유연하게 하여 마음에 자재를 얻은 연후에 총상관이 눈앞에 나타나 성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총상관이 눈앞에 나타나서 성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에서 나올 때도 또한 총상관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가령 미지선(未至禪)을 의지하고, 초선(初禪)을 의지하고 선중간(禪中間)을 의지하여 정결정(正決定)을 얻어서 성도에서 나올 때는 욕계의 총상관이 눈앞에 나타날 수 있지만, 2선ㆍ3선ㆍ4선을 의지하여 정결정을 얻으면 저 욕계의 총상관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멀기 때문이다. 또 총상관으로 달분선근(達分善根)을 제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도에 들어간 후에 다시 총상관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인데, 성도에서 나올 때에 어떤 총상관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하는가? 【답】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의 중간에서 총상관(總相觀)을 닦는데, 이른바 제행무상ㆍ고ㆍ공ㆍ무아ㆍ열반적정이다. 성도에서 나올 때 이러한 관(觀)이 눈앞에 나타난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 되고, 앞에서와 같이 말하는 것이 옳다. 욕계(欲界)에 세 가지 관(觀)이 있는데,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생득혜(生得慧)이다. 색계(色界)에 세 가지가 있는데, 문혜ㆍ수혜(修慧)ㆍ생득혜이다. 무색계에 두 가지가 있는데 수혜와 생득혜이다. 【문】 욕계에 세 가지 관의 혜가 있는데, 어떠한 등등의 혜(慧)가 눈앞에 나타나 성도에 들어갈 수 있는가? 【답】 욕계에서는 사혜관(思慧觀)이 눈앞에 나타나 성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에서 나올 때는 세 가지 관이 눈앞에 나타난다. 색계에서는 수혜관(修慧觀)이 눈앞에 나타나 성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에서 나올 때는 문혜ㆍ수혜관의 두 가지가 눈앞에 나타나며 생득혜는 현전하지 않는다. 무색계에서는 수혜관이 현전하여 성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에서 나올 때도 수혜관이 눈앞에 나타나며 생득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성도에서 나올 때 욕계의 생득혜(生得慧)는 눈앞에 나타나는데,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가? 【답】 욕계의 생득혜는 맹렬하고 날카로운데 색계ㆍ무색계의 혜는 맹렬하고 날카롭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미지선(未至禪)에 의지해서 아라한과를 얻어 성도에서 나오는 경우에는 다시 미지지(未至地)와 욕계의 심을 일으키고,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의지해서 아라한과를 얻어 성도에서 나올 때는 다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심을 일으키며, 나머지 지(地)를 의지해서 아라한과를 얻어 성도에서 나올 때는 바로 그 지(地)의 심을 일으킨다. 초선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미(味)ㆍ정(淨)ㆍ무루(無漏)이다. 내지 무소유처에도 세 가지가 있으며, 비상비비상처에는 미ㆍ정 두 가지가 있다. 미상응(味相應)은 차례로 미상응과 정을 일으키고 무루는 일으키지 않으며, 정은 세 가지를 일으키고, 무루는 정과 무루 두 가지는 일으키고 미ㆍ정은 일으키지 않는다. 초선(初禪)에 네 가지가 있는데 처분(處分)ㆍ주분(住分)ㆍ승진분(勝進分)ㆍ달분(達分)이 있으며, 내지 비상비비상처에도 또한 네 가지가 있다. 퇴분(退分)은 차례로 처분과 주분을 일으키고 승진분과 달분은 일으키지 않으며, 주분(住分)은 차례로 주분과 퇴분과 승진분은 일으키고 달분은 일으키지 않는다. 승진분은 차례로 승진분과 주분과 달분은 일으키고 퇴분은 일으키지 않으며, 달분(達分)은 차례로 달분과 승진분을 일으키고 주분과 퇴분은 일으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퇴분은 차례로 세 가지를 일으키고 달분은 일으키지 않으며, 주분과 승진분은 네 가지를 모두 일으키고, 달분은 퇴분을 제외한 세 가지를 차례로 일으킨다”고 하였다. 【문】 가령 2선ㆍ3선ㆍ4선지에서 초선에 들어가고자 하면 식(識)이 눈앞에 드러나는데, 몇 가지 관(觀)이 눈앞에 나타나는가? 【답】 머물고 있는 지(地)에 따라서 나타난다. 욕(欲)을 아직 떠나지 않은 경우에는 세 가지 관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선(善)과 염오(染汚)와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이다. 나올 때에도 세 가지 관이 눈앞에 나타난다. 욕을 떠난 경우에는 두 가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열두 가지의 마음이 있다. 욕계의 계(繫)에 네 가지가 있는데, 선(善)과 불선(不善)과 은몰무기(隱沒無記)와 불은몰무기이다. 색계의 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선과 은몰무기와 불은몰무기이다. 무색계의 계도 또한 세 가지이다. 여기에 학심(學心)과 무학심(無學心)의 둘을 더해서 열두 가지이다. 【문】 욕계의 계인 선심(善心)은 몇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며 또 몇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가? 나아가 무학심은 몇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며 또 몇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가? 【답】 욕계(欲界)의 계(繫)인 선심(善心)은 아홉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계인 4심과 색계의 계인 선과 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계인 은몰무기 1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또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계(繫)인 4심과 색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불선심(不善心)은 욕계의 4심을 차례로 일으킨다. 또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계인 4심과 색계의 계인 3심과 무색계의 계인 3심이다. 은몰무기심도 이와 같다. 욕계의 계인 불은몰무기심은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4심과 색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은몰무기 1심이다. 또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4심과 색계의 선심(善心)이다. 