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_0645_b_02L 3결(結) 내지 98사(使)는 모두 불경에서 설한 것이다. 다만 5결(結)과 98사는 제외된다. 이것은 불경에서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장(章) 가운데서 이 두 가지 논은 제외되어야만 한다. 일찍이 들으니, 구사 존자는 “일체의 아비담론(阿毘曇論)은 모두가 불경을 풀이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경을 인유해서 이와 같은 논을 지은 것이다. 모든 경 가운데서 설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제외한다. 이 두 가지 논은 경에서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5결(結)을 설한 것은 제외시키고 5상분결(上分結)을 설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5상분결은 불경에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98사는 제외되어야 한다. 불경에서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장(章)에서 5결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증일아함(增一阿含, Ekottara-āgama)의 다섯으로 이루어지는 법[五法] 가운데서 설하셨는데, 경이 오래 되어 망실한 것을 가전연자 존자가 원력과 지혜의 힘으로 관찰하여 아비담 중에서 다시 5결을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들으니, 『증일아함』에서는 일 법부터 백 법까지를 설하였는데, 지금을 일 법부터 십 법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망실되었으며, 일 법부터 십 법까지 설한 것 중에서도 망실된 것이 많고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적다고 한다. 가령 존자인 사나바수(奢那婆秀) 아라한과 존자인 기바가(耆婆迦) 화상이 반열반에 들던 날에 7만 7천의 본생경(本生經)과 1만의 아비담론이 망실되어 이 이후로는 다시 유행되지 않았다. 한 논사가 입멸해도 저만큼의 경론이 망실되거늘 하물며 불법 가운데서 많은 논사들이 입멸했음에랴.”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 논은 비록 불경에서 설한 것은 아니지만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불경에서 설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제외시키지 않는가? 【답】 경을 지은 사람의 뜻이 그와 같이 하고자 한 것이다.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한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논 가운데서는 일체변(一切遍)을 설하고, 비일체변(非一切遍)을 설하고, 일체변비일체변(一切遍非一切遍)을 설하였다. 일체변은 3결(結)이고, 비일체변은 5결(結)이고, 일체변비일체변은 9결이다. 【문】 5결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98사(使)도 또한 불경에서 설한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제외시키지 않는가? 【답】 일체의 아비담은 불경의 의미를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다. 불경의 의미를 자세하게 해설한 경우란, 불경에서는 7사를 설하였는데, 이 아비담은 계(界)와 종(種)과 행(行)으로 차별화시켜서 98사를 설하였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논은 모두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문】 저 존자는 무엇 때문에 논을 지으면서 먼저 장(章)을 세웠는가? 【답】 제문(諸門)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약 먼저 장을 세우지 않으면 문(門)의 의미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사람이 허공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고 만약 그리고자 할 때는 반드시 소의(所依)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 논이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장(章)과 문(門)을 세우고 게송을 짓고 건도(犍度)를 제정하고 품명(品名)을 지어도 백천의 대중 가운데서 한 사람만이 아비담을 구족하게 지송(持誦)할 수 있는데, 하물며 장과 문을 세우지 않고 품명(品名)을 짓지 않는다면 누가 이 번거로운 문장을 구족하게 지송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허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장을 세운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저 존자는 불경(佛經)을 인유해서 장(章)을 세웠는가? 【답】 일체의 아비담이 모든 불경의 의미를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경에는 가이없는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외도의 논서에는 문장은 있지만 의미가 없다. 비록 있다 해도 거의 없다. 가령 라마연서(羅摩延書, Rāmāyaṇa)의 경우 그 문장은 일만 이천의 게(偈)이지만 단지 두 가지 일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첫째는 라마연(羅摩延, Rāvaṇa)이 사타(思陀, Sitā)를 빼앗아 떠나는 일을 밝히고, 둘째는 라마(Rāma)가 사타를 데리고 돌아오는 일을 밝힌다. 일체 불경은 모두 한량없고 가이없다. 한량없다는 것은 한량없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가이없다는 것은 가이없는 문장이 있음을 말한다. 비유하면 마치 대해(大海)가 한량없고 가이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한량없다는 것은 깊이가 한량없음을 말하고 가이없다는 것은 넓이가 광대해서 가이없음을 말한다. 또한 불경이 문난(問難)을 감인(堪忍)해서 더욱 정밀하고 오묘하게[精妙] 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외도의 논서는 문난을 감인하지 못한다. 만약 질문하고 따지면 더욱 갇히고 견고해져서 어떤 뜻이나 맛도 없게 된다. 마치 원숭이는 맞는 것을 참아 내지 못하여 때리면 똥을 싸는 것과 같다. 불경은 때리고 비판하는 것을 감내해 내어 만약 때리고 비판하면 즉시 청정계색(淸淨戒色)과 선근촉(善根觸)을 낼 수 있다. 또한 가령 파라나의(波羅奈衣)7)는 아무리 거칠게 다루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거칠게 만질수록 빛과 색이 점점 묘해지고 미묘한 감촉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것도 그와 같다. 또한 불경은 드러나면 오묘해짐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불경에서는 덮으면 오묘하지만 펼치면 오묘하지 않은 세 가지 일을 설하는데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과 여인과 바라문서(婆羅門書)이며, 드러나면 묘해지고 덮으면 오묘하지 않은 것을 설하는데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과 해와 달[日月]과 불경(佛經)이다. 또한 불경은 사변으로 추구[思求]하는 것을 감내할 수 있어서 점점 오묘해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가령 사람이 해를 쳐다보면 눈이 명정(明淨)해지지 않는 것처럼 외도의 논서를 사변으로 추구할 때는 혜안을 명정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사람이 달을 쳐다보면 눈이 밝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이 불법이 담긴 경론을 사변으로 추구할 때는 혜안이 밝고 깨끗해진다. 또한 앞에서 “일체의 아비담은 모두가 불경의 의미를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다”고 말하였는데, 이 일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갖가지로 서로 비슷하지 않은 의미를 설하면서 잡건도(雜犍度)를 세웠고, 모든 결(結)의 의미를 설하면서 사건도(使犍度)를 세웠고, 나아가 견의 의미를 설하면서 견건도(見犍度)를 세워서 하나하나의 건도 가운데서 일체법(一切法)을 분별하였다. 【문】 저 존자는 논을 지으면서 무엇 때문에 먼저 장(章)을 세우고 후에 문(門)을 지었는가? 【답】 마치 사람이 집을 짓는 경우에 먼저 땅을 평탄하게 다듬은 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같이 법사(法舍)를 짓기 위해서 땅을 다듬는 법과 같이, 먼저 장을 세우고 집을 짓는 법과 같이 후에 문을 세운 것이다. 또한 사람이 나무를 심는 경우에 먼저 땅을 다듬은 연후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법수(法樹)를 심기 위해서 먼저 땅을 다스리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나무를 심는 법처럼 후에 문을 세운 것이다. 또한 화만(華鬘)을 만드는 스승과 그의 제자가 갖가지 화만을 만들고자 할 때에 먼저 실을 짜고 그런 후에 여러가지 색깔의 꽃으로 장식하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마찬가지로 법만(法鬘)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실을 짜는 것처럼 장을 세우고, 꽃으로 장식하는 것처럼 후에 문을 만든 것이다. 또한 그림 그리는 스승과 그림 그리는 제자가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 먼저 그 형상을 그리고 후에 여러 가지 채색을 바르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을 그리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채색을 바르는 법처럼 후에 문을 만든 것이다. 또한 공장(工匠)과 그의 제자가 먼저 나무를 측량하고 후에 지체(支體)를 새기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나무를 측량하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지체를 새기는 법처럼 후에 문을 만든 것이다. 