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_0811_c_02L2법으로서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이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인견(人見)을 그치게 하고 희유한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인견을 그치게 한다고 함은, 이 색법과 무색법에는 필경 인(人)은 없다는 것이다. 희유한 지혜를 드러낸다는 것이란 총명하여 지혜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법으로써 제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법은 능히 일체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을 색법이라 하는가? 【답】 10입(入)과 1입의 일부분이다. 10입이란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이다. 1입의 일부분이란 법입(法入)을 말한다. 【문】 무엇을 무색법이라 하는가? 【답】 1입과 1입의 일부분, 즉 의입(意入)과 법입을 말한다. 【문】 무엇을 색법이라 이름하고, 무엇을 무색법이라 이름하는가? 【답】 법의 이름이 색이고 체(體)가 색이면 색이고, 법의 이름이 색이 아니고 체도 색이 아니면 무색이다. 또한 법의 체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것이면 색이고, 법의 체가 4대도 아니고 4대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면 무색이다. 또한 4대로 인을 삼고 체가 4대로 만들어진 색이면 색이며, 법이 4대로 인을 삼지 않고 체도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무색이다. 또한 법이 생겨나서 증장할 수 있으면 색이며, 이것과 상위(相違)하면 무색이다. 화수밀(和須蜜) 존자는 “여기에서 색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답하건대, 점차로 온다 라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며, 점차로 무너진다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며, 방소(方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며, 장애의 의미가 색의 특징이며, 해치려는 마음[怨]과 더불어 작용하여 항상 끊어지고 줄어드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세 가지 뜻이 있다. 색의 특징에는 볼 수 있고 유대인 색[可見有對色]이 있고, 볼 수 없고 유대인 색[不可見對色]이 있고, 볼 수도 없고 무대인 색[不可見無對色]이 있다. 취하고 버릴 수 있는 모습의 의미가 색의 특징이며, 또한 장애의 의미가 색의 특징이다. 【문】 과거와 미래의 색 그리고 미진과 무작색(無作色:無表色)은 응당 색이 아닌 것인가? 【답】 색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색이다. 과거의 색은 이미 장애가 있었던 것이고, 미래의 색은 앞으로 장애가 있게 되는 것이다. 미진(微塵)은 하나일 경우에는 장애할 수 없지만, 합하면 곧 능히 장애하며, 무작색은 장애가 없는 것이지만 소의(所依)가 바로 장애가 된다. 어떤 것이 소의인가? 이른바 4대가 바로 그것이다. 4대로써 장애하기 때문에 그 또한 장애가 있다. 비유하면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 또한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 또한 제거하고 물리친다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다. 또한 하나의 모습이 있다는 의미가 색의 특징이다. 안(眼)과 색(色)의 모습이 서로 다르고, 나아가 법입 증에 색의 모습이 다르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장애하여 무너뜨리는 뜻이 색의 특징이며, 이것과 상위하는 것은 무색(無色)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슨 까닭에 법입 중의 색은 10입 중에서 설하지 않는가? 【답】 가령 색이 찰나를 경과할 때 이것이 미진의 성질이면 10입 중에 포함되지만, 법입 중의 색은 비록 찰나를 경과하더라도 미진의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설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색이 5식의 소의(所依)와 5식의 소연(所緣)이면 10입 중에서 설하지만 법입 중의 색은 5식의 소의도 아니고 5식의 소연도 아니다. 그래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문】 색계의 색이 많은가, 욕계의 색이 많은가? 【답】 입(入)에 의거하면 욕계의 색이 많다. 그것은 왜냐하면 욕계의 색은 2입과 9입의 일부분이지만, 색계의 색은 9입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체분(體分)에 의거하면 색계의 색이 많다. 그것은 왜냐하면 가령 『시설경(施設經)』에서 설하듯이, 광음천의 몸은 대범세천(大梵世天, Mahābrahma-loka)의 몸으로 바뀌고, 나아가 아가니타천(阿迦膩吒天, Akaniṣṭha)의 몸으로 바뀌고 또한 계속해서 큰 몸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으로서 볼 수 있는 법[可見法]과 볼 수 없는 법[不可見法]이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인견(人見)을 중지시키고 희유한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 논을 지은 까닭은 의미를 다투는 자들의 의도를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은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가령 구사(瞿沙) 존자 등의 경우이다. 구사 존자는 말하기를 “일체법은 모두 볼 수 있으니, 이것은 혜안의 경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설하는 자의 뜻을 중지시키고, 법은 볼 수도 있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을 볼 수 있는 법이라고 하는가? 【답】 1입으로서 색입을 말한다. 【문】 무엇을 볼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가? 【답】 11입이다. 【문】 무슨 까닭에 10색입 중에 하나만을 볼 수 있다고 설하고, 나머지는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색입은 거칠게 나타나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12입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색입에는 스무 가지가 있다. 스무 가지는 긴 것ㆍ짧은 것ㆍ모난 것ㆍ둥근 것ㆍ마음에 드는 것ㆍ마음에 들지 않는 것ㆍ높은 것ㆍ낮은 것ㆍ푸른 것ㆍ누런 것ㆍ붉은 것ㆍ흰 것ㆍ빛ㆍ그림자ㆍ밝은 것ㆍ어두운 것ㆍ구름ㆍ연기ㆍ티끌ㆍ안개이다. 또 어떤 사람은 “스물한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곧 앞에서 설명한 스무 가지 및 허공의 한 가지 색이다”라고 하였다. 【문】 이 스무 가지의 색 중에서 및 가지가 색깔[色]이 있고 형태[形]가 없으며, 몇 가지가 색깔도 있고 형태도 있는가? 【답】 여덟 가지가 색깔은 있으나 형태가 없는데, 이른바 푸른 것ㆍ누런 것ㆍ붉은 것ㆍ흰 것ㆍ빛ㆍ그림자ㆍ밝은 것ㆍ어두운 것을 말한다. 나머지 열두 가지는 색깔도 있고 형태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사구(四句)를 지어 말하기를 “어떤 것은 색깔이 있고 형태가 없으며, 어떤 것은 형태가 있고 색깔이 없으며 …(이하 네 구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며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색깔이 있고 형태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푸른 것ㆍ누런 것ㆍ붉은 것ㆍ흰 것ㆍ빛ㆍ그림자ㆍ밝은 것ㆍ어두운 것으로, 이 여덟 가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형태가 있고 색깔이 없는 것은, 이른바 그 자체 몸에서 색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색깔이 있고 형태가 있는 것은, 긴 것ㆍ짧은 것ㆍ모난 것ㆍ둥근 것ㆍ마음에 드는 것ㆍ마음에 들지 않는 것ㆍ높은 것ㆍ낮은 것ㆍ구름ㆍ연기ㆍ티끌ㆍ안개 등의 스무 가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색깔도 없고 형태도 없는 것은, 이른바 색깔이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은 색을 말한다. 【문】 볼 수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볼 수 없다는 뜻은 무엇인가? 화수밀 존자는 “여기 저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니 이것이 볼 수 있다는 뜻이고, 여기 저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볼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 존자는 “눈의 경계가 눈의 소행처이면 볼 수 있다는 뜻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볼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설한다. 【문】 물그릇 속에 영상과 거울 속의 영상은 실재하는 것인가, 실재하지 않은 것인가? 【답】 비유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거울은 면(面)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면은 거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찌 실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비담자는 “이것은 실재이다. 그것은 왜냐 하면 색입(色入)은 안식(眼識)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문】 면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거울은 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실재이겠는가? 【답】 몇 가지 인연으로 색을 생기시켜 색입이 됨을 말하는 것이지, 한 가지 인연으로 색을 생기게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달과 월광주(月光珠)가 그릇을 반연하면 물이 생기고, 해와 일광주(日光珠)가 마른 소똥을 반연하면 불을 생기게 하여 불의 작용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실재가 없는 것이 아니며, 가령 부싯돌을 비비거나 사람의 공력으로 불을 일으켜도 불의 작용이 있듯이 그 실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거울을 반연하고 면(面)을 반연하여 거울 속의 영상을 생기게 하여도 실제로 영상의 작용은 있어서 능히 안식을 일으키므로 그 실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문】 들려 오는 메아리 소리는 실재인가, 실재가 아닌 것인가? 【답】 비유자(譬喩者)는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1찰나 동안 소리가 생겨나면 곧바로 그 찰나에서 소리가 소멸하는데 어디에서1) 득을 받아들여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비담자는 “이것은 실재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것은 귀의 경계이며, 이식이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1찰나 동안 소리가 생겨나자마자 그 찰나에서 소멸하면 어느 계곡에서 곳에서 득(得)을 받아들여 메아리를 생기게 하는가? 【답】 몇 가지 인연으로 소리를 내어 성입(聲入)이 됨을 말하는 것이며, 한 가지 인연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혀ㆍ이ㆍ입술ㆍ잇몸ㆍ목구멍 등이 서로 접촉하여 소리를 내서 이식(耳識)을 생기게 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의 실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 또한 이와 같다. 두 가지 법으로서 유대법(有對法)과 무대법(無對法)2)이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인견(人見)을 중지시키고 희유한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무엇을 유대법이라 하는가? 【답】 10색입으로서 5내입(內人)과 5외입(外入)을 말한다. 【문】 무엇을 무대법이라 하는가? 【답】 2입으로서 의입과 법입을 말한다. 유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장애(障礙)유대, 둘째 경계(境界)유대, 셋째 연(緣)유대이다. 장애유대란 손과 손을 치면 서로 장애가 되고, 돌과 돌을 치면 서로 장애가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을 장애유대라 한다. 경계유대란 눈이 색을 대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경계유대라고 한다. 연유대한 심과 심수법이 각각 자신의 소연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이것을 연유대라고 한다. 세 가지 유대 중에서 여기에서는 장애유대에 의거하여 논을 짓는다. 【문】 몇 가지 입에 장애가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1입, 즉 촉입(觸入)에 장애가 있다. 나머지 입은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5입에 장애가 있다. 내입(內入) 중에 신입(身入)에 장애가 있고, 외입(外入) 중에 색ㆍ향ㆍ미ㆍ촉입에 장애가 있다. 이와 같이 5입에 장애가 있다고 설하면 손끼리 부딪칠 때 5입끼리 부딪치고, 손으로 돌을 칠 때는 5입과 4입이 부딪치고, 돌과 돌이 부딪칠 때 4입끼리 부딪치고, 돌과 손이 부딪칠 때 4입과 5입이 부딪치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성입(聲入)을 제외한 9색입3)에 장애가 있다. 만약 손과 눈이 부딪치면 어찌 장애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評】“10입에 장애가 있다. 성입에 장애가 없다면 소리는 곧 적취(積聚)의 뜻이 없어야만 한다”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시설경』에서 “눈은 결정적으로 색을 대하고, 색은 결정적으로 눈을 대하며, 나아가 의(意)는 결정적으로 법을 대하고, 법은 결정적으로 의를 대한다”고 설한다. 저 존자4)가 지은 논은 경계유대를 설하는 것이다. 어떤 눈은 물 속에서 장애를 받지 않지만 육지에서는 장애를 받는다. 가령 물고기와 같다. 어떤 눈은 육지에서는 장애를 받지 않지만 물 속에서는 장애를 받는다. 사람 등과 같다. 물 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육지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경우는 수발타인(須跋陀人)5)과 물 속에서 태어나는 나찰 등이다. 물 속에서도 장애를 받고 육지에서도 장애를 받는 것은 위에서 밝힌 내용을 제외한 경우이다. 어떤 눈은 밤에는 장애를 받지 않지만 낮에 장애를 받는데, 올빼미와 부엉이 등과 같다. 