색계(色界)의 계(繫)인 선심은 열한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계인 불은몰무기심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례로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아홉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데, 자지(自地)인 색계의 3심과, 욕계의 선과 불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색계의 계인 은몰무기심(隱沒無記心)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색계의 계인 3심과 욕계의 불은몰무기심을 제외한 3심이다. 또한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색계의 3심과 욕계의 선과 불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3심이다. 색계의 계인 불은몰무기심(不隱沒無記心)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색계의 3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은몰무기 1심이다. 또한 색계의 3심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무색계의 선심(善心)은 아홉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3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색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또한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무색계의 3심과 색계의 선심 1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무색계의 계인 은몰무기심은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3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색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이다. 또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무색계의 3심과 욕계의 선과 은몰무기 2심과 색계의 선과 불은몰무기 2심이다. 무색계의 계인 불은몰무기심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3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색계의 은몰무기 1심이다. 또한 무색계의 3심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학심(學心)은 다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선과 색계의 선과 무색계의 선과 학ㆍ무학심이다. 또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선과 색계의 선과 무색계의 선과 학심이다. 무학심(無學心)은 네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선과 색계의 선과 무색계의 선과 무학심이다. 또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데, 욕계의 선과 색계의 선과 무색계의 선과 학ㆍ무학심이다.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여덟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네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다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욕계의 마음임을 알아야 하네.
열한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아홉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여덟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세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이것은 색계의 마음이라네.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여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일곱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세 가지 마음을 일으키니 이것은 무색계의 마음이라네.
다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네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다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남은 학심ㆍ무학심인 줄 알아야 하니, 스무 가지의 마음이 있다네.
욕계(欲界)에 여덟 가지 마음이 있는데, 방편선심(方便善心)ㆍ생득선심(生得善心)ㆍ불선심(不善心)ㆍ은몰무기심(隱沒無記心)ㆍ위의심(威儀心)ㆍ공교심(工巧心)ㆍ보심(報心)ㆍ통과심(通果心)이다. 색계(色界)에 여섯 가지 마음이 있는데, 방편선심(方便善心)ㆍ생득선심(生得善心)ㆍ은몰무기심(隱沒無記心)ㆍ위의심(威儀心)ㆍ보심(報心)ㆍ통과심(通果心)이다. 무색계(無色界)에 네 가지 마음이 있는데, 방편선심ㆍ생득선심ㆍ은몰무기심ㆍ보심이다. 무루(無漏)에 두 가지 마음이 있는데, 학심(學心)과 무학심(無學心)이다. 【문】 욕계의 방편선심은 몇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고 몇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가? 나아가 무학심은 몇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고 몇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가? 【답】 욕계의 방편선심(方便善心)은 열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에서 통과심을 제외한 7심과 색계의 방편선심 1심과 학심ㆍ무학심이다. 또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방편선ㆍ생득선ㆍ불선ㆍ은몰무기 4심과 색계의 방편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욕계의 생득선심(生得善心)은 아홉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7심과 색계의 은몰무기심과 무색계의 은몰무기심이다. 또한 열한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7심과 색계의 방편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욕계의 불선심(不善心)은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킨다. 또한 열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7심과 색계의 생득선심ㆍ은몰무기심ㆍ위의심ㆍ보심 등 4심과 방편선을 제외한 무색계의 3심이다. 