또한 수행자가 법을 관하는 경우에 먼저 4대로 만들어진 색[四大造色]을 관하고 후에 미진찰나(微塵刹那)를 관하는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4대로 된 색을 관하는 것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미진찰나법을 관하는 것처럼 후에 문을 세운 것이다. 또한 세존의 설법도 그와 같아서 먼저 설하고 후에 풀이하셨다. 먼저 설하신 것은 가령 “6계(界)ㆍ6촉(觸)ㆍ18의행(意行)ㆍ4처(處) 등이 있으니,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이것을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한 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후에 풀이한 것은 “이것을 6계 내지 4처라고 부른다”고 한 것과 같다. 저 존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먼저 장을 세우고 후에 문을 지은 것이다. 또 두 가지 훌륭함[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먼저 장을 세워서 문장의 훌륭함을 나타냈고 후에 문을 지어서 의미의 훌륭함을 나타냈다. 【문】 문장과 의미가 훌륭한 것처럼 문장과 의미에 힘이 있는 것과 법(法)과 의미[義]가 걸림 없음과 법과 의미가 무애과(無礙果)임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자신의 지견(知見)이 착란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가령 사람의 지견이 착란을 일으키면 그가 지은 경론도 착란을 일으켜서 장과 문 내지는 품명을 훌륭하게 세울 수 없다. 만약 사람의 지견이 착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짓는 경론도 역시 착란을 일으키지 않아서 장 내지는 품명을 훌륭하게 세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지견이 착란을 일으키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장을 세우고 후에 문을 만든 것이다. 【문】 어떠한 등등의 이유 때문에 저 존자는 경을 지음에 있어 먼저 3결(結)을 세워서 장(章)으로 삼고 후에 98사에 이르기까지 설했는가? 【답】 저 작경자(作經者)는 이와 같은 바람[欲]과 이와 같은 생각[意]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의욕(意欲)에 따라서 이 논을 지었으며, 또한 법상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먼저 3결을 세워서 장으로 삼고, 후에 98사에 이르기까지 설한 것이다. 바사 존자는 “비록 일체처(一切處)에 의심이 일어난다 해도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는다. 가령 3불선근(不善根)8)을 먼저 설하고 후에 98사에 이르기까지 설한다 해도 또한 이와 같은 의심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아비담은 법상(法相)으로 추구해야 하고 차제(次第)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전설(前說)과 후설(後說) 모두 허물이 없다. 또 의미를 따라서 그 차제를 설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먼저 3결을 세워서 장으로 삼고 후에 98사까지 설한 것이다. 만약 하나하나의 아비담에서 차제를 구하면 경문(經文)이 번쇄하고 혼란스럽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비담의 번쇄하고 혼란한 문장을 누가 받아지닐 수 있겠는가. 또 법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먼저 3결(結)을 설하고 후에 4ㆍ5ㆍ6ㆍ7ㆍ9에서 98사(使)까지를 설한 것이다. 또한 번뇌라는 나무가 차제로 늘어나는 법을 설하기 위해서 먼저 3결을 설하고 후에 4ㆍ5ㆍ6ㆍ7ㆍ9에서 98사까지를 설한 것이다. 또한 네 가지 사문과[四沙門果]를 얻는 차제를 설하기 위해서이다. 가령 3결을 끊으면 수다원과를 얻고, 3불선근과 욕루(欲漏)를 모두 끊지 못하면 사다함과를 얻고, 모두 끊으면 아나함과를 얻고, 영원히 유루와 무명루(無明漏)를 끊으면 아라한과를 얻는다. 여타의 유(流)ㆍ액(扼)ㆍ박(縛)ㆍ취(取)ㆍ개(蓋)ㆍ하분결(下分結)ㆍ상분결(上分結)ㆍ견(見)ㆍ신(身)ㆍ애(愛)ㆍ결(結)ㆍ사(使) 등은 모두 유루의 차별인데 누(漏)를 자세하게 분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네 가지 사문과를 얻는 차제를 설하기 위해서 먼저 3결을 세워서 장을 삼고 후에 98사에 이르기까지 설한 것이다. 3결(結)은 신견(身見)ㆍ계취(戒取)ㆍ의(疑)이다. 【문】 이 3결의 체성은 무엇인가? 【답】 체성에 스물한 가지가 있다. 신견에 3계의 견고소단인 세 가지가 있으며, 계취에는 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인 여섯 가지가 있고, 의에는 3계의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소단인 열두 가지가 있다. 이 스물한 가지가 3결의 체이다. 나는 사물의 모양[相]과 성품[性]을 나누어 보겠다. 【문】 이미 체성을 설하였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결(結)이라고 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결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답】 속박한다는 뜻이 결의 의미이다. 고(苦)와 합치한다는 뜻이 결의 의미이다. 번뇌의 독이 섞여 있다는 뜻이 결의 의미이다. 속박한다는 뜻이 결의 의미라는 경우, 속박하는 것이 바로 결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령 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 Mahākauṣṭhila) 존자가 사리불 존자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묻기를 ‘색(色)이 눈을 속박합니까, 눈이 색을 속박합니까?’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의(意)와 법(法)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물었다. 그러자 사리불이 마하구치라 존자에게 답하였다. ‘색이 눈을 속박하지도 않고 눈이 색을 속박하지도 않습니다. 그 가운데 욕애(欲愛)가 있어서 이것을 속박합니다. 비유하면 마치 흰 소와 검은 소가 동일한 멍에에 묶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 구치라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령 검은 소가 흰 소를 얽어 매고 흰 소가 검은 소를 얽어맨다고 설하면 이것이 여법하게 설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 멍에가 얽어 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자 구치라여, 색이 눈을 속박하는 것도 아니고 눈이 색을 속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가운데 욕애가 있어서 이것이 속박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의(意)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설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결은 곧 속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와 합치한다는 뜻이 결의 의미라고 함은, 욕계의 모든 결은 욕계의 괴로운 중생에게 합치하고, 색계의 모든 결은 색계의 괴로운 중생에게 합치하고, 무색계의 모든 결은 무색계의 괴로운 중생에게 합치한다. 욕계의 모든 결은 고와 서로 합치하고 낙과 서로 합치하지 않으며, 색계ㆍ무색계의 모든 결은 고와 서로 합치하고 낙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이 있기 때문에 고와 합치한다는 뜻이 결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번뇌[漏]의 독이 섞여 있다는 뜻이 결의 의미라고 함은, 일체 생(生)을 받는 경우는 승묘하다 해도 유루의 정(定)이다. 가령 무량해탈을 제외하고는 일체처에 들어가는 정 등을 성인이 멀리 여의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번뇌의 독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섞여 있는 음식은 아무리 맛있고 묘해도 지인(智人)이 멀리하는 것과 같아서 이 역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속박한다는 의미와 고와 합치한다는 의미와 독이 섞여 있다는 뜻이 결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불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3결을 끊으면 수다원이라 하는데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구경의 도에 들어간다. 다만 천상인 가운데서 7유(有)와 7생(生)을 받고9) 고의 끝을 다한다”라고 하였다. 【문】 가령 아비담에서는 “88사(使)를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고 하였고, 『지유경(池喩經)』에서는 “한량없는 고를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떠한 등등의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는 “3결을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셨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이것은 여래에게 나머지 말씀이 있는 것이니, 간략하게 요점을 말한 것은 교화 받는 사람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또 사람을 위하고, 시중(時衆)을 위하고, 교화 받는 이를 위하고, 법기(法器)를 위해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교화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들의 지혜에 심천(深淺)이 있어서 그들의 마음과 결(結)ㆍ사(使)를 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마음이란 선근(善根)을 말하고, 결사란 모든 번뇌를 말한다. 그 마음과 번뇌를 관찰하고 나서는 번뇌에 따라서 대치법(對治法)을 설하시는데, 말씀이 모자라지 않으니, 만약 너무 적게 설하면 번뇌의 병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이 지나치지도 않으니, 만약 너무 많이 설하면 여래께서 아무런 이익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먼저 병과 병의 소인을 살핀 연후에 대치하는 약을 투여하는데 적게 투여하지도 않는다. 