낮에 장애를 받지 않지만 밤에 장애를 받는 것은 사람 등과 같은 경우이다. 밤과 낮 모두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은 사슴ㆍ말ㆍ너구리ㆍ고양이 등과 같은 경우이다. 밤과 낮 모두 장애를 받는 것은 위에서 밝힌 내용을 제외한 경우이다. 【문】 여기에서는 어떤 것이 유대이고 어떤 것이 무대인가? 【답】 적취와 미진의 경우에는 유대이고, 적취와 미진이 아닐 경우에는 무대이다. 또한 갖가지 특징을 달리하면 유대이고, 갖가지 특징을 달리하지 않으면 무대이다. 또한 덥고 가리는 특징이 있으면 유대이고, 덥고 가리는 특징이 없으면 무대이다. 또한 적취의 특징이 있으면 유대이고, 적취의 특징이 없으면 무대이다. 또한 큰 형단(形段)이 있으면 유대이고, 큰 형단이 없으면 무대이다. 또한 가히 제거할 수 있으면 유대이고, 가히 제거할 수 없으면 무대이다. 바사(波奢) 존자는 “나누어지는 특징이 있으면 장애가 있으며, 장애가 있으면 적취가 있고, 적취가 있으면 형단이 있고, 제거할 수 있다. 제거할 수 있으면 유대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대이다”라고 하였다. 화수밀 존자는 “나누어지는 특징이 있고 장애하는 특징이 있으면 유대이며, 나누어지는 특징이 없고 장애하는 특징이 없으면 무대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제거할 수 있는 특징인 것은 유대(有對)이며, 제거할 수 있는 특징인 것은 무대(無對)이다”라고 하였다. 구사(瞿沙) 존자는 “적취하는 미진(微塵)의 성질이 있고, 길고 짧은 것을 시설할 수 있는 색이 있고, 능히 소리를 낼 수 있으면 유대이다. 적취하는 미진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8입(入)을 말하며, 길고 짧은 것을 시설할 수 있는 색이 있다는 것은 색입을 말한다. 또한 능히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성입을 말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과 상위하는 것은 무대이다”라고 하였다. 바마륵(婆摩勒) 존자는 “합해지고 모이며 많아지는 미진의 적취가 유대이며, 이것과 상위한 것이 무대이다”라고 하였다. 2법으로서 유루법(布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이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인견을 중지시키고 희유한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논을 지은 까닭은 다투어 논쟁하는 자[倂義者]들의 뜻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가령 마하승기부(摩訶僧祈部)에서 “불신(佛身)은 한결같이 무루이다”라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문】 저들은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이 설하는가? 【답】 그들은 불경을 의거하기 때문이다. 곧, 불경에서는 “여래께서는 세간에 태어나셔서 세간에 오래 머무르셔도 세간을 벗어나셨기에 세간에 오염되지 않으신다”고 설한다. 이에 대해 그들은 “부처님께서 세간을 벗어나서 세간에 오염되지 않으셨다면 불신은 한결같이 무루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이 설하는 자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또한 불신은 유루임을 밝히기 위해서 이 논을 짓는 것이다. 만약 불신이 무루라면 무비(無比, Anupamā) 여인은 블신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한다. 그 밖에 자세한 내용은 잡건도(雜犍度)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무엇을 유루법이라 하는가? 【답】 10입과 의입ㆍ법입 2입의 일부분이다. 【문】 무엇을 무루법이라 하는가? 【답】 2입의 일부분으로서 의입과 법입이다. 【문】 무슨 까닭에 유루법과 무루법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만약 법이 존재하는 것[有]을 능히 증장시키면 유루이며, 이것과 상위하면 무루이다. 또한 법이 존재하는 것을 능히 상속시키고 생ㆍ노ㆍ병ㆍ사를 능히 증장시키면 유루이며, 이것과 상위하면 무루이다.…(이하 자세 한 내용은 생략함). 만약 법이 고와 집제에 떨어지면 유루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루이다. 화수밀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을 유루의 특징이라 하고, 무엇을 무루의 특징이라 하는가? 유루로부터 생겨나면 유루의 특징이고, 유루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면 무루의 특징이다. 또한 능히 유루의 특징을 생기게 하면 유루이고, 능히 유루의 특징을 생겨나게 하지 않으면 무루이다.” 불타제바 존자는 “처소에서 능히 누(漏)가 생겨나면 유루의 특징이고, 처소에서 누가 생겨나지 않으면 무루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2법으로서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인견을 중지시키고 희유한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무엇을 유위법이라 하는가? 【답】 11입과 1입의 일부분으로서 법입이다. 【문】 무엇을 무위법이라 하는가? 【답】 1입의 일부분으로서 법입이다. 【문】 무슨 까닭에 유위법, 무위법이라고 하는가? b 문 법에 생멸이 있고 인(因)이 있고 유위의 특징이 있으면 유위법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위법이다. 또한 법이 인에 속하고 연에 속하고 소작(所作)에 속하고 화합에 속하면 유위법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위법이다. 또한 법이 생(生)과 소생(所生)이 되고 주(住)와 소주(所住)가 되고 노(老)와 소노(所老)가 되면 유위법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위법이다. 또한 법이 세간에 유행하여 능히 과를 적취하고 능히 연(緣)을 알며 능히 소작하면 유위법이고, 이 법과 상위하면 무위법이다. 또한 법이 세간에 떨어지고 음(陰)에 있으며 고(苦)의 상속이고 전후가 있고 상ㆍ중ㆍ하가 있으면 유위법이고, 이것과 상위하면 무위법이다. 화수밀 존자는 “무엇을 유위의 특징이라고 하는가? 답하건대, 세간의 특징과 음의 특징이 바로 유위의 특징이다. 무엇을 무위의 특징이라 하는가? 답하건대, 세간의 특징도 아니고 음의 특징도 아닌 것이 바로 무위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 존자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생멸이 있으면 유위의 특징이며, 중생으로 말미암지 않아 생멸이 없으면 무위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3법으로서 과거법(過去法)ㆍ미래법(未來法)ㆍ현재법(現在法)이 있다. 【문】 무엇을 과거법이라 하는가? 【답】 과거의 5음(陰)이다. 【문】 무엇을 미래법이라 하는가? 【답】 미래의 5음이다. 【문】 무엇을 현재법이라 하는가? 【답】 현재의 5음이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투어 논쟁하는 자[倂義者]들의 주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가령 비유자(譬喩者)는 말하기를 “세간은 항상하고 행(行)은 무상하다. 행이 세간에 유행할 때는 마치 물건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는 것과 같으며, 많은 사람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르는 것과 같다. 제행이 세간에 유행할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설하는 자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또한 행이 바로 세간이며, 세간이 바로 행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4대건도(四大犍度)에서는 설하기를 “세간이란 어떠한 법을 이름하는 것인가? 답하건대, 행하는 것을 말로써 설명하는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 논을 지은 까닭은 세간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현재는 무위법이라고 설하는 자의 뜻을 중지시키고, 또한 과거와 미래는 실유상(實有相)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라 설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성취와 불성취도 없어야 한다. 마치 제2의 머리[頭], 제3의 손[手], 제13의 입(入)에 성취(成就)와 불성취(不成就)가 없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가 없을 경우에는 성취와 불성취가 없게 된다. 만약 성취와 불성취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과거와 미래가 실유상임을 알 수 있다.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저 과거는 현재시에 만들어진 인(因)과 같다”고 설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저 과(果)가 마땅히 과거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미래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현재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에 있다면 마땅히 과거가 있다 말해야 하며, 과거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과거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일은 옳지 못하다. 만약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면 미래가 있다고 말해야만 하고, 미래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일은 옳지 못하나. 만약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인(因)과 과(果)를 함께 갖추게 된다. 인ㆍ와를 함께 갖춘다면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는 어긋난다.
악을 지어도 곧바로 받지 않는 것은 우유가 낙(酪)이 되는 것과 같지 않으니, 어리석은 자가 재 속의 불을 밟아도 곧바로 발이 타버리지는 않는다네.
만약 과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면 과가 없게 된다. 과가 없으면 인도 없어서 제2의 머리, 제3의 손, 제6의 음(陰), 제13의 입이 있다고 하는 경우와 같게 된다. 만약 인ㆍ와는 있어도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고 하면 이것은 항상한 것으로서 무위법과 같게 된다. 만약 과(果)가 현재시에 있다면 저 인은 어느 곳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미래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현재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과거에 있다면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미래에 있다면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현재에 있다면 또한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만약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지 않다면 인이 없게 되고, 인이 없으면 곧 과도 없게 된다. 마치 제2의 머리, 제3의 손, 제6의 음, 제13의 입이 있다고 하는 경우와 같게 된다. 인ㆍ와는 있어도 3세(世)에 있지 않다고 하면 곧 항상한 것으로서 무위법과 같게 된다. 또한 과거와 미래가 없다고 하면 출가법도 없게 된다. 가령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과거가 없다고 설하면 과거불도 없게 되며 과거불이 없게 되면 출가법도 없게 된다네.
또한 과거와 미래가 없다고 하면 이것은 바로 항상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가령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과거가 없다 말하면서 수행의 경력[臘數]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일체시에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네.
또한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과거ㆍ미래가 있어서 현재를 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세가 없다면 유위법도 없으며, 유위법이 없으면 또한 무위법도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유위가 있어서 곧 무위를 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없으면 일체법도 없게 되고, 일체법이 없으면 곧 해탈과 출리(出離)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은 허물이 없게 하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에 실유상(實有相)이 있음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며, 또한 법상과 상응하는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이 세(世)의 체성인가? 【답】 과거의 5음과 미래와 현재의 5음이다. 이것이 바로 세의 체성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미 체성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므로 그 까닭을 지금부터 설명 하겠다. 【문】 무슨 까닭에 세라고 이름하며 세는 곧 어떤 뜻인가? 【답】 간다는 뜻[去義]이 세의 뜻이다. 【문】 제행(諸行)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만약 오는 것이라면 가는 것이 아니고 가는 것이라면 오는 것이 아니며, 오는 것은 곧 온 곳이 마땅히 공(空)이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저 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만약 가는 것이라면 가는 곳과 서로 방해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가서 저 곳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수밀 존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설하였다.
제행은 오는 모습 없고 제행은 찰나이어서 가는 모습도 없으며 또한 머무름도 없다네.
만약 행에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3세가 있겠는가? 【답】 소작이 있기 때문이다. 제행에 소작이 없으면 이를 미래라 하고 소작이 있으면 현재라 하며, 소작이 이미 소멸했으면 이를 과거라고 한다. 만약 눈이 아직 색을 보지 못했으면 이는 미래이고, 색을 보고 있으면 이는 현재이며, 색을 보고 나서 소멸하였으면 이는 과거이다. 【문】 그렇다면 현재의 피분(彼分)의 눈에는 무엇 때문에 소작이 있는가?