은몰무기심(隱沒無記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욕계의 위의심(威儀心)은 여덟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방편선과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7심이다. 보심(報心)도 또한 이와 같다. 공교심(工巧心)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방편선과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6심이다. 또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욕계의 7심이다. 욕계의 통과심(通果心)은 두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통과심과 색계의 방편선심이다. 또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통과심과 색계의 방편선심이다. 색계의 방편선심(方便善心)은 열두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색계의 6심과 욕계의 방편선ㆍ생득선ㆍ통과심 3심과 무색계의 방편선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또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위의심과 보심을 제외한 색계의 4심과 욕계의 방편선과 통과심 2심과 무색계의 방편선과 은몰무기 2심과 학ㆍ무학심이다. 색계의 생득선심(生得善心)은 여덟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5심과 욕계의 불선심과 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은몰무기심이다. 또한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5심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색계의 은몰무기심(隱沒無記心)은 아홉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5심과 욕계의 방편선ㆍ생득선ㆍ불선ㆍ은몰무기 4심이다. 또한 열한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5심과 욕계의 생득선ㆍ위의ㆍ보심 3심과 방편선을 제외한 무색계의 3심이다. 색계의 위의심(威儀心)은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방편선과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4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무색계의 은몰무기심이다. 또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5심이다. 보심(報心)도 또한 이와 같다. 색계의 통과심(通果心)은 색계의 방편선과 통과심 2심을 차례로 일으킨다. 또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색계의 방편선과 통과심이다. 무색계의 방편선심은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4심과 색계의 방편선과 학ㆍ무학심이다. 또한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보심을 제외한 무색계의 3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무색계의 생득선심은 일곱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4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 2심과 색계의 은몰무기심이다. 또한 무색계의 4심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무색계의 은몰무기심은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키는데, 무색계의 4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심 2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은몰무기심 2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은몰무기심 2심이다. 또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무색계의 4심과 욕계의 생득선ㆍ위의ㆍ보심 3심과 색계의 생득선ㆍ위의ㆍ보심 3심이다. 무색계의 보심(報心)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방편선을 제외한 무색계의 3심과 욕계의 불선과 은몰무기심 2심과 색계의 은몰무기심이다. 또한 무색계의 4심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난다. 학심(學心)은 여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생득선과 방편선 2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무색계의 방편선심과 학ㆍ무학심이다. 또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방편선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무색계의 방편선심과 학심(學心)이다. 무학심(無學心)은 다섯 가지 마음을 차례로 일으키는데, 욕계의 방편선과 생득선심 2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무색계의 방편선심과 무학심이다. 또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데, 욕계의 방편선심과 색계의 방편선심과 무색계의 방편선심과 학ㆍ무학심이다.
열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여덟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한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고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일곱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고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일곱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두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이것으로 욕계의 여덟 가지 마음을 모두 설하였네.
열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다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한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다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두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색계의 육심(六心)인 줄 알아야 하고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여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덟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열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이것은 무색계의 4심이며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며 다섯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다섯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니 학심ㆍ무학심인 줄 알아야 하네.