만약 적게 투여 하면 병이 낫지 않는다. 많이 투여하지도 않는다. 만약 많이 투여하면 허황하게 공력을 소비한다. 곧,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약을 투여하는데,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또 간략하게 말하면 3결을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하고, 자세하게 말하면 88사와 한량없는 고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 간략하게 설하는 것과 자세하게 설하는 경우와 같이, 분별하지 않는 것과 분별하는 것, 한꺼번에 설하는 것[頓說]과 차례로 설하는 것[次第說]도 마찬가지이다. 또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을 위해서는 3결을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고,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해서는 88결과 무량한 고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한다.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과 근기가 둔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 인력(因力)과 연력(緣力)ㆍ내력(內力)과 외력(外力)ㆍ내사유력(內思惟力)을 의지하는 것과 외설력(外說力)을 의지하는 것ㆍ건지(揵智)와 지지(遲智)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설한다. 또 이행법(易行法)으로 교화 받는 사람을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당겨서 일으키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발기자(跋耆子, Vṛjiputra)의 비유를 설해야 한다. 일찍이 들으니, 발기자가 불법에 출가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2백50계(戒)를 제정하여 족성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따라서 그것을 이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누가 이와 같은 모든 계를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심을 일으켰다. 그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는 이마를 발에 대어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2백50계를 제정하여 족성자들로 하여금 그 원하는 바에 따라서 봉행하게 하였는데, 저는 이 계를 수호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때 세존께서 가책하지 않고 친근하고 선한 모습을 보이면서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발기자여, 너는 선학계(善學戒)ㆍ선학심(善學心)ㆍ선학혜(善學慧)인 3계(戒)를 잘 배울 수 있겠느냐?” 그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환희심이 일어나서 “저는 이 세 가지 계를 잘 배울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는 세 가지 계를 배웠기 때문에 차례로 일체의 계를 배울 수 있었다. 만약 여래께서 “견도소단인 88사와 무량한 모든 고를 끊는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면, 교화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이 88번뇌의 나무를 뽑아 내고, 88번뇌의 대하를 건너고, 88번뇌의 대해를 바싹 마르게 하고, 88번뇌의 산을 무너뜨리며, 88대치도(對治道)를 닦을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심을 일으킨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3결을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면 교화를 받는 사람이 ‘3결을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다’라고 환희심을 일으킨다. 또 3결을 끊으면 견도소단인 일체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치단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행법을 설한 것이니,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최승법(最勝法)을 설하기 위해서이다. 일체의 견도소단인 결 중에서 이 세 가지 결이 가장 (세력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구사 존자는 “이 세 가지 결이 일체의 견도소단인 번뇌 중에서 가장 세력이 뛰어난 것이다. 나머지는 이것을 따라서 일어난다. 가령 보는 것[見]을 인유해서 애욕[愛]ㆍ성냄[恚]ㆍ교만[慢] 등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이 세 가지 결이 일체의 견도소단인 번뇌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뛰어난 군대가 항상 앞에서 가는 것과 같은데, 저 세력 때문에 나머지 번뇌가 일어난다. 또 이 세 가지 결이 공덕(功德)의 원수[怨家]이기 때문이다. 공덕은 수다원과를 말한다. 원수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이른바 세 가지 결이 이에 해당한다. 또 이 세 가지 결이 세 가지 삼매의 근대치(近對治)이기 때문이다. 신견은 공삼매(空三昧)의 근대치이고, 계취는 무원삼매(無願三昧)의 근대치이고, 의는 무상삼매(無相三昧)의 근대치이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견도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자주 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잡건도에서 “수행자가 인(忍)에 안주하면 견(見)과 의(疑)가 현행하지 않으며 또한 (설혹 현행한다 해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지가 하열하고 번뇌가 미세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과 같다. 여기서 견은 신견과 계취를 말하고, 의는 여기서 말하는 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끊기 어렵고, 타파하기 어렵고, 건너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허물을 증성(增盛)시키고, 여러 가지 허물을 두텁게 하기 때문이다. 【문】 신견(身見)은 어떤 허물을 증성시키는가? 【답】 신견은 62견(見)의 뿌리이다. 견(見)은 모든 번뇌의 뿌리이고, 번뇌는 업의 뿌리이며, 업은 과보의 뿌리이고, 과보에 의해서 선ㆍ불선ㆍ무기법이 일어난다. 【문】 계취는 어떤 허물을 증성시키는가? 【답】 계취로부터 여러 가지 삿된 고행(苦行)이 일어난다. 【문】 의는 어떤 허물을 증성시키는가? 【답】 의란 과거와 미래세를 의심하여 안으로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가, 누가 이것을 만들었는가, 이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중생은 어디에서 왔는가, 죽으면 어느 곳에 가는가?'라는 유예심을 품는 것을 말한다. 또 이 세 가지 결을 끊고 알았다 해도 아라한의 경우에도 오히려 상사법(相似法)을 행하기 때문이다. 신견은 고비인(苦比忍)에서 영원히 끊어지는데 비록 끊고 알았다 해도 아라한도 오히려 상사법을 행하면서 “이것은 나의 옷이고 나의 발우이다. 이는 나와 방을 함께 쓰는 제자이다. 이는 가까이 머무는 제자이다. 이것은 나의 방이다. 이것은 나의 방에서 자구가 되는 물건이다”고 말하여 아(我)와 비슷한 것을 헤아린다. 계취는 도비인(道比忍)에서 영원히 끊어지는데 비록 끊고 알았다 해도 아라한의 경우에도 오히려 상사법을 행한다. 가령 손발을 씻고 아란야(阿練若)에 머물면서 다만 3의(衣)만을 지니고 열세 가지 청정한 공덕을 말하고 이를 인유해서 필경의 정상(淨想)을 얻는다고 자세하게 설한다. 일찍이 들으니, 농마사항기가(聾摩奢恒耆迦) 존자는 비록 아라한이었지만 날마다 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이를 깨끗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 의(疑)는 도비인에서 영원히 끊어지는데 비록 끊고 알았다 해도 아라한의 경우에도 오히려 상사법을 행한다. 멀리 있는 물건을 보고 ‘이것이 사람인가, 이것이 막대기인가?' 하고 의심을 하며, 두 가지 도(道)를 보면 ‘이것이 나아가야 할 길인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 것인가?’라고 의심을 하며, 두 벌의 옷과 발우를 보면 ‘이것이 나의 의발인가, 나의 의발이 아닌가?’라고 의심을 한다. 또한 수행자가 이 세 가지 결을 끊으면 일체의 견도소단인 결도 모두 다 끊게 되기 때문이다. 또 수행자가 이 세 가지 결을 끊으면 견도소단인 결을 보고 지각하고 식별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3계(界)에 통하고 하분(下分)에도 통하기 때문이다. 욕(欲)ㆍ애(愛)ㆍ진(瞋)은 하분에는 통하지만 3계에는 통하지 않고 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애(愛)ㆍ만(慢)ㆍ무명(無明)은 3계에는 통하지만 하분에는 통하지 않는다. 또 7사(使) 중에서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이 있으면 이 가운데서 설한다. 수다원은 7사 중에서 두 가지 사를 영원히 끊는데 견사(見使)와 의사(疑使)를 말한다. 또 9결(結) 중에서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이 있으면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수다원은 9결 중에서 세 가지 결을 영원히 끊는데, 견결(見結)과 의결(疑結)과 취결(取結)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이 있기 때문에 구사 존자는 “이 경은 마땅히 ‘세 가지 결을 끊으면 수다원을 얻으니, 세 가지 결이란 견결ㆍ의결ㆍ취결을 말한다’고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10사(使) 중에서 남김없이 영원히 끊는 것이 있으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10사는 다섯 가지 견(見)과 애(愛)와 에(恚)와 만(慢)과 무명(無明)과 의(疑)를 말한다. 