【답】 상사인(相似因)이 되기 때문이다. 눈앞에 드러나지 않을 경우에는 미래의 것에 상사인이 되지 않고 눈앞에 드러날 경우에 미래의 것에 상사인이 된다. 나아가 의(意) 또한 이와 같다. 가령 색(色)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직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은 미래이고,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현재이며, 장애가 되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가령 수(受)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미래이며, 생겨난 것은 현재이며, 생겨나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나아가 상ㆍ행ㆍ식의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법으로서 아직 과(果)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 것은 미래이며, 과를 취하고 과를 주는 것은 현재이며, 과를 취하고 과를 주고 나서 소멸하는 것은 과거이다. 또한 법으로서 의과(依果)와 보과(報果)를 취하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것은 미래이며, 의과와 보과를 취하고 아직 주지 않는 것은 현재이며, 의과와 보과를 취하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또한 법으로서 상사인과 일체변인(一切遍因)을 아직 주지 않은 것은 미래이고, 주는 것은 현재이며, 주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또한 법으로서 아직 생겨나지 않아서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은 미래이고, 이미 생겨났으나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은 현재이며, 생겨나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아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경우[未生未離]와 이미 생겨나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경우[已生未壞]와 이미 생겨나서 이미 무너진 경우[已生已壞]와 아직 생겨나지 않고 아직 떠나지 않은 경우[未生未離]와 이미 생겨나서 아직 떠나지 않은 경우[已生未離]와 이미 생겨나서 이미 떠난 경우(已生已離)에 대한 설명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법으로서 아직 세 가지 유위상을 짓지 않은 것은 미래이고, 이미 한 가지 유위상은 지었고 지금 두 가지 유위상을 짓는 것은 현재이고, 이미 세 가지 유위상을 지은 것은 과거이다. 또한 법으로서 4연(緣)이 되지 못하는 것은 미래이고, 4연이 되는 것은 현재이며, 4연이 되고 나서 소멸한 것은 과거이다. 또한 법으로서 3세에 인이 되는 것은 과거이고, 2세에 인이 되는 것은 현재이며, 1세에 인이 되는 것은 미래이다. 또한 법이 3세의 과가 되는 것은 미래이고, 2세의 과가 되는 것은 현재이며, 1세의 과가 되는 것은 과거이다. 또한 과거와 미래에 의거하여 현재를 시설하는 것이지, 현재로써 현재를 시설하는 것이 아니다. 제4의 세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에 의거하여 미래를 시설하는 것이지 미래로써 미래를 시설하는 것이 아니다. 제4의 세는 없기 때문이다. 미래와 현재에 의거하여 과거를 시설하는 것이지 과거로써 과거를 시설하는 것이 아니다. 제4의 세는 없기 때문이다. 【문】 모든 과거에 속하는 것은 색에 속하는 것인가? 【답】 어떤 경우에는 과거에 속하는 것이지만 색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자세하게 4구(句)를 짓는다. 과거에 속하지만 색에 속하지는 않는 경우는 과거의 4음을 말한다. 색에 속하지만 과거에는 속하지 않는 경우는 미래ㆍ현재의 색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도 속하고 색에도 속하는 경우는 이른바 과거의 색에 속하는 것을 말하며, 과거에도 속하지 않고 색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는 이른바 미래ㆍ현재의 4음에 속하고 무위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색의 경우에 있어서 4구를 짓는 것처럼 나아가 식 또한 4구를 짓고, 과거의 다섯 가지에서 4구를 짓는 것처럼 미래ㆍ현재의 다섯 가지 경우에 있어서도 4구를 짓는다. 곧 열다섯 가지 경우에 있어서 4구를 이루게 된다. 【문】 만약 색에 속하는 것이면 모두 방분(方分)에 속하는 것인가? 【답】 방분에 속하는 것은 모두 색에도 속하는 것이다. 【문】 색에는 속하지만 방분에는 속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답】 있다. 과거ㆍ미래의 색과 현재의 미진(微塵)과 그리고 무작색(無作色)이다. 【문】 수(受)에 속하는 것이면 그 법은 모두 방분에 속하지 않는 것인가? 【답】 수에 속하는 것이면 모두 방분에 속하지 않는다. 【문】 방분에도 속하지 않고 수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답】 있다. 상ㆍ행ㆍ식에 속하는 과거ㆍ미래의 색과 현재의 미진과 무작색이며, 그리고 무위법에 속하는 경우이다. 수의 경우와 같이 상ㆍ행ㆍ식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문】 색에 속하는 것은 모두 다 장애가 있는가? 【답】 장애가 있는 것은 모두 색에 속하는 것이다. 【문】 색에 속하는 것이면서도 장애가 아닌 경우가 있는가? 【답】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색과 현재의 미진과 무작색이다. 【문】 수에 속하는 것은 모두 다 느낄 수 있는 것인가? 【답】 느끼는 것이면 모두 수이다. 【문】 수에 속하는 것이면서도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답】 있다. 과거와 미래의 수이다. 수의 경우와 같이 상ㆍ행ㆍ식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문】 이미 생겨난 것이 생긴 것인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 생긴 것인가? 만약 이미 생겨난 것이 생긴 것이라면 어떻게 제행은 다시 전환하지 않는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 생긴 것이라면 어떻게 제행은 본래 없는 것인데 있게 되는가? 【답】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미 생겨난 것이 생겨나고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 생겨난다”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해야 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미 생겨난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제법이 본래 자체상(自體相)에 머물러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일체의 미래법으로서, 이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문】 세(世)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세의 중간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세에서 생겨난다면 어찌하여 1법이 생겨날 때 일체법은 생겨나지 않는가? 만약 1법이 생겨나고 일체법이 생겨난다면 곧 세는 무너지게 된다. 만약 세의 중간에서 생겨난다면 어떻게 행이 세와 다르지 않겠는가? 【답】 “인연으로 말미암아 세가 생겨나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세 중간에 생겨난다”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세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1찰나가 생겨날 때가 곧 바로 세이기 때문이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세(世) 증간에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미래세의 중간에서 1찰나가 생겨나는 것으로, 나머지 찰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저 법이 생겨나면 저 법은 멸하는 것인가? 나머지 법이 생겨나면 나머지 법도 멸하는 것인가? 만약 저 법이 생겨나자마자 곧바로 저 법이 멸한다면, 미래법이 생겨나자마자 미래법은 멸하는 것인가? 나머지 법이 생기고 나머지 법이 멸한다면 색이 생기고 수는 멸하는 것인가? 【답】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 법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저 법은 멸하는 것이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법이 생기고 나머지 법이 소멸한다”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 법이 생기자마자 저 법이 멸한다고 하는 것은 색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색은 소멸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식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식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법이 생기고 나머지 법이 소멸한다는 것은 미래세가 생기면 현재세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문】 자분(自分)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타분(他分)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자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면 본래 자분은 없는데, 자분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본래 사물의 체성은 없는데 사물의 체성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타분에서 생겨난다면 어떻게 법이 자체를 버리지 않는가? 【답】 “자분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타분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법체와 같이 생겨나고 나서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문】 미래세는 줄어들고 과거세는 늘어나는데, 어떻게 두 가지 세에 증감이 있다고 시설하지 않는가? 【답】 화수밀 존자는 “증가하는 수로 계산한다면 과거와 미래세에는 증감이 있는가? 만약 증가하는 수로 과거와 미래세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과거와 미래세에 증감이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과거와 미래는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증감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바다에서 십만 병의 물을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고, 십만 병의 물을 쏟아 부어도 늘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닷물은 한량없기 때문이니,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미래법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고 아직 멸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줄어들지 않고, 과거법은 생겨나고 나서 소멸했기 때문에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미래법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에 줄어들지 않으며, 과거법은 생기고 나서 무너졌기 때문에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미래법은 아직 생겨나지 않고 아직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줄어들지 않고 과거법은 생겨나고 나서 여의었기 때문에 늘어나지 않는다. 불타제바 존자는 “법이 세(世)에 행하면 무슨 까닭에 증감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가? 단지 법은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과거와 미래는 마치 현재의 담벽ㆍ수목ㆍ산의 바위 등 처럼 적취가 있는 것인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인가? 만약 적취가 있다면 어떻게 시주가 지은 일이 헛되게 그 공을 훼손하지 않으며, 어떻게 그 방소(方所)가 있지 않으며, 어떻게 항상하지 않으며 어떻게 나타나지 않는가? 만약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 어떻게 “과거에 선견(善見, Sudarśana)이라는 왕이 있었고, 그 성의 이름은 구사발제(拘奢跋提, Kusāvati)이며, 강당은 선법(善法, Sudharma)이라 한다”고 설하며, 또한 “비바시불(毘婆尸佛) 내지 가섭불(迦葉佛)이 있었다”고 설하며, 또한 “미래에 성은 계두(鷄頭)라 하고, 미래불의 이름은 미륵이라고 어떻게 설하겠는가? 또한 과거의 일을 관하는 숙명지(宿命智)와 과거ㆍ미래의 일을 관하는 원지(願智)를 어떻게 시설하겠는가? 어떻게 본래 없는 것을 지금 있다고 하고,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없다고 하겠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마땅히 (과거ㆍ미래의) 적취(積聚)란 현재의 담벽 등과 같다고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단월(檀越)이 지은 일이 헛되이 그 공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아닐 수 있는가? 【답】 다른 이가 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공을 닦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지만 공을 닦으면 곧 나타난다. 