무엇 때문에 인(人)은 얻을 수 없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인(人)이 있다. 인이 있기 때문에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한다”9)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물[物]의 본성[性]은 서로 숨어들어가는 관계[相入]라고 하였는데, 상입론자(相入論者)는 “모든 유위법(有爲法)에 2분(分)이 있다. 가령 낮과 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밤에는 낮이 밤 가운데로 들어가고 낮에는 밤이 낮 가운데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가령 밤에 작위했던 것을 낮에 기억하는 것은 밤이 낮으로 들어가기 때문이고, 낮에 작위했던 것을 밤에 기억하는 것은 낮이 밤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물의 본성은 변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물성변론자(物性變論者)는 “가라라(伽羅羅)가 변하여 아부타(阿浮陀)10)가 된다. 나아가 중년(中年)이 변하여 노년(老年)이 되기 때문에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한다. 비유하면 마치 파타수(婆吒樹)의 잎이 청색에서 황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물의 본성은 왕래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왕래론자(往來論者)는 “가라라의 본성이 아부타 가운데 이르러 머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하였다. 【문】 물성변론(物性變論)과 왕래론(往來論)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물성변론에서는 가라라가 변하여 아부타가 된다고 하였고, 왕래론에서는 가라라의 물성이 아부타에 이르러 와서 머문다고 하였는데 모두 증장(增長)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지각(知覺)하는 본성은 하나이니 후에 지각하는 것이 바로 전에 지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의계(意界)는 항상한 것[常]이다. 의계가 항상하기 때문에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근본음(根本陰)이 있고 객음(客陰)이 있다. 객음이 작위하는 것은 근본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전심(前心)이 후심(後心)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후심으로 나는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과 불제자들은 ‘인(人)이 있다’고 의논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이 서로 숨어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물의 본성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사물의 본성이 왕래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지각하는 성품은 하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의계(意界)가 행상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근본음과 객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전심이 후심으로 흘러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은 미세하고 심심미묘해서 알기가 어렵다. 이와 같이 미세하고 심심미묘해서 알기 어려운 법을 환하게 나타내려고 이것을 의론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인(人)은 얻을 수 없고, 전심(前心)은 후심(後心)으로 흘러가지 않는데, 내가 작위한 것이 있으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는가? 【답】 “어떻게 인(人)은 얻을 수 없고, 사물의 본성은 상입(相入)하지 않으며, 사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은 왕래하지 않으며, 각성(覺性)은 하나가 아니고, 의계(意界)는 항상 하지 않고, 음성(陰性)은 근본(根本)과 객음(客陰)이 없고, 전심은 후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데,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가?”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처음과 끝의 중간을 간략하게 나타내서 문장을 간이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가령 “인(人)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하면, 인(人)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생각을 중지시키고, “전심이 후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설하면 왕래론자(往來論者)의 생각을 중지시킨다. 전심과 후심을 설하면 여타의 모든 의론자들의 생각을 중지시킨다. 【문】 [인은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전심이 후심으로 흘러간다는 이치가 없거늘 어떠한 연유로 본래 작위했던 일을 기억하는가?]11) 【답】 중생의 법은 이와 같이 서로 흡사한 습지(習智)에 의해서 얻는다. 【문】 앞에서는 인이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중생을 말하는가? 【답】 설하는 것과 설하는 법체(法體)를 서로 수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중생을 말하지 않고 단지 법(法)만을 설하면, 법은 의미에 있어서는 수순하지만 문장에 있어서는 불편하다. 중생을 말한다면 문장이나 의미에 있어서 모두 수순하다. 이 때문에 중생을 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앞에서 실제의 의미[實義]를 설하였고, 지금 여기에서는 임시로 중생의 법은 이와 같이 서로 흡사한 습지(習智)로 얻는다고 한 것이다. 습지(習智)는 결정(決定)ㆍ수습(修習)ㆍ자재(自在)의 의미가 있다. 본래 작위한 것은 본사(本事)에 따라서 하는 것인데, 본사는 가령 그 본성과 체와 상(相)과 물(物)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본래 함께 작위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어떤 것이 함께 작위한 것인가? 