수다원은 여섯 가지 사를 영원히 끊는데 다섯 가지 견과 의이다. 여기에서는 이 여섯 가지 사 가운데서 세 가지 사만을 설했는데, 신견(身見)과 계취(戒取)와 의(疑)를 말한다. 세 가지 사는 설하지 않았는데, 변견(邊見)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신견은 변견을 일으키고 변견은 신견으로부터 일어난다. 계취는 견취를 일으키고 견취는 계취로부터 일어난다. 의는 사견을 일으키고 사견은 신견으로부터 일어난다. 계취는 견취를 일으키고 견취는 계취로부터 일어난다. 의는 사견을 일으키고 사견은 의로부터 일어난다. 이미 일어나는 주체[能生]를 설하였으므로 따라 일어나는 것[從生]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이것은 초문(初門)과 약설(略說)과 처음 들어감[始入]을 나타낸 것이다. 이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1종단(種斷)이고, 어떤 경우에는 2종단ㆍ4종단이다. 가령 신견을 설하면 이미 1종단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령 계취를 설하면 두 가지[二種]라는 말이 없어도 이미 2종단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계취는 이름이 두 가지이고, 계취상응공유법도 또한 이름이 두 가지이다. 가령 의를 설하면 이미 4종단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자계일체변(自界一切遍)이고 어떤 경우에는 타계일체변(他界一切遍)이다. 가령 신견을 설하면 이미 자계일체변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가령 계취ㆍ의를 설하면 이미 타일체변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자계일체변은 한 가지 결을 설하고 타계일체변은 두 가지 결을 설하는가? 【답】 타계는 유루도 반연하고 무루도 반연하기 때문이다. 가령 계취를 설하면 이미 유루연사(有漏緣使)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의를 설하면 이미 무루연사(無漏緣使)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계일체변ㆍ타계일체변의 경우와 같이 자지일체변(自地一切遍)ㆍ타지일체변(他地一切遍)과 자계연(自界緣)ㆍ타계연(他界緣)과 자지연(自地緣)ㆍ타지연(他地緣)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유루연(有漏緣)이고 어떤 경우에는 무루연(無漏緣)이다. 가령 신견과 계취를 설하면 이미 유루연사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의를 설하면 이미 무루연사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유루연은 두 가지를 설하고 무루연은 한 가지를 설하는가? 【답】 유루연은 어떤 경우에는 자계연이고 어떤 경우에는 타계연이기 때문이다. 가령 신견을 설하면 이미 자계연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계취를 설하면 타계연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유루연ㆍ무루연의 경우와 같이 세연(世緣)ㆍ출세연(出世緣)과 미연(味緣)ㆍ무미연(無味緣)과 주연(住緣)ㆍ출연(出緣)과 계연(繫緣)ㆍ불계연(不繫緣)과 결연(結緣)ㆍ비결연(非結緣)과 수연(受緣)ㆍ비수연(非受緣)과 전연(纏緣)ㆍ비전연(非纏緣)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유위연(有爲緣)이고 어떤 경우에는 무위연(無爲緣)이다. 가령 신견ㆍ계취를 설하면 이미 유위연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가령 의를 설하면 이미 무위연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유위연ㆍ무위연의 경우와 같이 유상연(有常緣)ㆍ무상연(無常緣)과 유항연(有恒緣)ㆍ무항연(無恒緣)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체성을 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체성을 볼 수 없다. 가령 신견ㆍ계취를 설하면 이미 견성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가령 의를 설하면 이미 비견성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견성과 비견성의 경우와 같이 시(視)ㆍ불시(不視)와 전행(轉行)ㆍ부전행(不轉行)과 구(求)ㆍ불구(不求)와 마음을 전환하는 것[轉其心]ㆍ마음을 전환하지 않는 것[不轉其心]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어떤 경우에는 불선(不善)이고 어떤 경우에는 무기(無記)이다. 가령 계취ㆍ의를 설하면 이미 불선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신견을 설하면 이미 무기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불선ㆍ무기의 경우와 같이 유보(有報)ㆍ무보(無報)와 한 가지 과를 내는 것[生一果]ㆍ두 가지 과를 내는 것[生二果]와 무참무괴상응(無慙無愧相應)ㆍ무참무괴불상응(無慙無愧不相應)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소단인 결은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은 체성이 기뻐서 뛰는 것이고, 어떤 것은 체성이 우울하고 슬픈 것이다. 가령 신견을 설하면 이미 기뻐서 뛰는 경우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계취ㆍ의를 설하면 이미 우울하고 슬픈 것을 설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세 가지 몸[三種身]을 무너뜨린다. 신견은 계신(戒身)을 무너뜨리고, 계취는 정신(定身)을 무너뜨리고, 의는 혜신(慧身)을 무너뜨린다. 또 이 세 가지 결은 8정도(正道)를 무너뜨린다. 신견은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을 무너뜨리고 계취는 정념(正念)ㆍ정정(正定)을 무너뜨리며, 의는 정견(正見)ㆍ정각(正覺)ㆍ정방편(正方便)을 무너뜨린다. 또 의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세인(世人)들 대부분이 아(我)ㆍ아소(我所)에 깊이 집착하고, 길(吉)ㆍ불길(不吉)에 깊이 집착하고, 주저하는 마음을 깊이 품는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법을 행하는 중생은 수다원이라 하지 않고 이와 같은 법을 행하지 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 처음으로 도(道)를 얻는 것을 수다원이라 하는가, 처음으로 과(果)를 얻는 것을 수다원이라 하는가? 만약 처음으로 도를 얻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면 제8인(第八人)은 수다원이어야 한다. 제8인은 견신견법(堅信堅法)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는 처음으로 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으로 과를 얻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면 다분욕(多分欲)을 떠나거나 욕계욕(欲界欲)을 떠나서 정결정(正決定)과 도비지(道比智)를 얻었을 때에 수다원이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으로 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답】 어떤 사람은 “처음으로 도를 얻었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제8인도 수다원이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으로 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답】 처음으로 도를 얻은 경우 수다원이라 하는데, 이 경우 얻은 도가 반드시 도(道)를 반연해야만 수다원이라고 한다. 제8인은 처음으로 도를 얻긴 했지만 고(苦)를 반연하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은 경우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가 반드시 도비지의 과(果)에 포섭되는 도라야 수다원인 것이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반드시 세 가지 일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아직 얻지 못한 도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일찍이 얻은 도를 버리는 것이고, 셋째는 동일미(同一味)의 결을 끊는 것이다. 아직 얻지 못한 도를 얻는다는 것은 수도(修道)를 말한다. 이미 얻은 도를 버린다는 것은 견도(見道)를 말한다. 동일미인 결을 끊는다는 것은 견도소단인 결이 모두 동일미임을 증득하는 것이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반드시 다섯 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아직 얻지 못한 도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얻은 도를 버리는 것이고, 셋째는 동일미인 결을 끊어서 증득하는 것이고, 넷째는 8지(智)를 한꺼번에 얻는 것이고, 다섯째는 16행(行)을 모두 함께 닦는 것이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머물 때 견도소단인 결을 남김없이 영원히 소진시키고, 연도결(緣倒結)을 영원히 끊고, 인대치결(忍對治結)을 영원히 끊고, 사견(邪見)을 영원히 끊는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머물 때 그 사람과 함께 담론할 수 있고 상(相)을 시설할 수 있다. 또 처음으로 도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머물 때 생사(生死)를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다분욕(多分欲)과 욕계결(欲界結)을 모두 끊고 정결정(正決定)과 도비지(道比智)를 얻으면 수다원이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으로 과(果)를 얻기 때문이다. 【답】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반드시 초월인이 아닌 구박범부를 차례로 수순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처음으로 해탈을 얻고, 처음으로 도(度)를 얻고, 처음으로 과(果)를 얻은 사람이어야 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세속도(世俗道)로 1종결(種結)을 끊지 않고 과를 얻어야 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네 가지 사문과 중에서 최초의 과를 말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모두 4향(向)4과(果)여야 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8인(人)ㆍ4쌍(雙)10)을 말한다. 