【문】 어떻게 방소(方所)는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 방소가 있다한들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문】 어떻게 항상하지 않다고 하는가? 【답】 찰나에도 무상이 있기 때문이다. 【문】 무슨 까닭에 나타나지 않는가? 【답】 아직 5식신(識身)의 경계가 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지만 이미 5식신의 경계가 되면 나타나기 때문이다. 【評】“현재는 적취이며, 미래와 과거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수(法數) 중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가 있다고 설하는가? 【답】 과거를 설할 경우, 본래 현재시와 같다. 【문】 어떻게 미래가 있다고 설하는가? 【답】 미래를 설할 경우, 마땅히 현재시가 있는 것과 같다. 【문】 어떻게 숙명지(宿命智)와 원지(願智)의 경계는 과거가 되는가? 【답】 그것이 겪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전에 경험했던 글자로 차례로 구(句)를 세워서 뜻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는 일찍이 경험했던 일을 차례로 기억해서 지견(智見)을 일으킨다. 【문】 어떻게 원지의 경계가 미래가 되는가? 【답】 과거의 경우와 같이 현재의 특징[相]을 비교해서 아는 것인데, 가령 농부가 그 특징을 비교해서 아는 것과 같다. 【문】 어떻게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이 다시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 이것은 살바다(薩婆多)6)와 통할 수 없다. 살바다에는 네 종류의 논사가 있어서 각각 사(事)의 차이를 설하고, 상(相)의 차이를 설하고, 시(時)의 차이를 설하고 이(異)의 차이를 설한다. 사(事)의 차이를 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법이 세(世)에 행해질 때 사(事)는 차이가 있고, 체(體)는 차이가 없다. 비유하면 금은의 그릇이 파손되고 나서 다시 만들어도 비록 그 형태는 차이가 있지만 그 색(色)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우유가 낙(酪)으로 변할 때 그 향과 맛은 비록 차이가 있지만 그 색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미래법이 현재에 이르를 때 비록 미래법을 버리지만 그 체는 버리지 않고, 현재법이 과거에 이르를 때 비록 현재법은 버리지만 그 체는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다. 상(相)의 차이를 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법이 세(世)에 행해질 때 과거법은 과거의 특징을 지니지만 미래와 현재의 특징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미래법은 미래의 특징을 지니지만 과거와 현재의 특징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현재법은 현재의 특징을 지니지만 과거와 미래의 특징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자[女色]에 애착하더라도 다른 여자에 대해서 애착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 역시 이와 같다”고 한다. 시(時)의 차이를 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법이 세에 행해질 때 시(時)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생겨나지만 그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비유하면 주판알을 첫자리에 놓으면 일이라 하고 일을 다음 자리에 옮기면 십이라 하고, 또 다시 옮기면 백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해서 천만에 이르러도 주판알은 하나이며 다만 그 장소를 옮기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를 설명하는 것을 일컬어 ‘번거롭거나 어지럽지 않다’고 한다.왜냐하면 소작(所作)으로써 설명하기에 곧 3세가 있게 되는데, 법에 아직 소작이 있지 않으면 미래라 하고, 소작이 있으면 현재라 하고, 소작이 이미 소멸했으면 과거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離)의 차이를 설명하는 자는 말하기를 “법이 세에 행해질 때 전후가 있기 때문에 이름에 차이가 생긴다. 마치 한 사람의 여자를 딸이라 부르고 또한 어머니라고도 부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딸이라 이름하고, 그에게 딸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이 세에 행해질 때 전후가 있기 때문에 차이가 생겨나며, 시가 다르고 체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을 일컬어 ‘번거롭고 어지럽다’고 한다. 왜냐하면 1세에 곧 3세가 있고, 과거세에 3세가 있으며, 과거 전후의 두 찰나를 과거와 미래라 하고, 과거 속의 찰나를 과거와 현재라 하고, 미래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 【문】 살바다부의 4대 논사란 누구인가? 【답】 첫 번째는 달마다라(逢摩多羅), 두 번째는 구사(瞿沙), 세 번째는 화수밀(和須蜜), 네 번째는 불타제바(佛陀提婆)이다. 3법으로서 선법(善法)ㆍ불선법(不善法)ㆍ무기법(無記法)이 있다. 【문】 무엇을 선법이라고 하는가? 【답】 선한 5음(陰)과 수멸(數滅)이다. 【문】 무엇을 불선법이라고 하는가? 【답】 불선의 5음이다. 【문】 무엇을 무기법이라고 하는가? 【답】 무기의 5음과 허공과 비수멸(非數滅)이다. 【문】 무슨 까닭에 선과 불선과 무기를 말하는가? 【답】 자세한 것은 「불선품」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3법으로서 욕계계법(欲界繫法)과 색계계법(色界繫法)과 무색계계법(無色界繫法)이 있다. 【문】 무엇을 욕계계법이라고 하는가? 【답】 욕계에 매이는 계의 5음이다. 【문】 무엇을 색계계법이라고 하는가? 【답】 색계계의 5음이다. 【문】 무엇을 무색계계법이라고 하는가? 【답】 무색계계의 4음이다. 【문】 무슨 까닭에 욕계계ㆍ색계계ㆍ무색계계의 법이라고 하는가? 【답】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3법으로서 학법(學法)ㆍ무학법(無學法)ㆍ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이 있다. 【문】 무엇을 학법이라 하는가? 【답】 학의 5음이다. 【문】 무엇을 무학법이라 하는가? 【답】 무학의 5음이다. 【문】 무엇을 비학비무학법이라 하는가? 【답】 유루의 5음과 무위이다. 【문】 무슨 까닭에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무탐(無貪)의 도를 배워서 탐(貪)을 끊기 때문에 학이라고 부른다. 무탐의 도로써 배우지 않고도 탐을 끊기 때문에 무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이것과 상위하는 것을 비학비무학이라고 부른다. 무에(無恚),무치(無癡)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무애도(無愛道)로써 애(愛)를 끊는 것을 배우고, 그것이 애의 체(體)가 아니면 학이다. 무애도로써 애를 끊는 것을 배우는 것은 곧 무학도를 차단하는 것이며, 체가 애가 아니라는 것은 세속도(世俗道)를 차단하는 것이다. 무애도로써 애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체가 애가 아닌 것은 곧 무학을 말한다. 무애도로써 애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은 도를 차단하는 것이고, 체가 애가 아닌 것은 곧 세속도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하는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을 배우고 진제(眞諦)를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학(學)이며, 앞서 이미 끊었기 때문에 번뇌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 불학(不學)이며, 앞서 이미 보았기 때문에 진제를 보는 것이 무학(無學)이다. 이것과 상위한 것이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다.
또한 2구(求), 즉 욕구(欲求)과 유구(有求)를 끊는 것을 배우고 1구, 즉 범행구(梵行求)를 원만히 하고자 하는 것이 학이며, 앞서 이미 끊었기 때문에 2구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고 앞서 이미 원망하게 하였기 때문에 1구를 원만히 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 무학이며, 이것과 상위한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몸에 번뇌의 득(得)이 있고 또한 무루법(無漏法)의 득도 있으면서 번뇌를 끊는 것을 배우면 학이며, 몸에 번뇌의 득은 없고 무루법의 득도 있으면서 번뇌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무학이며, 이것과 상위한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애(愛)를 여의지 못하고 무루법의 득이 있으면서 애를 끊는 것을 배우면 학이다. 이미 애를 여의고 무루법의 득이 있으면서 애를 끊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무학이며, 이것과 상위하면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견도와 수도에 포함되면 학이고, 무학도에 포함되면 무학이다. 3지(地)와 3근(根)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무루법을 다섯 가지 사람의 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학이다. 다섯 가지 사람이란 이른바 견신(堅信)ㆍ견법(堅法)ㆍ신해탈(信解脫)ㆍ견도(見到)ㆍ신증(身證)로서, 이는 학에 해당한다. 무루법을 두 종류 사람의 몸에서 얻을 수 있으면 무학이다. 두 가지 사람이란 이른바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이다. 이것과 상위하면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무루법을 7인의 몸에서 얻을 수 있으면 학이다. 7인이란 4향(向)과 3과(果)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만약 무루법을 한 사람의 몸에서 얻을 수 있으면 무학이다. 한 사람이란 하나의 과에 머무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과 상위한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또한 무루법을 18인의 몸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면 학이며, 무루법을 무학인의 몸에서 얻을 수 있으면 무학이며, 이것과 상위하면 비학비무학이다. 3법으로서 견도단법(見道斷法)ㆍ수도단법(修道斷法)ㆍ무단법(無斷法)이 있다. 【문】 무엇을 견도단법이라 하는가? 【답】 법에 대해서 견신(堅信)ㆍ견법(堅法)을 행할 경우에 모든 인(忍)을 끊는 것이다. 【문】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답】 견도소단(見道所斷)의 88사(使)와 상응법과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공생법(共生法)을 견도소단법이라고 한다. 【문】 무엇을 수도단법이라 하는가? 【답】 법이 학견적(學見迹)7)이며, 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문】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답】 수도소단의 10사(使)와 그것의 상응법과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신 구업과 공생법과 불염오유루법을 수도단법이라고 한다. 【문】 무엇을 부단법이라고 하는가? 【답】 무루법이다. 【문】 무슨 까닭에 견도단법ㆍ수도단법ㆍ무단법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자세한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4제(諦)로서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가 있다. 【문】 무슨 까닭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이것은 불경이고, 불경에서는 4계로서 고제에서부터 도제까지를 설한다. 불경에서는 비록 4제를 설했지만 자세하게 분별하지는 않았다. 불경은 이 논의 근본이 되며 지금 자세히 분별하고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제(諦, satya)의 체성은 무엇인가? 【답】 아비담자는 “5취음(取陰)이 고제이고, 유루의 인(因)이 집제이고, 수멸이 멸제이며, 학법ㆍ무학법이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비유자는 “명(名)ㆍ색(色)이 고제이고, 번뇌와 업이 집제이며, 번뇌와 업이 소멸하는 것이 멸제이며, 정(定)과 혜(慧)가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비바사바제(毘婆闍婆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8고(苦)의 특징이 있으면 고이면서 고제이지만, 나머지 유루법은 고이지만 제는 아니다. 후유(後有)를 일으키는 애(愛)는 집(集)이며 집제이지만, 그 밖의 애와 그 밖의 유루법은 집이지만 집제는 아니다. 후유를 일으키는 애가 다하는 것은 멸(滅)이며 멸제이지만, 그 밖의 애와 그 밖의 유루법을 다하는 것은 멸이지만 멸제는 아니다. 학(學)의 8도지(道支:八正道)는 도이면서 도제이지만 그 밖의 학의 법과 일체의 무학법은 도이지만, 도제는 아니다.” 만약 주장하는 대로라면, 아라한은 2제, 즉 고제와 멸제를 성취하고 집제를 성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후유(後有)를 일으키는 애(愛)가 곧 집제인데, 아라한에게는 후유를 일으키는 애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도제를 성취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며, 또한 저기서 설명한 학의 8도지는 도제인데 아라한이 과를 얻었을 때 그것을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 구사 존자는 “자신의 음(陰)이거나 타신(他身)의 음이거나 중생수(衆生數)이거나 비중생수(非衆生數)이거나 이와 같은 모든 것은 고(苦)이며 고제(苦諦)이다. 