가령 예를 들면 본래 본 것과 과거에 경험한 것 등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본래 작위한 일[本作事]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어떤 것이 본래 작위한 일인가? 본래의 형색(形色)과 본래 행위를 한 것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래 작위한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이것을 의론한다. 비유하면 글을 잘 쓰는 사람[能書者]12)과 같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가령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에 능한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어떤 글자를 썼습니까”하고 묻지도 않고 그 사람도 “나는 이 글자를 썼습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이처럼 그 동안 익힌 습지(習智)로 자신이 쓴 글자도 알고 타인이 쓴 글자도 알며, 나아가 다른 나라[海外]에서 책이 와도 읽어서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전심(前心)이 후심(後心)으로 흘러가지 않지만, 후심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다시 거듭해서 이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 비유를 다시 든다. 가령 타인의 마음을 아는 두 사람이 전전하여 상대방을 반연하여,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일을 생각합니까?” 하고 묻지 않고, 저 사람도 “나는 이러한 일을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으며, 내지 백 유순(由旬) 밖에 있어도 두 사람의 마음을 서로 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전심이 후심으로 이르러 가지 않아도 후심이 본래 생각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다음에, 모든 심ㆍ심수법은 반연하는 대상[所緣]에서 정해진다. 【문】 어떤 법에서 정해지는 것을 정해진다고 하는가? 안입(眼入)에서 정해지는가, 색(色)에서 정해지는가, 찰나(刹那)에서 정해지는가? 【답】 어떤 사람은 “안입에서 정해지고, 색ㆍ찰나에서 정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는 심ㆍ심수법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안입(眼入)에서 정해지는가? 【답】 가령 안식(眼識)은 색(色)에서 정해지고,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각 자신의 경계(境界)에서 정해지는데, 안입이 청색(靑色)과 화합하면 청식(靑識)이 일어나고 나머지 색과 화합하면 나머지 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바로 두 가지 마음이 있게 되는데 청색을 지각(知覺)하는 마음은 황색 등을 아는 마음과 다르다. 또 『식신경(識身經)』에서 “과거의 안식은 과거법(過去法)을 반연하는가, 현재법(現在法)을 반연하는가, 미래법(未來法)을 반연하는가? 답한다. 과거법을 반연하고 현재ㆍ미래법은 반연하지 않는다”고 한 경문에 위배된다. 또 어떤 사람은 “안입(眼入)과 색(色)에서 정해지고, 찰나에서는 정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는 심ㆍ심수법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색에서 정해지는가? 【답】 청색을 반연하면 청식(靑識)이 일어나고 나머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황색 등을 반연하는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문】 청색은 여러 가지인데, 푸른 줄기ㆍ푸른 가지ㆍ푸른 잎ㆍ푸른 꽃ㆍ푸른 열매가 있다. 가령 푸른 줄기를 반연하는 식은 무엇 때문에 푸른 가지ㆍ푸른 잎ㆍ푸른 꽃ㆍ푸른 열매를 반연하는 식(識)이 아닌가? 【評】“세 가지 법에서 정해진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는 심ㆍ심수법이 많게 된다. 【답】 일어나지 않는 법이 많으면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미래세법은 필경에 주처(住處)가 없는데 이미 주처가 있기 때문이다. 【문】 심ㆍ심수법이 소연(所緣)에서 정해지면 소의(所儀)에서도 정해지는가? 【답】 소의에서도 정해진다. 왜냐하면 가령 미래의 심ㆍ심수법은 소의(所儀)와 멀지만, 일어나서 눈앞에 나타나면 소의와 함께 갖추어지고, 소멸되면 소의와 멀어진다. 어떤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심ㆍ심수법은 소의와 멀지만, 일어나서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는 함께 갖추어지고, 소멸되면 함께 갖추어지고, 소멸되면 함께 소멸된다”고 하였다. 【문】 심ㆍ심수법이 소연(所緣)과 소의(所依)에서 정해진다면, 어느 때에 소연이 되는가? 생시(生時)에 되는가, 멸시(滅時)에 되는가? 만약 생시라면 생시는 미래인데, 어떻게 미래가 소연이 될 수 있는가? 만약 멸시(滅時)라면 멸시는 무너져서 흩어진 쇠퇴법(衰退法)인데, 어떻게 무너져서 흩어지고 쇠퇴한 때에 소연이 될 수 있겠는가? 【評】멸시에 소연이 될 수 있으며 생시에는 소연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은 미래인데 미래법은 소연이 될 수 없으며, 멸시를 현재라고 하는데 현재법은 작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너져서 흩어진 쇠퇴법이 어떻게 작위할 수 있는가? 【답】 모든 유위법의 체성은 미미하고 하열하여 여러 가지 인연에 묶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다. 만약 심ㆍ심수법이 소연을 의지해서 화합하면 소연을 취할 수 있는데, 미래세법의 소의와 경계는 산란하다. 미래법과 같아서 과거법도 또한 그러하다. 현재법은 중연(衆緣)이 화합하는데, 현재가 경계를 반연하지 못하면 필경에 경계를 반연하는 의미가 없다. 【문】 만약 심ㆍ심수법이 소연과 소의에서 정해진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소연만을 설하고 소의는 설하지 않았는가? 【답】 여기에서는 소념사(所念事)를 설하였기 때문에 소의를 설하지 않았다. 소념(所念)이 있으면 반드시 소연을 의지하므로 소의는 소용이 없다. 가령 하나의 경계가 많은 심ㆍ심수법의 소연이 되는 것과 같고, 전찰나의 일심이 반연한 이후에 여러 마음도 반연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한 사람에게 백 명의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머지 아들들도 생각하는 것과 같은데, 저 하나의 경계가 여러 마음의 소연이 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문】 만약 경험한 일이 다르고, 기억하고 있는 일이 다르다면, 어떻게 제바달다(提婆達多, Devadatta)가 경험한 것을 연야달다(延若達多, Yajñadatta)가 기억할 수 없는가? 또한 연야달다가 경험한 일을 어째서 제바달다가 기억할 수 없는가? 