또 처음으로 과를 얻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데 저 도에 머물 때 지(地)도 무너뜨리지 않고 도(道)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사다함과는 지는 무너뜨리지 않지만 도는 무너뜨린다. 그것은 왜냐하면, 유루도와 무루도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나함과는 지도 무너뜨리고 도도 무너뜨린다. 지를 무너뜨리는 것은 6지(地)에 의지해서 가능하고, 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유루ㆍ무루도로 모두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라한과는 도는 무너뜨리지 않지만 지는 무너뜨린다. 그것은 왜냐하면, 9지(地)를 의지해서 얻기 때문이다. 수다원과는 지도 무너뜨리지 않고 도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지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미지지(未至地)를 의지해서 얻기 때문이고 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오직 무루도로써 얻고 유루도로써는 얻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으로 도를 얻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하고 처음으로 과를 얻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수다원이 얻는 과이기 때문에 저 사람을 수다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법을 인유해서 명칭을 삼은 것인데 마치 약수(藥水)는 약으로 명칭을 삼는 것과 같다. 소유[酥]를 넣는 병과 기름을 넣는 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수다원이라 하는가? 【답】 ‘수다'는 성도의 흐름이라는 말이고 ‘원'은 들어감[入]을 말하는데, 성도의 흐름에 들어가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도 또한 수다원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도의 흐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답】 이것은 처음 받은 것에 명칭을 붙이는 것으로, 비로소 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과의 명칭에도 각각 자신의 의미가 있다.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3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문】 가령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의 경우에도 또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유독 수다원만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 마땅히 설해야 하는데도 설하지 않는 것은 남겨 놓은 설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사문과(沙門果)에는 각각 자신의 의미가 있다. 가령 수다원의 경우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것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不墮惡趣]’고 말한 것이고, 사다함은 한 번 왕래하는 것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한 번 왕래한다[一往來]’고 설한 것이고, 아나함은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것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다[不還]’고 설한 것이고, 아라한은 다시는 유(有)를 받지 않는 것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후유를 받지 않는다[不受有]’고 말한 것이다. 곧, 사문과에는 각각 자신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의미에 따라 명칭을 세운 것이다. 【문】 범부인도 또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설하지 않는가? 【답】 마땅히 설해야 하는데도 설하지 않은 것은 남겨 놓은 설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범부인은 어떤 경우에는 악취에 떨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은 것이고, 성인의 경우에는 반드시 결정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설한 것이다. 결정(決定)이라고 한 것은 정결정취(正決定聚)에 머물기 때문에 ‘결정'이라고 한 것이다. 수다원의 의미는 ‘결정코 반열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반열반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삼층 옥상에서 질그릇을 땅에 던지면서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 반드시 깨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구경의 도에 들어간다고 한 것의 경우,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도라고 하는데, 저 사람은 이와 같은 욕(欲)과 이와 같은 기심(期心)이 있고 이와 같이 인가하고 이와 같이 즐기고 이와 같이 뜻을 가까이 하여 저 도에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에 구경의 도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7유(有)만을 받는다. 【문】 이것은 14유(有)나 28유를 받는다고 해야 한다. 가령 본유(本有)로 말하면 인중유(人中有)가 7이고 천중유(天中有)가 7이므로 14유라고 해야 한다.
【답】 마땅히 설해야 하는데도 설하지 않는 것은 남겨 놓은 설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령 본유ㆍ중유로 말한다면 천(天) 가운데 본유가 7이 있고 중유가 7이 있으며, 인(人) 가운데 본유가 7이 있고 중유가 7이 있으므로 28유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단지 7유만을 설하였는가? 【답】 이것은 7수법(數法)이니, 7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인(人) 가운데 7이고 천상에도 7이고, 본유도 7이고, 중유도 7로서, 여타의 경에서도 설하고 있다. 【문】 4제(諦)를 3설(說)하면 12행(行)이 있게 되는데, 1제(諦)에 12행이 있으므로 4제에는 48행이 있어야 한다. 고제를 3설하는 경우도 12행이 있고 내지 도제를 3설하는 경우에도 12행이 있으므로 48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단지 12행만 설하는가? 【답】 이것은 12수법(數法)인데, 12행을 세 번 굴리는 것을 떠나지 않기 때문인데, 여타의 경에서도 설하고 있다. 【문】 비구의 7처선(處善)과 3종의 관의(觀義)는 성법(聖法)에서 신속하게 유루를 다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7뿐이 아니고 35처선(處善)이거나 무량처선(無量處善)이라고 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단지 7처선만 설하는가? 【답】 이것은 7수법(數法)으로서 7관(觀)을 떠나지 않는다. 한 가지 색음(色陰)에 일곱 가지가 있고 내지 식음(識陰)에도 일곱 가지가 있기 때문인데, 여타의 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내가 지금 2법(法)을 설하겠노라. 어떤 것이 이법인가? 안색(眼色) 내지 의법(意法)을 2법이라고 하느니라”고 설하였다. 이것은 2가 아니라 12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2수법(數法)인 까닭에 2를 떠나지 않는다. 이 7수법도 7을 떠나지 않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 무엇 때문에 수다원은 7유(有)만 받고 증감하지 않는가? 【답】 바사 존자는 “가령 유를 받는 것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경우 모두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로써도 법상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그만큼의 보인(報因)이 있다면 다시 그만큼의 보과(報果)를 받기 때문이다. 또 업력 때문에 7유만을 받고 도력(道力) 때문에 제8유를 받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일곱 걸음을 걷고 뱀의 독에 쏘이는 경우 4대(大)의 힘으로 일곱 걸음은 걸을 수 있지만 독의 힘 때문에 여덟 걸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만약 제8유를 받으면 저 몸 가운데는 성도(聖道)가 텅 비어서 없어야 한다. 성도가 텅 비어서 없다면 먼저는 진리를 보았지만 지금은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본래는 정결정을 얻었지만 지금은 정결정을 얻지 못하고, 본래는 성인이었는데 지금은 성인이 아닌 것이 된다. 또 만약 제8유를 받는다면 과거 항하사 수의 모든 부처님이 내친(內親)이 아니라 외인(外人)이 된다. 비유하면 마치 세인들이 7세(世)까지는 서로 친하게 지내지만 8세(世)에 이르면 외인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또 증상인(增上忍)에 머물 때는 욕계의 7생분(生分)과 색계의 1생분(生分)ㆍ무색계의 1생분을 제외한 나머지 일체의 생분(生分)에 비수멸을 얻는데 비수멸법을 얻으면 다시는 눈앞에 일어나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7생처(生處)만 있기 때문에 7유(有)만을 받는다. 7생처란 인간의 6욕천(欲天)을 말하는데, 이것은 수다원이 나는 곳으로서 그 가운데 태어난다. 또 7유 중에서 일곱 가지 도를 가득 차게 닦고 일곱 가지 사[七使]를 영원히 끊는다. 이와 같은 일이 있기 때문에 7유만을 받고 증감하지 않는데 이와 같이 모두 7유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수다원은 천상에서 7유를 받고 인간 중에서 7유를 받지만 수다원에도 각각 차별이 있다. 