수행자는 고를 볼 때 자신의 고만 보고 타신의 고와 비중생수의 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핍박의 뜻이 곧 고의 의미인데, 타신의 고와 비중생수의 고에 대해서는 핍박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지론(生智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자신 속의 고에 대해서는 핍박받지만 타신 속의 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을 인유하지 않은 후에 타신이 절실하게 핍박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없다면 타신과 비중생수의 고에 어떻게 절실하게 핍박받겠는가? 자신의 고의 연(因)과 타신과 중생수 그리고 비중생수의 고의 인이 집(集)이며 집제(集諦)이다. 수행자가 집(集)을 볼 때는 자신의 고의 인을 보면서 타신의 고의 인을 보지 않고 비중생수의 고의 인을 보지 않는다. 만약 자신의 고가 다하고 타신의 고가 다하고 중생수와 비중생수의 고가 다하면, 멸(滅)이며 멸제(滅諦)이다. 수행자가 멸을 볼 때는 자신의 멸을 보지만 타신의 멸을 보지 않으며, 비중생수의 멸을 보지 않는다. 자신을 대치(對治)하고 타신과 중생수와 비중생수를 대치하면 도(道)이며 도제(道諦)이다. 수행자가 도를 볼 때는 자신의 대치도를 보고 타신과 비중생수의 대치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아비담자는 “자신의 고이거나 타신의 고이거나 중생수와 비중생수의 고이거나 간에 수행자는 고를 볼 때 모두 이와 같은 고를 본다”고 말한다. 【문】 수행자가 고를 볼 때 핍박받는 고를 보되 타신의 고와 비중생수의 고에 대해서는 핍박받지 않는데, 수행자가 고를 블 때는 무슨 까닭에 다른 것들의 고를 보는 것인가? 【답】 그의 고는 비록 절실하게 핍박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리석게 되는 곳에서 마땅히 지혜를 일으켜야 하고, 그 망설이는 곳에서 마땅히 결정을 일으켜야 하고, 그 비방하는 곳에서 마땅히 믿음과 공경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누가 생각하기를 ‘타신의 고와 비중생수의 고에 대해서는 절실하게 핍박받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만약 다른 이가 때린다면 어찌 핍박받지 않겠으며, 또한 공중에서 나무나 돌이 자기 몸에 떨어지면 핍박받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음(陰)의 인(因)이나 타신의 음의 인이나 중생수ㆍ비중생수의 음의 인이 모두 집이며 집제이다. 수행자가 집을 볼 때는 모두가 집임을 본다. 자신의 고가 다하고 타신과 중생수와 비중생수의 고가 다하면 멸이며 멸제이다. 곧 수행자가 멸을 볼 때는 모두가 멸임을 보는 것이다. 자신의 음의 대치이거나 타신(他身)ㆍ중생수(衆生數)ㆍ비중생수의 음의 대치를 다하면 도이며 도제이다. 곧 수행자가 도를 볼 때에는 모두가 도임을 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의 체성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미 체성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므로 그 까닭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문】 무슨 까닭에 제(諦, satya)라고 이름하고 제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답】 진실하다는 뜻이 제의 뜻이요 살핀다[審]ㆍ여여(如如)하다ㆍ전도하지 않는다ㆍ다르지 않다는 뜻이 제의 뜻이다. 【문】 진실하다, 살핀다, 여여하다, 전도하지 않는다, 다르지 않다는 뜻이 제의 뜻이라면, 허공과 비수멸(非數滅)에도 진실하다는 뜻에서부터 다르지 않다는 뜻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제라고 하지 않는가? 【답】 만약 법이 고(苦)이고 고의 인(因)이고, 고가 다하는 것이고, 고의 대치(對治)이면 제를 세우지만, 허공과 비수멸은 고도 아니고 고의 인도 아니고 고의 다함도 아니고 고의 대치도 아니기 때문에 제(諦)를 세우지 않는다. 고음(苦陰)의 경우와 같이 병과 종기와 화살과 과환(過患)과 무거운 짐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법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과 강과 뗏목과 같다면 제를 세우지만 허공과 비수멸은 차안과 피안과 강과 뗏목이 아니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이 고이고 고의 인이고 도이고 도의 과이면 제를 세우지만, 허공과 비수멸은 이것과 상위하므로 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에 인과가 있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만, 허공과 비수멸은 인과가 없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허공과 비수멸은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고ㆍ집제가 아니며,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멸제가 아니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도제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법은 세(世)에서 행하지 않기 때문에 3제(諦)를 세우지 않고,8) 무기이기 때문에 멸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은 음이 아니기 때문에 3제를 세우지 않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멸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이 법은 고와 서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3제를 세우지 않고 선이 아니기 때문에 멸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이 사견(邪見)과 무루정견(無漏正見)의 소연(所緣)이면 제를 세우지만 이 법은 사견과 무루정견의 소연이 아니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이 무명(無明)과 명(明)의 소연이 되면 제를 세우지만 이 법은 무명과 명의 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의 체성이 번뇌의 출요(出要)이면 제를 세우지만 이 법은 번뇌의 출요가 아니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또한 법이 능히 염리(厭離)를 일으키는 희(喜)를 따르면 제를 세우지만 이 법은 염리를 일으키는 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제를 세우지 않는다. 【문】 전도하지 않는다는 뜻이 제(諦)의 뜻이라면 전도는 마땅히 제에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체(體)가 전도이기 때문이다. 【답】 다른 일로써 전도를 세우는 것이며, 다른 일로써 제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이다. 곧, 세 가지 일로써 전도를 세우는데, 즉 첫째 맹리(猛利)하게 전행(轉行)하기 때문이요, 둘째 허망하기 때문이요, 셋째 한결같이 전도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실제의 체성이 있기 때문에 제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헤아리고, 즐겁지 않은 것을 즐겁다고 헤아리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헤아리고, 무아(無我)를 아라고 헤아리기 때문에 전도가 되지만, 이 법에는 인과가 있기 때문에 제에 포함되는 것이다. 【문】 다르지 않다는 뜻이 제의 뜻이라면 망어(妄語)는 마땅히 제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망어는 다른 이를 속이려고 말을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답】 다른 이유에서 망어를 세우는 것이며, 다른 이유에서 제에 포함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써 남을 속이기 때문에 망어를 세우는 것이지만, 실제의 체성이 있기 때문에 제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었다 말하고, 알지 못한 것을 안다고 말하고, 인식하지 못한 것을 인식했다고 말할 경우에는 망어를 세우지만 이 법에는 인과가 있기 때문에 제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다는 뜻이 제의 뜻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어떻게 4제(諦)를 세우는가? 체성에 의거하는가, 인ㆍ와에 의거하는가, 견시(見時)에 의거하는가? 체성에 의거하면 곧 3제가 있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고(苦)를 떠난 집(集)이 없고, 집을 떠난 고가 없으므로 멸(滅)은 제2의 제가 되고, 도는 제3의 제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인과 과에 의거하면 5제가 있어야만 한다. 고는 또한 인이라 말할 수 있고 또한 과라고 말할 수 있듯이, 도(道) 또한 인이라 말할 수 있고 또한 과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멸은 제5의 제가 된다. 만약 견시(見時)에 의거하면 8제가 있어야 한다. 수행자는 먼저 욕계의 고를 보고 후에 색계ㆍ무색계에 대하여 보며, 먼저 욕계의 제행의 인연을 보고 후에 색계ㆍ무색계에 대하여 보며, 먼저 욕계의 제행의 멸을 보고 후에 색계ㆍ무색계에 대하여 보며, 먼저 욕계의 제행의 대치도를 보고 후에 색계ㆍ무색계에 대하여 보게 된다. 【답】 “인과로 인해서 제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문】 그렇다면 5제가 있어야만 한다. 【답】 종합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5제의 도는 없다. 인이거나 과일 경우에는 종합하여 고멸도(苦滅道)라 하고 종합하여 생ㆍ노ㆍ병ㆍ사의 도(道)를 모두 다했다고 하는 것이다. 【문】 고의 인ㆍ과일 경우에는 고집도(苦集道)라고 하고 또한 생ㆍ노ㆍ병ㆍ사의 도라고도 한다. 【답】 행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과(果)의 뜻이 있으면 4행(行),즉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를 행한다. 고에 인(因)의 뜻이 있으면 4행, 즉 인(因) 집(集)ㆍ유(有)ㆍ연(緣)을 행한다. 도에 인의 뜻과 과의 뜻이 있으면 모두 한 가지의 4행, 즉 도(道)ㆍ여(如)ㆍ적(迹)ㆍ승(乘)을 행한다. 또한 세 가지 일 때문에 4제를 세운다. 곧, 첫째는 체성, 둘째는 인ㆍ과, 셋째는 비방과 믿음을 내는 것에 의거해서이다. 체성 때문이란 4제의 체성은 유루와 무루라는 것이다. 인ㆍ와 때문이란 유루의 체성도 있고 인과 과도 있다는 것으로, 과가 있을 경우에는 고제이고, 인이 있을 경우에는 집제이다. 무루의 체성에는 혹은 인ㆍ와가 있기도 하고 혹은 인은 있으나 과가 없기도 하다. 인과 과가 있는 것은 도제이고, 과는 있으나 인이 없는 것은 멸제이다. 【문】 무슨 까닭에 유루의 체성에서는 과가 있을 경우에 하나의 제를 세우고 인이 있을 경우에도 하나의 제를 세우는데, 무루의 체성에는 인과가 있는데 하나의 제만을 세우는가? 【답】 비방과 믿음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유루의 체성에서는 두 종류의 비방을 생기게 하는데, 즉 고도 없고 집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종류의 믿음을 생기게 하는데. 즉 고도(苦道)와 집도(集道)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과가 없다고 할 경우에는 한 종류의 비방을 생기게 하는데, 즉 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한 종류의 믿음을 내게 하는데, 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 때문에 4제를 세우는 것이다. 또한 제를 보는 것에 의거하여 네 가지 진제를 세운다. 【문】 그렇다면 8제가 있어야만 한다. 【답】 욕계의 고 또는 색계의 고와 무색계의 고에서 고를 볼 때, 모두 고 등의 4행(行)이 있다. 또한 욕계에서의 행의 인 또는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행의 인에 대해서 집(集)을 볼 때, 모두가 집 등의 4행이 있다. 또한 욕계의 행의 멸 또는 색계와 무색계의 행의 멸에 대해서 멸을 볼 때, 모두가 멸 등의 4행이 있다. 또한 욕계의 행의 대치와 색ㆍ무색계의 행의 대치에 대해서 도를 볼 때, 모두가 도 등의 4행이 있다. 그러므로 제를 볼 때에 모두가 행이기 때문에 단지 4제만이 있고 8제는 없는 것이다. 【문】 고ㆍ집ㆍ멸ㆍ도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답】 바사 존자는 “핍박하는 모습이 고의 특징이고, 존재하는 모습이 집의 특징이고, 고요히 없어지는 모습이 멸의 특징이고, 오르는[乘] 특징이 도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화수밀 존자는 말하기를 “유전하는 모습[轉相]이 고의 특징이고, 유전하게 하는 모습이 집의 특징이고, 그치는 모습이 멸의 특징이고, 유전을 머물게 하는 모습이 도의 특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유전하여 몸을 있게 하는 것이 고의 특징이며, 유전하여 능히 몸을 있게 하는 것이 집의 특징이며, 유전하여 몸을 있게 하는 것을 다하게 하는 것이 멸의 특징이며, 몸을 있게 하는 것을 머물게 하여 전환시키는 것이9) 도의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 존자는 “사물의 체성에 제(諦)라는 이름을 세울 수 있다. 5취음의 체는 뜨겁게 달구어진 쇠처럼, 불 속에서 오랫동안 있으면 불과 같은 색이 된다. 3고(苦)도 또한 5취음과 합해지는 이치가 이와 같아서 고제이다. 고가 번뇌로부터 업을 일으키고 능히 전변하는 것은 집제이다. 번뇌와 업이 소멸하여 다시는 유(有)를 받지 않는 것이 멸제이며, 계(戒)와 정(定)을 닦고 혜(慧)로써 생멸을 관하여 능히 존재의 원인을 끊는 것이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게송으로 설하셨다.10)
하나의 제는 두 가지가 없는데 중생은 이에 대해 의심하여 갖가지로 제를 설하지만 나는 사문이 있다고 말하지 않네.