【답】 제바달다의 몸[身]이 다르고 연야달다의 몸이 다르다.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몸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제바달다와 연야달다와 같은 경우에 심(心)이 전전하여 상대방의 인(因)이 될 수 없는데,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전심이 후심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상속(相續)하고 몸이 상속하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지만, 제바달다와 연야달다는 마음도 상속하지 않고 몸도 상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 만약 마음이 상속한다면, 먼저 한 소를 보고 후에 다른 소를 보았는데, 이것을 본래의 소라고 하는가? 【답】 과거에 경험한 일은 서로 비슷해야만 그것이 먼저 본 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후에 다시 경험한다 해도 후에 본 소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만약 앞에서 본 소와 후에 본 소가 서로 비슷하면 알 수 있다. 앞에서 경험한 의(意)에 반드시 세력이 있어야만 후에 생각을 잃지 않고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앞에서 일어난 심취(心聚)를 의(意)라 하고 후에 일어나는 심취를 염(念)이라고 하는데, 전의(前意)에 세력이 있기 때문에 후념(後念)으로 하여금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후념을 잃지 않는다고 한 것은 마음을 광란하지 않게 하고, 고통에 핍박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마음이 있는데, 첫째는 동행심(同行心)이고 둘째는 동연심(同緣心)이다. 고법인(苦法忍)ㆍ고비인(苦比忍)ㆍ고비지(苦比智)는 동행심이라 하고 동연심이라고 하지 않으며, 집법인(集法忍)ㆍ집법지(集法智)는 동연심이라 하고 동행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법지(苦法智)는 동행심이라고도 하고 동연심이라고도 하며, 그 나머지는 동행심이라고 하지도 않고 동연심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동행심이 경험한 일을 동연심이 기억할 수 있고, 동연심이 경험한 일을 동행심이 기억할 수 있다. 세 가지 마음이 있는데,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이다. 선심이 경험한 일을 선ㆍ불선ㆍ무기심이 기억할 수 있으면, 불선ㆍ무기심도 또한 이와 같다. 또 네 가지 마음이 있는데, 선(善)ㆍ불선(不善)ㆍ은몰무기(隱沒無記)ㆍ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이다. 가령 선심이 경험한 일은 네 가지 마음이 기억할 수 있으며, 나아가 불은몰무기심이 경험한 일을 네 가지 마음이 기억할 수 있다. 또 네 가지 마음이 있는데,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從因緣生心]과 차제연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從次第緣生心]과 경계연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從境界緣生心]과 위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從威勢緣生心]이다. 하나의 마음이 과거에 경험한 일을 네 가지 마음이 모두 기억할 수 있다. 또 다섯 가지 마음이 있는데, 체성이 고임을 보고 끊는 견고소단심(見苦所斷心) 내지는 수도에서 끊어지는 수도소단심(修道所斷心)이다. 견고소단심이 경험한 일을 다섯 가지 마음이 기억할 수 있으며, 견집소단심(見集所斷心)과 수도소단심도 이와 같다. 견멸소단심(見滅所斷心)이 경험한 일은 견도소단심을 제외한 네 가지 마음이 기억할 수 있고, 견도소단심(見道所斷心)도 이와 같아서 이 심이 경험한 일을 네 가지 마음이 기억할 수 있는데, 견멸소단심은 제외된다. 또 여섯 가지 마음이 있는데 이른바 6식(識)을 말한다. 6식이 경험한 일을 의식(意識)이 기억할 수 있다. 다시 열두 가지 마음이 있는데, 욕계에 선심ㆍ불선심ㆍ은몰무기심ㆍ불은몰무기심이 있으며, 색계에 불선심을 제외한 세 가지가 있고, 무색계도 이와 같으며, 무루의 학심과 무학심이다. 열두 가지 마음의 경우에는 이와 서로 비슷한 12법(法)ㆍ12념(念)이 있다. 욕계의 선심이 경험한 법의 경우는 열두 가지 염이 모두 기억할 수 있으며 불선심이 경험한 법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은몰무기심이 경험한 법은 여덟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는데, 욕계의 네 가지 마음과 색계의 선심ㆍ불은몰무기심ㆍ학심ㆍ무학심이다. 욕계의 불은몰무기심도 이와 같다. 색계의 선심이 경험한 법은 열두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고, 색계의 은몰무기심이 경험한 법은 욕계의 은몰무기심과 불은몰무기심을 제외한 열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다. 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이 경험한 법은 무색계의 은몰무기심과 불은몰무기심을 제외한 열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으며, 무색계의 선심이 경험한 법은 욕계의 은몰무기심과 불은몰무기심을 제외한 열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다. 무색계의 은몰무기심이 경험한 법은 아홉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으며, 욕계의 선심ㆍ불선심과 색계의 선심ㆍ은몰무기심과 무색계의 3종심인 학심ㆍ무학심ㆍ불은몰무기심도 이와 같다. 학심이 경험한 법은 열두 가지 염이 기억할 수 있으며, 무학심도 이와 같다. 가령 경(經)에서는 “존자 사리불이 이와 같이 말하였다. 모든 장로들이여. 만약 내입(內入)인 의(意)가 무너지지 않고 외입(外入)인 법(法)을 관조하여 정관(正觀)을 일으켜서 눈앞에 나타나게 하면 의식(意識)이 생깁니다”라고 하였다. 【문】 그는 무엇 때문에 의입(意入)이 무너지는 것을 말하였는가? 【답】 무너짐[壞]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수유괴(須臾壞)ㆍ명종괴(命終壞)ㆍ 구경괴(究竟壞)이다. 수유괴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이것을 잠깐 무너진다는 뜻에서 수유괴라고 한다. 명종괴란 가령 단선근(斷善根)의 선의(善意)가 무너진 경우와, 범부가 욕(欲)을 떠나거나 내지 수명이 다했을 때 불선의(不善意)가 무너지는 경우를 말한다. 구경괴란 가령 고비지(苦比智)가 일어나면 고제소단의(苦諦所斷意)가 마지막까지 무너지고, 나아가 도비지(道比智)가 일어나면 견제소단의(見諦所斷意)가 마지막까지 무너지는 것 등을 말한다. 불퇴법(不退法)에 머무는 사다함(斯陀含)은 견제소단의와 욕계(欲界)의 수도소단의(修道所斷意) 등 여섯 가지 의(意)를 마지막까지 무너뜨리고, 불퇴법에 머무는 아나함(阿那含)은 모든 견제소단의(見諦所斷意)와 욕계의 수도(修道)에서 끊은 염오의(染汚意)를 끝까지 무너뜨리며, 불퇴법에 머무는 아라한(阿羅漢)은 모든 염오의를 끝까지 무너뜨린다.