혹은 천상에서 7유ㆍ인 중에서 6유를 받기도 하고, 천상에서 6유ㆍ인 중에서 5유를 받기도 하고, 천상에서 5유ㆍ인 중에서 4유를 받기도 하고, 천상에서 4유ㆍ인 중에서 3유를 받기도 하고, 천상에서 3유ㆍ인 중에서 이유를 받기도 하고, 천상에서 2유ㆍ인 중에서 1유를 받기도 하며, 혹은 인 중에서 7유를 받고 천상에서 6유를 받기도 한다. 나아가 인 중에서 2유를 받고 천상에서 1유를 받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설한다. 여기에서는 모두 7유를 받는 경우만을 설했기 때문에 “수다원은 7유를 받는다”고 한 것이다. 【문】 모두 7유를 받는 수다원의 경우 천상에서 제7유를 받는가, 인 중에서 제7유를 받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이 생 가운데서 수다원을 얻으면 금생의 수(數)가 7이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금생에서 수다원을 얻는 경우) 7이라는 수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가령 수에 포함된다면 이 경우에는 “인 중에서 도를 얻으면 천상에서 7유를 채우고 그 곳에서 반열반하며, 천상에서 과를 얻으면 인 중에서 7유를 채우고 반열반한다”고 말한다. 가령 수에 포함되지 않으면 “인 중에서 과를 얻으면 다시 인 중에서 7유를 채우고 반열반하며 천 중에서 과를 얻으면 다시 천 중에서 7유를 채우고 반열반에 든다”고 말한다. 【評】처음 도를 얻은 생(生)은 7유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가운데 태어났을 때에는 범부이고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수에 포함시키면 28유가 아니고 27유만 있게 된다. 27유만 있게 되면 가령 『시설경』에서 “수다원은 28생을 지나서 반드시 고제(苦際)를 다한다”고 설한 것에 위배된다. 이와 같은 허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 도를 얻은 생은 7유중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문】 7유를 받은 수다원은 앞의 6생(生) 가운데서 성도가 일어나 눈앞에 나타나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일어난다면 반열반에 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눈앞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반열반에 들지 않는가? 【답】 업력 때문에 반열반에 들지 않는다. 【문】 가령 7유를 채웠을 때 세간에 부처님이 없으면 재가에 있으면서 아라한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다. 비록 불법(佛法)이 없다 해도 여타의 법에 반드시 출가하여 법복을 받은 후라야만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재가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얻고 나서는 집에 머물지 않고 여타의 법에 출가하여 법복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는 5백 벽지불이 선인(仙人)이 머무는 산중에 머물고 있을 때는 본래 성문이었음에 비길 수 있다. 천상과 인간을 왕래하는 것의 경우, 이것은 천상에서 인간으로 오는 것과 인간이 천상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마치 세인이 숲으로부터 동산에 이르러 오고 동산으로부터 숲에 이르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태어난다는 것[生]은 중유(中有)와 본유(本有) 가운데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고의 끝[苦際]을 다할 수 있다. 【문】 고의 끝은 고 안에 있는 것인가, 고 밖에 있는 것인가? 만약 고의 안에 있다면 고의 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의 밖에 있다면 세간현유(世間現喩)와 어떻게 의미가 통하는가? 비유하면 마치 금으로 만든 산가지[籌]가 처음에도 금이고 중간에도 금이고 끝도 금인 것과 같다. 고(苦)도 이와 같이 처음도 고이고 중간도 고이며 끝도 고이다. 고의 끝인가? 【답】 어떤 사람은 “아라한의 최후의 음(陰)이 고의 끝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멸진열반(滅盡涅槃)이 고의 끝이다”라고 하였다. 【문】 가령 “아라한의 최후의 음이 고의 끝이다”고 한다면, 이것을 고의 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체(體)가 모두 고이기 때문이다. 【답】 그러므로 고의 끝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시는 고를 일으키지 않고, 다시는 고와 상응하지 않으며, 다시는 고의 인[苦因]을 만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고의 끝이라고 한다. 【문】 가령 “멸진열반이 고의 끝이다”고 말하면, 금으로 만든 산가지라는 세간의 현유(現喻)와 어떻게 의미가 통하는가? 【답】 이것은 반드시 의미가 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것은 수다라ㆍ비니ㆍ아비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세간의 현유로 현성법(賢聖法)을 힐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현성법이 다르고 세간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 있는데, 탐불선근(貪不善根)과 에불선근(恚不善根)과 치불선근(癡不善根)이다.
【문】 이 세 가지 불선근의 체성은 어떤 것인가? 【답】 열다섯 가지가 있다. 탐불선근은 욕계의 5행소단(行所斷)인 애(愛)와 통하는 6식신이고, 에불선근은 5행소단인 에(恚)와 통하는 6식신이다. 치불선근은 욕계 전체의 4종소단(種所斷)인 무명이다. 네 가지란 집ㆍ멸ㆍ도ㆍ수도를 말한다. 고제소단은 종류를 분별해야 한다. 고제소단인 무명에는 열 가지가 있는데 5견(見)과 애ㆍ에ㆍ만ㆍ의와 상응하는 법과 불공법이다. 여덟 가지는 불선근이고 두 가지는 불선근이 아닌데 욕계의 신견ㆍ변견과 상응하는 것이다. 【문】 인(因)은 근(根)의 의미이다. 신견ㆍ변견과 상응하는 무명은 일체 불선법의 인인데 무엇 때문에 근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가령 법의 체가 불선(不善)이면서 일체의 불선법의 인이 되는 경우에는 근을 세운다. 신견ㆍ변견과 상응하는 무명은 일체의 불선법의 인이 되기는 하지만 체는 불선이 아니고 무기이다. 이 때문이다. 치불선근은 모두 욕계의 네 가지인데, 견집소단ㆍ견멸소단ㆍ견도소단ㆍ수도소단을 말한다. 이것과 고제소단의 여덟 가지와 6식신과 통하는 무명, 이 열다섯 가지가 3불선근의 체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이미 체성을 설하였으므로 이제 무엇 때문에 ‘불선근'이라 하는가 그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불선근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답】 일으킨다는 의미[生義]와 키운다는 의미[養義]와 증장시킨다는 의미[增義]가 불선근의 의미이다. 충족시킨다는 의미[充足義]와 요익케 한다는 의미[饒益義]와 매우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滋盛義]와 불선으로 흐르게 한다는 의미[流澍不善義]가 불선근의 의미이다. 화수밀 존자는 “어떤 것이 불선근의 의미인가? 불선인(不善因)의 의미가 불선근의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또 불선종자(不善種子)의 의미가 불선근의 의미이다. 또 불선을 일으킨다는 뜻이 불선근의 의미이다. 또 이미 불선을 일으키고, 불선이 일어나도록 돕고, 불선을 증익시킨다는 뜻이 불선근의 의미이다. 부타제바(浮陀提婆) 존자는 “불선은 본래 불선을 일으키고[能生不善], 불선이 일어나도록 돕고[助生不善], 불선을 증익시킨다[增益不善]는 뜻이 불선근의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문】 가령 인(因)의 의미가 불선근의 의미라면, 전생의 불선5음(不善五陰)은 후생의 불선5음에 대해서 인이 되고, 전생의 10불선업(不善業)은 후생의 10불선업에 대해서 인이 되고, 전생의 34불선사(不善使)는 후생의 34불선사에 대해서 인이 된다. 이와 같은 등의 불선법은 모두가 당연히 불선근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는 어떤 다른 특징이 있어서 불선근을 세운 것인가? 【답】 화수밀 존자는 “이것은 여래께서 설명을 남겨 놓은 것이다. 교화 받는 이를 위해서 간략하게 요점을 말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사 존자는 “부처님은 결정적으로 법의 근(根)을 알고 세용(勢用)도 아는데 여타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 가령 법에 불선근의 상(相)이 있으면 불선근을 세우고 없으면 세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구사 존자는 “부처님은 이 세 가지 법이 불선법에 대해서 신속하고 친근하고 편중(偏重)되게 인(因)이 됨을 안다. 이 때문에 세 가지 불선근을 세운 것이다. 나머지 불선법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상[三相]이 없다. 이 때문에 근을 세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일체의 불선법에 대하여 우두머리가 된다. 비유하면 마치 용맹스러운 장수가 뛰어난 군대의 앞에서 행군하는 것과 같은데, 그 위력 때문에 여타의 불선법이 일어난다. 또 일체의 불선법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뛰어난가? 이 세 가지 법이 일체의 불선법 가운데서 명칭도 가장 뛰어나고 의미도 가장 뛰어나다. 이 때문에 근을 세운 것이다. 또 탐불선근(貪不善根)은 불탐선근(不貪善根)의 근원대법(近怨對法)이고, 에불선근(恚不善根)과 치불선근(癡不善根)은 불에ㆍ불치선근의 근원대법이기 때문이다. 또 이 세 가지 법이 공덕의 원가(怨家)가 되는데, 공덕이란 3선근을 말한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이 모든 불선법에 대해서 인(因)이 되고, 근(根)이 되고, 주(主)가 되고, 본소작(本所作)이 되고, 세력이 되고, 연(緣)이 되고, 증익시키고, 집(集)이 되고, 기처(起處)가 되기 때문이다. 인이 된다는 것은 비유하면 종자가 되는 것과 같다. 근(根)이 된다는 것은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상(相)에 따라서 설한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이 불선법을 유지시키고, 초래시키고, 일으키고, 장양하고, 증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이 욕계욕을 떠날 때에 마치 문을 지키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많은 어려움과 장애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불선근은 5종단(種斷)이고, 6식신(識身)에 통하며, 사성(使性)이고, 신업ㆍ구업을 일으키며,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있기 때문이다. 5종단이란 견고단 내지 수도단의 다섯 가지이다. 6식신에 통한다는 것은 안식 내지 의식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사성(使性)이란 탐은 욕애사(欲愛使)이고 에는 진에사(瞋恚使)이고 치는 무명사(無明使)임을 말한다. 신ㆍ구업을 일으키는 것의 경우, 탐은 탐으로부터 일어나서 신ㆍ구업을 일으키고, 에는 에로부터 일어나서 신ㆍ구업을 일으키며, 치는 치로부터 일어나서 신ㆍ구업을 일으킨다.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된다는 것은, 가령 『시설경』에서는 “선근을 끊을 때 무엇 때문에 끊으며, 어떻게 끊는가? 답하건대, 비유하면 마치 탐욕이 치우치게 두텁고 진에가 두텁고 우치가 두터운 사람이 선근을 끊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설하였다.