【문】 4제가 있는데, 무슨 까닭에 하나의 제만을 설하시는가? 【답】 바사 존자는 “하나의 제란 이른바 고제(苦諦)로서, 제2의 제는 없다. 하나의 집제만이 있고 제2의 집제는 없으며, 하나의 멸제만이 있고 제2의 멸제는 없으며, 하나의 도제만이 있고, 제2의 도제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하나의 제란 이른바 멸제이니, 갖가지 해탈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외도에서는 갖가지 해탈을 계탁하는데, 즉 무신해탈(無身解脫)ㆍ무변의해탈(無邊意解脫)ㆍ정취해탈(淨聚解脫)ㆍ세속해탈(世俗解脫)이다. 무신해탈은 공처(空處)이고 무변의해탈은 식처(識處)이며 정취해탈은 무소유처(無所有處)이고 세속해탈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相處)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은 몸을 받는 처소[受身處]이며, 해탈이 아니다. 참된 해탈이란 하나의 멸진과 열반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의 제란 이른바 도제이니, 갖가지 도를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외도에서는 많은 종류의 도를 헤아리는데, 이른바 먹지 않는 도ㆍ재 위에 눕는 도ㆍ해와 달을 섬기는 도ㆍ바람을 마시고 열매를 먹는 도ㆍ나체로 다니는 도ㆍ날카로운 가시 위에 눕는 도ㆍ누더기 옷을 입는 도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은 도가 아니다. 이것은 사도이어서 착한 사람이 의지할 도가 아니다. 진실한 도란 이른바 8성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의 이른바 멸제이니, 능히 몸에 고통을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제란 이른바 도제이니, 능히 악도의 고통을 소멸했기 때문이다. 불경에서는 2제, 즉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설한다. 【문】 세제란 어떤 것이며 제일의제란 어떤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 앞의 두 가지 제는 세제이니, 이른바 고제와 접제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세법(世法)은 이 두 가지 제(諦) 안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령 남녀가 오고 가는 일이나 현재 지어지는 일들은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다. 다른 두 가지 제는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멸제와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세 가지 제는 세제이니, 이른바 고ㆍ집ㆍ멸제이다. 그것은 왜냐 하면 멸제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가명(假名)이며, 피안이며, 성(城)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의 제는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도제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도제 또한 세제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도제 역시 가명이어서 마치 사문이나 바라문과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評】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4제는 또한 세제도 있고, 제일의제도 있다. 고ㆍ집제가 세제라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제1의제는 고ㆍ공ㆍ무상ㆍ무아ㆍ인(因) 집(集)ㆍ유(有)ㆍ연(緣)과 같은 것을 말한다. 멸제에 대하여 그것이 세제라고 함은, 부처님께서는 멸제를 말씀하시되, 마치 성(城)과 같고 원림(園林)과 같다고 하셨다. 제일의제는 진(盡)ㆍ지(止)ㆍ묘(妙)ㆍ이(離)를 말한다. 도제가 세제라고 함은, 부처님께서는 도제를 말씀하시되, 마치 뗏목ㆍ돌ㆍ산ㆍ꽃ㆍ물ㆍ사다리ㆍ누각과 같다고 하셨다. 곧, 제일의제란 도(道)ㆍ여(如)ㆍ적(迹)ㆍ승(乘)이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4제에는 모두 세제와 제일의제가 있게 된다. 곧 일체법에는 모두 세제와 제일의제가 있게 되어서, 세제에도 18계ㆍ12입ㆍ5음이 포함되고, 제일의제에도 18계ㆍ12입ㆍ5음이 포함되게 된다. 【문】 세제 중에 제일의제가 있는 것인가? 만약 제일의제가 있다면, 곧 이 제일의제에는 세제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없다면 또한 하나의 제는 제일의제를 말한다. 【답】 “세제 중에 제일의제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세제 중에 제일의제가 없다면 여래께서 설하신 두 가지 제는 곧 진실이 아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두 가지 제는 진실과 같기 때문에 세제 중에 마땅히 제일의제가 있어야만 한다. 【문】 그렇다면 곧 하나의 제, 즉 제일의제만이 있는 것이다. 【답】 그렇다. 오직 하나의 제, 즉 제일의제만이 있다. 【문】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두 가지 제를 설하셨는가? b 문 일[事]에 따른 것으로, 체(體)로써 나누어 오직 하나의 제, 즉 제일의제가 있다고 하신 것은 아니다. 곧, 일에 따라서 차별이 있음을 설하신 것으로, 일에 의거하여 세제라고 이름하고, 이런 일에 의거하여 제일의제라 이름하지는 않으셨다. 다시 일에 따라 제일의제라고 이름하시고, 이런 일에 의거하여 세제라 이름하지는 않으셨다. 비유하면 하나의 수(受)에는 4연(緣)의 성질, 즉 인연ㆍ차제연ㆍ경계연ㆍ위세연이 있는 것과 같다. 가령 원인이 되는 일에 의거하여 인연이라고 이름한다면, 이 일에 의거하여 (차제연) 내지는 위세연이라고 이름하지는 않으며, 가령 일에 의거하여 위세연이라 이름한다면, 이 일에 의거하여 (경계연) 내지는 인연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수(受)에 6인(因)의 성질, 즉 상응인(相應因)ㆍ공생인(共生因)ㆍ상사인(相似因)ㆍ일체변인(一切遍因)ㆍ보인(報因)ㆍ소작인(所作因)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일에 의거하여 상응인이라 이름한다면, 이 일에 의거하여 (보인) 내지는 상응인이라 이름하지는 않는 것이다. 저 (두 가지 제)의 경우도 이와 같다. 【문】 세제와 제일의제는 서로 섞이지 않고 별체로 시설할 수 있는 것인가? 【답】 시설할 수 있다. 화수밀 존자는 말하기를 “명칭[名]을 세제라 하고, 그 명칭이 드러내는 뜻을 제일의제라 한다”고 하고, 또한 말하기를 “세간에서 설한 이름을 따르면 세제이고, 현성(賢聖)이 설한 이름을 따르면 제일의제이다”라고 하였다. 불타제바 존자는 “중생의 생각하는 바에 따라 상응하는 말을 설하면 세제이고, 연기(緣起) 등의 법을 생각하는 바대로 상응하여 말하면 제일의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타라달다(陀羅達多, Dharadatta) 존자는 “세제의 체상(體相)은 고집제(苦集諦)의 일부분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바라문 범지에게는 세 가지 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라문 범지의 진리이다. 어떠한 것이 세 가지인가? 곧, 바라문 범지는 ‘중생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설하는데, 이와 같이 설하는 경우에 이 말은 진실이니, 이것을 일컬어 바라문 범지의 첫 번째 진리라고 한다. 바라문 범지는 또한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고, 그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설하는데, 이와 같이 설하는 경우에 이 말은 진실이니, 이것을 일컬어 바라문 범지의 두 번째 진리라고 한다. 바라문 범지는 또한 ‘온갖 모인 법[集法]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라고 설하는데, 이와 같이 설하는 경우에 이 말은 진실이니, 이것을 일컬어 바라문 범지의 세 번째 진리라고 한다.” 【문】 여기에서 어떤 것이 바라문이며, 어떤 것이 제인가?
【답】 불법 외의 도(道)가 바라문이며, 앞에서 설한 세 가지 진리를 제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아니다. ‘중생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 중생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나는 그의 소유도 아니고 그도 나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것은 나는 그에 속하지 않고 그는 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갖 모인 법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라는 것은 온갖 생겨난 법은 모두 소멸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불법 내에 있는 바라문을 가리키며, 제란 앞에서 설명한 3제이다. 부처님께서는 외도를 대치하기 위하여 이 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외도는 스스로 바라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존재를 핍박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소ㆍ양ㆍ물소 그리고 그 밖의 갖가지 중생을 죽기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중생을 핍박한다면 바라문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진실한 의미의 바라문이란 일체 중생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는 이를 말한다’고 하셨다. 외도는 스스로 ‘나는 바라문이다. 하늘의 여색(女色)을 위하여 범행을 닦는다’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바라문은 하늘의 여색을 위해서 범행을 닦아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바라문이란 여색을 위하지도 않고 살고 있는 집을 위하지도 않아서 염착하는 것도 없다’고 설하신다. 외도는 스스로 ‘나는 바라문이다. 그래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탐착한다’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바라문은 단상(斷常)을 탐착하지 말아야 한다. 쌓인 법[集法]이 곧 멸법임을 안다면, 이것이 참된 의미의 바라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 경에서는 3해탈문의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을 해치지 말라는 것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의 방편을 설하신 것이고, 나는 그의 소유도 아니고 그는 나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것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의 방편을 설하신 것이고, ‘온갖 쌓인 법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라는 것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의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3해탈문의 경우와 같이 3삼매(三昧)ㆍ3종신(種身)ㆍ3학(學)ㆍ3수(修)ㆍ3정(淨)에 대한 설명 또한 이와 같다.” 불경에서는 설하기를 “비구들이여, 4방(方)을 관찰하는 것이 4제(諦)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한다. 【문】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방(方)을 제라고 설하시는가? 【답】 교화하기 위해서이다. 교화받는 이는 제에 대해서 방(方)이라는 이름으로써 설명한 것을 듣고 나면 깨쳐 이해한다. 가령 다른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교화받는 이를 위해서 방이라고 하는 해탈문을 설하시고, 교화받는 이는 응당 방이라고 설명되는 해탈문을 들을 수 있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곧 방의 이름으로 해탈문을 설하셨으니, 그 또한 이와 같다. 【문】 4제와 4방은 어떤 비슷한 특징이 있는가? 【답】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방(方)에도 넷이 있고 제에도 넷이 있다. 【문】 어떠한 방과 어떠한 제가 비슷한가? 【답】 동방(東方)은 고제와 같음을 알아야 하고, 서방(西方)은 집제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가령 수행자가 제를 볼 때 먼저 고제를 본 후에 집제를 보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동방은 집제이며, 서방은 고제이다. 이것은 인과법에서는 인을 앞에 두고 과를 뒤에 두기 때문이다. 남방(南方)은 도제와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제는 복전(福田)이기 때문이다. 북방(北方)은 멸제와 같다. 멸제에는 그 위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경에서는 “혜근(慧根)은 4제 가운데 속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하였다. 【문】 이것은 포섭에 의거하기 때문에 4제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연(緣)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 속에 있다 말씀하시는가? 만약 포섭[攝]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 속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혜근(慧根)은 4제에 포섭되지 않고 4제는 혜근에 포섭되지 않는다. 만약 연에 의거하면 혜근은 일체법을 능히 연하게 된다. 【답】 마땅히 말하기를 “포섭에 의거하지도 않고 연에 의거하지도 않으면서 그 안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혜근으로써 제를 분별할 때 그 세용(勢用)이 가장 뛰어나므로 4제 속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해야만 한다. 마치 신근(信根)은 4불괴(不壞)에서 신(信)의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근은 4불괴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마치 정진근(精進根)은 4정단(正斷) 속에서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정진근은 4정단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과 같으며, 염근(念根)은 4념처(念處)에서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염근은 4념처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정근(定根)은 4선(禪) 속에서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정근은 4선 속에 있음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연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말하였다. 【문】 그렇다면 혜근은 일체법을 연하는 것인가? 【답】 여기에서는 유루와 무루를 연하는 혜를 설하는데, 허공과 비수멸을 연하는 혜는 한결같이 유루이기 때문에 연한다고 설한다. 사리불 존자는 “장로들이여, 존재하는 일체의 선법은 모두 4제로부터 생기고, 4제에 포함되고, 4제 속함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문】 3제와 같은 경우는 유위이므로 능히 선법(善法)을 일으킴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멸제는 무위인데 어떻게 선법을 생기게 할 수 있는가? 【답】 비록 선법을 생기게 할 수는 없지만 선법에 포섭될 수 있다. 또한 생기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법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선법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멸제는 비록 선법을 생기게 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선법을 지닌다. 또한 여기에서는 득생(得生)을 설명한 것이다. 멸제는 비록 선법을 생기게 하지 않지만, 멸제는 선법이 생겨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바사 존자는 “여기에서는 인(忍)과 지(智)가 연(緣) 속에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고인(苦忍)과 고지(苦智)는 도제에 포섭되지만 고제를 연하고, 집인(集忍)과 집지(集智)는 도제에 포섭되지만 집제를 연하며, 멸인(滅忍)과 멸지(滅智)는 도제에 포섭되지만 멸제를 연하고, 도인(道忍)과 도지(道智)는 도제에 포섭되지만 도제를 연한다”라고 하였다. 불경에서는 설하기를 “여래ㆍ등정각께서는 수의설법(隨宜說法)으로 중생을 구제하여 모두가 승처(勝處)에 있게 하신다. 또한 그들을 위하여 해탈의 4성제법을 분별하여 나타내신다. 무엇이 넷인가 하면, 이른바 고성제ㆍ고집성제ㆍ고멸성제ㆍ고멸도성제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슨 까닭에 구제한다고 말씀하시는가? 【답】 스스로 구제하고 다른 이의 수도(修道)로써 구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제라고 하는 것이다. 【문】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답】 경에서 설하되, 도득가(度得迦)라고 하는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이러한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지금 바라문을 보건대 인간 속에 계시면서 현행(現行)하시니 나는 이제 두루한 눈을 가진 이에게 예배드리옵니다. 원컨대 나의 간교한 의심[狐疑]을 없애 주소서.