【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일을 잊어버려도 다시 기억할 수 있는가? 【답】 중생의 법은 심(心)이 서로 비슷하게 차례로 지견(知見)을 일으킨다. 세 가지 서로 비슷한 것이 있는데, 방편상사(方便相似)ㆍ경계상사(境界相似)ㆍ수순상사(隨順相似)이다. 무엇을 방편상사라 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수다라(修多羅)를 읽고 후에 잊어버려도 그 후에 부지런히 방편수행을 하면 다시 날카롭게 통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비니(毘尼)와 아비담(阿毘曇)의 경우에는 부지런히 방편수행을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먼저 부정관(不淨觀)을 닦고 후에 잊어버려도 부지런히 방편수행을 하면 그 경계를 따라서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데, 안반관(安般觀)의 경계방편도 이와 같다. 일찍이 듣건대, 어떤 바라문이 『위타경(違陀經, Veda)』을 읽고 후에 잊어버렸는데 다시 외우려고 모든 방편을 썼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승을 찾아가서는 물었다. “본래 읽어서 외웠던 위타경을 지금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날카롭게 통달해서 외우려고 부지런히 방편수행을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스승이 물었다. “네가 본래 독송할 때 어떻게 외웠느냐?” 제자가 답하였다. “처음 경을 독송할 때는 손에 노끈을 들고 세면서 입으로 경을 외웠습니다.” 스승이 말해 주었다. “먼저 읽었던 법대로 다시 독송하여라.” 제자는 가르침대로 한 후에 바로 날카롭게 통달하여 외울 수 있었다. 이런 경우를 비슷한 방편을 쓴다고 해서 방편상사(方便相似)라고 한다. 어떤 것을 경계상사라고 하는가? 가령 이곳에서 강ㆍ연못ㆍ산림(山林)과 경행(經行)하고 머무는 처소를 보고 후에 다른 곳에 이르러서 먼저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을 보면 본래 보았던 것을 다시 기억하는데, 이것을 경계상사(境界相似)라고 한다. 어떤 것을 수순상사라고 하는가? 가령 음식(飮食)ㆍ방토(方土)ㆍ주처(住處)와 동행인(同行人)을 수순(隨順)하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일찍이 들으니, 한 비구가 아함경을 독송하다가 후에 잊어버렸는데 부지런히 방편을 써도 다시 옛날처럼 날카롭게 통달하여 독송할 수 없어서 대덕(大德)인 아난의 처소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본래 『아함경』을 독송하다가 지금 잊어버렸는데 부지런히 방편을 써도 예전처럼 날카롭게 통달하여 독송할 수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난이 말하였다. “많은 기름을 구해서 욕실(浴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음식ㆍ방토ㆍ주처ㆍ설법ㆍ동행인을 수순해야 합니다.” 그는 아난이 말한 대로 모든 방편을 갖추어서 다시 날카롭게 통달하여 독송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수순상사(隨順相似)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차제(次第)라고 하는가? 【답】 서로 연속되어서 단절되지 않는 것[相續不斷]을 차제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차제는 불상속심(不相續心)을 다시 상속하게 하여 막거나 중지시킬 수 없게 하고, 대치법(對治法)에 파괴되지 않으며, 과거에 경험했던 의(意)의 세력이 강하여 후념(後念)에서 잊어버리지 않게 한다. 앞에 일어난 심취(心聚)를 의(意)라 하고, 후에 일어나는 심취를 염(念)이라 하는데, 전심(前心)에 세력이 있기 때문에 후심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하여 후념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마음이 미치고 어지러워지거나 고통에 핍박받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화수밀 존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소념사(所念事)를 잊어버려도 다시 기억하는데, 첫째는 전념에 떠오른 상[前相]을 잘 취하는 것이고, 둘째는 서로 비슷한 방편을 쓰는 것이고, 셋째는 후념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不失念]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기억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가? 【답】 중생의 법(法)은 심(心)이 서로 흡사하지 않고 불차제(不次第)하게 심의 지견(知見)을 일으키는데, 세 가지의 서로 흡사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이른바 방편불상사와 경계불상사와 수순불상사이다. 