5종단을 설한 까닭은 5견(見)과 의(疑)를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6식신에 통한다고 설한 까닭은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사성을 설한 까닭은 모든 얽매임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문】 가령 사견(邪見)의 경우도 선근을 끊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 않는가? 【답】 불선근이 선근을 끊을 때에는 방편이 될 때에도 세력이 뛰어나고 일을 완성시킬 때에도 세력이 뛰어나다. 일체의 선ㆍ불선법은 방편이 될 때는 세력으로 작용하기 어렵고 일을 완성시킬 때에는 세력으로 작용하기가 쉽다. 일찍이 듣건대, 보살이 세간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를 보고 물러남이 없는 무상도심(無上道心)을 처음 일으키고 이 이후로 3아승기겁 동안 이 마음에 물러남이 없는 데에 머물렀는데, 그를 어렵게 하거나 장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곧, 이 마음에 (선ㆍ불선의 법이) 작용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진지(盡智)를 얻어서 3계의 선근을 미래에 닦을 때는 그렇지 않다. 사견은 일을 완성시킬 때는 세용(勢用)이 뛰어나고 방편이 될 때에는 뛰어나지 않다. 이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또 가령 어떤 법이 선근을 끊을 때 불선법을 일으킬 수 있고, 불선법이 일어나도록 도울 수 있으면 불선근을 세운다. 탐ㆍ에ㆍ치는 불선법을 일으킬 수 있고, 불선법이 일어나도록 돕는데 사견은 불선법이 일어나도록 돕기는 하지만 불선법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또 사견이 선근을 끊는 것은 모두 불선근의 힘에 의해서 끊는다. 모든 불선근이 먼저 선근을 하열하고 미미하고 얇게 하여 곤란하고 세력이 없어지게 한 후에 사견이 선근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앞에서 “5종단(種斷)의 경우 불선근을 세운다”고 했는데 사견은 5종단이 아니고 6식신에 통하지 않는다. 저 사견은 의지(意地)에 속하고, 사성(使性)이긴 하지만 신ㆍ구업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견도소단심(見道所斷心)은 신ㆍ구업과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모든 불선근에 포섭되지 않는다.
불선5음(不善五陰)은 이 다섯 가지 일이 없다. 불선의 색음은 5종단이 아니고, 6식신에 통하지 않으며, 사성이 아니고, 신ㆍ구업을 일으키지 못하고,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불선의 수음ㆍ상음ㆍ식음은 번뇌에 포섭되지 않는다. 상응행음(相應行陰)은 비록 5행소단이고 6식신에 통하긴 하지만 사성(使性)이 아니고, 신ㆍ구업을 일으키긴 하지만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불상응행음(不相應行陰)은 5종단이긴 하지만 6식신에 통하지 못하고, 사성이 아니며, 신ㆍ구업을 일으키지 못하고,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번뇌 가운데서 5견(見)과 의(疑)는 5종단이 아니고 6식신에 통하지 않는다. 비록 사성이긴 하지만 신ㆍ구업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견도소단심은 신ㆍ구업과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만(慢)은 5종단이긴 하지만 6식신에 통하지 않고, 사성이고 신ㆍ구업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전(纏)에 열 가지가 있다. 분전(忿纏)ㆍ부전(覆纏)ㆍ수전(睡纏)ㆍ도전(掉纏)ㆍ면전(眠纏)ㆍ회전(悔纏)ㆍ질전(愱纏)ㆍ간전(慳纏)ㆍ무참전(無慙纏)ㆍ무괴전(無愧纏)이다. 수ㆍ도ㆍ무참ㆍ무괴의 이 네 가지는 5종단이긴 하지만 사성이 아니고, 신ㆍ구업을 일으키긴 하지만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면은 5종단이긴 하지만 6식신에 통하지 못하고, 사성이 아니고, 신ㆍ구업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없다. 나머지 전(纏)은 5종단이 아니고, 6식신에 통하지 못하며, 사성이 아니고, 때로는 신ㆍ구업을 일으키지만 선근을 끊을 때 견고하고 강력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한(恨)ㆍ한(佷)ㆍ첨(諂)ㆍ광(誑)ㆍ교(憍)ㆍ해(害)의 이 여섯 가지는 사구(使垢)가 아니고, 사(使)에 의지해서 일어나며 근본사(根本使)가 앞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 않는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업의 근본이고 업을 일으키는 원인[業集]이라고 한다. 가령 “가람마(迦藍摩)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탐은 중생의 업의 근본이고 중생의 업의 원인이며, 에ㆍ치도 또한 중생의 업의 근본이고 중생의 업의 원인이니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이 다하면 업도 또한 다한다. 가령 “탐이 다하면 업도 다하고 에ㆍ치가 다하면 업도 다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서로가 서로를 일으키고 서로 일어나도록 돕는다. 가령 “탐욕으로부터 성냄이 일어나고, 성냄으로부터 탐욕이 일어나며,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명도 일어난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3수(受)를 부린다. 가령 “탐욕은 낙수(樂受)를 부리고 성냄은 고수(苦受)를 부리고 우치는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부린다”고 설한 것과 같다. 【문】 이와 같은 세 가지 사는 모두가 3수를 부리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하는가? 【답】 많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탐욕은 낙수를 많이 부리고, 성냄은 고수를 많이 부리고, 우치는 불고불락수를 많이 부린다. 또 탐욕은 낙수로부터 생기해서 낙수로 근본을 삼고 많은 악업을 짓기 때문에 많은 고를 일으킨다. 성냄은 고수로부터 생기해서 고수로 근본을 삼고 많은 악업을 짓기 때문에 많은 고를 일으킨다. 우치는 불고불락수로부터 생기해서 불고불락수로 근본을 삼고 많은 악업을 짓기 때문에 많은 고를 일으킨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11)을 말하여 애증(愛憎)이라고 한다. 이 애증 때문에 중생은 많은 논쟁과 소송을 일으키고, 천과 아수라는 항상 서로 싸우며 많은 중생을 살해한다. 애(愛)란 탐내는 것이고 증(憎)이란 성냄이다. 【문】 이 중에서 무엇 때문에 치(癡)는 설하지 않았는가? 【답】 이 두 가지 가운데서 이미 설하였다. 가령 지혜가 있는 중생이라면 하늘에 이르기까지 욕(欲)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서로 싸우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의 악욕(惡欲)이 나타난 경우임에랴. 또 이것으로써 초문(初門)ㆍ요략(要略)ㆍ시입(始入)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번뇌는 모두 3분(分)으로부터 일어난다. 어떤 것은 애분(愛分)으로부터 일어나고, 어떤 것은 에분(恚分)으로부터 일어나고, 어떤 것은 치분(癡分)으로부터 일어난다. 불경에서는 설하기를 “바라문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스물한 가지 번뇌로 마음을 괴롭게 하면 정심(淨心)을 닦아 청정한 생각을 일으킨다 해도 오히려 악취에 떨어짐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담마다라 존자가 일체의 번뇌를 탐분ㆍ에분ㆍ치분의 3분으로 나누어서 세웠다. 곧, 이것이 탐분이고, 이것이 에분이고, 이것이 치분이라고 나누었는데, 가령 탐을 설하면 이미 탐분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에를 설하면 이미 에분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치를 설하면 이미 치분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애분ㆍ에분ㆍ치분의 경우와 같이 친분(親分)ㆍ원분(怨分)과 불친분(不親分)ㆍ불원분(不怨分)과 유은분(有恩分)ㆍ무은분(無恩分)과 유적의분(有適意分)ㆍ무적의분(無適意分)과 불유적의(不有適意)ㆍ불무적의(不無適意)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설함을 알아야 한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10악업(惡業)을 일으키기 때문에 10악처(惡處)에 떨어진다. 【문】 무엇을 세 가지 불선근이 10악업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는가? 【답】 불경에서는 “살생(殺生)에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탐욕으로부터 일으키고, 어떤 경우에는 성냄으로부터 일으키고, 어떤 경우에는 우치로부터 일으킨다. 