【문】 이 게송은 어떤 인연을 설하는 것인가? 【답】 저 바라문은 그 성품이 게을렀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닦은 도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가서는 다음과 같이 듣기 좋은 말을 하였다. “당신은 진실로 천인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원컨대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께서는 저를 위해서 성도를 닦아 저의 번뇌를 끊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하였다.
나에게는 너의 간교한 의심을 끊을 수 있는 자재력이 없으니 그대 스스로 수승한 법을 보아야만 큰 물살[大流]을 건널 수 있다네.
(이 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바라문이여, 다른 이의 수도로써 자신의 번뇌를 끊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다른 이의 수도로써 자신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면, 내가 처음 보리수 아래에서 수도할 때 일체 중생의 번뇌는 마땅히 끊어졌어야만 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또한 나에게는 대비심이 있어서 일체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사람의 수도로써 자신의 번뇌를 끊는 이런 일은 없으며, 만약 자신의 수도로써 자신의 번뇌를 끊는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 마치 다른 이가 약을 먹어서 자신의 병을 제거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으나, 자신이 약을 먹어서 자신의 병을 제거하는 이런 일은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스스로 구제하는 것을 일컬어 구제라고 하는 것이지, 다른 이의 수도에 의해서 구제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구제라고 함은, 높은 산, 험준한 계곡은 가히 두려워할 만한 곳이듯이 범부의 법 또한 이와 같으며, 평탄한 땅은 가히 두려워할 만한 곳이 없듯이 성인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범부를 높은 산, 험준한 계곡의 두려워할 만한 곳에서 빼어내어 성법의 평탄한 땅으로서 가히 두려워할 것이 없는 곳으로 안치시키기 때문에 구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평등하게 정법(正法)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구제라고 한다. 평등이란 세제일법을 말하고, 정법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법인(苦法忍)을 말한다. 【문】 무슨 까닭에 제(諦)에 대해서 구제라고 설명하면서 음(陰)ㆍ계(界)ㆍ입(入)에 대해서는 구제라고 하지 않는가? 【답】 제를 관할 때 정결정(正決定)을 얻으며, 능히 과(果)를 얻고 욕(欲)을 여의어 누(濕)를 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를 설하는 것은 수승한 것을 설하는 것이고, 교화받는 이를 수승하게 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이고, 가깝게 법신(法身)을 일으켜 가깝게 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界)는 초행자를 위해서 설하고, 입(入)은 이행자(已行者)를 위해서 설하며, 음(陰)은 구행자(久行者)를 위해서 설하는 것이다. 【문】 성제(聖諦)라 하는 것은 선한 성[善聖]이기 때문에 성(聖)이라 하는가? 무루의 성이기 때문에 성이라 하는가? 성인이 성취하였기 때문에 성이라 하는가? 선한 성이기 때문에 성제라고 하는 경우, 멸제ㆍ도제의 두 가지는 선한 것이 있지만 두 가지, 즉 고제ㆍ집제에는 없다.11) 만약 무루의 성이 성제라고 한다면, 두 가지 제는 유루이고 두 가지 제는 무루가 된다. 만약 성인이 성취하였기 때문에 성제라고 한다면, 성인 아닌 이도 또한 성취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누가 고제와 집제를 성취하는가? 곧, 일체 중생이다.” 【답】 마땅히 “성인이 성취하기 때문에 성(聖)이라고 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문】 그렇다면 성인 아닌 이도 또한 제를 성취하는가? 【답】 성취한다고 함은 4제를 성취하는 것인데, 범부는 비록 제를 성취하더라도 4제를 구족하지는 않는다. 【문】 성인에게도 4제를 구족하게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구박인(具縛人)의 경우로서,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고법인이 눈앞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답】 아직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고법지(苦法智)가 생겨나면 4제를 구족하게 성취한다. 또한 성인 중에는 4제를 구족하게 성취한 이가 있지만 범부 중에는 어느 한 사람도 4제를 구족하게 성취하는 이가 없다. 승가바수(僧伽婆修)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이 일을 가지고 논쟁하였다. 범부인이 말하기를 ‘제행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다’라고 하자, 이에 성인은 ‘제행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다’라고 말하였다. 범부인은 ‘내가 설한 것이 진실이다’라고 하고, 성인 또한 ‘내가 설한 것이 진실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서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성인이 설한 것이 진실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제는 성인이 지견(知見)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제라 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또한 몸에 성스런 법인[聖法印]이 있으면, 그가 소유한 제를 성제(聖諦)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성계(聖戒)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고, 그가 소유한 제를 성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성혜(聖慧)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고, 그가 소유한 제를 성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성스런 사마타(舍摩他)ㆍ비바사나(毘婆舍那)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니,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성스런 재(財)12)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니,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성스런 각지(覺支)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니,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성스런 태(胎)를 얻으면 성인이라 하니,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무엇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하는가? 【답】 불경에서는 설하기를 “태어나는 괴로움ㆍ늙는 괴로움ㆍ병드는 괴로움ㆍ죽는 괴로움ㆍ좋아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ㆍ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ㆍ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다. 간략히 말하여 5취음은 곧 고이다”라고 한다. 생기하는 특징 때문에 곧 태어남은 괴로움이고, 머무르고 변화하고 달라지는 특징 때문에 곧 늙음은 괴로움이고, 핍박받는 특징 때문에 병듦은 괴로움이고, 소멸하는 특징 때문에 죽음은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이와 서로 만나는 특징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이와의 만남은 괴로움이고, 헤어지고 마는 특징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괴로움이며, 자재를 얻지 못하는 특징 때문에 구해도 못 구함은 괴로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괴로움은 모두 유루의 5취음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말하여 5취음은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태어나는 것은 일체의 괴로움의 입족처(入足處)이자 일체고의 인(因)이기 때문에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사랑할 만한 한창 때가 무너져가므로 늙음의 괴로움이 있고, 아낄만 하여 병이 없어야만 하는 것이 무너지므로13) 병듦의 괴로움이 있고, 아까운 목숨이 무너지므로 늙음의 괴로움이 있고, 좋아할 수 없는 대상과 함께 해야 하므로 좋아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 있고, 사랑할 만한 대상과 헤어져야 하므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 있고, 일체의 뜻한 바대로 결과를 얻지 못하므로 구해도 못 얻는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 괴로움은 유루의 취음(取陰)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간략히 설하면 5취음은 괴로움이다”라고 설하신 것이다. 【문】 5취음은 광대한 괴로움인데, 무슨 까닭에 약설하여 5취음은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답】 5취음은 광대하더라도 이것은 또한 괴로움이고 간략하더라도 괴로움이다. 5취음에 머물러서 생기는 많은 과환(過患)들은 설명하여도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간략하게 설명하시어 “5취음은 괴로움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많은 허물과 악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허물과 악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말하여 허물과 악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문】 음(陰)에는 즐거움이 있는가? 만약 음에 즐거움이 있다면 무슨 까닭에 낙제(樂諦)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고제라고만 말하는가? 만약 없다면 불경에서는 설하기를 “마하남(摩訶男)이여, 만약 색이 한결같이 괴로움이고 즐거움이 없는 것이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낼 수 없다면, 중생은 곧 그 밖의 인이 없는 것을 의지하여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마하남이여, 색은 한결같은 괴로움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은 그 속에서 오염된 애착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아가 식에 대한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과는 어떻게 통하겠는가? 또 가령 설하기를 “3수(受)에는 각각 정해진 체가 있어서 서로 섞이고 합해지지 않으니, 이른바 고ㆍ낙ㆍ불고불락수이다”라고 하거나 또한 “필요한 자구를 의지하여 능히 도를 닦고, 도를 의지하여 능히 열반에 도달하고, 도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능히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신 것과는 어떻게 통하겠는가? 【답】 마땅히 “음에는 즐거움이 있으나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으며 즐거운 법은 적으나 괴로운 법은 많다. 즐거움이 적기 때문에 괴로움에 분위[分]속에서 설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독이 든 병에 한 방울에 꿀을 떨어뜨려도 한 방울의 꿀 때문에 꿀병이라고 하지 않고 독이 많기 때문에 독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역시 이와 같다”고 이와 같이 말해야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음에는 즐거움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고제라 하지만 낙제라고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문】 그렇다면 불경과 어떻게 통하는가? 【답】 최고의 괴로움을 받을 때 중간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즐거운 생각을 내고, 중간의 괴로움을 받을 때 그보다 낮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즐거운 생각을 내고, 지옥의 괴로움을 받을 때 축생의 괴로움에 대해서 즐거운 생각을 내고,축생의 괴로움을 받을 때에는 아귀의 괴로움에 대해서 즐거운 생각을 내고, 아귀의 괴로움을 받을 때에는 인간의 괴로움에 대해서 즐거운 생각을 내며, 인간의 괴로움을 받을 때에는 하늘의 괴로움에 대해서 즐거운 생각을 내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세상 사람이 음(陰)에 즐거움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세상 사람이 굶주렸을 때 음식을 먹거나, 또 추울 때 따뜻하게 되거나, 또 피곤할 때 탈것을 얻거나, 또 더울 때 서늘하게 되면 ‘나는 지금 즐거움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음에 즐거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인은 아비지옥에 음ㆍ계ㆍ입이 마치 이글거리는 쇳덩이와 같다고 관하고, 나아가 유정의 음ㆍ계ㆍ입도 이글거리는 쇳덩이와 같다고 관한다.” 【문】 무엇을 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하는가? 【답】 불경에서는 “후유(後有)의 애(愛)와 희심(喜心)과 함께하는 애와 곳곳에 있는 희애(喜愛)를 일으키는 것을 고집성제이다”라고 설한다. 【문】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모든 유루법을 제외하시고 단지 애(愛)만을 집제라고 설명하시고,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시는가? 【답】 집제를 시설할 경우에 애의 증익과 세용(勢用)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애가 집제라고 하시고 나머지 유루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가령 사(思)가 법을 조작하는 데 있어서 증익과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상응ㆍ불상응법 중에서 사(思)가 행음(行陰)임을 설하신 것과 같다. 저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애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있는 괴로움의 근본이고 출처(出處)ㆍ기처(起虛)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가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나무의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비록 잘라내었어도 다시 살아나듯이 애사(愛使)의 근본을 뽑지 않으면 자주 괴로움을 돌려받게 되네.