무엇을 방편불상사라 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수다라(修多羅)를 독송하다가 후에 잊어버리면, 또한 비니(毘尼)와 아비담(阿毘曇)을 독송했던 것도 잊어버리며, 먼저 부정관(不淨觀)을 닦다가 후에 다시 잊어버리면 또한 안반관(安般觀)의 경계와 방편도 망실(忘失)해버리는데, 이것을 방편불상사(方便不相似)라고 한다. 어떤 것을 경계불상사라고 하는가? 과거에 본래 보았던 강물과 연못과 경행하고 거주하는 처소 등의 것을 후에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이와 같은 등등의 일을 보지 않으면, 전에 보고 경험했던 일을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것을 경계불상사(境界不相似)라고 한다. 어떤 것을 수순불상사라고 하는가? 만약 음식ㆍ방토(方土)ㆍ주처(住處)ㆍ동행인(同行人)을 수순하지 못하면 전에 작위했던 것을 영원히 다시는 기억할 수 없는데, 이것을 수순불상사(隨順不相似)라고 한다. 불차제(不次第)는 서로 연속되지 않아서 단절되는 것을 불차제라고 한다. 또한 과거에 경험했던 의(意)의 세력이 미약해서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는데, 저 전(前)에 일어난 심취(心聚)를 의(意)라 하고, 후에 일어난 심취를 염(念)이라 한다. 전심(前心)이 약하기 때문에 후심(後心)이 본래 작위했던 것을 기억하게 할 수 없으며,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면 마음이 미치고 어지러워지거나 고통에 핍박을 받게 된다. 화수밀 존자는 “세 가지 일 때문에 전에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할 수 없으니, 첫째는 전념에 떠오른 상을 잘 취하지 못하는 것[不善取前相)이고, 둘째는 무상사방편(無相似方便)이고, 셋째는 기억한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失所念]”라고 하였다. 【문】 색계의 수혜(修慧)도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 몸이 미미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마음이 미미하고 나약하며, 마음이 미미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한다. 【문】 누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가? 【답】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모두 잊어버린다. 성인의 경우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도 또한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지 못하는데, 오직 여래(如來)만이 기억해서는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경에서 설하기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되, 가령 모든 비구 대중이 백 년 동안 나를 평상에 앉히거나 눕혀서 올려놓고 행하면서 여래의 무상지변(無上之辯)에 퇴실(退失)함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니, 마치 네 가지 궁(弓)의 비유와 같느니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셨는데, 이 때문에 여래는 잊어버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1)태생(胎生, jarāyuja)ㆍ난생(卵生, aṇḍaja)ㆍ습생(濕生, saṃsvedaja)ㆍ화생(化生, upapāduka)의 네 가지를 말한다.
2)어떤 사물의 인적(因的)인 요소가 현재에 미래의 결과를 취하는 인(因)이 되어서 그 각각의 과(果)를 취할 수 있도록 정해진 것을 취과(取果)라 하고, 인이 그 과를 현재에 실제로 과로서 냄으로써 현실화하는 것을 여과(與果)라고 한다.
3)범어로는 kṣaya-jñāna. 4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로, 곧 ‘괴로움은 이미 알려졌으며, 그 원인은 끊어졌고 적멸의 경지는 체득되었고 그리로 가는 길은 이미 수습되었다’고 아는 지혜이다. 유부에서는 세속지(世俗智)ㆍ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타심지(他心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의 10지를 말한다.
4)범어로는 svayaṃbhu-jñāna.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를 말한다.
5)범어 Kalalam의 음역. 태내오위(胎內五位)의 하나로, 탁태(托胎)한 최초의 7일간을 말한다.
6)범어로는 vyāpāra. ‘작용’ 혹은 ‘공과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7)범어로는 durlabha 혹은 sudurlabha. ‘획득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