나아가 사견(邪見)도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설하였다. 『시설경』에서도 “세 가지 불선근이 10악업의 인이 되는 근(根)이다”고 설하였는데,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10악업을 지어서 10악처에 태어나는 것인가? 【답】 불경에서는 “살생의 업을 광대하고 넓게 닦으면 지옥ㆍ축생ㆍ아귀 가운데 태어난다. 나아가 사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설하였다. 『시설경』에서도 “살생의 업을 광대하고 넓게 닦아 증상시키면 아비지옥(阿毘地獄, Avici-naraka)에 태어난다. 조금 가벼운 경우는 대열지옥(大熱地獄, Pratāpan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열지옥(熱地獄, Tapan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운 가벼우면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Mahāraurav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규환지옥(Raurav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중합지옥(衆合地獄, Saṃghāt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흑승지옥(黑繩地獄, Kālasūtr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활지옥(活地獄, Saṁjīva-naraka)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축생(Tiryañcaḥ)에 태어나고, 다시 더 가벼우면 아귀(Pretāḥ)에 태어난다. 나아가 사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설하였다. 이것을 10악업을 닦아서 10악처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을 내구(內垢)라고 한다. 가령 “탐욕을 내구라 하고 성냄을 내구라 하고 우치를 내구라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내구의 경우와 같이 내원(內怨)과 내혐(內嫌)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에 대하여 증가[增]를 말하기도 하고 감소[減]를 말하기도 한다. 가령 “어떤 것을 탐욕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성냄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우치가 증가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탐욕이 감소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성냄이 감소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것을 우치가 감소하는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퇴전하는 이에게 중인(重因)과 중연(重緣)이 된다. 가령 “만약 비구ㆍ비구니가 자기 스스로 탐욕심이 치성하고 진에심이 치성하고 우치심이 치성한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 비구ㆍ비구니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우 나의 선법(善法)에서 쇠약해져서 퇴전하느니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 설한다. 가령 “어떤 것이 번뇌장인가? 답하건대,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탐욕이 지나치게 두텁고 성냄이 지나치게 두텁고 우치가 지나치게 두터우면 이것을 번뇌장이라고 하느니라”고 설한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 불선근을 진(塵)이라고 한다. 가령 “이것이 탐진(貪塵)ㆍ에진(恚塵)ㆍ치진(癡塵)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진의 경우와 같이 예(穢)ㆍ구(垢)ㆍ전(箭)ㆍ화(火)ㆍ자(刺)ㆍ도(刀)ㆍ독(毒)ㆍ병(病)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문】 이 세 가지 불선근의 소행(所行)은 어떠한가? 【답】 만약 마음에 탐이 있으면 이 마음에는 에가 없고 마음에 에가 있으면 이 마음에는 탐이 없다. 치는 모두에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소행이 각각 다르기 때문인데, 탐의 소행은 기뻐서 뛰는 것이고 성냄의 소행은 우울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또 욕심이 성할 때는 몸을 유연하고 윤택하게 하며, 진에심이 성할 때는 몸을 거칠고 굳게 하여 손감시킨다. 또 욕심은 몸을 유연하게 하고 눈앞의 대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진에심은 몸을 거칠고 굳게 하여 눈앞의 대상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욕심은 몸을 유연하게 하는가? 【답】 욕심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몸이 유연해지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눈앞의 대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가? 【답】 가령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애심(愛心)을 일으키면 주야로 관찰하면서 싫증냄이 없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진에심은 몸을 거칠고 굳게 하는가? 【답】 진에심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자신의 몸을 거칠고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눈앞의 대상을 해칠 수 있는가? 【답】 가령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진에심을 일으키면, 나아가 눈으로 쳐다보려고도 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불선근은 5종단(種斷)이고 6식신(識身)에 통한다. 무엇 때문에 5종단인가? 가령 견도단이면서 수도단이 아니라면 수도소단인 심(心)은 바로 근이 없는 것이 되고, 가령 수도단이면서 견도단이 아니라면 견도소단인 심은 바로 근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6식신에 통하는가? 가령 의지(意地)에는 속하고 5식신(識身)에 속하지 않는다면 이 5식심은 근이 없는 것이 되고, 가령 5식신에는 속하면서 의지에는 속하지 않는다면 이 의지심(意地心)은 근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불선심은 이것으로 근(根)을 삼는다. 불선욕과 함께하는 마음은 두 가지 근이 있는데, 탐 및 이와 상응하는 무명을 말한다. 진에심과 함께하는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치와 함께하는 마음과 여타의 번뇌와 함께하는 마음은 한 가지 근이 있는데, 무명을 말한다. 【문】 근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신견(身見)이 근(根)이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세존이 근이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욕(欲)이 근이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불방일(不放逸)이 근이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자체(自體)가 근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든 근의 이름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신견이 근이라고 한 것은 신견으로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려서 모든 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세존이 근이라고 한 것은 세존께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번뇌의 출요ㆍ박해ㆍ증장ㆍ적멸 등의 (법이 많이 있지만) 이와 같은 등등의 법은 모두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세존이 근이라고 한 것이다. 욕이 근이라고 한 것은 선법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약 욕심이 있으면 선법을 모을 수 있는데 욕심이 없으면 선법을 모으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욕이 근이다. 불방일이 근이라고 한 것은 선법을 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방일하면 선법을 수호할 수 없는데 방일하지 않으면 선법을 수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불방일이 근이라고 한 것이다. 자체가 근이라고 한 것은 자체는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체가 근이라고 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위법도 역시 자체의 근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답】 만약 이 의미가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근이 되는 것이라면 무위법도 자체를 버리지 않으므로 근이 된다 해도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또 이와 같은 허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자체가 근이라고 한 것은 상사인(相似因)인 자체근이 다른 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고법인과 권속은 근이 없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상사인이 없기 때문이다. 【답】 상사인으로부터 생기하지 않는다 해도 다른 것에 상사인이 될 수 있는데 무위법은 상사인으로부터 생기하지도 않고 또 다른 것에 대해 상사인이 되지도 못한다. 【評】이것은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성근(自性根)이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신견이 근이다’고 한 것부터 ‘자체가 근이다’고 한 것까지의 이름의 차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