또한 애는 능히 윤택하게 할 수도 있지만 능히 불태우고 해칠 수 있다. 마치 뜨거운 기름 한 방울이 사람 몸에 떨어지면 어떤 경우에는 윤택하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태우는 경우와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애란 능히 생(生)을 받게 하는 사시귀(死尸鬼)14)를 일으키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물이 있는 곳에서 능히 사시귀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라고 하는 물이 있는 곳에 있으면 능히 생(生)을 받게끔 하는 사시귀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애로 인해서 중생수(衆生數)ㆍ비중생수의 물질[物]을 쌓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중생은 좋아하기 때문에 중생수의 물건, 즉 처자ㆍ노비ㆍ여러 종류의 하인ㆍ코끼리ㆍ말ㆍ소ㆍ양 등을 쌓아 모은다. 중생은 애로 인해 비중생수의 물질[物], 즉 궁전이나 집, 갖가지 재물과 보배, 갖가지 곡식을 쌓아 모은다. 또한 증생은 애로 인해 남자의 음ㆍ여자의 몸을 장양하고, 중생은 애로 인해 법답게 부모ㆍ처자ㆍ노비ㆍ친척ㆍ아는 이들을 공양한다. 또한 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골짜기 속에서 여러 가지 벌레를 잡아다가 다른 골짜기에서 스스로 그 새끼들을 기른다. 또한 애욕으로 인해 미래에 불이 있게 되는 것을 얻으며, 애욕으로 인해 추구하기 때문에 몸을 얻게 된다. 또한 애로써 윤택하게 하기 때문에 생사가 시들어서 마르지 않게 한다. 비유하면 약초와 과일 나무가 물로 인해 윤택하게 되기 때문에 시들어 즉지 않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애로 인해 윤택하게 되기 때문에 후유(後有)의 싹이 생겨난다. 또한 애로 인해 부모의 정기가 모태 속에 있으면서 건달바(揵闥婆, gandharva)의 소의가 되게 한다. 또한 애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을 행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과 같이, 나머지 번뇌도 소의와 연을 행하기 때문에 또한 생겨난다. 마치 큰 물고기가 가는 곳에 작은 물고기가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애를 중생의 번뇌 중의 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몸에 애착이 있으면 나머지 번뇌도 또한 애착이 있다. 마치 축축하게 젖은 옷에 먼지와 때가 붙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몸에 애라고 하는 물이 있으면 모든 번뇌는 곧 이 몸에 붙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물이 있는 곳에 고기 등의 물의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이 곧 생겨나서 붙길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짠물을 마시면 괴로움이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갈증 있는 사람이 짠물을 마시고 나서 점점 더 갈증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직 욕을 떠나지 못한 중생은 다시 그 경계를 얻으면 계속해서 갈애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애로 인해서 다른 중생을 능히 합치게 한다. 마치 물로 인해서 다른 모래들을 합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애로 인해서 능히 중생의 선근(善根)을 성숙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축축하게 하여 자신의 몸에 서로 붙게 한다. 비유하면 파리가 소유(酥油)와 꿀과 축축한 풀 위에 앉으면 허공으로 날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애의 인이 있을 때 행하는 바가 다르고 과가 없을 때 행하는 바가 다르다. 인이 있을 때 행하는 바는 친히 사랑하는 것과 같고, 과에 있을 때 행하는 바는 윈수와 같다. 마치 상인이 바다에 들어가 나찰교(羅刹交)를 만났는데, 처음 행하는 바가 다르고 뒤에 행하는 바가 다른 것과 같다. 처음에는 “잘 오셨습니다. 현선(賢善)이여, 잘 오셨습니다. 대선(大仙)이여, 원컨대 우리들을 위해서 왕이 되어주소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다가, 후에 사귀어 그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철성(鐵城) 속에 가두어 놓고 그의 피와 살을 먹고서 오직 뼈만 남겨 놓는 것과 같다. 애 또한 이와 같아서 인이 있을 때 행하는 바는 친히 사랑하는 것과 같고, 과가 있을 때 행하는 바는 마치 원수와 같다. 중생은 애로 인해서 갖가지 악업을 짓고, 악취(惡趣)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또한 “애는 생을 받는 인이다”라고 설하셨다. 마치 업은 생을 취하는 인이며, 애는 생을 받는 인이라고 실하신 것과 같다. 애는 끊기 어렵고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비유로써 설명해야 하니, 가령 어떤 사람이 두 나찰을 믿게 되는 경우과 같다. 하나는 어머니의 형체를 만들고, 또 하나는 원수의 형체를 만들 경우에 어머니의 형태로 만든 나찰에 대해서는 제거하고 물리치기 어럽지만, 원수의 형태를 만든 나찰에 대해서는 제거하고 물리치기 가 쉽다. 이와 같이 아직 유혹을 떠나지 못한 중생은 두 가지 결, 즉 에결(恚結)과 애결(愛結)을 소인(所因)으로 삼는 것과 같아서 에결은 끊기 쉽고, 애결은 끊기 어렵고 물리치기 어렵다. 또한 애결은 자주 미세하게 행한다. 애를 행할 때는 미세하여 인식하고 알기 어렵다. 비유하면 선사(旋師)가 사용하는 날카로운 도구는 모든 것을 절단해도 미세하여 느끼기 어려운 것과 같아서 그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애에 의지하여 3유(有)15)의 가지 속에 있게 된다. 처음 생겨나는 것은 애이며, 증장하는 것은 취(取)이며, 앞의 것이 차례로 멸하는 것은 무명(無明)이다. 또한 불경에서는 “애는 전도(前導)이다”라고 설하시니, 가령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난아, 애를 연하여 추구(追求)가 있고, 추구를 연하여 얻음이 있고, 얻음을 연하여 분처(分處)가 있느니라. 분처를 연하여 편애(偏愛)를 생기게 하고, 편애를 연하여 탐착을 생기게 하고, 탐착을 연하여 인색함을 생기게 하고, 인색함을 연하여 버리지 못하는 것을 갖게 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을 받는 것에 연하여 수호(守護)를 생기게 하며, 수호를 연하여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갖가지 투쟁을 생기게 하며, 속이고 거짓말을 하며, 그 밖에 갖가지 악과 불선법을 생기게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애에 의해서 8처(處)에서 염오(染汚)의 정(定)의 세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니, 가령 “초선을 맛보는 경우에 머무를 때도, 또한 맛을 보고 일어날 때도, 또한 맛을 보며 내지 비상비비상처 또한 이와 같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애는 박(繕)과 같다”고 하시니, 가령 게송에서 애가 중생을 계박하는 것은 포승으로 나는 새를 계박하는 것과 같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애는 그물과 같다”고 하시니, 가령 “나는 애는 그물과 같고 가지와 같다고 설하노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애는 넓다”고 하시니, 가령 “가령 넓어서 갈애보다 더 이상의 것은 없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애는 “강과 같다”고 하시니, 가령 “비구들이여, 세 가지 강은 욕애ㆍ색애ㆍ무색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애는 끊기 어렵고 뛰어넘기 어렵고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애는 여러 가지 과환(過患)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애로 인해서 계차별(界差別)ㆍ지차별(地差別)ㆍ종차별(種差別)이 있어서 일체 번뇌를 능히 생기게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이유에서 부처님께서는 애가 집제이며, 그 밖의 유루법은 아니라고 설하신 것이다. 【문】 무엇을 고멸성제(苦滅聖諦)라 하는가? 【답】 불경에서는 ‘후유(後有)를 생기게 하는 애(愛) 및 희심(喜心)과 함께하는 애, 곳곳에 있는 희애(喜愛)를 이미 토해내고 이미 버리고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 고멸성제이다”라고 설한다. 【문】 집제도 또한 멸인데, 무슨 까닭에 고멸성제만 설하고 집멸성제는 설하지 않는가? 【답】 마땅히 집멸성제도 설해야 하고 고멸성제도 설해야 하는데 설하지 않는 것은 여기에 그밖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고멸을 설하면 마땅히 이미 집멸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고를 제외하고 다시 집은 없으며, 고멸을 설하면 마땅히 이미 집멸을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고멸을 설하면 교화받는 이는 곧 희심을 내어 “멸은 오묘하고 좋은 것이라서 능히 이와 같은 폐악(幣惡)을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집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이유에서 고멸을 설하고, 단지 집멸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을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라고 하는가? 【답】 불경에서는 8성도, 즉 정견 내지 정정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다. 【문】 이것 또한 집멸도이며 고멸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단지 고멸도만 설하고 집멸도는 설하지 않는가? 【답】 고멸도성제를 설하면 또한 집멸도성제를 설한 것이다. 그런데 설하지 않는 것은 여기에 그밖의 뜻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고멸성제를 설하면 집멸도성제를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고를 제외하고 집은 다시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멸도성제를 설하면 교화받는 이는 곧 희심을 내어 “이 도(道)는 오묘하고 좋은 것이라서 능히 이와 같은 폐악을 소멸시킬 수 있다. 고집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도의 힘에 의해서고(苦)를 생겨나지 않게 함을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가령 어떤 인간도에서 “너는 인(因)을 인이 아니게 하고, 과(果)를 과가 아니게 할 수 있는가?”라 물으면, 그는 마땅히 “그렇게 할 수 없다. 단지 고의 인연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생겨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한 비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약 인간이 7ㆍ8세에 아라한도를 얻으면 후에 수명 백 세에 이르는 동안 몸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와 같은 사백네 가지 병들을 세간 사람들이 보고서는 “이 사람에게는 도를 성취했어도 이익한 것이 없다. 고통을 이와 같이 받으니”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도를 성취하고 큰 소작(所作)을 지으면 이 사람의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끊어진다. 그러면 다시는 여러 가지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등의 이유에서 고멸도성제를 설하시고, 집멸도성제는 설하지 않으신 것이다.
1)『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의거한다면, 원문의 何容을 何谷으로 고쳐읽어야 한다. 곧, “어느 계곡에서 소리를 만나고 소리를 내겠는가?”
2)유대법(有對法)이란 대(對), 즉 장애(障碍)ㆍ구애(拘碍)가 없는 법을 말한다. 장애는 주로 색법(色法)과의 상호관계를 가리키고, 구애는 색법과 심법(心法), 혹은 심법 상호간에 있어서 제약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것을 세 가지 유대에 배치한다면 앞의 것은 장애유대(障碍有對)에 해당하고 뒤의 것은 경계유대(境界有對)와 소연유대(所緣有對)에 해당한다. 무대법(無對法)이란 구애 없는 법이어서 일곱 가지 심계(心界)와 법계(法界)를 말한다.
3)원문의 無色入을 九色入으로 고쳐읽는다.
4)곧 『시설경]의 작자를 가리킨다.
5)범어로는 śumara. 악어를 가리킨다.
6)범어 Sarvâstivāda의 음역어. 설일체유부를 말한다.
7)도류지(道類智)가 이미 생긴 유학위(有學位)의 성자를 가리킨다.
8)3세는 유위법으로 체로 삼지만, 허공ㆍ비수멸은 무위법이어서 3세에 떨어지는 유위법을 그 체로 삼는 세 가지 제에는 포섭되지 않는다.
9)원문의 往轉을 住轉으로 고쳐읽는다.
10)원문의 불경설게(佛經說偈)을 불설게언(佛說偈言)으로 고쳐 읽는다.
11)원문의 이유(二有)을 무유(無有)로 고쳐 읽는다.
12)재(財, dhana)란 이른바 신(信)ㆍ계(戒)ㆍ참(慙)ㆍ괴(愧)ㆍ문(聞)ㆍ사(捨)ㆍ혜(慧)의 일곱을 말한다.
13)원문의 괴불애무병고(壞不愛無病故)를 괴가애무병고(壞可愛無病故)으로 고쳐 읽는다.
14)이른바 Vetāla법을 말한다. 곧, 주문(呪文)을 외어 사시귀(死尸鬼)를 불러 와서는 죽은 시체를 일어나게 해서는 주술자가 염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한다.